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호 통권 235호 - 민족문제연구소...201604 2016년 4월호 통권 235호 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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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 2016년 4월호 통권 235호 민족문제연구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 미리 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격랑 속의 조선 시론 · 2 4월 잔인한 달에서 ‘다시 민주주의로!’ 2016 민족문제연구소 정기총회 스케치 · 4 사진으로 보는 연구소 소사 · 7 박카스 같은 활력을 불어넣은 일일주점 초점 · 8 투표 독려를 위한 ‘2016 리멤버 카 캠페인’ 진행 안중근의사 순국 106주기 추모식 열려 “을미오적, 나는 안찍지 말입니다” 인터뷰 ·10 아픔을 아픔이라 말하지 못한 세월 - 최홍이 회원 사건과 인물로 보는 우리 근현대사 · 19 결국 그들은 아무도 처벌되지 않았다 열전 친일파 · 24 친일・독재권력의 산물, ‘민족지도자 김성수’ 돌려보기 · 29 대한 독립의 별, 김마리아 기증자료소개 · 33 식민지 비망록 · 35 전쟁물자 수탈이 빚어낸 대용품 전성시대 책소개 · 39 회원마당 ·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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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42016년 4월호 통권 235호

    민족문제연구소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

    민 족 문 제 연 구 소 회 보

    미리 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격랑 속의 조선

    시론 · 24월 잔인한 달에서 ‘다시 민주주의로!’

    2016 민족문제연구소 정기총회 스케치 · 4

    사진으로 보는 연구소 소사 · 7박카스 같은 활력을 불어넣은 일일주점

    초점 · 8투표 독려를 위한 ‘2016 리멤버 카 캠페인’ 진행

    안중근의사 순국 106주기 추모식 열려

    “을미오적, 나는 안찍지 말입니다”

    인터뷰 ·10아픔을 아픔이라 말하지 못한 세월 - 최홍이 회원

    사건과 인물로 보는 우리 근현대사 · 19결국 그들은 아무도 처벌되지 않았다

    열전 친일파 · 24친일・독재권력의 산물, ‘민족지도자 김성수’

    돌려보기 · 29대한 독립의 별, 김마리아

    기증자료소개 · 33

    식민지 비망록 · 35전쟁물자 수탈이 빚어낸 대용품 전성시대

    책소개 · 39

    회원마당 · 44

  • 미리보는 ‘식민지 역사박물관’ 20

    격랑 속의 조선 公園の各國兒童 공원의 각 나라 아이들

    아사히 타로朝日太郎(일본) “어이 로스케(露助)! 세이키치(清吉)가 방심한 틈을 이용해 ‘만두’(만주)를 훔치려고 하다니 어찌 된 일이냐, 자 빨리 돌려줘라!”로스케露助(러시아) “이러쿵 저러쿵 떠들지 마라, 건방진 놈이네. 내 큰 몸집이 안 보이냐!”부쓰지仏次(프랑스) “로스케, 나한테도 나눠 줘”도쿠이치独一(독일) “부쓰지, 네가 받으면 나한테도 나눠 줘”베이조우米蔵(미국) “이거 재밌네. 로스케 놈 센 척 말해도, 아사히한테 당하지 않을까”에이코英子(영국) “로스케 저 얄미운 얼굴. 아리오 씨, 그 배 타로한테 줘요”아리오有夫(아르헨티나) “그래 빨리 주자”(아르헨티나에서 군함 닛신日進, 가스가春日를 구입)칸보韓坊(한국) “타로 형, 무서워~~”세이키치清吉(청국) “푸우~”

    도쿠이치

    로스케

    아사히

    세이키치

    베이조우칸보

    부쓰지

    에이코아리오

    민족문제연구소

  • 1

    「공원의 각 나라 아이들 公園の各國兒童」이라는 제목의 이 그림은 메이지 시기부터 만주사변까지 일제의 침략전쟁을 다룬 화첩 전역화첩 어국지예戰役畫帖 御國之譽에 실려있는 풍자화다. 도쿄의 성문사省文社에서 1936년(소화11년) 10월 30일 초판이 발행되었고 연구소 소장본은

    1936년 11월 5일에 발행된 20판본이다. 이 화첩 서문에는 “메이지부터 쇼와시대까지 국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열강이 경이로워 했는데 이는 전쟁에서 황군의 대활약 때문”으로 “몸을 버리고 집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군국을 위한 나아간 귀중한 공적을 다시 음미하는 것”이 간행 목적이라 밝히고 있다. 따라서 청일전쟁, 러일전쟁, 만주침략 등 전쟁을 통한 일본제국의 ‘발전’을 주로 다루고 있다. 그림의 소재 또한 육군성과 해군성의 제공 자료를 활용하였으며 일본이 벌인 전쟁을 한

    눈에 이해하기 쉽게 구성하였다.

    총 60폭의 그림으로 구성된 전역화첩 어국지예에서 27번째 그림으로 등장하는 「공원의 각 나라 아이들」은 청일전쟁 직후 일본과 서양 열강들의 세력다툼을 일본의 시각으로 풍자한 것이다.

    청나라가 졸고 있는 사이에 큰 몸집의 러시아가 청나라 소유의 만두(만주滿洲를 만두로 표현)

    를 슬쩍 가져가자 소년으로 표현된 일본이 러시아의 손목을 잡으며 저항하고 있고 그 모습을 지

    켜보는 서양 열강들의 반응을 나타내고 있다. 이 와중에 아이로 표현된 조선은 일본의 다리에 매

    달려 무섭다고 외치고 있는데, 격랑 속의 동아시아 정세를 비유하면서 일본을 마치 ‘동양의 수호자’인 양 미화하였다.

    1895년 4월, 일본은 한껏 들떠 있었다. 청일전쟁의 승리로 대륙 침략을 위한 발판이 마련되었으

    니 어찌 기쁘지 아니하였겠는가.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일본이 랴오둥 반도의 지배권을 확보하자

    대다수의 언론은 마침내 일본이 노쇠한 아시아의 대열에서 벗어나 서양 강대국과 대등하게 교류

    할 자격을 얻었다고 자평했다.

    그러나 일본의 자축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한반도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커질 것을 우려한 러

    시아가 프랑스, 독일과 협력하여 랴오둥반도를 청에 반환하도록 일본에 압력을 행사했기 때문이

    다. 이른바 ‘삼국간섭’이다. 아직 러시아와 정면으로 맞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일본은 이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삼국간섭의 결과에 청일전쟁의 승리에 취해 있던 일본 국민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으며, 서구열

    강은 이를 기회로 경쟁적으로 청나라 분할에 나서게 되었다. 1898년 3월에는 독일군이 자오저우

    만膠州灣에 상륙하였고, 프랑스·영국 등도 앞다투어 군대를 파견하여 조차지租借地를 요구하였으며, 러시아는 만주의 철도 부설권을 획득하고 랴오둥반도를 조차하였다. 이 사건으로 러시아를

    향한 일본의 적대감은 더욱 커졌으며 결국 러일전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청일전쟁을 계기로 중

    국은 반식민지로 전락하였고 조선은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을 받으며 결국 식민지의 길로 들어서

    게 되었다.

    이 한장의 그림으로 19세기말 풍전등화와도 같았던 조선의 운명을 가늠해 볼 수 있다.

    「공원의 각 나라 아이들 公園の各國兒童」은 5월 개관하는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에도 전시될 예정이다.

  • [ 시론 ]

    4월 잔인한 달에서 ‘다시 민주주의로!’

    박한용 교육홍보실장

    본디 태평성대란 없다. 성군의 표본이라 할 세종 대에도 민란이

    일어나고 도적이 횡행하지 않았는가. 그렇다고 세종 치세를 난세

    라 부르지는 않는다. 완벽한 사회란 있을 수 없기에 불만들을 줄

    여나가고 구조를 개혁하는 것으로 위기를 넘길 수 있으면 그게 정

    상사회요 정상국가이다.

    세종 때 추진된 다양한 개혁 정책은 건국 프로그램의 연장선상

    에서 불만과 혼란을 줄여나가는 과정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렇

    게 공감을 넓혀나가는 이상적 군주를 성군이라 부른 것이고, 그러한 시대와 그것을 표상하

    는 인물을 함축한 표현이 태성성대일 것이다.

    그런데 난세는 실재한다. 지금 이 나라는 총체적 난국이다. 총체적 난국은 망국의 전조

    이다. 망국의 징조를 망조라고 한다. 지금 이 나라는 망조가 들었다. 이명박 정권 이래 박근

    혜 정권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예전 독재자들의 악행들이 기득권 사회 곳곳에서 다시 부활

    하는 것을 보고 있다.

    얼마 전 뉴스에는 역외탈세, 자금세탁, 검은 돈 은닉 등을 주요 서비스로 제공해 온 파나

    마에 있는 로펌 모색 폰세카(Mossack Fonseca)의 비밀장부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남

    노재현 씨를 비롯한 한국사람 이름이 195명 나왔다. 부유층의 도덕적 타락은 갈 데 까지 갔

    다고 봐야한다. 경제는 성장했다는데 사람 사는 꼴은 말이 아니다. 옷은 커졌지만 사람은

    영양실조에 걸린 형국이 지금 대한민국의 경제 현실이다. 대기업에 잠자고 있는 사내 보유

    금은 무려 700조원에 달하는 대신 소득의 불균형은 커져가고 서민들은 생존 위협에 내몰

    리고 있다.

    내집마련은커녕 결혼마저 포기하거나 결혼을 하더라도 자식을 갖지 않겠다는 20, 30대

    가 득시글하다. 입시나 교육마저 신분세습의 도구가 되었고 청소년 자살율은 OECD국가

    가운데 최고이고 정신상담을 받는 청소년들은 날로 늘어가고 있다. 아버지를 해고하고 아

    들을 취업시키겠다는 해괴한 고용정책이 남발한다.

    2 201604

  • 그것도 모자라 테러방지라는 미명 아래 개인의 신상마저 털려고 한다. 유신독재로 돌아

    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져가고 있다. 대통령의 말은 외계인의 말이라는 농담 아닌 탄식

    마저 나온다. 의사불통에 고집불통까지 더해지니 암울하기 짝이 없다. 야당은 지들끼리 찢

    어져서 싸우니 국민들은 야당을 찍어주려고 해도 누굴 찍어야 할 지 망연자실이다. 오죽하

    면 ‘수능찍기 보다 어려운 투표찍기’라고 하겠는가.

