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문화적 상상력의 가능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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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 音樂論壇 32집 ⓒ 2014 한양대학교 음악연구소 2014년 10월, 135-162쪽 한양대학교 초문화적 상상력의 가능성: 진은숙의 생황 협주곡《슈》(2009/2010)를 중심으로 (이화여자대학교) I. 들어가며 1996년 5월 31일,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는 미국의 현대음악 전문 연주단 체 크로노스 사중주단의 연주회가 열렸다. 1973년 창단 이래 줄곧 개성적 인 현대 작품들을 소개한 크로노스 사중주단은 이날 연주회에서도 프랑기 즈 알리-자데(Franghiz Ali-Zadeh, 1947-)와 함자 엘 딘(Hamza El Din, 1929-2006), 아스토르 피아졸라(Astor Piazzola, 1921-1992), 리크 고레츠키(Henryk Górecki, 1933-2010), 마이클 도허티(Miachel Daugherty, 1954-), 존 조른(John Zorn, 1953-)의 작품과 함께 한국 작곡가 진은숙(Unsuk Chin, 1961-)에게 위촉한 신작 ≪파라메타스트링≫초연했다. 아제르바이잔, 누비아(이집트 남부와 수단 북동부의 지명), 아르 헨티나, 폴란드, 미국 등 상이한 지역 출신이 만든 다양한 스타일의 음악 을 선보인 크로노스의 이 음악회는 당시 한국 청중들에게 유럽과는 다른 미국식의 색다른 현대음악을 접하는 흥미로운 경험을 제공했던 것 같다. 하지만 진은숙의 신작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선이었는데, 음악학자 허영 한은 다른 곡들이 “자신의 국적을 명확히 밝혔”음에 비해 “진은숙의 작품 에서는 한국을 볼 수 없었다”고 했으며, 1) 작곡가 황성호 역시 다른 제3계 작곡가들의 작품들이 “국적 있는 모더니즘”의 좋은 사례들임에 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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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音樂論壇� 32집 ⓒ 2014 한양대학교 음악연구소2014년 10월, 135-162쪽 한양대학교

    초문화적 상상력의 가능성:

    진은숙의 생황 협주곡《슈》(2009/2010)를 중심으로

    이 희 경

    (이화여자대학교)

    I. 들어가며

    1996년 5월 31일,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는 미국의 현대음악 전문 연주단

    체 크로노스 사중주단의 연주회가 열렸다. 1973년 창단 이래 줄곧 개성적

    인 현대 작품들을 소개한 크로노스 사중주단은 이날 연주회에서도 프랑기

    즈 알리-자데(Franghiz Ali-Zadeh, 1947-)와 함자 엘 딘(Hamza El

    Din, 1929-2006), 아스토르 피아졸라(Astor Piazzola, 1921-1992), 헨

    리크 고레츠키(Henryk Górecki, 1933-2010), 마이클 도허티(Miachel

    Daugherty, 1954-), 존 조른(John Zorn, 1953-)의 작품과 함께 한국

    작곡가 진은숙(Unsuk Chin, 1961-)에게 위촉한 신작 ≪파라메타스트링≫을

    초연했다. 아제르바이잔, 누비아(이집트 남부와 수단 북동부의 지명), 아르

    헨티나, 폴란드, 미국 등 상이한 지역 출신이 만든 다양한 스타일의 음악

    을 선보인 크로노스의 이 음악회는 당시 한국 청중들에게 유럽과는 다른

    미국식의 색다른 현대음악을 접하는 흥미로운 경험을 제공했던 것 같다.

    하지만 진은숙의 신작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선이었는데, 음악학자 허영

    한은 다른 곡들이 “자신의 국적을 명확히 밝혔”음에 비해 “진은숙의 작품

    에서는 한국을 볼 수 없었다”고 했으며,1) 작곡가 황성호 역시 다른 제3세

    계 작곡가들의 작품들이 “국적 있는 모더니즘”의 좋은 사례들임에 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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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은숙의 작품은 “국적이 모호”했다고 평했다.2)

    어떤 음악도 그것이 어떤 맥락 속에서, 어떤 작품들과 함께 연주되느냐

    에 따라 전혀 다른 양상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크로노스 사중주단

    은 ‘미국의 현대음악’을 주제로 한 이날 연주에서 1990년대 전반 그들이

    초연했던 이국적인 느낌의 비서구 출신 작곡가들과 더불어 재즈와 팝 음

    악의 환경 속에서 성장한 미국 작곡가들의 작품들을 함께 배치했다. 본격

    적인 글로벌 시대에 진입하며 상이한 문화들의 혼종성이 담론으로 부상하

    던 시기, 크로노스 사중주단의 레퍼토리는 그러한 흐름을 선도적으로 이

    끌어가는 것이었다. 한국 공연을 기획하며 당시 주목받던 한국인 작곡가

    에게 곡을 위촉했을 때, 이 미국인 연주자들은 아마도 아시아 출신 작곡

    가에게서 자신들이 연주해왔던 비서구 작곡가들의 작품들에서처럼 뭔가

    ‘이국적인 것’을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흐름과 거리를 두고

    있던 진은숙의 음악이 그 프로그램 속에서 낯설게 들린 것은 어쩌면 당연

    한 일이다.3) 그리하여 진은숙의 작품은 ‘한국적’이지 않고, ‘국적이 모호’

    하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당시 현대음악의 흐름에서 비서구 출신, 특히 아시아 출신 작곡가들이

    자신의 창작적 고유함을 만들어가는 가장 일반적인 방식은 서구와의 ‘다

    름’ 혹은 ‘차이’를 내세우는 것이었다. 전지구화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던

    1990년대 이후 이러한 흐름은 더욱 전면에 등장했는데, 프랑기즈 알리-자

    데나 탄둔(Tan Dun, 1957-)을 위시한 중국 작곡가들은 물론이고 토시오

    호소가와(Toshio Hosokawa, 1955-) 같은 일본 작곡가의 경우도 그러했

    다. 영국의 음악평론가 폴 그리피스도 지적했듯이, 진은숙은 흔히 서구인

    들이 비서구 출신 작곡가들에게서 기대하는 어떤 민족적인 향취를 느끼게

    1) 허영한, “크로노스 4중주단 서울 공연을 보고,” 중앙일보 6월 2일자.

    2) 황성호, “고급문화의 대중 접근의 두 양상,” 『문화예술』 204 (1996), 105.

    3) 이듬해 10월 15일 베를린에서 열린 크로노스 사중주단의 연주회에서는, 서울 공연

    레퍼토리와 전혀 다른 구성이 선보였는데, 이때 존 애덤스(John Adams, 1947-),

    헨리크 고레츠키, 스티브 라이히(Steve Reich, 1936-)의 작품들과 함께 연주된 진

    은숙의 《파라메타스트링》은 베를린 청중들에게 오히려 음악적으로 가장 주목받은

    작품이었다.

  • 초문화적 상상력의 가능성 137

    하지 않으며,4) 특정 흐름 속에 손쉽게 편입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오히려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물론 이런 평가가 한국에서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는 법이다. 더욱이

    1996년이라면 한국이 아직 IMF 경제위기를 거치며 전지구적인 신자유주

    의의 흐름에 본격적으로 흡수되기 이전이었고, 1980년대 ‘한국음악’ 혹은

    ‘민족음악’ 논쟁으로 촉발된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여전히 주류 담

    론의 하나로 자리 잡고 있었던 시기였다. 일제강점기와 분단, 오랜 독재정

    권 하에서 비판적인 성찰이 부재한 채 근대화, 서구화 이데올로기에 매몰

    되어 있던 음악계에서 1980년대 등장한 자국의 전통과 정체성에 대한 문

    제제기는 전사회적인 민주화 운동의 흐름과 맞물려 문화계 전반에 의식

    있는 흐름을 만들어내는 물꼬를 튼 일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에 접

    어들며 전지구화된 세계 질서에 본격적으로 편입되기 시작한 한국 사회에

    서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민족음악’이나 ‘한국적 정체성’ 담론은 영향력을

    갖기 어려워졌다. 1996년 아라준 아파두라이(Arjun Appadurai)는 탈식민

    주의 문화 담론의 물꼬를 튼 저작 『고삐풀린 현대성』에서 “우리는 민족을

    넘어 사유할 필요가 있다”5)고 역설했지만, 글로벌 시대가 도래 했다고 하

    여 로컬의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한정된 채널에 의해 외부 세계

    의 문화를 경험해 왔던 1980년대를 지나 전사회적인 전면적인 글로벌 시

    대에 접어들기 시작하면서 로컬의 문제는 새로운 패러다임 속에서 논의될

    것을 요구한다.

