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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Ⅰ. 머리말

    Ⅱ. 입관 전 조선의 몽골 정보 수집

    과 확대

    1. 누르하치 시기의 ‘黃台吉’, ‘西㺚’

    2. 瀋陽館을 통한 몽골 정보의 확

    Ⅲ. 입관 이후 내륙아시아 제 세력

    의 동향

    1. 칼카, 코르친, 차하르

    2. 오이라트 준가르(太極㺚子)

    3. 러시아(大鼻㺚子)

    Ⅳ. 맺음말: ‘영고탑 회귀설’의 이해

    朝鮮王朝實錄에 비친 17세기내륙아시아 정세와 ‘寧古塔回歸說’*1)

    洪 性 鳩 (慶北大)

    Ⅰ. 머리말

    거시적으로 보면, 10세기 이래 동아시아의 대륙에서 전개된 국제관

    계는 중원의 농경민과 북방의 유목민 혹은 수렵민 간의 길항이 종적인

    축을 이루는 가운데, 횡적으로는 대륙 북방의 초원 및 삼림 지역의 패

    권이 東胡系(거란, 몽골-유목)와 肅愼系(여진, 후에 만주-수렵) 사이에

    서 교체되는 흐름이었다. 그리고 16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중엽에 이르

    기까지의 역사, 즉 여진의 흥기와 대청의 성립, 명조의 멸망과 청조의

    중원 정복, 그리고 신강 설치로 결착된 외몽골과 티베트, 동투르키스탄

    * 이 논문은 2009년도 정부재원(교육과학기술부 인문사회연구역량강화사업비)으

    로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음(KRF-2009-32A-A00003). 졸

    고를 읽고 조언을 아끼지 않으신 윤은숙 선생님과 익명의 심사위원께 감사드

    린다. 본고에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지적 사항은 앞으로의 연구에 참고하도록

    하겠다.

  • 中國史硏究 第69輯 (2010. 12)274등을 아우르는 서북 지역에 대한 청조의 지배권 확립 등 청조의 발전

    과정은 10세기 이래 대륙에서 지속된 종횡의 길항 관계의 대미를 장식

    하는 클라이맥스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이 시기에 청조가 본격적으로

    외몽골에 대해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18세기 중엽 신강 설치로 상징되

    는 티베트 불교권과 이슬람권까지를 아우르는 대제국의 기초가 마련되

    었고, 이것은 곧 대청제국질서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중대한 변화가 발생하던 시기, 조선은 두 차례의 대 전란을

    경험했다. 하나는 16세기 말 일본의 침략(倭亂)이었고, 또 하나는 여진

    (만주)의 침략(胡亂)이었다. 전자가 16세기 이래 명조를 위시한 동아시

    아 각국의 상품화폐경제의 성장 및 유럽의 동아시아 진출의 결과로 만

    들어진 전례가 없는 교역의 활성화라는 경제적 변화와 관련된 것이라

    면, 후자는 앞에서 언급한 대륙에서의 정치적 격변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러므로 당시 조선은 남으로는 일본, 북으로는 만주 청조의

    정세에 깊은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전자와 관련된 동

    아시아 해상을 무대로 한 변화는 19세기 근대 전환기와 직접 연결되는

    변화의 시작으로 주목되었던 반면, 후자와 관련되는 대륙에서의 정치

    적 변화는 근대 전환기에 국민국가 형성에 실패한 지역인 탓으로 상대

    적으로 주목받지 못한 감이 없지 않다. 따라서 청조 정세의 제일 변수

    였다고 할 수 있는 청조와 몽골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 내륙아시아

    정세에 대해 조선이 기울인 관심에 관해서도 아직 충분한 검토가 이루

    어지지 못하였다. 거기에는 당시 조선이 명과 청이라는 중원의 통일제

    국이 주도하는 국제질서에서 충실히 적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밖의

    대륙의 정치세력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선입관도 개입되어 있었던 것 같다. 간혹 조선이 내륙아시아 정세에

    기울인 관심에 대해 언급한 연구가 있더라도, 대체로 對明義理論이나

    對淸復讐論이 조선 후기 내내 끈질기게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배

    경으로 당시 조선의 대외 정보 수집과 분석 능력의 한계 및 그로 인한

    왜곡된 정세 판단의 실례로 거론되는 정도에 그쳤다. 하지만 근래 들

    어 조선후기 대청인식과 그것이 국내 정치에 미친 영향 및 조선의 정

  • 朝鮮王朝實錄에 비친 17세기 내륙아시아 정세와 ‘寧古塔回歸說’(洪性鳩)275보 능력 등과 관련하여 조선이 파악한 내륙아시아 정세에 대한 연구가

    조금씩 진전되면서 이와 관련된 연구도 조금씩 축적되고 있다.

    현재까지 파악한 학계의 관련 연구 성과를 일별해 보면, 먼저 1960

    년대 李龍範의 연구는 1638년 成釴의 貿牛行이라는 조선시대 유일의

    몽골과의 무역 사례를 통해 동아시아 무역사에서 조선의 역할이, 대륙

    문물의 對日전파의 매개자에서 일본을 통해 들어온 서구문물(지삼․남

    초)을 滿蒙대륙으로 공급하는 매개자로의 역할로 변화되었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여기에서 貿牛使 파견의 정치적 배경으로 명과의 교통이

    단절된 상황에서 명청전쟁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한 목적을 추론할 수

    있다고 한 그의 언급은 당시 조선 정부의 정보수집 노력을 이해하는

    데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다.1) 이용범의 연구 이후 조선과 내륙아시아

    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다가 90년대 말에 배우성

    이 조선후기 북방영토의식은 대청정세인식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는 점을 지적하면서, 특히 ‘영고탑회귀설’에 주목하여 몽고의 존재가

    조선의 북방인식에 미친 영향에 대해 언급하였다.2) 그로부터 또 10년

    쯤 지난 2008년에 김문식은 조선후기 러시아 인식의 변화를 규명하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는 조선에서는 17세기 후반의 대비달자를 몽고

    의 일족 혹은 별종으로 인식하였고, 청-러 외교관계 성립(네르친스크

    조약) 이후 비로소 ‘아라사’ 표현 등장하지만, 19세기 중엽 아라사관에

    서 러시아 사람과 직접 접촉이 이루어진 이후 비로소 러시아에 대한

    비교적 사실에 가까운 인식이 보이기 시작한다고 하였다.3) 배우성과

    김문식의 연구가 몽골과 러시아에 대한 조선의 인식의 변화를 살펴본

    1) 李龍範, 成釴의 蒙古牛 貿入과 枝三․南草 (震檀學報 28, 1965; 李龍範, 韓滿交流史硏究, 同和出版公社, 1989의 제4장 朝鮮王朝時代와 內蒙古에 재수록).

    2) 배우성, 17․18세기 淸에 대한 인식과 북방영토의식의 변화 (한국사연구99․100, 1997; 조선후기 국토관과 천하관의 변화, 一志社, 1998의 제1장의제2절 청에 대한 위기의식과 변경의식, 제3장의 제1절 대청 정세인식과 북방영

    토의식)

    3) 김문식, 조선후기 지식인의 러시아 이해 (한국실학연구 16, 2008).

  • 中國史硏究 第69輯 (2010. 12)276것이라면, 송미령은 조선 조정의 정보수집 능력과 정보의 정확도에 초

    점을 맞추어 조선 정부가 파악한 몽골 정보의 신빙성에 주목하였는데,

    使臣別單 과 같은 1차 보고의 내용은 비교적 정확했지만, 실록 등에

    서 볼 수 있는 2차적인 정보 분석의 결과는 오히려 정확성이 부족해진

    다고 하면서, 현장의 보고가 정책 결정의 단계에까지 그대로 옮겨지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4) 이와 관련하여 伍躍은 삼번의 난에 관

    한 조선 연행사의 정보수집활동을 통해 번속국으로서의 조선 외교의

    성격을 규명하면서, 동아시아 국제관계사 연구의 두 가지 문제점, 즉

    조공시스템이 지나치게 확대 해석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조공 외교의

    실태에 대한 실증적 연구가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아울러 조선

    정부의 정보 수집의 신속성과 정확성, 정보 분석과 정책 결정의 적확

    성 등을 실증적으로 규명하였다.5) 우인수 역시 조선의 정씨해상세력에

    대한 정보 수집의 경로와 속도, 정확성에 초점을 맞추어 조선 정부의

    국제 정세 판단이 비교적 정확했음을 지적하였다.6) 하지만 김창수의

    경우에는 당시 대외인식이 부정확했음을 지적하며, 이것은 정보의 부

    족이기 보다는 성리학적 세계관으로 인한 왜곡된 정보 이해에 따른

    ‘불확실한 인식’이었다고 이해하였다.7)

    이상에서 언급한 선행 연구의 특징은, 대부분이 청조 정세를 파악하

    기 위한 조선 조정의 정보의 수집 방법, 경로, 수집된 정보의 내용 및

    그에 대한 분석, 그리고 이에 근거한 정세 판단에 대한 평가와 관련된

    연구였고, 당시 조선의 청조 정세 파악, 그 중에서도 특히 몽골, 러시

    아 등과 관련된 내륙아시아 정세에 대한 인식은 청조의 상황에 대한

    면밀한 검토 위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 일반적 평가였던 것

    4) 송미령, 17-18세기 조선정부의 몽골 이해 (중국사연구 62, 2009).5) 伍躍, 朝貢關係と情報收集 -朝鮮王朝對中國外交を考える際して (中國東アジア外交交流史の硏究, 夫馬進 編, 京都大學學術出版會, 2007의 제7장).

    6) 우인수, 17세기 후반 대만 정씨해상세력에 대한 조선의 정보 수집과 그 의미

    (대구사학 100, 2010).7) 김창수, 17세기 對淸使臣의 ‘공식보고’와 정치적 파장 (서울시립대 석사학위

    논문, 2008).

