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션후기의 인물 - memory.library.kr · 1624년(인조 2)에 일어난 이괄의 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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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션후기의 인물

  • 안주성 전투의 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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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장면 목리에서 태어나

    1627년(인조 5) 후금의 조선침략으로 일어난 정묘호란의 대표적인 격전지였

    던 안주성뤘li뼈 씨움에서 순절한 박명룡朴統 장군은 이천시 마장면 사람이

    다. 평안도 병마우후兵띄않채로 병마절도사 남이흥벼以멧 목사 김준金찮과 더불

    어 후금의 주력군에 맞서서 끝까지 성을 사수하다가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후일 조정에서는 장군의 공적을 기려 충신으로 정려하고 병조판서를 증직했

    으며, 충민썽愁이란 시호를 내렸다. 박명룡 장군의 출생지가 여주군 가남면이

    라는 설도 있으나, 이천시 마장면 목리에서 태어났으며, 묘소도 마장면 이치

    리에 었다. 행장기에도 그는 호법면 매곡리 출신인 박난영과 동향인이라 하였

    고, 부친과 조부등 선대의 묘소가 모두 원래부터 마장면 저명산 기숨에 있어

    온 사실로 미루어 이천 태생이 분명하다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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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朴光植(199이 「安州城 싸움과 朴命龍 장군J r설몽문호b 저13호, 이전문화원. 이하 박영룡의 가계와 안주성 전투에 관한 내용들은 위의 글을 잠고하였다.

    173

    박 명 료O

  • 174

    01 천 의 인

    박명룡의 본관은 죽산인데 죽산 박씨는 신라 54대 경명왕의 저14왕자인 박

    언립朴彦立을 시조1세로 하고 있다. 시조의 18세 손이 교하현감을 지낸 박도朴

    파인데 그의 묘가 양각산 서남쪽 기숨인 광주 노루목에 있다. 도가 일곱 아들

    을 두어 후손들이 번창하는데. 그중 삼형제가 각각 신둔면 수하리, 마장면 해

    윌리와 목리로 이주해 와서 터를 이룬다. 장군이 순절한 후, 외아들 박두환朴

    斗폈이 처가가 있는 여주군 가남면 일신동으로 이주함으로써 직계 후손들이

    이천을 떠나 가남면에 세거하게 되었다고 한다.

    박명룡은 1588년(선조 21) 교터}공 박도의 6세손인 박정호챔짧 증 호조판서의 3

    남1녀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장남 성룡成따의 자는 견백떠터, 차남 명룡

    은 자를 견숙없X이라 했으니 백이伯평 · 숙제總처럼 만고의 충신이 되라는 말

    인데, 그 돗처럼 두 형제가 나란히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게 된다. 명룡이 5

    세되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이듬해 부모가 연이어서 세상을 떠났다.

    어린 사남매가 전란 속에 부모를 잃고 갈 곳 없는 고아신세가 될 판이었으나,

    다행이도 집안에 충직한 노복이 있어 이들을 보살피고 양육하였다고 전한다.

    명룡은 어릴 때부터 무장의 자질을 타고나서 자라면서 말타기와 활쏘기, 병

    서를 익히고, 장성해서는 체구가 장대하고 기력이 출중하여 장부의 기풍이 있

    었다. 1608년(선조 41), 형 성룡이 먼저 무과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는데, 이때

    아우에게도 함께 과거보기를 권했다. 그런데 명룡이 보기에 자신까지 벼슬길

    로 나간다면 집에는 어린 동생만 남게되어 가사를 돌볼 사람이 없으므로 과거

    를 뒤로 미루었다고 한다. 드디어 1616년(광해군 8)에 무과급제하여 선전관이

    되고, 도총부도사, 조산만호造山파戶를 거쳐 소근진所규훨 수군첨절제사의 임무

    를 마치고 돌아 오던 도중 이란李造의 난을 만났다.

  • 후금과의 국제정세

    1624년(인조 2)에 일어난 이괄의 난은 인조반정이후 반정공신들 사이의 세력다

    툼과 불만이 원인이었다. 특히 논공행상에 대한 불만이 컸던 평안병사 이괄은

    귀성부사 한명련핸!띠따등을 포섭하고 군사를 조련하여 1만 명의 정예부대를 이

    끌고 순식간에 평양 이북의 여러 고을을 휩쓸고 나서 서울로 진격했다. 도원수

    장만짜n!\è과 부원수 이수일깎守一이 이끄는 토벌군이 황해도 저탄에서 반란군을

    맞아 격전을 벌렸으나 패뢰하였고, 반란군이 임진강을 건녔다는 소식을 들은 인

    조는급히 공주로 피신하여 한OJ=마저 어이없이 반군의 수중에 넘어가고 말았다.

    도성을 수중에 넣은 이괄은 기고만장하였지만 곧 반격에 나선 토별군에게 크

    게 패하고, 급히 한OJ=을 탈출하여 이천 묵방리띤혜민2)까지 도망쳐 왔다가 부하들

    손에 죽음을 당함으로서 난이 끝났다. 이괄의 난은 약 1개월에 걸친 단시일에

    끝났지만 왕이하 조정 신히들의 충격이 매우 컸으며 국력의 쇠진 또한 적지 않

    았다. 게다가 한명련의 아들 한윤을 비롯한 이괄의 잔당들이 몸을 피해 후금진

    영으로 투항하여 충동질을 해댐으로써 정묘호란을 촉발시키는 한 원인이 되었

    다. 이괄의 난 때 박명룡은 형과 함께 부원수 이수일을 도와 난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워, 원종공신原從功IE어l 녹훈되고 소절첨사겸 고부군수로 임명되었다.

    정묘호란은 중국대륙에서 명나라와 패권을 다투고 있던 신흥강국 후금이,

    명과 전통적인 선린국으로 후금의 배후에서 위협이 되고 있는 조선을 미리 굴

    복시키려는 의도에서 일어났다. 만주 일대에 흩어져 살고 있던 여진족은, 조

    선과 명이 임진왜란을 치르면서 국력이 쇠약해진 틈을 타서, 여러 부족틀이

    힘을 합쳐 누르하치를 칸(왕)으로 추대하고 1616년에 후금을 건국하였다. 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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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지금의 백사연 현방리이다.

    175

    바1 머O 료O

  • m-이천의인물

    주의 비옥한 영토를 두고 후금과 전쟁을 치르게된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구원

    군을 보내 준 전례에 따라 조선에게도 파병할 것을 요구해 왔다.

    당시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명의 쇠퇴와 신흥국 후금의 발흥이라는 대

    륙의 정세를 예의 주시하면서, 명분보다는 실리를 따르는 중립적 외교정책을

    펴나갔다. 그리하여 명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 강홍립姜弘立을 도원수로 1만3

    천여 명의 구원군을 파견하면서, 강홍립 등에게는 사태를 보아가면서 적절히

    대처하도록 비밀지령을 내렸던 것이다. 그 결과 강홍립은 후금과의 싸웅에서

    조 · 명 연합군이 대패하여 계속 수세에 물리게 되자 후금 진영으로 투항하여

    명의 요구에 따라서 할 수 없이 출병하였음을 해명하였다.

    그후 얼마동안 후금과 조선은 큰 마찰없이 평화를 유지하였으나, 1623년 인

    조반정이 성공하여 반정의 주역인 서인세력이 정권을 잡게 되자 상황이 달라졌

    다. 서인세력은광해군때의 대외정책을정면으로부정하고후금과의 관계를끊

    는 한편, 명과의 사대적 교린을 중시하는 친명배금정책으로 전환하였던 것이다.

    이 무렵 후금의 태조가 죽고 아들인 태종이 즉위했는데, 태종은 즉위 전부터

    조선에 대한 화친에 반대하고 주전론을 주장했던 인물이었다. 조선의 태도변

    화에 따라 배후로부터 위힘을 느끼게 되고, 계속된 전쟁으로 교역이 끊겨 극

    심한 물자부족에 허덕 이게 된 후금은, 마침내 1627년(인조 5) 1월, 3만명의 정

    예부대를 동원하여 조선을 침공해 왔다.

    정묘호란과 안주성 싸움

    정묘호란이 일어나기 전 고부군수로 있던 박명룡은, 북방 오랑캐들의 움직

  • 임이 심상치 않으니 자신을 북진으로 보내 달라고 여러번 상소하였다. 임금이

    이를 기특하게 여겨 전마 한 펼을 상으로 내리고, 평안도 병마우후로 임명하

    여, 병마절도사 남이흥의 휘하에서 북방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겼다. 병사 남

    이흥은 정유재란 때 부친이 노량해전에서 적탄에 맞아 전사한 것에 충격을 받

    아, 글공부를 포기하고 활쏘기, 말달리기에 전념하여 무장이 된 청렴 강직한

    인물이었다. 무과 급제하여 포도대장, 충청 · 경상도병마절도사, 안주목사 등

    을 지냈으며, 이괄의 난 때는 도원수 장만의 중군으로 공을 세우기도 했다.

    열음이 언 압록강을 건너 손쉽게 의주를 점령한 후금군은 용천 · 선천을 거

    쳐 능한산성마저 점령하고 안주성으로 진격해 왔다. 의주씨움에서 당시 귀성

    부사겸 청북방어사로 았던 형 성룡이 전사하였다. 안주성은 북방 오랑캐를 막

    는중요한요충지였으나 당시 안주성에는목사김준과우후박병룡이 거느린

    불과 수 백명의 관병이 주둔하고 있을 뿐이었다. 병사 남이홍이 급하게 수하

    장졸 3백명을 이끌고 달려오고, 강계부사 이상안李패安을 비롯한 개천 · 태

    천 · 명산 등 인근고을 수령들 역시 수하 군사틀을 이꿀고 달려 왔다. 그러나

    성안에는 병사와 일반 백성들까지 모두 합쳐 수 천명에 지나지 않았다.

    적군은 월등하게 많은 군시들로 성을 겹겹이 에워싸고 적진에 인질로 잡혀

    있던 강홍립과 박난영을 앞세워 항복할 것을 권유하였다. 남이흥 병사가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자 적은 이튿날인 1월21일 새벽부터 총공격을 감행하여 피아

    간에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다. 박명룡과 남이흥을 비롯한 장수틀은 군사들을

    독려하여 용전분투했지만, 중과부적으로 앞에서 넘어지면 뒤에서 잇달아 밀

    고들어오는적군의 기세를감당하기 어려웠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군의 형세는 점점 더 불리해 지고, 마침내 적병들이 물

    밀듯이 성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이것을 본 병사 남이흥과 목사 김준은 대세가

    177

    박 명 료O

  • 178

    01 천 의

    인 물

    이미 기울었음을 알고, 화약포대에 불을 붙여 폭발하는 화약과 함께 스스로 목

    숨을 끊고 말았다. 일찍이 김준이 안주목사로 부임해 와서 보니 국경을 방어해

    야 할 마땅한 군사조차 없는 실정이었다. 김준은 전란에 대비하여 승병 1천명을

    모집해서 정예군으로 조련하였으나 조정 중신들이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폐지

    하도록 영을 내렸다. 남이흥 병사도 죽기 전에 ‘조정에서 마음대로 군사를 훈련

    하고 기를 수 없게 한 것’ 이 한스럽다는 말을 남겼으니 당시 조정의 국방정책

    이란 것이 전쟁수행에는 아무 도움도 못되는 쓸데없는 간섭 뿐이었던 것이다.

