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원 자서전 - 저자 강민정

50

Upload: minjeongkang

Post on 01-Aug-2016

223 views

Category:

Documents


3 download

DESCRIPTION

 

TRANSCRIPT

1 2

44

최상원 자서전

편집장 ㅣ 강윤주

지도 교수 ㅣ 강윤주 송영택

디자인 ㆍ 편집ㆍ 글 ㅣ 강민정 김우미 신봉천

발행일 ㅣ 2016년 6월 17일

발행처 ㅣ 계원예술대학교 광고브랜드디자인과 2학년 C반

주소 ㅣ 경기도 의왕시 계원대학로 66

표지 사진 ㅣ 김하루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 223-5 / 010.7191.9907

어르신 자서전 만들기는 계원예술대학교 광고브랜드디자인과 2학년 C반 2016학년도

1학기 스타트업 수업시간에 진행된 프로젝트입니다.

이 책의 저작권은 계원예술대학교 광고브랜드디자인과에 있습니다.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와 무단 복제를 금합니다.

Copyright ⓒ 2016 by 계원예술대학교 광고브랜드디자인과 C반

5 6

지도교수 인사말지도교수 인사말

어르신 자서전 만들기 _ 백미리 커뮤니티 디자인을 하면서

커뮤니티 디자인이란 전문가가 예쁘게 디자인해서 선물하는 것이 아니라 지

역의 주민들과 더 살기 좋은 세상을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가

잘 알고 합심해야 ‘의미’있는 일을 ‘재미’있게 할 수 있습니다.

서해안 화성시에 있는 백미리를 마음에 두게 되면서 좀 더 아름다운 마을로

만들고 싶다는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꿈을 가지게 되었으니 이루어야겠지요.

학생들에게 교육적으로 도움이 되는 커뮤니티 디자인을 진행하면서 최선의

방법을 찾아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마을 주민들과 커뮤니케이션하기 위한

어떤 것이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어르신 자서전 만들기’ 프로젝트입니다.

고된 일로 피곤하고, 때로는 외롭고 쓸쓸하기도 한 노년의 삶을 위로할 수 있

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고, 아이들이라면 그분들께 환한 웃음을 선물할 수 있

을 것이라 믿어서였습니다.

비주얼 디자인을 하는 아이들이니 글쓰기는 많이 부족하지만, 인터뷰한 것을

기반으로 하는 작업이니까 아쉬운 대로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

했던 거지요. 다행히 아이들도 할아버지 할머니를 뵈러 그 먼 길 통학하기를

마다치 않았습니다.

물론 어르신들께서 잘 보살펴 주시고, 하시는 말씀으로 배우는 것 또한 적지

않았을 테니까요.

어르신들은 지나오신 과거로의 여행이 어떠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시는 어렵고 힘들었던 시절도 지금 돌이켜보면 그리운 시간이고 안타까운

추억인 경우가 많은데요, 저도 어르신들의 글을 읽으면서 가슴 뭉클했습니다.

모두 살아온 인생역정은 달라도 삶을 충실하게 살아온 사람만이 느끼고 말할

수 있는 부분들이 녹아있어서 저희 또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배움도 컸

습니다.

바라기는 이 자서전이 계기가 되어 어르신께서 집안의 자부심이 되시고, 자

식에게 해주고 싶으셨던 이야기와 남기고 싶은 귀한 정신적 유산들을 후손 대

대 전해지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학생들이 만든 자서전 결과물은 부족하지만, 2016년 봄 지난 4개월간의 따뜻

한 시간을 기억해주시고 응원해 주세요.

자서전을 시작으로 백미리 어르신들과의 좋은 인연을 발전시켜 가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부디 건강하십시오.

2016년 6월 17일

지도교수 I 계원예술대학교 강 윤 주 송 영 택

7 8

지도교수 인사말

1 백미리에 돌아오기 까지

/ 열여섯 시골 소년

/ 안녕? 양평동!

/ 백미리로 돌아오다

2 호탕함

/ 첫 만남, 첫 느낌

/ 호탕한 언변 배려 어린 술사

/ 술과 함께

3 호탕함 뒤의 속마음

/ 너무나 평범한 가장

/ 나의 어머니

/ 나의 유자, 고마워요

/ 당신을 존경하는 막내 딸

최상원 인터뷰

닫는 글

5

13

17

21

29

33

42

57

61

69

87

91

95

9 10

백미리에 돌아오기

까지

1

11 12

13 14

1 백미리에 돌아오기 까지1 백미리에 돌아오기 까지

1946년 5월 26일 밸미 마을에서 8남매의 둘째, 장남 최상원이 태어났

다.

‘밸미 마을’은 현재의 ‘백미리 마을’의 옛이름이다.

최상원은 요즘이라면 유치원에 다닐 나이에 서당에 다녔다. 그 때 당

시 어린 최상원이 본 훈장님은 아주 멋지고 무서운 분이었다. 무섭게

호통치시는 훈장님의 모습에 그는 서당에 다니기가 싫어 집에서 20여

분 걸리는 길을 1시간을 넘게 걸어 갔던 적도 있었다.

“오죽하면 한 시간을 걸어서 갔어. 서당에. 너무 가기가 싫어서 미적

미적 걸어 갔다니까”

서당에서는 하루에 천자문을 한 줄씩 외우게 하였다. 어느 날은 외우

기를 열심히 하지 않아, 훈장님께 회초리를 맞으며 호되게 혼났다.

“그래도 돌이켜보면 사랑의 매지. 요즘은 그럴 수도 없잖아.”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에게 훈장님의 회초리는 사랑의 매였다. 사

랑의 매 덕분에 열심히 천자문도 떼었고, 예절교육도 확실하게 배웠기

때문이다. 서당에 다녔을 때까지만 해도 집안은 부유했다. 하지만 아

버지의 실수로 그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즈음 가세는 기울었다.

“서신초를 4km를 걸어 다녔어. 비 오고 바다인데 요만한 길을 맨발

로 다녔어. 6년 동안, 미끈거린 진흙을 밟고”

서신터미널과 가까이에 서신초등학교와 서신중학교가 자리 잡고 있

다. 최상원은 서신초등학교 24기이다. 당시에는 길이 곧지 않아서, 비

가 오면 학교 가는 길이 물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그때 초등학생 최상

원은 어쩔 수 없이 맨발로 질척이는 흙을 밟으며 학교를 다녔다. 지금

은 그 길이 잘 포장 되어있지만 소년의 기억 속엔 좁고 질척이던 길이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다.

최상원은 바로 옆 서신중학교에 입학하였다. 하지만 계속되는 가난으

로 중학교 2학년까지 다니고 중퇴를 했다. 그는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

고 홀로 서울로 상경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열여섯이었다. 새마을 운

동이 막 시작하던 시절에 낯선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열여섯 시골 소년

16

우리는 아직 누구의 어머니도, 아버지도, 혹은 직업도 구체적이지 않

아, 누군가 나를 부를 때 이름을 불러준다. 하지만 최상원은 누군가의

아버지로서, 누군가의 남편으로, 또는 가게의 사장님으로 불린다.