  • 朝鮮王朝實錄에 비친 17세기 내륙아시아 정세와 ‘寧古塔回歸說’(洪性鳩)277같다. 하지만 이중에서 伍躍, 송미령, 우인수 등의 연구는 반대로 정보

    수집의 신속성, 정확성 그리고 이에 근거한 정책 결정의 적확성 등을

    실증적으로 검증하여 다른 연구와는 조금 다른 결론에 도달하였다. 이

    에 본고에서는 선행 연구를 참고하면서, 내륙아시아 제 세력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조선이 수집한 정보의 내용과 그것이 반영하고 있는 현

    실을 비교해봄으로써 정보의 정확성을 확인하고, 더 나아가 정확성 여

    부를 떠나 그 정보의 이면에 담겨있는 청조 사회의 분위기를 살펴보

    고, 이에 근거한 정세 판단의 결과라고 할 수 있는 ‘영고탑 회귀설’이

    가지고 있는 대외 인식으로서의 의미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다만, 연구의 효율을 위해 연구의 대상 시기를 후금이 성립하여 대

    청제국이 확립되는 과정에서 내륙아시아의 세력 관계가 크게 재편되었

    던 17세기로 제한하였고, 자료는 중요한 사건과 경향을 연속적으로 반

    영하고 있어 흐름과 경향을 파악하기에 유리한 조선왕조실록(이하 실록으로 약칭)을 주로 활용하였다.8)

    Ⅱ. 입관 전 조선의 몽골 정보 수집과 확대

    1. 누르하치 시기의 ‘黃台吉’, ‘西㺚’

    16세기 말(1590년대)에 누르하치가 흥기하여 만주 일대에서 건주여

    진을 비롯한 여진 각부를 통합하고 몽골의 각부를 복속하기 시작하면

    서 몽골의 동향은 조선 조정의 관심 대상이 되었다. 1596년(선조29) 누

    8)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실록에는 내륙아시아 정세와 관련된 자료가 매우 풍부하다. 또 실록 외에도 승정원일기나 비변사등록, 동문휘고 등 내륙아시아 정세를 담고 있는 자료는 매우 많다. 그러한 자료의 방대함이 오히려

    하나의 테마로 연구를 진행하는 데에는 장애가 되었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대

    상 시기와 자료를 제한하고, 다른 시기와 자료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를 활용하

    기로 하였다.

  • 中國史硏究 第69輯 (2010. 12)278르하치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파견된 신충일의 견문에 이미 누르하

    치에게 복속한 몽골의 우두머리로 추정되는 자들의 존재가 보이며, 그

    는 “몽고와 三衛까지도 복속하였다”는 보고를 올리기도 하였다.9) 신충

    일이 목격한 상황은 1593년(선조26, 만력21)에 일어난 여허, 하다, 울

    라, 호이파 등 훌룬4부(海西女眞) 및 칼카 5부의 하나인 코르친과 席北

    部, 卦爾察部 등 몽골 부족으로 구성된 九部 연합의 3만 대군과 누르

    하치의 대결에서 누르하치가 승리한 결과였다. 이미 누르하치가 위협

    적인 세력으로 성장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장면이었다. 조선에 파견

    된 明將 李如梅도 누르하치 세력의 강성함을 강조하면서 “서북 지방의

    달자”가 누르하치만 못하다는 말을 전하였다. 이때 宣祖는 좀 더 구체

    적인 정보를 얻고자 몽골의 실체에 관해 질문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적(서북의 달자-필자주)과 北虜는 원래 서로 통하

    는 遺種입니까? 北虜에는 皇太吉이 있는데 이 또한 달자의 종류입니까?”

    하니, 副總(李如梅-필자주)이 말하기를, 黃太吉은 바로 西胡입니다. 蒙古

    의 波羅那耶波羅가 老羅赤을 치려고 黃太吉에게 요청하여 공격하다가 불

    리하자 물러간 적이 있습니다. 老羅赤은 곧 金의 㺚子를 대신하고 태길은

    곧 遼의 㺚子를 대신해서 적은 숫자로 많은 수의 적을 대항합니다.10)

    여기에서 “서북의 달자”, “북로” 등은 모두 몽골을 가리키는 용어로

    이해된다. 이들이 누르하치를 공격하려다가 실패했다는 것은, 이 대화

    가 1598년 초의 일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1593년 9부연합군의 일원으

    로 참가하였던 코르친 등의 몽골 세력과의 대결 외에 다른 사건을 사

    료 상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蒙古의 波羅那耶波羅”는 音韻

    상으로는 구체적인 인물을 확정하기 어렵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코르

    친부의 지도자를 지칭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11) “西胡”라고 칭해진

    9) 선조실록 71권, 선조29년(1596) 1월 30일(정유); 선조실록 72권, 선조29년(1596) 2월 2일(기해).

    10) 선조실록 97권, 선조31년(1598) 2월 3일(무오).11) 北元이 멸망한 이후 몽골 대칸의 지위는 칭기스 칸의 적통인 차하르부의 칸

    이 계승하고 있었다. 시기적으로 볼 때 당시 몽골의 대칸은 보얀 세첸 칸

    (r.1593-1604)이었다.

  • 朝鮮王朝實錄에 비친 17세기 내륙아시아 정세와 ‘寧古塔回歸說’(洪性鳩)279“黃太吉”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그 語音은 몽골의 지도자의 지위를

    의미하는 몽골어 ‘홍타이지’의 音譯이다. 그리고 ‘홍타이지’라는 칭호는

    알탄 칸이 자신이 정복한 오이라트 지역에 대한 지배를 맡긴 쿠툭타이

    세첸 홍타이지와 부얀 바토르 홍타이지에게 副王의 지위를 부여하기

    위해 채용한 칭호였으며, 1581년 알탄 칸이 사망한 후 그 지위를 계승

    한 아들과 손자가 모두 ‘黃台吉’을 칭하였다.12) 그리고 ‘서호’와 같은

    의미라고 생각되는 ‘西㺚子’라는 용어가 실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1538년(중종33, 嘉靖17)의 일이다.13) 시기적으로 보면, 투메트의 알탄

    칸이 몽골의 실권을 장악하고 활약하기 시작하는 때이다. ‘서달자’가

    투메트부 알탄 칸이 주도하는 몽골 세력을 지칭하는 것이라면, 이때의

    ‘서호’ 역시 그 계통의 몽골 세력을 가리키는 용어일 가능성이 높다.

    아무튼 조선은 明將 李如梅를 통해 몽골의 두 세력에 관한 정보를 얻

    을 수 있었다. ‘蒙古의 波羅那耶波羅’는 좁게는 코르친을, 넓게는 차하

    르로 상징되는 몽골 本部를 의미하는 것이고, ‘西胡의 皇太吉’은 알탄

    칸을 계승한 몽골 세력을 의미하는 것이었다고 보인다.

    같은 해(1598년)에 조선에는 누르하치가 西㺚子에게 20만 병력을 請

    兵하여 일시에 각각 寬甸과 遼陽 지방을 공격한다는 소식이 전해졌

    고,14) 1605년에는 누르하치가 여전히 여허․몽골과 대립하고 있는 상

    황이 전해졌다.15) 몽골의 실체나 동향, 여진 및 명과의 관계에 대한 이

    12) 宮脇淳子, 조병학 역, 최후의 몽골유목제국 (백산출판사, 2000), p.166,p.214. 이에 따르면, 알탄 칸이 비록 칸의 칭호를 취하였으나 어디까지나 투메

    트 部長으로서 ‘지농’의 아들이었으므로 자신의 副王에게 대칸의 副王의 의미

    를 가진 ‘지농’의 칭호를 부여할 수 없었기 때문에 ‘홍타이지’라는 칭호를 채용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홍타이지’라는 칭호는 칭기스칸의 직

    계 자손에게만 허용되는 것이었다. 그 원칙이 깨지는 것은 오이라트의 구시칸

    시기에 이르러서의 일이다. 송미령은 皇太吉이 알탄 칸의 장자인 ‘훙타이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하였다(송미령, 앞의 논문, 2009, p.151). 알탄 칸의 장자

    는 ‘辛愛黃台吉’, 손자는 ‘址克力黃台吉’이라고 불리었다.

    13) 중종실록 89권, 중종33년(1538) 11월 25일(을미).14) 선조실록 107권, 선조31년(1598) 12월 13일(갑자).15) 선조실록 191권, 선조38년(1605) 9월 23일(갑오).

  • 中國史硏究 第69輯 (2010. 12)280해가 구체적이고 정확했다고 하기는 어렵겠지만, 당시 누르하치가 동

    생 수르하치와 대립하고 있던 상황, 혼인 동맹을 맺은 여진 및 몽골

    세력의 반란이 이어지는 등 대내외적인 위기에 처해 있었던 상황은 조

    선 조정에도 보고되었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평안도 관찰사 李時發의

    보고는 滿浦僉使 金應瑞의 牒呈에 의거한 것인데, 그 情報源은 “灣遮

    部落에서 온 穩城의 藩胡인 加音巨라는 이름의 오랑캐 등 11명”의 말,

    그리고 “梨坡에 거주하면서 대대로 귀순한 호인 童大乃가 老城(누르하

    치가 처음 定都한 퍼알라성)에 갔다 와서 아뢴 말”에 근거한 것으로

    당시 여진 사회에 널리 퍼진 소문임을 알 수 있다. 역사적 사실에 비

    추어 이 소문들은 거의 사실에 부합하는 것이었다.16)

    하지만 누르하치는 곧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고 점차 여진 내부를

    통일하고 혼인 정책을 통해 몽골과의 관계를 개선해갔다. 1616년 후금

    건국으로 상징되는 누르하치 세력의 확대는 조선에서도 분명하게 인지

    되었다. 하지만 ‘西㺚’로 통칭되는 몽골의 동향은 여전히 유동적으로

    인식되었다. 사르후 전투(1619년) 이후 누르하치가 요동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황태길의 㺚子”가 廣寧의 明軍과 연합하여 遼陽으로 진격해

    들어갔다는 소식이 들어왔는가 하면,17) 바로 며칠 후에는 사실이 아닌

    것 같다는 회의론이 제기되었다.18) 이듬해인 1622년이 되어 이 사건의

    실상이 전해졌다. 명이 후금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요동을 빼앗겼

    고, 명이 이를 만회하기 위해 서달과 연합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었

    다.19) 그런데 몇 년 후인 1624년에는 후금이 서달과 결탁하였다는 정

    보가 들어왔다.20) 또 얼마 후에는 후금이 서달에게 속았고 이 때문에

    16) 광해군일기 21권, 광해군1년(1609) 10월 13일(신유).17) 광해군일기 165권, 광해군13년(1621) 5월 27일(무진); 광해군일기 165권,광해군13년(1621) 5월 29일(경오); 광해군일기 166권, 광해군13년(1621) 6월1일(신미).

    18) 광해군일기 166권, 광해군13년(1621) 6월 14일(갑신).19) 광해군일기 176권, 광해군14년(1622) 4월 19일(갑신); 광해군일기 177권,광해군14년(1622) 5월 15일(경술).

    20) 인조실록 7권, 인조2년(1624) 12월 6일(병술).

  • 朝鮮王朝實錄에 비친 17세기 내륙아시아 정세와 ‘寧古塔回歸說’(洪性鳩)281싸움이 벌어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21) 이러한 정보들은 모두 누르하

    치의 후금이 요동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이를 저지하려는 명과 그 사

    이에서 撫賞銀을 확대하려는 차하르의 릭단 칸의 이해관계를 반영한

    것이다. 당시에는 명과 후금, 그리고 몽골(차하르) 사이에 이와 같은

    합종연횡이 빈번하게 일어났고, 몽골 내부에서도 자신들의 이익을 도

    모하기 위해 각 部가 후금이나 명에 가담하거나 이탈하는 등 변화무쌍

    한 국제관계가 전개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요동을 둘러싼

    국제정세의 전망을 어렵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변수는 바로 몽골의 동

    향이었다. 실록에 기록된 이합집산하고 있는 몽골의 모습은 바로 이러한 유동적인 국제관계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다.