    성이 적의 수중으로 넘어가서 승패가 이미 결정되었는데도, 박명룡 장군은

    얼마 남지않은 군사들을 독려하여 맹렬한 마지막 항전을 전개했다. 활을 들고

    무수히 활시위를 당겨 적을 쓰러트렸지만 화살마저 떨어지자 이번에는 육탄

    전을 전개하였다. 마침내 온 붐이 상처 투성이가 되어 기진맥진한 채 성위에

    서 숨을 거두니, 한창 일한 나이인 당년 40세 때였다. 충성스러운 수하 인물

    이 적이 물러간후 장군의 시신을 수습하여 이천까지 운구한 다음, 이치리 저

    명산 선영하에 정성껏 장사지냈다. 난이 끝난 뒤 인조는 그의 죽음을 애통히

    여겨 충신으로 정려하고 병조판서를 증직했으며 안주에 충민사忠댔패를 세워

    남이홍 · 김준과 함께 제향했다.

    후금군의 세력이 황해도까지 접근해 오자 다급해진 인조는 도성을 버리고

    강화도로 피신하는 한편 최명길댄嗚吉을 보내 화친을 청했다. 강홍립과 박난

    영의 주선으로 화의가 성립되어 후금과 형제동맹을 맺기로 하고 전쟁은 끝났

    다. 그러나 %댁간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어 결국 1636년 청의 재침으로 병자

    호란이 일어나서, 국토가 적의 말발굽 아래 유린되고 임금이 청나라 태종 앞

    에 무릎을 끓는 삼전도의 치욕을 당하게 된다.

  • 병자호란 때 적진에셔 순절한

    tl' 홉첼흉훗

    호법먼 매곡리에서 출생

    충숙공빙폐公 박난영朴I~î핏은 이천시 호법면 매곡리 출신의 무인이다. 창성부

    사로 있던 1619년(광해군 11), 강홍립죠~l立과 함께 명의 구원군으로 갔다가 후금

    의 포로가 되었다. 그후 오랜 억류생활을 통해 후금의 내부사정에 밝고 중요

    인물들과 가깝다는 이유로 사신이 되어 심OJ=을 드나들며 활약했다. 병자호란

    이 일어나자 역시 사신으로 청의 진영에 있다가, 조선의 입장을 두둔하기 위

    해 한 말이 거짓으로 판명되어 죽음을 당했다. 당시 복잡하게 얼킨 청과의 외

    교전쟁에서 희생양이 되었던 것이다.

    박난영은 본관이 고령으로, 고령 박씨틀은 신라 54대 경명왕의 둘째 왕자라

    는 고양대군돼陽大君 박언성朴l강成을 시조1세로 하고 있다. 이천의 고령 박씨틀

    은 호법면 매곡리와 율면 고당리, 월포리에 세거해 오고 있는데, 박만朴표-병조

    179

    박 난 여 0

  • 180

    이 천 의 인 물

    판세을 중흥조로 하는 무숙공파 후손들이다. 호법면 매곡리의 입향조는 중시

    조 만의 5세손인 박영로朴永老 진사이며, 영로의 증손인 박종수朴宗줬-증 판서가

    아들 삼형제를 두었으니 박계영朴桂英-훈련부정 박난영과 박규영朴쫓英-선천부사

    이다. 박난영이 병자호란 때 사신 임무를 수행하다가 순절하여 충신으로 정려

    됨으로써 「이천읍지」인물편에 이름이 올랐다.

    박난영은 1594년(선조 27) 무과급제하여 면천군수를 거 쳐 1606년 함흥부 중

    군中짧으로 있을 때 함홍성곽 축성에 공을 세웠으며, 1616년(광해군 8) 무이만호

    拖핑萬戶로 공이 있어 북도 암행어사 유석중의 서계로 벼슬이 오르기도 했다.

    그후 창성부사로 있던 1619년(광해군 11), 명의 요청으로 도원수 강홍립의 휘하

    에서 후금 정벌에 나섰다가, 광해군의 밀계에 따라 후금 진영에 투항함으로서

    적의포로가되었다.

    당시 중국 대륙에는 만주에서 일어난 신흥강대국 후금이 명나라 변경을 침

    입하는 등 세력을 확장해 오자 명은 후금을 치기위해 조선에 원병을 요구해

    왔다. 조선 조정은 이 때 새로 일어난 후금을 의식하면서도, 임진왜란 때 큰

    도웅을 준 명의 요구를 거절할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광해군은 어쩔 수 없이

    강홍립을 도원수로 하여 1만3천명의 구원군을 파견하면서, 도원수에게는 형

    세에 따라 향배를 달리할 것을 비밀리에 지시하였다.

    그후 조 · 명연합군이 후금군에 대패하여 계속 수세에 몰리게 되자, 강홍립

    은 후금 진영과 내통하여 조선군의 출병이 명에 대한 의리상 부득이한 것이었

    음을 밝히고 군시들을 이꿀고 투항했다. 이와같은 속사정을 알리없는 조선 조

    정에서는 강홍립의 관직을 박탈해 버렸다. 강홍립 · 박난영 등은 정묘호란 때

    까지 후금에서 오랜 억류생활을 해야 했다. 1621년(광해군 13)에는 박난영이 후

    금의 중군으로 활동한다는 말을 들은 왕이 동생 박규영을 보내 형을 만나도록

  • 했으나,1) 그마저 후금진영에 억류당하고 말았다. 이듬해 광해군이 ‘집에 노모

    가 있는데 형제가 모두 나핫일로 잡혀 있으니 규영이 돌아올 수 있도록 상의

    하여 처리하라’ 고 영을 내리기도 했다 2)

    병자호란 때 사신으로 활약

    1626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강홍립과 박난영은 후금의 통역겸 길

    잡이가 되어 돌아와서 OJ=국간 화친을 위해 힘썼다. 척화파들은 두 사람이 적

    에게 머리를 숙이고 항복하였으니 벌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한 편에

    서는 적에게 잡힌지 10여 년이 되도록 ‘머리도 깎지 않고 신하의 절개를 잃지

    않았으며, 지금 또 화친을 위해 힘쓰고 있으니 상을 주어야 한다’ 고도 해서 논

    란끝에 두사람의 관직이 회복되었다.

    후금과의 화의가 성립된 이후 박난영은 회탑관펴짜官 · 선위사꾀단때 · 선유사

    간떼f핏 • 추신사秋信셋 등으로 여러 차례 심양을 드나들면서 후금과의 교섭과 회

    유를 위해 힘썼고, 1631년(인조 9)에는 오랑캐 방어를 위한 계책을 상주하기도

    했다. 그러나 외교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양국간의 사이는 갈수록 악화일로

    를걸었다. 후금은조선이 감당하기 어려운양의 공물을요구하고, 당초약속

    한 ‘형제의 맹약 을 깨고 군신간의 사이로 하자는 등 갈수록 터무니없는 요구

    를 해왔으며, 이 때문에 후금에 대한 여론도 악화되어 시간이 지날수록 척화

    론이 힘을얻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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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1

    박 난 여O

  • 182 이 천 의 인 물

    1636년(인조 14) 4월, 후금은 나라의 이름을 청으로 고치고, 이 해 12월 청태

    종이 직접 12만의 대군을 이꿀고 조선을 침입하여 병자호란이 일어나게 되었

    다. 청의 주력군은 임경업 장군이 지키는 백마산성을 우회해서 심OJ=을 출발한

    지 불과 10여 일만에 서울로 육박해 왔다. 이 때도 박난영은 사신으로 갔다가

    청 진영에 인질로 잡혀 있었다.

    청 진영에서는 조선의 왕자와 대신을 사신으로 보낼 것을 요구하였으므로,

    조정에서는 종실인 능봉수淡파守를 능봉군이라 속여 왕자로 가장하고, 참판 심

    집沈輯을 대신이라고 속여서 청진으로 보냈다. 적장 용골대짧骨大가 이들의 신

    분을 의심하여 박난영에게 사실 여부를 확인하게 되었는데, 난영은 이들의 신

    분이 가짜임을 알면서도 죽음을 무릅쓰고 이들이 정말로 왕자와 대신이라는

    거짓 증언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적의 주구노릇을 하여 악명 높았던 역관 정

    명수鄭命뚫가 아무래도 신분이 의심스러우니 다시 확인할 것을 주장하는 바람

    에, 마침내 거짓 진술이 탄로나서 적진에서 무참한 죽음을 당했다.

    박난영은 당시 복잡하게 얼킨 조선과 명, 청과의 국제정세 속에 희생양이 되

    어 많은 오해를 받았던 인물이다. 적의 포로가 되어 오랜 동안 힘든 억류생활

    을 했고, 억류에서 풀려난 뒤로는 수없이 심OJ=을 오가면서 조국의 안위를 위

    해 힘쓰다가 적진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오랑캐에게 항복한 사실만으로

    도 척화론자들의 공격의 대상이 되고, 그래서 그의 공적은 당대에는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효종대에 와서 자손들에게 음서의 혜택이 주어

    지고, 1675년(숙종 1) 손자 박경지朴慶社의 청에 의해 충신 정문이 내려지고 영

    의정으로추증되었으며, 시호는충숙忠웹이다.

    그의 시신을 제대로 수습할 수 없었던 탓에 머리만 매곡리 돈의실에 장사지

    냈다고 하며, 정려문 곁에 후손들이 사당을 지어 제향하고 있다.

  • 일곰고을에 송덕비가 선

    껄휴뭉A흔탈

    호암산 정기 받고 태어난 李弘望

    이흥망李弘염은 조선 광해군과 인조 때의 문신으로 이천시 백사면 사람이다.

    문과급제하여 내직에 몸담았을 때는 옳은 일에 과감하였고, 외직으로 나가서

    는 가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어서 그가 수령을 지낸 일곱 고을의 백성틀이 빠

    짐없이 송덕비를 세웠다고 한다 1) 또 정묘호란 직후 사신으로 심양에 갔을 때

    는 적의 회유와 협박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의연하게 맞서서 상대를 감복시킨

    기개있는 외교관이었다.

