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2월 대구광문사의 위치에 관한 연구 · 2015. 4. 2. · 19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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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of Daegu Gyeongbuk Studies Vol.13. No.1 2014. 4. pp 21~31 21 Journal of Daegu Gyeongbuk Studies 1907년 2월 대구광문사의 위치에 관한 연구 이 진 현* 1) A Study on the Original Site of DaeguGuangmunsa Around the Time Period of February, 1907 Lee, Jin Hyun 국문 요약 국채보상운동은 대구를 대표하는 민족운동으로 그 발원지인 대구광문사는 대구광역시 수창초등학교 후문 부근(대성사 경내)에 위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곳에는 광문사 터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역사적 인 장소가 되었지만, 구체적 근거는 미약한 상태이다. 본 논문은 대구광문사의 위치를 찾기 위해 기존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관련 자료를 다시 조사하고 분석하였다. 그 결과 대구광문사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수창사의 위치는 달서문 밖 전동이며, 1907년 3월 까지 취고수청을 빌려 사용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수창사와 대구광문사의 관계는 분명하게 확인하지 못했다. 이는 경상북도관찰부 내 취고수청이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한 장소라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기존의 설명과 같이 관찰사서리 박중양에 의해 대구광문사가 수창사로 쫓겨났더라도 지금의 위치는 잘못된 것 이다. 본 논문의 결과를 바탕으로 보다 폭넓은 연구가 진행되기를 바란다. 주제어 : 대구광문사, 국채보상운동, 수창사, 경상감영, 취고수청 Abstract aeguGuangmunsa on February 1907. This social movement initiated at Sucahang elementary school(nearby Daesungsa) where a memorial tablet named Gwangmunsa was erected to commemorate the movement. A survey revealed that, however, the tablet was mislocated for some reason. Gwangmunsa was leased on the site of Chugosucheng(吹鼓手廳) of Gyeongsangbukdo government, not on the location of Sucahang elementary school. KeyWords : DaeguGuangmunsa, The National Debt Repayment Movement, Sucahangsa, Gyeongsangbukdo government office, Chugosucheng. * 대구근대역사관 학예연구사(Curator, Daegu Modern History Museum) E-mail :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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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of Daegu Gyeongbuk StudiesVol.13. No.1 2014. 4. pp 21~31

21

Journal of Daegu Gyeongbuk Studies

1907년 2월 대구광문사의 위치에 관한 연구

이 진 현*1)

A Study on the Original Site of DaeguGuangmunsa Around the Time Period of

February, 1907

Lee, Jin Hyun

국문 요약

국채보상운동은 구를 표하는 민족운동으로 그 발원지인 구 문사는 구 역시 수창 등학교

후문 부근( 성사 경내)에 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곳에는 문사 터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역사

인 장소가 되었지만, 구체 근거는 미약한 상태이다.

본 논문은 구 문사의 치를 찾기 해 기존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련 자료를 다시 조사하고

분석하 다. 그 결과 구 문사가 있었다고 해지는 수창사의 치는 달서문 밖 동이며, 1907년 3월

까지 취고수청을 빌려 사용했다는 사실이 밝 졌다. 수창사와 구 문사의 계는 분명하게 확인하지

못했다.

이는 경상북도 찰부 내 취고수청이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한 장소라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기존의

설명과 같이 찰사서리 박 양에 의해 구 문사가 수창사로 쫓겨났더라도 지 의 치는 잘못된 것

이다. 본 논문의 결과를 바탕으로 보다 폭넓은 연구가 진행되기를 바란다.

주제어 : 구 문사, 국채보상운동, 수창사, 경상감 , 취고수청

Abstract

aeguGuangmunsa on February 1907. This social movement initiated at Sucahang elementary

school(nearby Daesungsa) where a memorial tablet named Gwangmunsa was erected to

commemorate the movement. A survey revealed that, however, the tablet was mislocated for

some reason. Gwangmunsa was leased on the site of Chugosucheng(吹鼓手廳) of

Gyeongsangbukdo government, not on the location of Sucahang elementary school.