    북에서는 연일 핵이니 미사일이니 엄포를 놓고, 전쟁이 날 듯 소란스럽다. 이런데도 한국

    은 미국에 끌려 다니다가 중국에게 야단맞고 일본에게 실속을 다 빼앗기고 있다. 외교정책

    조차 없다. 이게 망조가 든 게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했다. 우리 현대사의 4월을 돌아보니 더욱 그런 느낌이 든다. 1948

    년 ‘4·3사건’으로 2만5천~3만 명의 피해자가 났는데, 「제주4·3특별법」에 의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이 가운데 사망자만 14,000여명에 달한다. 이 억울한 피해는 노무현정권 때 어느 정

    도 명예회복이 되면서, 역사교과서는 종래의 ‘4·3폭동’을 ‘4·3사건’이란 용어로 고쳐 기록했

    다. 그러나 수구세력들은 4·3사건을 다시 ‘공산폭동’으로 몰면서 ‘4·3폭동’으로 다시 고쳐야

    한다고 떠들고 있다.

    1960년 4월혁명에서 꽃다운 젊음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피흘리며 산화했다. 4월 혁명은

    한국 민주주의 운동의 꺼지지 않는 분화구였다. 그럼에도 2013년 8월에 검정통과한 뉴라

    이트의 역사 교본인 교학사판 한국사 교과서는 3·15부정선거나 4·19혁명을 독재자 이승만

    하고는 하등 관계가 없는 것처럼 호도했다. 5·16쿠데타를 장면정권의 경찰 해고 등 치안 혼

    란 때문에 자초한 것으로 정당화했다. 이 따위 교과서를 국민의 교과서라 추켜세우던 이 정

    권은 90퍼센트의 역사교수가 좌경화되었다는 막말까지 퍼부으면서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밀어붙였다. 이 정권의 역사 망발은 극에 달하고 있다.

    올해 4월은 4.13총선, 4·16 세월호 2주기, 4·19혁명 56주년으로 이어진다. 총선이 끝나고

    이어지는 세월호 2주기에는 또 무슨 낯으로 죽어간 아이들의 영정을 대면할 것이며 유족들

    을 바라볼 것인가. 56년 전 스러져 간 꽃다운 젊음에다가 더해 미처 피어보지도 못하고 사

    라진 어린 영령들까지 대면해야 하는 4월은 너무도 괴롭고 잔인하다. 대한민국은 국민이 주

    인이 아니라 일개 권력자를 섬기는 도구로 전락했다.

    그러나 이 사월을 잔인한 사월로 보내줄 수 없다. 본디 민주주의란 피를 먹고 자란다고

    했다. 국민의 의무만을 강요하는 못된 정권,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역사마저

    뒤바꿔버리는 패륜적 행위에 대해 국민의 명령을 다시 내려야 한다.

    그것만이 잔인한 4월을 5월의 신록을 피워내는 탄생의 준비기로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동작 그만! 다시 민주주의!

    3

  • 4 201604

    2016 민족문제연구소 정기총회 스케치

    창립 25년을 맞은 연구소 정기총회가 3월 12일 조계사 전통문화예술공연장에서 열렸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먼 길을 마다않고 달려온 약 200여 명의 회원들이 자리를 빛내 주었습니다.

    올해 정기총회에서는 몇 가지 이벤트가 있었습니다. 개회에 앞서 모든 참석자들이 서로 인사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악수 릴레이’는 서먹함을 없애고 연구소 회원 모두 동지라는 의식을 일깨우는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함세웅 이사장의 개회사,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의 격려사, 여인철 운영위원장의 인사로시작하였습니다.

  • 5

    2015년 사업보고는 또 하나의 참신한 시도였습니다. 올해는 2015년 10대 뉴스를 중심으로 연구소가 펼친 주요 활동을 2명의 캐스터가 소개하는 형식으로 꾸며 보았습니다. 영상자료를 기반으로 방은희 교육팀장, 김영환 대외협력팀장이 연구소 활동을 재치있게 설명하여 큰 호응을 받았습니다.

    2015년 결산보고에 이어 김승은 자료실장의 2016년 사업계획 보고가 이어졌습니다. 올해 연구소는 창립25주년 기획사업,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준비, 역사정보데이터베이스 구축사업, 친일문제연구총서, 한일극우세력의 역사왜곡에 대한 대응을 핵심과제로 뽑았습니다. 2016년에도 연구소는 5대 핵심과제를 중심으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연구소 영상팀이 만든 「위험한 시그널, 국정교과서」를 상영했습니다. 공식 공개에 앞서 회원들께 미리 보여 드렸습니다. 영상은 3월 30일부터 유튜브 등 각종 매체를 통해 공개되었습니다.

    가수 최도은 씨가 ‘국정교과서 반대의 외침’, ‘불나비’,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습니다. 회원들도 일어나 주먹을 쥐고 함께 불렀습니다.

  • 6 201604

    총회 후반부는 연구소 임원 및 회원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시간이었습니다.최수전 감사의 연임을 승인하고, 신임 최창옥 이종민 운영위원에게 임명장을 수여했습니다. 또 오랫동안 연구소 활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해 온 김헌식 윤일 홍진경 님께 공로패를 드렸습니다. 전임 운영위원 박기호 윤옥식 님, 전임 이사 장병화 고 장두석 님에게도 공로패를 드렸습니다.

    마지막으로 각 지부에서 뛰어난 활동을 보인 강동화(광주) 정태수(충북) 김창의(경기동북) 서승의(고양파주) 장재영(서울동부) 이방욱(서울중부) 홍경표(대전) 홍성표(충남) 이남희(관악동작) 김점선(부산) 성백만(성남광주) 채길모(경기북부) 정동조(부천) 김광진(인천) 박향란(전북) 님에게 모범회원상을 드렸습니다.

    자유토론 시간에는 여러 회원들이 연구소 활동을 위한 제언을 해 주셨습니다. 함께 한 회원들과 “친일파 청산” 구호를 외치며 정기총회를 마무리했습니다.

    ∷ 글 권시용 선임연구원 ∷ 사진 장이근 회원

    공로패를 받은 김헌식(왼쪽), 윤일(오른쪽) 회원과 함세웅 이사장

    모범회원상을 받은 회원들

  • 7

    박카스 같은 활력을 불어넣은 일일주점

    반민족문제연구소에서 민족문제연구소로 임의단체에서 사단법인으로 전환하며 친일인명사전 편찬의 토대를 굳건히 하기 위해 연구소는 1996년 초부터 서울지역 회원 모임을 적극적으로 꾸리기 시작합니다. 당시 연구소의 활동은 널리 알려지지 않아서 회원 모

    임은 물론 사업활동도 전체적으로 다소 침체된 상황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연구소를

    알릴 수 있는 수단이라곤 삼일절이나 광복절에 한겨레신문 정도에 잠깐 기사가 나가는 것

    이 거의 전부였으니 말입니다. 그러다가 가장 활발히 움직이고 있던 강동송파모임이 깃발

    을 들었습니다. (당시 강동송파지역에서 꾸준히 회비를 내는 회원은 채 10명이 넘지 않았

    습니다. 지금은 약 320명 정도이니 그야말로 격세지감이 듭니다.)

    그래서 계획한 것이 바로 연구소 후원 주점이었습니다. 막상 직장인들이 후원 주점을 준

    비하기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강동송파모임은 학원 선생님들이 많았는

    데, 잠실에서 오랫동안 학원을 운영하면서 초기 모임을 주도한 신창헌 회원(전 연구소 이

    사)과 양재동 회원 그리고 노은숙 회원이 중심이 되어 서울의 다른 지역 모임을 일일이 방

    문하면서 후원 주점 홍보에 나섰습니다.

    드디어 1997년 8월 23일 서울의 한 호프집에서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하루주점’이라는 이름의 주점이 열렸고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당시 이돈명 이사장도 오랫동안 자

    리를 함께 했고 아마추어일망정 노래, 만담, 마술, 민요, 자작

    시 낭송 등 회원들 스스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했습니다.

    두 번째 후원 주점은 1997년 말 IMF 사태의 여파가 여전

    하던 1999년이었습니다. 이번에 구원투수로 나선 곳은 ‘얼산이’(얼이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뜻의 순우리말) 즉 연구소 청년회였습니다. 어린 두 아들과 아내까지 거의 모든 청년회 모

    임에 함께 참여하며 열성을 다한 한호석 회원이 청년회장을

    맡아 1999년 5월 15일 한양대 앞 호프집에서 ‘친일인명사전 편찬과 연구소 기금 마련을 위한 하루 주점’을 개최했고 이번에도 큰 성황을 이뤘습니다. 수익금으로 약 500만원을 연

    구소에 기부했는데 그 금액은 당시 연구소 한달 회비보다도 많은 금액이었습니다.

    연구소가 지치고 의기소침한 순간에 박카스같은 활력을 불어넣어준 것은 다름 아닌 회

    원들이었습니다. 창립 25주년인 올해,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을 후원하는 하루주점을 개

    최하고픈 지부나 회원님들은 손들어주세요. 벌써부터 여기저기서 환청이 들립니다. (저요

    ~ 저요~)

    사진

    으로

    보는

    연구

    소 소

    사·11

    첫 후원주점 사진이 실린 회원 소식지 「민족정기」 9월호 표지

  • 8 201604

    투표 독려를 위한 ‘2016 리멤버 카 캠페인’ 진행

    연구소가 참여하고 있는 민주주의국

    민행동(상임대표 함세웅)은 세월호 참

    사 700일째인 3월 15일부터 4·13총선일 전날까지 투표 참여를 독려하기 위

    해 ‘2016 리멤버카(remember car) 캠페인’을 진행했다. 리멤버 카는 세월호 참사와 일본군 ‘위안부’, 역사교과서 국정

    화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젊은이들이 반드시 투표해야 한다는 점을 홍보하고자 기획되었다.

    1톤 트럭을 개조한 리멤버 카 겉면에는 ‘4월13일, 20대 국회의원 선거일입니다’라는 글귀와 함께 투표를 통해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위안부 합의 무효화, 역사왜곡 저지 등을 이루자는 문구가

    담겼다.

    또한 로고는 안중근 의사의 단지(斷指) 그림에 노란 리본과 노란 나비를 넣었는데 이는 세월호

    참사와 일본군 ‘위안부’,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 등을 의미하는 상징물을 조합한 것으로 김운성 김서경 작가 부부가 재능기부 형식으로 디자인한 것이다. 리멤버 카에 대한 자세한 활동 내용은 다

    음 달 회보에 소개할 예정이다. www.facebook.com/remembercar ∷ 방학진 사무국장

    안중근의사 순국 106주기 추모식 열려

    안중근의사 순국 106주기 추모식이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와 우리 연구소가 공동주최하고 여

    러 단체가 후원한 가운데 3월 26일 오후 2시 서울 용산 효창원 안중근의사 묘역에서 열렸다. 이

    날 추모식에는 시민과 학생 300여명이 참석해 최근 우리 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음을 다

    시 확인할 수 있었다.