    청렴하고 소신있는 품행으로 「이천읍지」인물편에 이름이 올랐는데, 읍지에

    보면 그의 인물됨을 ‘충성과 신의가 있고번닫, 인정이 많고 소박하며체핑, 청렴

    r~"-_..~ .. """'~...Jo.":..~그~~그5’二~____.."-_I"I"' ..... "r1그~..r-4~I_r__..""' ...... "-..... """JτT...Jo.":..r ....... "'::ì. ..... IJ그’:...,...IJ.~r__......-_.....-I ..... ~ .. ....-_r_z느zτr-.rI_r__.."-J그n"-~←‘.--_...~ .... ....-~~二rI..... rI ...... ..-_r_r_r.....-_r ....... 그?그r_.....-..... 'rJ그1':

    1) rOI천읍지』

    mm-이흉망

  • mm-이천의인물

    검약하고따杓, 스스로 자신에게 엄격하다律己’ 라고 하였다. 당시 바람직한 목

    민관으로 지녀야 할 덕목들을 빠짐없이 갖추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를 좋지않

    게 보고 시샘하는 무리들이 있어서 벼슬이 크게 현달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이홍망은 1572년(선조 5) 이양진李찌팝-증 좌찬성의 아들 삼형제 중 둘째로 백사

    면 도지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원로元老, 호를 호암않감이라고 했으니 고향의

    뒷산인 호암산에서 따온 이름이다. 본관은 용인, 용인 이씨들은 원래가 순국짝

    댐 이씨였다고 하는데 시조인 이길권주吉卷이 용인 지방의 토호로 고려 태조를

    도와 건국에 공을 세운 탓에 공신이 되고 구성백關~JX伯에 봉해 짐으로써 후손

    들이 본관을 구성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뒤에 구성현이 용인현으로 개편되

    면서 용인 이씨가 되었다.

    시조 길권의 14세 손이 중시조 이중인쥐中仁-시중인데, 고려가 망하자 이태조

    가 불렀지만 머리를 풀고 두문동으로 들어가서 절의를 지킨 인물이다. 중시조

    중인의 5세 손이 정주목사를 지낸 이성달李成途이며 용인 이씨들의 이천 입향

    조인 이명효李明孝는 성달의 아들이다. 율곡 선생의 어머니이며 여류화가로도

    유명한 신사임당은 명효의 사촌인 이사온李밍없-진사의 외손녀가 된다.

    이명효는 일찍이 큰 포부를 가지고 조정암起따따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성균

    관 생원이 된 후, 대과에 뭇을 두고 학문에 정진하던 도중 기묘사화가 일어나

    자, 스승에 연루되어 이천 안흥서줬爛2)로 귀양오게 된 것이 이천과 인연을 맺

    게 된 동기라고 한다. 당시 이전에 우거하고 있던 모재뿔鎬 김안국金安國을 중

    심으로 강은 · 엄용순 · 최광한 등 고을의 선비들과 교유한 사실이 r모재집」

    속에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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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효가 아들 육형제를 두었는데 이틀의 후손들이 백사면 일대에 뿌리를 내

    리게 되었다. 즉 장남 이양복추떠찌과 차남 이양승깎liJl--성균관 교수의 후손들이

    조읍리에, 홍망의 부친인 셋째 이양진과 여섯째 이양절李찌~~의 후손틀은 모전

    리와 도지리에 각각 세거하여 오늘에 이른다.

    목민관으로 가는 곳마다 선정 펴

    이홍망은 어려서 부모를 잃고 매우 가난하게 살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밤

    낮으로 학업에 힘썼으며 심지어는 잠을 쫓기위해 상투를 대들보에 묶어 놓고

    공부했다고 전한다. 1601년(선조 34) 사마시 에 합격하고, 1605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충좌위 사과로 선조실록 편수관을 겸하였고, 정언 · 지평을

    거쳐 1612년(광해군 4) 사간원 헌납으로 언로를 열 것과 경연을 재개할 것을 왕

    에게 진언하였다. 그후 장령 · 펼선 · 사간 등을 거쳐 수안군수로 외직에 나갔

    으며, 1617년(광해군 9)에는 비변사에서 그를 유장띠샘으로 전거하기도 했다.

    이듬해 이이첨 등 대북파의 책동으로 인목대비仁탠大%의 폐모론이 발의되어

    조정이 한창 시끄러울 때 논의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1622년(광해군 14) 함평현

    감으로 부임하여 선정을 폈다. 고을 백성들이 쌀 300석을 비변사에 바치면서

    그를 다시 현감으로 제수하여 달라고 청하니 조정에서 군수로 승진시키려 했

    으나 굳게 사양하였다고 한다. 이를 두고 사관이 평하기를 ‘당시 수령들은 제

    수하는데 있어 모두 뇌물을 받았기 때문에 서로 수탈을 일삼았는데, 홍망이

    청렴하고 근신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청을 받았으니 백성들의 마음이 또한 감

    없-이홍망

  • mm-이전의인물

    동적이라 할 수 있다’ 고 하였다.

    당시 고을 주민들이 세운 송덕비가 지금도 함평공원 안에 세워져 있으며, 함

    평출신 유학자이며 병자호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나각歸표이 홍망을 위해

    지은 시 한 수가 전해온다.

    뽑 箕j서i太守 추강텍휠3

    풍찰與합풍AM홍賢 (제여증시융휴현)

    쫓당휩牛刀짧휠ft (계할유도공종션)

    塵世錯逢동쩌異 (진써난봉겨소。1)

    λ問웹合理其然 (인간이합리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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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魔聽짜펌꺼~tif1.좋 (쌍라고홍역가전)

    相近相많챔不兄 (상은상샤유괄견)

    江휩淸水滿春Ã(강윤위슈만흔천)

    ;)1 성래슈이흥망에게

    시 솜씨는율원屆똥、보다도뛰어냐고

    닭잡는데 소잡는캉을쓰니 곰새 말걸 플렬까듀렴소 εir ..... r ...... -.:εir..I:..."Cr..r..r..r..r..r...r.:..εir..r..r ...... ~..r..r..r ..... "{""..rII..rLε;::εirI.IJ그r:,.r..r..rI..r ...... ":...'rI-εir..r..rI~..-::..."':I'..r..rI ...... y--..rII..r ...... ~..rI..rII-I.:...~....r...r .....

  • 전세에 다은곳에셔 상다가만냐가가정말어려융터1

    인간이 만났다헤어점은정한이치랴오.

    형져1간의 정표다도더육듀터유니

    외가려가 편에 편지 전항만도 한터1

    서로가까이 셔효샤모해도오능1 려 팔슈없으나

    위슈의 장유름이 폼 등}늘어1 가득하더이다.

    홍망은 그후로도 연안 · 해주 · 안변 · 동래 등 모두 일곱 고을의 수령을 지내

    면서, 가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어서 주민들이 송덕비를 세웠다고 한다. 1621

    년에는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과정에 간계를 부리는 자들이 있어, 이를 적발

    하기 위한 어사로 임명 되기도 했다. m-이흉망

    기개있는 외교관으로 활약

    1627년(인조 5) 후금의 침입으로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강화도로 호종하

    였으며, 그후 세 번이나 심양을 오가면서 사신의 임무룰 수행했다. 먼저 후금

    과의 화약이 이루어진 직후, 원창군따감君 이구주f久를 왕자로 가장해서 심양으

    로 보낼 때 호행관파行띤이 되어 따라 갔는데 일행이 펑산땅에 이르자 적의 대

    장이 명의 연호를 쓴 국서를 보고 트집 잡아 공갈협박으로 여러 번 위험한 지

    경에 이르고혹은미녀와술로써 회유하려 했으나, 그는 ‘왕명을받들고왔을

  • 188

    이 천 의 인 물

    뿐으로 국서의 내용은 절대로 고칠 수 없다’ 고 버티면서 당당한 기개로 오히

    려 상대를 감복시켰다. 오랑캐들이 많은 금은보화를 예물로 주었지만 받지 않

    고모두돌려주었다.

    흥망이 돌아와서 적진의 사정을상세하게 보고하니 인조는 ‘위급하고 어려

    운 시기에 명을 받들고 수 천리 호혈을 다녀 온’ 공을 치하하면서 숙마 한 펼을

    상으로 내렸다. 조선인 포로의 송환문제를 교섭하기 위해 심양에 갔을 때도

    서슬퍼런 후금의 임금 앞에 뭇못이 선 채 배례를 하지 않아서 주위를 놀라게

    했으나, 결구수 백명의 포로들을무사히 고국으로데려오는데 성공하였던 것

    이다. 이 때 돌아온 포로 가운데 황해도 해주 사람인 김굉인金宏寅 형제는 뒷

    날 높은 벼슬에 올랐는데, 죽을 때까지 홍망의 제삿날이 되면 매년 잊지않고

    제사를 올려 은공을 기렸다고 한다.

    1628년(인조 6) 안변부사에 이어 길주목사로 북변을 수호하고, 1632년(인조

    10)에는 동래부사로 나갔다. 1636년 홍망이 잠시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집에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왕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해 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급히 산성을 향해 달려 갔지만 적병들이 이미 길을 가로막고 있어서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조정에서는 왕을 호

    종하지 않고 피신했다는 이유로 그를 탄핵하고자 했다. 이에 인조는 홍망이

    가난하여 거마車馬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오히려 두둔하면서 동부승지를 제수

    하여측근으로불렀다.

    일찍이 광해군시절에 권신윤인尹訊의 죄를논하는상소를올렸더니 사람들

    이 그를 기피하였다고 했는데 당시 이이첨의 심복으로 권세가 하늘 높은 줄

    모르던 윤인에게 잘못 보이게 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청렴하고 공손한

    관원’ 이란 평을 들었으나 그를 좋아하지 않는 자들이 저지하여 높은 벼슬에

  • 오르지는 못했다. 1637년(인조 15) 66세로 별세하여 묘가 백사면 모전리 선영

    에있다.

    홍망이 아들 사형제를 두었는데 장남이 이이철것以염-증 호조참판이며, 이철의

    아들이 이태은李값없-몽덕랑과 이진은주찮댔-판견사이다. 홍망의 막내딸이 효종

    때 명재상 송시열과 함께 북별 계획을 주도한 이완쥐完 대장의 며느리가 되었

    다. 이진은은 학문이 뛰어나서 증조부 홍망과 나란히 rol천읍지」 인불편에 이

    름이올라있다.