    조선에서 이러한 국제관계를 면밀하게 분석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니었다. 하지만 후금이 요동으로 진출하는 과정에 ‘서달’

    이 개입하면서 요동을 둘러싼 정세가 매우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으며,

    그 여파가 조선의 북변 방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상황은

    충분히 고려되고 있었다. 1621년(광해군13) 광해군은 “西㺚이 요양을

    핍박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 말은 허황된 말이 아닐 것이다. 서달이 다

    시 瀋陽을 함락한다면 이 적들이 동쪽으로 나오는 길을 가득 메우게

    될 염려도 없지 않으니 昌城과 義州 두 곳을 굳게 지키고 강가를 기찰

    하는 등의 일을 별도로 의논해서 처리하도록 하라”고 지시를 내렸

    다.22) 서달의 공격으로 후금이 동쪽으로 밀리게 되면 조선의 북변이

    위험할 수 있다는 우려는 조선 후기 朝野에 팽배해 있던 이른 바 ‘영

    고탑 회귀설’을 떠올리게 한다. 따라서 ‘영고탑 회귀설’은 후금이 강성

    해진 후 몽골과의 대결이 예상되기 시작하면서 조선이 경계할 수밖에

    없었던 항상적인 외부적 위협의 구조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었다고 하

    겠다. 그리고 조선은 16세기 말 누르하치가 등장하는 초기부터 몽골의

    존재가 요동 정세에 미치는 영향, 즉 몽고․여진․명 삼자의 변화무쌍

    21) 인조실록 9권, 인조3년(1625) 6월 22일(무술); 인조실록 10권, 인조3년(1625) 12월 10일(갑신).

    22) 광해군일기 166권, 광해군13년(1621) 6월 1일(신미).

  • 中國史硏究 第69輯 (2010. 12)282한 이해관계와 그것이 조선의 북변 방어에 위협이 될 수 있는 가능성

    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2. 瀋陽館을 통한 몽골 정보의 확대

    1626년 寧遠城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누르하치가 死去하고, 홍타이

    지가 후금의 汗이 되었다. 이 무렵 명과 ‘서달’ 관계에 변화가 발생하

    고 있는 정황이 조선에 전해졌다. 정묘호란 문제를 교섭하기 위해 명

    에 파견되었던 김상헌이 ‘서달’의 사신에게서 “중국 조정이 외국인을

    대우하는 데 있어 매우 무례하여 오로지 토산물만을 요구한다. 東胡가

    배반한 것도 사실은 이 때문인데, 明年에는 우리도 오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을 듣고 온 것이다.23) 이것은 명이 차하르로 대표되는 몽골 각

    부의 지나친 撫賞銀 요구를 거절하면서 발생하기 시작한 명-몽골 관

    계 악화의 상황을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와 더불어 후금이 ‘서

    달’을 공격하고 있다는 소식과 후금이 ‘서달’ 혹은 몽고 지역을 경유해

    서 영원성 및 關中 일대를 공격하고 있는 소식도 전해졌다.24) 이것은

    홍타이지 시기 후금이 차하르 부의 릭단 칸과 대결하는 과정 및 그로

    인해 전개된 릭단 칸의 西遷과 후금의 내몽골 진출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후금은 이와 같이 차하르부를 서쪽으로 밀어붙이고 長城 북방

    의 내몽골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명과의 대결에서 군사

    적․지리적 우위를 확보해가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1634년 릭단 칸이

    사망하고 몽골 각부에 대한 차하르의 지배권이 급격히 와해되면서 후

    금은 차하르와 그 잔여세력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였다. 그 결과 후금

    의 홍타이지는 릭단 칸의 부인과 아들(에제이)을 사로잡고 大元의 傳

    23) 인조실록 16권, 인조5년(1627) 5월 18일(계미).24) 인조실록 18권, 인조6년(1628) 2월 28일(경신); 인조실록 18권, 인조6년(1628) 4월 14일(을사); 인조실록 19권, 인조6년(1628) 12월 4일(경인); 인조실록 22권, 인조8년(1630) 2월 27일(정축); 인조실록 28권, 인조11년(1633)12월 28일(병술); 인조실록 30권, 인조12년(1634) 11월 30일(임오).

  • 朝鮮王朝實錄에 비친 17세기 내륙아시아 정세와 ‘寧古塔回歸說’(洪性鳩)283國玉璽를 손에 넣음으로써 몽골의 정통을 계승한다는 상징성을 획득하

    는 데 성공하였다. 이것이 홍타이지가 大淸을 수립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소식은 후금의 使臣을 통해 조선

    에도 공식적으로 통보되었다.25) 1638년 심양관에서 세자를 배종하고

    있던 박노의 보고는 당시 청조의 판도를 반영한 것이었다.

    저 나라는 형세가 지극히 커졌습니다. 漠北의 여러 오랑캐들이 모두

    그 나라에 귀속하였고, 귀부하지 않은 곳은 다만 黃河 이북인데, 車河羅

    의 태자가[割註:차하라는 즉 西㺚 부락의 이름이다.] 汗의 사위가 되었고

    魚皮㺚子도 전쟁하지 않고 복속하였으니, 대저 그들의 위엄이 막북에까지

    행해지고 있습니다.26)

    당시 몽골은 크게 보면, 漠南몽골․漠北몽골․漠西몽골로 구분되었

    다. 막남몽골은 칭기스 칸의 적통을 계승한 차하르로 대표되는 내몽골

    제부를, 막북몽골은 칼카5부를 중심으로 한 세력을, 막서몽골은 오이라

    트를 중심으로 한 세력을 가리킨다. 1636년의 상황에서 보면, 청은 차

    하르 등 막남몽골을 복속시키는 데에는 거의 성공하였다. 하지만 막북

    의 칼카에 대해서는 通好 관계를 유지하였지만 직접적인 통제력을 행

    사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1638년에 이르면, 청이 칼카에 대해서 이른

    바 ‘九白之貢’을 요구하면서 갈등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1638년)에 자삭트 칸이 歸化城을 약탈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홍타이

    지가 親征에 나서고 자삭트 칸이 사신을 보내 사죄함으로써 문제는 일

    단락되었지만, 칼카에 대한 청의 정복욕은 이 사건을 계기로 여실히

    드러났다. 청과 오이라트는 거의 접촉이 없다가 1638년 오이라트의 칸

    이었던 호슈트의 구시 칸이 盛京에 사신을 보내옴으로써 비로소 관계

    가 성립하였다. 하지만 이때 구시 칸이 사신을 파견한 이유는 청이 막

    남몽골을 복속하고 막북몽골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함으로써 증가한 위

    기감의 결과였다고 이해되고 있다. 이러한 위기감은 칼카와 오이라트

    25) 인조실록 31권, 인조13년(1635) 11월 12일(무오); 인조실록 31권, 인조13년(1635) 12월 30일(병오); 인조실록 32권, 인조14년(1636) 2월 16일(신묘).

    26) 인조실록 37권, 인조16년(1638) 8월 4일(갑오).

  • 中國史硏究 第69輯 (2010. 12)284에게 내부 질서의 정비와 상호 협력의 필요성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

    다. 이에 칼카와 오이라트의 귀족들은 1640년에 會盟하여 유명한 ‘몽골

    -오이라트 法典’를 제정하고 자신들의 독립성과 자주성을 지키기 위한

    동맹을 체결하였다.27) 그러므로 “漠北의 오랑캐들이 모두 귀속하였다”

    는 표현은 실제로는 漠南의 차하르 복속을 가리키는 것이거나 칼카의

    諸 部將이 청조에 사신을 보내 通好 관계를 맺고 있는 상황을 반영한

    것이고, “아직 귀부하지 않은 황하 이북”은 漠西의 오이라트를 가리키

    는 것이라고 하겠다. 비록 조선이 몽골의 세력 지형을 정확하게 인식

    하고 있지는 못했지만, 일정한 사실과 대략적인 경향을 반영하고 있었

    으며 40여 년 전인 16세기 말과 비교하면 그 내용이 훨씬 풍부해졌다

    고 할 수 있다.

    몽골에 대한 정보가 이처럼 풍부해진 것은 바로 瀋陽館의 존재 때

    문이었다. 심양관에 파견되었던 조선의 관원들은 이어지는 몽골 귀족

    의 귀부에 관한 소식을 바로 바로 수집할 수 있었고,28) 그들에 대한

    冊封, 通婚 등의 의식에 참석하면서 몽골 귀족들과 직접 접촉하거나

    그들에 관한 소식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이를 통해 조선은

    청-몽골 관계의 실상을 파악하고 몽골에 대한 정보도 확대해 갈 수

    있었다. 이를 테면, 1636년 大淸의 수립은 누르하치의 여진 부족 통일

    과 1620년대 요동의 한인 지배, 그리고 몽골의 적통을 계승한 차하르

    부의 복속을 통해 이룩한 滿․蒙․漢의 새로운 통합 권력의 탄생을 알

    리는 사건으로 평가되는데, 청조의 이러한 성격은 “詔書를 반포할 때

    에 세 건의 조서를 만들어 청나라 장수는 淸語로 읽고 漢人은 漢語로

    읽고 몽고 장수는 蒙語로 읽는”29) 익숙하지 않은 광경을 보고한 조선

    관료의 눈에도 그대로 포착되었다.

    27) 이상 이 시기의 칼카와 오이라트의 동향에 관해서는 鳥雲畢力格 等撰, 蒙古民族通史 4卷 (內蒙古大學出版社, 2002), pp.58-61 참고.

    28) 심양장계 무인년(1638) 11월 17일; 심양장계 신사년(1641) 같은 날(4월11일) 承政院開坼.

    29) 심양장계 무인년(1638) 9월 3일.

  • 朝鮮王朝實錄에 비친 17세기 내륙아시아 정세와 ‘寧古塔回歸說’(洪性鳩)285그리고 1636년 병자호란은 형식적이나마 청과 조선의 관계를 적대

    관계에서 동맹 관계로 전환시킨 결과를 초래한 것이었으므로 조선이

    당시 청의 판도 내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는 계기가 된 것

    이 사실이다. 특히, 1638년과 1643년 2차례에 걸쳐 몽고 땅에 가서 소

    를 사오도록 한 일은 조선의 관원이 몽골을 직접 여행하고 지리․환경

    등 다양한 경험을 축적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의 貿牛 여정은 이러했

    다.

