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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6통권 제175간결함 속의 심오함 문화재 속에는 간결함을 통해 심오함을 실현했던 조상들의 삶의 태도가 담겨 있다. 본질보다 기교와 꾸밈에 기대 깊이를 실현하고자 하는 현대인들이 문화재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이다. 간략할 략 심오할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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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통권 제175호

간결함 속의 심오함

문화재 속에는

간결함을 통해

심오함을 실현했던

조상들의 삶의 태도가

담겨 있다. 본질보다

기교와 꾸밈에 기대 깊이를

실현하고자 하는

현대인들이 문화재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이다.

간략할 략 심오할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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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통권 제 1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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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의 저작물은 ‘공공누리’의 출처표시·상업적 이용

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단 사진·그림·만화는 이용할 수 없습니다.

발행일 2019년 5월 28일

창간일 2004년 10월 29일

발행처 문화재청 대변인실

(우)35208 대전 서구 청사로 189

정부대전청사

전화 (042)481-4675

팩스 (042)481-4679

전자우편 [email protected]

발행인 정재숙

제작총괄 정성조, 최계원, 김권영

편집위원 김계수, 김용희, 오명석, 김용구,

조동주, 안호, 윤리나, 이동융, 방인아,

최정우, 이솔지, 조상순, 이종숙, 이원호

홈페이지 www.cha.go.kr

기획·디자인·제작 (주)홍커뮤니케이션즈

www.hongcomm.com

우리 문화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다이

내믹하다. 우리 문화 속에는 드러나는 것으로 해석

할 수 없는 심오함이 있다. 문화재를 잘 들여다

보면 이치에 맞지 않지만 더 본질적인 인과관계를

발견할 수 있다. 당장의 필요를 해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궁극적인 가치까지 바라봤던 선조들의

정신유산을 문화재를 통해 발견해본다.

문화를 재발견하다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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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마크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음성변환 보이스아이 바코드입니다.

목차

특집

간결함 속의 심오함

서로 얼싸안아라!

- 인류애를 추구한 대표적 음악:

베토벤 9번 교향곡

세계기록유산38

영화 <타짜> 속 군산의 시간

히로쓰 가옥, 빈해원, 조선은행

미디어 속 문화재30

미주 독립운동 지도자의 숙소

- 중가주 리들리의 버지스 호텔

항일의 현장, 투쟁의 기록34

초기 철기시대 첨단기술의 결정판

- 국보 제231호 전 영암 거푸집(鎔范) 일괄

사람과 자연이 서로 기다리고 만나

만들어진 명승

- 도봉산

풍류로드18

최소한의 필선으로

마음에 합한 그림을 그리다

- 연담 김명국의 <달마도>

특집 셋10

두 줄의 현으로 연주하는 천상의 소리

- 해금 명인 차영수

특집 넷14

간결함 속의 심오함

철의 왕국, 가야

- 문화재 발굴로 세상에 드러난

가야의 경제와 문화

알면 쓸모 있는 문화재 세계26

승탑,

단순한 구성에 투영된 삶과 죽음에 대한 통찰

특집 둘06

국가 정체성과 국민의 자긍심을 드높인

- ‘문화재 환수 20년’

문화재청 20년사46

가자, 우리 동네 매장문화재 발굴현장으로

- 문화재청,「매장문화재 발굴현장

활용 교육프로그램」 시행

함께하는 문화재청48

문화유산과 4차 산업

문화재 카툰49

암울한 역사의 흔적이 남은

- 파주 구 장단면사무소

특집 하나04 문화재 과학사24 42 DMZ가 숨겨둔 보물

독자 코너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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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조상은 어떤 대상이나 상황을 대할 때

흑 또는 백으로 단정하기보다는

이면에 숨어 있는 접점을 발견하는 열린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었다.

간결함과 심오함에 대한 인식도 마찬가지였다.

궁극적인 깊이는 많은 것을 덧칠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간결하고 단순한 것으로부터 발현된다고 여겼다.

사찰의 한구석, 세월의 이끼가 두껍게 낀 승탑은

대부분 화려하게 장식된 모습이 아니라 간결하고 소박한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 속에는 우주의 섭리와 인간 생사의 무상함이 담겨 있다.

일필휘지로 단순하게 그린 조선 중기의 화가 김명국의 <달마도>는

끊임없이 대상을 관찰하면서 수정을 거듭해 완성하는 서양화와 확연히 다르다.