    189

    이 흉 망

  • 홍장 거유들이 宗師로 압은

    걱합讓져£

    홍장 거유들이 宗師로 삼은 李震股 m-이진은

    이진은李震股은 숙종조의 문신으로 이천시 백사면 사람이다. 문장에 뛰어나

    서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명재상 남구만폐L파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지금

    재주로써 문한을 감당할 사람은 오직 이 아무개 한 사람 뿐’ 이라고 했을 만큼

    한 시대의 홍장편E과 거유E폐들이 모두 그를 종사宗師로 삼았다고 하였다. 그

    러나 이진은은 뛰어난 재주에도 불구하고 그리 현달하지는 못했다. 성품이 소

    박하고 고요하며 특히 말 수가 적어서, 화려한 말투 피하기를 명예가 손상된

    듯 여겼으니 이로인해서 벼슬길이 막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숙종실록l에 보면 그는 일찍이 문장이 뛰어나다는 평판이 있어 한 때 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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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r숙종실록j 권29, 10월 13일(을유)

  • 192 이 천 의 인 물

    교知製敎로 뽑혀서 임금이 내리는 교서를 도맡아 작성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

    다. 그러나 이를 마땅치 않게 생각하고 시샘하는 무리들이 문제를 삼으려고

    하자, 미리 병을 핑계하여 사임하고 말았다. 대흥 · 삭령 · 고성 · 김제 · 곡산

    등지의 수령을 지내면서 일에 소홀함이 없이 백성들을 극진히 보살폈으므로,

    늙어서 관직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오게 되자 백성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이진은은 용인 이씨로 부승지를 지낸 이홍망李弘볕의 증손이며 동지중추부사

    이의무李宜않의 둘째 아들로 1646년(인조 24) 백사면에서 태어났다. 자는 정숙正

    t~, 호는 포와짧챔이며 어린 시절부터 부친에게 글을 배워 8세 때 이미 예법을

    알았다고 한다. 1666년(현종 7)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어서 1678년(숙종 4) 증광

    문과에 세번이나 연이어서 장원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이 되었다. 그후 공조좌

    랑으로 춘추사국홉秋史局을 겸임하여 실록편찬에 참여했으며, 1680년 사헌부

    지평이 되었는데 당론의 폐해를 알아서 어느 편에도 휩쓸리지 않았다.

    이어서 함경도사로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제직하고, 다시 병조정랑을 거쳐

    대흥군수로 임명되었지만 역시 병으로 인해 부임하지 못했다. 다시 사예 · 제

    용감정 · 고성군수 · 종부시정 · 정언 등을 거쳐 1695년(숙종 21)에 다시 김제군

    수로 나가서 백성들을 구홀하는 등 선정을 폈다. 1697년 대간의 무고로 인해

    파직되었다가 다시 고산도 찰방으로 벼슬길에 오르고, 오위장 · 첨지중추부사

    를 거쳐 1703년(숙종 29) 판결사가 되 었다.

    1707년(숙종 33) 임금이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춘당대春塊臺에 거동해서

    문신정시를 베풀었을 때 이진은이 수석을 차지하여 다시 한번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았다. 가선대부에 가자되고 동지중추부사에 올랐으나, 이 해 겨울에

    62세로 갑자기 별세하니 사람들이 뛰어난 문인을 잃었다고 모두들 애석하게

    여겼다. 묘를 백사면 모전리 두곡삼짝에 썼다.

  • 당대의 뛰어난 학자이며 문장가인 최석정 nii쐐 · 김우원企宇抗 • 오도일싸파一

    등과 평생 벗으로 친하게 지냈다. 시문 각체에 뛰어나 스스로 일가를 이루고,

    문집으로 r포와집J 3권을 남기고, 장기에도 능해서 인근에 마땅한 적수가 없

    었다고 전한다. 증조부 이홍망과 나란히 r이천읍지」 인물펀에 이름을 올렸다.

    %-이진은

  • 학문과육예가 뛰어났던

    ~9鍵l좋

    학문과 육예가 뛰어났던 柳譯l흥

    유담후柳댐]켈는 조선 숙종 시대의 문신으로 이천시 증일동 사람이다. 학문과

    육예에 모두 뛰어나고 성품과 행실이 청백하여 장래가 촉망되었으나, 벼슬에

    는 크게 뭇을 두지않았던 탓인지 눈에 띄게 현달 하지는 못했다. 본관은 문화,

    예조참판, 오위도총부 부총관 등을 지낸 유공량柳公亮이 조부이며, 부친은 영

    동현감, 의빈부 도정을 지낸 유훤柳줍이다.

    조부인 유공량의 자는 언명닫-明 호는 둔옹평이며 1560년(영종 15)에 태어나

    1590년(선조 23)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1595년(선조 28)에는 공조좌랑겸

    춘추관 기사관을 겸하였다. 이듬해 병조정랑을 거쳐서 정언 · 지평 · 철산군

    수 · 평양서윤 · 호조참의 · 동부승지 · 우부승지 등을 지내고 황해도 관찰사로

    있을 때 탄핵을 받기도 했으나 호군으로 동지사同知팎가 되어 선조실록 펀찬

    195

    유 담 후

  • 196 이 천 의 인 물

    에 참여했다. 광해군이 즉위하고 나서 좌부승지 · 형조참판 · 경상감사를 거쳐

    황해도 병마절도시를 지내고 공신으로 책봉되어 지중추부사를 겸했다.

    1615년(광해군 7) 소위 강변칠우의 역모사건이 일어났을 때 지의금부사로 추

    관推官이 되었으며, 서궁을 폐출하도록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인조가 즉위한

    뒤 역모자의 흔적이 있다는 이유로 중도부처되었다가.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연루자로 지목되어 잠수 당했다. 1627년(인조 5) 억울하게 죽은

    것이 분명한 사람들을 가려 신원하라는 왕멍에 따라 신원되었으며, 묘가 이

    전 · 수원간 국도변인 호법면 유산리에 었다.

    유훤은 호가 절초당節해堂이며 1586년(선조 19)에 태어났다. 선조 때 대문장가

    인 최립崔뾰과 서자 출신의 뛰어난 시인이던 이달李達에게 시문을 배워 문장으

    로 이름을 떨쳤다. 1604년(선조 37)에 성균시, 1610년(광해군 2) 사마시에 각각

    합격하고, 영동 · 화순현감과 종부시주부 · 의빈부도정을 역임하였으나, 부친

    이 이괄의 난에 연루되어 큰 화를 당하자 한 때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이천

    설봉산에 숨어서 시와 술을 벗삼으면서 세상을 조롱하기도 했다.

    외직에 있을 때는 그 고을의 향약해쩨깅을 반드시 실시하여 풍속 순화에 앞장

    서고, 따로 상평죠냄平용을 설치해서 흉년에 대비하기도 했다. 저서로 r절초당

    집J 3권을 남기고 묘를 이천시 증일동에 썼다. 문화 유씨들이 이천과 인연을

    맺게 된 내력은 뚜렷이 밝혀진 것이 없으나, 유훤의 외조부인 여흥 민씨 민사

    온閔士溫-진사의 묘가 이천시 단월동에 있는 사실로 미루어 외가 쪽과 연관이

    있지 않았나여겨진다.

    유담후는 자가 정부正夫 호는 결청재많淸짧이며 유훤의 아들로 1632년(인조 1)

    에 태어났다. 1651년(효종 2) 사마시에 급제하고 1665년에는 별시문과에 을과

    로 급제하였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우거하였다.1673년(현종 14)에 사간원 정언

  • 이 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부름에 응하지 않아서 체직되고, 이듬해 사헌부 지

    평, 세자시강원 사서, 사간원 정언을 차례로 지낸 뒤 다시 물러났다.

    1680년(숙종 6) 사간원 헌납이 되었으며 이 때 부제학 남이성폐二띨의 천거로

    의정부에서 홍문록을 작성할 때 오도일짜펴一 · 박태보朴챈:Iì 등과 나란히 이름

    을 올렸다. 이듬해 홍문관 부수잔을 거쳐 울산부사로 외직에 나가서 탐학한

    토호를 다스리고 어려운 송사를 잘 처리하였으며, 순창군수를 지낸 뒤 다시

    사임하였다.

    1683년(숙종 9) 5월에 이조참의 박세채朴jI텃가 그를 추천하기를 ‘박세당朴i\t

    -‘lt · 윤진尹펌 · 유담후는 모두 조용히 물러나 있는 선비이나, 특히 유담후는 경

    학깜낌이 명숙D]1꽤하니 아룰러 조정에 초치낌앉해야 마땅하다’ 고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또 영의정 김수흥企갚맺 좌의정 민정중閒싸퍼등이 천거하여 오위

    장에 등용되고 동부승지로 임명되었으나 신병으로 부임하지 않았으며, 1685

    년(숙종 11) 좌승지를 지내고 이듬해 64세로 별세하였다.

    저서로 「성능유의成能펄찮」를 남겼으며 묘가 증일동에 있는데, 영의정 정호鄭

    뼈가 행장을 짓고 역시 영의정을 지낸 유척기셈E基가 묘지명을 찬했다고 했으

    나 현재 묘비는 남아있지 않다.

    197

    유 담 후

  • 강원감사로 션정떼푼 청백리

    책E젖종첼즌

    입향조 宋關과우곡리

    여산 송씨들은 고려 때 인물인 송유익치tt폐을 시조 1세로 하고 있다. 유익의

    현손이 송서宋I;M-우정승인데 이천의 여산 송씨들은 송서를 파조로 하는 정가공

    파正퍼公波 후손들이다. 정가공의 8세손이 기묘명현중 한 사람인 송호지재댐

    교리이며 장남인 송일이 이천 입향조라고 한다.

    송일은 1557년(명종 12)에 태어나 1595년(선조 28) 별시문과에 갑과로 급제하

    여 이듬해 세자시강원 사서가 되고 헌납 · 예조좌랑 · 장령 · 펼선 · 집의 등을

    지낸 뒤 홍문관수찬으로 지제교와 경연검토관을 겸하였다. 1599년(선조 32) 부

    응교를 거쳐 사간원 사간이 되었는데, 이 때 당리 당략만을 앞세우는 소북파

    남이공南以쁨과 김신국金옆댐 등의 관직을 삭탈하고 귀양보낼 것을 강력하게 주

    장하여 마침내 파직시켰다.

    199

    송 정 규

  • 200

    01 천 의

    인 물

    그후 광주목사로 나갔다가 1611년(광해군 3) 다시 필선이 되고, 이듬해 해주목

    사를 거쳐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1616년(광해군 8)에 형조참판이 되었다.

    권신 이이첨을 배척하는 소를 올린 일로 벼슬길에서 물러나 백사면 우곡리에

    서 은거생활을 했는데 시와 술로 소일하면서 학 두 마리를 길들여 벗삼고 스

    스로를 반학옹伴젤값이라 호를 지어 불렀다.9년 만에 다시 벼슬길에 올라서 지

    중추부사를 지내고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1640년(인조 18) 84세로 별세하였다.

    송일이 송시길宋時吉과 송휘길宋따-생원 두 0많을 두었는데, 장남 시길이

    도승지 · 관찰사 등으로 현달하였다. 시길은 1597년(선조 30)에 태어났으며, 어

    린 시절부터 이미 경사에 통달하여 19세의 나이로 사마시에 합격하고, 1623

    년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이 되었다. 그후 사헌부 감찰및 공조 · 예

    조 · 병조의 좌랑과 호조 · 예조 · 병조의 정랑을 차례로 지내고, 1626년(인조 4)

    사간원 정언 · 필선 · 장령 · 상의원정 · 우부승지 · 동부승지 등을 거쳐 1643

    년 경주부윤으로 외직에 나갔다.