    공식 행사에 앞서 작년과 마찬가지로 조선동(서울예원학교 교사) 홍소연(연구소 운영위원회 부

    위원장) 회원과 배상국(백범 암살을 다룬 소설 「미씽 링크」 작가) 님과 방학진 사무국장 등이 낮 12시부터 중고등학교생 약 200명을 대상으로 백범기념관, 효창원 임정요인 묘역, 삼의사 묘역, 백

    범 묘역을 안내해 참석한 학생들과 동행한 학부모들의 큰 호응을 받았다.

    인천 청라고 구자순 회원, 서울 예일여고 윤경수 회원은 제자들을 직접 인솔해 추모식에 참석

    하기도 했다. 또한 이영국(서울남서지부장)회원이 지휘한 안중근 어린이합창단의 합창과 유세종

    (독립운동가 유만수 선생 차남)님이 지휘한 안중근청소년평화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추모식을 더

    초점

  • 9

    욱 풍성하게 해주었다.

    특히 올해는 다소 무거운 분위기

    였던 예년과 달리 깜짝 공연을 선

    보이며 감동과 재미를 더했다. 배우

    황건 씨는 1909년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 위해 나선 안중근 의사의

    모습을 관중들 사이에서 연기했으

    며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감동적으로 공연을 끝마쳤다. 황건 씨는

    “안중근 의사 자료 전집을 받아 공부하고 대본쓰고 연출·섭외·출연에 의상·소품·음향까지 맡으며 힘에 부쳤지만 무사히 마쳤다. 관객 분들이

    눈물 흘려주시고 만세를 같이 외쳐

    주실 때는 가슴이 벅찼다”며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와 민족문제연구소에 감사드리고 공연을 함께 해준 배우 서정식 류세일 이상진 씨와 바이올린 연주를 해준 아내에게도 고맙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 방학진 사무국장

    “을미오적, 나는 안찍지 말입니다”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사무국 민족문제연구

    소, 이하 저지넷)가 참여하고 있는 2016총선시민네트워크는

    20대 총선을 눈앞에 두고 1만 유권자가 선정한 전국의 ‘집중심판대상자’를 찾아가는 ‘낙선투어’를 진행했다. 저지넷은 지난 4월 5일과 7일 황우여가 출마한 인천 서구을, 8일은 김을

    동이 출마한 서울 송파구병, 10일은 나경원이 출마한 서울 동

    작구을 선거사무소 앞에서 이들에 대한 심판을 호소하는 기

    자회견과 퍼포먼스를 벌였다.

    저지넷은 지난 3월 역사교과서 국정화 주도와 한 일 위안

    부 합의 옹호 등의 이유로 김무성, 황우여, 이정현, 김을동, 나

    경원 후보를 을미오적(乙未五賊)으로 선정하고, 이들에 대한

    심판을 촉구하는 활동을 해왔다.

    ∷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 사무국 송민희

  • 10 201604

    ∷ 인터뷰 │ 최홍이 회원·전 서울시교육위원

    아픔을 아픔이라 말하지 못한 세월

    정리 : 김진주 서울관악동작지부 회원

    27년 전, 췌장암으로 죽어가던 한 남자가 있었다

    마흔여덟의 한창 나이, 교사라는 선망의 직업. 게다가 술담배도 즐기지 않는, 절제된 생활이 몸

    에 밴 사람이다. 그런데 췌장암이라니. 그것도 병원에서 “더 이상 오지 않아도 된다”니…세상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는 법. 그가 췌장암이라는 몹쓸 병을 얻은 데도 원인이 있을 테다. 그

    원인을 찾고 싶다면, 이로부터 39년을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잠자리채를 들고 고추밭을 누비던

    아홉 살의 그를 만나러, 1950년의 충청남도 홍성으로 떠나야 한다.

    여느 날처럼, 아이는 고추잠자리를 잡느라 여념이 없었다

    문득 아이의 눈에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어머니가 들어왔다. 어머니가 운다. 그냥 우는 것도

    아니고 방석을 쥐어뜯으며, 눈물로 세수를 한다. 고개를 갸우뚱하다 다시 고추잠자리를 따라간

    아이는 그 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한참 후에야 알게 됐다. 그 날 자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그리고 세월이 한참 더 흐르고 흐른 후에야, 아버지가 동네 사람들과 굴비처럼 엮인 채 끌려가,

    ‘죽임’을 당하셨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무려 50년 후인 2000년 1월 15일, 그 마을에 사시는 고모의 입을 통해서였다. 알고도 그 오랜 세월을 함구해온 고모에게 크나큰 배신

    감을 느꼈지만, 한편 이해도 됐다. 참혹한 이해였다. 얼마나 무자비한 세월이었으면, 친오빠가 자

    기마을에 끌려와 학살당했는데도 50년이나 숨죽이고 입 다물고 지냈겠는가? 그는 잠들지 못한

    아버지의 시신이, 그 곳 어딘가에서 자신을 부르고 있는 것을 것을 느꼈다. 아버지가 세상을 살았

    던 43년보다도 훨씬 긴 66년이라는 세월을, 자식이 찾으러 올 날만 기다리며 한 순간도 눈을 붙이

    지 못했을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은 최원복. 1908년에 태어났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과 ‘한일합병조약’이 강제체결된 1910년 사이에 태어난 그의 삶은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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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탄할 리 만무했다. 게다가 가난한 집안에

    서 아버지의 기대에 묻혀 자란 첫째 아들

    이었다. 그러나 최원복의 삶이(죽음마저

    도) 결코 순탄할 수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

    는 그의 성품에 있었다. 국권을 잃은 시기

    에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불의에 굴복할 수 없는 성품의 소유자이

    기까지 했던 것이다. 1929년, 홍성공업학

    교 1학년생이었던 최원복은 광주학생독

    립운동에 몸을 던졌다. 그가 던진 것은 그

    한 몸 뿐이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가 그를 동네에서 제일 좋

    은 공업학교에 보내며 걸었던 모든 꿈을

    내던진 것이다. 최원복의 아버지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애머슴으로 갖은 설움과 고

    초 끝에 일가를 이뤘다. 그런 그에게 큰아

    들 최원복은 삶의 희망이었고 꿈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꿈은 참 야속하게도, 조

    국독립을 향한 큰아들의 염원에 묻혀 불

    타버렸다. 절망은 순식간에 노여움으로 변했다.

    학교를 잘 마치고 면서기라도 될 줄 알았던 큰아들은, 2학년 진급을 한 달 앞두고 퇴학을 당했

    다. 그리고 순사에 쫓겨다니는 몸이 됐다.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보며, 안쓰러운 마음조차 가질 수

    없었다. 자신의 기대를 저버린 아들이 미울 뿐이었다. 밉고 또 미웠다. 아버지는 큰아들이 가장 아

    끼던 벼루를 박살내며 분노를 쏟아냈다. “이눔이 하라는 글공부는 안 허고 쓰잘머리 웁넌 독립운동질이냐!”

    결국 최원복은 아버지의 노여움과 순사들의 감시를 피해 고향 홍성을 떠났다. 순사를 피해 여기

    저기 떠돌다 함경남도 흥남에 간신히 자리를 잡았다. 알루미늄 공장에 취직을 한 것이다. 결혼도

    했다. 1946년, 해방 1주년이 되자 최원복은 가족들을 데리고 고향 홍성으로 돌아왔다. 해방이 됐으

    니 이제 순사에게 쫓길 일은 없을 것이고, 아버지의 노여움이 무섭다 한들 타향살이 서러움만 하

    겠는가. 아버지는 17년 만에 돌아온 큰아들을 거두었다. 최원복은 이제 고향에 정착하는가 싶었

    다. 아내와 7남매들과 함께…

    그러나 1950년. 6·25가 터졌다

    거짓방송으로 국민을 속이고, 한강다리를 폭파시킨 후 도망갔다 돌아온 이승만의 적반하장과

    아버지가 학살당하신 폐광입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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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행은 끝이 없었다. 피난을 가지 못한 채 남아서 고초를 겪던 국민들은 졸지에 반역자가 됐다. 자

    신도 모르게 ‘보도연맹원’이 된 최원복은 다른 보도연맹원들과 굴비처럼 엮인 채 끌려갔다. 아홉 살짜리 아들은 그 날도 고추잠자리를 잡고 있었을까. 최원복과 함께 끌려갔다가 기적처럼 살아 돌

    아온 한 사람이 최원복의 아내를 찾아왔다. 남편의 죽음과 함께, “죽어 구름 속에서라도 어린 칠남매를 지켜주겠다”던 유언을 전했다.

    고추잠자리를 쫓아다니던 아홉 살 최홍이

    그날 어머니가 왜 눈물로 세수를 했는지 몰랐던 아이는 홀로 7남매를 키우기 위해 달밤에 콩

    밭을 매는 어머니를 보며 자랐다.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하는 나라, 망하기 싫으면 불의에 굴복

    해야 하는 나라. 그런 나라에서 독립운동가 최원복의 아들 최홍이는 망하지도, 불의에 굴복하지

    도 않았다.

    납부금을 외상으로 해달라고 애걸해 고등학교를 들어갔다. 등록금 마련이 어려워 6년 만에 간

    신히 졸업하고 군대에 갔다. 제대 후 상경했으나 서울에는 그가 취직할 곳이 없었다. 우여곡절 끝

    에 교대에 들어갔고, 장학금과 학보기자 월급으로 졸업했다. 초등교사로 일하다 다시 검정고시로

    중등교사가 됐다. 자신이 어려웠던 만큼, 어려운 처지의 학생들에게 더욱 깊은 애정을 쏟았다. 참

    교육을 위해 전교조에 가입했다. 전교조조합원에서 서울시 3선 교육의(위)원을 지내다, 제8대 서

    울시의회 후반기 교육위원장에 선임되기도 했다.

