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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제1장

=====1:1� 하나님의� 뜻을� 따라...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과� -�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을� � 친히�

부르셨다는� 주장이� 필수적으로� 변화되어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 이유는� 고린도� 교회에� 여러� 당

파들이�있어서�바울의�사도권을�부정하려는�경향이� � 있었기� � 때문이다(12절;9:1-12).� 여기에서� '

사도'(*� � ,� 아포스톨로스)라는� 말은� � '보냄을받은� 자'란� 의미로� 전권(全權)을� 위임받은� 특사라는�뜻을� 함축하고� 있다.� � '사도'라는직분은� 원래� 오직� 그리스도가� 임명을� 해서� 직접� 보낸� 열� 두� 제

자만을� 가리켰다.� � 그러다가� 초대� 교회에서는� 이보다� 더� 넓은� 의미를� 갖게되었다(Cole).� 여기에

서� 바울은� � 자신이� 다메섹� 도상에서� 직접�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 받은� � 사실을� � 근거로� � 해

서(행9:15)� 자신의� 사도됨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을� 따라� 된� 것임을� 명백히� 한다.� 그는� 자신이�

전하는�복음의�권위를�옹호하기�위하여�자신의�사도직을�변호한�것이다.� � 이러한의미에서�바울이�

본서의� 첫머리에서� 자신의� 신분을� 사도라고� 밝힌� 것은� � 매우� � 중요한의미를� 지닌다.� � � 형제� 소

스데네� -� 헬라어�본문에서� '형제'의� 헬라어� '아델포스'(*)앞에� 정관사� � '호'(*� � )가� � 있어서� � 소스

데네가� � '형제들'가운데� � 하나임을� � 의미한다(Farrar).� 그가� 바울과� 함께� 본서신을� 집필하였다는�

증거는� 전혀� 찾아볼� 수� 없으나� 고린도� 교인들이� 소스데네에� 대해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

서� 언급했을� 것이다.� � 소스데네는� 고린도의� 유대인� 회당의� 회당장이었으며,� 유대인들이� 총독� 갈

리오에게� � 바울을� 송사(訟事)했을� 때� 바울� 대신에� 그들에게� 매를� 맞은� 사람이었다(행�18:12-17).� � 그런데� 소스데네라는� 이름은� 당시에� 흔한� 이름이었기� 때문에� 그가� 반드시� 본절의�

인물과동일하다고�보기는�어렵다(Hodge,� Alford,� Morris).

=====1:2� � 고린도에� 있는� -� 고린도는� 기원전� 146년에� 무미우스(Mummius)에� 의해� 파괴되었

으나그로부터� 80년� 후인� 기원전� 44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에� 의해� � 복구되었다.�

그후� 고린도는� 급속히� 재건되어� 아우구스토� 황제에� 이르러� 아가야(Achaia)의� 수도가� 되고� 바울�

당시에는� 인구� 60만을� 헤아리는� 대도시로� 발전했다.� 당시에� 이� 도시는상업의� 도시로� 번창했으나�

반면에� 정신적인� 측면에서는� 극히� 암담하고� � 무질서하였다.그� 도시인들은� 다신교를� 숭배했고(행�

17:16-22)� 그들의� 생활은� 음란했다.� 따라서� � '고린도화� 하다'라는� 말은� '아프로디트(Aphrodite)�

여신을� 숭배하며� 추악한� 음행을� � 행한다'는� 의미가�될� 정도였다.� � � 하나님의�교회� -� 바울이� 고린

도라는� 지명과� 함께� '하나님의� 교회'를� � 언급한� � 것은기독교의� 고귀한� 이상과� 우상� 숭배의� 허탄

함을� 극명하게� 대조해� 주는� 역설적인� 표현이다(Bengel).고린도� 교회가� 하나님에게� 속한� 교회임

을� 나타내는� 이� 표현은� 교회에� 대한하나님의� 온전한� 주권과� 하나님의� 교회를� 함부로� 판단하지�

않으려는�바울의 겸손함을잘� 드러내� 준다.� 바울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하여� 모이는� 교회를�

헬라� 세계의� 세속적인� '엑클레시아'(-)와� 구별하는� 것이� 필요했을� � 것이다(Mare).당시의� 세속적

인� 세상의� 총회(엑클레시아)는� 공공,� 이익에� 관련되는� 문제를� 토의하고� 결정하기� 위해� 도시� 국가

의� 시민들이� 모이는� 집합체였다(행� 19:39).� � �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 �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이�예수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연합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지위를�

차지하게�되었다고�묘사한다.� '거룩하여지고'� 의� 헬라어� '헤기아스메노이스'(� )는� � 완료형분사로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고� 그� 결과� 이루어진� 상태가� 현재에도� 계속� 유지됨을의미한다

(Grosheide).�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 등이� 하나님의� 소유로서� 거룩하다고� 불리워졌

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을� 지칭하여� 거룩한� 자들이라고� 불렀다(30

절;6:11).� 바울이� 여기에서� 고린도인들을� '성도'와� '거룩하여진'� 자들로� 칭했다고� 해서� 고린도�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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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들� 모두가� 참� 신자였다고� 말할� 수� 는� 없다.의심할� 바� 없이� 고린도시가� 부패했던� 것처럼� 교회

도� 교리와� 실천에� 있어서� 상당히� � 부패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로� 인정하고� � 있다(Calvin).� � � 또� 각처에서...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

에게� -� '각처에서'라는� 말은� 이서신이� 고린도� 교회� 이외의� 다른� 교회에서도� 읽혀진� 것을� 목적으

로� 기록되었다는� 것을암시한다.� 이에� 대해� 혹자는� 본서와� 같은� 특정한� 내용의� 서신� 다시� 말하면�

특정한� � 교회의� 개별적인� 문제를� 취급한� 편지가� 일반� 교회를� 상대로� 하여� 쓰여졌다고� 보는� � 것

은곤란하다고�한다(Robertson,� Plummer).� 그러나�본� 서신이�비록� 고린도�교회에� � 보내진것이라

할지라도다른� � 교회들을 염두에 두었다는� � 것을 배제(排除)� � 할 수� � 없다(Lightfoot).�

고린도�교회의�문제를�다루는�바울의�서신은�하나님의�교회의 근본적인성격을� 원리적으로� 가르

치고�있기�때문이다.

=====1: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 � 이� 구절은� 전형적인� 바울의� 인사� 형식이다.� 당시� 헬라� 세

계의�일반적인�인사말은�삼인칭을�사용했지만�바울은�일인칭이나� � 이인칭을 사용하여휠씬�

가까운� 친밀감을� 표현하였다.� 한편� 바울이� 하나님을� '우리� � 아버지'로� � 표현하는것은�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사람들을� 창조하셨고� 우리를� 자녀로� 삼으셨다는� 것을� � 보여준다.� � �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 '예수� 그리스도'란� 말은� 본장의� 1절부터� 9절까지� 아홉번이나� 반복되었다.바울의� 문체의�

독특성� 중의� 하나는� 핵심되는� 단어를� 계속하여� 되풀이하는것이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전

하는�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이�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명백히� 보여준다.� 한편� 전치사� '좇아(� � ,� 아

포)는� 하늘의�은사들이�그리스도때문에� 신자들에게�주어지는�것이라는�사실을� 잘� 보여준다.� � � 은

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 이런� 형식의� 인사말은� 바울이� 자주사용하는� 문구이다(롬� 1:7;갈�

1:3;엡1:2;빌1:2).� '은혜'(� � ,� 카리스)란� 하나님이� � 인간에게그리스도� 안에서� 값으로� 계산� 불가한�

것을�대가없이�주시는�선물이다.그리고� '평강'(* � ,� 에이레네)은� 히브리인들의� 일반적인� 인

사말� '샬롬'(,� '평화')에서� 온말로� 분쟁과� 싸움이� 없다는� 소극적인� 의미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축

복이� 있어서풍요로운� 영적� 상태에� 있음을� 의미한다(Morris).� �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

은혜와� 평강'을� 기원한� 것은� 그들이� 구원을� 받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고(고후�

8:9;엡� 2:8,9)� 그리스도께서� � 그의� 구속� 사역을�통하여�하나님과의�평화를�이루셨기� 때문이다(롬�

5:1;엡� 2:14).� 본절에서� 바울은� 비록� 은혜와� 평강을� 얻는� 방편인� 믿음을� 말하고� 있지� 않지만� 그�

믿음을� � 소유한�모든자들에게는�이� 은사가� � 주어지리라는것을�암시한다.

=====1:4� � 그리스도� 예수안에서...은혜를� 인하여� -� 바울은� 다른� 편지에서와� 마찬가지로� � 인사

말에� 이어� 수신자들을� 위한� 감사를� 드린다(롬� 1:8;빌� 1:3-7;골� 1:3-8).� 혹자는� 본서에서의� 감사

는�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비난한� 본서의� 내용에� 비추어� 보면� 풍자적인� � 면이� 있다고� 한다.� 그

러나�바울은�될� 수� 있는� � 대로 격려와 칭찬을 자주� � 하곤� � 했다(Morris).� 비록� 고린도�

교인들의� 삶에� 많은� 결함이� 나타났을지라도� 그들은� 다른� � 고린도� 시민들과는� 명백한� 차이가� 있

었음이� 분명했다(Lightfoot).� 따라서� 바울은� 진정으로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다고� 말할수� 있

다.� 한편� '그리스도�예수�안에서'(* � ,� 엔� 크리스토� 예수)라는� 말은� 바울의� 서신에� 164회나� 나

타나며� 옥중� 서신(獄中書信)에� 특히� 많고� 본서에서도� 11회나� 쓰였다(2,4

절;3:1;4:10,15,17;15:18,19,22,31).� 바울이� 여기에서�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문구를� 사용한� 것

은� 하나님의� 은혜가일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영역� 안에서� 특정하게� 주어

진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 � 내가...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 '항상'에� 해당하는� 헬라어� '

판토테'(* � � )와� '감사하노니'(*� � ,� � 유카리스토)는� 현재형으로� 쓰여� 바울의� 계속적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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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칙적인� 기도� 생활을� 시사한다.바울은� 그가� 가르쳤던� 교회들을� 위해� 정규적으로� 중보의� 기도를�

드렸다(엡� 1:16;빌� 1:3).� 원문에는� 본절의� 첫머리에�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열거될� 수� 있는� 모든� 영적인� 축복들이� 하나님의� 선물이자� 그분에게서만� 유래되는� 것임을�

암시해�준다(Grosheide).

=====1:5� � 너희가...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 고린도� 교회에� 내려진� 하나님� � 은

혜가�각�방면에서�풍족하게�드러났음을�의미한다.� 본절에서� '모든...풍족하므로'(*... � � � -

� � ,� 판티� 에플루티스데테)는� 사실상� 양보다� 질을� 말하고있으며� '하나도� 빠짐없

이� 전체'라는� 의미라기보다는� '가능성있는� 모든� � 측면에서'라는의미가� 더� 타당하다.� 한편� '구변'

에� 해당하는� 헬라어� '로고'(*)는� '교리'혹은'진리'를� 의미한다(Calvin,� Hodge).� 그리고� '지식'에�

해당하는�헬라어� '그노세이'(*� � � - � � )는� 영지주의(Gnosticism)에서� 언급하는� 감추어진� 신비한�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기초한� 구체적인� 지식을� 말한다(Mare).� �

즉� 바울이� 말하는� '지식'이란� '내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빌� 3:8)� 곧� 그리스도와� 그의십자

가의� 죽으심이라는� 실재� 위에� 기초한� 구체적인� 지식을� 말하고� 있다.� � 한편� � '풍족하므로'에� 해당

하는� 헬라어� '에플루티스데테'(*)는� � '플루티조'(*-)의� 부정과거� 수동태로� 신약� 성경에서는� 바울�

서신에서만� 나타난다(고후� 6:10,11).� '풍족하다'는� 말은� 본절에서� 개종이나� � 세례가� 풍부하다는� �

말이아니라(Mare)� 그리스도에� 대한� 일들을� 알고� 말하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이� 풍성히� 축복하여�

주신� 것을� 지칭한다.� 이� 단어가� 부정과거� 시제로� 사용된� 것으로� 보아� 고린도교인들의� 삶� 속에�

나타난�하나님의�역사가�뚜렷했음을�알� 수� 있다.

=====1:6� 그리스도의� 증거가...견고케� 되어� -� '그리스도의� 증거'란� 바울이� 4년� 전에� � 고린도에�

머무르면서� 전했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를� 말한다.� 그리고� '견고케� � 되어'에해당하는� 헬라

어� '에베바이오데'(*� � )는� '베바이오오'(*� � � )의� 부정과거�수동태로�앞절의� '풍족하다'와� 동일하게�

강조되고�있다.

=====1:7� 너희가�모든� 은사에�부족함이 없이� � -� � '은사'라는� � 말은� � 신약성경에서� � 구원(롬

5:15),일반적인� 하나님의� 선물(롬11:29),� 성령의� 특별한�능력(12:4)� 등의� 의미로�사용되었다.� 여

기에서는� 전체� 문맥을� 고려해� 볼� 때� 그리스도의� 증거가� 고린도� 교회에� 좋게받아들여져서� 나타난�

열매을� 의미하는� 것� 같다.� 고린도� 교인들에게� 믿음,� 지식과� 같은내적인� 은사뿐� 아니라� 이적행함

과� 병고침,� 방언과� 예언같은� 외적인� 은사들이� 풍성하였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 �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 '나타나심'에� � 해당하는� 헬라어'아포칼립신'(*� � )은�

문자적으로� '뚜껑을� 열다',� '수건을� 벗긴다'라는� 의미이다.� 이� 말은� 종말론적인� 용어로서� 감추었

던� 사실이� 드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참뜻은� 현재에는� 비밀에� 속한� 것인데�

종말에는� 비로소� 완전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한편� � '기다림이라'의� 헬라어�

'아페크데코메누스'(*� � )는� 바울이� 주로� 사용한� 단어로� 초대� 교회� 교인들의� 종말론적� 삶을� 잘� 표

현해� 준다.본절에서� 이� 단어는� 강하고도� 진지하게� 기다리며� 경성한다는� 의미를� 지니며� '간절하게� �

기다리면서'(eagerly� waiting� for,� NIV)라고� 번역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그들의� 간절한� 기대는�

주님의� 종말(終末)에� 관한� � 말씀(마� 24:30,34)에� 근거한� 것이다.초대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가능하면� 그들이� 살아� 있을� 동안에� 주님께서� 재림하시기를� 바랐다(15:51;살전� 1:9,10;약� 5:8,9;벧전

4:7;요일2:18;계�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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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 주께서...그리스도의� 날에� -� '주께서'라는� 인칭관계대명사� '호스'(*� � � )가� � 누구를가

리키는지� 정확하지� 않다.� 7절을� � � 미루어� � 볼� � 때� � 그리스도인� � 듯� � 하지만(Origen,Meyer,�

Robertson),� 9절에서� 하나님의� 미쁘심을� 언급한� 것으로� 비추어� 볼� � 때� � 하나님아버지를� 지칭하

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 싶다(Calvin,� Alford,� � Bengel,� � Hodge,Mare).� 만약� 그리스도라

고� 한다면�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의� 날에� 견고케� 하시리라'고말하는� 격이� 되기� 때문에� 더욱� 그

렇다.� '주의� 날'이라는� 표현은� 바울� 서신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나타내는� 일반적인� 표현이다.� � �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 '책망할� 것이� 없는'에� � 해당하는헬라어� '아넹

클레투스'(*-� � )는� '고소하다',� '비난하다'의� '엥칼레오'(*)와� 부정� 접두어� '아'(*� )의� 합성어로� 아

무도�비방할�수� 없을만큼�흠이�없는� 상태를�가리킨다(Robertson,� Plummer).이처럼�흠없는�상태

가� 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보증하는� 자들을� 고소할� � 만한� � 자는� �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롬8:33,� Morris).� 따라서� 본절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다시� � 오시는� � 그날에책망할�

것이� 없는� 자가� 될� 것이라는� 확신을� 일깨워� 주고� 있다.� 한편� � '견고케� � 하시리라'의� 헬라어� '베

바이오세이'(*� � � )는� 6절의� � '견고케� 되어'와� � 같은동사인데� 그곳에서는� 교리적인� 면을� 묘사했다

면�본절에서는�실제�생활에�적용되는� � 실천적인�면을�묘사한다(Grosheide).

=====1:9� � 너희를�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다� -� '미쁘시도다'의� 헬라어� '피스토스'(*

� � )가� 원문에는� 문두에� 나와서� 강조적으로� 쓰였다.� 이� 말은� 바울이� 즐겨� 사용하는� 말로

써� 그의� 자신의� 근거가� 되는� 말이고(고전� 10:13;살전� 5:24),� 신약� 성경� 전체에� 걸쳐� 사용되는�

중요한�용어� 가운데�하나이다(히3:2;10:23;벧전� 4:19;요일� 1:9;요삼1:5;계� 1:5;3:14).� 바울은�본�

서신의� 첫머리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사도가� 되었다고� 밝혔는데� 본절에서는� 모든�

신자들을�하나님의�부르심을�받은�대상으로�간주한다.� 이� 부르심의�목적은�하나님께서�인간과�교

제하여� 그들을� 거룩케� 하기� � 위함이었다(롬� 3:29).� 여기서� '교제'(*,� 코이노니안)란� 연합과� 교통

을�포함하는�말로�함께� 참여함을�의미하며�기독교�신앙의�핵심이�된다.

=====1:10� � 형제들아� -� 바울은� 그의� 편지의� 서론을� 마치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 자기의� � 집

필목적에� 따라� 고린도� 교회의� 구체적인� 문제에� 관하여� 언급하기� 시작한다.� � 본론에� 들어가는� 첫�

부분에�나와� 있는� 반의어�접속사� '데'(*,� '그러나',개역성경에는�생략됨)는�전체적인�흐름을�잘�표

현해� 준다.� 즉� 뒤에� 나오는� 내용이� 앞에서� 진술했던� � 내용과상당히� 강한�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형제들아'라는� 호칭은� � 바울� � 서신에서자주� 사용되는� 말로� 부드럽고� 사랑이� 가득� 담

긴� 어조이다.� 바울은� 종종� 중요한� 사실을말하려고� 할� 때� 이� 칭호를� 사용하였다(고전�

7:29;14:20,� Meyer).� � �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 주님의� 칭호(稱號)를� 모두�다� 사용한�것은� 그의� 호소가�얼마나�진지하고�엄숙한지를�보여�준다(Morris).� � � 너희를�권하노니�

-� '권하노니'에� �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칼로'(*� � -� � � )는� '격려하다',� '권고하다'의� 의미로� 사용될�

수도� 있고� 좀더� 강조해서� '간청하다',� '탄원하다'의� 어조를� 띨� 수도� 있다.이� 문맥에서는� 후자의�

의미로보이며� 강한� 권면을하려는� 바울의� 심정이� 엿보인다.다� 같은� 말을� 하고� -� '말을� 하고'의� 헬

라어� '레게테'(*)는� 현재� 능동태� 가정법으로� 엄격하고� 고전적인� 표현이다.� '같은� 말을� 한다'는� 표

현은� 정치적인� � 공동체가� 분열이나� 파당이� 생기지� 않고� � 상호간에� 우호적인� 관계에� � 있을� � 때

사용된다(Lightfoot).� 바울이� 이처럼� 고전적인� 헬라어의� 분위기를� 나타낸� 것으로� 보아�

그가� 이미� 헬라� 문화권에� 친숙하게� 젓어� 있음을� 알� 수� 있다(Robertson).� � �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 '분쟁'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키스마타'()는� (1)갈라진� 틈(LXX� 욘� 2:6;LXX� 사� 2:19,21)�

(2)� 옷이� 찢어짐(마� 9:16)� (3)� � 의견의� 차이로� 일어나는� 분쟁(요� 7:43;� 9:16)� (4)� 몸이� 조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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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지� 못함(고전� 12:25)등의� 의미로� 사용되었고� 본절에서는� 각기� 다른� 지도자를� 따름으로� 인한�

분열을�가리킨다.� 즉� 같은� 교회� 내에서�서로� 느낌이�달라� 당을� 짓는� 형편을�묘사한다.� � � 같은� 마

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 '온전히�합하라'의� 헬라어� 동사� '카테르티스메노이'(*� � )는� 어

떤� 것을� 올바른�상태로� � 회복시킨다는의미인데,� 그물을�수선하거나(마� 4:21)� 신앙의�부족함을�채

운다는�정신적인 의미로도사용된다(살전� 3:10).� 본절에서는� 고린도� 교인들이� 하나의� 온전한� 통

일된� 몸을� 이루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즉�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마음과� 뜻을� 하나로� 하는� �

연합(聯合)을� 그리스도�안에서�믿음과�사랑으로�이루기를�권하고�있는�것이다.

=====1:11� � 내� 형제들아� -� 이제부터� 바울은� 자신이� 권면을� 하게� 된� 배경을� 제시한다.� 10절과

는달리� 여기에서는� '내� 헝제들'이라고� 하는데� 이는�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자비를보여준

다.� � �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내게� 들으니� -� '글로에의� 집'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 클로에스'(*)

는� 문자적으로� '글로에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정확하게� 누구를� 가리키는지� 알수� 없다.� 다

만� 글로에는� 고린도� 교회에� 잘� 알려진� 상업에� � 종사하는� 여인일� 것이라는� 추측이� 있을� � 뿐이다

(Hodge).� 그러나� 바울이� � 고린도� � 교회의소식을� 그녀로부터� 직접� 들었다고는� 볼� 수� 없다.� 오히

려�그녀의�집에� � 속한 종들이나가족� 중의� 한사람이� 바울에게� 정보를� 제공했을� 것이다

(Grosheide).� 그들은� 적어도� � 그리스도인들이었을� 것이고� 고린도� 교회의� 교인이면서� 교회와� 매

우� � 밀접한� 관계를� 맺고있었을� 것이다.� � �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 '분쟁'에� 해당

하는�헬라어� '에리데스'(* � � � )는� 10절에서�말한� '분쟁'(*� ,� 스키스마타)의�결과로� � 의견이�분분

하게� 된� 상태를� 말하며� '말다툼'(quarrels,� NEB,� NIV)혹은� '논쟁'(contenti-ons,� KJV)� 등으로� 번

역할� 수� 있다.� 이는� 고린도� 교회가� 분열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어도그들의� 견해가� '심각한� 차이

'(serious� differences,� JB)를� 보이고� � 있음을� � 가리킨다.그들은� 각기� 자기의� 의견만� 옳다고� 주장

하고�다른�사람들의�관점은�경멸하였다.

=====1:12� � 너희가�각각� 이르되� -� '너희가�각각'의� 헬라어� '헤카스토스�휘몬'(* � )은� 각자가�

자기� 입장을�취하였음을�시사하는�말로�분쟁의�문제가�얼마나�넓게� 확산되었는지�알려준다.� 그들

의� 문제는� 신학적인� 견해� 차이�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몇몇� 지도자들에� 대한� 지나친� 충성심�

또는� 편파심� 때문에� 조성된� 것이었다.� 여기에서는� 그� 분파를� 넷으로� 소개하고� 있으나� 그것이� 전

부였는지�혹은�그�외에도 더� � 많은분파가� 있었는지� 알� 수� 없다.� 본문에� 소개된� 네분파의� 내용

을�살펴보자.� � � 바울에게� -� 바울에게�속했다고�하는�자들은�주로� 바울이�전한� 복음을�듣고� � 기독

교신앙으로� 개종한� 자들이� 중심이� 되었을� 것이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였기� 때문에� � 이방인� 개

종자들이� 모였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하여튼� 그들은� 바울을� 너무� 존경한� 나머지� 다른� 지도자들

을� 배격(排擊)하면서까지�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변호하였다.� � 그러나바울은� 자신을� 향한� 바르지�못한� 충성심을� 배격하고� 비난했다.� � � 아볼로에게� -�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학자로�

학문이� 많고� 성경에� � 능한� 자였고� 웅변적인사람(행� 18:24-28;딛� 3:13)인� 것� 외에� 그를� 알� 수�

있을� 만한� � 자료는�없다.� 다만� 고전3:16에� '나는� 심었고�아볼로는�물을�주었으되'� 라는� 말로보아�

그가고린도� 교회에서� 상당한� 역할을� 한것으로� 보인다.� 그의� 풍부한� 학식으로� 인해� � 지식층의� 사

람들이�그를�추종하였을�것이고�그들은�곧� 바울을�멀리하고� � 아볼로를 지도자로세우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바울과� 아볼로가�대립적이�거나�조화를� 이루지� � 못했다는�증거는� 없다.� � � 게바에

게� -� '게바'(*� � � ,케파스)는� '바위'(rock)라는� 의미를� 가진� � 아람어'게바'(*)의� 음역으로� 베드로의�

아람어식� 이름이다.� 그가� 당시에� 고린도에� 있었는지의� 여부는� 알� 길이� 없다.� 혹자는� 이� 파를� 바

울에� 대항하는� 율법주의� 부류로� � 보기도� 한다(Baur).� � 그러나� 고린도� 교회의� 분쟁이� 신학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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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 아니며� 단순한� 편당심리에서� 발생된� 것이므로� 이러한� 해석은� 무리가� 있다.� 오히려� 이� 파는�

베드로에게� 예루살렘에서� 지도를� 받은� 유대인� 신자들이� 그의� 권위를� � 배경으로� 하여� 자연스럽게� �

모여그를� 추종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것은� 베드로의� 이름을� 헬라식으로� � 부르지않고�

아람어로� 부른� 사실이� 뒷받침해� 준다.� � � 그리스도에게� -� 이� 파가� 어떤� 성격인지� 알기가� 매우� 곤

란하다.� 혹자는� 고린도� 교회내의� 가장� 보수적인� 태도를� 지닌� 한� 분파라고� 한다.� 그러나� 전술했듯

이�고린도� 교회의분파문제는�신학적인�문제가�아니었기�때문에�이것은�설득력이�없다.� � 추측하건

대� � 이파는� 위의� 세파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교훈을� 들은� 사람들이� � 중심

이� 되어� 만든� 당파인듯하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들이야말로� 그리스도에게만� � 속하였다고� 자부심

을� 가진�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추측� 역시� 불확실하다.� � 분명한� 것은� 그� 곳에� 당

파가�있었다는�사실이다.� 바울은�그러한�당파를�만든� 그� � 정신을책망하고�있다.

=====1:13� � 그리스도께서�어찌�나뉘었느뇨� -� '� 나뉘었느뇨'의�헬라어� '메메리스타이'(*- � � � )

는� 완료시상� 형태로� '그리스도께서� 이미� 나뉘어지셨고� � 지금도� � 회중안에서� 계속� 나뉘어진� 상태

로� 있느냐'라는� 뜻으로� 번역이� 가능하다.� 본절을� 혹자는� 단지� 문자적으로� '그리스도가� � 나뉘어졌

다'라고� � 긍정적인� � 표현으로� � 해석하기도� � 한다(Lachmann,� Meyer).� � 그러나� 이� � 문장은� 부정

적인� 대답을� 예상하는� 수사적� 의문문으로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리라� 본다.� 아무튼� 이구절에서� 바

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 그리스도께서� 나뉘어진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 � 바울

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으며� -� � 바울은� 인간� 지도자를� 중심으로� � 당쟁을� 일삼는� 것은�

그리스도의�십자가의�값을�무효화(無效化)시키며�그리스도만이�가지는�구주로서의�권위를�무시하는� 결과임을� 보여준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 이루신� � 구속사역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

으며� 아무도� 그리스도의� 자리에� 설수� 없다는� 것을� 지적한다.� � �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 -� 이질문은� 고린도� 교인들이� 세례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여기에서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절대적인유일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름으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

에이스�토� 오노마'(* � � )는� 전치사� '에피'(*� � ,� 행� 2:38)나� '엔'(*� � � ,행� 10:48)과� 함께� �

쓰인용법보다�강한�표현으로�영적인�결합의�상태로�들어감을�가리킨다. 본절에서� � 바울은자신을�

그리스도나�삼위일체�하나님과�견준다는�것은�어처구니�없는�것임을 보여주고있다.

=====1:14� �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세례를� 주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 � '그리스보'는

행� 18:8에� 나타나는� '회당장� 그리스보'와� 동일한� 인물로� 보여진다.� 그리고� 본절의� '가이오'라는�

이름은� 행� 19:29에� 나오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는� 다르지만� 롬� � 16:23에� � 언급된� 모든� 고

린도� 교회를� 접대한�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요삼� 1:5,� � 6에� � 나오는� � 나그네를� � 잘� �

대접하는� � 가이오와� � 동일� � 인물일� � � 가능성도� � 없지�않다(Robertson).� 여하튼�바울은�이� 두� 사

람과� 스데바나� 집� 사람(16절)에게만� 예외로� 세례를� 베풀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들이� � 아주� 중요

한�사람들이었기� 때문에�바울이�세례를베풀었다고�한다.� 그러나�이것은�문맥의�흐름에�비추어�볼

때� � 타당하지� 않다(Morris).바울이� 제한적으로� 세례를� 베푼� 이유는� 구태여� 밝히고� 있지� 않지만,�

바울이 이들에게만� 세례를� 베푼� 것을� '감사한'것을� 보면� 고린도� 교회에서는� 몇몇� � 당파의� � 지

도자들이자기�파의�세력를�확장하기�위하여�서로� 다투어�가며� 많은� 사람에게�세례를 베 풀

었던것으로� 추측된다.� � 그들은� 세례의� 본래� 의미를� 잃고� 세례를� 단순히� 당파� 확장의� � 도구로� 사

용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사명이� 세례를� 베푸는데� 있지� 않고� 복음을� 전파하는� 데� � 있었기� �

때문에� 몇몇� 소수의� 사람에게만� 세례를� 주었을� 것이다.� 이� 사실이� � 바울� 자신이� 제자를� 만들고�

있다는�비방을�막을� 수� 있어서�그는� 기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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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이는� 아무도�나의� 이름으로�세례를�받았다�말하지�못하게�하려� 함이라� - 본 절

에서바울은� 자기가� 당파적� 정신을� 가지고� 행동하지� 않았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만약� � 그들이� 바

울에게� 세례를� 받았으면� 그들은� '바울파'임을� 주장하였을� 것이다.� � 따라서� � 그는세례를� 몇� 사람

에게만�베풀었던�것을�하나님의�섭리적�인도로�보아 감사의 제목으로삼았다(14절).� 이렇듯�

바울은� 성도들을�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묶으려는� 어떤� 시도도� 배제하였고� 도리어� 그리스도와� 구

속받은자들� 사이에� 있게� 되는� 교제와� 연대� 의식을� 중요시했다.� 결국� 본절에서� 바울이� 자신과의�

개인적인�관계를� 갖도록�성도들에게�말했거나시도했다는�실마리를�찾아볼�수� 없다.� 그는� 다른� 사

람들에게�오직�그리스도만� � 바라보게�하였다(Morris).

=====1:16� � 내가�또한� 스데바나�집� 사람에게�세례를�주었고� -� '스데바나'와� 그의�가정은� � 아가

야에서� 최초의� 열매였다(16:15).� 당시� 스데바나는�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와� 함께� 에베소에서� 바울

과� 같이� 있었다(16:17).� '집'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콘'(*)은거처(居處)� � 즉� 눈에� 보이는� 건물을� 의미하기도� 하지만(눅12:39)� 본절에서는� 가족이나식구를� 구성하는� 개개� 사람들을� 의미한다.�

아마도�이� 말에는�그의� 혈육� 친척들과�종들까지도�포함된�것� 같다(Mare)� � � 그외에는...알지� 못하

노라� -� '그� 외에는'의� 헬라어� '로이폰'(*)은� '그밖의� 것에� 대해서는'� 이란� 뜻으로� '알지� 못하노라'

와� 연결되어� 바울이� 언급할� � 필요가있는� 사람들은� 한사람도� 빼놓지� 않으려� 했음을� 시사한다

(Robertson).

=====1:17� �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 바울이� 고린도에

서� 제한적으로� 세례를� 배푼� 이유는� 새로� 들어온� 고린도� 교인들이� 겨우� 교리� 문답을� 공부해야� 할�

단계� 밖에� 되지� 않은� 것으로� 여기고� 아볼로(행� 19:1)에게� 적당한� 때에�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성

례식을� 거행하라고�맡겼기� 때문일� 수도� 있다(Mare).� 어쨌든� 본� � 구절에서� 바울은� 그의� 본질적인�

일은� 복음을� 전하는� 일이라고� � 진술한다(행� 26:17,� 18).여기서� '복음을� 전케� 하려'의� 헬라어� � '

유앙겔리제스다이'(*-)는� 현재형으로� 사용되어� 바울의� 복음전하는� 행위가� 계속적이며� 다른� 무엇

보다�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 �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 '말의� 지혜'에� 해당하는� 헬라어� '

소피아�로구'(* � � � )는� '말의� 명석함으로'라고� 번역될� 수� 있다(Mare).� 당시� 고린도의

어떤�신자들은�인간의�지혜와�달변을�지나치게�높이�평가하였다.� 그들은�전형적인� � 헬라인으로서�

수사학과� 철학� 연구에� 지나칠� 정도로� 몰두하였다.� 이러한� 문제에� 직면하여바울은� '말의� 지혜'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가� 받은� 사명이� 아님을� 주장한다.� � �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

려� 함이라� -� '헛되지'에� 해당하는�헬라어� � '케노데'(*� � )는� 이름과�형식만�남고� 내용은� 없어진�상

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구절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고� 무력해지거나� 효력

없는� 상태가� �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는� 의미이다.� 만약� 바울이� 설교하면서� 십자가의� 도� 대신에�

인간의지혜나� 인본적(人本的)인� 철학� 따위로� 대치하였다면� 그의� 설교는� 무력하고� 인간의� � 지혜에�지나지�않았을�것이다.

=====1:18� 십자가의�도가� -� 이에� 해당하는�헬라어� '호� 로고스�호� 투스타우루'(* � � � )

는� 문자적으로� '그� 십자가의� 말씀'이라는� 의미로� 앞절에� � 있는� '말의� 지혜'와� 대조를� 이룬다.� 여

기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분쟁에� 대한� 문제는잠시� 제쳐� 두고� 개심자들이� 인간의� 말과� 지혜

에� 대해서� 지나치게� 찬사를� 보내는� � 것이잘못된� 일임을� 깨우쳐� � 주고� 있다(Lightfoot).� 결국� 그

가� 여기에서 언급한� '십자가의도'란� 십자가에� 관하여� 전하는� 말로서� 십자가를� 통하여� 인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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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구원받는� 진리를� � 의미한다.� � � 멸망하는� 자들에게는...구원을� � 얻는� 우리에게는� -� '멸망하는'

의� 헬라어� '아폴뤼메노이스'(*)와� '구원을�얻는'의� 헬라어� '소조메노이스'(*� � � - � � )는�

둘� 다� 현재� 분사형으로� 쓰여� 그� 행위에� 대한� 즉각적인� � 결과가계속적으로� 일어남을� 보여준다.그

러므로� 이� 말은� '멸망하고� 있는� 자에게'와� '구원얻고있는� 우리에게'라고� 번역할수� 있다(Morris).�

이처럼� 바울은� 구원을� 과거의� 사건(롬� 8:25),� 현재의� 상태(엡� 2:5)� 및� 과정(고전� 15:2),미래의�

결과(롬� 1:9)� 등으로 묘사함으로써� 구원이� 단편적이거나�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계속적인�

과정임을� � 설명하고� � 있다.본절에서는� 구원을� 멸망과� 대조하여� 구원얻은� 자들이� 복음에� 대해� 보

이는� 반응이� 하나님께로부터� 유래한� 것임을� 보여준다.� � � 하나님의� 능력이라� -� 본� 구절은� 롬�

1:16과� 동일한� 표현으로� '십자가의� 도'에는� � 하나님의� 능력이� 있음을� 앞의� '미련한� 것'과� 대조시

켜�강조한다(고전� � 4:20).� � '능력'에해당하는�헬라어� '뒤나미스'(*� � )는� 신체적,� 영적,� 지적� � 능력

을� � 포함한총체적�능력을�가리키며,� 헬라� 세계에서는�우주의 원리로서의� � 생명력을� � 의미하였

다(TDNT).� � 신약성경에서는� '뒤나미스'가� 그리스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사용되며,� 본절에서는�

인간의�구원이�오직� 하나님의�초월적인�힘에�의해서만�가능하다는�것을�보여준다.

=====1:19� � 기록된바...폐하리라� 하였으니� -� 바울은� 하나님께서� 구원의� 방법으로� 인간의� � 지혜

를� 채택하지� 않고� 버리셨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사� 29:14(LXX)을� 인용하고� � 있다.다만� 70

인역에서� '가리워지리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립소'(*� � )가� � 본절에서는� '폐하리라'의� 헬라어� '

아데테소'(*� � )로� 대치되고� 있다.� 이사야서의문맥을� 살펴보면� 인간이� 입술로만� 경배하고� 마음은�

멀리� 떠났으므로(사� 20:13)� 인간의지혜와� 총명이� 가리워진다고� 되어� 있다.� 바울은� 이� 사상을� 자

신의� 논쟁에� � 적용시킴으로써� 독특한� 방법으로� 자신의� 논리를� 펴나가고� 있다.� 본문에서� '지혜'와�

'총명'은� � 차이가� 별로� 없으나,� 의미상� 전자는� 뛰어난� 마음� 상태를� 뜻하며� 후자는� 어떤� 일들을� �

분별할� 수� 있는� 지적� 판단력을� 의미한다(Morris).� 이것들은� 인간이� 발휘할수� 있는� � 독특한� 능력

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이것들을� 없애버린다는�사실을� 예로� 들어� 인간의�지혜가상대적이고� 의존적

(依存的)이며� 일시적일�수밖에�없다는�것을� 말한다.

=====1:20� � 지혜있는� 자가...선비가...변사가� 어디있느뇨� -� 인간의� 지혜가� 갖는� 한계를� 명확히

제시한� 후,� 본절에서는� 그렇다면� 십자가의� 도를� 파악할� 수� 있는� '지혜� 있는� 자'가� � 어디� 있느냐

고� 질문한다.� 여기서� '지혜� 있는� 자'란� 바울이� 헬라인을� 염두에� 두고� 한� � 말이다(22절).� '선비'의�

헬라어� '그람마튜스'(*)는� '서기관'을� � 가리키기도� 하지만(막� 23:2;눅� 20:39;행� 19:35),� 율법에�

능통하여� '율법을� 가르치는� 자'(teacher� of� the� law,� NIV)를� 지칭하기도� 했다.이� 용어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이해하기가� 적절한� 단어였다.� 또한� '변사'의� 헬라어� '쉬제테테스'(*� � )는� � 무슨�

문제든지� � 인간의� 이성으로� 해결하려� 드는� 사람을� 가리키며� 본절에서는� 지적인� 노력으로� 구원을�

획득하려는� 유대인과� 헬라인을� 동시에� 지칭한다(Mare).� 이러한� 용어들을� 번갈아가며� 사용한� 것

은� 당시�고린도�교회가�헬라인들과�유대인들로 구성되어있어서� 헬라적� 개념과� 유대적� 개

념을� 같이� 사용해야�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 �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 '세상의'의� 헬라어� '코스무'(*)는� 앞� 구절의� '세대'(*� � ,� 아이오노스)와� � 동의어로� � 원래

질서� 정연한� 배열을� 의미하다가� 나중에는� 비기독교적인� 세계를� 가리키는� 뜻으로� � 사용되었다

(Robertson).� 또한� '아니뇨'(*,� 우키)는� '우'(*,'아니')의� � 강조형으로� 본절에서는� 의문문� 초두(初頭)에� 사용되어�긍정적인�대답을�기대하는�수사적� � 의문문이�되었다.� 바울이�여기에서�염두에�둔�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였다.� 즉� 십자가에못박혀� 죽으심으로써� 그를� 믿는� 모든자에게� 구원을� 주

신� 그리스도의�사역은�세상의�지혜와는�전혀�다르다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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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 하나님의� � 지혜에� 있어서는� 이� � 세상이� 자기� �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이� 구절은� 해석이� 난해하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 '엔� � 테소피아� 투�

데우'(*)는� '하나님의� 지혜로'� � 혹은'하나님의� 지혜� 안에서'� 등으로� 직역할� 수� 있는데,� 그� 의미는�

(1)� '하나님의� 섭리가운데서'� (2)� '하나님의� 지혜의� 드러남� 가운데서'로� 생각해� 볼� 수� 있다.� (1)

의� 해석을� 따르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 곧� 하나님의�

지혜라는� 의미이다(Alford,� Lightfoot).� 또한� (2)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지혜를� � 세상에�

나타내셔서�하나님을�알게�하셨으나(롬� � 1:20)� � 세상이�알지� 못했다는 의미이다(Chrysostom,�

Meyer).� 이� 가운데� (2)의� 견해가� 더욱� 타당한� 데,� 이� 견해를� 따라� � 해석하면� 사람이� 비록� 창조

와� 섭리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에� 둘러싸여�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지식을� 얻는데는�

실패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계시(啓示)는� 분명하지만,� � 인간이� 온갖� 노력을�기울인다� 할지라도� 그것을� 이해하지� � 못함을� 강조하고� 있다.� 즉� 인간은� 빛� 가운데서도� 눈이� 먼�

상태로� 있고� 자신의� � 지식� � 안에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는� 것이다(롬� 1:28).� � � 하나님께서� 전도

의�미련한�것으로� -� '전도'에� 해당하는�헬라어� � '케뤼그마토스'(* � � -� � )는� 선포하는� 행위

뿐만� 아니라� 선포하는� 내용도� 가리킨다.� 본절에서는� 전하는� 행동� 자체보다는� 그� 내용에� 중점을�

두고� 있다.� 바울이� 전한복음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었던� 바(롬� 16:25)� 바울은�

이러한� 복음� 전파가� � '미련한� 것'이라고� 규정함으로써� 기독교의� 전도가�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

것과는� � 전혀다른�내용을�가지고�있음을�가르친다.

=====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 '표적'은� 구체적으로� 눈으로� 볼� 수� 있는� 기이한� � 현상을

의미하는데� 유대인들은� 종종� 예수께� 찾아와� 표적을� 구하였다(마� � 12:38;16:1;막� 8:11,12;요�

6:30).� 그들은� 항상� 증거를� 요구했고� 현상적인� 것에� 관심이� 있어서� 하나님을� 생각할때에도� 역사�

속에� 표적과� 큰� 능력과� 기사로� 자신을� 나타내시는� 분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박혀� 저

주� 아래� 있게� 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 수없었다.� � �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

헬라인들은� 이성적인� 증거를� 요구하였다.� 그들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것은� 받아들이지� 않

았다.� 그들에게� 가장� 큰� 이상(理想)은� 지혜� 곧철학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혜가� 때로는� 무의미한� 궤변에� 빠지기도� 했음에도� 불구하고(행� 7:21)� 지적� 요구에� 만족을� 주지� 못하는� 것들을� 무

시했기�때문에�복음이� � 들어갈�자리가�없었다.

=====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 본� 구절은�앞� 구절과� 날카로운� � 대조

를� 이룬다(Robertson).� 헬라어� 본문에�있는� '데'(*� � � ,� '그러나')는� 본절이�앞� 구절과대조를�보이

고� 있음을� 나타내고,� 주격� 대명사� � '헤메이스'(*,� � '우리')가사용되어� 행위의� 주체자를� 강조하고�

있다.� '십자가에� 못박힌'에� 해당하는� 헬라어� � '에스타우로메논'(*-)은� 완료� 수동태� 분사형으로� �

그리스도께서단� 한번�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가리키고� 지금도� 그� 대속적인� 효과가� 계속되고� � 있

음을보여준다.� � �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

도'란� 받아들이기� 어려운� 모순이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란� 조국을� 구하고� 이스라엘을� 회복하여�

존재케� 할� 영광스런� 왕이라고� 예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메시야가� 행악자취급을� 받고� 십자

가에�못박혔다고� 하는�것은� 유대인들에게�있어서� 최악의� � 모욕(侮辱)이었다.� 따라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걸림돌만� 될� 뿐이다(롬� 9:33;벧전� 2:8).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

되� -� 당시의� 이방인들을� 대표하는� 헬라인들과� � 로마인들은� 십자가의� 형벌을� 가장� 비천한� 죄인들

이나� 받는� 것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 십자가와� 구세주는�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여겼다.� 또한� 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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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들의� 관점에� 비추어� 보면� 하나님이� 육신을� 입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고� 그렇게� 된다� 해도� 육

신의� 한계로� � 인해� � 죄를용서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결국� 본� 구절을� 통해� 모든� 인류

가�빠짐없이� � 십자가에�못박힌�그리스도를�거부했음을�말하고�있다.

=====1: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 '부르심을� 입은� 자들'의� 원어� '클레토이스'(*-

� )는� 단순히� 외형적으로만� 초청을� 받은�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이� � 효과적으로�

적용된�사람들을�가리킨다(Hodge).� 여기서�바울은� '부르심'의� 사상을�강조한다.� 자연인으로�있을�

때는� 누구나� 십자가의� 진리를� 받아� 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 절대적인�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은� 이진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부르심에� 순종하게되며� 십자가가� 곧� 하나님의� 능력임을� 이

해한다(Morris).다시� 말해�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유대인과� 헬라인이� 이상으로� 생각하는� 능력과�

지혜를�헛된� 것으로�돌리고�그리스도안에서�새롭게�하나님의�지혜와�능력을�발견케�되는�것이다.

=====1:25� � 하나님의� 미련한것이...사람보다� 강하니라� -� 인간이� 교만하여� 십자가에� 담긴� � 하나

님의� 지혜를� 어리석은� 것으로� 일축했지만� 도리어�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났다.비록� 십자

가가� 인간의� 눈으로는� 하나님의� 패배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모든� 믿는자를� 구원하는� 능력

이�된� 것이다.

=====1:26� � 형제들아�너희를�부르심을�보라� -� 바울은�앞에서�논술한�내용을 바탕으로� � 고

린도교회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려� 한다.� '부르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클레신'(*� )은� � 하나님의� 주

체적이고� 동적인�모습이� 강조된�말로서� (롬� 11:29;엡� 1:18)� 고린도�교회의� 부르심이�하나님으로�

부터�왔음을�시사한다.� 한편� '보라'의� 헬라어� '블레페테'(* � � )는� 문법상� 직설법으로� 볼� 수

도� 있지만� 본절에서는� 명령형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Morris,� Alford,� Meyer).� � � 육체를� 따

라� 지혜있는� 자가...능한� 자가...문벌� 좋은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 '육체를� 따라'의� 헬라어� '카타�

사르카'(*� � � )는� '육체를� 표준으로� 삼아'라고� 해석되는데,� 대개� '육체'는� 인성(人性)을� 뜻하므로,�세속적인� 관점으로� 분별한다는의미가� 된다.� 이� 문구는� '지혜있는� 자',� '능한� 자',� '문벌� 좋은� 자'

에� 모두� 적용된다.'지혜� 있는� 자'(*� � ,소포이)는� 헬라의�철학자들처럼� 높은� 교육을�받은� 지적인사

람들을� 가리키고� '능한� 자'(*� � ,� 뒤나토이)는� 정치적인� 권력을� 가진� 자를� 의미하며,� '문벌� 좋은자

'(*,� 유게네이스)는� 사회적으로� 상류� 계급에� 속한� 사람들을� 지칭한다.� 바울은� 이� 세� 용어를� 사용

해서� 지적,� 정치적,� 사회적으로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부류의� 사람들을� 표현하고� 있다.� 이런�

유력한� 사람들이� � 많지� 않다는� 것은� 고린도� 교회의� 구성원� 대부분이� 상류� 계급에� 속하지� � 않았

음을�보여주고,� 하나님의�부르심이�이러한�외적인�조건에�근거하지�않았음을�시사한다.

=====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 '택하사'의� � 헬라어� � '엑셀렉사

토'(*� � )는� '뽑아내다',� '선택하다'라는� 뜻의� '에클레고'(*� � )의� 부정과거� 중간태형으로� 혼자서� 스

스로� 선택한� 것을� 의미한다.� 이� 말이� 28절까지� 반복적으로� 제시되어� 하나님께서� �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 선택하셨다는� 것을� �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어리석고� 약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선택하신� 사실은� 외적인� 조건들이� 일시적이며� 무의미하다는� 것을� 보여주며� 구원과는� 무

관하다는� � 것을� 시사한다.

=====1:28� 하나님께서� � 세상의� 천한� �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 '천한� 것

들'의� 헬라어� '아게네'(*� � )와� '멸시받는�것들'의� 헬라어� '엑수데네메나'(* � - ) 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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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계급에� 처한� 사람들을� 일컫는� 용어로� 사회적� � 신분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선택이� 적용됨을�

강조한다.� 이러한� 표현은� 당시� 고린도에� � 노예들이� 많았기� 때문에� 고린도� 교인들이� 처한� 특별한�

상황에� 적합한� 것이었다.� 또한� 바울은� '없는� 것들'(*,� 타� 메� 온타,the� things� that� are� not)이라

는� 표현을� 통해� � 사회적으로� 전혀� 가치가� 없고� 필요가� 없는� 자들까지도� 선택의� 대상임을� 명백히�

보여준다.� � � 있는� 것들을� 폐하려� -� '있는� 것들'의� 헬라어� '타� 온타'(*)는� 세상에서중요한� 사람처

럼�보이는자를�지칭하는�용어이다.� 바울은�하나님� 앞에서는�아무리�유력한�자일지라도�자신의�구

원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기� 위해,하나님을� '선택하심'과� '폐하심'의�

주체자로� 언급하고� 있다.� � 바울은� 이� 대조법을� � 통해� 다시한번� 인간의� 지혜와� 능력과� 신분은� 구

원을�얻기위해�아무런�효력이�없음을� � 말하고�있다(Mare).

=====1:29� � 이는� 아무� 육체라도� -� '아무� 육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사� 사륵스'(*� � )는� 문자

적으로� '모든�육체'를�가리키며�비유적으로� '모든�사람'을�의미한다.

=====1: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 '하나님께로� 부터'에� 해당

하는� 헬라어� '엑스� 아우투'(*� � )에서� 전치사� '엑스'는� 하나님이� 그의� � 백성을� '그리스도� 안에'있

게� 하시는�궁극적인�동인(動因)이� � 되신다는� � 것을� � 보여준다.그리고�헬라어� 원문에�나와있는�반의적인� 접속사� '데'(*,� '그러나')와� 강조형� � 주격� 대명사� '너희'(*� � � ,� 휘메이스)는� 본절이� 앞절과�

강한� 대조를� 이름을� 보여준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라는� 말은�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리

스도와� 개인적으로�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있음을� 묘사한다.� � �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 '하

나님께로서� 나와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 데우'(*� � � ,� � '하나님께로� 부터')는� 그리스도의� 궁

극적인� 출처가� � 하나님이심을� 지시한다.� � �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

니� -� 바울은� 그의� 편지를� 읽을독자들에게� 자신을�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신비로운� 연합을� � 이루었음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본절� 초두에� 언급한� 바� 있는� '너희'를� '우리에

게'(*� ,헤민)라고� 바꿔� 쓰고� 있다.� 본절에서� � '지혜'라는� 개념과� � '의로움과� � 거룩함과구속함'의�

개념이� 별개의� 개념으로� 이해될� 수도� 있으나� 오히려�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지혜를� 설명

하는�말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그리스도의�대속적인�속죄(贖罪)를� 통해서� 나타나는�하나님의�지혜가� '의,� 거룩,� 구속'의� 개념으로� 표현되는� 것이다(Alford,� Mare,� Morris,� Meyer).� 위에

서� '의로움'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 속성에해당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가� '

의롭다함'을� 입은� 것,� 곧� � '칭의'를� 의미한다.� 그리고� � '거룩함'이란� 그리스도와의�영적�고제를�통

해서� 그리스도의� � 소유가� 된� 상태를� 의미한다.� � 이제� 그리스도의� 자녀가� 된� 자들은� 부정과� 불법

에서� � 벗어나� 의의� 종이� 되는� 것이다(롬� 6:19).� 마지막으로� '구속함'이란� 적당한� 값을� � 지불하고

노예를� 자유롭게�한다는� 뜻에서�전용(轉用)된� 말로(출� 21:8),� 하나님이�그의� 아들� � 예수그리스도의�피를�대가로�인간을�죄의� 속박에서�풀어놓으셨다는�뜻이다(엡� 1:7;골� 1:14;히� 9:15).

=====1:31� �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나라� � -� � 바울

은마지막�결론�부분에서�렘� 9:24을� 인용함으로써�구약의�권위를�빌어 강하게 호소하고있다.�

우리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을� 얻게� 되는� 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고�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유래한다.� 모든� 선(善)은� 하나님께만� 있고� 다른� 어느� 곳에서도� �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하나님� � 한� 분만을� 자랑해야� 한다.� 결국� 바울은� 고린도� � 교인들이� 구속받은� 백성임을� 인식시킨�

후� 그의� 백성에�합당하게�주님의�영역� 안에서� � 자랑할것을�권고하는�것으로�결론짓는다.고린도전

서�제� 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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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 이� 문구는� 문자적으로� '내가� 너희에게� 나아갔을� � 때

'(WhenI� came,� NIV)라는� 의미로�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당시� 약� 1년� 반� 동안� 고린도에� 머무르

면서� 전도하였을� 때를� 가리킨다(행� 18:1-17).� � �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 '증거'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르튀리온'(* � � )은� 공인� 본문(Textus� Receptus)에� � 근거한� � 것이다.� � 오래된� � 사

본들(P� � ,,A,C)에는� '뮈스테리온'(*� � ,'비밀')으로� 되어� 있어서� '비밀'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Aland),� 내용에�있어서는�어떻게�해석하든지�별차이가�없다.� 즉� 하나님께서�주시고�하나님을�내

용으로� 삼는� 증거� 곧� 복음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기� �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계시하셨

고� 그� 계시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역사였다.그러므로바울이� 하나님을� 말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말하는�것이며�곧� '십자가의�도'(1:8� 주석참조)를� 전한다는�것이다.

=====2:2� � 내가...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 헬라어� 본문에는� '왜냐하면'이라는� � 의미의헬

라어� '가르'(*� � )가� 있어서� 본절이� 앞절의� 이유가� 됨을� 보여준다.� 본절에서� � 바울은� 죄인들을� 위

한�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서� 언급한다(행� 10:37-43).� 이것은� 바울이고린도에� 가고자� 했던� 유일

한� 목적이었다.�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곧� 그리스도의� 인격

과� 사역을� 가르친다.� 이러한� 그의� 가르침이야말로복음의� 핵심이다(Hodge).� � � 아무것도� 알지� 아

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 '알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 '에이데나이'(*� � )는� 경험을� 통해� 아는� 일

반적인�용어인� '기노스코'(*-)와는� 달리� 직관적이며� � 전문적인�지식을�가리킬�때� 쓰는� 용어인� '오

이다'(*� )의� 부정사이다.� 바울은� 모든� 것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으나� 그리스도에� 대해서만은� 깊

은� 지식을� 가졌고� 또� 가지기를� 원했다.� 바울이� 이렇게� 다짐한� 것은� 바울이� � 회심� 때에� 겪은� 체

험과� 철학적인� 지혜를� 동원하여� 전도하려다가� 실패한� 아덴에서의� 경험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행�

17:22-34).� 바울은�이러한�경험을�통해� 그리스도에�관한� 지식만이�참이며�십자가에서�죽으신�그

리스도를�전하는�것이� 가장�합당(合當)한� � 것임을깨달았다.

=====2:3� � 내가� 너희� 가운데�거할� 때에� -� '거할'에� 해당하는�헬라어� '에게노멘'(* � � )은�

'갔다'라는� 의미로� 본문은� 문자적으로� '내가� 너희에게� 갔을� 때'의� 뜻이다.� 바울은� 본절� 초두에서�

'카고'(*,� '내가� 또한')라는� 말로� 시작하여� 주제를전환하고� 있다.� � �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

노라� -�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약함'은� 육체적인� 허약이� 아니다.� 그가� 비록� 이따금� 자신의� 육체

적인� 허약을� 언급하지만(고후� 10:10)� 본절에서는� 전체� 문맥상� 육체가� 아닌� 마음의� 상태를� 보여

주고� 있다(Hodge).� � 바울의� � 마음이약하고� 두려웠던� 것은� 그가� 고린도에� 이르기� 직전� 아덴에서

의� 전도에� 실패한� 것이� � 그중요한� 원인이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 지방에서� 성행하던

이교도들의� � 강한세력들,� 철학자들의�사변과�교만한�태도,� 그리고�음탕한�도덕적인�타락

상�등이� 난무한곳에서�복음을�전하려고�했을때�느꼈던�인간적인�중압감으로�인한�것으로�보인다.� �

바울은�비록� 강하고�담대한�대사도(고후� 4:7-11;엡� 6:19,20)이기도�했지만�자아의� � 나약함을�인

정하고�두려워할�줄� 아는� 겸비한�인격자였음을�보여준다.

=====2:4� �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 '권하는�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이도이� 로고이스'(*� � � -� � )는� '유혹하는� 말'(enticingwords,� KJV),� '그럴� 듯한� 말

'(plausible� words,� RSV)등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 인간의이성을� 교묘하게� 사용하여� 유혹하는�

말,� 곧� 인간의� 지혜가� 상상해� 낸� � 설득조의� � 말을의미한다.� 바울은� 사람들을� 믿음에� 복종하도록�

함에� 있어서� 인간적인� 논쟁이나� 설득으로� 하지� 않았다.� 일반적인� 학문에는� 그와� 같은� 논리와�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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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력,� 그리고� 인간의� � 지혜에서� 나온� 웅변술과� 화려한� 말들이� 필요할지� 모르지만� 그러한� 지혜가�

부각되면� 십자가의도는� 헛되게� 된다(1:17).� � �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 바울은� 성

령의�역사로� 말미암은�강한� � 영적인� 능력을� 나타내는� 데� 중점을� 두었다(1:18).� 여기에서� '성령의�

나타남과�능력'의� � 헬라어� '아포데익세이�프뉴마토스�카이�뒤나메오스'(*� � -

� � � )는� (1)'능력있는� 성령의� 나타남'� 또는� (2)'성령과� 능력의� 나타남'이라는� 두�

가지�번역이�가능하다.� '능력'의� 헬라어� '뒤나미스'(* � � � )가� 종종� 이적적인� 능력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이� 구절에서는� 전체적인� � 문맥에� 비추어� (1)의� 번역이� 더욱� 타당하다.� 즉� 성령께서� 능력�

있게� 나타나심에� � 근거하여�바울이�복음을�전했음을�보여준다.� 바울이�성령의� 나타나심에�의존하

여�설교했으므로복음을� 듣는�자들에게�확신을�주었다.� 이� 편지에서�바울이�성령의�사역에�대해서�

언급한�것은� 이곳이�처음이다.

=====2:5� �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 본절에서는� 바울이� 왜� 인간의� � 지혜로

된� 말을� 사용하지� 않았는지� 그이유를� 설명한다.� 바울이� '성령의� 능력'� 으로� � 말미암아전도하고�

가르친�이유는�고린도�교인들의�믿음이�되기를�원했기� � 때문이다. 여기에서'믿음'의� 헬라어�

'피스티스'(*)는� 정관사� '헤'(*� � )와� 함께� 사용� 되어� 믿는� 행위� 그� 자체보다는�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에� 기초한� 믿음의� � 본질로� 해석되어야� 한다.� 따라서� '너희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고�

번역할�수� 있다(Mare).� � � 다만�하나님의�능력에�있게�하려� 하였노라� -� '다만'의� 헬라어� '알라'(*)

는본절을� 앞절과� 완전한� 대조를� 이루게� 하는� 접속사로� 믿음의� 원천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강조

한다.� 바울은�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의� 근거가� 이성에� 호소하는� � 논증(論證)이아니라� 진리와� 함께� 그리고� 진리로� 말미암아� 심령에� � 역사(役事)하는� 하나님의� � � 권능임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그는�고린도�교인들로�하여금�그� 믿음의 근거가 하나님의능력에� 있음을� 명확하게� 인식시켜

서� 그들이�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지� 않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능력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도록� 가르

친다.

=====2:6� �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 바울은� 이미� 지혜의� � 부당성

을� 언급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지혜를� 언급한다.� 헬라어� 본문에서는� '지혜를'(*� � � ,� 소피안)이�

문두에�나와� 강조되고�있다.� 바울은�진정한�의미에서의'지혜'는'온전한� 자'들이� 깨닫는다고� 규정

하고� 있다.� 여기서� '온전한� 자'(*-� ,� 텔레이오이스)에� 대해� 혹자는� 그리스도안에� � 있는� 어린아이

(3:1)와� 비교되어� � 영적인� 이해에� 있어서� 성숙한� 자를� 가리킨다고� 한다(Morris).그러나� 본문의�

문맥상,구원받지�못한자와�대조되는�구원받은�자들�즉� 성령에�의해� 깨우침을�받는�자들을 가 리

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바울이� 전하는� 십자가의� 도를� 미련한� 것으로� � 단정한� � 자들은그리

스도� 안에서� 갓난� 아이된� 자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아예� 중생하지못한� 자,� 즉이� 세상의� 지

혜� 있는� 자(1:20-23)이다.� 따라서� 십자가의� 도를� 지혜로� 간주하는� 자들은성령에� 의해� 깨우침을�

받은� 모든� 믿는자를� 가리킨다(Hodge,� Mare).� 바울은� 본문을� � 통해� 진정한� 의미에서의�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옴을� 시사해준다.� � � 이� 세상의� 지혜...없어질� 관원의� 지혜� -� '이� 세상의'에� 해

당하는�헬라어� '투아이오노스�투투'(*)는� 보다� 정확히는� 1:20과� 같이� '이� 세대'를� 뜻한다.� 그리고�

'관원'(*,� 아르콘톤)은� 본절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다.� 혹자는� 이� '관원'

이� 사단이나� 악귀� 등을� 가리킨다고한다(Origen,� Marcion).� 그러나� 이� 견해는� 타당성이� 희박하

다.� 비록� 바울이� 이� 단어를사단의� 개념으로� 자주� 사용하지만(롬� 8:38;골� 2:15),� 모두� 단수형을�

사용하였다.� 더욱이� 행� 3:17에서는� '관원들'이� 무지(無知)� 중에�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음을� �언급했고� 본장� 8절에서도� '이� 세대의� � 관원'(*� ,� 톤� 아르콘톤투� 아이오노스)이� 무지로� 인해� 주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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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 못박았음을� � 언급한다.또한� 앞절에서부터� 계속하여� 하나님의� 지혜와� 대조하여� 사람의�

지혜를� 언급하므로� � 본절에서� 갑자기� 사단을�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그러므로� '관

원'이란� '이방� 세계나�유대� 세계의�지도자�일반'� 을� 가리킨다고�보는�것이� 타당하다.� 바울은�본문

에서도�자신이�전파하는�지혜는�세상의�것과는�본질적으로�다르다는�것을�보여주려�한다.

=====2:7� 오직� 비밀한� 가운데�있는� 하나님의� 지혜를�말하는� 것이니� -� '오직'에� 해당하는� � 헬라

어� '알라'(*)는� 강한� 반의어� 접속사로� 바울이� 언급하는� 지혜가� 바로� 하나님의� 지혜임을� 가리킨

다.� '하나님의�지혜'에� 해당하는�헬라어� '데우소피안'(* � � � )에서� 하나님(데우)은� 강조되어� 앞에�

위치되었다.� 바울은� � 자신이� � 전하는복음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그� 복음을� 이해하는� 것은� 하

나님의� 지혜로� � 말미암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비밀'(*� � -� � � ,� 뮈스테리오)이란�

오랫동안� 감취어져� 있다가�드러난� 것으로(엠� 3:3;골� 1:26),�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이해를초월하신

다는�사실을�지적하기�위해�사용한�용어이다(엡� 5:32).� 이 '비밀'은� � 인간이전혀� 포착할� 수�

없는� 것으로� 하나님의� 계시로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 아무리연구해도� 그� 비밀을� 알� 수�

없고� 하나님의� 사랑도� 깨달을� 수� 없다(Morris).� � �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 본� 구절은� 헬라어� '헨'(*� ,� � '곧')을� 사용하여� 앞구절을� 설명한다.� '영광'(*,� 독사)은� 백

성들과� � 함께하신� 구약의� 영광스런� 하나님을� 회상해� 보는� 것(출� 24:17;40:34;민� 14:10)과� 백성

들이하나님과�함께�나눌�미래의�영광을�미리� 맛보는�것(계� 21:10,� 11,� 22,23)을 의 미 한 다

(Mare).� 결국� 이� 말은� 구원으로� 말미암는� 모든� 유익들을� 가리키는� 말로서� � 그리스도께서�마련하

신� 뛰어난� 모든� 것과� 복스러운� 모든� 것까지도� 포함한다(롬� 5:2).� 바울은�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라고� 표현함으로써�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돋보이게� 하고� 있다.� � 결국� 본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

지혜라� 할� 수� 있는� 구속� 계획(球贖計劃)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생각으로� 만세전에�이미� 구상되었고� 복음을� 통해� 인간의� 구원을위해� 알려진� 것임을� 증거하고� 있다(Hodge).� � � 만세

전에(* � ,� 프로� � 톤� � 아이오논)� -� 이� 말은� � 문자적으로'영원� 전에'라는� 의미

로� 시간이�발생되기도�전에� 하나님의�계획이� 있었음을�보여준다.이는� 복음이�후대의�고안물(考案物)이� 아니었음을�명백히�한다.

=====2:8� 이� 지혜는...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기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 -� � '영광의

'(*� � � ,� 독세스)라는� 형용사는� 대개�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사용되었고(행7:2;엡� 1:6)외경� 에녹

서에서도� '영광의�주'가� 하나님을�지시하였다(Morris)� � 그리스도의�신성을�보여주는�호칭인� '영광

의� 주'(*,퀴리온� � 테스독세스)는� 바울� 서신에서는� 본절에만� 나타난다.� 바울은� 본절에서� 그리스도

에게� 적용할수� 있는� 최고의� 호칭을� 사용하여� 십자가의� 수치와� 극명(克明)하게� 대조를� � 보이고� �있다.바울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강조하는� 이유는� 7절에서� 언급한대로� 그분의� 영광이� '우리의� 영

광'을� 위한� 것이며�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께서만� 이루실�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Grosheide).

=====2:9� � 하나님이...함과� 같으니라� -� 본� 구절의� 인용� 출처를� � 알아내기가� � 어렵다.� � 오리겐

(Origen)과� 그후�몇몇� 주석가들은�지금은�분실된� '엘리야의�외경'이나� 또는� '이사야의승천'이라는�

외경에서� 인용했다고� 했다.� 그러나� 바울이� 구약성경을� 인용할� 때에만� '기록된� 바'라고� 함으로� 이

견해는� 타당하지� 않다(Lightfoot,� � Hodge).� 혹자는� 복음서에는기록되지� 않은� 주님의� 말씀을� 인

용했다고� 하며� 사� 52:15;65:17등에서� 인용했다고� 하기도� 한다(Chrysostom,� Hodge).� 그러나�

전체적으로�봐서�사� 64:4을� 대략적으로�언급한듯하고� '사람의�마음으로도�생각지�못하였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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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구약의� 전체적인� 사상을� � 일반적인의미로� 함축시킨� 것같다.� 한편� '예비하신'이라는� 동사는� 하

나님께서�자신의�계획을�이루어가고�계신다는� 7절의�사상을�강조해�주고�있다.

=====2:10� � 오직� 하나님이�성령으로�이것을� 우리에게�보이셨으니� -� '오직'에� 해당하는� � 헬라어

가�어떤� 사본에는(*� ,� A,C,D),� '데'(*� � � ,� '그러나')로� 되어있고,� 어떤�사본에는(P� ,B)� '가르'(*� � ,�

'왜냐하면')로� 되어있다(Aland).� 개역성경은� '데'를� 취하여� � 본절을� 앞� 구절과� 역접관계로� 보았

다.� 그리고� 헬라어� 본문에는� '우리에게'(*,� � 헤민)가� 문장의� 초두에� 나와� 특히� 강조되고� 있다.� 이�

세상의� 관원들이� 깨닫지� 못했던� 하나님의� 깊은� 지혜가� 선지자와� 사도들(엡3:5)� 그리고� 모든� 그

리스도인들에게 계시되었다.� 바울이� 본절에서부터� 16절까지� 줄곧� '우리'라는� 대명사를� 주로� 사

용한�것은� � 계시가�바울뿐�아니라�모든� 사도들에게�주어진�것임을�시사해준다.

=====2:11� 사람의� 사정을...아우도� 알지� 못하느니라� -� 본절은� 인간의� 지혜를� 이해하기� 위해서

인간의� 영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영적인� 지혜와� 진리를� 이해하려면� 성령을� 통해서

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본절에서� 언급된� '영'(*,� 프뉴마)은� 하나님과� 사람의영을� 모두�

지칭하므로� '사고하고�행동하는�실재적인�인격'을� 가리킨다(Mare).

=====2:12� 우리가...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 '우리가'에� 해당하는� 헬라어� � '헤메이

스'(*� � )가� 10절에서와� 마찬가지로� 문장� 초두에� 나와� 강조되고� 있다.� � 이는하나님의� 깊은� 지혜

를� 알� 수� 있는� 특별한� 은사를� 받은� 대상이� 다름아닌� � 그리스도인임을� 역설하기� 위한� 것이다.� 본

절에서의� '우리'는� 바울� 자신을� 포함한� 사도들을� �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성령에� 의

해서� 인도함을� 받은� 자들까지도� 포함한다.� � � 이는...은혜로� � 주신� 것들을� � 알게� 하려� 하심이라� -�

'이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히나'(*� )는� 목적을� 나타내는� 접속사로� 본절은� 우리� 성도가� 하나님께

로부터�온� 영을받은�목적은�하나님께서�은혜로� 주신� 것들을�알게� 하려는� 것임을� � 설명한다.� � '은

혜로주신� 것들'의� 헬라어� '카리스덴타'(*)는� 부정� 과거로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 사실

을� � 근거로� � 사람에게 단번에 주시는 선물을 가리킨다(Edwards).� 본절에서� 바울은� 하

나님의� 지혜의� 깊음과� 인간을� 구원하시는� 은혜를� � 사람들에게� 알게� 하는� 것이� 성령께서� 추구하

시는�궁극적인�목표임을� � 보여준다. 하나님은성령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계시하시고,� 성령의� 조명

으로� 말미암아� 그� � 계시를� � 깨닫게하신다.� 다만�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깨닫지� 못하는�

것은�인간� 이성의�취약성(脆弱性)과� 제한성�때문이다.

=====2:13� � 우리가�이것을�말하거니와� -� '말하거니와'에� 해당하는�헬라어� '랄루멘'(* � � � )

은� '소리� 낸다'는� 의미를� 가진� '랄레오'(*� � )의� 1인칭� 복수� 현재동사이다.� 바울은� 현재형을� 사용

하여� 본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반복적으로� 강조하고자� 하고� 있다.� � � 신령한� � 일은� 신령한�

것으로� � 분별하느니라� -� 이� 구절은� 해석상� 난제를� 갖고� 있다.'신령한� 것으로'(*� � � ,� � 프뉴마티코

이스)란� 단어의� 성(性)에관한� 문제이다.� 개역성경은� 이� 단어를� 중성으로� 보고� 번역했지만� 남성형으로도� 해석이가능하다.� 남성형이� 맞다면� '신령한� 사람들에게'라고� 번역해야� 하고� '분별하느니라'

의헬라어� '슁크리논테스'(*� � )도� 다른� 해석을� 적용해야� 어울린다.� '슁크리논테스'는� 원래� '결합시

키다',� � '조화롭게� 하다'등의� 의미로� 쓰였는데� � 나중에는� '비교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했며

(고후� 10:12)� '가져오다',� '주다',� '설명하다',� '해석하다'� 등의� 의미로도� 쓰인다.� 그러므로� 본� 구

절의�번역은� 다음� 네� 가지로�생각해볼수� 있다.� (1)� '신령한� 진리에� 신령한�형식을� 부여한다.'� (2)�

'신령한� 진리를� 신령한� 진리로� 비교한다.'� (3)� '신령한� 사람들에게� 신령한� 것을� 해석해� � 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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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4)'신령한� 말로� 신령한� 진리를� 설명하거나� 표현한다.'� 비록� 이� 네� 가지� 해석이� 모두� � 타당성

이� 있기는� 하지만� 네번째� 해석이� 문맥에� 가장� 적절하다.� 바울은� 영적인� 말� 즉�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고린도�교인들에게�설명하고�있다.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 '육에� 속한� 사람'의� 헬

라어� '프쉬키코스� � 안드로포스'(*� � )는� '하나님의� � 영으로부터� 빛과� 진리를� 받지� 못하여� 구원얻

지� 못한� 자연인의� 상태'를� � 가리킨다.� � 이들은복음에� 대한� 이해가� 저급한� 수준에� 있어서� 감각적

이고� 이기적인� 정신을� 가지고� 단조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이� 용어가� 신약성경과� 교부� 문헌

에서는� 성령과� � 초자연적인세계와는� 대조적인� 자연� 세계의� 생명을� 가리키는� 말로� 종종� 사용되었

다.� � 흠정역(KJV)에서는� 이를� '자연인'(the� natural� man,KJV)으로� 번역했는데,� 자연인은� 거듭나

지�않은생태적인�사람을�가리킨다.� 그들은�성령의�일을�미련하게�보기�때문에�이를 받 아

들이지� 못한다(1:23).� 그들은� 아무리� 지혜롭다� 할지라도� 오히려� 그� 지혜가� 걸림돌이� 된다.� � � 저

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 헬라어� 본문에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 � ,� '왜냐하면')가�

있어서� 본구절에� 앞� 구절의� 이유가� 됨을� 나타낸다.� '미련하게'의� 헬라어� '모리아'(*� � )는� 고대� 헬

라에서� 신체적으로� 둔하거나� 장애가� � 있는것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정신적인� 우둔함

을� 의미한다.� 거듭나지� 않는� 자연인은� 모든� 가치를� 육체적� 물질적� 기준에서� 평가하기� 때문에� 그

들에게� � 있어서� � 복음은무익하고� 무가치하다고� 인식된다.� � �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 '영적

으로라야'에� 해당하는�헬라어� '프뉴마티코스'(* � � )는� '영'(*,� 프뉴마)의� 부사형으

로서� � '복음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분변함이니라'의� 헬라어� '

아나크리네타이'(*)는� 13절의� '분별하느니라'의�헬라어� '슁크리논테스'(* � � � )

와는� 달리� 법정� 용어로서� 진술을�듣기� 전에� 심문받는� 것을� 말한다.� 이� 단어가�원래� '검사한다',� '

시험한다'는� 의미를�가졌으며� 나중에는� � '판단하다',� '평가하다'� 등의� 뜻을� 가지게�되었다.� 바울은�

육체에� 속한� 사람은� 영적이� 아님을� 전제하고� 성령의� 일을�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이를� 분별할� 가

치� 기준도�가지지� � 못했다고�단언하고�있다.

=====2:15� � 신령한� �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과� � 대조적으로� '신령한� 자'는� 분명한� 가치� 기준이� 있어서� 판단의� 주체체자가�

될수� 있다.� '신령한�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뉴마티코스'(*� )는� '육에� 속한� 사람'의� 헬라어� '프

쉬키코스'(*� � )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영에� 속한� 사람',� '영적인� 사람'으로� 번역할� 수� 있다.� '프뉴

마티코스'는� 성령께서� � 내주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Hodge).�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사는� 사람들은� 모든� 가치� 기준이� 영적이므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계시(啓示)에� 의존하여� � 판단한다.� 그러므로�그의� 판단은�정확하며�다른�사람의�판단을�받지�않는다.

=====2: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주를� 가르치겠느냐� -� 헬라어� 본문에� 이유를�나타내는� � 접

속사� '가르'(*� � ,� '왜냐하면')가� 있어서� 본절이� 앞절의� 내용을� � 확증하고� � 있음을알� 수� 있다.이�

구절은� 70인역(LXX)의� 사� 40:13을� 인용한� 것으로서� 긍정적인� 질문� 형식을� 취하여� 부정적인� 답

을� 유도하는� 수사법을� 사용하였다.� 즉,� 주의� 마음을�전혀� � 헤아릴� 수� 없다는�것이다.� '주의� 마음'

에� 해당하는� 헬라어� '눈� 퀴리우'(*)는� 70인역을� 따른� 것으로� 히브리어� 본문에서� '여호와의� � 신'

에� � 해당하는� 히브리어� '루아흐� 야웨'(*� � )의� 번역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것은� 롬� 11:34� � 주석

을�보라.� � � 그러나�우리가�그리스도의�마음을�가졌느니라� -� 바울은�앞� 부분에서�인용한�구약의표

현� 가운데� '주의마음'과� 관련시키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마음'이란� � 용어를� � 도입한다.� 본절은�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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께서� 우리를� 아시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백성들도�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영적인� 진리와� 영적

인� 지혜를� 알�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Mare).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모든� 생

각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이� 그리스도를� 계시하여� 깨닫게�

한다는�점을� 간과해서는�안�될�것이다.� 고린도전서�제� 3장

=====3:1� �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 할� 수� 없어서� -� '신령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뉴마티코이스'(*)는� 2:14,� 15과는� 달리� � 본절에서는�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을� 가리킨

다.� 2:14,� 15에서는� 이� 단어가� 구원받지� 않은� � 사람과� 대조되어� 구원받은� 사람을� 의미하였지만,�

본절에서는� 영적으로� 미숙한� 상태에� 있는'어린아이'(*� ,네피오이스)와� 대조되고� 있다.� 즉� 본절에

서� '신령한� 자들'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성숙해� 가는� 자들을� 가리킨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상태가여전히�성숙되지�못하고�정체(停滯)되어� 육적인�편견과�기준을�가지고� � 생각하며�행동하는�수준에�있다고�규정한다.

=====3: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 '밥'에� 해당하는� 헬라어� � '브로마

'(*� � )는� 원래� '고기'(meat)라는� 의미로서� 일반적으로�성인이� 먹는� � 단단한음식을� 가리키는� 말이

다.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단단한� 음식에� 해당되는� 형태로� 복음을� 가르치고자� 하지� 않았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어린� 신자로� 여겨,� 그들이� � 수용할� 수� 있는� 형태로� 진리를� 표현하고자�

했음을� 시사한다.� 바울의� 이러한� 화법은� 헬라세계에� 퍼져있던� 밀의� 종교의� 방식과는� 다르다.� 밀

의� 종교에서는�신도의�수준에� � 따라일정수준에� � 이른�신자들에게만�은밀하게 자신들의� 교리

를�가르쳤다.� 그러나� � 바울이이런�방식으로� 복음의�진리를�단계적으로�구분하여�가르쳤다고는�볼�

수� 없다.왜냐하면그리스도의� 복음은� 신앙의� 상태에� 관계없이� 항상� 진리이기� 때문이다(Calvin).� �

오히려복음의�내용을�설명하는�형식을�달리하여�가르쳤다고�보는게�더욱� � 타당하다.� � 이렇듯하나

님의� 개시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여� 그들이� 수용할� 수� 있는� 상태에� 따라� 깊고넓게� 가르쳐야�

한다.� � � 지금도� 못하리라� -�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처음� 방문하여� 복음을� 가르칠� 때,� 그들은단순

한�믿음의� 도리조차도�제대로�이해하지�못했다.� 그런데�지금까지도�고린도�교인들이� 복의�초보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신앙이� 성숙하지� 못하여� 정체된� 상태로� 머물러� 있는� 까닭에� 다른형태로� 복

음을�설명할�수� 없음을�안타까워�하고�있다.