    1645년(인조 23) 금성현감으로 있을 때 도둑이 많은 금성지방의 토포시를 겸

    임했는데, 그는 법을 바르게 다루면서도 지나치게 엄하지 않아 주민들이 법을

    잘 지커게 되었다. 1648년(인조 26) 형조참판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거쳐

    1652년(효종 3) 한성부 우윤 · 도승지 · 경기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효성이 지

    극해서 잠시도 부모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으며, 사신으로 임명되자 왕의 윤

    허를 얻어 성묘를 하고 떠났다고 전한다.

  • 송모의 글은 손을 씻고서 읽어야

    송시길이 송빅깃댐-김천군수 송증宋짜-생원 송진宋振 송담갓淡-양지현감 등 아

    틀 사형제를 두고, 둘째인 증의 아들이 청백리로 이름난 송정규宋廷캘이다. 송

    정규의 자는 원경元때, 호는 우수펄, 또는 이호첫해로 1656년(효종 7)에 태 어났

    다. 1683년(숙종 9)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1690년(숙종 16) 사간원 정 언에

    임명되었다. 이 때 인현왕휘二웰王E 민씨가 희빈 장씨 일파의 간계에 빠져 폐

    서인이 되어 있었는데 어명으로금한인현왕후의 처우문제를두고정언송정

    규가 소신있는 상소를 올렸으니 다음과 같았다.

    삐멸이 만냐는것은왕화되b의 기본이나 흑율행하여 만욕하고

    외면하는 변을 당라연 반드시 강화λ1 3 1 되 팔니} 감화사갤 슈 없게

    된 둬에야에려야하며 EE 만드시 잘처려하여 은혜와의리가다

    지극하게 하연 곧 변을 당하여 오 도리를 잃지 않는 것이나, 광뮤

    제£式땀가 곽휴홍~J6흘 쳐려한 것은 온맏을 만합니다. _ ... -까의웰필가말하가흘관.í\1이 헬였더랴도신여1 창자 않는다

    하였는더1 더유나 임즘어1 짝하여 한 냐라의 어머니까 되었다가 하

    류야침에 장샤하고슐파는여자플과거리 가윤터1 에셔 섞여 알면

    서 조강쐐械도 져1 대로 드사지 뭇하는데 폴보지 않는단 말임니까.

    신이 듣건배. 폐서인/홉숍λ이 정으료 졸야간 뒤료는 천척이 갇히

    셔」로다나지 않아서 정얀이 적막하고잡초가뜰에 왔으며,뷰려는

    m-송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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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중국 전한의 문인이며 정치가.

  • 202

    이 천 의 인 물

    종이 적고밖에는어련 。}이도없습니다.밸나무와왈의 어려융은

    온다 폴촬것도 없으나,콜 · 괄이나좀도듀도또한염려스렘습니

    다.전승P께서 그괴호윤정상을가없이 여겨 별궁))IJ합어l 겨듀어 듀

    사고, 옷 · 양식 · 찬율짧껴도 배쥬어서 끌까지 은혜를 베퓨셔야 마

    땅합니다 2)

    이를 본 숙종은 ‘금령을 업신여기고 앞장서서 상소하다니 참으로 놀랍다’ 고

    하였고, 사람들도 그의 용기있는 태도를 칭찬하면서 ‘송모의 글은 마땅히 손

    을씻고서 읽어야한다’고했던것이다.

    1694년(숙종 2이 세자시강원 사서가 되고 홍문록弘文앓에 이름이 올랐다. 수

    찬 · 지평을 거쳐서 1696년(숙종 22) 경성판관*範썼IJ官으로 나갔는데 때마침 기

    근이 들어서 굶어 죽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에 창고에 곡식을 내어 진홀에 힘

    쓰는 등 선정을 펴서 품계가 올랐다. 1699년에 승지겸 경연참찬관으로 왕명

    에 따라 과거에서 부정을 막을 수 있는 계책을 진언하였고, 이어 나주목사를

    거쳐서 인현왕후가 승하하자 고부사꼼펴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1705년

    (숙종 31) 제주목사로 부임해서는 요해처에 성을 쌓아 방비를 든든히 하고, 섬의

    풍속을 교화하는데 힘썼으며 탐라지111麗誌와 탐라닮歸圖를 제작하기도 했다.

    어사 이해조李海햄가 그의 선정을 보고하니 임금이 말 한 필을 상으로 내렸다.

    이듬해 다시 승지가 되고, 양주목사로 나가서 선정을 폈다. 1708년(숙종 34)

    강원도 관찰사가 되어 강릉 · 춘천 · 낭천 세 고을의 절수折受의 폐단을 지적하

    여 혁파하도록 하고, 양전월田을 공정하게 처리하였다. 양전사업은 대동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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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r숙종실록」 권22 , 숙종16년 9월 15일(임인)

  • 확대 실시와 함께 당시 전세정책상 매우 중요한 사업이었다. 광해군 때부터

    추진돼온 양전사업이 숙종조에 와서 강원도와삼남지방까지 확대됨으로써 사

    실상종결을보게 되었다.

    이 해 12월에 헌남 이윤문주允文이 사적인 감정 때문에 온갖 모함하는 말로

    송정규를 탄핵했다. 임금은 ‘송정규는 행정이 상명詳明하여 바야흐로 균전의

    명을 받고 마음을 다해 봉행하고 있는데 갑자기 죄주라는 말의 뭇을 모르겠

    으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고 물리쳤다. 그러나 탄핵이 계속되자 이듬해 하옥

    되었으나, 곧 모함을 당한 사실이 탄로나서 이윤문은 파직되고, 그의 상소를

    경솔하게 받아들인 해당 승지를 추국하도록 했으며, 송정규는 풀려나 다시 승

    지로기용되었다.

    송정규는 평생을 청빈하게 살아서 관찰사 임기를 마치고 몰아오는데 점이라

    고는 소소한 옷가지를 담은 괴짝 하나 뿐이었다고 한다. 일찍이 양주목사로

    있을 때 선정을 편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r숙종실록」어l 실려 있다.

    도제조 낌창칩全읍菜이 엄음에게 말 하기를 ‘엘찌가 첼원을 말았

    을 해 날이 저융어 양쥬의 촌가에 튜숙라였는더11. 쥬언이 야직 밥

    을 젓지 뭇하고 환자곡을 받야 요가를 가다리고 있었슴니다. 맘。1

    깊은 뒤에야 환자콕아 넙1 호소 왔는데, 그 곡식을 보나 다 빈캡터1

    ~1 이으료 할u1가율며 관가를욕하였슴니다.그뒤에 송정유가욕

    샤이었을 해에 신이 또 양쥬를 지냐는데, 마침 흔궁기를 당하여

    플에 보리가 익어가고 있었:냐 베어 먹지 않으으효 괴야하게 여

    겨 을였더니, 이 고을에서는 지난해에 환자곡을 잘 맏야플였:으

    효 온 경내가 이에 힘엽어 옮지 않야써 보리흘 二2배로 듀고 익 ~1

    203

    정 규

  • 를가다렬 슈있다고하였슴니다.적곡을맏。}플이는정샤는정멜

    라계 가리는것이 증요하다는것을알슈있슴니다.’3

    고 하니, 임금0] ‘아흰 것이 자못 좋으니 유의 하겠다’ 고 대답하였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로는 이전 이호잦湖 곁에 작은 별장을 짓고 자호하기를

    이호라 하여 글읽기로 유유자적하다가 55세로 별세하였다. 1796년(정조 20)에

    공조참판 김익휴金翊休의 천거로 청백리로 녹선되었으며, 효행에도 뛰어나서

    헌종 7년 효자로 정려되었다. 글씨를 잘 써서 문묘의 대성전 현판 글씨를 그

    가 썼다고 하며, 묘는 백사면 내촌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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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r숙종실록」 권59, 숙종 43년 6월 9일

    -따-이전의인물

  • 五君子의 한사람으로 문명이 높았던

    책i 조뿔

    송질宋慣은 조선 영조 때의 문선으로 본관은 여산, 자는 중윤찌1패, 호는 치암

    따핸이며 이천시 백사면 사람이다. 경기감시를 지낸 송시길宋時吉의 증손이며

    송박宋땐-김천군수의 손, 송정택宋廷패의 아들로 1676년(숙총 2)에 태어났다. 성균

    관에서 공부할 때부터 자질이 뛰어나서 영조의 총애를 받았다.1727년(영조 3)

    임금이 대제학 윤순권핑에게 명해서 성균관 유생틀을 시험보게한 성균시에서

    급제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였다.

    1730년(영조 6) 정혼鄭패이 공명첩을 훔쳐서 몰래 팔다가 발각되어 옥에 갇히

    게 되자, 옥시를 늦추기 위해 송질 등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고변하였다. 임

    금이 숭정문렇政門에 나아가서 친히 국문한 결과 무고임이 밝혀져 정혼은 사형

    에 처해지고 송질은 석방되었다. 1734년(영조 10) 사헌부 지명이 되고, 그후 장

    령 · 집의를 역임했으며 사간원에서는 정언 · 헌납 · 사간을 지냈다. 1737년

    (영조 13)에는 세자시강원 펼선으로 세자를 가르치고 그후 보덕에 이르렸다.

    205

    송 질

  • 2CX5

    OJ 천 의

    인 물

    문명이 높아서 오군자五君子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지고 저서로는 r치암집」이

    있다고 했으나 행적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며 묘가 백사면 우곡리에 있다.

    질의 아들이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지돈녕부사로 기로소에 든 송제로宋펙엽이

    며, 제로의 아들인 송락末樂-헌납도 문과급제하여 연이은 삼세 문과급제를 기

    록하였다.

    백사면 도립리 육괴정에 판각으로 남아있는 r육괴정중수기」가 송질이 1726

    년(영조 2)에 지은 글인데 다음은 중수기에 나오는 모재의 옛 시에 차운짧한

    시 두 편중 하나이다 1)

    敬;k꿇經先죄는舊홈항二줍

    5챔활3훌樹木

    舊菜.ll:r.나1 中

    함쉽何R훈줄b

    *윈짤-半2E

    客求生E흥趣

    λ농見」획風‘

    홍想、盤~fot

    11-、魔옳老同

    (자당경슈욕)

    (유축차산증)

    (하기라시동)

    (괴음얼만공)

    (객래생은취)

    (인거견고융)

    (갱상반션지)

    (배상모노동)

    ~...r.:..ε,,_r..r_;:,εr...r.:..ε,r~r:rr..r..r..r_r.r..L.ε"-ε,r~二~..r...z.:...-:..r..I..r...... ""--...I'...r..r-.I"'...r.:..εrr..r...r..r..r...r..r..r..r..r..r~二ir..r...... ~....rrI..r..r_r ...... 'Cεεr..r ...... ~..r...I"r..I..r..r..r ....... ...-.Lε'"

    1) 백사면 문화유적.민속조사보고서J 1966, 이전문호뭔 · 강남대인문과학연구소

  • 자당:힘땅에 슈욕이 겸하였는터1

    옛 적 이 산증여1 지였던 것이네

    연꽃가윤은어느때 동하였던고

    느라냐무:2놓은한반이나마였유나

    손이 찾야옴에 숨은풍취가냐고

    샤람은가도드높은풍취 보겠네.

