[몸살] 2014년 5,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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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인권센터 회원소식지 '몸살' 5,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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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몸살] 2014년 5,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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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5-6

#1 밀양인권감시록 우리는 아직 진 것이 아니다

#2 세월호 시민분향소 지킴이 활동을 하면서

#3 몸살 인터뷰

#4 인권공부방 & 청년인권기자단 참가후기

#5 활동보고

#6 결산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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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인권감시록우리는 아직 진 것이 아니다 #1 인권이슈글/ 오렌지가좋아다산인권센터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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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4개의 농성장에 대해 6월 11일 행정대집행을 한다는 예고를 듣고 다산의 활동가를 비롯해 많은 시민들이 밀양의 농성장으로 발길을 향했습니다. 저도 밀양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6월 10일 오후 6시경에 해가 일찍이 지기 시작한 129번 농성장 입구에 도착했을 때 이미 마을은 경찰방패로 출입이 차단된 상태였습니다. 함께 도착한 상황실 활동가가 농성장에 물과 김밥 20줄을 전달하러 왔다고 해도 경찰은 “다칠 수 있고, 위험하니 안 됩니다. 돌아가십시오. 필요하면 위에서 내려와서 가져가라 하십시오.”라는 대답 뿐 이었습니다. 도대체 뭐가 위험한지, 다친다면 누구 때문에 다친다는 말인지, 그 어떤 말도 듣지 않는 경찰 앞에서 그저 답답할 뿐이었습니다. 다행히 다산의 활동가 허기저가 차를 가지고 미리 올라가 있어서 그 높은 산길을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농성장으로 올라가는 장동마을 입구에는 초소가 하나 있었습니다. 얼마나 오래 되었을까. 초소주변의 나무와 풀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있는 그곳에서 유독 눈에 들어오는 모습은 나무에 매달려 있는 밧줄과, 바람에 나부끼는 태극기였습니다. 내일이면 국가로부터 어떤 일을 당할지 불안한 가운데서도 초소에 태극기를 달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참 뭐라 할 수없는 감정에 눈물이 올라왔습니다.

차를 타고 아무도 없는 산길을 타고 한참을 올라가자 ‘평화’라는 글씨와 많은 현수막과 함께 129번 농성장이 나왔습니다. 도착한 농성장에는 다음 날 해가 뜨면 들이닥칠 일 때문인지 무겁고 긴장된 분위기 속에 조용한 목소리들만 왔다 갔다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산꼭대기에도 해가 지고 도심에서 본 밤 풍경과는 전혀 다른 손전등 하나에만 의지해야 하는 칠흑 같은 어둠이 농성장을 뒤덮었습니다. 다음 날 들이닥칠 일을 생각하면 긴장되고 불안 했지만, 한편으로는 매일 밤 도심은 온갖 광고판과 자동차 불빛, 자정에도 창문으로 환하게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들로 밤인지 낮인지 구분이 안 되는 도심에서 주로 생활을 해오다 처음 맞이하는, 불빛하나 없는 진짜 밤 같은 어두운 풍경이 편안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편안함 속에 자정부터 차안에서 잠시 눈을 붙였고, 차안에서 뒤척이다 새벽 3시 눈을 떴습니다. 농성장은 여전이 어둠에 싸여있었고, 저 멀리 산 아래 도로에 끝이 보이지 않게 불을 켜고 달려오는 경찰차들을 빼면 농성장이 있는 산꼭대기는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이제 3시간 정도를 남겨놓은 상황에서 어김없이 1초 1초 새벽 6시를 향해 가는 그런 시간이 야속하기도 했습니다.

새벽 6시, 경찰을 앞세운 한전직원들이 129번 농성장으로 다가왔습니다. 다산의 허기저 활동가는 마이크를 잡고 외쳤습니다. 무릎을 꿇으라면 꿇을 테니 제발 돌아가 달라고, 제발 밀양 할매들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제발 사람 좀 살려 달라고. 하지만 한전직원이 행정대집행 문서를 읽고 나자 경찰은 거침없이 농성장으로 쳐들어왔습니다. 농성장 앞 쪽에는 수녀님들이 앉아서 아침이슬과 노래들을 부르고 있었고, 농성장 옆 구덩이에는 할매들이 알몸으로 목에 쇠사슬을 묶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경찰은 그들이 누구인지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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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소주변의 나무와 풀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있는 그곳에서

유독 눈에 들어오는 모습은

나무에 매달려 있는 밧줄과, 바람에 나부끼는 태극기였습니다.

내일이면 국가로부터 어떤 일을 당할지 불안한 가운데서도

초소에 태극기를 달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참 뭐라 할 수없는 감정에 눈물이 올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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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한명 한명이 아니라 사람을 마치 물건 던지듯 다뤘고, 언론에 공개하겠다던경찰은 기자들마저 들어내며 거짓을 일삼았습니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들리고, 알몸이 된 할매들에게 남성 경찰들이 달려들어 목에 달린 쇠사슬에 절단기를 들이대고, 저항하지 못하도록 온몸으로 덮쳐버리고, 여성경찰들은 수녀님들의 머릿수건을 벗겨내고, 팔을 비틀고, 발로 밟고, 사지를 들어 옮기며 지어내는 그 비열한 웃음이 섞인 얼굴들은 너무도 끔찍했습니다. 몇 년간 살려달라고, 여기서 살수만 있게 해 달라고 외친 국민들에게 국가의 대답이 이런 야만적인 폭력이라는 게 너무도 끔찍했습니다. 경찰과 한전의 일사 분란한 작전으로 오랜 시간 129번 농성장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모두 그 곳에서 쫓겨났고, 할매들이 마지막 저항을 하기 위해 파놓았던 구덩이를 제외하고는 농성장은 그렇게 사라졌습니다.