=====3:3� �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 속한� 자로다� -� '육신에� 속한�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 '사르

키코이'(*� � )는� 1절에서� 언급한� '사르키노이스'(*� )보다� 강한� 표현으로� '사르키노이스'는� 육신� 자

체를� 가리키는� � 반면� � '사르키코이'는육신적인� 특성을� 나타낸다.� 이� 말이� 신앙� 생활을� 적게� 한�

사람에게는� 비난이� � � 되지않지만� 신앙� 생활을� 오래한� 사람에게� 사용되면� 비난하는� 투가� 된다

(Morris).� � �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 바울은� 본절에서� 육신에� 속한� 상태에� 대해� 구

체적으로� 말하고�있다.� '시기'에� 해당하는�헬라어� '젤로스'(*� � � )는� 근본적으로� � '뜨거움',� � '열심'� �

등을� 의미하여� 헬라의� 전통� 작가들의� 문헌과� 신약� 성경에서는이� 단어가� 덕목� 가운데� 하나로� 이

해되기도� 한다.� 또한� 질투와� 유사한� 개념으로� 사용되어� 그릇된� 경쟁� 의식에서� 나온� 감정으로� 이

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바울은� 대개� � '젤로스'를� 육에� 속한� 사람이� 갖고있는� 정서로� 본다(갈�

5:20).� 한편� '시기'가� 외적으로� � 표출되면� 분쟁이� 유발되는데,� � '분쟁'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리

스'(*� )가� � 어떤헬라어� 사본들(P� ,D,F,G,TR)에서는� '분열'이라는� 의미의� 헬라어� '디코스타시아이

'(* )로� 되어� � 있다.� '분열'은� '분쟁'의� 결과로서� 필사자가� 좀더� � 과격하게� 고린도�

교회의� 분열상을� 나타내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고린도� � 교인들은� 여러� 파로� 나누어�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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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주장을�강하게�내세우며�각기�독자적인�태도와�노선을�취하였음을 시사한다.� � � 사람을� 따

라� 행함이�아니리요� -� '사람을�따라'에� 해당하는�헬라어� � '카타안드로폰'(*

� )은� 통상적인� 죄인의� 삶의� 방식인� 이기심,� 교만,� 시기� 따위의� 정서를� 정당하게� 여기고�

수용하며�사는�것을� 의미한다.� 그러나�그리스도인들은� � 육체의�요구를�그리스도와�함께�십자가에�

못박아�없애버린�칭의인(稱義人)으로� 살아가야한다(갈� 2:20;5:24).� 그렇기� 때문에�본절에서�바울은� 이를� 염두에� 두고� 고린도� 교인들의� 오류를� 스스로� 시인할� 수� 밖에� 없도록� 수사적� 의문문을�

사용하고�있다.

=====3:4�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아볼로에게라� 하니� -� 헬라어� � 본문에� � 나오는접

속사� '가르'(*� � ,� '왜냐하면')는� 본절이� 앞절의� 진술에� 대한� 이유가� 됨을� � 나타낸다.� � 고린도� 교

인들이 '시기'와� '분쟁'에� 가득한� 어린� 신자들이라는� 사실은� 그들이'바울'파와� '아볼로'파� 등으로�

나뉘어� 있는� 현상을� 통해� 알� 수� 있다.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당파를� 짓

고� 있는� 분열상을�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 설명하고� 있다.� 바울이� 본절에서� 제시하는� 바울파,� 아

볼로파� 외에도� 몇몇� 분파들이� 더� � 있었다(1:12).� 그런데� 바울이� 본절에서� 자신을� 중심으로� 모인�

바울파와� � 견주어� � 자신과깊은� 관계에� 있던� '아볼로'를� 예로� 들어� 설명하는� 것은,� 고린도� 교인들

이� 교회� 안에서어떤� 특별한� 사역이나� 어떤� 특정한� 인물에� 속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

생각하는�것이�잘못돼었음을�설득력있게�가르치기�위함이다.

=====3:5� 사본(P� ,� � ,� C,D,TR)에서는� 인칭형인� '티스'(*� � � ,� '누구냐')로� 되어� � 있으나,고대� 사

본들(� � ,A,B)에서는� 중성형인� '티'(*,� '무엇이냐')라고� 되어� 있어� 바울� 자신과� 아볼로를� 매우� 경

시하여�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다음� � 절에서� � 언급하려는하나님의� 권위의� 절대성과� 그분

의�사역의�완전성을�두각(頭角)시키고� � 인간 지도자의권위의� 상대성과� 한계성을� 대조적으로� 약

화시키려는�의도이다.� � � 저희는�주께서�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하여금�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

앞� 구절의질문에� 대한� 대답의� 형식을� 취하여,'주'와� '사역자'를� 대조함으로써� '주'의� � 우위성을나

타낸다.� '사역자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코노이'(*)는� 본래� 식탁에서� 시중을� 드는� 봉사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용어가� 신약성경에서는� 자주� �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언급할� 때� 사용되어� '

집사'(롬� 16:1;빌� 1:1)를� 의미하기도� 한다.� 본절에서� 이� 단어가� � 사용된것은� � 그들의� � 직무가� �

낮다는� � 사실을� � 표현하기 위함이다(Morris).� 모든� 행위의� 주체자는� '그리스도'이시고� 사역자인�

바울과�아볼로는� � 도구에불과하다.

=====3:6� �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 -� � 바울은

앞절의� 논술을� 뒷받침하기� 위해,� 식물� 재배와� 비교하여� 설명한다.� 본절에� 나타나는� 동사들� 가운

데�바울과�아볼로를�주체자로�삼는� '심었고'의� 헬라어� '에퓌튜사(* )와� '물� 주었으되'의� 헬

라어� '에포티센'(*)은� � 부정과거인데반해,� 하나님을� 주체자로� 갖는� 동사� '자라나게� 하셨나니'의�

헬라어� '육사넨'(* )은� 미완료과거이다.� 이는� 바울과� 아볼로의� 사역은� 시간적인� 한계를� 갖고� � 있

지만,� 하나님의� 사역은� 영속적임을� 보여준다.� 본� 구절은� 고린도� 교회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해� 준�

사람이� 바울이라는� 것과(행� 18:1-18)� 그의� 동반자� 아볼로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복음을� 자세하게�

해석하여� 가르친� 역사적� 사실을� 증명한다(행� 18:24;19:1).� 그러나� 그들의� 사역� 배후에는� 하나님

의�역사하심이�항상�있었고�절대적인�역할을�하셨음을명백히�보여준다.

=====3:7� � 그런즉�심는�이나� 물주는�이는� 아무것도�아니로되�오직�자라나게�하시는 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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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뿐이니라� -� 본절도�역시� 하나님의�주권적�사역을�설명해�주는것으로,� 앞절에�이어� 5절의질문에�

답하고� 있다.'아무것도� 아니로되'의� 헬라어� '티� 우테'(*)는� � 심고물주는� 사역이� 무가치하다는� 것

을�보여준다.� 반면에� '오직...뿐이니라'의� 헬라어� '알'(* )은� 근본적으로�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절대적인�가치가�있음을�보여준다.

=====3:8� � 심는� �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 본절에서는� 심는� 이와� 물주는� 이를� 접속사� '카

이'(*� � � ,� '그리고','...도')로� 연결시켜�바울이�언급하려는�것을�둘� 다에게�동일하게�적용시킨다.� '

일반이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헨� 에이신'(*� � )은� '하나이다'라는� 의미로� 둘� 다� 동일하다는� 의미

이다.즉� 본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역자들이� 각기� 하는� 일은� 다르다� 할지라도� 동일하게� 하

나님과� 관계를� 맺고� 동일한� � 교회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 �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

의� 상을� 받으리라� -� '각각� 자기의� 일하는� � 대로'라는표현은� 사역자들이� 하나님께� 대해� 개별적인�

책임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바울은� 사역자들이� 자신이� 수고한� 만큼의� 대가를� 받는다고� 말한다.�

그들이� 가진� 재능이나� � 은사조차도� 하나님께로� 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갖고� 있는� 재능이

나�은사에 관계없이수고에�대한�대가로�상급이�주어진다(Hodge).

=====3:9� �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 본절에는� '하나님'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우'(*

)가� 각� 구절� 맨� 앞에� 위치하여� 강조되고� 있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 바울이줄곧� 하나

님을� 모든� 행위의� 주체자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동역자들'의헬라어� '쉰에르고이

'(*)의� 의미가�명확하지�않다.� � 학자들의� � 견해에따라�두가지�해석이�가능하다.� (1)혹자의�견해를�

따르면�이� 말은� 문자�그대로� '하나님과�함께� � 일하는�사람들'을�가리킨다고�한다(Meyer,� Alford,�

Robertson).(2)혹자는� 문맥에� 따라� '하나님의� 일을� 행함에� 있어서� 함께일하는� 사람들'을� 가리키

는�것으로�해석한다(Bengel,� Morris,� Vincent).� 여기서는�후자의�경우가�더� 타당하다.� 그� 이유는� �

본절이� 앞� 구절에� 대한� 설명적인� 표현이므로� 문맥을� 떠나� 해석할� 수� 없기때문이다.� � � 너희는� 하

나님의� � 밭이요� 하나님의� � 집이니라� -� '밭'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오르기온'(*� )은� 신약성경에서�

여기에만� 나오는� 표현으로� 교회를� 가리킨다.바울은� 자신이나� 아볼로와� 같은� 사역자들을� � 경작자

로� 간주하고� 고린도� 교회를� 밭으로표현하고� 있다.� 또한� '집'의� 헬라어� '오이코도메'(*)� 역시� 교회

를� 가리키는데,� 바울은� 이런� 표현을� 신약성경에서� 자주� 사용했다(롬� 15:20;엡� 2:20-22;벧전

2:5).� 바울은� 교회를� '밭'으로� 비유하다가� 갑자기� '집'으로� 비유의� 소재를� 전환하면서자신의� 논증

을�다음�절에서도�계속�이끌어나간다.

=====3:10�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 본절을� 통해서도� 바울이�고린도� 교

회에�처음으로�복음을�효과적으로�전한�사실을�알�수�있다.� 바울은 자신을 지혜로운건축

자로�묘사한다.� '지혜로운�건축자'에�해당하는�헬라어� '소포스�아르키테크톤'(*

)은� '숙련된�건축가'라는�뜻으로� 헬라어의�관례에� � 따르면�다른� 일꾼들을�감독하는� 사람

을� 말한다.� 바울이� '집'(*,� 오이코도메)이란� 말은� 곧잘� 사용했지만,� '건축자'라는� 말은� 여기에서만�

사용하였다.� 바울은� 교회를�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 경륜(엡� 3:7-10)을� 알고있는� 숙련된� 건축자로

서� 고린도� 지역에� 처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사실을� 소개하고� � 이에� �

대한교리적인� 터를� 닦아� 놓았다(2:2;행� 4:11;엡� 2:20;벧전� 2:6).� � � 다른� 이가� � 그� 위에� 세우나� �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다른�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알로스'(*� )

는� 단수이지만,� '각각'에� 해당하는헬라어� '헤카스토스'(*� � )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교회의� 모든� �

사역자를개별적으로�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새로� 기초를� 놓을� 필요가� 없이� � 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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닦여진� 그� 터� 위에� 건물을� 세우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각자는� 어떻게� 그� 위에� 세울지를� 주의

하여야�한다.

=====3:11� 이� 닦아� 둔�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 본절은�앞절에서� � 경고

했던� 이유를� 제시한다.� 모든� 건축에� 있어서� 그� 건물의� 기초를� 세우는� 일이� 가장� � 중요하고� 우선

적인� 일이다.� 마찬가지로� 교회� 공동체에� 있어서도� 교회의� 터가� 가장� � 중요하고� 우선적이다.� 교회

는� 그리스도를� 터로� 삼지� 않고서는� 세워질� 수� 없다.� 이� 터는� 바울이� 닦았으나� 실상은� 그가� 닦은�

것이�아니다.� 바울에게�사도적�권위를�부여하신�그리스도께서 바울을� 통해� 그� 터를� 닦으신� 것

이다(Meyer).� � �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 예수그리스도는� 교회의� 유일한� 주인이며� 교회의� �

진정한� 터이다.� �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터로� 삼지� 않으면� 그것은� 이미� 교회라� 할� � 수� � 없다.� 엡�

2:20� 에서는� 사도들을� '터'라�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이� 돌'이라� � 하였다.이는� 그리스도가�

교회의� 궁극적인� 기초이심을� 보여준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 � 어떠한인물이나� 사상� 체계도� 교회

의�기초가�될� 수� 없다.

=====3:12� �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바울은� 건축에� 사용되는� 두� 종류의� 자재를� 예로들고� 있다.� 그� 하나는� '금,� 은,� � 보석'등� 값비싸

고� 견고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무,� 풀,� 짚'� 등� 값싸고� � 허술한� � 것이다.바울은� 순수하며� � 변

치않는� 영원한� 것과� 이에� 비해� 무미건조하고� 일시적인� 것을� � 비교대조함으로써� 거짓된� 가르침은�

쉽게� 소멸될� 것을� 연상하게� 한다.� 여기서� 후자(後者)는'천한� 초등� 학문'이며� � '철학과� 헛된� 속임수'이다(갈� 4:9;골� 2:8).

=====3:13� � 각각�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 그� 날이� 공력을� �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 '그

날'은� � 재난이나� 환난의� � 날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심판하시는� '주의� 날'(롬� 13:12;

살전� 5:2-9;히� 10:25)이다.� '밝히리니'의� 헬라어� '델로세이'(*� )는� 성격의� 본질을� 드러내어� 그것

의� 실상을� 밝힘을� 의미한다.� 그� 날에는� 각� 사람의� 공력에� 따른� 결과와� 성격이� 공개적으로� 드러

날� 것이다.� 그� 드러나는� 방식이� '불'에의해� 결정되어지는데,이는� '심판의� 불'을� 의미한다.� 성경에

서� '불'은� 크게� 두� 가지� 작용을�하는� 것으로�나타난다.� 즉� 정화시키는� � 작용(마� 3:11;막� 9:49)과�

소멸(燒滅)시키는� 작용(마� 3:12;살후� 1:7,� 8;히� 12:29)이� 그것이다.� � 바울은� '불'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각� 사람의� 공력이� 정당한� 것인지의� 여부를� 시험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적절히� � 표현하

고� 있다.� '나타내고'의� 헬라어� '아포칼립데타이'(*� � )는'아포칼립토'(*,� '드러내다')의� 현재� 수동태

형으로�공력의� � 드러나는�정도가�완벽하다는�사실을�시사한다.

=====3:14� 만일� 누구든지�그� 위에� 세운�공력이�그대로�있으면�상을� 받고� - 바울은 본 절

에서완벽한� 불의� 시험을� 거친� � 후에� � 그� � 결과에� � 따라� � 상급을� � 받을� � 것을� � 설명한다(마

25:14-30;눅� 19:11-27).� 이렇듯� 바울은� 마지막� 심판� 때� 있을� 보상과� 형벌(形罰)은� � 그리스도인에게도� 적용된다고� 보았다(고후� 5:10).� 그때� 주어질� '상'이� 실지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시되지

는� 않았으나� 이� '상'은� 개인적� 구원이나� 영원한� 생명은� � 아닌� � 듯하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들은�

모든� 신자에게� 이미� 주어졌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 상급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남아� 있

는� 것'(9:18)� 자체가�될� 수도�있다(Grosheide).

=====3:15� �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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얻은것� 같으리라� -� 공력이� 무익하여� 없어져� 버리는� 사람은� 그리스도께� 칭찬을� 받을� 만한일을� 갖

고있지� 못하므로� 단지� 구원만� 받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 구원도� '불� 가운데서얻은� 것'� 같아서�

쉽지� 않음을� 암시한다.� 이� 표현은� 화염� 속에서� 살아� 남기� 위해� �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사람의� 모

습을�연상시킨다(Morris).� 그러므로�이런� 사람은 적지않은해가� 있게� 된다.� 카톨릭에서는� 본

절을�연옥사상(煉獄思想)의� 근거로� 제시한다.� 그러나그들의�견해가� 타당하지�못한�이유는� 다음과�같다.� (1)� 본절에서� 다루고자�하는� � 주제는�교회의�사역자들과�교리와� 연관지어서� 언급하는�것이

지� 일반� 성도들과� 관련된� 언급이� 아니다.� (2)� 본절에서� '불'은� 심판을� 위해� 연단받는� 상태가� 아

니라� 심판� 그� 자체를가리킨다.� (3)� 이� '불'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 가운데� 나타나실� 불이다.� 바울

은� 구원얻는� 것이� 불로� 정화되는� 과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단지� '불� 가운데서'처럼� 어렵게� � 구원

얻는다고� 한다(Hodge).� 그러므로� 카톨릭이� 불을� 통해� 구원얻는다고� 하는� 주장은� � 타당하지� 않

다.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 '성전'에� 해당하는� 헬라어� '나오스'(*� )는'성전� 지역

'(temple� area)을� 가리키는� '히에론'(*� � � )과는� � 달리� � 문자적으로'거룩한� 장소'� 즉� '성소

'(sanctuary)를� 가리킨다.� 예수께서� 자신의� 몸을� '성전'이라고부른� 것처럼(요� 2:19-21),하나님의�

성령이� 거하는(6:19)� 하나님의� 구속받은� 백성은� 개인적으로나� 집합적으로�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불리어질� 수� 있다(Mare).� 바울은� 9절의'하나님의� 밭',� '하나님의� 집'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에이

미(*� ,� 'be')� � 동사의� 복수형� � '에스테'(*� ,� � '너희는...이다')를� 사용하면서도� '하나님의� 성전'(*

� � ,나오스�데우)은� 단수형을�사용하여� 기독교�공동체� 전체를� � 하나의통일된�유

기체로� 보았다.� � �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 본� 구절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

성전'이라는� 사실에� 대한� 증거를� 제시한다.� 성도가� 하나님의� 영적성전이라는� 근거는� 성령의내주

하심에� 있다(엡� 2:22;벧전� 2:5).�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막이나� 성전의� � 지성소에� �

'쉐키나'(*� � ,� Shechinah,� '여호와의� 가시적인� 임재')가� � 나타나고�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였지

만,� 이제는�예수께서�보내신�성령이� � 성도들� � 개인과교회�공동체�안에� 항상� 임재하신다(Hodge).

=====3:17� �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 본절은� � '

더럽히면'(*� � ,� 프데이레이)이라는� 조건문의� 동사와� '멸하시리라'(*� � ,� 프데레이)는� 귀결문의� 동

사가� 동일하게� 쓰여� 전체적으로� 매우� 과격하게� � 표현되어� 있다.� '프데레이'는� '보다� 나쁜� 상황으

로� 이끌어�간다'라는� 일반적인�의미를� � 갖고� 있는데,� 신약성경에서는� 70인역에서와� 마찬가지로� '

망치게� 하다'라는� 뜻으로도� � 사용되었다.� 따라서� 본절은� '만약� 누구라도� 하나님의� 성전을� 훼손시

킨다면� 하나님이� � 그를� 망하게� 할� 것이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Hodge).� 바울은� 이러한� 보응(報應)의� � 원칙을�제시하여�하나님의�처분이�불공평하고�임의적인�것이�아니라�합법적이고 공 의

로운처사임을� 보여준다.� 바울이� 이� 말을� 사용한� 것은� 실제로� 분쟁을� 일으키는� 고린도� 교인들의�

태도가� 중대한� 죄의� 행위였음을� 전제하고� 있다.� 모세� 율법에� 의하면� 성전을� 더럽히면� 사형을� 당

하거나(레� 15:31)�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의� 축출되었다(민� 19:20).� � 그런데� 하나님은� 나무와� 돌

로� 지어진� 상징적이고� 외적인� 성전� 건물보다는� 영적인� 성전인사람과� 교회� 공동체를� 더욱� 중요하

게� 여기신다.� 그러므로� 사역자들이� 교리를� 그릇되게전하면� 사람의� 영혼을� � 망하게� 하고� 교회

공동체를� 훼손시키는� 것이� 되며� 결과적으로'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행위가� 되므로�

하나님은� 그에� � 대해� 보응하실� 것이다.� � �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 '거룩

하니'의� 헬라어� '하기오스'(* � � )는� '성별된',� '하나님을� 위해� 구별된'� 등을� 의미한다.� '거

룩'이란� 말은� 원래� 하나님의� 속성에� 해당되는� 것으로,�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은� 본래가� 거룩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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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전(聖殿)은� 더욱� 거룩하고� 구별되어� 있다(사� 28:10;계� 3:12).� 바울은�하나님의� 성전의� 거룩성을� 예시하여,� 그의� 백성이� 하나님의� 소유이며� 하나님을� � 위해� 구별된� 존

재임을� 인식시키려� 하고� 있다.� � '너희도� 그러하니라'의� 헬라어� '호이티네스� 에스테� 휘메이스'(*)

는� 문자적으로� '그게� 너희들이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여기에서� '호이티네스'가� 단수인� '하

기오스'를� 가리킨다기보다는� 집합명사인� '성전'(*,� 나오스)을� 가리키는� 것로� 이해하는� 편이� 낫다

(Grosheide).� 그러므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다'라는� 뜻으로,결국� 독자들로� 하여금� '그러므로�

너희가� 거룩하다'는� 의미로� 논리적� 결론을� 내리게� � 한다(Edwards).� 바울이� 하나님의� 성전의� 거

룩성을� 들어� 고린도� 교회에� 곧바로� 적용한� � 것은� � 지도자들이나성도들의� 분쟁을� 그치게� 하고� 교

회의�각�구성원의�책임이�얼마나�심각한지를�지적하려는�것이다.

=====3:18� � 아무도� � 자기를�속이지�말라� -� 바울은 갑자기� 주제를� 전환하여� 앞에서

(1:17-2:16)하나님의� 지혜와� 비교하면서� 줄곧� 다루었던� 세상� 지혜의� 어리석음에� 대해� 다시� 언급

한다.� 따라서� 이� 말은� 바로� 앞� 구절의� 말�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는� � 주제보다는� 뒤따

르는� 말� '지혜자가� 되기� 위해� 미련한� 자가� 되라'는� 주제와� 연결짓는� 것이� 타당하다(Alford,�

Findlay).� '속이지'에� � 해당하는� 헬라어� � '엑사파타토'(*� � )는� 현재� 명령형으로서� 고린도� 교회� 내

에� 자기� 자신의� 양심을� 속이고� 그릇된� 행위를하고있는� 사람이� 현재�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바울은� 하나님의� 진정한� 지혜를� 세상적인� 관점으로� � 그릇되게� 인식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

에� 대해서� 불경건한� 태도를� 갖게� 되는� 것이므로� 이를� 엄증하게� 경고하고� 있다.� � �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 바울은� 세상에� 대한� � 미련함이� 진정한� 지혜라고� 일

깨워주고� 있다.� 이는� 고린도� 교인들뿐만� 아니라� 헬라인� � 모두가� 갈망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

면� 오직�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미련함을� 인식해야한다는� 역설적인� 표현이다.� � '지혜'를� 무엇보다�

중요시하고� 있는� 헬라인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이� 가치를� 두고� 있는� 것은� 미련한� 것으로� 여겨지나

(2:14)� 실상은�그렇지� 않다.� 왜냐하면�바울이� 1:18-25에서� 언급한�대로� 십자가의�도가� 어리석은�

것처럼�보이나� � 이것이야말로�구원을�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진정한�지혜이기�때문이다.

=====3:19� �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 앞에서� 언급한�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

지혜를� 증명하기� 위해,� 그는� 이� 세상의� 지혜가� 하나님� 보시기에� 어리석은� 것이라고� 강력하게� 선

언한다(Mare).� 이처럼�지혜에� 대한� 의의와� 가치� 판단의� 기준이� 이� 세상의� 것과하나님� 나라의� 것

이� 서로다르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인들이� 자기의� 인간적� 지혜를� � 의존하여� 서로� 분열과� 분쟁을�

일으킴은�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었다.� � � 기록된� 바�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

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 � 바울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본절과�

다음절에서� 구약성경의� 두� 부분을� 인용한다.� 본� 구절은� 첫번째� 부분으로� 욥� 5:12,13을� 약간� 자

유스럽게� 인용했다.� � 이� � 구절은70인역의� 번역을� 옮기지� 않고� 바울이� 직접� 히브리어� 본문에서�

번역한� 듯하다.� � '궤휼'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누르기아'(*� � )는� 본래� '어떤� 일을� � 민첩하게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 단어는� 좋은� 의미로� 사용된� 경우도� 있지만� 주로� 나쁜� 뜻으로� 사용되어

(Morris),� '못된� 일이라면� 어떻게라도� 해낼� 태세를� 갖춘� 상태'를� 말한다(Robertson).� 한편� '빠지

게�하시는'에� � 해당하는�헬라어� '드랏소메노스'(* � )는� 70인역에서의� '카탈람바노'(*� � ,� � '

취하다')보다� 강력하고�생생한� 표현이다.� 이� 단어는� '벌린� 손'을� 의미하는�헬라어� '드락스'(*� � )와�

같은� 어군으로� '탈취하다',� '붙잡다'등을� 의미한다.� 바울은� 본구절을� � 통하여� 사람들의� � 궤휼(詭譎)이� � 아무리�뛰어나도�하나님의�상대가�될� 수� � 없다는� � 사상을뚜렷하게�표현한다.� 그들이�하나님께� 대항하여� 자기들의� 구원� 계획을� � 세우나� � 오히려그� 궤휼이� 그들을� 얽어매도록� 하여� 인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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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가�전적으로�부족하다는�사실을�보여준다.

=====3:20� �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 본� 구절은� 구

약에서� 인용한� 두번째� 부분으로서� 시� 94:11의� 인용이다.� '생각'에� 해당하는� 헬라어� � '디알로기스

무스'(*)는� 사람의�마음� 속에서�일어나는�논리�과정까지�포함하고(마� 16:7;눅� 12:17),� 주로� 악한�

뜻을� 품는� 것으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다(눅� 5:22;6:8;롬� 1:21;약� 2:4).본절에서는� 소위� 지혜� 있

다고� 하는� 자들의� 모든� 생각이란� 주께서� 충분히� 파악할� 수� 있는� 것이며� 그들의� 지혜가� 주� 앞에

서는� 헛것에� 지나지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헛것으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타이오이(*� � � )는�

'쓸모없는',� '열매없는','공허한',� '무익한'이란� 뜻으로�본문에서는� 인간�스스로의계획은�허탄(虛誕)한� 것에서� 나온� 것이므로� 아무런� 결과도� 기대할수� 없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들이� 아무리� 악한�

계획을� 세운다해도� 영구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없고� 비록� 그생각이� 일시적으로� 선한� 것이� 있다고�

해도�결국� 무익한�것으로�돌아가고야�만다는� � 것이다.

=====3:21�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 '그런즉'의� 헬라어� '호스테'(*� )는� 앞� 부

분에서� 언급한� 내용에� 대한� 결론을� 맺을� 때� 사용되곤� 한다(3:7;4:5;11:33;14:39;15:58).� � 본절

에서는� 명령형� 동사� '자랑하지� 말라'� 와� 함께� 쓰여� 바울이� 18-20절의내용을� 권고하며� 동시에� 요

약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린도� 교인들은� 지혜를� � 사모하는� 것� 때문에� 교만해졌고� 그들이�

따르는� 지도자들의� 이름을� 힘입어� � 헛된� � 자랑에빠졌으나� 이제� 그러한� 현상에� 쇄기를� 박고� 분열

을� 방지하라는� 명령이다.� � �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 헬라어� 본문에� 접속사� '가르'(*� � )를� 사

용한� � 것은앞� 구절의� 권면에� 대한� 정당한� 근거를� 제시하기� 위함이다.� 이제� 바울은� 독자로� 하여

금시야를� 만물에� 돌리게� 한다.� '만물'에� 해당하는� 헬라어� '판타'(*� � )는� 하나님의� 피조� 세계� 전체

를� 가리키는� 것으로� 지도자인� 바울이나� 아볼로,� 게바� 등도� 하나님의피조물(被造物)에� 지나지� 않음을�상기시킨다.� 하나님은�그리스도�안에�있는 자들에게우주의� 대권자까지� 될� 수� 있는� 특

권을� 주셨다(롬� 8:17,32;딤전� 6:17).� 그러므로� � 어떤특정인이나� 사상을� 중심으로� 모이는� 행위는�

그리스도의�교회에서는�무익하다.

=====3:22� �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

다너희의� 것이요� -� 바울은� 앞절에서� 언급한� '만물'에� 대해� 다시� � 구체적으로� � 설명한다.즉� 교회

의� 사역자와� 공간과� 시간에� 속하는� 모든� 것을� 나열한다.� 바울과� 아볼로나� 베드로와� 같이� 사도적�

권위를� 갖고� 있는� 교회의� 사역자들도� 교회를� 섬기는� 종으로� � 세움을받았다.� 그러므로� 인간의� 지

혜나� 업적을� 크게� 보고� 섬기거나� 그런� 것들에게� 영광을� 돌려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모든� 것이�

구속받은�교회에�속한� 것이지�교회가 사역자에게�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가시

적인� 세계인� '코스모스'(*� ,'우주')나� 사람에게� 궁극적인� 가치를� � 부여할� 수� 있는� 생명이나� 사망

도� 그리고� 역사를� 종속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의� 흐름도� 구원받은�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목

적과� 계획에관련되어� 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주의� 백성들을� 위해� 존재가치가� 있는� 것이므로�

결국�본질상�우리에게� � 속한� 것이� � 된다(Mare).

=====3:23� �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 그리스도인에게� 우주의� 모든� 것이� 속하여졌음을� � 앞

서언급한� 후에� 본절에서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에게� 종속된� 관계라고� 말함으로써� 긍극적인� 통

치권자가� 그리스도이심을� 밝힌다.� 인간이� 최고� 통치권자가� 아니라� � 그리스도께서� 인간에게� 통치

권자로서의�가치를� 부여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그리스도에게종속되어�있을� 때� 그� 가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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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으로� 발휘할� 수� 있다.� �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 성도들이� 그리스도에게� 종속되는�

근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 명령과� 의지에� 순종하여� 그� 보상으로� 영광의� 자리에

앉게되었다는� 사실과� 관련된다(Grosheide).�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받게� 하고(약� 2:5)� 구원얻게� 하시려고� 이� 세상에� 보냄을� 받으셨다(요� 10:36;17:18).그

러므로�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아들로서� 완전한� 순종을� � 이루시고� 모든� 통

치권을� 이양(移讓)받으셨다(마� 28:18).�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 하나님으로서� 성부� 하나님의� 의지와� 일치되게� 통치권을� 행사하시므로� 교회가� 한� � 분� � 그리스도께속하여� 있는� 것은� 곧� 하나님께�

속하여있는�것이�된다.� 이러한�관계 속에서만� � 완전한하나됨과� 정상적인� 질서가� 이루어� 진다.고

린도전서�제� 4장

=====4:1� 마땅히...여길지어다� -� 바울은� 3:23의� 결론을� 그대로� � 받아들이면서� � '후토스'(*

,� '그와� 같이')를� 사용하여� '일꾼'이라는� 것과� '비밀을� 맡은� 자'라는� 두� 가지의�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본문에서� '후토스'는� '그러므로',� '그런즉',� � '이와� � 같이'등의� 접속사로� 사용되었

으며� '로기제스도'(*� � ,� '여기다')와� 함께� 쓰여� '하나님의� 것'이라는� 결론을� 토대로(3:23)� 새롭게�

판단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 개역성경은� '마땅히'라는� 말로� 번역하였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일꾼

된� 것과� 비밀을� � 맡은자� 된것의� 당연성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 � 그리스도의� 일꾼� -� 여기서� '

일꾼'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휘페레타스'(*� � )는� 본래� '노예'에� 가까운� 신분을� 의미한다.� 고대� 전

함에서� 노를젓는� 가장� 하급노예를� '휘페레테스'� (*)라고� 불렀는데� 바울은� 3:5에서� 사용한� '디아

코노이'(*,� '사역자들',� ministers)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고� � 있다(Barrett).� '휘페레타스'는� 공

관복음서에서도� '일꾼'이라는� 뜻으로� 번역되기도� 하였으나(눅� 1:2),행� 13:5에서는� 요한을� 칭할�

때� '수종자'라는� 의미로� 번역되기도� 하였다.특히� 본절에서� 바울이� 이� 단어를� 사용할� 것은� 자신의�

위치를� 보다� 겸손하게� 나타내려� 한것� 같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신분적인� 지위에�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 누구에게� 속해�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에게� 속한� 노예적� 개

념은� 오히려� 바울의� 지도자됨을� 더� 선명하게� 나타내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 � 비밀을� 맡은�

자� -� 예수께서는�제자들에게만� � 천국의� '비밀'(*,뮈스테리온)을� 나타내시고�다른� 자들에게는� 숨기

셨다고� 말씀하신� 바� 있다(마� 13:11).'비밀'이라는� 말은� 초대� 교회� 속에서� 신성한� 의식이나� 성례

전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Barrett)� 본절에서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관계된� 엄밀

한� 지식이나� 숨겨진� 하나님의� 경륜을� 뜻하는� 의미로� 쓰여졌다(골� 1:26,27;2:2).� 특별히� 임무를�

받은� 자들� 외에는� 숨겨진� 것이기에� 비밀이라고� 말할� 수� 있으나� 비밀을� 맡은� 자들에게는� '계시된�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이다(Lightfoot).� 이런� 의미에서�바울과�같은� � 당시의지도자들은� '계

시된� 진리의� 교사들'이라고� 칭할수도있다.� 한편� '맡은� 자'를� 뜻하는� 헬라어� '오이코노무스'(*)는� '

오이코스'(*� � ,'집')와� � '네모'(*,� '관리하다')의� 합성어로서� 한� 집안의� 행정� 관리� 및� 재정을� 맡아� �

관장하는� 지배인� 또는� 관리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직분의� 행정적인� 면을� � 강조하여� 마

치� 바울을� 비롯한� 지도자들을� 교회의� 행정관� 정도로� 취급하는� 것은� � 바람직하지못하다.� 바울은�

교회의� 구성원을� 관리할� 뿐만� 아니라� 진리를� 가르치는� 영적청지기로서의� 위치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딛� 1:7;벧전� 4:10).� '일꾼'이라는� � 단어는� � 가장낮은� 노예적� 신분을� 나타내는� 반면� '맡

은자'라는� 단어는� 중간� 관리인,� 또는� 위엄과� 권위를� 가진� 직분이라는� 점에서�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들� 모두� 그리스도와하나님의� 종으로서� � 완전히� 예속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사명은� 더� 선명하게� � 나타난다(Lenski).� 그리고�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구원의� 신비,� 인간의� 지혜

로는� 깨달아� � 알수� 없는� 영적� 진리를� 그리스도께로부터� 위임받아� 전하는� 일을� 맡았다는� � 점에서� �

같은직분임을�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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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 바울은� 지도자의� 겸손과� 권위를� 동시에� 강조한� 후에� � 이에

덧붙여서� '히나'(*� � ,� '...하기� 위하여')가� 이끄는�또� 하나의� 목적절을�제시한다.어떤사본(*� � )에는�

'구하다'라는� 동사가�명령형(*� � � ,� 제테이테)으로� � 기록되어�있는데�그� 의미는� '너희는�충성을�구

하라'는� 뜻을� 포함한다.� 이렇게� � 해석하더라도� 의미상� 큰� 차이는� 없다.� 보다� 중요한것은� '충성'이�

청지기의� 필수� 불가결한� 자질이라는� 점이다.� '충성'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피스토스'(*)는� � � 문자

적으로� '신실성이� 발견되는� 것'을� 뜻한다.� 청지기는� 주인� 앞에서� 신실한� 자로� � 인정받아야하며�

완전히� 신뢰할� 수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 된다(Lenski),� � 특히� '충성이니라'에서� 수동형� '

휴레데'(*� )를� 사용하여� 나타낸� 것은� '충성되다'라는� 인정이� 개인이나� 인간들의� 판단에� 있지� 아

니하고� 주인이신�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에�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청지기는� 주인이신� 하나님의�

명령에�따를� 뿐이며�자신의�일을� 처리함에�있어서�신실할�따름이다. 칼빈(Calvin)은� 이와� 같

은� 삶을� '건전하고� 지혜로운생각으로� 양심의� 순결성을� 지켜나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 특히� 본절

에� 사용된� 충성의의미는� 구별된� 몇몇�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원리로서� 모

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윤리라고� 할� 수� 있다.� � 왜냐하면� 모든� 성도들이� 자신의� 믿음의분

량에따라�청지기로�부르심을�받았기�때문이다(12:28;엡4:11,12;딤후1:11;벧전� 2:9).

=====4:3� 판단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 당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바울을� 비롯

한� 교회의� 지도자들을� 주관적인� 소욕(所慾)을� 따라함부로� 판단했다.� 그들의� 판단은� 마지막� 날에�공력을� 따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법정적� 선언과(고후� 5:10)� 근본적으로� 다른� 성격의� 판단이다.�

바울은� '아나크리노'(*)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이� 판단이� 심판이라는� 의미보다는� 편견에� � 의

한� 분별� 또는� 식별(discern)을� 의미하는� 것으로� 취급한다.� 당시� 교회의� 비난과� 배척은� 그리스도�

앞에� 서게� � 되는� 심판대의공정성과� 위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그야말로� 매우작은� 일에� 불과

한� 것이었다.� � 설령�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바울을� 칭찬하며� 천사와� 같이� 높였다고� 할지라도� 바

울은� � 아무런� 동요를�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오직� 주인에게� 충성할� 자세를� 가

졌으며� '인간의� 판단',� '하나님의� 판단'이� 어떻게� 다른� 것인가를� 분명히� 알고� � 있었기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깨닫고� � 자신의선한� 양심조차도� 신

뢰하지� 않았다.� 그것은� 자기� 유익을� 위해서� 판단의� 기준이� 변할� 수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사람

들의�판단은�사도�바울에게�아무런�가치가�없음을� � 선포한�것이다.

=====4:4� �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 한� 인간의� 업적에� 대하여� 판단을� 한다는� 것은� 쉬

운일이� 아니다.� 바울은� 앞절에서�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라고� 말한� 이후� � 자신의� 허물없

음을� 스스로� 언급한� 것이� 궁색한� 변명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롬� � 7:19에� � 기록된� 바와�

같은� 죄인의� 고백을� 염두에� 두고�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바울은� 원치않는� 바� 악을� 행하는� 자신

을� 발견할� 때마다� 양심의� 가책을� 받아야만� � 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자신을� 책망할수� 없다고� 말

한것은� 나름대로의� � 이유가� � 있을� � 것이다.� � 칼빈(Calvin)은� '책망할� 것이� 없다'는� 것은� 전� 생애

에� 대하여� �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의� 직분을� 수행하는� 일에� 있어서�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 이해한다.� 또한� 라이트푸트(Lightfoot)는� 본절을� 단순히� 가상적인� 진술로�

취급한다.� � 바울은사실을� 진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만족에� 빠져� 있는� 자들을� � 책망하기�

위하여하나의� 가정적인� 전제를�제시하였다는� 것이다.� 양자는� 모두� 나름대로의�근거를� 가지고있으

나� 지도자의� 직분과� 권위를� 설명하는� 본절에서는� 전자가� 보다� 타당한� 것이라고� 본다.� 바울은� 하

나님의� 비밀을� 맡은� 사도적� 사명을� 수행함에� 있어서� � 태만이나� � 과오(過誤)를� 범하지� 않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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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하는� 것이다(Lenski).� � � 이를� 인하여� 의롭다함을� 얻지� 못하노라� -� 바울에게� 있어서� 의롭다함

을� 받은� '칭의'의� � 개념은� 언제나� 수동태로� 나타난다.� 본절의� '의롭다� 함을� 얻지'의� 헬라어� � '데

디카이오마이'(*)� 역시� '디카이오오'(*,� � '옳게여기다')의� 수동태로서� 의롭다고� 판결하시는� 그리스

도의� 판단을� 시사하고� 있다.� � 사도의� 직무에� 충실하였음도� 불구하고� 그것이� 자신을� 의롭게� 하지�

못한다는� 고백은� 철두철미하게� '이신� 득의'에� 근거한� 것으로� 자신의� 충성도를� 자랑하거나� 비하하

는�것으로� 이해하기�보다는�심판자이신�그리스도의� 권위를�강조하는�것으로�이해해야� 한다.� 인간

은자신이� 이행한� 일을� 정직한� 것으로� 판단하지만� 심판자는� 그� 심령을� 감찰하시고(잠� 21:2)� 판단

하신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안에서� '의'를� 인정하시는� 것이다.� 한편� 본절에서�

바울이� 궁극적인� 최후의� 심판을� 바라보며� 자신의� 삶을� 점검한� 것은복음의� 사역자된� 모든시대의�

지도자들이�본받아야�할� 삶의� 태도이다.� 복음의�사역자는스스로�책망할�것이� 없는가를�살피는�삶�

가운데서� 칭찬을� 기대할� � 수� � 있는� 것이다(5절).� 따라서� 우리는� 본절에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

는� 하나님의� 초월성(超越性)과� � 모든� 판단의� 근거를� 그리스도께� 두는� 바울의� 겸손한� 신앙� 인격을�엿볼�수�있다.

=====4:5� �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 � 바레트(Barrett)는'

판단하다'를� 뜻하는� '크리네테'(*� � )를� 궁극적인� 최후� 심판이� 있기� 전에행하는� '예비� 심문'� 또는�

'예비� 조사'의� 개념으로� 이해함으로써� 인간의� � 모든� � 판단을임시적인� 판단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

하려� 한다.� 그러나� 인간의� 판단이� 최후의� 심판에어떠한� 작용을� 할� 수� 있는� � 예비적� 개념으로� �

이해되어서는�안된다.� 마지막�날의� 심판은�그리스도에게� 모든�권위가�위임된�것로써� 혐의에�대한�

조사도� 그리스도께서� 하시며판결도� 그분께서� � 행하신다.� � 인간� 행위에� 대한� 고발은�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죄인을� 고발하는� 것이다.� 따라서� 본절의� '판단'은� 합당한� 이해와� 관찰� 없이�

조급하고� 경솔하게� 남을� 평가하는� 죄인의� 판단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다(Calvin).한편�

바울은� 천사들을� 판단할� 수도� 있는� 인간의� 권위가(6:3)� 그리스도에� 의하여� � 완성되는� 최후의� 날

까지�유보되어�있음을�시사하며�주님께서�오실� '때'와� � 그의� � '심판'을강조하고�있다.� 본절의� '때'

를� 가리키는� 헬라어� '카이로스'(*� )는� 일정한기간(롬� 3:26)뿐만� 아니라� 한� 순간의� 시각(마�

24:45)을� 의미하는� 단어로서� '약속된�시간'(an� appointed� time)으로서의� '최후� 심판의�날'을� 가

리킨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때'는� 전장(前章)에� 나오는� '그� 날'(3:13)과� 동일한� 말임을� 알�수있다.� 그런데� 이최후� 심판의� 날은� 예수� 그리스도의� � 재림과� 불가분의� �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를� 심판하게� 될� 이� 날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도래하기� 때문이다(마�

25:31-46;요� 5:24-30,� Harris).� � �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 본절은� 그리스도의�

심판의� 내용이다.� � 어두움� 속에� 숨겨진� 악한� 세력의� 일들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모두� 드

러날� � 것이다(고후� 5:10).� 그뿐만�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에� 숨겨진� 모든� 비밀조차도� 밝히� 드러날�

것이다(마� 10:26).� 어두움� 속에� 숨겨진� 인간� 행위의� 무질서는� 그리스도의� 밝은� 빛에� � 의하여� 모

두� 드러날�것이기�때문에�인간의�어설픈�판단은�그� 때까지�유보되는�것이다(요� 12:48).

=====4:6� 너희를� 위하여...본을� 보였으니� -� 바울과� 아볼로의� 모범은� 단순히� � 개인의� � 영광과칭

찬만을� 기대하는� 행위가� 아니다.� 여기서� '본을� 보였으니'로� 번역된� 헬라어� � '메테스케마티사'(*� � �

)는� '적용하다',� '변형시키다'(빌� 3:21)� 또는'변장하다'(고후� 11:13,� 14)의� 뜻으로� 사용된� '메타스

케마티조'(*� )의� 능동태로서� '의지를� 가지고� 자신에게� 적용시켰다'는� 의미를� 가진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규범을� 자신과� 아볼로의� 관계에� � 적용(適用)시켰다는� 것이다.� 바울이� 앞에서� 사용한� 여러� 비유들에� 의하면� 그들은� � 때로� � 심는자와� 물주는자(3:5-9),�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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닦는� 자와� 건축자� 등과� 같은� 협력자로서의� � 공동체적� � 삶을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서로를�

판단하지� 않는� 것은� 자신들에게� � 주어질� � 칭찬을의식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지켜보며� 살아

가는� 수많은� 성도들과� 무엇보다도� 모든것을� 판단하실� 분은� 주님� 자신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

는� 점에서� 그들의� 지도자적자질을� 더욱� 빛내준다.� 또한� 규범을� 자신들에게� 적용시켰다는� 바울의� �

변호는� � 고린도교회에� 나타난� 분쟁이� 선한사도들(예를� 들면� 구체적인� 언급이� 생략됨� � 베드로와� �

같은자)에� 의한� 것이� 아님을� 지적함과� 동시에� 그들의� 당파� 싸움을� 부추기는� 거짓� 교사들이있음

을� 고발하고� 있다(J.� Calvin).� � � 기록한� 말씀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배워...교만한� 마음을�

먹지� � 말게� � 하려함이라� -�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파당과� 분쟁이� 그들의� 자화� 자찬(自畵自讚)과� �교만에기인한� 것이라고� 파악한다.� 특히� '교만해지다'를� 뜻하는� 헬라어� '프쉬시오오'(*� � � )는� 다른�

곳에서� 오직� 한� 번만� 사용되고� 있는� 것에� 비하여(골� 2:18)� 본� 서신에서는� 여러번� 반복되어� 나타

나고�있다(18,19절;5:2;8:1;13:4등).� 여기서� 교만은�스스로'자랑한다'는� 의미로�사용되었다.� 그들

은� 자기가�따르는� � 지도자(바울이나� � 아볼로)를자랑함으로써�서로�속에서�도무지�발견할�수� 없는�

분쟁을�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다.� 하나를� 자랑함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또� 하나에� 대한� 시기와� 멸

시는� 스스로도� 해결할� � 수없는� 파벌� 싸움에� 휘말리게� 하였다.� 이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분쟁

과�파벌을�초래한교만을�말씀�안에서�잘라내는�일뿐이다.� 그런데�위에서� '기록한�말씀'(* ,� 게

그랖타이)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고린도� 교회� 내의� 분쟁에� � 관하여바울� 자신이� 본� 서신� 1장에

서�부터�지금까지�기록해�모든�교훈(1:10,30,31;3:16-21)들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교만하

지� 말며� 겸손할� 것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는� 구약성경말씀(잠� 16:18;22:4;사� 57:15)을� 의미하는

가?� 이에� 대해서는� 전자의� 견해를� 취함이� 타당하다.� � 왜냐하면� 지금까지� 교훈한� 것중에� 인용한�

말씀이� 많고(1:19,31;2:9;3:19,20)뿐만� 아니라� 본절에서는� '우리에게� 배워'라는� 말까지�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 '기록한� 말씀'이란� 바울이� 본서신� 1장에서부터� 지금까지� 기록해� 온� 모든� 교

훈을�의미한다(Harris).

=====4:7� 바울은� 세� 가지의�질문을� 통하여�고린도�교회의�교만을� 지적하며�왜� 교만0하지�말아

야� 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제시한다.� � �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 본절에서� '구별하다'(*,�

디아크리노)는말은� � '추려내다'� � 또는� '다르게� 하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Lenski,� Barrett).� � 첫

번째� 질문은� 그들� 가운데서� 다르게� 나타나려� 하는� 자들이� 있음을� 시사한다.� 바울은� 이질문� 가운

데서� 두� 가지의�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1)그는� 고린도� 교인들이� 모두� 같은� 죄인들이기� 때문에�

교만할�수� 없다는�사실을�지적하면서�근신할�것을 요구한다.� � (2)또하나는� 그들이� 하나님의�

은사와� 은혜를� 동일하게� 입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라도� 하나님앞에서� 특혜(特惠)를�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들은� 하나님� 으로부터� � 받은은사를� 우월감의� 근거로� 삼음으로� 인하여� 마

치� 자신들에게� 주어진� 은사들� 조차도�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되었다.� 그

러나� 인간들의� � 욕심을� 자랑하는거짓� 은사와는� 달리� 하나님의� 은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한�

것이다.� 설령 구별된다할지라도� 그� 판단의� 기준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 한다.따라서� 사도는� 첫번째� 질문을� 통해서� '누가� 너희를�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

리스도파� 등으로� 구분지었느냐'는� 반문을� 한� 것이다(1:12).� 사도의� 이� 같은� 질문에는� � '그리스도

께서� 어찌� 나뉘었느냐'(1:13)�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동일

한� 자들이� 아니냐'(1:2)라는� 책망이� 담겨� 있는� 것이다.� � �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 인간은� 자신이� 가지고� � 있는� 모든것을� 하나님으로부터� � 받았기� 때문에� 자랑할� 만한�

아무런� 정당성도� 가질� � 수가� � 없다.그들이� 가진� 지식,� 혈통,� 재산,� 생명,� 심지어� 신앙까지라도� 아

무�공로�없이 하나님께로부터� 선물로� 받은�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자랑은� 무익한것에� 지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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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는다는� � 뜻이다.� � �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 -� 세번째� 질문은� �

두번째질문과�유사한�것으로서� '모든것이�하나님께로�부터�받은� 것인데� � 어찌하여� � 스스로가잘나

서� 그와� 같은� 것을� 누리고� 있는� 양� 자랑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바울은� � 점진적인질문의� 방법을�

통하여�그들의�교만이�남들과�비교하는�것에서�출발하여�스스로�하나님의�영광을�탈취(奪取)하는�오만한� 자리에까지� 이르게� 되었음을� 지적한다.� 그들은� 은사를� 포함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권리와� 공로를� � 자랑함으로써� 자신뿐만� 아니라� 이웃들� 조차� 함께�

판단하는� 악행을� 저질렀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겸손은�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다는� 사

실을�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칼빈(Calvin)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 속에서� 겸손할� 수� 있는� 선한� 의지를� 발견한다면�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은혜� 덕분임을� 알아

야� � 한다고�주장한다.

=====4:8� �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 노릇하였도다� -� 본절은� � 고린도

교인들의� 오만� 불손한� 행동들에� 대한� 야유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일� 수도� 있고� � 실제적인� 그들

의� 삶을� 묘사한� 내용일� 수도� 있다.� 7절에서의� 질문들은� '너희가� 정말� 그러하냐?'는� 반어적인� 표

현임에� 틀림없으나� 본절을� 역설적인� 표현으로� � 취급하기에는� � 다소어려움이� 있다.� 실제로� 그들�

삶은� 모든� 면에� 있어서� 풍요로움을�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1:5).�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풍요는� 감사와� 찬양으로� 돌려지지� 아니하고� � 교만의� 근거로� 사용되었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 특

별히�주목해야�될�것은� '배부르며'(* � � ,� � 케코레스메노이)의� 완료분사와� '부요하며'(*� � �

,� 에플루테사테)와� '왕� 노릇� 하였다'(*� ,� 에바실류사테)� 등의� 부정� 과거� 동사가� 종말론적인� 의미

로� 사용되고� � 있다는� � 사실이다(Barrett).이러한� 특징은� '이미'� 성취되었음을� 시사하는� 헬라어� 본

문의�부사� '에데'(*� � � )에서� 더욱� 선명하게� 나타난다(Lightfoot).� 그들은� 완성될� 그리스도의� 왕국

을�바라보면서긴장을�가지고�죄악의�요소들과�싸워가는�것이�아니라�그들의�풍요(豊饒)와� 배부름�속에서� 즉� 영적� 교만� 속에서� 스스로� 만족하는� 상태에� 빠졌고� 현재도� 계속� � 빠져� � 있음을보여� 준

다.� ('여러분은� 벌써� 배가� 불렀습니다.� 벌써� 부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를� � 제쳐놓고� 벌써� 왕이� 되

었습니다.� 여러분이�정말�왕이었으면�좋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과함께� 우리도� 한번� 왕� 노

릇을� 해� 볼� 것이� 아닙니까?',공동번역).� 그리고� '우리� 없이� 왕노릇� 하였다'는� 구절은� 무슨뜻인가?� �

이� 말은� 고린도� 교인들이� 지니게� 된� 영적� 지식이바울과� 같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기인한� 것인데�

이제는� 그러한� 사도들이� 없이도� 그들이모든� 영적인� 일을� 분별할� 수� 있는� 것처럼� 행세하고� 있다

는� 지적이다(Harris).� � � 우리가� 너희와� 함께...왕� 노릇하기를� 원하노라� -�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들을제외하고�허황된�종말론적�사고�속에서�왕노릇하려�할�것이� 아니라 참된� � 그리스

도의왕국을�바라보는�미래�지향적인�시각�속에서�함께� 왕� 노릇하기를�간구한다.� 혹자는�하반절에�

쓰인� '왕� 노릇하기를'을� 전반절의�부정�과거� 동사� '에바실류사테'와� 서로� 구분하여� 전반절의�왕노

릇은� 이� 세상에서� 왕� 노릇하는� 것으로� 해석하며� 하반절은� 장차� � 올세상에서� 왕� 노릇한다는� 의미

로� 해석하려� 하지만� 구태여� 구별지을� 필요는� 없는� 것같다(Lenski).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그릇된�

종말론적�시각을�수정하고�장차� � 올 세상에서왕� 노릇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

인들은� 자신들의� 교만� 속에서� 만들어� 놓은� 스스로의� 왕� 노릇을� 포기해야� 한다.� 그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종말은� 아직� � 완성될� 수� 없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유보되어� 있다.� 따라

서� 그들의� 부요와배부름은� 자신의� 곤고와� 가련한�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교

만� � 속에서�만들어진�거짓�왕� 노릇이�라고� 할� 수밖에�없다� (계� 3:17).� 이제 그들에게� � 필

요한것은� 믿음으로� 행하는� 것과(고후� 5:7)� 어떤� 불의한� 환경� 속에서도� 자만하지� 않는� 겸손을� 찾

는� 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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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하나님이...미말(微末)에� 두셨으매� 우리는...구경거리가� 되었노라� -�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의� 방종과� 안일을� 일깨우기� 위해� 자신을� 포함한� 사도들이� 어떠한� 고난� 가운데서그들에게� 복음

을� 전하였던가� 하는� 사실을� 회상한다.� '미말'(*,� 에스카투스)에� 두었다는� 말은� 다스리는� 자와� 거

리가� 먼,인생에� 있어서� 가장� 낮은� 자리에� 처해� 있는� 비천한� 자들의� 모습을� 연상시켜� 준다.그리고�

'구경거리'를� 뜻하는� '데아트'(*� � )은� '극장'과� 같이� � 구경거리가� 있는� 장소를� 뜻하는� � 말로서(행

19:29,31)� 당시� 원형� 경기장(Colosseum)에서� 맹수들에게� 찢겨� 죽어간� 고난의� 삶을� � 암시한다

(행� 8:1).� 그들은� 죽기로�작정되어� 십자가�위에서� 구속을�완성하신� � 그리스도의삶을� 본받아�시대

의� 고난앞에서� 주의� 나라를� 위해� 용감하게� 순교의� 삶을� 살았다.� 바울은� 자신을� 그� 순교� 대열에�

내어� 놓음으로써� 고린도� 교인들에게� 항상� 사랑과� 열심을� 나타내었음을� 상기시키면서� 그들의� 허

세를�경고하고�있다.

=====4:10� �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 이런� 식

의반어적인� 대구는� 본절에서� 세� 번이나� 반복되고� 있다.바울은� 자신의� '미련함',� '약함','비천함'을�

나열함으로써� 앞절에서� 말한� 구경거리가� 구체적으로� 자신들에게�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설명하려�

한다.� 그들도� '그리스도의� 연고로'� 바보가� 되었으나� 고린도� 교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여전히�

세상� 지혜와�경험을�소유함으로�마치�자기들만�지혜로운�자들인�것처럼�되었다는�뜻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연고로'(*,� 디아� 크리스톤)라는� 말은�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를� 위하여'라는� 말

이다.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엔� 크리스토)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교

제함으로'라는� 뜻이다.�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 위하여� � 스스로세상� 지혜에� 대하여� 무지(無知)한�자들이� 되었으며(1:17,21;3:18)� 이세상에서� 가장� 약하고� 비천한� 자같이� 매맞으며� 핍박을� 당하는�

자(11,12절)가� 되었다.� 그러나� 이에� 반해고린도� 교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까닭에� 지혜롭고� 강

하며� 존귀한� 자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은� 굉장한� 역설(paradox)이다.� 왜냐하면� 고린

도� � 교인들이 그리스도안에서�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지� 못하였으면서도(3:1,2)� 서로를� 판단

하며� 사도들� � 없이� 왕� 노릇하기를� 서슴지� 않는� 것을� 신랄하게� 책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사도들

이�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해지고,� 약하고,� 비천해진� 것은� 인간의� 약함이� 오히려� 하나님의능력

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으며(고후� 12:9)� 또한� 영광의� 기준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불의한� 영광과� 세속적� 지혜를� 비교함에� 있어서� 자신을� 과감하게낮출� 수� 있었음을� 의미

한다.� 요컨대�바울은�하나님의�지혜를�멸시하는�인간의� � 지혜를고발함으로써�고린도� 교인들의�교

만이�정당화될�수�없다는�사실을�지적한�것이다.다.

=====4:11� �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定處)가� � 없고� �-위에� 나타난� 사도들의� 목마름과� 헐벗음,� 매맞음은� 고린도� 교인들의� 부요와� 대조를� � 이루고� 있

다.� 한쪽은�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배부름과� 부요속에서� 왕� 노릇하고� � 있으며� 또� 다른� 한쪽

은� 복음을� 인하여� 고난과� 굶주림에서� 허덕이고� 있다면� 참으로� � 모순된현상(결과)이� 아닐� 수� 없

다.� 특별히� 고린도� 교인들을� 복음으로� 가르친� 사도들의� � 형편이� � 이러하다면� 그들의� � 부요와� 배

부름이란�비정상적인�것이�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바울은� 복음의� 현상에서� 실제적으로� 겪은�

고난을� 구체적으로� � 하나하나� � 서술함으로써그� 의미를� 더� 강조하려� � 한다.� � 주리고� 목마르고� 헐

벗은� 것과는� 달리� 매맞는� 것은� � 외부적인� 힘에� 의한� 고난으로서� 이러한� 용어는� 노예나� 범죄자들

에게� 행하는� 가혹한� 행위를� 뜻할� 때� 사용된� 것이다(행� 14:19).� 그들은� 신체적� 학대를� 받았을� 뿐

만� 아니라� 정신적� 고난도� 동시에� 받았다.� 유대인의� 신분을� 포기하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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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다가� 동족인� 유대인으로부터� 박해를� 받게� � 될� 때� 그가� 가졌던� 정신적� 외로움은� 컸을� � 것이며�

특별히� '바로� 이시간까지'라는� 표현� 속에� 나타난� 바와� 같이� � 그리스도를� � 위하여당하는� 사도들의�

고난은� 그때까지도� 계속되고�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바울은� 이방인인� 고린도� 교인들

로부터�까지�외면을�당하므로�그의�고통이� � 더욱 심했음을상기시킴과� 동시에� 그들의� 자기�

도취와�어리석은� � 영적� � 교만을� � 책망하고� � 있다(고후11:26).

=====4:12�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 '수고하여'(*� ,� 코피오멘)라는말은� 바울이� 설교

하거나� 교회를� 관리하는� 일들을� 시사할� 때� 자주� 사용되었던� 단어이며(15:10;16:16;갈� 4:11;골�

1:29;살전� 5:12)� '일을하며'를� 뜻하는� � 분사� � '에르가조메노이'(*� � )는� 육체적� 노동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이들은�서로� 중복되어�있으므로�노동을� 강조하는�뜻으로�해석할�수도� 있겠으나�본절에

서는� 교회를� 돌보는� 일과� 육체적� 노동을� 각기�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시�

말해서바울은�교회를�돌보는�일에도�열심을�다했으며�자신의�생계를�위한 육체적 노 동

에도열심을�다했다는�뜻이다.� 그는� 자신에�의하여� 개종한�사람들에게�생계를�의존하지� � 아니하고�

스스로�직업을�가짐으로써�생활을�유지해�나갔다(행� 18:3;살후� 3:9).� � 즉� 성도들에게 누 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자신의� 쓸� 것을� 벌어� 가면서� � 전도를하였다(살전� � 2:9)는� 뜻으로� 손수� 천막

을� � 만드는�일을� 하며� 자신의�생활비와�전도�활동에�필요한�경비를�충당(充當)했음을�가리킨다.

=====4:13�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 본문은� 앞에서�지금까지�서술해온�고난의� � 역사

를� 결론적으로� 정리한다.� 그들은� 가장� 비천하고� 초라한� 사람이� 됨으로써� 십자가의� � 충실한� 종이�

될수� 있었다.� 혹자들은� '페리카다르마타'(*,� '더러운� 것')라는� 단어� 속에서� 희생의� 개념을� 찾으려�

한다(L.� Morris,C.K.Barrett).다시� 말해서� � '페리카다르마타'는� 청소를� 깨끗이� 한� 후에� 버리게� 되

는� 오물을� � 의미하는데� 바울은� 자신이� 바로� 이� 오물이� 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나� 세상을� 깨끗게�

하는�희생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 비록� 이� 단어는� 종교적� 정화를� 나타내는� 속죄� 양의� 개념을

선명하게� 나타내지는� 않지만� 공동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헌신� 했다는� 의미는� 충분히� 전달한

다.� 그리고� '만물의�찌끼'에서� '찌끼'(*,� 페리프세마)란� 말은� 물로� 닦아내고�문지르면�없어지는�옷

이나,� 물건,� 사람몸의� � 때(dirt)를� � 가리킨다.따라서�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한� 사도들의� 고

난을� 언급하면서� 이런� 말을� 한� � 것은� 세상� 사람들이�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을� 얼마나� 하찮은� 것

으로� 여기고� 모욕하며� � 배척했는가� 하는� 것을� 정확히� 나타내� 준다.� 그들은� 이� 지상의� 모든� 것들

로� 부터� � 소외된찌꺼기와� 폐물이� 되었지만� 오히려� 그것은� 그들의� 소명을� 더욱� 선명하게� 나타내

는�결과를�초래하였다(골� 1:24).

=====4:14� �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 상반부에� 나타난� 반어적인� �

풍자와� 비유는� 사라지고� 부드럽고� 친근감(親近感)� 있는� 표현들이� 등장한다.� 바울의� 엄격하고� 딱딱한� 어조가� 따뜻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바뀌었다는� 것에서� 고린도� 교회를� 향한� 그의� 사랑을�

발견하게�된다.� 극한� 분노와�책망� 속에서도� 사랑으로�권면하고자�하는마음을�잃어버리지�않고�있

다.� 한편� '부끄럽게� 하려고'(*� � ,� � 엔트레폰)란� 표현은� 다른� 곳에서도� 사용되었는데(6:5;15:34)�

그곳에서는�오히려�부끄럽게�하려고�경고의�말들을� 기록했다고�말한다.� 그러나�본절의�문맥은�그

것과� 다른� 의도를� 지향하고� 있다.� 그는� 격한� 분노� 속에서도� 아버지의� 따뜻함과� 같은� 위로를� 나

타내려� 하였음을� 바로� 이어지는� 후반절에서� 명백히� 밝히기� 때문이다.� � � 내�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하려�하는� 것이라� -� 여기서�바울의�의도는�보다 선명하게드러난다.� 그는� 자녀에� 대한� 사랑

을� 나타냄과� 동시에� 그들의� 잘못을� 바로� 잡으려는�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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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하는'이라는� 말과� '권하려� � 하는'이라는말이� 결코� 그들의� 죄악마저도� 덮어두고자� 하는� 의도로�

쓰인� 것은� 아니다.� � '권한다'는것은� '권면한다'는� 것과� 같은� 보다� 부드러운� 해석으로� 번역될� 수도� �

있으나� � 아버지의훈계와� 같은(엡� 6:4)� 보다� 준엄하고� 권위적인� 훈계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렇듯�

'사랑'과� '훈계'를� 동시에� 나타내고자� 하여� 사용한� 부자(父子)� 개념은� 다음� 절에서� 더욱� � 선명하게�나타난다.

=====4:15� �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 '스승'으로� 번역된� '파이다고구스'(*

� � )는� 엄격하게� 말해서� 스승이라고� 할� 수는� 없는� 지위이다.� 이들은� 아버지의�

지도에� 따라� 아들을� 가르치며� 아들이� 아들로서의� 예의� 범절을� 지킬� 수� 있도록� 돌보는� 노예들이

다(slave-guide).� 갈라디아서에서는� 몽학� 선생으로� 번역되었는데(갈� � 3:24)� 이들은� � 아들을� 학교

에� 데리고� 가는� 수행원에� 지나지� 않는� 자들이다.� 보편적으로� '파이다고구스'는� 크게� 두� 가지의�

의미를� 지니는데� (1)하나는� '가르친다'는� 지식적� � 개념이며� (2)� 또� 하나는� '지도한다'는� 지도권의�

개념이다.� 로버트슨(A.T.Robrt-son)은� 전자의� 개념을� 강조하여� 가르치는� 가정� 교사라는� 긍정적�

개념으로� 이해하며,바레트(Barrett)는� � 후자의� 개념을� 강조하여� 지도권을� 행사하는� 하나의� 집단

이라는� 부정적� 개념으로� 이해한다.본절에서는� 가르치는� 것과� 지도권을� 모두� 인정한다� 하더라도�

해석상에� 무리는�따르지� 않는� 것으로� 판단된다.� 바울의�의도는� 단지� '일만'(*� � ,� 뮈리우스)이라는�

풍자적� 수사법을� 사용하여� 스스로� 스승이라고� 자처하는� 거짓교사들의� 신분을� 고발하고� 있는� 것

이다(J.� Calvin).그들의� 수가�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아버지� 앞에서는�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

한다.� � �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파하여� 개종하게� 된� 많은� � 이방인들

에게� � 영적 아버지로서의� �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그는� 자녀들에게� 생계비를� � 요구하지는�

않았지만(12절)� 그들이� 잘못된� 길로� 나아갈� 때마다� 그들을� 향한� 지난날의� 해산의� 고통을� 상기시

키면서(10-13절;갈� 4:19)� 돌아올� 것을� 강청한다.� 바울은� 모든� 복음의� 지도자들에게� 아버지라는�

칭호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그는� 단지� 자신에게만� 이� � 칭호를� 사용함으로써� 다른� 지도자들과는�

차이가�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것은� � 단순히� 고린도� 교회� 설립자인� 자신의� 위치와� 권리를�

내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1)� 본능적인사랑을� 발휘하는� 아버지의� 속성을� 나타내려� 하였다.� 즉� 그

들에� 대한� 자신의� 책망및� 권면이� 진실된� 것이며� 책망의� 동기� 또한� 부성애적(父性愛的)� 사랑에서�기인된� 것임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2)다른� 복음� 지도자들보다� 자신과� 그들의� 관계를� 보다� 친숙

한� 관계로� 묘사한다.� 특별히� 주목할� 것은� 바울은� 자신이� 그들을� 낳았음에고� � 불구하고� � '예수그

리스도안에서','복음을� 통하여'라는� 강조점을� 잊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아비'란� 그

리스도로� 말미암은� 복음으로� 사람들을� 회심시키고� 계속해서� 그들을� � 젖과� 밥으로(3:2)� 양육하는�

영적� 아버지를�가리키기�때문이다.� 따라서�우리는� 당시의�고린도�교회에서�아버지의� 심정으로�교

인들을�권면하며�훈계하고�의로�양육하려�한� 자들보다는�지도자라는�직책(職責)만을� 얻기에�급급한� 자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 그러나� 바울은� 직접� 고린도� 교회를� 설립하고(행� 18:1-11),� 그�

교인들을위하여 계속해서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한� 참된� 영적� 아비였다(1:3;3:2).� 그러

므로� 그는� � 그들이� 어그러진� 길로� 나아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1:11,� 12)� 심한� 책망을� 할� 수� �

있었던것이다.

=====4:16� �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 바울은� 자주� 이와� 갈은� 성격의� 말들을� 반복하고� �

있다(갈� 4:12;빌� 3:17;살전� 1:6;2:14;살후� 3:7,9).이것은� 자녀들에게� 기대하는� 아버지의심정일�

수도� 있으나� 결코� 바울� 자신의� 개인적인� 입장을� 강조한� 것은� 아니다.� 다시� � 말해서� 그를� 따르는�

자들이�개인적으로�사도�바울� 주변에�붙어� 다니라는�뜻이 아니라는것이다.� 만약에�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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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될� 수� 있다면� 그것은� 본절의� 의도를� 완전히� 바꿔버리는�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다(L.�

Morris).� 바울이� 본받으라고� 주장한� 본받음의� 내용은� �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이방인들에게� 직접� 그리스도를� 본받으라고� 말하

는� 것보다� 더� 큰� 효과를� 거두기� 위하여위와같은� 표현을� 사용했는지도� 모른다(C.K.� Barrett).� 그

러나� 설령� 바울이� 자신의� � 삶을� 본받으라고� 직설적으로� 표현했다� 할지라도� 문제가� 되지않는� 것

은�복음을 드러내고자� 일평생� 고난속에서� 살았던� 그의� 삶이� 그리스도의� 삶을� � 대변할� 수�

있기� � 때문이다.그는� 복음의� 능력을� 나타내는� 삶을� 통하여�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저하지� 않고�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11:1).� 따라서� '너희는� 나를� 본받는자� 되라'는�

바울의�이� 선언은�단순한�자신의�추종자나�바울당파의�일원이�되라는�말이� 아니다.오히려�이것은�

구체적으로�다음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1)바울이�본을� 보인� � 사랑의�실천과� (2)그의� 겸손과�

고난에의� 동참,� (3)지적� 교만과� 불손한� 태도를� 버리고� 신앙안에서� 화합(和合)하는� 것,� (4)결론적으로�그리스도를�본받는�것을� 의미한다.

=====4:17� �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니� -� 바울이� 디모데를� 처음� 만난� 것은� 실라와� 함께� �

제2차전도� 여행을� 하던� 중�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파할때이다.� 디모데는� 유대인� � 어머니와� 헬라

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로서� 그� 외조모와� 어머니의� 신앙을� 이어받은충실한� 일꾼이었

으며�바울의�사역�후반기에는�마가�이상으로�바울의�사역에 참여하였던� 동역자다.� 바울은� 제

3차� 전도여행� 중� 에베소에서� 고린도� 교회의� 분쟁� 소식을� � 듣고디모데를� 파송한다.� 바울이� 지금�

디모데와� 동행하고� 있지� � 않음에도(디모데는� � 실라와함께� 마게도냐에서� 하역� 중)� 불구하고� 어려

운� 상황속에서� 디모데를� 파송하는� 것은� � 그만큼� 디모데를� 향한� 바울의� 신임이� 큰� � 것을� � 나타내� �

준다.� � 그러나� � 본절의� � 파송은16:10,� 11의� 기록과� 비교해� 볼때� 약간의� 난점이� 제기된다.� 본절

의� '보내었노니'(* � ,� 에펨프사)는� 부정� 과거� 시제로서� 과거의� 행동을� 가리키고� � 있으나� �

16:10,11은� 미래적�사건으로�기록하고�있기�때문이다.� 바레트(Barrett)는 서신상에� � 쓰

여진부정�과거는�때로� 현재�시상으로�해석되어야�한다고�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디모데는현재�

파송되지만� 편지가� 도착하는� 시간� 보다는� 늦게� 도착하게� 될� 것이라는� � 주장이다.그는� 디모데가�

다른� 목적지를� 경유하여� 고린도에� 도착하도록� 명령된� 것으로� 이해한다.한편� 렌스키(Lenski)는� 편

지는� 배편으로� 보내지고� 디모데는� 육로를� 따라� 갔기� �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아무튼� 편지

보다� 늦게� 도착할� 수밖에� 없는� 형편임에도� � 불구하고� 그를� 파송하는것은� 그� 만큼� (1)고린도� 교

회의�문제가� � 심각했다는� � 것을 반영하며(2)그의� 표현대로� '신실한� 아들'� 디모데가� 이� 문제

를� 해결해� 줄� 것을� 확신했다는� 것을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디모데는� 이편지를� 고린도에� 보낼� 즈

음에� 마게도냐� 지방을� � 통해� 고린도로� 향하고�있는� 도중이었음을� 알� 수있다(행� 19:22).� � � 각� 교

회에서� 기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 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문맥에서� � 볼때� 각처에서� 모이

는�그리스도인들의�지역적인�모임을�의미하는�것으로�이해되어야� � 한다.� 바울은�디모데를�특수한�

임무로� 파송(派送)함에도� 불구하고� 새롭고� 특수한� 처방법을� 명령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실루아노와� 디모데와� 함께� 고린도� � 교회에서� 사역했던지난� 날의� 가르침의� 내용을� 상기시키는� 방법을�

통하여� 그들의� 잊어버린� 기억들이� 다시회복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가� 누렸

던� 복음의� 능력들을� 상기시키려고� 한다(1:18).� 왜냐하면� 사람을� 교훈하고� 책망하며� 바르게� 하는�

것� 중� 하나님의�말씀의�능력보다�더� 효과적인�것은�없기�때문이다(딤후� 3:16,� 17).

=====4:18� �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 이

것이� 고린도� 교회의� 특징이다.� 바울이� 제� 2차� 전도여행의� 마지막� 시기인� A.D.� 51년� 경까지�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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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도에� 머물렀다고� 추정해� 볼� 때� 제� 3차� 여행� 중에� 서신을� 쓰고� 있는� 이� � 시점은(A.D.� 53-58)�

결코� 오랜� 시간이� 지난� 때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들은� 불과� 몇년� � 사이에� 이토록� 교만한� 자들

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들� 중에� 일부는� 교인들의� 방종을� 부추기며� 거짓된� 진리를� 가르치면서도�

바울이�차지했던� 영적�아버지의�자리를�빼앗으려�했는지도�모른다.� 그들은�바울이�다시� 돌아오지�

않았으면�하고�기대하며�바울이 이뤄놓은귀한� 설교� 활동의� 열매를� 훔쳐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이들은�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하려� 하며(9:17)� '그의� 몸은� 약하고� 그의� 말은� 시원치� 않다

'(고후10:10)고� � 조소(嘲笑)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고린도� 교회� 내의� 거짓� 교사들이었을� 것이다.

=====4:19� 주께서�허락하시면...속히� 나아가서� -� '주께서�허락하시면'(*� � � ,� 에안� 호� 퀴리오스�

델레세)이란� 말은� 조건을� 전제로� 한� 말로서� � 인간적인� 인정과� 감정을� 드러내지� 아니하고� 오직�

주님의� 뜻에� 자신의� 전도� 계획을� � 맡기는참된� 주의� 종의� 태도를� 보여준다.� 즉�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 계획하고� 애쓰는� 바울� � 일지라도� 그의� 계획과� 앞일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사실

을� � 보여준다.� � 여기서우리는� 지도자로서의� 바울의� 모범을� 다시� 발견한다.� 그런데� 16:8에서� � 바

울은� �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머물러� 있겠다고� 말하나� 본절에서는� '속히� 가기를� 원한다'고� 하여� 약

간의� 모순이� 발생하는� 듯� 보인다.� 따라서� 일부� 학자들은� 16:8과� 본절을� � 모순된� � 것으로생각하

여�이들이�서로� 다른�서신서�들에�의하여�재편집된�것이라고 주장하기도� � 한다(J.� Weiss,� J.�

Hering).� 그러나� 우리는� 바울� 당시의� 여행� 문화가� 오늘날과� 같은� � 것이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역이나� 터미날에� 나가면� 당장� 운송� 수단을� 만날수� 있는� 오늘날과는� � 달리� 여행을�

위하여� 오랜� 기간� 준비해야� 하며� 때로는� 항로를� � 이용하기� 위하여� 몇달� 몇일씩� 항구에� � 대기해

야� 하는� 환경에� 놓여� 있었을� 것이다.� � 또한오늘날과� 같은� 필기� 도구나� 타자지가� 없는� 환경� 속에

서� 이� 많은� 분량의� 편지를� 기록하는� 것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함을� 기억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4장과� 16장을 집필하는사이에� 대두될� 수� 있는� 시간의� � 경과와� � 환경의� � � 변화를� � 염두에� �

두어야� � 한다(C.K.Barrett).� 바울은� 본절에서� 될� 수� 있는대로� 빨리� 가기를� 소원하는� 의지를� � 표

명하면서그들이� 더이상� 실수하지� 않기를� 경고하고� 있으며� 16장에서는� 구체적인� 시간,� � 곧� 오순

절� 이후라는� 계획(計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구절에� 나타났� 듯이� 바울의여행� 계획에� 모순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16:8에서� 바울이�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머물겠다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아직도� 에베소에서� 전도� 활동을� 할� 기회가� 많았기� 때문이다(행�

14:27;고후� 2:12;골� 4:3).� 그러므로� 바울의� 이� 같은� � 표현은자신의� 에베소에서의� 복음� 전파� 사

역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주며� 특별히� 효과적인� 복음� 전파의� 기회가� 자기에게� 많이� 주어

졌기� 때문에� 에베소를� 쉽게� 떠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모든�

상황에도�불구하고� '주께서�허락하시면'� 속히� 너희에게�가겠다는�간절한�심정을�지니고�있다.

=====4:20� � 하나님의�나라는�말에� 있지�아니하고�오직�능력이�있음이라� -� � '하나님의� � 나라'는

예수의� 교훈� 속에� 자주� 등장하는� 주제로서� 공관복음서에서� 더� 일반적인� 표현으로� 사용되었으나�

바울서신� 가운데서는� 본서에서� 제일� 많이� 등장한다.� � 일반적으로� � '하나님의나라'(*� � ,� 헤� 바실

레이아�투� � 데우)는� � 그리스도의성육신과� 재림으로�성취될� 메시야�왕국을�의미한다(막� 1:15).� 즉� �

대체적으로� � 다음과같은� 두가지� 의미가� 있다.� (1)이� 세상� 끝날에� 도래하게될(마19:28;25:31)� 하

나님의� 신천� 신지(계� 21장)이다.� (2)�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인해� 이미� 성도들간에� 실현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눅� 17:21),� 즉�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현재� 영적으로� 지배하시며� � 그들의삶� 속에�

그의� 능력을� 나타내� 보여주신다는� 의미로서의� '하나님의� 나라'이다.� � � 바울이'하나님의� 나라'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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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사용한� 것은� 두번째� 의미로� 사용한� 말이다.본절에서� 바울이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을� 도입하

여� 저들을� 책망한�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1:5,6과� � 본장8절이� 시사한� 대로� 모든� 구변과� 지식에�

풍족한� 수준에� 있었으나� 생활의� 실제적인� 모습은�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과� 거리가� 먼� 시기(猜忌)와� 심한� 분쟁이� � 있었기� � � 때문이다.그러므로� � 하나님의� � 나라가�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

력'에� 있다는� 바울의� 말은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성도들의� 새로운삶(고후� 5:17)과� 그� 능력(요�

3:3-8)을� 암시한� 것이다.� 즉� 고린도� 교인들의� 삶의� 공동체� 곧� 교회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복음의� 능력과� 사랑의� � 실천을� 요구한� 것이다.� � 하나님의� � 나라가� '말'(*� � ,� 로고스)에있지� 아니

하고� 에서� '말'은� '능력'과� 대조적인� 개념으로� 사용되어� 말에� 상응한� 내용이따르지� 않는� 단순히� '

헛된말'이라는� 것을� 시사해� 준다.� 한편� '능력'은� 가시적인� � 것으로서� 예수께서� 그의� 왕국을� 선포

할� 때에� � 나타났던�기적들(눅� 11:20)을� 의미하는�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으나�본절에서는� 인간

의� 공허한� 웅변과� 대조를� 이루는� � 능력,� � 곧하나님� 나라에� 대한� 지식으로� 인해� 변화된� 품성,� 새�

사람으로서의� 옛� 사람을� 벗어� � 버린� 의와� 거룩함과� 화평을� 이루는� 실제적인� 모습을� 뜻하는� 것으

로� 이해함이� 보다� � 타당할� 것� 같다(L.� Morris,� J.� Calvin).� 따라서� 바울은� 인격과� 삶의� 변화,� 즉�

행동으로� 나타나는� 능력을� 강조함으로써� 헛된� 말과� 지식� 즉� 영적� 교만� 속의� 열매없는� 신앙� 생활

을고발하고�있다.