최소한의 필선으로 간략하게 그려내는 대담하고 힘찬 붓놀림은

대상의 고유한 인상을 강렬하게 전달한다.

‘앵금’으로도 불리는 전통악기 해금은 단 2줄의 현으로 되어 있지만

은은하고도 깊은 멋을 자아내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다.

한국적인 여백의 미를 세계에 알린 백자는 또 어떤가.

단순한 형태와 색의 절제를 추구했던 조선 사람들의 소박함,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정갈하고도 고고한 멋을 발견할 수 있다.

이렇듯 문화재 속에는 간결함을 통해 심오함을 실현했던 조상들의 삶의 태도가 담겨 있다.

본질보다 기교와 꾸밈에 기대 깊이를 실현하고자 하는 현대인들이

문화재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이다.

간결함 속의 심오함

특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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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결함

속의

심오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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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간결함 속의 심오함

특집, 둘

선인선과(善人善果) 악인악과(惡人惡果)

죽음은 살아 있는 생명체에는 피할 수 없는 절대평등

의 이치지만, 인간이 지닌 가장 근본적인 고민 중 하

나이다. 불교에서 죽음에 대한 고민은 현실로서 인식

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삶에도 번민하지 않고 죽

음에도 번민하지 않는 생명을 추구한다. 즉 삶과 죽

음을 초월하는 것은 불교가 기본적으로 ‘윤회’ 사상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이다.

죽음을 준비하는 최상의 자세는 당연히 윤회로부터

의 해방이다. 모든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 선인선과(善人善果) 악인

악과(惡人惡果), 즉 선의 종자를 많이 심으면 다음 세

상에서 좋은 곳에 태어나고, 악의 종자를 많이 심으

면 다음 세상에서 고통을 받게 된다.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삶을 두려워해야 한다. 죽음은 삶의 연장

이자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불교는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다(生死不二)’라고 강

조한다. 해탈하지 않는 한 중생은 끝없이 윤회한다.

불교 상장의례는 해탈을 위한 방편이다. 죽은 사람

에게 번뇌와 업장을 소멸하고 해탈해 윤회고를 벗어

나 불생불멸하기를 바라는 의례이자 망자를 위한 법

회이다. 죽은 사람뿐만 아니라 의례에 동참한 산 사

람도 해탈·열반에 이르기를 염원하는 의식이다. 이

같은 이유로 불교 상장의례는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뭇 중생의 관조와 깨달음을 촉구하는 법문으로 이

어진다.

승려의 장례문화

불교의 장례는 ‘다비(茶毘)’이다. 인도에서는 시신을 불

에 태우는 화장(火葬), 숲에 안치하는 임장(林葬), 갠지

스강 물속에 버리는 수장(水葬), 빈터에 놓아두는 기

장(棄葬) 등 여러 장례법이 행해졌다. 화장(火葬)은 불

교에서 다비(茶毘)라고 불린다. 『입세아비담론(立世阿

毘曇論)』에는 소장(燒葬), 수장(水葬), 매장(埋葬), 기장

(棄葬) 등 고대 인도 장례법이 나온다.

만물이 탄생하여 일생을 사는 동안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많은 활동을 하다가 이윽고

몸은 남김없이 사라진다. 삶과 죽음의 차이는

가질 수 있는 것과 갖지 못하는 것의 차이일

뿐이다. 모두 우주의 근원적 요소들이 합성

하고 다시 분해되어 우주로 환원된다. 여기

에서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 새로운 천상

이나 인간 세상에 태어나 올바른 삶을 꾸리기

위해 다비라는 절차를 밟는다. 입적 뒤 장골

처를 남기려는 뜻에서 조성된 석조승탑은

지수화풍공(地水火風空)으로 짜인 화려한

또 다른 세계의 집에서 우주의 섭리와 인간

생사의 무상함을 보여준다.

글. 정진해 (한국능력교육개발원 교수)

승탑,

단순한 구성에 투영된

삶과 죽음에 대한 통찰

승려(스님)의 유골(뼈)이나

사리를 모신 조형물이다.

삼국시대부터 만들어졌

으며 전국 곳곳의 절 주변

에서 발견된다.