    비국 낭청 成釴이 소를 무역하는 일로 몽고에 들어갔다. 심양에서 서

    북쪽으로 16일을 가서 烏桓王國에 도달했고, 3일 만에 乃蠻王國에 도달했

    다. 또 동북쪽으로 4일을 가서 도달한 곳이 者朔道王國이었고, 북쪽으로

    가서 3일 만에 蒙胡達王國에 도달했고, 또 동쪽으로 가서 投謝土王國·所

    土乙王國·賓土王國에 도달했다.30)

    여기에 언급된 몽골 왕국 중 烏桓은 아오한, 乃蠻은 나이만, 者朔道

    는 자삭투, 投謝土는 투시예트를 가리키는 것이다. 아오한과 나이만은

    차하르에 복속되어 있던 막남몽골이고, 자삭투와 투시예트는 외몽골

    지역의 칼카이다. 성익은 내몽골을 지나 외몽골 지역까지 貿牛 여정을

    다녀왔고, 직접 이 지역을 두루 돌아다니며 지리 정보를 획득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여정은 각별한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또한 심양

    관 시절 鳳林大君도 청 태종 홍타이지의 西征을 따라 몽골 지역을 직

    접 체험하기도 했다.31) 이러한 체험은 봉림대군(孝宗)의 몽골 이해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이처럼 1636년 호란 이후 조선은 심양관에 체류하는 관원들을 통해

    서, 그리고 그 일부의 몽골 여행과 체험을 통해서 양적으로나 질적으

    30) 인조실록 36권, 인조16년(1638) 6월 9일(경자). 貿牛使로 파견된 成釴의 활동과 의의에 대해서는 이용범, 앞의 논문, 1965에 상세하다. 1643년의 貿牛와

    이를 위해 파견된 譯官 趙孝信에 관해서는 심양장계 계미년(1643) 같은 날(2월 10일) 承政院開坼; 심양장계 계미년(1643) 같은 날(2월 14일) 承政院開坼 ; 심양장계 계미년(1643) 같은 날(3월 2일) 承政院開坼; 심양장계 계미년(1643) 6월 27일 承政院開坼에 단편적인 기사가 보인다.

    31) 효종실록, 孝宗大王 墓誌文.

  • 中國史硏究 第69輯 (2010. 12)286로나 좀 더 수준 높은 몽골 정보를 집적할 수 있었다. 정보 수집의 방

    법이라는 면에서 보면, 주로 요동 지역에 떠돌던 소문과 풍문에만 의

    지하던 수준에서 관리가 직접 몽골 사람을 접촉하고 몽골 지역을 체험

    하며 정보를 수집하는 수준으로 발전했다고 할 수 있다. 이로써 조선

    은 몽골을 이전보다는 좀 더 익숙한 존재로 인식할 수 있게 되었고,

    청-몽골 관계를 비교적 사실에 가깝게 이해할 수 있게 되면서 몽골의

    동향은 조선의 미래와 관련된 중요한 외적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

    Ⅲ. 입관 이후 내륙아시아 제 세력의 동향

    1. 칼카, 코르친, 차하르

    1644년 명조가 이자성에게 멸망하자 明將 오삼계가 산해관을 열고

    청군을 맞아들임으로써 청조는 입관에 성공하였다. 그런데 입관 직후

    부터 몽골의 이상 동향에 관한 보고가 이어졌다. 1646년 사은사로 파

    견되었던 이경석 등은 “북경에서 전해들은 바에 따르면, ‘대왕[할주:죽

    은 汗 洪太始의 형 貴榮介]의 사위인 蒙古王이 瀋陽의 서쪽에서 살고

    있었는데,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옛 땅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그래서

    금년 5월 2일 청나라 사람들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十王[할주:죽은 한

    의 아우]으로 하여금 가서 치게 하였는데,’ …(중략)… 또 듣건대, ‘朱氏

    라는 어떤 사람이 몽고로 도망쳐 들어가 복수할 계책을 모의하고 있는

    데, 청나라 사람들이 매우 걱정한다.’고 한다”고 치계하였다.32) 이 기사

    는 막남몽골 수니트부의 텡기스가 일으킨 반란 사건을 가리킨다. 텡기

    스는 1639년 청에 귀부하였는데 도르곤과 사이가 나빠 태종 홍타이지

    가 죽자 충분한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이에 1646년 봄 여러 타이지와

    함께 무리를 이끌고 칼카로 도망갔다. 텡기스의 입장에서는 청조의 대

    32) 인조실록 47권, 인조24년(1646) 6월 3일(무인).

  • 朝鮮王朝實錄에 비친 17세기 내륙아시아 정세와 ‘寧古塔回歸說’(洪性鳩)287우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것이었지만, 이들을 받아들인 칼카의 입장에

    서는 칼카-오이라트 동맹을 통해 청조에 대항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

    신들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청에 복속한 막남몽골을 이탈시켜 자신

    들 측으로 끌어들이는 전략이었다. 따라서 청조는 ‘텡기스 사건’을 매

    우 중시하여 5월 2일 豫親王 도도를 揚威大將軍으로 삼고 코르친, 차

    하르 등 막남몽골의 군사를 동원하여 추격하였다. 7월에 이르러 칼카

    투시예트 칸이 2만의 병력을 동원하여 텡기스를 지원함으로써 양측의

    전투는 대규모로 확대되었지만, 결국 청군이 승리함으로써 칼카의 의

    도는 좌절되고, 이후 청-칼카 관계는 이 사건에 크게 영향을 받았

    다.33)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비춰보면, 이경석 등이 보고한 ‘텡기스 사

    건’은 매우 정확한 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1649년에는 冬至使 吳竣이 “宣大守將이었던 漢人 江姓인 자가 西㺚

    과 通謀하여 淸將을 죄다 죽였는데 그 근방의 7, 8고을이 다 투항하여

    붙었으므로 八王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친다고 한다.”고 치계하였

    다.34) 이 기록은 1649년의 大同守將의 반란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텡기스 사건’이 정리된 이후 칼카 제부의 여러 귀족들이 연이어 청조

    에 귀부해왔지만, 내부에서는 여전히 서로간의 약탈 행위가 계속되고

    있었다. 청은 이를 빌미로 칼카의 침입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1649년

    英親王 아지거를 파견하여 大同을 지키게 하였다. 이때 大同守將의 반

    란이 일어나 攝政王 도르곤이 몇 차례 친정에 나섰기도 했다.35) 그러

    므로 이 기사 역시 일정한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또 1655년 衙譯 金三達이 伴送使 許積에게 전한 청조 내부 정세에

    관한 정보에는, 청이 永曆帝의 南明 정권과 宣府·大同에서 일어난 봉

    기에 대해서 승리를 거두거나 섬멸한 상황과 함께 “매우 두려운 것은

    몽고 군사가 날로 성하고 부락이 매우 많은 것인데 그 가운데서 가장

    강한 것은 大元㺚子이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36) 이것은 조선의

    33) ‘텡기스 사건’에 관해서는 鳥雲畢力格 等撰, 앞의 책, pp.61-64 참고.

    34) 인조실록 50권, 인조27년(1649) 2월 5일(갑오).35) 이에 관해서는 鳥雲畢力格 等撰, 앞의 책, pp.123-124 참고.

  • 中國史硏究 第69輯 (2010. 12)288譯官이 당시 떠돌던 소문을 수집하여 보고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입관

    직후부터의 이어진 몽골의 반란을 고려할 때, 일정 부분 청조 사회 내

    부의 위기감을 반영한 것이라고 보인다. 그러므로 조선으로서는 청-몽

    골 관계에서 몽골의 위협이라는 요인을 추출해 내기에 충분한 정황이

    있었다고 하겠다.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서달’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이러

    한 의논이 이루어졌다.

    (상이-필자주) 이어서 묻기를, “지금 남북의 근심 중에서 어느 곳이 급

    한가?”하니, 김자점이 아뢰기를, “청국이 염려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

    기를, “우상의 생각은 어떠한가?”하니, 정태화가 대답하기를, “왜가 염려

    되나 군사를 움직이려면 먼저 한 가닥 말썽부터 일으킬 것이고, 蒙古가

    혹 마음을 먹더라도 北京을 버려두고 우리에게 먼저 오지는 않을 것입니

    다. 염려스러운 것은 청국이 버티지 못하고 義州 근처에 와서 우리가 接

    濟하여 주기를 바라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장차 어찌합니까?” 하자, 상

    이 이르기를, “내가 근심하는 것도 그것이다. 치밀한 대비책을 미리 강구

    해야 할 것이다.”하였다.37)

    仁祖가 우려한 조선의 외적 위협의 제일 요인은 淸이나 倭, 혹은 몽

    골이 조선을 직접 침략하는 경우가 아니라, 몽골의 공격을 받은 청이

    물러나면서 조선이 그 피해를 입는 경우였다. 앞에서 언급한 ‘영고탑

    회귀설’의 기본 구조는 인조의 인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665년(현종5, 강희4)에는 새삼 몽골이 청조에 위협이 되고 있는 상

    황이 전해졌다.

    蒙古의 여인이 일찍이 順治 황제의 황후가 되었다가 황제의 총애를 잃

    어서 본국으로 쫓겨났는데, 그 뒤에 낳은 아들이 나이가 지금 14세입니

    다. 청나라에서 몽고에 보내주기를 요청하였으나 끝내 보내지 않으므로

    조만간에 반드시 싸움이 일어날 것이라고들 하고 있습니다. 대개 몽고는

    서북 방면에 있는데 지역이 끝없이 넓고 부락이 많아 강함을 믿고 명령

    을 따르지 않는데다가 또 순치 황제의 아들이 인재여서 몽고 사람들이

    36) 효종실록 14권, 효종6년(1655) 4월 11일(을축).37) 인조실록 50권, 인조27년(1649) 2월 13일(임인).

  • 朝鮮王朝實錄에 비친 17세기 내륙아시아 정세와 ‘寧古塔回歸說’(洪性鳩)289왕으로 삼고 와서 다툰다면 반드시 큰 걱정거리가 될 것이므로 청나라

    사람들이 몹시 염려하고 있다고 합니다.38)

    순치제는 모두 6명의 몽골 출신 妻妾을 맞이했다. 그 중 둘이 황후

    가 되었는데, 모두 코르친부 출신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순치제와

    관계가 좋지 않았다. 첫 번째 황후는 책봉된 지 3년 만(1653년, 순치

    10)에 결국 폐위되고 말았고, 두 번째 황후인 孝惠章皇后의 경우도 겨

    우 폐위의 위기를 모면했다. 따라서 위 기사는 첫 번째 황후를 폐위한

    사건의 개요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39)

    이 순치제 폐후 사건은 누르하치 이래 가장 빈번하게 通婚하며 강

    고한 동맹을 유지해 온 코르친부의 불만을 야기하였다. 1659년(순치16)

    순치제가 폐후의 아버지인 科爾沁親王 吳克善과 郡王 滿珠習禮 형제를

    북경에 불러들였는데 이들은 전염병을 핑계대고 들어오지 않았다. 이

    것은 폐후 사건에 대한 불만을 표출한 것이었다.40)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약 10년쯤 후의 숙종실록의 기록에도 보인다.

    황제(강희제-필자주)에게는 東․西의 두 황후가 있다. 이른바 西后는

    蒙王의 딸이요 東后는 한인의 딸인데, 황제가 黑舍氏에게 매혹되어 서후

    를 本國으로 내치자 아이를 임신한 채 가서 이미 아들을 낳았다는 말을

    들었다. 몽고에다 군사를 청하여 正軍 1만 4천을 얻어서 남방으로 보냈더

    니, 戰陣에서 죽은 자와 水土에 익숙지 못하여 죽은 자가 반을 넘었다.