농성장에서 쫓겨나고 여기저기서 서러운 울음소리와 탄식만이 맴돌았습니다. “내가 이 꼴을 보려고 살았나…” “차라리 나를 죽여라…” “우리가 후손들에게 좋은 자연 물려주려고 여적 싸워왔는데, 내 후손들이 우리를 이렇게 할 줄 몰랐다…” 저도 몇 달 전 할매들을 지지해 주는 희망버스 승객들을 보며 환하게 웃어주던 한옥순 할매의 그 서러움에 북받친 얼굴을 보니 가슴이 너무도 아팠습니다. 경찰과 한전직원들을 제외하고는 그 곳의 누구라도 다 같았을 겁니다. 하지만 뭐가 그렇게 급했던지 할매들과 우리가 서러움과 분노를 추스리기도 전에 한전은 공사차량과 자재를 실은 차량을 밀고 들어왔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었던 건 그저 길바닥에 앉아 있는 것 뿐, 그 당시 할 수 있는 건 그 것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경찰과 한전을 규탄하고 그 날 하루를 정리하는 정리집회를 가졌습니다. 비록 오늘은 농성장을 빼앗겼지만 밀양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은 거라고, 반드시 송전탑을 막아내 이 싸움 이길 거라는 다짐을 하며 서로의 손을 잡고 내일을 다짐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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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시민분향소 지킴이 활동을 하면서. #2글/ 이성주 기고

세월호 시민분향소 지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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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16일 세월호 참사 후 4월 30일부터 수원역 광장에 시민분향소를

차리고 운영을 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두 달째 지킴이를 하고 있는 <역사와

진실> 회원 이성주님이 소감을 보내주셨습니다.

6월22일 일요일 아침입니다. 오늘은 시민 분향소에 아침에 나와서 지킴이 활동을 하는 날이기 때문에 일찍 나왔습니다. 6월 중순으로 넘어가면서 날씨도 많이 더워지고 또 지금은 월드컵기간이기 때문에 뉴스를 봐도 내일 있을 월드컵 경기로 인해 축구 얘기만 잔뜩 나오고 있습니다. 이곳을 지나가시는 시민들도 바쁜 일들로 분주한 일상을 보내는 것 같습니다. 어느 때와 똑같은 일상의 반복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더 슬픕니다. 점점 잊혀져가는 세월호 사건, 이제는 사고 초기에 전 국민이 ‘잊지 않겠습니다.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라고 외치던 목소리조차 점점 잊혀 져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분향소 지킴이 활동을 하면서 느낀 점들을 짧게나마 적어보려 합니다.

세월호사고가 일어난 뒤부터 시민분향소가 설치되기까지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뉴스를 보면서 마음아파하거나 실종자분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바랄뿐 이였습니다. 안산에 있는 임시 합동분향소도 갈 엄두가 안 났습니다. 그곳에 갔다 오면 마음이 너무 힘들 것 같아서 도저히 갈 생각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 뒤 수원역에 시민분향소가 설치된다는 얘기들을 듣고 나선 그곳에선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기 위해서 분향소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한 일은 분향소를 찾아온 분들에게 추모의 버튼을 만들어서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가방이나 옷에 달고 다니면서 세월호 사고를 잊지 않기 위해서 시작된 일이였습니다. 평일엔 일이 끝나는 대로, 주말엔 아침부터 분향소에 나오면서 있는 시간은 몸이 힘든 것보다 마음이 너무 힘든 시간 이었습니다. 시민분향소엔 정말 많은 사연들이 노란리본이 되어 펄럭이고 있습니다. ‘언니, 오빠들 무사히 돌아오세요.’라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꾹꾹 눌러쓰는 아이들부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른이여서 미안하다고 적고 가는 어른들, 친구들이 꼭 돌아오길 바란다고 교복을 입고 찾아오는 학생들까지 너무나도 많은 추모의 글들이 이곳 분향소를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그중 기억에 남는 사연은 작년까지 안산에 살고 있다가 올해 수원으로 이사 온 남학생은 친한 친구4명과 초등학교 동창 30명이 실종됐다고 울먹이며 말하는 학생, 수원에서 5년간 근무하시다가 안산으로 올해 부임하고 사고가 난 선생님을 -그 선생님은 스승의 날 전날인 5월14일,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기억하러 온 학생들의 사연입니다. 스승의 날에 선생님을 뵙기 위해 학교가 아닌 안산분향소로 가는 학생들이 이곳에 들러서 잘 다녀오겠다고 인사를 할 때에도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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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세월호 시민 분향소는 이제 추모의 글을 적는 일보다 서명운동에 집중해서 운영되고 있습니다. 세월호의 희생자, 실종자, 생존자 가족 분들도 주말이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서명운동을 하고 계십니다. 부모님들이 직접 서명용지를 들고 다니면서 서명을 받는 현실이 너무나 마음이 아픕니다. 수원에도 두 번 오셨는데 마지막에 오신 2-9반 부모님들은 아이들이 학기 초에 찍은 반 사진을 들고 수원으로 나오셨습니다. 학기 초에 찍은 사진이여서 활기차고 환하게 웃고 있는 학생들, 하지만 그 학생들의 웃는 얼굴을 이젠 다시 볼 수 없게 됐습니다. 어떻게 하면 가족 분들을 도와줄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가족 분들의 상처를 치유해줄 수 있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계속 고민만하고 있는 것 보단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습니다. 가족 분들이 국민들에게 요청한 1000만 서명운동에 조금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려고 합니다. 1000만 서명을 받으려면 더 많은 시민들의 참여와 관심이 필요합니다. 세월호 사건을 잊지 않겠다고 외치던 목소리들이 이젠 서명으로 모이길 바랍니다. 끝으로, 세월호 사고로 희생된 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그리고 가족 분들께서 힘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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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살!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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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서비스지회 유병철>영통구에 위치한 삼성전자 수원사업장 정문 맞은편 보도에서는 ‘고장난’ 초일류