KeyWords : DaeguGuangmunsa, The National Debt Repayment Movement, Sucahangsa,

Gyeongsangbukdo government office, Chugosucheng.

* 구근 역사 학 연구사(Curator, Daegu Modern History Museum) E-mail :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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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경북연구 제13권 제1호

Ⅰ. 서 론

1. 연구배경 및 목적

1907년 2월 구 문사(大邱廣文社) 사장 김 제와 부사장 서상돈은 단연을 통하여 국채 1,300만원을

갚아나가자는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하 다. 발기인 16명은 국채담보취지서(國債擔保趣旨書)를 작성 배포하

고, 북후정(北後亭)에서 국채보상모 을 한 군민 회를 열고, 국채지원 수합사무소를 설치하 다. 이

후 국 인 호응을 받아 한매일신보사에 국채보상지원 총합소가 설치되고 한규설, 양기탁 등이 임원

으로 활동하 으며, 4월말까지 보상 을 의연한 사람은 40,000여명이고 5월까지의 보상 은 186,000원을

상회하 다. 이러한 국채보상운동은 IMF 당시 모으기 운동으로 계승되었으며 구 역시에서는 표

인 민족운동으로 기념하고 있다.

구 역시에서는 2007년 국채보상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다양한 행사를 비하 는데 그 일환으로

구 문사 터라고 알려진 구수창 등학교 후문( 성사 경내)에 표지석을 세웠다. 이는 국채보상운동 발

원지라 하여 골목투어 코스에 포함되어 있으며 여행 명소로 알려져 많은 람객들이 찾는다. 최근 구 역시

구청은 국토해양부에서 주 하는 도시 활력증진지역 개발사업의 하나로 순종황제 어가길 조성을 추진하고

문사 터에 옛 이야기를 담은 게시과 설치한 지공원을 조성할 정이다.

구 문사 터로 알려진 성사는 2002년 허물어지고 2003년 11월 4층 건물로 새로 지어졌는데 그 사

실은 2010년 2월에서야 언론에 보도되었다. 당시에는 성사가 구 문사의 옛 건물로 잘못 알려져 국채보

상운동의 산실이 사라졌다는 소동이 일었다. 2011년 들어서는 국채보상운동과 련된 다른 유 지인 북

후정의 치가 잘못되었다고 지 되기도 하 다. 임경희는 2011년 7월 11일자 조선일보 기고문에서 북후

정은 표지석이 세워진 시민회 자리가 아니라 서문루에 있던 북루(把北樓)라고 하 는데 상당히 신빙

성이 있는 주장이다.1)

이러한 논란은 구 문사 터에 한 의문을 갖게 하 으며, 자료 정리 과정에서 기존의 주장이 재검토되어야

한다는 단을 하게 되었다. 이 논문은 그동안 검토한 자료를 소개하고 구 문사의 정확한 치를 밝히는

것에 그 목 이 있다.

2. 연구방법

본 연구는 문헌조사와 장조사를 병행하여 진행되었다. 먼 구 문사에 한 선행연구를 바탕으로

재의 자리에 표지석을 세우게 된 과정과 그 근거를 추 하 다. 한 국사편찬 원회의 디지털 아카이

자료들과 함께 규장각에 소장 인 공문서, 신문자료 등을 통해 새로운 자료를 발견하고 정리하 다.

특히 규장각이 소장 인 각사등록 근 편의 각 찰도(거래)안(各觀察道(去來)案)은 1577년(선조 10)부터

1910년까지 지방 각 아와 앙과의 왕복문서와 등록류(謄 類)를 해서(楷書)로 탈 하여 편찬한 조선

시 연구의 기 사료집으로 연구에 큰 도움이 되었다.

1) 다만 기고문에서 밝힌 북루는 읍북루(挹北樓)의 오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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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of Daegu Gyeongbuk Studies

이와 함께 장조사를 실시하 는데 일제강 기에 발간된 지도를 바탕으로 장을 확인하고 비교분석

하 다.