=====4:21� � 매...사랑...온유한� 마음� -� 이것들은� 모두� 하나의� 생각에서� 출발한� 것들이다.� 바울

은� 14절에서� 그들을� 부끄럽게� 하는� 것과� 훈계하는� 것이� 서로� 대치되는� 것이� 아님을� 말한� 바� 있

다.� 본절에서도�매와�사랑을�대치시키지� � 않는다. 만약� 바울이�매를� � 가지고나아갔다�하더라

도� 그것은� 사랑에� 근거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바울은� 아픈� � 채직으로� 훈계하든지� 사랑과� 온

유한� 마음로� 격려하든지� 간에� 고린도� 교인들이� 거짓� 교사들의사설(邪說)과� 교만으로부터� 해방되기만을� 기대하고� 있다.� 문제는� 바울이� 매를� � 택하느냐,� 사랑을� 택하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고린

도� 교인들이� � 무엇을� � 선택하느냐에� � 달려있는� 것이다.� 한편� '매'를� 가리키는� '라브도스'(*)는� 공

관복음서에서� � 전도자들이� 지니는� 지팡이를� 의미하기도� 하였으며(마� 10:10;막� 6:8)� 때로는� 지배

자의� 상징으로서� 홀을� 의미하기도� 하였다(히11:21).� 그� 외에� '목자의� 지팡이'� � 또는� � '스승의매'�

등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본절에서는� 아버지가� 자녀를� 훈계하는(14절)� 것을�

상징하는�의미로�사용되었다(Lenski).� 고린도전서�제� 5장

=====5:1� 너희� 중에...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 '음행'(*� � � '포르네이아)이라는� 말은� 문자적

으로�다른�사람의�육욕을�위해�자신의�몸을 파는� 행위를� 뜻하지만� � 보편적인� 의미로는� 불법적

인� 성행위를� �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 헬라어� 본문에� 의하면'심지어'(*� � � ,� 홀로스)가� 본문� 초

두에� 나와� 있는데� 이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이미� 벌어졌음을� 시사한다.� 바울은� 본

서에서� 두가지를� 강조하고� 있다.� � (1)그들� 가운데� 음행이� 성행하고� 있다는� 사실이며� (2)이� 추악

한� 음행을� 그들� 가운데� 있는모든� 사람들이� 널리�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당시의� 부도덕한�

성행위가보편화되지� 않고� 일부� 사람들에게만� 행해지는� 제한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고

린도�교회에서� 보다� 심각한� 문제는�그러한� 범죄가� 교회로� 부터� 정죄(定罪)되지� 않았다는� 것이다.�그들은� 모두� 자기들� 속에� 음행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으며� 또한� � 바울에게까지� 소

식이� 들릴� 만큼� 그� 행위는� 공공연한� 것이었다.� � 한편� '들었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쿠에타이

'(*)는� '아쿠오'(*� � ,� � 듣다)의� � 현재수동태로서� '...라는� 소문이� 들리더라'는� 것이다.� 이는� 고린도� �

교회로부터� � 들었다는것인지,� 아니면�고린도�교회에�음행이�있다는�것을� 다른� 사람들로부터�들었

다는� � 것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대체적으로� 글로에의� 집� 식구들에� 의해� 전해졌을� 것으로� �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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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다(1:11,� Farrar).� 뿐만� 아니라�이것은�널리� 퍼져� 있는� 사실이기에�여러�경로(소문)를통해서�들

었을� 것으로� 여겨진다(Lenski).� � �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 -� 유대인의� 율법에는� 이런� 죄를� 범한

자는� 돌로쳐� � 죽이라고� 명시되어� 있다(레� 18:8;신� 22:30).� 이러한� 율법의� 내용을� 알고� 있는� 바

울이� 구태여여기서� 이방인과� 비교한� 것은� 더� 이상� 재고의� 가치도� 필요없는� 아주� 경멸스런� � 행위

로취급하기� 위함이다.� 당시� 고린도� 지방은� 성적� 문란과� 방종으로� 소문난� 곳이었으나� � 바울은� 그�

이방인의� 문란보다� 더� 큰� 죄악이라고� 규정함로서� 자신의� 분노를� 반영(反映)하고� 있다.� 한편� 바울이�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고� 말한것은� 이방인들은� � 이러한범죄를� 전혀� 저지르지� 않는다

는�뜻이�아니다.� 오히려�본절은�당시� 이방인들 사이에서도� 가장� 치욕스러운� 죄로� 취급하

는� 추악한� 행위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Calvin).� � � 그� 아비의� 이내를� 취하였다� -�

바울은� 이� 사건을� '간통'이나� '근친� 상간'이라는� � 말로� 표현하지� 않고� '그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고� 하여� 음행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그의� 어머니'라고� 표현하지� 않고� '아

비의�아내'라는� 표현을�쓴� 것으로�보아� 그� 음행이�최소한� '그의� 어머니'(친모)와의� 관계속에서� 빚

어진� 음행은� 아닌것� 같다(L.� Morris).� 사실� 본문에는� 그� 여인의� 정체가� 무엇인지� 선명하게� 드러

나지�않지만�그� 대상이� '아비의�아내'� 였다는�점과� '아내'로� 번역된�헬라어� '귀나이카'(* � � � )

란� 뜻으로� '계모'(*� � ,� 메트뤼이아)라는� 말과� 거의� 뜻을� � 같이� 하기� 때문에� '아내'는� 아버지의�첩

이거나� 의붓� 어머니일� 수� 있다(Farrar,� Calvin).한편� '취하였다'라는� 헬라어� 본문� '에케인'(*� � )은�

현재� 부정사로� 이� 음행� 사건이� 단회� 적이지� 않고� 지금도� 지속적(持續的)인� 반복� 행위임을� 시사한다.� 따라서� � 여기서�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는� 말은� 계모와의� 관계에서� 성적� 부정이� 계속� 진

행되고있음을�의미한다(Harris).

=====5:2� 그리하고도...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 그들은� 도대체� 어떤� 지식과�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방인들도� 정죄하는� 음행을� 저지르면서도� 원통하게� 생각하지� � 아니하고� 오히

려� 교만할� 수� 있었는가?� 그들은� 그리스도의� 공동체� 속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음에도� 불구하

고� 옛� 이방인의� 생활� 습관을� 미처� 다� 버리지� 못했는지도� 모른다.그러나� 그들에게�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 괴이한� 악행� 가운데서도� 여전히� � 회개할줄� 몰랐고� 버젓이� 그리스도인� 이라는� 명분

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F.� W.� Farrar).� 그들은� 음행� 사건으로� 인하여� 적어도� 수치스러워하며,�

그들의� 공동체� 속에서� 발생한� � 불미스러운� 일들로� 인하여� 자신들을� 되돌아� 보아� 최소한� 통한히�

여기는� � 모습으로� � 주의용서와� 은혜를� 구했어야� 했다.� 여기서� '통한히� 여기지'의� 헬라어� '에펜데

사테'(* � � )는� '죽은� 자로� 인하여� 애통한다'는� 의미로� 죄에� 대한� 선자들의� 반응이어떻게야� 되는

지를� 나타낸다.� 즉� 그들은자신들이� 주장한� 자유와� 방종으로(6:12;10:23)인하여� 죄악이� 성행하게�

되었다는�공동체적인�책임을�느껴야만�했다.� � 그러나� � 그들은공동체적인�책임은�고사하고�오히려�

자신들이� 영의� 사람이� 됨으로� 말미암아� 모든� 육체적� 일들로부터� 자유하게� 되었다는� 또� 다른� 교

만과� 거짓으로� 더� 큰� 죄악을� 범하고� 있었다.� 이처럼� 형제의� 죄악을� 보고� 애통할� 수� 있는� 사랑을�

잊어버린� 교회가� 분열과� � 분쟁을� 격을� 뿐만�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추악한� 성적�

타락으로� 인하여� 고통당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바울은,� 음행한�

자에� 대해무관심� 내지� 방조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죄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만� � 가운데� 있던

고린도� 교인들을� 크게� 책망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1)그리스도인들의� � 연대적(連帶的)� 책임성과� 지체� 의식� (2)무관심과� 교만은�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을� 방해하는� � 범죄라는� 점� (3)어떠한�

죄악�가운데서도�회개의�은총을�주시는�하나님의�사랑을� � 깨달을수�있다(5절).

=====5:3�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 '떠나� � 있다'(*� ,아폰)라는표현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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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가�매우�선명하다.� 그는� 지금�고린도�지방을�떠나�제3차�전도� 여행�중에있기�때문이다.� 그리

고� '함께� � 있다'로� 번역된� 헬라어� '파론'(*� � � )은� � '곁에있다',� '가까이� 있다'� 또는� '왔다'라는� 뜻

을� 가진� '파레이미'(*� � � )의� 현재� 분사형이다.� '파레이미'는� 공관� 복음서에서� '왔다'(눅� 11:6)라는�

의미로� � 사용되었며,� 행� 17:6에서는� '이르렀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는데�본절에서는� 몸이� � 떨어져� �

있는것과는 대조적으로�영은�그들과 '함께�있다'라는� 의미로�사용되었다(골� 2:5).� � 한편'

영'이라는�표현은(*� � � ,� 토� 프뉴마티)� 바울에게� 있어서� 주로� 하나님의� � 영이라는�의미로� � 사용되

었으나(롬� 8:9;고후� 3:17;갈� 4:6)� 여기서는� 바울� � 자신의'영'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마음'(*,카르

디아)과� 동일한�의미로�사용되었다(Farrar).� � 즉� 멀리� � 떨어져� � 있는� 교회와�영으로,� 곧� 마음으로�

함께� 있음을� 의미한것이다.� 아울러� 본절의� 심각성을� 생각할때� 바울이� 영으로� 그들과� 함께� 하여�

문제를� 해결하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심정이� 강하게� 암시되어� 있다.� � � 거기� 있는� 것� 같이...이미�

판단하였노라� -� 음행한�자들에�대한� 바울의�태도는�매우단호하다.� 그는� '에고'(*� � ,� � '내가')의�강

조� 용법과� 함께� '에데'(*� � � ,� � '이미')라는� 부사와� '판단하다',� '정죄하다',� '심판하다'(*� � � ,� 크리

노)의� � 완료직설법� 능동태인� '케크리카'(*� � ,� '판단하였다')를� 사용함으로써� � 그들을향한� 심판이�

이미� 선고되었음을� 강조한다.� 한편� 헬라어� 본몬에서� '함께� 있어서'(*� � ,� 파론)라는� 말에� 이어� 다

시� 한번� 반복된� '호스� 파론'(*� � ,� � '거기있는� 것� 같이')이라는� 표현은� 판결의�순간에� 그들과� 함께�

실제로� 있었던� 것과� 같은� 확실성과� 자신이� 함께� 한� 심판의� 권위가� 다시� 번복(飜覆)될� 수� 없다는�절대성을� � 강조하고�있다.

=====5:4�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 � 바울

은� 자신의� 판단이� 독단적이거나� 판협된� 것이� 아님을� 증거하고� 그들이� � 스스로� � 모임을갖고� 자신

들의�판단에�의하여�음행한�자들을�징계할�것을� 촉구한다.� 고린도 교인들은자신들� 속에� 발

생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여야� 하며� 그곳에서� 새로운� 발전의� � 기회를� 모색� 해야한다.� 바울

은� '주� 예수의�이름'으로� 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그들에게�용기를�주고자�하였다.� 여기서� � '예수

의� 이름'과� '예수의� 능력'은� (1)일차적으로� 분열된그들을� 하나로� 모으는데� 크게� 기여할� 것이며�

(2)이차적�으로는�음행하는�자들을� � 추방할�수� 있는�용기와�힘을� 주는� 원동력이�될� 것이다.� 한편�

'너희가�함께� 모여서'의� � � 헬라어� '쉬나크덴톤'(*)은� 부정� 과거� 분사로서�그� � 일들의� � 결정을위한�

단회적� 모임을� 시사하며,� 동사� '쉬나고'(*,� '모이다')는� 그리스도인의� 집회를� 나타내는� 전문적인�

용어로� 이� 회집이�그리스도인들만의� 회집임을� 시사한다.또한�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예수의� 이름

과�능력(能力)이� 함께�한다는�것을 강조함으로써� 그들의� 판단� 기준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 있음

을� 설명하고� 음행한자에� 대한� � 징계가� 정당하고� 합법적임을� 증거하며� 나아가� 교회의� 징계는� 인

간의� 힘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권위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밝힌� 것이다(Harris).� 따라서� � 예수� 안

에서� 자신의� � 영이� 그들과� 하나되어� 이미� 그가� 판단한� 것과� 같은� 판단을� 내려줄� 것을� 바울은� 기

대하였다.

=====5:5� 사단에게� 내어� 주었으니� -� 본절은� 3절의� '판단하였노라'(*� � � ,� 케크리카)와� 연결된�

것으로서� � 연결의� � 엄숙한�조치를�가리킨다(Deissmann).� 다이스만은� '내어주다'� (*,� 파라두나이)

라는� 단어를� 이교도의� 저주� 의식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주장하여� 사단에게� 내어주는� 행위가� 저주

의� 선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내어주다'라는� 말을� 꼭� 이방인의� 저주� 의식에서� 유래된� 단어라

고� � 주장할� � 수만은없다.� 바울은� 이� 단어를� 범죄자들에� 대한� 최종적인� 선언으로서� 선포하고� 있

는� � 것이다(Lenski).� 따라서� 바울은� 교회가� 책임있는� 거룩한� 공동체로서� 그러한� 자들을� 출교시킬

것을� 권고하였다(13절).� 이러한� 표현은� 딤전� 1:20에도� 나타나는데� 그들의� 출교는� 일차적으로�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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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의� 죄악을� 심판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또한� 다른� 성도들을� 보호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고린도�

교회의�순결한�영혼들을�훼방하지� � 못하도록�교회로부터 분리하는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한편�우리는�본절에서�중요한�하나의�원리를 발견하는데� 그것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교

회는� 그리스도의� 다스림과� 보호하심� 아래� 머물러� 있는반면� 교회� 밖은� 그리스도의� 지배하심에서

떠난�사단의� � 영역이라고�생각하였다는� � 것이다(Calvin).� 따라서� � 출교는�사단에게�내어

주는� 멸망의� 극단적인� 조치로서� 그들에게있어서는� 제일� 큰� 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토록� 극단

적인� 조치가� 취해질� 수밖에� � 없었던� 것은� 세상과�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그들� 가운데�

있는� 음행이� � 얼마나심각한� 죄악이었는가� 하는� 것을� 반영해� 준다.� � � 육신은� 멸하고� 영은...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 이� 구절은� 해석상� � 어려운� � 문제를안고� 있다.� 유대교에서는� 육체의� 죽음을,�

속죄받지� 못한� 죄들을� 속죄하는� 수단으로� 취급하기도� 하였으나� 본절에서� 이와같은� 원리를� 적용

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다시� � 말해서� 육신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영혼이� 구원받는다는� 견해는�

성립될� 수� � 없다는� � 뜻이다.� 성경에는� 영과� 육이� 따로� 분리되어� 구원받거나� 멸망받는� 일에� 대하

여�전혀� 말하지않는다.� 그것들은�둘다�구원받든가�둘다�멸망하든가�해야한다(Lenski).특히� 바울은�

다른� 모든� 구절에서� 속죄는� 육신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

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본절의� 육신의� 멸망과영의� 구원은� 어떻

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칼빈(Calvin)은전반부에� 등장하는� '내어준

다'라는� 말의� 법정적,� 선언적� 의미를� 강조한다.� 다시말해서사단에게� 내어주는� 행위는� 일시적(一時的)인� 것으로서� 궁극적인� 심판과� 구원에� 선행하는� 임시� 조치라는� 뜻이다.� 음행한� 자들을� 사단에게� 내어주는� 교회의� 심판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이기� 때문에� 궁극적이며� 영원한�

그리스도의� 심판에� 의하여� 그의운명은�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참된� 사랑의�

원리인� 징계를� 나타냄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이� 다시� 그들에게� 미칠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하며�

또한� � 올바른� 징계를� 행함으로�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도록� 그들을� 도와야� 한다.한편�

바울은� '주� 예수의� 날'이라는� � 구절을� 첨가함으로써� � 그� 징계받은� 죄인들을� 주의� 백성들가운데서�

다시� 볼�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따라서� 본절에서� 범죄자에� 대한� 징계의� 목적을� 살펴볼� 수� 있

다.� 즉� 징계는� 범죄한� 영혼에� 대한� 최종적인� 심판이나� 유기가� � 아니라� 회개와� 돌이킴을� 위한� 일

시적�고난이며�구원을�전제로�하는� 하나님의�사랑의� � 배려이다.� � 본절은�특히� (1)� 범죄자를�그대

로� 방치하는� 행위는� 사랑이� 아니라� 무관심의� 소치로서� 그� � 사람을� 멸망에� 빠뜨리며� 다른� 사람들

까지� 함께� 타락케� 만드는� 범죄라는� 사실과� (2)� 참된� 징계의� 정신은� 사랑이라는� 점을� 극명하게�

교훈해�준다.

=====5:6� 너희의� � 자랑하는� 것이� � 옳지� 아니하도다� -� '자랑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우케마

'(*� � )는� 자랑하는� 표면적� 행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랑하는� 내용을의미한다.� 헬라어로� '자랑

하는� 행위'는� '카우케시스'(*)이다.� 바울이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자랑할� 것이� 없다'라고� 말한� 것

은� 단순히� 그들� 교회가� � 분열과음행으로� 가득찬� 교회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그들이� 하나님

의 은사를 가졌으며하나님의� 사랑을� 입었음에도� 그� 사랑과� 은사를�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

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은사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은사를� 죄악을

묵인하는곳에� 사용하였으며�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곡해하여� 죄악을� 용납하고� 그들과� 더

불어� 죄악에� 빠지는� 것에� 사용하였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죄악의� 행위를� 묵인하는� 것이� � 그들의�

자랑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L.� Morris).� � � 적은� 누룩이...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 누룩은�

(1)� 그리스도의� 복음(마13:33;눅� 13:21).(2)� 죄(출� 12:15;갈� 5:9)등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죄악

을� 상징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본문의� 상징적인� 표현을� 통해�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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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룩,� � 즉죄악으로부터� 구속함을� 받은� 새로운� 존재임과� 죄악의� 파급적인� 영향력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그� 모양이라도� 버려야� 할� 것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살전� � 5:22).즉� 바울은�

그들의� 자만이� 결국�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 '누룩'이라는� 하나의� 실례를� 들

어� 증명한다.� 누룩은� 아주� 작은� 미량의� 효소로� 그보다� 몇� 배나� 더큰� 반죽� 덩어리를� 발효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그� 효력은� 더욱왕성해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교회� 내

의� 범법자는� 처음에는� 그� 이웃을� � 감염시키지만� 결과적으로는� 교회� 전체를� 부패시키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갈� 5:9).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의� 지혜와� 은사에� 비하여� 악의� 요소

인�누룩이� � 작아 보였기에자만� 할�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들� 앞에� 닥친� 위협은� 결코� � 작은� �

것만은� � 아니었다.이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서로의� 지혜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 악으로부터� �

교회의순결성(純潔性)을� 유지하는�일이다(Harris).

=====5:7� �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 하나님의� 백성은� 이미� 죄로부터� 해방된� 사람들이며� � 그

리스도� 안에서� 거듭나기� 전의� 타락한�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생명을� 소유한� 사람들이다

(Calvin).특별히� 바울은� '누룩� 없는� 자이어야� 한다'는� 표현을� 하지� 않고� '누룩� 없는자'(*� � ,� 아주

모이� 온테스)라고� 선언하고있다.� 그의� 표현은� 그들이� 더� 이상� 죄의� 지배를� 받지� 아니할� 뿐만� 아

니라�그리스도�안에서�존재� 자체가� � 새로운�피조물이�되었음을�강조한다(고후5:17).� 그러므로�적

극적으로하나님의� � 명령에순종해야만� 하는� 신분임을� 상기시킨다(4:17).� 만약� 그들이� 아직� 거듭

나지� 못한� 자들이었다면� 바울은� 그들을� 향하여� 묵은� 누룩을� 제거하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

따라서누룩없는� 상태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제적인� 상태로서� 그들이� 다시� 묵은� 누룩으로� 돌아

갈� 수� 없는� 신분임을� 강조한다.� � �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 하반절은� 헬라어� 원문에서� �

'가르'(*� � � )로시작하는데� '왜냐하면'의� 뜻을� 가진� '가르'는� 왜� 묵은� 누룩을� 버려야만� 하는것인가�

하는� 문제와� 그들이� 어떻게� 누룩� 없는� 자가� 되었는가� 하는� 이유를� 암시한다.� 한� � 마디로요약하

면�그리스도께서�희생양이�되셔서�그들의�백성의�죄를� 다� 도말하셨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그리스도의�죽음은�그들을�멸망으로부터�이끌어내었으며�또한 하나님의백성으로� 세워주셨다.� 바

울은� 누룩으로� 시작된� 비유를� 유월절의� 무교병과� 유월절� � � 어린� 양이라는� 또� 다른� 비유의� 의미

에� 연결� 시키면서�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성취된� � 무교병에� 참여한� 자들은� 더� 이상� � 누룩� � 있는

떡을� � 먹지� � 않는다는� � 것을�설명하고�있다(Lenski).

=====5:8� � 우리가� 명절을�지키되...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 칼빈(Calvin)은�

이� 구절을� '영적(靈的)인� 유월절을� 지키자'� 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왜냐하면� �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새로운� 유월절의� 개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 잡히시기� 전날� 밤에� 만찬에

서� 떡을� 떼시고� 포도주를� 나누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 알고있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는� 다시� 범죄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새로운� 명절에� 참여한� 자들은� 옛� 습관의� 죄악

된� 누룩을� 가지고� 새� 덩어리에� 참여할� 수� �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새� 명절을� 지키고자� 하는�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누룩이� � 아니라� 순전함과� 진실함이라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적인� 생활

이다.� 한편� '순전함'(* � � ,� 에일리크리네이아스)은� 동기의� � 순수함을� 나타내고� '진

실함'(* ,� 알레데이아스)은� 행동의� 순수함을� 나타낸다.� 새로운� 명절은� 더이상� 종교적�

의식과�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다.� 누룩없는� 새� 명절은� � 모든� � 삶의영역에서� 거룩한� 삶으

로�드려져야�할� 성도의�순결한�삶을� 의미하는�것이다(롬12:1).그러므로�바울은� '묵은� 누룩'과� '괴

악하고� 악독한� 누룩'을� 버려야� 할� 것을� 권고한다.� 여기서� '묵은� 누룩'과�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

이란� 성도들이� 그리스도께� 속하기� � 이전에지니고� 있던� 죄의� 습성을� 가리킨다.� 그리스도�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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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어진� 성도들은� 묵은� 누룩이� 뜻하는� 음란과� 정욕,� 술취함과� � 방탕,� 연락과� � 무법한� 우상� 숭배

(엡� 4:22;벧전� 4:3)등을버리고�새� 사람으로서�영향력을�발휘해야�한다.

=====5:9� 내가� 너희에게� 쓴� 것에� -� 헬라어� '에그랖사'(*,� � '내가� 쓰다')는� 부정과거� 능동태로서�

(1)이미� 그가� 썼던� 과거의� 한� 편지를�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Calvin,Meyer,� Godet).� (2)서신서

에� 등장하는� 부정� 과거의�특징적인� 성격을�생각할� 때� � '내가지금� 쓰고� 있는� 한� 편지'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와� 같은� 견해에� 반대한다(Lenski,� Barrett,�

Morris).� 만약� 이� 편지가� 지금� 쓰고� � 있는것을� 의미한다면� 아직� 받지� 않은� 편지를� 두고� 그들이�

어떻게� 오해할� � 수가� � 있겠는가?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 편지는� 앞서� 고린도� 교회에� 보내진� 편

지로서�지금�우리에게는발견되지�않은것들�중� 하나라고�보는�것이�학자들간에�널리�알려진정 설

이다(Calvin,Meyer,� Godet,� Harris).�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쓴� 서신� 중에� 오늘날� 우리에게� � 전

해지지� 않은� 것이� 있으므로� 우리들이� 갖고� 있는� 성경이� 완전하지� � 못하다는� 말인가?� � 결코그렇

지는� 않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주시려고� 했던� 영감서인� 신� .� 구약� 66권으로� 된� 완전한� 성경을�

갖고� 있다.� 그외� 성경� 기자들의� 다른� 저작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 자연스레� 소실(消失)되거나�성경에� 수룩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1)� 의� 견해를�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Robertson).

=====5:10� � 만일� 그리� 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 많은� 사람들은� 본절이� 세상과

의분리나� 은둔을� 강조하는� 것이� 아닌� 것으로� 이해한다(Barrett,� Lenski,� L.� Morris).� 그러나� 본절

이� 세상과의� 타협과� 동화를� 뜻하는� 말이� 아님도� 기억해야만� 한다.� 바울이� 고린도에� 보낸� 서신들

의� 전체적인� 주제는� 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세상의� � 음행한� � 것들과타협함으로� 말미암아� 발생하

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 서신은� 타락한� 도시� � 고린도로부터� 어떻게� � 그리스도인들이�

구별되어�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 수� 있는가에초점을� 두고� 있다.� 하지만� 고린도� 교인들은�

사도바울의�전체적인 의도를 망각하고그들� 나름대로의� 판단에� 따라� 행동했다.� 그들은� 자

신들에게� 주어진� 바울의� 훈계가� � 너무� 지나친� 것이라고� 오해했기� 때문에� (1)� 어떤� 자들은� 오히

려� 세상과� 하나되어� 그리스도를� 포기하고자� 하는� 극단적인� 행동을� 취했으며� (2)� 또� 다른� 자들은� �

아예 세상으로부터� 떠나� 은둔과� 도피적(逃避的)인� 삶을� 선택하게� 되었다.� 또한� 그들� 중에� 일부는� 이세상과의� 구별을� 단순히� 고린도라는� 한� 도시를� 떠나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였으며�

또� 어떤자들은� 세상과의� 분리를� 은둔이나� 수도라는� 의미보다� 더� 가혹한� 죽음이라는것으로� 해석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오해들이� 세상과� 그리스도인의� � 관계를� 바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온� 것이며� 또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 자체와� 그� � 세상� 가운데� 있는� 추악한� 것들을�

바로� 구별하지�못한�데서� 발생한� � 것임을� � 발견한다(J.Calvin).� 이것은�예수께서�기도하실�때에� "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 위함이니이다"(요� 17:15)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의미로� 이해

되어야� 한다.� 따라서� 그들의� � 분리는� 음행하는� 고린도� 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로� 가는� 것도� 아니

며� 또한� � 타락한� � 도시를떠나� 다른� 곳으로� 가는� 것도� 아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악한� 본을�

보이는� � 자들과의� 관계를� 포기하는� 것이며,� 그� 관계의� 포기로� 말미암아� 초래되는� 온갖� 사회적,� �

경제적�불이익을�감수하면서도�오히려�그들의�악을� 미워하고�거룩한� � 백성으로, 살아가는고난

의� 삶을� 선택하는� 일이다(Chrysostom).� 한편� 상반절에� 나열된� 세상의� 추악한� 모습은� 음행이나�

탐심이나� 토색이나� 우상숭배라는� 서로� 다른� 형태로� 나타났지만,� 보다� � 근본적인� 문제에� 있어서�

이러한�행악(行惡)은� 온� 세상을�주관하고�있는�악한� 자,� 곧� � 공중에�권세� 잡은�자에� 의하여�발생하게�되는�문제임을�기억해야�한다(엡�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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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1� �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 � 바울은

앞절에서�나열한�악의� 종류에�두� 가지를�덧붙이고�있는데� � 하나는� '로이도로스'(* ,'후욕하는� 자')

로서� 다른� 사람에� 대한� 욕설이나� 비방을� 서슴지� 않고� � 행하는� 것이며(마� 5:22)� 또하나는� '술� 취

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일을� � 행하는� � 자들이� 형제라는� 그리스도인의� 명분을� 가지고는� 있

으나� 더� 이상� 그리스도� 안에� 있는� � 자들이� 아니라� 악한� 자의� 손에� 있는� 자들임을� 강조한다.� '사

귀지�말라'(*� � ,� 토토이우토)는� 9절에서�사용된�것과� 같이� 그들� 가운데�어울리지�말라는� � 뜻을다

시� 반복한� 것이며(엡� 5:11)� '메데� 쉬네스디에인'(*� � ,'함께� 먹지도� 말라')과� 함께� '철저하게� 관계

를� 단절할� 것'을� 요구하는� 표현이다.� 한편본절에서� '쉬네스디에인'은� 성만찬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만은� 없다.� 물론� 그들은� 당연히� 성만찬에서� 제외될� 것이다.� 그러나� 본절에서� '쉬네스디

에인'은� 보다� 일상적인� 생활속의� 자유스런� 식사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즉� � 고린도� 교인

들은� 형제라고� 일컫는� 자� 중에� 공공연히� 범죄를� 하고도� 회개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을� 때� � 그

들과의�교제를�단절할�뿐� 아니라�그들을�탈퇴시켜야�한다는�것이다.� 이것이 범죄자에게� 유

익이�될�뿐만� 아니라(5절)� 교인들을�보호할�수� 있는� 최선의�방법이기�때문이다.

=====5:12� �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너희가� 판단치� 아니하랴� -� 바울은� 앞절에서� 제시

한� 자신의� 권리가� 최선의� 방법임을� 다시� 한번� 호소� 하면서� 자신의� 판단� 범위의� 한계와고린도� 교

인들의� 의무를� 보다� 명백하게� 기록한다.� 그는� 교회밖에� 있는� 자들을� � 판단하는� 것은� 자신의

할�일이�아니라고�말하면서�고린도�교인들도�교회 밖에있는� � 자들을판단하는� 것을�

금지시킨다.� 이는� 심판의� 특권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며(13절)또한� 저들이� 이웃을� 심판하는� 일�

때문에� 그들� 역시� 범죄하기� 쉽기� 때문이다(롬� 2:1;14:4,10).그는� 성도들의� 신앙� 규범과� 행동� 원

리를�교회� 공동체�내에� 한정(限定)시키면서�그들의동료들�가운데서�발생한�문제들을�스스로�판단함으로써� 책임을� 다할� � 것을� � 강조한다.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교회� 공동체가� 범죄자를� 판단하는�

행위를� 그리스도인� 개인이� 성도의� 행위를� 판단�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Lenski).� � 왜냐하면� 교회는� 교회의� 순결성을� 유지하기� 위해� 공동체를� 훈계하고� 권징하는� 일

을� 교회적차원에서� 행하는� 것이지� 어느� 개인에게� 맡겨놓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 교회

의� 판단의� 권위와� 진실성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말씀과� 권위에� 순종할� 때� 더욱� � 명백해질� 것이다

(Barrett).

=====5:13� � 이� 악한� 사람은� 너희중에서� 내어�쫓으라� -� '악한� 자'를� 뜻하는�헬라어� � '호� 포네로

스'(*� � � )는� 한� 행악자� 개인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보다� 총체적인� 악의� 개념으로� 앞에서� 열거한�

모든� 행악자들을� 의미한다(Calvin).� 바울은� 이� 모든� 자들이� � 교회� 공동체로부터� 쫓겨나야할� 것을�

다시� 경고한다.� 교회는� 그들� 속에� 있는� 적은� 누룩을제거하지� 못할� 때에� 결국� 그� 순결성을� 잃게�

되어� 악의� 무리들이� 권세를� � 잡는� � 타락한모습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훼손되기� 때문이다.� 그

러나� 교회가� 순결성을� 지키기� � 위해� 행하는� 권징의� 의미를� 본절에� 기록된대로� 모든시대의� 교회

에� 적용한다는� 것이� 용이한�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각� 시대의� 교회마다� 다른� 상황이� 고려되어

야� 하기� 때문이다(Morris).�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시대의� 교회가� 기억해야� 할� 것은� 교회� 내의�

악의존재가� 묵인(?認)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따라서� 어느� 형태로든지� 악에� 대한� 권징의� 정당한�시행이�있어야만�한다는�것이다.� 한편� 바울은� '내어�쫓으라'(* ,� 엑사라테)는� 동사의�

주체가� 구약의� 여러� 곳에서는(신� 19:19;22:21,24;24:7)단수로�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

절에서는� 복수로� 기록함으로써� � 그리스도� � 안에있는� 그들의� 판단이� 교회� 전체에� 의하여� 행사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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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야만�한다는�사실을�시사하고�있다.� 고린도전서�제� 6장

=====6:1� � 너의� 중에...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 -

바울의� 논지는� 형제들� 가운데서� 분쟁이� 발생했을� 때� 그� 문제는� 형제들� 가운데서� � 해결해야� 한다

는� 것이다.� 유대� 랍비들도� 이러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들� 역시� 이스라엘� 공동체의� 문제는�

이방� 신에게� 소송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Hodge).� � 그러나고린도� 교회는� 복음의� 역사속

에서� 새� 이스라엘로� 부르심을� 받았으나� 아직도� 율법� 아래있는� 유대인들보다도� 못한� 수준에� 머물

러� 었었다.� 당시� 이방� 종교들이나� 사회� � 단체들조차도� 스스로� 분쟁을� 해결하는� 관행(慣行)을� 가지고�있었음에도�불구하고�고린도� � 교회가�세상� 법정에� � 송사한� �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 일

이 아닐� � 수� � 없다 (Morris,Barrett).� 또한� 그� 송사는� 부끄러운� 것일� 뿐만� 아니라� 세상�

법정의� 판결에� 따라� � 형제를� 멸시(蔑視)하고� 괴롭히는� 또� 다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 것을� �기억해야� � 한다(Calvin).� 위에서� '불의한� 자들'(*� ,� 톤� 아디콘)은� 그들의� � 재판� � 자체가완전히� 거

짓되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을� 부인하는� '세상의� 재판관'들을� 일괄적으로지칭한� 것이다.� 여기

서� 우리는� 기독교적인� 의와� 세상적인� 의의� 차이점을� 분명하게� � 볼수� 있는데� 세상적인� 의는� 인간

의� 행위나� 공로에� 그� 기반을� 두는� � 반면,� � 그리스도인의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으

로� 말미암는� 의이다(롬� 1� :� 17).� 따라서� 본절은(1)� 세상� 법에� 대한� 하나님의� 법의� 우월성과� (2)�

성도간의� 문제는� 법� � 이전에� � 신앙적차원에서� 해결해야� 할� 것임을� 교훈해� 준다.� � 한편� 칼빈

(Calvin)은� 본� � 구절을� � 성도는세상� 법정에� 절대로� 설� 수� 없다는� 견해로� 이해하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성도들� � 역시불가피한� 상황에� 따라서는� 세상� 법정에� 송사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

디까지나� 해결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모체한� 이후에� 권리를� 보호받기� 위해� 사용하는� 차선의�

방법이다.� 또한� 성도는� 세상� 법정으로부터� 출두� 명령을� 받았을� 때� 마땅히� 법정의� 순서상절차를�

따라� 출두하여� 해명(解明)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 왜냐하면� � 성도역시� 하나님� 나라의� 백성임과� 동시에� 일반� 국가� 시민으로서� 그� 책임을� 다해야� 할� 뿐만아니라� 때로는� 법의� 정당한�

보호를�받아야�하기� 때문이다(Lenski).

=====6:2� 성도가�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 '판단할'로� 번역된�헬라어� � 동사�

'크리누신'('� )은� � 미래� � 능동태로서� 세상� 끝날에� 그리스도께서� � 행하시는� 마지막� 심판에� 성도들

이� � 참여한다는� 가르침을� 반영하고� 있다(마19:28;눅22:30).이러한� 사상은� 구약성경에도� 등장하

는데� 단� 7:22은� 지극히� 높으신� 자가� 성도들의� 원한을� 들어주매� 성도들이� 나라를� 얻었다고� 미래�

사건을�예언한다.� 바울은�미래의�심판� 날에� 성도가�참여할�재판의�권위와�자랑스러움을�강조함으

로써� 불의한� 이방� 법정에� 소송을� 제기하는� 고린도� 교인의� 행위를� 책망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이� 미래에� � 누리게� 될� 세상에� 대한� � 왕권� 행사(벧전� 2:9)를� 현실에� 적용함으로써�

그� 사소한일들조차도�심판할� 능력이�없겠느냐고�반문한� 것이다.� '판단� 한다'(*� � � ,크리노)라는�말

은� 히브리적� 사고에서� '통치한다'라는� 의미로서� (1)� 현재적으로는� 성도들이� 빛된� 생활로� 세상을�

교훈하고� 복음을� 통해� 세상의� 불의를� 심판하게� 되는� � 것이며(요� 3:18-20)� (2)� 종말론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성도들이� 주와� 함께세상을� 심판하고� 왕� 노릇하게� 될� 것을� 의미

한다(계� 20:4,� Morris).

=====6:3� �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 하나의� 논지를� 향한� 그의� 수사

학적(修辭學的)� 질문은�계속�반복되고�있다.� 그는�앞절에서�사용한 수사적 표현보다더� 강

조된� 부정� 의문을� 사용함으로써� 그의� 논지가� 필연적� 결론에� 도달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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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는� 세상을� 판단할� 뿐만� 아니라� 마지막� 날에� 우리를� 보좌하는� 천사들까지도� 심판할� 수� 있는�

신분임을� 기억해야� 한다(사� 24:21;벧후� 2:4;� 유� 1:6).� � 여기서'천사'('� � � ,� 앙겔루스)란� 자기� 지

위를�지키지�아니하고�자기�처소를�떠난�천사들(유� 1:6)� 곧� 범죄한�천사들(벧후� 2� :� 4)을� 가리킨

다(히� 2:14).� 그리고� '하물며'(* � � � ,� 메티게)는� 장차� 세상과� 천사를� 판단하게� � 될� 위치에� �

있는� 성도들이� � 일상� 생활의�사소한� 일들로�인하여� 세상� 법정에� � 송사하며� � 그� 권위에� � � 굴복하

겠느냐라는�의미를�함축하고�있다.� � '세상� 일'로� 번역된�헬라어� � '비오티카'('� )는� 법정� 용어가�아

니라� '일반� 생활� 습관에서� 발생하는� 평범한� 일'� 들을� 의미하는데� � 그들은평소에� 사소한� 마찰� 정

도도�해결하지� � 못해� � 세상법정에 소송한 것으로 추추된다(Farrar).

=====6:4� � 경히� 여김을�받는� 자들을�세우느냐� -� 본절에서 문제가� 되는� � 것은� � 두� � 가지이

다.(1)� '경히� 여김을� 받는� 자'가� 누구를� 가리키느냐하는� 것이며� (2)� '세우느냐'로� 번역된'카디제테

'('� )를� 직설법으로� 쓰인� 수사� 의문문으로� 볼� 것이냐� � 아니면� 풍자적� 어조를� 띤� 명령문으로� 볼�

것이냐�하는� 문제이다.� � '카디제테'는� '카디조'(* � ,� '임명하다')의� 2인칭� 복수� 현재� 명령형

이나� 문맥상� 그� 의미는� � 의문문과� 관계된� 직설법� 동사로� 해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먼저� 명령

형으로� 해석하는� 자들은� 본절을� 다음과� 같은� 풍자적� 의미로� 해석한다.� 즉� '만일� 너희가� 세상과�

천사들을� 심판할� 위치에� 있는데도� 이러한� 세상� 사건으로� 논쟁해야� 한다면� 차라리� 교회에서� 교인

들중에�가장�경히�여김을�받는�자를� 세워� 이런�작은� 일을� 처리하도록�하라� !� '는� 의미로이해한다

(KJV,� NIV,� Godet,� Calvin,� Mare,� Bengel).� 이처럼� 명령법으로� 받을� 경우� '경히� 여김을� 받는�

자'는� 교인들� 중에� '믿음이� 약한� 자'로서� '무시� 당하는� 자'� 또는� � '어리석은� 자'로� 해석한다.� 그래

야만� 풍자적� 의미가� 강하게�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카디제테'를� 직설법� 동

사로� 이해하고자� 하는� 자들은� "너희에게� � 세상사건으로� 인한� 논쟁이� 있다면� 왜� 너희는� 그� 사건

을� 교회로부터�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에게� 맡기느냐?"라는� � 의미로� � 해석한다(RSV,� C.K.�

Barrett).� 이� 경우� � '경히� � 여김을받는� 자'는� 성도들의� 송사를� 주관하는� '세상� 법관'들을� 시사� 한

다.� 세상� 법관들이� � 아무리� 높은� 지식과� 천성적인� 미덕을� 갖추었다� 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 앞

에서� 구원받지못한� 어리석은� 자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Barrett).� 우리는� 여기서� 전자의� 해석을� �

따르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 왜냐하면� 바울이� 4� :� 8에서� � 고린도� � 교회를� � 풍자적으로평가하

고� 있는� 사실과� 전자의� 해석이� 일치할� 뿐만� 아니라� 본문의� 문맥과도� 자연스럽게어울리기� 때문이

다(Mare,� Harris).� 후자의� 해석을� 취할� 경우� 이� 문맥에서는� 고린도� 교인들이� 당시의� 재판관들을�

경멸히� 여겼다는� 증거를�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사실� 본절의� 의미를� 어느� 것으로� 취하든� 간에�

이� 말을� 한� 바울의� 근본� 의미는� 손상되지� 않는다.왜냐하면� 바울이� 이� 말을� 한� 목적은� 고린도� 교

인들을�부끄럽게�하려한� � 데 있었으니명령적인�어조든�의문문적�어조든�이� 말은� 교인들간

의� 사적� 문제를� 법정으로까지� 끌고간� 것에� 대하여� 심한� 부끄러움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따

라서� � 여기서 교훈하는바는� 경히� � 여김을� 받는� 자들이� 누구이든지� 간에� 그들이� 분쟁을� 해결

할� 수� 있는� � 정당한� 해결자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교회는� 분쟁의� 사건이� 사소한� 생활의

문제이든지� 아니면� 큰� 분쟁이든지� � 교회� � 자체� 내에서� � 공동체(共同體)의� 능력으로� 스스로� � 문제를�해결할�수�있어야�한다.

=====6:5�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 고린도� 교회의� 소송� 문제에� 대한� 바울의� 솔직한� 심정

이�토로되어�있는�본절의�뜻은� 다음과�같이� 해석할�수� 있다.� '내가� 너희에게�교인� � 중에� 경히� 여

김을� 받는� 자를� 세우라'고� 말한� 것은� 실제로� 이와� 같은� 일이� 생기기를� 바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너희가� 부끄러움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 한� 것이다(E.B.� Allo).그것은� 본� 서신의� 전반부에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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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의� 지식을� 자랑했던� 고린도� 교인들의� 자만심에� 비해현재� 그들의� 초라한� 상태를� 지적하려는� 것

으로서� '정말� 너희� 중에� 그� 분쟁을� 해결하거나� 중재할� 만한� 지혜자� � 하나� � 없느냐'라는� � 풍자적� �

� 의미를� � 담고� � 있는� � 것이다(L.Morris).� 한편� 바울이� 4� :� 14에서� '부끄럽게�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밝혔으나� 본절에서� 그� 의도를� 바꾼� 것은� 그들을� 무시하는� 듯한� 심한� 풍자를� 사

용해서라도� 법관들에게� 양도되어� 판단받는� 일들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강한� 의지� � �

때문이다.� � 사도가� 그들을� 향한� 지대한� 관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깨닫게� 하고� 반성하도록하기�

위해�사용한� 이� 면박(面駁)은� 결국� 그들을� 명예롭게�할� 것이다(J.� Calvin).� � � 판단할� 만한� -� 이에� �해당하는� � 헬라어� '디아크리나이'('� � � )는� 부정� 과거부정사로서�재판에� 대한� 판결이나�결정이라는�

의미보다는�두� 사람� 사이의� 분쟁을�중재하여�해결한다는�의미가� 더욱� 강하다(Morris).� 형제와� 형

제� 사이에� 발생한� 분쟁은� � 재판의� 판결이라는� 것보다는� 서로를� 이해하고� 협력하려는� 의지와� 조

정자의� 중재에� � 의하여� 원만하게� 해결되는� 것이� 보다� 더� 바람직하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이런�지혜자한�사람�찾지� 못했다.

=====6:6� �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 바울은� 접속사� � '카이

'('� � ,'그리고')를� 사용하여� 논리를� 점진적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 그들의� � 잘못은(2)� 그리스도인

의� 공동체� 안에서� 있을� 수� 없는� 분쟁이� 발생했다는� 것이며� (2)� 그� 분쟁을� 스스로� 해결하지� 아니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송사하였다는� 것이고� (3)� 결정적인� � 잘못은� 그� 분쟁을� 제소한� 법정이� 불

신자의�법정이라는�사실이다.� 그들은�분쟁이라는� � 잘못된�행위로부터�출발하여�형제를�이방의�법

정에까지� 고소하고� 이교도로� 하여금� � 성도를� 판단하게끔� 하는� 더� 큰� 죄를� 범하였던� 것이다.� 마

치� 적은�누룩이�온� � 떡 덩어리를부풀게� 하는� 것처럼� 그들� 가운데� 발생한� 작은� 악은� 점진적

(漸進的)으로� 성장하여� 개인과� 이웃과� 교회� 공동체� 전체를� 멍들게� 하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러므로� 바울은� 지금이라도� 악의� 연결� 고리를� 끊는다는� 의미에서� 형제와� 형제� 사이의� 분쟁

을� � 서로간에� 해결하기를� 기대한다.� 다시� 말해� 분쟁� 문제를� 꼭� 처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면� � 이

런� 일을� 충분히� 처리할� 만한� 지혜를� 가진� 교인을� 찾아서� 해결하라는� � 것이다.� � 그렇게하는� 것이�

세상의�소송을�통하여�서로�다투고�판단받는�것보다� � 훨씬� � 좋다는� � 것이다(Mare).

=====6:7� � 송사함으로...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 이들의� 송사에� 대한� 판결은� 소송을� 제기하기

이전에� 이미� 승패가� 결정되었다.�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에� 속한� 두� 형제는� 세상� 법정에제소하는� �

그� � 순간� � 모두� � 패배하고�말았던�것이다.� '허물'이라는�헬라어� '헥테마'(* � )는� 초대� 교

부들� 가운데서� '패배'라는� 의미로� 자주� 사용되었는데(Morris)� 본절에서도� 같은� 의미로� 받아들이

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것은� 도덕적� 패배이며�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공동체� 의식,� 즉� 한몸� 의

식(지체� 의식)의� 패배이기� 때문이다(롬� 12:5;엡� 4:4).� 그들은� 자신의� 이기심과� 욕망을� 채우기� 위

해� 사랑의� 원리를� 저버리고� 세상의법정을� 선택함으로써�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기를� 포기하는� 영

적� 패배를� 선택하였던� � 것이다(Harris).� 한편� '헥테마'를� '패배'가� 아닌� '허물'이나� '결점'이라는�

뜻으로� � 해석할� 경우� 그� 의미는� 송사한� 사건이� 이미� 그들의� 약점이� 되었다는� 뜻이� 될�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것이� 허물이든지� 패배이든지� 간에� 사랑과� 용서를� 저버린� 그들의� 행위가(골�

3� :13)� 그리스도인의� 삶에�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는� 의미를� 전하는� 데는� � 별다른차이가� 없다.� � �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 여기에서� 바울의�

주장은� 절정에� 달한다.� 교인들� 사이의� 문제를� 법적� 소송에� 의해서� 해결하려고� 하는� 그� 자체가�

악한� 일이며� 나아가서� 완연한� 허물이라고� 지적한� 사도는� 이제� 교인들이� 이런� 싸움에� 휩쓸려서는�

안될� 뿐만� 아니라�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를� 주거나속이기� 보다는� 차라리� 스스로� 어려운�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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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기꺼이� � 감수하는�것이� � � 낫다고� � 말한다(Mare).� 그들은�분쟁의�승리를� � 위해�송사하기�이전

에� 또다른� 방법을� 선택했어야만� 했다.� 그것은�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자신을� 희생하고� 양보하는�

것이다(마� 5:39-42).� � 그희생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손해일�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자신이�

불의한� 자가� 되는� 고통'을� 감수해야만� 하는� 양보이다.� '불의를� 당하는� 것'('� � ,� � 아디케이스데)과�

'속는� 것'('� � ,� 아포스테레이스데)에� 해당하는� 두헬라어� 동사는� 모두� 현재� 중간태로� 사용되었으나�

본절에서는� 허용적� 의미를� 띠는� 수동태에� 가깝게� 해석되어야� 한다.� � '아디케이스데'는� '부당함을�

입는',� � 또는� � '불공평한상태나�모욕을�당하는'을� 뜻하는�단어로서�공평하고�평등한�해결이� � 아니

라� � 할지라도그� 불공평을� 감수하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아포스테레이스데'는� � '강도를� � 당

하다',� '빼앗기다'를� 뜻하는� 단어로서� � 형제에게� 양보하는� 것이� 마치� 강도에게� 약탈당하는� 것과�

같은� 불이익(不利益)을� 당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양보하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자신의� 지혜와�의를� 자랑하는� 자들에게� 이러한� 원리를� 기대하는� 것은� � 쉬운� � 일이아니지만,�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명예를� 생명처럼� 여기는� 자들에게는� � 결코� � 어려운일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참된� 하나님

의� 백성은� 자신의� 이기적인� 추구보다는� 희생적인사랑의� 실천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을�삶의� 원리와�목표로�삼기� � 때문이다.

=====6:8�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저는� 너희� 형제로다� -� '저는� 너희� 형제로다'라는말

은� 교인들� 상호간에� 불의를� 행하거나� 속이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된다.� 그런데� 고린도교인들은� 형

제를� 사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인� 태도로� 형제를� 해치고모욕하는� 악을� 행하였

다.� 그들은�약탈과�보복이라는�굴레에서�벗어나지� 못함으로써�결국�그들이�한� 형제라는�사실조차�

망각하게� 되었다.� '불의를�행하고'에� 해당하는� � 헬라어� '아디케이테'('� � )와� '속이다,� 빼앗다'에� 해

당하는� � 헬라어� '아포스테레이테'('� )는� 모두� 능동태� 동사로서� 단지� 그들의� 소송이� � '방어적� 소송

'� 이상임을� 시사한다.� 소송을� 제기하는� 자나� 소송으로� 말미암아� � 고발된� � 자나이들은� 모두� 서로

를�이해하지�않음으로써�상대를�형제라고�인정하지�못하는 이교도와같은� 삶의� 수준에� 머물

러� 있었던� 것이다.� 특히� 바울이� '서로를� 형제라고� 판단하지� � 않았다'고� 표현한� 것은� 그� 당시의�

교회� 공동체� 속에서� '형제'(',� 아델포스)라는단어가� 양보와� 희생으로� 하나된� 공동체의� 일원(一員)을� 뜻하는� � 용어로� � 사용되었음을반증한다.

=====6:9� � 불의한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 알지� � 못하느냐...남색하는

자나� -� 관사없이� 사용된� '아디코이'('� � ,� '불의한� 자')는� '악을� 행하는� 집단'을� 의미한다기보다는� '

악을� 행하는� 자들의� 특성',� 곧� '악의� 성격� 때문에� 하나님의� � 나라와� 대적� 관계에� 놓여진� 자들'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불의를� 행하는� 자들이� � 교회공동체와� 같은� 또� 하나의� 집단적� 공동체를�

형성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스스로� � 행하는� 악의� 성질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동지가� 된� 자들이

다.� 그들은� 악의� 동지� 의식에� � 의해� 더욱� 하나님의� 나라와� 강한� 대조를� 이루는� 세력이� 되었으며�

또한�하나님 나라로부터� 철저하게�배척�되었다.� 본절에�기록된�다섯� 가지의�악의� 형태는� 모

두� 불의한� � 자들에게� 속한� 것으로서� 성적� 타락과� 관계된� 것들이라고� 할수� 있다.� (1)� '음란'(*� � �

,포르네이아)은�모든� 형태의�성적� 타락을�표시하는�일반적인�의미로 쓰였으며� � 자세한내용은�

5:1� 주석을� 참고하라.� (2)� '우상� 숭배'는� 당시� 이방� 신전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행위로서� 특히�

성적� 타락과� 깊은� 연관이� 있다.� 당시� 이방� 신전들은� 성적� 타락의� 본거지였기� 때문이다.� (3)� '간

음'은� 특별히� 결혼의� 신성함을� 파괴하는� 성적� 타락을� 지칭한다.� (4)� '탐색'(*� ,� 말라코스)은� 원래�

'유약한',� '여자같은'� 등의� 뜻을� � 가지고� 있다.� 혹자는� 이� 단어의� 수동적� 의미를� 강조하면서� 남자

들과� 더불어� 음행하는� 자들� 중에서� 수동적� 위치에� 있는� 상대자를� 뜻하는� 말로� 해석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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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rrett).� 여기서� 특별히� 주색(酒色)에� 빠진� 것을� 뜻하는� 말로서�동성� 연애자들을� 지칭하는� � '남색하는� 자'(*� ,� 아르세노코이테스)와� 같은� 부류의� 사람,� 곧� 자기의� 몸을� 동성� 연애자에게� 내어�

맡기는� 부끄러운� 악을� 행하는� 자들을� 뜻한다.� � � 미혹을� 받지� 말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

플라나스데'('� � � )는� 갈� 6:7에서� '스스로� 속이지� 말라'는� 뜻으로� 번역되었는데� 이러한� 표현은� 당

시의� 논쟁� 가운데서� 자주� 사용되었다(15:33;눅� 21:8;약� 1:16).� 이것은� '외부적인� 유혹에� 넘어가

지� 말라'는� 의미보다� 내부에서� 발생하는� 유혹을� 극복하라는� 뜻이� 더� � 강하다.� � 당시고린도� 교인

들은�자신들의�교만한�지혜로�도덕적�수준을� 규정하였으며,� 하나님은�거룩한�삶의� 수준을�요구하

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하나님과� 자신을� 스스로� 기만하였다.� � 다시� 말해서� 그들은� 자신을� 속이면

서�이러한�것들이�악이� 아니라고� � 스스로� � 생각하였던것이다.

=====6:10� � 도적이나...하나님의� 나라를...받지� 못하리라� -� 본절에� 기록된� 악들은� 앞절과� 약간

의� 차이가� 있는� 것들이다.� 앞절의� 행악은� 주로� 자기의� 몸을� 더럽히는� � 특성을� � 가지고있으나� 여

기서는� 주로� 이웃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종류의� 악들을� 기록하고� 있다.� � 바울은� 이들� 역시� 하나

님의�나라로부터�제외되었음을�강조한다.� � � (1)� 도적(*� � ,� 클레프타이)� -� 전문적인� 강도라기� 보

다는� '좀도둑'을� 의미한다.� � � (2)� 탐람하는�자(* � � � ,� 플레오네크타이)� -� '자기� �

욕심에� � 의하여이웃의�것을�탐하는자'를� 의미한다.� � � (3)� 술� 취하는�자(* ,� 메뒤소이)� -�

'술로� 인하여� 자신뿐만� 아니라� � 이웃들에게도� 해를� 끼치는� 자들'을� 의미한다.� � � (4)� 후욕하는� 자

(* ,� 로이도로이)� -� '남을� 비방하는�자'를� 뜻한다.� � � (5)� 토색하는�자(*

,� 하르파게스)� -� 탐람하는� 것과� 짝을� 이루는� 것으로서� 완력뿐만� 아니라� 가능한� 모든

방법을 총동원하여� � '남의� � 재산을� � 강탈하는� � 자'(extortioner)를� 의미한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당시� 고린도� 교회에� 만연하던� 죄상(罪狀)을� 지적하여� 그들의� 수치를� 자각시키고� 성도� 본연의� 사랑과� 순결의� 중요성을� � 깨우치며� 죄악을� 가지고는�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음

을�명백히�선포하고�있다.

=====6:11� �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 바울은� 고리도� 교인들의� 옛� 생활을� 회상하

고있다.� 본절은� 두� 가지� 의미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데� '있더니'('� � ,� 에테)를� � 어떤의미로� 받아들

이느냐에� 따라� 다르다.� (1)� 미완료� 과거로서� 지난� 날을� 회상하는� 것이라면� 그� 의미는� '지난� 날에�

너희는� 이방인과� 같은� 죄악에� 빠져� 있었으나'를� 뜻한다.� (2)미완료의� 반복적� 의미라면� 그� 뜻은� '

지난� 날에� 너희가� 죄악� 가운데� 있었을� 뿐만� � 아니라� 지금도� 그러한� 죄악� 가운데� 있다'라는� 의미

가� 된다.� � 후자는� � '티네스'(*,'너희� 중에')에� 의해� 지지를�받는다.� 다시� 말해서�그들� 가운데�있는�

'몇� � 사람'� � 또는'일부'(개역성경은� 번역하지� 않았음)가� 죄악을� 범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

본절은전체� 문맥� 속에서� 의미를� 재고해� 볼� 때� 전자의� 의미가� 강한� 것� 같다.� 바울은� 지금� � 죄악

들을� 나열하며� 지난날� 고린도� 교인들이� 이방인� 가운데서� 살� 때의� 죄악과� 예수� � 안에서� 얻게� 된�

새로운� 삶을�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본절의� 의미는� '너희� 중에� � 이러한� 죄에� 빠져� 있던�

자들이� 있었으나'라는� 뜻에� 더� 가까운�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 � 주� 예수� 그리스도의� � 이름� � -

이는� � 그리스도의� � 모든 인격과 사역을 포함한다(Morris).� 그리스도의� 피는� 성도

들을� 정결케� 하였으며� 그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를� � 의롭게� 하시고� 성화(聖火)의� 소망을� 갖게� 하였다.� 특별히� 본절에서� � '그리스도의� � 이름'은� '하나님의� 성령'과� 더불어�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

들이� � 영위하는�성화의� 삶의� � 원동력임을� 시사한다(롬� 8� :� 4,� 14,� 17).� � �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

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 이제는� 더� 이상� 죄악� 가운데� 묻혀� 있지� 않다는� 뜻을� 강조하기� 위하여�

헬라어� 원문은� 접속사� '알라'(*� � ,� � '그러나')를세� 번이나� 반복하고� 있다.� '씻음',� '거룩함',� '의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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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하심'을� 뜻하는� 세� � 동사� � 앞에각각� 하나씩� 기록함으로써� 주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실� 때� 일어

난� 세� 가지� 사실을� � 열거한다.� 먼저,� '씻음'에� 해당하는� 동사� '아펠루사스데'(')는� 부정� 과거중간

태로서� 죄로부터� 씻음을� 받은� 것을� 뜻한다(행� 22:16;계� 1:5).� � 보통� 신약성경에서는� � '세례를� �

받았다'는�의미를� '세례를�받았다'는�의미를�나타내는� '에밥티스데산'(* � � ,� '그들이� 세

례를� 받았다')을� 사용하여(행� 19:� 5)� � 그� � 의미를전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절에서� '아펠

루사스데'가� 세례를�뜻하는�것으로� � 받아들일�수� 있는�것은� 함께� 기록된� '예수의�이름'과� '하나님

의� 성령'� 때문이다.� 바울은세례를�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으로� 이해하며� 성령의� 사역에� 의하여�

성취되는� � 것으로해석하고�있다(행� 2:4;롬� 6:3).� 혹자는� '아펠루사스데'� 를� 중간태로�기록한�것은�

세례와� 관계가�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세례는� 세례받는� 자의� 선택과� � 고백에� � 의하여행해

지는�것이기� 때문에� 다른� 두� 동사와� 구분하였다고� 한다('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은� 모두� 부정� 과

거� 수동태로� 기록� 하고� 있다,� Bachmann).�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 보다근본적인� 예수� 그리스도

의� 은혜와� 용서하시고� 정결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동적� � 사역을망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Morris,� Barrett).� 그러므로� '아펠루사스데'는� � 중간태로쓰였으나� 본절의� 문맥상� 그� 의미는� 수동

적�의미를�강하게�담고� 있는�것으로�보아야�할것이다(Lenski).� 다음으로,� '헤기아스데테'(','거룩함

')와� '에디카이오데테'('� � ,'의롭다� 하심')는� 부정� 과거� 수동태로서� 그들이� � 의롭게� � 된것과� 거룩

하게� 된� 것은� 이미� 과거의� 시점에서� 하나님의� 주도적(主導的)인� 은혜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한편� 본� 구절에서� 주의할� 점은� 바울이� 세� 동사를� 사용하여� 그들의현재적� 신분을� 설명하고� 있지

만� 보다� 근본적인� 의미에� 있어서� 세� 단어는� 모두� � 동일한'의'의� 개념� 선상에� 있다는� 사실이다

(Calvin).� 즉,� '죄� 씻음'과� '거룩'과� '의'는� 그들의� 죄가� 아무리� 컸을지라도�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

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되었다는� 것을� 시사하며� 그들이� 새로운� 의의� 삶을� 지향하게�

된� 것을�가리키는�법정적�선언의�개념을�가진다.

=====6:12� �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 바울은� 이� 구문을� 주로� 1인칭으로� 사용하며� 그리스도� �

안에�주어진�자유를�표현할�때�사용하였다(7:17;9:19;10:23).�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이� 격

언에� 대하여� 잘못된� 편견을� 가지고� 있었으며� 결국에는� 그들의� 방종을� 정당화시키는� 방편으로� 삼

게� 되었다.� 그들이� 이러한� 격언을� 알게� 된� 것에� 대하여� 학자들은� 두� 가지의� 견해를� 주장한다.�

(1)� 바울이� 이� 서신을� 쓰기� 전에� 보냈던� 어떤� � 그들을� � 통하여알게� 되었다는� 것이다(다른� 서신

에�대한� 것은� 5:9� 주석� 참조).� 모리스(Morris)는� 바울이�고린도에�일차로�방문하였을�때� 이와� 같

은� 사상을� 가르쳤던� 것으로� 추적하며,� � � 허드(J.C.� Hurd)는� 이전� 편지의� 내용� 가운데서� 특히� 유

대주의의� 율법적� 규제와� 대조적으로� 표현된�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인용한� 것이라고� 주장한

다.� (2)� � 이러한� � 격언이고린도의� 영지주의자들� 속에서� 이미� 통용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 영지주

의자들은� 물질과� 육체를� 경시함으로써�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격언을� 육체의� 방종과� 잘못된�

결혼생활에� 적용하였던� 것이다(Barrett,� A.� Schlatter).� 한편� 바레트는� 바울이� 이미� � 언급한� 자유

를� 영지주의자들이�도용했을�가능성에� 대해서�개연성(蓋然性)을� � 부여하고� � 있다.� 그러나�분명한�사실은� 그들이� 이� 격언을� 어떤� 방편으로� 알게� 되였든지� 간에� � 그들은� 격언의�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했으며� � 잘못된� 곳에� 사용하고� 있었다는� � 사실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다는� � 의미로� 이해한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에� 의해� 판단

되어야� 한다.� (1)� 그� 일이� � 과연� � 내게유익한가?� (2)� 일에� 이끌려� 참여함으로써� 다른� 이에게� 어

떤� 영향을�주는가? � (3)� � 그일이� 교회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어떠한� 역할을� 담당

하게� 되는가?� � �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자유가� 곧� 무책임을� 뜻하지는� �

않는다.� � 율법은� '칭의'의� 수단으로서의� 기능은� 상실했으나� 여전히� 존재하며� � � 그리스도인들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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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규범을� 따라� 살�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이라는� 개념으로� 새롭게�

다가온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범죄한� 자들을� 내버려둘� 수� � 있는� 자유를� 가진�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들을� 사랑해야� 하는� 새로운� 진리를� � 가지게된다.� 율법에�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살지만�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 백성으로서� 덕을� 세워야� 하며(8:1)� 자유를� 통하여�

진실과� 사랑을� 실천�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방종이� 아니라� 방종을� 다스리는�

자유이기�때문이다.

=====6:13�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 이것� 역시� 12절의� 격언과� � 같이� � 고린

도교인들이�이미�알고� 있는�표현이라고�할� 수� 있다.� 바울은�먹는�것은� 육체의 본능이기때문

에� 앞의� 구절과� � 같이�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다는� 뜻으로� 이� 말을� 사용하고� � 있다.다시� 말해서�

우상에게� 바친� 음식이라� 할지라도� 몸을� 위하여� 또는� 식욕의� 본능을� � 채우기� 위하여� 믿음으로� 먹

을� 수� 있다는� 것이다(8:8;10:25).� 그런데� 당시� � 고린도� � 교인들중에는� 이� 격언을� 엉뚱한� 곳에�

적용시키는� 자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식물을� � 먹는� 것이� 육체적� 본능이듯이� 성적� 욕구를�

채우는� 것도� 육체적� 본능의� 발로라고� � 주장하며� 그들의� 성적인� 타락과� 방종을� 정당화시키려� 하

였다(Barrett).� 그러나�바울은� � 이러한�태도와�주장을� 단호히�거부한다.� 왜냐하면�먹는�것과� 성적

인� 욕구는� � 잠깐� � 있다가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모두� 폐하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로� 새롭게� 태어난� 몸은� 오직�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따라� 행하며� 거룩한� 생활� 가운데서� 주를� 영

화롭게해야�하기� 때문이다.� 이처럼�성도는�자신의� 몸이� 하나님을�향한�헌신의� 도구임을�자각해야�

하며,� 또한� 그� 헌신뿐만� 아니라� 모든� 육체적� 생활조차도� 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는� 것을� 기억

해야�한다.

=====6:14� 주를� 다시� 살리셨고...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 바울은� 성도의� 육체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따라� 함께� 부활할� 것을� 강조함으로써� 육체를� 경시하여� 성적인� 방종에� 빠진� � 자들을� 경고

한다.� 바울은�예수의�부활을�부정� 과거�시상으로�기록함으로써(* � � � ,에게이렌,� '살리셨고

')� 부활이� 역사적� 사건으로서� 이미� 단회적으로� 성취되었음을� 시사한� 반면� 성도의� 부활사건은� 미

래�시상으로�기록하여(* � ,� 엑세게레이,� '살리시리라')� 죄로� 인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우

리를�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 살리실� 것을� 나타내고� 있다.� � 이는� 초대�

교회에서� 이미� � 그리스도의부활� 사상이� 교리화되었으며� 고린도� 교인들도� 예수의� 부활� 사건에� 대

하여�믿고� 있음을시사한다.� 예수의�부활은�단순동사(* ,� 에게이로)로� 기록한� 반면� 성도의� � 부활

은�합성�동사(* ,� 엑세게이로)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부활의� 질적인� 차이를� 나타내기� 위한� 것

이라기� 보다는� 부패하지� 않은� 그리스도의� 몸과,� 흙으로� � 돌아가서� 무덤� 속에서� 부패하고� 썩어�

문드러진�인간의�육신(肉身)을� 구별하기�위한�표현이라고�할� 수� 있다(Lenski).� 여기서�전치사인� '에크'(*� � � ,� '...부터',� '...밖으로')는� 죽음의� 무덤으로부터� 우리를� � 부활시켜� 구원하실� 하나님의�

능력을�암시한다.

=====6:15�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 몸을� 아무렇게나�방치할� 수� 없

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이기� 때문이다.� '지체'(*� � � ,� 멜레)라는� 말은� 손,�

발� 등과�같은� 신체의�일부를�가리킬�때� � 사용하는� � 일반적인 용어로서다른� 곳에서는� 그리스도

의� 몸으로서의� 교회� 연합체를� 설명할� � 때� � 자주� � 사용� � 되었다(12:12;엡� 5:23).� 본절에서는� 그

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과� 연합한� � 성도는� � 그리스도의� � 일부라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

창기와� 더불어� 음란한� 육체적� 방종에� 빠져� 스스로� 그리스도의� 지체이기를� 거부하는� 자들에게�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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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를� 주고� 있다.� 이는� 13절에서� � 언급한� '주와� 몸'의� 관계를�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한� 것으로서�

지체된� 몸의� 일부는� �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지시에� 따라� 주를� 위하여� 사용되고� 움직여져야� 한다

는� � 것을� � 강조한다.� � �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 이는�강조� 어구(* ,� 메� 게노이토)

로서� � 신약성경에서�주로�바울이�사용하였으나�본서에서는�여기에서만�등장한다.� 고린도� � 교인들

중에는� 창기와� 더불어� 방탕(放蕩)한� 생활을� 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지체로부터� 제거되기를� 거부한�자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두� 주인을� 섬기려는� 자들에� 대한� 바울의� 태도는� 너무나� 단호하

다.� 결코� 그리스도와�창기를�겸하여�섬길� 수� 없기� 때문이다.

=====6:16� � 창기와� 합하는� 자는...둘이� 한� 육체가� 된다� -� 바울은� 창� 2� :24에� 기록된� 부부의�

성적� 결합에� 대한� 표현을� 인용함으로써� 창기와� 더불어� 음란한� 방종에� 빠진� 자들이� � 그들과� 한�

몸이� 되어� 창기와�같은� 신분이�되었음을�시사한다.� 즉� '합한다'(*,콜로메노스)와� '한� 몸'(*� � � ,� 헨�

소마)이라는�표현은� 그들이�성적� 행위를� � 통하여� '하나의�신분',� 또는� '같은� 범죄',� '더� 나아가� 동

일한� 멸망'에� 처하게� � 되었다는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들은� 타락한� 육체와� 연합함으로써� 그리스

도의�생명으로부터�분리되어�더� 이상�그리스도의�통제를�받지� 않는� 죄악의�종이� 되어�버렸다.

=====6:17�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 주제는� '몸의� 연합'에서� '영의� 연합'으로� � 옮겨진

다.� 즉� 창기와� 합한자는� 창기와� 한몸이지만� 주님과� 합한� 자는� 영적으로� 주님과� 하나가된� 자라는�

것이다.� 이는� 성적� 타락으로�더럽혀진�죄악의�상태와�성도의�거룩한�신분을선명하게� � 대조시킴으

로써� 고린도� 교인들의� 성적� 부도덕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고� 성도들의� 참된� 지향점은� 그리스도

와� 합하여� 거룩한� 삶을� 살아나가는� 것임을� � 암시해� � 준다.� � � 여기서� � 바울은� � 주와� � '합한다'는� �

것도� � 앞절과� � 같은� � 분사� � '콜로메노스'(* � )를� 사용하고� 있다.� 이처럼� '영'의� 연합을� 몸의� 연

합과� 같은� 선명한� � 표현으로� 묘사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사역� 때문이다.� � 성령은� 성도들이� 영

적으로� �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해주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

그몸과� 영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신비적� 연합을� 이룸으로써� 모든� 삶의� 영역에서� � 그리스도

의� 거룩한� 인격을� 닮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엡� 4:13).� 그리고� 신비적� � 연합을통하여� '한� 영이�

된다'는� 것은� 성도의� 영이� 그리스도에게� 흡수된다거나� 또는� 그리스도의� 영과� 성도의� 영이� 혼합�

내지는�융화된다는�것이�아니다.� 이는� � 양자(兩者)의� � 영이어느� 하나의�특성을�무시하지�않는�인격적�연합을�이룸을�의미한다(Lenski).

=====6:18� 음행을� 피하라� -� 바울은� 몇� 가지의� 비유적인� 표현을� 마무리하면서� 접속사를� 사용하

지� � 않고� � 갑작스럽게� � 명령형을 사용한다.� � '피하라'에� 해당하는�헬라어� '퓨게테'(* � )는�

복수� 현재� 명령형으로� 한순간의� 도피나� 연기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찾아오는� 음행의�

유혹으로부터� 철저하게�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음행으로가득찬� 고린도� 도시� 속에서� 이러한�

유혹으로부터� 떠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 아닐� 것이다.� 그것은� 과거의� 한� 순간에� 거부했던� 것만

으로� 안심할� 수� 없으며� 미래의� 생활� � 속에서도� 안심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음행을�

피하라'� 는� 것은� 그� 유혹이� 있을때마다� 강하게� 거부할� 수� 있는� 현재적(現在的)인� 행동을� 요구한다.� � �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 바울은� 여기서� � '몸'(*� ,� 소마)이라는� 말과�

'죄'(*� ,� 하마르테마)라는� 단어를� 특이하게� 사용하고� � 있다.여기서� '몸'은� 단순한� 육체를� 뜻하지�

않는다.� 그는� '썩어� 없어질� 육체'� � 를� � 의미하는'사륵스'(*� � � )� 대신� '소마'를� 사용하고� 있다

(Lenski).� 이는� 음행이� 단순히� � 육체에� 행하는� 자해적인� 것� 이상으로� 인간의� 전인격을� 손상시키

는� 치명적�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시사한다.� � 일반적으로� '죄'는� '하마르티아'(*)라는� 단어를�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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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하지만� 본절에서� 바울은� '하마르테마'를� 사용하여� 죄의� 행위� 자체보다는� 그� 죄로� 인하여� 초래

될�결과,� 즉� 인간의�생명� 작용까지도�악화시키고�타락시키는�것을�강조하고�있다(Morris).

=====6:19� � 너희�몸은...성령의...알지�못하느냐� -� 바울은�본장의�논쟁에서 여섯번째� � 질

문을던지고� 있다.� 그는� 3:16에서� 복수('너희')를� 사용하여�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과�그�공동체�속에�성령이�거하신다는�점을�말한� 바� �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몸'을� 단수로�

사용함으로써� 성도� 개인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과� 개인의� 인격� 속에성령이� 거하신다는� 것을�

강조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전으로서� 각각의� � 그리스도인들은거룩한� 하나님의� 전에� 적합하지� 않

은�행위들을�삼가해야�한다.� 이것은�비단 음행이라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부분에� 있어서� 적

합하지�않은�행동은�절제되어야�한다는� � 것도포함한다.� 왜냐하면�그리스도인은�자신의�모든� 인격

을� 포함해서� 자신의� � 몸을� � 성령이거하시는� 거룩한� 처소(處所)로�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Mare).

=====6:20� �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 이는�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19절)고� 말한� � 이

유를� 제시하는� 것으로서� �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 몸을� 타락시키거나� 함부로� 사용할� � 권리를� 가지

고�있지�않다는�것을�잘�보여주고�있다.� 여기서� '산� 것이�되었다'(* ,� 에고라스데

테)는� 것은� 일반적으로� 부장에서� 어떤� 물건을� 사기� 위해그에� 맞는� '값(*� � ,� 티메스)을� 지불했다'

는� 뜻이나� 본절에서는� (1)� � 수동태로서� 누군가에� 의하여� '저희가� 산� 바�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며�

(2)� 부정� 과거로서� 그� 행위가� 과거의� 단회적(單回的)인� 사건에� 의하여� 성취되었음을� 시사한다.�여기서� � 바울은갈보리� 십자가에서� 죄의� 노예가� 된� 인간을� 위하여� 죽으셨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염두에� 두고� 있다.� 그리스도는� '죽음'이라는� 고귀한� 값을� 치르고� � 죄인들에게� � 자유를허락�

하셨다.� 따라서�구속받은�백성은�이제� 그리스도의�소유물로서 그속에서� � 자유를누리며� 하나님

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추구하여야� 한다.� 한편� '티메스'라는� 표현은� � 본절에서� 두� 가지를� 강조한

다.� (1)� 그� 가치가� 비싸다는� 것과� (2)� 값이� 공정한� 거래의� 대가로서� 정당하게� 주어졌기� 때문에�

또� 다른� 값이� 요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 이는� 18절의� 부정적인� 명

령형과는� 달리� 적극적이며� 진취적인� 성도의� 행위를� 요구하는� 명령이다.� 성도는� 죄악을� 피해다니

며�죄를�안�짓는� 소극적�차원에�머물러�있지� 아니하고�이제�적극적으로�하나님의�영광을 추 구

하는� � 긴장된삶을� 통하여� 죄악의� 세력으로부터� 승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 바

울은'몸'이라는� 단어를� 육체적인� 것� 뿐만� 아니라� 인간의� 전인격적인� 모든� � 것을� � 포함하는용어로�

사용함으로써� 인간의� 전인격인� 모든�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여야� 함을� 강조한다.� 고린도전

서�제� 7장

=====7:1� � 너희의�쓴� 말에� 대하여는� -� 이와� 유사한� 구절들은� 어떤� 특정한�주제를� � 도입할� � 때

사용되었다(25절;8:1;12:1;16:1,� 12� 등).� 또한� 이것은� 고린도인들이� 바울에게� 이와� 비슷한� 주제

들에� 대하여� 질문하는�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5� :� � 9� � 주석참조).� 아마도� 사도

와� 고린도� 교인들은� 본서신이� 씌어지기� 전에� 서로의� � 소식을� � 주고받는� 서신을� 교환(交換)했던�것으로� 추측된다.� � �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 이� 말은� 먼저� 보낸� 서신에서� 고린

도� 교인들이� 썼던� 내용일� 수도� 있고� 바울이� 언급한� 적이� 있는� 주제일� 수도� 있다.� 당시� 고린도교

인들은� 영지주의의� 영향으로� 금욕주의에� 물들어� 있거나� 이와� 반대로� 쾌락주의에� � 빠져� 있었을�

것인데(Farrar),� 만약� 금욕주의자라면� 그들은� '가까이� 하는� 것이� � 좋지� � 않다'라고� 주장했을� 것이

며,� 쾌락주의자였다면� '가까이�하는� 것'이라는�말의� 의미를� � 성적인�방종으로� 이해하였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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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바울은� 본절에서� 혼인을� 금하는� 것과� � 같은이단� 종파의� 교리(딤전� 4:3)를� 지지하지� 않으

며� 방종을� 허락하지도� 않는다.� 한편� � '가까이� 함'(*� � � ,� 하프테스다이)은� '성적� 관계를� 갖는다'는�

말을� � 완곡하게표현한� 것으로� 합법적인� 결혼을� 뜻한다(Morris).� 그러나� 본절에서� 바울이� 결혼에�

대하여� 반대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남자가� 여자에게� 가까이� � 하는� � 결혼그� 자

체를�나쁘거나�죄악스러운�것으로�취급할�수는�없기� 때문이다(Calvin).

=====7:2� 음행의�연고로� -� 앞절이�결혼에�대한� 근본적인�반대의�표현이�아님이�곧 증 명

되었다.� 바울은�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 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일부� 고린도� 교인들에

게� 결혼의� 합리성을� 피력한다.� 본� 구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 타스� 포르네이아스'(*� )는� 문자

적으로� '음행하는� 일들이� 생기게� 때문에'라는의미이다.� 바울은� 결혼을� 음행(淫行)을� 피하기� 위한�수단으로�제시하지만,� 이것이� � 결혼을�권장하는�유일하고�절대적인�이유는�아니다. 바 울

은�타락하고�음란한 고린도의일반� 생활� 문화로부터� 어떻게� 그들� 자신을� 거룩하게� 유지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 말하고� 있다(Morris).� 따라서� 본절은� 칼빈(Calvin)의� 말대로� 결혼이� 꼭� 필

요한� 자들을� � 위한� 것이다.� � �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 일반적인� 원리이다.� � 라이트푸트

(Lightfoot)는� � 이것을� 일부� 일처제에� 대한� 규정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전체적인� 문맥이� 일

부� � 일처제를� 설명하기� 위한� 논지는�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 바울은� 타락한� � 고린도에서� � 순결

을지키며� 도덕적� 질서를� 유지� 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 뜻이� � 결코결혼을�

음행이나� 간음을� 방지하는� 수단으로� 삼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인간의� 욕망� 속에� 항상� 존

재하는� 정욕을� 하나님이� 제정하신� 결혼� 제도� 내에서� 충족시키지� � 않으면� 불법적인� 음행에� 빠질�

것을� 염려하고� 있다.� 따라서� 한� 여자와� 한� 남자의� 결혼은� 영적� 원리에� 근거한� 현실적이고� 실제

적이며�육체적인�결합이라고�할� 수� 있다(Barrett).