이제 본인의 이름 “상원아” 혹은 “최상원”으로 불릴 일이 오롯이 동창

생을 만날 때라는 말에서 할아버지에게 친구의 의미가 남다르다는 생

각이 들었다.

이제 ‘최상원’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은나의 오랜 친구뿐이다.

서신초등학교

최상원은 서신초등학교를 입학해 죽마고우를 만났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친하게 지낸 분들은 딱 두 분 이관우 씨,

홍종필 씨다. 우리는 오랫동안 우정을 키워 오고 유지해왔다는 사실이

놀랍게 느껴졌다. 많은 수의 친구가 아닐지언정 오랜 세월동안 함께

할 수 있는 진정한 친구가 있다는 것이 감탄스럽기도 했고 부러웠다.

최상원은 친구들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이야기했다. 동창생 친구들이

이름을 불러주어서 고맙고 좋다는 말을 하며 끝을 흐렸는데 우리는 그

것이 굉장히 가슴에 와 닿았다.

더는 ‘최상원’이라는 이름은 초등학교 동창들과 함께할 때만 불릴 수

있는 것이 되어버렸다고 말하는 그의 진심에 우리는 울컥했다.

1 백미리에 돌아오기 까지1 백미리에 돌아오기 까지

1615

17 18

1 백미리에 돌아오기 까지1 백미리에 돌아오기 까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그는 부모님께 학교를 그만두고 서울에 올라

가겠노라 이야기하고 홀로 서울에 올랐다. 서울은 시골과는 천지 차이

였다. 힘들고 고단했지만 배는 안 고프니 살만했던 시절이었다. *정부

미 덕분에 의식주 중 가장 중요한 식이 해결되니 마냥 좋았다.

그 시절의 서울의 양평동은 지방에서 올라온 젊은 처녀와 총각들로 북

적였다. 수 백 개의 공장들이 지어지고, 이촌 귀향의 바람이 불었다. 이

들의 대부분은 판자촌에서 살았는데, 대부분 무허가 주택이었다. 몸만

누울 정도로 허름한 천막 위에 덧댄 판잣집은 무작정 서울에 올랐던

사람들에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안녕? 양평동!

*피역 : 가죽.

그는 판자촌에 홀로 집터를 짓고, 연줄로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타

일 공장, *피역 공장, OB맥주 공장, 포도주 공장 등 총 12가지 공장들

을 다니며 일했다. 지금으로 따지면 중고등학생의 사춘기가 아닐까 싶

을 정도로, 그는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을 찾지 못해 여러 공장을 이리

저리 옮겨 다녔다. 그렇게 2년을 공장 생활로 방황하며 돈을 벌었고,

18살부터 사촌 형님이 상무로 있던 서울주철 공장에서 진득하게 약

14년간 일을 하게 되었다. 12개의 공장을 전전했지만 마지막 서울주

철 공장에서 만큼은 조금 편안한 생활을 했다.

“서울에서 살 때가 황금기였지 돈도 모으고 결혼도 서울에서 했어. 그

때가 가장 좋았지. 열여섯 살 때부터 자취하고 나중엔 동생들도 상경

했어. 편안한 생활은 아니지만 그때가 가장 재밌고 기억에 남았지.”

어린 나이에 혼자 서울에 가서도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공순이, 공돌

이들이 많아서 일이 끝나면 함께 놀았던 즐거운 시절이었다. 하루 벌

어 하루를 먹으며 살았던 때, 가장 철없던 시절이지만 돈이 있어도 없

어도 좋았던 인생의 황금기였다.

1960년대 서울의 모습 출처 : 2002 Neil Mishalov

19 20

궁평유원지 ‘5호집’

‘5호집’이 최상원이 이장을 했던 시절부터 운영하고 있는 가게 이름이다. 현재는 칼국수를 주로

판매하고 있다. ‘5호집’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매점’이나 ‘칼국숫집’의 개념과 조금 다르게 운

영 되고 있다. 손님의 입맛에 따라 그때그때 내오는 음식이 다르다. 손님이 칼국수를 원하면 칼

국수, 파전이면 파전, 돼지고기면 돼지고기를 해준다. 매점을 운영할 당시에는 방갈로에서 숙박

도 같이 운영했다. 그야말로 매점과 숙박, 식당을 함께 운영하는 만능집이라고 할 수 있다.

1 백미리에 돌아오기 까지1 백미리에 돌아오기 까지

21 22

1 백미리에 돌아오기 까지1 백미리에 돌아오기 까지

1978년, 최상원은 돌아가신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어릴 적 살던 백미

리 집으로 돌아왔다. 당시 그의 나이는 서른두 살이었다.

그는 고향에 돌아왔지만 마음 한편에 서울에서의 삶을 잊지 못했다.

부인과 함께 내려온 시골생활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그는 서울 사람

과 시골 사람의 생각과 문화가 많이 달랐다. 그래서 혹여나 실수를 할

까 봐 좋아하던 술을 끊기도 하며 시골 생활에 맞춰가기 위해 많은 노

력을 했다.

게다가 생전 해본 적 없는 농사는 이 부부에게는 너무 힘든 일이 었다.

처음 시작한 농사는 참외와 수박이었다.

그는 백미리에서 지은 농작물을 서울로 가져가서 팔았다. 새벽부터 트

럭을 빌려 농작물을 잔뜩 싣고 안양에서 영등포, 인천, 청량리까지 전

전하며 팔다가 밤늦게 백미리 집에 돌아왔다.

힘들었던 시절이지만, 그는 그때를 추억하며 그래도 행복했던 때였다.

풍족하진 않아도 돈을 벌어 쓸 곳이 있고, 바쁘고 활기찬 생활을 할수

있었던 유일한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백미리에 돌아오고 10년이 조금 지나, 특유의 친화력과 리더십

으로 이장, 어촌계장, 노인회 총무를 도맡아 마을을 이끌어 나갔다. 그

리고 그 시기부터 농사일과 함께 백미리 마을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궁평유원지에서 매점 장사를 시작했다.

당시 궁평유원지는 여름이면 인산인해였다. 사람이 차고 넘쳐 어깨를

부딪히며 지나다닐 정도였고, 매점과 함께 딸려 있는 *방갈로는 항상

예약이 쇄도했다. 뿐만 아니라, 텐트들이 즐비해 발 디딜 곳이 없었다.

그때가 그의 인생에서 최고로 돈을 많이 벌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엔

사람이 워낙 많이 몰려와 ‘5호집’과 같은 가게들이 14개가 들어와 장

사를 했다.

특별한 홍보를 하지 않아도 14개의 가게에 물건이 없어서 못 팔 정도

로 장사가 꽤 잘 됐었지만 현재 궁평유원지에는 ‘5호 집’을 포함하여

단 3개의 가게(5호집, 종갓집, 완도집)만이 남아있다.

백미리로 돌아오다

*방갈로 : 캠프용의 간단한 작은 오두막집.