    몽고에서는 그의 딸이 내침을 당한 것을 한하고 있는데다가 兵馬의 折傷

    이 이와 같아서 마음에 분노를 품고 있으므로 앞으로의 일이 염려스럽

    다.41)

    여기에서 “黑舍氏”는, 音韻 상으로 보면, 아무래도 강희제의 첫 번째

    38) 현종실록 10권, 현종6년(1665) 3월 6일(임진).39) 순치제의 폐후 사건에 관해서는 다음 기록을 참고. 淸世朝實錄 (中華書局,1976) 卷77, 順治10年 8月 丁亥; 庚寅; 卷78, 順治10年 9月 癸巳朔; 丁酉; 丁巳;

    趙爾巽 等撰, 淸史稿 卷214, 列傳1, 后妃, 世祖廢后 ; 孝惠章皇后 .40) 杜家驥, 淸朝滿蒙聯姻硏究 (人民出版社, 2003), p.269.41) 숙종실록 1권, 숙종즉위년(1674)) 11월 7일(병인).

  • 中國史硏究 第69輯 (2010. 12)290황후인 孝誠仁皇后 赫舍里氏를 가리키는 것 같다. 하지만 그 밖에 강

    희제의 황후에 관한 내용은 거의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강희제는 모두 53명의 처첩을 맞이했는데 그 중 몽고 출신은 불과 2명

    에 불과했고, 이들도 순치제 때와 마찬가지로 모두 코르친부 출신이긴

    했지만 누구도 황후가 되지는 못했다.42) 그러므로 위 기사는 ‘순치제

    폐후 사건’과는 달리, 삼번의 난이 발발한 직후의 불안감 속에서 증폭

    된 몽골에 대한 위기의식이 ‘순치제 폐후 사건’을 통해 드러난 결과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소문이 “나이 70이 된 漢人 曲科”라는 사람

    을 통해 전해진 것을 볼 때, 역시 청조 사회 내부에 퍼져있던 위기의

    식, 적어도 청조 치하의 漢人의 정서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강희시기에 접어들면서 몽골과 관련한 청조의 위기의식을

    전하는 소식이 더욱 빈번해졌다. 1667년 陳奏使 許積과 동행했던 南龍

    翼이 전한 청나라 士人의 말에는 “유독 청나라 사람들이 밤낮으로 걱

    정하는 것은 단지 西㺚에 있다”43)는 내용이 있었고, 1668년 사은사 일

    행은 “喜峰口의 蒙古 部落이 배반한 사정에 대한 글”44)을 보고하였다.

    그리고 1669년 정월에는 “몽고가 청나라와 틈이 생겼다는 소식”45)이

    전해졌다. 이때의 “몽고와 청나라의 틈”은 아마도 “몽고에서 도망쳐

    온 崔吉이라는 사람”이 전한 다음과 같은 사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

    을 것으로 생각된다.

    몽고의 왕은 바로 順治 皇帝의 매부이다. 그의 처가 살아생전에 왕에

    게 이르기를 “내가 죽은 뒤에는 심양에 가지 마십시오. 가셨다간 반드시

    42) 청조가 순치조까지 주로 몽골 코르친부 출신의 황후를 맞이했던 사실에 비춰

    보면, 이것은 청조 통혼정책의 큰 전환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杜家驥, 앞

    의 책, pp.266-268).

    43) 현종실록 13권, 현종8년(1667) 1월 12일(정해).44) 현종실록 15권, 현종9년(1668) 10월 13일(무인). 희봉구 몽고 부락의 배반은이듬해에 곧 사실이 아님이 확인되었다. 하지만 청이 몽고를 두려워한다는 인

    식에는 아무런 영향도 없었다(현종실록 16권, 현종10년(1669) 3월 4일(정유).45) 현종실록 16권, 현종10년(1669) 1월 27일(신유).

  • 朝鮮王朝實錄에 비친 17세기 내륙아시아 정세와 ‘寧古塔回歸說’(洪性鳩)291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처가 죽자 왕이 그 말을 생각하고

    한 번도 심양을 찾지 않자, 청나라가 사람을 보내 꾸짖기를 “심양에는 그

    대 조상의 무덤이 있는데 어찌해서 한번 와 성묘하지도 않는가.” 하니 왕

    이 부득이해서 찾아갔다. 청나라 사람들이 덫을 놓아 사로잡아 구류시키

    고서는 그 아들을 세워 왕을 삼게 하였다. 그 아들의 나이는 16세였는데

    당당하게 말하기를 “죄도 아닌 것으로 父王을 구류하고 있는 것은 불가

    한 것이며, 아비에게 죄를 주고 자식을 세우는 것도 불가한 것이다.” 하

    고는 마침내 청나라의 서울로 달려갔다. 몽고의 12部 중 이 왕의 부가 가

    장 어른인데 12부가 각기 정병 수십만을 거느리고서 ‘일이 잘 끝난다면

    우리들도 일을 벌이지 않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군사를 일으키겠다.’고 말

    하고 있다. 몽고 왕의 나이가 비록 어리지만 헌걸참이 출중하다.46)

    그리고 불과 20여 일 후에 “差使員 麟山僉使 金得善과 淸譯 崔厚元

    이 돌아와 전한 소문”도 위의 몽고에서 도망 쳐 온 사람이 전한 소문

    과 대동소이하였다.

    몽고는 옛날부터 제어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기미책을 쓸 심산으로

    일찍이 황제의 딸을 그 나라 왕에게 시집보내 처로 삼아주었다. 그래서

    몽고 왕은 順治 皇帝의 親妹夫였다. 그 뒤로 몽고의 왕은 제후의 법도를

    지키지 않았고 순치 황제가 죽었을 때도 북경에 조문오지 않아, 청에서는

    노여움을 쌓아둔 채 속으로 참아온 것이 오래였다. 지난해에 몽고 왕의

    처가 죽었는데 화장할 때 그 나라의 풍속은 으레 평생 옷가지며 보물들

    을 불태워 왔는데 이 왕비의 것은 불태우지도 않았고, 또 북경의 장가들

    라는 허락을 기다리지도 않고서 그 죽은 형의 처를 後妻로 삼았다. 그리

    고는 전처의 옷가지며 보물들을 그대로 그에게 주었으므로 이로 인해 더

    욱 분노를 샀다. 올 6월에 계책을 써 북경으로 초치했는데, 처음에는 남

    쪽에다 안치시키려 했었으나 이른바 황태후란 분의 간청으로 중지하고,

    별도로 심양에다 감옥을 만들어 囚禁시키고 그 아들을 봉해 몽고 왕으로

    삼았다. 8월 사이에 그 아들과 몽고의 다른 왕 너 댓 사람이 술이며 안주

    를 싣고 삼양에 함께 왔었는데, 지키는 장수가 서로 만나는 것을 허락해

    주지 않았다. 그러자 그의 아들이 화를 내며 돌아가면서 수많은 공갈을

    했다. 이로 인해 심양이 웅성거리고 있다. 반드시 무사하지 않을 것이

    다.47)

    이 소문의 출처로 “김득선은 우리나라에서 포로로 잡혀갔다가 몽고

    46) 현종실록 17권, 현종10년(1669) 9월 30일(경신).47) 현종실록 17권, 현종10년(1669) 10월 20일(경진).

  • 中國史硏究 第69輯 (2010. 12)292에서 중이 된 사람과 우리나라에서 포로로 잡혀간 이름이 崔貞立이란

    사람에게 들었고, 최후원은 요동의 護送 군사에게 들었다”고 한 것으

    로 보아 이 사건은 당시 몽골과 심양 일대에 파다하게 퍼진 소문이었

    다고 생각된다.

    이 사건의 실체는 1669년(강희8)에 발생한 ‘아부나이 囚禁 사건’이었

    다. 아부나이는 릭단 칸의 장자인 에제이의 동생이었다. 태종 홍타이지

    는 1635년 차하르를 복속한 후 자신의 둘째 딸인 마카타를 에제이와

    결혼시키고, 에제이를 固倫額駙親王으로 삼았다. 이렇게 함으로써 칭기

    스 칸의 적통을 예우하는 뜻을 드러내어 몽골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에제이는 1641년 사망하고 말았다. 마카타는

    1645년 에제이의 동생인 아부나이에게 再嫁하였고, 1648년 아부나이는

    형의 지위를 계승하여 和碩親王이 되었다. 그런데 1659년 차하르부에

    서 阿濟薩이란 자가 아부나이를 刺殺하려다 발각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아부나이가 범인인 阿濟薩 등을 斬刑에 처함으로써 일단락

    되었으나, 청조가 이와 같은 결정을 문제 삼으면서 예기치 못한 방향

    으로 전개되었다. 청조는 ‘例에 따라 다른 旗王․貝勒 등과 의논하여

    처리’하지 않고 아부나이가 멋대로 독단했다는 죄를 씌워 ‘친왕의 지위

    를 삭탈하고 말 천 필의 벌금을 부과’하기로 하였다. 마지막에는 순치

    제가 관용을 베풀어 친왕의 지위는 유지하는 것으로 되었으나 이 사건

    으로 인하여 몽골의 수장인 아부나이는 청조에 큰 불만을 갖게 되었

    다. 이후 아부나이는 8년 동안 한 번도 북경에 조회하러 오지 않는 등

    불만을 그대로 표출하였다. 이에 1669년 청조는 아부나이의 작위를 박

    탈하고 심양에 수금하였고, 장자인 부르니에게 그 지위를 계승하도록

    하였다. 부르니는 청조의 이러한 조치에 불만을 품고 있다가 1673년

    삼번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틈타 마침내 1675년 반란을 일으켰다. 이

    것이 ‘부르니 반란’ 사건이다.48)

    48) 이상 ‘아부나이 수금 사건’과 ‘부르니 반란’에 관해서는 森川哲雄(葉新民 譯),

    察哈爾部布爾尼親王之亂 (蒙古學信息 1998-4); 鳥雲畢力格 等撰, 앞의 책,pp.70-77; 梁劍兵․張新華, 對1675年布爾尼事件的法律社會學分析 (靑海民族

  • 朝鮮王朝實錄에 비친 17세기 내륙아시아 정세와 ‘寧古塔回歸說’(洪性鳩)293‘부르니 반란’ 역시 청나라를 도망쳐 나온 安端이라는 사람에 의해

    신속하게 조선에 전해졌다. 아래의 사료를 보면, 당시 이 사건으로 인

    한 요동 일대의 위기감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청나라 사람 한 명이 스스로 走回人이라 일컬으며 中江을 건너와 강을