=====7:3� 의무를�다하고� -� '의무'의� 헬라어� '오페일렌'(*� � )은� '빚',� '채무'를� 뜻하며�본절에서는�

부부가� 서로에게� 져야� 할� '의무',� 특히� 성생활에서의� � 의무를� � 뜻한다.'다하고'의� � 헬라어� � '아포

디도토'(*� � ,� '다하라')는� '아포디도미'(* � � )의� 명령형으로� 단순한� 권고가� 아니라�

강제적인�명령으로서�충실한책임�수행을�요구하고�있다.� 이는� 당시의�고린도�교인들이�올바른�부

부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서로에� 대한� 무관심과� 비도덕적인� 음행을� 자행함으로� 결혼의� 고귀한�

가치를망각한�자들이�많았음을�시사한다.

=====7:4� 본절은�개역� 성경을�따를� 경우� 마치� 3절의�이유인듯� � 느껴진다. 그리고 카 우

프만(Kaufmann)같은� 학자는,� 본절을� 1-3절에� 기록된� 긴급조치에� 대한� 설명으로� � 보고� � 5절이

하의� 인구조사는� 이방인과의� � 결혼을� 금지시킨� 에스라의� 개혁� 조치(스� 10장)와� 관련시켜� 이해되

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본절과� 5절� 이하� 내용과는�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

러나� 사실상� 본절은� 느헤미야가� 5절� 이하에서� 인구� 조사하게� � 된이유에� 해당된다(Williamson,�

Fensham,� Myers).� 즉�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거민의� � 수효가� 극히� 적었던� 관계로� 전체� 귀환자의�

현황을� 조사하여� 예루살렘으로� 이주� 시킴으로써방어상의� 취약점을� 보강하고자� 했다고� 볼� 수� 있

다(11:-36).� � 자기�몸을� 주장하지�못하고� -� 의무의�이행은�남편과�아내� 각자에게�요구되는� � 것으

로� 제시한다.� � 부부는� 상호� 책임적인� 관계에� � 있기� 때문에� 자기� 몸에� 대한� 자기� � 주장을� 하지�

않고� 배우자와의� 합당한� 관계� 속에서� 정상적인� 성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 것이다.� 그래서� 부부는�

자신의� 몸을� 전적으로� 자기� 의사에� 따라� 사용할� 수� 없다.� � 순결(純潔)한� 결혼� 생활은� 부부의� 평등한� 의무가� 항상� 행해질� 때� 유지될� 수� 있는� 것이며� 부부의� 권리도� 그� 의무� 속에서� 동등하고�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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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적으로�요구될�수� 있을� 것이다.

=====7:5막� 표현되었다.� 당시의�고린도�교인들이�금욕주의의�영향을�받아 성관계를� � 부

정한것으로� 여겨� 부부� 간에� 지켜야� 할�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거나,� 사도� 바울을� � 추종하

여�결혼은�했어도�혼자� 사는� 것처럼�절제하는�사람들이�있었을�것이다. '분방(奔放)하지� 말라'에�해당하는� 헬라어� '메아포스테레이테'(')는� � '빼앗지� � 말라'� 또는� '강탈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이�

명령형은� 보다� 일반적인� � 표현으로서� � 부부사이의� 권리나,� 의무를� 빼앗지�말라는� 것이다(Farrar).�

즉� 부부가� 서로에� 대해� 가지고있는� 권리와� 의무를� 지키라는� 것이다.� � 바울은� 때때로� 아내가� 싫

어지는� 약점을� 간파하여� 서로간의� 의무를� 사려깊게� 다루고� 있다(Calvin).� 결국� 본문은� 부부� 간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라는� 명령으로� 금욕� 주의에� 빠지지� 않게� 하고,� 이로� 인해� 시험에� 들지� � 않

게� 하려는�것으로�보인다.� � � 기도할�틈을� 얻기� 위하여�합의상�얼마� 동안은�하되� -� 부부가�분방할�

수� 있는� � 경우를�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기도하는� 틈을� 얻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이� 표현은� � 기

도할때는� 언제나� 분방해야� 된다는� 것이나� 기도하는� 동안은� 절대로� 부부� 생활을� 해서는� � 안된다

는 �의미는� � 아니다.� � '틈을� � 얻기� � 위하여'라고� � 번역된� � '히나� � 스콜라세테'(*

)는� '몰두할�수� 있는� 여가를�얻기� 위하여'라는�뜻이며� 이는� 일상적인기도라기� 보다는�집

중적인� 노력을� � 필요로� � 하는� � 기도를� � 염두에� � 둔� � 것이다.� � 칼빈(Calvin)은� 이러한� 기도가� '재

난'이나� '진노의� 날'� 또는� '매우� 어려운� 문제'� 등을� � 결정해야� 할� 때�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이러한�기도의�기간은�한정되어�있으며�그것은�또한�부부의�합의하에�행해져야�한다.

=====7:6� � 내가� 이� 말을� 함은� 권도요� 명령은� 아니라� -� '권도'(',� � 슁그노멘)라는말은� 신약성경

에서는� 본절에만� 나오는� 고대� 단어로� '용서'� 또는� '양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Robertson).� 바

울은� 교회� 공동체� 속에서� 같은� 동료로서� 자기의� 의견을� � 피력하고� 있는� 것이지� 종속� 관계� 속에

서� 명령하고� 있지� 않다.� � 이것은� 곧� 공동체의� 질서를추구하는� 그의� 사랑의� 표현�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권도'가� 무엇에� 대한� 것인가� 하는� 문제는� 쉽지� 않다.� 그것은� '이� 말을� 함'이

라는� 것이� 무엇을� 지시하고� � 있는가�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이에� 대한� 견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 하나는� 앞� 부분에� 서술한� 모든� 부부� 생활에� 대한� 의무를� � 지시할� � 수도

있으며(Barrett),(2)� 하나는� 다음� 절에� 기록된� 것과� 같이� 결혼이냐� 독신이냐� 하는� 문제

에� 대해� 그가� 제시하는� 견해일� 수도� 있다(Farrar).� 전자를� 주장하는� 자는� 보다� 구체적으로는� 5절�

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기도하기� 위하여� 분방하는� � 것이나또는�

잠시� 후에� 서로� 다시� 합하는� 것이� 명령이� 아니요� 권도라는� 것이다.� 후자를� � 주장하는� 자는� 자신

과� 같이� 독신으로� 지내기를� 원하는� 바울의� 소신(所信)이� 권도이지� 명령이� 아니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다시� 말해서�부부� 생활에�대한� 명령은� � 모두 강조적인요구라고�할� 수� 있으나� 결혼에�대

한� 견해,� 즉� 결혼을�할�것이냐�독신으로�살� 것이냐에대한�견해는�권도라는�주장이다. 사 실�

성경에� 제시된� 결혼의� 질서를� 생각해� 볼� 때� 부부에� 대한� 의무를� 단순한� 권고로� 이해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따라서� � 본절에� � 제시된그의� 권도는� 후자를� 향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보다� 바람직

할� 것� 같다.� 그는� 결혼한� 사람의� 의무에� 대하여� 논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Morris).� 그

러나� 바울이� � 자신의� 주장에� 대한� 겸손의� 표현으로� '권도'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고� 가정했을� �

때� � '이말'은� 바울이�제시한�모든� 복음적�내용들을�지시할�수도�있다는�것을�인정해야�한다.

=====7:7� 나는� 모든�사람이�나와�같기를�원하노라� -� 이것이야말로�결코�명령이�될 수� �

없는'권고'요� '하나의� 견해'라고� 할� 수� 있다.� � 이는� 또한� 당시의� 박해와� 시련� 속에서� 그리스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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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박한� 재림을� 고대하는� 심각한�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구절이다.� � 본절의� 문자적인� 뜻은�

'나와� 같이� 결혼하지� 않은� 사람으로� 있기를� 바란다'는� 간절한� � 요청이지만� 광의적인� 의미에서� 그�

뜻은� 다음� 구문과� 연결하여� 생각해� 보아야� 한다.� � �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

각� 사람은�하나님께서�각자자신들에게� 베풀어주신� 은사를� 따라� 결혼하거나� 독신� 생활을� 영위하

게� � 된다.� 이는� 바울과� � 같은� 독신의� 삶이� 하나님께서� 주신� 독특한� 은사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

러나� � 이� � 은사를받지� 못한� 자는� 결혼해야� 한다.� 그렇다고� 결혼의� 은사를� 받은� 자만� 결혼을� 해

야� �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결혼이나� 독신은� 하나님께서� 각� 자에게� 주시는� 선물로서� 하나님� 편

에서� 그것은� 언제나� 동일한� 은사이다.� 결혼이� 완전한� 결혼으로서� 육체적인� 욕구가� � 충족되어야�

하듯이� 독신도� 완전하고� 성결한� 삶으로서� 영위되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 것은� 어떠한� 삶의� 형

태를�취하든지�음욕의�유혹으로부터�그들의�거룩한� 신분을�보존시켜야�한다는�점이다.� 한� 사람은�

결혼이라는� 은사를� 통해서� 또� 다른사람은� 독신이라는� 은사를� 통해서� 순결한� 삶을� 유지할� 때� 비

로소� '바울과� 같이� 살았다'라고� 말할� � 수� � 있을것이다.� 따라서� 독신의� 삶이� 순결을� 보장해� 주지�

못하는� 타락한� 고린도의� � 상황속에서'나와� 같기를'� 바란다� 라고� 말한� 바울의� 표현은� 결혼이냐� 독

신이냐� 하는� 선택의� � 문제를� 의미한다기보다는� 실제적인� 삶에서� 음란한� 유혹으로부터� 순결을� 유

지했던� 삶의� � 모범을� 본받으라고� 하는� 말이다.� � 따라서� � 결혼한� 자들이� 바울을� 본받는다는� 것은� �

무질서한�방종으로부터�결혼의�순결을�유지하는�것이라고�할� 수� 있다.

=====7:8� �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 본절의� '나와� 같이'라는� 표현은� 앞절의� 광

의적인� 의미와는� 달리� 보다� 개인적인� 의미로서� 독신의� 모든� 자들에게� � 요구되는� � 것이아니라� 특

수한� 부류의� 사람들에게만� 제한된다.� 그의� 요구는� 앞절과� 같은� 적극적인� � 요청이� 아니다.� 그는�

단지� 그들이� 현재� 있는� 상태� 그대로� 있으라고� 충고한다.� 혹자는� 이와� 같이� 그대로� 있기를� 바라

는� 바울의� 위치를� 홀아비와� 같은� � 상황이라고� � 이해하기도한다(Barrett).� 이에� 대한� 근거로는�

(1)� 결혼이� 유대인들에게는� 의무적인� � 규례였다는것과� (2)� 그가� 한때� 산헤드린의� 회원으로서� 투

표를� 하였다는� 점이다(행� 26:10).� � 만약그가� 실제� 산헤드린의� 회원이었다면� 그는� 틀림없이� 결혼

을�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 산헤드린의� 회원은�반드시� 결혼을�한� 자들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3)� 또한� 본절에서'혼인하지� 아니한� 자'(*,� 아가모이스)는� 남성� 복수로서� '과부'(*� � � ,케라이스)라

는� 말과� 동격이며� 그� 뜻은� '홀아비'라는� 주장이다.� 다시� 말해서� 바울이� 홀아비들과� 과부들에게�

나와�같이� 그냥� 있으라고�말한�것으로� 보아� 그는� 결혼한�적이� 있는� 홀아비라는�것이다.� 그러나� '

아가모스'(*� )는� 헬라어의� � 관용적인� � 특성상남녀� 모두를� 포함� 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염두에� 둘� 때� 이러한� 해석은� 불가능하며,� 또한� '아가모스'는� 32절에서� 단순히� '장가가지� 아니한�

사람'을� 뜻하는� 말로� � 사용된� 것으로� 보아� '홀아비'라는� 해석은� 더욱� 불가능하다.� 혹자는� 이러한�

난제를� � 극복하기� 위하여� 바울이� 결혼했으나� 지금은� 결혼하지� 않은� 자와� 같은� 상태에� 있다는� �

현재적�의미를� 강조하기도�한다(Farrar).� 그는� 바울이�알롄산드리아의�클레멘트,� 루터� � 등과� 같이�

상처(喪妻)한� 이후에� 혼자� 지내게� 되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초대� 교부들(Tertullian,�Jerome)과� 칼빈은� 이와� 같은� 바울의� 결혼설에� 대하여� 단호히� 부정한다.� 칼빈(Calvin)은� 만약� 그

가� 결혼한� 사람이었다면,� 아내와� 자식들을� 아무렇게나� � 팽개쳐� 놓고서� 어떻게� 부부에� 대한� 의무

와� 가정에� 대한� 질서와� 사랑을� 그토록� 고조된� 표현으로� 강조할� 수� 있었겠느냐고� 반문하며� 바울

이� 율법주의자들과� 같이� 스스로는� � 질수없는� 법들을� 이웃들에게만� 강요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

이라고�한다.

=====7:9� �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 바울은� 성적인� 욕구� 그� 자체를� � 금욕주의자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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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금지하지� 않는다(Morris).� 그렇다고� 해서� 결혼� 그� 자체를� 욕망의� 도피처로� � 삼지도� 않는다.�

그는� 각자에게� 주어진� 은사를� 최대한으로� 존중한다.� � �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 -� '나으니라'의�

헬라어� '크레잎톤'(*� � )은� 독신보다� 결혼이� 더� 낫다거나� 결혼보다� 독신이� 더� 낫다라는� 뜻이� 아니

라� 하나님께서� � 자기에게� 주신� 은사의� 분량에� 순종하는� 것이� 제일� 낫다는� 의미이다.� 한편� '절제

한다'는� 것과'불같이� 탄다'는� 말은�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는데� '절제'(*,엥크라튜온타이)는� '스스

로를�제어하는� 것'을� 의미하며� '불같이�타는� 것'은� 실제적인� 욕망에는굴복하지� 않았다�할지라도� '

내적으로는� 욕망이�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것'을� � 의미한다.만약� 이� 솟아오르는� 욕망을� 바울과� 같

이� 절제할�수� 있다면�우리는�그것을�하나님의�은사라고�불러야�할�것이다.

=====7:10,11� � 갈리지� 말고...버리지� 말라� -� 결혼한� 자들에게� 주어진� 절대적인� 명령은� 서로� �

이혼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이미� 선언� 하신� 것으로서(마� 19:4-9)� 음행한� 연고외에

는� 절대로� 이혼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설령� 그� 이유가� 모세� 율법에� 기록된방식을� 따른다�

할지라도� 이혼은� 블가능하다.� 물론� 본절의� 배경이� 부부가� 모두� � 그리스도인인� 것을� 전제로� 하고�

있지만� 이� 윤리는� 창조� 질서로서� 모든� 인류에게� � 적용되어야하는� 법칙이다.� 한편� '갈리지� 말고'

에� 해당하는�헬라어� '메� 코리스데나이'(* )는� 수동태� 부정사로서� '분리되어지지� 말

라'는� 의미이다.� 이혼에� � 대한� 여자의� 능동적인� 의사를� 규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남자의� 능동

적� 의지를� 규제하는� 표현으로� '버리지� 말라'(*� � � ,� 메� 아피에나이)고� 하고� 있어서� � 이혼에대한�

규제가�남녀� 모두에게�똑같이�중요한�의미로�주어졌음을�시사한다.

=====7:12,13� � 그�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버리지� 말라� -� 이제� 바울은� 부부� � 중에� �

어느한쪽이� 불신자일� 경우에� 대하여� 설명한다.� 이는� 당시� 고린도� 교회에서� 실제적으로� � 발생한�

문제로서� 선교지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특히� 한쪽이� 불신자일� 경우그가� 당시의� 타

락한� 문화� 속에서� 음란한� 성적� 방종에� 빠져� 살아가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수도� 있다는�

것을� 가정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에게� 피차'버리지� 말라'(*� � � ,� 메� 아피에토)

고� 명령한다.� 이는� 10,� 11절에� � 사용된부정사와� 동일한� 의미로서� 쓰여졌다.� 그러나� 이교도� 배우

자에� 대한� 이혼� 문제는� � 앞의그리스도인� 부부에게� 주어진� 절대적인� 의미와는� 차이가� 있다.� 다시

말해서 이들에게있어서� 이혼� 문제는� 이교도인� 배우자에게� 달려� 있는데� 만약� 그가� 결

혼� 생활을� � 계속하기를� '좋아하면'(',� 쉬뉴도케이)� 믿는� 배우자는� 능동적인� 자세로이혼을� 요구하

지� 말라는� 뜻이다.� 이는� 불신� 배우자가� 이혼을� 원할� 경우� 기꺼이� 응해야한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15절).� 따라서� 본절의� 전체적인� 의미는� 믿는� 배우자들에게소극적(消極的)인� 태도를� 요구하는�것으로서�불신�배우자의�의사를 존중하고� � 그들도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도록� 도우라는� 의미

를�포함한다(16절).

=====7:14� � 거룩하게�되나니�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기아스타이'(*� � )는� � 완료� 수동태로서�

그들의� 신분적� 변화를� 의미한다.� 그러나� 믿는� 배우자로� 인하여� 불신� � 배우자가� 거룩한� 신분이�

되었다는� 의미는� 결코� 이해하기� 쉬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 '거룩한'(*� � � ,� 하기오스),� '성별하

다'(*� � � ,� 하기아조)등과� 같은� � 단어는� � 성도의구별된� 신분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사역

을� 통하여� 얻게� 되는� 신분이기� 때문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적� 신앙을� 근거로� 하여�

획득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도의� 거룩한� 사귐은� 그� 이웃들에게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Morris).� 칼빈(Calvin)은� 이에� 대하여� 신자의� 거룩함은� 불신자의� 불경건함이� � 결혼을� � 더럽

히려는것보다�더� 능력� 있는�것이라고�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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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5� �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 전반절에서� 갈리울� 것을� 용인한� 후

에화평(和平)할� 것을� 언급한다.� 다시� 말해서� 성도와� 불신� 배우자의� 관계� 속에서� � 지속적으로�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인은� 종교적인� 이유로� 불신� � 배우자에게� 이혼을� 요

구할� 수� 없으며,� 불가피하게� 극단적인� 형편이� 되었을� 경우가� � 아니면평화를� 추구해야� 할� 것이다.�

혹자는� 본절을� 근거로� 하여� � 평화를� 위해� 이혼을� 해도� 무방하다고� 한다(Barrett).� 그러나� 본절에

서는� 이혼에� 대해� 긍정적으로� � 언급하지� � 않고오히려� 수동적이어야� 하며,� � 이로� 인해� 신앙을� 저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을� � 전제하고� 있다.� 즉� 배우자가� 신앙의� 문제로� 먼저� 이혼할� 것을� 제안하고�

떠나간�경우� 신자는� � 그로인해�구속받을�필요가�없다는�것을� 보여주고자�한다.

=====7:16� � 아내된�자여...어찌� 알� 수� 있으리요� -� 성도가� 불신� 배우자의�구원을� 위하여� 애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 그러나� 아예� 처음부터� 불신자와� 결혼하여� � 개종시키고자하는� 것은�

무모한� 짓이다.� 즉� 구원에� 대한� 확실한� 보장도� 없이� 불신� 배우자와� � 결혼하는� 것은� 욕구� 불만과�

불필요한� 긴장감만을�초래할� 뿐이다(Morris).� 그러나�일부� � 학자들은� 오히려�본절에� 나타난�불신�

배우자의� 구원� 가능성을� 강조한다.� 즉� 그들은� 14절의의미를� 보다� 강조하며� 평화와� 인내를� 통하

여�계속된�결혼� 생활이� � 불신자를 거룩하게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Barrett,� Lenski).� 더� 나아가�

불신� 배우자와� 결혼하는� 것을� 기피하는� 행위는� 선교적� 기회를� 회피하는� � 것이라고� 주장한다

(Barrett).� 그러나� � 본절의주제가� 이미� '불신자와� 결혼한� 자들에� 대한� 충고'라는� 것과� 불신자가�

결혼� 생활을� � 계속� 유지하는� 것을� '좋아하거든'이라는� 조건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을(12절)� 염두

에� � 둘때� 이와� 같은� 견해는� 타당하지� 않다.� 따라서� 바울의� 이러한� 가르침으로� 불신자와의� 결혼

을�정당화할�필요는�없다.

=====7:17� �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그대로� 행하라� -� 이� 구절은� 결혼� 생활뿐만� 아

니라�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의� 영역에� 구체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각� � 사람들에게�

주신� 능력과� 소명은� 그것이� 종교적인� 것이든지� 또는�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 필요로� 하는� 사회적

인� 것이든지� 간에� 서로의� 화평을� 도모하는� 곳에� 사용� � 되어야� � 한다.이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

신이� 처한� 위치에서� 스스로� 만족하라는� 자족의� 의미� 라기보다는� 자신이� 처한� 삶을� 중요하게� 여

기고�하나님의�주권을�중시하라는�의미가�더� � 강하다(Morris,� Barrett).

=====7:18,19� � 할례자...무할례자� -�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하여� 새� 사람이� 된� � 자들에게는� � 할

례나무할례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초대� 교회에서� 이방인의� 할례� 문제는� 교회� 구성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매우� 불만족스러운� � 처사였다.특히� 이방인� 개

종자들에게� 할례가� 아무런� 효과가� 없다고� 주장한� 바울의� 견해는� 대부분의� 선교지에서� 오해의� 원

인이었으며� 교회� 분쟁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또한� � 헬라의생활� 방식에� 적응한� 유대인� 중에는�

할례의� 흔적을� 감추려� 하거나� 없애려� 하는� � 자들도있었다(Lenski,� Farrar).� 이런�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바울의� 주장은� 보다� 설득력� � 있는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생활의� 이기적�

유익을� 위하여� 할례를� � 행하기도� 하고� 없애버리기도� 하는� 할례의� 의미는� 더� 이상� 아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율법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이다.� 여기서� '계명'(*� ,� 엔톨라이)은� 모세의� 율법과� 같은� 법적� 규제가� � 아니라� 부르심을� 받은�

형편과� 처지를� 따라� 복음에� 순종하며� 믿음과� 사랑으로� 자신이� � 처해있는� 생활� 여건을� 그대로� 받

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사랑의� � 계명안에(요� 15:12-14)� 거하는� 자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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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어서�유대주의적�관행(慣行)은� � 아무런� � 의미가없다.

=====7:20� 그� 부르심� 그대로� -� '부르심'(*,� 헤� 에클레데)은� 17절에서� 사용된� '소명'� 이라는� 주

제와� 다른� 관점에서� 사용되었다.� 신약� 성경에서� '클레시스'(*,� '부르심')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

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실제로� � 부르신다는의미로� 사용되었지만(롬� 11:29;히� 3:1),� 본절

에서는� 이� 세상에서� 처해있는� 처지까지도포함한다(Boice).� 또한� 앞절들(17,� 18절)과� 비교해보면�

앞� 구절에서는� 소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였으나� 본절에서는� 부르심을� 받은� '그때의'�

상태에�역점을� � 두고있다(Barrett).

=====7:21,22� �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 고린도� �

교인들의�신분이�대부분�낮은� 사회적�지위에�있었다는�것은�바울의�다른�진술 속에서도찾아

볼� 수� 있다(1:26,� 27).� 그들의� 사회적� 신분은� 교회� 내에서� 서로� 시기하고� � 무시하는� 근거가� 되

었으며� 실제로� 이러한� 신분의� 차이로� 말미암아� 고린도� 교회� 내의� � 분쟁은더� 심화되었다.� 그러나�

결코�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 자유자요� � 더이상� 종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실

적인� 종이나� 자유자의� 신분은� 더� 이상� � 문제가� � 되지않는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속했느냐� 속하지� 않았느냐� 하는� 문제이다.� 특히� 22절에� 사용된� 그의� 역설적� 표현은� 노예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자가� 되고자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중이�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들� 양

자 모두는 그리스도안에서� 종인� 동시에� 자유자라는� 뜻이다.� 그� 근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 '차라리'(*,� 말론)라는� 부사가� 단순한� 반전이나� 양자� 택일의� 유익을� 시사하는� 뜻으로�

사용되지� 않았으므로� 현실적인� 노예� 신분을� 버리고� 자유인이� 되라는� � 표현은� � 아니다.� 오히려�

이� 말은� '자랑스럽게',� 또는� '자신있게'� 등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어서� � 종의� 직분을� 긍정적으로�

사용하라는� 의미이다.� (2)� '사용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레사이'(*� � � )는� 부정� 과거� 중간태로

서� '너� 자신을� 위해� 사용하라'는� � 의미이다.� 따라서� 노예된� 상태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자신에

게� 유익이� 되게� 하라는� �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근거들� 때문에� 주� 안에서� 자유자가� 된다는� 것은�

현실� 신분의� � 종된상태에서� 벗어나라고� 종용(慫慂)하는� 것이� 아니고,� 비록� 신분이� 종이긴� 하나�주� � 안에서�자유자이므로�자유자로서�살고,� 궁극적으로�주님의�종된�삶을� 살라는�가르침이다.

=====7:23� 값으로�사신�것� -� 예수� � 그리스도를�믿는�자는�그의� 피로써�산�바�되었다(6� :� � 20)

는� 것을� 전제하는� 구절이다.� 당시에는� 노예를� 값으로� 사고� 파는� 것이� 관례였으며� 일반적으로� 값

을� 치른� 노예는� 문서상으로�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 더� 이상� 이전� 주인의� 노예� 상태로� 있지� 않

았다.� 본절에서는� 이러한� 사회� 상황을� 비유로� 하여� 성도들을� 값으로샀다고� 말한다.� 성도들을� 값

으로� 산� 것은� 금이나� 은과� 같은� 현실적인� 재화로� 산� � 것이아니라(벧전� 1:18)� 그리스도께서� 십자

가에서� 죽으신� 역사적이고� 단회적인� 사건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그로� 말미암아� 산� 바� 된� 자들

은�역사�속에서�구체적으로�그리스도에게�순종하는�삶을�살아야�한다.

=====7:24� �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 '하나님과� 함께'의� 헬라어� '파라� 데

오'(*)는� '하나님과� 동행한다'� � 또는� '하나님의� 곁에'� � 있다는� 의미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그것은�

보다� 근본적인�의미에서�그의�신분이�하나님으로부터� � 주어진것이라는�점을�시사한다.� 바울은�자

신의� 사도적� 신분이� 하나님으로� 말미� 암아� � 주어진것이듯이(갈� 1� :� 1)� 모든� 성도들의� 신분� 역시�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밝히며� 그� 가운데서�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살아갈� 것을� 요구한다

(Godet).이것은� 단순히� 그들로� � 하여금� 노예� 신분을� 계속� 유지하라는� 희생의� 요구라기� 보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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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 사람임을� 강조함으로써� 그들의� 삶이� 질서� 속에서� 그리스도에게� 봉사하는�

과정이� � 되기를요구하는�것이다.

=====7:25� � 처녀에�대하여는...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 처녀의� 결혼� 문제에� 대한� 바울의� � 태

도는� 매우� 신중하다.� 그는� 사도적� 권위나� 주께로부터� 받은� 계명을� 강조하지� 않고� 주의자비와� 자

신의� 신실한� 양심을� 앞세운다.� � 이렇게� 하여�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모든�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 중심이� 주께� 있음을� 강조하는� � 것이다(Morris).� 한편� '처녀'(*� ,�

파르데논)는� 때로� '성경험이� 없는� � 남성'을의미하기도� 하였지만(계� 14:4),� 28절에서� 남자의� 장가

가는� 것을� 따로� � 언급하고� � 있는것으로� 보아� 본절의� '처녀'는� 부모의� 견해에� 따라� 결혼� 문제가�

결정되는�당시의� '미혼여성'을� 가리킴이�분명하다(Barrett).

=====7:26� �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 바울은� 종종�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하여� 언급하지만,� � 살

후2� :� 2에서는� 임박했다고� 하는� 주의� � 강림의� 소문에� 대해� 회의적이다.� 예수께서는� 그의재림이�

있기� 전에� 발생할� 일들에� 대해� 이미� 말씀하셨다(마� 24:8).� 따라서� 환난과� 재림은� 연속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본절의� '환난'(*� ,아낭켄)이� 그리스도의� 재림과� 직접� 관계된� 고난이

냐� 하는� 문제는� 분명치� 않다.� 혹자는� 그리스도인들이� 현실적으로� 겪는� 고난이� 곧� 선취(先就)된�종말론적� � 재난이라고� � 주장하기도한다(Barrett).� 하지만� 본절의� '환난'은� 바울과� 당시의� 교인들

이� 받았던� 현실적인� '박해들'로� 해석� 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다(Morris).� 환난은� 바울� 시대뿐만�

아니라�모든시대의�성도들이�현재적으로�겪게�된다(Calvin).

=====7:27매였느냐...놓였느냐� -� 두� 동사는� 완료� 수동태로서� � 그들의� � � 신분이� � � 수동적으로확

장된� 상태임을� 시사한다.� 기혼자는� 기혼자의� 신분� 가운데서� 환난을� 잘� 견뎌야� 한다.고통스런� 박

해를� 피하기� 위해� 아내를� 버리거나� 남편을� 버리는� 일은� 합당하지� 않다.� 이는� 미혼자에� 대한� 그

의� 충고와(26절)�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지내라'(17,� 20,� 24절)는�

주제를�지지하는�것이며,� 또한� 결혼�생활에�대한� � 바울의�견해와(엡� 5:� 22,� 23)� 일맥� 상통한다.

=====7:28� � 너희를� 아끼노라� -� 바울은� 비교적� 독신� 생활을� 권장하고� 있다.� 그는� 박해로� 인하

여당하게� 될� 육체의� 고난을� 상기하며� 결혼으로� 인하여� 가중될� 책임과� 고난으로부터� 보호되길� 기

대한다(Harrison).

=====7:29� �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없는� 자� 같이� 하며� -� '때'(*� � � ,� 카이로스)라는� 단어가� 무

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분분하다.� (1)� � '때'는� � 26절의'환난'과� 같이� 당시� 고

린도� 교인들이� � 처해� 있던� 상황을� 의미한다(Morris).� (2)� � '때'는� 성도의� 개인적� 종말을� 고하는�

죽음을� 의미한다(Calvin).� (3)� '때'는� 예수� 재림� � 전의� 시대를� 의미한다(Barrett,� Lenski).� 본절에

서는� (3)의� 견해가�가장�타당하다고� � 할수� 있다.� 왜냐하면�개인적�종말과�박해의�시대� 등을� 모두� �

포괄하는� 견해이기� � 때문이다.� 바울은� 예수의� 재림이� 불과� 몇� 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위기� 의식

을� 조장하는� � 것이아니라� 모든� 시대의�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 한다

는� � 것이다.� 그것은� '없는� 자� 같이� 하며'라는� 표현� 속에� 더� 선명하게� 나타난다.� 이는� 금욕이나절

제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이나� 재물이나� 그� 외의� 세상� 것들이� 성도의� � 궁극적목적이� 될�

수� 없다는�것이다(Grosheide). 성도는� 세상에� 있으나� 세속에� 속하지� � 않은자이며(5:10),� 세

상의�자랑거리로�자신을�치부할수�없는�자들이다(고후� 6� :�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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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1� �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 '지나감'(*� � ,� 파라게이)이라는� � 단어는단순히� '

스쳐� 지나간다'는(마� 20:30)�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본절에서� 그� 의미는보다� 고조되어� '없

어지다'� � 또는� � '소멸되다'는� 뜻으로�사용되었다.� 세상은�영원한�것이� 아니라�임시적�이며�무상한�

것이기에� 그리스도의� 재림�때에는� 그� 형상조차도� � 무너지고� 말� 것이다(시� 103:15).� 한편� 혹자는�

이것을�사회나� 상업� 제도� 등과� 같은� � 세상의외적�구조가�변화된다는�뜻으로� 해석한다(Barth).� 물

론� '형적'(*� � � ,� 스케마)이라는� 단어가� 세상사에� 나타나는� 외형적� 형태를� 의미� 하기도� 하지만� �

본절에서는� � 종말에멸망할�수밖에�없는� 세상의�특성으로�이해하는�것이�문맥상�타당하다�하겠다.

=====7:32,33� � 주를� 기쁘시게� 할꼬...아내를�기쁘게� 할꼬� -� '기쁘시게'에� 해당하는�헬라어� � '아

레스코'(*)는� 상대방을� 향한� 헌신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즉� 기혼자는� 아내로� 인하여� 주께� 향

한� 헌신의�자세를�반감(半減)시킬� 수도� 있다는�것이다.그리스도인이� 세상의� 염려로부터� 자유함을�받아� 오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살아야� 하는� � 것이�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그� 일을� 위하여�

독신�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은� 부당한� 요구이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결혼이나� 외적인� 제도�

등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함으로� 참� 하나님을� 섬기느냐� 하는� 데에�

있다.� 따라서 결혼하지않은� 자라� 할지라도� 그가� 정욕에� 매여� 있다면� 그� 역시� 하나님을� 향한�

헌신을� 잃어버린자에� 불과하다(Calvin).� 기혼자이든지� 미혼자이든지� 간에� 그는� 주어진� 자유를� 선

용(善用)할� 때만� 주를�기쁘시게�하는�자로� 인정받을�수� 있다.

=====7:34� � 몸과�영을� 다� 거룩하게�하려�하되� -� '거룩하게�하다'라는� 말은�고상한�도덕적�성취

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Morris).�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헌신의� 자세로서� 모든� � 성도들이� 결혼

을� 했건� 안� 했건� 간에� 거룩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6:13,� 15;롬� 6:� 12;12:1;고후� 4� :� 10�

;� 갈� 6:17).� 다시� 말해서� 결혼하지� 않은� 처녀만이� '거룩하다'고� � 말할� 수는� 없다.� 그들에게� 중요

한�것은�성적� 생활을�삼가하는�것이�아니라�주의� 뜻을� 염두에�두고� 사는�삶의� 자세이다.

=====7:35� � 분요함이� 없이� 주를� 섬기게� -� 바울의� 의도는� 보다� 확실하게� 드러났다.� � 기혼자이

든미혼자이든지� 간에� 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질서� 속에서� 주를� 섬기는� 일이다.� 이러한� 가

르침을� 통해� 바울이� 의도한� 목적이� 있었다.� 즉� (1)� 고린도� 교인들의� 신실한� 신앙과� 빛된� 생활을�

촉구하고� (2)� 그리스도�안에서�지속적으로�완전한�헌신을�하도록�하려는�것이며� (3)� 구차한�논쟁

에�말려들지�않도록�하는� 것이다.

=====7:36� � 그같이�할� 필요가� 있거든...혼인하게� 하라� -� 본절에서� 언급하는� 결혼이� 어떠한� � 종

류의� 결혼인가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분분하다.� (1)� 혹자는� 당시� 고린도� 지방의� � 관습으로� 지

켜진� '정신적� 결혼'� 또는� '영적� 결혼'� 등을� 말한다고� 하는데,� 이� 견해에� � 의하면� 성적� 결합이� 없

는� 결혼을� 유지하느니� 차라리� 통상적인� 결혼� � 생활을� � 영위하라는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5절의� 서로� 분방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설명해� 주지� � 못하고,� 이런� 정신적인� 결혼의� 관습은� 2세

기에� 들어서야� 생겨난� 것으로,� 본� 견해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Morris).� (2)� 혹자는� 처

녀의�보호자된� � 아버지가 정년기에접어든� 딸의� 결혼을� 추진하는� 것으로� 이해한다(Calvin).� (3)�

혹자는� 젊은� � 과부가� � 그형제들에게� 시집가는� '수혼'을� 권장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Barrett).� 그�

외에� 약혼자가� 독신을� 서약한� 후에� 부득이한� 일이� 생기면� 결혼하라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2)의� 해석이� 가장� 타당하다.� 당시� 자녀의� 결혼에� 대한� � 결정권(決定權)을�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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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고�있었던�보호자에게�자녀의�결혼을� � 권장하는 일은� � 자연스러운� � 일이다(Morris,�

Lenski).

=====7:37,38� 부득이한�일� -� 결혼을� 시켜야만�하는�부득이한� 일은� 결혼� 서약과�같은� 대외적인�

의무와� 책임을� 가리킨다(Morris).� 이를� 보아� 결혼에� 있어서� 쌍방의� 서약을� 중요하게� � 생각하고�

공적인� 인정도� 중요하게� 여긴� 것으로� 보인다.� � � 머물러� 두기로� 마음에� 작정하여도� 잘하는� 것이

니라...시집보내지� 아니하는� 자가� 더잘하는� 것이니라� -� 본문은� 처녀를� 가진� 부모에대한� 권면으로�

처녀가�결혼하길�원치�않을�경우에�앞� 구절(36절)과는�대조적으로�시집보내지�않는 것 이�

더� 좋다는� 결론을� 내린다.� 성도는� 창조� 질서� 속에서� 거룩함을� 유지해야하며� � 죄의� 오염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 � 성도의� 삶에� 대한� 평가� 기준은� 결혼을� 했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지� 않고

못했느냐에� 달려� 있다.� 본절의� 더� 잘하는� 것이라고� 칭찬하는� 말은� 바울의� 의도를� 보다선명하게�

드러낸다.죄의� 욕망으로부터� 자신의� 순결한� 삶을� 지킨� 성도는� 잘하였다는� 칭찬을� 듣게� 되며� 그�

칭찬은�결혼하지�않고�순결한�삶을� 지키며�하나님께�헌신한�자에게더�크게�작용한다(Calvin).

=====7:39�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 과부들의� 재혼�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 원리는� � 앞절에

서� 기록된� 처녀들의� 경우와� 동일하다.� 그들은� 다시� 결혼하든지� 혼자� 그냥지내든지� � 자신의� 뜻에�

따라� 자유롭게� 결정할�수�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또� 하나의� 조건이� � 추가되었는데�그것은� '주� 안

에서만'하라는� 것이다.� 이는� 불신자들과�이미� � 결혼한� � 자들에게'그대로� 행하라'고� 말한� 것과(12,�

13절)� 달리� 새로운� 결정을� 해야� 되는� � 과부들에게는자신이� 그리스도의� 지체된� 자임을� 기억하도

록� 요구한다.� 이로써� 그리스도� 안에서의� 가정을� 최선의� 것으로� 여겼고,� 그� 외의� 경우에� 파생적으

로�발생된�문제에�대한� 대책만을언급하고�있음을�알� 수� 있다.

=====7:40� � 하나님의�명을�받은� 줄로� 생각하노라� -� '하나님의�영을� 받았다'는�것은� 크게� 두� 가

지를�의미한다.� (1)� 사도� 바울� 자신이�독신으로�살�수� 있도록�도우시는�하나님의�은사를�받은� 것

과� 같이� 너희도� 그� 은사를� 사모하라는� 것이다(Barrett).� (2)� 비록� 주의� � 계명에� 이르지� 아니한�

내용이라� 하더라도(25절)� 바울은� 자신이� 사도로서� 올바른� � 판단을내리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다

는� 것이다(Morris).� 즉� 독신에� 대한� 바울의� 견해는� � 하나님의� 영을� 따라� 된� 것으로� 하나님의� 뜻

과�부합(符合)된다는�것을� 의미한다.� 고린도전서�제� 8장

=====8:1� �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 '...에� 대하여'(*� ,� 페리)라는� 표현은� 7장의� 결혼� 문제와�

마찬가지로(7� :� 1)� 고린도� 교인들이� 서신이나� 구전을� 통하여� � 우상� � 제물에대한� 문제를� 바울에

게� 제기했음을� 시사한다(Morris).� � 당시의� 고대� 도시들에서는� 종교적� 제의(祭衣)에� 사용된� 음식물들을� 사제들이� 처분하였으나� 다� 처분하지� 못하고� � 남은제물들은� 시장에서� 판매하였다.� 제의에�

사용되지� 아니한� 고기도� 있었으므로� 교인� 들이거리낌없이� 시장에서� 음식을� 사먹을� 수� 있었는데�

사실� 제물과� 순수한� 음식을� 구별하기란� 쉽지가� 않았다.� � 그러나� 본절에� 언급된� 음식은� 제의에�

올랐던�제물들로서�분명하게논의될�수� 있는� 성격을� 지녔다.� 고린도�교회에서�우상의� 제물이�문제

가� � 되었던� � 것은크게� 두� 가지의� 서로� 상반된� 견해� 차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유대교로부터� �

개종한그리스도인들은�우상�숭배로�인하여�오염된�음식을�먹는�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이

라고주장하였으며� 또� 다른� 무리들은� 영지� 주의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 자유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도살이나� 우상� 제물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Barrett).� 바

울은�이들� 두� 주장에�의하여�발생한�고린도�교회의 문제를 해결함에있어서� 먼저� 그들의�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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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이� 편견이나� 교만에� 빠져� 분쟁을� 유발시키는� 한계에� 부딪혔다는� 것을� 지적하고� 성숙한� 인격과�

사랑을� 강조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결국� 그들의� 문제는� 사랑이� 없는� 지식� 때문에� 발생

한�것들이었다(9-13).

=====8:2� �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 바울은� 사랑과� 지식을� 비교하면서� 먼저� 지식의� � 불완

전함을� 증명한다.� 본절에서의� '지식'('� � � ,� 그노시스)이� '하나님에� 관하여� 아는� 것'을� 시사� 하지

만,� � 하나님을�안다는� 것은� 계명을� 지키는� 것과� � 직결되기도� � 한다(요일� 2:4).� 즉� 하나님을� 안다

는�것은�하나님과�바른�관계를�맺는다는�것과상통하는것이다(호� 6:3).� 그러나� 고린도의� 지식있는�

자들은�단편적인�지식만을�가짐으로� � 인하여�오혀려�자신을�오류에�빠지게�하는� 우(愚)를� 범하였다.� 그들은�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으나,� 그� 지식을� 당면한� 문제에� 적용할� 수� 있는� '마땅한� 지식'�

곧� 덕을�세워주는�사랑을�소유하지는�못했던�것이다.

=====8:3� � 누구든지�하나님을�사랑하면...하나님의�아시는�바�되었느니라� -� '사랑하면'(* � � ,�

에이�아가파)이라는�표현을�하나님의�인정을�받을� 수� 있는 조건문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Barrett).� 이보다�더�중요한�것은�하나님이�주도권을�가지고� � 그의� 백성을�아신다는�사실이다(딤

후� 2:19).�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인정하실� 때에� � 그백성의� 삶에는� 사랑이� 나타날� 것이며� 또한�

그� 속에서� 하나님은� 증거될�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을� 학습의� 과정을� 통해�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삶� � 속에서구체적인� 전인격적� 반응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결국� 사랑�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 모든� 외형적인� 아름다움은� 그것이� 고상한� 지식이라� 할지라도� 무가치한�

것에�지나지�않는다(Calvin).

=====8:4� � 우상은�세상에�아무것도�아니며� -� 바울은�여기서�앞절에�비하여 상당한 직 설

적인표현을� 사용하며� 우상의� 실체를� 단호하게� 규정하고� 있다.� 즉� 우상이라고� 하는� 것은� 인격적�

실체가�아니므로� 아무런�능력도�없는� 것이며� 실제적으로도�없는�것과� 마찬가지라는�것이다.� 바울

은� 10:20에서�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것'� 이라고� 규정하여� 우상의� 배후(背後)에는� 정신적인� 것이� 존재함을� 보여준다.� � 그럼에도� 바울이� � 본절에서� 우상의� 존재가� 아무것도� 아

니라고�하는�것은�우상� 그� 자체는�허상과 다를� � 바없는� 인간이� 만들어낸� 것임을� 강조하기� 위

함이다(Morris).� 따라서� 바울은� 여기서� � (1)우상� 숭배의� 어리석음과� (2)� 참된� 신앙의� 대상은� 하

나님�한�분이시라는�사실을�가르쳐준다(사� 41:24;렘� 10:14).

=====8:5� � 신이라�칭하는�자가� 있어�많은� 신과� 많은�주가� 있으나� -� 바울은 계속해서� � 우

상의허구성에� 대해� 언급한다.� 본절에서� '신이라� 칭함을� 받는� 자'가� 있음을� 인정했는데� � 이때의� '

신'은� 당시의� 그리이스� 신화에� 나타나는� 이방� 신을� 가리키며,� 사람들이� � 신앙하는� 대상을� 일컫는

다.� 그런데� 여기서의� '주'(*,퀴리오스)는� � 당시의� � 여러종교들이� 신앙의� 대상에� 대하여� 사용하던�

일반적인� 용어이다(Morris).� � 따라서� � '많은신'(*� ,데오이� 폴로이)과� '많은� 주'(*� � � ,� 퀴리오이� �

폴로이)사이에는� 의미상의� 차이가� 없으며� 많은� 우상들이� 이방인들의� 경배의� � 대상이� � 된것을� 풍

자적으로� 비유한� 것에� 불과하다.� 본� 구절은� 이러한� 풍자(諷刺)를� 통하여� � 당시사람들이� 섬기던�이방신들이�비실재적인�존재임을�지적하고�있다.

=====8:6� � 한� 하나님...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그로� � 말미암았느니라� � -본�

구절에서�바울은�하나님만이�유일하신�신이며�우리의�기원은�그분이심을 강조하고있다(Calv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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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하나님의� 창조자로서의� 속성과� 유일하심이� 강조되는� 것은� � 하나님이� 앞에� 언급되어� 있는�

이방의� 신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 특히하나님께� 대하여� '아버지'란� 표현을�

쓴� 것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 절대적� � 통치권과예수� 그리스도와� 성도들� 간의� 끊을� 수� 없는� 사

랑의�관계,� 그리고� � 하나님의 인격적인사랑을� 나타낸다.� 더욱이� 본� 구절에서� 중요하게� 제

시되는� 전치사� '에크'(*,� � '...로부터'),� '에이스'(*� ,� '...안으로'),� '디아'(*� ,'...을� 통하여')는� 롬�

11� :36의� 사상을�내포하고�있음을�보여준다.� 이는� 우리들뿐만�아니라� '모든�것'(* , 타�

판타)의� 기원과� 존재� 목적과� 최종적인� 귀결과� 중보적� 사역이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음을� 명백히�

하는�표현으로�피조물인�이방의�우상과는�전혀�다르다는�것을�확실하게�규정한다.

=====8:7� �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 여기서� 바울이� 언급한� 지식은� 우상이나� � 거짓

신들의� 존재와� 위치에� 관해� 인식(認識)할� 수� 있는� 지식을� 가리킨다.� 이� 지식은� � 1절에따르면� 우리가� 다� 지니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장성한� 분량에까

지� 이른� 사람들에게만� 국한된다(Morris).� 따라서� 이러한� 지식은� 교회� 내에서조차도� 보편적인� 지

식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당시� 이방� � 종교에서는� � 우상을숭배하며� 희생� 제물을� 드리는� 것이� 상

례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중에는� 고기를� �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신� 음식으로� 생각지� 않고� 우

상에게� 바쳐진� 제물로만� 인식하는� 자들이� 있었다.� � �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 '습관'에� 해당하

는� 헬라어� '쉬네데이아'(*� � � )는� 시내산� 사본(*� � )에� 근거한� 것이다.� 어떤� 사본에는� '쉬네이데세

이'(*,'양심')라고� 되어� 있고� 흠정역(KJV)이� 이를� 따르고� 있지만� 문맥상� � 어울리지� � 않는다.고린

도� 교인� 중에� 어떤� 사람들은� 우상이나� 우상� 제물이� 마법적인� 효력을� 가지고� � 있다는� 거짓� 신앙

에서�완전히�벗어나지�못한�이들도�있었다.� 오늘날에도�샤머니즘적인� � 신앙에서�헤어나지�못하는�

상태에서,� 구복(求福)신앙에� 매여� 있는� 경우가� 있다.� � 그러나성도는� 복음의� 기본� 도리와� 그� � 복음의� � 능력을� �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롬� � 1:16;갈1:10-12;엡� 3:1-6).

=====8:8� �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 본절은� 식물(食物)� 자체가� 하나님께대한�우리의�신앙에�영향을�끼치지�않으며,� 우상에게�바쳐졌던�제물을�먹는� 행위가�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위한� 필수적� 요소라고� 하는� 영지주의적� 고린도� 교인들의� 주장이� 근거없는� 것임을� 드러내�

준다(Hodge).� 한편� '세우지'에�해당하는�헬라어� '파라스테세이'(* � � )는� '가까이�

나아가다'(행� 27:24),� '드리다'(롬� 6:13)라고� �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럽다(Morris).� 어떤� 사본들(*� �

,� D,� � � )에서는� 이를� 미래� 시제로� � 하였다.� 이는� 장차� 있게� 될� 최후� 심판을� 염두에� 둔� 표현일�

것이다.

=====8:9� � 거치는� 것�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콤마'(*� � � )의� 문자적� 의미는� '길에� 떨어

져� 있는� 돌'로서� '장애물'을� 가리킨다.� 본절에서� '프로스콤마'는� 믿음이약한� 형제의� 양심에� 상처

를� 준다는� 의미� 뿐만� 아니라� 우상과� 타협함으로� 죄를� � 짓도록만드는� 것을� 뜻한다.� 우리의� 행위

가� 나쁘게� 생각되지� 않더라도� 이것이� 초신자들의� � 양심(良心)에� 반대된다면� 그들을� 실족케� 할�수� 있으며�더� 나아가�그들을�나쁜�상태로�이끌�수도� 있다(D.� Thomas).

=====8:10� 지식� 있는� 네가...먹게� 되지� 않겠느냐� -� 믿음이� 성숙한� 신자는� 장소와� 음식의� 출처

와는� 상관없이� 모든� 것을� 수용하며� 정확한� 이해� 가운데서� 자유롭게� 행한다.� 하지만� 믿음이� 약한�

자는� 우상의� 집에서� 음식을� 먹는� 것을� 그� 우상과� 교제하며� 경배하는� 것으로생각할� 수� 있다

(Calvin).� 결국� 믿음이� 강한� 자들의� 자유로운� 행동은� 믿음이� 약한� 신자들에게� 악영향을� 미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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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왜냐하면� 강한� 신자들을� 좇아� 우상의� 제물을� 먹을� � 경우� 강한� 신자들과는� 달리� 양심에� 거

리낌을�느낄�거리낌�때문이다.

=====8:11�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 바울은� 본� 구절에서� 자유가�남용되

는� 경우를� 예로� 들어�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모든�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 해방과� � 구원의증표가� 되

지만�그것이�남용(濫用)될� 때� 형제들을�실족케�하는� 빌미가� � 됨을 지적하고있다.� 한편� 본

절의� '멸망� 하였나니'에� 해당하는�헬라어� '아폴뤼타이'(*� )는� 미래� 시제로�볼� 수도� 있으나� 내용상�

현재� 시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약한� 자들은장차� 실족하게� 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지금� 현재에�

실족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Morris).그리고�이� 단어가� 문장의�앞� 부분에� 위치하여�강조되고�있으

며,� 롬� 14:15에서도� � 본절과�동일한�내용을�언급한다.

=====8:12� �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 약한� 형제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는� � 그리

스도께� 죄를� 짓는� 행위로� 규정된다(행� 9:4).� 혹자는� 이러한� 범죄를� 그리스도에� 대한� � 모욕이며�

그리스도의� 피를� 무효화시키려� 하는� 행위라고까지� 본다(Calvin).� 모든� � 하나님의� 백성은� 지식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는� 상태이다.� � 그러므로� 형제에� 대한� 사랑의� 결핍

은� 그것이� 선행이든� 악행이든� 그리스도께� 대한� 행위로� � 귀결된다(Hendriksen).� 주님께서도� '지

극히�작은� 자� 하나에게�한� 것이� 곧� 내게�한� �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25:40).

=====8:13� �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 형제

를실족치� 않게� 하리라� -� 본절에서� 우상의� 제물에� 대한� 바람직한� 태도가� 바울� 자신의� � 의지� 표명

(表明)을� 통하여� 나타난다.� 바울의� 이러한� 결심은� 그의� 뜨거운� 사랑이� � 단적으로� 드러난� 것이다.�또한� 이것은� (1)� 인간적으로� 보잘것없는� 형제일지라도� � 하나님께서는� 그를� 천하보다� 귀하게� 여

기시며�그를�통해�당신의�사역과�섭리를�이루어 나가신다는� 점과� (2)� 그리스도인의� 영속적

인� 생활� 원칙을�밝히� 제시해� � 주고� � 있다(마� � 25:40,45).� 한편� '실족케'에� 해당하는� 헬라어� � '스

칸달리제이'('� � � )는번역하기가� 쉽지� 않다(Morris).� 이� 단어는� '스칸달론'('� � � )에서� 온� 것으로� 원

래� '올가미의� 덫을� 잠그는� 나무'를� 가리키며� 온갖� 고난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데사용되었다.� 바

울은� 유대인들에게� 십자가가� '스칸달론'이� 되었다고� � 표현하기도� � 하고(1:18),� 십자가의� '거치는�

것'을� '스칸달론'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갈� 5:11).� 본절에서는� 형제로� 하여금� 그릇된� 판단을� 하

게� 하는�것을� 의미한다.� 고린도전서�제� 9장

=====9:1� �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 여기서의� '자유'는�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갖는� 영적

인�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율법주의에서� 벗어난� 사람이었으므로� 다른� 그리스

도인들과� 마찬가지로� 믿음의� 범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8:13에서� 그� 자신이� 고백한� 대로� 형제를� 위해� 그의� 자유를� � 포기하였다.� � � 사도가� 아니냐� -� 이�

말� 속에는� 혹자의� 말대로� 사도인� 바울이� 사도로서� 자신의� 권리를� 마음껏� 행사할� 수� 있다는� 뜻이�

들어� 있다(Godet).� 동시에� 바울� 자신의� 사도성을� 주장하는� 근거로� 두� 가지� 사실을� 제시하였다.�

즉� 자신이� 부활한� 그리스도를� 보았다는� 것과� 고린도인들이� 자신의� 전도로� 인해� 그리스도인이� 되

었다는� 것이다.� � �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 '못하였느냐'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키'(*)

는� 강한� 부정을� 나타내는� 말로서� 바울이� 본절에서� 던진� 네� 개의� 질문� 가운데� 이� � 구절에서만� 사

용� 되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된� 근거로� 먼저�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목격한� 사실을� 제시하는

데,� 이� 단어가�그� 사실을�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보았다고�하는�것은� 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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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말대로� 행� 9:3� 이하에� 기록되어� 있는� 다메섹� 도상(道上)에서� 목격한�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Godet,� Grosheide).� � �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 이� 말은� 바울이� 자신의� 사

도성을� � 주장하는� 두번째� 근거이다.�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교회를� 최초로� 설립하였고� 또한� � 자

신이뿌린� 씨앗의� 열매가� 바로� 고린도� 교인들이기� 때문에� 자신의� 사도로서의� 근거는� 명백하다고�

주장한다.� 3:7의� 말씀과� 같이� 바울� 자신이� 씨를� 뿌렸다해도� 하나님의� 인정하심이없었다면� 어떠

한�열매도�맺을� 수� 없었을�것이다.

=====9:2� � 나의� 사도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을� 인정하지� 않

는� 자들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그의� 사도권을� 의심할� 근거가적당치� 않

았다.� '인'(印)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프라기스'(*� � � )는� � 어떤일정한� 모양을� 새기는� 도구를� 가리키거나� 그� 도구를� 사용하여� 진흙이나� 밀납� 등에� � 새긴� 소유권과� 증명의� 표시를� 말한다.� 바울로�

인하여� 고린도� 교인들이� 그리스도를� � 영접하게� 되었고,� 그들이� 믿음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은�

바울이� 사도라는� 사실을� � 입증하는� 분명한� 증거였다.� 엄격히� 말해� 사람들의� 회개는� 성령의� 역사

이다.� � 하지만� � 바울의복음�전파로�말미암아�교회가�생긴� 것은� 바울이�하나님의�사도임을 증 거

하는� � 것이다(Hodge).

=====9:3� � 나를� 힐문하는� 자들에게� 발명(發明)할� 것이� 이것이니� -�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이앞� 구절을� 지시할� 수도� 있고� 뒷� 구절을� 지시할� 수도� 있다.� 혹자는� 이를� 뒷절에� 연결시켜� 바울이�

자신의� 언행을� 본으로� 보이면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언급하는� 가운데� 자기사도권을� 변호하는�

것이라� 한다(Grosheide).� 그러나� 뒷절들은� 바울의� 사도권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권이� 입

증된� 후에� 말할� 수� 있는� 사실들을� 열거한� 것이므로� 앞� � 구절에� 연결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

다(Morris).� '힐문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 '아나크리누신'(*� )은� '엄밀히� 조사하다',� � 혹은� � '심

문하다'의뜻이며� '발명할�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폴로기아'(*� )는� � '답변하다'의� 뜻으로서� 둘�

다� 법률� 용어이다.� 즉� 바울은� 그의� 반대자들이� 심문하듯이� � 자신의사도권을� 따진다면� 앞에서� 말

한� 내용들,� 곧� 자신이� 부활한� 그리스도를� � 목격하였으며,이방인인� 고린도�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으

로� 회심시킨� 뚜렷한� 사도됨의� 증거들을� 법정에서� 증인이� 되어� 증명하듯이� 단호하게� 답변하겠다

는�것이다.

=====9:4� 우리가� -� 본절에서� 복수� 1인칭� 동사� '에코멘'(*� � ,� '우리는� 가지고� 있다')을� 사용한�

것은� 바울이� 자신의� 동역자� 바나바를� 의식하였기� 때문인� 것� 같다.�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자비량�

선교를� 하였다(6절).� 혹은� '우리'� 속에� 실라와� 디모데를� � 포함시켰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고린도�

교회를� 위해� 바울과� 협력하였으며� � 바울의� � 삶의방식을� 따랐었다(Godet).� � �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 '권'(權)에� 해당하는� 헬라어� '엑수시안'(*� )은� '권리'(right,� NIV)를� 뜻한다.� 이는� 바울이� 고리도� 교인들로부터� 생계에� 필요한� 물질적� 원조를� 받을� 권리가� 있었음을� 뜻한다(고전�

9:9-11).� 그러나�바울은�그러한� � 권리를�주장하지�않았다.

=====9:5� � 다른� 사도들� -� 사도행전에서는� 사도가� 예수의�열� 두� 제자와�바울과� 한� � 두� � 사람이

더�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행� 14:4,14).� 본절에서도� 사도의� 범위가� 사도행전의� 언급보

다� 그리� 확대되지� 않았을� 것이다.� � � 주의� 형제들� -� 이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인가� 하는� 의문에� 대

해� 몇� 가지� � 견해가� � 있다.� (1)� 요셉이�마리아와�결혼하기�전에�전처(前妻)에게서부터�태어난� 예수의� � 형들도포함한다는� 것이다(Lightfoot).� (2)� 예수님의� 사촌� 형제� 즉� 마리아의� 동생과� 남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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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패오의� 소생일� 가능성도� 있다(마� 10:3).� (3)� 가장� 분명한� 것은� � 요셉과� � 마리아에게서태어난�

아들들로서�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 이� � 네� � 사람들이다(마� � 12:46;13:55;행1:14;갈� 1:19).� � �

게바� -� 바울은� 다른� 사도들과� 구분하여� '게바'� 곧� '베드로'를� 따로� 언급하고� 있다.이것은� 베드로

가� 탁월한� 사도이므로� 고린도� 교인들에게� 두드러진� 본보기가� 되기� � 때문이다.� 그가� 탁월한� 사도

였다는� 것은� 고린도� 교회� 내에� '게바파'가� 형성되어� � 있었다는것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1:12).� 또한� 본절은�베드로가�아내가�있는� 자임을�추측케�한다(막� 1:30).� � � 자매된�아내를�데리

고� 다닐� 권� -� '자매된� 아내'라는� 말은� 헬라어의� 관용구로서� '자매'와� '아내'� 이� 두� 단어가� 서로�

동격(同格)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자매'라는� 말� � 속에는� '믿는� 자'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Lenski).� '데리고� 다닐'에� 해당하는� 헬라어'페리아게인'(*� � � ,� '사방으로� 데리고� 다니다')은� '관례

적인� 선교� 여행'에만� 적용시킬� 수� 있는� 용어로� 당시의� 사도들이� 아내를� 대동시키면서� 도움을� �

받았음을� 시사한다.� 2세기� 말엽,�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나� 4세기� 로마� � 교회의부제

(副祭)였던� 암브로시에스터(Ambrosiaster)에� 의하면� 요한과� 바울을� 제외하고� 모든사도들에게� 아내가�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결혼한� 사도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딸린� � 식솔까지� 교회로부터� 공궤

를� 받을� 권리가� 있었다.� 본절에서� 바울은� 자신도� 역시� 다른�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결혼할� 권리가�

있었다는�사실을�말한다.

=====9:6� � 일하지� 아니할� 권� -� 본절은� 사도들이� 교회로부터� 그들의� 생계비를� � 받는다는� �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바울은� 이러한� 것을� 결코� 반대하지� � 않았다(딤전5� :� 18).�

그러나� 바울과� 그의� 제1차� 전도� 여행시� 동역자였던� 바나바는� 이러한� � 권리를사용하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어려서부터� 생계를� 위한� 기술을� 한가지씩� 익히는� 관습이있었다.� 더욱이� 철저한� 유대

인이었던� 바리새인들은� 모두� 스스로� 생계비를� 벌었는데� 바울� 역시� 그리하였다.� 그러나� 헬라인들

은� 육체적인� 노동을� 천하게� 생각하였으므로,� � 혹자는�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의� 이러한� 삶의� 방식

을�매우�특이하게�생각하였을�것이라고한다(Grosheide).

=====9:7� � 누가� 자비량하고...양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 바울은� 본절에서� 두� 가지� 예를� 들

고� 있는데� 그것은� 군인들이� 자신의� 비용으로� 봉사� 하지� 않는다는� 것과� 일꾼들이� � 포도원이나� 목

장에서� 일을� 할� 때에� 보수를� 기대하고� 일을� 한다는� 것이다(신� 20:6).� 바울은이� 같은� 실생활의�

예를� 들어� 그들이� 보수를� 받는� 것이� 당연한� 순리임을� � 가르치고� � 있다.� 그러므로� � 바울� 자신도�

교회로부터�생계비를�보조받는 것이� � 마땅하다고� � 주장한다.� 복음의� 역군들(딤후� 2� :� 3,� 4)

과�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농부(3:6)� 그리고� � 양떼를인도하는� 목자(요� 21:15)들이� 보수를� 받고�

신령한�일에� 참여하는�것은�결코 세속적이거나�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였다.� '자비량

(自備糧)� 하고'에� � 해당하는�헬라어'옵소니오이스'(*� � � )는� '옵손'(*� � ,� '양식')과� '오네오마이'(*,'구입하다')의� 합성어로� 문자적인� 뜻은� '스스로� 구입한� 양식'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이후에� '군인들

의� 봉급'을� 뜻하는� 말로� 굳어졌다.� 바울은� 이러한� 비유를� 들어� � 하나님의사역자들이� 자신의� 수고

에�대한�대가를�요구하는�게� 당연하다는�것을�피력한다.

=====9:8� � 사람의� 예대로� -�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 안드로폰'(*)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인습(人習)이나� 생각에� 따라'의� 의미이다.� 이� 말이� 때로는� � 육체의� 그릇된� 이해를� 따른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지만(롬� 3� :� 5),� 본절에서는� � 사람들에게� 익숙한� 임금� 지불의� 도리가� 당연하다

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 6절에서� � 예를든� 것처럼� 사람의� 피습을� 따른다� 할지라도� 일한� 대가

를�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보다� 더� 결정적인� 근거로� 하나님의� 말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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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을� 제시하였다.� � � 율법도� -�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노모스'(*� � )는� 성경의� 처음� 다섯� 권인

모세� 오경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바울은� 인간적인� 생각과� 하나님의� 계시인� 율법이� � 서로� 일치함

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혹자는�인간을�만드신� 분과� 인간에게� 계시를� � 주시는분이� 같은� 한� 분,� 하

나님이시기�때문이라고�말한다(Grosheide).

=====9:9� 곡식을�밟아� 떠는� 소� -� 본절에서�인용된�구절은�신명기� 25:4이다.� '떠는'에� � � 해당하

는� 헬라어는� '알로온타'(*� )로서� '할론'(*,� '둥근� � 모습')에서파생된� 말이다.� 동방의� 여러� 나라에

서는� 소를� 이용하여� 곡식을� 터는� 방아를� 돌리거나,혹은� 일정한� 반경(半徑)� 안에� 있는� 곡식을� 소로� 하여금� 발로� 밟아� 떨게� 하였다.� � 혹자는� 이� 때� 이집트나� 다른� 이방� 지역에서는� 소가� 곡식을�

먹지� 못하도록� 그� 입에� 망을� 씌웠다고� 한다(Lenski).� 그러나� 모세의� 율법에서는� 이것을� 금(禁)하였다.� � 소가� 일을� 할동안에는�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뿐만�

아니라�짐승들과� 자연에게까지�관심과�사랑을�베푸시는�모습을�가르쳐�준다(욥� 38:41;시� 147:9;

마� 6:26;눅� 12:24).� � �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 이� 말은� 하나님께서� 소들을� 염려하시지� 않

는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마리� 새에게도� 관심과� 애정을� 갖고� 계신다(마� 6:26).� 바울

의� 의도는� 일한� 만큼� 보상을� 받는� 것에� 대하여는� 가축도� 율법에� 의해� � 보장을� � 받는데하물며� 인

간들이� 일한� 것에� 대해� 보상을� 받는� 것은� 더욱�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다.� � 바울은� 구약에서� 달리�

인용할� 말씀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신� 24:15),� 굳이� 본절의말씀을� 인용하였다.� 이처럼� 일

꾼의� 품삯을� 예로� 들지� 않고� 가축을� 예로� 든� 것은� � 짐승들도� 소중히� 여기시는� 하나님께서� 사람

들은�더욱�소중히�여기신다는�사실을 강조하여사람들�사이에�서로를� � 귀중하게 대 우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 강조하기 위함이다(Calvin).

=====9:10� 전혀� -� 이� 단어를� '전혀'(altogether,� KJV),� 혹은� '전적으로'(entirely,RSV)로� � 번역

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는� 듯하다.� 왜냐하면� 9절에서� 바울이� 인용한� � 구약의� � 계명은인간들만을�

위한�것이� 아니기�때문이다.� � 오히려� � '전혀'에� 해당하는�헬라어� '판토스'(* � � � )는� '확실히

'(assuredly,� � certainly)로� � 번역하는� � 것이� � 더욱� � 타당하다(Hodge,� Goert).� � � 소망을� 가지고�

-� 바울은� 본절에서� 자신이� 인용한� 구약의� 계명이� 문자적인� 뜻으로는일하는� 소에게� 먹을� 양식을�

주라는� 것이지만� 내면적인� 뜻은� 인간을� 위한� 것으로서� � 밭갈고� 씨뿌리는� 자들이� 결실을� 거두어�

들이는�소망을�갖고� 일함을� � 보여주는 것이라고해석하였다.

=====9:11� �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 -� � 10절에서

는모든� 노동자들이� 일한� 대가로� 그에� 상당한� 임금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주장으로� � 결론을� 맺

었다.� 이제� 본절에서는� 앞� 구절의� 비유들에� 빗대어� 바울이�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는� '신령한� 것'(*� � ,� 타� 프뉴마티카),� � 곧� 한없이� � 고귀한� 영적인� 씨앗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

뿌렸으므로�그들에게� '육신의� � 것'(* � ,� 타� 사르키카)� 즉� 세상에� 속한� 것으로� 영적인� 것

과� 비교할�때� 지극히�미미한�것을�요구한다고�하는�것이� � 결코�지나친�것이�아님을�역설한다.

=====9:12� �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 베드로와� 아볼로� 등� 다른� 사도들은�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생계비를� 보장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다.� 혹자는� 이러한� 이

유로�고린도�교인들로�하여금�바울이�다른� 사도들보다�낮은 등급의 사도이기때문이라는� 오

해를�하게� 했을� 것이라고�한다(Morris).� 그러나�바울은� � 고린도� � 교회를처음�세운�자로서�자신이�

그� 어떠한� 사람들보다� 더욱� 물질적인� 권리를� 요구할� � 권한이있다고� 주장한다.� � � 범사에� 참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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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 '참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테고멘'(*� � � )은� � '스테게'(*� � � ,� '지붕')에서� 유래된� 말로서� '

덮다',� '감추다',� '참다'의� 뜻을� � 갖는다.신약� 성경에서� 바울만이� 이� 말을� 사용한다.� 본절에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데어려움이� 없도록� 모든� 것을� 참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거나�

요구하지� � 않는다는� � 것이다.� 바울은� 온갖� 종류의� 곤궁함을� 인내로써� 참았다.� � � 복음에� 아무� 장

애가� 없게� -� 바울은� 복음이� 자기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권한을� � 행사하려는� 자들과� 복음� 전파를�

통하여� 이익을� 얻으려는� 자들에� 의해� 잘못� 전달될� � 소지가있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어

떤이게는,� 신령한� 일을� 담당한� 자가� 물질에� � 얽매여� 산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

에� 그들이� 실족함� 없이� 신앙� 생활을� 하도록� 하기� 위하여� 바울� 스스로� 모든� 권리를� 포기하였다.�

이것은� � 바울� � 자신이� � 4:2에서'맡은� 자의� 구할� 것은� 충성'이� 라고� 하는� 가르침을� 몸소� 행동으

로�실천하는� � 것이기도하였다(Grosheide).

=====9:13� � 성전의�일을� 하는� 이들은...제단을� 모시는�이들은� -� 본절에서� 바울은� 구약에서� � 언

급된� 제사� 의식과� 이방� 제사의� 실례를� 들어,� 신약의� 교회가� 복음� 사역자들에게� 물질을공급할� 의

무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이,� 제단� 위에� 드려지고� 남은� 고기� 중� 일부를� 그들의�

몫으로� 할당받아� 생계를�유지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율범이� � 규정하는�바였다(레� 7:6,� 8-10,� 14,�

18-36).� 그러므로� 바울이� 자신의� 권한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객관적으로도� 합법적임을� 보여주

며� 이에� 바울이� 자신의� 권한을� 자제하는� 것을강조하고� 있다.� 한편� '제단'에� 해당하는� 헬라어로� '

보모스'(*� � )가� � 있음에도'뒤시아스테리오'(*� )을� 사용하는� 것은� '보모스'라는� 용어에� 너무� 이방

적인�의미가�내포되어�있기�때문이다(W.H.� Mare).

=====9:14� � 이와같이� 주께서도� -�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 제사장들에� 관하여� 규정하신� 것� 같

이그리스도께서도�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의� 보수에� 대해� 똑같은� 규정을� 허락하셨다.� � � 복음� 전

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 이것은� 마� 10:10이나� 눅� 10:7에서주어진� 예수님의� 명

령을� 바울이�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그것은� 구약의� 제사장들이� � 성전에서� 나는� 것으로� 생활을�

영위� 하였던� 것� 같이� 복음을� 전하는� 자들도� 그� 복음을� � 믿는� 자들의� 현금으로� 생계를� 꾸려가라

는� 예수님의� 명령이다.� 또한� 이것은� 예수님의� � 직접적인� 명령인� 만큼� 더할� 나위� 없이� 강력한� 권

위를� 가진� 증거였다.� 이처럼� 바울은� � 자신의� 권리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이� 없었으나� 고린도�

교인들에게�어떤�것을� 요구하려고�했던�것은� 아니었다.

=====9:15�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 바울은� 복음� 전파자로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경제적인� 보

조를� 요구할� 수� 있는� 당연한� 권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권리를� 결코� 사용하지� 않았다.� � �

죽을지언정...� -� 바울은� 자신이� 죽는� 한이� 있어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경제적인� � 짐을� 주지� 않겠

다고�말한다.� 바울은�여기서�고린도에�있었을�때�겪은 여러가지� � 생생한경험들의� 기억으로� 격한�

감정이� 되어� 정상적인� 방법으로� 글을� 잇지� 못하고� 파격� � 구문(破格構文)을� 사용했다.� � �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 바울은� 아무런� 보상없이�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자

신을� 의심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었고� 또한혹자의� 말대로� 자신을� 대적하

는� 자들과�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을� 축적했다(Hodge).� � 따라서� 물질적인� 공급� 없이� 교회를� 위하

여�봉사한다는�것은�그가� 전한�복음의 순수성을입증하는� 것이었으며� 바울의� 자랑이요� 영

광이었다.

=====9:16� � 자랑할�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할일임이라� -� '자랑할'에� 해당하는�헬라어� � '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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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마'(*� � � )는� '자신이� 취한� 행동에� 대하여� 도덕적인� 가치를� 느끼고,� 그로� 인해� 갖게� 되는� 즐거

운� 감정'을� 의미한다(Heinrici).� 사도� 바울이� 선교� � 사역을� � 감당한것은� 그� 일을� 통해서� 갖게� 되

는� 즐거움과�보람�때문이라기보다는�그� 사명이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진� 일이었고(행�

26:16-18;갈� 1� :� 1� ;� 빌� 1:16) 그가� � 부득불(不得不)하지않으면�안되는� 일로� 인식하고�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열정적으로� 헌신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자신의� 의지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예수(행� 9:1-9)와� 성령(행� � 13:2)에사로잡혀� 있었고� 날마다� 주의� 계시에� 민감하였다(행�

22:21).� 즉� 그가� 복음� 전파� � 사역을�감당할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가능

했다.� � � 내게� 화(禍)가� 있을� 것임이로라� -� 바울은� 소명(召命)에� 있어서� 다른� � 사도들과� � 큰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다.� 12사도들은� 자발적인� 믿음으로� 그들의� 소명을� 받아들였다.그러나� 바울은�

오히려� 믿는� 자들을� 박해하는� 완악한� 불신앙� 가운데서� 부르심을� 받았으며그의� 소명은� 자신의� 힘

으로는�어찌할�수�없는� 그리스도의�강압적인�역사였다(행� 9:� 5,Godet).

=====9:17� �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 바울이� 자발적인� 선택으로� 복음을� �

전파한다면,� 그것은� 자랑할� 만한� 것이요� 그에� 대한� 상이� 있을� 것이다.� '상'에� � 해당하는헬라어� '

미스도스'(*)는� '보상'(reward,� KJV,� NIV)을� 뜻한다.� 그러나� � 바울은�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

리스도로부터� 강압적으로� 복음� 전도의� 소명을� � 부여받았으므로� 거기에� 대해� 어떠한� 자랑거리나�

보상이� 있을� 수� 없다.� 그는� 단순히� 자신에게부여된� 임무를� 수행할� 뿐이었다(행� 26:16).� � � 나는�

직분을�맡았노라� -� 여기에� � 해당하는� � 헬라어� '오이코노미안�페피스튜마이'(*

� )의� � 문자적인� � 뜻은� '나는� 청지기직을� � 부여받았다'이다.� 여기의� '청지기'(steward)는�

'자유인'('freeman)과� 상반되는� 말로서,� � 청지기들은노예� 계급에� 속했었다(눅� 12:42,� 43).� 노예

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했다고하여� 어떠한� 보상도� 기대할� 수� 없었다.� 다만� 그들의�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을� 때� � 엄한처벌만이�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므로� 본절은� 바울이� 그의� 사도

직을 수행함에� � 있어서'나는� 노예로서� 일을� 수행할� 뿐�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입장

을� 견지(堅持)하였음을� 보여준다(Godet).� 바울이� 자신의� 사명에� 대해� 이러한� 태도를� 취한� 것은�그리스도의�가르침에�근거하는�것임이�분명하다(눅� 17� :� 10).

=====9:18� � 값� 없이� 전하고� -� '값없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다파논'(*� � )은� 바울� 자신이� 고

린도�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 대가로� 아무런� 물질적인� 부담을� 지우지� � 아니한� 것을� 뜻한

다.� � � 다쓰지� 아니하는� 것이로라� -� '다� 쓰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 동사� � '카타크레사스다이'(*� � )

는� '남용하다'나� '오용하다'의� 뜻이� � 아니라� � '남김없이소모하다'는� 의미이다.� 따라서�이것에� 대한�

부정은� 부분� 부정이� 아니라� 전체� 부정으로'일체� 사용하지� 않다'의� 뜻이� 된다(Lenski).� 바울은� 청

지기,� 즉� 아무런� 대가를� 기대할수� 없는� 노예로서� 복음� 전하는� 사명을� 수행하였다.� 그런데� 노예도�

주인으로부터� � 먹을것과� 입을� 것은� 공급받을� 권리가� 있었던� 것� 같이� 바울도� 그러한� 권리를� 고린

도� 교인들에게� 행사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바울은� 보상을� 바라지� 않고� 봉사하는� � 것과� � 권리를

행사하지�아니하고�복음을�위해� 희생하는�것� 자체를�자랑이며�보상으로�여겼다.

=====9:19�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잡혀(빌� 3:12)� 그의

종이� 되었기� 때문에(롬� 1:1)� 그리스도� 외에� 그� 어떤� 사람에게도� 예속되지� 않았다.� � 따라서� 그는�

민족이나� 종교,� 국가,� 사상,� 인습,� 유대교의� 율법주의� 등� 그� � 어느� � 것에도매이지� 않은� 자유인이

었다.� � �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 이것은� 곧� 완전한� 자기� 포기를� 의미한다.� 즉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게� � 된다면� 자신의� 모든� 것이� 없어져도� 좋다는� � 뜨거운� � 사랑의심정을� 나타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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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11:24,� 25;롬� 9:3).� 이것은�바울이�자신을� � 부정하는 원리이며그의� 모든� 행위는� 이러

한� 원리에� 기초를� 두고� 있다(Godet).그가� 스스로� 종이� 된� � 것은무엇보다도� 모든� 사람들을� 그리

스도께� 인도하기� 위함이다(고후� 4:5).� � �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 바울이� 스스로� 그리스

도인의�자유를�포기한� � 이유는�더�많은� 사람들을�그리스도인으로�만들기�위함이었다.

=====9:20� 내가� 유대민과� 같이� 된� 것은� -� 바울은� 먼저� 유대인을� 언급했다.� 그는� 베냐민� � 출신

으로� 육체적으로는� 완벽한� 유대인이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모든� 관습과� 명예를� 포기하였으

며� 진정한� 유대인,� 곧� 영적� 이스라엘은� 그리스도를� 통해� � 거듭난� � 자들이라는확신을� 지녔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유대인처럼� 행동하여� 자기의� 동역자이며� 제자였던�

디모데에게�유대인의�상징인�할례를� � 시행하도록 하였으며(행� 16:3)� 예루살렘에서는� 결례

(缺禮)를� 행하였다(행� 21� :� 17-29).� � �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율법� 아래있는� 자� 같이� -� '율법� 아래� 있는� 자'가� � 누구를� 가리키는지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유대인'을� 뜻하는�

다른�표현� 이다(Thomas).� (2)�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로서� � 모세의� � 율법을� � 받아들인

자들이다(Hodge,� Godet).� 그러나� 바울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말하려고� 한� 것이� 아니

라� � '율법에� 매여� 있는� 자'에� 초점이� 있으므로� 그것이� 어떤� 종류의� 사람이냐� 하는� 것은� 그리� 중

요한� 문제가� 아니다.� 바울이� 율법� 아래� 있는� 자에게는� 율법� 아래� 있는� 것처럼� � 처신했지만� 사실

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더� 이상� 그에게는� � 율법이�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유대인과� 같은� 행동을� 할� 수� � 있고� 율법� 아래� 있는� 자들과�

같이� 한� 것은� 그가� 유대인� 사이에서� � 소외(疏外)되는� � 것이두려워서가� 아니라� 자신의� 동족인� 유대인들이나� 혹은� 이방인들을� 구원하고자� 함이었다(롬� 9� :3;갈� 2:7).� 이로� 보건대� 바울은� 자유를�

포기하고�스스로�자신을�구속할수�있는자유를�소유한�진정한�자유자였다.