    최홍이 씨에게 세월은 아홉 살 그 때에 멈춰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것들 뿐이다. 아무 잘못도 없는, 아니 조국독립을 위해 싸웠던

    아버지가 왜 죄인처럼 쫓겨 다녀야 했는지. 왜 어머니와 7남매를 남겨둔 채 그토록 일찍 세상을 떠

    나야 했는지. 누가, 왜 아버지를 구덩이로 끌고 가 총질을 해댔는지. 아버지를 빼앗아 간 것도 모자

    라, 지금까지도 자신과 아이들까지 괴롭히는 ‘연좌제’는 대체 무엇인지, 왜 아버지의 시신조차 찾을 수 없었는지… 이유조차 알 길 없는 아픔들. 더욱 아픈 것은, 아프다 비명조차 지를 수 없다는

    것이다. 아픔을 아픔이라고 말할 수도 없던 세월, 그 아픔과 울분은 분출되지 못한 채 켜켜이 쌓

    였고, 결국 췌장암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전교조 탄압이 시작된 1989년, 당시 마흔여덟이던 최홍

    이 씨는 췌장암 진단을 받았다. 유서까지 써놓은 채 교직생활을 계속하던 그는 한방치료를 통해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그리고 27년 후, 2016년

    2월 25일 아침, 최홍이 씨는 밤잠도, 아침밥도 설친 채 홍성 광천읍 꿀꿀이 산으로 향했다. “아버지 최원복의 유해가 이곳에 묻혀있다”는 말에 한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그곳에서 최홍이 씨와 같은 아픔을 지닌 사람들, 그리고 이 일을 돕기 위해 온 사람들을 만났다. 이 날 아버지의 유해를 찾

    지는 못했지만, 최홍이 씨는 포기하지 않고 아버지를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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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3월 말, 최홍이 씨를 인터뷰하기 위해 약속장소인 신림동으로 가면서, 나는 살짝 걱정이 됐

    다. 인터뷰가 그의 상처 깊숙한 곳을 건드리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였다. 그러나, 그는 걱정했던 것

    보다 밝은 얼굴로 선선하게 이야기를 풀어내며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올해 3월에 민족문제연구소에 가입했어요. 김영환 팀장님이라는 분이 정말 자기 일처럼 애쓰는 모습에 감동했거든요. 원래 무기명 후원은 해도 회원가입 같은 것 안하는데.”

    “후원을 하면 생색을 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인데요. 왜 무기명으로 후원을?”

    “연좌제, 신원조회, 이런 거 안 당해본 사람은 몰라요. 어떤 단체에 최홍이가 후원을 했다, 이런 말이 오가는 것조차 두려웠을 정도니까.”

    “정말 힘드셨겠어요”라고 말하려던 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어떤 말로도 그 아픔을 표현하거나 위로를 건넬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형언(形言)할 수 없는 아픔’이라고들 한다

    제아무리 달변가라 해도 말이라는 형식에 차마 가둘 수 없는 아픔을 말하는 것일 테다. 나는 이

    말에서 중의성을 느낀다.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은 말의 표현력이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에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나, 동시에 “말로 표현하는 것을 금지 당했다”는 뜻도 된다.

    내게는 최홍이 씨의 경우가 그랬다. 무슨 말로 그 아픔을 표현할 것인가. 그리고 감히 무슨 말을

    할 것인가. 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픔’을 드러내는 것조차 금지 당했던 세월. 아픔을 아픔이라 말할 수 없던 세월…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적어도 아프다고, 아팠다고, 그리고 누가, 왜, 어떻게 아프게 했는지 말길이나마 열어주어야 한다.

    조국독립을 위해 싸웠다는 죄로 냉대 받고, 17년 만에 찾아온 고향에서 죽임을 당했던 아버지를

    살려낼 수는 없어도, 남편을 잃고 7남매를 키우기 위해 새벽에 콩밭을 매야했던 어머니의 세월을

    돌려드릴 순 없어도 누가, 어떻게 그들에게 그런 짓을 했는지 전 국민을 향해 말길을 열어주어야

    한다. 그것만이,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위로가 아닐까.

    최홍이 씨가 하루 빨리 아버지의 유해를 찾기를 기원하며, 이에 더해 ‘말길을 열기 위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시도와 노력에 감사와 응원을 보낸다.

    민족문제연구소 모바일 페이지에서 ‘후원하기’ http://minjok.info/give주변 분들에게 많이 권유해 주세요.

    민족문제연구소

    이제 스마트폰에서도 회원가입이 가능합니다

  • 14 201604

    단신

    ▪ 이이화 지도위원(역사학자)은 3월 5일 경향신문이 창간 70주년 기념으로 마련한 ‘경향 70년, 70인과의 동행’에 해설을 맡아 동학농민혁명의 불길이 타오른 전북 정읍, 김제, 전주와 충남 공주 우금치 일대를 답사했다. 이번 답사에는 수도권뿐만 아니라 경북 구미, 충남 보령 등 전국의 경향신문 독자 70여명이 동행했다.

    ▪ 지학순 정의평화기금(이사장 김병상 신부, 연구소 3대 이사장)이 주관하는 지학순정의평화상 제19회 시상식이 3월 10일 서울 세종호텔에서 열렸다. 올해의 수상자는 말레이시아의 환경운동단체인 세이브 리버스(SAVE Rivers, 강 살리기 운동)로 이 단체는 2011년부터 사라왁 지역에 건설 예정인 다수의 대규모 댐으로 인해 부정적 영향을 받고 있는 마을 주민들의 조직화와 역량 강화를 위해 노력해왔으며 캠페인과 직접행동을 통해 주민들의 권리 옹호와 환경 보호에 힘써왔다. 지학순정의평화상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헌신한 지학순 주교의 뜻을 살려 정의와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이들을 격려하고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 도산학회장인 윤경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은 3월 10일 강남구 도산공원 선생 묘소에서 열린 도산 안창호 선생 순국 78주기 추모식에서 약전을 봉독했다. ▪ 박한용 교육홍보실장은 3월 11일 목포시 오거리문화

    센터에서 열린 ‘목포의 눈물’ 이난영의 친일행적과 기념사업의 방향 토론회에서 발제했다. 3월 24일에는 우당강좌에서 ‘1948년 건국인가 정부수립인가’를 주제로 강연했다. ▪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지난 3월 15일, 박정희 전 대통

    령의 만주군관학교 지원 혈서가 조작·날조되었다고 주장한 강용석 정미홍 일베회원 강씨에 대해 “손해배상하라”며 화해권고를 결정했다. 배상액은 강용석 500만원, 정미홍과 일베회원 강씨 300만원으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1심에 이어 민족문제연구소에 대한 강 변호사 등의 명예훼손을 인정한 결정이다. 원고와 피고가 2주안에 이의신청을 하지 않으면 재판상 화해와 같은 효력이 생겨 사건이 끝나지만 이의신청이 있으면 정식재판이 다시 개시된다.▪ 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상임대표와

    김영환 연구소 대외협력팀장은 3월 16일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열린 야스쿠니합사철폐 2차소송 참석차 15일부터 17일까지 방일했다. ▪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는 3월 17일 서울 인사동 ‘천

    강에비친달’에서 대표자회의를 열고 2016년도 사업을 논의했다. 이날 회의에서는 서전서숙 설립 110주년을 맞아 관련 학술회의를 6월 9일 개최하는 것을 비롯해 서전서숙 설립 주역인 보재 이상설 선생 유적지 답사 등을 진행키로 했다. 윤경로 상임대표가 주재한 회의에는 전기호 한용원 김삼웅 서중석 황원섭 공동대표와 이준식 기획위원장, 김용호 행사위원장, 정철승 조직위원장, 김재운 기획팀장, 방학진 사무국장 등이 참석했다. 한편 EBS 교육방송은 ‘인성캠페인 가문의 유산’을 편성해 석주 이상룡 편을 4월 한 달 동안 연속 방영했는데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공동대표인 이항증 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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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회 경북지부장은 이상룡 선생의 증손자이다.▪ 독립운동가이자 연구소 2대 이사장인 고 조문기 선생

    의 외손녀 김슬아 양이 3월 19일 용인 아이티컨벤션웨딩홀에서 박용효 군과 결혼식을 올렸다.▪ 통일운동과 민족생활의학 전파에 헌신했으며 연구소

    이사를 역임한 해관 장두석 한민족생활문화연구회 이사장을 기리는 1주기 추모행사가 3월 25일 오후 2시 전남 화순군 이서면 용강마을 양현당에서 열렸다. 추모 행사에서는 추모의 노래와 암도 스님의 추모사, 박몽구 시인의 추모시에 이어 김형진 순천향의대 외래교수가 ‘민생활의학의 현대의학적 고찰’을 주제로 강연을 했으며 극단 깍지의 추모 공연도 이어졌다. 1938년 화순에서 태어난 장두석 선생은 초등학교 2학년을 중퇴하고 집을 떠나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자연 치유를 경험했고 1975년 자연건강대학을 설립해 민중의학을 펼치기 시작했다. 민주화와 통일, 노동, 환경, 농민운동을 하다 도피 생활과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며 6․ 15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상임대표, 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공동대표를 맡아 통일운동에 앞장섰다.▪ 야마구치 고이치 오사카 오테몬가쿠인대 국제교양학

    부 교수가 3월 26일 연구소를 방문했다. ▪ 이준식 연구위원은 3월 26일 경희대 한국현대사연

    구원이 주최한 ‘한국 근현대의 모습: 삶과 문화, 그리고 사회변화’ 학술대회에 토론자로 참석했다. 29일에는 ‘창비학당 강좌-한국근현대사의 쟁점들’에서 친일문제와 과거사 정리를 주제로 강연했다. 31일에는 포천교육문화 사회적 협동조합 강좌에서 국정교과서를 주제로 강연했다. ▪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상임대표 이희

    자)는 3월 28일 청량리 가마솥설렁탕에서 2016년도 정기총회를 열고 2015년 사업평가와 결산, 2016년 사업계획과 예산안을 승인했다. ▪ 4월 23일부터 26일까지 3박 4일간 서귀포 강정마을에

    서 제1회 강정국제평화영화제(조직위원장 : 홍성우, 집행위원장 : 양윤모)가 열린다. 이 영화제는 2007년 해군기지 건설 반대운동으로 시작된 강정마을 주민들의 투쟁이 최근 다양한 형태의 생명평화마을 운동으로 진화하고 있는 가운데, 강정마을 주민들과 평화운동 활동가, 각계의 시민운동가들이 강정마을을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의 상징으로 가꾸어 나가자는 뜻에서 개최하게 되었다. www.ipffig.org

    ▪ 경기북부지부(지부장 김재광)는 3월 5일 전교조 의정부지회 사무실에서 지부 총회를 열었다 이날 총회에서는 2015년 사업 및 결산과 2016년도 사업계획과 예산안을 승인했다. 또 고문변호사, 신임 자문위원 위촉 그리고 지회장과 지부 운영위원 등에 대해서도 승인했다. 지부는 특히 20~30대로 구성하는 지부 청년회 조직에 힘을 쏟기로 했다.