    다λ1 만션옆짧의 땅을 생각하나

    슐잔을요채 노인과갇이 랴는듯.

    2m 소O 지금

  • 利川이 배출한 탁월한유학자

    李 #혔‘

    외암의 가계와 어린시절

    이식짧의 자는 경숙淑 호는 외암잃웬이며 본관은 연안이다. 외암은 이천

    이 배출한 탁월한 유학자로서 조선 후기를 풍미한 사상계의 거장이기도 했다.

    그의 선대는 경기도 광주에 세거해온 근기 사족이었으나. 1694년(숙종 20)에

    외암이 광주 율리票띤에서 이천읍내 동촌폈村으로 이거하면서, 이천의 명망있

    는 가문으로 정착 발전하게 되었다. 특히 외암이 18세기 초반 이천 일대의 학

    풍을 주도하는 과정에서 연안 이씨들은 ‘선비집안’ ‘학자집안’ 으로서의 확고

    한 입지를 다질 수 있었다1)

    외암은 어려서부터 경학찜헨에 뭇을 두고 학문에 정진함으로써 일가를 이루

    r_r_...τi ...... I"'_......-...... ..-...... ...-Ir.εr_r_......-_r-rr ..... ....-rr..rr_r_r:εsτr ...... ..-...... ...-~τ.TI_....-_......-rJ.....-....... "r ...... ...--r..::εr_r_r_r_r_,.....-_I' ...... ~....-J....-..r:....-...... ..-:.εr..rr_....-r~_r_r ...... ..-....... ...-_r_rI _r .... ...--r_r ...... ..-rI ........ τεir" ...... "'"그rL

    1) 01천시지면찬위원회 (20이 )rOI천시지』 저11 권 자연과 역사, 237쪽-이하 이식의 학통과 학문세계에 관한 부분은 위의 책을 인용하였다.

    2JJ)

    01 ),1

  • m-이전의인물

    었으며, 당대의 대학자인 정시한丁時賴의 제자가 되어 퇴계학의 학통을 계승하

    였다. 숙종 때 뛰어난 학행으로 천거되어 세 고을의 수령을 지내고, 경종 때

    세제익위사世弟翊衛司의 익위翊衛가 되어 세제 시절의 영조를 가르쳤다. 이전에

    우거해서는 후학들을 지도해서 그가 죽었을 때 문하로써 복을 입은 사람이

    40여 인이라고 했으니, 모재 김안국金安댐 이후로 향촌 선비사회에 커다란 영

    향을 가져다 준 인물로 손꼽을 수 있다.

    연안 이씨의 시조 이무추않는 원래가 당나라 사람이었다고 한다. 소정방 휘

    하의 중랑장中郞將으로 백제 정벌에 공을 세운 뒤, 신라로 귀화해서 연안백延安

    伯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연안을 본으로 삼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

    조 이후의 세계世系가 실전되어 분명치 않은 탓에 고려조에 와서 현탈한 후손

    들을 중흥조로 해서 10개의 파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이습홍李팽파을

    중흥조로 하는 태자첨사공파와 이현려李賢呂의 판소부감공파, 이지주핸의 통례

    문사공파 3개 파가 주류를 이루며 조선조에 와서 다수의 중신과 학자들을 배

    출한명문으로손꼽히게 되었다.

    첨사공 습홍의 5세손인 이원발李元發은 고려말 전공판서典工判좁를 지냈는데,

    조선 건국후 이태조가 중용하려고 불렀으나 응하지 않고 절의를 지켰다. 원발

    의 두 아들이 이귀령李합歐-좌의정과 이귀산주월山병조판서이며 귀산의 아들이

    이속주續 부사이다. 중종반정 때 공신이며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연성군延城캄

    이곤李坤-판결사은 속의 증손이다. 이식은 중시조 습홍의 17세 손, 기묘명현으

    로 추앙받는 이곤의 7세 손이 된다.

    이식은 1659년(효종 10)에 부친 이제헌李齊핑과 어머니 창녕 성씨 사이에서 태

    어났다. 그의 출생지는 분명치 않지만 서울 또는 광주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

    정되며, 15세 때인 1673년(현종 14)에 부친상을 마친 뒤 광주 율리로 이사하였

  • 다. 그후 다시 35세 때인 1694년 이천읍내 동촌2)으로 이주하여 정착함으로서

    이른바 동촌 이씨의 입향조가 되었다. 그후 외암의 가풍을 이은 동촌 이씨들은

    다수의 현달한 인물들을 배출하면서 이천의 명문사족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외암은 어려서부터 품행이 바르고 효성스러우며 행동이 민첩, 활달하였다고

    한다. 부친 제헌이 ‘대학의 도는 명덕明폈을 밝힘에 있고, 백성을 새롭게 함에 있

    으며, 지선玉편:에 머무름에 있다’ 는 「대학」의 첫구절을 가르치자, 삼강령 팔조목

    의 대의를 이해하였으며 7세에는 공자의 초상을 벽에 걸어놓고 매일 두 번씩

    알현할 정도였다. 이를 기특하게 여긴 어머니가 태극도太않템의 원리를 설명해

    주자, 이로부터 학문의 본령인 위기지학셨E之찌에 침잠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 외암은 집안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과거보기를 단념한 채 학문연구에만

    몰두하였다. 15, 16세 무렵부터 공부를 하는 도중에 마음에 얻은 바가 있으면

    빠짐없이 기록하여 이름을 ‘일기日記’라고 했는데 모두 수 십권이나 되었다.

    이 일기는 그가 학문하는 과정에서 응축된 지식과 각종 의문점틀을 수시로 기

    록한 것으로 초년기 외암의 학문 방향과 지향점이 집약된 저술이다. 후일 스

    승인 정시한은 이 일기를 보고 외암의 학문의 갚이에 감탄하는 한편, 그의 독

    자적인 학문 태도에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다.

    겐 이식

    외암의 학문세계

    이식은 학문하는 과정에서 사서삼경을 물론이고 「성리대전性理大全」 r심경心

    t그;r__. .... ~τJ.~_..~L..._._.._T"'1:.."rI.J...,..-II"'J...-... ..-1그n’:τ~ ... "rr~τrι;r ... ..,-....... ...,..-'""""'...-..... "r..r ..... ...-...... .,-..... ...-... ..-.J...-....... ..-_"..-...... ..-.... ..-_r_......--...... ..-..... r~τzτ~_._rJ....--...... y-..... ~τrr_J...-...... ..-_."r__,.'r1그~.r~그;r__.""'-_..~二ι-T .... ..-~느;느T ...... "r_rJ>.rr-.IJ._ ..... _:τ .. ~ ..... "':

    2) 지금의 창전동으로 이전초등학교 동쪽마을이다.

  • m-이천의인물

    *5나 r근사록近많없」 r주자서朱子팝」 「퇴계집退않集」 등의 저서들을 두루 섭렵했으

    며 지리학에도상당한조예가 있었다. 일찍이 「대명일통지大明一統誌」를탐구하

    여 요점을 정리한 천하도를 만들고 그 서문에 쓰기를 ‘군현 넓이의 크고 작음

    과 넓고 좁음을 살피고, 산천과 도로의 험하고 평평함과 멀고 가까움을 살펴,

    치교治效의 도리와 수전守웰의 방법을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출장입상出將入相

    하는 자가 새겨 두어야 할 바 라고 하였다. 또 r동국지도핑떠地댐」를 제작하였

    는데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를 모방할 정도로 뛰어났다고 한다 3)

    외암의 지리학적인 관심은 그의 족친인 이광정李光底-이조판서의 영향을 받지

    않았나 여겨지는데 이광정은 외암의 종7대조인 이말李ìí-직제학의 증손이다.

    선조 때 사신으로 중국에 갔다가 마태오리치의 세계지도인 r곤여만국지도」를

    들여와서 이 땅에 최초로 개화의 씨를 뿌린 인물인 것이다. 그러나 어디까지

    나 이식의 학문적인 요체는 경학을 바탕으로 하는 성리학 연구에 있었다.

    그는 유년기에서 청년기까지는 가학家탤을 통해 학문을 익힌 것으로 보여지

    며, 청장년기에는 정시한을 사사하여 학문의 깊이를 더함으로서 근기 일대의

    뛰어난 학자로 성장 발전할 수 있었다. 선인들이 미처 발명하지 못한 사단칠

    정四端t情에 대해 연구하여 지론을 확립하고, 퇴계의 「이기이원론뀔氣二파삶」의

    입장을 지지하여 「사칠부설四七附設J 1권을 저술하였다. 외암은 또 당시 학계의

    쟁점들에 대해 갚이 천착한 결과 매우 독창적인 견해를 제시하였으니, 이에

    대한 그의 학설이 「인물성동이논변A物性同龍짧양」에 집약되어 있다. 이 외에도

    그는 유교 경전에 대한 자신의 해석과 견해를 담은 여러 저술을 통해 학문에

    대한 강한 의욕과 열정을 드러냈다.

    r..L:.‘:"'~ ........ ~.LJ.εr_rI...r-I ..... 'CI..~I ....... ~...r~T.::...~‘그εr..r...r_r_r__..r_::‘TI.r ...... ....--...r.r ...... ....--..I:.....-II...r...rI..rI::....~.I:..εTI ...... ..-_r-I_r..r~~"':....---I:i...--...... ..-...... 'C....-I.r ...... ~~εr..r-I...r.:;;ε:F.. 3) r이천부 읍지』 인물펀

  • 외암의 학문활동과 관련하여 빼어놓을 수 없는 인물이 스승인 우담!뭔편 정시

    한이다. 우담은 선조조의 명신인 정응두丁멘斗-좌찬성의 현손이며 퇴계의 문인

    인 정윤복丁HjU~낌-대사헌의 증손이다. 명문 출신이면서도 강원도 원주 법천法없에

    우거하면서 명생 벼슬을 멀리한 채 학문과 후진 양성에만 전념하였다. 이이李

    m의 성리설을 비판하고 「이기론」 「사단칠정론」을 정밀하게 분석하여 퇴계의

    입장을 명석하게 해명함으로써 퇴계학파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후일

    이익쥐섯이나 다산 정약용丁若î\U같은 이틀도 그를 높이 명가하고 존경하였으

    며, 문인으로는 외암을 비롯하여 황수일따갚一 · 이만부李파썼 · 권두경짧斗핸 등

    많은 학자들을 배출하였다.