=====9: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 '율법� 없는� 자'란� 유대인과� 같이� 하나님의� 계시(啓示)가� � 성문화(成文化)된� 모세의� 율법을� 갖지� 않았던� 이방인들을� 말한다.� 그러나� 이방인들도� 자기들� 나름대로의� 법,� 곧� 양심의� 법은� 가지고� 있었다(롬� 2:14,� 15).� � �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

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 바울은� 어떤� 상황에서는� 이방인들처럼,� 즉� 율법� 밖에� 있는� 것처럼�

행동� 한다고� � 말했다.� � 그것은� � 그가'그리스도의� 법'� 아래� 있었기� 때문에� '모세의�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갈� 6� :� 12).� 그렇다고해서� 바울이� 결코� '하나님의� 법'으로부터� 자

유로웠던� � 것은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의� 법'의� 완성자이신� '그리스도의� 율법'아래� 있는� 자였다.� �

그런�바울이었으나�율법없는�이방인들을�그리스도께�인도하기�위하여 유대인의� � 율법을무시하

고�그들의�문화적인�상황에�자신을�순응시켰다.

=====9:22� �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 여기서� '약한� 자'(*� � � ,� � 아스데네이스)란복음에�

대해�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약한� 양심의� 소유자들로서� 반드시� � 극복되어야� � 할상태에� 처한� 사람

들을� 가리킨다(고전� 8:� 9;� 살전� 5� :� 14).� 바울은� 복음을� 바로� 이해하고� 있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자로서� 믿음이� 강한� 상태에� 있었지만�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얻기� 위하여� 그들의� 입장에� 서

서� 그들을� 이해하였으며,� 그들의� 믿음에�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하여� 자신의� 자유를� 제한했다(19

절).� � �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 '여러� 사람'을� 세� 가지� 부류로� � 나누어생각해�

보면(10:32)� 유대인,� 헬라인,� �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에� 속한� 모든� � 그리스도인가운데� 약한� 자들

을� 가리킨다� 할� 수� 있다(Edwards).� 바울이� 다양한� 사람들에게� � � 전도하면서� 그들의� 다양한� 모

양대로� '여러�모양'이�된�것은� 그들을�구원하기�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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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3� 내가� � 복음을� � 위하여� � 모든� 것을� 행함은� -� '모든�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판타'(*� �

� )가� 어떤�사본(* ,� TR)에서는� '투토'(*� � � ,� '이것')라고� 되어� � 있다.� � 즉앞� 구절에서� 바울이� 말

한� 것들을� 가리킨다.� � 바울은� 여러� 사람들과� 여러� 상황에� � 자신을� 순응시켜� 복음을� 전함에� 있어

서�장애가�없게� 했다.� � � 복음에� � � 참예하고자� 함이라� -� '참예'에� � � 해당하는� � � 헬라어� � '슁코이

노노스'(* )는� 원문에� '참예자'라는� 명사로� 되어� 있다.� 이� 단어는� '쉰'(*� ,'...와�

함께')과� '코이노노스'(*� � � ,� '공유자')의� 합성어로서� '...와� 함께� 공유(共有)한� 자'� 라는� 뜻이다.�이� 명사가� '기노마이'(*,� '되다')의� 부정과거� '게노마이'(*� � ,� '되었다')와� 함께� 사용되어� 본� 구절

의� 문자적인� 뜻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복음을� 공유하는� 자가� 되고자'이다.� 결국� 바울은� 자신이�

소유한� �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주어� 같이� 공유하고� 싶다는� 말로써� 전도에� 대한� � 의

지를�표명한�것이다.

=====9:24� 바울은� 본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영광의�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는� 절제와� 노력이� 필

요함을� 권면하기� 위하여� 운동� 경기를� 비유로� 들었다.� 당시� 고린도� 지역에서� 매� � 2년마다� 열렸던�

'이스미안� 경기'(Isthmian� games)가� 올림피안� 경기(Olympian� games),� � 피티안� 경기(Pythian�

games),� 네미안� 경기(Nemean� games)와� 함께� 그리스� 사대� 경기� 중� � 하나이다.� 이스미안� 경기

에는� 주로� 격투기,� 경마� 등이� 진행되었다.� � � 운동장에서� -� '운동장'에� � 해당하는� 헬라어� '스타디

오'(*� )는� � 606.75피트(feet)로� 약� 200m� 길이의� 단위를� 나타내는� 말이다.� � 이것이� � 경기장,� �

곧� � '스타디움'(Stadium)으로� 뜻이� 굳어졌다.� 그� 이유는� 당시� 그리이스� 도시들에� 있는� 경기장들

이� 한스타디오(약� 200m)로� 규격화� 되어� � 있었기� 때문이다.� � �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 이� � 말은문자대로� 육상� 경기에서� 오직� 한� 사람만이� 상을�

얻는� 것처럼� 고린도� 교인들도� 오직� 한사람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당시에는� 운

동� 경기에서�승리하면�상금을주지�않고�명예를�상징하는�월계관을�수여했는데,� 모든� 경주자는�이

러한� 명예를� � 획득하기� 위해� 경기에� 참가했다.� 따라서� 바울이� 의미한� 것은� 경기에서� 우승자가

질주하는것같이� 고린도� 교인들도� 상을� 얻겠다는� 목적� 이외의�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그� �

목표만을�향해�노력하라는�것이다(Godet).

=====9:25� �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 '이기기를�다투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 아고니조

메노스'(*� )는� 동사� '아고니조마이'(*� � � ,� � '경쟁하다',� � '격렬히� 몸부림치다')에서� 파생된� 말로서�

본절에서는� 경주에� 참가하는� 모든� � 자를� 가리킨다.� � �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 '절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엥크라튜에타이'(* � � � )는� 고대� 그리스의� 운동� 경기자들이� 사용했던� 전문� 용어

였다.� � 그들은�통상� 10개월�가량의�고된� 훈련을�받았으며�음식이나,� 오락,� 수면� 시간 등� �

모든일에�있어서� 자신을�절제하여야�했다.� � � 썩을� 면류관을�얻고자�하되� -� 고린도�지역에서� 개최

되었던� '이스미안� � 경기'에서는승자에게� 월계수나� 솔잎,� 또는� 어린� 파슬리(parsley)� 잎을� 엮어� 만

든� � 화환(wreath)을머리에� 씌워� 주었으며� 올림피안� 경기에서는� 우승자에게� 야생� 감나무� 잎으로�

엮은� 화환을� 씌워� 주었다.� 이처럼� 나뭇잎을� 엮어� 만든� 그런� 면류관은� 경기자들에게� 최고의� 영예

(榮譽)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면류관은� 금방� 시드는� 것이었고� 그것을� 쓴� � 우승자의� 영예�역시� 덧없는� 것이다.� � �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 운동� 경기자가� 목표하는� 면류관은� 일

시적인� � 것이지만�그리스도인들이�추구하는�면류관은�영원한�영광의�면류관이다.� 따라서� � 그리스

도인들은� 운동� 경기에� 참여하는� 선수들� 못지� 않게�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갈�

만한�충분한�가치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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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6� �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 '향방� 없는'의� 헬라어� '아델로스'(*� )는� '목표� 없는',�

'불분명한'의� 뜻을� 갖는다.� 달리기� 선수들이� 목표와� 방향을� 분명히� � 정하고경기에� 임하는� 것을�

비유로�삼으면서�바울�자신도�목표와�방향을� � 확고하고 분명하게인식하면서� 신앙� 생활을�

하고� 있음을� 말한다.� � � 싸우기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퓌크튜오'(*� � )는� '퓌그메'(*,'주먹')와�

'퓌크테스'(*� ,� '권투� 선수')의� 합성어이다.� 따라서�이것은� � '권투시합'을� 가리킨다.� 바울은�여기에

서� 달리기� 경주에서� 권투� 시합으로� 비유를� 바꾸어� 표현의� 폭을� 넓히고� 있다.� � �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 이것은� 권투� 선수들이� 시합을� 하기� 전에� 상대방� 없이� 혼자서� 연습하는� 것을� 표

현한� 말로� 전문� 용어로� '스키� 아마키아'(*� � ,'싸움')라고� 하였다.� 바울은� 자신의� 영적인� 싸움이�

상대방이� 없는� 공허한� 것이� 아니라분명한� 대적(對敵)이� 있는� 싸움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둔� 것�같다.

=====9:27� � 내가� 내� 몸을� 쳐� -� '쳐'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포피아죠'(*� � )는� � '휘포'(*� � � ,� '...

아래')와� '옵스'(*� ,� '눈')의� 합성어로서�문자적으로는� '눈� 아래� 부위를� 친다'라는� 뜻이다.� 이� 말은�

매우� 사실적인� 표현으로서� 당시� 권투� � 선수들이상대방의� 얼굴� 부위를� 공격하는� 광경을� 묘사한�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권투� 시합을� 연상하면서� 자신의� 싸울� 대상이� 자기� 몸이� 라는� 것을� 보여

준다.� � '몸'에� � 해당하는� � '소마'(*� � � )는� 고린도전,� 후서에서� '영'과� 상반되는� 개념으로� 주로� 사

용되었다.� � 본절에서는� 세속적이고도� 육체적인� 욕구를� 제어하여� 그리스도를� 섬기기� � 원하는� � 자

신의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 � 복종하게� � 함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둘라고고'(*� )는� '둘로스

'(* � � ,� '종',� '노예')와� '아고'(*� ,� '데려오다',� '끌고� 오다')의� 합성어로서전쟁에서� 승자가� 패

자를� 종으로� 끌고� 오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이것은� 바울이� 자신의몸을� 쳐서� 패배시킨� 후� 이제

는� 온전히� 복종시켜� 종이� 되게� 하였다는� � 말이다.� � 바울은그의� 육체적인� 본성뿐만� 아니라� 정신

적인� 죄의� 성향과� 욕망까지� 복종시키려고� � 하였다(Hodge).� � � 남에게� 전파한� 후에� -� '전파한'의�

헬라어� '케뤽사스'(*� )는� 헬라어� � '케뤽스'(*� � � ,� '전달자')에서� 유래하였다.� 운동� 경기에서� '케뤽

스'의� 임무는� 경기규칙을� 설명하고� 선수들을� 소집시키며� 나팔을� 불어� 시합의� 시작을� 알리는� 일�

등을� � 하였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자신의� 모습을� 전달자인� '케뤽스'에� 비유하였다.� � �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 '버림'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도키모스'(*� )는� '도키마조'(*� � � ,� '조사하다',�

'시험하다')에서� � 파생된� � 말로서� � '불합격자'의� 뜻을� 갖는다.� 또한� 이� 단어는� 옛날� 화폐로� 사용

된� 주화의� 무게를� 달아서� 제� � 무게를� 지닌� 주파와� 그렇지� 못한� 불량� 주화를� 가려내는� 것과� 관련

하여� 자주� 사용되었다.바울이� 버림받는다고� 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 두

가지� � 해석이나올� 수� 있다.� (1)� '구원을� 받지� 못하고� 버림받는다'는� 의미이다(Lenski,� Godet).�

(2)구원에서� 제외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상급을� 받지� 못한다'는� � 것이다(Morris).위의� 두�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한� 듯하다.� 바울은� 자신이� 구원� 얻은� 자로서� 주님을� 마땅히� 섬기지� 못할까�

두려워한�것이다.� 고린도전서�제� 10장

=====10:1� � 헬라어� 본문에는� 접속사� '가르'(*� � ,� 왜냐하면)가� 있어서�앞� 문단의� 내용과� 본장의�

내용이�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 � 형제들아� -� 바울은� 이방인인� 고린도� 교인들을� 향

하여� '형제'라는� 말을� � 사용함으로써� 교회� 전체를� 하나의� 몸(body)으로� 이해하였다.� 또한� 고린도�

교회의� 상황을� �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과� 연결시킴으로써� 고대� 이스라엘� 공동체에� 기독교� 교회

의� 근원이� 있음을� 시사하였다.� 롬� 4장과� 11장에서� 바울은� 이스라엘이라는� 원� 줄기에서� 교회가�

접목되었음을�말하였다.� 그러한�영적� 관계의�맥락� 속에서�이스라엘�민족의�조상들이� � 교회구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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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의�조상이�될� 수� 있다.� � � 너희가�알지� 못하기를�내가�원치� 아니하노니� -� 이것은�고린도�교인들

이� 출애굽� � 사건을� 모른다는� 의미가� 아니다.� 바울이�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그들이� � 출애굽� � 사

건이지닌�참된�의미를�충분히�파악하지�못할까하는� 염려�때문이다.� � � 우리� 조상들이�다� -� 여기에

서� '다'(*,� 판테스)라는� 말이� 강조되어� 2,� 3,� 4절에서� 5번에� 걸쳐� 반복된다.� 이처럼� 반복하여� 강

조하는�것은�대다수의�사람들이� 멸망하였다(5절)는� 사실을�더욱� 강조하기� 위함이다.� � � 구름� 아래�

있고� -� '아래'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포'(*� )는� 공간적으로� 구름� 아래� 있었다는�것이� 아니라� 하나

님의�보호와�인도를�받아� 출애굽하여�구원받았다는� 사실을�말한다.� 여기서�구름은�하나님의�인도

를� 의미한다(출� 13:21,� 22;14:19,� 24등).� � �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의�구원하심을�확실히 체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광야에서� 멸망받았다.� 따라서�

고린도� 교인들도� � 끊임없는� 경건과� 영적인� 각성(覺醒)� 없이는� 멸망받은� 이스라엘� 조상들과� 같은� �전철(前轍)을밟게� 될� 것이다.� 본절에서� 바울은�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을�통하여� 고린도� � 교인들에게교훈을�주고자�하고� 있다.

=====10:2� 모세에게�속하여� -� 홍해를� 건너는�위기의� 순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 모세롤� � 굳게

믿음으로써�모세와� 하나로� 결합되었음을�의미한다.� 그와� � 마찬가지로� � 그리스도인들은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연합체를� � 이루는� � 것이다(롬� � 6:3-5).� � � 구름과� 바다

에서�세례를�받고� -� 혹자는� � 구름과�바다가�이스라엘�백성을 애굽인들과� 공간적으로� 차단해�

주는� 역할을� 하였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의� 백성을� 세상으로부터구별해주는� 역할이었고� 동시에�

모세의� 권위를� 높여주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의� � 제자가� 되게� 하는데� 기여했다고� 한다.� � 그들

은� 이러한� 관점에서� 구름과� 바다가� 그리스도인들의� 세례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고� 해석한다

(Lenski).� 그러나� 이에� 대한� 보다� � 심층적인� 의미를� 분석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즉� 이스라엘� 백

성들은�구름�기둥을�통해� � 인도함을�받고� 홍해�바다를�건너는�체험을�함으로써� � 그들에게 베 푸

시는� 하나님의� 사랑과초자연적� 능력을� 극적으로� 경험하게� 되었다.�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

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거룩한� 백성이라는� 정체성(正體性,� identity)을� 갖게� 해주는� 결정적� 역할을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구름� 기둥과� 홍해� 바다'의�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 곧'구원� 받

은� 백성'이라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구름과� 바다'는� 구원의� 도구가� 되었으며�

그리스도인의� '물세례'를�상징한다(롬� 6:3).

=====10:3� 신령한� 식물� -�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뉴마티콘� 브로마'(*� � )에서� '식물'을� 뜻

하는� '브로마'(*� )는� 단순히� '고기'만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고� 전반적인� 음식물을� 나타낸다.� 본문

은� '만나'를� 가리키는� 것임이� � 분명하다(출� � 16:4,� 14-18).� 그런데� 이� '만나'에� 대한� 학자들의�

해석이� 다양하다.� (1)� 유형론적(類型論的,� typical)� 해석을� 하는� 자들의� 견해로,� 이에� 따르면� '신령한� 식물'은� 보다� � 고상하고� 미래적인� 것의� 모형으로서� 물질적인�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

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에서� 쓰여진� '신령한'이라는� 단어의� 사용과� 일치하지� 않는다.�

(2)� 혹자는� 이를� '영혼을� 위한� 식물'이었다고� 해석한다.� 즉� 만나는� 신� 뿐만� 아니라� 영혼을� � 위해

서도�주어진� 음식이라는� 견해이다(Calvin).� 이� 견해에�따르면� '만나'는� � 곧� � 성만찬때�예수님께서�

나누어� 주신� 떡과� 동일한� 효력을� 지닌다고� 한다.� 그러나� � 이것은� � 다소무리한� 해석이다.� 왜냐하

면� 만나는� 평상적인� 주식물(主食物)로� 주어진� 것이었기� � 때문이다(느� 9� :� 15).� 또한� 예수님께서는� 만나가� 영혼을� 구원하는� 영적인� � 효력이� � 없음을말씀하시고� � 예수� 자신만이�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참� 떡이심을� 가르쳤다(요� 6:49-58).(3)� 혹자는� 만나를� '성령으로부터� 유래된'(procceding�

from� the� Divine� Spirit)� � 것으로�보는데�이�견해가�가장�타당한�듯하다(창� 1:2;� 시� 33:6).�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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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께서는�모든� � 피조물�가운데에서�성령으로� 역사하신다.� 만나는�자연적이고�일상적인�음식이�아

니라�성령의�역사로�공급된�초자연적인�양식이었다.

=====10:4� � 저희를�따르는�신령한�반석� -� '따르는'에� 해당하는�헬라어� '아콜루두세스'(*

� )는� 미완료형으로서� 계속적으로� 뒤따랐다는� 의미를� 갖는다.� � 그러므로� 몇몇� 주석가들

은� 바울이� 랍비들� 사이에서� 전해져오는� 우화를� 인용하였다고� � 주장한다(Ruckert,� Baur,� de�

Wette,� Meyer).� 그� 우화에� 의하면� 14피트� 높이의� 바위� 덩어리가이스라엘� 백성들을� 따라다니며�

물을� 뿜어냈다고� 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그러한� � 전설을� 근거로� 해서� 교회를� 가르쳤다고� 보

기는�어렵다.� 더욱이� '반석'에� 해당하는� � 헬라어� '페트라스'(*� � � )는� 움직일� 수� 있는� 바윗� 덩어리

를�가리키는� '페트로스'(* � � � )와는� 달리� 움직일� 수� 없는� 고정된� 암반을� 가리키는� 말이다.� 본절

에서� � 바울은� 물질적인� 바위� 배후에� 그� 물의� 참된� 근원인�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주

지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 � 마셨으매� -� 앞� 문장에서의� '마셨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온

'(*� � � )은� 부정� 과거로� 마신� 것이� 과거� 사실이라는� 점에� 역점을� 두는� 반면,� 본� 구절에서의� '마셨

으매'(*� � ,� 에피논)는� 미완료� 시제로�사용되어� 이스라엘� 백성이� '계속해서�마셨다'는� 사실을�강조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적적인� 방법을� 통하여� 메마른� � 광야에서계속� 물을� 공급받았으며� 그�

공급의�근원은�바로� 그리스도였다.� 바울은�구약 시대에나신약� 시대에나�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를� 구원하는� 생명의� 떡이며� 물이심을� 강조하고� 있다(요� 6� :� 31,� 32).� 주께서는� 배고픔

과� 갈증으로� 헤매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시급했던� 음식과� 물을� 제공� 하셨다(요� 7� :� 37-39).�

마찬가지로� 영적� 이스라엘� � 백성인고린도� 교인들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은� '신령한� 음료'와�

'신령한� 식물'의� 근원이되시는� 그리스도이심을� 바울은� 주지시킨다.� � �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 바울이� 그리스도를� 반석에� 비유한� 것과� 같이� 신� 32� :4,� 15,� 18등에서는� 하나님을� 반석에� 비

유하고�있다.� 이사야는� � 여호와를� � '능력의� � 반석',� '영원한�반석'� 등으로�표현하는데(사� 17� :� 10�

;� 26:4)� 이는� 그리스도에� 관한� � 것임이�분명하고(요� 12:41)� 본� 구절은�그리스도가�이� 땅에� 오시

기� 전에� 이미� 선재(先在)하셨음을� 뒷받침하는� 구절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생활하는�동안 이스라엘백성의� 신령한� 반석이셨던� 여호와가� 바로� 그리스도였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

그들과동행하셨으며�그들의�구원자였다.

=====10:5�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 신령한

음식인� 만나보다는� 애굽의� 고기를� 더� 좋아하는� 등� 하나님께� 많은� � 은혜를� � 받았음에도불구하고�

불순종하고� 원망하는� 죄를� 범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모두� 광야

에서� 멸망당하는� 운명에� 처할� 수� 밖에� 없었다(민� 26:65).� � � 멸망을� 받았느니라� -� 여기에� 해당하

는� 헬라어� '카테스트로데산'(*� � � )은� '카타스트론뉘미'(*� � � )의� 부정과거� 수동태로� 씨앗� 등이� 흩

뿌려져'표면을� 뒤덮다'� 또는� 폭풍으로� 말미암아� '쓰러지다'의� 뜻이� 있다.� 본절은� 민� 14� :� 16을�

인용한� 것으로서�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비참하게� 멸망받은� � 모습을생생히� 표현

해� 주고� 있다.� 바울이� 이같은� 역사적� 사실을� 예로� 든� 이유는� 비록� � 그들이성찬에� 유추(類推,�analogy)될� 수� 있는� '신령한� 식물과� 음료'를� 먹고� 마셨을지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지� 못

할�때에는�멸망받았던�것처럼�고린도�교인들도 '성찬'에참여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기쁘

시게�해드리지�못할�때� 하늘나라를�유업으로�받을�수없음을�가르치기�위함이었다.

=====10:6� � 거울이� � 되어� -� '거울'에� 해당하는�헬라어� '튀포이'(*)는� '튀프토'(* � ,'치다')에서�

파생된� 단어로� '타격을� 가한� 흔적'이라는� � 뜻이었다가� � 후에는'표상',� '윤곽'� 등의� 뉘앙스를� 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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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을� 의미하였다.� 또한� 신약에서� � 이� � 단어는'표상'(롬� 5:14),� '식양'(행� 7:44),� � 본받아야� �

할� � '모범'(살전� � 1:7;살후� � 3:9;딤전4:12;벧전� 5:3)� 등의� 의미를� 가졌다.� 본절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실패를 교훈으로삼아�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에� 지워지지� 않을� 하나의� 흔적으로� 새겨놓

으라는�강한�의미를�담고� 있다.� � � 악을� 즐겨하는� 자� -� '즐겨하는'에� 해당하는�헬라어� '에페뒤메산

'(*� � )은� '뒤모스'(*� ,� '영혼')와� 전치사� '에피'(*� � ,� '...쪽으로')의� 합성어로사람의� 마음이� 뭔가를�

하고자� 하여� 한쪽으로� 쏠려있는� 상태를� 나타낸다.� 민� 11:4,� 5에의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악을�

갈망했었다.� 그들이�애굽에서�먹던�고기와�야채를� � 간절히�사모하자�하나님께서는�그들의�요구를�

채워주시기는� 하셨으나� 그들의� 탐욕에� � 대해서는� 진노로� 큰� 재앙을� 내리셨다(민� 11:33,� 34).� 하

나님께서� 금지하신� 것에� 대한� 갈망은� 곧� 그들의� 불신앙의� 증거였다.� 바울은� 이러한� 역사적인� 사

실을�전제로�고린도�교인들이�이교도들의�희생�제물� 축제에�참여하지�말�것을� 경고하고�있다.

=====10:7� �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데� 에이돌롤

라트라이� 기네스데'(*)의� 문자적인� 의미는� '우상� 숭배자가� 되기를� 멈추라'는� 뜻으로� 바울의� 이러

한� 표현은� 고린도� 교인들� 중� � 일부가� � 이미우상� 숭배를� 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고린도� 교인들

은�이스라엘�백성�들이 금송아지우상을� 숭배한� 것(출� 32� :4ff.)같이� 이교도들의� 관습,� 즉� 우

상의� 신전에서� 열리는� � 연회에� 참가함으로써� 우상� 숭배의� 행동을� 범하였다.� 바울은� 8장에서� 우

상� � 제물에� � 대한문제를� 이미� 다루었고� 여기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 숭배와� 고린도� 교인의�

우상� � 숭배를� 비교하고� 있다.� � �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

을� 경배한� 후� � 불경스러운� 향연을� 벌인� 모습을� 묘사한다(출� 32:6).� � � 뛰논다� -�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이제인'(*� � ,� '어린아이� 같이� 놀다')은� 특별히� 춤추는� 것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단어로�

이스라엘� � 백성이� � 금송아지를가운데�놓고�놀며� 춤추던�것을� 묘사할�때로� 사용되었다(출� 32:6).

=====10:8� �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 이스라엘� 백성이� 저지른� 또하나의� 범죄는� '

간음'이었다.� '간음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르뉴오멘'(*� � )은� 일반적으로� 성적인� 부정� 행위를�

나타낼�때� 사용된�용어로서� 5장에서�사용된 용어들과� � 어원이같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을�

지날� 때� 그곳에� 있는� 모압� 여인들에게� 이스라엘� 젊은청년들이� 유혹을� 받아� 바알브올� 우상을� 경

배하였다.� 바알브올을�섬기는� � 제사� � 행위는처녀들과의�음행을� 통하여�이루어졌다(민� 25� :� 1-9).�

따라서� 우상� 숭배와� 간음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바울� 당시의� 고린도� 지역

도� 종교적인� 매춘� 행위가� 성행하던� 도시로� 이름이� 높았다.� 고린도� 교인들은� 여신� '비너스'를� 섬

겼으며� � 비너스� 신전에서� 열리는� 우상의� 축제에는� 바알브올을� 섬길� 때� 행해지던� 음행이� 그대로� �

재현(再現)되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본절의� 내용을�통하여� 우상� 숭배와�간음죄는�하나님께� 큰� 죄악이므로� 그러한� 유혹에� 빠지지� 말� 것을� 간곡하게� 권면하고� 있다.� � �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브올� 우상을� 섬기며� 그곳� � 여인들과� 음란한� 교제를� 나눌� 때� 하나님께서

는� 징벌로� 전염병이� 돌게� 하셨으며� 그� 일로� 이만� 삼천� 명이나� 죽음을� 당해야만� 했다(민� 25� :�

1-9).� 한편� 그� 당시� 죽은� 사람의� � 숫자가� 민� 25� :� 9� (70인역),� 필로(Philo),� 요세푸스이

(Josephus)� 등에� 의해� 2만4천� 명으로제시되어� 천명의� 차이가� 생긴다.� 그러나� 이런� 차이는� 민�

25:9의� 내용이� 환난의� 전� � 기간(이틀)� 동안의� 희생자를� 언급한� 데� 반하여� 본절에서는� 당일� 하루

만� � 계산한� � 것으로해석될�수도�있다.

=====10:9� � 시험하다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크페이라조멘'(*� � )은하나님의� 선하심,� 능

력,� 지혜� 등을� 그릇된� 동기에서� 알아보려는� 인간의� 생각을� 가리키는� 동사이다(마� 4:7;행� 5:9;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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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관용을� 시험하고� 구원의� 능력을� 시험하였

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인간이� 범할� � 수있는� 인간이� 범할� 수� 있는� 죄� 중에서� 가장� 큰� 죄이

다.� � � 우리는�저희와�같이�시험하지�말자� -� 모세� 시대에�이스라엘�백성들이�하였던� � 것처럼�고린

도� 교인들도� 주를� 시험하는� 죄를� 범하였다.� 그들은� 율법으로부터� 해방된� �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사용함에� 있어서� 그� 한계(限界)를� 벗어났다.� 즉� 이교도들의� 우상� � 축제에� 참여함으로� 주를� 시험하였던� 것이다.� 고린도� 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우상숭배의� 죄에� 빠지지� 않도록� 구원하실�

수� 있는지를� 시험하였으며� 설사� 그러한� 죄를� � 범했다고� 할지라도� 용서하고� 다시� 일으켜� 세워주

시는�관용이�있는지를�시험하였다.� 바울은�고린도� 교인들의�이런�상태를�경고하면서� 자신을�포함

한� 의미로� 2인칭� 복수� 동사를사용하고� 있다.� 이로써� 주를� 시험할� 가능성이� 바울을� 포함한� 모두

에게�있음을� � 시사한다.

=====10:10� 원망하다가� -� 본절에서�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이� 지은� 네번째� 잘못을� � 언급하고� �

있다.� 이것은� 모세와� 아론을� 향한� 이스라엘� 백성의� 원망이었다.� � 본절은� 고라의� � 반역과그를� 따

르는� 일만� 사천� 칠백� 명이� 염병으로� 멸망한� 사건을� 가리키는� 듯하다(민� 16:41,49).� 이스라엘� 백

성의� 원망이� 9장에도� 나오는데� 본절이� 가나안� 정탐군의� 보고를� � 듣고가데스� 바네아에서� 하나님

을� 향해� 원망을� 발했던�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언급이라고� 볼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에는� 이스라

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즉각적인� 심판이� � 없었으므로� 전자의� 경우로�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Godet).� � � 멸망시키는� 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올로드류투'(*� � � )는� � 히브리어� '함마쉬히트

'(*� � � )의� 인용으로(출� 12:23)� 하나님의� 심판을� � 수행하기위해� 온� 멸망� 시키는� 하나님의� '천사'

를� 가리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 아론을원망하다가� 치명적인� 염병(plague)으로� 멸망을�

받았다(민� 16:48).� 바울은� 이� '염병'을출� 12� :23� 의� 내용에� 근거하여� '멸망시키는� 자'로� 해석했

을� 것이다(Godet).� 고린도�교인들� 중에� 바울을� 반대하여� 우상� 축제에� 참여하는� 일단의� 무리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울의� 가르침에� 따라� 우상� 축세� 참여에� 반대하는� 그들의� 지도자들에� 대하여� 원

망과� � 불평을� 하였다.� 바울은� 그러한� 불평자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의� 예를� 들어� 경고를� 하고� 있

다.

=====10:11� � 말세를�만난� -� 이에� 해당하는�헬라어� '타� 텔레� 톤� 아이오논'(*� � )은� 문자적으로� '

세대들의� 끝'이라는� 의미이다.� 이� 말은� 유대인� 시대의� 끝을� � 뜻하기도하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의

미하기도� 한다(Hendriksen,� 마� 13:39;히� 1:2).� 또한� � '메시야� 시대'� 자체를�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Godet).� 그러나� 바울이� 긴� 세월의� '완성'을뜻하는� 단어� '운텔레이아'(*� � � )를� 사용하지� � 않

고,� 한� 세월의� '끝'을� 뜻하는� '타� 텔레'(*� � )를� 사용한�것으로�보아� 창조� 이래� � 지나간� � 모든� � 시

대의'끝'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Lenski).� 즉� 그리스도가� 이땅에� 옴으로써� 유대� � 민족이율법을�

통한� 제한적인� 구원의� 길로� 인도되었던� 시대가� 막을� 내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시대가�

열렸음을� 뜻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히� 9:26).� � � 우리의� 경계로� -� '경계'에� 해당하는� 헬

라어� '누데시안'(*� )은� '권고하다'� 혹은� '교정하다'는� 뜻을� 갖는� 단어로(살전� 5:12,� 14)� 앞에서�

언급한�내용들이� � 당시� 고린도�교인들에게�필수적인�것임을�강조한다.

=====10:12� � 그런즉�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스테'(*� � )는� '그러므로'라는� 뜻으로,� 바울이�

앞에서� 열거한� 예증을� 근거로�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충고하려는� 의도를� 나타내는접속사이다.� � �

선� 줄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스타나이'(*� � )는� 현재� 서있는� 모습을표현하는� 말로,� 신앙이�

아무런� 흠없이� 온전하다는� 뜻이다.� 고린도� 교인들은� 그들의� 복음에� 대한� 지식과� 생활이� 흠이�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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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 � 넘어질까� 조심하라� -�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선택된� 민족이며� � '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에� � 결코� 이방의� � 침략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였었다(겔� 12:22).� 이와� 마찬가지로� 고린도� 교인들� 중에도� 자신들이� � 이미예수

의� 피로� 깨끗함을� 입었기� 때문에� 우상의� 제사에� 참석하고� 그� 제물을� 먹어도� � 아무런� 해가� 없다

고� 하는� 자들이� � 있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의�형벌로�죽은� 사실을�지적하면서(5,� 8절)� 믿음� � 가운데있을�것을�강조하고�있다.

=====10:13� 시험�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이라스모스'(*� � � )는� 종교적인� � 의미로� 주로� 사

용되었고� 의학적으로는� 실험한다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신약에서는� � 주로'유혹'(temptation)이

나� '시련'(trial)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유혹'이라는� � 것은사단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죄에� 빠

지도록� 하는� 것이고(마� 6:13;눅� 11:4;계� 2:10)� � '시련'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

녀들을� 연단하기� 위하여� � 허락하시는� � 것을의미한다(마� 5:4,� 10;약� 1:12;벧전� 4:12).� � � 오직� 하

나님은� 미쁘사� -� '미쁘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토스'(*)는'신실(信實)하다'는� 말로서� '믿을� 수�있다'는� 뜻이다.� 즉� 고린도� 교인들이� 가지고� � 있었던� 복음에� 대한� 지식이나� 그들이� 자처하는� 경

건의� 생활로� 모든� 시험을� 이길� 수� 있는것이� 아니었다.� 오직�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써만� 그들의�

안전이� 보장되는� � 것이었다(Hendriksen).� � �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 본절에서 나오는� '시험� � 당함'의� 의미를� '유혹'(temptation)과� '시련'(trial)이라는� 두� 가

지� 의미로� 나누어� � � 양자� 택일의� 개념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두� 가지� 의미가� 복합된� � 일원론

적인� � 의미로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Grosheide).� 약� 1� :� 14의�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

것은자기� 욕심에� 끌려� � 미혹� 됨이니'라는� 말씀과� 같이� 비록� 하나님의� � 자녀들이� � 자신들의욕심

에� 끌려� 유혹을� 받고� 시련을� 당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또한� 그러한� � 시련을� � 통하여그들을� 연단하

시고� 훈계하신다.� � �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 이� 말씀을� 두가지로� 해석할� 수� 있

다.� � (1)시험이�임할� 때� 우리에게�회할�길을�하나님께서�만들어�주신다는�의미로�하나님은� � 시험

과는� 무관한� 분이심을� 전제한다.� (2)� 하나님께서� 시험을� 허락하실� 때� 피할� 길도� � 함께� 예비하신

다는�의미로�하나님께서� � � 시험을� � 허락하시는 �주관자이심을 전제한다(Hendriksen).�

그런데� 본절에서는� '즈음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 '쉰'(*� � � ,'...와함께')이� 사용되어� 후자의� 해석이�

더욱� 타당함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 우리로� � 하여금감당할� 수� 없는� 시험은� 허락지� 않으시며� 또

한�직면한�시험을�견뎌낼�수� 있는�힘을� � 공급해�주시는�신실한�분이시다.

=====10:14� � 그런즉�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오페르'(*� � )는� 앞구절과� 매우� � 밀접하게� 논

리적으로� 연결되는� 서술임을� 나타낸다.� 바울은� 지금까지� 말한� 사실들로부터� 결론을� 도출해내고�

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본보기로� 고린도� 교회의� 상황,� 즉� � 우상숭배� 축제의� 참여에� 적용�

시킨다.� � � 내� 사랑하는� 자들아� -� 바울은�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뜨거운� 애정을� 표현하면서� 바른태

도를� 취할� 것을� 급박하게� 권면하고� 있다(Lenski,� Morris).� � �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 '피하

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 '퓨게테'(*� � )는� KJV에는� '달아나라'(flee)로� 번역되어� 있다.� 죄를� 피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 도망하여� 멀리� 있는� 것이다.� 희생� 제사의� 축연이� 곧� 우상� 숭배는� 아니

었으나� 그것은� � 우상� 승배의� 경계선까지� 가는� 행위였으며� 또한� 충분히� 우상� 숭배에� 빠지도록� 할� �

가능성이� 있었다(Godet).� 그러기에� 바울은� 여기서� 단순히� 우상� 숭배만을� 하지� � 말라는� � 것이아

니라�그렇게�될� 가능성이�있는�일조차도�하지�말라고�가르친다.

=====10:15� 지혜� 있는� 자들에게�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니모이스'(*� � )는� 1:19에서� 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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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된� '지혜있는'(*� � ,� 소포스)과는�달리� '지각있는',� '총명한'등을� 의미한다.� 바울은�고린도�교인들

을� 지각있고� 총명한� 자로� 규정하고� 그들에게� � 권면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양심을� 속여

가며� 제물의� 고기를� 먹고� 동시에� � 그리스도의�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분별(分別)하라고� 촉구한다.� � � 스스로� 판단하라� -� 고린도� 교인들이� 실제로� 지혜가� 있었는지는� 언급되어

있지� � 않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가정하였다.� � 그가� 그렇게� 말한� 것에는� 고린도� 교인

들이�자신의�말을�이해하고�수용하기를�바라는�심정이�포함된다.

=====10:16� 본절부터는� '성만찬'에�관해� 언급하고�있다.� 신약� 시대의�성만찬은�구약�시대의�화

목제사� 뒤에� 있었던� '축제'와� 상응하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제사를� 드린� 후� 그의� 가족들과� 함

께� 성전� 뜰에서� 신성한� 축제를� 가졌다.� 거기에는� 제사장도� 같이� 참여하였다.제단에� 드려지지� 않

고� 남은� 재물은�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함께� 먹었는데� 재물을� � 먹는것은�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주

시는� 은총과� 화해의�보증이� 되는� 행위였다(Godet).� � 마찬가지로�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

과� 인간� 사이에� 화목이� 이루어졌다는� 화해의� 표식이� 된다.� 신약의� 교회에서는� 주님께서� 최후의�

만찬때에� 시행했던� 것을� 기념하기� � 위한� 것으로� 성찬이� 시행되었으며,� 이러한� 성찬을� 통해� 그리

스도와� 연합된� 몸임을� � 확인한다.� 즉� 주님의� 살과� 피로� 상징되는�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

그리스도와� 한� 몸임을� 인정하고�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하며� 주님과� 교제를� 나눈다는� 의미를� 갖는

다.� � 뿐만� 아니라� 다른� 신자들과� 서로� 하나� 된� 지체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 � 축복의� 잔은� -� '축

복'(*� ,� 율로기아스)� 이라는� 말은� � '찬사'나� � '복을비는� 것'을� 뜻한다.� 유대인들� 술잔을� 들� 때� 복

을� 기원하는� 관습을� 가지고� 있었으며� 유월절에� 마셔야� 하는� 네� 잔� 가운데� 세� 번째� 잔이� '축복의�

잔'(* � � ,� 토� 포테리온� 테스� 율로기아스)이었다.� � � 참예함이� -� '참

예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이노니아'(*� � )는� � '교제'(communion)를� 뜻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성만찬의� 떡과� 잔을� 받아� 먹고� � 마시는� � 것은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적인� 교제가� 이루어진다는� 의

미를�갖는다.� � � 우리가�떼는� 떡은� -� 여기에서�바울은�성만찬의�원래�순서와는�달리� '떡'보다� � '잔

'을� 먼저� 언급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보혈을� 강조하려는� 의도인� � 것� � 같다.� 잔과�

떡은� 그리스도의� 피와� 몸을� 상징하는� 것으로� 그것을� 먹고� 마시는� 것은� � 그리스도와� 살과� 피를�

먹는�것을� 의미하지�않는다.

=====10:17� � 본절의� 전체적인� 의미는� 그들이� 떼어� 먹는� 떡이� 한� 덩어리인� 것처럼� 비록� 많은� �

사람들이� 모여있다고� 할지라도� 실상� 그리스도인들은� 한� 몸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 � 한몸이니�

-� 이에� 대해�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혹자는� '한� 몸'(*� � � ,� 헨소마)이란� '그리스도의� 몸'을� 말

하는� � 것이� � 아니라� � '회중의� � 유기적인� � 단일체'(theorganic� unity� of� the� congregation)를�

뜻한다고� 한다(Grosheide).� 그러나� 본절에서는성도와의� 연합의� 관점에서� 언급하려는� 것이� 아니

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 머리로� � 하는공동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뜻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Meyer,� Godet,� � Osiander).왜냐하면� 16,� 17절에서�한� 떡을� 떼므로� 그리스도의�몸에� 참예한다

고�말하고�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한� 덩어리의� 떡을�

떼는� 의식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더불어� 모든� 교인들이� 하나의� 신비한� 영체(靈體)를� 이루게� 된다고�말한�것이다(엡� 5:23;골� 1:18).

=====10:18�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 -� 이것은� 혈통(血統)에� 의한� 민족적인� 이스라엘을� 말하는것으로서,� 그리스도를�믿음으로�하나님의�참된�백성이�된� '영적인�이스라엘'(* � � � ,�

이스라엘� 카타� 프뉴마)과� 상반된다.� 이로써� 앞구절에서� � 언급한� 성찬의식을� 유대인의� 의식과�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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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하려� 하고� 있다.� � � 제물을� 먹는� 자들이...아니냐� -�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릴� 때� �

제물을제단� 위에� 태워서� 드리고� 남은� 고기를� 제사장과� 제물을� 드리는� 자들이� 성전� 뜰에서� 나누

어� 먹었다(레� 7� :� 15).� 바울은� 여기에서� 고린도� 교인들의� 주의를� 다시� 구약으로� � 돌려서� 옛� 이

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전에서� 제물을� 먹은� 것과� 고린도� 교인들이� � 우상� 축제에� 참여하여�

제물을� 먹는� 것과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 � 제단에� 참여하는� 자들� -� 제물은� 제단� 위에� 드려지

는� 것이므로� 제물을� 먹는� 것은� 제단에� 참여하는� 것이� 된다.� 또한� 제단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

는�곳이다.� 그러므로� � 결국� 이스라엘�백성이�제물을�먹는 것은� � 하나님을 예배하는� � 하

나의� � 행위가� � 되었다(Hendriksen).� 바울은� 이에� 비추어� 이방� 신전에서� 열리는� 우상의� 축제에�

고린도� � 교인들이� 참여하여� 같이� 제물을� 먹는� 것은� 곧� 이방의� 신(神)과� 교제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10:19� �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라� 하느뇨� -� 어떤� 사본에는� '우상의� 제물'

에해당하는�헬라어� '에이돌로뒤톤'(*� � � )과� '우상'에� 해당하는� � 헬라어'에이돌론'(*� )의� 위치를�바

꾸어� 그� 강조점에� 차이를� 두었다.� 바울은� � 이러한질문을� 통해� '우상'이든� '우상의� 제물'이든� 모두

가� 거짓임을� 강조한다.� � 우상은� � 실재(實在)하지� 않는� 것이며(고전� 8� :� 4)� 우상의� 제물� 역시� 아무것도�아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이방인들의� � 제사는�여전히�우상� 숭배였으며�고린도�교인들의�

신앙을�위태롭게하는�것이었다.

=====10:20� � 이방인의�제사하는�것은�귀신에게� 하는�것이요� -� 앞구절에서� 우상의�허구성을�지

적하고� 본절에서는� 그� 우상� 배후에� 영적인�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귀신임을� 시사한다.� 당시� 헬라

인들이� � 섬기던� � 신들은� 쥬피터(Jupiter),� 아폴로(Apollo),� 비너스(Venus)� � 등신화에� 근거해� 의

인화된�신들로�실재(實在)하는� 존재들이�아니었다.� 그러나 이� � 모든신화적� 존재들의� 배후에

는� 사악한� 힘,� 곧� 사단의� 세력이� 역사하고� 있음을� 바울은� 지적한다(Godet).� 우상� 자체는� 결코�

신(神)적인� 존재들이� 아니다.� 그럼에도� � 불구하고� � 그배후에는� 살아서� 활동하는� 영적인� 존재들이�있다(엡� 2� :� 3� ;6� :� 12).� '귀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다이모니오이스'(*� )는� '하급의� 신',� '잡신'� �

등을� � 의미하는'다이몬'(*� � � )에서� 나온� 파생어로서� 바울서신에서는� 본절과� 딤전� 4� :� � 1에서만�

나온다.� 본절은� 신� 32:17을� 그대로� 바울이� 인용한� 것이다(시� 96:5;106:37).� � � 귀신과� 교제하는�

자� -� '교제'에� 해당하는� 헬라어� � � '코이노누스'(')는'친교'(communion),� 혹은� '협동'(fellowship)

의� 뜻으로� 16절의� 그리스도와� 교제한다는문맥에서도� '참예함'이라� 번역되어� 동일하게� 사용되었

다.� 본절에서는� 우상� 그� � 자체와친교를� 갖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어둠의� 세력과� 결탁된� 악한� 영

들과� � 짝이� � 된다는�뜻이다(Grosheide).

=====10:21� 주의� 잔과� 귀신의� 잔� -� 바울이� 17절에서는� '떡'을� 앞에� 두어� 강조하고� � 있는� � 반

면본절에서는� '잔'에� 강조를� 두어� '잔'을� 앞에� 두었다.� 이렇게� 하여� '잔'과� '떡'이� 모두중요함을�

균형있게�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주의� 잔'을� '귀신의� � 잔'과� � 대비시킴으로명백하게� 구분짓고� 있

다.� 당시에� 헬라인들은� 자기들의� 신전에서� 향연을� 베풀� 때� � 첫번째� 술잔은� '쥬피터'(Jupiter)에게�

두번째는� 쥬피터와� � '님프'(Nymphs)에게,� � 세번째는'쥬피터� 소터'(Jupiter� Soter)에게� 바쳤다

(Godet).� 또한� 술과� 고기� 등� 모든� 음식은� 우상의� 이름으로� 축복되고� 봉헌되었다(삼상� 9:12,�

13).� � 이러한� 술잔을� 드는� 것은� 곧� 악령의� 세력에� 굴복하는� 것이고� 복의� 근원이� 우상에게� 있다

는� 것을� 인정하는� � 행위이다.그러나� 성찬에서� 주의� 잔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임을�

인정하는� 행위이다.� � � 주의� 상과� 귀신의� 상� -� '주의� 상'에서는� 주님께서� 주인이시고� 그에� 참예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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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들은그의�손님이�된다.� '귀신의�상'에서는�귀신이�주인이�되고� 참석자들은�귀신의� � 객(客)이� 된다(Hendriksen).� '주의� 상'과� '귀신의� 상'은� '잔'과� 마찬가지로� � 서로� � 배타적이다.� 그러므로� 두�

주인을�동시에�섬길� 수� 없듯이�주의� 상과� 귀신의�상에� 동시에�참여할수�없다(고후� 6:14-18).

=====10:22�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 '노여워하시게'에� � 해당하는� � 헬라어� � '파라젤루멘

'(* � � � )은� '질투하게� 하다'(to� provoke� to� jealousy)는� 뜻으로� � '질투하다'에� 해

당하는� '젤로오'(*)와� '곁에'라는� 의미의� 전치사� '파라'(*� � � )의합성어이다.� '젤로오'는� 좋은� 의미

로는� � '부러워하다'라는� � 뉘앙스를� � 가지고� � 있어서(TDNT) 하나님의� � 열심에� 대해� 묘사하기

도� 한다(겔� 39� :� 25).� 이� '질투'는� 사랑과�신뢰에�대한� 배신을� 당하여�유발되는� 감정으로�인간이�

갖는� 분노� 중에� 가장� 강렬한� 것이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백성이� 우상을� 섬길� 때� 하나님께서� 드

러내시는�분노를�표현하는데�있어서�가장� 적절하다(Hendriksen).� 구약� 시편에서도 '질투� �

하다'에� � 해당하는'카나'(*� � )가�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 감정을� � 표현할� � 때� � 사용되었으며

(시78:58),� 신� 32:16,� 21에서는� 다른� 신으로� 하나님의� 질투를� 일으키게� 하는� � 이스라엘의상태

를�묘사할�때� 사용되었다.� � � 우리가�주보다�강한�자냐� -� 본절은�앞�구절과�마찬가지로�수사적�의

문문을� � 사용하여�반어적�표현으로�당연한�사실을�강조하고�있다.� 하나님의�능력은�절대적이므로� �

그어떠한� 것보다도� 강하시고� 그� 무엇도� 그분을� 굴복시킬� 수� 없다.� 본절의� 질문은� 둘� � 중에� 하나

를� 택하여야� 한다는� 것에� 역점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고린도� 교인들이마음으로� 하나님

의� 속성을� 인정하고� 있음을� 단정하고� 질문한�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그들이� 이미� 정한� 마음을�

거슬려서� 어떤� 것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Grosheide).� 바울의� 이러한� 질

문을� 통해� 고린도� 교인들은� 이미� 결정한� 것을� 확고히� 하고� 그들이� 지은� 죄가� 얼마나� 무거운� 것

이었는가를�깨닫게�될� 것이다.

=====10:23� 모든� 것이� � 가하나� -� 본절의� � 논의는�바울이� 이미� 6� :� 12에서� 언급한�내용의� � 반

복이다.� 본절에서는� 개인적인� 차원의� � 자유보다는�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자유의� 개념에� 초

점을� 맞추고� 있다.� 바울은� 이미� 8장에서� 우상에게� 드려진� 제물을� 먹는� 것은� 그자체만으로는� 아

무것도� 아니지만� 그러한� 개인적인� 자유가� 교회� 공동체에� 해악을� � 끼치게� 될� 때� 그것은� 제약(制約)을� 받을� 수� 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바울은� � 본절에서� 두� 가지를� 제시하여� 그리스도인의�자유는�분명한�원칙� 가운데�시행되는�것임을� � 보여준다.� � � 유익한�것� -� 이에�해당하는�헬라어�

'쉼페레이'(*� )는� 개인의� 영적인� � 유익을� 말하는� 것으로(Godet)� '이익이� 되는'(beneficial)이라�

번역할� � 수� � 있다(NIV).이에대한� 자세한� 주석은� 6� :� 12을� 참조하라.� � � 덕을� 세우는� 것�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코도메이'(*� � )는� � 특별히� 이웃들의� 유익을� 위한다는� 의미의� '건설적인

'(constructive)으로� � 번역할� 수� � 있다(NIV).� 바울은� 본절을� 통하여� 기독교인은� 우상의� 제물을�

능히� � 먹올� 수� � 있는� � 자유가있으나� 그� 자유는� 자신의� 영적인� 유익과� 이웃들의� 신앙적� 유익을� �

위하여� � 제한되어야함을�가르친다.

=====10:24� � 남의� 유익을�구하라� -� 바울은�고린도�교인들을�향하여�그리스도인들이� � 가진� � 참

된자유와� 사랑의� 실천� 원리를� 제시한다.� 타인의� 유익을� 구하는� 삶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안에

서� 가능하며� 모든� 이기적인� 욕심을� 배척하여� 구원을� 완성하는� 삶이다.� � 타인을위하여� 자유를� 사

용하는�것(롬� 14:� 7;� 15:� 2;� 고전� 13� :� 5� ;갈� 6:2)은� 공동체를� � 위해지켜야�할� 원리이자�그리스

도인이� 덕을� 세우는� 방법이다.� 인간에게� 귀중한� 자유가� � 타인의� 유익을� 위해� 사용되며� 그러한�

유익을� 주고받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그� 사회는� 참으로� 행복한�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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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7).

=====10:25시장에서� 파는� 것� -� 당시� 로마와� 소(小)� 아시아� 지방에서는� '황제� � 숭배'와� � '우상숭배'가� 성행하였기� 때문에� 상점에서� 판매되는� 대부분의� 음식들은� 일단� 제물로� 바쳐졌던� 것이었

다.� 즉� 제사에� 사용되었던� 제물은� 신전(神殿)에� 바쳐졌으며� 나머지는� 제사장이나� 예배자들에게�제공되었는데� 제사장들은� 보통� 많은� 양의� � 고기를� � 할당받았으므로쓰고� 남은� 대부분의� 음식은�

일반인들에게�판매되었다.� 따라서�시장에�나와� 있는� � 음식들이�제물로�쓰여졌는지�아닌지를�가리

기란�어려웠다.� � � 양심을�위하여�묻지� 말고� 먹으라� -� 이에� 대한�학자들의�견해를�세� 가지로�나눌� �

수있다.� (1)� 여기에서의� '양심'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와� 같이� 믿음이� � 약한자의� � 양심을말한다는�

견해이다.� 강한� 자는� 고기를�먹더라도�자유함으로�인하여 양심의 거리낌을받지� 아니한다.�

따라서� 이것은�약한� 자의� 양심을� 가리킨�것이다(Holsten,� Godet).� (2)이� 말은� 특별히� 믿음이� 약

한� 자들을� 의식하여� 한� 말이� 아니고� 전반적인� 모든� 사람들을위하여� 한� 말로서,� 일단� 시장에� 나

온� 고기는� 양심의� 거리낌을� 가질� 필요가� 전혀� � 없으므로� 그� 고기가� 제물인지� 아닌지� 의문을� 가

질� � 필요가� � 없다는� 견해이다(Hendriksen).(3)� 나중에� 제물인� 것을� 알게� 되더라도� 양심의� 부담

을� 갖지� 않게� � 하기� � 위하여� � 묻지말고� 먹으라는� 것이다(Chrysostom,� Erasmus).� 이와같은� 세�

가지� 견해� 중에서� (1)의� 견해가� 가장� 자연스럽게� 문맥과� 연결된다.� 이는� 29절의� '내가� 말한� 양

심은�너희의� � 것이아니요�남의�것이니'라는� 언급과�잘� 연결된다.� � 시장에서� � 파는� 고기가� 우상의�

제물임을� 알게� 되었을� 때� 믿음이� 강한� 자들은� 개의치� 않고� 사먹을� 수� 있겠으나� 믿음이� � 약한자

들은� 우상� 제물이� 신비한� 능력을� 가진� 것처럼� 여겨서� 사먹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바울은� 묻지�

말고�먹으라고�하였다.

=====10:26� � 본절은� 시� 24:1의� 인용으로�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식사� 전에� 드리는� 감사� � 기

도의형식이다.� 이것은� 만물의�창조주가�하나님이며�그분이�모든� 것을� 다스리는�분임을� � 인정하는�

고백이었다.� � � 충만한� � 것이� � 주의� � 것임이니라� -� '충만한� � 것'에� � 해당하는�헬라어� '플레로마'(*

)는� 땅을� 채우고� 있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제물로� 바쳐진� 동물의고기도� 우상의�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것이기에� 그� 제물� � 자체는� � 더러운것이� 아니다.� 또한� 우상�

제물로� 쓰여진� 고기를� 먹는다� 해도� 그� 음식이� 본래� 의도된� 목적대로� 사용된� 것이므로� 조금도� 거

리낄�것이� 없다.

=====10:27� 무엇이든지� 차려�놓은� 것은...먹으라� -� 본절에서는�식사에�초청받는� � 문제에� � 대해

다루고� 있다.� 시장에서� 팔리게� 되는� 우상의� 제물들은� 이미� 그� 종교적인� 의미를� 상실한것이므로�

단순한� 음식으로서의� 의미� 밖에는� 없다.� 따라서� 음식을� 먹을� 때� 양심의� 가책을� 받을� 필요� 없이�

자유롭게� 먹을� 수가�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불신자나� � 이교도들에게초청을� 받을� 수� 있다.� 모든� 그

리스도인들에게는� 이교도의� 형제나� 친척들이� 있을� 수� 있으며� 바울은� 그런� 자들과의� 교제를� 금하

지�않았다(5:� 9,� 10).

=====10:28� 알게� 한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 그들은� 상� 위에� 놓여진� 음식은� 어떤�

것이든지� 양심의� 가책없이�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중에� 어떤� 약한� 그리스도인이� 특정

한� 음식이� 제물이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면� 성도는� 그것을� 알게� 한� 자와� 자신의� 양심을� 위하

여� 먹지� 말아야� 한다.� 만일� 그� 말을� 듣고도� 그� 음식을� 먹는다면� 그것이� 제물임을� 가르쳐준� 사람

은� 그� 약한� 믿음이� 그� 일로� 인해� 성처받아� � 실족할� � 것이며그에� 대한� 책임은� 제물을� 먹는� 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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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있다.� 믿음이� 약한� 그리스도인이� � 그것을� � 보고우상과� 교류해도� 괜찮은� 것이� 아닌가� 또는� 그�

음식을�먹는� 사람이�우상� 숭배자가�아닌가�하는� 등의�오해를�할� 것이기�때문이다.

=====10:29� � �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 바울이� � 지금까지� 말한� 것은� 믿음이�

약한자의� 양심을� 위한� 것이었다.� 믿음이� 강한� 자는� 제물을� 양심의� 거리낌� 없이� 먹을� 수� 있었으

므로�그들의� 믿음이�흔들리지�않았다.� � 그러나�문제는� 약한� 자들이었다.� � � 어찌하여� 내� 자유가...

판단을� 받으리요� -� 이에� 대해� 혹자는� 본절을� '다른� 사람들의판단으로� 인해�너희� 자유가� 제약받아

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으므로� 너희가� 옳다고� � 생각되는� 한� 너희의� 자유함을� 온전히� 유지하라'

는� 의미로� 이해한다(Meyer,� � de� � Wette).그러나� 28절의� 문맥과� 연결시켜� 볼� 때� 보다� 적합한�

해석은� '너희의� 자유함이� 다른� � 사람들의� 비방을� 듣는다면� 유익한� 것이� 무엇이냐'라는� 것이다.�

즉� 나의�자유가�남을� � 죄짓게�하는데�사용되어서는�안� 된다는�말이다(Godet,� Hendriksen).

=====10:30� �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예하면� 어찌하여...비방을� 받으리요� -� '감사함'에� � 해당

하는�헬라어� '카리티'(*� � � )는� 본래� '은혜'(grace)라는� 의미인데� '감사함'의� 뜻으로도�쓰인다(딤전�

1:12).� 본절에서는�음식에�대한� � 축사로� � 사용된� � 용어로� � 보인다(TDNT).� 바울은�기독교인이�이

교도의� 집에� 초청받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 될� 때� �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음식으로� 생각하고�

감사하며� 먹는다면� 윈리적(原理的)으로는� 합당한� 것으로� 비방받을� 일이� 못된다고� 말한다.� � 그렇지만� 그러한� 행동으로� � 인해� � 믿음이약한� 형제들이� 상처를� 받는다면� 음식을� 먹음에� 있어서� 자제

할� 필요가� 있다는� � 것이다.타인의� 유익을� 위해� 나의� 권리와� 자유를� 포기한다면� 그것은� 자유와�

권리를�잃는� � 것이아니라�오히려�그것들을�최대한�사용한�것이라고�할� 수� 있다(롬� 14:21).

=====10:31� 먹든지� 마시든지...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 이제� 바울은� '우상의� � 제물'

이라는�문제에서�한� 걸음� 더� 나아가�결론적인�권면을�하고� 있다.� � 본절에서 제시하는'하나

님의�영광'은� � 그리스도인의� 전반적인� 삶을� 지배하는� 기본� 원리이다(골� 3� :� 17).즉� 그리스도인들

의�모든�행동은�그것이�먹는� 것이든�마시는�것이든 결국은 하나님의영광을� 위해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벧전� 4� :� 11).�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하라는� 말� 속에는� 바울이� 이제

까지�말하였던� '타인의�유익'에�대한� 언급이� � 포함되어�있다(시� 133:1-3).

=====10:32� � 거치는� � 자가� 되지� 말고� -�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프로스코포이...기네스데

'(* � � � ... � � � )는� '거침돌이� 되어�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 하지� � 않는'의� 뜻을� 갖는다.� 그

리스도인의� 가장� 큰� 행동� 원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 것이요� 두번째� 원리는� 다른� 사람들을�

실족케�하는� 일을�피하는�것이다.

=====10:33� 나와� 같이...저희로�구원을� 얻게� 하라� -� 바울은�자신의� 행동을�본보기로�고린도� 교

인들에게� 권면하였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스스로를� 다른� � 사람들의� 환경에�

적응시켰다(9� :� 18-22).� 특히� 그는� 9:22에� 기록된� 대로� 약한� � 자들을� � 얻기위하여� 스스로� 약한�

자가� 되었다.� 바울이� 그렇게� 행동한� 것은� 단순히� � 그들의� � 비위를맞추기� 위함이� 아니었다(갈�

1:10).� 즉� 바울은�복음이�말로만�전해지는�것이�아니라�행함으로�전해진다는�것을알고� 있었으므

로(Grosheide)� 스스로를�순응시키는겸손함을통하여� 그들에게� � 복음을� 전한� 것이다.� � 본절은� 바

울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구하시는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자신을� 본받아� 살면� 결코� 그릇된� 길로�

가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바울은� 자신의� 중심에� 자기가� 사는� 것이� � 아니라� 예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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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살아가고� � 있었기�때문에�담대하게�이런�말을� 할� 수� 있었다(갈� 2� :� 20).� 고린도전서�제� 11장

=====11:1� �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 본절을� � 10

장에� 속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1)� � 2절에서부터� � 새로운주제� 즉�

교회의� 예배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다.� (2)� 문맥상� 본절은� 10:3과상관성(相關性)을�갖는다.� 바울은� 10장에서� 우상� 숭배에� 대한� 경고와� � 우상의� � 제물을먹고� 마시는� 문제에� 대해서�

권면하고� 있으며� 그� 권면의� 모델로서� 자신을� 소개하고� � 있다.� 즉� 바울은� 8장의� 경고와� 권면에�

대한� 결론으로� 본절에서� 자신을� 본받으라고� �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본받는� 그리스도는� 유

일하고도� 완벽한� 모델로서(Godet)� � 그분의� 삶은� 이기적인� 삶이� 아니라� 이타적인� 삶이었다(빌� 2�

:� 4,� 5).� � 그러나� � 그리스도나바울의�삶은�단순히� 도덕적으로� 이타적인� 삶이� 아니라�구원을� 위한�

이타적인�삶이었다(10:33).

=====11:2� � 개역성경� 본문에는� 생략되었으나� 헬라어� 본문에는� 새로운� 주제로의� 전환을� � 나타

내는�접속사인� '이제'(*� � � ,� 데)가� 사용되었다.� 그러므로�바울은� � 본절에서부터� � 새로운주제를�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Godet,� Meyer).� � � 유전� -� '유전'(*� � � ,� 파라도세이스)은� 초대� 교회� 그

리스도인들에게� 구전으로� 전해내려온� 가르침으로서,� 관습과� 교훈은� 물론� 교리를� 포함한다(갈� 1� :�

14;� 골2� :� 8� ;� 살후� 2:15;3:6).� � 이것은� 바울� 자신의� 교훈뿐만� 아니라�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

들에게�전해진�복음과�같은� 것이다(Grosheide).� 그런데�본문에서�바울이� � 말한� � '유전'은� 교리보

다는� 구전(口傳)으로� 고린도� 교인들에게� 전해준� 교회의� 관습을� � 의미한다(Godet,� Meyer).� 왜냐하면� 이후의� 본문들이� 여자가� 공예배� 때에� 수건을� � 써야� � 한다는관습에� 대해서� 논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 � 너희를� 칭찬하노라� -�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경고와� 질책의� 말을� 하기에� � 앞

서� 먼저� 그들이� 바울의�가르침과� 교훈을�잘� 지킨� 데� 대해� � 칭찬의� � 말을� 하여� � 그들로하여금�마

음에� 깊은� 상처없이� 자신의� 권면을� 받아들일� 수� 일도록� 하였다.� 이것은� 바울서신의� 영감성과� 신

적� 권위를� 증거하며� 아울러� 양들을� 사랑으로� 돌보는� � 목희자로서의바울의� 세심한� 볘려를� 잘� 보

여준다.

=====11:3�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 본절은�고린도� 교인들� 모두가�바울이� � 전한

유전을� 지킨� 것은� 아님을� 시사한다.� 그들은� 바울에게서� 비판받을� 점이� 있었다.� 그것은여자들이�

공예배� 때에� 남자와� 동등하게� 수건을� 쓰지� 않으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여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로워졌다� 할지라도� 이� 관습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 창조� 원리를� 통해서� 논증한다.� � �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 바울은�

교회에서� 공예배시� 여자들이� 머리에� 수건을� 써야� 한다는� � 관습에� � 대해서말하기� 전에,� 그� 논증

의� 근거를� 제시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는� 세� � 단계의� 질서이다.� 본절에서� '머리'(*� �

� ,� 케팔레)는� '권위'를� 의미하며,� � '유기체적인� 복종'을� 암시한다(Edwards,� Morris,� Meyer).� 그

리고� 각� 질서는� 연합(union)에� 의한� 관계성을� 나타내는데,� 그� 관계성은� 교회의� 질서와� 그리스도

의� 구속� 사역에서� � 이루어진� 것이다.� 첫째� 질서는� 그리스도와� 남자의� 관계인데,� 그리스도는� 믿음

을� 통한� 연합에� 의해서� 남자의� 머리가� 되신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그리스도와� � 남

자의연합� 관계의� 근거이다.� 둘째� 질서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인데,� 남자는� 결혼이라는� 연합을� 통

해서� 여자의� 머리가� 된다.� � 그리스도인의� 결혼� 사상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 그리스도와� 교회

와의� 관계� 즉� 그리스도가� 죽기까지�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는� �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사랑과� 복

종'의� 관계로� 설명되고� 있다(엡� 5:22;골� 3:18,� 19).� 비록�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이� 남편과�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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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동등하며,� 아내가� 그리스도와� 연합된� 결속이� � 남편과�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차이가� 없다� 할

지라도(갈� 3� :� 28),� 지상의� 다른� 관계들� � 즉주인과� 종의� 차이와� 마찬가지로� 복음의� 섭리� 아래�

에서도� 여자의� 복종의� 위치는� � 지속된다(Godet,� Meyer).� 그러나� 이러한� 질서는� 존재� 자체의� 우

열이�아니라�사랑과�화합과안정이라는�측면에서�이해되어야�한다.� 창조� 질서에�있어서�남녀� 관계�

(창� 3� :� � 16)는지금도� 존속(存續)하나� 두� 개체는�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인격체이다.그러나�남녀간의 성(性)의� � 구별이� � 완전히� � 사라지는� � 때는� � 그리스도의� � 재림의� � � 때이다(눅20:34-36).� 셋째� 질서는� 하나님과� � 그리스도와의� � 관계인데,� � 하나님은� � 자신의� � 부성

(Fatherhood)과� 그리스도의� 아들됨(Sonship)의� 관계뿐만� 아니라� � 그리스도가� � 신인(神人)이며�중보자(요� 14:28;고전� 3:23;15:24ff.)라는� 사실에� 근거해서� 그리스도의� � 머리가� 된다.� � 그래서� �

그리스도는� � 하나님에게� � 절대적인� � 복종을� � 하셨다(요� � 5:19;고전3:23;15:28).� 특히� 본절에서

는� 세� 가지� 질서� 중� 그리스도와� 남자와의� 관계가� 제일� � 먼저� 나타난다.� 이는� 그리스도의� 주권을�

가능케�한� 그리스도의�구속�사역이�서로의�관계를�형성시키는�요체가�되기� 때문이다.

=====11:4� 기도나�예언을�하는� 자� -� 본절에�나타난�기도나�예언이�행해지는�장소가 어 디

인가하는� 문제에�대해서�혹자는�가정� 예배라고�하며(Bachmann,� Hofmann),� � 혹자는� � 교회의공

적인� 예배라고도� 한다(Grosheide,� Meyer).� 이� 두� 견해� 중� 후자가� 더� 타당하다.� 전자는� 그� 견해

의� 근거로서� 8:1-11:1에서� 가정� 문제를� 다루었으며� 별다른� � 주제의� � 전환이없으므로� 2절� 이후

에도� 가정� 문제를� 다루는� 것으로� 미루어� 기도나� 예언도� 가정� 예배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

한다. 그러나� 앞서� 2절에서� 살핀� 바와� 같이� � '데'(*� ,'이제')가� 새로운� 주제로의� 전환을� 의미

하며� 또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기도는� � 타인을위한� 것이기� 때문에� 본절의� 기도와� 예언은� 전체�

교회를� 위한� 활동으로(12:10;14:3,� 4,22)� 공적인� 예배에서� 행해진� 것이다.� 더욱이� 5절� 이하에�

나타난� 본장� 내용에서도� 공적인� 예배를� 전제로� 바울의� 권면이� 전개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본

절의� 공간적� � 배경은공적인� 교회의� 예배로�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 한편� '기도와� 예언'은� 본서� �

14장에서도�함께�나타나고�있는데,� � 거기서�기도는�방언을�말하는�것과� � 동일시되고 있 다

(14:14-17).� 그래서�혹자는�본절에서 말하는 기도를 방언으로� � 해석하기도� � 한다

(Baur,Edwards).� � �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 본절에서� '머리'는� 두� 가지로� � 해석된다.� �

하나는'신체적인� 머리'로� 해석하는� 것이다(Erasmus,� Beza,� Bengel,� Meyer).� � 본절의� � 앞에서"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라고� 말함으로� 신체적인� 머리를� 말하며,� � 5절에서도� 같은� 경

우를�발견할�수� 있다.� 다른� 하나는�은유적인�표현으로서 '그리스도'로� � 해석한다

(Hofmann,� Maier,� Osiander,� Ruckert).� 3절에서� "각� 남자의� 머리는�그리스도"라고� 한� 것은� 본

절에서� 머리를� 그리스도로� 해석하기� 위한� 선언이었다고� 본다.� 이� 두� � 견해는� 모두�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이렇게� 볼� 때� 본절은� 머리에� 수건을� 쓰는� � 상징을� 헬라� 관습처럼� 이중적인� 알

레고리(allegory)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 교회질서� 속에서� 남자에게� 여자에� 대한� 주권을�

부여했는데,� 만약� 남자가� 여자에� 대한� 순종의� 상징인� 수건을� 머리에� 쓴다면,� 그것은� 자신의� 신체

적인� 머리를� 부끄럽게� 하는� 것이다.� 또한� 신체적인� 머리를� 부끄럽게� 한� 남자는� 여자에� 대한� 남

자의�주권을�부여한� � 영적인�머리�즉�그리스도를�부끄럽게�하는�것이다.

=====11:5� 무릇� 여자로서...머리�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 -� 바울은� 본절에서� 여자가� � 공예

배시에� 수건을� 써야� 하는� 이유를� 당시� 관습을� 통해서� 논증하고� 있다.� 여자가� 공예배에서� 머리에�

무엇�인가를�쓰지�않으면�머리를�민� 것과� 같다는�것은� 당시�헬라 여인들이나� 유대� 여인들

에게�있어서�긴� 머리는�여성다움을�표현하는�장식과 같은� � 것이었으며짧은� 머리는� � 매춘부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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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 부도덕한� � 사람들의� � 모습이었기� � 때문이다(Grosheide,Meyer).� 여기서� 긴� 머리는� 머리에�

무엇을�쓰는� 것과�동일시된다고�본다(15절).

=====11:6� � 만일� 여자가...부끄러움이� 되거든� 쓸지니라� -� 개역성경� 본문에서는� '왜냐하면'(*� � ,�

가르)이� 생략되어� 있다.� 본절은� 5절에� 대한� 원인절로서� 여자가� 공예배에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해야� 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본절에서� 바울의� � 권면은� 당시� 기존� 관습과� 상식

을� 무시하지� 않으며� 그� 범주� 안에서� 공예배에� 참여할� 것을요구하는� 것이다.� � 당시� 기존� 관습에

서� 여자가� 머리가� 짧은� 것은� 부끄러운� � 일이었다.여자가� 짧은� 머리를� 하게� 되는� 경우는� 두� 가지

이다.� (1)� 애통이나� 슬픔을� 표시할� 때이다(신� 21:12).� (2)� 조신(操身)하지� 않거나� 간음의� 죄를�범했을� 때이다.� 그래서� 매춘부는� 짧은� 머리를� 갖고� 있었다.� 전자의� 경우는� 특수한� 상황이기에� 본

문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 그러나� 후자의� 경우에� 있어서� 짧은� 머리는� 여자의� 수치였다.� � 반면에�

유대인들이나� 헬라인들� 사이에서� 긴� 머리는� 여자다운� 우아한� 장식으로� 여겨졌으며(Meyer),� � 여

자의� 권위와� 명예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바울이� 당시의� 기존� 관습을� 인정한�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 사실은� � 복음이전파되었을� 때� 한� 나

라의�관습이�하나님의�말씀에�위배되지�않을�때� 그� 관습이�인정될수�있음을�시사한다.

=====11:7� � 본절에서� 바울은� 여자가� 머리에� 수건� 써야� 하고,� 남자가� 쓰지� 말아야� 하는� � 이유

를창조� 질서에서� 찾고� 있다.� � �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

와� -� 하나님이� �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 대로� 창조하셨으며,� � 사람으로� 하여금� 이� �

땅을� 다스리는� 주권을� 주셨다(창� 1� :� 26-28).� 여기서� '하나님의� � 형상(形狀)'이라� 함은� � 여러의미를� 갖지만� 그� 중에� � 하나는� � 자연에� � 대한� � 사람의� � '주권'을� � 포함한다(Edwards,Godet).� 사

람은� 모든� 피조물� 중의� 절정으로서,�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부여받았다(시8편).� 또한� 남자가� '

하나님의� 영광'이라� 함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 남자는창조자이며� 통치자이신� 하나님

의�위엄을�세상에�드러내며�그를�존귀케�하는존재이기때문이다.� 본문은� 이처럼� 모든� 피조물에�

대한�주권적� 지위를�소유하고,� � 창조주를� � 세상에�밝히� 드러냄으로�존귀케� 하는� 존재인�남자가� '

순종의� 표'인� 수건을� 쓴다는� � 것은하나님의� 창조� 원리에서� 벗어남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 강조하며� '마땅히'라는� 말을� 사용한다.� '마땅히'로� 번역된� 헬라어� '오페일레이'(*�

)는� '의무가� 있다',� '해야만� 한다'는� 뜻을� 갖는다(ought,� NIV).� � �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 본

절은� 여자가� 당시의� 습관대로� 머리에� � 수건을� � 써야할� 이유를� 말하고� 있다.� 여자가� 수건을� 쓰는�

것은� 자신의� 정절과� 순결,� 그리고� 복종을의미하는� 것으로� 사랑과� 헌신을� 통해서� 남자를� 존귀케�

하며� 또한� 자신을� 성별(聖別)하고�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다.� 창� 1:26-28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나,� 바울은� 여자에� 대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 혹자는� 여자가� 남자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음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하지� 않았다고�

말한다(De� Wette).�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서� 여자를� 남자로부터� 창조하셨다는� 것을� � 말하는�

것이지(8,� 9절)� 결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받지� 않았다는�것을�말하려는�것은�아니다.� 따라

서�여자는�남자와�동등하게�하나님의�형상을�소유하고� � 있다(Edwards.Godet,� Meyer).

=====11:8� � 여자가� � 남자에게서� 났으며� -� 본절은� 여자가� 남자의� 영광이라는� 논증에� 대한� � 근

거로서,� 여자의�기원을� 말한다.� '...에게서'의� 헬라어� '에크'(*� � � )는� � '기원'이나� � '근원'을� 의미하

는�전치사로서,� 아담의�갈비뼈를�통한�여자의�창조를�암시한다(창�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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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 본절은� 하나님이� 여자를� 창조하신� �

목적을� 진술하고� 있다.� 이� 진술을� 통해서� 바울은�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 씀으로� � 자신의순결과�

사랑의� 복종을� 표하며,�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함을� � 시사한다.� 창� 2� :� 20에

는� 하나님께서� 여자를� 창조하실� 때� '아담이� 돕는� 배필이� � 없으므로'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또한�

창� 2� :� 18에는�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고�

되어� 있다.� 물론� 이� � 말씀들은� 남자에� � 대한� 여자의� 종속성(從屬性)이나� 여자에� 대한� 남성� 우위론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다.� 남자는� � 혼자서� 하나님이� 부여하신� 주권을� 발휘할� 수� 없다(창� 1� :�

28).� 그� 주권은�남자와�여자가사랑과�복종의�관계에�있을�때�온전하게�행사될�수� 있는�것이다.

=====11:10� � 그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 둘지니라� �

-'이러므로'는� 본절이� 8,� 9절을� 전제로� 이제까지� 논증한� 것에� 대한� 결론임을� 나타낸다.'천사'는�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창조� 때에� 함께� 일하였으며(욥� 38:7),� 죄인들의� 회개와개종을� 기뻐하며(눅�

15:7,� � 10), 성도들을� � 보호하기도� � 한다(시� � 138:1;엡� � 3:10;히12:22).� 또한� 천사들은�사

람들을�섬겨서(히� 1� :� 14)� 성도들의�삶과� 신앙�생활� � 속에서하나님의� � 뜻이 온전하게� � 실

현되도록� � 한다.� � 그런데�본절에서� '천사들을�인하여'(* ,� 디아� 루스� 앙

겔루스)는� 해석이� 다양하다.� (1)� � 그리스도인의� 예배를� 지켜� 보게� 하기� 위해서� 이교도가� 보낸�스

파이로 생각한다(Storr,� � Flatt).(2)� 교회의� 예언자로�해석한다(Beza).� (3)� 가장� 신실(信實)한� 성도들을� 의미한다고� 본다(Clement).� (4)� 악한� 천사로서(창� 6:2)� 예배� 때� 수건을� 쓰지� 않은� 여자

를� 보고� 색욕을� 일으킨다고� 본다(Tertullian).� (5)� 선한� 천사로서,� 예배� 때� 함께� 참석해서� � 지켜

보는� 것으로� 해석한다(Hodge,� Morris,� Meyer,� Ruckert).� 이런� 해석들� 가운데� 가장� � 타당한� 것

은� 마지막� 견해이다.� 이렇게� 볼� 때� 본문은� 선한� 천사들이� 예배를� 지켜보기� � 때문에� 창조� 질서에�

어긋나지�않도록�여자들은�머리에�수건을�써야�한다는�것을 강조하고있다.� '권세� 아래� 있는�

표'는� 헬라어로� '엑수시아'(*� � � )로서,� 본문에서� 머리에� 수건을� 쓰는� 것을� 의미한다(Grosheide).�

머리에� 수건을� 쓰는� 것이� '엑수시아'가� 되는� 이유는� 당시� 헬라의� 여자가� 수건을� 쓰지� 않는� 것은�

자신을�매춘부로� 취급하는�것으로�여자로서의� � 권위와�존엄성을�버리는�것이었기�때문이다.� 따라

서� 본절은� 여자가� 자신의� 머리에� 이런� 권세있는� 표식을� 함으로,� 창조� 때에� 함께� 사역하고� � 성도

들과� � 함께현존하여�예배를�지켜보는�천사들에게�창조�질서에�벗어나지�않음을� 보여주며,� 천사들

을�예우(禮遇)함과�동시에�자신의�권위와�명예를�세울�것을� 고린도�교인들에게�권면하는�것이다.