Ⅱ. 대구광문사 표지석 설치

1. 대구광문사

구 문사(달성 문사와 혼용)는 채, 장지연 등이 만든 서울의 문사와 명칭이 같아 구별해 지은

것이라고 한다(류 경, 2005). 1906년 1월 김 제는 구 문사를 설립하고 동서양서 을 번역하고, 경상

북도 각 가문의 충신과 효자, 열녀의 행 을 책으로 발간하며 매월 3회씩 잡지를 간행하기 해 인허를

받았다. 경상북도 찰사로 2월 부임한 신태휴는 신교육사업을 극 지원하 는데, 구 문사와 교류

하여 경상북도의 각 군에 학교 설립을 권유하 는가 하면 남문 밖 덕당을 수리하고 사범학교를 설치

하 다.

구 문사는 설립 당시 구부 서문 밖 달서교에 임시로 자리 잡았으나 5월 즈음에 경상북도 찰부

앞의 공공건물로 옮겨져 활자기계를 갖추고 남신보 등을 간행할 비에 들어갔다. 6월에는 한매일신

보의 지방 사무소 역할을 하기도 하 다.

<그림 1> 달서교

<그림 2> 달서교 위치

하지만 이사청의 설립 문제 등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던 신태휴 찰사는 이임되었으며 후임 찰사가

부임하지 않아 례에 따라 구부사인 박 양이 찰사서리로 활동하 다. 표 인 친일 인 박 양은

찰사서리로 집무하던 당시 이사청 설치, 성벽 철거 등을 진행하 는데 찰부 앞 공공건물에 사무실을

두었던 문사를 쫓아내어 다시 달서교 부근의 옛 건물로 돌아갔다고 한다.( 구상공회의소: 2006) 구

문사는 학교의 설립과 함께 신학문교과서 간행에도 힘썼는데 일본 동경에서 활자와 활 을 구매하 으

며 간행 서 은 <표 1>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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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경북연구 제13권 제1호

서명 저․역자 연도 활자 내용

유몽휘편 학부편집국 1906 목 본 아동용 교과서

만국공법요략로 스

임락지 역1906.11 연활자

김 제의 서문

(국제법의 필요성)

상업학 장지연 역 1907.10 연활자 상업교과서

등산학 이원조 편 1907.10 연활자 수학교과서

<표 1> 대구광문사 간행서적(류준경, 2005)

구 문사 내에는 문회(文 )가 있어 사회문제, 교과과정에 한 연구 술을 하 는데, 국채보상운동

은 이 문회의 이름을 동 문회로 개칭하는 문제를 논의하는 특별회에서 발의된 것이다.

2. 표지석 설치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에서는 2007년 국채보상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다양한 사업을 실시하 다.

그 하나가 역사 상징장소 표석 등 설치 환경개선 사업으로 구 문사, 진골목에 표지석을 세우

고 북후정 터를 소공원화 하는 것이었다. 이와 련해 사업 기에는 수창 등학교 후문 화단 내 표지석

을 설치하는 것으로 계획되었다. 그러나 당시 수창학교의 주 출입구가 지 과 달랐다는 성사 주지스님

의 주장에 따라 성사 경내에 설치하 는데 당 와 변경된 치는 학교 담을 경계로 2m 남짓 한 거리

이다.

당초위치 현재위치

<그림 3> 설치위치의 변경

<그림 4> 표지석

구수창 등학교 부근을 구 문사터라고 결정하게 된 근거에 해서는 상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수

창사의 치를 처음 언 한 사람은 박 규인데, 그는 ‘서문 밖 달서교 부근에 있던 수창사(壽昌社)(지 의

구수창 등학교 부근인 듯)에 국채지원 수합사무소를 설치했다’고 수창사의 재 치를 추정하 다

(박 규: 1997). 구체 근거를 제시하지 않아 확인할 수 없으나, 경상북도 찰사 신태휴가 후임 발령 없

이 떠나자 경북 찰사 서리직을 맡게 된 구군수 박 양이 구 문사가 사용하던 찰청 내 공공건물

을 회수하는 한편 일체의 지원을 단했다고도 고 있어 결과 으로 찰사서리 박 양에 의해 쫓겨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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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2월 구 문사의 치에 한 연구 25

Journal of Daegu Gyeongbuk Studies

<그림 5> 대성사 위치(1948)

곳을 수창사로 비정하여 표지석을 설치한 것으로 이해된다.

