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의료보험 정책의 변화와 복지담론 · 의사학 제20권 제2호(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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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권 제2호(통권 제39호) 425-462, 2011년 12월 │425 의사학 제20권 제2호(통권 제39호) 2011년 12월 Korean J Med Hist 20 ː425-462 Dec. 2011 ⓒ대한의사학회 pISSN 1225-505X, eISSN 2093-5609 1970년대 의료보험 정책의 변화와 복지담론 황병주* 1. 머리말 2. 제1차 의료보험법 개정과 사회개발 담론 3. 제2차 의료보험법 개정과 의료보험 제도 시행 4. 맺음말 1. 머리말 이 글은 1970년대 의료보험 정책의 변화를 살펴보고 복지담론과의 관련을 이해하고자 한다. 의료보험 시행은 해방 이후 보건·의료사에서 빼놓을 수 없 는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 더 나아가 의료보험은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거의 모든 사람이 연관되는 사회복지의 기본 문제이기도 하다. 최 근 한국 사회의 중요한 의제로 부상한 복지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 한 것은 1970년대 의료보험 시행을 전후해서였다. 요컨대 의료보험은 의료와 복지 두 영역에 걸쳐 있으면서 전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 다. 당시 표현을 빌리자면 의료의 사회화가 본격적으로 문제가 된 것이었다. 의료보험법이 최초로 제정된 것은 1963년 12월이었다. 그러나 이 법은 강 제가입 대신 임의가입제를 채택했기에 의료보험의 본격 시행은 불가능했고 오직 몇 군데 시범사업만 진행될 수 있었다. 이에 1970년 의료보험법 1차 개 * 국사편찬위원회 주소 : 경기도 과천시 교육원로 86 국사편찬위원회 (427-010) 전화 : 02-500-8365 / 이메일: [email protected] 1) 혹자는 의료보험을 우리 역사 5천년사에 자랑스러운 사회보장의 첫 페이지를 연 효시가 될 이라고 했다(의료보험관리공단, 발간에 즈음하여, 의료보험연보, 1980, 11쪽). 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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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0권 제2호(통권 제39호) 425-462, 2011년 12월 │425

    의사학�제20권�제2호(통권�제39호)�2011년�12월� Korean�J�Med�Hist�20�ː425-462�Dec.�2011ⓒ대한의사학회� pISSN�1225-505X,�eISSN�2093-5609

    1970년대 의료보험 정책의 변화와 복지담론

    황병주*

    1. 머리말

    2. 제1차 의료보험법 개정과 사회개발 담론

    3. 제2차 의료보험법 개정과 의료보험 제도 시행

    4. 맺음말

    1. 머리말

    이 글은 1970년대 의료보험 정책의 변화를 살펴보고 복지담론과의 관련을

    이해하고자 한다. 의료보험 시행은 해방 이후 보건·의료사에서 빼놓을 수 없

    는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1) 더 나아가 의료보험은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거의 모든 사람이 연관되는 사회복지의 기본 문제이기도 하다. 최

    근 한국 사회의 중요한 의제로 부상한 복지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

    한 것은 1970년대 의료보험 시행을 전후해서였다. 요컨대 의료보험은 의료와

    복지 두 영역에 걸쳐 있으면서 전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

    다. 당시 표현을 빌리자면 ‘의료의 사회화’가 본격적으로 문제가 된 것이었다.

    의료보험법이 최초로 제정된 것은 1963년 12월이었다. 그러나 이 법은 강

    제가입 대신 임의가입제를 채택했기에 의료보험의 본격 시행은 불가능했고

    오직 몇 군데 시범사업만 진행될 수 있었다. 이에 1970년 의료보험법 1차 개

    * 국사편찬위원회

    주소 : 경기도 과천시 교육원로 86 국사편찬위원회 (427-010)

    전화 : 02-500-8365 / 이메일: [email protected]

    1) 혹자는 의료보험을 “우리 역사 5천년사에 자랑스러운 사회보장의 첫 페이지를 연 효시가 될

    것”이라고 했다(의료보험관리공단, 「발간에 즈음하여」, 『의료보험연보』, 198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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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을 통해 강제가입 조항으로 변경되었지만, 시행령이 만들어지지 않아 역시

    시행되지는 못했다. 결국 1976년 의료보험법 2차 개정을 통해 1977년 의료보

    험이 본격 시행되기까지는 14년이 걸리게 되었다.

    최초 법 제정과 본격 시행 간의 14년이란 낙차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주지

    하듯이 이 기간은 3차례의 경제개발계획을 통한 급속한 산업화·도시화와 겹

    쳐진다. 애초 박정희 정권은 국가의 인적·물적 자원을 경제개발에 집중 투자

    했으며 복지 문제는 주요 관심사가 아니었다. 정치적으로도 삼선개헌에 이어

    유신체제가 수립됨으로써 절차적 민주주의는 고도의 권위주의 질서로 대체

    되었다. 흔히 ‘개발독재’로 지칭되던 시기 마지막 무렵에 의료보험이 시행된

    셈이었는데, 유신체제 몰락과는 불과 2년 정도의 시차밖에 없었다.

    따라서 유신체제 말기에 갑자기 의료보험이라는 중요한 사회보장 정책을

    추진하게 된 이유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인다. 이와 관련된 기존 연

    구들은 주로 사회과학계를 중심으로 진행되어 왔는데, 국가 정책결정에 초점

    을 맞추어 분석하거나(손준규, 1981; 박정호, 1996) 기업과 자본의 노동력 확

    보(김영범, 2002) 또는 기업 복지의 맥락(우명숙, 2005)에서 분석하는 것이었

    다. 이외 국가와 이익집단 간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연구(김순양, 1994)와 계

    급관계를 중심으로 정치경제학적 분석을 통해 자본의 예방혁명 조치로 보는

    연구(원석조, 1991), 냉전체제 효과를 통해 의료보험을 이해하는 연구도 있

    다(김연명, 1993).

    기존 연구를 통해 의료보험 시행의 배경과 정책변화의 의미에 대해서는 많

    은 진척이 있었다고 보인다. 그러나 기존연구에서 정책변화를 담론적 변화와

    연관시켜 분석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국가나 사회세력의 모든 정책과 행위는

    특정의 담론체계를 통해 의미화되고 실천되기에 의료보험에 대한 온전한 이

    해를 위해서는 담론적 분석이 필수적이라고 보인다. 요컨대 의료보험을 포함

    한 복지는 제도이자 담론이기도 하다. 이는 곧 정책변화를 국가의 행위로 국

    한하지 않고 사회적 반응과 연동시켜 이해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박정희 체제는 집권 초기부터 복지국가가 최종 목표임을 천명하기는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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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 그에 걸맞는 별다른 정책을 실행하지는 않았다. 공무원 연금, 군인 연금,

    산재보험 등이 실행되기는 했지만 특수 직종과 대기업 중심의 제한된 조치였

    을 따름이었다. 박정희 체제는 복지보다 경제성장과 국가안보를 더욱 절실

    한 과제로 추진했다.

    그러나 1960년대 말부터 제2경제 운동, 국민교육헌장 제정에서 보이듯이

    급속한 산업화, 도시화가 초래한 각종 문제들을 봉합하기 위해 ‘정신혁명’을

    강조한 새로운 정책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사회개발도 그 일종이었다. 경

    제개발과 함께 사회개발을 강조하게 된 상황을 배경으로 의료보험 개정 작업

    이 진행된다고 할 수 있었다. 경제와 사회 두 가지의 개발담론이 지향하는 최

    종 목표점은 복지국가로 수렴되는 것이었는데, 의료보험은 그 구체적 실례로

    배치되었다. 요컨대 의료보험은 복지담론과 분리되기 힘든 것이었다.

    한편 의료보험은 급속한 자본주의적 산업화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회 전 부문이 자본주의적 질서에 입각해 재편되는 와중에 의

    료계 또한 예외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기존 연구에서는 의료계를 주로 이

    익집단으로 파악하고 국가와의 거래나 협상 파트너 정도로 이해했을 뿐 의

    료의 산업화와 사회화의 의미를 제대로 추적하지 않았다고 판단된다. 요컨

    대 의료보험이 단순 시혜가 아니라 자본주의 재생산 과정의 일부로 배치되

    는 과정과 함께 당시 의료계는 이를 어떠한 담론체계로 표현했는가를 이해

    할 필요가 있다.

    이상의 문제의식을 담아내기 위해 본 논문에서는 신문자료 및 당시의 논

    설들을 적극 활용할 것이다. 특히 신문자료는 당시 정책변화 및 사회적 반응

    은 물론이고 담론 변화 양상을 이해하는 데에도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

    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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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제1차 의료보험법 개정과 사회개발 담론

    1)�의료보험법�개정�전후의�의료�현실과�사회개발�담론

    1963년 12월 제정된 의료보험법의 가장 큰 문제는 임의적용 규정이었다.

    즉 의료보험 시행이 강제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기에 실질적으로 시행되기

    힘든 상황이었다.2) 법제정에 따라 시행된 것은 의료보험 시범사업이었는데

    1960년대에는 호남비료와 경북 문경의 봉명흑연광업, 대한석유공사 등 단 세

    개의 의료보험 조합이 운용되었을 따름이었다.3) 실질적으로 의료보험이 시

    행되지 않는 조건 하에서 다수 대중의 의료기관 이용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상황이 이러했기에 일반 대중의 질병치료는 제대로 이루어지기 힘들었다.

    1968년 기준으로 질병 치료 방법은 64.4%가 약국, 25.4%가 병원, 7.5%가 한

    의원 이용으로 조사되었다. 대부분의 질병 치료가 간단한 약 처방으로 끝나는

    양상이었고 “돈 없어서 죽어가는 사람을 위해 의료보험이 절실”하다는 주장

    이 나타났다.4) 1970년대 들어서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1972년 8월 서울

    대 보건대학원 허정 교수팀의 의료기관 이용실태 조사에 의하면, 대도시의 경

    우 약국 64.1%, 통원치료 21.8%, 한의원 2.9%였고 중소도시는 약국이 63.8%,

    통원 16.8%, 농어촌은 약국 52.7%, 민속요법과 미신 행위 등이 10.6%였다.5)

    이는 의료 서비스 공급이 잠재수요에 부응하지 못하였다는 점을 보여준다.

    의료혜택을 받는 비율은 서울 27%, 지방도시 17.9%, 농촌 2~3%에 불과하고

    그것도 90%가 자비 부담이고 보험 2.7%, 구호가 6.3%로 의료보장 제도는 있

    2) 1962년 7월 박정희의 「사회보장제도 확립」 지시 각서가 내각에 전달된 이후 보사부는 사회

    보장제도심의위원회(사보심)를 중심으로 의료보험법 제정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국가재

    건최고회의 상임위원회의 분위기는 “시기상조”라는 것이었고 우여곡절 끝에 법이 제정되기

    는 했지만 사회보험의 지배원리인 강제적용을 갖추지 못한 채 임의적용제 채택으로 귀결되

    고 말았다{의료보험연합회, 『의료보험의 발자취』 (1997), 30-8쪽}.