    외암이 정시한을 만나서 사사받기 시작한 것은 1686년(숙종 12) 무렵으로 그

    의 나이 30세를 전후한 시기였다. 이후 그는 정시한이 거주하던 원주 법천을

    자주 오가면서 시사를 담론하고 학문을 토론하였다. 두 사람 사이의 학문토론

    은 단순한 토론이 아니라 논쟁에 가끼울 정도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그중에

    서도 1700년부터 3년 동안에 걸쳐서 「인물성동이론A物性同짧삶」을 두고 벌린

    토론은 유명하며, 이는 정시한이 외암에게 보낸 31통의 편지와 「서이경숙논변

    후얀李敬짜鋼後」 「서논변인물성동이후찮쐐샤物性同뭘後」 등의 저술에서 실상을

    확인할수있다 4)

    「인물성동이론」이란 성리학에서 인간의 성性과 인간을 제외한 만물(특히 몽갚)

    의 성이 같은가 다른가에 대한 이론으로 같다고 보는 이론이 「인물성동론A物

    얀메폐, 다르다고 보는 것이 「인물성이론A物뾰찢~íÍììJ 이다. 이 토론 과정에서 정

    시한은 이식의 학문적 순수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도 이식의 학자적인

    rlπ/>.~_rIJ.~ ...... ""--... ""--r~느r_:-_.....-_r_r~_r ..... ..,....r_.....-_r_r-_.......--r ..... ....--...... ....--~....--rI ...... ....--r ...... .....-_... ..... r_.......--_rr1τr~rr_r__....-r_......--_r_I:J..7τ~I~그~_......-r1τrr_Ij.~τ'"'ι • ...--..... ...-I_r~εr ..... .....-...... ..-_rL,.._""_r_r_......-_.......-_.....-:_

    4) rOI천시지j 앞의 잭 240쪽

    213 01 λl

  • 214

    이 천 의 인 물

    자질과 소양 만큼은 매우 높이 평가하였다. 외암 역시 스승을 크게 존경하여

    학자의 표준으로 칭송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후일 그가 정시한의 묘지명을

    찬하고 r정곡공변무록폐갑公辦짧앓」의 발문을 지은 것도 두 사람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말해 준다. 그런 과정에서 외암의 학문적인 명성은 영남까지 전파되어

    당시 영남학파의 대표적 유학자인 이재李찮 · 이만주탤 · 김성탁金많앙이 그의 학

    문에 대한 관심을 피력하기 까지 하였다.

    세저|世弟 시절 영조에게 학문 가르쳐

    이식의 학문적인 명성이 널리 알려지면서 1689년(숙종 15) 이조판서 심재沈햄

    의 천거로 의릉참봉에 임명되고 1692년(숙종 18) 군자감 봉사를 거쳐서 이듬해

    상의원 별제, 의금부 도사를 지냈다. 1706년(숙종 32)에는 비변사에서 대신 ·

    육경 · 삼사 장관들에게 학술웹따 · 행의行誼 · 재식才識의 세 분야로 나누어 인

    재들을 천거하도록 했을 때 그는 판서 강현姜없과 경기감사 김우항金宇沈에 의

    해 학술로 전거되었다. 당시 천거된 인물들 중에는 윤동수尹東洙 · 이만부李萬

    폈 • 남학명南씹嗚 · 정제두鄭濟斗 · 김창집金昌짧 등 유수한 인재들이 많았으니,

    외암의 학문적인 위치를 짐작할수 있다.

    그후 1708년(숙종 34)에 장흥고 주부, 이듬해에 송화현감을 지내고, 64세 때

    인 1722년(경종 2) 세제익위사 익위로 임명되어 세제인 영조를 가르쳤다. 매변

    경연에 나가서는 선악과 치랜않L에 대한 계책을 상주하고, 마음을 기르고養心,

    선비를 기르고효士, 백성을 기르고효民, 사사로움을 넘어설 것克己을 진언하였

  • 다 5) 이어서 1723년(경종 3) 흡곡현령 1724년에는고성군수를 역임했다.

    영조 임금이 즉위하자 영조는 잊지않고 지난 날의 스승이었던 외암을 조정

    으로 불렀다. 즉 1727년(영조 3) 그에게 다시 세자익위사 익위를 제수하면서 말

    하기를 ‘내가 세제였을 때 이식이 이미 연로했는데 지금은 더욱 노쇠하였을

    것이다. 서연에서 강설하게 할 것이니 세자익위사는 속히 그를 상래上來하게

    하라’ 고 했던 것이다. 외암이 병이 었음을 핑계로 세 번이나 사양했지만 받아

    틀여지지않았다.

    이듬해 병으로 사직하고 고향인 동촌으로 돌아왔으며 일 년 뒤인 1729년(영

    조 5) 8월, 71세로 별세하였다. 그가 별세하자 문인으로서 의복앓nu을 입은 사

    람이 40여 명, 만사뺑詞나 제문을 지어 조의를 표하고 곡을 한 사람이 50여

    명, 사대부나 유생으로 장례에 참석한 사람이 수 백명에 달했으며, 일반 백성

    들과 천민들까지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였다고 한다.1797년(정조 21)

    에는 경향각지의 사림틀이 그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부의 동쪽에 원학사폈f션

    폐를 건립하고 영정을 봉안했는데 지금은 사당은 없어진 채 문중에 영정만 전

    해 옹다.1883년(고종 10)에는 외암을 두고 ‘학문에 순정한 한 시대의 학문적인

    모범’ 이라고 하여 자현대부 이조판서를 추증하였다.

    이식은 상당수의 문하생들을 배출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사제 관계가 분명하

    게 확인되는 인물은 소수에 불과하다. 장례 때 문인으로서 의복을 입은 사람

    이 40여 명이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그의 문하생 수는 적어도 40명 이상으로

    보이지만 현재로서는 실상을 확인하기 어렵다. 단지 r북보北땐」를 통해 일부

    문인들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이명익李命싫, 광주인 • 유성윤柳및

    r~그~r .... ~εεr.r ...... T"'_z:ε'"εir~그~-'>-rJ..~II:),.~~..&rI' ...... T"' ..... r _,..-..... .,-_..r_r_E"..r-__....-_,..,-...... T""_r.r ...... ~"Cr ...... ..-.... 'C.J..~..--_r_r_r .... ~γT_r .... ~1:'r"'~τirJio~"-I"'_,."'-.. "'-_r ...... ""' ...... "-r .. r ...... "'":r ... "'-_r_r."-~π.,ι"‘’r

    5) r이전부읍지j

    215 0)

  • m-이천의인

    i間, 문화인 • 정최능鄭옳能, 동래인 • 정세기鄭世器, 동래인 • 강택룡姜澤龍, 진주인 • 최경

    기崔짧紀, 강화인 등 모두 6인이 수록되어 있다. 이명익은 동고束뿔 이준경힘據

    영의정의 7세 손, 유성윤은 이전에 묘가 있는 유공량柳公亮-참판의 현손, 정최능

    과 정세기는 정대년鄭大年-영의정의 6세 손과 7세 손 강택룡은 강섬姜펴-판서의

    5세 손, 최경기는 최숙캘많 판서의 증손이다. 이들은 대부분 소북 계열의 자제

    들로서 이식과 정치적인 입장이 동일하여 그가 소북 계열의 학문적인 구심점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6)

    외암의 日記

    r이천읍지」를 비롯한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외암은 r일기」라 이름한 수 십

    권의 저술말고도 r사칠부설」 r낙민유훈발휘洛/웹짧11짧필」 r문사록돼많~J r가언

    家言」 r인물성동이론변」 등의 여러 저술을 남긴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현

    재까지 남아있는 것은 r원학일기습유願學日記업道」7)라는 문집 뿐이다.

    r원학일기습유」는 외암의 시문집으로 권의 구분없이 2책으로 엮어져 있다.

    필사본으로 중간 중간 서로 다른 글씨체가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여러

    사람이 펼사한 글을 한데 모은 것으로 추정되지만, 필사한 사람이나 편찬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제1책은 외암이 소시적부터 지은 시와 서간

    문, 그리고학문에 대한견해와일기처럼 쓴 일상적인 일들과감상문들이 뒤

    섞여 있다. 제2책은 후손들이 쓴 시문과 행장기 등을 모은 것인데 1권에 비해

    'r...J>."':.ε.r-I ....... r~그πir...r.:..εr-III~그?그;:r_r ....... ~_r_r_r.I_r_II_rI_r ....... rI~..-~그r .... ...-I~~...J>.~:r-_r..rI~...--....... ..-.Lεε~..-I~...-..rLε.T ...... ":Lεr ....... ...--I ....... ....--_r_rI_r...JJ.rI~느;r_rI...r~τF-.L

    6) rOI천시지」 앞의 책, 242-243쪽. 7)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온(古3428-521)인 이 잭은 제목이 rOI학일기습유(碩學日記治道)J로 되어 있으나 잭 맨 앞부분 첫 머리에는 r願學日記治遺」로 되어있어 ‘이학일기’ 가 아닌 ‘원학일기’ 가 맞는것 같다.

  • 분량이 휠씬적다.

    이 책은 ‘습유씹낀’ 라는 제목으로 미루어 볼 대 문집을 만들면서 미처 수록

    하지 못한글틀을다시 모아정리한것이 아닌가여겨지지만, 정작문집이 남

    아있지 않은 탓에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전체적으로 볼 때 체게있게 정리된

    내용이 아니기 때문에 후손들이 망실되는 것을 막기위해 흩어진 글들을 정리

    하였거나, 본격적인 문집 간행을 위한 준비자료였을 가능성도 었다. 실린 글

    의 순서는 대략 연대와 날자 순을 따랐는데 맨 첫장이 을묘년이므로 그가 17

    세 때인 1675년임을 알 수 있다. 15. 16세 무렵에 ‘일기’ 를 저술했다고 했으

    니 비슷한 무렵인 것이다. 마지막 부분은 을해년이니 37세 때인 1695년(숙종

    21)에 해당하며 광주에서 이천 동촌으로 이거한 이듬해이다.

    다음은 1687년 3월 3일에 이천의 후미동당美패을 다녀온 내용을 적은 글이다.

    3월 초삼얼 어1 휴ul 동드효 갔다. 점심 때 샤장현강해縣 동쪽어il~~ 쉬

    었는데, 쉬는 곳에 융에 침식된 논이 있어 깊이가 얼장이 념였다. 그

    멜을상펴보나 흰 졸이 가지렌해서 앉을만하였다.다음날듀촌*썩

    으로향랴는켈에 융정JR井의 육쪽을지났다.이 육쪽에는농장이 하

    냐 있고 원츄라i합않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경치가 좋。써 또 다흔

    셔1상언듯했다.신원新院육쪽을지냐겨1곡속에 있는작은켈로플어

    가서 고개를념어 초천촌후씨村을지냐갔다.이곳은가장궁벽한곳

    이었는데 그곳의 천석 7양E플도팔만랴였다.삼산三피을지냐여서 삼

    승三升이 가까윤 곳에 있음을 얄고서 홍슴지洪정ξ가 샤는 곳을 찾。}

    가고자하였으냐바빠셔 까지 콧하였다.칸자치량주채흘념어셔는고

    책획R샤람이천명추쫓쩌을만냐셔 동행하였는데,그는송치*앙팩어1 샤

    217

    OJ 식

  • 쟁 이천의인물

    는 。l추 야뮤개 한레 가는 걸 이 라고 하였다. 동드료 도마치刀.關흘 념

    S나 걸이 있는터L 상승을지나삼산앞S로나왔다.저녁에 듀례촌

    斗週村에 이료렀다.다음날야침 석곡E양을지나서 정으」로올아왔다.