    이미 글로벌화된 세계 음악언어의 흐름 속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음악적

    상상력을 발휘함으로써 자신의 존재이유를 증명 받는 작곡가들에게 어느

    지역 출신이라는 것은 어떤 문화적 함의를 지닐 수밖에 없다. 그에 대한

    작곡가들의 다양한 대응방식이 존재해 왔지만, 과연 21세기 전 세계가 하

    나의 ‘지구촌’으로 소통하는 시대에, 그러한 문화적 정체성 찾기는 여전히

    4) 폴 그리피스, “진은숙 음악, 소리와 색채의 매혹적인 조화,” 슈테판 드레스 엮음,

    『진은숙, 미래의 악보를 그리다』, 이희경 옮김 (서울: 휴머니스트, 2012), 369.

    5) 아르준 아파두라이, 『고삐 풀린 현대성』, 차원현, 채호석, 배개화 옮김 (서울: 현실

    문화연구, 2004), 275.

  • 138 이 희 경

    유효한 질문일까? 작곡가 진은숙의 음악은 이러한 현대 사회의 특징적인

    한 면모를 잘 보여주는 듯하다. 그것이 얼마나 복잡한 문제들로 얽혀있는

    지, 21세기 아시아 출신 작곡가의 정체성이 지니는 의미를 새롭게 사유해

    볼 수 있는 흥미로운 텍스트이다. 이 논문은 전지구화된 현대음악의 지형

    속에서 진은숙의 생황 협주곡 《슈》(Šu)(2009)가 갖는 의미를 해석해보고,

    그것이 21세기 아시아 현대음악에서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자 한다.

    II. 진은숙의 생황 협주곡《슈》

    1. 작품의 탄생 배경

    《슈》는 산토리홀과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암스테르담 일요마티네

    (Zaterdagsmatinée)와 에센 필하모니의 공동 위촉으로 탄생한 곡으로,

    2009년 작곡된 20여분 길이의 단 악장 작품이다. 세계초연은 2009년 8월

    26일 도쿄 산토리 홀에서 카추요시 아키야마(Kazuyoshi Akiyama)가 지

    휘하는 도쿄 필하모닉과 우웨이(Wu Wei, 1970-)의 협연으로 이뤄졌고,

    같은 해 10월 9월 구스타보 두다멜(Gustavo Dudamel)의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취임기념 음악회에서도 연주되었으며, 2010년 개작을 거친 후

    지난 5년간 지속적으로 무대에 오르고 있는 진은숙의 대표곡 중 하나이

    다. 특히 서울시향의 해외 투어 공연에서는 빼놓지 않고 포함되는 레퍼토

    리이며, 2014년 6월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출시된 [진은숙: 3개의 협주곡]

    음반에 피아노 협주곡, 첼로 협주곡과 함께 수록되어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진은숙은 동아시아 출신 작곡가임에도 자신의 작품

    에서 어떤 문화적 함의나 제스처를 드러내지 않았는데, 이 작품은 그녀가

    동아시아 악기를 위해 쓴 최초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출세

    작이라 할 《말의 유희》(Akrostichon-Wortspiel, 1991/1993) 이후 또

    하나의 전환점이 된 작품이 2000년대 벽두에 작곡된 바이올린 협주곡

    (2001)이었다면, 그녀의 창작 세계에서 또 다른 분기점이 된 것이 바로

    이 생황 협주곡이 아닐까 생각된다. 2009년 서울대 미술관에서 열린 특

  • 초문화적 상상력의 가능성 139

    강6)에서 진은숙은 이 작품을 쓰기 위해 지난 날 작곡을 해왔다는 느낌이

    었다고 소회한 바 있다. 2년 후 필자와의 대담에서 이에 대한 의미를 되

    묻자 그녀는 이렇게 답변했다.

    그 작품은 저에게 하나의 한계를 뛰어넘은 작업이었습니다. 서양에 살

    면서 동양 출신인데 왜 한국 악기로 작곡을 하지 않느냐는 불만을 많

    이 들었습니다. 사실 저는 서양 악기만을 위해 작곡을 하고 싶었던 것

    도 아니고, 동양 악기를 무시한 것도 아니에요. 창작 생활을 하면서 어

    떤 악기를 사용해 좋은 곡을 만들려면 그만큼 내공이 쌓여야 되고 경

    험이 필요한데, 외부에서 볼 때 그런 작업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실제

    적인 현실의 문제를 모르죠. 그러다 보니 이 문제를 굉장히 이데올로기

    적으로 생각을 해요. 그 전까지 동양 악기를 일부러 외면한 것도 아니

    고, 생황을 선택한 것도 동양 악기라서가 아닙니다. 음악 활동을 하면

    서 자연스럽게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생황이라는 악기에 오랫동안 매

    료되어 있었는데, 이 악기를 가지고 저의 음악적인 아이디어가 있는,

    정말 질적으로 우수하고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 방법이 없었던 거예요.

    그것을 위해 25년의 경험이 필요했던 거지요.7)

    말하자면 진은숙은 한국 전통음악의 영향을 받거나 전통 악기를 사용하여

    곡을 쓴다는 것이 너무나 어렵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서로 다른 근원

    과 역사를 지닌 것들을 한데 뒤섞는 일에 매우 조심”8)스러웠기 때문에,

    전통음악에 대한 경외감을 가지고 거리를 뒀다고 할 수 있다.

    진은숙이 생황 협주곡을 쓰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베를린에 살고 있던 중국 생황(Sheng) 연주자 우웨이9)의 탁월한 연주를

    6) 2009년 10월 14일, 19-21시 서울대 미술관 최고경영자과정 초청 ‘작곡가 진은숙

    과의 대담’을 말한다.

    7) 필자와의 대담, “작곡가로서의 삶과 한국 음악계에 대하여,” 슈테판 드레스 엮음,

    『진은숙, 미래의 악보를 그리다』, 110.

    8) 데이비드 앨런비와의 대담, “과 에 대하여,” 슈테판

    드레스 엮음, 『진은숙, 미래의 악보를 그리다』, 236.

    9) 상하이 콘서바토리를 졸업한 후 1995년 이후 베를린에 정착한 우웨이는 생황을 현

    대음악 뿐 아니라 서양 클래식과 재즈, 월드 뮤직 등 전방위적인 음악활동을 하는

  • 140 이 희 경

    접하고 나서였다. 우연히 듣게 된 우웨이의 연주는 생황이라는 악기의 무

    궁무진한 기법적, 표현적 가능성에 눈을 뜨게 했다. 하지만 그녀가 생황이

    라는 악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훨씬 이전으로, 어린 시절 누군가 먼 산

    위에서 불고 있는 생황 소리를 듣게 되면서였다. 농현과 시김새가 많은

    다른 한국 전통 악기들과 달리 그녀는 오히려 생황의 평평하고 단조로운

    소리에 매료되었다고 한다.10) 1960-70년대 어린 시절을 보낸 세대에게

    한국의 전통문화는 새마을 운동으로 상징되는 전 사회적인 근대화 과정

    속에서 사라져간 옛 유물에 불과했다. 그녀에게 생황 소리는 “멀리서 들

    리는 소리에 대한 동경”11)이라는 표상으로 자리 잡았다. 사실 이는, 노송

    아래에서 생황을 부는 신선의 모습을 그린 김홍도의 《선인송하취생도》(仙

    人松下吹笙圖)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 문화에서는 익숙한 모습이다. 생

    황 연주자 우웨이의 연주를 통해 환기된 어린 시절 생황에 대한 기억은

    그렇게 “멀리서 들리는 소리에 대한 동경”이라는 이미지로서 이 협주곡의

    기본 아이디어가 되었다.