    건너오기를 청하기에 儐臣들과 의논하고서 通官으로 하여금 勅使에게 말

    하였더니, 칙사가 將官을 시켜 급히 잡아오라고 하므로 그를 결박하여 鳳

    凰城으로 압송하였습니다. 그의 이름을 물으니, 스스로 走回人이라고 일

    컫던 청나라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의 실상은 “이름은 安端이고 江華千

    摠 安夢說의 아들이며, 京畿都事 鄭復吉의 妻兄弟로서 丙子年에 청나라에

    붙잡혀 가서 甲軍의 집의 종이 되어 北京에 있었으며, 다시 북경의 서쪽

    3, 4일 거리인 保重衛로 옮겼습니다. 지난해에 주인 되는 胡人이 전쟁에

    한 번 나간 뒤에는 아득히 소식이 없었으며, 그밖에도 남방으로 쳐내려간

    청나라 군사들은 모두 전쟁에 패하여 죽었기에 청나라 사람들의 마음이

    흉흉하여 아침저녁을 보전하기 어려웠습니다. 이미 주인인 호인을 잃었으

    므로 망명할 계책을 내어 보중위를 떠나 북경에서부터 출발하여 關 밖에

    이르러 보니, 錦州衛와 廣寧 등지의 사람들은 모두 避亂할 것만 생각하면

    서 蒙古가 장차 심양을 침범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심양 성문에 이르니

    낮에도 성문을 닫아서 머물지 못하고, 連山關에 이르러 봉황에서 징발되

    어 심양으로 떠나는 甲軍 1백 20인을 만났기에 물으니, 그들은 몽고의 임

    금 車屹汗이 포로가 되어 심양에 갇힌 지 10년이 되었는데, 그의 아들이

    대신 임금이 된 뒤에 한 부대의 군사를 이끌고 와서 북경으로 통하는 길

    을 막고는 심양을 쳐서 빼앗고 그의 아버지를 구해 냈으며, 그런 뒤에 장

    차 서쪽을 침범할 것이라고 했습니다.49)

    安端이라는 사람이 겪은 당시 청조 사회는 삼번의 난 등 반청 운동

    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다. 특히 산해관 밖 錦州와 廣寧, 瀋陽, 그

    리고 連山關에서 鳳凰城에 이르기까지 요동의 대부분 지역은 차하르

    부의 부르니 반란으로 인해 몹시 불안한 상황이었다. 물론 부르니의

    반란은 다른 몽골 제부의 호응을 얻는 데 실패하여 신속하게 진압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 사료는 몽골의 반란이 청조 사회에 얼마나 큰 불안

    요인이었는지, 그리고 어느 정도로 위기감이 조성되었었는지를 여실히

    學院學報(社會科學版) 33-2, 2007)을 참고.49) 숙종실록 3권, 숙종1년(1675) 4월 6일(갑오).

  • 中國史硏究 第69輯 (2010. 12)294보여주고 있다. 특히 코르친는 청조의 오랜 동맹이고, 차하르는 칭기스

    칸의 적통을 계승한 몽골의 권위이었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만

    큼이나 이들과의 관계 악화나 반란은 청조 사회의 위기의식을 크게 증

    폭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조선도 다양한 정보활동을 통해 이러한 청-

    몽골 관계의 정황과 청조의 위기감을 충분히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2. 오이라트 준가르(太極㺚子)

    코르친과 차하르의 이반 외에도 몽골의 또 다른 세력이 청조의 위

    협으로 등장하였다. 1670년 조정에서는 ‘청인이 두려워하여 금과 비단

    을 뇌물로 주는 西凉의 몽골’50)이라는 존재가 거론되었고, 1673년 삼번

    의 난이 발생한 직후 청-몽골 관계 악화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는

    가운데 ‘太極㺚子’라는 새로운 몽골 세력에 대한 정보가 들어오기 시작

    하였다.51) ‘태극달자’는 “오삼계의 아들이 태극달자의 사위”라고 하는

    등, 오삼계와의 연합에 대한 우려가 거론되면서 그 세력의 강성함과

    청조에 대한 위협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52) 물론 오삼계의 아들과

    ‘태극달자’의 통혼은 사실이 아니지만, 이것은 적어도 삼번의 난이 발

    생한 이후 오삼계와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5세의 연계에 대한 강희제의

    강한 의구심을 반영하고 있다고는 볼 수 있다. 당시 강희제는 오삼계

    50) 현종실록 18권, 현종11년(1670) 3월 3일(경신).51) 현종개수실록 28권, 현종15년(1674) 5월 20일(계미). 아마도 삼번의 난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는 告訃使의 密啓에 ‘太極㺚子’에 관한 언급이 포함되어 있

    었던 것 같다. 이에 대해 領議政 金壽興은 “그것은 바로 大元의 자손인데 스스

    로 병력이 강하다고 믿고 자못 북경을 가볍게 보는 뜻이 있다”고 인식하고 있

    었다.

    52) 숙종실록 2권, 숙종1년(1675) 1월 17일(병자); 숙종실록 2권, 숙종1년(1675) 1월 26일(을유); 숙종실록 13권, 숙종8년(1682) 3월 17일(을축). “오삼계의 義子인 張勇이 태극달자의 사위”라는 정보가 사실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

    서는 송미령, 앞의 논문, 2009, pp.156-157 참고. 張勇이 오이라트 방어의 책임

    을 맡고 있었다는 점에서 보면, 이러한 소문은 그렇기를 바라는 漢人들의 기대

    와 희망을 반영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 朝鮮王朝實錄에 비친 17세기 내륙아시아 정세와 ‘寧古塔回歸說’(洪性鳩)295와 접하고 있는 달라이 라마 5세의 동향에 매우 신경을 쓰고 있었고,

    그가 기꺼이 청을 지원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티베트의 동향에 대해

    큰 의심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티베트의 배후에는 달라이 라마를

    정신적 지주로 삼고 있는 몽골의 오이라트가 있다는 것을 강희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태극달자와 오삼계의 통혼관계에 관한 정보는

    비록 사실이 아니라 하더라도, 오삼계와 티베트의 연계에 대한 청조의

    우려를 반영하고 있는 소문이었다.

    1653년 오이라트 4부의 하나인 준가르의 部長인 바투르 홍타이지가

    죽자, 준가르 내부에서는 그 계승권을 놓고 형제 간에 권력 투쟁이 일

    어났다. 여기에서 승리하여 준가르 부장이 된 것은 바투르 홍타이지의

    넷째 아들 갈단이었다. 그는 이어 자신을 도왔던 호슈트의 칸인 오치

    르투 칸을 죽이고 오이라트 전체를 지배하는 수장이 되었다. 삼번의

    난이 한창이던 1677년 말부터 갈단에게 패한 오이라트의 일부 세력이

    불법적으로 청의 서부 변경을 넘어 식량을 약탈하기 시작하였고, 몽골

    에서는 갈단이 장차 청을 침략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1679년에도

    오이라트의 일부 세력이 계속 청의 서변을 약탈하였고, 강희제는 두르

    베트부의 달라이 바투르 타이지 등을 통해 이들을 통제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삼번의 난 진압에 몰두해야 했던 강희제는 갈단에게 청의 서변

    을 침략하는 무리들을 제거하고 그들이 약탈한 것들을 돌려줄 것을 요

    구하였다. 1679년 가을 갈단은 강희제에게 서북 지역은 자신의 영역이

    며 靑海 지역만이 양측의 조상이 나누어 가진 곳인데, 지금은 청이 통

    제하고 있으니 돌려받기를 원한다는 서신을 전달하였다.53) 이처럼

    1670년대의 ‘태극달자’는 바로 오이라트에서 갈단이 등장하는 과정을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당시는 마침 삼번의 난이 한창이던 때이므

    로 지리적으로 가까운 티베트와 그 배후에 자리 잡은 오이라트의 존재

    53) 이상 준가르의 내분과 갈단의 등장에 따른 오이라트와 청조의 관계에 대해서

    는 Peter C. Perdue, China Marches West; The Qing Conquest of CentralEurasia (The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2005), pp.139-140참고.

  • 中國史硏究 第69輯 (2010. 12)296는 청조로서는 매우 신경이 쓰이는 부분이었다.

    1682년에는 ‘태극달자’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정보가 들어온다.

    지금 몽고의 太極㺚子가 가장 강성하여 제압하기 어려운데, 청나라에

    臣服한다고는 하나 실은 청인이 도리어 섬깁니다. 㺚子가 拜陵하겠다고

    말하거나 會獵하겠다고 말하면, 청인이 두려워서 金帛을 많이 주고 그만

    두도록 꾄다 합니다.54)

    太極㺚子의 병력이 매우 강성하여, 매번 황제와 함께 수렵할 것을 청

    하는데도 청나라에서는 두려워하여 해마다 金 3백 50만 냥을 주어서 때

    우고, 청나라 장수 張勇이 陝西를 수비하며 꾀를 내어 묶어 두고 있는 까

    닭에, 아직 군사를 일으킬 일은 없으나, 이것이 腹心의 병통이 된다고 합

    니다.55)

    이들을 ‘태극달자’라고 부르고 있다는 점에서 1670년대의 ‘태극달자’

    와 같은 세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되고, 특히 “청나라 장수 張勇이

    陝西를 수비하며 꾀를 내어 묶어 두고 있다”는 내용으로 보아 오이라

    트를 가리키는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56) 청조가 ‘태극달자’ 혹은 ‘서달’

    로 표현되는 오이라트 준가르를 각별히 경계하고 있다는 소식은 이후

    에도 계속 이어졌다.57) 1685년에는 “태극달자(서달)가 조공을 핑계로

    수만의 기병을 이끌고 關 밖에까지 몰려왔다”는 좀 더 구체적인 상황

    이 전해졌고,58) 1687년에는 “태극달자가 陝西와 山西는 원래 자기네

    땅이므로 내놓지 않는다면 침략하겠다”는 뜻을 청조에 전했다는 정보

    54) 숙종실록 13권, 숙종8년(1682) 1월 24일(임신).55) 숙종실록 13권, 숙종8년(1682) 11월 24일(정묘).56) 송미령은 1688년 이전의 ‘태극달자’ 혹은 ‘서달’은 동몽골을, 그 이후의 ‘태극

    달자’, ‘서달’은 준가르로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송미령, 앞의 논문,

    2009, pp.158-163) 하지만 1688년 이전의 ‘태극달자’, ‘서달’을 동몽골로 추정한

    근거가 미약해 보인다. 물론 여러 몽골 세력에 관한 정보가 혼재되어 있을 수

    있지만 오삼계와의 관련을 의심한다던가, 張勇이 방어하고 있다는 내용으로 보

    아 ‘태극달자’는 대부분 오이라트의 준가르 세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도 무

    방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57) 숙종실록 14권, 숙종9년(1683) 4월 29일(신축); 숙종실록 15권, 숙종10년(1684) 12월 6일(정유).

    58) 숙종실록 16권, 숙종11년(1685) 4월 2일(신묘).