기업 삼성을 AS하겠다는 일념으로 뭉친 삼성전자 서비스 노동자분들이 한 달

넘게 노숙 농성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뜨거운 뙤약볕을

맞으며, 때로는 거센 비바람을 견디며 ‘골리앗’에 맞서도록 만들었는가?

노숙농성에 참여중인 유병철 조합원을 만나 그들의 투쟁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다산: 먼저 본인소개 부탁드립니다.

유병철 : 저는 삼성전자 서비스 성남센터에서 근무하면서 성남센터 노조 분회의 조직담당을 맡고 있습니다.

다산: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가 지난달 19일부터 전면 파업에 들어가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본사 앞에서 농성에 돌입했습니다. 그런데 이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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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영통사업장 앞에서는 그 전부터 농성이 전개 됐던 걸로 알고 있거든요.

농성은 언제부터 시작됐는지요.

유병철 : 여기 수원 삼성 디지털 시티 정문 앞에서의 노숙농성은 5월 8일부터 시작되었는데, 저는 5월 18일부터 참여했습니다. 5월 18일 이전에는 네 명의 인원이 차례대로 돌아가면서 부분파업 및 노숙농성을 했었고 5월 18일부터는 전면 노숙농성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현재 이곳에서는 경기 남부권 조합원들이 참여중입니다.

다산: 농성장을 와보니 삼성에서 천막도 못 치게 했더군요.

하루가 굉장히 길 것 같은데 어떻게 보내시고 있나요?

유병철 : 주로 저희 이야기를 알리는 활동을 해요. 아침 6시에 일어나서 7시쯤 조합원들끼리 간단한 집회를 합니다. 그 후에 여러 장소로 이동해 유인물도 나눠드리고, 피켓도 들고 있고 합니다. 저녁엔 가급적 지역이나 서울 등에서 진행되는 문화제에 자주 참석하고 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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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문화제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지난 수요일에 안산 촛불문화제에서

삼성서비스 노조가 공개라디오 방송을 하는 것을 들었는데, 정말

유쾌하더라고요. 힘든 와중에도 즐기는 방식으로 지속적인 투쟁동력을

끌어나가는 부분이 놀라웠는데,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따로 계획해서 준비한

것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유병철 : 저희 서비스기사들이 원래 끼가 좀 많아요. 저도 노조가 항상 치고박고 싸우는 과격한 단체인 줄 알았는데...안 그렇더군요(하하). 저희도 사실 고민이 많았어요. 매일매일 뭘 하면서 농성을 하나...근데 조합원 한 명 두 명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럼 지나가던 시민들도 눈여겨보고, 저희도 덩달아 신이 나는 거지요.

다산: 그런데 이렇게 힘든 노숙 농성을 왜 하게 됐는지, 혹시 본인이 직접

참여하게 된 계기는 여쭤봐도 될까요?

유병철 : 간단히 말해서 저희는 삼성전자의 제품을 수리하는 업무를 하고, 삼성로고가 박힌 옷을 입고, 명함을 돌립니다. 하지만 삼성직원이 아니에요. 관리감독, 업무지시를 다 삼성에서 받는데, 법적으로는 삼성직원이 아니에요. 여기서 문제가 뭐냐면, 우리 같은 서비스 기사들의 근로조건이에요. 저는 경력이 좀 있어서 신입기사가 들어오면 현장교육을 데리고 나가요. 근데, 이 친구들 1년을 못 버텨요. 힘드니까요. 힘이 드는 일이면 돈이라도 많이 주냐. 그것도 아니에요. 그래서 노조 만든 거고, 실제 사용주인 삼성이 책임지라고 요구하는 거지요.

다산: 근무환경, 근로조건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유병철 : 지금 저희의 임금체계에서는 ‘건당 수수료’가 중요해요. 한 건 한 건 수리 처리할 때마다 수수료가 나오고 그것이 임금이 되는 구조에요. 3년 전까지는 기사 본인이 수수료가 확인이 가능했어요. 이걸 알아야 월급이 어느 정도 되겠구나 예상이 가능했거든요. 근데 느닷없이 본인에게 공개가 안 되는 거예요. 이 말은 하청업체사장(각 센터의 사장)이 주면 주는대로 받으라는 말이거든요.

다산: 그렇다면 사측에 요구하는 바는 무엇인가요?

유병철: 가장 기본이 되는 게 ‘노동조합 인정’이에요. 임금을 올리고, 근무조건을 개선해달라는 요구도 있지만 가장 기본은 노동조합 활동 자체를 인정하고 보장해 달라는 거예요. 지금이 70년대 80년대는 아니잖아요. 노조 활동하는 간부들, 조합원들을 상대로 황당한 트집을 잡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 방해하고 탄압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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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이거 삼성이 매번 써먹는 방법이잖아요.