    ▪ 전북지부(지부장 김재호)가 참여하고 있는 ‘한국사 국정화저지 전북네트워크’는 3월 16일 도교육청에서 초등학교 사회교과서 폐기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 경기성남광주지부(지부장 이덕수)는 3월 18일 성남시

    의회 1층 소회의실에서 지부 총회를 개최하고 새 지부장으로 허남해 회원을 선출했다. 허남해 회원은 2005년 회원 가입 이래 지부는 물론 본부 사업에도 열성적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작년 10월부터 최근까지 야탑역에서 국정화 반대를 위한 야외 전시회를 진행하고 있다. ▪ 광주지부(지부장 김순흥)는 3월 18일 지부 회원들과

    함께 여수지역 답사를 다녀왔다. 주로 여수순천사건의 현장을 방문한 이번 답사에는 여순사건 전문가인 주철희 전 전남동부지부장(현 순천대 지리산권문화연구원 여순연구센터장)이 직접 안내를 맡아 깊이 있는 해설

    지부지회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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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 해주었다. 답사 이튿 날인 19일에는 여수우도풍물굿 보존회(예술총감독 김영)를 방문해 장구 9개, 꽹과리 3개, 북 3개, 징 2개, 소고 6개 등 다수의 악기를 기증받았다. 이 물품은 광주지부를 통해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후손들에게 전달될 예정이다. 여수우도풍물굿 보존회는 2년 전부터 카자흐스탄 고려인 학교에 전통악기가 없어서 한국의 전통음악을 배우고자 하는 교포 3, 4세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고, 그동안 도서지역이나 경로당 등에 기증 하려고 모아둔 중고악기 등을 수리하고 몇몇 악기는 직접 구입해서 이번에 광주지부에 기증한 것이다.

    ▪ 전남동부지부는 3월 18일 순천 연향동 전주콩나루식당에서 지부 총회를 열고 새 지부장에 박주권 회원을 선출했다. 이날 열린 지부 총회는 지부 정상화를 위해 지난 운영위원회와 이사회의 결의로 이뤄졌다. 그간 전임 지부장인 강세형 회원이 작년 2월로 임기가 만료되었음에도 지부 총회를 개최하지 않는 등 지부 활동이 사실상 정지된 상황이었다. 원만한 지부 총회 개최를 위해 함세웅 이사장을 비롯해 김순흥 광주지부장, 김희원 경기동북지부장, 김재운 서울동부지부장, 방학진 본부 사무국장 등이 함께 했다. 박주권 지부장은 하루 속히 지부를 정상화하여 예전처럼 모범적인 지부가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 대전지부(지부장 이순옥)는 3월 18일 대전 중구청 옆

    다온밥상에서 월례회를 가졌다. 이날 모임에서는 4월 23일(토)~24일(일) 1박 2일 일정으로 공주로 지부 답사를 가기로 결정했다.

    ▪ 제천단양지회(지회장 정윤선)는 제천의병유족회와 함께 3월 19일 충북 제천시 백운면 소재 박달재 노래비 옆에 ‘반야월의 일제치하 협력행위 안내판’을 세웠다. 대중가요 ‘울고 넘는 박달재’의 작사가로 유명한 반야월(1917∼2012)은 일제강점기 다수의 군국가요를 작사하고 노래한 친일행위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으나 제천시는 2012년부터 10억 원을 들여 백운면 평동리 705번지 일원 1천650㎡ 부지에 건축 면적 200㎡ 규모의 반야월 기념관을 건립하고 박달재도 홍보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뒤늦게 그의 친일행적이 알려지면서 연구소 제천단양지회를 비롯한 지역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기념관 건립이 부적절하다는 비판이 제기돼 2014년 3월 8일 예정됐던 제2회 반야월 추모 음악회와 기념관 기공식을 취소된 바 있다. 한편, 지회는 3월 26일에는 제천시민회관 3층에서 최범산 작가(항일유적답사기인 두만강 아리랑 압록강 아리랑 저자)를 초청해 ‘만주의 항일 독립전쟁과 오늘’을 주제로 강연회를 열었다.안내판에 실린 그가 작사하고 불렀던 대표적인 군국가요 「일억 총진군」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나아가자 결전이다 일어나거라 / 간닌부쿠로堪忍袋 1)

    의 줄은 터졌다 / 민족의 진군이다 총력전이다 / 피 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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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 일억일심一億一心 함성을 쳐라 // 싸움터 먼저 나간 황군皇軍 장병아 / 총후銃後는 튼튼하다 걱정 마시오 / 한 사람 한 집안이 모다 결사대 / 아카이타스키赤い襷 2)에 피가 끓는다 // 올려라 히노마루日の丸 빛나는 국기 / 우리는 신의 나라 자손이란다 / 임금께 일사보국一死報國 바치는 목숨 / 무엇이 두려우랴 거리끼겠소 // 대동아大東亞 재건이다 앞장잡이다 / 역사는 아름답고 평화는 온다 / 민족의 대진군아 발을 맞추자 / 승리다 대일본은 만세 만만세

    ▪ 진주지회(지회장 조한진)는 3월 20일 150여명의 시민․ 학생들이 참여한 가운데 진주 만세운동 재현행사를 주최했다. 진주의 3․ 1만세운동은 3월 18일부터 5월까지 계속되었으며 참가 인원은 3만명으로 추산한다. 앞서 14일에는 진주지회 회원들과 시민․ 학생 100여명이 만세운동 유적지들을 탐방하는 ‘기미년 진주 만세운동 길걷기’ 행사를 가졌다. ▪ 이규봉 대전 시민단체연대회의 공동대표(전임 운영

    위원장)와 이순옥 대전지부장은 3월 21일 야권연대와 후보단일화를 위한 대전시민 원탁회의 기자회견에 참석했다.▪ 서울 강북구 회원 모임이 3월 30일 서울 수유동 중화

    요리 가문식당에서 열렸다. 이날 모임에서는 5월 개관을 앞두고 연구소가 위탁관리하게 된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에 대해 강북지역 회원들의 관심을 당부하고 지역 모임 결성에 대한 여러 의견을 나누었다. 대학 교직원으로 근무하는 이광해 회원의 제안으로 모인 이 자리에는 공란희 공순희 박은석 신동현 윤미경 이광해 정인곤 신을주 이시진 회원과 방학진 사무국장이 함께했다.

    ▪ 인천지부(지부장 이민우)는 3월 27일 ‘백범 김구 발자취 따라가기’ 역사탐방을 진행했다. ▪ 김희원 경기동북지부장은 3월 29일 남양주시청 기자

    실에서 열린 제 20대 총선 후보단일화를 위한 구리․ 남양주 시민연대 단일화 촉구 기자회견에 참석했다. ▪ 김순흥 광주지부장은 3월 31일 광주시청 앞 ‘평화의

    소녀상’ 옆에서 열린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이 주최한 에 참석했다. ▪ 경기안산시흥지부(지부장 신대광)는 시흥지역 60여

    시민사회단체들과 함께 ‘평화의 소녀상 건립추진위원회’에 참여하고 있다.▪ 이종민 부산지부장 등 부산지역 시민사회단체 대표들

    은 부산역 광장에서 열린 한반도 긴장고조 반대 ‘부산 평화선언 대회’에서 평화선언문을 발표했다.

    ▪ 연구소 운영위원회 부위원장과 전교조 부위원장 등을 역임한 김민곤 회원이 시집 을 펴냈다. 2016년 2월 경기고에서 프랑스어 교사로 정년퇴임한 김 회원은 고향 경남 사천으로 귀향을 준비하고 있다.▪ 정용택 회원(전 전국역사교사모임 대표, 전 시흥장곡

    중 교장)과 박철하 회원(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전문위원)이 3월 28일 발족한 경기도교육청 역사교육위원회의 위원장과 부위원장으로 각각 호선됐다. 역사전문가, 학부모, 시민단체 추천인 등 17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이 위원회는 경기도교육청이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대응해 만든 교육감 자문기구이다. 앞으로 위원회는 학생들을 민주시민으로 육성하기 위한 경기도교육청 역사교육 정책 연구, 교사 역사교육과정 재구성 역량 강화, 학생활동 중심의 역사교육, 일본의 역사 왜곡을 비롯한 현안 대응, 역사교육 정상화를 위한 시민사회단체와의 연대, 현장 지원 방안 등에 대해 방향을

    1) 堪忍袋の緖が切れる 즉 인내를 담은 주머니의 줄이 끊어졌다는 말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경우에 쓰는 일본의 관용적인 표현

    2) 소집영장을 받고 입대하는 사람이 두르는 붉은 어깨띠

    회원동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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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시할 계획이다. 위원들에게 위촉장을 수여한 이재정 경기도교육감은 “학생들이 올바른 판단력으로 미래를 열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역사교육”이라며, “경기도교육청 역사교육위원회가 경기도 역사교육을 넘어 대한민국 역사 교육의 방향을 제시해 달라”고 당부했다.

    ▪ 언론운동을 비롯해 다양한 시민사회운동에 기여해 온 이요상 회원(한겨레 주주통신원회 전국운영위원장)이 3월 29일 제1회 한경희 통일평화상을 수상했다. 평화박물관건립추진위와 성공회대 민주자료관이 주관한 이 상은 1982년 안기부가 조작한 ‘송씨 일가 간첩단 사건’의 총책으로 몰린 뒤 2009년 재심을 통해 무죄로 밝혀졌으나 이미 1977년 작고한 이유로 명예회복조차 못한 채 분단사의 희생양이 된 고 한경희 여사의 가족들이 1억원의 기금을 출연해 제정했다. 공개 추천을 통해 통일과 인권·평화·민주의 신장, 그리고 국가폭력 피

    해자들의 치유와 명예회복에 기여해온 개인 또는 단체에게 주는 상이다.

    ▪ 서울관악동작지부 송진복 지부장이 3월 12일 장인상을 당하였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연구소 조직위원장을 역임한 한글운동가 이대로(현 초

    등교과서 한자병기 반대 국민운동본부 상임대표) 선생이 3월 21일 부친상을 당하였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 학원강사로 일하고 있는 임권배 회원이 3월 10일 연구소에 고급 커피세트를 보내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올해부터 계간 내일을 여는 역사를 민족문제연구소와 내일을여는역사재단이 함께 발행합니다

    내일을 여는 역사는 2000년 3월 창간되었으며 2015년 겨울호까지 통권 61호가 나왔습니다. 그간 내일을 여는 역사는 대중 역사 잡지를 표방하며 유익한 내용으로 전문가들의 호평을 받았으나 생각만큼 널리 읽히지는 못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내일을 여는 역사를 통해 올바른 역사인식의 대중적 확산에 기여하면서 연구소의 활동 영역을 넓혀 나가고자 합니다. 내일을 여는 역사가 역사의 진실을 알리고 사회의 정의를 지키는 데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우리 역사를 사랑하는 시민 회원 여러분들의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 기존의 『역사와 책임』은 반년간 근현대 과거사청산 전문학술지로 계속 발간됩니다.