=====11:11� � 이제까지�바울은� 창조� 질서를�통해서� 남자가�여자의� 머리이며,� 예배시에도� � 순종

의표인� 수건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해야� 한다는� 것을� 논증하였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주안에서�

서로� 하나인� 것을� 밝힘으로� 여자의� 지위에� 대해� 변호하고� 있다.� � � 그러나� -� 이에� 해당하는� 헬라

어� '플렌'(*� � � )은� 앞서� 진술된� 내용에도� '불구하고'� 라는� 의미이다.� 비록� 본질적으로� 여자가� 남

자에게�순결과� 복종을�표하지만,� � 그럼에도� 불구하고�주� 안에서�하나라는�의미이다.� � � 주� 안에는�

-� 여기서� '주'(*� ,� 퀴리오)는�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의미한다(Godet).� 왜냐하면� 12절

에서�하나님에�대해�말하고�있기� 때문이다. '주� 안에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서�

그에게� 복종하며,� 그의� 인도를� 받으며� � 살아간다는� 뜻이며(갈� 5:6;엡� 1:7)� 주� � 안에서� � 남자와� �

여자는� � 하나라는� � 의미이다(갈3:28).� 그렇다고해서�바울이�이제까지�논증한�여자의�순종성에�대

해서� 거부하는� � 것은아니다.� 본절은� 주� 안에서� 남자와� 여자가� 동등하게� 구속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감을�말하고�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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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2� � '가르'(*� � ,� '왜냐하면')가� 개역� 성경에는� 생략되어� � 있다.� � 본절에서� � 바울은주�

안에서� 여자와� 남자가� 하나이며,� 상호� 의존적인� 관계라는� 사실의� 근거를� 제시한다.� � � 여자가� 남

자에게서� 난� 것같이� -� '남자에게서'(*� � ,� 에크� 투� � 안드로스)에서� '에크'는� '...에서� 밖으로'라는�

의미로,� 사물의� 기원과� � 근원을� � 표시한다.본문은� 여자의� 기원이� 남자임을� 말한다.� � 이것은� 8절

의� 반복으로서,� 하와가� 아담의� 갈비뼈로� 창조되었음을� 상기시킨다(창� 2� :� 21).� � �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 '말미암아'는� 헬라어� '디아'(*� )로서� 본절은여자의� 몸을� 통해서� 태어나는� 사람

의� '일반적인� 출생� 과정'을� � 말하고� � 있다(Morris).이처럼� 여자가� 남자에게서(에크)� 태어났고,� 남

자가�여자로� 말미암아(디아)� 태어났다고하는� 구별은�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의� 과정과� 질

서를� 바울이� 염두에� 둔� �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설사� 바울이� 그것을� 염두에� 두었다� 할지라도�

본절에서� 바울이� 지적하는� 것은� '서로에게서�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 �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 여기서� '...에게서'� 역시� '에크'(*� � � )라는� 의미로서� 기원과� 원천에� 대해� 말하고� 있다.�

창조� 질서에� 있어서� 남자와� 여자가� 서로� � 다른� 과정� 속에서� 창조되었다� 할지라도,� 분명한� 사실

은� 남자와� 여자� 그리고�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에� � 의해� �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 두�

존재의�기원은 결국� � 하나님이다(창� 1,� 2장).� 그러기에�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 하나이며,� � 동

등하며,� � 독립적인�존재가�아니라�하나님께�종속되어�있다.

=====11:13� � 스스로�판단하라�여자가�쓰지�않고...기도하는�것이�마땅하냐� - 바울은 이 제

까지여자가� 하나님께� 수건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해야� 한다는� 논증을� 마친� 후,� 이런� � 논증들이�

틀렸는가를� 고린도� 교인들� 스스로가� 자신의� 지혜를� 가지고� 판단하라고� 권면한다.'마땅하냐'(*� � ,�

프레폰)의� 의미는� 바울� 자신이� 이제까지� 논증한� 것의� 적절성과� 타당성에� 대한� 것으로� 당연히� 수

건을� 써야� 한다는� 호소이다.� � 왜냐하면� 바울이� � 다음� 절에서� 여자는� 긴� 머리를� 가지거나� 수건을�

써야�한다는�것을�인간의� � 본성(本性)이말하고�있다고�제시하기�때문이다.

=====11:14� � 바울은� 앞절의� 질문에� 대한� 반어적인� 답을� 주고� 있다.� � � 남자가� 긴� 머리가� 있으

면�자기에게�욕되는�것을� -� 고대�헬라� 세계에서는 철학자들이� 머리를� 길게� 하는� 일이� 있었

다.� 그러나� 대개의� 남자들이� 긴� 머리를� 하는� 예는� 극히부분적으로� 행해진� 일이었다.� 바울은� 하나

님의� 창조� 원리에� 의하여� 자신의� 논리를� � 펼치고� 있다.� � �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 '본성'(*� ,� 퓌시스)은� 크게� 두� 가지로� 해석된다.� (1)� 본질에� 대한� 천성적인� 감각과� 인지를� 말한

다(Meyer).� 그래서� 남자는� 본성적으로� 긴� 머리를� 갖는� 것이� 부끄러운� 일로� 안다.� (2)� 하나님께

서� 창조하신� 여자의� 본래적인� 신체� 구조를� 암시한다(Godet).� 이는� 15절에� '여자가� 긴� 머리가� �

있으면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라는� 내용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분명하다.� 두� � 가지� � 견해가나름

대로의�타당성을� 지닌다.� 따라서�본절은�하나님께서�남자와�여자를�창조하셨을�때남자가�긴� 머리

를� 하는� 것을� 본성적으로� 부끄럽게� 느낄� 뿐만� 아니라� 신체� � 구조상� � 긴머리는� 여자에게� 해당되

는� 것임을� 말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가� 긴� 머리를� 소유한다면� 그것은� 남자의� 권위와� 명

예를� 포기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러나� 예외가� 있는데� 나실인(민� 6:5;겔� 44:20)이다.� 그들은�

머리에� 삭도를� 댈�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긴� 머리는� 하나님에게� 구별된� 존재라는� 의미를� 지니

기�때문이다(행� 21:17-16� 주제� � 강해� '나실인<Nazirite>제도'� 참조).

=====11:15� � 긴� 머리는� 쓰는� 것을� 대신하여� 주신� 연고니라� -� 긴� 머리는� 머리에� 무엇을� 쓰는� �

것과� 동일시되며,� 그것은� 하나님이� 여자에게만� 허락하신� 권세이다.� 여자가� 긴� 머리를� 갖는� 것은�

본성이� 아름답다고� 당연하게� 생각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서� 남자와� 구별된다.� 또한� 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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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나�머리에�수건을�쓰는�것은� 여자의�권위와�존엄성을�나타낸다.

=====11:16� � 변론하려는� 태도를� 가진� 자� -� '변론� 하려는'(*� ,� 필로네이코스)은'사랑하는'(*� ,�

필로스)과� '싸움'(*� � ,� 네이코스)의� 합성어로서,� �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서� 변론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기기� 위해서� '변론을� 위한� 변론을하는� 것'을� 의미한다.� 본절에서� 바울이� 이� 말을� 언급하

는� 것은� 헬라인들의� 국민적� � 특성인� 변론이� 무익하며� 잘못된� 습관임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다.� � �

하나님의� 모든� 교회� -� 단순히� '모든� 교회'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라는� 것을� � 부가하여� 수식하

는�것은�모든� 교회들의�거룩성과�존귀함을�나타낸다. 이는� � 헬라인들이교회의�관습에� 대해서�경

솔하게� 논쟁하기를� 좋아하는� 것과� 대조되는� 것으로� 교회에� 대한� 존경을� 강조한다.� � 이런� 규례가�

없느니라� -� '급례'(規例)가� 무엇을� � 말하는가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변론하는� 것이다(Calvin,� De� Wette,� Edwards,� Meyer).(2)�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쓰지� 않는� 것이다(Bengel,�

Godet,� Maier).� 두� 견해� 중� 후자가� 더� 타당하다.� 전자의견해를� 주장하는� � 학자들은� � 변론하는�

것이� 헬라인들의� 관습(custom)이라고� 하나(Mey-er),� 그것은� 무익한� 습관(habit)에� 불과한� 것이

다(Godet).� 더욱이� 이제까지� 바울이� 공예배� 때에� 여자가� 수건을� 써야� 한다는� 관습의� 정당성에�

대해�논증해�왔기�때문에�본절은�그런� 논증의�결론으로�보는�것이�타당하다.

=====11:17� 내가� 명하는� 이� 일에� -� '이� 일'(*,� 투토)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는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2-16절에서� � 언급한�여자가� 수건을�써야� 한다는�관습에� � 대한� 논증� 전체를�가

리킨다(Grosheide).� (2)� 바울이� 다음� 절에� 이어서� 명령하는� � 성만찬(聖晩餐)에� � 대한� 것을� 가리킨다(Godet).� 두� 견해� 중� 후자가� 더� 타당하다.� 바울은� � 16절에서� 이미� 여자가� 공예배시에� 수건

을� 써야� 한다는� 관습에� 대해서� 완전한� 결론을� � 맺었다.� � 따라서� '투토'를� 16절� 이전의� 내용에�

연결시킨다는� 것은� 문맥상� � 어울리지� � 않는다.� 도리어� 그것은� 이어서� 논할� 성만찬에� 대한� 것을�

지칭한다고�보는�것이� � � 타당하다.� � 이러한�입장에� � 따라� � 다수의� � 영역본들은� � 본절을� � '다음의� �

명령에서'(in� � thefollowing� � directives, NIV)� � � 혹은� � � '이어지는� � � 교훈에서'(in� � � the� � �

followinginstructions,� RSV)라고� 해석하고� 있다.� � �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 본절은� 공예

배시�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써야� 한다는점을� 권하기� 전에,� 먼저� 고린도� 교인들을� 칭찬했던� 2절

의� 내용과� 대조를� 이룬다.� 바울은� 이제부터� 명령할� 성만찬의� 규례를� 고린도� 교인들이� 경솔히� 생

각하고� 행함으로� 범죄하였으며,� 교회� 내에� 파벌이� 형성되어� 분쟁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이를� � 책망하려고�한다.� � � 이는� 저희의�모임이...해로움이라� -� 본절은�바울이�고린도�교인들을�칭

찬하지� 않은이유를� 드러낸다.� 고린도� 교인들의� 모임은� 편당(偏黨)을� 이루어서(19절)� 부유한� � 자들이� 가난한� 자를� 업신여기고(22절)� 주의� 만찬에� 불경하게� 참예하였기� 때문에� 유익이� 되지� 못하

였다.

=====11:18� � 첫째는� -� '첫째'(*� � � ,� � 프로톤)는� 바울이� 고린도� 교인을� 처망하는� 논증의근거를�

제시하는� 것이나� '둘째'가�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한� 견해는� 학자들간에� � 분분하다.� (1)� '둘째'에�

해당되는� 사항이� 없다(Hofmann,� Morris).� 따라서� '프로톤'은� � '첫째로'(firstly)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강조적인� 표현으로서� '주로'(principally)를의미한다.� 그러나� 이� 견해는� '프로톤'만� 본문에�

사용된다면� � 타당하지만,� � 본문에서는'멘'(*� � ,� '진실로')과� 더불어� 사용되고� 있기에� 타당치� 않다

(Godet).� (2)� 34절� 내용으로�이해한다(Edwards,� Grosheide).� 왜냐하면� 34절에서�바울이�더� 하

고� 싶은� � 말들을� 가서� 하겠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절은� 둘째� 책망이라고� 할� 수�

없다.왜냐하면�본절에는�구체적인�책망의�내용이�나오지�않기�때문이다. 바울이 책망하기를�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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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면� 아마도� 책망의� 내용이� 기록되었을� 것이다(Godet).� (3)� 20절에서� � 둘째� 책망이� 시작된다

고� 본다(De� Wette,� Olshausen,� Ruckert).� 그러나� 20절의� '그런즉'(*� � � ,운)은� 새로운� 내용을�

말한다기보다는� 앞서� 말한� 것을� 요약하는� 것으로(Grosheide),� 앞의� 내용과� 지속적이고� 확언적인�

관계를� 형성하고�있기� 때문에�이� 견해� 또한� 적절치� 못하다.� (4)12-14장을� 둘째� 책망으로�이해한

다(Heinrici,� Meyer,� Osiander).� 바울은� � 본문에서� 고린도� 교인들이� 주의� 만찬에� 대해� 소홀히�

하는� 문제를� 책망하고,� 12� :� � 1에서부터는� 새로운� 주제,� 곧� 은사의� 문제에� 대해� 책망하기� 시작

한다.� 이러한� 사실은� 12� � :1에서� '데'(*,� '그러나')를� 사용해서� 11장과� 연결된� 관계를� 형성하면

서�새로운�주제로�화제를�전환하고�있다는�점에서�분명해�진다는�것이다(Meyer).� 이상의 네� �

가지견해�중� 마지막�견해가�가장� 타당한�듯하다.� � � 교회에� -� '교회에'(*� � � ,� 엔� 테� 엑클레시아)에

서� 관사� '테'(*� � � )는� 공인� 본문(Textus� Receptus)에는� 삽입되어� 있으나� 고대� 사본(*� ,�

A,B,C,D)에는생략되어� 있으므로� 관사� '테'는� 생략되어도� 무방하다.� 관사� '테'가� 없을� 경우,� � '교

회에'는� '모임의� 장소'가� 아니라� '모임'을� 가리킨다.� � 이렇게� 볼� 때� 본절은� 장소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모임의� 성격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 것이다(Edwards,� Godet).� � � 분쟁� -� '분쟁'(*,�

스키스마타)은� 본서� 1� :� 10에서� � 사용되고� � 있으나,그것은� 본절과� 같은� 의미로� 볼� 수� 없다.� 왜

냐하면� 바울이� 다음� 절에서� '편당이� 있어야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본절에서의� 분쟁은� 가난한�

자와� 부자� 사이에서� 생겨난� 대립을� 가리킨다.� � � 대강� 믿노니� -� 바울은� 들었던� 분쟁에� 관한� 소문

들을�믿고�싶지� 않았지만,� 그� � 소문들의� 진위(眞僞)를� 가려볼�때� 분쟁의�사실들이�분명하기에�책망하지� 않을� � 수� � 없다는의미이다.� 그러나� 바울이� 그� 소문의� 진위를� 어떻게� 파악했는지는� 알� 수�

없다.

=====11:19� � 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 '편당'(*,� � � 하이레세이스)은� � 어원적으로'선택

'(choice)� 혹은� '좋아함'(preference)에서� 유래된�것으로,� � � '단체'를� � 의미하는것이�아니라� '차별

'(differences,� NIV)� 혹은� '파벌'(fractions,� RSV)을� 가리킨다.� '있어야'(*� � ,� 데이)는� 존재의� 당위

성이나� 필요성을� 의미한다.� � �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 본절은�

교회� 내에� 편당이존재하는� 목적을� 긍정적으로� 나타낸다.� � 교회� 내에� 존재하는� 견해의� 차이와� 파

벌은� 때때로� 심각한� 위기를� 초래하지만,� 그런� 위기들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진리를� � 드러내

는� 역할을� 하게� 되며,� 그� 위기의� 과정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성숙한� � 신앙인으로성장하게� 된

다.

=====11:20� � 그런즉� -� '그런즉'(*� ,� 운)은� 앞에서� 말한� 것을� 요약하는� 것으로� 앞절과의� � 연관

성을� 시사한다.� � 따라서� 앞절의� 편당은� 주의� 만찬에서� 비롯된� 것임을� 추론할� 수� � 있다.� � � 주의�

만찬을�먹을� 수� 없으니(*� � ,우크� 에스틴� 퀴리아콘� 데이프

논� 파게인)� -� 본문은� 세� 가지로� 해석된다.� (1)� "너희는� � 주의� 만찬을� 먹을� 의도가� 없이� 모였다는�

해석이� 있다(Alford).� 그러나� 29,� 30절은� � 고린도� 교인들이� 주의� 만찬을� 먹기� 위해서� 함께� 모였

다"는� 것을� 암시하므로�이� 견해는� � 타당�하지� 않다고�본다.� (2)� "너는� 주의� 만찬을�먹을� 수� 없다

"는� 해석이� � � 있다(Meyer).이� 해석은� '에스틴'(*,� '...이다')에� 부정사(infinitive)가� 뒤따라� 올� 때� �

가능하다.� (3)� "이것은� 주의� 만찬을� 먹는� � 것이� � 아니다"라는� � 해석이� � 있다(De� �

Wette,Maier).� NIV에서도� "너희가� 먹는� 것은� 주의� 만찬이� 아니다"(it� is� not� Lord's� �

Supperyou� eat)라고� 해석함으로써� 이�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 세� 견해� 중� 첫째� 견해는� 본문상의�

내증(內證)에� 위배되기에� 타당치� 않지만� 나머지� 두�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 당시�주의� � 만찬은� '애찬'(love-feast)과� '성만찬'(Eucharist)이� 결합된� � 형태였던� 바,� 교인들은� 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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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편에� 따라� 먹을� 것을� 싸가지고� 교회에� 모여서� 공동� � 식사를� 하면서� 교제를� 나누었다(행� 2:46;

고후� 8:14).� 이런� 애찬� 후에� 성만찬이� � 행해졌다.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애찬에서부터� 교제를�

나누지� 않고� 먼저� 먹고� � 취함으로(21절)애찬과� 성만찬을� 일반� 식사로� 전락시켜� 버렸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의� 만찬이� 주의� � 만찬이� 아니라고� 단언하였다.� 한편� '주의'(*,� 퀴리아콘)는� 그리스도

와의�관계를�나타내는�것으로�그리스도가�만찬을�제정(制定)하고,� 만찬에�초대하며 주 관

한다는�것을�나타낸다.

=====11:21� 이는� 먹을� 때에...어떤� 이는� 취함이라� -� '이는'(*� ,� 가르)은� 앞절에서� � 바울이고린

도� 교인들이� 행한� 만찬을� 부정한� 이유를� 말한다.� 고린도� 교인들은� 함께� 모일� 때까지� 기다려서�

만찬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들은� '먼저� 먹고� 마심으로'� 만찬을� 통해� 참된교제를� 나누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은� 결국� 거룩한� 주의� 만찬을� 무시한� � 것이었으므로바울은� 진정한� 의미에서,� 그들이�

나눈�만찬은�주의�만찬이�아니라고�책망한�것이다.

=====11:22�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 고린도� 교인들이� 주의� 만찬에서� 행한� 모습들은�

마치� 집에서� 먹는� 일반� 식사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래서� 바울은� 주의� 만찬에� 그런� 식으로� 참여

할려면� 집에� 가서� 하라고� 책망한다.� � �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 '하나님의� 교회'는�

거룩한�하나님의� � 백성된사람들의�모임으로서(15:� 9;빌� 3:6),� 그� 모임의�목적은�하나님을� 예배하

고� 명하신� � 그리스도의� 규례를� 따라�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

자신의�이기적인�욕망을�채우기�위해�육신적인�만족을�추구하였다.� 그� 결과로 그들에게있어�

주의�만찬은�하나님의�백성�전체를�무시하는� 결과를�낳았다.� � � 빈궁한�자들을�부끄럽게�하느냐� -�

'빈궁한�자'는� 단순히� '가난한�자'의� 차원이� � 아니라� '아무것도�가지지�못한� 자'를� 가리킨다.� 그럼

에도�불구하고�그들은�하나님의� � 백성으로�택하심을�받은�사람들이었다.� 그런데�부자들은�보이는�

것에만� 치중함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하나님의� 백성을� 분리하고� 구별지어� 가난한� 자들로�

하여금�열등감과�굴욕감에�빠지게�하였다.

=====11: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 본절의� 선언을� 통해서� 바울은� 두� �

가지를� 말하고� 있다.� (1)� 성만찬에� 대해서� 이미� 고린도� 교인들에게� 전달하였다.� 이는� 고린도� 교

인들이� 성만찬에� 대해서� 몰랐기� 때문에� 그런� 죄를� 범하였다고� 변명할� 수� � 없음을� 암시한다.� (1)�

바울이� 성만찬� 규례를� 그리스도께� 받았다.� 이것은� 바울이� 말하는� 성만찬의� 규례가� 권위를� 갖고�

있다는�것을� 시사한다.� 한편� 본절에서�바울이�성만찬�규례를�그리스도에게서�직접�받은� 것인가에�

대해선� 반대� 의견이� 있어� 왔다.� 반대의� 이유는본절의� '주께'(*,아포� 투� 퀴리우)에서� 직접적인� 전

달을� 의미하는� 전치사� '파라'(*� � )를� 사용하지� 않고� 간접적인� 전달을� 나타내는� 전치사� � '아포'를�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혹자는� 바울이� 사도� 전통(傳統)이나� � 사도들에게서�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Beza,� Hofmann).�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아포'가� � 단순히� � 간접적인� � 전달의� 경

우에만�사용된�것은� 아니다.� 사도� 요한은� '저에게서�듣고'(* ,� 앞� 아우투)라는� 말을� 할� 때� '아

포'를� 사용하였다(요일� 1:5).� 또한� 바울은�자신이�전한� 복음이�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말미암은

'(*� � � ,� 아포칼립세오스)� 것이라고� 말할� 때� '아포'를� 사용하였다(갈� 1:� 12).� 이로� 보아� 성만찬의� �

규례는� 바울이�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받은� 것으로서(Bengel,� Calvin,� Meyer,� Olshausen),바울이�

전한� 성만찬� 규례의� 권위의� 확고성(確固性)을� 내포한다.� � �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 '잡히시던'(*� � � ,� 파레디데토)은� 예수께서� 유다에� 의해� 배반당한� 것을� 의미한다.� '파레디데토'는� '파라디

도미'(*� � � ,'내어주다')의� 미완료� 과거로서� 그� 배반이� 갑작스런� 충동에� 의한� 결과가� 아니라,� 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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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 계획의� 성취임을� 시사한다.� 예수는� 배반� 당하시던� 그날� 밤에� 유다가� 함께� 있는� � 상황에서� 자

신의� 죽음에� 대한� 성만찬� 규례를� 제정하셨다.� � � 떡을� 가지사� -� '떡'은� 성만찬만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것이� 아니라,� � 유월절� � 식사과정에서� 성만찬을� 제정하였기� 때문에(마� 26� :� 17-19� ;� 눅�

22:7-20)� 아마도 무교병이었을� 것이다(Godet,� W.H.Mare).�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 성만찬의

의미는 '떡'이나'포도주'가� 어떤� 것이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과� 깊은� �

연관성이� � 있다(Grosheide).

=====11:24� 성만찬� � 규례는� � 마태복음,� � 마가복음,� � 누가복음과� � 본서에� � 나타난다(23-25절;

마26:26-29;막� 14:22-25;눅� 22:17-20).� 본서에� 나타난� 성만찬� 규례는� 세� 복음서� � 중에서누가

복음과� 많은� 공통점을� 갖는다.� 예를� 들면,� '기념하라'(24절� ;� 눅� � 22� :� 19),� � '새언약'(25절;눅

22:20)� 등이� 그것이다.� 이런� 사실은� 아마도� 누가가� � 바울의� � 추종자였으며,� 바울과� 함께� 선교�

여행에�동참하였던�때문일�것이다(Edwards).� � � 축사하시고(*� � � � ,� 유카리스� 테사스)� -� 본절에

서는� 누가복음의� 경우와같이(눅� 22:19)� '사례하다'(to� give� thanks)의� 뜻을� 가진� '유카리스테오

'(*� )가� 사용되었으나�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 사용된� 것은� '축복� 하다'� 혹은� � '찬양하다'의� 뜻

을� 가진� '율로게오'(*� � � )이다.� � 엄밀한�의미에서� � 양자가�구분될� � 수도있겠지만,� � 하나님의�은혜

에� � 대해� 감사하는� 믿음을� 전제로� 하는� � 축복이라는� � 점에서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본절

은� 유대인의� 유월절� 식사� 관습의� 일부인� 봉헌(奉獻)의식을� 반영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의식을�통해서� � 일반적인� � � 떡을 성만찬의떡으로 바꾸셨다(Grosheide).� � � 떼어(* � ,� 에

클라센)� -� 이는� '떡을� 쪼갠다'의� 의미로�공동� 식사의�한� 모습이다.� 떡을� 떼는� 행위는�유월절�식사

의� 경우� 애굽에서의� 고통을� � 상징하는� � 것이며,성만찬의� 규례에서는� 고난을� 당해서� 찢길� 그리스

도� 자신의� 몸을� 상징한다.� � �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 개역성경에는� '찢긴'(*� ,클로메

논)이� 생략되어� 있다.� 이것은� 사본상의� 문제이다.� 고대� 사본(*� � ,� A,B,C)에는� 이것이� � 빠져� 있기

때문에� 혹자는� 이것을� 생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Hort,Lachmann,Tischendorf).혹자는� 공인� 본

문(Textus� Receptus)이나� 비잔틴� 사본에� 기록� 되어� 있음을� 근거로� 제시하면서� 삽입되어야� 한다

고� 주장한다(De� Wette,� Hofmann,� Reiche).� 문맥상� � 그것은� '떼어'와� 연관되는데� 이유는� 그리

스도의� '찢긴� 몸'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 따라서� '찢긴'을� 삽입하는� 것이� 의미를� 더� 분명하게� 드

러낸다.� � '너희를� 위하는'은� 성만찬의� 목적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서� 직접� 행한�

것임을� 시사한다.� � �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 '이것을� 행하여'는� 성만찬이� � 영구한� 제도로

서� � 사도들뿐만� 아니라� 믿는� 자들까지도� 영원히� 행하여야� 할� 규례임을� 시사한다.� '나를� 기념하라

'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나오지� 않으며� 누가복음에만� 나타나고� 있다(눅� 22� :19).� '기념하라

'는� '상기시켜� 기억하라'는� 의미로서,� 하나님이� � '유월절� 규례를� � 기념하라'(출� 12� :� 14)신� 명령

을�상기시킨다.� 이런� 그리스도의�명령은�유대인들이� � 유월절규례를�계속�지켜왔던�것처럼�성만찬�

규례를� 기억하고� 지켜야� 함을� 시사한다.� � 그러나그리스도가� 하신� 명령은� 새로운� 성만찬� 규례를�

의미를� 기억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 본절은� 아마도� "너희가� 성만찬을� 기념할� 때,� 어린양의� 피로�

조상을� 구원한� 것을� � 기억하지� 말고� 너희를� 구원할� 나와� 내� 희생을� 기억하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Godet,� 눅22:1-23� 주제� 강해� '성만찬과�성찬식'� 참조).

=====11:25� � 식후에� -� 본절은�만찬이�다� 끝난� 후가� 아니라�떡을� 다� 먹은� 후를� 의미한다.� � � 이

와� 같이� -�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잔을� 가지사� 사례� 하시고'로� 성만찬의� 두번째� 의식을� 언

급한다(마� 26� :� 27� ;� 막� 14� :� 23).� 그러나� 누가복음과� 본서에서는� � '이와� 같이'라는� 어구로� 그

와� 같은�축사의�의식을�묘사하고�있다.� � � 이� 잔은� -� 혹자는�잔이� 없이는�포도주를�나누지�못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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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본문� '잔'� �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 주장한다(Grosheide).� 그러나� 본문에서의� '잔'은� 잔에� �

담겨진� � '포도주'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본절에서�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진술함으로� � 포

도주� 마시는� 것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 �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 본절은� 누가복음의� 기록과�

동일하다(눅� 22:20).� � 단지누가복음에는�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가� 부가되어� 있다.� � 반

면에� � 마태복음과마가복음에서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막� 14:24)고� 되어� � 있

다.� � 이런차이를� 설명하기� � 위해서� � 혹자는� � 바울이� � 원시� � 사도� � 교회(Primitive� �

ApostolicalChurch)에서�사용되었던�원형(原形)을� 말한다고�주장한다(Holsten).� 그러나 마 태

복음과� 마가복음의� 표현은� 유대계� 기독� 교회에서� 사용된� 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Godet).한편�

본절의� '새� 언약'은� '모세의� 언약'(출� 24:8)과� 대조된다.모세의� 언약에서는� 언약을� 체결하는� 과정

이� 다섯� 단계이다(출� 24:3-11).� (1)� 언약� 체결을� � 위한� � 준비� � 작업.(2)� 여호와의� � 언약서� 낭독.�

(3)� 백성들의�준행� 서원.� (4)� 언약의�피를� 뿌림.� (5)� � 70인�장로가�백성을�대표하여�하나님�앞에

서� 체결� 완료를� 의미하는� 공동� � 식사를� � 나눔.이런� 과정을� 거친� 옛� 언약은� 희생의� 피를� 필요로�

하며� 피를� 뿌림으로� 언약� 당사자들간의� 책임을� 인식하게� 하였고� 이런� 언약� 의식은� 매년� 유월절�

만찬� 때� 상기(想起)되었다.그러나� 이런� 모세의� 옛� 언약은� 애레미야에� 의하여� 선포된� 새� 언약으로� �대치되었다(렘31� :� 31-34).� 예레미야는� 모세의� 언약을� 이스라엘이� 파괴하였음을� 지적하면서� � 하

나님의� '새� 언약'은� 하나님의� 법을� 마음에� 새겨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관계를� 맺고,� 모든사람으

로�하여금�하나님을�알게�함으로�죄를� 기억지�않게� 하겠다는 내용임을� � 소개한다.� 예레미야가�

말한�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예수의� '새� 언약'에대한� 예표로서,� 더� 이상� 동

물의� 희생의� 피로� 맺는� 언약이� 아닌� 그리스도� 자신의� � 죽음을� 통해� 영원히,� 단번에� 이룬� 새� 언

약임을� 암시한다.� 본절의� '새� 언약'은� 바로� 예레미야가� 예언한� 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새� 언약을�가리키며�그리스도인들은�예수의�명령에�따라서�성만찬을�통해�이를�기념한다.

=====11:26� 개역성경에는� '가르'(*� � ,� '왜냐� 하면')가� 생략되어� 있으나� � 헬라어� � 사본에는문자

적인� 의미에서의� '가르'를� 보존하고� 있다.� 이것에� 대한� 학자들의� � 견해는� � 다양하다.� (1)� 본절이�

예수의�강화(講話,� discourse)를� 암시한다고�생각한다(Ewald).� (2)� 22절의� '칭찬하지�아니하노라'의� � 이유로� 생각한다(Hofmann).� (3)� 앞절의� '나를� � 기념하라'와� 연관성을� 갖는다(Godet,�

Hodge).� 이런� 견해들� 중� 마지막의� 견해가� 가장� �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절이� 그리스도를� 기념하

여� 성만찬을� 행하는� 이유가� 되기� � 때문이다.� � �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 '

오실� 때까지'(*� ,아크리스� 후� 엘데)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의미하는� 것으로� '기념하라'와� 연관성을�

갖는다.� 그러므로� '기념하는�행위'는� 주가� 재림할�때까지�지속된다.� 이처럼�본절은� 그리스도의�죽

으심과� 재림� 사이의� 기간을� 지칭하는� 것이나,� 그것은� 단순히� 기간만을� �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시사한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 기념이며,� 다른� 하나는� 그리

스도의� 재림(再臨)에� 대한� 확신이다(Edwards,� Godet).� � 한편'전하는� 것이니라'(*� � ,카탕겔레테)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전하는방법에� 대해서�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떡을� 먹고� 잔을� 마시

는� '행위'로� 그리스도의죽으심을� 전한다(Edwards).� '말'로� 알리는� 것보다� 그� 이상의� 의미를� 전달

하기� � 위해서바울이� 역설적으로� 이� 단어를� 사용했다고� 주장한다.� (2)� '카탕겔레테'가� '알리다'� �

혹은� '선포� 하다'라는� 뜻으로,� '말'로� 전하는� 것을� 의미한다(Meyer).� 두� 견해가� � 나름대로의�타당

성을� 지닌다.� '전한다'는� 것은� 단순히� '말'로만이� 아니라� 상징적인� '행위'를통해서도� 가능하기� 때

문이다.� 본절에서�바울은�그리스도의대속적(代贖的)인� � 죽음과부활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은� 개인적인� 고백과� 대중적인� 선포는� 물론� � 성만찬� � 의식을통해서� 증거하고� 대대로� 전해야함을� 강조하

고�있다(God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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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7� � 바울의� 관심은�성만찬의�규례에� 대한� 설명이�아니다.� 그는� 성만찬에�대한�그리스

도의� 말씀(23-25절)과� 자신의� 견해(26절)를� 밝히고,� 이런� 규례를� 고린도� 교인이� � 처했던상황에�

적용시켜�고린도�교인의�잘못된�행위를�지적하고�있다(Grosheide).� � � 그러므로(* � � ,� 호스테)� -�

이것은�이제까지�말한�성만찬의�규례를 적용시켜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권면하고자� 하는� 바

울의�의도를�니타낸다.� � � 주의� 떡이나�잔을� 합당치�않게� 먹고�마시는�자는� -� � '이나'(*� � � ,� 에)는� �

'그리고'(and)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 '또는'(or)을� 의미한다(Godet,� � Grosheide,� � Meyer).

그것은� 떡을� 먹거나� 잔을� 마시는� 두� 가지� 행위� 중에� 어느� 하나라도� 합당치� 않게� � 행하면� 범죄하

는� 것임을� 암시한다.� � 당시의� 성만찬은� 두� 가지를� 동시에� 행하는� 것은� � 아니었다.� 식사� 동안에�

떡을� 먹고� 그� 후에� 포도주를� 마셨기� 때문에,� 떡을� 합당하게� 먹는다할지라도� 잔을� 합당치� 않게�

마실� 경우도� 있다.� � 반면에� 카톨릭은� 본절의� � '에'를� 근거로� 해서� 둘� 중의� 하나만을� 행하고도� 성

만찬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Godet).� '합당치않게'(*,� 아낙시오스)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1)� 회개하지� 않은� � 악한양심을� 가지고� 참여하는� 것이다(Olshausen,� Theodoret).� (2)� 가난한�

자들을 멸시하고참여하는� 것이다(Billroth,� Chrysostom).� (3)� 주어진� 말씀에� 대한� 믿음이� 없이�

참여하는�것이다(Luther).� � (4)� � 자기� � 성찰(self-examination))이� � 없이참여하는� � 것이다

(Bengel).� (5)� 예수의� � 죽음에� � 대해서� � 감사함으로�기념하지도�않고,� 그를 경외하지도� 않

으며� 타인들을� 사랑하지� 않고� 참여하는� 것이다(Flatt).� (6)� 죄인을� 구원하신� �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기억함과� 감사함이� 없이� 참여하는� 것이다(Godet).� 이런� � 견해들중� (5)와� (6)의� 견해가� 타

당하다.� 왜냐하면�고린도�교인들은�성만찬을�그리스도의� � 고난과�성도들간의�교제로� 생각지�않고�

단지� 헬라인의� 관습처럼� 즐거운� 연회로� 행하였기때문이다.� � �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

니라� -� 합당치� 않게� 성만찬에� 참여했을� 때� 범죄의대상은�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과� 피다.�

그래서� 카톨릭과� 루터교는� 본절이� �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실재적� 임재를� 의미하는� 근거라고� 주

장한다.� 그러나�어떤 '상징'에대한� 범죄는� 곧� 상징이� 나타내는� 대상에� 대한� 영적(靈的)� � 범죄이기에(Godet,� � Meyer)그들의�주장은�합당하지�않다.

=====11:28� � 개역성경에는� '데'(*� � � ,'그러나')가� 생략되어� 있다.� '데'는� 앞절보다� 진보된� 내용

을�다루려고�하는�것을� 암시한다.� 즉� 성만찬을�합당하게�참여하기�원한다면 해야� � 할일이�

있다는� 의미이다.� � �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 '살피고'(*,� 도키마제토)는� 예수의�인격에� 관한� 자신

의� 마음가짐을� 판단하는� 행위를� 가리킨다(Godet).� 그래서� � 본절은� � 그리스도의고난에� 대해�감사

함으로�기념하며�고난에�동참하기를�원하는�지에� 대해서�스스로�살펴야�함을� 의미한다.

=====11:29� � 개역성경에는� '가르'(*� ,� '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본절은� 앞절에서� 밝힌내

용,� 즉� 자기� 자신을� 살피고� 먹어야� 하는�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 �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 '

분변치'(*� ,� 디아크리논)는� 두� 가지로� 해석된다.� (1)� 혹자는� 물질적인� 떡과� 주의� 몸을� 구별하지�

않은� � 것으로� � 해석한다(Beza,Grosheide,� Hofmann).� (2)� 혹자는� 떡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라�

주장한다(Godet).� � 즉그리스도의�몸과� 피를� 나타내는� 성별된� 떡과� 포도주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

이다.� 두� 견해� 중� 후자가�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 몸과� � 죄

로변하는� 것이� 아니며,� 성도가�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 감사하며� 동참

하는�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은� 성만찬의� 가치와� 의미를�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는� 것

을� 의미한다(Grosheide).� � �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 '죄'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리

마'(*)는� '심판'을� � 의미한다(Judgment,� NIV).� 그러나� 이것은� 영원한� 심판을� 의미하지� �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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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심판을� 의미할� 경우에는� 관사� '토'(*)가� 부가된다(Godet,� Meyer).� � 더욱이� 다음� 구절들

에서,� � 바울이� 합당치� 못한� 성만찬의� 참여에� 대한� 결과로서� 일시적인심판을� 생각하고� 있음을� 시

사하고� 있다(30,� 31절).� 그러나� 회개와� 개종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일시적인� 징계는� 영원한� 심판

에�대한�전조(前兆)이다(32절).

=====11:30� � 이러므로� -� 이� � 말은� 본절이� � 앞절에�대한� 증거임을�시사한다.� � � 너희� 중에� 약한�

자와�병든� 자가� 많고�잠자는�자도�적지� 아니하니� -� '약한자'(* � � ,아스데네이스),� '병든자'(*� ,�

아르로스토이),� '잠자는자'(* � � � ,� 코이몬타이)를�이해함에�있어서혹자는 영적인 측 면

으로만� � 해석한다(Eichhorn,� Krause,� Morus). 그러나� 영적인� 차원� 에서라면� � '약한� � 자'

나� � '병든자'는� 의미상� 같은� 것이기에� 꼭� 그렇게만� 해석되지� 않으며� '잠자는� 자'는� � '죽은� � 자'를�

나타내는�용어이다(Edwards).� 따라서�오히려�본절은�성만찬에� 합당치�못하게� � 참여함이�영적� 병

약함과�죽음뿐만�아니라�육체적인�연약함과�죽음까지도�초래하게�됨을�시사한다.

=====11:31� �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 개역성경에는� '데'(*� � � ,� '

그러나')가� 생략되어� 있다.� 사본에� 따라� '데'가� 삽입되어� 있기도� 하고(*� � ,� A,B,D),� '가르'(*� � ,� '

왜냐하면')로� 대체(代替)되기도� 한다(C� 사본).� 그러나� '데'가� 더� � 신빙성이� � 있을� 뿐만� 아니라(Godet)� 문맥상으로도� 알맞다.� � '데'는� 논쟁에� 귀한� � 논리적인진보롤� 나타내는� 것으로,� 성만찬과�

하나님의� 징계� 문제를� � 연결시키고� � 있는� � 것이다.'살폈으면'(*,� 디에크리노멘)은� 29절과� 상관성

을� 갖는데,� 그것은� � 주의� 몸과� 피의� 가치를� 분명히� 이해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그리스도

를� 기쁘게� 하는가를�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다(Godet).� '판단을� 받지'(*� � � ,� � 에크리노메다)는� 29

절의� '죄를� 먹고� 부시느니라'와� 연관된다.� 29절에서� '죄'가� 하나님의� 징계나� � 심판을� 의미하는�

것처럼,� 본절에서도� '판단'은� 하나님의�징계를�의미한다.

=====11:32� � 개역성경에는� '데'(*� � � ,� '그러나')가� 생략되어� 있다.� '데'는� 앞절에� 대한� � 대조적

인� 개념을� 소개한다.� � � 우리가� 판단을�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받는� 것이니� -� 본문에서도� '판단을�

받는� 것'과� '징계를� 받는� 것'은� 동일시� 된다.� 본절의� � '하나님의� 징계'는� 잘못한� 자식을� � 회개케�

하기� 위한� 아버지의� 사랑의� 표현으로서� 하나님의� 구속의� 수단이다(딤전� 1� :� 20� ;딤후� 2:� 25;딛�

2:12;히� 12:6).� � � 이는� 우리로�세상과�함께� 죄� 정함을�받지� 않게� 하려�하심이라� - 본 절

은 하나님이그리스도인에게� 징계하시는� 목적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서� 그� 징계는� 영원한� �

심판을막기�위한�수단이라는�것이다.� � � 영원한� � 심판의 때는� � 그리스도의� � 재림의� � 때이

다(Edwards).� 한편� 바울은� 앞절과� 본절에서� 세� 가지� 용어를� 통해� 세단계의� '판단'에� � 대해� 논증

한다(Godet).� 첫� 단계는,� '디에크리노멘'(*� � � )으로서(31절)� 그리스도인들� 스스로가� 자신을� 판단

하는�것이다.� 둘째� 단계는,� '크리노메노이'(* � � � ,� '판단을� 받는� 것')로서(32절)� 하나님께서� 당신

의� 자녀로� 하여금� � 회개케� 하고� 세상과� 함께� 정죄(情罪)받지� 않게� 하기� 위한� 사랑의� 표현이다.� �셋째� � 단계는,� '카타크리도멘'(*,� '죄정함을� 받은')으로서(32절)� � 마지막� � 심판때에� 영원한� 심판

을�하시는�것을� 의미한다.

=====11:33� 그런즉(* � ,� 호스테)� -� 이것은� 이제까지� 성만찬에� 대해� 논증한� 것에� 대한� 결론

임을�시사한다.� � � 형제들아� -� 이는� 바울이�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권속(眷屬)들을� 향해� 자주� 사용하는� 애정어린� 표현이다.� 바울은� 본장� 2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책망과� 유사한� 강력한� 권면을� 하

기� 전에�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의� 권면을� 받아� 들일� 수� 있도록� 애정어린� 호칭으로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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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det).� � � 서로� 기다리라� -� '기다리라'로� 번역된� 헬라어� '에크데케스데'(*)는� 두가지로� 해석된

다.� (1)� '환영하다'(to� welcome)� 혹은� '용납하다'(to� receive).� (2)� '기다리다'(to� wait).� 혹자는�

전자로�해석해서� '만찬에�서로� 용납하라'는� 의미로� � 이해한다(Hofmann,� � Ruchert). 그 러

나 본절에서는� � 후자로� � 해석하는� � 것이� � 더 타당하다(Edwards,� Godet).� 왜냐하면� �

본절은� � 21절의� '프롤람바네이'(*� � ,� '취함이라')와�대조되기�때문이다.

=====11:34� � 만일� 누구든지� �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 본절은� 22절과� 연관성을� 지닌다.�

그것은� 어떠한� 형편의� 사람이든지� 간에� 먹고� 마시는� 것� 자체에� 관심을� 갖고� 성만찬에� 참여하려

면�집에�가서� 먹으라는�의미이다.� � � 이는� 너희의�판단받는�모임이�되지�않게� 하려� 함이라� -� 본절

은� 허기를� 메우려고� 성만찬에� 참여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제시한다.� 그� 이유는� 잘못을� 범함으

로 하나님의징계를(29-32절)� 받는� 것을� 피해야� 한다는�것이다.� 바울은� 성만찬의� 목적을� 분

명히� 이해하고� 참여할� 것을� 권고한다.� � � 그� 남은� 것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귀정하리라� -� '그�

남은� 것'(*� � � ,� 타로이파)은� 성만찬� 외에� 다른� 문제들에� 대한� 교훈을� 말하는� 것이� 아리라,� 성만

찬에� � 대해서� 지금� 말하지� 못한� 세부적인� 사항을� 의미한다(Godet,� Grosheide).� 본절은� � 성만찬

의�규례에�대한� 설명을�맺으며�바울이�부언하는�내용이다. '귀정하리라'에� � 해당하는헬라어�

'디아탁소마이'(*� )는� '정돈하다'라는� 의미하며(Edwards,Hodge)� 아울러� 사도� 바울의� 권위를� 암

시한다.� 바울은�사도로서�모든�규례를 제정하고정비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지고� 있다.� 고린

도전서�제� 12장

=====12:1�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 '...에� 대하여'의� 헬라어� '페리'(*� � )는� 고린도� 교인들의� 서

면(書面)� 질문에�답하는�말이다.� � 이는� 이미� 독자들이�제기된 문제점에� � 관하여바울이� 알고� 있

음을� 전제한다.� 여기서� 바울이� '신령한� 것'이라고� 한� 말에� 대하여� 서로다른� 견해가� 있다.� '신령한�

것'의� 헬라어� '프뉴마티콘'(*� � � )이란� 단어의� 성(性)이�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1)� 혹자는� 14:37에서� � '프뉴마티콘'이� � '신령한자'(*,� 에� 프뉴마티코스)로� 사용되기� 때문에� � 본문의� � '프뉴마티콘'� �

역시� � 남성� � 명사로서� � '신령한� � 사람'을� � 의미한다고� � 본다(Hofmann,� � Edwards,Holsten,�

Heinrici).� (2)� 혹자는� 14:1에서와� 같이� '신령한� 것'(*� ,� 타� 프뉴마티카)이� 중성� 명사로서� '은사'

를� 가리킨다고� 본다(Calvin,� Luther,� Meyer,� � Godet,� Lenski).� 본문의� '신령한� 것'에� 대한� 성

(性)이� 불확실하며,� 또한� (1),(2)의� � 내용이서로� 일맥� 상통하므로� 어느� 한쪽으로� 기울� 필요는� 없으나� 본문의� 문맥과� 주제상� '신령한� 것'의� 의미는� '은사'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

다.� � � 원치� 아니하노니� -� 본문의� 헬라어� '우� 델로'(*� � � ,� '내가� 원하지� 않는다')는� 바울적� 표현으

로� 친근한� 어구인� '아델포이'(*� � � ,� '형제들이여')를� 수반한다(10:1;살전� 4:13).� 바울의� 희망을�

분명히�천명(闡明)하면서도�그� 대상에�대하여는�친근한�호칭을�사용함으로써�감정적인�문제로�비화될� 여지를� 최소화� 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성령의� 은사의� 목적과� 그� 기원에� 대하

여�그리고�은사의� � 다양성에�대하여�무지한�결과� 초래할�수�있는� 오류를�범하지�않기를�바란다.

=====12:2래� 고린도� 교인들의�대부분은� 이방인�출신으로� 이방의�우상� 종교를� � 좇아갔던� � 과거

상태를� 상기시켜줌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되어있는� 현재� 상태와� 대조시키고� 있다.� � 바울은� 성령의�

현현(顯現)� 이전과� 이후를� 이방인이란� 단어로� 분명히� 구별짓고� 있다.� � � 말� 못하는� 우상� -� 본� 구절은� 이방� 종교의� 허구성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표현으로� 우상은� 생명이� 없어서� 사람의� 요구에�

반응할� 수도� 없고,� 사람에게� 자신의� 생각을� 나타낼수도� 없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과거에� 섬

겼던� 우상의� 본질을� 말함으로써� � 그들이이런� 헛된� 우상을� 섬긴� 것은� 우매함과� 세속적� 탐심의�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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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이고,� 그 상태는 비극적인것임을� 부각시키고� 있다.� � �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 -� '끄

는� 그대로'의�헬라어� '호스� 안� 에게스데'(* � )에서� '호스� 안'은� 반복의� 개념으로� 쓰이

는� 코이네� 헬라어의� 관용어로서� '끌림을� 당할� 때마다'라고� 번역된다.� 그리고� '끌려갔느니라'의� 헬

라어� '아파고메노이'(*� � )는� � 아고(*� ,� '내가� 인도하다')의� 미완료� � 수동태� � 분사이다.� 이는� 과거

의� 고린도� 교인들이� 헛된� 우상의� 요구대로� 이끌려� 자기의� 판단과� 결정과는� 무관하게� 비인격적인�

숭배를�하였음을�보여준다.

=====12:3� 예수를�저주할�자라� 하지� 않고...예수를�주시라�할� 수� 없느니라� -� � '저주할� � 자'의헬

라어� '아나데마'(*� � )는� '신에게� 드려진� 것'(눅� 21:5)� 혹은� '신의� 저주아래� 놓인� 것'� 등의� 의미이

다.� 본래� 이� 단어는� 신성한� 장소에� 저축된� 것을� 의미하였다가� 신에게� 바쳐진� 것을� 뜻하게� 되었

고,� 바쳐진� 것은� 바치는� 사람에게는� 완전히� 잃어진것이므로� '멸망된� 것'� 곧� '저주받은� 것'의� � 뜻

이� 되었다.� � 바울은� 저주의� 대상에게� 이단어를� 사용하였다(16:22;롬� 9:3;갈� 1:8).� 본절에서� 바울

은� '저주받은�예수'(* ,� 아나데마� 예수스)와� '주� 예수'('� ,퀴리오스� 예수

스)를� 대비시키고� 있다.� 즉� 2절에서� 이교도에� 대하여� 언급하고나서� 본절에서는� 유대교적� 배경을�

가지고� 예수를� 저주받은� 자로� 인식하는� 부류들과� � 기독교적� � 그리스도관을� 가지고� 예수를� 주� 예

수로�고백하는�자들을�비교하여�핵심에� � 접근하고� � 있다.� 본절에서� '그리스도'라� 하지� 않고� '예수

'라� 지칭하고� 있는� 이유는� 역사적인� � 인물로서의� 인간� 예수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이� 있기� 때문이

다.� 바울이�전하는�예수는� � 하나님의�아들로서, 사람의� 몸을� 입고� 성육신하신� 후� 인류� 역

사에� 종속되어� 자발적인� � 삶을� 영위하시다가,� 그의� � 택하신� 백성을� 구속하기� 위해� 죽으시고� 부

활하신� � 그리스도이시다.� 한편� 예수를� '주'시라고� 할� 수� 있는� 조건을� '성령으로'(*,엔� 프뉴마티�

하기오)라고� 정한� 것은� 고후� 11:3,� 4에서� 제시한� � 것처럼� � '다른� � 예수','다른� 영'� 그리고� '다른�

복음'으로� 미혹되지� 않도록�하기� 위함이다.� '다른� 예수'란� 바울의� 증거에�위배되는� 것으로�바울은�

예수를� 참� 하나님(Vere� Deus)인� 동시에� 참� � 인간(Vere� Homo)으로서� 이해하였다.� 본장� 10절에

서� '영들을� 분별하는� 은사'를� 언급한� 것도당시� 고린도� 교회� 안에서� 다른� 신앙� 고백� 내용을� 가진�

'다른� 영'� 때문일�것이다.

=====12:4� � 은사�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리스마톤'('� )는� 하나님께서'값없이� 주시는� 선물',�

'은혜의� 선물'을� 뜻한다.� 이� 단어는� 바울� 서신에� 16회� 나온다.바울은� 이� 단어를� 특별한� 사람들만�

받을� 수� 있는� 어떤� 신기하고� 특별한� 은사라는� 의미로�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그리스도인

에게� 하나님이� 성령을� 통하여� 값없이� � 주시는� 선물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 � 여러� 가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 � 이레세이스'('� � � )는� � 원래'분배'� 혹은� '분할'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를�

여러� 갈래� 나눈다는�뜻이다.� � 이� � 단어가�본장� 11절에서는�분사형� '디아이룬'(*� � )으로� 사용되어� �

'나눠주다'라는� 의미로� 번역됨으로써� 은사의� '다양성'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5,� 6절의� � '여러� �

가지'에도� 이와� 동일한� 헬라어가� 사웅되었다.� � � 성령은� 같고� -� 예수를� 주로� 믿는� 모든� 그리스도�

인에게� 주시는� 성령의� 은사는� 어떤특정한� 것들� 만이� 아니라�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그� 다양성�

위에�한�성령의�역사가�있음을�알아야�분쟁이나�다툼�따위의�문제가�사라질�것이다.

=====12:5� 직임� -� 이에� 해당하는�헬라어� '디아코니온'(*)는� � '디아코네오'(* ,� '섬기다',� '봉

사하다')에서� 파생된� 말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 '디아코니아'는� 여러� 가지� 의미를� 포괄한다.� (1)�

이� 말은� '사랑을� 밑바탕으로� 한� � 섬김'을� � 뜻하고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모든� 봉사를� 가리킨다.�

(2)� 보다� 특별한� 의미로는� '어떤� 의무의수행'을� 뜻하여� 사도들이나� 전도인들이나� 마가� 같은� 조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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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들이�맡은� 책무를�수행하는것을�가리킨다.� (3)� 때로는� 이� 단어가� � 연보(捐補)하는� � 일을� � 가리키기도� � 하였다(롬15:31;� 고후� 8:1ff.).� 연보는� 부수적인� 활동이� 아니라� 기독교적� 사랑에서� 나오

는� 참된활동이기� 때문이다.� 본절에서의� 직임은� 이� 모든� 것을� 포괄적으로� 염두에� 두고� � 언급된것

이다.� � � 주는� 같으며� -� 직임은�개개인의�공명심으로� 말미암아� 행해지는� 것이�아니라� � '하나의� 주

(主)'를� 위한� 것이다.� 성도가� 그� 직임에� 따라� 각자에게� 부여된� 영역� 속에서� 봉사하는� 것은� 곧� 주를� 섬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의� � 머리는� � 그리스도이시기� � 때문이다.� 그러므로� 직임의� 열등

성�또는�우월성을�따지고�그에�치중하는�것은�그리스도의�머리되심을�잊은�처사이다.

=====12:6� � 역사는� 여러� 가지나...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 � '역사'에� � 해당하는� � 헬라어'

에네르게마톤'(*)은� '에네르게오'(*,� � '활동하게하다')에서� 온� 말로� 헬라� 세계에서는� 사람의� 사역

이나� 세상에� 감도는� 우주적이거나� 물리적인� 힘을� 가리켰고,�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사역이나� 사단

적인�힘을 지칭하는데� � 주로사용되었다(TDNT).� 본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사

역하시는� � 작용을� � 의미한다.� 바울은� '역사'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삼위이신� 하나님께서� 이러한�

모든� 은사를� � 일관성� 있게� 주관한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Mare).�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성령의� 은사는� 성도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다양하게� 주어진다.� 그러므로

성도들은상호� 은사의� 상이성을� 인정하고� 서로� 격려하면서� 은사를� 온전히� 사용해야� 할�

것이다.

=====12:7� � 바울은� 8-10절에서� 은사의� 목록을� 열거하기에� 앞서�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여러�

은사를� 주신� 것은� 유익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대원칙을� 소개하고� 있다.� � �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

라� -� '하려� 하심이라'의� 헬라어� '프로스'(*� � )는� � 목적이나� 의도를�가리키는� 전치사로서� 본구절은�

은사의� 목적을� 설명하고� 있다.� 은사의� � 목적은�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것임을� 여기서� 밝히

고� 있다.� � � 성령의� 나타남� -� '성령의'에� 해당하는� 헬라어� '투� 프뉴마토스'(*)는� 소유격으로서� 본�

구절에서는�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쓰였는지� 주격적� 소유격으로� � 쓰였는지� 논의의� 여지가� 있다.�

(1)� 주격적� 소유격의� 용법으로� 쓰였다면� 성령께서� 나타나신� 것을� 의미하고� (2)� 목적격적� 소유격

의� 용법으로� 쓰였다면� 사람이� � 성령의� � 내주(來週)하심을� 드러낸다는� 의미가� 된다.� (2)의� 견해는�고후� 4:2의� '진리를�나타냄'(* � ,� 파네로세이� 테스� 알레데이아

스)과 연관지어설명된다(Meyer,� Hofmann).� 하지만� '성령'은� 인격인� 반면� '진리'는� 비인격이

라는� 점에서� 명백히� 차이가� 있기� 때문에� 동일하게� 볼� 수는� 없다(Godet,� Edwards).� 따라서� (1)

의견해가� 더욱� 타당하다.� 즉� 성령은� 인격자로서� 은사를� 주시고� 성령께서� 나타내시는� � 증거가� 은

사임을�보여준다.

=====12:8� 성령으로� 말미암아...같은� 성령을� 따라� -� 바울은� 본절에서� 성령과� 연관지어� 전치사

를� 다르게� 사용하고� 있다.� 먼저� '말미암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 )는� '...에� 의해'(by�

means� of)라는� 뜻으로� '지혜'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지혜는� � 성령의조명(照明)에� 의한� 것임을�나타낸다.� 그리고� '따라'에� 해당하는�헬라어� '카타'(* )는� '...의� 기준에� 따라

'(according� to� the� standard� of)라는� 뜻으로� � '지식'과� 관계되어� '지식'이� 성령의�기준� 내지� 결

정에� 좌우되는� 것임을� 나타낸다.� � � 지혜와� 말씀을...지식의� 말씀을� -� 혹자는� '지혜'(*,� 소피아)와�

'지식'(* ,� 그노시스)이� 아무런� 차이점이� 없다는�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만,� � 바울은그들을� 구별하

고�있다.� 본문에서�벵겔(Bengel)에� 의하면� � '지혜'(소피아)는� � 이론적인성질을�내포하고� '지식'(그

노시스)은� 실제적인� 성질을� 나타낸다고� 한다.� 그러나� � 본절에서는� 전자는� 실제적인� 적용을,� 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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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이론적인� 지식을� 의미한다고� 봄이� � 타당하다.특히� '지혜'는� 하나님의� � 계획� 속에� 들어� 있는�

비밀을� 설명하는데� 쓰이는� 용어로� 이해되어야� 한다.� � 그리고�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것'(고후�

10:� 5)이며,� � '예수� �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고후� 4:6)이며,� '그리스

도� � 예수를� � 아는지식'(빌� 3� :� 8)이다.� � 결국� 이� 은사들은� 성령의� 조명으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

결합되어� 성령께서� 가르치는� 말씀으로� 다른� 사람과� 교제하는� 데� 사용된다(고전� 2� :� 6-13;� 엡

1:8,� 17;� 골� 2:3).� 혹자는� '지혜'는� '사도'와� '선지자'를� 만들고,� '지식'은� � '교사'를만든다고� 한다

(Godet).� 이� 점을� 수용� 한다면,� '지혜의� � 말씀'은� 본서� � 28절에� � 나오는직임들� 가운데� 첫째와�

둘째� 것인�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직임과� 관련되고,� � '지식의말씀'은� 그� 다음의� 직임인� '교사'의�

직임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다.� 이� 견해는� � '지혜'와� '지식'을� '실제'와� '이론'으로� 구분하여� 생

각하기보다는� 동시적으로� 볼� 수� 있게한다.� 결론적으로�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첫번째와� 두번

째� 은사로� '지혜의� 말씀'과'지식의� � 말씀'을� 성령과� 연관지어� 말한� 것은� '구원의� 계획'(Heilsplan)

이나� � '구원의내용'(Heilsgut)은� 성령께서�주시는�은혜로�이해될�수� 있음을�나타낸다.

=====12:9� �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 앞� 구절에서는� '성령'을� 제한하는� 전치사가� '디아'와� � '카

타'였는데� 본절에서는� '엔'(*� � � ,� '...안에',� '...로')이� 사용되었다.� 전치사� � '엔'은성령께서� 사역하

시는� 영역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수단으로서의� 의미도� 있어서� '디아'나'카타'를� 사용한� � 것보다� �

더� � 강력하게� � 성령께서� � 행동의� � 주체자임을� � 표현한다(롬9:1ff).� 믿음은� 모든� 신자들에게� 주어

지는�것이지만(롬� 1� :� 17� ;3� :22)� 본절의� '믿음'은� 일부� 그리스도인들에게�주어지는�제한된�은사

를� 의미한다.� � 이는� 바울이� 8� :� 2에서일반적인� 믿음과� 특별한� 은사로서의� 믿음을� 구분하고� 있는�

것에서�유추해�볼� 수� � 있다(Godet).� 본절에서의� '피스티스'(*� � ,� '믿음')는� 영적인�것을� 실제적인� �

것으로�발휘하는�능력의� � 개념을�내포한다.� 믿음의�능력은�예언하고(히� 11� :� � 3),� � 기적을행하는

(마� 21:� 21;� 고전� 13:2)데� 있어서� 필수적인� 조건이�된다.일반적으로� '피스티스'는� 모든� 은사들의�

기본이며,� 이� '믿음'의�정도에�따라� 은사는�보다� � 영향력있게� � 행사(行使)될� 수� 있다.� � � 병고치는�은사� -� '병� 고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야마톤'(*� � )은� 복수� 명사로서� 여러� 종류의� 질병이� 치유

의� 대상이었음을� 시사한다.� '은사'에� 해당하는� 헬라어'카리스마타'(*� � � )� 역시� 복수� 명사로� 은사

가� 각기� � 다른� 종류의� 병을� 치료하기� 위한� 것임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병� 고치는� 은사'는� 단지�

사람의� � 육체� � 뿐만아니라�영혼자�마음과�정신의�치료까지�포괄하는�말이다.

=====12:10� � 능력� 행함� -� 이� 은사는� '믿음'과� '병고치는� 은사'와� 본질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이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지체(肢體)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자연의� � 법칙을� 초월한� 기적적인�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도록� 하여�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게� 하는것이다

(C.P.Wagner).� 이� 은사는� '병� 고치는� 은사'보다� 더� 포괄적인� 힘을� 지닌다.� 이것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갑작스런� 죽음(행� 5:1ff.),� 박수� 엘루마를� 소경으로� 만든� � 일(행� 13:11)등과� 같이� 마귀

를�대적하며,� 그� 추종� 세력을�축출하는데 사용되는� � 능력이다.� 이러한� 능력� 행함으로� 나타나

는� 기적은�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에게� 나타내시는� � 방편이� 되며(Calvin)� 동시에� 하나님의� 살아계

심과�역사하심을�계시하는�수단이�된다.� � � 예언함� -� 이에�해당하는�헬라어� '프로페테이아'(*� � )는� �

하나님의� � 계시를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은사로� 하나님에� 의해� 수여된� 통찰력에서� � 비롯된� �

것이다.이� 단어는� '말을� 토하여� 내다',� '미리� 경고한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 말한다'는� 의미를�

가진� '프로페튜오'(*� � � )와� 같은� 어군으로� 미래에� 일어나리라고� � 예측되는� 상황과� 현재� 일어난�

사건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뜻이다.� 바울은� � '예언'을� 하나님께서� 교회를� 가르치기� 위해서�

베푸신� 가장� 큰� 은사� 중의� 하나로� 보았다.� � 예언은� 교회를� 신앙의� 기초� 위에� 세우며� 하나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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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으로� 된� 말씀을� 설명해� 준다.� � 신약� 성경에서� '예언'이란� 구약� 성경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증

거를�찾는� 것이었다.� � 그러므로�계시가�완결된�현재에�있어� '예언'이란,� 예언의�말씀인�성경을�바

로� 이해하여� 가르치며� 현재의� 삶에� 적용시키는� 것을� 가리킨다(계� 1� :� 3).� � � 영들� 분별함� -� '영들

'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뉴마톤'(*� � � )은� 악한� 영들을의미하며,� '분별함'의� 헬라어� '디아크리세이

스'(*� )는� � '구별',� � '인식',� '가려냄',� '심판'� 등의� 의미를� 지닌다.� 초대� 교회� 당시에도� 거짓� 선지

자가� � 많았으므로� 교회의� 순결성을� 지키기� 위해� 그릇된� 가르침을� 분별해야� 할� 필요가� 있었고� �

영들이�하나님께�속하였는지�시험해�볼� 필요가�있었다(요일� 4� :� 1). 하지만 당시에는기록

된� 말씀이� 없었으므로� 영들을� 분별하는� 은사가� 필요했다.� 이� 은사는� 교회를� � 거짓선지자들의� 미

혹으로부터� 보호하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발로(發露)였다.� 영들을� 분별하는� 은사는� 어떤� 현상의�이면에�있는� 정신적인�영향력을�간파하는�능력으로� 특수한� � 사람들에게만�주어졌다.� 사도� 베드로

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마음에� '거짓말� 하는� 영'이들어� 있는� 것을� 알았고(행� 5� :� 1-10),� 마술사�

시몬의� 마음이� '악독하고� 불의한� � 영'에얽매여� 있는� 것을� 간파하였다(행� 8:23).� 이러한� 은사를�

활용한다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고� 주장하는� 어떤� 행위가� 신적인� 것인지� 혹은� 인간적인� 것인

지,� 아니면 사단으로부터� 나온� 것인지를� 확실히� 식별할� 수� 있다.� � � 각종� 방언� 말함� -� '각

종'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네'(*)는� '혈통',� '민족','종류'� 등을� 의미하므로� 방언의� 종류가� 여러� 가

지임을� 가리키고� 각� 민족들이� 사용하는언어였음을� 시사한다.� 방언은� 고린도� 교인들이� 가장� 자랑

으로� 삼았던� 은사� 가운데� � 하나로� 교린도� 교회에서의� 방언의� 형태는� 각기� 다른� 민족들이� 사용하

는� 언어뿐만� 아니라어떤� 종교적� 흥분� 상태에� 이르렀을� 때�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말로�

하는� � 것까지도� 포함하였다.� � � 방언들� 통역함� -� '통역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르메네이아'(*� � �

)는'번역',� '해석'을� 뜻하며,� 이� 단어는� 신약에서� 본절과� 본서� 14:26에만� 나온다.� 이� � 특별한� 방

언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경우에� 이� 방언에서� � 유익을� � 얻고자한다면� 이� 방언을�

통역할�사람이 있도록 성령의 통역� � 은사를� � 구해야� � 할� � 것이다(14:13).� 그런데� 바울은�

방언이� 그� 자체로는� 교회에� 유익이� 되지� 않으므로� 자제할� � 것을� 권면한다(14:28).� 본절에서도�

방언의� 은사와� 함께� 통역함의� 은사가� 언급되는� 것은,은사가� 교회에� 유익을� 도모할� 수� 있어야� 함

을� 전제한다.

=====12:11� � 은사들은�그� 다양성에도�불구하고�공통된�기원을�가진다.� 6절에서�하나님의�역사

를언급한� 데� 반해서� 여기서는� 성령의� 행하심을� 언급하고� 있다.� 성령께서는� 은사들을� � 발생(發生)�시키실� 뿐만� 아니라�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다.� �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서로의� 은사들

을�자기들의�관점에�비추어�비교하여�열등의식이나�우월감에� � 빠질필요가�없다.

=====12:12� � 몸은� 하나인데...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 '몸'과� � 지체의� � 관계

를그리스도와�교회에�비유함으로써,� � 교회가�그리스도의� � 유기체(有機體)임을 이해시킨다.� '

같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다페르'(*,'just� as',� � '꼭...처럼')는롬� 12� :� 4처럼� 유사� 비교를� 이끌

어� 내고� 있다.� 본절에서� '그리스도'(*� � ,크리스토스)는� 단지� 교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De�

Wette)� 단순히� 교회의� � 머리로서의� 그리스도만을� 의미하지도� 않는다(Chrysostom,� Estius,� �

Meyer).� � 바울은� � 여기서'그리스도'를,� 교회를� 몸으로� 하는� 인격적� 주체자로서� 간주한다

(Edwards).� 몸은� � 단일체이면서도�많은�지체와�더불어�유기적�연관성을�이루는�것처럼�그리스도

도�많은�지체들로�구성되어�완전성과�통일성을�이룬다.

=====12:13� �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 그리스도� 안에서� 혈통적인� 구별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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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의�구분에� 상관없이� 한� 몸이� 되는� 것은� 성령이�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본절에서� � 바울은� '하

나됨'에� 각별한� 신경을� 기울이고� 있다.� 그것은� 고린도� 교인들의� 하나되지� � 못함에� 대한� 권면일�

수도�있다(엡� 4:4-6절).� 바울은 '성령'(*,� � 프뉴마)과'세례'(*,� 밥티스마)와� '몸'(*� � � ,� 소마)

을� 하나의�관계로� 본다.� � 즉한� 성령으로�세례를� 받음으로�그리스도의� 하나된�몸,� 곧� 하나된�영적� �

유기체가� � 되었다는� 것이다.� 이때� '성령으로� 세례받는다'고� 하는� 것은� 성령이� 어떤� 외적인� 방법

인� 물로써� 변화시킨다는� 뜻이� 아니라� 성령께서� 내적으로� 작용하여� 변화시키심을� 의미한다.� � �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 '또'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이'(*� � � )는전술한� 내용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설명을� 이끄는� 접속사로� 쓰였다.� 즉� 성령으로� 세례받은� 것을� '마시다'는� 표현으로�

보충한다.� 우리의� 주� 예수께서도� 성령을� 받아� � 들이는것을� 가리켜� '생수를� 마신다'라고� 표현하신�

바� 있다(요� 7:37-39).� 이제� 성령을� 받아들임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는� 모두� 다� '한� 몸'을� 이

루기�때문에�분열과�다툼� 따위를종식(終熄)시키고,� 공동�사역을�전개해�나가야�할�것이다.

=====12:14� �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 12절에서� 사용했던� 상징적인� 표현을� 다시� �

사용하여� 교회가� 갖는� 독특한� 성격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바울은� 인간의� 몸을� 비유로� 영

적인� 몸인� 교회를� 설명하고� 있다.� 즉� 교회는� 하나의� 몸으로� 되어� 있지만� 많은� 기능과� 역할을� 필

요로� 한다는� 것이다.� 12절에서는� 지체가� 많다는� 점에� 역점을� 두었다면,본절은� '한'� 몸이라는� 사

실을�강조하고�있다.

=====12:15,16� � 바울은� 몸의� 지체들� 각각이� 가지고� 있는� 중요성에� 대하여� 설명하고자� 손과�

발을� 대비시키고� 눈과� 귀를� 대비시키고� 있다.� 즉� 비중있고� 가치있는� 손과� 눈에� 비해� 덜� � 눈에띄

고� 덜� 사랑스런� 발과� 귀가� 불평하는� 것을� 예로� 들어� 고린도� 교인들의� 잘못된� 가치관을� 바로잡으

려� 한다.� '발'과� '손'� 그리고� '귀'와� '눈'� 등은� 은사가� 각기� 다른� � 사람들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

들이다.� 교회� 구성원들이� 자신의� 은사를� 다른� 사람의� 것과� 비교하여� 우월� 의식이나� 열등의식을�

가지고� 상대방에� 대해� 비난하거나� 불평하는� 것은� 교회의� 건덕상� 무익한� 것이다.� 영향력이� � 적고�

보잘것없는�은사라�할지라도�전체적인�관점에서�보면�귀중하다.

=====12:17� � 만일� 온� 몸이�눈이면...냄새맡는�곳은� 어디뇨� -� 본절은� 15,� 16절에� 대한 연 속

적인설명으로�교회의�각�구성원의�은사가�서로�다르다는�것을�전제한다.� 바울은 가정법을사용

함으로써� 이해를� 용이하게� 하고� 있다.� 온� 몸은� 듣는� 곳이� 없이� 보기만� 해서도� � 안되며,� 냄새� 맡

는� 곳이�없이� 듣기만�해서도�안된다.� 따라서�지체의�다양성은 곧� � 몸의효용성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그리고� 지체간의� 관계� 또한� 상호� 대립과� 불평의� 관계가�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기능을�

가지고�있다.

=====12:18�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 '원하시는� 대로'에� � 해

당하는� 헬라어� '에델레센'(*� )과� '두셨으니'의� 헬라어� '에데토'(*)는� 부정� 과거로서�하나님의�계획

과� 창조� 행위를�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 몸을많은� 지체들로� 구성� 되도록� 지으셨다.� 이렇

듯� 각� 지체들을� 세우신� 것은� 하나님의� 원하심에� 근거하는� 것으로� 바울은� 간주한다.� 하나님의� 원

하심은�완전하므로� � 각 지체들이존재하는� 자리가� 완벽한� 것이고� 각� 지체에게� 귀중한� 역할이�

있음을� 본� 구절은� � 보여준다.� 따라서� 누구든� 불평하거나� 시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

는�것이며� � 하나님의�창조� 행위에�도전하는�것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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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9� � 만일� 다� 한� 지체� 뿐이면� 몸은� 어디뇨� -� 17절의� 내용에�대한� 재설명이요� � 부연이

다.모두들� 자기가� 좋게� 여기는� 지체만� 된다고� 가정하면� 몸은� 정상적인� 기능을� 갖추지� � 못한� 불

구가� 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성도� 각자가� 하나님께서� 주신� 자신의� 은사를� � 발전하여� 전체� 공동

체�속에서�자신이�갖는� 독특한�역할을�잘� 수행하여야�그리스도의� � 몸인교회가�바로�설� 것이다.

=====12:20� �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 바울은� 12절에서� 몸의� 단일성에서� 지체와� �

다양성으로� 전개시켜� 나가다가� 본절에서는� 다시� 다양성에게� 단일성으로� 회귀(回歸)하고� 있다.� 역시� 강조점은� '하나'인� 몸에� 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각� 지체들의� 은사는� 다양할� 수�

있지만�교회는�그리스도를�머리로�한�하나의�통일된�교회로�존재한다.

=====12:21� � 내가� 너를�쓸데없다�하거나� -� 많은�지체들이�모여�하나의�유기체를�만드는� � 것이

기때문에� 각� 지체는� 그� 우선� 순위나� 중요도가� 덜하다고� � 하여� 그� 존재� 가치마저� �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몸에� 붙은� 모든� 지체는� 한� 몸을� 이루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되고� 한� 지체라도� 없으면� 다

른� 지체들이�자신의�기능을�온전히�발휘하지�못한다.

=====12:22� � 더� 약하게� 보이는� -� 이에� � 해당하는� 헬라어� '아스테네스테라'(*� � � )는'약한',� '병

든'� 등을� 의미하는� 말로� 본절에서는� 중요도가� 전혀� 없다는� 것으로� 간주(看做)한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 바울은� 원문상� 강한� 부정을� 사용함으로써� 모든� � 지체들이� 각각의� 고유한� 중요성을� 가지

고�있음을�강하게�부각시킨다.

=====12:23� �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 '덜� 귀히� 여기는� � 그것들

','아름답지� 못한� 지체',� 그리고� '부족한� 지체'(24절)는� 앞절의� '더� 약하게� � 보이는� � 지체'를� 다른�

표현으로�설명한� 동일한�의미들이다.� 사람들이�가치기준을�어디에� � 두느냐에�따라� 지체� 상호간에

는� 우열이나� 차등이� 있다고� 간주될� 수� � 있겠으나� � 하나님께서는열등하다고� 간주되는� 지체들을�

존귀하게� 여기신다는� 사상을� 실례를� 들어� 설명하고� �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적� 세계의� 통치�

원리이다.� 그러므로�성도는 각자에게� � 주어진은사를�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고� 신실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한다.

=====12:24� �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존귀를� 더하사� -� 바울은� 18절에서� � 언급한� 대

로몸의� 형성(形成)이�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를� 따라� 되었다고� 반복한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조화를� 이루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속성을� � 전제하는� 것이므로� 몸

의�조화도�완벽하다.� 따라서�몸과� 그� 몸에�붙은� 모든� 지체들은� � 함께존귀함을�얻는다.

=====12:25� � �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 본절은� 하나님의� 주체적인� 행동으로� 구성된� �

몸의� 본절은� 하나님의� 주체적인� 행동으로� 구성된� 몸의� 지체들이� 상호� 대립� 관계가� � 아니라� 상호�

협력� 관계임을� 보여준다.� � 교회의� 통일성이란� 이러한� 상호� 관계� 속에서� � 이루어지며,� 성도는� 하

나님께서� 교회를� 한� 몸으로� 세우신� 의도에�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 교회의� 참된� 지체가� 될� 수� 있

다.

=====12:26� � �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 지체들은� � 서로� � 공

동체의식과�공동의�감정을�가지고�있다.� 각각� 독럽된�것이� 아니라�서로� 유기체적인�긴밀한연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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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지닌다.� 바울은� 이처럼� 하나의� 유기체로� 지음받은� 사람의� 몸이� 갖고� 있는� 특성을� 설명하여�

교회가�가져야�할�공동체성을�상기시키고�있다.

=====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 본절은� 12-26절과� 28절� 이하의�

교량적인� 역할을� 한다.� 이제까지� 몸과� 지체에� 대하여� 의인법을� 사용해온� 바울은� 이제� 28절� 이하

에서�다른�교회의�구성원에�대한�본격적인�지칭,� � 곧� '너희'를� 사용한다.� � '너희는'(*� ,� 휘메이스)

은� 일반적으로�고린도�교인을�뜻하지만,� 구체적으로는�교회에서�은사와�직임을�가진� 사람들을�가

리킨다.� 한편� '그리스도의� 몸'(*,소마� 크리스투)은� 교회� 전체를� 가리키지만,� '각� 부분'(*� ,� 에크� �

메루스)은� '부분적으로'(in� part)라는� 의미로� 각각의� 구성원이� 몸에� 속한다는� 것을� 가리킨다.따라

서� 몸의� 각� 지체는� 중요한� 부분이라� 하여� 자신이� 전체라고� 주장할� 수� 없고� 사소한부분이라고� 하

여�전체에서�제외될�수� 없다.

=====12:28� � 하나님이�교회� 중에�몇을� 세우셨으니� -� '몇'에� 해당하는�헬라어� '후스�멘'(*� � � )

은� 바울이� 자신의� 의도(意圖)대로� 몇몇� 직임과� 은사들을� 구분하여� 설명하고자� 함을� 보여준다.� �바울은� 사도로부터� 방언에� 이르기까지� 교회� 안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사람과� 은사만� 언급하고�

기타� 다양하고� 일반적인� 은사에� 대해서는� 생략하고� 있다.� � � 사도�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

스톨루스'(*� � � )는� '아포스텔로'(* � � ,� '보내다')에서� 온� 말로�초대� 교회� 당시에�이� 직분을�가진�

사람은� � 매우� 중요했다.� �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 이� � 직분을� 맡으라는� 직접적인� 명령을�

받았으며(눅� 6:13;롬� 1:1),� � 이� � 직분에� 대한� 신약성경의� 언급을� 살펴보면� 이� 외에도� � 4가지� 특

징을� 갖는다.� (1)�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고(갈� 1� :� 15),� (2)� 교회에서� 구별하여따로� 세웠고(행�

13:1),� (3)� 전체� 교회가� 그를� 사도로� 인정하고(갈� 2:7),� � (4)� � 사도의표로� 사도직이� � 확고하게� �

증명되었다(고후� 12:12).� � � 선지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페타스'(*,� '대변자',� '대리자')

는� 사람들�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대변자를� 가리킨다.� 이에� 대한자세한� 내

용은� 10절� 주석을� 참조하라.� � � 교사� -� 이들은� 사도나� 목사가� 아니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

게� 효과적으로� 가르쳐서� 교인들을� 온전히� 세우는� 사람들이다(고전� 14:30;엡� 3:5).� 교사의� 사역

은� � 사도들이나�예언자들과는�달리�한� 지역과�깊은� 관련을�맺고� 있는�것이� � 특징이다. 당 시

에는필사본이� 매우� 귀중해서� 교인들� 모두가� 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 � 이러한� � 이유로인해�

교회에서� 교사의� 위치가� 상당히� 중요했다(Morris).� � � 서로� 돕는� 것� -� 이에� 해당하는� � 헬라어� � '

안틸렘프세이스'(*� � )는'손을� 거들어서� 도움'의� 의미로� 특별히�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행하는�

모든� 종류의도움을� 가리킨다.� 본절에서는� 교회와� 연관지어� 교회� 안에서� 베풀어지는� 도움을� 시사

한다(Grosheide).� 이는� 포괄적으로� 돕는� 모든� 일을� 가리킨다기보다는� 구체적으로� 사람들의� 외적

인� 필요를� 채워주는� 일을� 가리킨다.� 바울은� 이� 은사를� 말할� 때� 집사(執事)들의직무를� 염두에� 둔�것으로� 생각된다(Chrysostom,� Hodge).� � � 다스리는� 것�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퀴베르네세이스

'('� � )는� '선장'이라는� 의미로(행� 27:11;� 계� 18:17)� 배가� 항해하기에� 휘험한� 모래톱� 해안을� 통과

할� 수있도록� 조종해� 주는� 사람을� 가리킨다.� 본절에서는� 권위를� 가지고� 회중을� 인도하는� 자,곧� 치

리하는� 사람들(rulers)을� 가리킨다.� 이들은� 고대� 교회에서는� '세니오레스� 플레비스'(Seniores�

Plebis,� '평민� 장로')라고� 불리었으며(Hodge),� '다스리는� 것'은� � 교회의감독들이나� 장로들에게� 필

요한�은사로�간주되었다(딤전� 5:17).