다산: 농성을 지금 오랫동안 하고 계신데 농성을 진행하면서 특별히 힘드신

점은 없으신지요?

유병철 : 아이고...사실 힘들지만...대놓고 이야기하기엔...^^ 저 같은 경우 자식이 둘인데, 둘 다 고등학생이에요. 농성 때문에 집에도 못 들어가고 월급도 못 받아 가족들한테 제일 미안해요. 근데 저 같은 사람이 대부분이에요. 신혼인 사람도 있고, 연로하신 부모님 모시는 분들도 계시고...다들 힘들 텐데 힘든 내색은 잘 하지 않아요. 사정을 뻔히 다 아니까...

다산: 마지막으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유병철 : 많이 알려주세요. 언론도 그렇고, 삼성이 워낙 막강한 힘을 갖고 있으니까, 우리 힘으로는 역부족이라 생각하거든요. 저희도 육체적으로는 피곤하지만 잠깐의 힘든 것은 참을 수 있습니다. 다만, 노동자라고, 서비스 기사라고 깔보는 회사에 우리의 목소리가 전달될 때까지 버틸 겁니다. 이게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노동조합 활동하면서 알았습니다. 우리가 버티고 이겨야 다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우도 조금씩이라도 나아지지 않겠습니까. 삼성에 맞서는 게 어렵다는 거 저희도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더 끈질기게 버티고 있는 겁니다. 응원해주시고, 많이 알려주세요.

인터뷰 당일 새벽 광화문광장에 선전전을 다녀오느라, 새벽잠을 설쳐 피곤한

상태였음에도 노동조합의 인정을, 그리고 더 나아가 삼성의 ‘또 하나의

가족’으로서 기본적 권리를 보장받고 싶다는 소망을 말하는 유병철 조합원의

눈빛은 반짝였고, 목소리에는 힘이 넘쳤다.

삼성서비스 노동자 분들이 이번 투쟁을 통해 원하는 결과를 꼭 얻어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인터뷰 정리 나동환 (다산인권센터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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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공부방& 청년인권기자단 참가후기 지난 4, 5월 다산인권센터에서 진행된 두 강연회에 참석한 회원 분들께서 직접 보내주신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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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공부방 민윤주>집에서 수원에 있는 다산 인권센터까지 버스와 전철, 매번 시간을 지키지 못하는 택시를 타고 헐레벌떡 도착해서 앉을 때마다 민망했던 기억은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이다. 집에서 수원역까지 2시간 10분, 어디서 버스를 타야할지 헤매다 매번 타게 되는 택시로 15분 정도 거리에 흘리다보면 10-15분씩 늦었는데, 씩씩하게 들어와 맨 앞자리에서 강의를 들었으니. 멋모르고 굴러온 돌맹이 같은 어리석음이 새삼 민망하다. 2시간의 강의, 또 2시간 반의 집으로 가는 길. 바쁜 회사 일을 미루고 하루에 보낸 시간은 계산해보니 총7시간, 강의에 투자한 총 시간은 28시간이다. 나흘의 휴무에서 하루하고 네 시간은 강의를 들는다는 설레임과, 시간을 느낄 수 없이 몰입했던 수업과, 앞으로 찾아볼 책이나 고민할 부분에 대한 기대, 수업 직후 긴장 풀린 허기로 구성되어 있다.

그럴만한 가치와 만족감이 있었는가? 물론. 좀 더 심화해서 한 달 일정의 2,3회를 다시 한다고 해도 어떻게든 회사일을 조치하고 다시 달려올지 모른다. 그렇다면 나만 그랬을까? 학기 중에 시간을 냈고 집이 멀긴 마찬가지라 강의 후 급하게 자리를 떴던 조효제 교수님의 시간의 소모도 나 못지않았으며, 강의를 준비했던 시간까지 따지면 더 많으면 많았지 적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시 따져보자. 처음 엠네스티 강연을 들은 후 한2년 동안 찾아 읽었던 '인권의 문법''인권의 풍경'에 대한 희미한 기억을 더듬기만 하고 열심히 들을 각오만 다졌던 나에 비해 수많은 논문과 인권에 대한 저작, 번역서를 꾸준히 생산해온 인권학자 조효제교수가 들였던 실천의 시간과 노력들은 얼마나 많았는가? 교육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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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의 노력이며 학습은 그 전승을 어떻게 내가 계승하고 발전시킬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안고 있어야 한다. 학교라는 담장을 넘어서 매번 듣는 말이 다 새로울 일반시민들을 위해 개론 수준의 수업을 하는 건 히트곡이 하나만 있는 가수(원 히트 러너)가 다른 장소에서 같은 노래를 몇 십 년 동안 부르는 지루함과 비슷하지 않을까?