    3) 1975년에는 협성의료보험조합이 설립되어 임의 보험 시절 총 4개 조합이 전부였다(의료보험

    연합회, 『의료보험의 발자취』 (1997), 46쪽).

    4) 『경향신문』, 1969년 2월 13일.

    5) 『경향신문』, 1973년 2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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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으나 마나한 상태였다.6) 1974년도에도 전국 유병자 중 약 40%가 의료서비스

    를 이용하지 않고 있었으며 농촌의 경우 43.3%가 의료비 지불능력이 없는 실

    정이었다. 병상 이용율도 1974년 현재 전국 평균 57.8%에 불과했다. 요컨대

    대중의 의료 현실은 거의 개선되지 않았기에 의료보험 실시 요구와 법 개정

    움직임 또한 지속적으로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의료 상황이 열악했던 이유는 첫째, 정부의 보건 관련 예산 규모와 관

    련이 있었다. 1965년도 보건 부분 예산 비율은 0.1%로 베트남의 0.6%, 인도

    의 0.7%보다 낮은 수준이었는데, “후진국가로서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적

    은 보건비 지출 양상”을 보였다는 지적이 나올 정도였다.7) 1970년대 들어서

    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1970년 정부 예산중 보사부 예산 비율은 노동청

    과 원호처를 합쳐 6% 정도에 불과했다. 이는 유럽과 일본의 사회보장 예산이

    전체 예산의 30%에 달하는 것과 대조되는 것이었다.8)

    둘째, 의료 공급 능력의 부족과 불균형도 심각했다.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의료보험이 있는 국가에서는 적어도 만 명당 의사 수가 10명 이상이 되어

    야 하지만 한국의 경우 5명에 불과했고, 병상 수는 10만 명당 500병상이지

    만 한국은 50병상에 불과했다.9) 50%대에 머물고 있었던 병상이용률 또한 선

    진국의 90% 이상과 대조되었다. 아울러 의료 전달체계 상의 불균형도 심각

    했는데, 1974년 기준으로 병상의 도시 집중률은 무려 87%에 달했다(정영순,

    1976: 69).

    불균형의 중요한 원인은 자유 개업의에 입각한 의료 정책때문이었다. 의료

    보험 실시 이전까지 의료에 관한 정부정책은 거의 완전한 자유 방임으로 시

    장 논리에 맡기는 것이었다. 그 결과 의료 영역의 공공 부문과 사적 부문 간

    의 격차가 매우 크게 벌어졌다. 1974년 기준으로 공공 부문과 민간 부문 사이

    의 비율은 의사는 18.4% 대 81.6%였고 병상 비율은 21.1%대 78.9%에 달했

    6) 『경향신문』, 1970년 1월 26일.

    7) 채규철, 「한국 민간의료보험에 관한 고찰」, 『공중보건잡지』 11-2, 234쪽.

    8) 『경향신문』, 1970년 1월 26일.

    9) 조규상, 「한국의 의료보험」, 『대한의학협회지』 16-2, 1973, 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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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정영순, 1976: 69).

    이는 모든 국민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의료 사회화의 길을 걷고 있는 현대

    의료의 경향과도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는 판단을 가능케 했다.10) 의료보험의

    필요성은 종래 자유진료의 폐단을 극복하고 특수집단을 위한 특수보험을 넘

    어 의료 서비스의 보편화를 위한 것에서 구해졌다.

    셋째, 의료비의 가파른 상승이 문제였다. 1970년 가계지출 중 의료비 비

    율이 2.3%였던 것이 1974년에는 3.6%로 상승했다. 그 결과 1인당 의료비는

    2,000원에서 5,700원으로 4년 만에 3배 가까이 상승했다(정영순, 1976: 68-

    70). 1975년 서울시 의사회 조사에 의하면 응답자 90% 이상이 의료비가 비

    싼 편이라고 답변했다. 1965년부터 1975년 사이 10년 간 1인당 의료비는 생

    계비 증가율의 3배가 넘었다.11) 1971~1975년 사이 5년간 의료수가는 최고 15

    배나 인상되어 병원 못가는 사람 비율이 도시는 15%, 농촌은 50%에 달하는

    상황이었다.12)

    물가 상승률을 넘어서는 의료 수가 상승은 결국 국민 의료비 지출을 폭등

    시켰고 의료보험의 필요성을 가중시켰다. 개인이 의료 수가 상승을 감당할

    수 없게 된다면 이것은 의료 공급자 입장에서도 커다란 위기였다. 결국 개인

    의 한계를 넘어서는 의료 비용의 사회적 또는 국가적 지불 방안이 절실해진

    것이었다. 이렇게 의료보험을 통해 의료비 마련이 쉬워지면 유효수요와 의료

    비가 증가할 것이고 수요 증가는 공급의 증가를 유발함으로써 의료부문의 성

    장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는 분석도 가능했다.13) 즉 보험을 통한 의료의 산업

    화가 가능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14)

    넷째, 의료 공급 능력의 부족과 불균형이 심각한 반면에 의료 잠재 수요는

    10) 조규상, 「한국의 의료보험」, 『대한의학협회지』 16-2, 1973, 89쪽.

    11) 『경향신문』, 1975년 12월 16일.

    12) 『동아일보』, 1976년 1월 22일.

    13) 한달선, 「의료체계의 과제와 의료보험의 대응」, 『의료보험』 1, 1978, 26쪽.

    14) 실제로 의료보험 실시 이후 적정 수준을 유지하던 종합병원 병상이용율이 급증하였다는 점

    은 이를 반증한다{허정, 「의료보험의 현주소와 미래상」, 『의료보험』 1, 197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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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에 따른 소득증

    대, 의료 서비스 기대치 상승 현상이 나타났다.15)

    상황이 이러하였기에 의료보험 개정의 필요성이 적극적으로 제기되었는

    데, 기존 의료보험은 완전히 실패했다는 것이 중론이었다.16) 의료보험 시행 3

    년이 지난 1967년 현재 대상 기업체의 100분의 1만 가입한 상태였고 의정 당

    국자는 의료보험법의 맹점, 정부의 보험운영 미숙, 사업주들의 비협조 등으

    로 완전 실패임을 자인했다.17)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박정희 정권은 1968년 5월 의료보험법 개정안을 국회

    에 제출하게 되었는데, 그 핵심은 강제 가입제를 채택해 적용 대상을 전국민

    으로 확대하되 500인 이상 기업체에 먼저 적용한다는 것이었다.18) 의료보험

    시행을 위해 보사부는 8개년 연차 계획을 수립해 1971년까지 10%, 1975년까

    지 20%의 국민이 혜택을 보도록 추진하고자 하였다.19) 이어서 보사부는 1969

    년 1월 「국가보건의료 장기목표(69~86)」를 작성했다. 이 계획은 1986년까지

    전근로자의 100%, 전국민의 50%를 의료보험에 포괄하는 것을 목표로 했는

    데, 1만 5천 개 병상을 6만 개로 확대해 병원 이용율을 27.7%에서 63%로 올릴

    예정이었고 1966년 현재 252억 원인 총의료비를 1986년에는 1,720억 원으로

    증가시키는 한편 총의료비의 56.5%를 의료보험으로 충당할 예정이었다.20)

    이러한 장기 계획 하에 1970년 8월 5일 의료보험법 개정안이 공포되었다.

    그러나 산재보험, 공무원 연금 등과의 중복문제, 의료보험 조직 일원화 문제

    15) 한편 산업화와 도시화로 초래된 핵가족화 경향은 전통적 가족이 가지고 있었던 다양한 기능

    을 대체하게 되었다. 즉 직업, 의료, 문화, 교육, 종교 등등의 요구들은 기존과 달리 가족 밖

    에서 구해야 될 상황이었다{김덕준, 「우리나라 사회보장 제도의 전망」, 『국회보』 133, 1973}.

    16) 의료보험의 필요성은 반공주의 맥락에서도 강조되었다. 공산주의자와 총칼을 맞대고 있는

    우리의 실정으로는 생산과 분배, 즉 경제개발과 사회복지 문제를 동시에 해결함으로써 사

    회 각 계층이 모두 만족을 느끼는 상태로 이끄는 것이 승공의 지름길이라는 것이었다(『경

    향신문』, 1970년 1월 26일).

    17) 『동아일보』, 1967년 5월 18일. 당시 단 2개의 의료보험 조합만 운영중이었는데 500만 원의

    국고 보조금조차 소화 불가일 정도로 미미한 수준이었다.

    18) 『동아일보』, 1968년 5월 11일.

    19) 『경향신문』, 1968년 5월 29일.

    20) 『동아일보』, 1969년 1월 6일; 『매일경제』, 1969년 8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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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 여러 가지 문제점 또한 여전히 남아있었고 무엇보다 국가 재정 문제가 가

    장 중요했다. 일본의 경우 3년 간 1천억 원의 적자를 국가보조로 메꾸는 상황

    에 비추어 당시 정부 재정이 그것을 허용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보사

    부 관료조차 회의적이었다.21)

    1960년대 말부터 시작된 의료보험 개정 움직임은 박정희 정권의 ‘사회개

    발’ 전략과 밀접히 관련되는 것이었다. 보사부는 1967년부터 제3차 경제개발

    계획이 실시되는 1972년부터 사회개발을 본격화한다는 일정 아래 ‘사회개발

    10개년계획’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 목적은 ① 서민층의 생활 안정, ② 봉

    급 생활자와 근로자를 영구적으로 보장하며, ③ 질병과 빈곤의 악순환으로부

    터의 노동력 보호, ④ 사회보험 비축금에 의한 내자조달 등이었다. 이를 위

    해 보사부는 사회보장심의위원회(이하 ‘사보심’)를 통해 기초조사를 진행시

    켰는데, 세부적 계획은 ① 사회보장(보험), ② 공적 부조(구호), ③ 사회복지,

    ④ 공중보건 및 의료, ⑤ 노동력 보전, ⑥ 지역사회 개발 등으로 구성된 것이

    었다. 계획에 따르면 사업 시작년도인 1972년도에는 경제개발계획 재정투자

    규모의 15%, GNP의 7.8%에 해당하는 980여 억 원을 투입한다는 야심찬 기

    획이었다.22)

    이에 따라 1968년 사보심에 의해 제출된 사회개발 전략은 “경제개발의 궁

    극의 목표는 국민복지의 향상에 따른 복지국가의 실현”임을 분명히 하는 것

    이었다.23) 즉 “공업화 과정에서 자본의 편재 축적은 도농의 격차와 함께 빈부

    의 격차는 더욱 심대”될 가능성이 있다고 전제하고 “중상계층의 생활양상과

    최하계층의 생활의 불균형은 우리 사회의 불평, 불신 풍조를 초래하여 많은

    사회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다.”고 진단하였다.24)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는 방

    법으로 사회개발의 필요성이 강조되었는데, “경제개발에 장해가 되는 제 요

    21) 『매일경제』, 1970년 8월 29일. 이 기사는 보사부 사보심 연구실장 최천송과의 인터뷰인데,

    그는 정부 재정의 한계를 가장 크게 우려하였다.