    2. 음악적 텍스트 분석

    《슈》의 음악적 콘셉트는 우선 생황이라는 악기 자체의 특성에서 출발한

    다. 3천 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생황이라는 악기는 원래 동아시아 관악기

    가운데 한 번에 여러 음을 (10개에서 20개까지도) 동시에 낼 수 있는 유

    일한 것으로서, 숨을 내쉬거나 들이쉴 때 모두 소리를 낸다. 우웨이는 37

    개의 관을 지닌 현대화된 생황을 사용하는데, 전통 생황과 달리 이 악기

    는 키 메커니즘을 사용해 반음계와 미분음, 화음, 폴리포니, 클러스터 등

    대표적인 아시아 악기 연주자라 할 수 있다. 그의 공식 홈페이지에 올라있는 자신

    의 현대음악 레퍼토리 147곡 가운데 대다수가 직접 초연한 작품들이다. 이 자료는

    2000-2010년까지만 기록되어 있어 그 이후로 더 늘어났을 것이다. http://www.

    wuweimusic.com/. 2014년 8월 10일 접속.

    10) 2009년 10월 19일 서울시향 5층 연습실에서 열린 ‘진은숙의 아르스노바’ 공개강

    좌에서 생황 협주곡에 대한 진은숙의 설명 중.

    11) 마리스 고토니의 《슈》 작품해설, 슈테판 드레스 엮음, 『진은숙, 미래의 악보를 그

    리다』, 242.

  • 초문화적 상상력의 가능성 141

    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으며, 때로는 전자음악처럼 들리기도 하고 때로

    는 영묘한 음향을 만들어 내거나 폭발적인 힘을 발휘할 수도 있는, 그야

    말로 엄청난 음향적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12) 진은숙은 무엇보다 이 독특

    한 악기에 내재해 있는 무궁무진한 표현가능성에 주목했고, 그로부터 자

    신의 음악적 상상력을 펼쳐갔다.

    생황 독주로 시작하는 이 곡은 점차 다른 악기 군들이 생황 소리에 합

    류하여 좀 더 큰 생황을 이루고, 나중에는 전체 오케스트라가 하나의 거

    대한 생황을 구성해 나가는 것이 기본 콘셉트이다. 독주 생황이 첫 시작

    음인 a음에다 점차 다른 음들을 더해가듯이, 독주 생황에 다른 악기들이

    합쳐져서 또 다른 형태의 ‘확대된 생황’을 만들어가는 것이다.13) 이렇게

    하나의 아이디어가 모습을 달리하며 긴 호흡으로 발전되어 나가는 것이기

    에, 이 협주곡은 그녀의 다른 독주 협주곡들과 달리 단악장 구성으로 작

    곡되었다.14) 독주 생황이 거의 쉬지 않고 음악의 흐름을 주도해가는 가운

    데, 곡을 시작하는 도입부와 마무리하는 에필로그 사이에 변화무쌍한 음

    악의 극적 드라마가 펼쳐진다.

    한 음에서 시작한 독주 생황이 하나씩 음을 더해가고 거기에 현악기들

    이 가세하여 미묘한 뉘앙스의 색채감을 만들어내는 도입부(마디 1-49)15)

    는 이 작품의 음향적, 구성적 밑그림을 보여준다. 생황의 첫 음악적 제스

    처는 마지막 에필로그(마디 493-521)에서 다시 등장하여 곡을 순환 형식

    12) 우웨이는 작곡가들을 위해 생의 주법을 여러 차례 강연했는데, 2009년 암스테르담

    아틀라스 아카데미의 강연 내용은 유투브에 올라있어 누구나 이 독특한 악기의 음

    악적 표현가능성을 접할 수 있다[“Wu Wei demonstrates the sheng”

    http://www.youtube.com/watch?v=nn45L7Sebjw 2014년 8월 10일 접속]. 그는

    2010년 4월 12일 서울시향 ‘아르스노바’에서도 악기에 관한 특강을 가진 바 있다.

    13) 독일 작곡가이자 음악학자인 고르돈 캄페는 이를 ‘하이퍼 생황’이라는 용어로 개념

    화했다. 고르돈 캄페, “색채, 공간, 마법 상자. 진은숙 작품의 관현악법에 대하여,”

    슈테판 드레스 엮음, 『진은숙, 미래의 악보를 그리다』, 433-435 참조.

    14) 피아노 협주곡(1996-1997), 바이올린 협주곡(2001), 첼로 협주곡(2008-2009/

    2010)은 4악장 구성이며, 최근 초연된 클라리넷 협주곡(2013-14)은 3악장 구성이

    다. 전통적인 오케스트라가 아닌 소규모 앙상블을 위한 피아노와 타악기의 이중

    협주곡(2002)과 생황 협주곡만이 단악장 형태의 자유로운 형식으로 작곡되었다.

    15) 여기에 사용된 마디 수는 2010년의 개정본에 의한 것이다.

  • 142 이 희 경

    으로 묶어주는 역할을 하는데, 약 2분 40초가량 되는 첫 단락은 말하자면

    “이 음악의 극적인 내부로 들어갔다가 마지막 순간 다시 나오게 되는 일

    종의 입구와 같다.”16)

    [악보] 생황 독주 시작 부분(마디 1-5) 및 현악기가 가세하기 시작하는

    부분(마디 13-18)

    © Copyright 2009 by Boosey & Hawkes Music Publishers Ltd.

    Reproduced by permission of Boosey & Hawkes Music Publishers Ltd.

    도입부에서 제시된 작품의 기본 구상은 이어지는 단락에서 더욱 본격

    적으로 펼쳐진다. 생황과 현악의 결합에서 나아가 생황과 목관, 금관, 타

    악의 다양한 결합을 선보이며 결국에는 오케스트라 전체가 거대한 하나

    의 생황으로 변모한다. 이렇게 작품의 첫 부분(마디 1-122)은 생황과 확

    대된 생황의 기본 구상을 제시하는데, 음고 구조에서도 a음에서 시작하

    여 다음 단락에서 b음과 c#으로 이어졌다가 f#으로 마무리되며, 지속음

    위주로 진행되던 음악적 텍스처도 점차 글리산도와 트레몰로가 많아지며

    두터워진다. 분위기가 바뀌며 시작되는 둘째 부분(마디 123-284)에서 생

    황은 좀 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면모를 드러내고, 생황과 오케스트라가

    여러 층위에서 더욱 복잡하게 전개되면서 다채로운 음향들의 독특한 조

    16) 하바쿡 트라버의 《슈》 작품해설, 슈테판 드레스 엮음, 『진은숙, 미래의 악보를 그

    리다』, 250.

  • 초문화적 상상력의 가능성 143

    합을 들려준다. 템포와 박자 변화도 빈번하고, 다이내믹의 극적인 대비도

    두드러지며, 격정적인 음향 텍스처와 뱃노래 풍의 리드미컬한 부분17) 등

    이 번갈아 등장하며 함께 얽혀 들어간다. 생황이 빠른 리듬을 연주하고

    오케스트라가 간헐적으로 끼어들면서 절정을 향해 몰아쳐가는 셋째 부분

    (마디 285-492)은 일종의 카덴차처럼 생황의 비르투오소 함이 더욱 부각

    된다.18) 여기서는 이전 부분들과 달리 박절적인 리듬감의 불규칙적인 강

    세에서 긴장감이 고조되고, 점증하는 에너지가 마침내 격정적으로 폭발

    한 후 서서히 사그라진다. 이때 멀리 청중석 끝에서 여섯 대의 현악기(바

    이올린 4, 비올라 2) 소리가 마치 메아리처럼 조용하게 들려오기 시작한

    다. 마지만 종결부는 도입부의 음악적 제스처가 변형된 형태로 다시 등

    장하는 일종의 에필로그로서, 영묘한 사운드가 서서히 사라져가듯이 끝

    난다. 마치 어린 시절 작곡가의 기억 속에 남아있던, 멀리서 들려오는 생

    황의 소리처럼.

    17) 아래의 예는 뱃노래 풍의 리드미컬한 부분(259-272마디) 가운데 259-261마디의

    독주 생황 파트이다.

    © Copyright 2009 by Boosey & Hawkes Music Publishers Ltd.