23 24

1 백미리에 돌아오기 까지1 백미리에 돌아오기 까지

1991년 여름, 궁평유원지 매점 앞에서 즐거운 모습

1991년 여름, 매점과 함께 운영했던 방갈로 내부 모습

2016년 6월, ‘5호점’에서 아내와 함께 보내는 즐거운 시간

25 26

호탕함2

27 28

29 30

2 호탕함2 호탕함

“안녕하세요. 계원예술대학교 학생들입니다.

최상원 할아버지 맞으세요?”

백미리 어르신들과의 첫 만남. 킥오프 미팅이 끝나고 우리는 그때 만

나 뵙지 못했던 또 다른 어르신께 연락을 드렸다. 이름과 번호만으로

누군가에게 처음 전화를 건다는 것. 그 자체로도 낯설고 어색했다.

처음 만나는 날 백미리로 향하던 중 서신터미널에 내린다고 전화를 드

리니, 선뜻 데리러 오시겠다며 기다리라는 최상원이었다.

멀리서 “학생들~”하고 부르는 늠름한 남자.

주황색 줄무늬 카라티에 까무잡잡하고 둥근 얼굴, 도톰한 눈두덩이와

짝눈, 큰 손을 흔들며 우리를 알아보시고 먼저 말을 걸어주는 호탕한

매력의 소유자였다. 우리는 그의 오래된 봉고차에 오르며, 어색한 인사

를 나누었고 그것이 최상원과 우리의 첫 만남이었다.

그는 음식점에 들어갈 때도 식사를 마치고 나올 때에도

“학생들 먼저 들어가요.”

“오느라 힘들어서 어떡하나, 학생들 편하게 앉아서 먹읍시다.”

“학생들 먼저 나가요.”

“차가 좁고 더러워서 어떡하나...”

같은 사소한 것들에서도 우리를 먼저 챙기는 모습을 보였다.

지금은 편해져서 우리에게 반말도 하시고, 농담도 하시지만 매주 전화

를 할 때 마다 먼저

“어유~ 학생들 잘 지내?”

“나는 덕분에 잘 지내지!”

라며 항상 그렇듯 우리를 먼저 챙겨주시는 다정한 그의 말에 늘 기분

이 좋았다. ‘역시 우리 할아버지!’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그의

배려 어린 통화에 매번 감탄했다.

첫 만남, 첫 느낌

31 32

맨 처음 우리가 ’최상원 할아버지’라며 말문을 틀 때, 그것이 오히려 서

먹하게 만드는 느낌을 받은 그는 “아유, 무슨 할아버지야. 아저씨라고

부르기로 하자.”라며 먼저 편한 분위기를 이끌어 주셨다.

우리가 손주와 비슷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가 아닌 아저씨

로 부르는 이유 역시 그가 우리를 배려해 주는 방법이었다. 덕분에 우

리는 그를 더 가깝게 느꼈고, 초반의 어색함도 잊어갔다.

그래서 우리와 최상원은 대외적으로는 ‘최상원 할아버지’이지만 우리

끼리 있을 때 호칭은 ‘최상원 아저씨’이다.

할아버지가 뭐야, 아저씨라고 합시다. 학생들-!

31

2 호탕함

신봉천, 김우미와 함께

강민정, 김우미와 함께

2 호탕함

33 34

Episode 1 Episode 3

Episode 2

“ 개소리 할까봐, 개고긴 안먹어! ”

최상원이 싫어하는 음식은 계란 후라이와 카레, 그리고 개고기이다.

우리는 그가 싫어하는 음식이 개고기라는 이야기에 왜 다른 고기는 다

드시면서 개고기는 안드시냐고 여쭈어보았는데, 이런 대답을 했다. 사

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냥 먹을 때마다 배가 아플 뿐이다.

“ 저기 보이는 뻘이 다 해수욕장이지!

물 들어오면 해수욕장, 물 나가면 그냥 뻘이오! ”

궁평유원지에 방문하는 대부분의 여행객들은 궁평유원지 솔숲 뒤에

해수욕장을 즐기기 위해 온다. 한 장소에서 오래 가게를 운영하다보면

도시에서 온 여행객들에게 듣는 이야기는 “여기 해수욕장은 어디에 있

어요?”인데, 그러면 최상원은 호탕하게 웃으며 이런 대답을 해준다고.

실제로 궁평유원지 솔숲 뒷켠은 전부 해수욕장이다.

“ 난 민증을 까본 역사가 없어. 내 친구들은 46년 생이지, 근데 1살

덜 들면 나이가 들키잖아. 그래서 내가 민증을 까본적이 없어. ”

최상원은 1946년 개띠로 태어났지만, 당시에는 아이가 태어나고 보통

1년정도 뒤에 등본에 올렸기 때문에 주민등록등본 상에는 1947년으

로 등록되어있다. 그래서 그의 주변 친구들은 주민증록등본 나이로 따

지면 그보다 1년 형인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그는 친구들에게 절대

주민등록증을 보여주지 않는다.

호탕한 언변 호탕하고 재미있는 말솜씨.

2 호탕함2 호탕함

35 36

Episode 1 Episode 3

Episode 2

“아줌마, 나는 밤이 좋아요.”

이 말은 어촌계장을 하던 시절, 최상원은 함께 일하는 아줌마들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못했다. 어떤 날은 갯벌에서 힘들게 일했는데, 아줌

마 들이 너무 힘들고 배고프다며 조개 봉다리들을 트럭 앞에 다 던져

두고 가 버렸다. 그러면 최상원은 혼자 남아, 그 무겁고 많은 조개 봉다

리들을 홀로 트럭에 실었고 다음날 속상함을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아줌마들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시고

‘어촌계장님은 밤을 좋아해!’라고 알았들었다.

“상대방이 듣기 싫어할 소리는 하지말아야지.

그래서 나는 적당주의지.”

“가급적 좋은 말만 하고 지내자! 그러면 부딪힐일이 없잖아.

너무 모나지말게 동글동글하게 살아!”

이 말은 최상원이 늘 강조한 말이다.

상대방이 듣기 싫은 소리를 하지 않는 것. 기분 좋은 말만 하는 것이

그가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방법이었다.

“아유~회장님!”

최상원은 친구들이나 마을 사람들에게 ‘회장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다. 실제로 그 사람들 이 자신의 상사도 아니고 회장도 아니지만 남을

높여주기 위한 그만의 방법이다.

배려어린 술사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법에 능통한 사람.

2 호탕함2 호탕함

37 38

2 호탕함2 호탕함

50대, 백미리 이장을 맡던 시절 60대, 제주도 풀밭에서

39 40

41 42

최상원의 유일한 취미는 술이다. 취미라고 일컬을 정도로 그 스스로가

기뻐지는 데에는 사람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걱정 없이 웃는 것이다.