    22) 『매일경제』, 1967년 12월 15일.

    23) 보사부 사회보장심의위원회, 『사회개발』 제1집: 기본구상, 1968, 57쪽.

    24) 보사부 사회보장심의위원회, 앞 책, 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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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0권 제2호(통권 제39호) 425-462, 2011년 12월 │433

    소를 사전에 계획적으로 조정하여 무용의 마찰과 혼란을 방지하여 줌으로써

    경제발전에 효과를 증진시켜 국민 복지 향상에 기여케 하는 역할”을 하는 것

    으로 설명되었다.25)

    보사부 사보심이 주도한 이 ‘기본구상’은 경제와 사회의 균형발전을 강조한

    것이었으나 경제기획원을 중심으로 성장론자들의 반발과 보사부 장관이 정

    희섭에서 김태동으로 바뀌면서 개발우위 입장이 강해지기 시작한 측면도 있

    었다(허은, 2010: 223-4). 그러나 기본적으로 사회개발론은 경제개발 중심으

    로 배치된 것이었다. 즉 1968년 ‘기본구상’에서 사회개발은 “유효수요를 만들

    어내거나 확대하여 경제개발을 촉진 또는 조정하는 효과”가 강조되었고 “사

    회보장 급여주순을 변경시키는 것은 …(중략)… 사회보장 제도가 본래의 복

    지효과보다는 경기조정책으로 더 중요시되는 경우가 많다.”는 설명이 이를

    잘 보여준다.26)

    당시 언론에서도 사회개발은 주요한 관심 중의 하나가 되었다. 『매일경제』

    는 사회개발이란 주제로 이념, 부담, 범위, 제도, 분야, 시기 등 총 8차례에 걸

    쳐 시리즈 기사를 게재할 정도였다. 여기서도 헌법 조항에 근거해 국가의 사

    회보장의 의미를 강조하면서도 결국 ‘사회보장은 복지국가이자 노동력 보전

    과 생산성 향상에 기여하는 효과’가 있음을 주장했다. 즉 ‘사회보장사항은 경

    제개발계획과 상치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이라는 것이었다. 요컨대 사

    회개발론은 경제개발계획의 폐해를 시정하기 위한 보완장치처럼 여겨졌다.

    논리적으로는 ‘복지국가 건설이 경제개발계획의 이념적 목표’가 되어야 하는

    것이었지만, 현실적으로는 경제개발계획이 “일부층의 부만을 창조해주고 대

    부분의 국민에겐 무관하게”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사회개발론이

    25) 보사부 사회보장심의위원회, 앞 책, 54쪽.

    26) 보사부, 사회보장심의위원회, 앞 책, 82-3쪽. 심지어 이 책에서는 “미국의 경우 19-24세 1인

    이 사망한다면 1인당 61,000달러의 손실을 초래하며 반대로 사망을 예방하면 61,000달러

    의 이익을 본다. 국민보건의료사업은 경제적으로 계량할 수 있는 사회간접자본임을 알 수

    있다.”고 하여 사회보장이 인권보다는 경제적 가치 문제의 의미가 더 클 수 있음을 보여주

    었다(앞 책, 3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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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醫史學434

    기능했다고 할 수 있었다.27)

    이렇게 사회개발론이 사회적으로 부각되면서 의료보험에 대한 관심도 증

    폭될 수 있었던 것이다. 경제성장의 불균형과 모순이 가시화되면서 사회개발

    담론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당시 여건 하에서 의료보험은 가장 대표적인 사

    회보장 제도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2)�의료보험법�개정�이후�정책�표류

    의료보험법을 개정하기는 했지만 그 시행은 불가능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시행령 제정의 지지부진이었는데, 1976년 2차개정 때까지 끝내 만들어지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정권은 80년대 국민개보험 시대를 약속하

    며 야심찬 계획을 잇따라 발표했다. 1972년은 제3차 경제개발계획이 시작되

    는 해였는데, 사회복지 문제는 1, 2차 계획에서 그 용어조차 찾아볼 수 없었지

    만 3차 계획에서 처음 나타나기 시작했다.28)

    1972년 11월 이경호(李坰鎬) 보사부장관이 80년대 복지사회 계획을 발표

    했는데, 일단 1976년도까지 88억 원을 들여 전 인구의 14%를 의료보험에 포

    함시키고 이어 목표 연도인 1986년까지 644억 원을 투입하여 전 인구의 55%

    인 440만 가구로 확장할 방침이었다.29) 의료보험 확대에 따라 제약 산업 생산

    도 대폭 증가될 예정이었다. 생산액 기준으로 1968년 230억 원이 1986년도엔

    6배 증가한 900억 원으로 확대될 계획이었다. 국내 의약품 원료생산을 주축

    으로 한 육성방안도 마련되었는데, 1967년도 6.1%에 불과한 원료 국산화율

    을 1986년도에는 38%로 확대할 예정이었다.30)

    이렇게 의료보험을 비롯한 사회복지에 관한 미래 청사진을 자주 발표하게

    27) 『매일경제』, 1968년 1월 17일.

    28) 『동아일보』, 1971년 2월 26일. 물론 3차 계획의 사회복지도 분명한 한계를 가진 것이었는데,

    계획 작성의 실무 책임자인 이희일 경제기획원 기획국장은 “현재 경제 여건에서 이를 지나

    치게 강조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29) 『경향신문』, 1972년 11월 15일.

    30) 『매일경제』, 1969년 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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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0권 제2호(통권 제39호) 425-462, 2011년 12월 │435

    된 것은 정치적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1969년 삼선개헌을 통해 장기집

    권의 길을 걷고 있던 정권의 입장에서는 대중적 지지를 끌어낼 수 있는 정책

    이 시급했다. 사실 1차 의료보험 개정이 1969년 삼선개헌과 1971년 총선, 대

    선 사이에 끼어있는 1970년에 이루어진 것이 단순한 우연만은 아니었다. 게

    다가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야당에서는 다투어 복지공약을 내놓고 있었다.

    1971년 3월에 신민당과 김대중 후보는 의료보험을 비롯해 산재보험, 실업보

    험, 재해보험 등을 신설 또는 강화하겠다는 공약을 발표했다.31) 이에 공화당

    에서도 총선공약에 의료보험, 산재보험 실시가 포함되기에 이르렀다.32)

    그럼 의욕적으로 출발했던 의료보험 시행이 무위로 돌아가게 된 이유는 무

    엇일까? 가장 먼저 얘기될 수 있는 것은 박정희 정권의 정책 의지였다. 법 개

    정을 하기는 했지만 사실상 박정희 정권으로서는 의료보험의 전면 시행이 커

    다란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사회보장 부문 예산 비

    율이었다. 1972년부터 착수될 3차 경제개발계획에서 사회보장 부문 투자는

    전체의 1.8%에 불과해 2차 계획 당시의 2.2%보다 오히려 줄어든 상황이었

    다.33) 경제 최고 책임자라 할 김학렬 경제 부총리는 3차 계획에서 사회복지에

    신경을 쓰기는 하겠지만 한계가 분명할 것임을 강조하면서 본격 시행을 4차

    계획으로 미루었다.34)

    정부의 재정 투자 문제는 의료계의 주된 반대 이유이기도 했다. 의료계는

    보험료의 적정화, 국고보조금의 현실화, 의료기관 지정문제, 의료수가 책정

    및 지불방법, 의료보험 기구의 일원화 등의 문제를 제기했지만, 특히 국고 보

    조금이 중요한 문제였다. 즉 다른 국가의 경우 국고 보조금 비율이 영국 25%,

    일본 30%, 노르웨이 45%인데 반해 시범사업에 한해 보면 한국은 15~17%에

    불과하다고 강하게 비판했다35). 한편으로는 보험 이전에 의료제도 개선, 의약

    31) 『동아일보』, 『경향신문』, 1971년 3월 24일; 『동아일보』, 1971년 3월 29일.

    32) 『경향신문』, 1971년 5월 5월.

    33) 『매일경제』, 1971년 2월 17일.

    34) 『경향신문』, 1971년 2월 15일.

    35) 이희대, 「한국 의료보험 사업에 대한 고찰」, 『최신의학』 17-3, 1974, 3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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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醫史學436

    분업, 일반의와 전문의, 의원과 병원의 기능 분화 등이 조직화되어야 함을 강

    조하기도 했다36). 의료계의 반발로 시행령조차 만들 수 없는 상황이었고 그

    나마 운영 중이던 의료보험 가입자 수도 계속 축소되고 있는 상황이었다.37)

    국가 재정 투입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면 다른 곳에서 재원 염출이 가

    능해야 했다. 그 일차적 대상은 의료보험 대상 기업주가 될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 전경련으로 대표되는 경제계는 의료보험 강제 적용에 강력 반발하고 있

    었다. 경제계는 이미 산재보험을 시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의료보험 강제 적용

    은 “제2의 산재보험”이라면서 기업의 부담을 가중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38)

    의료보험 실시가 불가능해지자 1974년부터 정부는 민간 의료보험을 강화

    하고자 하는 정책전환을 시도했다.39) 이러한 정부 방침에 따라 설립된 대표

    적 의료보험 조합이 적십자사가 주도한 백령도 의료보험 조합이었다. 적십자

    사는 1974년 5월 25일 백령도 의료보험조합을 결성해 6월 1일부터 본격적인

    의료보험제도 실시를 결정했다. 백령도, 소청도, 대청도 주민 1,507가구(주민

    12,000여 명)을 대상으로 하여 매월 가구당 100원의 보험료를 내면 진찰, 상

    담 등은 전액 무료로 하고 수술, 입원비는 70% 할인해주는 게 골자였다.40) 그

    결과 한 달만인 6월 14일까지 8천여 명이 조합에 가입했고 870여 명의 주민

    치료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41)

    민간 의료보험 운동의 대표적 사례는 청십자 의료보험 조합이었다. 청십자

    운동은 덴마크에서 협동조합 운동을 공부한 채규철이 장기려에게 제안하여

    1968년 부산에서 시작해 1970년 서울로 확대되었고 1972년 진료거부 사건을

    계기로 원주, 인천 등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42) 청십자 운동은 1972

    36) 조규상, 「한국의 의료보험」, 『대한의학협회지』 16-2, 1973, 89쪽.