    구독료 1년 54,000원 2년 100,000원 3년 150,000원입니다.납부계좌 우리은행 1005-201-271908(예금주 : 민연주식회사) 문의 02-2139-0404

    정기구독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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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70년 특별기획

    결국 그들은 아무도 처벌되지 않았다 1938년 흥업구락부사건의 진실

    조한성 선임연구원

    “이제 우리는 종래 마음에 품은 민족자결의 미망을 청산하고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사명을 구현시키는 것이 조선 민중의 유일한 진로인 것을 인식하여서, 신일본 건설의 대국민적 긍지와 포

    부 하에 그 부여된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조선민중의 장래의 행복과 발전을 약속하는 것임을

    확신하여 이에 흥업구락부를 해산하는 터이다.

    지나사변(중일전쟁)은 일본의 대국가적 사명 즉 신동아건설의 목적을 달성케 하는 성전임으로

    우리는 어떠한 희생은 불사하고 광휘있는 황국 일본의 신민으로서의 영예와 책임을 통감하고

    팔굉일우(八紘一宇)의 도의적 결합으로써 자분(自奮) 노력케 함을 성심으로써 맹세하는 바이

    다. 흥업구락부의 해산에 임하여 우리는 그 활동자금으로서 금일까지 축적한 금 2천 4백 원을

    경성 서대문경찰서에 의뢰하여 국방비의 일조로서 정중히 헌납하기로 한다.

    소화 13년 9월 3일 흥업구락부 일동”

    동아일보 1938년 9월 4일자 석간에 한 장의 성명서가 실렸다. 그것은 한때 조선의 독립을 꿈꾼

    과거의 잘못에 대한 반성과 함께 향후 내선일체와 신동아건설이라는 일본의 침략정책에 적극 협

    조하겠다는 서약이 들어있는 흥업구락부의 공개 전향서였다.

    1938년 5월에 시작된 흥업구락부사건은 수사 초기부터 장안의 화제였다. 관련자 대부분이 감

    리교를 중심으로 한 조선기독교의 유력 지도자이자, 조선을 대표하는 지식인, 명망 있는 민족지

    도자들이었기 때문이다. 1937년 6월부터 시작된 수양동우회사건이 진행 중인 와중에서, 흥업구

    락부사건의 발생은 조선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연이은 조직사건에 일제의 의도는 무엇인지,

    사건 관계자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지, 세간의 설왕설래가 이어진 것은 어쩜 당연한 반응이었을지

    도 모른다.

    그런데 일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수사결과를 내놨다. 흥업구락부를 ‘국체에 반하는 부정단체’로 규정하고, 불법성을 지적했지만 막상 구속자 54명에 대해서는 전원 기소유예를 결정했기 때문이

    다. 전례 없는 수사결과였다. 여운형은 “민족적 사상을 가진 비밀결사를 한 사람의 처형도 없이 관대하게 처분한 것은 조선 통치사상 대서특필할 일”이라고 논평했다.

    사건과 인물로 보는 우리 근현대사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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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양동우회사건이 1년간의 예심을 거쳐 40여

    명이 기소된 것과 비교해도 그 차이는 더욱 도드

    라진다. 더욱이 수양동우회는 기나긴 예심과정에

    서 최고지도자 안창호까지 잃지 않았던가. 왜 이

    런 결과가 나왔을까? 비밀결사 흥업구락부는 어

    떤 단체였을까?

    1924년 10월의 어느 날, 하와이 호놀룰루. 한 중

    년의 신사가 이승만을 만났다. 그의 이름은 신흥

    우. 조선기독교계의 대표적 지도자로 조선중앙기

    독청년회(조선YMCA)의 총무 겸 이사로 활약하

    던 인물이다.

    “국외에서만의 파행적 운동으로서는 소위 백년하청(百年河淸)을 기다리는 것과 같아 도저히

    조선독립은 기대할 수 없으므로, 금후는 어떻게

    하여서든지 국외와 조선 안의 운동을 병행적으

    로 전개하여, 호기가 이르는 때에 일제히 호응 궐기하여 숙망의 달성에 매진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같이 하기 위하여 조선 안에도 동지회와 동일한 사명의 비밀단체를 조직하기 바란다.”이승만은 신흥우에게 ‘동지회’의 자매단체를 국내에 조직해주기를 부

    탁했다. 워싱턴군축회의 이후 외교론이 파탄나면서 이승만은 하와이에

    설립한 동지회를 중심으로 실력양성운동을 펼쳐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

    는데, 국내까지 그 활동의 영역을 넓히고자 했던 것이다. 이승만은 조선

    기독교계의 핵심 지도자이자 조선일보사 사장이었던 이상재에게도 편

    지를 보내 동지회 국내지부의 조직을 부탁했다.

    1925년 3월, 사직동 신흥우의 자택에 이상재, 윤치호, 유성준, 유억

    겸 등 10명의 인사가 모였다. 이날 그들은 동지회의 자매단체 ‘흥업구락부’를 창립했다. 대표는 이상재가 맡기로 했다. 조직은 이승만의 뜻대로 ‘비밀결사’ 형태로 하기로 했고, 비밀 유지를 위해 이름과 조직 규약도 평범한 실업친목단체처럼 꾸몄다. 하지만 흔히 ‘실업을 일으킨다’로 이해되는 ‘흥업’이란 표현에는 ‘조선독립의 대업을 일으킨다’는 의미를 숨겨 자신들이 동지회와 연결된 비밀 독립운동단체임을 표방했다.

    흥업구락부는 그 목적을 민족의 대동단결과 실력양성을 통해 독립을 준비하는 것으로 설정하

    였다. 독립을 준비하다 적당한 시기가 오면 내외에서 동지회와 흥업구락부가 서로 호응하여 조선

    의 독립을 성취하자는 것이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민족의 대동단결은 흥업구락부의 조직을

    점차 전국으로 확대하고 지도자를 중심으로 단일한 대오를 형성하는 것을 통해 성취하고자 했다.

    「동아일보」 1938년 9월 4일자에 실린 흥업구락부 기사

    신흥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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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의 실력양성은 정치, 경제 두 가지 방면의 활동으로 제시되었다. 정치적 측면에서는 주로 사회

    문화단체를 중심으로 실력양성운동을 전개하는 것이었고, 경제적 측면에서는 산업부를 설치하

    여 해외 동지회 산업부와의 무역을 통해 경제적 실력양성운동을 펼치는 것이었다. 이 중 가장 중

    요한 목표는 역시 경제적 실력양성이었다. 워싱턴회담 이후 위기에 처한 이승만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국내의 경제적 지원이었고, 이승만이 국내세력과의 연결을 기도한 의도 자체가 바로 여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흥업구락부는 ‘조선의 독립에 뜻을 같이하는 의식분자’ 중에서 ‘비밀을 엄수할 수 있는 인격자’이면서, 현재 ‘사회 각계에서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지도자’들을 조직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양반출신의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주류를 차지했다. 직업적으로는 이상재, 안재

    홍을 중심으로 한 언론인(조선일보), 연희전문 유억겸을 중심으로 한 교육자들과 종교인, 자산가,

    실업가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유성준처럼 명백히 친일적인 인사들이나 윤치

    호와 같은 대일 타협적 인사도 섞여 있었다. 독립을 지향하는 조직으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구성

    이었다.

    이외에도 흥업구락부의 구성원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서울을 중심으로 한 기호지방 인사들이

    라는 특징과 종교적으로 조선감리교 인사들이라는 경향성이 나타난다. 이것은 흥업구락부가 만

    들어진 또 다른 이유와 관련이 있다. 그것은 바로 조선기독교계에서 서북세력을 대표하는 안창호

    계열의 흥사단세력(수양동우회)을 제압하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민족운동에 투신한 이후 언제나

    안창호 세력과 경쟁해야 했다. 미국에서도 그랬고, 상해에서도 그랬고, 조선에서도 그랬다. 그는

    안창호의 세력과 맞설 자신만의 세력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 자신의 정치적 종교적 배경인 기호세

    력과 감리교세력을 동원하고자 했던 것이다.

    조직 직후부터 흥업구락부는 기독교 계열의 문화단체에서 적극 활약하며 수양동우회 계열과

    치열한 세력싸움을 벌였다. 그들이 선호했던 무대는 조선기독교연합회와 조선YMCA였다. 이들

    단체가 장로교와 감리교를 통할하는 조선기독교의 중심단체였기 때문이다. 흥업구락부는 수양

    동우회와의 경쟁에서 결국 승리했다. 그들은 조선기독교연합회와 조선YMCA의 간부직 다수를

    차지하였고, 이들 단체를 통해 조선기독교의 실권을 장악했다. 이승만이 제시한 흥업구락부의 설

    립목적 중 하나는 그렇게 충족되었다.

    그럼 흥업구락부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설립목표, 즉 ‘실력양성을 통한 독립 준비’는 얼마나 실현되었을까? 결과부터 말하자면 이 목표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흥업구락부의 일

    상적인 활동은 정기모임, 조직원 확보, 활동자금모집 등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이 가운데 정기

    모임을 제외하고 제대로 진행된 것이 없었다. 전국으로 조직을 확대한다던 애초의 계획은 시도조

    차 되지 못했고, 경제적 실력양성운동을 위해 필수적 조건이었던 활동자금모집도 구체적 사업을

    벌이기에는 모금 액수가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실력양성도 독립준비도 제대로 진행되지 않으면서 비밀결사 흥업구락부의 유일한 존재이유는

    이승만과의 연락이 전부인 것처럼 되어갔다. 흥업구락부는 1930년대 중반까지 이승만과 정기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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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회원들은 후일 이승만과의 연락을 통해 뭔가 자신들이 비밀스런 일을 하고

    있으며, 독립운동에 일조하고 있다는 자기 만족감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그것은 공허한 만

    족감이었다. 흥업구락부에서 이승만과의 연락 외에 비밀스런 일은 어떠한 것도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밀결사지만 전혀 비밀스런 일을 하지 않았던 것이 흥업구락부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이렇듯 흥업구락부는 기독교내 세력장악이라는 목표 외에는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면서 깊

    은 침체에 빠져들었다. 그들에겐 지지부진한 조직 활동을 타개할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흥업구

    락부의 선택은 회원들의 외부활동이었다. 자체 조직의 확대가 더 이상 불가능한 상황에서 자신들

    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고 민족을 단일한 대오로 이끌려면, 외부 단체에 적극 참여하여 그 속

    에서 자파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방법밖엔 없었던 것이다. 1927년 2월 흥업구락부가 신간회에 조

    직적으로 참여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흥업구락부는 조선일보 세력과 연대하여 신간회의 중앙을 차지했

    다. 이상재는 신간회의 회장이 되었다. 흥업구락부는 신간회를 동지

    회 활동의 연장이라 인식하고, 자신의 조직 역량을 총동원하여 신간

    회 활동에 주력했다. 그들은 신간회 중앙을 차지한 후 자신감에 충

    만하여 이승만에게 ‘신간회는 동지회의 국내 변환체’이니 미주에도 신간회지부를 만들자고 권유했다.

