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AGAZINE OF THE KOREAN SOCIETY OF CIVIL ENGINE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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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매일 접하는 뉴스에 과연 역사의 개념
이 존재하는 것일까. 텔레비전과 신문 보도를
보면 결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오늘 일어난 사
건과 사고는 어제의 것과 다를 바 없음에도 언
론은 마치 그 일을 난생 처음 경험한 것처럼 사
건의 갈등에만 집중해 최대한 선정적으로 다룬
다. 오랜 시간에 걸쳐 비슷한 패턴으로 발생하
는 사건의 보도에서조차 어떤 역사적 성찰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하루 24시간동안 쉬지
않고 ‘지금’, ‘여기’에 해당되는 일에 매달리는
것이 뉴스라고 정의할 수 있을 정도로 뉴스는
역사에 무관심하다. 분명 의도적인 기억상실이
다. 이는 다양한 변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현재와 비교해봤을 때 과거가 경제적으로 덜
가치 있는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나타난 결
과일 것이다. 결국 과거에 대한 의미 있는 비평
이나 숙고가 결핍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제는 뉴스만 과거를 폐기하고 있는 것이 아
니라는 점이다. 거의 모든 예술의 영역에서 과
거는 이제 망각의 시간으로 처리되고 대신 지
속적인 ‘현재’만을 나열하는 모습이 뉴스를 닮
아 있다. 문화 자체가 깊이를 상실하고 표피적
감각에 호소하고 있는 것도 저널리즘의 센세이
셔널리즘 추구와 다르지 않다. 과거에는 기억
이 특정한 향토적 맥락에서 고유한 개인의 경
험으로 남아 있었다면 오늘의 시대적 맥락에
서 역사적 기억은 영화나 TV 드라마에 의해 발
굴되고 수정되는 방식으로 불특정 다수에게 전
파, 소비되다 보니 역사의 인공적 요소가 더욱
더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Jameson 1990). 이
상황에서 역사가 부정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역사를 구축하는 대서사가 붕괴되고 이데올로
기 또한 존재의 이유가 소멸된다. 과거를 대신
한 현재와 환상적 미래만이 유일한 관심사인
것이다.
경험에 기댄 기억이 사라지고 실제 과거가 다
양한 매체의 시뮬레이션으로 대체되는 현실
은 안정적인 지역사회의 와해와 문화적 정체
성의 파편화를 지시하는 일종의 징후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뿌리 뽑힌 정체성의 한편에 기
억의 위기가 자리 잡고 있고 그 위기는 동시
에 현실과 환상의 끝없는 갈등으로 진행된
다. 이 과정에서 흥미로운 대목은 시대가 망각
한 과거를 몸이 기억하고 있다는 점이다. 몸은
110 │ CULTURE & ART Ⅱ │ 영화이야기
<살인자의 기억법>과 기억의 위기<Memoir Of a Murderer> and Memory Crisis조 흡 | Heup Cho | 동국대학교 영상대학원 교수
제65권 제12호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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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운반체로서 ‘새김’(inscribing)과 ‘합
체’(incorporating) 라는 두 가지 사회적 실천
의 저장고인 것이다(Connerton 1989). 새김
이 사진, 글쓰기, 녹음과 같은 정보를 저장하고
검색하는 행위라면 합체는 악수와 같이 숙련된
몸짓을 의미한다. 이런 합체 행위는 무의식적
으로 수행되지만 간접적으로 전달되는 새김 행
위와 비교했을 때 기억을 유지하는데 더 정통
성이 있다는 것이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기억된 정체성과 경험이
과연 현실을 근거로 구축된 것인지 아니면 환
상의 산물인지의 물음에 스릴러를 더한 영화
다. 주인공인 동물병원 원장 김병수(설경구)는
연쇄살인자이자 알츠하이머 환자인 까닭에 실
제와 망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설정으로는 제격
이다. 영화는 기억이 처한 위기를 극단으로 몰
고 가면서 관객의 관심을 지속적으로 소구하
고 있다. 김영하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영화지
만 소설과는 많이 다르게 이야기가 진행된다.
소설이 현대사회에서 기억이 차지하는 의미와
무게가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면 영화는 전통적
인 장르 법칙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영화가 소
설과 달리 보다 뚜렷한 갈등구조를 제시하면서
그 갈등이 해소될 클라이맥스에 집중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소설의 대반전을 영화도
마지막에 시도하지만 그리 효과적이진 않다.