    37) 『매일경제』, 1972년 1월 6일. 의료보험 가입자 수는 1969년에 4,367명, 1970년에 4,229명,

    1971년에 3,687명으로 축소 일로에 있었다. 보사부 당국자는 그 원인을 기업주와 근로자의

    의식부족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38) 『매일경제』, 1970년 8월 29일.

    39) 『경향신문』, 1974년 7월 17일.

    40) 『매일경제』, 1974년 5월 27일.

    41) 『동아일보』, 1974년 6월 25일.

    42) 이 운동은 1972년 현재 부산 13,000여 명, 서울 1,500여 명의 조합원을 확보했다(『동아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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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년 11월 2일 청십자중앙회를 창립하고 김유택을 총재로 鄭熙燮 전 보사부장

    관을 부총재로 선출하는 등 전국적인 확장을 모색했다.43)

    그러나 서울, 수원, 대전, 전북(전주), 옥구, 경북(대구), 제주 등 7개 조합이

    낸 설립인가 신청이 1973년 7월 31일 일괄 반려되면서 청십자중앙회 사업은

    무산되게 되었다. 반려 사유의 핵심은 역시 법정 사무비, 보험급여 보조비 등

    을 지원할 정부 재원 부족이었다. 이외에도 병원이 주도한 자영자 조합이 전

    국 각지에서 준비되었으나 역시 정부의 인가 불허 방침에 따라 대부분 무산

    되었고 전북 옥구, 강원도 춘성 의료보험 조합 등 8개만 인가되어 실질적으로

    민간 의료보험 조합은 별다른 의미가 없게 되었다.44) 결국 1976년 4월 현재

    총 27개의 의료보험 조직(피용자 조합 포함)이 전체 인구의 0.46%인 16만 명

    을 대상으로 의료보험을 실시하는 정도였다.45)

    야심차게 준비했던 의료보험 제도 시행은 예산 문제로 이렇게 물거품이 되

    는 듯 했다. 1975년까지도 박정희 정권은 계속해서 4차 경제개발계획을 마

    친 다음에야 그것도 부분적으로 의료보험을 실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46)

    보』, 1972년 9월 7일.)

    43) 『경향신문』, 1972년 11월 2일; 『동아일보』, 1972년 11월 3일. 이 운동에 관심이 많은 언론

    은 『동아일보』였는데, 조합의 가입과 혜택, 이용방법을 상세하게 보도하는가 하면 장기려

    박사의 인터뷰 기사를 게재하여 운동의 정당성을 설명했다. 즉 “행정당국이 국민의 건강

    을 충분히 보살피지 못하는 현실 아래”에서 이 운동은 불가피하다는 것이었다(『동아일보』,

    1972년 9월 20일).

    44) 의료보험연합회, 『의료보험의 발자취』 (1997), 59-61쪽.

    45) 김일순·김한중, 「우리나라 의료보험 운영 실태에 관한 조사연구」, 『대한의학협회지』 8월

    호, 1976, 61쪽.

    46) 『동아일보』, 1975년 7월 4일. 고재필 보사부 장관은 공화당 채영철 의원의 의료 사회보장

    계획에 대한 질의에 대해 국민 의료보험을 실시하려면 3~4백억 원의 국고 부담이 필요하

    기에 재정형편상 감당키 어렵고 4차 경제개발계획을 마친 후에야 일부 실시될 수 있을 것

    으로 본다고 답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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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제2차 의료보험법 개정과 의료보험 시행

    1)�의료보험법�재개정의�배경과�개정�내용

    1차 의료보험 개정 이후 박정희 정권의 의료보험 정책은 계속적인 유보였

    다. 그런데 1976년 의료보험법 2차 개정을 1년 앞둔 1975년 들어서 의료보험

    실시에 대한 요구가 각계각층에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먼저 의료계의 의

    료보험 확대 요구가 있었다. 1975년 4월 4일 대한병원협회장 송호성은 보건

    사회부에 의료보험 제도 확대 등을 건의했다.47) 이어서 4월 초에 개최된 대한

    병원협회 주최 세미나에서 ‘전국민에게 골고루 의료혜택을 주기 위해서는 의

    료보험 제도가 조속히 전국적으로 실시돼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 세미나에서는 전북 옥구군의 청십자 의료보험 조합 운동의 성공사례

    가 보고되었는데, 의료보험 실시 2년 만에 1인당 보건비가 1,740원으로 낮

    아져 전국 평균 5,500원보다 훨씬 저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희섭 박사는

    15~20%의 고소득층을 위한 의료제도 밖에 생각하지 않은 보사부를 질타하며

    앞으로는 60% 이상 되는 중산층에 의료혜택이 주어질 수 있도록 의료시혜의

    범위가 확산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이것은 분배정책이자 사회안정 정책이라

    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48)

    이어서 6월 19일에는 공화당과 유정회가 합동 간부회의를 통해 4차 개발계

    획 작성 지침 설명을 듣고, 성장 위주의 정책을 탈피하고 안정 위주 정책으로

    전환하라고 남덕우 부총리에게 주문하면서 의무 교육제도와 함께 국민 의료

    보험제도 등 후생 복지사업 확충을 건의했다.49) 7월에는 대한노총이 4차 계

    획 작성 지침에 대한 건의서를 통해 사회개발을 통한 사회적 형평의 증진과

    국민총화의 경제적 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한 방책의 일환으로 ‘실업보험과 함

    께 수익자의 부담이 적은 의료보험 제도 전면 실시’를 주장했다.50) 9월에는

    47) 『매일경제』, 1975년 4월 4일.

    48) 『동아일보』, 1975년 4월 10일.

    49) 『경향신문』, 1975년 6월 19일.

    50) 『매일경제』, 1975년 7월 22일.

  • 황병주 : 1970년대 의료보험 정책의 변화와 복지담론

    제20권 제2호(통권 제39호) 425-462, 2011년 12월 │439

    한국개발원이 「한국의 사회보장」이란 보고서를 통해 한국의 사회보장 투자가

    GNP 규모에 비해 지나치게 적다는 주장과 함께 주요 도시 근로자에 한해서

    라도 부분적인 의료보험 혜택이 바람직하다고 건의했다.51) 국회 보사위에서

    도 9월 초 의료보험의 점진적 확대책을 건의하기에 이르렀다.52)

    이러한 분위기 하에 언론에서도 사회복지와 사회개발의 필요성을 강조하

    면서 4차 계획에서 복지에 대한 정책적 배려를 강조했다. 즉 “석유파동 이후

    고도성장 시대는 막을 내렸다.”는 전제 하에 “고도성장의 부작용 해소를 위해

    사회개발과 복지증진에 눈을 돌려야 한다는 주장이 높아가고”있다고 전했다.

    그럼에도 복지예산의 비중은 1975년의 4.6%에서 1976년엔 3.9%로 위축되어

    복지에 대한 정책적 배려가 떨어진다는 비판이었다.53)

    이렇게 의료보험 확대 실시 요구가 갑자기 높아진 것은 4차 경제개발계획

    작성이 한 계기가 된 것만은 분명했다. 이미 3차 계획 당시부터 사회복지, 사

    회개발 조항이 들어가기 시작했고 박정희 정권 스스로 ‘복지국가’ 건설을 강

    조하고 있었기에 4차 계획에서 사회복지 확대에 대한 기대치가 상당히 높아

    진 상황이었다. 특히 이러한 관심은 1973년 말부터 시작된 제1차 오일쇼크

    에 따른 불황으로 인해 증폭되었다. 본격적 경제개발이 진행된 이후 처음으

    로 맞는 경제위기는 커다란 충격이었는데, 1973년 도매물가는 15.1%나 폭등

    했고 12월 한 달 동안에만 무려 5.4%나 급등했다. 결국 박정희 정권은 1974

    년 1월 14일 긴급조치 제3호를 발동했는데, 총 9번의 긴급조치 중 유일하게 ‘

    서민생활의 안정을 위한 대통령 긴급조치’였다. 그 주요 내용 중에는 ‘저소득

    자의 부담 경감’이 포함되어 향후 저소득층 의료보호 제도 시행을 예고했다.

    여기에 유신체제 선포 이후 침체되었던 민주화 운동 진영이 1974년부터 본

    격적으로 민생과 복지문제를 들고 박정희 정권을 압박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허은, 2010: 231-6). 인혁당 관련자들의 전격적인 사형

    51) 『매일경제』, 1975년 9월 25일.

    52) 『매일경제』, 1975년 9월 4일.

    53) 『동아일보』, 1975년 9월 30일; 1975년 10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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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醫史學440

    집행에서 보이듯이 정치적 타협 의사가 거의 없었던 유신체제로서는 정치적

    민주화 대신 사회경제적 복지 정책의 강화가 유력한 대안일 수밖에 없었다.

    한편 1972년 커다란 사회적 물의가 되었던 ‘진료거부’ 파동이 배경으로 작

    용했다고 볼 수 있었다.54) 진료거부 문제는 지속적으로 문제가 되어 1976년

    에는 16명의 병원장이 진료거부 및 의료 부조리 혐의로 구속되는 사태가 벌

    어질 정도였다(남찬섭, 2006: 33). 또한 1975년 초 종합병원, 대학병원 등에

    서 14~66%씩 의료 수가를 인상하겠다고 발표했고 국립병원들도 39% 인상을

    예고한 상황도 의료보험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는 데 일조했다.55) 1976년 현

    재 의료기관의 80%가 영리를 위한 민간 베이스에 의존했고 5년간 1인당 평균

    의료부담액이 72배나 늘어날 정도였다.56)

    의료수가 인상은 당시 고성장에 수반되었던 인플레도 크게 영향을 미쳤겠

    지만, 의료계 내부적으로는 의료시설의 대형화, 현대화와도 관련이 깊었다.

    그 상징적인 것이 종합병원의 급팽창이었다. 1970년도에 12개에 불과했던 종

    합병원이 1973년에는 17개, 1975년에는 37개로 폭증했다. 이후 종합병원은

    1979년 70개에 달할 정도로 급성장했다. 병원이 1970년 220개에서 1979년

    226개로 제자리걸음을 하고 의원이 5,402개에서 6,110개로 미미하게 성장한

    것에 비한다면 종합병원의 성장이 전체 의료시설의 팽창을 주도했다고 볼 수

    있었다.57) 의료시설의 대형화, 현대화는 의료 산업화라 할만 했고 그만큼 의

    료수가 인상을 초래하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의료 공급 능력의 확대에도 불

    구하고 고수가로 인해 의료 수요가 동반 확대되지 않는다면 의료산업 전체가

    커다란 후유증에 시달릴 것은 불을 보듯 확실했다.58)

    54) 『동아일보』, 1972년 8월 9일; 『경향신문』, 1972년 8월 9일; 8월 10일 참조. 진료거부 파동은

    국립의료원,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 병원, 경찰병원 등은 물론 일반 의원들에서도 위급 환

    자에 대한 진료를 거부하여 환자가 사망하는 등의 물의를 빚은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으로

    의사 6명이 구속되기도 했다.