    Reproduced by permission of Boosey & Hawkes Music Publishers Ltd.

    독주 생황에다 이와 음향적으로 유사한 하모니카 네 대가 목관, 하프, 현악과 함께

    어우러져 또 하나의 거대한 생황이 만들어진다. 서정은은 이 부분에 사용된 하모

    니카 네 대의 화성이 독주 생황과 어떻게 음향적으로 결합되는지를 분석한 바 있

    다. 서정은, “진은숙의 음악언어, 추상화를 통한 재맥락화 - 생황협주곡 ≪슈≫를

    한 예로 -,” 『서양음악학』 16/2 (2013), 157 참조.

    18) 생황은 엄청나게 빠른 리듬과 변박에도 들숨 날숨의 기교를 극대화시켜 역동적인

    변화를 만들어내며, 취구가 아닌 관들의 구멍을 대고 불어 마치 팬 플루트처럼 소

    리를 내기도 한다(마디 287, 290. 아래의 악보 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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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4 이 희 경

    음악적 흐름 마디 / 시간19) 특기사항

    도입-제시1-122

    ca. 6 min

    생황 독주로 시작(a음), 생황+현악

    b, c#, F#음, 생황+현악/관악/타악

    전개(발전)123-284

    ca. 6.5 min

    빈번한 박자 변화, 다채로운 악기 배합,

    대조적인 음형들의 대비

    카덴차-절정 285-492

    ca. 6 min

    비르투오소한 생황 패시지, 리드미컬,

    점점 빨라지는 템포, 절정으로 몰아침

    에필로그493-521

    ca. 2.5 min

    도입부 생황 재등장. 영묘한 음향

    청중석의 여섯 현악기, a음으로 끝남

    ⟪슈⟫의 전체 흐름은 곡의 시작과 끝이 동일한 순환 형식을 띤다. 간

    략하게 요약한 위의 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협주곡은 그녀의 다른 협

    주곡들에서처럼 명료한 형식 구성에 생황과 오케스트라가 빚어내는 ‘하이

    퍼 생황’의 다채로운 음향이 특징적이다. 구성상의 명료함은 각 부분을 연

    결하거나 매듭짓는 타악기 어택과 투티 음향들에서도 잘 나타나며, 각 부

    분들과 그 내부의 작은 단락들이 서로 맞물리면서도 각기 뚜렷한 음악적

    특성을 보여준다. 음향적인 측면에서도 독주 생황에서 뿜어져 나오는 엄

    청난 에너지와 화려한 음향적 스펙트럼은 물론이고, 생황과 현악, 생황과

    목관, 생황과 금관, 생황과 타악기가 절묘하게 어우러지며 독창적인 음향

    적 판타지로 ‘확대된 생황’의 콘셉트를 구현해간다. 한편 이 곡의 주된 박

    절 구조는 2/2(4/4)+3/4로서, 도입부와 에필로그는 물론이고 각 부분의

    시작에서도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구조 설정 덕에 빈번한 변박과

    템포 변화에도 음악적 흐름의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4+3의 리

    듬 구조는 생황의 비르투오소 한 움직임이 절정으로 치닫는 셋째 부분에

    서 특히 주요하게 사용되는데, 아래의 악보 예에서도 그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질주하는 듯한 생황의 빠른 리듬의 악센트를 다른 악기들

    이 함께 강조해주고 있다.

    19) 여기에 표시된 시간은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최근 발매된 음반 [Unsuk Chin: 3

    Concertos](정명훈 지휘, 우웨이 협연, 서울시향 연주)에 실린 녹음에 의한 것이다.

  • 초문화적 상상력의 가능성 145

    [악보] 엄청난 템포로 질주하는 셋째 부분의 한 대목, 마디 384-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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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협주곡에서는 무엇보다 독주 악기와 오케스트라의 관계 설정이 중요하

    다. 피아노나 바이올린처럼 뚜렷이 자신의 존재를 전면에 드러낼 수 있는

    악기와 첼로처럼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보다 오케스트라의 전 음역을 아

    우르며 음향적인 통합을 수행할 수 있는 악기의 협주곡은 전혀 다른 전제

    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앞에서 두드러지는 개별자와 큰 공동체

    와의 관계라는 주제는 협주곡이라는 장르에서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사항

    이다. 무엇보다 협연 악기의 비르투오소한 역량과 음향적 가능성을 새롭게

    탐색하는 진은숙의 협주곡들에서 오케스트라의 관계는 협연하는 악기의 특

    성에 대한 그녀의 해석에서 출발한다. 피아노 협주곡에서는 피아노에 24개

    의 타악기를 추가하여 오케스트라가 피아노의 음향을 확대하고 증폭시키

  • 146 이 희 경

    는 역할을 하게 했다면, 고음역의 화려하고 영묘한 소리를 구사하는 바이

    올린 협주곡에서는 독주 악기가 곡 전체를 주도하며 오케스트라를 이끌

    어가도록 했고, 첼로 협주곡에서는 독주 악기가 오케스트라에 묻히지 않

    고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방식을 모색했는데, 그래서 여기서는 그

    녀의 다른 작품에서와 달리 노래하는 선율과 정서적 표현이 두드러진다.

    또한 피아노와 타악기를 위한 이중 협주곡에서는 협연자들을 한편으로

    하고 앙상블을 다른 한편으로 하여 서로를 반추하게 만든다.

    생황 협주곡에서 진은숙은 생황과 오케스트라의 관계를 ‘확대된 생황’

    으로 설정하여 다층적인 차원에서 협연 악기와 오케스트라가 어우러지게

    했다. 따라서 이 곡에서 중요한 것은 생황이 어떻게 다양한 모습의 확대

    된 생황들을 생성해내는가 이다. 도입부에서 연주되는 현악기의 여린 하

    모닉스와 글리산도는 마치 생황의 숨소리처럼 독주 악기와 융합되며, 때

    로는 생황의 글리산도 음향과 어우러져 바람소리처럼 들리기도 한다. 또

    한 생황은 목관이나 금관과도 잘 어우러지고, 심지어 다양한 종류의 타악

    기와도 음향적으로 절묘하게 결합된다.20) 이러한 작품의 특이성은 작품의

    20) 예컨대 둘째 부분의 마디 106-120에서는 글리산도로 오르내리는 독주 생황의 음

    향에다 금속 브러시로 소리 내는 비브라폰과 현악기의 글리산도 및 술 폰티첼로

    주법까지 가세하여, 마치 겨울날의 스산한 바람소리처럼 독특한 분위기의 음향이

    창출된다. 다음의 악보는 그 중 마디 106-110의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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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문화적 상상력의 가능성 147

    제목 “슈”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슈”는 이집트 신화에서 공기 혹은

    바람의 신을 상징하는 말이라는데, 이는 작곡가의 음악적 아이디어를 정

    확하게 포착한 단어라 할 수 있다. 심지어 이 단어의 소리울림조차 바람

    소리처럼 들린다. 진은숙의 다른 협주곡들에는 별도의 제목이 붙어 있지

    않다. 피아노나 바이올린, 첼로, 심지어 클라리넷 협주곡조차 수 백 년 간

    만들어진 풍부한 레퍼토리와 전사가 존재하지만 생황 협주곡은 그렇지 않

    기에 작곡가는 자신의 콘셉트를 분명하게 드러낼 제목이 필요했던 것 아

    닐까.

    그렇다면 이러한 음악적 특징을 지닌 진은숙의 생황 협주곡이 21세기

    현대음악의 흐름 속에서 어떠한 문화적 함의와 맥락을 갖고 있는지 검토

    해보자.