사람들과 함께 술을 한 잔 두 잔 기울이시는 그는 항상 즐겁고, 유쾌

하다. 그는 특별한 술버릇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가 본 그는 술

을 마시면 그는 자연스레 웃음이 많아진다. 게다가 어느새 붉어진 그

의 눈가와 뺨은 함께 술 을 마시는 사람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게 한

다. 술을 마시더라도 남에게 나쁜 소리를 하지 않는 그였다. 그렇기 때

문에 최상원의 호탕함과 배려심을 뽑낼 수 있는 자리 역시, 단연 술자

리다. 그래서 그가 사람을 사귈 때, 항상 술이 빠질 수 없다. 술잔을 나

누며 서로 즐거운 이야기를 하는 것. 그게 최상원이 삶을 살아가는 낙

이자 기쁨이다.

“ 나는 술 먹고 삐딱한 거는 못 보지. 술 먹는 게 제일 재밌는 거지 뭐.

나는 술 마실 때 비유를 잘 맞춰. 자연스럽게 만나서 술도 먹고, 웃고

떠드는 거지.”

술과 함께

2 호탕함2 호탕함

즐겁게 술을 마시는 모습

43 44

2 호탕함 2 호탕함

하지만 최상원은 술이 몸에 잘 받는 체질은 아니다. 최상원의 주량은

소주 한 병. 하지만 술을 마시면 술자리의 분위기에 취해 한 병을 조금

더 마시며 즐거운 분위기를 주도한다.

“나는 밤엔 술을 안 마셔. 술을 마셔도 잠은 집에서 자야 하는 거야.

밤 12 시 까지 술을 먹고 그러면 집에서 못 자는거잖아. 아침까지 꼴딱

새는 거는 별로야. 그래서 점심에나 좀 마시고 새벽 늦게까지 술을 먹

지 않아.”

술을 먹을 때 그만의 법칙이 있다. 그는 술을 좋아하지만, 밤 늦게까지

는 절대 술을 마시지 않는다. 그 이유는 가족을 생각하고 건강을 생각

하는 마음에 있었다. 그렇게 좋아하는 술을 자주 즐기지만, 가족들이

자신을 걱정하지 않게 배려하는 것이다.

아침엔 사장님, 점심엔 형님, 갈 땐 ‘여-이리와봐!’

칼국수 집에서의 손님들은 시간에 따라 최상원을 지칭하는 호칭이 바

뀐다. 그의 호탕하고 친화력 넘치는 성격 때문이다. 하지만 예의를 지

키지 않는 그들에게 답답함을 느끼기도 한다. 싫은 소리를 하지 않는

성격상 웃으며 맞춰주게 되었고 그것이 곧 그의 서비스 정신이 되어버

렸다. 그래서 최상원은 장사가 서비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가 말

하는 서비스란 무엇일까?

그가 칼국수 집을 운영하시는 모습을 관찰하면 손님들과도 술을 마시

는 모습을 종종 볼 수가 있다. 그는 항상 편안하고 호탕한 말투와 술을

함께 하는 분위기로 손님과 급속도로 친해진다. 이것이 그만의 단골손

님 유지법이다.

하지만 가끔 도를 지나치는 손님들이 있다. 너무 친해진 탓일까? 아침

엔 사장님, 점심엔 형님, 갈 땐 ‘여, 이리와봐!’라고 말하는 손님도 있었

다. 그래서 장사를 운영하는 그의 솔직한 마음은 불편하다. 그가 중요

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는 ‘예의’인데, 손님 중 자신이 갑이라는 생각

으로 예의범절을 지키지 않는 손님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점점

44

백미리에 돌아오기 까지

46

나이가 들수록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손님들을 상대하기가 어렵기만

하다. 그는 요즘 젊은이들이 빨라지는 시대적 상황에 비해 정신이 못

쫓아가고 있지 않나라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도 최상원은 “근데 어쩔 수 없이 삭혀야지. 참아야지.” 라며 씁쓸하게

웃는다. 상대방은 지키지 않을지 언정 본인 만큼은 항상 사람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그것을 의식해야 한다는 것이 그가 사는 방식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장사를 접고 싶은 마음도 여러번 들었지만 그럴 수 없

었던 이유는 자식들을 위해서였다. 최상원은 항상 나이가 들어 돈이

필요없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황을 다 참아 내는 이

유는 몇푼이라도 벌어 자식들에게 부담을 덜어 주고 싶어서라고 한다.

또한 그의 유일한 재산인 집과 이 가게만이 자식들에게 남겨줄 유산이

라는 것이다.

장사를 하는 사람들, 서비스직을 가진 사람들의 고충과 가장으로서의

그의 무게가 느껴지는 말이 었다. 항상 웃고 있는 그의 표정 뒤에 감춰

진 고충을 누가 감히 다 읽어 낼 수 있을까?

2 호탕함2 호탕함

4645

47 48

호탕함 뒤의

속마음

3

백미리에 돌아오기 까지 백미리에 돌아오기 까지

49 50

취중 진담이 깊어지면서 항상 웃기만 하던 그의 모습 속에

그간 가족에게 표현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속마음을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식들과 부모님, 그리고 부인에 대한 속 이야기를

씁쓸하게 말하면서도 마지막은 대강 웃어 넘기는 그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표현 하고 싶으나, 표현하는 방법을 몰라 어떻게 이야기 할 줄 모르는

가장 최상원을 보았다.

51 52

53 54

귀 향 과 함 께 한

이곳은 어릴 적 최상원이 살던 집터 위에 다시 지은 집이다.

백미리, 그 어떤 집보다 낡고 오래된 흙 집엔 최상원이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

56

그는 돈을 들여 이 집을 다시 지으려고도 생각했었지만 얼마 남지 않

은 인생, 그 돈을 써서 집을 새로 짓기 보다 아들에게 재산으로 물려주

는 게 낫지 않겠냐는 결론을 내렸다.

‘ㅁ’자 형의 이 집은 요즘 시골집들보다 더 오래된 모습을 하고 있다. 백미리에 돌아오고 최상원과 함께 40년 가까이 되는 세월을 버틴 이

낡은 흙 집에는 현재 최상원과 그의 아내 현유자 둘만이 살고 있다.

이것은 1950년대 한국전쟁 이후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격변의 시

대를 관통하며 살아온 우리 시대 아버지의 모습이 아닐까?

젊은 시절 자식을 위해 돈을 벌었고, 현재에도 자식을 위해 불편함을

감수하고 집을 지키는 최상원이었다.

이것이 그 동안 자식들에게 말하지 못했던 미안함에 대한 그만의 표현

방식이다. 백미리 그 어떤 집보다 멋스러운 오래된 흙 집에서 그의 표

현 방식을 느낄 수 있었다.

“1억을 들여 집을 바꾸려고 했어. 근데 안 했어.

그 돈 그냥 아들을 주지, 내가 써서 뭐해.

자식들한테 부담만 가는 거야.”

3 호탕함 뒤의 속마음3 호탕함 뒤의 속마음

2016년, ‘ㅁ’ 자형 흙 집

5655

57 58

Q 자서전에 꼭 들어갔으면 하는 이야기가 있을까요?