    55) 『매일경제』, 1975년 1월 16일.

    56) 『동아일보』, 1976년 3월 26일.

    57) 보건사회부, 『보건사회통계연보』, 각년도 판 참조.

    58) 이에 정부에서 내놓은 대책 중의 하나가 ‘의료적금제’였다. 이 제도는 적금형식으로 급환 대

    처에 유리하고 저축의욕도 증진시킬 것이란 평가를 받았지만, 의료보험 실시를 대체할 수

  • 황병주 : 1970년대 의료보험 정책의 변화와 복지담론

    제20권 제2호(통권 제39호) 425-462, 2011년 12월 │441

    이러한 상황 하에서 정부 측에서도 의료보험 확대에 대한 다양한 논의와

    시도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경제기획원은 “국민전체 복지의 질적 향상”을 강

    조하면서 이를 위해서는 “경제발전과 더불어 국민생활과 직결되는 경제외적

    인 사회분야의 개발”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즉 “경제개발 투자는 생산적이지

    만, 사회개발 투자는 소비적이라는 인식”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경제력의 향

    상은 사회개발의 기반이 되며 사회개발을 통한 국민의 생활개선은 건전한 노

    동력은 물론 개발의욕을 고취시킴으로써 국민경제의 안정적 발전을 촉진”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입장에 기반해 4차 계획 기간 중 ① 종합 국민보

    건 계획 수립운영, ② 의료시설 및 인력낭비 제거, ③ 국공립병원 운영개선,

    ④ 농어촌 의료체계 개발 등과 함께 의료비 사회화를 위해 조합 및 사내 의료

    보험을 확대시켜 향후 국가 의료보험 제도의 기반 조성을 계획 중이라고 밝

    혔다.59) 요컨대 사회개발 담론에 입각해 의료보험 확대 실시를 고려하고 있

    었던 것이다.

    그러나 1975년 말까지 정부입장을 대표한 보사부의 방침은 의료보험 본격

    화를 5차 계획, 즉 1980년대로 넘기는 것이었다. 1975년 11월 25일 고재필 보

    사부 장관은 의료보험이 5차 경제개발계획 기간 중에 본격화될 것이란 입장

    을 피력했다.60) 대신 박정희 정권이 1976년 초까지 관심을 보인 것은 저소득

    층 의료보호 정책이었다. 박정희는 1976년 보사부 연두순시를 통해 ‘자기의

    료를 해결할 수 없는 저소득층에 대한 의료문제를 우선적으로 연구’하라고 지

    시했다. 즉 의료보호가 선차적이었고 의료보험 제도는 단계적으로 실시해야

    된다고 강조했다.61)

    그런데 1976년 4월 21일 보사부에 의해 1977년부터 500인 이상 사업장에

    는 없었다(동아일보』, 1976년 3월 26일).

    59) 『매일경제』, 1975년 7월 10일.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 경제기획원은 저소득층 의료혜택을 위

    한 새로운 시료체제 개발, 무의촌 해소방안, 전국민 대상 의료보험 제도 연구 등을 위해 미

    국제개발처에 5백만 달러 장기 저리차관을 신청해 보건개발원을 설립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동아일보』, 1975년 5월 26일).

    60) 『동아일보』, 1975년 11월 25일.

    61) 『동아일보』, 1976년 2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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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醫史學442

    대해 의료보험을 실시한다는 발표가 이루어졌다.62) 보사부는 1976년 4월 4

    차 경제개발계획에 포함될 의료보장 10개년 계획을 수립했는 바, 1978년까지

    는 500인 이상 당연 적용, 1979~1981년에는 200인 이상 적용으로 확대하여

    1981년까지 240만 명을 의료보험에 포함한다는 것이었다. 보사부는 장기계

    획과 더불어 의료보험법 개정 시안을 1976년 4월 28일 성안하여 5월 6일 보

    사부안으로 확정하였다.63)

    보사부의 의료보험 개정안은 정부내 타 부처와 여당 등으로부터 집중 검

    토대상이 되어 우여곡절을 겪게 되었고,64) 박정희도 의료보호 제도에 더 많

    은 관심을 보였다.65) 신현확 보사부 장관은 대통령 지시에 따라 생활보호 대

    상자 33만여 명은 전액 국가 부담으로, 저소득 영세민 172만 명에게는 의료

    비 대납 후 환불 혜택을 부여하는 의료보호제도를 보강했다.66) 이러한 과정

    을 거쳐 7월 초 보사부는 대폭 수정된 시안을 발표했고, 경제장관 회의, 청와

    대 검토까지 거친 후 9월 초 의료보험법을 포함한 의료보장계획이 대통령 재

    가를 얻어 1976년 9월 13일 「국민보건 향상을 위한 의료시혜 확대방안」이 공

    식 발표되었다.67)

    이 방안은 크게 저소득층을 위한 공적 부조인 ‘의료보호제도’와 사회보험

    인 ‘의료보험제도’의 두 가지로 구성되었다. 핵심 내용은 500인 이상 사업장

    에 강제 적용으로 의료보험 조합을 조직하고, 보험재정은 보험료로 충당하여

    정부 재정 투입을 최소화한다는 것이었다. 농어촌 지역이나 여타 사업장은

    임의 적용으로 하되 순차적 실시를 예고하였다. 보험료는 사용자와 노동자가

    62) 『경향신문』, 1976년 4월 21일.

    63) 의료보험연합회, 『의료보험의 발자취』 (1997), 79-80쪽.

    64) 『동아일보』, 『매일경제』, 『경향신문』, 1976년 5월 18일.

    65) 박정희는 6월 15일 청와대에서 남덕우 경제기획원 장관으로부터 제4차 경제개발계획에 대

    한 보고를 받고 대체적으로 만족을 표하면서도 저소득층에 대한 의료혜택을 강조해 이에 보

    완 계획이 작성되었다(『동아일보』, 1976년 6월 19일). 6월 25일에 박정희는 재차 의료보험

    제도는 생활보호대상자, 영세민, 일정수입자 등 각계각층에 알맞은 제도로 마련하도록 신

    현확 보사부 장관에게 지시했다(『매일경제』, 1976년 6월 26일).

    66) 『매일경제』, 1976년 6월 26일.

    67) 의료보험연합회, 『의료보험의 발자취』 (1997), 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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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0권 제2호(통권 제39호) 425-462, 2011년 12월 │443

    각각 50%씩 분담하며 급여의 3~8% 이내에서 갹출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핵

    심은 보험 재정과 대상이었는데, 수혜자 부담 원칙을 적용해 기업과 노동자

    에게 보험료 부담을 넘기고 대상은 500인 이상 사업장으로 한정해 기업의 반

    발을 최소화하려 한 것이었다.

    1976년 11월 9일 국회 제96회 제17차 보사위에서 의료보험법 개정법률안

    에 대한 본격 심의가 진행되었는데, 중요 쟁점은 요양 취급기관 지정 문제, 사

    무비 국가보조, 적용범위 등이었다. 의원들의 질의와 비판에도 불구하고 신

    현확 보사부 장관은 원안을 고수하였다.68) 결국 소위원회까지 구성되는 과정

    을 거치기는 했지만 큰 변동 없이 본회의를 통과해 12월 22일 법률 2942호로

    공포되었다.69)

    주요 법률내용을 보면, 직장 및 자영과 공무원·교사 의료보험 등 3원화를

    규정했고 앞의 두 가지는 제1종과 2종으로 구분했다. 다음으로 중앙의료보험

    조합연합회 설립을 규정했는데, 기존의 의료보험중앙연합회라는 명칭을 바

    꾼 것이었고 보험 의료기관 또한 요양 취급기관으로 변경되었는데, 아울러 보

    사부 장관이 지정한다는 기존 규정을 보험자가 보사부 장관의 승인을 얻어 지

    정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70)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의보심의위원회 구성이

    었는데, 근로자, 사용자, 의료계 각 3인 동수의 위원과 공익 대표위원으로 구

    성한다고 했는바 의료계 요구를 크게 반영한 것이었다.

    국고부담 부분은 관리운영비 전액과 급여 일부를 보조할 수 있다는 기존

    규정이 예산 범위 안에서 필요 경비 일부를 부담할 수 있다는 것으로 변경되

    었는데 국가 재정 투입 측면에서는 후퇴한 조항이었다. 보험료의 경우에는

    1종의 경우 노사가 반반 부담하고 2종은 본인이 전액 부담하는 것으로 규정

    되었다. 보험료 징수는 국세와 지방세 다음으로 규정하여 의무를 대폭 강화

    68) 국회 사무처, 제96회 국회 『보건사회위원회 회의록』 제16호, 1976, 6-14쪽.

    69) 국회 사무처, 제96회 국회 『보건사회위원회 회의록』 제17호, 1976, 1-2쪽.

    70) 이 조항은 의료계의 강한 반발을 불러오기도 했다. 서울시 의협은 긴급 총회를 열고 보험자

    가 보사부 장관의 승인을 얻어 요양 취급기관을 지정할 수 있도록 한 조항을 악법으로 규정

    하고 시정을 요구하기도 했다(『동아일보』, 1976년 11월 25일).

  • HWANG Byoungjoo : The Change of the Health Insurance Policy and Social Welfare

    │ 醫史學444

    하였다.

    개정 내용은 전문개정으로 제1차 개정에 비해 크게 달라지기는 했으나 사

    회보험방식, 강제적용, 노사 공동부담, 조합방식 등, 제도 골격의 큰 흐름은

    그대로 유지된 셈이어서 법률 개정 자체의 의미보다는 정책집행 의지를 표명

    한 것이 더 커다란 의의라고 평가되었다.71)

    의료보험 정책이 변화된 것은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했지만, 결국 최종적

    판단은 정권 핵심부의 몫이었다.72) 특히 박정희는 1975년 말 의료보험 제도

    시행에 대한 최종 판단을 내렸을 가능성이 높았다고 보인다. 당시 비서실장이

    던 김정렴의 회고에 의하면 1975년 12월 박정희는 최규하를 총리로 하는 내각

    개편을 단행하면서 고도성장에 따른 경제적·사회적 불균형을 시정하기 위

    해 제4차 경제개발계획부터는 사회개발을 병행해서 추진해 나가되, 특히 사

    회개발의 기초인 의료보장책을 기필코 시행한다는 방침을 세웠다고 한다.73)

    이러한 방침을 추진할 주무 보사부 장관 인선이 중요했는데, 비서실에서 단

    수 추천한 신현확이 임명되었다. 박정희는 ‘의료 복지정책을 쓰되 국방력 강

    화와 경제 고도성장이 계속해서 요긴한 우리 현실에 비춰 우리 실정에 맞는

    건전한 제도 마련’을 특별히 주문했다. 그것은 곧 정부 재정 투입을 최소화하

    는 사회보장 정책을 의미하는 것이었는데, 이에 따라 정부의 정책기조 핵심

    은 의료보험 재정 투입을 최소화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박정호, 1996: 92).