3. 수창학교

수창사의 치가 구수창 등학교 부근으로 비정된 이유에 해서는 근거를 찾을 수 없었다. 다만 수

창사와 구수창 등학교 사이에 ‘수창’이라는 같은 명칭을 사용한다는 것이 그 근거로 잘못 오해될 수 있

다.

구수창학교(지 의 구수창 등학교)는 새로운 학문을 교육하기 해 구향교의 동무, 서무를 합

쳐서 신식학교로 운 하 으며 1907년 9월 26일 개교식을 거행하 다.2) 그 무렵 구향교는 교동(당시

신정)에 치하고 있었으며 지 의 치에 교사를 새로 짓고 이 한 것은 1923년 5월 18일이다.3)

한 수창동은 구부 서상면 지역이었으나 1911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후동과 달성동 일부가 합쳐져

팔운정(八雲町)이 되었다. 1946년 일제 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수창동으로 변경되었는데, 이는 수창 등학교

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라고 한다( 구 역시, 2009). 수창 등학교 주변지역의 변천과정은 <표 2>를 통해

확인 가능한데, 1910년의 경우 가로만 구획되었으며, 수창학교가 이 해 오기 인 1917년 지도에는 명사

(光明寺)만 명시된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명칭의 유사성은 그 근거가 될 수 없다.

<표 2> 수창학교 부근 변천과정

1910년 1917년 1926년 1928년

4. 대성사

문사 터로 알려진 성사는 1917년 9월 15일 창립되

었다고 한다. 1988년도에 작성된 통사찰 등록보고서

에 따르면 웅 은 목조와가로 1941년 건조되었으며 요

사 등 다른 건물은 1980년에 건축되었다. 사찰에 소장 인

불교유물 가장 오래된 것은 후불탱화인데 1919년에 제

작된 것이며 그 외 지장탱화는 1937년, 칠성탱화 등은

2) 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7. 10. 09 大邱壽昌學校趣旨書, 壽昌校報告, 수창 등학교에서 발행한 『수창백년사』에는

1907년 7월 13일 개교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본 논문에서는 1907년 10월 9일자 한매일신문의 기사를 인용하여

1907년 9월 26일 개교식을 거행한 것으로 는다.

3) 매일신보(每日申報) 1923. 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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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경북연구 제13권 제1호

1941년에 조성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성사는 앞서 서술한 것과 같이 2002년 철거되었으며,

재 4층 빌딩이 자리 잡고 있다.

종류 명 칭 수량 유래

불상음불상 1 1950

지장보살상 1 1955

탱화

후불탱화 1 1919

지장탱화 1 1937

칠성탱화 1 1941

신 탱화 1 1941

산신탱화 1 1941

신불상 산 신 상 1 1978

탑석 탑 1

비 석 2

<표 3> 대성사 소장 불교유물 목록(1988)

Ⅲ. 백남준 보고서와 대구광문사의 위치

1. 백남준 보고서

백남 (白南埈)은 1863년생으로 1884년 동래항일어학교(東萊港日語學校)를 졸업하고 1895년 무 학교

주사에 임명되어 공직을 시작하 으며 번역 보를 거쳐 풍군수에 임명되었다. 출신학교와 번역 보를

지낸 경력으로 보아 일본어에 능통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1906년 10월 30일 경상북도 찰도참서

으로 임명된다. 당시 경상북도 찰사는 한진창이 임명되었으나 이사청의 개청과 선화당 반환문제로 부임

하지 않고 있었으며 구군수 박 양이 례에 따라 찰사서리로 있었다. 박 양은 이 시기에 일본인

거류민단과 제휴하여 성벽의 철거를 강행하고 찰부의 건물을 일본에 불하하는 등 친일 인 행보를 보

다. 하지만 11월 한진창이 잠시 부임하 다가 12월 풍질을 이유로 요양을 할 때 백남 은 박 양을

신해 찰사서리에 임명되었다. 규장각에는 그가 찰사서리 재임시 의정부참정 신 박제순에게 보낸 보

고서가 4건 남아있는데 그 목록은 <표 4>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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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of Daegu Gyeongbuk Studies

