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 10 11 - 대학신문pdf.snunews.com/1928/192811.pdf · 2016. 9. 3. · 2016년 9월 5일...

1
11 대학신문 사진기획 2016년 9월 5일 월요일 “우리집이, 이웃집이, 온 동네의 집들이 보이지 않았다. 방 죽도 없어지고, 벽돌 공장의 굴뚝도 없어지고, 언덕길도 없어졌다. 난장이와 난장이의 부인, 난장이의 두 아들, 그 리고 난장이의 딸이 살아간 흔적은 거기에 없었다.” -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中 지나온 시간의 기억들이 곳곳에 묻어 있는 집, 대 문을 열고 몇 발짝만 걸으면 만날 수 있던 이웃사촌,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게 해주었던 농토. 하나의 마 을은 단순한 거주지가 아니라 주민들의 정서, 생계 그리고 삶 전체를 단단하게 받쳐주는 지반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마을은 이제 물 아래에 잠 겨있다. 기본 계획이 고시된 후 겨우 6개월만인 2009년 12 월, 경상북도 영주에서는 4대강 사업의 마지막 공사 인 영주댐이 착공됐다. 500여 가구가 수몰 대상에 포함됐고, 이 중 400년 전통의 인동 장씨 집성촌인 금광마을이 있었다. 한때 반대 대책위가 꾸려졌으나, 대부분이 고령층인 주민들은 ‘국가가 하는 일이니’ 하며 어쩔 수 없이 자포자기하기도 했다. 고시 당시의 금광마을에는 40여 가구가 모여 살고 있었지만, 지금은 채 절반도 되지 않는 17가구만이 금광이주단지로 옮겨와 살고 있다. 네비게이션이 물 속을 가리키는 바람에 한참을 헤매다 찾은 금광이주 단지에서 장중덕 이장은 말문을 뗐다. “다들 이웃사 촌처럼 친하게 지냈고, 아무래도 집성촌이다보니 보 통 마을보다는 더 특별한 사이였죠.” 이주단지가 아 닌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긴 주민들에 대해 묻자, 그 는 “거의 만날 수가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댐이 삼킨 것은 이웃들 간의 정뿐만이 아니었다. 장중덕 이장은 현실적으로 가장 큰 문제는 앞으로의 생계유지라고 말했다. “받은 보상금이 떨어지면 자 식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농사를 짓 고 싶어도 땅이 없고, 다들 노인들이라 다른 기술도 없고, 그렇다고 고향을 떠날 수도 없으니….” 독립문역 3번 출구에 세워진 펜스는 몇 개월째 행인들의 시야 를 답답하게 가로막고 있다. 제자리에서 뛰어올라 봐도 도저히 안 을 들여다볼 수 없을 만큼 높다란 펜스 안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 고 있을까. 지난 5월 17일, 용역업체는 크레인을 끌고 옥바라지골목에 진 입했다. 사방에 하얀 소화기 분말이 흩뿌려지고 건물 내부의 거주 민들은 끌려나왔다. ‘행정 대집행 인권매뉴얼’과 ‘재개발·재건축· 뉴타운 정비사업 강제철거 예방대책'의 내용에 어긋나는 폭력적 인 강제철거가 일어난 것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급하게 달려왔 지만 이미 상당수 건물은 철거된 뒤였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 공사를 중단하겠다”는 서울시장의 말과 함께 철거는 중지됐다. 옥바라지골목을 지키고자 하는 시민운동 가와 주민들은 번갈아 길 위의 천막에서 잠을 자며 해결을 촉구 했으나, 대책위와 재개발조합은 번번이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결 국 몇 개월간의 공사 중지로 인해 손해를 본 조합 측이 지난 8월 22일 강제철거를 재개해 갈등이 심화됐다. 26일 극적으로 합의에 성공했으나, 이는 모두가 만족하는 합의가 아닌, 오랜 투쟁으로 지쳐버린 주민들 그리고 이미 구본장 여관을 포함한 대부분의 건 물이 철거된 데에 기인한 합의로 알려졌다. 그 물 아래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우리 집 대문이 무너지던 날 1인당 국민소득이 지난 1970년 254달러에서 2015년 2만 7천 달러로 성장할 만큼의 긴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아직도 부당한 노동 조건에 항의하다 직장을 잃거나 혹은 항의 자체를 탄압당한 사람들, 그리고 개발로 인해 몇 십 년간 살아 왔던 곳을 어쩔 수 없이 떠나게 된 사람들이 우리 곁에 있다는 점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40여 년 전 소설들은 그저 ‘있을 법한’ 이야기를 써내려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당시 일어난 일의 기록이며, 지금도 존재하고, 앞으로도 계속해 서 이어질 현실의 이야기였다. “없어지다니 뭐가요?” “방울재가 없어졌지라우. 몽땅 물에 쟁겨 뿌렸어유. 남은 것이라고는 저 뒷골 감나무뿐인갑네유.” “그래도 고향이 없어져 뿔고 정든 사람덜이 뿔뿔이 풍지박산되야 뿐졌는디 으찌.” “딱하게 됐습니다.” “그라니께 우리는 뿌리 없는 나무여라우. 우리헌티 땅이 있소, 기술이 있소?” -문순태, 『징소리』 中 사진 제공: 사진가 박용훈

Upload: others

Post on 03-Feb-2021

1 views

Category:

Documents


0 download

TRANSCRIPT

  • 11대학신문 사진기획2016년 9월 5일 월요일

    “우리집이, 이웃집이, 온 동네의 집들이 보이지 않았다. 방죽도 없어지고, 벽돌 공장의 굴뚝도 없어지고, 언덕길도 없어졌다. 난장이와 난장이의 부인, 난장이의 두 아들, 그리고 난장이의 딸이 살아간 흔적은 거기에 없었다.”