그러나 보다 직설적으로 대립적 관계가 전개되
는 대중오락 영화에서 기억의 위기를 소설에서
보다 좀 더 분명하게 읽어낼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원전에서 병수가 연쇄살인자가 되는 동
기는 명확하지 않다. 술에 취해 가족에게 습관
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를 가족의 도움
을 받아 살해한다는 첫 경험이 명시됐을 뿐 이
후 계속되는 살인 행위는 오로지 쾌감을 만끽
하기 위한 습관에 불과한 것으로 전개된다. 반
면 영화에서도 아버지 살해의 동기는 동일하지
만 이후 그가 저지른 살인은 사회적으로 바람
직하지 못한 인간들을 처리하는 것으로 설정함
으로써 가정을 비롯한 여러 사회제도가 서서히
붕괴되고 있음을 대중이 공감할 수 있는 방식
으로 암시하고 있다. 이런 장르적 문법이 소설
과 비교하면 다소 ‘낮은’ 차원의 기법이지만 문
제의식만큼은 명쾌하게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사회제도의 핵심인 가정의 해체는, 그것도 아
버지를 살인함으로써 가정을 파괴하는 행위는
병수가 장래 쌓을 수 있는 모든 사회적 경험의
준거 틀을 상실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이 경험들을 기억하기보다 망각하는 것이 그의
심리적 안정에 보탬이 될 수 있음을 쉽게 유추
해볼 수 있다. 병수가 굳이 알츠하이머병을 앓
고 있지 않아도 악몽 같은 경험은 억압된 기억
으로 감춰둘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소설
에서 재현된 무차별적 살인행위가 충분히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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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위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지
만, 영화에서는 그 살인의 대상을 죽어 마땅한
인물들로 분명하게 제시하면서 제도의 붕괴와
기억의 위기 둘 사이의 상관관계를 직접적으
로 설정하고 있다. 여기서 읽히는 메시지는 아
마도 기억하고 싶은 경험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제도의 안정이 중요하다는 점일 것이다.
연쇄살인자가 자신의 딸을 과보호한다는 설정
이 얼핏 모순적으로 보이지만 병수에게 딸 은
희(설현)를 지키는 일은 자신이 가장 절실히 원
했던 것을 딸과 함께 실현하고 싶은 환상적 결
과라는 점에서 이해가 된다. 실제로 소설에서
는 은희가 그의 딸이 아니라 자신의 치매를 돌
보는 사회봉사자인 것으로 뒤집히지만, 영화
에서는 이런 반전을 되풀이하는 대신 병수에게
극진히 대하는 자상한 딸로 제시된다. 병수가
딸을 지키겠다는 마음이 강해질수록 갑자기 나
타난 그녀의 애인 민태주(김남길)에 대한 그의
적개심은 강화된다. 태주는 현직 경찰이다. 이
전에 안개 속에서 그의 차를 들이받는 사고로
이미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 병수는 그가 자신
과 마찬가지로 연쇄살인자임을 직감한다. 병수
는 17년 전 사고로 살인을 멈췄지만 딸을 보호
하기 위해 이제 다시 살인을 감행하게 된다.
알츠하이머병이라는 직접적인 원인으로 그리
고 가정의 해체라는 간접적 요인에 의해 기억
의 위기를 맞은 병수가 또다시 살인의 유혹에
빠진 것은 그의 과거가 여전히 자신의 몸에 흔
적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병적인 살인 욕구
가 병수의 의식을 떠나 있을지 몰라도 몸에 배
어있는 잠재적인 살인의 기술까지 떨치진 못했
던 것이다. 그의 말대로 기억은 사라질지 몰라
도 자신의 손이 살인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
다. 기억에 관한 병수의 이런 깨달음은 그가 녹
음과 글쓰기의 새김 행위로 자신의 기억을 유
지하려고 부단히 노력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참고자료
1Connerton, Paul. How Societies Remember,
Cambridge Univ. Press, 2007(1989).
2 Jameson, Fredric. ‘Postmodernism and
Consumer Society’, in E. Ann Kaplan (ed.),
Postmodernism and Its Discontents, Verso,
1990.
그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부질없
는 짓이 되어버리고 마는 대목에서 확인된다.
결국 그에게 남겨진 것은 몸의 기억, 즉 살인의
기술이 자신의 몸에 합체된 기억의 침전이다.
합체가 새김보다 훨씬 윗길의 기억인 것이다.
그러나 기억이 몸으로만 유지됐을 때 혼돈은
불가피하다. 영화에서 병수가 끝까지 망상에
시달리듯이 몸으로 전달된 기억이 위기를 해소
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몸의 속성이 쾌락과 저
항과 자유의 영역일 수 있지만, 몸은 동시에 통
제와 구속과 억압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병수
가 몸으로 기억한 것이 살인의 기술이라면 그
리고 기꺼이 딸을 위해 그 기술을 사용하겠다
면 그는 여전히 과거의 트라우마에 갇혀 있어
이를 극복하고 회복하여 변화될 가능성이 희박
한 것이다. 병수는 결국 과거와의 화해가 불가
능할 수밖에 없고 억압된 기억의 포로에서 벗
어나기 어려운 것이다. 과거와 단절된 현대 사
회에서 그나마 몸으로 전달된 과거에 대한 기
억이 병수의 경우처럼 부정적일 때 역사와 전
통에 내재한 가치는 외면될 가능성이 높다. 판
타지가 과거를 대신하는 기억의 위기가 도래한
것이다.
WRITER INTRODUCTION
조 흡 교수는 미국 위스콘신-메디슨 대
학에서 커뮤니케이션과 문화연구를 전
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서강대
언론대학원 대우교수를 거쳐 현재 동국
대학교 영상대학원 교수로 재직하고 있
다. 대중문화를 중심으로 한 문화 사회
학과 문화정치가 주된 연구관 심사이며 MBC 프로그램 자
문위 원과 EBS 이사를 역임했다.
기획│사무국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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