빵점 짜리 부모. 나는 빵점 짜리 애비야. 자식들한테 해준 게 없으니

까. 우리 아들 고등학교만 나오고 큰 딸도 고등학교만 나오고, 우리 막

내 딸만 자기 혼자서 수원간호대학교를 나왔는데, 사회 나가서도 어디

서 타 모범이 될 정도로 잘하니까 더 미안하고 그렇지. 이 말을 꼭 하

고 싶었어.

그는 우리를 만날 때마다 끊임 없이 자식들에게 미안하다고 이야기했

다. 삼 남매를 키우던 시절, 너무 가난해서 자식들을 더 가르치지 못했

다. 하지만 현재 첫째 딸은 주부, 둘째 아들은 카센터 사장, 셋째 딸은

간호사로 셋 다 성실하고 바르게 자라주었다.

“내 아들이 카센터를 하는데 걔가 그러더라고, ‘아버지 저는 연장만

있으면 돼요. 잘릴 일이 없어요.’”

가난했던 시절, 자식들은 스스로 공부에 매진했다. 그리고 현재에는

삼 남매 모두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 풍족해 보였다. 그는 그걸 무

척이나 자랑스러워 하면서도 자신이 조금이라도 더 해줬어야 하는데,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다며 자책한다.

카센터를 운영하는 아들이 일하는 곳은 겨울에는 북풍 바람이 분다.

그는 아들의 근무 환경을 말하며,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겨울에 뜨거

운 물로 세수도 못 하겠다고 눈시울을 적셨다. 나의 아들은 찬바람 불

때, 밖에서 차가운 것들을 만지는데. 아버지인 자신은 집에서 따뜻한

물을 쓰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한 번은 그가 몰던 봉고차가 고장이 났다. 그걸 알아챈 아들이 바로 차

를 수리하기 위해 견인차를 끌고 왔고, 밤새도록 차를 고쳤다. 최상원

은 다음 날 아들이 새로 가져온 차를 보고 밤잠을 못이뤘다. ‘해준 것도

없는데 부모라는 두 글자 그것 하나로 밤새 차를 고친 우리 아들’이 라

며 고생한 아들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한 마음을 내비칠 뿐이었다. 그

런데도 현재 삼남매는 어린이날, 어버이날을 번갈아가며 그의 집에 방

문하고, 일주일에 서너 번씩 전화를 한다. 아내인 현유자씨가 병원에

가야 할 때는 사위까지 발 벗고 나서서 쫓아온다. 그는 해준 게 없다고

늘 말하지만, 자식의 입장에서 경제적 뒷받침보다 부모님께 받은 가르

너무나 평범한 가장

3 호탕함 뒤의 속마음3 호탕함 뒤의 속마음

59 60

침과 사랑이 더 크기에 삼남매가 한 번도 싸우지 않고 이렇게 모시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라고 말한다. 자

식들이 잘 큰 것은 아마 자신이 자식 보기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서 그

런 것이 아니겠느냐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자신이 아버지를 존

중하고 모시던 시절을 떠올리며 아마 자신이 부모에게 효를 했던 모습

을 아이들이 보고 나에게도 잘하는 게 아니겠냐는 말이 었다. 그래도

역시나 마지막은 항상 “나는 아무것도 해준 게 없다.”라는 말이었다.

“ 저희 아버지께서는 고지식하고, 무뚝뚝하셨어요. 근데 안 그러시

죠? 다른 분들한테는 안 그래요, 상냥해요. 근데 우리 때 하고는 시대

가 다르니까. 지금은 ‘아빠 뭐이랬어.’ 라고 하는데, 그 전에는 ‘요’를

붙였어야 했었어요. 항상 가부장적이시고 고지식하고 무뚝뚝한, 매일

저희를 위해 일만 하시는 진짜 아빠의 모습 아니면 선생님 같은 그런

존재였죠. 그런데 연세가 드시면서 그런게 조금씩 없어졌어요.”

-막내딸 인터뷰 중

최상원은 젊은 시절 무뚝뚝하고 가부장적인 가장 평범하고 보편적인

아버지였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그 역시 함께 변해갔다. 아직도

표현은 많이 서툴고 표현하는 방법조차 모르지만 나이가 들면서 손주

의 애교에 더 다정하게 받아 주고 늘 그렇듯 호탕하게 웃으며 장난도

친다.

3 호탕함 뒤의 속마음3 호탕함 뒤의 속마음

61 62

최상원은 2014년 여름에 돌아가신 어머니 이야기를 하며, 어머니가

정말 힘든 세월을 보내시다 가셨다고 입을 열었다.

“우리 어머니, 오래 아프셨지. 쉰둘부터 아프셔서 여든여섯에 돌아가

셨어. 우리 아버지가 한량이셔서 더 많이 고생하셨지.”

8남매를 홀로 키우신 최상원의 어머니 고금순씨.

그의 어머니는 남편 때문에 더 많이 고생하셨다. 결국 노년에는 아버

지는 서울에, 그리고 어머니는 백미리에서 따로 사시게 되었다.

최상원의 어머니는 쉰 둘 때부터 병을 앓기 시작하셨다. 어머니는 몸

한쪽이 마비가 되셨다. 그것 때문에 언어장애까지 갖게 되시고 홀로

몸을 가누기 힘든 상태가 되었다. 그는 그가 살던 서울로 모시려고 했

지만 어머니는 백미리에 있겠다고 하셨다. 결국, 최상원은 다시 백미

리로 돌아가기로 결심했고, 백미리에 돌아와서 아내과 함께 아픈 어머

니를 간호했다.

“그 어려웠던 보릿고개 시절에 홀로 8남매를 키우시니까. 고생을 많

이 하셔 가지고 일찍 병을 얻으셨나 봐. 그래서 30년을 고생하셨으니

까.”

오랜 병간호를 했지만 어머니의 상태는 점점 악화되어 결국 치매가 함

께 오게 되었다. 더군다나 자식인 본인 보다 더 어머니를 지극 정성 간

호하던 아내의 몸도 점점 안 좋아지자 최상원은 점점 늙어가는 자신과

아내가 어머니를 모실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그는 어머니를 요

양원에 모시기로 했다.

맨 처음 동생들이 사는 김포에 있는 요양원에서 어머니를 모셨다. 그

때만 해도 최상원은 늙은 자신과 아픈 아내보다 병원에서 더 나은 치

료를 해줄 것 이라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요양원에 찾아갔을 땐 몹

시 비참한 기분을 느꼈다. 당시에 제대로 된 면회 기회가 주어지지 않

았고 어머니를 위해 준비해간 음식들도 직접 전해 주지 못했다. 결국

그는 시설의 사람에게 사 온 음식만이라도 전달을 부탁했다. 하지만

그것마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요양원 안의 노인들은 병

원에서 준비한 음식을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노인들이 함께

생활하고 관리를 받는 곳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요양원이 편한 대로 노

나의 어머니

3 호탕함 뒤의 속마음3 호탕함 뒤의 속마음

63 64

인들을 관리했다. 음식을 적게 주고 적정량 이외에 불필요한 배변 활

동을 최소화시키기 위해서 면회자의 음식을 챙겨주지 않았다. 게다가

요양원이다보니 제대로 된 치료를 즉시 할 수 없었다. 노인이 아프다

고 하면 바로 병원에 링거를 맞으러 보내는데, 이것을 보호자에게 후

에 통보 하여 링거 값을 청구했다. 심지어 어머니의 상태는 구체적으

로 알려 주지 않아, 어머니가 어디가 어떻게 아프셨는지 자세히 듣기

조차 어려웠다고 한다.