=====12:29,30� � 다� 사도겠느냐...다� 통역하는�자겠느냐� -� 바울의�이� 수사적인�질문에는�다음과� �

같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1)� 몸에� 여러� 지체가� 존재하는� 것과� 같이� 교회에서도� 모두가�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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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은사와� 동일한� 직임을� 가진다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2)� 모두� � 다� � 동일한은사를� 갖기를� 원

하는�마음을�억제하고�하나님께서�주시는�대로�은사를� � 감당해야� � 한다.� (3)� 은사는�우열을�비교

하거나� 대립� 관계에서가� 아니라� 협조� � 관계로� � 이해되어야한다.� 따라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은

사를� 가진� 사람들이� 교만하거나� 그렇지� 못한� � 자들이� 시기하고� 불만을� 갖는� 것은� 교회의� 건덕상�

무익하다.

=====12:31� 너희는�더욱� 큰� 은사를�사모하라� -� '더욱� 큰� 은사'에� 해당하는�헬라어� '타� � 카리스

마타� 타� 메이조나'(*� � � )는� '더욱� 탁월한� 은사'라는� 의미로� 이는� 은사들이� 서로� 상대적임을� 시사

한다.� 그러므로� 바울이� 모든� � 은사들이� 교회에� 필수적인� 요소들이라고� 언급한� 것과(21절ff.)� 약

간의�모순이� 있는� 듯� � 보일수�있다.� 그러나�바울은�고린도� 교인들이� 잘못된�표준을�가지고� '탁월

한� 것'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수정해� 주려는� 의도를� 가지고� 이렇게� 말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특별히� 방언� 은사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반해� 바울이� 언급하고자� 하는� 은사는� 교회� 전체에� 유익을� 주기에� 제일� � 효율적이고광범위한� 힘

을� 지닌� 것이었다.� 다시� 말해� 고린도� 교회는� 은사의� 효율성� 보다는� 매력적이고� 대중적인� 것에�

관심을� 가졌으나� 바울은� 모든� 은사보다� 뛰어난� 은사를� 새로운� � 관점에서� 제시하고자� 한다.� 고린

도전서�제� 13장

======13:1-3� �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 내게� � 있는� 모든� 것

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 사르게� 내어� 줄� 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

라.� -� 1-3은� 은사(*� � )의� 목적을� � 설명하는� � 의미에서,� 사랑이� 없으면� 그것들이� 존재의� 의의(意義)를� 가지지� 못한다고� 한다.� � 고린도� � 교인들은�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은사(恩賜)를� 오용(誤用)하며� 사랑은� 없이� 그것들� 자체를� 중대시하며� 자랑하였다.� 여기� 본문에� 있는� 방언이나� 예언� 같은�

것은� 그때� � 초대� � 교회에� 있었던� 초자연적인� 은사였다(Grosheide,� De� Openbaring� God� In�

Het� Nieuwe� Testament,� p.186).� 그들이� 그� 은사를� 사랑의� 목적으로� 사용하지� 못하였던� 것이

다.� 14장� 참조.� 그러므로� 바울이� 여기서� 그것을� 경계한다."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 이�

말씀엔,� 사랑이� 없이� 그런� 은사를� � 취급하는� 자는� (1)� 심령과� 인격을� 결여(缺如)한� 도구와� 같다는� 의미도� 있다.� � 인격적(人格的)인� 것은,� 사랑을� 예상할� 수� 없는� 쓸쓸한� 세계에도� 사랑을� 건설한다.� 인격은� 미움을� � 미움으로� 갚는� 기계적� 법칙에� 예종(隷從)하지� 않고� 미움을� 사랑으로� 대하는� � 좋은� � 역리적� 행동(逆理的行動)도� 취한다.� 현대는� 기계문명이� 발달됨에� 따라,� 인간의� � 생활이� � 점점� 기계화되고� 마는� 것은� 유감이다.� 인간은� 기계를� 초월하여서만� 살� 수� 있는� 것이다.� � 과

학은� 발달하나� 사랑은� 식어지고� 사람이� 사람을� 대할� 때에� � 심령상� 뜨거움이� 없다.� � 이점에� 있어

서�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것이� 있다.� 그것은,� 내가� 위에� 말한� � 대로� � 기계에� 반대되는� 요소� 곧,�

인격이라는� 것이� 자연적� 인격(自然的人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성신으로� 거듭나� 진정한� 사랑을� 가진� 인격을� 의미한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 사랑을� 소유한� 인격은,� 이�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한다.� (2)� 아무� 의미� 없는� 소리라는�뜻도� 있으니�고,� 아무� 유익도�주지� 못하는�맹

목적(盲目的)인� 것이란� 뜻이다.� � �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이� 말씀� 역시� 위에� "소리나는� 구리와�울리는� 꽹과리가� 되고"라는� 말에� 비하여� 크게� 다른� 뜻을� 가지지� 않는다.� 이� 말씀도� 역시� 사랑이�

없이� � 하나님의� 은사르르� 취급하는� 자는� 아무런� 효과를� 나타내지� 못하고� 무의미한� 존재가� 된다

는�것이다.� 하나님이�주신� 모든� 좋은� 것들도�모두� 다� 사랑을�가지고서야� � 그� � 의의(意義)를�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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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킨다.� � � "내게� 아무� 유익이�없느니라".� 자선� 사업과� 같은� 선한� 일일지라도� � 진정한� � 사랑이� 없

이� 행하여질� 때에는� 그� 행하는� 자� 자신에게� 유익이� 없다는� 것이다.� 신자는� 남을� � 위하여� 희생할�

때에�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에게도� 유익이� 돌아올줄� 아는� 자이다.� � 그러나� 그러한� 일을� 진정한�

사랑이� 없이� 행하는� 사람들이� 많다.� 혹은� 무의식적(無意識的)으로� 행하고,� 혹은� 어떤� 명예를� 위하여�행하고,� 혹은� 군중� 심리(群衆心理)에� 이끌려서� 행하기도�한다.� 그� 행하는� 일이� 선한� 일이지마는�진정한�사랑으로�행한�것이� 아니라면� � 그행동자�자신은�진정한�유익을�보지� 못한다.� � �

=======13:4� �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 이� 두가지� 덕행은,� 공격(攻擊)을� 받거나� �괴롭힘을� 당하여도� 보복(報復)하지� 않음이다.� "오래� 참고"란� 헬라� 원어(*� )는� 화를� 내는� 데서� 멀리함을� 이름이니,� 곧,� 격동성(激動性)있는� 감정을� 피함이다.� 그리고� "온유"란� 말(*� � )은� 친절을�베풀기로� 준비된� 태도이다.사랑이� 있으면,� 아무리� 성급한� 사람이라도� 이� 두가지� 덕을� 행할� 수� �

있다.� � 그렇게� 되는� 이유는,� (1)� 사랑은� 수고할� 수� 있는� 강한�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 "사랑은� �

죽음� 같이� 강하고......�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 바꾸려� � 할지라도� � 오히려� � 멸시를� � 받으리라"(아� 8:6,7).� 여기�

고전� 13장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인하여� 온� 것이니,�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관계된� 사랑

이다.� 우리는� 무슨� 일에나�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죽으신� � 사건을� 생각하여� 어려움을� 참게� 된다.�

그뿐� 아니라.� (2)� 사랑은� 소망을� 내포(內包)하기� � 때문에� 참는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항상�함께� 있다.� � 그리스도의� 속죄적�사망(贖罪的 死亡)은� 그의� 재림을�성립시켰다.� 세상을�이기신� 그는� 장차� � 두번째� � 오신다.� 우리는� 주님이� 오실� 것을� 기다려� 모든� 난관을� 참게� 된다.� 약�

5:7,8에� 말하기를,� "그러므로�형제들아�주의�강림하시기까지�길이�참으라�보라�농부가�땅에서�나

는� 귀한� �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심판자가�문밖에서�계시니라"고� 하였다.투기하는� 자가�되지� 아니하며� 사랑은�자랑하지�아니

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 � 여기� 기록된� 세� 가지� 말씀도� 서로� 연락(連絡)있는� 한� 뭉치이다.� 이�셋은,� (1)� 자기와� 남을� 비교하여� 경쟁(競爭)하는� 심리로� 범하는� 죄를� 범치� 않음이고,� (2)� 명예주의(名譽主義)를� 가짖지� 않음이다."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남을� 나보다� 낫게� 여겨� 존경하는� � 것은� � 옳으나(빌� 2:3),� 나보다� 우월하다고� 섭섭히� 여김은� 투기이다.� 의(義)와� 선이� 결핍(缺乏)한� � 이세상에서,� 내가� 갖지� 못한� 의(義)와� 선을� 남이� 가졌다면� 그것이� 얼마나� 고마운� � 일인가?� 그것은� 기쁜일이지� 섭섭한� 일은� 아니다.� 남에게� 있는� 의(義)와� 선도� 그리스도의� � 구속� 운동(救贖運動)� 곧,� 사랑에서� 생겼을� 것이니,� 그것들은� 그리스도의� � 사랑의� � 움직임이다.� 그것들을�보는� 나로서는� 기뻐할� 것밖에� 없다.� � � 그� 뿐� 아니라� 기독자는� 자기� 개인� 문제(自己個人問題)의�해결을� 그리스도� 안에서만� 기대한다.� 그는,� 그와� 같은� 의미에서,� 독립인(獨立人)이니� 자타� 비교(自他比較)� � 혹은� 경쟁의� 의식(意識)부터� 가지지� 않는다.� 기독자인� "나"의� 구원� 문제� 기타� 문제� �해결이� "나"� 자신의�진실한�믿음으로�관계된� � 그리스도의�힘에만�달렸고,� 다른� � 사람들이� � 잘� 한�

일에� 달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는� 남의� 잘한� 일에� 의뢰(依賴)할� 것도� 없거니와� 간섭할� 것도�없다.� 투기는� 남의� 일에� 간섭하는� 죄악이다.� � 그리스도� 안에서만� 사는� 독립인은� 투기하지� 않는

다."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기독자의� 별명은� 사랑이다.� 그� � 이유는,� �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

하여� 독생자를� 주셨고,� 그는� 독생자의� 속죄� 희생(贖罪犧牲)을� 받음에� 따라서� 남을� 사랑할� 수� 있는� 자가� 되었기�때문이다(요일� 4:9-11).� 이와� 같이� � 주님을� � 영접한�그는� 주로써�자랑하나니,� 그�

자랑이� � 자기에게만� � 있고� � 남에게는� � 있지� � 아니한다(갈� 6:4).� 그� 자랑이� 자기에게만� 있다� 함

은,� 자기는� 죄인으로만� 나타나는� 것이니� 만큼� � 주님으로만� 광영(光榮)으로� 여김을� 이름이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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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같은� 자랑은� � 주님만� � 자랑거리로� 아는� 심리인� 것이니� 만큼� 그것은� 믿음이다.� � � "교만치� 아

니하며".� "교만"은� 스스로� 높아진� 심리이다.� 사라이� 일단� 스스로� 높아지면� 낮아지는� 처세를� 못한

다.� � 그가� 겸손을�힘씀도�실상은� 높아지기� 위한� 심리로� � 그리하기�쉽다.� 그러므로�기독자는�처음

부터�높아지지�않아야� 한다.� � 사랑은�하나님� � 아들이� 적신(赤身)으로� 십자가에�못� 박혀� 낮아지심이니,� 이와같은� 속죄의� 사랑을� 받은� � 기독자로서는� 교만할� 수� 없다.� 이렇게� 낮아진,� 사랑의� 소유

자가� 어찌� 교만하랴?� 죄는� 만물� 중에� 제일� 더럽다.� 예수님은� 그것을� 씻는� 이가� 되신� 셈이다.� 이�

사랑이�얼마나� � 낮아진�처지에서�실현된�사랑인가?� �

=====13:5� � �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 이� 두가지� 말씀도� 역시� �

서로� 통함이�있는� 한� 뭉치이다.� "무례"란� 말(*� � )은� 합당치�안헥� � 행함이다.� 그것은,� (1)� 공중(公衆)을� 위한� 예의(禮儀)가� 없이� 행함을� 가리킬� 수� 있다.� � 신자는� 그리스도의� 지체요� 고립(孤立)되어� 자행� 자지(自行自止)할� 사람이� 아니다.� � 그는� 개인(個人)이면서도� 그리스도의� 몸(하나님� 백성)의� 모든� 지체들과� 함께� 살줄을� 알아야� 된다.� � 속죄의� 사랑을� 받은,� 사랑의� 사람은� 인륜상(人倫上)� 질서도� 더욱� 강화(强化)할� 지언정� 약체화(弱體化)시키지� 않는다.� 사람에� 대한� 책임을� 다�할줄� 모르는�자가,� 어떻게�하나님을�바로�섬길� 수� 있으랴?(요일� 4:21).� 하나님을�공경하노라� � 하

면서� � 부모를� 박대한� 바리새인은� 실상� 하나님을� 바로� 공경하지� 못한� 자였다(마� � 15:5,6).� � 사람

에게� 대한� 예의(禮儀)와� 하나님에게� 대한� 경외(敬畏)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 가지고� � 있다.� 눅�18:4에� 불의한� 법관의� 말도�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라고하여,� 양자

(兩者)의� 관련성을� 암시한다.� (2)� 권위(權威)를� 존중히� 하지� � 않음이� � 역시� "무례"에� 속한다.� 이�세상에는� 권위라는� 것이� 있다.� 실례를� 들면,� 부모는� 자식의� 권위요,� 선생은� 제자의� 권위요,� 노인

은� 젊은� 자들이� 권위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 제정하여� 주셨다.� 사람이� 땅의� 권위들을� 존경하도

록� 된� 것은,� 그들이� 그� 방법을� 통하여,� � 하나님� 경외(敬畏)에� 이르는� 훈련을� 받도록� 한� 것이다.�레� 19:32에� 말하기를,� "너는� �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얼굴을�공경하며�네� 하나님을�경외

하라� 나는� � 여호와니라"고� 하였다.� 권위를� 존경할줄� 모르는� 자에게는� 하나님을� 알게� 하기가� � 곤

란하다.� � 존경� 의식(尊敬意識)은,� 어떤� 의미에선� 경건을� 돕는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 � 중에� � 존경할� 자를� 존경하는� 것이� 우리의� 경건도� 증진(增進)시킨다.� � �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이것은� 상습적(常習的)으로� 개인적� � 유익� � 만을� 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속죄의� 사랑을� 받은�사랑의� 사람은,� 벌써� � 독생자와� � 함께� 모든� 것을� 받아� 가지고� 나온다.� 그는� 욥과� 같이� "주께서�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뢰하리니"라고� 한다(욥� 13:15�脚註).� 그는� 사람에게� 무엇을� 받으려고�행하지� � 않고,� 사람에게�무엇을� 주려고�만� 행한다.� 그가� 자기의�유익을� 구하지�않는� 이유

는,� 자아(自我)가� 없어진� 까닭이� 아니다.� 그에게� 자아라는� 것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자아는� �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음"을� 기억하는� 자이다(행� 20:35).� � �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아니하며.� -� 이� 두마디�말씀도�서로� 유사(類似)한� 방면을�가진� 한쌍(雙)이다.� 성내는�것이나,� 악한� 것을� 생각함은� 둘� 다� 악독한� 심리를� 발함이다.� � � 성내는� 것은� 잠재(潛在)하였던� 증오(憎惡)가� 폭발(爆發)함이니� 그것이� 곧,� � 살인독(殺人毒)이다.� 분노는� 남을� 죽이려는� 마음의� 발작(發作)이다.� (1)� 이것은� 영생의� 생명운동을� 방해하며(요일� 3:15),� (2)� 하나님의� 사랑을� 내� 마음에서� 내쫓으며(요일� 3:17),� (3)� 분노하는� 자� 자신이� 죽는데� 나아간다(요일� 3:14).� 남을� 죽이려다

가� � 먼저� � 자기를�죽이고� 만다.� � � 속죄의� 사랑을�받은,� 사랑의�사람은� 그렇게�할� 수� 없다.� � 요일� �

3:16에� � 말하기를,� "그가� 우리를�위하여�목숨을�버리는�것이�마땅하니라"고� 하였다.� 성내는�죄를�

이기는� 비결은� 무엇인가?� (1)� 남들로� 말미암아� 괴롭힘을� 당할� 때에� 분노하나,� 그때에� 우리가� 생

각하여야� 될� 것은� 이것이다.� 곧,� "내가� 그� 형제를� 위하여� 죽을� 책임까지� 있는데� 그� 형제의�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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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괴롭힘을� 당하지� 못하랴"하는� 생각이다.� 그렇게� 생각함이,�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

신� 것을� 그대로� 믿는� 믿음을� 지니는� � 생각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랑을� 입으로는� 받

는다고� 하면서,� 행위로는� � 그것을� 받지� 않은자처럼� 행하면� 안� 된다.� 말로만� 믿는� 다하고� 행위로�

그렇지� 않으면,� 이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랑을� 정성스러이� 받지� 않는� 불행이다.� (2)� 분노를� 이

기는� 또� � 한가지� 비결은� � 성령� 충만의� 은혜를� 받음에� 있다.� � 성령� 충만은� 누구든지� 간절히� 원할� �

때에� 받아진다.� � 사도� 바울은�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에베소� � 교인들에게� � 명령하였다(엡� 5:18).�

특별히� 성내기� 잘하는� 사람으로서는� 그� 성질� 하나가� 자기를� 망치는� 줄을� � 깨닫고� 그것� 하나� 고

치기� 위하여� 전심으로� 기도하여야� 한다.� � � "약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이것은� 기독자가� 억

울함을� 당하였을� 때에� � 가해자(加害者)에게� 복수(復讐)를� 안� 할뿐� 아니고� 그� 받은� 손해를� 생각하지도� 않음을� 의미한다.� 벧전� 4:8에� 말하기를�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하였다.� 우리가�

받은� 속죄(贖罪)의� 사랑은,� 사죄의� 사랑이니� 이� 사랑을� 받은� 사랑의� 사람이� 어찌� 복수� � 사상(復讐思想)을� 가지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랑은,� 우리가� 그의� 원수되었을� 때에� � 우리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죽음심이었다(롬� 5:10).� 리차드.윌렘손(Richard� Willemson)은� 주님을� 위하여� 핍

박을� 받아� 얼음� 가운데� 피하였다가,� 자기를� 잡으러� 온� � 사람이� � 얼음� 가운데� 빠져� 죽게� 되었을�

때에�그를� 건져주었다.

=====13:6� �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 (1)� 불의는� � 하나님의� � 원수

이니,� 하나님의� 자녀된� 신자가� 그것을� 기뻐할� 수� 없다.� 시� 5:4에� 말하기를� "주는� 죄악을� 기뻐하

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하며"라고� 하였다.� (2)� �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불의

(不義)�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니(사� 53:4-6)� 신자� 된� 우리가� 어찌� 불의를� 기뻐할� 수� 있을까?� (3)�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배척하며� 떠날� 그때에� � 바로� � 참� 기쁨은� 신자의� 마음� 속에� 온다.�

그러므로� 우리� 본문� 하반절� (下半節)은� 뒤이어� 말하기를,�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라고� 한다.� 이�말씀� 뜻은,� 복음� 진리가� 좋아할바(복음� � 진리가� 가르친� 선과� 의)를� 기뻐한다는� 뜻이다.� "진리"는�

여기서� 복음� � 진리를� � 가리킨다(골� 1:5;엡� 1:13;갈� 5:7;살후� 3:13,14;요� 1:17).� "함께"란� 말은�

"진리"란� 말을� 인격화(人格化)한� 경우의� 용법(用法)이니,� 성령께서� 진리를� 통하여� � 인격적으로� �역사하시기� 때문에� 이런� 표현법이� 나왔다.� � � 그런데� 이� 기쁨은� 무엇� 때문에� 필요한가?� (1)� 그것

은� 물론� 몸의� � 건강을� � 위하여도� 유익하다.� 그러나� (2)� 그보다도� 그것은� 영적(靈的)으로� 유익하니,� 기쁨이� 있어야� 믿음과� 감사가� 증진(增進)되고� 또한� 모든� 덕을� 힘있게� 피곤함이� 없이� 실행하게�된다.

======13:7� �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 것을� � 견디느니라.� �

-� (1)� 기독신자와� 모든� 것.� 여기� "모든"이란� 말이� 네번� 나온다.� 속죄함을� 받은� 신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은� 협력하여�선을�이룬다"(롬� 8:28).� 믿는� 자를� 위하여� "자기� � 아들을�내어� 주신� 하나님

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는가?"(롬� 8:32).� "모든� 일에� 우리를� �

사랑하시는� � 이로� � 말미암아� � 우리가� � 넉넉히� � 이긴다"(롬� 8:37).� "만물이� 다� 너희(신자들)의� 것

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 너희

(신자들)의� � 것이요"라고� � 하였다(고전� 3:21,22).� � � 그러면� 속죄의� 사랑을� 입은� 사랑의� 사람,�

곧,� 기독� 신자는� 무엇이든지� 결국은�자기에게� 복될줄�아는� 것인� 만큼,� 그는� 그� 모든� 일에� 참으며�

믿으며� 바라며� 견딘다.� � � 한� 번은� 어떤� 배가� 파선되어� 그� 배에� 탔던� 사람들이� 다� 죽고� 한사람만�

남았다.� � 그가� 바다물� 위로� 표류(漂流)하다가� 필경� 한� 무인도(無人島)에� 상륙하여� 조그마한� � 초막(草幕)을� 지어� 가지고� 살고� 있었다.� 하루는� 먹을� 것을� 잡으려고� 섬에� � 돌아다니던� � 중� 자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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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사이에� 초막이� 불붙어� 버렸다.� 그러나� 불붙는� 연기� 때문에� 멀리서� 다른� 배가� 그� 연기를�

신호(信號)로� 알고� 와서� 그� 외로운� 사람을� 건져� 주었다.� � � 끄레스.쌌스(Grace� Saxe)� 부인은� 외국� 선교사로� 가기를�작정하고,� � 타고갈� � 기선을� 정하고�떠날� 시간까지�약속하였다.� 그러나� 이� 선

교� 부인은,� 자기� 부친이� 병들었기� � 때문에� 정한� 날자대로� 떠나지� 못하여� 마음이� 불안하였다.� 그

러나� 후에� 알려진� � 대로� � 그� 타려던� 배가� 가다가� 파선� 당하여� 승객(乘客)은� 모두� 다� 죽었다.� � �(2)� 저렇게� 모든� 것이� 자기에게� 유익할� 줄� 아는,� 사랑의� 사람� 기독자는� 모든� � 역경과� 고난에� 대

하여� 보는� 방법이� 불신자와� 다르다.� 기독자는� 평안한� 일들에� 있어서도� 인내와� 소망과� 신앙을� 지

키지만,모든� 역경과� 고난� 그자체도� 자기� � 자신을� � 훌륭하게� 만들어� 주는� 줄� 안다.� "환난은� 인내

를,� 인내는� � 연단을,� � 연단은� � 소망을"� � 이룬다(롬� 5:3,4).� 약� 1:2-4참조.� � � 기독자가� 역경과� 고

난을� 잘� 이기어� 지나간� 뒤에� 하나님의� 상급이� 오는� 것을� 믿는다(약� 1:12).� 그는,� 자기를� 위하여�

독생자의� 보혈까지� 주신� � 하나님의� 사랑이� 어디까지든지� 실패하지� 않을� 줄� 믿는다.� � 이� 믿음으

로� 그는� 어디까지든지� 참으며,� 이� 믿음으로� 바라보며� 견딘다.� 그의� 이� 생활은� 비상(非常)한� 일,�곧,� 큰� 희생이나� 순교� 행위가� 요구되는� 경우에만� 지향(指向)된� 이상(理想)이� 아니다.� 그의� 이� �생활은,� 여기� "모든� 것"이란� 말이� 보여줌과� 같이(고전� 13:7),� 일상� 생활(日常生活)에� 실시되어야�한다.� 일상생활에� 이와� 같은� 승리� 생활을� � 하면,� 비상한� 희생이나� 순교의� 승리는� 자동적(自動的)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기독자가�일상�생활에�승리를�거두지�못한다면�비상한�생활이나�순교의�

때가� 와도� 그� 기회에는� 참여하지� 못한다(Lenski).� � 일상� 생활의� 모든� 어려움에� 있어서,기독자인�

나는참나니,� 그� 참는� 것은� 하나님을� 기다리는� 기쁜� 맛� 있는� � 일이고,� 키니네� 교갑을� 씹지� 않고�

그냥� 통으로� 삼켜� 넘김과� 같은� 지혜있는� 일이다.� � � 또� � 나는믿나니,�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피� 흘리기까지� 사랑하시어� 구원하여� � 주신� 까닭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는�

자로서는� 모든� 것이� 다� 자기에게� � 복이� 될줄로� 믿는다.� 나는바라본다.� 그� 이유는� 나는� 하나님의�

약속을� 사실과� � 마찬가지로� � 취급하기� � 때문이다.� � 그러므로� � 나는� � 기뻐하면서까지� � 이약속을� �

바라본다(벧전� 1:3,4).� 나는모든� 것을� 견디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견디라고� 명령함에� � 있

어서� "모든� 것"을� 견디라고� 하신� 것은,� 나로서는� 감당하기�어려운� 무거운� � 짐인것� � 같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합동하여� 나에게� 유익이� 될줄을� 아시는� 주님은,� 모든� 것을� 견디라고� 하신� 것이다.� 그

러므로�이명령은�무거운�짐이� 아니고�도리어�복된�소식이다.

=====13:8� � 사랑은� 언제가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

하리라.� -� 여기� 이� 말씀은,� (1)� 사랑이� 내세에까지� 들어가서도� 폐지되지� 않는다는� � 것과� (2)� 예

언,� 방언,� 지식등(知識等)은� 내세에� 이르러서는� 폐지� 된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바울은� 이렇게�말함으로,� 사랑과� 내세와의� 관련성을� 가르친다.� � � 바울이� 여기서�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한다"고� 할때에,� 사랑이� 이� � 세상에서도� 존속(存續)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캄캄한� � 세상에도� 내세의� 요소(要素)가�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요일� 4:8),� 그의�사랑은� � 독생자를� 보내시어� 화목� 제물로� 삼으신� 사건으로� 나타내셨다(요일� 4:10).� 이� 속죄의� �

사랑은� 이� 세상� 어디서� 움직이고� 있는가?� 그것은� 물론� 기독자의� 심령에� 움직이고� � 그� � 생활에�

나타나도록� 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셨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우리의� 육체에�채움으로�이� 사랑을� 체현(體現)한다(골� 1:24).� 사랑은� 수고이다(살전� 1:3).� "그리스도의�남은� 고난"이란� 것은� �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대속

적(代贖的)� 고난은� 아니다.� 대속적� 고난은� 하나님� � 아들께서만이� 감당하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것은� � 우리가� 믿는� 주님을� 위하여� 사람들이� 당해야만� 되는� 고난

을� 의미한다.기독자는� 벌써� 천국(天國)을� 그� 심령� 속에� 가지고� 있다.� 그가� 사랑의� 생활을� � 힘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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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 그는� 더욱� 천국� 맛을� 보게� 된다.� 고난에� 참예함이� 사랑의� 생활인데,�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

세와�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어진다.� 그러므로� 바울이� � 빌� � 3:10,11에�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 받아� 어찌하든지�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라고� � 하였다.� � 또� 요일� 4:16-18엔� 말하기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

라"고�하였다.

=======13:9,10� � � 우리가�부분적으로�알고�예언하니� 온전한�것이� 올� 때에는�부분적으로�하던�

것이� 폐하리라.� -� 여기서부터� 12절까지는,� 이� 세상에서� 신자들이� 받는� 하늘� 나라의� 지식이� 부분

적(部分的)의� 것인� 사실을�밝힌다.� "온전한�것이� 올� 때"는� 내세가�완전히� � 나타나는�때를� 이름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내세가� 부분적으로만� 알려진� 이유가� � 무엇인가?� 그것은� 이렇다.� 곧,�

(1)� 이� 세상은� 죄악� 세상이니,� 죄� 많은� 인생이� 내세의� 형편에� � 대하여� 모르는� 것이� 없을� 수� 없

다.� 죄는� 곧,� 어두움이다.� 죄� 있는� 인간으로서는� � 별� � 수� 없이� 내세에� 대하여� 전적� 이해(全的理解)를� 가질� 수� 없다.� 그는� 이와� � 같이� � 어두움의� 벌을� 받아야� 합당하다.� 이� 어두움은� 그의� 성결(聖潔)이� 진보(進步)함에� 따라서� 조금씩� 벗어진다.� 그는� 하늘� 나라에� 대하여� 좀� 더� 알기� 위하여�더욱� 착한� 일을� 힘쓰며� 성결을� 힘쓴다.� (2)� 죄� 있는� 인생으로서는� 완전한� 계시(啓示)의� 빛을� 감당하지�못한다.� � 예수님께서�거네사렛�호수에서�베드로를�지도하시어�고기를�많이� 잡도록�하셨을�

때에,� � 베드로는�말하기를,� "주여� 나를� 떠나소서�나는�죄인이로소이다"라고�하였다(눅� 5:8).� 불완

전하고� 죄� 많은� 인생은� 완전한� 지식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는� 그런� 지식으로� 인하여� 유해� 무익

(有害無益)한� � 반응을� 가지게� 된� 것이다.� 가령� 우리가� 별세할� � 날자를� � 알고� 살기가� 좋을까?� 차라리� 그� 날자를� 모르고� 사는� 것이� 좋다.� 하나님에게� 속한� 높은� 지식은� 도리어� 이�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는� 너무� 밝은� 때문에� 가리워져� 있다.� "하나님은�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신다"고� 하

였으니(딤전� 6:16),� 어찌� 불완전하고� 죄� 많은� � 인생이� 내세의� 전체적� 나타남을� 감당할� 수� 있을

까?� 하나님은�사랑이시나,� 그� 사랑의� � 어떤� 방면은�지금� 땅위의�사람으로서�감당하기�어렵다.� 병

아리가� 바깥� 세상의� 공기에� 견딜만치� 털이� 자라나기� 전에는� 달걀� 껍질� 속에서� 나오지� 못한다.�

그것이� � 바깥� � 세상에� 나온� 때엔� 물론� 바깥� 세상이� 그에게� 유익하고� 편리하다.� (3)� 인생은� 현세

에서는� � 믿음을� 연습하기� 위하여� 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상대하고� 움직인다.� 롬� 8:24에�

말하기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

리요"라고� 하였다.� � 하나님과� 신자의� � 관계는� � 영원토록� � 믿음의� � 관계니(고전� 13:13),� 신자로

서는� 땅위에서� 믿는� 일을� 전무(專務)하여야� 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 실상이요� 보지� 못� 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였다.� � 보이지� 않는� 것을� 상대로� 하고야,� 믿음의� 연습과� 연단은� 생긴다.�

벧전� 1:7에� 말하기를,� "너희� 믿음의� � 시련이� �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나타나실�때에� � 칭찬과� � 영광과�존귀를�얻게�하려� 함이라"고� 하였다.�

=====13:11� �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일을�버렸노라.� -� 이� 귀절은,� 위에� 관설된� "부분적"지식이�어떤� 것임을�밝혀� 준다.� 그

것은� 비유컨대� "어린� 아이"의� 지식과� 같다.� 어린아이의� 지식은� � 어떤� 것인가?� 어린� 아이의� 지식

은,� 비판적(批判的)이� 못되며,� 사색적(思索的)이� 못된다.� 그들은� 감각적(感覺的)이다.� 이것은�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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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이�현세�생활에서�가지는�지식� 방법을�표본으로�보여준다.� 그들은�자기�중심(自己中心)이며� 주관적(主觀的)이고,� 객관적(客觀的)인� 하나님에게� 대하여는� 무관심(無關心)하다.� 여기� 우리� 본문에� "장성한� 사람"은� 비교적� 판단력이� 많아서� 주관적� 지각(主觀的知覺)보다� 객관적� 지식을� 귀하게� 여김이� 아이들보다� 많다.� 이것은� 내세에� 사는� 사람들의� 지식� 방법을� 어느� 정도� 표본적으로�

비유한다.� � 내세에� 들어간� 사람은� 주관주의(主觀主義)를� 전연� 버리고,� 하나님을� 중심한� 지식을�실체화(實體化)하여� 거기서� 움직인다.� 그러나� � 이� 세상� 사람들이� 안다고� 하는� 지식은� 어떠한가?�(1)� 그것은�참으로� 어린� 아이들의� 놀음에�불과하다.� � 현대인들은�너무도� 주관적이고� 감각적(感覺的)이다.� 과학적� 지식(科學的知識)이란� 것은,� 감각주의에� 속하는� � 것이다.� (2)� 현대인들은� 당면한� 세계� 문제� 해결을� 위하여� 하나님의� 보좌를� 생각하지� � 않고� 모스크바와� 워싱톤을� 바라보고� 있

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를� 바라볼� � 뿐이다.� 계시록� 4-5장에만도� 하나님의� "보좌"란� 말

이� 16번이나� 나타난다.� (3)� 이� 세상� � 사람들은� 이� 세상과� 역사를� 모두� 상대적� 가치(相對的價値)의� 것이라고� � 하면서,� � 실제에� 있어서는� 저렇게� 역사적� 원리로만� 표준� 삼아� 모든� 것의� 시비(是非)를� 논하고,� � 역사를� 초월한� 이적은� 부인한다.� (4)� 이� 세상� 사람의� 과학이,� 다른� 것은� 다� 행할�수� 있을는지� 모르나� 인간의� 심령을� 통솔하지는� 못한다.� 인간의� 마음을� 통솔하는� 것만이� 세계� �

평화의� 해결책이다.� 그것을� 통솔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 밖에� 없다.� 그러나� 현대인은� � 하나님� 말

씀을� 가장� 낮추며� 업신여긴다.� 이것이� 유치한� 지혜이다.� � � 요컨데� 어린아이는� 그� 현재(現在)� 그�현재만� 느낄� 줄� 아나� 미래(未來)를� 예비할� 줄은� 모른다.� 그들은� 그� 현재의� 고통을� 느껴� 울� 뿐이고� 장래의� 고통을� 면할� � 줄은� � 모른다.� 그들은� 미래를� 내다� 보지� 못한다.� 그뿐� 아니라� � 그들은�

보이지� 않는� 실유(實有)에� 대하여� 생각할� 줄� 모른다.� 그러므로� 그들은� 신령한� 이치를� 깊이� 깨닫지� 못한다.� � 그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두려워할� 줄� 모른다.� 어른들도� 이� 세상에선� 아이들과� 같

다.� 그들도�신령한�것을� 업신여기는�일이�많다.

=====13:12� �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 내가� � 온전히� 알리

라.� -�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옛날의� 거울은� 사람의� � 얼굴을� � 희미하게� 나타냈다.� 이�

말씀은,� 존재(存在)에� 있어서� 확실하나� 그� 정체(正體)는� 전적(全的)으로� 알기� 어려울�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밤에� 하늘을� 보면� 별들이� 많이� 보이는데� 어떤� � 별들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뚜렷

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희미"하다는� 것이다.� � � 내세가� 거울로� 보듯이� "희미"한� 이유는,� 우리

가� 하나님� 말씀에� 의하여� 내세를� 깨닫고도� 또� 다시�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약� 1:23,24에� 말하기

를�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보고� � 가서� 그� 모양이�어떠한�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라고�하였다.� 사람은� � 하나님의� �

말씀을� 잊어버리는데� 건망증(健忘症)이� 있다.� 사람의� 마음은� 더러운� 못과� 같다.� 더러운� � 못에는�고기는� 다� 죽어� 버리고� 개구리만� 성한다.�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잊어버림에� 있어서� 셀바리우스

(Cervurius)란� 짐승과� 같이� 건망증이� 있다.� � 셀바리우스는,� 무엇을� � 먹다가도� 머리를� 뒤로� 돌이

키면�자기�앞에� 놓은� 식물(食物)을� 잊어버리고�새로운�식물을� � 찾기� 위하여�달아난다고�한다.� 사람이� 하나님� 말씀에� 대하여� 건망증이� 있는� 원인은� 하나님� 말씀과� 반대되는� 죄악과� 이� 세상� 생명

을� 좋아하는� 애욕(愛慾)이� 너무� 강하기� � 때문이다.그러나� 기독신자는� 하나님� 말씀을� 잊어버리지�않기를� 힘써야� 된다.� 그는� "갓난� �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여야� 될� 것이다(벧

전� 2:2).� 그� 이유는,� � 그는� ,� 희미하지만� 참된� 내세� 지식을� 가졌기� 때문이다.� 기독자는� 캄캄한� �

때에� � 더욱� � 빛을� 사모하여야� 될� 자이다.� 잎속에� 감추인� 꽃을� 더욱� 보고� 싶어함과� � 같은� � 심리

(心理)로,� 그는� 희미한�중에� 가리운�내세를�사모하여�들어가고자�하여� 자기를� � 깨끗하게� � 하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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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다.� 요일� 3:2,3에� 말하기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 장래에� 어떻게�

될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나� 주를� 향하여� 이� � 소망을� �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

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고� 하였다.� 고후� 3:18에� 말하기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 하였다.� 조금� 맛만� 보고� 전체는� 소유되어지지� 않는� 그� 심리는�

얼마나� 안타까운� � 심리일까?� 감옥에� 갇힌� 사람이� 그� 좁은� 창문을� 통하여� 바깥� 세계를� 내다볼� 때

에� 그� 마음이� � 얼마나� 바깥� 세계를� 사모하게� 될까?� 진실한� 성도들은� 모두� 다� 은혜를� 사모하는�

자들이다.� � �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9,10� 절의� 해석� 참조.� 우리가� 이점에� 있어서� 기억

하여야� 될� 일이� 있다.� 그것은� 현세에� 우리의� 아는� 것이� 부분적인� 것이지만� 믿기에� � 부족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본문에� 바울이� "부분적으로� 아는것"의� 가치(價値)를� 부인한� 것은� 아니다.�주석가�슐라테르(A.Schlatter)는� 다음과�같이�말하였다.� 곧,� � 현세에�우리가�아는� 바를�바울이�무

가치하고� 무용하다고� 말함이� 아니다.� 그것이� � 멸절된다는� 것� 뿐이다.� 그� 이유는� 그것이� 완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Was� wir� jetzt� � erkennen,� � heisst� � Paulus� � nicht� � und� �

unnutz;� � es� � � erfallt� � � aber� � � der� Verganglichkeit,� weil� es� nie� etwas� ganzes� und�

vollendetes� ist.-Erlauterungen� zum� Neuen� Testament,� 1909,� Zweiter� Band� p.117).� � � 우

리가� 정신만� 차리면,� 이런� 부분적인� 진리� 지식에� 의하여도� 내세에� � 대한� � 확신을� 가질� 수� 있다.�

부분은� 전체를� 증거하는� 법이다.� 이� 점에� 있어서� 예화를� 하나� 들면,� 이태리사람� 콜룸부스가� 아메

리카� 대륙을� 발견한� 역사가� 타당할� 것같다.� 그가� 1492년� 8월� 3일� 아침� 여덟시에� 88명을� 실은�

세배(Sante� Maria,Pinta,� Nina)를� 가지고� 대서양(大西洋)을� 건너가던� 중� 8월� 17일엔� 선원들이�콜롬부스를� 원망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 그들을� 안정시켜� 항해를� 계속하던� 중,� 10월� 7일에� 철물

(鐵物)에� 붙였던�작대기�한� 개와� 판자조각�한개와�또� 나뭇가지를� 물에서�건졌다.� � 그것이� 그들에게� � 큰� � 소망을� � 주었다.� � 그들은� 그것으로� 인하여� 육지가� 가까운� 줄� 알아� 힘을� 얻고� 기뻐하였

다.� 과연� 그� 날� 밤� 11시에� 콜롬부스는� 멀리� 있는� 불빛을� 보았고,� 12일� 오전� 2시에� 그들은� 신대

륙(新大陸)을� 발견하였다.� 그� 때에는�전에� 콜럼버스의�발� 밑에� 엎드리어�자복하며� � 울면서� �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그� 때에� 그들은� 다� 흙에� � 입맞추고� � 하나님께� � 감사하였다고� � 한다

(Encyclopaedia� Britanica� VI,� 742-743).� 그러면� 우리는� 이들의� 여행에� 있어서� 부분적인� 지식,�

곧� 나무� 조각� 같은� 것을� 보고서� 전체(곧�大陸)의� 존재를� 확신한�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우리는�내세에�대한� 현재�우리의�지식이�희미하다고�하여,� � 내세에� � 대한� 확신을�못� 가질� 수는�없다.

=====13:13� �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 제일은� � 사랑

이라.� -� 이� 말씀은,� 신� 망� 애(信望愛)� 세� 가지가� 현세(現世)에도� 신자에게� 늘� 함께�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왜� 이� 셋은� 늘� 함께� 있어야�되는가?� 그� 이유는� 이렇다.� 곧,� (1)� 소망을� 가지� 않은� 믿

음이� 있다면� 그것은� 믿어서� 장래의� 은덕(恩德)을� 보려는� 것이� � 아니니�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아니다.� 사람을� 의뢰하여� 믿으면� 자유(自由)도� 잃고� � 진정한� 소망(所望)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뢰하며� 믿는� � 믿음은,� � 무엇을� � 의지하고야� � 살� 수� 있는� 인생의� 최고� 신앙이며� 또한� 진정

한� 장래의� 은덕을� 받게� � 되어지는� � 믿음이다.� 믿기만� 하고� 소망은� 못� 가지는� 믿음이란� 것은,� 생

명� 없는� � 사물(事物)의� � 사정(事情)이나� 이치를�믿음과� 같은� 것이다.� 생명� 없는� 물건이나�이치는�그�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지� 못한다.� 1+2=3의� 셈법을� 믿는다고� 해서,� 그� 믿음이� 구원을� 줄� 수�

있을까?� � 아니다.� 우리가� 성경대로� 믿는� 믿음은,� "반드시� 하나님이� 계신� 것과� 또한� � 그가� � 자기

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음"이다(히� 11:6).� 하나님이� 계시는� 것만� 믿고� � 그의�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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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는�사실은�못� 믿는� 것은,� 귀신들이�하나님께�대하여�가지는� � 믿음� � 정도이다(약� 2:19).� 특별

히� 우리� 기독자들이� 믿는�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 하나님을� � 믿나니,� 속죄의� 큰� 사랑으로� 우리

를� 구원하여� 주시는� 하나님을� 믿음이다.� 이� � 믿음은,� � 소망을� 동반(同伴)하여� 가지는� 참� 믿음이다.� 기독교�신앙은�반드시�확실한�수확(收穫)을� 가져오는�법이다.� 예수님께서�병자들에게,� "네� 믿음대로� 되라"� 하실� 때에,� 믿음� 있는� 병자는� 곧� 고침이� 되었다.� 기독교� 신앙은� 믿음대로� 되는� 신

앙이다.� 왜� 구원은�믿어야�받도록� 되었는가?� 그� 이유는�이렇다.� 구원은�인생이�알기� 어려운�높은�

진리로� 이루어진� 것이니,� 유한(有限)하고� 죄� 많은� 인생은� 그것을� 믿어야만� 받는다.� � � (2)� 사랑이�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 곧,� 성경이� 말하여� � 주는� 믿음은,� 법칙� 상대(法則相對)의� 것이� 아니고� 독생자를� 주신� 살아계신� 사랑의� � 하나님을� 상대한�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을� 상대하고� 일어나는� 믿음이� 왜� 사랑� � 없는� � 것일까?� 그럴� 리가� 만무(萬無)하다.� � � 그런데�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느낄� 수� 있는가?� 하나님의� 사랑과� 나� � 개인(個人)과의� 관계는�어떻게� 나의� 의식(意識)� 속에� 성립되는가?� 그것은� 믿음으로만� 성립된다.� 성경은,� "누구든지� 저(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 얻으리라"고� 하였을� 뿐이다.� 이� 사랑을� 느끼는� 자

마다�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다.� � � 이점에� 있어서�우리가� 기억할� 것은,� 다른� 사람(형

제)을� 사랑하는� 사람이� �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도� 강화(强化)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 형제애(兄弟愛)로� 인하여� 강화된다.� 요일� 4:20에� 말하기를� "누구든지� � 하나님을� �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

아니하는�자가�보지� 못하는�바�하나님을�사랑할�수� 없느니라"고�하였다.� 고린도전서�제� 14장

======14:1� � 사랑을�따라� 구하라�신령한� 것을� 사모하되�특별히�예언을�하려고�하라.� � -� � 바울

은� 사랑이� 제일�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13:13).� 그러므로� 모든� 다른� 은사들도� 사랑을� 베풀기� 위

하여� 있는� 것� 뿐이니,� 은사를� 구하는� 자는� "사랑을� 따라"� 구해야� 한다.� 다시� � 말하면,� 그는� 사랑

을� 실시함에�더욱�필요한� 은사를�구해야�된다.� � � "구하라"는� 말(*)은� 붙잡기� 위하여�열심으로� 좇

아� 감을� 의미한다.� � 사랑을� 실행하려고� 전심(專心)함이,� 곧,� 그� 의미이다(Lenski).� � � "예언하려고�하라"함은,� 곧� 남들을� 영적(靈的)으로� 유익하게� 지도하는데� 필요한� 성령의� 지시하는� 말씀을� 구하라는�뜻이다.� 이� 은사는,� 더욱� 사랑을�나타낸다.� 그� 이유는�이�아래� 자세히�진술된다.

======14:2� �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 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

자가� 없고� �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

님께"한다는� � 말씀에� 대하여,� 어떤� 학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곧,� 방언(方言)은� 이� 세상의� 어떤�외국말이라� 하고,� 그것을� 말할� 때에� 그것을� 하나님� 외에는� 깨닫지� � 못한다고� 한다(그� 말을� 배운�

자가� 그� 말하는�자리에�한� 사람도�없는� 경우).� � 그러나� � 이� 해석은�자연스럽지�않다.� 이� 귀절� 하

반에� 있는� "그� 영으로� 비밀을� � 말"한다는� � 말씀을� 보니,� 그것이� 영적� 방언이고� 외국어를� 가리킴

이� 아니다.� � � 그런데,� 이런� 이적이�교회� 시대에도� 있을까?� 교회� 시대란� � 것은,� � 계시시대(啓示時代),� 곧,� 사도� 시대와� 구분된� 명칭이다.� 사도� 시대에는,� 표준적인� 이적과� 계시가� � � 있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기� 위하여,� 이렇게� 터를� 닦는� 의미의� � 기본적인� � 역사(役事)를� 하셨다.� � 그�시대에� 있었던� 이적과� 계시는,� 실상� 주님� 재림� � 때까지� � 장성할� 교회의� 뿌리와� 터전을� 이룬� 것

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사도의� 역사(役事)를� � 가리켜� 터� 닦는� 일로� 비유하였다.� 고전� 3:10에� 말하기를,� 교회의� � "터를� � 닦아두었다"하였고,� 11절에� 말하기를,� "이� 닦아둔�것� 외에� 능히� 다

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이� 터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였다.� 이� 말씀� 뜻은,� 사도가�그리스

도를� 전파할� 계시와� 능력을� 받아� 복음을� 나타낸� 것을� 의미한다.� 교회는� 이� 터� 위에� 서게�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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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엡� 2:20;� 계� 21:14).� 이렇게� 생각할� 때에� 사도적� 역사는,� 나무에� 있어서� 뿌리와� � 같은� �

것이다.� 뿌리는� 한번만� 일정한� 자리에� 잡고� 있는� 것이다.� 거기서� 돋아� 나온� 줄기가� 질적으로는�

뿌리와� 같은� 것이지만,� 그� 모습에� 있어서는� 뿌리와� 다른� 점들이� 많이� 있다.� 하나님은,� 변치� 않으

시며� 그� 능력도� 여전하시지만,� 그의� 사역의� 경륜은,� 사도� � 시대에는� � 그렇게� 나타내셨고,� 교회�

시대에는�이렇게� 나타내신다.� 그가� 이스라엘�백성을�광야에서� � 인도하실�때에는�하늘에서�만나를�

내려� 먹여� 주셨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 다음에는� 만나� 내리시기를� 그치셨다.�

그렇게� 되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변하신� � 것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제� 우리는� 교회

시대에� 대하여� 생각해� 볼� 때에,� 이는� 마치� 뿌리에서� 돋아난� 나무와� 같으니,� 그� 자라나는� 도중에�

다시금� 뿌리의� 형태로� 자체를� 거듭� 나타낼�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와� 같이,� 교회는� 그� 뿌리를� �

의미하는� � 사도적� 역사를� 거듭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이점에� 있어서� 기억할� 것은,� 교회� 시대

에는� � 사도의� 증표를� 보여주는� 이적은� 없다할지라도� 특별� 섭리는� 있다는� � 것이다(L.� � Berkhof,�

systematic� Theology,p.68).� 특별� 섭리란� 것이� 계시사(啓示史)에� 속한� 것은� � 아니지만� 역시� 하나님의�특수� 간섭이기�때문에� 그의� 놀라운�일이다.� 예를� 들면,� 병자를� � 위하여� 기도할�때에� 하나

님의� 은혜로� 고침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과� 사도의� 행한� 이적과는� 다

르다.� 가령,� 병� 고침� 받는� 실례를�들어� 말하면,� � (1)에수님과�사도의�이적은,� 취급된�병자가�모두�

치료되었으나,� 교회� 시대의� 신유(神癒)라는� � 것은� 그렇지� 못하고,� 위하여�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은혜로� 치료되는� 자도� 있거니와� � 치료되지� 않는� 자도� 있다.� (2)� 그뿐� 아니라,� 예수님과� 사도의�

이적으로� 고치받은� 병은� � 재발하는� 법이� 없으나,� 교회� 시대의� 신유는� 그� 병이� 재발되는� 경우도�

있다.� (3)� � 예수님과� 사도들의� 고친� 병자들의� 몸은� 당장� 완전해졌으나,� 교회� 시대의� 신유는� 그렇

지� 못하다.� � � 위의� 세� 가지� 사실은,� 교회� 시대의� 신유의� 특징들을� 보여준다.� 이러한� 특징들이� 있

게� 된� 원인은,� 하나님의� 능력이� 교회� 시대에� 이르러서� 약해지셨다는� 것이� 아니다.� � 하나님의� 권

능은�여전히� 역사하신다.� 그러나�그� 사역� 경륜의� 이와� 같은� 차이점은,� � 특별히� 교회의�터가� 되는�

계시� 시대(예수님과� 사도� 시대)의� 표준성을� 드러내기� 위한� � 것이다.� 우리� 신앙은,� 언제든지� 예수�

그리스도와� 및� 사도적� 전도� � 내용(성경)을� � 표준으로� 하고,� 거기서� 안식해야� 되는� 것이다.� 만일�

교회� 시대에� 있어서도� 어떤� 사람들이� �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혹은� 사도들과� 같이� 표준적인� 이

적을�행한다면,� 그들도� � 역시� � 성경� 말씀과�같은� 권위� 있는� 계시(啓示)도� 받는�다고하게�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과�성경만� 기초로�한� 기독교의� 성격이�무너진다.� � � 그러므로� 우리는�오늘

날의� 방언을,� 사도들의� 역사로� 나타났던� 그� 시대의� 방언과� 같은� 수준의�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 �

현대의� 방언� 운동에는� 많은� 그릇된� 방언들도� 드러난다.� 이런� 방언들은� 물론� 금지해야� 된다.� 다만�

방언을�함이� 자기에게�유익한�줄� 아는� 이는,� 고전� 14장의� 교훈을�지켜야�될� 줄� 생각한다.

=======14:3� � �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

요.� � -� 사도� 시대에� 활동한� 예언자들은,� 성령의� 감동에� 의하여� 어떤� 특별한� 사건을� � 예고하였다

(행� 11:28,21:11).� 그러나� 그들(혹은� 그들� 중� 어떤� 이들)도� 하나님� � 백성의� � 구원을� 위한� 계시�

역사를� 하였으며,� 이런� 의미에서� 신앙에� 관한� 진리를� 해명하기도� 하였다(롬� 12:6).� 그들의� 역사

도� 사도들의� 역사와� 함께� 신약� 교회의� 기초를� 이루었다(엡� 2:20;고전� 12:28).� 이점이� 방언하는�

자와� 다르다.� 방언의� 은사는� 교회의� 기초가� 아니고,� 은사의� 미말(尾末)에� 속한다(고전�12:10,28).� 그러나� 예언� 역사는� 사도의� � 역사처럼� � 계시� 시대(사도� 시대)에만� 있었던� 단회직(單回職)에� 속한다.� 교회� 시대에는,� � 예언의� � 후신(後身)으로서� 설교가� 자리잡았다고� 할� 수� 있다.�그� 이유는,� 양자(兩者)의� 기능이�같기� 때문이다.� 예언이� 건덕,� 권면,� 안위를� 그� 기능으로�한� 것처럼(고전� 14;3),� 설교도� � 그러하다.� 다만� 예언자의� 경우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초자연적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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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그에게� � 찾아� 왔으나,� 설교자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성경)으로� � 나아가

야� � 한다.� 곧,� 설교자는,� 말씀의� 청지기란� 말이다.� 그는� 사도와� 선지자를� 통하여� 교회에� �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이다(고전� 4:1,2;딛� 1:7).� 다시� 말하면,� 설교자는� � 기독교의� 터를� 닦는�

자가� 아니고,� 사도와� 선지자가� 닦아� 놓은� 터(고전� 3:10-11)� 곧,� �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설명

(성경)을� 근거하여� 교회를� 세우는� 자이다.� 설교자는,� (1)� � 맡기운� 터와� 자재(資材)� 곧,� 성경을� 그대로� 보수할� 책임이� 있고,� (2)� 또한� 그� 터와� 그� � 자재를� 가지고� 집� 지을(교회� 세울)� 책임도� 있

다.� 그가� 성경의� 말씀을� 전파하며� 가르치는� 것이� 바로� 그� 일이다.� 그는,� 말씀을� 전파할� 때에� � 자

기의� 구미에� 맞는� 것만� 골라서� 할� 것이� 아니고,� 성경� 말씀� 전부를� 전할� 책임이� 있다.� � � 현대� 교

회에도� 예언이� 있다는� 이들이� 있다.� 만일� 예언� 같은� 것이� 오늘날도� � 나타난다면,�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될�것인가?� (1)� 그� 예언이�맞지� 않을� 경우에�그것을�배척하기�쉬운�일이다.� 그러나� (2)�

그� 예언이� 사실과� 부합할� 때에는� 우리로서� 그것을� 거부하기가� 곤란할� 듯하다.� 그� 이유는,그� 예언

이�맞아도�그것이�거짓된� � 예언일� � 수� 있으니(신� 13:2),� 하나님의�명령대로(요일� 4:1)� 착실히�영

들을� � 시험하며� � 지내보아야� 된다.� 그것을� 시험하며� 지내보는데� 오랜� 세우러이� 지날� 수도� 있다.�

신자가� 미혹에� � 빠지지� 않기� 위하여� 영들을� 시험하는� 것이� 오히려� 경건한� 행동이다.� 신� 13:1-3

에� 말하기를,�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네게� 말하

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 그� 말대로�

이룰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

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 여호와를� �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고� 하였다.� � � 사단이� 사자도� 복음을� � 높이는� 체� 하며(행� 16:16-17),� 또한� 도덕

이� 있게� 사람을� 대할� � 수도� � 있다(고후� � 11:14-15;마� 7:15).� 그러므로� 우리가� 현대의� "예언"이

란� 것을� 시험해� 봄이� 마땅하다.� � 그� � 이유는,� 우리에게는,� 현대의� 예언보다� 성경이� 권위� 있으며,�

또한� 우리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롬� 15:4).� � � "덕을� 세움"은� "세워� 나감"을� 의미하는데,� 하나

님의� � 진리를� 가르쳐� 신자들의� 산앙� 사상을� 증진� 시킴이다.� "권면"은� � 경계하여� 양심과� 의지로�

옳은� 데로� 움직이게� 함이고,� "안위"는� 난관과� 핍박을� 당한� 신자들에게� 소망을� 보여� 주어� 그들의�

정서(情緖)로� 하여금� 기쁨과� � 용기를� 취하도록� 하여� 줌이다.� � � 이렇게� 생각할� 때에� "예언"은� 하필� 성령의� 특종� 예고(特種豫告)를� � 전달함에� � 국한� 한� 것이� 아니고,� 광범위의� 영적� 교훈과� 지도를�가리키는�것이다.�

======14:4� �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 세우나니.� �

-� 방언하는� 자의� 말은� 남에게� 알려지지� 않는� 것인� 만큼,� 듣는� 자들에게는� 유익이� � 없다.� 그것은�

그� 자신에게�영적(靈的)� 깨달음을�줄� 뿐이다.� 그러나�예언하는�자는�온� 교회로�하여금�진리를�깨닫게�하여� 유익을�받도록�한다.

=====14:5� �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 말하

는�자가� 만일� 교회의�덕을� 세우기�위하여�통역하지�아니하면�예언하는�자만�못하니라.� � -� 바울의�

논조는� 그때의� 방언� 은사를� 전연� 불필요하다고� 함이� 아니고,� 다만� 그것에� 대한� 과대� 평가(過大評價)를� 막는� 것� 뿐이다.� 방언은� 통역되지� 않으면� 남들에게� 별로� � 유익을� 주지� 못한다.� 방언은�벌써� 위에� 해석한� 바와� 같이(2절),� 영감(靈感)으로� 말하는� 것이다.� � 그것이� 영감과� 동반(同伴)되지� 않는� 순간부터는� 효능을� 잃는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통역하는� 자도� 영감� 중에서� 하여야� 된

다(Hodge).� 방언하는� 자� 자신이� � � 통역의� 은사까지� 겸한� 자가� 있으나� 늘�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예언의�효능에�대하여는�위의� 3절에�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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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 � 바울은� 자기로서� 방언하는� 것으로는� 남들에게� 유익을� 줄� 수� 없다고� 단언하여,� 앞

서� 말한� 논조를� 강화시킨다.� 이� 점에� 있어서� 그가� 남들을� 실례(實例)로� 드는� 것보다� 자기자신을�실례로�들어� 말한�것은,� 그의�겸손이�라고�할�수�있다.

=====14:7� � 생명� 없는� 악기(樂器)같은� 것들도� 곡조의� 분별을� 표시하지� 않는다면,� 듣는� � 사람들에게� 그� 소리의� 뜻을� 알려� 주지� 못한다.� 알아� 듣게� 하기� 전에는� 듣는� 자들에게� 무익한� 소리가�

된다는� 것은,� 이렇게� 생명� 없는� 도구들의� 소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 � "저� 부는� 것인지� 거

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이것은� 차라리� 다음과� 같이� 번역하여야� 된다.� 곧,� "저를� 분�

것이� 무엇인지� 거문고를� 탄� 것이� 무엇인지� 어찌� 알려지랴?"라고� 함이다(Hodge).� 이� 말씀� 뜻은,�

곡조를�분변� 있게�내지� 않은� "저"소리나� "거문고"� 소리는�무의미�하다는�뜻이다.

=====14:8� �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 -� 전쟁� 때엔� � 나

팔� 소리로써� 군인들에게� 경고를� 준다.� 그것은� 곡조로써� 뜻을� 표시하여� 듣는� 자들로� � 하여금� 깨

닫게�하기� 위함이다.

=====14:9� � "허공에다�말함"� -� 은,� 효과� 없이�말한다는�뜻이다.

=====14:10� � �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이� 같이� 많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 여기� "소리"란�

말은� 헬라� 원어로� 포네-(*)니� 목소리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람의� � 방언들을� 의미한� 것

이다.� 칼빈(Calvin)은� 이것을� 동물들의� 소리로� 해석하였으나� 문맥으로� 보아서� 사람들의� 언어를�

가리킨다(Hodge).

=====14:11� � � 내가� 말하는�자에게� 야만이�되고� 말하는�자도� 내게� 야만이�되리니.� -� 곧� 피차간�

야만의�관계란�뜻이니�서로�이해하지�못하는�처지에�있다는�것이다.

====

====14:12,13� �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 -� 곧,� 신령한� 은사를� 구하여야� 되나,�

남들에게�유익� 끼치기를�목표하라는�뜻이다.� 그리� 하려면�방언하는�자는�통역하는� � 은사도받아야�

된다.

=====14:14� �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 맺

히지� 못하리라.� -� � 이� 귀절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가� 있다.� (1)� 방언은� 지능(智能)으로� � 하는� 것이� 아니고� 그보다� 높은� 층계에� 속하는� 영으로� 한다.� 그러므로� 그것을� 하는� 자� 자신도� 지능으로

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 (2)� "나의� 영"은� 정서(情緖)를� 가리키는데� 지능과는� 관계없다.�그러므로� 정서에서� 되어지는� 방언을� 인하여� � 지능면(智能面)에서는� 얻을� 것이� 없다는� 것.� (3)� "나의�영"이란� 것은�성령의�지배하(支配下)에� � 있는� 영(인간의�영)을� 의미한다.� 그런데,� 나의�영의�방언하는�바를�가지고�나의� � 지능(나의�영과� 크게� 다를�것�없는� 곳)이�남들에게�유익을�가져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해석이� 적당하다고� 하지(Hodge)는� 말한다.� 그러나� 바울은� "나의� 영"과� 나

의� "마음"을� � 엄격히�구분하여�이� 아래서도�말하고�있다(15절).� 그러므로�위의� 첫째�해석이�옳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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듯하다.

=====14:15� �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 이� 말씀� 뜻은,� 방언(方言)하는� 자들이� 자기만� 알� � 수� 있는�기도나� 찬송을� 할� 것이� 아니라� 남들도� 알아� 듣도록� 해야� 된다는� � 뜻이다(Hodge).� 그러므로� 그

는� 통역하는�은사까지�받아야�된다.

=====14:16� �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

말을� 하는지� 알지� � 못하고� � 네� � 감사에� � 어찌� � 아멘� � 하리요.� � -� � 여기"축복"이란� � 말(*� � 은� 하

나님께� 감사함을� 의미한다.�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란� 말은,� 교회의� 지도자가� 아닌� � 평신도(平信徒)를� 가리킨다(Lenski).� "아멘"이란�말은,� 여기서는�예배에�참석한�자로서�공석�기도자(公席祈禱者)의� 감사에� 동조(同調)하여� "그렇습니다"하는� 뜻이다(느� 8:6).� 이� � 말은� 히브리어의� 음역(音譯)이다.� 그� 말은� "진실함",� 또는� "그렇습니다"� � 등을� 의미한다.� � � 공석� 기도가� 끝나자� 회중이� "아멘"하는�것은�구약의�예배�풍속에서�왔다(민� � 5:22;� 신� 27:15).

=====14:17� � 너는� 감사를� 잘� 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 이것

은,� 남이� 알아듣지� 못할� 방언으로� 기도한� 것이,� 공동� 예배자(共同禮拜者)들에게� 유익을� 주지못할�것임을� 지적한다.� 예배는,� 단지� 신비적(神秘的)인� 느낌만� 위주하지� 않고,� 지식� 성품을� 통하여� 받아질�진리에�해한�심령의�반응(反應)을� 보다�중요시한다.

=====14:18� �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함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 � 신자들� �

중� 받은� 은사를� 잘못� 쓰므로� 폐단이� 있는� 때에,� 그것을� 교정시킬� 만한� 자격자는� 같은� � 은사를�

받은� 자이다.� 바울은�누구보다도�방언의� 은사를�더� 많이� 받았으므로,� 이� � 은사를�폐단� 있게� 사용

하는�자들을� 경계할�권위(權威)를� 가졌다.� 오늘날� � 불건전한� � 신비주의(神秘主義)의� 폐단을� 교정시킬� 사람은� 누군가?� 그는� 참된� 신비주의를� � 체험한� � 사람이다.� 기독교는� 냉랭한� 지식� 종교(知識宗敎)가� 아니고� 역시� 건전(健全)한� 신비주의를� 하나의� 요소로� 가지고� 있다.� 성경� 말씀을� 그대로� 믿고� 순종하는�자가�살아� 계신� � 하나님의�사랑을�실감(實感)하게� 되나니,� 이것이�건전한�신비주의이다.� � � 바울은� 방언하는� 은사를� 그� 자신이� 받은� 사실로� 인하여� 감사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이� 은사�자체를�귀히�여긴� 것이� 분명하다.

=====14:19� � 남이� 아는� 말로� 가르쳐� 남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것이,� 남들이� 모르는� 방언을�

말함보다� 교회에� 유익하다고� 바울은� 역설(力說)한다.� 기독자가� 받은� 은사는,� 자기의� � 독점� 사용(獨占使用)을� 위한� 것이� 아니고� 교회의� 봉사를� 위한� 것이다.� 이것을� 보면,� � 바울은� 교회� 앞에서는� 언제나�방언을� 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그는� 말할� 바엔� � 깨달은�마음으로� 말하였던� 것이다.�

오늘날�우리는�방언을�위주할�수� 없다.� (1)� � 예수님께서도�친히�방언을�하였다는�말이�없을� 뿐더

러� 그들은� 물론� 방언을� 위주하지� 않았다.� (2)� 방언을� 위주하면,� 결국� 성경을� 등한히� 하는� 폐단이�

오게� 될지도� 모른다.� 사람의� � 마음은� 언제든지�기이한� 것을� 탐한다.� 누가� 어떤� 곳에서�성경을� 가

지고� 기독� 신자들에게� 은혜를� 끼친다� 할지라도,� 그� 부근에� 이적을� 행하는� 이가� 있는� 경우에는,�

그들의� 마음이� 거의� 전부� 그리로� 쏠리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의� 영혼을� � 이적으로� �

먹여� 살리지� 않으시고� 성경� 말씀으로� 먹여� 살리신다.� 바울은� 말하기를,� � "유대인은� � 표적을� 구하

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라고� � 하였다(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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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23).� (3)� 방언을� 위주하는� 곳에는� 결국� "예언"(성경� 이외의� � 어떤� � 예고)도� 고조하게� 된다.�

그리하여� 신자들이� 필경� 저마다� 계시를� 보려고� 하여� 꿈을� � 숭상하고,� 기타� 여러가지로� 숨은� 것

을� 드러낸다고� 주장할�우려가� 있다.� � 예언을� � 위주하는�곳에는,� 마침내�그릇된� 예언들이�많이� 터

져� 나오게� 되어� 마귀� 역사의� � 온상을� � 이루게� 된다.� 마귀는� 언제든지� 교훈의� 불건전한� 틈을� 타

서� 역사하는� 법이다.� 사도� 바울은,� 교훈의� 건전성을� 많이� 주장하였다(딤전� 1:10,6:3;� 딤후�

1:13,4:3;� 딛� 1:9,2:1).� 이� 귀절들� 중에서� 그가� 주장한� "바른� 말",� 혹은� "바른� 교훈"이란� 것은,�

건전한� 교훈을� 말함이다.� "건전한� 교훈"이란� 것은,� "건강한�교훈"(*� )을� 말함이다.� 사람의�체격이�

건전하다고� 하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그것은� 여러� 지체들이� 제� 자리에� 있는� 질서� 정연한� 체격

이� 아니겠는가?� 그와� 같이,� �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은사들이� 교회에서� 본말(本末)과� 선후(先後)가� � 바뀌지�않고� 각기� 제� � 위치를�지키도록�가르치는�그�교훈이�건전한�교훈이다.

=====14:20� �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 고린도� 교인들� 중에� 방언의� 은사를� 받은� 자들이,� 통역� 없이� � 방언을� � 회중(會衆)에게� 말하였다.� 그것은� 지혜�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받은� � 은사를� 하나의� 호기심

(好奇心)과� 자랑거리로� 구경시키는� 일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 그들더러� 아이들처럼� 유치하게� 행하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그는,� 뒤이어� 어린� 아이에게서� 본받을� 것만은� 본받으라고� 말한다.� 곧,�

악에� 있어선,� 그것을�경험해� � 본� 일이� � 전연� � 없는� 어린� 아이와�같이� 되라는�것이다.� "어린� 아이

"란� 말의� 헬라� 원어는� 상반절에� 있는� "아이"란� 말과� 다른� 단어이다.� 이것은� 실상� 유아(乳兒)를�의미하는� � 네피오이이다.� � �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되라".� 방언하는�자들이� 교회의� 유익을� � 위함

이� � 지혜이다.� 그렇게�행함이�장성한�사람다운�자의�소위(所爲)이다.

=====14:21� �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

백성에게� 말할지라도�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 하리라� 하였으니.� -� 이것은� 사28:11,12에서� 인용

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율법에� 기록된"� 것이라고한� 이유는,� 그� 때에� 구약� � 전서를� 가리켜� "

율법"이라고도� 하였기� 때문이다.� 요� 20:34;롬� 3:20� 참조.� � � 그러면� 여기� 인용된� 사� 28:11,12의�

예언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렇다� 이사야� 시대에� 유대인들이� 선지자의� 말에� 순종하지� 않으므로,�

하나님께서�그들을� 벌하시려고� � 하시는� 말씀이� 장차� 외국인들(앗수르� 사람들)이� 유대를� 침략하여�

정복하고�지배하리라고� 하신�것이다.� 그것이�여기� 이른바�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다른� 입술로�

이� � 백성에게� � 말할"것이라고�한� 말씀의�의미이다.� 여기� "다른� 방언하는�자"란� 말은� � 앗수르� � 사

람들을� 가리킨다.� 이렇게� 다른� 방언하는� 자가� 유대인에게� 온� 것은,� 그들을� � 벌하시는� � 일이었�

다.� 그렇다면,� 이제� 고린도� 교회에서� 방언의� 은사를� 받은� 자들이,� 일반이� 깨닫지� 못하는� 말로� 회

중에게�말하면�그것은�그� 회중에게�대한�일종의�벌이다.� 그것은�유익을� � 주는�일이� 아니다.

=====14:22� � � 그러므로� 방언을�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 표적

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 -� "방언은� 믿는� � 자들을�

위하지� 않고".� 이� 말씀� 뜻은,� 남들이� 깨닫지도� 못하는� 방언을� 하는� 것은� � 결과적으로� 듣는� 자들

을� 믿음으로� 인도하지� 못한다는� 뜻이다(23절).� 이는� 마치,� � 유대인들이�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

로� 마침내� 다른� 방언하는� 자(앗수르� 민족)의� 지배를� � 받았지만� � 하나님을� 순종하지� 않았음과� 같

은� 일이다(21절).� � �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 곧,� 방언하는� 결과는,� 그� 듣는� 사람들

의� � 불신앙을� 고쳐� 주지� 못하고� 그냥� 믿지� 않는� 자들로� 남아� 있도록� 하는� 것� 뿐이란� 뜻이다.� 이

것은�방언의�결과가�어떠함을�지적하는�말이다.� "예언은�믿지� 아니하는�자들을� 위하지�않고� 믿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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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들을� 위함".� 이것은� 사람들이� 깨달을�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 곧,� � 예언을� 하면� 그� 듣는� 자들

이�회개하고�믿는�데로� 나아가진다는�뜻이다.

=====14:23� � �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

하는�자들이�들어� 와서� 너희를�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 신자들이� 방언을�통역하지� � 않고� 말

하는� 경우에,� 그� 듣는� 불신자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도리어� 방언하는� 자들을� � 미쳤다고� 할� 것이

다.� 통역없이�방언을�하는�것이� 얼마나�헛되다는�것을,� 바울이�이� 말로써�역설(力說)한다.

=====14:26� �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통역함도� �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 "찬송시"란� 것은� 원시� 교회에서� 성령의� � 감동을�

받은� 회원들이� 부를� 수� 있었던� 시가(詩歌)였는데(엡� 5:19;골� 3:16),� 구약� 시편을� 말함이� 아니다.�눅� 1:46,� 68,� 2:14� ,29� ;딤전� 3:16;� 계� 4:8,� 5:9,� 7:10,� 11:5,� 12:10,� 15:3,� 19:1,� 6� � 참조.� �

벤드라드(H.D.Wendland)도� � 이와같은� � 뜻으로� � 해석하였다(Die� Briefe� an� Korinther,� p.114).� �

� "가르치는�말씀"이란�것은,� 교리(敎理)나� 도덕면(道德面)에서� 교훈을�베푸는� � 것을� 말함이다."계시도� 있으며".� 이것은,� 그때� 초대� 교회� 신자들에게� 있었던� 직접� 영감(直接靈感)에� 의한� 진리� 섭취를� 말함이다.� � �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신자들은,� 위에� 열거(列擧)된� 무슨� � 은사든지� 오직� 건덕(建德)을� 위하여� 행용(行用)하여야�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것을� 사용하는� 자도�다만�건덕(남들을�유익하게�함)을� 위하여�할�뿐이다.건덕은�결국� 사랑을�의미하는�행위이다.

=======14:27,28� � 방언을� 하는� 자들은,� (1)� 공중� 질서를� 지키기� 위하여� 한� 사람씩� 차서(次序)있게� 할� 것이고,� (2)� 또한� 회중이� 알도록� 하기� 위하여� 그� 말하는�방언을� 통역할� 것이다.� � � 사도� 바울은� 이렇게� 지시한� 것은,� 후대� 교회보다� 그� 때� 초대� 교회의� 실정에� 맞추어� 한� 것이다.� 현

대� 교회에서� 이렇게� 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현대� 교회의방언이� � 사도들의� 역사

(役事)로� 나타났던� 그것과� 같은� 수준의� 것이� 아니기� � 때문이다.� 세계� 삼대� 칼빈주의� 학자� 중� 하나인�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 � Kuyper)는� � 말하기를,� "방언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

는데�성령께서� 말하게�하는� 대로� 말한� 것이다.� 그것은,� 하늘� 방언인데(천사의�방언은� 아님),� 죄악

의� 영향을� 초월한� � 것이다"라고� � 하였다.� 그는� 계속하여� 또� 말하기를,� "방언의� 이적이� 오순절에

는� 완전하게� 나타났으나� � 그� 후에는� 불완전하였다.� 이것은� 마치,� 우리� 마음에� 받는� 은혜가� 처음

엔� 중생의�강한� � 것으로�나타나고,� 그� 후에는�비교적� 현저하지�않은�영력(靈力)만이� 나타나는�것과� 같다.� 오순절에는� 완전한� 방언의� 이적이� 나타났고,� 그� 후에� 지방� 교회에서는� 비교적� 약한� 분

량으로� 나타났다"고� 하였다(The� Work� of� the� Holy� Spirit,� pp.134-135).� � � 교회� 시대(특별히�

현대)의� 방언� 운동에� 대하여� 한가지� 주의� 해야� 될� 것은,� 위에� 카이퍼(A.Kuyper)가� 말한� 바와� 같

이,� 그것이� 사도적� 역사의� 완전성에� 속한� 것이� � 아니라는� 것이다.� 사도적� 이적은,� 병자를� 고칠�

때� 그� 취급된� 병자가� 다� 고침을� 받았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 시대의� 신유는� 그렇지� 못하여� 어떤�

병자는� 고치나� 어떤� 병자는� 못고치는� 정도이다.� 오늘날� 참된� 방언이� 있다면,� 그것이� 그런� 정도의�

것이라고� 인정해야� � 된다.� 사도의� 직접� 지도가� 없는� 지금(교회시대)에� 있어서� 방언의� � 성격의� �

진위(眞僞)를� 참으로� 알� 분이� 누구이기에� 교회에서� 방언을� 통역에� 의하여� 공식으로� 사용할� 수� �있을까?

======14:29-31� � � 이� 부분의� 말씀은,� 초대� 교회의� 신자들이� 직접� 계시(啓示)를� 받은� 일이� 있음을� � 보여� 준다.� 그들이� 예배� 석상에서� 그� 받은� 계시를� 회중(會衆)에게� 전달할� � 자유가� �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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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러나� 이것도� 공중� 질서(公衆秩序)를� 무시하지� 않고� 전달되도록� 할� 것이었다.� 한� 집회에�너무� 많은� 사람이� 예언하지� 않도록� 할� 것과� 하나씩� 하도록� 한� 것은,� 질서� 있게� 하므로� 유익을� 받

도록�한�것이다.

=====14:32� �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 여기� "예언하는� 자들

의� 영"이란� 말은,� 예언하는� 자가� 받은� 성령의� 감화를� 말함이다.� 이� 감화력(感化力)은� � 그� 예언자의� 의식(意識)의� 자주성(自主性)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다.� 그� 예언자는� 의식� 없는� 사람처럼� 난동(亂動)하게� 될� 처지에� 있지� 않다.� 그는,� 위(29-31)에� 기록된� � 질서를� 지킬� 수� 있는� 정상적� 의식을�가지고�있다.

=====14:33� �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 예언을�

주시는� 하나님� 자신이� 질서와� 화평의� 하나님이신� 만큼,� 예언� 자들이� 질서를� � 지켜야� � 될�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이다.

======14:34� �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

을� 허락함이�없나니�율법에�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것이요.� -� "모든� 성도의�교회에서�함과�같

이"란� 말씀은,� "모든� 교회의� 풍속과� 같이"란� 뜻이다.� 이는,� 교회의� 아름다운� � 규례를� 배경으로�

내� 세우는� 말씀이다.� 교회의� 규례도� 성경에� 근거한� 것이라면,� 신자들이� 반드시� 지켜야� 된다.� 바

울은� 이� 규례가� 성경게� 근거하고� 있음을� 지적하기� 위하여,� "율법"의� 교훈에서� 인용(引用)한다.�그러면,� 여자가� � 교회에서� 잠잠해야� 됨(남자를� � 지배하는�公敎訓을� 하지� 못함)은� 율법의�말씀(창�3:16)에� 근거한�것이다.

=====14:35� �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니라.� -� 여기� 이른바� "부끄러운� �

것"이란� 말은,� 보기� 싫은� 것(ugly,� deformed)을� 의미한다(Hodge).� 여기서� 여자의� 교회에� 말하

는� 것을� 금한� 것은,� 그들이� 거기서�무슨� 말이든지�금지�당한� 것이� 아니고,� 다만� 남자들을� 주장하

는�의미의�공교훈(公敎訓)에� 관한� 것이다.

====14:36� �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 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 이

것은� 일반적으로� 고린도� 교회를� 꾸짖는� 말씀이다.� 그� 교회는,� 그때에� 스스로� 모든� � 다른� 교회들

의� 모체(母體)인� 듯이� 교만하였다.� 그리고� 그� 교회� 신자들은,� 하나님의� � 말씀이� 자기들의� 교회에만� 임한� 듯이� 자만하였다.� 이런� 주제넘는� 태도는� 오늘날� 교회들� � 가운데도� 있다.� 하나님의� 복음

이� 저희에게만� 전속한� 듯이� 남들을� 무시하며� 교만하게� � 행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는� 동

안� 자기들도�모르는�사이에�진리에서�떠나게� � 되는� 것이다.� 약� 4:6� 참조.

======14:37� �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 편

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 이� 말씀은,� 고린도� 교회에� 은사(恩賜)를� 받은� 자들이� 바울의�편지를� 표준하여� 시정(是正)을� 받아야� 할� 것을� 가르친다.� 그들이� 은사를� � 받았으나� 그것을� 오용(誤用)하는� 일이�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주님의� 명령을� � 전달하는� 바울의� 서신을� 보고� 고쳐야�할� 것이다.

======14:38� � 만일� 누구든지� 알지�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 -� 이� 말을� 개역하면,� "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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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알지� 못하거든� 그는� 인정되지� 않는� 자니라"고� 할� 것이다.� 곧,� � 바울의� � 편지를� 주님의�

명령인�줄� 모르는� 자가� 있다면,� 그런� 사람은�하나님에게�알려지지� 않은� 자� 곧,� 진리의�사랑을� 받

지� 못한�자이다.