<그림 6> 전동의 위치(1907 이전)

일자 보고서명 수신자

1907.2.24

本道 警務署 警務官 朴準孝의 報告書와 禁烟償債 長 李玄澍·副 長 鄭

在學·總務 鄭圭鈺의 청원서에 의거‚ 그 취지서 규칙과 主務 임원 성

명기와 록을 첨부한다는 報告書

議政府參政大臣 朴齊純

1907.2.26경상북도 구 宣化 의 理事廳을 신축한 후 澄淸閣을 반환하는 문제에

해 보고議政府參政大臣 朴齊純

1907.3.8경상북도 찰사서리는 선화당에 옮겨 사무를 보고 있으며, 이사 도 징청

각에 있음을 보고 議政府參政大臣 朴齊純

1907.3.8 경상북도의 각 청 20여 곳의 사용 황에 한 보고 議政府參政大臣 朴齊純

<표 4> 백남 작성 보고서 목록

1907년 2월 24일자 보고서는 국채보상운동의 동향을 살펴보는데 매우 요한 자료로 국채담보취지서,

연상채회 임원명단, 민의소 규칙 등이 포함되어 있다. 1907년 2월 26일 보고서는 이사청의 개청에 따른

선화당, 징청각의 변화를 살펴보는데 도움이 되며, 1907년 3월 8일의 보고서는 당시 경상북도 찰부의

청 운 황을 세세히 살필 수 있는 매우 귀 한 자료이다. 특히 경상북도의 20여 개 청 황에 한보

고서에는 도면이 첨부되어 있어 경상감 의 복원정비 사업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2. 수창사

수창사에 한 기록은 많지 않으며 그 치는 서

문 밖 혹은 달서교 부근에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백

남 의 보고서에는 이와 련하여 조 더 상세한

정보를 주고 있는데, 그가 작성한 보고서에 포함된

민의소 규칙 제9조에는 ‘사무소는 서문 밖 동(前

洞) 수창사로 정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수창사의

치는 동이었음을 말해 다. 동은 달서문을 지

나 달서교에 이르는 길의 북쪽 부분을 말하는데 동

의 경계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구수창 등

학교가 치한 수창동은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후

동(後洞)과 달성동의 일부가 합쳐진 것으로 그 자리

를 수창사로 볼 수 없다.

3. 취고수청

백남 이 작성한 보고서 1907년 3월 8일 경상북도 찰부의 각 청 20여 곳의 사용 황에 한 보고

는 한제국기의 지방행정체계 변화와 일제 침략과정에 따른 지방 아 변모사항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데

그 내용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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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경북연구 제13권 제1호

관청명 사용현황 비고 희망

宣化本道事務室 定行 以澄淸閣 換推

事務室 溫堗이 無

澄淸閣 日本理事廳 借設

燕超警視警部 宿 占居

素履齋

內衙 日本守備隊 糧穀儲置庫 取用

百和 財政顧問補佐官 該支部 設

前 執事廳 測量講習所 設

前 官廳年前 公立 學校 設

普通學校 他處 建築 後 該校長敎員 宿 定

四一

日本巡査宿所 定前 計所

參書官 各主事宿所前 別庫

外通房

書記廳 巡檢敎習所 警視 占領 觀察使 宿

前 都訓 廳 警務官 宿 借居

前 軍牢廳

日本守備隊 占居使令廳

巡令手廳

前 吹鼓手廳 廣文社 借

前 官奴廳 年前 電報司 設

前 外營吏廳

郵遞司 設

該事務를 日人에게 인계 該兩司를 북문외에 건축한

후 右兩廳을 該司日本官人이 宿仍居

前 內營吏廳更張以後 本道詞訟課 設行

今回 法務補佐官 裁判所 設

<표 5> 1907년 3월 8일 경상북도관찰부 관청 사용현황

백남 의 이 보고서는 각 청의 사용 황에 해 비교 상세히 고 있다. 를 들어, 외 리청의

경우 우체사무를 일본인에게 인계하 더니 북문 밖에 우체사를 신축한 후 리청의 우측 두 개의 건물은

일본인 우체사 인의 숙사로 사용하고 있다는 이력을 었다. 한 차설(借設), 거(占居), 취용(取用),

령(占領), 차여(借 ), 잉거(仍居) 등 건물 계자의 사용 황에 해서도 분명히 구분해서 했다.