승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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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1

1 기단이나 지붕돌은 팔각이지만,

몸돌은 공 모양의 원형인

충주 정토사지 홍법국사실상탑

(국보 제102호)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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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화장은 춘천 교동 등 신석기시대 동굴 유적에

서 불에 탄 사람 유골이 발견됐는가 하면 보령댐 수몰지

역인 보령 평라리 유적에서도 화장 흔적이 있었다. 『삼

국유사(三國遺事)』에는 신라 자장(慈藏) 스님의 장례를

다비로 치렀다는 기록이 있다. 12세기에 이르러서야 다

비가 정착되었다. 조선시대 배불(排佛)로 억압받던 중

에도 출가자는 모두 다비로 장례를 치렀다.

다비로 장례를 마치면 유골을 수습하고 무덤을 조성하

였다. 이를 우리는 승탑이라 불러왔다. 승탑은 승려의

묘탑으로 불교가 전래된 이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를 가진 불교 조각과 화려한 장식문양이 주

를 이루고 있다.

승탑의 시작은 통일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부도

를 만들어 스님의 사리를 봉안하고 신앙의 대상으로 삼

는 것은 신라 말에 도입된 선종 불교의 발전과 관련이

깊다. 선종 불교는 법을 전해주고 이어받은 스승과 제

자, 또 다음 세대의 스승과 제자의 활동에 의하여 법맥

이 성립된다. 선종이 유행하면서부터 조사 또는 스승의

역할이 중요시되었고, 그들의 자리를 승탑이라는 무덤

을 만들어 봉안하고 섬기게 되었다. 승탑은 승려의 사

리를 봉안한 무덤으로 부처의 사리를 봉안한 탑보다는

규모가 작다. 탑은 부처의 상징이므로 경내의 중앙부에

세우는 것이 원칙이라면, 승탑은 격이 낮은 사찰의 어

귀나 뒤편 등 조용한 곳에 모아 세우는데 이곳을 부도

전 또는 부도밭이라 부른다.

08

입적 뒤에 남은 안식처, 석조승탑

우리나라에 승탑이 처음 세워진 곳은 선문 9산의 각 선

문에서 각기 사자상승(師資相承)함으로써 각 산문에는

개산조와 개산인의 순서로 일종파의 계보가 이루어진

다. 이에 각 선문의 제자들은 소속 종파가 확정되면서

그들의 조사를 숭봉하여 보통 때 그가 설법한 내용이나

교훈 등을 어록으로 남기고, 입적 뒤에는 장골처를 남

기려는 뜻에서 조성된 것이 석조승탑이다. 승탑은 대체

로 선종이 처음 들어온 통일신라 말기부터 널리 세워지

게 되었고 고려시대 이후 선종의 발달과 함께 크게 유행

한 것으로 보면 된다. 이러한 석조승탑은 대개 9세기 중

반 이후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가장 오래된 승탑은 9세

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양양 진전사지 도

의선사 승탑(보물 제439호)과 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

탑(국보 제104호)을 통해 승탑 양식의 계통을 추정한다.

도의선사 승탑은 기단부가 신라 석탑의 기단부를 모방

하였고, 그 위의 탑신부는 팔각형으로 만들었다. 통일

신라 말부터 고려시대 초에 걸쳐 승탑은 팔각원당형을

기본으로 하여 만들어지게 되었다. 2단의 기단은 각 면

마다 우주와 중앙에 탱주를 새기고, 그 위로 탑신을 괴

기 위한 8각의 돌을 두었고 옆면에는 연꽃을 조각하여

둘렀다. 8각의 기와집 모양을 하고 있는 탑신은 몸돌의

한쪽 면에만 문짝 모양의 조각을 하였을 뿐 다른 장식

은 하지 않았다. 지붕돌은 밑면이 거의 수평을 이루고

있으며, 낙수면은 서서히 내려오다 끝에서 부드러운 곡

선을 그리며 위로 살짝 들려 있다.