강의후기를 말하라 했더니 조효제교수의 인물론을 말하는 것인가? 누군가에 대한 평가는 화자의 호의와 열정에 따라 과장되거나 폄하될 수 있지만 그런 목소리대로 어떤 방식으로든 기록될 인물에 대한 이 감상마저 기록이다. 그가 남긴 저작들과 은폐된 영향력의 기록이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에 새겨져 있다. 인권이란 개념을 이론적으로 정리하고 변화하는 시대의 인권에 대한 담론을 계속 생산하며 실천방안을 고민하는 학자와 그의 작업들을 자신의 방식으로 녹여내는 활동가들과 묵묵히 자신의 시야를 넓혀가는 평범하고 힘이 세지는 시민들이 있다. 강단에서 시선을 돌려 이곳에서 그 시간들을 함께 했던 사람들을 기억해볼까? 나중에야 다산인권센터의 회원들이 대부분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가끔 칭얼대는 아이의 목소리를 함께 할 수 있는 수업이 몇이나 될까? 앰네스티에 가입한지 몇 년 안 된 회원이지만 더 열악한 국내인권운동을 일선에서 하고 계신 분들은 만나볼 일이 없었다. 이 강의에 참석한 분들은 그 자신의 활동에 '다시 기본을 기억하자'는 재학습과 인권운동의 유의미함을 재확인하는 시간이 되었을지 모른다. 난 이곳에서 인권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그걸 실천하는 청년 같은 학자와 현장에서 힘들게 부딪히면서도 그 안의 관성을 벗어나려고 매번 공부하고 노력하는 활동가들을 아주 조금 알게 됐다. 많이 알게 됐다는 것은 나를 뺀 이 분들에 대한 오만한 표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의뢰받고 '단 한 번도 지면에 글을 싣지 않았던 내가 무슨 말을?'이라고 고민하다가 내가 할 수 있는 말의 방식으로 낯선 감상을 쓰자고 결심했다. 사실 마지막 강의를 듣고 집에 오자마자 조효제 교수님께 감사의 편지를 한 통 써 두었었다. 지금 다시 읽어보니 들뜬 마음만 가득하고 내용은 빈약해서 웃음이 나오는데, 시간이 좀 지나고 객관화되어 이 글을 쓸 수 있게 해준 다산인권센터에 감사의 말을 드린다. 물론 이 소중한 시간을 함께 나눴던 기억들에도 감사하며.

삶은 여행이니까 언젠가 끝나니까

강해지지 않으면 더 걸을 수 없으니

수 많은 저 불빛에 하나되기 위해 걸어가는 사람들 바라봐.

- 이상은 <삶은 여행>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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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인권기자단 성준영>이번 인권기자단 강의에서 엄기호 선생님의 강의와 박진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며, 북유럽 르네상스의 거장인 피터르 브뢰헬(Pieter Bruegel)이 이카루스의 신화를 바탕으로 그린 그림인 <추락하는 이카루스가 있는 풍경Landscape with the Fall of Icarus, 1588>과 이 그림에 관한 감상평 중의 하나인 <Musee des Beaux Arts(미술박물관), 1940>이라는 Wystan Hugh Auden(위스턴 휴 오든)의 시가 떠올랐다. W.H. 오든은 이 그림을 보고 쓴 자신의 시에서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한 사회를 비판하며, 타인의 고통에 관심을 가질 것을 역설한다. 아래 그림을 보고 쓴 이 시의 주제는 이번 인권 강의의 주제와도 상통한다. 그리고 이 시는 내가 앞으로 쓸 ‘비참을 전시’하지 않는 기사와도 같다.

이번 인권강의에 있어서 주제는 ‘인권 감수성’과 ‘고통’이었다. 박진 선생님은 ‘인권 감수성’에 대해서, 엄기호 선생님은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는 것’에 대해서 각각 말씀해주셨다. ‘인권 감수성’이란 “인권 문제가 개재되어 있는 상황에서 그 상황을 인권 관련 상황으로 지각하고 해석하며, 그 상황에서 가능한 행동이 다른 관련된 당사자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를 상상해보며, 그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인식하는 심리적 과정”을 말한다.(인권감수성 지표 개발 연구, 국가인권위원회, 2002) 따라서 박진 선생님은 인권 문제를 바라 볼 때에는 ‘누구의 입장에 서서 볼 것인가?’, ‘무엇을 볼 것인가?’를 생각하여야 한다고 했다. 이렇게 질문을 변화시키는 힘이 곧 인권감수성이며, 인권감수성을 가지고 하나의 사건을 바라보면 사람 한명 한명의 존엄에 주목 할 수 있다.우리가 한 사람의 존엄에 주목 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한 사람의 ‘고통’을 들을 수 있다. 그래서 인권기자단은 한 사람의 고통을 듣고 느낀 바를 공유하는 것이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엄기호 선생님은 기자란 “소리를 말로 표현”하는 사람이라고 설명하셨다. 이런 기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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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상 인권 ‘기자단’이 처음인 나는 이번 세월호 참사에서 기자들이 보여줬던 행태와 같이 단순히 고통을 대신 말해주며, ‘비참함, 참혹의 전시’만 할 수도 있다. 그래서 더욱 더 엄기호 선생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 일 필요가 있었다. 엄기호 선생님은 고통을 받는 사람은 자신의 고통을 말로 표현 할 수 없다고 한다. 때문에 우리는 그 고통의 원인과 해결책을 알 수는 있으나 타인의 고통 그 자체는 느낄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그 불가능성을 가지고 글을 쓰되, 고통받는 사람이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 제대로 말을 할 수 있을 때까지 말을 경청해야한다고 한다. 말을 경청하는 것이 곧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말을 거는 것이며, 비로소 그 사람이 고통에 대해 말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고통에서 거리를 둘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엄기호 선생님은 고통에 거리를 둘 수 있게 되는 것이 이 고통이 내가 불운해서 생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위의 그림에 대한 W.H. 오든의 시는 입장을 바꿔서 보는 관점을 제시 하며,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말하지만, 비참을 전시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위의 그림은 이카루스 신화를 바탕으로 그린 그림인데, 이카루스 신화는 우리에게 친숙한 고대 그리스 로마신화 중 하나이다. 이카루스는 크레타 섬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밀랍을 이용하여 날개를 만든다. 그리고 하늘을 날아서 탈출하는데, 태양에 가까이 다가가지 말라던 아버지의 충고를 잊고 태양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서 날개가 녹아버린다. 결국 이카루스는 에게 해에 빠져 죽고 만다. 이러한 신화를 바탕으로 그린 이 그림에서 브뢰헬은 이카루스를 오른쪽 구석에 그림으로써 이상을 좇는 이보다 열심히 현실을 살아가는 이를 그림의 중심에 놓았다. 더불어 미지의 세계에 닿으려고 하는 이카로스의 욕망을 무모하고 어리석은 것으로 그렸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자신의 주어진 본분을 잊어버리고, 무모한 이상을 좇다가 실패해서 추락하는, 신의 뜻을 거스른 이카루스만을 생각한다. 하지만 W.H Auden은 자신의 시인 <Musee des Beaux Arts>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모든 것이 고통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지 않은가, 그것도 꽤나 여유로운