    신현확의 보사부 장관 임명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신현확은 보건, 복

    지 전문가가 아니라 정통 경제관료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의료보험 시행

    의 총책임을 떠맡고 장관에 임명되었다. 신현확은 당시의 일반적 의료현실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즉 도농격차, 병상이용율 저조, 의료비 상승, 보건

    의료 혜택의 계층간 불균등, 의료기관 및 인력의 불균형과 부족 등의 문제를

    71) 의료보험연합회, 『의료보험의 발자취』 (1997), 94쪽.

    72) 1970년대 국가는 방대한 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 강력한 정책능력을 바탕으로 피지배 계급

    에 대해서는 고도의 배제성을 지배계급에 대해서는 높은 자율성을 지니고 있었다(원석조,

    1991: 36).

    73) 김정렴, 『한국경제정책30년사』 (중앙일보사, 1990), 3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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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0권 제2호(통권 제39호) 425-462, 2011년 12월 │445

    파악하고 있었다.74)

    이에 신현확은 사회개발을 통한 사회적 형평을 강조하면서 그것이 국민복

    지의 향상이자 노동력의 보전과 생산성의 향상을 통한 경제 성장의 중요 조

    건임을 주장했다. 이러한 인식 하에 박정희가 지시한 저소득층 의료시혜 확

    대와 의료보험의 단계적 추진을 위한 정책 개발에 착수한 것이었다.75) 신현확

    은 장관에 임명되자 본인이 스스로 각국의 의료보장제도를 철저히 연구, 비

    교, 검토하여 의료보험법 개정작업을 주도했다.76) 신현확은 자유 개업의 제

    도가 주축이 된 현행 의료제도, 국민의 소득수준과 선진국에 있어서의 의료

    보장의 동향 등을 감안해 의료보장 방법을 사회보험과 공적부조로 이원화할

    것을 구상했다.77)

    정통 경제관료 출신 신현확이 보사부 장관에 임명된 것은 결국 경제상황을

    고려해 의료보험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인물을 찾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경

    제계와 상당히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던 신현확이 그 적임자라고 판단했을

    것이다.78) 특히 신현확은 성장론자로 알려진 남덕우를 대신해 1978년부터 경

    제부총리를 맡게 되었다. 경제안정화를 추구하면서 경제개발과 사회개발의

    병행 추구를 천명했던 4차 경제개발계획의 실질적 추진 주체로 임명된 것이

    었는데, 이는 의료보험 시행과 같은 맥락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2) 주요 사회세력의 역할과 복지 담론

    의료보험법 재개정과 관련해 주목해야 될 것은 의료보험의 주요 주체가 될

    74) 신현확, 「80년대 의료정책의 방향」, 『국회보』 160, 1977, 27-8쪽.

    75) 신현확, 「서민을 위한 의료복지 시책」, 『국민회의보』 15, 1976, 147쪽.

    76) 박정희는 보사부 장관 인선에 특별히 신경 쓸 것을 지시했다. 이에 비서실에서는 경제 이론

    과 실정에 밝고 정치적, 사회적 식견이 높으며 추진력이 강한 후보로 신현확을 단수 추천했

    다{김정렴, 『한국경제정책30년사』 (중앙일보사, 1990), 309쪽}.

    77) 신현확, 「서민을 위한 의료복지 시책」, 『국민회의보』 15, 1976, 148쪽.

    78) 신현확은 이미 1950년대부터 삼성과 관계를 맺고 있었고 1968년부터는 동해전력, 쌍용양

    회 등의 사장을 역임했다. 공직 퇴임 이후에는 삼성물산 회장직을 수행하는 등 정, 관, 재계

    에 걸친 경력을 자랑했다. 요컨대 경제계를 설득해 의료보험 시행을 추진할 적임자였다고

    보인다(申鉉碻·金容三, 200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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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醫史學446

    기업과 의료계 그리고 노동계의 반응과 대응이었다. 의료보험 제도 시행과 관

    련해 더욱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은 의료계와 경제계였고 노동 진영은 별다

    른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79) 노동 진영의 역할이 미미했던 것은 그 자체로

    중요한 탐구대상이기는 하지만, 일단 여기에서는 경제계와 의료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할 것이다.80) 경제계와 의료계를 대표하는 것은 전경련과 대한의

    학협회였다.81) 둘 다 실시 당위성을 부정하는 태도는 거의 없었으며 뜻밖에도

    전경련이 적극적 입장을 표명하였다.82)

    전경련의 경우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기업부담의 가중이라고 반대 입

    장이었던 것에 비추어 보건대 급격한 입장변화였다.83) 경제기획원과 대통령

    의 미온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의료보험 시행이 결정된 것은 장예준 상공장관

    으로부터 기업의 적극적 입장이 보고되었기 때문이라고 알려질 정도로 기업

    의 입장은 전향적이었다.84)

    기업의 변화는 박정희 정권의 역할과도 관련 있었다. 전경련은 기업복지

    79) 의료보험 시행을 전후해 당시 공식 영역에서 노동계를 대표하는 조직은 사실상 한국노총

    밖에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민주 노조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지만, 공식 영역에서 역할하

    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한국노총은 몇 차례 의료보험 시행을 건의하기는 했지만 뚜렷한 활

    동은 없었다. 1975년 7월 4차 계획 작성 지침에 대한 건의서를 통해 실업보험과 함께 수익

    자의 부담이 적은 의료보험제도 전면 실시 요망(『매일경제』, 1975년 7월 22일), 1976년 근

    로자의 날 기념대회를 통해 의료보험 확대 요구(『매일경제』, 1976년 3월 10일), 1976년 전

    국 대의원 대회를 개최하여 노동부 설치, 의료보험법, 실업보험법, 국민복지연금법 등의 전

    면 실시를 촉구(『매일경제』, 1976년 10월 21일) 등이 그것이다.

    80) 박정호는 보사부가 의료보험법 개정을 주도했고, 노동과 자본을 비롯한 사회집단은 의보

    개정을 의제로 제기한 적이 없다고 했으나(박정호, 1996: 75-6) 이는 사실과 다르다. 법 개

    정을 보사부가 주도한 것은 사실이나 의료계, 한국노총 등에서도 꾸준히 의료보험 시행을

    주장했었다.

    81) 전경련은 국가와의 제도화된 통로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협력관계를 유지했고. 의협은 초

    창기부터 정부와 긴밀한 관계였는데, 1955년 독립 회관 건립 이전까지 사회부, 보건부 등에

    사무실을 유지할 정도였으며 정희섭 등 의협회장 출신들이 보사부 장관을 역임하는 사례가

    많았다(김순양, 1994: 94-5, 158, 164).

    82) 의료보험연합회, 『의료보험의 발자취』 (1997), 86-7쪽.

    83) 전경련은 의료보험 시행 직전까지 정부, 사용자, 근로자 3자 부담에 의한 의료보험은 사용자

    부담이 과중한 것이기에 기업성장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의료 사회화가 안

    된다면 사회보험으로서 의료보험 발전 전망은 어둡다는 것이었다(우기도, 1986: 879-80).

    84) 의료보험연합회, 『의료보험의 발자취』 (1997), 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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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0권 제2호(통권 제39호) 425-462, 2011년 12월 │447

    가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이 1974년 우리사주 조합운동으로부터이며 1975년

    부터는 정부가 기업복지를 사회보장의 일환으로 적극 권장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85) 이에 따라 경제계에서는 복지재단 설립이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

    다. 현대의 정주영과 대우의 김우중은 재단 설립과 함께 어떠한 사업이 좋을

    지를 박정희에게 문의했고 박정희는 농어촌과 도서지방 의료사업을 권장해

    그대로 시행되었다.86)

    전경련은 경제계가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 이유로 박정희 정권의 권유와 함

    께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요구가 가장 비등했던 시기”였다는 점을 꼽았

    다. 즉 경제성장에 따른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시정 요구가 석유파동과 맞물

    리면서 민주화 운동 진영을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었던 상황과 무관치 않은 설

    명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바로 이 시기에 기업들이 자신들의

    재단을 가질 정도로 급속히 성장했다는 점이었다.87) 특히 1976년에는 15.2%

    의 “초고도 성장”을 이룩한 해였는데, 그 주된 수혜 대상은 수출 위주 대기업

    이었던 만큼 사회적 책임에 대한 목소리도 커질 수밖에 없었다.88)

    이러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전경련은 의료보험 시행에 적극적으로 개입했

    다. 이미 1974년부터 의료보험 실무자 회의를 개최할 정도로 관심이 있었던

    전경련은 1976년 들어 의료보험 제도에 관한 간담회를 지속적으로 개최하면

    서 자신들의 입장이 반영되도록 활발하게 움직였다.89) 1974년 경제계의 또

    다른 대표 조직인 경영자협회도 의료보험 관련 좌담을 개최하는 등 발 빠르

    게 움직였다. 이 좌담에서는 ‘의료의 사회화’라는 새로운 추세에 따라 의학계

    는 물론 산업계에서도 연구가 전개될 필요가 있다고 전제하면서 ‘전산업계가

    85) 전경련, 『전경련30년사』 상 (1991), 303쪽.

    86) 김정렴, 『한국경제정책30년사』 (중앙일보사, 1990), 314쪽.

    87) 전경련, 『전경련30년사』 상 (1991), 304쪽.

    88) 『경향신문』, 1977년 1월 15일.

    89) 『매일경제』, 1974년 8월 17일. 1976년 7월 7일 간담회에서는 보험대상자 범위와 의료기준

    획정, 대상 질병 설정, 정율제 채택, 사회보장 성격 부각 등의 입장을 촉구했다. 아울러 기업

    이나 지역 등의 자유 실시를 주장했다(『매일경제』, 1976년 7월 8일). 이어 7월 16일에 재차

    간담회를 개최하여 의료보험과 산재보험 간의 분쟁요인 제거, 공업단지 등 특수지역을 위

    한 전담 병원 설립 등을 촉구했다(『매일경제』, 1976년 7월 16일).