9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은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팔각원당형 승탑이다. 염

거화상은 도의선사의 제자로 우리나라 선종의 제2조로

꼽힌다. 염거화상탑은 844년에 축조되면서 이후 대부

분의 승탑은 이 양식을 따르고 있다. 아래위 각 부분

이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삼고 있다. 기단이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으며, 각 면

에 연꽃을 장식한 조각이 멋스럽게 펼쳐져 있다. 하대

석에는 사자를 돋을새김하였고, 중대석은 측연화문을

간결함 속의 심오함

특집, 둘

승탑은

승려의 묘탑으로

불교가 전래된

이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를 가진

불교 조각과 화려한

장식문양이 주를

이루고 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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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3

4 5

4 현재 가장 오래된 승탑으로 추정

되고 있는 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

(국보 제104호)

ⓒ 문화재청

5 여주 고달사지 승탑(국보 제4호)

중대석의 운룡문

ⓒ 문화재청

2 신라 자장(慈藏) 스님의 장례를 다비로

치렀다는 기록이 있는 『삼국유사』

ⓒ 문화재청

3 불교의 장례인 다비(茶毘)식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새기고 가운데에 향로를 새겼다. 2단으로 마련한 상대

석의 하단에는 앙련을 두 줄로 돌려 우아함을 살리고

윗단에는 면마다 측연화문을 새기고 안에 여러 문양으

로 장식하였다.

탑신의 몸돌 8면에는 문짝 모양과 사천왕상을 번갈아

가며 배치하였는데, 입체감이 있어 사실적으로 표현되

었다. 지붕돌은 당시의 목조건축양식을 잘 따르고 기왓

골과 기와의 끝마다 새긴 막새기와 모양, 밑면의 서까

래 표현 등은 실제 건물의 기와지붕을 보고 있는 듯하

다. 상륜부는 모두 없어졌다.

고려시대에는 승탑의 양식이 다양해지고 팔각원당형을

기본으로 하여 다른 형태의 승탑이 만들어진다. 전체가

사각으로 된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현묘탑(국보 제101

호)과 기단이나 지붕돌은 팔각이지만 몸돌은 공 모양의

원형인 충주 정토사지 홍법국사실상탑(국보 제102호),

그릇을 거꾸로 엎어놓은 듯한 모양의 태화사지 십이지

상승탑(보물 제441호) 등이 대표적이다. 조선시대에 와

서는 석종형 승탑이 주류를 이루었다. 대표적인 승탑

은 신륵사의 보제존자석종(보물 제228호)으로 기단은

돌을 쌓아 높게 만들고 탑신은 아무런 꾸임이 없고, 꼭

대기에는 머리 장식으로 불꽃무늬를 새긴 큼직한 보주

가 솟아 있다.

승탑에 새긴 다양한 문양 중에 연꽃이 주를 이루고 있

는데 이것은 극락에 가서 연꽃 속에 다시 태어나려는 극

락왕생의 염원을 담은 의미를 갖는다. 또한 사자가 승

탑의 기단석에 조각되어 있는 모습은 수많은 번뇌와 망

상인 사악한 무리에게 빈틈을 보이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으로 악귀를 물리치는 용감한 수호신이다. 통일

신라시대부터 시작된 가릉빈가는 영원히 망자를 기리

도록 하려는 뜻이다. 생사의 순환을 계속하면서 부처님

이나 고승대덕을 찬양하는 역할을 하는 음악신을 대신

하여 영원한 음악을 만든다. 이 밖에도 신장상, 비천상,

물고기, 두꺼비, 거북 등을 조각하여 죽은 사람에게 번

뇌와 업장을 소멸하고 해탈해 윤회고를 벗어나 불생불

멸하기를 바라는 의례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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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예술가’ 하면 떠오르는 모습은 이렇다. 현실

보다 꿈을 좇는 사람, 그래서 생활력이 없고

상식이나 일반 규범을 과감하게 뛰어넘어도

용납되는 사람, 술을 엄청나게 잘 먹어야 되고

지저분한 외모를 지녀야 하며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창작에 몰두해야 하는 사람, 성격이

거칠거나 괴팍해야 하며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이상한 행위나 버릇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사람, 평생 가난하고 외로우며 불행하게 살다

가 일찍 죽거나 비참하게 세상을 떠나야 하는

사람. 이런 모습은 유독 화가에게 많이 적용

된다. 이렇듯 왜곡된 예술가상을 우리 머릿

속에 심어놓은 데에는 매스컴의 역할이 지대

하다. 이런 이미지는 천재 예술가인 경우

대부분 용서가 되며, 때론 신화로 승화되기

까지 한다. 위대한 예술 작품을 창작해 인류

에게 보답 했기 때문이리라.