모습으로. / 농부는 분명 첨벙 하는 소리, 그 쓸쓸한 외침을 들었으리라. /

그러나 그는 그것에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없었다. / … … / 하늘에서 한

소년이 떨어지는 놀라운 광경을 보았을 테지만 / 가야할 곳이 있기에 유유히

물 위를 떠갔을 뿐이다.”

이렇게 그는 <추락하는 이카루스가 있는 풍경>에서 이카루스가 물에 빠져서 허우적대고 있어도 그 고통에 등을 돌리고 자신의 삶을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는 농부, 아무렇지 않게 유유히 이카루스의 옆을 지나가는 배를 보며 타인의 고통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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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감각’한 사회에 대해서 비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의 뜻을 거스른 이카루스 만을 생각할 때, W.H. 오든은 <추락하는 이카루스가 있는 풍경>에서 질문을 바꾸어서 생각했다. 즉, 이카루스의 입장에서 이 그림을 보았다. W.H 오든은 이카루스의 추락이라는 사건을 이카루스의 입장에서 다르게 생각해보고 난 후, 이 그림의 다른 감추어진 진실을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쓴 시를 통해 자신이 느낀 바를 우리들과 함께 나누며, 우리들이 잊고 지냈던 ‘타인의 고통’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끔 해준다.

이번 인권기자단 강의를 들으면서, 인권기자단으로서 내가 쓴 글들이 ‘비참과 참혹의 전시’가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시는 내가 지향하는 기사의 방향을 보여주기도 한다. W.H. 오든이 쓴 시를 기사로 본다면, 그의 기사는 ‘비참과 참혹의 전시’가 아닌 진정한 기사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시를 통해서 비참을 전시하지도 않으면서, 우리에게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더 알아보고 싶게 만든다. 이렇게 기사를 쓰기 위해서는 인권감수성을 가지고 고통 받는 타자에게 말을 걸고, 그들이 고통을 말 할 수 있을 때까지 고통의 목소리를 끊임없이 들어줘야한다. 하지만 그것이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의 고민과 타인의 고통에 대한 반응물들을 보고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한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더 알아보고 싶게 된다면 좋겠다. <추락하는 이카루스가 있는 풍경>을 보고 <Musee des Beaux Arts>를 읽으며 다시 한 번 비참을 전시하지 않는 기사를 쓰기 위한 결의를 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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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활동보고

#4 활동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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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참사 희생자 수원역 시민분향소 설치

지난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후 같은 달 30일 수원역에 시민분향소를 차렸습니다. 희생된 분들의 명복을 빌며, ‘잊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기 위해 설치했습니다. 시민들은 추모의 글을 노란리본과 메모지에 빼곡히 적어주셨고, 많은 분들이 조문을 오셨습니다. 매주 수요일 추모의 촛불을 분향소에 앞에서 들고 있습니다. 수원지역 시민사회는 ‘세월호 문제해결을 위한 수원시민공동행동’을 구성해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현재는 유가족, 실종자 가족, 생존자 가족분들이 진행하고 있는 ‘진실규명과 특별법 제정을 위한 천만서명운동’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 세월호 범국민대책회의 참가

세월호 범국민대책회의 존엄안전위원회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세월호 문제의 핵심은 규제되지 않은 자본과 이러한 자본의 욕심을 방치하고 조력한 정부의 책임과 무능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벌어지지 않도록 막기 위해서는 이전과 같을 수 없다는 각오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모든 이들이 말하고 모이고 연대할 자유를 위한 자유팀, 평등한 지원 평등한 애도를 위한 평등팀, 대안적 안전 프레임을 만들어 내는 안전대안팀을 두고 활동합니다. 지금까지 표현의 자유를 위한 두 차례의 기자회견, 토론회, 자료집 등을 발간했습니다. 관련 자료는 다산인권센터 홈페이지에 공유해 두었습니다. 모든 인간이 존엄하고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같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 밀양 인권침해 감시활동