    III. 생황 협주곡《슈》의 문화적 콘텍스트

    1. 아시아 전통 악기와 현대음악의 접점

    20세기 현대음악에서 비서구 문화는 새로운 창작의 흥미로운 보고(寶庫)

    역할을 해왔다.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등장한 인도네시아의 가믈란

    (Gamelan) 음악에 매료된 드뷔시 이후, 서양 작곡가들에게 비서구 음악

    이 창작적 아이디어를 촉발시키고 자신의 음악적 사유를 확장시키는 주요

    계기가 되었음은 잘 알려진 얘기다. 올리비에 메시앙(Olivier Messiaen,

    1908-1992), 벤자민 브리튼(Benjamin Britten, 1913-1976), 존 케이지

    (John Cage, 1912-1992), 죄르지 리게티(György Ligeti, 1923-2006),

    칼하인츠 슈톡하우젠(Karlheinz Stockhausen, 1928-2007), 필립 글래

    스(Philip Glass, 1937-), 스티브 라이히 등의 음악에서 그 흔적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이와 관련하여 서구 학계에서는 1990년대 후반부터 ‘이국주

    의’, ‘민족주의’, ‘타자의 음악’ 등을 주제로 한 연구서들이 쏟아져 나왔

    고,21) 최근 들어서는 ‘글로벌리즘’, ‘상호문화성’(interculturality) 등의

    21) 대표적인 것으로는 Jonathan Bellman (ed.), The Exotic in Western Music

  • 148 이 희 경

    이슈로 비서구 작곡가들의 작품을 재맥락화하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

    다.22)

    이처럼 비서구 음악에 매료된 서양의 작곡가들이 자신들의 창작적 아이

    디어 속에서 그것을 새롭게 재구성하던 데서 나아가, 20세기 후반 비서구

    출신 작곡가들이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전통 악기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이는 서양에서 공부한 비서구 작곡가들이 자신들의 음악문화

    전통을 재발견하고, 전통음악 연주자들과 개인적으로 직접 접촉하기 시작

    했기 때문일 것이다. 연주자 입장에서도 작곡가들과의 협업으로 자신들의

    전통이 더욱 풍부해짐을 인식하면서 현대음악에 적극 참여하는 경우가 늘

    어났다.23)

    (Boston: Northeastern University Press, 1998); Georgina Born and David

    Hesmondhalgh (ed.), Western Music and Its Others. Difference,

    Representation, and Appropriation in Music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0); Timothy D. Taylor, Beyond Exoticism. Western

    Music and the World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2007); Raplh P.

    Locke, Musical Exoticism. Images and Reflection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9) 등이 있으며, 독일 밤베르크 대학 종족음악

    학과에서 출간되는 학술지 The World of Music (Berlin: VWB—Verlag für

    Wissenschaft und Bildung)의 1997년부터 2011년까지의 매호 주제에서도 이러

    한 흐름을 확연히 읽어낼 수 있다.

    22) 이 분야의 주목할 만한 저술로는 Christian Utz, Neue Musik und

    Interkulturalität. Von John Cage bis Tan Dun (Stuttgart: Franz Steiner

    Verlag, 2002); Yayoi Uno Everett, Frederick Lau (ed.), Locating East

    Asia in Western Art Music (Connecticut: Wesleyan University Press,

    2004); Christian Utz (ed.), Musik und Globalisierung: Zwischen

    kultureller Homogenisierung und kultureller Differenz (Saarbrücken:

    Pfau, 2007); Christian Utz and Frederick Lau (ed.), Vocal Music and

    Contemporary Identities. Unlimited Voices in East Asia and the West

    (New York: Routledge, 2013); Christian Utz, Komponiseren im Kontext

    der Globalisierung. Perspektiven für eine Musikgeschichte des 20. und

    21. Jahrhunderts (Beielefeld: transkcript, 2014) 등이 있다.

    23) 1980년대까지 이러한 흐름에 동참한 사람들은 주로 고토, 샤미센, 샤쿠하치, 비와,

    쇼 등의 일본 악기 연주자들이었다. 1990년대 이후에는 중국의 이른바 ‘신사조

    (new wave)’ 작곡가들의 등장으로 경극, 비파, 얼후, 생황 연주자들이 세계무대에

    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한국에서도 1998년 가야금 주자 이지영의 주도

    로 결성된 ‘한국현대음악앙상블(CMEK)’이 가야금, 대금, 피리, 장고 등과 서양 악

    기가 결합된 음악 창작을 적극적으로 선보였다.

  • 초문화적 상상력의 가능성 149

    1960년대 윤이상(Isang Yun, 1917-1995)과 도루 타케미츠(Toru

    Takemitsu, 1930-1996)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예악》(Réak, 1966)

    과 《11월의 단모노》(November Steps, 1967)는 동아시아 전통 악기가

    현대음악 속에서 어떻게 결합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흥미로운 두 사례라

    할 수 있다.24) 한국의 전통 제례악을 깊이 연구하여 나온 《예악》에서 윤

    이상은 한국 궁중음악의 시작과 전환 및 끝을 알리는 ‘박(拍)’을 직접 제

    작하여 사용했을 뿐 아니라, 악보에 한국 궁중음악에서 사용되던 ‘생황’의

    소리가 담겨져 있다고 명시해놓았다. 여기서 생황이 직접 사용되지는 않

    으며, 생황의 음향이 관현악으로 시뮬레이션 된다. 그 후 윤이상은 오보에

    독주를 위한 《피리》(1971), 목소리, 기타, 타악기를 위한 《가곡》(1972),

    플루트 독주를 위한 《에튜드》(1974) 같은 작품에서 한국 전통음악의 선율

    구조를 서양 악기로 재현해내는 독자적인 어법을 더욱 발전시켰다. 그가

    한국의 전통 악기 연주자들과의 교류가 아닌 추상화된 음악적 제스처의

    형태로 한국 전통 악기를 작품 속에 녹여낸 것은, 1967년 동백림 사건으

    로 납치 귀국하여 우여곡절 끝에 1969년 독일로 돌아간 이후 한국 사회

    및 음악계와 불편한 관계였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1970년대 한국 전통

    악기 연주자들 가운데 현대음악에 관심을 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

    기도 하다.25)

    반면 일본 전통 악기들과 서양 오케스트라의 협주곡인 《11월의 단모노》

    에서 타케미츠는 비와와 샤쿠하치가 서양 오케스트라와 얼마나 상이하고

    이질적인지 드러내는 것을 작품의 콘셉트로 삼았다. 그 작품 이후 일본

    전통 악기와 가가쿠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을 몇 곡 더 쓰긴 했지만, 타

    케미츠 역시 음악적 제스처보다는 자국의 전통 미학에 천착하여 ‘사와리’

    24) 이 두 작품에서 다뤄지는 전통 관련 논의는 졸고, “동아시아 3국 현대음악에서 전

    통 수용방식 비교 연구 – 윤이상, 타케미츠 도루, 탄둔의 작품을 중심으로,” 『음악

    과 문화』 8 (2003), 57-87 참조.

    25) 1970년대 한국 사회에서 전통음악의 처지는 국가 주도의 박제화된 보존 외에 사회

    적 삶 속에서 제대로 뿌리내리진 못했다. 여전히 일제강점기 이후 계속된 배제와

    억압의 굴레에서 크게 나아지지 못했으며, 그러한 사정은 1990년대에야 와서야 비

    로소 개선된다.

  • 150 이 희 경

    와 ‘마’ 같은 일본 음악의 미학적 정수에서 전통과의 접점을 발견한다.26)

    이러한 타케미츠의 전통 이해는 이후 세대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줬는데,

    토시오 호소가와는 그러한 흐름을 잇는 대표적인 작곡가라 할 수 있다.

    본격적인 글로벌 시대에 접어들면서 현대음악에서 아시아 전통 악기를

    사용한 창작은 눈에 띄게 많아졌고, 서로 다른 문화권의 악기가 한데 어

    우러지는 앙상블들도 다수 결성되었다. 1998년 요요마(Yo-Yo Ma)의 주

    도로 시작된 ‘실크로드 프로젝트’는 그러한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기획이라 할 수 있다. 점차 증가하는 전지구적인 정보 교류를 통해 서로

    다른 나라들의 문화, 음악 전통, 악기에 대한 새로운 지식이 양산되고, 클

    래식과 재즈, 팝, 록, 월드 뮤직 간의 엄격한 구분에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악기는 여전히 민족적 아이콘의 하나로 인식되는 경향

    이 있다.27) 낯선 음향의 악기가 사용될 경우, 그 악기의 역사적, 사회문화

    적 맥락이 동시에 고려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흔히 전통 악기를 사

    용할 때 나타나는 작곡가의 태도는 크게 두 가지로 대별될 수 있다. 작곡

    가가 전통 연주자들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거나, 아니면 작곡가가 새로운

    표현 영역을 개척하여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방식이 그것이다. 하

    지만 이 두 가지 태도는 서로 양립하는 것이라기보다 작곡가와 전통 연주

    자가 결합하는 양 극단을 보여주는 것일 따름이다. 실제로는 이러한 창작

    에서 전통 연주자들과의 긴밀한 협업은 필수적이며, 그로부터 자신만의

    음악적 아이디어를 끌어내는 것도 당연히 요구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2. 쇼와 생, 신화와 혁신 사이

    현대음악에서 아시아 악기들의 등장은 음악적 전지구화의 뚜렷한 징후로

    여겨지곤 하는데, 그 중에서 일본 생황 ‘쇼(shō)’와 중국 생황 ‘생

    26) 타케미츠의 전통 이해에 대해서는 졸고, “일본 현대음악과 전통의 문제,” 『한국음

    악사학보』 30 (2003), 645-651 참조.