글. 전준엽 (화가)

간결함 속의 심오함

특집, 셋

연담 김명국의 <달마도>

최소한의 필선으로

마음에 합한

그림을 그리다

1

김명국

조선 중기에 활동한 도화서 화원

이다. 자는 천여(天汝), 호는 연담

(蓮潭)·취옹(醉翁), 본관은 안산

(安山)이다. 도화서 교수와 정6품

사과(司果)를 지냈다. 김명국은

평소에 호방하고 술을 좋아하였

음이 여러 기록에 전한다. 현재

남아 있는 유작들은 안견파(安堅

派)의 화풍을 따른 것도 있으나,

대부분 절파(浙派) 후기의 광태파

(狂態派) 화풍의 작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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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 김명국의 <달마도>는 원래 일본에

있던 것을 국내에 들여온 것으로,

통신사행 중에 그린 작품으로 알려

져 있다. 순식간에 그려진 거침없

고 호쾌한 필치는 그의 대담하고

호방한 선화의 정수를 보여준다.

ⓒ 국립중앙박물관

2 호방하고 대담하면서도 소탈한 필

치가 돋보이는 <녹수선경도>

ⓒ 간송미술관

조선 회화사를 수놓은 화가들의 미스터리

조선 회화사를 수놓은 화가 중 ‘신필’로 불리는 세 명의

천재가 있다. 연담 김명국, 호생관 최북, 오원 장승업.

이들은 모두 술과 친했으며, 창작의 배경에 괴팍한 버

릇이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죽음에

미스터리가 따른다는 점이다. 그들은 모두 세상을 떠

난 연도가 확실하지 않다. 조선시대의 화가 천시 풍조

가 이들의 생애를 정확하게 기록으로 남기지 않은 탓

도 있다.

이런 모습을 가장 충실하게 보여준 이는 최북

(1712~1786?)이다. 중인 출신으로 조선시대 엄격한 신

분 사회를 헤집어온 그의 일생은 가난했고 외로웠으며

처절하게 살다가 눈보라치는 밤길을 만취 상태로 걸어

오다 그야말로 비참하게 객사했다.

천재의 기운이 듬뿍 묻어나는 최북의 회화는 인문적

향기를 격정적 낭만성으로 풀어내 독보적 위치를 점

하고 있다. 사실 그는 자기 눈을 찌른 미치광이 화가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그 이유가 무리한 그림을 요구하

던 고관대작에게 대적하기 위해서였다고 알려져 있다.

이런 성정 탓에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기가 어려웠다.

자신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하는 세상에 대해 최북은 자

조적 흔적을 보이기도 했다. 그의 호는 ‘호생관’이다. 풀

이하면 ‘붓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름의 북

(北)자를 둘로 쪼개 ‘칠칠(七七)’이라는 자를 썼다. 스스로

‘그림이나 그려 먹고 사는 칠칠이’라는 자기 비하를 통

해 세상에 대한 울분을 삼켰던 것이다.

조선 말기 화가 장승업(1843~1897?)도 이에 못지않다.

‘업을 잇는다’는 뜻의 이름을 쓴 것으로 볼 때 중인 출

신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무슨 종류의 직업이었는지

는 알 수 없으나 그림으로 조선 말기를 휘어잡았다. 왕

의 총애까지 받았지만 그의 자유정신을 막을 수는 없

었다. 술과 여자, 방랑으로 생애를 수놓으며 탁월한 재

능을 떨치다 소리 없이 사라져 신비감을 더한다. 평소

술에 취하면 신선이 되겠다던 생각을 실천한 것은 아

닐까.

취옹(醉翁)

안견 이후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연담 김명국(1600~?)

은 최북이나 장승업에 비하면 존재가 그나마 역사에

흐릿한 윤곽을 새기고 있다. 도화서 화원으로 벼슬을

했고, 임진왜란 후 일본 통신사 수행화원으로 두 차례

(1636년, 1643년)나 일본을 다녀왔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리고 일본에서도 그림 재능을 인정받았고, 그의 신

필을 알아본 일본 관리들로부터 많은 주문을 받은 것

으로 알려져 있다. 아마도 선종화를 선호했던 일본의

취향이 선화에 능했던 김명국과 꼭 맞았던 것이었기

때문이리라.