  • HWANG Byoungjoo : The Change of the Health Insurance Policy and Social Welfare

    │ 醫史學448

    자발적인 참여로서 각 기업체별 의료보험조합을 조직 운영하는 것이 가장 이

    상적’이라는 의견이 개진되었다. 아울러 정부의 의료보험 정책의지도 없었던

    1974년에 이미 전경련이 ‘의료보험중앙연합회’ 결성을 주도할 것이란 의견이

    개진될 정도였다.90) 의료보험은 이미 경제와 산업이라는 프레임으로 조명되

    고 있었고 기업이 주도적 역할을 하는 것으로 설정된 것이었다.

    정부의 의료보험 실시발표가 난 이후 전경련은 1976년 5월 14일 제2회 이

    사회를 개최하여 의료보험 실시에 따른 문제점을 논의했는데, 일부에서는 전

    면 반대를 주장하기도 했지만, 결국 실시 시기 조정 등 제반 문제점을 검토하

    여 정부에 건의하는 것으로 입장을 정리하였다. 이에 정부에서도 1976년 7월

    15일 전경련에 의보 시행 기본 요강을 설명하고 협조를 요청하는 등 긴밀하

    게 협력하기 시작했다. 전경련은 9월 24일 제4회 이사회를 개최하여 의료보

    험 개정에 대한 대정부 건의안을 심의하고 신현확 보사부 장관과의 면담 등을

    통해 지속적 협의채널을 가동하여 조합단위 자율 조직, 각 기업체별 진료비

    보조제도의 의료보험제도로의 확충, 조세특례 및 행정적 지원책 강구, 국고

    보조금 조합 예산의 30%로 확대, 의료보험조합중앙협의회 설치 등의 건의내

    용을 전달했다.91) 결국 전경련은 1977년 1월 13일 산하에 ‘의료보험협의회’를

    조직하여 의료보험 시행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92)

    한편 의료계 또한 중요한 이해 당사자로써 적극 개입했다. 의료계를 대표

    한 조직은 대한의학협회, 대한병원협회, 대한약사회 등이었는데, 특히 의학

    협회의 활동이 두드러졌다.93) 의료보험의 중요한 주체였기에 의료계는 이미

    1970년대 초반부터 의료보험에 대한 다양한 연구와 의견개진을 해오고 있었

    90) 「의료보험제도 구현의 가능성과 문제점」, 『경협』 117, 1974, 26-7쪽.

    91) 의료보험연합회, 『의료보험의 발자취』 (1997), 88쪽.

    92) 『매일경제』, 1977년 1월 14일.

    93) 의료계 내부에는 약사회와 한의사협회도 있었고 이들도 주요한 이해 당사자였기에 의료

    보험에 대한 입장을 개진하고 자신들의 이해를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약사회의 주된

    문제제기는 의약분업에 관한 것이었고 한의사들은 한의원도 의료보험에 포함시켜 달라는

    것이었다(『매일경제』, 1976년 8월 12일; 1976년 10월 21일; 1977년 5월 30일; 『경향신문』,

    1977년 6월 15일).

  • 황병주 : 1970년대 의료보험 정책의 변화와 복지담론

    제20권 제2호(통권 제39호) 425-462, 2011년 12월 │449

    다. 의료계는 의료보험에 대하여 기본적으로 찬성이었고 정부에 조속한 시행

    을 촉구하는 입장이었다.

    의료계는 의료보험 실시를 경제적 기준의 문제가 아니라 ‘인권존중 사상’

    이라는 ‘문화적 가치관’에 달려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그렇지

    만 역시 중요한 것은 잠재 의료수요의 현재화였다고 보인다. 의료보험 실시

    로 『대한병원협회지』는 환자가 두 배 가량 증가될 것이라고 기대했다.94) 연간

    의대 졸업생이 천 명에 달할 정도로 의료공급 여지가 큰 반면 병상 이용률이

    50% 대에 머물 정도로 저조한 상황 속에서 의료 잠재수요의 현재화는 매우 중

    요한 문제일 수밖에 없었다(정영순, 1976: 72-3). 이외에 보험 수가 등 제반 급

    여수준과 의료계의 참여방식과 절차 등이 의료계의 관심이었는데,95) 보사부

    는 의료보험 심사위와 심의위에 의료계 참여는 보장했지만, 의료기관 지정제

    와 지역 차등제, 수가 책정은 거부했다(박정호, 1996: 82). 요컨대 제도적 참

    여를 보장하되 수가 책정 등 핵심 사안은 정부안을 관철시켰다.

    의료계의 요구는 의료비의 안정적 공급 체계 확립으로 모아졌다. 의료보험

    의 정부 재정지원이나 새마을 운동에 의료조합을 포함시킬 것을 요구한 것도

    결국 의료비 공급 체계의 안정화를 위한 것이었다.96) 병원협회는 정부의 의

    료시혜 확대안이 발표되자 각계 전문가를 동원해 특집을 구성하였는데, 영세

    민층의 의료보호 대책부터 진료기관 계열화, 병원 수준 평준화, 의료수가 결

    정 문제 등을 제기했지만 중요한 것은 수가문제였다.97) 보험 수가는 의료산

    업화가 진행되는 조건 하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로서 의료보험 시행 당시 의

    료계와 정부 간의 최대 쟁점이었다. 당시 의료계에서는 관행 수가가 나름대

    로 기능하고 있기는 했지만 전문화된 의료기술이 도입되어 의료생산에 막대

    한 비용이 들게 되었고 의료보수 지불방법에서도 새로운 보수 항목들이 많

    94) 「의료보험을 통한 의료시혜 확대(2)」, 『대한병원협회지』 5-7, 1976, 45-7쪽.

    95) 대한의학협회, 『대한의학협회70년사』, 1979, 177쪽.

    96) 이러한 제안을 한 사람은 당시 병원협회장이었던 송호성이었다(「의료보험을 통한 의료시혜

    확대(2)」, 『대한병원협회지』 5-7, 1976, 54쪽).

    97) 『대한병원협회지』 5-9, 1976.

  • HWANG Byoungjoo : The Change of the Health Insurance Policy and Social Welfare

    │ 醫史學450

    이 설정되었다.98)

    의료수가 책정은 정부와 의료계 간의 긴밀한 협력 하에 진행되었다. 1976

    년 11월 4일 신현확 장관이 의학협회를 방문하여 공동 수가책정 작업을 합

    의하고 11일에는 보사부, 의학협회, 병원협회가 공동으로 ‘의료수가연구위원

    회’를 구성했다.99) 이 기구 사무실이 의학협회 건물에 있을 정도로 수가 책정

    작업에 의료계가 깊숙하게 개입했다. 작업은 독일과 일본의 경험을 참고했는

    데, 특히 일본 자료를 주로 참고했다.100) 일본은 보사부, 병원협회, 의학협회

    가 공동으로 11월 20일부터 12월 4일까지 직접 현장 조사까지 진행하였다.101)

    이러한 과정을 거쳐 1977년 6월 9일 의료보험용 기준수가가 고시되었다.

    전 의료행위를 762 종류로 구분하고 각 행위마다 난이도, 시간, 빈도에 따

    라 기준 수가 점수제를 시행하는 방식이었는데, 전체적으로 관행 수가보다

    약 45%가 절감된 선에서 책정된 셈이었다.102) 정부는 의료계의 협조를 위해

    ‘행위별 수가제’를 채택하기는 했지만 수가 책정은 의료계의 요구와 달랐다.

    책정된 기준 수가에 대하여 의료계는 강력 반발하였다. 병원협회는 연간

    보험료가 359억 원인데, 수가로 지불되는 것은 45.2%인 162억 원에 불과하다

    고 항의했다.103) 병원협회장은 사퇴까지 불사했고 병원들은 요양기관 지정과

    계약을 회피하여 의보조합들이 애를 먹기도 하였다.104) 그러나 의료계의 반발

    에 대한 비판론도 나타났다. 의보수가 25~45% 가량 절감은 병원 측의 엄살이

    라는 것이며 의보 시행 이전에도 단체 환자의 경우 30~40% 할인이 기본이기

    에 의보는 최소 500~1,500명의 단체 가입자를 현 수가대로 받는 것이니 축배

    98) 허정, 「한국적 의료보험의 개발유형에 관한 고찰」, 『보건학논집』 14-2, 1977, 161쪽.

    99) 보사부, 의료보험제 실시 위해 보사부, 병원협회, 의학협회 등 3자 대표로 의료수가연구

    위원회 결성하여 금년 말까지 기준 의료수가 결정 예정(『매일경제』, 1976년 11월 11일).

    100) 의료보험연합회, 『의료보험의 발자취』 (1997), 100-2쪽.

    101) 대한병원협회, 『대한병원협회20년사』, 1982, 279쪽.

    102) 『경향신문』, 1977년 6월 9일.

    103) 『경향신문』, 1977년 6월 30일.

    104) 대부분 병원이 의보조합과의 계약체결을 회피하여 의보 시행 이틀 앞둔 6월 29일 현재 90%

    이상이 의료기관의 회피로 요양기관을 지정하지 못했다(『경향신문』, 1977년 6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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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0권 제2호(통권 제39호) 425-462, 2011년 12월 │451

    라도 들어야 할 판이라는 것이 의료보험 관계자의 분석이었다.105)

    수가 문제를 둘러싼 대립은 의료에 대한 사회적 시선 변화를 함축하는 것

    이었다. 의료에 대한 기존 사회적 통념은 비영리 행위 내지 준비영리 행위여

    야 한다는 것이었으나 의료가 사회경제 구조 속에서 행해지며 사회적 경제

    적 여건에 의해 규제되는 것이기에 비영리성과 함께 경제적 유지 또한 중요

    시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래서 의료보수 원가 계산은 ‘의료

    인이란 전문기술에 대한 보수, 의료제공에 소요된 경영원가의 보전, 의료시

    설에 투입된 자금에 대한 자본보수와 기업이득’ 등이 포함되는 것이어야 했

    다. 나아가 자본에 대한 정당한 보수는 “하나의 사회정의”라고까지 규정하기

    에 이르렀다. 이제 의료는 ‘의료산업’으로 이해되었고 ‘자본 공급면에서 타산

    업과 경쟁관계’에 놓이게 되었다고 파악했다. 따라서 민간자본을 경쟁적으로

    유치하려면 그 사회의 평균적인 ‘자본 보수율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결론으

    로 이어졌다.106)

    결국 의료보험은 유효수요 창출을 위한 정책이기도 했다. 그 결과 1977년

    부터 대규모 투자가 진행되어 그전 20년간의 투자액이 최근 1년간의 투자액

    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획기적인 투자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투자에도 불

    구하고 공급 부족현상이 나타났다. 그것은 의료이용율의 폭증 때문이었는데,

    1970년 전후 환자의 20%만 병원을 이용한 반면 의료보험이 시행된 1970년

    대 후반 이후 의료수요 격증으로 60%의 환자가 병원을 이용하게 되었던 것이

    다. 그래서 1970년 10만 명당 병상수가 53개였음에도 부족 문제가 없었으나

    1979년의 경우 166병상으로 증가했음에도 대도시에서는 병상가동률이 100%

    에 달한 상황에서 병상 부족현상이 심각해진 것이었다.107)

    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1976년 의료보험 시행에 대해 반대 입장을

    105) 『경향신문』, 1977년 6월 11일.