  • 朝鮮王朝實錄에 비친 17세기 내륙아시아 정세와 ‘寧古塔回歸說’(洪性鳩)297가 보고되었다.59) 이러한 정보가 조선에도 위기감을 고조시킨 것은 물

    론이다. 영의정 남구만, 병조판서 이사명 등이 서달(태극달자)로 인한

    혼란에 대비해 무비를 강화해야 한다는 건의를 올리기도 했다.60)

    1688년 마침내 ‘태극달자’가 거병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冬至使

    로 갔던 東平君 李杭 등과 進香使로 파견되었던 洪萬鍾 등이 돌아와서

    보고한 바의 요지는, “태극 달자의 병력이 매우 강성하고, 북경에서 3

    천여 리 밖에서 國號를 大興이라 하고 年號를 文治라고 한지 5년이나

    되었다”는 소문이었다. 이 보고를 들은 숙종은 “저들의 형세가 이와

    같다면 천하는 끝내 안정될 수가 없겠다”고 판단하였다.61)

    1688년에 보고된 태극달자(서달)의 거병은 강희제의 제1차 준가르

    정벌의 계기가 되는 준가르의 갈단과 칼카의 투시예트 칸 사이의 무력

    충돌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때 칼카가 청조에 귀부하여 구원

    을 요청함으로써 강희제는 칼카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는 기회를 잡

    았고, 갈단에 대해서는 교섭을 진행하다가 결국 정벌을 단행하였다.

    1690년에 들어서면 조선 조정에서도 ‘태극달자’와 청의 전쟁이 임박했

    음을 감지하고 있었던 듯 위기감이 고조되었다. 입관 이래 항상적으로

    몽골로 인한 위기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던 상황에서 ‘거병’ 소식과 본

    격적인 전쟁 임박의 기운을 접한 조선이, 몽골의 공격을 받아 버티지

    못한 청조가 영고탑을 돌아가는 상황을 우려하게 된 것은 어쩌면 자연

    스런 결론 도출이었을지도 모른다.62) 1690년 8월 초하루 청군과 준가

    르군은 마침내 울란 부퉁에서 격전을 벌였다. 강변을 지나가는 淸人이

    청이 승리했다는 소식을 전했고, 이것은 義州府尹의 狀啓를 통해 조정

    에 보고되었다.

    59) 숙종실록 18권, 숙종13년(1687) 3월 22일(경자).60) 숙종실록 18권, 숙종13년(1687) 9월 22일(정유); 숙종실록 18권, 숙종13년(1687) 9월 26일(신축).

    61) 숙종실록 19권, 숙종14년(1688) 4월 2일(갑진); 숙종실록 19권, 숙종14년(1688) 6월 12일(계축).

    62) 숙종실록 22권, 숙종16년(1690) 1월 3일(을미); 숙종실록 22권, 숙종16년(1690) 7월 13일(임인).

  • 中國史硏究 第69輯 (2010. 12)298

    강변을 지나가는 淸人에게 물었더니 “황제가 스스로 거느리고 山西總

    兵과 군사를 합하여 8월 초하룻날에 羯哈 지방에서 於乙於大 등을 격파

    하여 거의 다 죽이고 16일쯤에 철수하여 북경에 돌아올 것인데, 어을어대

    는 太極㺚子의 종류가 아니고 사는 곳은 북경에서 2천여 리 떨어져 있

    다.” 하였습니다.63)

    여기에 언급된 “於乙於大”는 오이라트를 가리키는 윌뤼트(Ölöt)를

    音借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 점에서 “어을어대는 태극달자의 종류가

    아니”라고 한 청인의 이해는 정확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준가르 정벌이라는 사건의 개략적인 사실은 불과 한 달 여 만에 신속

    하게 조선에 전해진 것이다.

    1695년에는 冬至副使 李弘迪과 書狀官 朴權 등이 “蒙古의 別部인 喀

    喀의 一種이 매우 강성하여 지금 바야흐로 군사를 동원해 변경을 침노

    하였다”64)고 보고하였다. ‘喀喀’을 ‘칼카’의 음차로 본다면, 당시 칼카가

    청의 변경을 침범했다는 내용은 아무래도 사실에 부합하지 않을 가능

    성이 높다. 왜냐하면 준가르와의 갈등으로 인해 칼카는 이미 대부분

    청조에 귀부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이 ‘칼카’를 인식할 수

    있게 된 것은 청과 준가르의 대립을 주시하며 정보 수집을 해 온 결과

    였다. 이 무렵 오이라트을 의미하는 ‘阿魯得’65)이라는 명칭이 등장하면

    서 “이때에 아직 交兵하지 않고 있으며, 청국에서 이제 바야흐로 戎務

    를 整飭하여서 봄이 오면 반드시 군대를 동원하리라고 한다”는 정보가

    謝恩使行을 통해 보고되었다. 실제로 이듬해 봄인 1696년 3월 강희제

    의 친정군이 북경을 출발하였고, 5월 말 자오 모도에 도착하여 갈단의

    군대를 맞이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실록에는 더 이상 강희제의 준가르 정벌에 대한 기사가 나오지 않지만 이후에도 강희제는 제3차 준가

    르 정벌을 단행하여 결국 갈단을 제거하였다.

    청조는 입관 이후 차하르의 반란을 진압하고 막남몽골에 대한 지배

    63) 숙종실록 22권, 숙종16년(1690) 9월 8일(을미).64) 숙종실록 28권, 숙종21년(1695) 3월 21일(임오).65) 숙종실록 29권, 숙종21년(1695) 12월 3일(신묘).

  • 朝鮮王朝實錄에 비친 17세기 내륙아시아 정세와 ‘寧古塔回歸說’(洪性鳩)299권을 확립하였으며, 강희제 시기에 들어서서 삼번의 난과 대만의 정씨

    세력 등 반청 세력을 진압하고, 남진하는 러시아와도 조약을 맺었으며,

    준가르의 갈단을 제거하고 막북 칼카에 대해서도 지배력을 확대하였

    다. 이로써 강희제는 대청제국의 안정을 위한 초석을 모두 마련한 셈

    이었다. 특히 갈단 정벌은 대청제국의 경계를 확정짓는 대 프로젝트의

    시작이었고, 과거의 金朝 처럼 몽골에게 망하느냐, 아니면 중국 역사상

    가장 강한 나라가 되느냐의 기로에서 사실상 대청제국의 지속 여부를

    결정지은 대사건이었다.66)

    강희제의 준가르 정벌은 청조에게 있어서도 이처럼 중요했지만, 몽

    골의 동향에 예민할 수밖에 없었던 조선에게도 초미의 관심사였다. 하

    지만 강희제의 준가르 정벌을 정점으로 몽골의 동향과 관련된 청조의

    위기에 대한 조선의 기대나 우려는 점차 약화되기 시작하는 것 같다.

    이후에도 청과 몽골의 길항관계가 계속되는 만큼 조선에서도 여전히

    ‘영고탑 회귀설’이 제기되고 있었다. 하지만 18세기에 들어서면 그것이

    점차 약화되고 고식화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준가르만을 놓고 본다면,

    사실 갈단 사후 체왕 랍단의 시기(1697~1727)가 오히려 준가르 세력

    의 전성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내륙아시아 정세에 대한 조선

    의 인식은 청과 몽골의 상호 관계의 변화에 매우 밀착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러시아(大鼻㺚子)

    몽골과 관련한 청조의 위기의식이 절정에 이른 17세기 후반 몽골과

    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력이 동아시아에 출현하였다. 바로 러시아의

    남진이다. 한국사에서는 ‘羅禪征伐’(1654년 邊岌, 1658년 申瀏)로 기록

    하고 있는 두 차례에 걸친 러시아와의 군사적 충돌은 조선이 새로운

    세력 러시아와 처음 접촉한 사건이었다.

    66) Peter C. Perdue, 앞의 책, p.208.

  • 中國史硏究 第69輯 (2010. 12)300제1차 나선정벌에 나섰던 邊岌은 寧古塔에 출정한 이후 러시아와

    전투를 벌였던 지역 일대에 대한 비교적 자세한 지리 정보와 종족의

    상황에 대해 보고하였다. 여기에서 변급은 “이 적은 반드시 서양의 나

    라에서 왔을 것”이라고 보고하였다.67) 원병을 요청하러 온 淸差 韓巨

    源이 “나선이 어떤 나라”인지를 묻는 효종의 질문에 “영고탑 옆에 별

    종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나선”이라고 대답한 것과 비교해 보면, 淸差

    도 아직 러시아에 대해서 사실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지 못했던 데 비

    해, 현장에서 직접 접촉했던 변급은 상대적으로 사실적인 이해가 가질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직접적인 접촉이 계속 이어지지 못하

    였기 때문에 조선은 오랜 동안 러시아의 실체에 접근하기 어려웠다.

    그로부터 약 15년 쯤 후인 1679년 실록에는 ‘아부나이 수금 사건’과 함께 “청인들이 가서 공격하였으나 5백 명의 군사가 모두 몰살당한

    ‘曰可’라는 종족이 곧 羅先”이라는 언급이 보인다.68) 1682년에는 瀛昌

    君 李沈과 함께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副使 尹以濟가 청조의 사정에 관

    해서 “청이 태극달자 외에도 大鼻㺚子와도 군사를 서로 대치하고 있

    어, 太學士 明珠의 아들을 보내어, 수천의 兵馬를 거느리고 가서 싸우

    게 하였는데, ‘講和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기필코 무찔러 없애라.’고 하

    였다”69)고 보고하였다. 처음 러시아를 지칭하는 이름인 ‘나선’외에도

    ‘왈가’라는 이름이 나타났고, 또 ‘대비달자’라는 이름이 등장했다. ‘대비

    달자’라는 이름은 청의 사료에는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조선에서

    그들의 신체적 특징을 지칭하여 사용한 이름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달자’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몽골의 일부로 이해했던 것 같

    다.70)

    67) 효종실록 14권, 효종6년(1655, 순치12) 4월 23일(정축).68) 현종실록 18권, 현종11년(1670) 3월 3일(경신).69) 숙종실록 13권, 숙종8년(1682) 11월 24일(정묘).70) ‘대비달자’를 몽골의 일부로 생각한 인식은 18세기까지도 계속되는 것 같다.

    18세기의 기록에서도 ‘대비달자’와 ‘아라사’는 같은 것으로 이해되었지만 역시

    몽골의 별종이라는 인식이 보인다. 러시아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가능해지는

    것은 러시아 인과의 직접적인 접촉이 이루어지는 19세기에 이르러서이다. 이와

  • 朝鮮王朝實錄에 비친 17세기 내륙아시아 정세와 ‘寧古塔回歸說’(洪性鳩)301이 무렵 ‘대비달자’는 태극달자와 더불어 청의 북변을 위협하는 새로

    운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16세기 들어서 모피를 찾아 시베리아를 횡단

    한 러시아는 17세기 중엽 본격적으로 흑룡강 유역으로 진출하여 청과

    충돌하기 시작하였다. 러시아는 청과의 무역을 위해 계속해서 교섭을

    시도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자 1682년 알바진에 거점을 건설하였다가

    1683년 청과 다시 충돌하였다. 이후 다시 교섭을 진행하였지만 양측의

    대결 구도는 전혀 해소되지 못하였다. 특히 청조의 입장은 매우 강경

    하여 교섭 과정에서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러시아를 압박하였다. 이

    러한 당시의 정세는 1685년(강희24) 謝恩使로 燕行하였던 南九萬이 돌

    아오는 길에 瀋陽에서 올린 狀啓에도 “大鼻㺚은 형세가 매우 강성하기

    에 청나라 사람이 바야흐로 군대를 증가시켜 瀋陽을 지키면서 금년 봄

    에는 기어코 대거 정벌하겠다고 합니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71)

    또 남구만은 서울에 돌아와서 좀 더 구체적인 정황을 보고하였다.