김명국 하면 일반인에게는 낯선 이름이지만, 중고등학

교 미술교과서에 나왔던 <달마도>가 그의 작품이라면

‘아, 그 그림’ 하고 기억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필력으

로만 본다면 조선 회화사를 통틀어 그를 능가할 화가

가 없다고 말해도 무리가 없다 할 정도로 천재성이 보

인다. 그만큼 기행과 관련된 에피소드도 많다.

특히 술은 그에게 창작의 촉매제였다. 스스로 ‘취옹(醉

翁)’ 즉 ‘술 취한 늙은이’라는 아호를 지어 쓸 정도였으니

까. 기록에 의하면 “사람 됨됨이가 거친 듯 호방하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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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김명국의 활달하고 호방한 필묵

법을 출실하게 보여주는 <달마절

로도강도>

ⓒ 국립중앙박물관

5 비밀스런 처방이 적힌 족자를

가운데 두고 얘기가 한창인

두 신선을 그린 <비급전관>.

두건에서부터 도포자락에 이르기

까지 굵기에 변화를 둔 빠른

필치의 감필법을 구사하였다.

ⓒ 간송미술관

3 <달마도>와 함께 김명국의 대표작

으로 꼽히는 <설중귀려도>

ⓒ 국립중앙박물관

간결함 속의 심오함

특집, 셋

12

농담을 잘했으며, 술을 즐겨 한 번에 몇 말씩 마셨다.

그가 그림을 그릴 때면 실컷 취하고 나서 붓을 휘둘러

야 더욱 분방하고 뜻이 무르익었으며, 필세는 기운차

고 농후하여 신운이 감도는 것을 얻게 된다. 그의 걸작

중에는 미친 듯 취한 후에 나온 것이 많다고 한다. 때

문에 좋은 작품을 얻으려면 반드시 술독을 지고 가야

했다”고 전한다.

그런 흔적이 잘 보이는 작품으로는 <달마도>와 함께

대표작으로 꼽히는 <설중귀려도(雪中歸驢圖)-눈 속에

나귀 타고 돌아오는 사람>가 있다. 이 그림은 취중에

완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먼저 인물부터 그린 것으로

보인다. 나귀 탄 선비와 시종은 취기가 시작될 무렵 그

린 탓에 섬세하고 정확한 사실 묘사가 돋보인다. 앞쪽

다리와 바위, 나무 그리고 중간 참의 길과 집은 서서히

취흥이 오를 무렵 그린 듯 필세가 힘차다. 설경의 백미

인 눈 덮인 산과 하늘에 이르면 취흥의 절정에서 나온

신필의 경지가 묻어나고 있다.

천재의 필력이 담긴 명작

김명국 하면 역시 <달마도>다. 중국 선종을 창시했다고

알려진 달마 스님의 초상이다. 선종은 6세기경 중국으

로 들어온 인도의 달마 스님이 9년간 면벽 수도를 통해

깨달음을 얻으면서 알려졌다. 참선 수행하는 달마의 모

습이나 얼굴만을 부각시켜 그린 것을 <달마도>라고 한

다. <달마도>는 부릅뜬 눈을 강조한다. 눈에 힘이 없으

면 달마도로서의 의미가 퇴색된다고 여겨진다. 달마 스

님이 면벽 수도 중 졸음을 이기려고 눈꺼풀을 잘라버렸

다는 일화에서 유래된 형식으로 알려져 있지만, 참선의

경지에서 깨달음을 놓치지 않으려는 의지를 담아야 하

기 때문이리라.

불교의 한 종파로 1,5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선종의 대

표적 이미지인 <달마도>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양권

여러 나라에서 오래전부터 제작돼왔다. 그중 가장 출중

한 작품으로 평가되는 것이 김명국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강한 먹과 옅은 먹으로 농담을 조절해 강렬

한 대비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얼굴은 옅은 먹으

로 옷은 짙은 먹으로 그렸는데, 모두 한 호흡으로 그렸

다. 옅은 먹선은 인간적 면모의 달마를, 짙은 먹선의 강

렬한 표현의 옷은 정신적 의지를 보여준다. 붓의 속도에

서 주저함이 전혀 보이지 않고 순식간에 그려야 나타날

수 있는 분위기가 여실하게 드러나 있다. 천재의 필력이

아니면 도달할 수 없는 경지에서만 나오는 표현력이다.