    106) 허정, 「한국적 의료보험의 개발유형에 관한 고찰」, 『보건학논집』 14-2, 1977, 161-2쪽.

    107) 장경식, 「의료수요 증가에 따른 진료시설의 현황과 전망」, 『의료보험』 23, 1980, 102-3쪽.

    한 병원의 경우 하루 250명 전후이던 환자 수가 의료보험 시행 이후 3배로 늘어 7, 800명

    으로 증가했다{심영보, 「의료보험 수가 삽화 7제」, 『의료보험』 13, 1979, 27}.

  • HWANG Byoungjoo : The Change of the Health Insurance Policy and Social Welfare

    │ 醫史學452

    표명한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해 당사자들의 불만과 문제제

    기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의료보험 자체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자

    신들에게 유리한 제도 시행을 위한 압력 수단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거의

    만장일치에 가까운 이러한 상황은 ‘복지’를 매개로 가능했다고 보인다. 복지

    국가, 복지사회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가치였고 의료보험은 바로 복지

    국가의 상징과도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108)

    박정희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취임사에서부터 “민주복지국가” 건설이

    최고의 목표임을 천명한 이래 기회 있을 때마다 구두선처럼 복지국가를 강조

    했다.109) 1960년대 후반부터는 ‘사회개발’이 적극적으로 강조되어 경제개발

    과 쌍벽을 이루게 될 정도였다.110) 특히 1977년부터 시행될 4차 경제개발계획

    은 본격적인 사회개발이 가능한 시기로 설정되어 그 중요성이 더해졌다. 요

    컨대 경제개발과 사회개발을 통해 복지국가를 이룩하자는 논리였다. 의료보

    험 실시의 책임자였던 신현확 또한 사회개발 담론에 입각한 논지를 전개하였

    다. 그는 경제개발이 생산 지향적인데 반해 “사회개발은 복지 지향적”인 것임

    을 강조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양자가 대립적인 관계는 아니며 사회개발

    이 인간의 능력발휘와 복지향상을 도모하는 것이기 때문에 경제개발을 저해

    하는 여러 가지 요인을 제거하여 지속적인 고도성장을 오히려 촉진하는 역할

    을 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111)

    이러한 논리는 정권 차원으로 국한되지 않았고 학계, 언론 등으로 확산되

    어 나갔다. 사회개발, 사회보장은 단순한 소비가 아니라 경제개발을 위한 사

    회통합, 국민총화를 위한 투자로 여겨졌고 의료보험은 구체적 실례가 될 것

    108) 서울시 의사회장 김재전은 “우리도 이제 당당하게 의료복지의 나라로서 세계 복지국가의

    대열에 끼게 된 것”이라고 감격해했고 또 다른 사람은 “이제는 우리도 복지국가의 행세

    를 하게 되었다.”고 평했다(『경향신문』, 1976년 12월 29일; 이강목, 「진료의 경제화」, 『의

    료보험』 3, 1978, 28쪽).

    109)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취임사」(1961.7.3), 『박정희 대통령 연설문집』 1(1973, 대통령비

    서실), 4쪽.

    110) 1950년대 말 유엔에 의해 주장된 사회개발은 박정희 정권의 중요한 지배전략으로 활용되

    었다. 이에 대해서는 허은, 앞 글 참조.

    111) 신현확, 「사회개발을 위한 행정의 역할」, 『한국행정학보』 11, 1977, 10-1쪽.

  • 황병주 : 1970년대 의료보험 정책의 변화와 복지담론

    제20권 제2호(통권 제39호) 425-462, 2011년 12월 │453

    이었다. 사회보장은 선진국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비스마르크의 독일과

    미국의 뉴딜정책에서 확인되듯이 사회위기 시에 국민총화를 위한 중요한 수

    단이 된다는 논리였다.112) 이러한 논리에서 무의촌 문제가 심각한 상황에서

    “대도시에는 호텔 값보다 비싼 특실과 특수병원들이 재미를 보고” “지도급 인

    사들과 그 가족들은 ‘신병치료차 출국’의 버젓한 기사를 흔히 보게 되는” 현실

    을 극복하기 위해 의료보험 실시가 절실해지는 것이었다.113)

    따라서 사회복지는 재정지출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중대

    한 뜻을 지니는 일”이 되는 것이었는데, 그 구체적 의미는 “사회의 연대책임

    을 지향하는 점”이었다. 즉 “구미의 사회복지가 중산층과 도시 노동자들이 민

    주주의의 틀 속에서 저마다의 목적을 추구하는 현실적인 이념으로 발달”되

    어 왔다는 것이었는데, 산업화에 따른 사회불평등의 심화를 완화하여 “국민

    총화”를 이룩하기 위한 것으로 설정되었다.114) 이러한 맥락에서 “인류 최대의

    적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가난과 질병”이라는 케네디의 언명이 중요한 울림을

    가지게 되는 것이었다.115)

    의료보험이라는 사회복지의 문제가 정치적 문제로 연결되어 국가안보와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었다. 1976년을 전후해 박정희 정권

    은 “복지사회야말로 안보의 기반이 된다는 개념조정”을 하게 되었는데, 특히

    7·4남북 공동성명 이후 북한이 해외선전 등을 통해 남북의 의료보장 실태를

    비교 선전하였던 것이 상당한 자극이 되었다.116)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자본주의적인 자유경제 체제”의 배분 면에서의 위

    약성을 보완키 위한 것이기도 했다. 산업화에 따른 사회적 병리현상, 사회적

    112) 서울대 법대의 김치선은 사회보장제도는 국민총화가 절실히 요청될 때 필요한 것이며 그

    사례로 “극렬한 사회주의” 극복하기 위한 비스마르크의 정책과 대공황 극복을 위한 미국

    의 사회보장 제도를 들었다.(『동아일보』, 1973년 5월 24일).

    113) 『동아일보』, 1976년 6월 23일, 「경제성장과 복지의 쌍전을, 최저수준의 개선부터

    노력하라.」

    114) 『동아일보』, 1977년 2월 7일. 「사회복지와 인권」.

    115) 채규철, 「한국 민간의료보험에 관한 고찰」, 『공중보건잡지』 11-2, 1974, 233쪽.

    116) 의료보험연합회, 『의료보험의 발자취』 (1997), 76-7쪽.

  • HWANG Byoungjoo : The Change of the Health Insurance Policy and Social Welfare

    │ 醫史學454

    긴장이나 불안 등을 생각할 때, 의료보험이 사회통합과 안정을 위한 하나의

    안전판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즉 균형 있는 배분에의 욕구에 입각

    한 “국민 모두가 바라는 공평한 기회”가 주어지는 사회 실현을 위해 의료보험

    이 필요하다는 것이며 이를 통해 의료 또한 점차 공공적인 성격으로 전환해

    ‘의료의 사회화’가 실현되어야 할 것이었다.117)

    요컨대 의료보험을 매개로 한 복지담론은 박정희 정권은 물론 사회 전체가

    공유하고 있는 지배적 가치였다.118) 박정희 정권은 경제개발에 모든 것을 집

    중했지만 그 결과 나타난 사회적 적대와 모순이라는 새로운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계층, 지역 간 갈등과 균열은 체제 유지에 커다란 부담이었기에 통합

    을 위한 정책과 담론이 절실했다. 사회개발 담론은 이러한 배경 하에서 나오

    게 되었고 의료보험은 구체적 정책으로 제시된 것이었다. 경제개발과 사회

    개발을 통해 도달해야 될 최종 목적지는 복지 국가로 상정되었다. 복지 담론

    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가치로 등장했고 ‘선진국’을 통해 그 가치와 현실

    태가 재현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복지 국가가 된다는 것은 곧 선진국이 된

    다는 것이었다.

    ‘선진-후진’ 구도는 1960년대 이래 한국사회의 지배적인 인식 패러다임으

    로써 소위 ‘조국근대화’의 주요한 추진 동력으로 기능했다. 그런데 1970년대

    들어서 선진국의 재현은 경제 영역뿐만 아니라 사회 영역으로 확장되기 시

    작했다. 경제성장이 사회적 삶의 질 개선과 연결되지 못한다면 더 이상의 성

    장도 불가능할 수 있었다. 체제 내외부를 막론하고 복지 담론은 시대정신처

    럼 확산되었다.

    의료보험과 복지담론은 한국의 자본주의적 산업화의 직접적 산물이었다.

    그것은 산업화가 가져다줄 수 있는 생활변화를 증거하는 것이자 다른 한편

    으로는 국가와 자본에 의해 보살펴지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특히

    117) 김대환, 「의료보험의 경제·사회적 의미」, 『의료보험』 11, 1979, 12-3쪽.

    118) 사회개발의 각 부문 중에서도 의료부문은 사회적으로 가장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

    는 공공적인 것이라는 언명이 이를 보여준다{임흥달, 「사회개발 계획과 의료시혜 제도」,

    『도시문제』 127, 1977, 9-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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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0권 제2호(통권 제39호) 425-462, 2011년 12월 │455

    자본은 그 과정의 핵심 요소로 등장했다. 국가 정책에 생사가 규정당했던 자

    본이 역으로 국가 정책의 성패를 좌우할 정도로 성장했던 것이며 이제 국가

    는 자본의 협력 없이 효율적인 정책 집행이 곤란해질 정도였다. 국가와 자본

    이 긴밀하게 협력하면서 사회정책을 구상하고 집행하는 과정은 의료보험 시

    행의 주요한 특징이었다. 사회개발과 복지 또한 자본 운동과 무관한 것이 아

    니었다.

    그것은 의료 분야가 본격적으로 산업화되는 것에서도 확인된다. 자본의 논

    리에 입각해 의료산업이 움직이게 되고, 의료보험은 안정적인 수요 창출 메커

    니즘이 됨으로써 복지와 자본의 융합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었다.

    물론 복지담론에 입각한 국가 정책이 자본을 강제해 일정한 양보를 이끌어

    낸 측면도 존재했다. 그러나 전경련의 태도 변화에서 보이듯이 자본은 단순

    히 수세적 입장에서 끌려다닌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