=====14:39,40� � "예언하기를� 사모하라"� -� 고� 하였으니,� 이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장려함이고,�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 고� 하였으니,� 이는� 그것을� 그저� � 용인(容認)하는� � 정도이다.� 이�권면은,� 위(6-28)에� 기록된� 모든� 규례에� 의하여� 교회의� 공적� 질서(公的秩序)에� � 해를� 끼치지� 않는� 방언(方言)을� 할� 때에는� 금하지� 말라는� 것� 뿐이다.� � � 방언�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는� "영을� 다�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요일� 4:1)고� 한� 말씀을� 지켜야� 된다.� 성경

은� 성령님의� 말씀이니,� 그� 말씀을� 존중히�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성령의� 감화를� 참되이� 보존하는�

길이다.� "영들을� 시험하라"고까지� 하였으니,� 우리가� 성령의� 은사들을� 취급함에� 있어서� 얼마나� 신

중을� � 기해야� 할� 것인가?� 시험해� 보기까지� 분변하는� 행위는,� 결단코� 불신앙이� 아니라� 도리어� 경

건이다.� 우리가� 방언을� 아무� 분변� 없이� 받아� 들일� 때,� 거기에는� 마귀의� 역사도� 받아� � 들이게� 되

어지는� 위험이� 얼마든지� 있게� 된다.� � � 그러므로� 우리는,� 신령한� 은혜의� 진위(眞僞)를� 분변하기�위하여� � 언제든지� � 성경을� 표준해야� 된다.� 성경을� 떠나서� 그� 무엇으로� 이런� 중대한� 일들을� 분변

할� 수� 있으랴?� 진리� 판단의� 표준은� 오직� 성경이다.� (1)� "이적"을� 행한� 사람이라고� 하여� 그가� 반

드시�언제나�진리를�바로� 분변할� � 것이라고도�할� 수� 없다.� � 마귀도�어느� 정도�이적을� � 행한다(마�

24:24).� (2)� 누가� 병을� 고친다고해서� 그는� 언제나� 진리를� 옳게� � 분변할� �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가� 확실히� 알기는,� 예수님과� � 사도들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병을� 고치셨고,� 그들이� 전도한� 말

씀은� 진리이다.� 오늘날� 교회의� 신자들도� 하나님께� � 기도하므로� 병� 고침을� 받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교회� 시대에�기도나�안수로�병� 고치는�일이� 있다고하여,� 모두� 다� 신임할�수는� 없다(그� 중

에� 혹시� 신임할� 것도� 있지만).� � �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 7:6,� 17,� 25,� 35,� 36� 참조.�

공식� � 예배(公式禮拜)가� 어느� 시대에나� 질서� 있게� 실행되어야� 할� 것은,� 본장을� 읽는� 자마다� 깨달을�것이다.� 고린도전서�제� 15장

======15:1,2� � 여기� "복음"이란�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었다가� 다시� 사신� �

것을� 전파하는� "좋은� 소식"(*)을� 이름이다(롬� 1:2-4).� � �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 바울은� 여기서�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또� 그� 사실�

위에� 확립한� 사실을� 지적한다.� � 그들이� 신앙을� 가졌으면,� 필연적(必然的)으로� 일반� 신자(一般信者)들의� � 부활도� � 믿어야� 된다.� 그� 이유는,� 신자들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필연적으로�성립되기�때문이다(요� 14:19).

=====15:3� � 그리스도의�부활은�성경적�진리임.� � � 우리�본문에� "성경대로"란�말이� 두번� 나온다.�

세상� 역사상(歷史上)에는� 성경에� � 기록되지�않은� 것이� 발생하는� 사실들도�많다.� 그러므로�사실이라고� 해서� 반드시� 다� 성경에� 예언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면� 성경에� 기록되어� 있었음이� 무슨�

중요성(重要性)을� 가지는가?� 사실들이� 많은� 중에도,� 특별히� 예수님의� 죽었다가� 부활� 하실� � 것은� �성경에� 예언되어� 있었다.� 이것이� 그렇게� 된� 이유는,� 인류(특별히� 하나님의� 백성)가� � 부활함이� 우

주� 만물의� 고대(苦待)하는� 바� 목표이기� 때문이다(롬� 8:19� "피조물의� 고대하는� � 바는� 하나님의�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사� 26:19엔� �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라� 하였고,� 단� 12:2엔� "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라고� 하였다.� 또� 이밖에� �

구약에� 많은� 장� 절들이� 부활에� 대하여� � 예언한� 것이� 확실하다.� 그것은,� 부활� 문제로� 예수님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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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을� 해석하신� 것으로도� 알려진다.� 그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이렇게� 하셨다.� 곧,� "미련

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 자

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

든� 성경에�쓴� 바� 자기에�관한� 것을� � 자세히� � 설명하시니라"(눅� 24:25-27).� 부활� 관계로�여기� 있

는� 예수님의�구약�성경� 취급을�보면,� 구약� � 성경에�부활� 장� 절이� 많이� 있다.� 다만� 우리가�무식하

여� 모르는� 것� 뿐이다.� 그러나� � 예수님은� 아셨다.� 그가� 마� 22:31,32에서� 말씀하신� 것을� 보면,� 우

리로서는� � 부활에� � 대하여� 가르친� 것이라고� 보기� 어려운� 장� 절을� 그는� 부활� 관계의� 장� 절로� 생

각하셨다.� 그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곧�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나

는� �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

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하셨다.� 그는� 여기서� 부활�

장� 절� 같이� 보이지� 않는� 장� 절을� 부활� 장� 절로� 취급하셨다.� 그러나� 그는� 성경을� 밝히� 아시고� 이

렇게� 취급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보시기엔� 구약이� 전체적으로(직접� 혹은� 간접으로)부활을� 가

르친다고� 생각되었을� 것이다.� 그가� 이렇게� � 생각하셨을� 것은,� 바울의� 말로� 보아도� 확실하다.� 바

울은� 구약� 성경의� 목표가� � 부활을� � 가르치는데� 있다는� 의미로� 말하였다(행� 24:15-16,�

26:22-23).� � � 이렇게� 구원사(救援史)라고� 할� 수� 있는� 구약은,� 주로� 부활을� 내다보고� 예언하였다.� 이렇게� 된� 이유는� 부활이� 우주(宇宙)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이런� 중대성을� 띤� 것이� 저렇게�중점적(重點的)으로� 예언되었으니,� 우리는� 믿기에� 용이하다.� 우리는� � 믿어야� � 된다.� 우리가� 부활을� 못� 믿을� 이유는� 전혀� 없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부활한다면,� � 그것은� 믿어지지� 않는다.� 그러

나� 사람을�부활케�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니,� 우리는� 부활을�믿기에�문제성(問題性)을� 느끼지�않는다.� 없는� 데서�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 죽은� 자를� 부활시킬� 수� 없으랴?�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이� 이� 세상에� 늘� 있는� 이유는,� � 인간된� 저들의� 죄악성(罪惡性)� 때문이다.� 그러나� 택함을� 받은� 자들은� � 성령으로� � 말미암아� 부활을�믿는다.� 그러므로�부활의� 도리를�전할� 때에,� 믿는� 자들이�

생기는� 반면에� � 믿지� 않는� 자들도�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부활� 이외의� 다른� 교리를� 전할� 때에

도� � 마찬가지로�생긴다.

=======15:5-8� � � 그리스도의� 부활은,� 눈으로� 친히� 본� 자들의� 증거에� 의하여� 확증(確證)된� 것임(고전15-5-11).� � � "게바".� -� � 그는� 다시�사신� 예수와�함께� 음식을�먹었다고�하면서(행� 10:41),� �

그가얼마나� 확실성(確實性)있게� 주님의� 부활한� 사실을� 안다고� 증거하였는가?� 음식을� � 같이먹는�것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니� 그� 먹는� 동안에� 잘� 살필� 수� 있으며,� 또한� 그� � 사실로인하여� 주님의�

몸이� 음식을� 잡수실� 수� 있는� 구체적(具體的)인� 몸이었다는� 것이� 알려진다.� � � "열두� 제자"� -� 란�말은,� 그들의� 수효가� 예수님의� 부활하신� 직후(直後)에도� � 열둘이란� 의미에서� 여기� 관설된� 것은�아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유다가� 죽은� 뒤의� � 일이다.그러므로� 예수님은� 부활� 직후엔� 열한� 사도

만� 남았었다.� 여기서� "열둘"을� 관설한� � 목적은,� "열둘"이란� 제자단(弟子團)의� 명칭을� 이름이다.�한� 사람이�없어졌어도� 그들의� � 단체� 이름은�그냥� "열둘"이었다.� � 이� 단체는�신약� 교회의�기초(基礎)로서� � 진리를� � 바로분변할�수� 있는� 훈련을� 3년동안�받았으며�부활�후의� 예수를� 잘� 식별할�수�있었다.� � 그들은�이런� 일에� 있어서�최고� 권위�있는� 단체였다.� 하나님의�방침은 부활하신� � 주

님을누구에게나� 보여주실� 방침이� 아니었다.� 행� 10:40,41에� 말하기를,� "하나님이� � 사흘만에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 곧죽은� 자� 가운데

서�일어나신�후� 모시고�음식을�먹은� 우리에게�하신�것이라"고� 하였다.� � � 오백여�형제에게�일시에�

보이셨나니.� -� "오백"이란� 숫자(數字)는� 대중(大衆)의� � 숫자이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소수(小數)에게만� 아니고� 대중에게도� 나타나셨다.� 이는,� 소수에게만� 나타나시는� 불완전한� 사실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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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고� 대중� 앞에서도� 마찬가지로� 진리임을� 알게� 한다.그러므로� 행� 1:3에�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

히� 사심을� 나타내사"라고� � 하였다.� � �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 � 야고보는� 주님의� 동생이니,� 그

로서는� 부활하신� � 예수께서� 자기의� 본래� 형이신� 사실을� 더� 잘� 식별(識別)할� 수� 있었겠다.� 그는�이렇게� � 확실히알았기� 때문에,� 후에� 기둥� 같이� 여김이� 된� 일군이� 되었다(갈� 1:19,2:9).� � � 모든�

사도에게.� -� 여기서� "모든� 사도"라고� 한� 것은,"열둘"이란� 단체에� � 국한(局限)된� 말이� 아니겠다.�이것은� "사도"란� 명칭을� 좀� 넓은� 뜻으로� 써서� 다른� 사람들,� 예컨대바나나와� 같은� 사람들도� 포함

한� 말인� 듯하다.� � �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 같은� 내게도.� -� 바울은� 예수님을� 핍박하던� 자였으나� �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보고� 인격이� 전적으로� 변화되었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 사실� � 증거의�

또� 하나의� 특징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의� 원수도� 믿을� 수� 밖에� 없었다.� � � 그러면� 부활하신� 예

수님이� 나타나신� 사실은� � 순� 객관적� 사실(純客觀的事實)인� 것이다.� 그것은,� 간추리면,� 다음과� 같은� 원리에� 비추어� 알려진다.� � � (1)�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실� 때에� 사앨한� 사람의� 수효가� 일정

(一定)하지� � 않아서어떤� 때엔� 한� 사람을� 상대하셨고,� 어떤� 때엔� 십여명,� 어떤� 때엔� 오백명� 까지�상대하셨다.� 예수님의� 부활이� 어떤� 일정한� 수효의� 사람들에게만� 보여졌다고� 할� 수� 없다.� 그� 만큼� �

그의� 부활� 사실을� 본� 자들의� 증거는� 일방적(一方的)이� 아니고� 완전하다.� � � (2)� 예수님의� 부활은,�주로� 그의� 제자들(그의� 동생� 야고보도� 포함됨)에게만� 나타났으니,� 이는,� 그들만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전� 예수님과� 부활하신� 후� 예수님과의� 동일성(同一性)을� 식별(識別)하겠기� 때문이다.� � � (3)그러나� 주님을� 핍박하던� 불신자� 바울에게도�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셨다.� � 이것도� 주님

의� 부활의� 객관적� 사실(客觀的事實)됨을� 확증한다.� 주님의� 원수도� 주님의� 부활을� 믿을� 수밖에�없었다.� � � (4)� 어쨋든,� 주님의� 부활이� 무차별(無差別)의� 대중� 상대로� 나타나� � 보이기를� � 기필(期必)하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첫째로,� 주님의� 부활� 사실은� 하나님이� 택하신� � 일군들을� 통해서만�증거되도록� 하셨기� 때문이며(행� 10:41),� 둘째로,� 주님의� � 부활을� � 보지못하고� 믿는� 자가� 복이�

있도록,� 하나님께서� 경륜하셨기� 때문이며,� 세째로,� 주님의� � 부활은� 성령의� 능력으로야� 증거되며�

또� 믿어지는� 까닭이다(행� 5:32).� � � 5-8절에� 있는� 대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친히� 본�

자들을� 들어서� 그� � 부활의� 역사성(歷史性)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칼.바르트(k.Bart)는� 이� 귀절에�대하여� 다2� 과� 같이� 말하였다.� "소망이나� 어두움이나� 신앙도� 무덤� 앞에는� 있을� 수� � 있다"고

(TheResurrection� of� the� Dead,� translated� by� H.J.Stenning).� 이� 말은 그 리 스 도 의� �

비인무덤이,� 그의� 부활을� 증거함의� 역사적� 증거품으로서는� 별로� 효과가� 없다고� 하는� � 그릇된� 말

이다.� 그는� 또� 말하기를� "바울은�왜� 이렇게�부활한�그리스도의�나타나신� � 기사를가지게 되 었

는가?� 그것은�부활의� 역사적�증거를�들기� 위함이�아니다"라고�하였다.� � � 위의� 바르트� 말을� 보면,�

그는(바르트)� 확실히�계시(啓示)의� 역사적�성격을� � 부인하고�잘못� 말하였다.

======15:9-11� � 바울은,� 이� 부분에� 있어서,� 자기의� 부족을� 말하고� 자기와� 같이� 악한� 자도� 그

리스도의� 부활� 사실을� 보고� 변화되고� 은혜로� 사도가� 되어짐을� 지적하였다.� 즉,� 큰� 죄인이� 변화하

여� 신앙에� 들어오게� 된� 것은� 그가� 본바�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적� 진리이기� � 때문이란� 말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여기에� 대하여서도� 말하기를� "진리는� 보이는� 역사적� 모습을� � 취하지� 않을� 때에�

그것은� 아무리� 초조할지라도� 유력하다.� 진리는� 그것이� 인간의� 이름을� 취하거나� 일정한� 슬로간에�

의하여� 학파(學派)나� 운동으로� 나타날� 때는� 죽었거나� 혹은� 치명적(致命的)으로� 병든� 것이다"� 라고� 하였다(같은책� p.145-146).� 바르트의� 이� 말은� 복음� 진리에� 대한� 역사적� 체계가� 있을� 수� 없

다는�그릇된�사상이다.

======15:12,13� � 이� 두� 귀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인즉,� 일반� 신자들도� 죽었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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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살수� 있다는� 것이다.� 부활은� 벌써� 된� 일이니� 앞으로도� 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곧,� � 예수그

리스도도� 인간성을� 입으셨던� 이로서� 죽었다가� 다시� 살았은즉,� 모든� � 다른� � 인간성의� 소유자들도�

그렇게�될� 가능성�아래� 있다.

=====15:14,15상� �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고� 가정(假定)하는� 경우에� 나올� � 불행한� �일들에� 대하여� 말한다.� 그� 가상(假想)되는� 불행한� 일들은� (1)� 사도들의� 전도가� 헛됨.� � 이것은� 물론� 천부당�만부당(千不當萬不當)한� 가상이다.� 사도들의�전파하는�것이� � 참인� � 것은,� 하나님의�이적과�기사가�동반(同伴)된� 것과� 성령의�역사로�증거되었다(히� 2:4).� (2)믿음도�헛것이�됨.� 이것도�이론(理論)을� 위하여� 가상적으로� 말한� 것� 뿐이고� 사실과는� 정반대(正反對)이다.� 믿음이� 헛되어�질� 리(理)는� 만무하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다(히� 11:1-2).� (3)� � 사도들이�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됨.� 이것도� 사실과�

정반대� 되는� 가상이다.� 사도들은� 거짓� 증인들과� 정반대되는� 성질� 있는� 사역을� 하였다(살전�

2:3-6;� 고후� 2:17).

======15:15하반� �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

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 것이� � 없었을�

터이요.� -� 여기에� 같은� 말씀이� 중복된� 목적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일반� 신자들의� 부활이� 서로� 서

로� 일체(一體)되는�원리라는�것을�역설(力說)하려는�데�있다.

======15:17-19� � � 이� 귀절들은,� 14,15절의�말씀과�유사(類似)하게�그리스도의�부활이�없다는�가정(假定)� 밑에� 나올� 불행한� 결과들에� 대하여� 보충한다.� � � (1)� 믿음도� 헛됨.� -� 14,15절의� 같은�말씀� 해석을� 참조하라.� � � (2)�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음.� -�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음으로� 이

방인들이� � 사죄� 받은� 것은� 확실하였다(행� 10:43,11:1-18).� 그들은� 복음을� � 믿자마자� � 하나님에

게서� 사죄� 받은� 증표를� 많이� 받았다.� 그러면,� 신자들이� 여전히� 죄� 가운데에� 있다는� 말은� 성립될�

수� 없다.� 그렇다면� 그들로� 하여금� 사죄� 받게� 한�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도� 참되다.� � � (3)� "그리스

도�안에서� 잠자는�자도� 망하였으리라"� -� 고함� .� 그리스도의�부활을� � 믿고� 죽은� 자들이� 부활할�것

은� 확실하다(살전� 4:14).�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것은� 성령의� 은혜로� 되나니,� 성령을� 받은� 자가�

부활할�것은� 확실하다(롬� 8:11).� 그러므로� � "그리스도� 안에서�잠자는�자도� 망하였으리라"는� 가상

(假想)은,� 어디까지든지� 성립될� 수� 없다.� 다만� 그리스도의� 부활이� 참되지� 않다고� 할진대� 이런� 불가능(不可能)한� 가상도� � 성립된다고� 하는� 셈이니,� 그리스도의� 부활이� 참되지� 않다고� 할� 수� 없는�것이다.� � � (4)� "우리가� 더욱� 불쌍"� -� 함.� 이것도� 가상이다.� 기독자인� 바울은� 얼마나� 행복스러웠

나!� (행� 26:29;빌� 3:7-9).� 그러므로�이런�가상은�성립될�수� 없다.

=====15:20� � �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 자는� 자들의� 첫� � 열

매가� 되셨도다.� -� "잠자는� 자"란� 말은� 죽은� 자들을� 비유한다.� � � "첫� 열매",� 하나님께� 처음� 익은�

열매를� 바치면,� 수입되는� 곡식� 전부를� 바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의의(意義)를� 가진다(롬� 11:16;�출� 23:19,� 34:26;� 레� � 2:12,� � 23:10,� � 17,� 20;민� 15:20,� 21).� 그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그의� 백성의� � 부활도� 얻어진� 것이다.� 그는� 머리요� 그의� 백성은� 몸이니,� 머리

가�부활하였은즉�몸된� � 교회도�부활하도록�되어있다(롬� 6:5;골� 1:18).�

======15:21� �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 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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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은,� 분명히� 구주� 예수님의� 대속적� 구원(代贖的救援)의� 원칙을� 보여준다.� 특별히� � 롬� 5:12이하의� 말씀이� 이� 귀절� 해석에� 적합한� 참고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대속자(代贖者)이신� 역사가�윗절에� 있는� 그의� "첫� 열매"된� 성질을� 설명하여� 준다.� 그렇기� � 때문에� 본절� 초두에(헬라� 원문대

로)� "왜� 그런고�하면"이란�말(*� � )이� 있다.

=====15:23� �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 그

리스도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 "첫� 열매"란� 말에� 대하여� 위에� 제� 20절에� 있는� 같

은� 말� 해석을� 참조하여라.� "강림"이란� 말(*)은� 왕의� 내림(來臨)을� 의미할� 때� 상용되는� 말인데� 여기서� 주님의� 재림을� 가리킨다.� "그에게� � 붙은� � 자"란� 말은,� � 그리스도의� 백성을� 가리킨� 것이니,�

곧,� 기독신자�들이다.� � 고전� � 12:3,� � 1:30,� 7:23� 참조.

======15:24� �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

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 여기� "나중이니"란� 말은,� 헬라� 원어로� 토� 텔로스(*)니� 세상� 끝이란�

뜻이고,� "마지막� 부활"이란� 뜻이� 아니다."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침".� 이것은,� 그가� 그의� 백성

을� 구속하기� 위하여� � 모든� 악한� 권세들을� 멸하느라고� 잡았던� 권세를� 하나님� 아버지께� 바친다는�

뜻이다.� 그가� � 재림하실� 때엔� 모든� 악한� 권세들을� 멸하신다.� 대상� 29:11;� 시� 22:29,� � 145:13;

욥� � 21장;� 욜� 3:8;� 계� 11:15,� 20:10� 참조.� � �

======15:25,26� � 그리스도께서� 그� 백성을� 구속하시기� 위하여는,� 모든� 원수(사망까지� 포함됨)

를� 완전히� 멸절하시는� 권세를� 가지신다.� 이것이� 그의� 왕권인데,� 그가� 하나님� 우편에� 앉아� � 계시

어�이를�행용(行用)하신다(시� 110편).� "그� 발아래"� 둠은�완전한�정복을�이름이다.

=====15:27� � 만물을� 저의� 발아래�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저의� 아래�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것이� 분명하도다.� -� 이것은,� "만물을�저의� � 발아래�두

셨다"는� 시� 8:6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씀이다.� 이것은� 메시야께서� 구속� � 사업(救贖事業)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권세를� 가리킨다.� 하나님� � 아버지께서� 그에게� 이런� 권세

를� 주셨으니,� 아버지께서만은� 메시야의� 권세� 아래� 들지� � 않으신� 것이� 명백하다.� 그는� 필경� 만유

의�주가�되신다(28�下半節)

=====15:28� � 그리스도께서� 모든� 원수들을� 정복하시어� 그� 왕권을� 하나님� 아버지에게� � 바침에� �

따라,� 하나님� 아버지는� 만유의� 주로� 계신다.� � �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재림하시어� 하나님� 아버지께�

복종(복속)하신다� 함은,� (1)� � 그의� 신성(神性)이� 아버지만� 못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다만�그의� 역사면(役事面)에� 있어서� 아버지에게� 종속(從屬)하심을� 가리킨다.� 그리고� (2)� 그것은,� 그가�삼위� � 일체� 신(神)� 안에서� 영원한� 왕이심을� 부인하는� 의미도� 아니다.� 그리고� 또한� (3)� 그것은,�그가� 그의� 구속하신�백성의�영원한�왕이심을� 부인함도�아니다.바르트는�이� 부분에�대하여�말하기

를,� "그리스도의� 왕국은� 본질에� 있어서는� 언제나� 오는� 중에만�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같은책�

P.171).� � �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이세상에� 이루신� 역사적�가치(歷史的價値)를� 무시한� 말이� � 아닌가?� 그리스도의� 왕국은� 물론� 과도적(過渡的)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 천국의� 현실이�아닌가?� 천국의� 종말적(終末的)인� 완성은� 미래에� 속하지만� 그것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함께� 벌써�와� 있는�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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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9� � 만일� 죽은� 자들이�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죽은� 자들을�위하여�세례� 받는� � 자

들이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 -� 여기� 이른� 바� "죽은� � 자들을� 위

하여�세례를� 받는다"함은�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몇가지� 해석을� 가진다.� (1)어떤� 주석가들은�

말하기를,� 이것이,� 산� 사람으로서� 별세(別世)한� 사람을� 위하여� � 대신� 세례를� 받음을� 가리킨다고�한다.� 그러나� 이런� 대리적(代理的)� 세례는� � 이단에� � 속하는� 것이니,� 바울이� 그것을� 인정하는듯이�여기� 관설하지� 않았을� 것이다.� (2)� 이것은,� 거의� 죽어가는� 자가� 그의� 불신(不信)� 가족이나� 친척이나� 친구더러� 예수를� 믿고� 세례� 받으라고� 한� 부탁대로,� 그� 부탁받은� 자들이� 순종하여� 세례� 받

음을� 의미한다고� 한다.� (3)� � 이것은,� 죽은� 자들� 위해서(=무덤� 위에서)� 세례� 받음을� 의미한다고�

한다.� "위하여"란� � 말(*)이,� 이� 해석에� 있어선,� "위에서"(above)라고� 생각되었다.� (4)� � 그리고� �

또� 한가지� 해석은,� 이러하니,� 곧,� 여기� "죽은� 자들을� 위하여"란� 말씀이� "죽은� � 자들(세례받는� 자

신도� 포함시킴)의� 부활할� 것을� 염두에� 두고"란� 뜻이라고� 한다.� 이� 해석은� � "부활할� 것"이란� 말을�

보충(補充)하는� 것이나� 자연스럽지� 않다.이� 밖에도� 학자들이� 거의� 30내지� 40여개의� 다른� 해석을�이� 말씀에�붙인다고� � 한다.� 어쨌든,� 세례� 받는� 자들이�부활� 소망을� 가지고�받는다는� 것이� 바울의�

염두에� 있은� � 것은� 사실이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사람들이� 세례받을� 필요가� 없겠다.� 그러나� 사

람들이�부활�소망을�가지고�세례를�받는�것은� 사실이다.

=======15:30,31� � 신자들이�의(義)를� 위하여�죽음을� 무릅쓰는� 것은� 장래의� 부활을�믿기� 때문이다.� 그같은� 모험적�신앙(冒險的信仰)을� 가짐이�사람의�힘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 하나님께서� 부활신앙(復活信仰)을� 기뻐하시어� 그에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된다.� � 하나님이� 부활신앙을�기뻐하시는�이유는,� 그것이�진리이기�때문이다.

=====15:32� � � 내가� 범인처럼�에베소에서�맹수로�더불어�싸웠으면�내게�무슨� � 유익이� � 있느뇨.� �

-� "범인처럼"이란� 말은,� "부활� 소망� 없는� 사람처럼"이란� 뜻이다.� 그런� 소망� 없는� 사람으로서야�

무슨� 유익을� 보자고�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랴?� 바울이� "맹수로� 더불어� � 싸웠다"는� 것은,� 하나의�

은유(隱喩)니,� 곧,� 악인들의� 박해를� 받았다는� 뜻이라고� 한다.� � �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 마시자� � 하리라.� � -� � 사� 22:13� 참조.� 여기에� "먹고� 마시자"란� 말이� �

인용되었는데,� � 이것은� � 에피큐리오� � 철학(Epicurean� philosophy),� 곧� 쾌락주의철학의� 표어(標語)이다.

====15:33,34� � 여기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더러,� 회의주의(懷疑主義)로� 흐르는� � 악도(惡徒)들에게� 속지말라고� 다짐한다.� � 회의주의자들은� � 행실이� � 부패한� � 것을� � 특징으로� � 한다(시�

14:1).� 진정한�의미에서�의를�행하는�사람일�수록�진리� 신앙에�가까워진다.

======15:35� �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 �

이것은,� 신자들의�부활할�몸이� 어떤�성질의�것인지�물음에�대하여�대답한다.

======15:36,37� � 이� 말씀은,� (1)� 현세(現世)의� 몸은� 죽고야� 내세의� 부활체(復活體)가� 생겨난다는�비유이며� (2)� 장래에�부활할�몸이� 현세의�썩을�몸과� 같지�않다는�비유이다.� 뿌리워�썩는� 씨

가,� 그것에서� 자라난� 줄거리에서� 피는� 꽃과� 같을� 수� 없다.� 부활한� 몸도� 영� 뿐이� � 아니고� 물질적

(物質的)이면서도�현세의�인체(人體)와� 같지는�않다(charles� Ho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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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8� �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 주시느니

라.� � -� 여기� "저"란� 말(*)은� "그것"(종자를� 의미함)이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 그러면� 심기운� 종자

에서� 그� 종자의� 모양과는� 다른� 형체의� 줄기와� 잎이� 나온다.� � 그것은� � 또한� 씨앗의� 종류에� 따라

서� 다르기도� 하다.� 그와� 마찬가지로� 부활하는� 때(그리스도의� � 재림� 때)에� 나타나는� 신자의� 몸이�

그� 본래�무덤에�들어가던�몸과는�다른� 것이다.

======15:39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

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 하나님께서� 모든� 생물들을� 창조(創造0하시는� 사역에�있어서,� 그� 몸들의�구조와�모양이�각각� 다르게�하셨다.� 그렇다면,� 그가,� � 인간들을�부활시키는�사

역에� 있어선,� 땅에있던� 그들의� 육체의� 모습과� 같이� 하셔야만� 되는� 제한을� 받을� 것인가?� 그럴리

는�없다.

=====15:40� � �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 여기� "하늘에� 속한� 형체"란� � 것은,� � 다음� 귀절

이� 명시(明示)한� 바와� 같이� 일월성신(日月星辰)을� 의미하고,� "땅에� 속한� � 형체"는� 땅에서� 사는�것들의� 몸들을� 가리킨다.� 양자(兩者)의� 모습이� 서로� 다른� 사실에� � 근거하여,� 바울은� 또다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다양성(多樣性)을� 지적한다.� � 그리하여,� � 그는,� 하나님께서� 신자들의� 다시� 살아날� 몸을� 현세(現世)� 사람의� 몸과� 다르게� 할� 수� � 있음을� 지적한다.� � � 바울은� 여기서� "창조질서�상(創造秩序上)에� 나타내신� 하나님의� 능력을,� 그의� � 구속� 능력(球束能力)에� 대한� 비유와� 전주곡(前奏曲)으로� 생각하였다.� 구속의� � 능력은� � 결코� 창조의� 능력보다� 작은� 것이� 아니다"(H.D.�Wendland,� Dies� Schopfungswirklcdkeit� � ist� Gleichnis� und� Vorspiel� der�

Erlosungswirklichkeit.� Diese� Macht� � des� � Gottes� � � der� Erlosung� ist� nicht� geringer� als�

die� Macht� des� Gottes� der� Schopfung.� � Die� � Briefe� an� die� Korinther� p.134).�

======15:41-43� � � 이�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함을� 암시한다.창조질서(創造秩序)에� 있어서도� 그� 다양성(多樣性)을� 성립시키는� 그의� 능력이(38-41)� 오묘하다.� 이� 능력이� � 부활시키는� 사역에� 있어서� 역시� 오묘하게� 나타난다.� � � 바울은� 여기서,� 현세의� 인체(人體)와� 내세의�부활체(復活體)와의� 대조(對照)를� � 보여주며,� 양자(兩者)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립되며� 존재할�수� 있음을� 지적한다.� 그� 둘� 사이에� 대조는,� -� "썩을� 것과� 썩지� 아니할�것",� "약한� 것과� 강한� 것",�

"육의� 몸과� � 신령한� 몸"� -� 의� 대조이다.� 이것을� 존재케� 하신� 하나님이� 저것도� 존재케하실� � 수� �

있다.� 하나님은� 여기� 말한� 각기� 대조� 중에� 한� 편만� 존재케� 할� 수� 있을가?� � 하나님은� � 권능에� 제

한� 받은�신(神)이� 신가?� 결단코�그렇지�않다.

======15:45� �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아담은� 살려� 주는� �

영이� 되었나니.� -� 여기� "기록"이란� 것은� 창� 2:7에� 대하여� 관설한다.� "첫� � 사람"이란� � 말은,� 아직�

완성되지� 못한� 초등� 인간(初等人間)을� 의미한다.� 그에겐,� � 완성시켜� � 주시는(살려주시는)사람,�곧,� 마지막� 아담이� 무언중(無言中)에도� 요구되고� � 있었던� � 것이다.� "산� 영"(*)이란� 것은,� 하나님이� 아담의� 몸을� 지으시고� 거기� 생기를� 불어� 넣은� 뒤에� 된� 것이다(창� 2:7).� 그리하여� 그� 몸은� 영

혼이� 담기운� 그릇과� � 같이� 된� 셈이다(Meyer).� 그것은� 위에� 44절에� 이른바� "영혼의� 몸"(*� � )이

다(한역에서� "육의� 몸"이란� 것은�誤譯임).� � � 이런� 몸은� 범죄하지� 않았더라면� 자체로서는� 영생할�번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 남을� 살리는� 영은� 못� 되었다.� � �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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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니".� 예수� 그리스도를� "마지막� � 아담"이라고� 한� 이유는,� 그가� 말세에� 나타나서� 인생들을� 구원

하여� 완성시키기� 때문이다(히� 9:25-28上半節).� "마지막"이란� 것은� 말세란� 말을� 암시한다.� 그리스도의� 초림(初臨)� 때부터는,� 성경의� 가르친� 대로,� 말세이다(히� 1:1,2).그리스도가� "살려� 주는� 영이� 되"신� 것은� 어느� 때부터� 된� 것인가?� 여기� � "되었"다는� 말이� 역사상(歷史上)에� 이루어진� 사건(事件)을� 가리키는� 것인� 만큼,� 그것은� 그의� 부활승천하신� 때부터� 된� 것이다.그의� 부활� 전(復活前)� 몸은� 아직� "영혼의� � 몸"(soulbody),� 곧,� 영혼만이� 지닌� 몸이었다.� 그러나� 그가� 죽었다가� 다시� 사신� 몸은,� 남들에게� 생명을� � 교통하여� 줄� 수� 있는� 몸이다.� 이와� 같이� 생명을� 교통하여� 주시

는�일은,� � 그가� � 하심에�있어서,� 물론�성령으로�말미암아서�하신다.

======15:46� � 여기� 이�말씀은,� -� "신령한�자와� 육� 있는자"(헬라� 원문엔� *� � 이니� "영혼의�사람

")의� 존재에� 대한� 시간� 순(時間順)을� 지적하려는� 것보다,� � 미성품(未成品)과� 같은,� "육� 있는� 자"(헬라� 원어의� 직역대로� "영혼� 있는자"� *� � 이니� 성령으로� 다시� 살게� 함이� 된� 사람이� 아님)를� 완

성케� 하기� 위하여� 마지막� 아담� 곧,� 신령한� 자가� 오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귀절은,� 하나님께

서�인생을�구원에까지�이르도록�완전케�하시는�사역의�단계를�표시하는�말씀이다.

======15:47,48� � 이� 귀절들은� 첫� 사람� 아담의� 근원과� 둘째사람� 그리스도의� 근원에� � 대하여� �

말한다.� 하나는�흙에서�유래(由來)하였고�다른� 한� 분은�하늘에서�오셨으니,� 양자(兩者)는� 천양(天壤)의� 차이로� 서로� 다른� 면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성품을� � 취하셨으니만큼,� 그를�믿는� 자들이� 그의� 형상을� 입을� 소망이� 있다.� 다음� 귀절(49절)이� � 그것을� 지적� 한다.� � � 바르트

(Barth)는,� 이� 부분에� 있는� "둘째� 사람은�하늘에서� 나셨느니라"하는� � 문구에�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즉,� "이� 진정한� 영은� 언제나� 우리를� 위하여서는� 주어지지� 않는� 것이고� 하나님이� 주신�

절대적� 이적(絶對的異蹟)이다"라고� 하였다(Barth,� �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translated�by� Stenning.� p.� 201).� 그는� 또� 말하기를� � "우리는� 구원사(救援史)와� 관련하고� 서있다.� 그것은�진정한� 역사니,� 옛것은� 망해� 가고� 새� 것이� 되어� 가는� 역사이다.� 그것은� 시간계에서� 연출되는� 것

이� 아니고,� 시간과� � 영항(永恒)의� 사이에서� 되어지는� 것이다"락� 하였다(같은책� p.201-202).� � �위에� 소개한� 바르트의� 구원사관(救援史觀)은� 초월주의(超越主義)가� 이니라� � 초절주의(超絶主義)이다.� 구원사� 관계에� 있어서� 성경은,� 초월주의를� 가르치고� 있으나� 초절주의를� 말하지는� 않는다.�

초월주의는,� 하나님께서� 시간� 세계에� 내재(內在)하시면서� 동시에� 초월하여� 영원계(永遠界)에� 계심을�말한다.� 이� 사실은�고린도�전서� 15장� 27,� � 28절이� 밝혀준다.

=======15:50� � 여기� 이른바�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는� 것은,� 몸의�

부활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고,� 혈육� 그대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 뿐이다.� � �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 이� 말씀도� � 역시� � "썩은� 것"� 그대로는� "썩지� 아

니한� 것"(천국)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썩은� 것은� � 하나님의� 권능으로� 변화를� 받아� 부활체

(復活體)가� 되어서만�천국에�참여한다.

=====15:51� � �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 나

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 "비밀"이란� 말은,� 전에� 감취었다가� 지금은� 계시(啓示)된�진리를�이름이다.� 이것은�신자들의� 부활에�대한� 진리를� 염두에�둔� 말이다.� � � "우리가� 다� 잠잘� 것

이� 아니요".� 곧,� 우리� 신자들이� 주님의� 재림� 때� 전에� � 모두� � 다� 별세하고� 없을� 것이� 아니고,� 그�

때에� 살아� 남아� 있을� 자들도� 있겠다는� � 뜻이다.� � 살아� 남아� 있는� 자들은� 그� 때에� 예수님의� 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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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인하여� 몸이� 변화된다.� "마지막� 나팔"은� 비유니,� 주께서� 재림하시어� 성도들을� 모으심을� 가

리킨다(마� 24:31).� 사� � 27:13;� � 살전� 4:16� 참조.

======15:52� � 우리도� 변화� 하리라.� -� "우리"란� 말은,� 주님의� 재림� 때까지� 살아� 남아� 있을� 자

들을� 대표하는� 것이다.� 사도가� 자기� 당대에� 주께서� 재림하실� 줄� 알았던가?� 그가� 재림이� � 자기�

생전에� 될지도� 모른다는� 신앙은� 가졌을� 것이다(고전� 7:26의� 해석� 참조).� � 그� � 이유는,� 예수님께

서�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재림의� 날과� 때를� 모른다고� 하셨으며� 또한� 늘� 깨어� 있으라고� 하셨기�

때문이다(마� 25:13;� 눅� 12:40).� 그러므로� 바울이� � 자기� � 당대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지도� 모

른다는�사상을�가진� 경우에도,� 그것이�잘못은�아니다.

======15:53� � 이� 썩을� 것이� 불가불�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입

으리로다.� -� 이� 말씀은,� 주님이�재림하실� 때에� 그때까지� 살아�남아� 있는� 자들이� � 변화하게� 될� 원

인(原因)을� 보여준다.� 곧,� 이� 말씀에� "불가불"(*� )이란� 말이� 중요하니,� 그것이� 원인이다.� 그것은,�어떤� 추상적(抽象的)인� 절대성(絶對性)을� 의미하지� 않고,� � 하나님의� 필연성(必然性),� 곧,� 하나님께서� 되도록� 하셨기� 때문에� 될� 수밖에� 없는� 것을� � 가리킨다.� 이것은� 구원론적� 필연성을� 염두에�

둔� 말이다(Lenski).

=======15:54� �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용하리라.� -� 호� 13:14� 참조.� �

사망이� 이김에게� 삼킨� 바� 된� 사실에�대하여는� 55-57의� 말씀이� 잘� 보여주었다.� 곧,� � 사망은� 죄를�

이르며� 죄는� 율법을� 기회로� 삼아� 성립되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 대신하여� 율법을� 완수

하여� 주셨으니만큼� 사망은� 패배(敗北)를� 당하였으며� 폐지(廢止)를� 당하였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제� 16장

=====16:1� � 행� 11:28에� 보면� 글라우디오� 때에� 흉년이�들� 것이라는�아가보의� � 예언이� � 전해지

고� 있고,� 갈� 2:10에는� 예루살렘� 사람들이� 비참한� 빈궁� 속에� 빠져� 있음이� 나타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예루살렘� 교인들을� 도운� 것처럼� 고린도� 교인들도� 곤궁에� 처

한� 예루살렘� 형제들을� 도우라고� 권면한다.� � � 연보�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로게이아'(*� � )는� 여

기에서만� 쓰였는데� 후대에� 이� 말은� 세금과� 관련되어� 쓰여졌다(Barrett).� '로게이아'의� 이러한� 용

법� � 때문에� 혹자는� 바울의� 헌금에� 대한� 가르침이� 예루살렘� 성전에� 비친� 유대인들의� 세금과� � 유

사한� 성격을� 가진다고� 주장한다(J.� Jeremias).�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잘못된� � 것이다.� 왜냐하면�

세금은� 강제성이� 부여된� 징수인데� 반해� 연보는� 사랑에� 기초하여� 어려움을� 당한� 교회를� 돕기� 위

한� 자발적인� 헌납이기� 때문이다(Kittel).� 연보는� (1)� 대가� 없이� � 주는� '선물'(*,� 카리스,� '은혜')이

며(3절;고후� 8:4ff.),� (2)� � 서로� � 나누는� '교제'(*� � ,� 코이노니아,� '동정')의� 방편이며(롬� 15:26).�

(3)� '섬김'(*� � ,디아코니아)의� 진정한� 표현이고(롬� 15:31;고후� 8:4;9:1),� (4)다른� 사람에게� 복을�

기원해� 주는� 것(*,� 율로기아,� '축복')을� � 합당하게� 구체화� 시키는� 것이다(고후� 9:5).� � �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연보를� 권면한�

기록은� 찾아� 볼� 수� 없으나� 본문은� 갈� 2:10에서� 결정된�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는� 것'과� 밀접하게�

연관된다고� 추측할� 수� 있다.� 당시의� 많은� 교회들은� � 예루살렘의� 결정에� 따라� 연보에� 동참하였다.�

이러한� 전체� 교회의� 전체� 운동은� 단순한� 구제� 운동에� 그친� 것이� 아니라� (1)� 교회의� 단일성과� 통

일성을� 고취시켜� 유대� 그리스도인과� 이방� 그리스도인의� 실제적인� 연합을� 도모하며,� (2)� 그리스도

인� 공동체가� � 추구하는� 사랑을� 추구하기� 위함이다.� 한편� 갈라디아는� 바울이� 제� 1차� 전도�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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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개척한� 안디옥,� 마게도냐� 지방을� 통틀어� 생각하는� 것으로� 추정된다(Barrett).� 여기에� 대한�

근거는� 고후� 8:1이하에� 마게도냐� 교인들이� 궁핍한� 중에서도� 최선을� 다해� 풍성한� 연보를� 하여� 예

루살렘� 교회를� 구제한� 사실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소개할� 때,� 마게도냐� 지방을� 넓은� 의미

에서�갈라디아�지방으로�해석한�데� 있다�하겠다.�

=====16:1-19� � 본문은�예루살렘� 성도들을�위한�연보� 문제에�관해� 언급하고�있다.� 바울은�어려

움에� 처한� 자들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주도록� �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예루살렘� 교회가�

어려움에� 처하게� 된� 특별한� 이유로는� � (1)� 원래� 빈민층이� 많았고,� (2)� 여러� 차례에� 걸친� 팔레스

틴�지방의�흉녕으로�인해�기근으로�처해�있었다는�점을�들� 수� 있다.

=====16:2�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 '매주일� 첫날에'에� 해당하는� 헬라

어� '카타� 미안� 삽바투'(*� � � )는� '매� 안식� � 후� � 첫날에'라는� 뜻으로� 오늘날의� '주일'(Lord's� day)

에� 해당한다.� 초대� 교회� � 당시에는� � 주로� 안식일에� 정기적인� 모임을� 가졌으나(행� 15:21;18:4),�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는� � 그것을� 기리며� '안식� 후� 첫날'에� 정기적인� 모임을� 가졌다(행� 20:7).�

이처럼� 초기에는� 주일과� 안식일에� 정기적인� 모임을� 가졌지만� 유대교임의� 기독교� 박해로� 두� 종교

간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4세기� 초부터� 기독교는� 주일을� 정규적인� 교회의� 집회일(集會日)로� 정했다.� 한편�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연보를� 드리는� 세� 가지� 원칙을� 말하고� 있다.� (1)� 연보를� 드

리는� 시기가� '주의� 날'임을� 밝힌다.� (2)연보는� 가난한� 사람이나� 부유한� 사람이나� 할� 것� 없이� 모

두가� 각자의� 형편에� 따라� 하도록� 하였다.� 이는� 연보를� 하는� 사라들이� 어떤� 특정� 부류의� 계층에

만� 제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모든� 사람이� 연보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모두에

게� 미치기� 때문이다.� (3)� '이를� 얻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오도타이'(*� � )는� '유오도오'(*� � )의�

현재� 수동형으로� '번영된다',� '바르게� 인도되다'라는� 의미이다.�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서는� 드물게�

나타나며(롬� 1:10;요삼� 2)� 모두가�수동태를�취했는데,� 이는� 70인역(LXX)의� 영향을� � 받은� 듯하다

(TDNT).� 이로� 보아� 이� 말이� 하나님께서� '길을� 인도해� 주시는� 대로'� 또는� '기회� 주어지는� 대로'�

연보하라는� 것을� 암시한다� 하겠다.� 또한� '호� 티� 에안'(*� � � )은� '...하는� 대로'라는� 의미로� 자신의�

수입�정도에�따라서�연보할�것을� � 가르치는�것이라�볼� 수� 있다.�

=====16:3� 너희의� 인정한� 사람에게� -� 바울이�고린도� 교회에� 도착한�후� � 연보를� � 예루살렘으로�

가져갔지만,� 바울� 자신이� 직접� 가지고� 가는� 것은� 아니고� 고린도� 교회에서� 추천한� 사람이� 가져가

도록� 하였다.� 바울이� 이렇게� 한� 이유는� 교회� 재정을� 취급함에� 있어� 호리라도� 의심을� 살� 만한� 여

지를�남겨두지�않으려�했기� 때문이다.� � � 너희의�은혜를� -� '은혜'에� 해당하는�헬라어� '카린'(*)은� '

즐거움을� 주는� 어떤� 것',� '친절한� 호의'� 등을� 뜻한다.� 만약� '카리스'가� 죄와� 허물과� 연관해서� � 쓰

이면� 언제나� '공로� 없이� 받는� 은혜'를� 뜻한다(TDNT).� 본문에서는�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보낼� 선

물로� 친절하고� 자비로운� '사랑의� 연보'를� 가리키며(Lenski),� 이러한� 구제의� 연보는� 대가를� 전혀�

생각지�않는� 선물이다.

=====16:4� � �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 바울의� 계획은� 불확실하였다.� 그가� � 예루살렘으

로� 갈� 것인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갈� 것인지� 자신도� 알지� 못했다.� 다만� � 고린도� � 교회가� 드린�

연보의� 액수가� 크면� 그� 분배(分配)를� 위해� 전달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갈� � 것이라고� 밝힌다.�사실� 나중에� 살펴보면,� 고린도� 교회가� 연보한� 금액은� 상당히� 많은� � 것이었으며�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과�동행하여�예루살렘에�간�것으로�나타난다(행� � 20:4;룸�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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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 � 내가� 마게도냐를� 지날� 터이니� -� 바울의� 원래� 계획은� 본서를� 쓰고� 있던� � 에베소에

서� 배를� 타고� 고린도로� 갔다가� 마게도냐� 지방을� 방문하고� 난� 연후에� 다시� 고린도로� � 돌아와� 예

루살렘으로� 향하는� 것이었다(행� 19:21;고후� 1:16).� 하지만� 바울은� 이� 계획을� � 변경하여� 마게도

냐를� 먼저� 방문하였다.� 바울이� 이렇게� 한� 것은� 고린도� 교회에서� � 발생한� 부끄러운� 사건을� 전해

듣고� 이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기� � 위함이었다.� 당시� 고린도� 교회에서� 발생

한� 문제로는� 간음,� 음행,� 우상숭배� 등이� 있었는데� 교회는� 이것을� 처리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따라서� 교회는� 거룩성을� 날로� 상실해� 가고� 있었다.� 바울은� 이것을� 바르게� 가르쳐주고자�

고린도� 교회를� � 달려가고� � 싶었지만� 자칫� 감정적인� 분노때문에� 성도의� 덕을� 상할까� 염려하여� 고

린도� 교회에� � 대한� � 방문을� 연기했거나� 변경하게� 된� 것으로� 본다(Farrar).� 하지만� 고린도에� 있는� �

거짓� � 교사들은� 이러한� 바울의� 의도를� 모르고� 그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경박한� � 인물이라고� � 비

난하였다.� 바울은� 이러한� 비난에� 대해� 고린도후서에서� � 변호하고� � 있다(고후� � 2:13;8:1;9:2,�

4;12:14;13:1).

=====16:6� � 너희와� 함께� 머물며� 과동할� 듯도� 하니� -� 바울이� 과동(過冬)하려는� 구체적인� 시기는A.D.� 57년� 말에서� 58년� 초까지�약� 3개월� 간을� 가리킨다.� 바울은�실제로�고린도에서�머무르게�

되었는데� 고린도에� 체류한� 이� 기간� 동안� 로마서를� 집필하였다(행� 20:1-3).� � 당시� 근동지방에서

는� 겨울에� 여행하는� 것을� 꺼려하였다.� 바다는� 얼어서� 배를� 이용할� � 수� 없게� 되고� 육지는� 추위로�

여행에� 지장을�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는� 바울은� 자신의� 여행� 계획을� 이미� 세웠지만,� 한편으

로는� 여행할� � 수� � 없는� � 여건을� � 생각하고� � 있었다(Morris).� � � 이는� 너희가� 나를� 나의� 갈� 곳으

로� 보내어� 주게� 함이라� -�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 머무는� 목적은� 교회의�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 바울이� 전도� 여행을� 계속할� 수� 있도록� 그의� 생필품을� 마

련해� 주는� 것이� 하나의� 관례로� � 되어� 있었다(Barrett,� Lenski).� 한편� 바울의� 이러한� 표현은� 고린

도� 교회� 성도들로� � 하여금� 자신의� 선교� 사역에� 관심을� 갖게� 하고� 그일이� 바울� 혼자만의� 일이� 아

니라�전체� � 교회가�해야�할�사명임을�시사해준다.

=====16:7� 이제는� 지나는� 길에� 너희� 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 바울은�고린도� 교회에� � 가려는�

또다른� 목적을� 제시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잠깐� 거쳐가는� 것으로� 만족하지� � 않고� 가능한�

한� 일정기간� 머물면서�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실제적으로� 해결하길� 원했다.� � 본문에서� '이제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르티'(*� )를� 해석함에� 있어�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다.� (1)� 혹자는� '아

르티'를� '팔린'(*,� '다시'),� � 혹은� '아르티팔린'(*� � � ,� '이제� 다시')으로� 해석하여� � 바울이� � 고린도�

교회를�방문한�사실이�두번째임을�주장한다(Reuss).� (2)혹자는� '아르티'를� 수사(數詞)로� 볼� 수� 없고� 단순한� 부사에� 불과하기에� 바울의� 두번째� 방문을� 증거해� 주지� 못한다고� 주장한다(Lenski,�

Godet).� 문맥상� 두번째� 견해가� 타당한� 듯하다.� 바울은� 전에� � 계획하기로는� 잠시� 들렀다� 가려는�

생각을� 했지만,� '이제는'생각이� 바뀌어� 고린도� 교회에� � 한� 동안� 머무르길� 원한다는� 것으로� 해석

할� 수� 있다.주께서� 만일� 허락하시면� -� 바울은� 주님의� 종이라는� 인식을� 항상� 갖고� 있다.� 본절에서

도� 바울은� 생각과� 뜻을� 고집하지� 않고� 그의� 삶과� 계획� 가운데� 간섭하시는� � 하나님의� 섭리를� 인

정하였다.� 그리고�자신을�주님께�드려� 하나님의�뜻을�이루도록�하였다.

=====16:8� 내가� 오순절까지�에베소에�유하려� 함은� -� 본� 구절을�통해� 사도� 바울이� � 본� � 서신을�

오순절이� 되기� 전,� 봄에� 쓴� 것임을� 알� 수� 있다(Robertson).� 바울이� 에베소에서� 오순절까지� 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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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 있으려� 하는� 이유는�복음을� 전할� 수� 있는� 많은� 기회들을� 가지려�했기� � 때문이다(행� 14:27;고

후� 2:12;골� 4:3).� 하지만� 예기치� 않게� 발생된� 데메드리오의� 소동으로� 바울은� 급하게� 에베소를�

떠나게�된다(행� 20:1).

=====16:9� 광대하고�공효를�이루는�문� -� '공효를�이루는'에� 해당하는�헬라어� '에네르게스'(*)는�

'활동적인',� '효과적인'이란� 의미이다.� 그리고� � '문'에� � 해당하는� 헬라어� '뒤라'(*� � )는� 주님께서�

널리� 사용한� 수사법� 가운데� 하나로서� � 제자들도� 일상적으로� 사용하였다(행� 14:27;고후� 2:12;골�

4:3;계� 3:8).� 이� 말이� 주는� � 뉘앙스는� 눈에� 보이는� 형상적인� '문'보다는� '기회',� '통로'를� 의미한

다.� 본절에서� � 이� � 말은� 비유로� 사용되어�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렸음을� �

뜻하는� � 것이다(Hodge).� � �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니라� -� 바울이� 정확히�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기�

어렵다.� � 다만� 행� 19장의� 내용으로� 보아� '대적자'가� 아데미� 여신을� 섬기는� 이교도들이었고,� 특히� �

아데미의� 은감실� 만드는� 것을� 생업으로� 하는� 데메드리오가� 주동하여� 소요를� � 일으켰으리라고� 짐

작할�수�있다.� �

=====16:10� � 디모데가� 이르거든� -� 바울은� 디모데를,� 고린도� 성(城)의� 재부� 담당� 에라스도와� �함께,� 마게도냐를� 거쳐� � 고린도� � 교회로� � 가서� � 바울의� � 방문을� � 준비하도록� � 보냈다(행�

19:22).� 디모데의� 임무는� 고린도� 교회에� 발생한� 분쟁을� 바로잡는� 것이었다.� 당시에� 고린도� 교회

는� 헬라� 철학의� 영향이� 만연되어� 있었고� 항구� 도시라는� 특성� 때문에� � 세상의� 헛된� 지혜가� 팽배

해� 있었다.� 이에� 바울은� 데모데를� 통해� 그리스도의� 참된� 지혜,� 곧�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도리를� 바르게� 가르치고자� 하였다.� 디모데가� 고린도� 교회를� 향해� 출발하고� 나서� 바울은� 여행� 계

획을� 바꾸어� 직접� 방문하는� 대신� 편지만을� 전했다.� 한편� 디모데는� 여러� 교회를� 들러� 고린도� 교

회로� 간데� 반해,� 바울이� 쓴� 편지는� � 해상도를� 통해� 직접� 고린도� 교회에� 전달되었기� 때문에� 디모

데보다� 훨씬� 빨리� 도착한� � 것� 같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바울은� 편지를� 통해� 자신이� 고린도� 교

회를� 방문하지� � 못하게� 되는� 경위와� 앞서� 보낸� 디모데를� 기쁘게� 영접해� 주기� 바란다고� 당부하고�

있다.� � � 두려움이� 없이� -� 디모데는� 이� 때에� � 비교적� � 젊고� � 경험이� � 적은� � 목회자였다(딤전�

4:12).� 이에� 반해� 고린도� 교회의� 분쟁은� 매우� 심각해져서� 디모데가� 지닌� 부담은� � 더욱� 무거워졌

다(Lenski).� 오만한� 궤변가와� 논쟁적인� 분파주의자들이� 연소(年少)한� � 디모데를� 위협하거나� 조롱하여� 그가� 임무를� 감당하면서� 지극히� 어려움을� 겪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바울은� 특별한� 배려

로� 고린도� 교회에� 권면한다.� 이는� 디모데가� 천성적으로� � 겁이� 많고� 소심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

고� � 볼� � 수도� � 있겠으나(Groscheide,� � De� � Wette,� Alford),� 디모데의� 소심함� 보다는� 연소함�

때문에� 바울이� 염려하는� 것이다(Meyer).� � 사실� 디모데는� 현재와� 같은� 어려운� 직무� 외에도,� 이후

에� 아시아� 전지역을� � 전도하는� � 데� 큰� 몫을� 담당할� 만큼� 대담하고� 능력있는� 인물이었다.따라서�

바울은� 디모데가� 소심하고� 유약해서라기보다는� 디모데가� 연소하다는� 빌미로� 그가� 전하는� 복음까

지도� 그릇되게� 받아들여질까봐� 이를� 경계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Lenski).� � � 저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니라� -� 디모데는� 바울의� 동역자� � 중에서도�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였던�

인물이었다.� 디모데만큼� 바울과� 가까운� 사람도� 없었고� 바울의� 칭찬을� 들은� 사람도� 없었다.� 아볼

로나� 디도가� 독자적으로� 사역하였던� 것에� 반해� 디모데는� 바울과� 함께� 평생을� 동역(同役)하였다.�디모데는�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해� � 헌신적으로� 사역한� 자로서(롬� 16:21;빌� 2:20ff.)� 바울이� 고

린도�교회에�보낼�수�있는� 가장� 적합한�사람임에�분명하다.

=====16:11� � 그러므로� 누구든지� 저를� 멸시하지� 말고� -� 바울는� 자신의� 젊은� 동역자� 디모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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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하여�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그의� 연소함과� 겸손함을� 무시하거나� 멸시하지� 말라고� 권면한다.�

'멸시하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여수데네오'(*� � � )는� �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대하다',� '고려할� 가

치가� 없는� 것으로� � 삼다'라는� � 뜻이다(Kittel).� 바울이� 디모데를� 위하여� 이처럼� 고린도� 교회성도

들에게� 권면하는� 이유는� 바울� � 자신이� 겪었던� 고린도인들의� 특성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바울이� 이러한� 권면을� � 고린도� 교회� 전체� 성도들에게�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회중� 가운데� 몇몇�

사람들을� � 염두에� 두어� 그들이� 디모데를� 함부로� 대할까� 염려하며� 권면하는� 것이다(Lenski).� � � 평

안히� 보내어� 내게로� 오게� 하라� -� '평안히� 보내어'에� 해당하는� 헬라어� � '프로펨프� 사텐� 엔� 에이레

네'(*)는� � 단순히� � 관용적인� 작별인사가� 아니다(Edwards).� 문맥상으로� 보면� 이� 말은� '아무런� 근

심이� 없거나� 두려움이� 없게� 하라'는� 소극적인� 권면이라기� 보다는� '위협하지� 말고� 멸시하지� 말라'

는� � 것으로� 강조적이고� 적극적인� 의미로� 사용� 되었다.� 바울이�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디

모데의� 임무가� 순조롭게� 진행되어� 그가� 떠날때에는� 어떠한� 문제나� 분쟁이� � 없이� � 모든� 일이� 원

만하게� 해결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Lenski).� � � 나는� 저가� 형제들과� 함께� 오기를� 기다리노라� -�

본구절은�자주� 논쟁이�되는� � 부분이다.� 즉� '저가� 형제들과�함께�오기를'에� 해당하는�헬라어� '에크

테코마이� � 가르� � 아우톤� 메타� 톤� 아델폰'(*� � )에서� '메타� 톤� 아델폰'('형제들과� 함께')이� '아우톤

'('저를')을� 수식하는지� 아니면� '에크� 테크� 마이'('오기를')를� 수식하는지에� 대한� 계속되는� 논란이�

있어왔다.� 만약� 전자의� 견해를� 따라� 해석하면� '바울이� 형제들과� 함께� 디모데를� 기다린다'는� 의미

이다.� 이러한� 해석상의� 문제가� 명확하게� 해결되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은� � 해석이� 지배

적이다.� 즉� 헬라어� 어법상� 위치하고� 있는� 그대로의� 순서를� 우선적으로� � 따르는� 방법으로� '아우톤

'과� '메타� 톤� 아델폰'을� 연결시켜� '형제들과� 함께� 한� � 디모데를'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Lenski).�

물론� 여기서� '형제들'이라고� 지칭된� 사람들은� � 에라스도를� 비롯하여� 고린도� 교회의� 몇몇� 사람을�

가리킨다.

=====16:12� � 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 -� '대하여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리� 데'(*� � )는� 고린

도로부터� 보내온� 질문에� 대해� 설명하는� 상용구로서� � 본서에서� � 마지막으로� 나타난다

(7:1,25;8:1;12:1;16:1).� 본절의� 답변으로� 미루어� 보아� 아볼로가� � 고린도에서� 적지� 않은� 존경을�

받은� 듯하고,� 그리하여� 고린도� 교인들이� 아볼로를� 초청한것� 같다.� � � 저더러� 형제들과� 함께� 너희

에게� 가라고� 내가� 많이� 권하되� -� � '권하되'에� � 해당하는� 헬라어� '파레칼레사'(*� )는� 원래� '간청하

다',� '호소하다',� '초대하다'라는� 의미이며� 본절에서는� '권고(勸告)'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바울이�아볼로에게� 고린도� 교회에� 가길� 권유함에� 있어서� 이� 단어를� 모르고� 사용하고� 있는점으로� � 미루

어� 바울과� 아볼로가� 경쟁적이거나� 명령적인� 관계가�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 � 지금은� 갈� 뜻이�

일절� 없으나� 기회가� 있으면� 가리라� -� 아볼로가� 고린도� 교회에� 가지� 않는� 이유에� 대하여� 혹자는�

당시� 고린도� 교회가� 바울과,� 아볼로파,� 베드로파로� 나뉘어� 분쟁이� � 성하였기에� � 자신도� � 연루된� �

점을� � 고려하여� � 가기를� � 꺼려했다고� � 추정한다(Montefiore).� 하지만� 이러한� 추정은� 가설에� 불

과할� 뿐� 사실을� � 증명할� � 근거는� � 없다(Barrett).� 실제로�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아도� 아볼로가� 고

린도� 교회에� 가지� 못하는� 직접적인� 이유는� 당파� 싸움때문이라기보다는� 시간적� 여유가� 없기때문

이다.� 왜냐하면� '기회가� 있으면'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카이레세'(*)는� 동사� � '유카이레오'(*)에서�

온� 것으로� '시간이� 있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와� 같이� 번역한다면� '시간이�

있다'는� 의미로� '스콜라조'(*� � )라는� 더� 분명한� 뜻의� 단어가� 있는데� 왜� 바울이� 이� 단어를� 안쓰고�

다른� 단어를� � 사용했는가� 하는� 질문을� 할� 수� 있다.바울이� 그렇게� 한� 이유는� '스콜라조'라는� 헬라

어가� 바울� 당시에는� 쓰이지� 않았고� A.D.� 2C� 이후� 유세비우스� 때에야� 비로소� 쓰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로서는� � 부득불� '유카이레오'라는� � 단어로� � 두� � 의미를� � 모두� � 전하는� �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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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 � 없었다(Edwards,� Kittel).�

=====16:13� 깨어�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그레고레이터'(*� � )는� 현재� 명령형으로� 일시적인�

행동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상태를� 유지하라는� � 의미이다.� 이� 단어는� 예수께서� 세상

의� 끝날에� 있을� 징조를� 설명하면서� 사용하신� 바� � 있다(마� 24:42;25:13).믿음에� 굳게� 서서� -� '굳

게� 서서'의� 헬라어� '스테케테'(*� � � )는� � '흔들림� 없는',� '확실한',� '의심없는'� 등의� 의미로� 본절에

서는� 믿음의� 상태가� 견고함을� � 가리킨다.� 한편� '믿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테이'(*� )는� 그리

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역사적인� 객관적� 사실로� 인정한다는� 것(fides� quae� creditur)과� 역

사적� 사실에� 의거하여� 주관적� 진리로� 확신하는� 것(fides� que� � creditur)을� � 가리킨다.� 그러므로�

바울이� 고린도� 교인에게� 권면한� 내용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깊이� � 이해하고� 그� 위에� 든든히� 서

라는� 것이다(Lenski).� � �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 '남자답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안드리제스데'(*� )

는� '성인� 남자'� 혹은� '남편'을� 가리키는� 헬라어� '아네르'(*� � )에서� 온� 말로� 때로는� 힘의� 상징으로

서의� 남성을� 가리키기도� 했다(TDNT).� 이� 단어는� 부사처럼� 번역되었으나� 동사로� '남자다워라'는�

의미이며� 본절에서는� 동사로� 신앙을� 지키는� 것을� '남성다움',� 또한� '강건함'과� 연관짓는다.� '강건

하여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 '크라타이우스데'(*)는� 수동태� 명령형으로� � 그리스도인이� � 갖는� 신

앙의� 힘이� 타고난� 육체적인� 힘과는� 달리�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영적인� 것임을� 보여준다(Morris).� �

=====16:14� � 사랑으로� 행하라� -� '사랑으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아가페'(*� � � )는� '사랑을�

가지고'(with� charity)로� 번역하기보다는� '사랑안에서'(in� love)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

다.� 왜냐하면� 전치사� '엔'(*� � )이� '도구'� 혹은� '기구'의� 용법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본절에서는� '범

위'를� 나타내기� 때문이다(Lenski,� Morris).�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사랑은� 그들의� 행동을� 위

한� 부수적인� 수단이� 아니라� 행동� 그� 자체이어야� 한다.� 바울이� 마지막� 권면에서� 이� 말을� 사용하

는�것은�사랑을�최고의�것으로�본�동시에�최종적인�열매로�간주했기�때문이다.�

=====16:15�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 스데바야의� 회심은� 바울이� 아덴에� � 복

음을� 전했을� 때�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행� 17:34).� 행� 17:34의� 누가의� 기록이� 스데바나의� 회

심을�뒷받침해주고�있다면�본절과�지명의�차이의�보이는�문제가�생기지만,� � 본절에서는�스데바나�

개인만을� 언급하지� 않고� 그의� 가족� 전체를� 가리켜� 아가야의� 첫열매로� 지칭한다고� 보면� 이� 문제

는� 해결된다.� '집'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키안'(*� )은� 라틴어의� '파밀리아'(familia)와� 마찬가지

로� '가족들'뿐만� 아니라� � '노예들'까지도� 포함하였다(Boice).� 따라서� 스데바나가� 아덴에서� 회심한�

이후에� 아가야에� 돌아와� 그의� 가족들을� 모두� 회심시켰다고� 볼� 수� 있다.� � � 성도� 섬기기로� -� 바울

이� 보다� 구체적인� 언급은� 하지� 않기� 때문에� 스데바나의� � 가족이� 어떤� 종류의� 봉사를� 했는지� 알�

수는� 없다.� 학자들의� 견해를� 따르면� 둘로� � 나눌� � 수� 있다.� (1)혹자는� 병든� 자나� 가난한� 자를� 돕

는� 일,� 자기� 집을� 집회장소로� 내어� 놓는� 일�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Godet).� (2)혹자는� 스데

바나가� 예루살렘� 성도들을� 돕는� 일에� 많은� 연보로� 봉사했다고� 본다(Edwards,� Hofmann).� 이상

의� 견해들� 가운데� (1)의� � 견해가� 보다� 더� 옳은것� 같다.� 왜냐하면� (2)의� 견해를� 따르면� 스데바나

가� 연보를� � 시작한� 것은� 바울이� 연보에� 대해� 가르친� 시기보다� 훨씬� 이전에� 이미� 행했다는� 뜻이�

되는데�연보를�시작한�것이�시기상�그렇게�이르다고�볼� 수� 없기� 때문이다.� � � 작정한�줄을�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태산� 헤아우투스'(*)는� '스스로를� 준비시켰다'라는� 의미로� 스데바나의� 가정이�

자발적이고도� � 헌신적으로�봉사했음을�보여준다.� 이� 사실은�또한� 그들이�교회에서�섬기는�직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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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출(選出)되지도�않았음을�추측케한다(Morris).

=====16:16� 복종하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 '휘포탓세스데'(*� )는� '휘포탓소'(*� � )의� 명령

형으로� '휘포탓소'가� 능동태일� 경우에는� � '밑에� 두다',� '밑에� 첨부하다'등의� 의미이지만� 본절처럼�

중간태로� 쓰이면� '자신을� 복종시키다',� '주(主)로� 인식하다'(acknowledge� as� lord)등의� 의미로�쓰인다.� � 본절에서� � 이� 단어는� 스데바나의� 가족들이� 보여주는� 자발적인� 순종을� 본받아� 자신들을�

낯춰� � 교회와� 성도를� 섬기기에� 힘쓰라는� 의미이다.� 바울이� 서신의� 끝부분에서� 이렇게� 권면하는�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나이나� 경험이� 비슷한� 사람들을� 존경하는� 일을� 천성적으로� � 못하였기� 때

문이다.� 고린도� 교인의� 이러한� 결점은� 바울의� 서신보다� 약� 35년� 늦게� 보내어진� 로마의� 클레멘트

(Clement� of� Rome)� 서신에도�나타난다(Godet).

=====16:17� 브드나도와� 아가이고� -� 이들은� 신약성경에서� 본절에만� 등장한다.� 브드나도는� � 바

울의�편지가�있은� 지� 약� 35년� 뒤에� 기록된�로마의�클렌멘트의�편지에는�종종�등장하지만�동일인

이라� 볼�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시에� 이런� 이름은� 흔한� 이름이었고,� 시간적으로도� 차이가� 많이� 나

기� 때문이다.� 아가이고는� 다른� 곳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브드나도와� 아가이고는� 노예였거나�

노예� 출신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혹자는� 그들이� 스데바나의� 노예였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하

고(Godet,� Grosheide),� 혹자는� 1:11을� 근거로� � 하여� 글로에의� 종들이었다고� 추정한다

(Edwards,� Lenski).� 이� 견해들� 가운데� � 어느� � 것이� 정확한지는� 분명치� 않다.� � � 너희의� 부족한�

것� -� '너희의'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메테론'(*� � )은� 공인� 본문을� 비롯하여� 오래된� 사본들(P,,� A)

에서는� � '휘몬'(*� � � )으로� 되어� 있지만� 이들은�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부족한� 것'에� 해당하는� '

휘스테레마'(*)는� 적은� 재산을� 가리키기도� 하고(막� 12:44)� 물질적� 궁핍을�의미하기도� � 한다(고후�

8:14).� 또한� 믿음의� 교훈이� 부족하다는� 것(살전� 3:10)과� 사랑을� 나눔이� �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

하기도� 한다(빌� 4:10ff).� 본절에서는� 물질적인� 부족함보다는� � 사랑의� � 나눔의� 부족함을� 가리킨

다.�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는� 고린도� 교인들을� � 행한� 바울의� 충고와� 애정을� 대신� 전해�

주었고� 또한� 바울에게도� 그를� 향한� 고린도� � 교인들의� 애정을� 전해줌으로� 바울에게� 큰� 기쁨을� 가

져다� 주었다.� 지금은� 고린도� 교인들과� � 떨어져� 있는� 바울에게� 그들� 세� 사람이� 고린도� 교회의� 소

식을�가지고�온� 것이다.

=====16:18� � 마음을� 시원케� 하였으니� -� '마음'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프뉴마'(*� � )로� 바울이�

여기에� '프쉬케'(*� � )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 스데바나와� 함께� 온� 형제들이� 바울과� 고

린도� 교인들에게� 시원함을� 준� 것은� 단지� 감정상의� � 위로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하는� 영혼에

까지�영향을�끼쳐� � 참안위를� � 주었음을� � 가리킨다(Godet).

=====16:19� � 아시아의� 교회들� -� 바울이� 말하는� '아시아'는� 현재의� 터어키� 지역에� 위치한� 당시

의� 로마령� 아시아를� 가리킨다.� 바울이� 본� 서신을� 쓴� 장소는� 에베소였으나� 아시아의� � 교회라고�

표현하고� 있다.� 에베소가� 소아시아에� 속해� 있기는� 하나� 아시아� 지역에는� � 라오디게아,� 골로새,�

히에라볼리(골� 4:13)도� 있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 바울이� � 본절에서� 아시아� 전교회를� 대표해

서� 인사를� 할� 수� 있는� 근거에� 대한� 견해들이� 있다.� � (1)� � 비록� 바울이� 소아시아� 전지역을� 가보

지는� 않았지만� 그� 지역의� 교회� 대표들과� 교제를� 나누고� 있었기에� 그들을� 대표하여� 인사했다는�

견해이다(Grosheide,� Lenski).� (2)� 에베소가� 소아시아� 지역의� 수도이고� 에베소� 교회는� 그� 지역�

전체를� 관할하는� 교회이기에� 대표성을� 띠고� 인사했다는� 견해이다(Godet,� Edwards,� Robert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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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ummer).� 이상의� � 두� � 견해는� 모두� 타당성을� 갖는다.� 본� 구절은� 바울이� 에베소에� 있으면서도�

가까이� 있는� 모든� 아시아의� 모든� 지역� 교회들을� 염두에� 두고� 사역하였음을� 보여준다.� � � 아굴라

와�브리스가� -� 이둘은�부부로서�아굴라가� � 남편이고� � 브리스가가� � 아내이다.� '브리스가'(*� ,� 프리

스카)는� 헬라어� 표현이고� 라틴어� 표현으로는� '브리스길라'(*� � � ,� 프리스킬라)였다.� 그들은� 고린도�

교회를� 세울때�많은� 도움을� 주었고(행� 18:2)바울과�함께� 고린도를�떠나(행� 18:18)� 에베소에� � 머

물러� � 있었을� 것이다(Boice).� 또한� 그들은� 신앙의� 깊이가� 있어서� 아볼로와� 같은� 사람을� � 가르치

기도� 하였다(행� 18:26).� 한� 가지� 흥미있는� 사실은� 이들� 부부에� 대한� 기록이� 신약성경에� 6번� 정

도� 나오는데� 4번이나� 아내인� 브리스가의� 이름이� 먼저� 나온다는� 점이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신

앙� 생활에�있어서�남편� 아굴라보다�아내인�브리스가가�더� 열심히였던�것으로�추측된다(Morris).

=====16:20� �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번역된� 헬라어� '필

레마티� 하기오'(*� � � )는� 동양사람들에게� 있어서� � 화합,� � 애정,� 존경의� 표시로� 이마나� 볼에� 입맞

추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미의� 말씀이� 신약� 성경의� 서신서에� 많이� 나오고� 있다(롬� 16:16;고후�

13:11;살전� 5:26;벧전� 5:14).� � 하지만� � '입맞춤'이� 단순히� 동양의� 문화� 양식만을� 따른� 의미로서�

행해진�것은� 아니다.� 그것보다� � 더� 깊고� 분명한� 의미가�있었다.� 적어도�초대� 교회에서�이� 의식이�

행해지는� 데는� 세� � 가지� 의미가� 있었다.� (1)� '평화'의� 표시로�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막혔던� 담이�

허물어지고�화해가�이루어졌듯이� � 교회와�교회,� 신자와�신자� 사이에�그리스도로�말미암아�평화가�

이루어졌다는� 의미이다(Edwards).� (2)� '하나됨'의� 표시로� 이제까지� � 복음을� � 받아들이지� 못한�

외인이나,� 혹은� 비록� 복음을� 받아들였다� 할지라도� 배도한� 형제들에� 대하여� � 그들의� 회개에� 따라�

한� 형제로� 받아들임을� 다시금� 허락하는� 표시였다(Lenski).� (3)� '부활'의� 표시로� 그리스도께서� 부

활하심을�상기하여�굳세게�믿음을�지켜� 나가자는�격려의�표시였다(Robertson,� Plummer).

=====16:21� 친필로� -� 바울은� 보통� 자신의� 편지를� 구술하여� 대필자로� 하여금� 적게� 한� 것이� 대

부분이다(롬� 16:22).� 하지만� 맨� 마지막� 문구나� � 인사말은� � 친히� � 바울이� � 기록하였다(갈5:11;골�

4:18;살후� 3:17).� 바울이� 이렇게� 한� 이유는� 이� 편지가� 바울� 자신의� 것임을� 확인시키기� 위함이었

다(Robertson,� Plummer,� Edwards).

=====16:22�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 바울은� � '주님을� � 사랑하는� � 것'

과� '저주'를� 대비시켜� 주님께� 대한� 사랑이� 필수적임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저주'에� �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데마'(*)는� 어떤� 사건과�관련있는�사람이� � '하나님의�노여움� 아래� 맡겨진� 것'을� 의미

한다(Boice).� 본절에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 가르치는� 바는� 주님께� 대한� 사랑도� 없이� 자기� 생

각과� 행동을� 고집하는� 사람들에게� � 주의� 공의로운� 심판이� 임할� 것임을� 경고하는� 것이다(Lenski,�

Edwards).� � �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 바울은� '저주'에� 이어� 곧바로� '소망'의� 말을� 잇는다.� 본� 구

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라나� 다'(*� )는� 아랍어� '마라나� 타'(*� � )의� 음역이며� 어떤� 사본에서는� '

마란� 아다'(*� � )로� 되어� 있는데� 이는� 아랍어� '마란� 아타'(*)의� 음역이다.� 양자는� 시제� 상의� 차이

를� 보이는데,� 전자의� 경우� '우리� 주님이시여� 오시옵소서'(our� Lord,� Come!)라고� � 번역할� 수� 있

고,� 후자의� 경우는� '우리� 주님께서� 오셨다'(our� Lord� has� come)라고� 번역할� 수� 있다

(Chrysostom).� 계� 22:20에� 나오는�헬라어�번역� '에르쿠퀴리에'(*� � � ,� '오소서�주여')는� 명령형으

로�전자의� 경우에�해당한다.� 본절에서는�두가지�해석이�모두� 가능한데�전자의� 경우는�그리스도의�

재림에� 역점을� 둔� 것이고,� 후자의� 경우는� 그리스도의� 초림에� 역점을� 둔� 것이다.� 여기서� 후자의�

표기를� 따라� 완료형으로� � 해석하면� 그리스도께서� 이미� 심판을� 담당하러� � 오셨다는� � 사실을� � 담

Page 132: 고린도전서제1장 - christianmonitor.netchristianmonitor.net/jusuk/corin01.pdf · 주님의종말(終末)에관한말씀(마24:30,34)에근거한것이다.초대교회의모든성도들은가능

고� � 있고� � 예언적� � 과거(prophetic� past)의� 용법으로서� 미래적� 사건을� 과거시제로� 표현하고� 있

다고� 볼� 수� � 있다.� 또한� 명령형으로� 사용된� 경우는� 주의� 재림을� 촉구하는� 의미로� 모든� 분쟁과�

불의를�종식(終熄)시켜� 고난을�없애주실�것을�소원하는�의미가�된다(Godet,� Lenski).

=====16:23� �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 '은혜'의� 헬라어� '카리스'(*)는�

아무런� 공로없이� 주어진� 주님의� 선물을� 가리킨다.� 바울이� 이� 문구로� 고린도� 교회에� 문안인사를�

끝맺는� 것은� 고후� 13:13에서도� 나타난다.� 본절에서는� 고린도� 교인들의� 미숙한� 신앙행동들이� 있

긴� 하지만� 그럼에도� 고린도� 교회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1:4)가� 더욱� 깊어지고� 속되길� 소원하는�

바울의�심정이�잘�드러난다.�

=====16:24� �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 -� '그리스도� 예

수의� 안에서'에� 해당하는� '엔� 크리스토� 예수'(*� � � '� � )가� '나의� 사랑'(*� � ,� 헤� 아가페� 무)을� 수식

하여� '그리스도� 예수� � 안에� � 있는� 나의� 사랑'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지만,� '너희� 무리와� 함께'(*� ,�

메타� 판톤� 휘몬)를� 수식한다고� 보아�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 너희� � 무리'라고� 할� 수도� 있다.�

헬라어� 본문에� 의하면� 후자의� 경우가� 더� 타당하나,� 의미상� '엔� 크리스토� 예수'는� 문장� 전체를� 수

식한다고� 보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 � 이는� � 헬라어� 구분상으로서가� 아니라� 의미상으로� 볼� 때�

본서� 전체에까지� 적용된다고� 볼� � 수도� � 있기� 때문이다(Barrett).� 바울은� 본서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기록하였고,� 그리스도의� � 사랑으로� 말미암은� 자신의� 사랑을� 모든� 성도에게� 쏟고� 있음을� �

명백히� � 보여준다.� � 한편� '너희� 무리'(*� � � ,� 판톤� 휘몬)라는� 표현을� 통해� 바울은� 그를� � 대적하고�

따르지�않는� 모든�교인들에게도�동일하게�사랑을�전하고�있음을� � 알� � 수� � 있다(Mor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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