    하지만 이승만의 반응은 차가웠다. 그는 자신의 ‘일에 지장이 초래될지도 모른다’며 미주 신간회 지부 건설을 거절했다. 이승만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주도 하에 있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이승만은 신간회

    에 대한 흥업구락부의 장악력을 의심했다.

    신간회는 민족주의의 여러 계파와 사회주의자들이 집결한 민족

    단일당이었다. 흥업구락부가 중앙을 장악했다고 해도 그 속에서 자

    신들의 의도를 관철시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승만

    은 이미 비슷한 일을 충분히 경험한 적이 있었다. 바로 대한민국임

    시정부에서였다.

    흥업구락부와 조선일보그룹이 주도하는 신간회는 애초부터 문제가 많았다. 막상 비타협주의를

    표방하며 신간회를 조직했지만, 합법주의에 입각한 온건노선에 머물다보니 비타협주의에 걸맞는

    운동의 구체적 내용을 제대로 생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28년 3월 안재홍은 처음으로 신간회

    의 당면 방침을 발표했지만,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획득’ 등과 같은 조선사회의 일반적 개혁을 요구하는 수준에 머무르고 말았다. 문제는 민족단일당 신간회에 대한 조선의 일반 민중 및

    신간회 기층 세력의 기대가 이 정도로는 도저히 충족될 수 없다는데 있었다.

    일제의 식민지배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민족운동이 그 건강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제와의

    타협을 전제로 하는 합법적 정치운동 외에, 때에 따라선 이를 넘어서는 비합법적 정치투쟁에 대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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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가능성도 열어놓아야 했다. 그래야만 일제의 탄압에도 쉽사리 굴복하지 않고 투쟁을 지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간회를 주도한 흥업구락부와 조선일보그룹, 뒤늦게 신간회에 참여한

    수양동우회와 동아일보 세력 등, 그 어떤 세력도 그들 스스로 만들어낸 금단의 선, 합법주의를 넘

    어서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근본적인 한계였다. 결국 신간회의 지도부는 민족주의자들의 결집을 우려

    한 일제의 탄압과 신간회 중앙과 지회간의 갈등으로 인해 보다 전투적인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

    의자들의 연합체제로 교체되었다.

    애초부터 결속력이 강하지 않았던 흥업구락부는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이상재가 노환으

    로 사망하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결속력까지 모두 잃었다. 이상재를 대신한 이는 윤치호였으나 그

    는 이미 대일 타협적인 면모를 보이던 인물이어서 흥업구락부를 제대로 이끌어 갈 수 없었다. 흥

    업구락부는 점차 민족운동단체의 성격을 잃어갔고, 단순히 기호파 유력인사들의 친목단체로 전

    락해갔다. 1932년 신흥우는 흥업구락부에 산업부 설치를 시도했지만 아무런 호응도 얻지 못하자

    흥업구락부를 탈퇴했다. 신흥우의 탈퇴 이후 흥업구락부는 사실상 활동 정지상태에 들어갔다. 그

    런데 흥업구락부가 민족운동단체의 성격을 잃고 활동정지상태로 빠져든 데에는 이승만의 역할

    도 컸다. 1929년 그가 경제적 실력양성운동의 일환으로 의욕적으로 추진하던 동지식산회사가 파

    산하고, 그 이듬해 하와이에서 대규모 분쟁에 휘말리면서 더 이상 동지회 활동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흥업구락부사건이 터진 것은 흥업구락부가 활동정지상태에 빠진 지 오래인 1938년 5월의 일이

    었다. 사건은 연희전문학교 경제연구회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동지회 계통의 우애회가

    발견되면서 시작되었다. 수사과정에서 동지회 회원이자 구미위원부 간사였던 윤치영은 결국 비밀

    결사 흥업구락부의 존재를 만천하에 드러내고 말았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일제 공안당국은 결국 아무도 기소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윤치호를

    비롯한 흥업구락부 관련자 상당수가 이미 친일화의 길에 들어서 있었기 때문에 굳이 처벌할 필요

    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제 당국은 오히려 흥업구락부사건을 빌미로 그들을 회유한다면 앞으로

    자신들의 통치정책에서 더 많은 협조를 얻어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 또한 흥업구락부 관련자들은

    대부분 서울을 중심으로 한 조선 최고의 유력 인사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처벌하여 조선 민중

    의 반발을 사기보다는 친일세력으로 만들어 조선통치의 선전도구로 활용하는 것이 일제의 식민

    통치에 훨씬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일제의 판단은 주효했다. 공개 전향서 발표 이후 흥업구락부 관련자들은 본격적으로 친일의 길

    에 빠져들었다. 물론 그들만이 아니었다. 수양동우회사건의 관련자 대부분도 그들과 같은 길을 걸

    었고,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역시 민족지로서의 사명을 포기하고 친일 언론의 길로 빠져들었다. 그

    것은 돌이키려 해도 쉬이 돌이킬 수 없는 길이었다. 자신의 삶에 치욕적인 상처를 남길 뿐만 아니

    라, 그 상처가 모두 아문다고 해도 그 흔적은 그들의 삶 곳곳에 남아 절대 지워지지 않는 마수같

    은 길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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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 친일파·2

    1

    해방 직후 미군정과 함께 다시 등장한 친일세력이 반민특위를 와해시키고 한국사회를 장악한

    것은 익히 알려진 바다. 거세게 해방공간을 휘몰아치던 친일청산 문제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자

    유력 친일파들에게는 ‘건국의 주역’, ‘반공투사’, ‘근대화의 선구자’ 등의 화려한 명칭이 붙여졌다. 그리고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정권으로 이어지는 장기간에 걸친 독재기간 동안 친일세력이 한

    국사회의 지배층으로 군림하면서 그 명성과 위상은 점점 견고해졌다. 대표적인 인물이 김성수다.

    김성수는 1955년에 사망했다. 그러나 후손

    과 추종자들이 언론계・교육계・학계를 장악하면서 오히려 살아있을 때보다도 더 ‘큰 인물’로 부각되었다. 해방 직후 처단해야 할 친일파

    로 세간에 이름이 오르내리기까지 하던 김성

    수가 오랜 독재기간을 거치면서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민족지도자’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조국 광복을 위해 교육에 힘쓰고, 산업을 일으키고 언론을 육성하는데 평생을 바친” ‘민족 지도자 김성수’가 자리 잡힌 것은 박정희・전두환 정권 시기였다. 1965년 출범한 인촌기념회(전신은 인촌기념사업회)를 중심으로 각종 기념사업이 본격화 되었고, 평전류의 책과 글, 각계 인사들의

    회고 등도 이때 집중적으로 나왔다. 이를 통해 김성수는 ‘민족’교육, ‘민족’언론, ‘민족’기업을 상징하는 ‘민족지도자’로 굳어졌고 나아가 독립운동가로까지 미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걸림돌인 친일행적에 대해서는 와전되었거나, 조작된 것으로 기정사실화 했다. 이 시기는 역사가 독재정권의 정

    치적 도구로 이용됐던 시절이었다.

    역사학의 자율성과 전문성은 독재정권에 짓밟혔고 곳곳에서 역사왜곡과 조작이 나타났다. 이

    런 시기에 독재 권력의 한 축을 담당한 후손들이 선대의 과거사를 짜 맞추고 미화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힘과 권력이 역사학, 역사적 사실을 압도하던 시기였다. ‘민족지도자 김성수’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민주화’ 이후 민족지도자 이미지는 약화되기는 했지만 워낙 강고하게 만들어졌던 터라 쉽게 허

    친일・독재권력의 산물, ‘민족지도자 김성수’

    박수현 연구실장

  • 25

    물어지지 않았다. 2009년 친일인명사전,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에 김성수가 수록됐음에도 여전히 민족지도자로 기억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후손들의 기념사업 또한 여전히 계속

    되고 있다.

    2

    김성수 후손을 비롯한 ‘민족지도자 김성수’ 신봉자들은 김성수의 친일행적을 믿지 않는다. 한편에서는 사실이든 아니든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또 한편에서는 “그럴 리가 없다”는 확신에서다. 그들이 믿는 것, 믿고 싶은 것은 오로지 독재정권 시기 ‘김성수 우상화’ 작업 과정에서 나온 많은 증언과 회고들이다.

    “1940년 8월 일제가 동아일보를 강제 폐간시키자, 사주인 김성수는 고향으로 돌아가 광복 때까지 은거하였다. 일제로부터 창씨개명을 강요당하였으나 거절하였고, 일제가 주는 작위도 거

    절하였다. 그는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보고 일본이 패망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이승만이 하

    는 ‘미국의 소리’ 단파 방송을 송진우・장택상 등과 함께 비밀리에 청취하기도 하였다. 학생들의 창씨개명 거부와 학도병 징집 거부가 이어지자, 보성전문학교장인 그는 학생들에게 자신

    이 옳다고 믿는 바대로 행동하라며 창씨개명 거부와 징집 회피 및 거부를 방관하였다. 그러나

    1943년 총독부 기관지라고 할 수 있는 매일신보 사설란에 김성수 명의로 징병에 찬성하는 ‘문약의 기질을 버리고 상무기풍 조장하라’는 글이 실렸다. 물론 이 글은 매일신보의 김병규 기자가 명의를 도용하여 쓴 것이라고 하는데 오늘날까지 논란이 되고 있다. 김성수는 1942년 이후

    요 시찰 인물 2등급으로 분류되어 감시와 내사를 당하였고, 보성전문학교는 1944년 4월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로 격하 당하였다.…”

    재작년 검정이 통과돼 크게 논란이 됐던 ‘교학사교과서’에 실린 내용이다. 왜 이 교과서 채택율이 0%에 가까웠는지, 왜 역사학계와 교육계가 폐기를 주장하며 들고 일어났는지 알 만한 대목이

    다. 이 서술대로라면 김성수를 일방적으로 친일파로 규정할 수는 없다. 그들의 주장대로 김성수를

    친일파로 매도하는 것은 사회 분열을 노린 좌파들의 소행일 수도 있다.