최상원은 그때 이야기를 하며, 울분을 터트렸다. 그러면서 후회가 많

이 남는다며 다시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돌아가실 것 같다 하더니, 진짜로 가신 거야. 아마 내가 볼 땐 처음

악수하셨을 때 돌아가신 것 같아. 참 씁쓸하지. 다른 사람들 가는 건

알아도 내 부모는 모르는 거지...”

이장을 맡던 시절, 그는 동네의 상을 손수 치루며 죽음에 대해 단련이

되었고, 그 누구보다 죽음의 소식을 빠르게 접했다. 하지만 자신의 어

머니가 돌아가실 때는 정작 본인이 가장 먼저 알아 채지 못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어느 날 궁평 유원지에서 장사하다가 한 노인

이 자신의 어머니를 모시고 유원지 옆에 솔숲을 함께 산책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어머니를 생각이 났다. 살아계실 적 저렇게 하지 못했던

자신을 씁쓸해하며, 음료수를 들고 찾아가 그 70대 노인을 응원했다.

“그 궁평에서 장사할 때, 내 또래의 어떤 남자가 자기 어머니 데리고

여기 뒤에 나무가 좋은 곳을 함께 걷더라고. 그걸 보고 내가 쫓아가서

그랬어. 음료수 하나 주면서 참 당신 복 받을 거라고 ‘내가 우리 어머

니하곤 그러지 못했어.’라고 말했지...”

3 호탕함 뒤의 속마음3 호탕함 뒤의 속마음

66

“형님! 김포 요양원에 계셔도 제대로 어머니 얼굴도 못 보는데, 고향과

가까운 곳으로 다시 모시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그래. 그러자.”

오랜 세월 잔병치레와 치매가 왔을 때, 나는 어머니의 똥도 못 치워 아

내에게 미루는 철없는 아들이었다. 결국, 더 좋은 병원에 모시는 게 낫

겠다 싶어. 김포 요양병원에 모셨지만, 3년째 되던 날, 내 동생들이 가

까운 곳에 모시자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렇게 86세의 나의 어머니를 백미리 마을 근처, 사강 양로원에 모시

게 되었다. 어머니는 언어장애와 치매를 앓는 3급 장애인이셨다. 보릿

고개 시절 아버지의 한량생활 때문에 한 평생 고생하신 우리 어머니.

2014년 8월.

‘메-엠. 멤-’

매미가 찌르라며 울던 뜨거운 여름.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어머니가 지금 위급하세요! 어서 오셔야 해요!”

“예? 그게 무슨 말인가요? 양로원 가신지 일주일 밖에 안되었는데 이

게 무슨 말입니까!”

나는 급한 마음에 얼른 차를 몰고 사강으로 향했다. 그날따라 급하게

몰고 간 차 안에서 어린 시절 정부미로 밥을 해주시던 어머니의 얼굴,

나를 칭찬하시던 얼굴들이 스쳐 지나가며 이제 나의 얼굴도 못 알아

보시는 어머니를 어떻게 뵈야 하나. 불안한 가슴을 붙잡고 요양원으

로 향했다.

양로원에 도착하고 허겁지겁 병실에 들어갔을 때, 어제까지만 해도 나

를 못 알아보시던 어머니가 어눌한 어투로 나를 부르셨다. 그러곤 알

아듣기 어려운 말과 함께 나의 눈을 맞추며 나와 악수했다. 그렇게 어

머니와 한 참 손을 잡고 있었다. 몇 분 뒤, 어머니는 아무 일도 없었다

는 듯 다시 잠이 드셨다.

그렇게 걱정 안은 마음으로 몇 시간을 문밖에서 기다렸다. 시간이 지

나도 어머니는 평소처럼 낮잠을 주무셨다.

나는 화가 났다.

어머니 가실 적에

3 호탕함 뒤의 속마음3 호탕함 뒤의 속마음

6665

68

“아니. 내가 지금 몇 시간 동안 여기 있었는데 우리 어머니 멀쩡하시지

않냐. 왜 사람을 놀라게 오가라 하냐.”

“아깐 분명히 위독하셨는데…. 보호자분 연세도 있으시니, 일단 집에

돌아가 계시면 나중에 다시 연락드릴게요. 상황을 더 지켜보긴 해야

할 것 같네요.”

돌아가는 길에 나는 이런저런 생각들이 들었다. 간호사한테 화가 나기

도 하고,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들기도 하고, 설마 우리 어머니가 지금

돌아가시겠냐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시속 40km로 천천히 달리며 창밖을 바

라보았다. 그렇게 15분 만에 도착할 길을 1시간이 걸려 집에 도착했

다. 나는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피곤한 몸을 씻고 누웠다.

다시 한 번 아까의 놀란 감정들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길 때 쯤. 또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따르릉~”?“여기 사강 요양원인데요! 어머니가 위급하세요! 다시 오셔

야 할 것 같아요! 아드님 찾으시는 것 같아요!”

“지금 장난해? 내가 분명 방금 갔다 왔는데! 아까 분명 멀쩡하셨는데

왜?”

나는 결국 화가 나서 소리쳤다. 그러나 어머니를 생각하니 마음이 급

해져서 아까 1시간을 걸려 왔던 길을 빠른 속도로 차를 몰고 갔다.

도착하자마자 나는 또 뛰었다. 병실에 들어섰을 때, 나는 아까와는 사

뭇 다른 분위기를 느꼈다.

“아······.”

나는 알 수 없는 탄식과 함께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나의 어머니는 사강 양로원에 오신지 일주일 만에 돌아가셨다.

무더운 여름. 나는 더는 어머니를 부를 수 없게 되었다.

3 호탕함 뒤의 속마음3 호탕함 뒤의 속마음

6867

69 70

“내 아내 얘기를 하자면 팔불출이라지만~”

맨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그가 그의 가족에 관해 이야기할 때 처음 나왔

던 말이다. 우리는 최상원씨에게서 ‘팔불출’의 매력을 찾기 위해 노력

했다. 하지만 자식 자랑은 술술 잘하면서도 아내에 대한 말은 아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아내 생각을 안 하는 것은 아니었다.

최상원과 현유자는 젊은 시절 중매를 통해 처음 만났다. 그렇게 현유

자는 23살, 최상원은 25 살에 결혼했다. 지금이나 그때나 이른 결혼을

한 이 부부. 두 분은 항상 우리에게 일찍 결혼하라고 당부하셨다.

“결혼은 일찍 해야 해! 학생들 꼭 삼십 안쪽에 결혼해! 나이가 들면 자

꾸 계산하잖아. 아무것도 모를 때, 서로 마냥 좋을 때 하는 거야. 결혼

은! 돈은 결 혼하고 같이 벌면 되고, 결혼을 일찍 해야 잘 살아.”