    27) Max Peter Baumann, “The Local and the Global: Tranditional Musical

    Instrument and Modernization,” The World of Music 42/3 (2000),

    128-136 참조.

  • 초문화적 상상력의 가능성 151

    (sheng)’은 여러 배경을 지닌 서양 작곡가들에게 매력적인 악기로 각광받

    았다.28) 특히 17개의 대나무관으로 이루어진 쇼는 8세기 경 중국 당나라

    에서 유입되었다는데, 독특한 화음구성과 (수백 년 동안 살다가 스스로를

    불태운 뒤 그 재 속에서 되살아난다는 전설적인 새 피닉스로 상징되는)

    신비로운 이미지로 가가쿠 음악의 대표 악기의 하나였다. 브리튼은 1956

    년 일본 여행 후 가져온 쇼를 《컬류 강》(Curlew River, 1964)에서 실내

    오르간으로 사용한 바 있고, 메시앙 역시 1962년 일본 방문 후 《일곱 개

    의 하이카이》(Sept haïkaï, 1962) 4악장에서 8개의 독주 바이올린으로

    쇼의 화음들을 모방했으며, 슈톡하우젠도 일본 방문에서 초연된 《텔레무

    지크》(Telemusik, 1966)에서 여러 차례 쇼의 화음들을 인용했다 한다.29)

    일본 현대음악에서 쇼의 사용은 도시 이치야니기(Toshi Ichiyanagi,

    1933-)의 《카이키》(Kaiki, 1960)와 타케미츠의 오보에와 쇼를 위한 《거

    리》(Distance, 1972)가 대표적인 초기 예라 할 수 있다. 이치야나기는 당

    시 일본 악기 쇼와 고토를 서양 악기 하모니카, 색소폰과 결합하는 방식

    으로 주목을 받았고, 타케미츠는 서로 다른 문화권의 두 악기 오보에와

    쇼가 서로를 모방―예컨대 오보에는 멀티포닉스를 사용하여 쇼처럼 다성

    적인 악기가 되고, 쇼는 전통적인 화성 기능을 버리고 단선율의 지속저음

    을 연주30)―하게 했는데, 이 작품은 쇼를 독주악기로 취급한 개척자적인

    작품으로 여겨진다.31) 쇼 작품들은 1980년대 이후 더욱 늘어났는데, 이는

    1983년 독주 쇼 연주자로 국제무대에 등장하여 많은 작품들을 초연한 마

    유미 미야타(Mayumi Miyata)의 활동에 힘입은 바 크다.32)

    28) 쇼나 생과 달리 한국 생황은 독주 악기로서의 면모보다는 다른 악기와의 앙상블에

    서만 주로 사용되었으며, 독자적인 악기로 조명 받게 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다양한 장르와 접목하며 독주악기로서의 가능성을 새롭게 모색하고 있는 생황 연

    주자 김효영의 활동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29) Christian Utz, “Interkulturelles Komponieren als Herausforderung.

    Transformation, Bruch und Mythoskritik in Werken für die japanische

    Mundorgel shō,” Orientierungen: Wege im Pluralismus der Gegen-

    wartsmusik (Mainz: Schott, 2007), 71.

    30) Peter Burt, The Music of Tōru Takemitsu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1), 140.

    31) Utz, “Interkulturelles Komponieren als Herausforderung,” 72 (각주17).

  • 152 이 희 경

    쇼를 위한 작품들을 광범위하게 분석하며 그 속에서 상호문화적

    (intercultural) 작곡에서 제기되는 여러 논점들을 폭넓게 다룬 바 있는

    크리스찬 우츠(Christian Utz)33)는, 현대 작곡가들이 무엇보다 쇼의 독특

    한 음향적 아우라와 주법상의 특이성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

    다. 1980년대부터 미야타에게 직접 쇼 연주를 배운 호소가와의 경우 쇼의

    신화적 아우라에 집착하며 “모태화음”이라 불리는 가가쿠 쇼의 화음을 창

    작의 토대로 삼았고, 헬무트 라헨만(Helmut Lachenmann, 1935-)의 오

    페라 《성냥팔이 소녀》(Das Mädchen mit den Schwe- felhölzern)의

    끝에서 두 번째 장면, 소녀가 하늘나라로 올라갈 때 등장하는 쇼에서도

    그러한 신화적 이미지가 구현된다. 물론 샤야 체르노빈(Chaya

    Czernowin, 1957-)이나 존 케이지 혹은 유지 타카하시(Yūji Takahashi,

    1938-)처럼 쇼를 이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룬 작품들도 존재하지만

    말이다.34)

    반면 일본 쇼와 달리 중국 생은 무엇보다 실험적인 현대음악의 주된 사

    유 대상이 되었다. 여기서도 연주자들의 존재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데,

    진은숙의 《슈》를 초연한 상하이 출신 우웨이와 대만 연주자 황륭이

    (Huang Lung-Yi)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생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악

    기의 하나로 기원전 14-12세기에 이미 등장했다고 하는데, 근대화의 과정

    에서 17관은 36-37관의 반음계적인 악기로 개량되어 완전 현대화되었다.

    32) 마유미 미야타가 초연한 수많은 작품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존 케이지 말년

    의 숫자 작품들 가운데 쇼를 위한 《One9》, 《Two

    3》, 《Two

    4》(1991), 도루 타케미

    츠의 쇼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제의적: 가을 송가》(1992), 헬무트 라헨만의 오페라

    《성냥팔이 소녀》(1992-96/2001)의 쇼 연주 장면, 토시오 호소가와의 쇼와 현악사

    중주를 위한 《풍경 V》(1993), 샤야 체르노빈의 쇼, 색소폰, 더블베이스를 위한 《튀

    기(Die Kreuzung)》(1995) 등이 있다. 또한 그녀는 2005년 아이슬란드 음악가 비

    요크(Björk)와 미디어 아티스트 매튜 버니(Matthew Barney)의 영화에도 출연하

    여 쇼를 연주한 바 있다.

    33) 최근 출간된 책에서 우츠는 세계화 시대 상호문화적 작곡의 구체적인 한 사례로서

    쇼를 둘러싼 논의에 한 챕터를 할애한다. Christian Utz, Komponieren im

    Kontext der Globalisierung. Perspektiven für eine Musikgeschichte des

    20. und 21. Jahrhunderts, IV “Kontext shō,” 217-258 참조.

    34) Utz, “Interkulturelles Komponieren als Herausforderung,” 참조, 특히

    69-83,

  • 초문화적 상상력의 가능성 153

    1950년대 이후 현대화된 ‘생’을 위해 작곡된 음악은 공산화된 중국의 당

    시 창작곡들이 그러했듯이, 주로 오음음계 곡조에다 서양식 화음을 붙여

    변주한 단순한 스타일의 곡들이 대부분이었다 한다.35) 이러한 생이 아시

    아와 서양의 아방가르드 작곡가들에게 재발견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

    다. 우츠는 중국 생이 여러 문화권 출신의 작곡가들에서 어떻게 다뤄지는

    지를 논하면서, 고대 제의음악에서 사용되던 화음을 토대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복잡한 리듬의 비르투오소한 제스처나 다성화음-글리산도 같은

    비전통적인 연주기법 등 음향적인 가능성을 탐색하는 이른바 “혁신의 전

    략”이 두드러진다고 분석한다.36) 말하자면 생이라는 악기의 음악적 기능

    을 확장시키고 전통적인 상징과 표제적인 함의를 넓히는 방식으로 작곡되

    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악기가 지닌 전통적 함의와 이를 끊임없이 재창조

    하고 변용시키려는 것 간의 긴장이야말로 현대음악이 아시아 전통 악기를

    사용할 때 제기되는 핵심적인 이슈라 할 수 있다.