    ‘민족지도자 김성수’의 일제 말기의 행적, 즉 교학사교과서에 실린 김성수의 동향은 거의 왜곡과 조작 수준이다. 내용도 문제지만 이런 내용이 교과서에 실리고 이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했다는 자

    체가 박근혜 정권이 역사학·역사교육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지를, 또 일방적인지를 짐작케 한다.

    역사소설도 이보다는 낫다. 최소한 역사소설은 역사적 사실을 중심에 두고 허구의 내용이 채워진

    다. 위의 내용은 증언만을 근거로 삼고 문헌상의 역사적 사실은 아예 무시하거나 부차적으로 활

    용하고 있다. 더욱이 대부분 김성수 측근의 증언이다. 역사 연구에서 증언은 근거자료로 활용하긴

    하지만, 문헌상의 역사적 사실과 명백히 배치되거나 신빙성에 문제가 있는 경우는 배제 또는 참고

    만 하는 것이 상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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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일보 폐간 후의 낙향과 은거, 창씨개명과 작위 거절, 일본 패망 예상과 비밀리의 단파방송 청

    취, 학생들의 창씨개명 및 징집 거부 방관, 명의 도용, 내사와 감시 등 대부분 사실이 아니거나 확인

    되지 않는 내용들이다. 더구나 앞부분의 행적은 사주인 김성수와 함께 동아일보 경영에 참여했던

    백관수·송진우의 행적과 흡사하다. 이 두 사람은 동아일보 폐간 뒤 김성수와는 달리 은거하거나

    칭병하면서 일제에 협력하지 않았다. 김성수 미화를 위해 함께 일한 동료들의 행적을 끌어드린 정

    황이 역력하다. 아마도 김성수조차도 생존해 있었다면 민망해 했을 날조된 행적들이다.

    3

    그렇다면 실제 김성수의 친일행적은 어떠했을까? 김성수의 친일은 전시체제기에 본격화 되었

    다. 1937년 7월 중일전쟁 직후 경성방송국 시국강좌·전국시국강연회의 강사로 나선 것을 시작으

    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국민총력조선연맹)·조선임전보국단을 비롯한 친일단체의 간부 활

    동, 전쟁협력을 독려하는 기고문·연설·훈시·담화, 국방헌금 헌납 등 김성수의 친일활동은 전시

    체제기 내내 지속적이고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 전시체제기 김성수의 친일은 어쩔 수 없이 마지

    못해 한 행위라고하기에는 행적이 너무 많았고 내용도 구체적이었다. 이 시기 김성수와 같은 지도

    층 친일인사의 행적과 비교해도 단연 앞선다. 그 계기가 무엇이든 간에 그의 친일은 스스로 선택한

    길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때문에 자발적이고 노골적이었다.

    김성수의 자발적 친일의 근거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한 예로 1943년 4월 김성수는 일제가 전시물자

    부족현상을 메꾸기 위해 벌인 ‘금속회수운동’에 동참하기 위해, 자택 철문 3개(120관)를 비롯해 식기류 등 집안의 금속물 약 200관을 마차에 싣고 직접 해군무관부를 방문하여 “격멸의 탄환에 보태 달라”면서 헌납하기도 했다. 다른 친일행적은 차치하고, 무엇보다 심각한 행위는 교육계 지도층으로서 식민지조선의 청년 학생들을 침략전쟁으로 내모는데 앞장섰다는 점이다.

    교육자라면 해서는 안 될 반민족적·반인륜적·반교육적 행태이자 김성수의 친일을 명백히 드러

    내는 행위였다. 그가 각종 글과 인터뷰를 통해 징병·학도병을 강요한 근거는 당시 신문·잡지에서 쉽

    게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이중 상당수는 보성전문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학생들에게 학도병으로

    침략전쟁에 적극 나설 것을 강요하는 내용이다. 표면적으로는 조선 학생 전체를 대상으로 한 것이지

    만, 실제 대상은 보성전문 제자들이었다. 지

    원에서 입영까지 학도병 일정에 맞추어 그

    때그때 제자들, 혹은 그 가족들에게 전하

    는 메시지였다.

    학도지원병제는 1943년 10월 20일 「육군특별지원병임시채용규칙」 공포에 따라 전면적으로 실시되었다. 일정도 10월

    25일부터 11월 20일까지 지원접수, 12월 11

    일부터 20일까지 징병검사, 1944년 1월 20「경성일보」, 「매일신보」 1943년 4월 2일자 김성수의 대문 헌납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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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 입영 순으로 정해졌다. 그런데 조선총독부가 각 학교에 홍보와 협조를 당부했음에도 지원접수

    초기 각 학교의 지원율이 저조했고, 특히 대상자가 가장 많았던 보성전문과 연희전문의 지원율이

    가장 낮았다. 조선총독부의 압박도 가해졌다. 그러자 교장인 김성수는 보성전문 학생들의 학도병

    지원을 독려하는 집회를 수시로 열었다. 접수기간 동안 학도병 지원을 독려하는 집회를 가장 많

    이 연 학교는 보성전문이었다. 〈대의에 죽을 때 황민됨의 책무는 크다〉(「매일신보」 1943년 11월 7일), 〈빛나는 전통을 살리라〉(「매일신보」 1943년 11월 9일), 〈우리 완승을 목표로 더욱 연락과 격려를〉(「경성일보」 1943년 11월 20일) 등의 기고문과 인터뷰 기사는 이 때 나왔다.

    접수가 완료되자 이번에는 가족 걱정으로 동요하는 지원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원호사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절대로 협력〉(「매일신보」 1943년 12월 7일) 인터뷰를 했고, 12월 11일부터 시작되는 징병검사 직전에는 중요한 징병검사에서 보성전문 지원자 모두의 ‘갑종’ 합격을 기원하는 〈학병을 보내는 은사의 염원 - 이 시대 최고의 광영, 빛나는 조선청년의 특권을 살리라〉(「매일신보」 1943년 12월 10일) 제하의 인터뷰를 했다. 그리고 1944년 1월 20일 입영을 전후해서 떠나는 학도병과 그 가족들을 격려하고 안심시키기 위해 〈충용무쌍한 황병이 되라〉(「경성일보」 1944년 1월 19일), 〈징병이 닥쳐온다〉(「매일신보」 1944년 1월 22일)라는 제목의 인터뷰를 했다. 김성수는 글과 인터뷰를 통해 내선일체 및 황국신민화를 강조하며 징병과 학도병을 찬양·격려하고, 심지어

    〈대의에 죽을 때 황민됨의 책무는 크다〉에서는 조선이 진정한 ‘황국으로서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 학생들의 희생이 필요하다고까지 했다. 당시 학도병 대상 학생들은 어떻게든 전쟁에 나가는 것

    을 피하고자 했다. 그 학생들은 김성수의 말과 글을 듣고 읽으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4

    ‘민족지도자 김성수’ 신봉자들은 이러한 구체적인 사실을 아예 인정하지 않는다. 이른바 ‘대필설’·‘조작설’로 일축해 버린다. 앞의 ‘교학사교과서’ 내용처럼 쓸 수 있는 ‘자신감’도 여기서 비롯되었다. ‘대필설’・‘조작설’은 1970년대에 본격적으로 제기돼 ‘민족지도자 김성수’를 지키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대필・조작되었다는 근거 대부분은 측근들의 회고와 증언이었다. ‘대필설’을 주장하면서 가장 많이 인용하는 것이, 김성수 대표적인 친일 글 가 “김성수의 허락 하에, 유진오의 감수를 전제로 매일신보 기자 김병규가 대필했다“는 유진오의 회고 내용이다.

    그러나 이 유진오의 회고는 〈대의…〉의 기고 시기와 청탁 주제가 맞지 않는 등 여러 곳에서 오류가 발견된다. 또 회고에서는 일제의 강압을 피할 수 없어 글을 잘 쓰지 않는 김성수가 어쩔 수없

    이 대필을 했다고 했지만, 이는 회고 내용에서조차 그 정도 상황은 아닌 것으로 확인된다. 즉 유진

    오 회고에 나오는 집필자 명단 중 송진우는 집필을 하지 않았다. 당시 매일신보의 ‘학도병 특집’을 담당했던 정경부장 이원영의 회고에도 송진우, 그리고 홍명희는 집필을 거부한 것으로 나온다. 이

    원영의 회고 또한 김성수측이 제시한 근거다. 즉 집필자 명단이 정해졌다 해도 집필을 거부할 수

    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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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유진오는 다른 글에서 김성수의 강연 원고나 훈시 등은 자신이 대필하고 김성수는 검토

    만 했다고 밝혔다. 이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해도 김성수의 책임이 면해지는 것은 아니다. 김병규

    가 대필했든 유진오가 대필했든 간에 김성수가 이를 인지했고 검토했다면, 당연히 그 글의 책임

    은 김성수 몫이다.

    김성수의 친일행적은 ‘대필설’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조작설(명의도용설)’이다. 당시 김성수의 친일행적 대부분이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한글)・경성일보(일본어)에 실려 있는 점을 들어, 이 두신문은 허위・날조된 선전선동물에 불과하기 때문에 김성수의 기사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김진섭(전 매일신보 기자), 김달

    수(전 경성일보 기자) 등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증언을 내세웠다.

    김성수를 보호하기 위해 일제감정기의 역사 자료를 송두리째 폐기하자는 주장과 같다. 이 두

    신문이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선전・미화하고 여론을 이끌어가기 위한 조선총독부 기관지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일제 말기에 철저한 언론통제 하에 일방적이고 편파적인 보도

    를 한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두 신문의 기사 대부분이 없는 사실을 만들어 소설을 쓰듯

    날조되었다는 것은 억측에 가깝다. 더구나 한글신문인 매일신보는 국내는 물론 일본에까지 읽

    히는 방대한 조직과 보급망을 가진 신문이었다. 바로 탄로가 날 김성수와 같은 유명 인사의 행적

    을 한두 번도 아니고 매번 날조하는 것은, 조선인들의 전쟁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여론 조성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조선총독부나 매일신보의 입장에서도 결코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니다. 또

    많은 사람의 증언을 활용하다보니 같은 내용도 다르게 진술하는 등 문제 되는 부분이 한두 가지

    가 아니다.

    재판에서도 ‘대필설’과 ‘조작설’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김성수 후손과 인촌기념회는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2009년 활동 종료)가 김성수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한데 대해, 2010년 1월 국가를 상대로 “위원회의 결정을 취소해 달라”는 소송을 냈다. 이들은 결정 취소의 근거로 ‘대필설’과 ‘조작설’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1심 재판부는 김성수의 다수의 글이 날조된 것으로 보기 어렵다며 ‘대필설’과 ‘조작설’을 인정하지 않았다. 김성수측은 이에 불복해 2011년 11월 항소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