취중진담이 깊어지면서 최상원은 아내의 젊은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나의 유자, 고마워요

1970년 1월 4일 아내 현유자와 결혼

3 호탕함 뒤의 속마음3 호탕함 뒤의 속마음

71 72

1970년 1월 4일 아내 현유자와 결혼

1970년 1월 4일 아내 현유자와 결혼

3 호탕함 뒤의 속마음3 호탕함 뒤의 속마음

73 74

“ 처음 봤을 때 인형인 줄 알았어. 주머니 속에 쏙 넣고 다니고 싶었

어. 지금도 그렇지만 젊었을 때 아주 예뻤지.”

젊은 시절 아내는 아름다웠다. 백미리 마을에 내려 왔을 때 동네 사람

들이 “어쩜 그렇게 하얗고 이쁜 처녀가 여기까지 내려왔냐”는 말이 나

올 정도였다. 궁평유원지에서 매점을 운영 하던 때 최상원은 내 아내

를 누가 해라도 끼칠까봐 매점 주변 다른 동료들에게도 술을 사주었

다. 그리고 그들에게 혹여라도 내가 없을 때 우리 아내 잘 부탁한다며

신신당부하기도 했다.

궁평유원지 ‘5호집’ 앞 아내 현유자의 모습

3 호탕함 뒤의 속마음3 호탕함 뒤의 속마음

백미리에 돌아오기 까지 백미리에 돌아오기 까지

75 76

77 78

제주도에서 아내 현유자와 함께

3 호탕함 뒤의 속마음3 호탕함 뒤의 속마음

79 80

태국에서 아내 현유자와 함께

3 호탕함 뒤의 속마음3 호탕함 뒤의 속마음

81 82

최상원은 표현한 적은 없지만 늘 가슴 속에는 너무 고맙고 미안하고

사랑한다는 말이 얹혀있었다.

아내는 오랜 세월 허리디스크 와 당뇨로 고생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쓰러졌다. 당황한 최상원은 아내가 그대로 잠이 든 줄 알았다. 흔들어

도 아내가 깨어나지 않자. 그 날 아내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샤워도

시켜 보고 바르게 눕혀도 보며 정신을 잃은 아내를 깨우기 위해 애썼

다. 하지만 깨지 않자 급하게 정신이 들어 응급실에 연락했고 가까운

병원에 병실이 없어 수원까지 가게 되었다. 다행히 아내는 안전하게

치료를 받았지만 그날의 기억은 생사를 가르던 끔찍한 일이었다.

며칠 뒤, 막내 딸에게서 그 동안 호탕함 속에 감춰져있던 그의 모습을

알게 되었다. 아내를 병원에 보내기전 그 날 앞마당 비닐하우스 안에

서 소리 내지 못하고 홀로 울던 최상원의 이야기를 들었다.

첫날 그가 우리에게 씁쓸한 웃음과 함께 이야기했던 것들이 생각났다.

“내 아내가 참 고생 많이 했지. 내 어머니를 30년을 모셨어. 30년을.

그러다 본인이 아픈 거야. 내가 많이 미안하지. 고맙고 ······.”

아내는 아픈 시어머니를 30년 동안 모시고 살았다. 그렇게 곱디고운

아내가 나의 어머니를 모시느라 병이 들었을 때, 그의 마음은 찢어지

는 듯 했다. 백미리에 돌아와서 아내가 환갑이 될 때까지 30년 동안 그

작은 체구로 40kg이 넘는 노인을 모신다는 것은 병이 들 수밖에 없었

다.

아내는 최상원보다 더 지극정성으로 시어머니를 간호했다. 일부러 포

크를 직접 사용하시게 하고 치매가 왔을 땐 스스로 빨래를 하게 했다.

또한 방에 끈을 달아 두어 일어나실 때 스스로 일어나시도록 하여 몸

을 많이 움직이게끔 했다. 어떤 날은 밭일도 시켰는데 동네 사람들이

한 때 그 모습을 보고 못됐다고 했었다. 하지만 덕분에 그의 어머니의

상태는 더 많이 좋아졌다. 그 지극함을 알고 마을에서 아내에게 효도

상도 주었다.

3 호탕함 뒤의 속마음3 호탕함 뒤의 속마음

백미리에 돌아오기 까지

83 84

그랬던 아내가 지금은 아프다. 그는 첫째도 건강, 둘째도 건강이라고

이야기 하며 아픈 아내를 걱정했다. 워낙 표현을 못하는 최상원이지만

아내의 몸이 아프게 되자 최근 들어 표현을 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그것 조차 너무 어려워 한다. 게다가 사랑한다는 말이 가장 어렵고 해

본 적이 없다고 말하며, 이번에 자서전을 쓰면서 아내에게 고맙고 사

랑한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고 했다.

사랑하는 유자씨에게안양 계원예술대학교 학생들을 만나서 처음으로 영상 편지를 쓰고자 합니다. 우리가 1970년 1 월 4일에 결혼하여 46년을 살고 아들,딸 삼 남매를 두고 살고 있지만, 너무나도 유자씨를 고생 시켜서 말도 제대로 못하고 쓰지도 못하겠네요. 어머니 36년을 병간호하느라고 유자 씨도 병만 들었고 우리도 어느 덧 칠십이구려. 앞으로 삼 남매를 비롯하여 건강하고 잘 살자고 노력하겠지만, 처음으로 안양 계원예술대학생을 만나서 영상편지를 쓰고자 하니 도무지 생각이 안나 무슨 말을 써야 하는지 모르겠구려. 처음으로 정아 엄마께 사랑한다는 말을 쓰게 되는구려. 46년을 살면서 어찌 사랑한다는 말을 못하고 이제 학생들을 만나서 쓰게 되는 구려. 마음으로 서는 왜 고생하고 또 고생하는 유자씨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안 하겠습니까. 마음으로 사랑하고 또 사랑합 니다. 나를 만나서 평생 고생하는 정아엄마. 진정으로 영상편지로써 전하고자 합니다. 평생 두고두고 잘하고 잘하려고 합니다마는 이젠 해가 서산으로 지고 있구려. 우리가 남은 인생 얼마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있는 날까지 우리 자식 삼 남매를 비롯하여 건강히 잘살았으면 합니다. 정아엄마가 건강이 안 좋으니까 걱정이 태산 같구려. 사랑하고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사랑합니다. 조금이나마 건강을 유지하였으면 좋겠네요. 건강하고 또 건강 하자고요. 여보 사랑합니다.

2016년 5월 20일최상원

3 호탕함 뒤의 속마음

백미리에 돌아오기 까지

85 86

3 호탕함 뒤의 속마음

87 88

우리는 최상원의 자랑스러운 막내딸을 만났다. 그녀는 올해 6월 30일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뉴질랜드로 떠난다. 그녀는 애 둘을 낳은 엄마

라고 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키에 날씬한 몸매를 가졌다. 또 목소리와

표정에서 활력이 넘쳤다.