    3. 문화적 함의들을 넘어, 《슈》의 특이성

    진은숙은 이전의 많은 작곡가들이 쇼나 생을 다루었던 방식과는 달리, 악

    기가 지닌 상징적 의미나 문화적 함의보다는 악기 고유의 음향적 가능성

    에서 출발한다.37) 21세기 들어 생은 전통적인 주법의 확장은 물론이고 여

    35) Utz, “Beyond Cultural Representation: Recent Works for the Asian

    Mouth Organs Shō and Sheng by Western Composers,” The World of

    Music 47/3 (2005), 125.

    36) 이 글에서 다뤄지는 곡들은 스위스 작곡가 하인츠 레버(Heinz Reber, 1952-), 빈

    에서 활동하는 쿠바-베네수엘라-중국 작곡가 호르헤 산체스-치옹(Jorge Sánchez-

    Chiong, 1969-), 인도계 독일인으로 캐나다에서 활동하는 산딥 바그와티

    (Sandeep Bhagwati, 1963-), 오스트리아 작곡가 볼프강 수판(Wolfang Suppan,

    1966-), 그리고 우츠 자신의 생 작품들이다. Utz, “Beyond Cultural

    Representation: Recent Works for the Asian Mouth Organs Shō and

    Sheng by Western Composers,” 125-132 참조.

    37) 서정은은 진은숙이 동양 악기를 사용하면서도 동양의 문화적, 역사적 맥락은 ‘제

    거’하려고 했다고 지적했지만, 필자가 보기에 진은숙은 그러한 문화적, 역사적 맥

    락에 대한 관심보다는 그 악기의 음향적 측면에 집중했다고 보는 편이 적절할 듯

    하다. 서정은, “진은숙의 음악언어, 추상화를 통한 재맥락화 - 생황협주곡 ≪슈≫

    를 한 예로 -,“ 136 참조.

  • 154 이 희 경

    러 문화권들의 상이한 악기와의 앙상블, 심지어 라이브-일렉트로닉 음악

    과 결합하여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음향들이 탐색되어왔다.

    이 과정에서 연주자의 탁월한 기량과 표현력이 작곡가에게 창작적 아이디

    어를 촉발시키는 계기로 작용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150여 곡에 이르는 작품을 초연한 우웨이를 만난 후 진은숙은 이 악기

    가 지닌 무궁무진한 표현적 가능성에 곧바로 매료되었고, 다른 작곡가들

    이 그러했듯이 이 악기만의 고유한 음고 구조와 독특한 연주법을 우선 파

    악하는데 매진했다. 생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을 구상하며 그녀는

    생황과 ‘확대된 생황’을 작품의 기본 아이디어로 삼았고, 생황이 다른 악

    기들과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갖가지 음향적 판타지를 통해 하나의 거대한

    음향적 흐름을 구성해 나갔다. 그 속에서 펼쳐지는 변화무쌍한 극적 드라

    마를 음악적으로 구체화하는 데에는 작곡가의 다양한 문화적 경험이 녹아

    들게 마련이다.

    우선, 서양의 다른 작곡가들과 달리 진은숙에게 생황이라는 악기는 낯

    선 것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들었던 생황 소리에 대한 기억은 멀리서 들

    려오는 소리에 대한 그리움의 이미지를 환기시켰고, 이것은 작품 속에 고

    스란히 반영된다. 시작부분의 생황과 그에 더해지는 현악 하모닉스와 글

    리산도의 음향에서는 물론이고, 곡의 마지막 부분에서 청중석에 배치된 6

    대의 현악기 소리는 멀리서 들려오는 아련한 생황의 소리를 음향 공간적

    으로 재현하기 위해 마련된 음악적 장치이다. 작품의 세 번째 부분에 등

    장하는 생기 넘치는 리듬과 점차 템포가 빨라지며 몰아치듯 절정을 향해

    가는 모습은 사물놀이나 여러 민속음악에서 빠른 템포로 점점 흥을 돋워

    가는 형태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라 한다. 물론 리듬이나 화성 혹은

    전체적인 분위기 면에서 그런 음악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그런 음악

    적 구성 원리를 자신의 방식으로 변형시켜 사용한 것이다. 또한 이 단 악

    장짜리 협주곡의 중간 중간에 나오는 강한 타악기 어택들은 음악적 에너

    지가 축적되어 가는 가운데 그것이 응집되는 일종의 매듭이라 할 수 있는

    데, 작곡가는 이 역시 한국 정악에서 나오는 타악기의 역할에서 아이디어

    를 얻어 그것을 완전히 다른 형태로 표현한 것이라 말한다.38)

  • 초문화적 상상력의 가능성 155

    《슈》는 진은숙의 작품세계에서 처음으로 동아시아 악기를 위해 쓴 작품

    이지만, 여기서 악기에 내재된 역사적, 문화적 배경이나 전통적인 음악적

    제스처를 발견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이 악기에 몰두하면서 작곡가는 그

    동안 잊고 있었던 자신의 문화적 경험들을 새롭게 환기시켰음에 틀림없

    다. 물론 그 경험은 어떤 구체적인 모습이 아니라 매우 추상화된 방식으

    로 표현된다. 문화적 맥락을 유지한 채 혼종 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서, 서정은은 진은숙의 음악언어를 “추상화를 통한 재맥락화”라 개념화했

    다. 그런데 이러한 추상화가 그녀의 작품이 단지 순수한 음들의 조합만을

    추구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작품에서 진은숙은 중국 생황과

    접속하며 자신이 오랜 기간 천착했던 서양 오케스트라에서 색다른 아이디

    어를 발전시켰으며, 그 과정에서 자신의 다양한 문화적 경험들을 가로지

    르며 음악적 상상력을 펼쳐냈다. 게다가 이 작품의 제목인 “슈”는 이집트

    신화에서 가져온 것이 아니던가. 생황이라는 악기와의 접속은 진은숙으로

    하여금 분명 자신에 이전에 작업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의 음악적 가능성

    을 자연스레 열어주었다고 보인다. 비서구의 전통이나 문화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새롭게 접합하고 구성해 내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 말이다. 그러

    나 그것이 이전과 같은 ‘민족적 정체성’이나 ‘국적 있는 모더니즘’의 추구

    로 귀결될 리는 없다. 오히려 진은숙의 《슈》는 유럽, 중국, 한국, 인도네

    시아, 이집트 등 상이한 문화적 맥락들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만들어진 ‘초

    문화적 상상력’(transcultural imagination)이 발현된 흥미로운 사례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39) 독일 종족음악학자 막스 페터 바우만(Max

    38) 2009년 10월 19일 서울시향 5층 연습실에서 열린 ‘진은숙의 아르스노바’ 공개강

    좌에서 생황 협주곡에 대한 진은숙의 설명 중.