    大鼻㺚子가 謀反하여 그 형세가 매우 성하기에 청나라 사람이 바야흐

    로 군사를 일으켜 가서 정벌하고자 하여 山西와 山東과 廣西와 廣東의

    군사를 수십 여만을 다 징발하였고, 戰馬를 민간에서 강제로 취하므로 백

    성들의 원망을 크게 일으킨다 합니다. 또 들으니, 魚皮㺚子라는 것이 대

    비 달자와의 사이에 끼어 있는데, 皮物의 貢納이 다 이들에게서 나오므로

    대비달자가 강성해지면서 길이 막혀서 다시 공납하지 못하였습니다. 청나

    라 임금이 이를 분하게 여기어 반드시 그들을 다 멸망시키고야 말겠다고

    합니다.72)

    청조는 1685년 正月 議政王大臣 등이 직예, 산동, 산서, 하남의 군사

    를 징발하여 黑龍江將軍에게 증파하여 알바진 성을 협공하게 하자고

    의논하고 이를 강희제에게 건의한 일이 있었다.73) 남구만이 전한 정황

    과 매우 흡사하다. 아마도 남구만의 보고는 청조 관리에게서 전해들은

    말이거나 혹은 관련 문서를 열람한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또 謝恩使

    같은 러시아 인식의 대체적인 흐름에 대해서는 김문식, 앞의 논문 (2008) 참고.

    71) 숙종실록 16권, 숙종11년(1685) 3월 6일(병인).72) 숙종실록 16권, 숙종11년(1685) 4월 2일(신묘).73) 何秋濤, 朔方備乘 卷首一, 聖訓一.

  • 中國史硏究 第69輯 (2010. 12)302朴弼成 등은 “저들 나라의 事情을 듣건대, 大鼻㺚子들이 歸順하였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다만 약간의 사람일 뿐이고 모두 항복하여 붙은 것

    은 아니라 합니다.”74)라고 보고하기도 했다. 이것은 1683년 알바진 전

    투에서 투항한 100여 명의 러시아인을 八旗에 편입하고 ‘俄羅斯佐領’을

    설치하여 東直門 근처에 거주하게 한 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75)

    역시 비교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보고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무렵 실록에 ‘鵝羅斯’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흥미로운 것은 여기서는 ‘아라사’와 ‘대비달자’를 별개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鵝羅斯는 北海와 접하고 있는 대국인데, 大鼻와 가까운 지역으로서 대

    비가 두려워하여 복종하는 나라입니다. 禮部侍郞이 接伴하고 병부시랑이

    나가 맞이하여 北海에 이르러 下陸하고 몽고의 五王들이 말을 번갈아 타

    면서 들여보내는데, 그러한 점으로 보아 아마도 강대국인 듯하며, 이렇게

    접대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大鼻와의 勝負 관계가 달린 것 같습니다.76)

    이것은 1686년 남구만이 보낸 使臣別單의 내용인데, 이 해 봄 러시

    아는 골로빈(Golovin)을 전권대사로 파견하여 청과 교섭한 결과 셀렌

    긴스키(Selenginsk)에서 회담을 열기로 합의하였다. 남구만의 보고는

    이때 북경에 들어온 골로빈 일행을 맞이하는 청조의 분위기를 보고한

    것으로 보인다. 청과 ‘대비달자’가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비가 두

    려워하여 복종하고 있는” 러시아 사신이 후대를 받으며 북경까지 들어

    왔다는 소식을 접한 조선이 청조가 이들을 통해 ‘대비달자’의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고 생각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결론이었는지도 모르

    겠다.

    이어 1687년에는 청과 러시아 간 교섭의 분위기에 대한 보고가 들어

    왔다.

    74) 숙종실록 16권, 숙종11년(1685) 8월 16일(갑진).75) 趙士國, 康熙時期中俄關係述論 (湖南師範大學社會科學學報 26, 1997),p.63.

    76) 숙종실록 17권, 숙종12년(1686, 강희25) 10월 13일(갑자).

  • 朝鮮王朝實錄에 비친 17세기 내륙아시아 정세와 ‘寧古塔回歸說’(洪性鳩)303謝恩使 郞善君 李俣 등이 청나라에서 돌아오다가 중도에서 우선 狀聞

    했는데, 그 別單에 大鼻㺚子의 일에 대해 대강 말하기를, “대비달자에서

    청나라에 온 글을 구입하여 보건대, 각기 경계를 세우고 영원히 修好하자

    는 말이 있었고, 균등하게 對敵하는 禮는 있었지만, 臣服하는 일은 없었

    으니 歸順이란 말은 과장에서 나온 것인 듯합니다.77)

    잘 알려진 바와 같이 1689년 체결된 ‘네르친스크 조약’은 청과 러시

    아가 호혜평등의 원칙에 입각하여 대등한 입장에서 체결한 조약이다.

    위 사료는 이와 같은 교섭의 분위기가 잘 담겨있다. 조약 체결을 위한

    본격적인 교섭은 1688년부터 시작되지만, 이미 전권대사 골로빈이 파

    견되었을 때부터 대등한 조약의 분위기가 존재하였고, 이러한 분위기

    가 조선에까지 알려질 만큼 이미 널리 퍼진 사실이었음을 보여준다.78)

    새로운 세력 ‘대비달자’는 삼번의 난과 대만 정씨 세력을 진압할 직

    후, 그리고 준가르 문제가 한창 불거지는 시점에서 등장하였다. 그러한

    점에서 ‘대비달자’ 역시 청조의 정세를 불안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의

    하나였다. 게다가 조선에서는 ‘대비달자’를 몽골의 별종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조선에게 ‘대비달자’는 몽골의 동향과 관련하여 주목

    해야 할 대상이었고, 당시 러시아의 등장은 실제로 청과 몽골 관계의

    중요한 변수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조선 조정에서도 대략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77) 숙종실록 18권, 숙종13년(1687, 강희26) 3월 3일(신사).78) 구범진은 ‘네르친스크 조약’과 ‘캬흐타 조약’에는 ‘漢人과 漢文 배제’의 원칙이

    관철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두 조약의 평등성은 華夷秩序의 관념과 명백하게 배

    치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것을 漢人들에게 이를 감추기 위해 청조는 주도면

    밀한 ‘은폐’의 전략을 구사했고, 그 방법이 바로 ‘漢人과 漢文 배제’의 원칙이었

    다는 논리이다.(구범진, 淸代 對러시아 外交의 성격과 그 변화 -締約大臣과

    交換 條約文의 言語를 중심으로- , 대동문화연구 61, 2008) 하지만 실록에남아있는 위 사료는 ‘네르친스크 조약’을 직접 언급한 것은 아니었지만, 청과

    러시아가 이와 같이 대등한 입장에서 교섭을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청조 사

    회 내부에는 물론이고, 조선에까지도 알려졌음을 보여준다. ‘漢人과 漢文 배제’

    의 원칙이 漢人에 대한 ‘은폐’의 전략이었다고 한다면, 이 원칙이 19세기 중엽

    까지 관철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전략은 처음부터 실패였다고 하겠다.

  • 中國史硏究 第69輯 (2010. 12)304

    Ⅳ. 맺음말: ‘영고탑 회귀설’의 이해

    이상에서 17세기 청과 내륙아시아의 여러 정치 세력과의 관계가 실록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그 기록은 어떠한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16세기 말 요동에서 누르하치가

    흥기하기 전까지 사실 몽골은 한동안 거의 조선의 시야에 들어오지 못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누르하치 세력의 영향력이 몽골에까지 미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조선은 몽골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누루하치가 요동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명과 후금 사이

    에서 양면 외교를 구사했던 몽골의 모습은 당시 명, 후금, 몽골 사이의

    관계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다만 조선은 그러한 현실을 면밀하게

    분석할 만큼 충분히 정보를 축적하고 있지 못하였다. 병자호란 이후가

    되면 심양관의 존재로 인하여 조선 관인들이 직접 몽골인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고, 또 몽골 지역을 직접 여행하거나 체험할 수 있

    는 기회도 있었다. 이에 따라 청과 몽골 관계의 구체적인 양상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사실적인 지리 정보도 축적할 수 있었다.

    이로써 몽골은 조선과 멀리 떨어져 있는 추상적인 존재가 아닌 익숙한

    실체로 이해될 수 있었다.

    그런데 입관 직후부터 알려지기 시작한 몽골의 이상 동향은 청조

    사회의 불안정을 보여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순치제 폐후 사건’이나

    이에 가탁하여 만들어진 ‘강희제 폐후 사건’에 관한 소문은 사실을 다

    소 과장하거나, 심지어 완전히 왜곡한 것이 틀림없지만, 당시 청조 사

    회 내부, 특히 북경과 요동 등지에 널리 퍼져있던 소문이라는 점에서

    청조 황실과 몽골 귀족 세력의 갈등 관계를 두고 불안해하는 사회 분

    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던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그 중에서도

    ‘아부나이 수금 사건’과 ‘부르니 반란’은 청-차하르 관계의 악화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에 관한 실록의 기록은 청조와 몽골 측의 사료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중요한 사실들을 확인할 수

  • 朝鮮王朝實錄에 비친 17세기 내륙아시아 정세와 ‘寧古塔回歸說’(洪性鳩)305있는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1670년대부터는 ‘태극달자’의 존재가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당시 몽골에서 새롭게 부상하고 있던 오이라트, 구체적으로는 준가르

    의 갈단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준가르의 갈단은 강희제가 3차에 걸친

    정벌에 성공함으로써 대청제국의 확고한 초석을 마련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청-몽골 관계는 물론이고, 대청제국의 외적 질서의 완성에 중

    요한 전환점을 제공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 만큼 준가르는 청에게 손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그렇게 때문에 청조에서도 거의 대부분의 신료

    들이 강희제의 준가르 정벌에 반대하였다. 당시의 입장에서 보면, 입관

    이래 지속된 강력한 반청 세력(남명정권, 삼번의 난, 대만의 정씨 세력

    등)을 막 진압한 시점에서 다시 대외 정벌을 단행한다는 것은 매우 위

    험한 선택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강력한 반청 세력의 진압

    이라는 성과에도 불구하고 청조 사회의 위기감이 지속된 한 요인이 되

    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