우리의 “너무 부담 갖지 마세요. 편하게 인터뷰할게요~”라는 이야기를

듣고, “아! 몸빼를 입었어야 하는데!”라는 농담을 할 정도로 털털하고

밝은 사람이었다. 누가 핏줄 아니랄까봐, 아버지와 같은 큰 목소리에

호탕한 웃음의 소유자 최정미씨. 그녀는 현재 장난꾸러기 두 아들을

키우고 있으며, 간호사로 일하다가 결혼 후 전업 주부가 되었다.

우리가 가장 먼저 궁금했던 것은 그녀가 어린 시절에 아버지의 모습

이었다. 최상원씨는 “늘 자식들 에게 경제적으로 뒷받침을 해주지 못

했다. 미안하다.” 라는 이야기 자주 했다. 우리가 그녀에게 여쭈어 보았

을 때, 최정미씨는 오히려 그게 좋았다고 한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아

버지와 함께 수박도 심고, 수확하고 바로 따먹는 그런 추억들을 소중

히 여기고 있다고 했다. 또한 그 어려운 시절에 밥도 굶기지 않고 깨끗

한 옷을 입혀주신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하다고, 이렇게 잘 키워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은 우리의 눈시울을 붉게 했다. 가르침이 좀 부족했을지

언정, 스스로 공부를 쫓았고, 자취하면서 더 많이 성장했다고 한다.

당신을 존경하는 막내 딸

2016년 6월 말에 뉴질랜드로 떠나는 최상원 할아버지의 막내 딸 최정미

호탕함 뒤의 속마음호탕함 뒤의 속마음

89 90

막내 딸이 보내는 편지

호탕함 뒤의 속마음호탕함 뒤의 속마음

백미리에 돌아오기 까지 백미리에 돌아오기 까지

91 92

최상원 인터뷰

백미리에 돌아오기 까지 백미리에 돌아오기 까지

93 94

Q 할아버지에게 행복이란 무슨 의미일까요?

행복이라는게 자식들 건강하고, 잘되는게 행복이지. 애들보는 맛에 살

고 있어. 근데 우리 막내 가 뉴질랜드로 간다고 해서 우울하고 좀 슬프

지...먼저 자식이 이민간 친구들이 자식이 어차피 이민 갈거면 낳지도

말라고 그런 소릴했어 (웃음). 안갔으면 하는데 어차피 그곳에 투자를

했으니까. 사람이라는게 한번 꽂히면 누구말도 안듣는거지. 내가 어떻

게 말려. 못말리지. 가서도 잘 살았으면 좋겠어.

Q. 스스로 기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요?

그냥 사람들 만나서 가끔 술 한 잔 하고 실컷 떠드는거지. 요즘은 학생

들 오면 고맙고 그래. 평소에는 자식들이랑 가끔 밥 한끼하고 그럴 때

가 가장 기쁘지.

Q.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은 할아버지 삶의 유산이 있을까요?

정직함. 정직한거 하나야. 애비 노릇을 못했지만, 내가 여태까지 이장

도 보고, 어촌계장도 보고 할 때 누구한테 거짓말 안하고 정직하게 살

최상원 인터뷰 았거든. 그래서 내 생각에는 우리 아들이 내가 죽고 돈 한 푼 없이 백

미리 와도. ‘백미리 최상원 아들 입니다.’ 이러면 너희 아버지 모른다

이러지 않고, 돈을 꿔줄것 같아. 그 만큼 나는 거짓 없이 살던 건 자부

해. 그래서 자식한테 물려줄건 정직하게 살아라. 그것만 물려주고 싶

어. 거짓말하지 않는 것.

Q. 할아버지는 지금 1천만원이 생긴다면 어디에 쓰실 것 같아요?

생각은 안해봤는데...갑자기 생긴다면, 자식들한테 다 나눠줄꺼야. 나

는 돈이 필요없으니깐 자식들한테 공평하게 다 나워줄꺼야.

Q. 할아버지 만약 묘비명을 쓴다면 어떤 말을 쓰고 싶으세요?

“0점 짜리 아비였다.”

내가 죄책감이 자식들을 잘 키우지 못한 죄책감이 있어서 자식들한테

다 못해준 것에 대한 미안함이 커서 미안하지 자식들한테 죄책감이 많

고 큰소리도 못치겠고 그냥 자식들한테 미안하다는 마음을 갖고 있지.

95 96

닫는 글닫는 글

4개월 간의 길고도 짧은 만남을 마무리하며 책이 완성되었다. 나의

이야기도 쓰는 것이 서툰 내가 아무런 연고 없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

를 쓴다는 것은 정말 막연한 일이었다.

이제와서 말하자면 최상원 할아버지는 나에게 베일 속에 감춰진 존

재였다. 늘 웃으시며 말씀해주셨지만 결정적인 할아버지의 삶에 대한

솔직한 마음은 듣기 어려웠다. 인터뷰한 녹음기를 듣고 또 듣고를 반

복했지만 할아버지의 이야기보다 그의 가족 이야기, 그가 생각하는 자

식과 아내에 대한 이야기들뿐이었다. 처음엔 ‘무엇이 문제일까?’, ‘ 이

할아버지는 과연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 분인가?’, ‘우리가 마음에 안드

신건가?’ 같은 생각들을 했다. 결국 우리는 할아버지의 막내 따님을 뵙

고, 할아버지를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원체 표현이 서투신 분이었다.

더군다나 살아온 삶이 바빠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조차 모

르고 계신 분이었다.

별 수 없으니 무작정 삭힌다는 것. 그것이 가능하다는 할아버지의 말

에서 나는 할아버지의 웃음 뒤에 숨었던 씁쓸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

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원했던 자서전은 자신이 그동안 못했던 서툴

지만 고맙고 사랑한다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마 100페이지짜리 책 한 권이 할아버지의 삶을 다 대변해 줄 수 없

을 것이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다음 세대들은 격변하는 시대를 홀로

맞이한 그가 처음으로 인생을 정리한 말이 ‘가족’이었던 것을 기억했

으면 좋겠다.

매주 백미리에 내려갈 때마다 마중 와 주시고 맛있는 점심을 해주신

최상원 아저씨. 아저씨는 저희에게 늘 100점짜리 주인공이셨습니다.

그동안 너무 감사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르신 자서전 만들기 프로젝트와 책제작에 함께 해주신

강윤주, 송영택 교수님과 김건재, 강순철 선배님께 감사드립니다.

2016년 6월 17일

강민정 김우미 신봉천

98

지도교수강윤주 송영택

백미리 어르신김상용 김상주 김오례 김하겸 김호연 유태구 이창미 장정순 정규옥 정용모 정용전 정정용 주명자 최상원 한광은 허복희 홍창선

계원예대 광고브랜드디자인과 C반강민정 강혜선 김노영 김란의 김민지 김세영 김세현 김우미 김예원 김혜주 남궁다연 박인혜 박지현 손정호 신봉천 안혜민 안희수 양다경 유정민 유하늬 이다빈 이승아 임찬송 장미래 전지원 최지수 최혜연 한슬기

100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