    -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中

    지나온 시간의 기억들이 곳곳에 묻어 있는 집, 대

    문을 열고 몇 발짝만 걸으면 만날 수 있던 이웃사촌,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게 해주었던 농토. 하나의 마

    을은 단순한 거주지가 아니라 주민들의 정서, 생계

    그리고 삶 전체를 단단하게 받쳐주는 지반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마을은 이제 물 아래에 잠

    겨있다.

    기본 계획이 고시된 후 겨우 6개월만인 2009년 12

    월, 경상북도 영주에서는 4대강 사업의 마지막 공사

    인 영주댐이 착공됐다. 500여 가구가 수몰 대상에

    포함됐고, 이 중 400년 전통의 인동 장씨 집성촌인

    금광마을이 있었다. 한때 반대 대책위가 꾸려졌으나,

    대부분이 고령층인 주민들은 ‘국가가 하는 일이니’

    하며 어쩔 수 없이 자포자기하기도 했다.

    고시 당시의 금광마을에는 40여 가구가 모여 살고

    있었지만, 지금은 채 절반도 되지 않는 17가구만이

    금광이주단지로 옮겨와 살고 있다. 네비게이션이 물

    속을 가리키는 바람에 한참을 헤매다 찾은 금광이주

    단지에서 장중덕 이장은 말문을 뗐다. “다들 이웃사

    촌처럼 친하게 지냈고, 아무래도 집성촌이다보니 보

    통 마을보다는 더 특별한 사이였죠.” 이주단지가 아

    닌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긴 주민들에 대해 묻자, 그

    는 “거의 만날 수가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댐이 삼킨 것은 이웃들 간의 정뿐만이 아니었다.

    장중덕 이장은 현실적으로 가장 큰 문제는 앞으로의

    생계유지라고 말했다. “받은 보상금이 떨어지면 자

    식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농사를 짓

    고 싶어도 땅이 없고, 다들 노인들이라 다른 기술도

    없고, 그렇다고 고향을 떠날 수도 없으니….”

    독립문역 3번 출구에 세워진 펜스는 몇 개월째 행인들의 시야

    를 답답하게 가로막고 있다. 제자리에서 뛰어올라 봐도 도저히 안

    을 들여다볼 수 없을 만큼 높다란 펜스 안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

    고 있을까.

    지난 5월 17일, 용역업체는 크레인을 끌고 옥바라지골목에 진

    입했다. 사방에 하얀 소화기 분말이 흩뿌려지고 건물 내부의 거주

    민들은 끌려나왔다. ‘행정 대집행 인권매뉴얼’과 ‘재개발·재건축·

    뉴타운 정비사업 강제철거 예방대책'의 내용에 어긋나는 폭력적

    인 강제철거가 일어난 것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급하게 달려왔

    지만 이미 상당수 건물은 철거된 뒤였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 공사를 중단하겠다”는 서울시장의 말과

    함께 철거는 중지됐다. 옥바라지골목을 지키고자 하는 시민운동

    가와 주민들은 번갈아 길 위의 천막에서 잠을 자며 해결을 촉구

    했으나, 대책위와 재개발조합은 번번이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결

    국 몇 개월간의 공사 중지로 인해 손해를 본 조합 측이 지난 8월

    22일 강제철거를 재개해 갈등이 심화됐다. 26일 극적으로 합의에

    성공했으나, 이는 모두가 만족하는 합의가 아닌, 오랜 투쟁으로

    지쳐버린 주민들 그리고 이미 구본장 여관을 포함한 대부분의 건

    물이 철거된 데에 기인한 합의로 알려졌다.

    그 물 아래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우리 집 대문이 무너지던 날

    1인당 국민소득이 지난 1970년 254달러에서 2015년 2만 7천 달러로 성장할 만큼의 긴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아직도 부당한 노동 조건에 항의하다 직장을 잃거나 혹은 항의 자체를 탄압당한 사람들, 그리고 개발로 인해 몇 십 년간 살아

    왔던 곳을 어쩔 수 없이 떠나게 된 사람들이 우리 곁에 있다는 점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40여 년 전 소설들은 그저 ‘있을 법한’ 이야기를 써내려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당시 일어난 일의 기록이며, 지금도 존재하고, 앞으로도 계속해

    서 이어질 현실의 이야기였다.

    “없어지다니 뭐가요?”“방울재가 없어졌지라우. 몽땅 물에 쟁겨 뿌렸어유.남은 것이라고는 저 뒷골 감나무뿐인갑네유.”

    “그래도 고향이 없어져 뿔고 정든 사람덜이 뿔뿔이 풍지박산되야 뿐졌는디 으찌.”“딱하게 됐습니다.”“그라니께 우리는 뿌리 없는 나무여라우. 우리헌티 땅이 있소, 기술이 있소?”

    -문순태, 『징소리』 中

    사진 제공: 사진가 박용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