이 가운데 특기할 만한 것이 바로 취고수청(吹鼓手廳)이다. 취고수청은 조선 후기 취고수의 악사양성

소인데, 자인 감 오횡묵의 기록에 의하면 1888년 경상감 에는 20명의 취고수가 있었다고 한다(손태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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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2월 구 문사의 치에 한 연구 29

Journal of Daegu Gyeongbuk Studies

2002). 당시 취고수청은(보고서의 ‘前’이라는 표 에서 이미 용도가 변경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문사

에 빌려 것으로 기록하고 있어, 한매일신보 5월 24일자에 보도된 찰부 문 공해는 바로 취고수

청이었다.

1906년 1월 구 문사가 설립된 당시에는 달서교 인근에 권설(權設)되었다고 한다. 권설은 임시로

거처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제 로 된 건물과 인쇄기기 등을 갖춘 것은 5월 경상북도 찰부의 취고수

청으로 옮겨온 시기 던 것으로 생각된다. 6월에는 박 양이 찰사서리가 되었으나 7월에 구 문사는

만국공법요략을 간행하 고, 9월에는 한진창이 경상북도 찰사로 임명되었으며, 선화당 반환문제로 혼란

스러운 때 다. 그리고 11월 한진창이 부임하고, 12월에는 백남 이 찰사서리가 되었다. 이 시기에 취고

수청에 있던 구 문사가 쫓겨났으면 그 무렵 구 문사의 소식을 상세히 하던 한매일신보, 그리

고 백남 의 보고서에 기록되었어야 할 것이다.

구 문사는 일본인들과의 교우를 어느 정도 유지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1907년 2월 23일 한매

일신보의 기사에 따르면 구 문사 문회는 회명을 동 문회라 개칭하고 그 목 을 일본 동아동문회와

청국 학회와 연락하여 친목을 두텁게 하고 교육을 확장한다는데 두었다. 일본 동아동문회는 서구세력

의 침략에 앙하기 한 아시아 연 를 의명분으로 친일 를 육성하고 반일감정을 완화시키며 지사

정을 일본에 알리는 역할을 담당한 곳이었다.

그러므로 구 문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발의된 날은 학자에 따라 이견이 있지만 2월로 그 장소는

경상감 의 취고수청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취고수청의 서측 건물은 일본군 수비 가 거하고 있었으

며 북측 건물은 종계소로 종두를 시행하던 기 이었다.

<그림 7> 1907년 3월 8일 경상북도관찰부 공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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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이 진

대구경북연구 제13권 제1호

Ⅳ. 결 론

지 까지 구 문사의 치가 구수창 등학교 부근으로 알려지게 된 과정과 그 배경을 살펴보았으

며, 백남 의 보고서 등 련 자료를 다시 검토하 다. 그 결과 수창사는 지 의 수창 등학교 부근이

아닌 달서문 밖 동에 치하고 있었으며, 수창 등학교로 비정하게 된 근거는 찾을 수 없었다. 구 문

사가 언제 쫓겨났는지에 해서는 알 수 없지만 1907년 3월까지는 구 문사가 취고수청을 빌려 사용하

고 있었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1907년 2월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할 당시 구 문사의 자리

는 지 의 표지석이 세워진 지 이 아닌 경상북도 찰부내 취고수청이었다.

구 역시에서는 2014년 경상감 복원정비계획을 수립한다. 최근까지는 선화당, 징청각, 풍루 등

정청의 심건물을 상으로 복원이 논의되었으나 풍루 동측에 치하던 취고수청 복원도 함께 비

있게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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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2월 구 문사의 치에 한 연구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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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수일:2014. 3. 2, 심사완료일:2014. 4. 8, 최종원고:2014. 4.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