    후미동은 지금의 호법면 후안1리를 말한다. 외암이 후미동을 다녀오게 된

    이유는 밝혀져 있지 않으나 거쳐간 곳과 만난 사람, 길을 가면서 목격한 풍경

    등이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삼승이(마장면 이평리)와 고척

    (신둔면 고척리)을 비롯한 사장현 · 두촌 · 원추리 · 신원 · 초천촌 · 군자치 · 도마

    치 · 두례촌 · 석곡 등 많은 당시의 지명들이 등장하고 있어서 흥미를 끈다.

    다음은 1695년 3월13일 집 뒤 언덕에 올라서 안흥지安與벼를 내려다 보면서

    봄경치를옳은시 한편이다.

    同遊後I펴

    훗興i합上綠楊#-(얀흥지상녹양럼)

    옛起냉획서調.~ (환가유인람상섬)

    操上後l웹칩합뽕 (휴상휴강화대접)

    坐훌I휩浦{gp藏金 (좌간남포유장긍)

    微짧煙흥앓Z잎何Ftl (마 원 연 애 인 하한)

    總練Jl川樂未禁 (료요산천락마긍)

    春與흥P今;휘以海 (흔흥즉긍흔샤해)

    與君훤웹覺댐짜 (여균점작바한음)

  • 步上春tll仍坐캄it (보상층산영 좌완)

    一年佳품練약邊 (얼년까경요음변)

    등훈成掛展~Ul등휩 (시 성 꽤 전화자 목)

    티灣松l쌓過蟲前 (엘전송음과암전)

    歸R폭행후徐徐검턴 (귀 정 약초~~~~ 유)

    近j흩i흉楊참,참風‘ (온옥슈양뷰뷰풍)

    橋烏맏용春春끽:음홈 (교조환흔흔괄어)

    只쩡~옳걷}끓JkJr:. (Ãl 교련 행 고꽉홍)

    *짧좁짧생Jt딛폐쏠深春 (섬 성 만유약삼 흔)

    醒錄헐풍*工在4로新 (성 록경 홍새재 신)

    *삶갱f*4>겉t~협白使 (종유고샤유백경)

    꺼:솟,uÃ..빼澤꿇i성 (역 지 천 지 랙시 균)

    언덕어l 올라셔

    때-이식

    얀흥연뭇가에 퓨흔어플숲。1 있어

    숨은샤람율러내어 감상하는마음을찾네.

    더플어 둬 언덕에 오료나 꽃플은냐바를가다라고

    앉야남포회퍼를바라보니 머드냐뮤는긍맺을강췄네

    마원에 얀개여 아지랑이 자육랴여 차마어디가팔인가.

  • 산천을휘감야플야드나 즐거융긍할슈없네

    폼의 흥이 지긍에 이료러 흔연 바다언듯

    그대 와 슐찬 냐뉴여 한까효이 시 한 슈 옳어 그효더l

    폼산어1 올라 쥬저 앉아 감상하노니

    한해의 아름다융경치가시 속에 들렀너L

    자은사 꽃까지에 걸어 듀고읽다쏘나

    시간은흘러 소냐뮤二Z놓바위 앞을지났네.

    뜰에 돋은연약한플잎위」로조용허 바내라는데

    배들늘어진 지융가까이 소슬바람뷰너l

    야렷다윤새플폼을뷰르지만픔은말이 없고

    이웃 상규나무가 。}직도 홍색을 콸잡고 있네

    -a-

    이천의인물

    늦은바 실바되어 내리나 폼은깊어 가는데

    초록홍색이 놓라고깨어나서 곳곳마다새홈네.

    늘어진 죽은나뮤는흰 가시장아서

    역사 천자의 혜랙이 고릉을알겠너11.81

    「그뭄날 북악에 놀러가서臨日遊北짧」라는 제목의 시도 눈에 띠는데, 외암 시

    절에도 설봉산이 북악北짧이라 불리웠음을 알 수 있다.

    n~εn~~~r..JiJ.~""'~I'..J>.Ú~εCI'..I"..I:.εr ...... ~~..r ...... 'C...'r~~εr.rJ..ú'C...-':ε;nr:.."'C...~'Cì..'Cr.:..εitI"" ...... ~ε~‘:"~'G..TI""..I:I..~'Cì..~ε~~~‘’~'CI.T"'.r ...... 'CJ..'Cì..'r ...... "Cìr.,Lε

    8) 시의 정리와 번역은 김주흥(전 남천한문학원장)씨가 수고하였다.

  • 軟랬f흥*.1:등차첼春 (연륙잔홍망모흔)

    J./먼장輔7]

  • 222

    이 천 의 인 물

    외암의 학통은 그의 직계 후손들을 통해서도 계승되었다. 외암은 이도익李道

    웰 · 이도융李편웰 · 이도남李道南 삼형제 아들을 두었다. 장남 도익은 순수하고

    독실한 학문과 행실로 천거되어 광흥창앉興깡 주부를 지냈으며, 삼남 도남 역

    시 학행으로 감역에 천거되었지만 출사하지 않았다. 장남 도익이 다섯 아들을

    두어 후손들이 크게 번창했는데 손인 이수옥李뚫玉은 증조부처럼 학문이 뒤어

    나서 1844년(헌종 10) 세자익위사에 천거되었지만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청

    양현감을 거쳐 동지중추부사에 오른 이장옥李꿇玉은 고향 이천에서 남천구로

    회폐11九老용9)의 뱀버로 활동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정하李貞쭉승지 · 이정두李貞

    斗-참의 · 이헌춘주없春-음성현감 · 이건춘李않캅-좌승지 · 이은춘李股春-이조참판 · 이

    일찬李日贊-참의등도 외암의 직계 후손들이다.

    근대 인물로는 독립운동가 이상혁李商ð/j과 이수흥李파興이 었다. 이수흥은 외

    암의 7세 손으로 1905년 이천읍에서 태어났다.19세되던 1923년 만주로 건너

    가서 김좌진 장군이 세운 신명新明학교를 나온 뒤 임시정부 주만참의부 특무

    정시特務표士가 되었다. 22세 때인 1926년 국내로 잠입해서 동소문파출소 습

    격사건을 비롯한 「기내4대사건」을 일으키며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아깝게

    체포되어 25세의 꽃다운 나이로 순국하였다. 이상혁은 신둔면 사람으로 3.1

    운동 때 신둔면 만세시위를 앞장서서 이끌었던 인물이다.

    ~I_r..I'I1:‘S그~..L...~~‘:''rI''I...l.εrr ..... ~~~"CI'~ζ-.....-...I ....... 'r~ε:nε~~~..ÁεI:r..L..‘~...r-...r_rJ..~.L...-I..L‘그rI""I...J..~ε~_r ...... ..-:rIII ..... "-..A~‘:‘:Li.ε:r...r..r ...... ~

    9) 1818-1827년 사이에 이전에 거주하고 있던 사류 9인이 결성한 일종의 시사(詩社)모임으로 r남천구로회 장화록」이란문집이 남아있다.

  • 利川의 천주교전래와

    숭교/:} 藝~ 짧갖

    정은(바오로)의 가계

    이천시 호법면 단천1리 단내 마을은 해발 209m의 외룡산핍Mm山을 끼고 이늑

    하게 자리잡은 마을로 천주교 단내성지가 있는 곳이다. 단내 성지는 이 미을

    출신으로 병인박해 때 순교한 정은鄭폈 · 바오로와 정베드로를 기념하기 위해

    만틀어 졌다. 단내의 정씨 일가가 언제부터 천주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는지는

    뚜렷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탓에 알 수 없다. 그러나 18세기 후반 우리나 천

    주교 발생에 중심 역할을 했던 남인계 실학자들과 정은의 집안은 흔맥과 학맥

    등으로 가깝게 얼켜 있어서 일찍부터 이들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에 서양학문이 소개되면서 천주교(서학)를 처음으로 연구하고 받아들이

    기 시작한 것은 소위 성호좌파뭘湖左ìJK라 부르는 남인계 실학자들이었다. 성호

    렐폐 이익李랩은 어디까지나 학문적인 입장에서 서학을 연구했지만, 그의 제자

    223 Ã~ o o "c"

  • 들가운데 일부는종교적인차원에서 천주교를이해하고받아들였으며, 더 나

    아가 이를 보급하기 시작했다. 성호는 정은의 조부인 정현서鄭玄瑞에게는 처당

    숙이 되는데, 성호의 사촌형인 이진李震이 현서의 장인이었던 것이다. 성호 좌

    파의 중요인물 중 한 사람인 이기양李基讓은 정은의 고종 사촌형이다. 정은의

    집안은 또 같은 남인 계열인 나주 정씨 정약용丁짧때 가문, 평창 이씨 이승훈李

    承薰 가문과도 흔맥이 서로 얼켜 있다.

    이천 천주교인들의 자랑인 순교자 정은의 자는 성재離, 세례명은 바오로

    (Paulus)이다.1804년(순조 4) 호법면 단천리에서 부친 정언겸鄭彦議과 김해 허씨

    (태레새 사이 3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동래로, 동래 정씨들은 원래

    가 신라 육부의 하나인 진지촌장珍支村長 지백호智伯虎의 후예들이라고 하나 그

    후손들의 세계가 분명치 않다가 고려조에 호장 벼슬을 한 정지원鄭之遠을 시

    조 1세로 하여 후손들이 번창하였다. 시조의 12세 손이 조선 성종 때 명신이

    며 명필로도 이름났던 정난종鄭蘭宗 이조판서이며 난종의 아들이 성종의 배향

    공신인 정광필鄭光弼-영의정과 정광보鄭光輔-장령이다.

    광보의 손이 정상신鄭象信-증 영의정이며, 정유재란 때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

    한 정기원鄭期遠-증 이조판서과 동래 정씨 이천입향조인 정흥원鄭弘遠-펼선은 상신

    의 아들이다. 흥원은 호가 만천뼈11으로 1613년(광해군 5) 문괴급제하여 정랑 ·

    세자시강원 필선 · 사헌부 장령 등을 지냈으나,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난을 피

    해 호법면 단천리로 이주하여 동래 정씨들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입향조

    흥원의 현손인 정현서鄭玄瑞가 언승彦升 · 언항彦桓 · 언겸彦議 · 언관彦觀 네 아

    들과 딸 하나를 두었으며 셋 째인 언겸이 아들 삼형제를 두었는데 그중 막내

    가 정은이다. 현서의 딸은 광주 이씨 가문의 이종한李宗漢에게로 출가하여 이

    기 Od=을낳았다.

    -껑-이천의인물

  • 조선의 천주교 수용과 박해 과정

    정은의 가문이 천주교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