결국 지난 6월 11일 밀양 주민들이 송전탑 반대 농성을 벌이던 네 곳에 대해 행정대집행이 들어왔습니다. 수년 동안 대화와 사회적 대안 모색을 요구했던 주민들의 간절함을 정부와 한전, 경찰은 외면한 것입니다. 다산인권센터를 비롯해 인권단체 활동가들은 10일, 11일 이틀에 걸쳐 ‘인권침해감시단’ 활동을 했습니다. 경찰은 10일 정오부터 농성장이 설치된 마을 입구 곳곳을 봉쇄하는 것을 시작으로 11일 새벽 6시 본격적인 행정대집행에 들어갔습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은 움막과 토굴 등에 있던 주민들과 종교인, 연대자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했습니다. 인권침해 감시와 주민들의 조력자로 그 자리를 지켰던 우리들 역시 사지가 들려 쫓겨나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인권침해 상황과 문제점에 대해 간단한 보고서를 제작했습니다. 아울러 6월 25일 장하나 국회의원을 비롯해 밀양주민, 인권단체들과 <폭력과 야만의 밀양을 증언하다>라는 제목으로 행정대집행 과정에서 나타난 폭력의 구체적 증언과 문제점에 대해 토론회도 진행했습니다.

■ 청년인권기자단 특강 진행

인권의 밭을 일구는 사람은 몇 사람만의 노력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모든 이들이 인권의 주인공이고 인권옹호자가 되어야 합니다. 다산인권센터는 어려운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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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수록 그런 밭을 같이 일굴 사람을 찾으려고 합니다. 우선 인근 지역 대학생, 직장인 등 청년들을 중심으로 청년인권기자단 특강을 했습니다. 엄기호, 양훈도, 박진 등의 강사가 특강을 진행했습니다. 곁을 주지 않는 사회에서 어떻게 인권의 글쓰기를 할 것인지, 현장의 인권은 어떤지 함께 배웠습니다. 이제는 특강 수강자들과 자원활동가들이 2주에 한번 모임을 갖고 현장을 방문, 글을 쓰는 등 본격적 활동에 들어가려고 합니다. 젊은 피들을 응원해주세요.

■ 삼성전자 서비스 노동자들 투쟁에 연대

지난 5월 18일 자결한 고 염호석 열사 정신 계승과, 제대로 된 노동조건을 요구하는 삼성전자 서비스 노동자들의 투쟁이 강남과 수원에서 40일 넘게 진행되고 있다. 700여명이 넘는 노동자가 강남 삼성본관 앞에서, 30여명의 노동자가 수원 삼성전자 정문 앞에서 노숙농성을 하고 있다. 다산인권센터도 삼성서비스 노동자들과 연대하기 위해 수원의 시민사회단체와 지난 6월 17일 삼성전자 본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진행하였다. 이번 기자회견을 통해 삼성서비스 문제가 조속히 해결되고, 삼성이 76년 동안 고집해 온 무노조 경영이념을 중단하길 요구하였다. 또한 5월 30일에는 다산인권센터, 온다, 경기복지시민연대가 삼성 수원사업장에서 농성하고 있는 서비스 노동자들과 따뜻한 밥한 끼의 연대를 진행하였다. 수도가 없어 음식을 해먹기 어려운 상황에서 밑반찬 등을 준비해 서비스 노동자들과 점심 식사를 함께했다. 자원 활동가 하늬바람님의 도움으로, 시원한 미역냉국과 밑반찬을 준비하였다. 현재도 삼성 정문 앞에서 노숙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한 끼 연대, 생필품 연대가 절실하다. 생필품 연대 연락처/ 031-213-2105

■ 군대내 집단 따돌림 사건 피해자 지원

피해자는 6년전 부사관이 되었습니다.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자원입대한 때 나이는 19살이었습니다. 어린 그에게 상관들은 모욕적인 폭언, 폭행, 성추행을 했습니다. 견딜 수 없어 내부 인트라넷에 하소연을 했습니다. 군은 당사자들을 가볍게 징계했고, 그는 오히려 내부를 이간질하고 조직 적응을 못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따돌림은 6년 동안 지독하게 따라다녔지만 오로지 헌병수사관이 되려는 목표로 참았고, 수사관이 돼서 잘못된 풍토를 바로 잡아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허망한 꿈이 되어 버렸습니다. 자신을 가해했던 상관이 지금의 상관에게 그를 폄하하는 메일을 보냈고, 그는 이것으로 인해 양성수사관에서 해임되었습니다. 그 뒤 자살을 시도했고, 눈치 챈 가족들이 그를 살렸습니다. 그는 해임의 부당성과 자신이 당한 인권유린을 사회에 고발했습니다. 국가인권위 진정 등 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다산인권센터는 군 당국이 그가 당한 인권침해와 부당한 처우의 원인과 결과를 함께 찾도록 힘쓰고 있습니다. 관련 내용은 뉴스타파에서 ‘나는 벌레가 아니다 -날개 꺾인 한 군인의 절규’편을 보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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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결산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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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지출