    39) ‘초문화성(transculturality)’에 대해서는 독일의 미학자 볼프강 벨쉬(Wolfgang

    Welsch)가 그 개념적 유의미성에 대해 논한 바 있다. 그는 내부적 동질성과 타자

    와의 분리를 전제로 하는 전통적인 의미의 ‘문화’ 관념이 글로벌 시대 더 이상 유

    효하지 않음을 지적하며, 1980년대 대두되었던 ‘간문화성(interculturality)’이나

    ‘다문화성(multiculturality)’ 역시 이러한 전통적인 동질적, 배타적 문화 개념을

    전제로 한 것임을 비판하고, 문화는 애초에 상호간에 뒤섞이며 변형되는 것임을

    강조하는 ‘초문화성’을 주장한다. Wolfgang Welsch, “Transculturality - The

    Puzzling Form of Cultures Today,” Space of Culture: City, Nation,

    World, ed. Mike Featherstone and Scott Lash (London: Sage, 1999),

  • 156 이 희 경

    Peter Baumann)이 지적했듯이, “서로 다른 전통 개념들을 나타내는 아

    이콘인 악기는 이미 글로벌 차원의 창조적 상상력에서 탈-민족의 세계를

    상징”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40)

    IV. 결론에 대신하여: 전지구화 시대의 ‘정체성’

    진은숙의 생황 협주곡은 어떤 인종적, 민족적 제스처를 전달하는 것이 아

    니라, 이른바 서구 예술음악의 경계 외부에 있는 것과의 창조적인 접속으

    로 빚어낸 새로운 음악의 세계이다. 이는 리게티나 라이히가 아프리카 음

    악을 자신의 창작적 원천으로 삼아 새로운 음향적 세계를 구축해내는 것

    과 유사한 방식이다. 특히 1990년대 이후 리게티 작품에서 특정 지역을

    연상시키는 구체적인 소리의 질감이 나타나면서도 그것이 다른 것들과 뒤

    섞여 그만의 독특한 감응과 촉각적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지역성의

    추상을 통한 ‘보편화’ 혹은 ‘세계화’의 관점이 아니라, 구체적인 지역성이

    다른 것들과 만나고 뒤섞임으로서 탈지역화하게 되는 그러한 흐름 속에

    있는 것이다.41)

    1990년대 이후 약진하는 동아시아(특히 중국) 작곡가들은 자신들의 ‘다

    름’을 강조하면서, 이른바 ‘중국적임’을 세계무대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

    보하는 차별화 전략으로 삼았다. 하지만 1980년대 한국에서 민족적 정체

    성을 둘러싼 논쟁을 겪은 진은숙에게는 이전 세대처럼 한국 전통이나 민

    족 어법을 가져다 쓰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존재했다.42) 그녀에게 예술가

    로서의 ‘정체성’은 흔히 비서구 작곡가들에게 요구되었던 문화적 ‘차이’를

    194-213 참조.

    40) Baumann, “The Local and the Global: Tranditional Musical Instrument

    and Modernization,” 138.

    41) 이에 대해서는 졸고, “90년대 이후 리게티 작품에서 ‘국지성(locality)’의 문제,”

    『서양음악학』 9/3 (2006), 43-61 참조.

    42) 이는 그 세대의 다른 작곡가들에게도 나타나는 경향인 듯하다. 구본우(1956-)는

    1980년대 이후 한국음악 혹은 민족음악 논의와 관련하여 중요했던 민족적 색채나

    한국적 어법의 사용에 대해 “싸구려 모방”이라며 비판적인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Bonu Koo, “Beyond ‘Cheap Imitations’,” The World of Music 45/2 (2003),

    133-135 참조.

  • 초문화적 상상력의 가능성 157

    통해서가 아니라 유럽의 동료 작곡가들처럼 ‘개성의 발현’으로 드러나는

    것이어야 했다.

    전지구화 시대 아시아 현대 작곡가들의 특이성은 더 이상 자신의 민족

    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확보되기 힘들다. 오늘날 정체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글로벌한 차원에서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이동성

    의 증가에 따라 특정 장소에 대한 안정적 소속감은 더욱 상실되고, 다양

    한 초국적 영향력 하에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초민족적, 복수적 정체

    성을 갖게 되었다. 대만 출신 영화감독 이안(Ang Lee, 1954-)의 필모그

    래피―《결혼 피로연》, 《음식남녀》에서 《센스 앤 센서빌리티》, 《와호장룡》

    을 지나 《브로크백 마운틴》, 《색, 계》와 《테이킹 우드스탁》 등에 이르기

    까지―는 로컬의 문제의식이 글로벌 차원에서 어떻게 접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라 할 수 있다. 최근작 《라이프 오브 파이》(2012)

    는 캐나다 소설가의 손에서 탄생한 인도 소년의 이야기를 대만 출신 감독

    이 할리우드의 자본을 끌어들여 영화화 한 것이다. 영화라는 장르의 특성

    상 이러한 초국적 네트워크가 더욱 두드러지긴 하지만, 음악의 영역에서

    도 그 흐름은 크게 다르지 않다. 20세기 후반 ‘동서양의 만남’이라는 모호

    한 프레임을 넘어서서, 21세기 글로벌 현대예술 담론에서 더욱 부각되는

    비서구 출신 작곡가들의 활동을 다루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진 않을

    까? ‘복수적/유동적 정체성’이나 ‘초문화적 상상력’ 등의 이슈들은 비단

    비서구 작곡가들에게만 해당되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21세기 글로벌 시

    대에는 그 누구라도 그러한 존재론적 조건에 처해있을 터이니 말이다. 진

    은숙의 생황 협주곡 《슈》는 그러한 시대적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흥미로운 한 사례임에 틀림없다.

    한글검색어: 진은숙, 생황 협주곡, 아시아 현대음악, 글로벌, 초문화적,

    정체성

    영문검색어: Unsuk Chin, Sheng Concerto, Asian Contemporary

    Music, Global, Transcultural, Identity

  • 158 이 희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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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ebsite

    http://www.youtube.com/watch?v=nn45L7Sebjw 2014년 8월 10일

    접속 - Wu Wei demonstrates the sheng

  • 초문화적 상상력의 가능성 161

    국문초록

    초문화적 상상력의 가능성

    - 진은숙의 생황 협주곡《슈》(2009/2010)를 중심으로

    이 희 경

    글로벌화된 세계 음악언어의 흐름 속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음악적 상상

    력을 발휘함으로써 자신의 존재이유를 증명 받는 작곡가들에게 어느 지

    역 출신이라는 것은 어떤 문화적 함의를 지닐 수밖에 없다. 그에 대한

    작곡가들의 다양한 대응방식이 존재해 왔지만, 과연 21세기 전 세계가

    하나의 ‘지구촌’으로 소통하는 시대에, 그러한 문화적 정체성 찾기는 여

    전히 유효한 질문일까? 전지구화 시대 아시아 현대 작곡가들의 특이성은

    더 이상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확보되기 힘들다. 오

    늘날 정체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글로벌한 차원에서 복잡한 양상으로 전

    개되기 때문이다. 진은숙의 음악은 ‘동서양의 융합’이라는 과거의 패러다

    임을 넘어, 다양한 초국적 영향력 하에서 새롭게 대두되는 ‘복수적 정체

    성’ 혹은 ‘초문화적 상상력’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이다. 이

    논문은 전지구화된 현대음악의 지형 속에서 진은숙의 생황 협주곡 《슈》

    (2009)가 갖는 의미를 음악적 텍스트와 문화적 컨텍스트의 관점에서 해

    석해보며, 그것이 21세기 아시아 현대음악에서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 162 이 희 경

    Abstract

    Toward Transcultural Imagination:

    Recontextualizing Unsuk Chin’s Šu for Sheng and

    Orchestra (2009/2010)

    Heekyung Lee

    In the globalized era, the boundaries between local and global,

    East and West become more flexible and complex; this kind of

    dichotomy is no longer so useful for appreciating a cultural

    phenomenon, even a musical work. Nonetheless, Asian composers

    are usually expected to present their cultural identity as a

    contrast to their Western colleague. Is it still appropriate to

    focus on ethnic identity or regional boundaries in the global

    era of the twentieth-first century? Unsuk Chin (b. 1961), a

    Korean composer based in Berlin, reflects a highly interesting

    phenomenon in new music within the shifting global order; this

    paper examines the possibilities of recontextualizing Unsuk

    Chin’s music without reducing the work’s meaning to ethnic or

    cultural origins through an analysis of Šu for Sheng and

    Orchestra (2009/2010). This piece is her first work for non-

    Western instrument; although it carries diverse cultural

    implications, it cannot be explained by such cliched assessments

    as ‘fusion’, ‘exoticism’, and ‘hybridity.’ Rather, it needs to be

    interpreted as an instance manifesting transcultural imagination

    of this global era.

    〔논 문 투 고 일: 2014. 08. 30〕

    〔논 문 심 사 일: 2014. 09. 26〕

    〔게재확정일: 2014. 0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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