총계 11,860,536 총계 6,333,316

이월 전월이월 3,735,616

운영비

소계 1,675,580

경상수입

CMS후원 4,842,070

경상운영비

대출이자

관리비 193,630자동이체후원 90,000

이사적립금 90,000

특별후원 2,776,350

일반운영비

정보통신비 473,150일반후원 110,000

활동비 144,900

사업수입

일반사업

교육사업 사무관리비 713,900재정사업 차량유지비 60,000행사사업 기타

기타수입

결산이자

인건비

소계 3,023,550기타 100,000 급여 급여 2,776,350

차입금 206,500

복리후생비

식대 247,200

상여금

자원활동가지원비

기타

사업비

소계 1,634,186

경상사업비

우편발송비 19,890

인쇄비 170,000

기타

일반사업비

교육사업비 605,400

행사사업비

기획사업비 170,400

현안사업비 339,420

기타 50,000

연대사업비

분담금 53,976

후원금

기타 225,100

차월이월 5,527,220

2014년 4월 결산

Page 23: [몸살] 2014년 5,6월호

23

수입 지출

총계 14,913,950 총계 6,989,680

이월 전월이월 5,527,220

운영비

소계 721,760

경상수입

CMS후원 5,356,560

경상운영비

대출이자 80,000

관리비 149,480자동이체후원 70,000

이사적립금 70,000특별후원 2,776,350

일반운영비

정보통신비 191,490일반후원 695,000

활동비 215,900

사업수입

일반사업

교육사업 사무관리비 8,590재정사업 차량유지비행사사업 기타 6,300

기타수입

결산이자

인건비

소계 4,850,700기타 99,800 급여 급여 4,476,350

차입금 389,020

복리후생비

식대 374,350

상여금

자원활동가지원비

기타

사업비

소계 1,417,220

경상사업비

우편발송비 2,320

인쇄비 30,000

기타

일반사업비

교육사업비 885,200

행사사업비

기획사업비 79,000

현안사업비 310,400

기타

연대사업비

분담금 110,300

후원금

기타

차월이월 7,924,270

2014년 5월 결산

Page 24: [몸살] 2014년 5,6월호

후원계좌 | 신한 : 110-062-448424 (박진 다산인권상담소) / 농협 : 116-12-264081 (노영란)

주소 : (우)442-844,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행궁로 28(남창동 91-3) 2층

전화 : 031)213-2105 | 팩스 : 031)215-4395

홈페이지 : http://www.rights.or.kr | 다음카페 : http://cafe.daum.net/humandas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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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월 다산인권센터를 후원해주신 벗바리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간은균 간호중 강두용 강복심 강상원 강윤정 경기대학교민주동문회 고미영 고성준 고 영 곽봉식 곽봉재

곽지숙 곽창훈 구선희 국찬석 궁경혜 권민희 권순택 권인철 권정순 길은실 김갑수 김강학 김경숙 김경지

김계향 김관일 김근영 김기헌 김노진 김대술 김동겸 김동균 김동근 김동우 김만희 김명숙 김명욱 김명준

김문정 김미숙 김민규 김민석 김민태 김병곤 김병선 김병수 김보경 김상곤 김상기 김상순 김상욱 김상호

김선미 김선형 김성종 김성중 김성태 김성희 김 솔 김수영 김수정 김시연 김아름 김영기 김영기 김영숙

김영주 김영호 김완수 김용섭 김용신 김우진 김원규 김윤경 김윤종 김윤희 김은경 김은총 김이화 김의경

김의식 김자현 김장렬 김재영 김재욱 김정수 김정심 김종보 김종서 김종우 김종태 김주이 김주환 김준성

김지수 김지연 김진성 김진우 김진혁 김타균 김태은 김철수 김철환 김칠준 김태교 김태균 김태환 김학성

김화준 김향미 김현주 김현창 김현철 김형옥 김형인 김형일 김혜영 김혜령 김희연 김희정 김희태 남경호

남길현 남영숙 남지원 남현우 노수정 노영란 노완호 노정순 노정희 노창식 노학주 류용웅 문민수 문숙희

문정석 민진영 민현주 박경화 박관우 박래군 박미향 박민수 박선희 박설규 박성희 박숙경 박영재 박용태

박유순 박윤정 박재형 박정근 박정희 박주민 박준모 박준영 박지영 박지훈 박 진 박 찬 박찬병 박 철

박치현 박태현 박혜상 박호철 박효진 반재운 법무법인 다산 배기성 배용석 백가윤 백수영 백아형 백정선

백종수 변상우 사미경 삼성 노동조합 서경숙 서미나 서미향 서윤수 서재덕 서정리 서정희 서태정 서채원

석권호 성명애 손난주 손어진 송명은 송명훈 송연주 송용기 송원찬 송인숙 송주현 송주희 승혜신 신강현

신남균 신 돈 신동석 신성원 신유아 신은정 신종은 심병훈 심지연 안금옥 안병일 안병주 안병진 안상용

안정희 안진영 안채원 양기석 양민재 양은숙 양훈도 엄명환 여운철 염경미 오동석 오석경 오세범 오일용

오준원 오준희 오춘상 왕윤정 원선옥 원영기 유기만 유덕화 유미희 유정은 유준영 유지혜 육대웅 육성철

윤권영 윤나경 윤세홍 윤영훈 윤은수 윤재훈 윤창경 윤태관 윤태기 윤흥준 이가영 이강복 이건해 이경이

이경진 이계수 이광훈 이근랑 이기만 이기원 이기성 이기은 이기자 이기주 이길순 이다예 이동찬 이문영

이미경 이민수 이민정 이민휘 이범희 이병삼 이봉임 이상명 이상무 이상목 이상언 이상희 이선용 이선희

이설희 이세훈 이소진 이수정 이수진 이순일 이승규 이연민 이연진 이영기 이영문 이영미 이영희 이용덕

이용석 이우상 이유정 이원숙 이은별 이정무 이정화 이정희 이종란 이종수 이종순 이종우 이주영 이주현

이중호 이창림 이태형 이필주 이학준 이향숙 이현찬 이 호 이호헌 이희정 임굉호 임대철 임성민 임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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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도숙 한상운 한상희 한수연 한준경 황영숙 허 선 허승대 허연실 허진만 허환주 홍영덕 홍의표 홍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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