붓글씨로 단련된 그의 필선은 대상 핵심만 간추려 표

현하는 감필법에 능했는데, 인물화에서 많이 쓰인 전

통회화 묘사법이다. 감필법을 유창하게 구사하려면 필

력 외에도 사물의 특징을 한눈에 걸러낼 수 있는 직관

력이 필수다. 김명국의 감필법은 <달마도>에서 절정

을 보인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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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의 성격에서도 김명국의 화재가 유감없이 드러난

다. 오랜 수도로 지친 표정을 만들기 위해 옅은 먹으로

얼굴을 그렸다. 눈은 활짝 뜨고 있지만 피곤함이 흠뻑 묻

어 있다. 정신력으로 버텨내는 수행의 고통은 미간의 강

한 먹선(얼굴에서 유일하게 쓴 짙은 선이다)으로 표현하

고 있다. 면벽 수도의 오랜 시간의 흔적은 덥수룩한 수염

으로 나타냈다. 매부리코와 커다란 눈으로 인도인의 특

징을 부각해 스님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달마의 모습

도 함께 새겨놓았다.

김명국의 신필을 보여주는 것은 강한 먹으로 거침없이

그려낸 옷이다. 먹선의 힘은 머리에 쓴 두건에서 얼굴을

타고 내려오는 오른쪽 선에서 절정을 보인다. 리드미컬

하게 흐름을 보이는 선인데, 한 번의 붓질로 힘을 교묘

붓글씨로 단련된

그의 필선은

대상 핵심만 간추려

표현하는 감필법에

능했는데, 인물화에서

많이 쓰인 전통회화

묘사법이다.

13

5

하게 조절해 턱수염 부분에서 갈필 효과까지 보여준다.

이 때문에 선에서 힘이 더욱 강조되어 보인다. 합장한 손

은 소매 속에 감추었지만 수행의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

기 위해 소매의 선을 가장 강하게 그렸다. 강철의 힘이

느껴지는 긴장된 직선으로 처리해 달마선사의 수행 의지

를 강조하고 있다.

이 작품 역시 얼굴 표정은 취기가 오르기 전에 섬세하게

그린 것으로 보이며, 그의 필력이 온전히 드러나는 옷 부

분은 취흥의 절정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이 주제의 초상은 종교적 아이콘처럼 알려져 현재까지도

여러 스님들에 의해 제작되기도 한다. 특히 선불교가 번

성한 일본에서 <달마도>는 인기가 많았고, 스님뿐만 아

니라 많은 화가들에게 의해 제작된 그림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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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결함 속의 심오함

특집, 넷

14

연습벌레였던 유년 시절

음악을 좋아하고 관심도 많았던 차영수 명인의 부모님

은 어린 딸에게 한국무용을 가르쳤다. 하지만 그는 춤

보다 음악에 더 관심이 갔다. 그렇게 중학생이 되면서

전통악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배우면 배울수록 욕심이

생겼다.

“가족 중 예술계에 있는 사람은 저 외에는 없어요. 그런

데 예고에 들어가보니 ‘직계’가 아니면 소외되는 분위기

였어요. 대회에 나가도 짜여 있는 판이라는 걸 많이 느

꼈죠. 실력으로 인정받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학교,

집, 학원’이 전부일 정도로 악바리처럼 했어요. 그때부

터 이 길이 내 길이다 생각했던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서이기도 했지만 무엇

보다 ‘잘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대학에 가서도 연습벌

레였다. 그때는 다른 사람을 넘어서기 위해서가 아닌

오직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어떤 한 마디가 있으면,

작은 울림통에 세로로 대를 세우고 울림통과

대 사이에 두 개의 줄을 연결하여, 말총으로

만든 활대로 문질러서 소리를 내는 악기.

해금은 그 고유한 음색으로 깊은 멋을 자아

내며 우리민족의 세계관, 사상, 철학을 세계인

들에게 전하고 있다. 단 두 줄의 현에서 나는

더없이 그윽한 소리에 이끌리어 해금연주자의

길에 들어선 차영수 명인. 알아갈수록 깊이

빠져드는 해금의 아름다움에 그는 다른 곳에

눈길한 번 주지 않고 예인의 삶을 살고 있다.

글. 성혜경 사진. 이민희

해금 명인 차영수

두 줄의 현으로 연주하는

천상의 소리

1 차영수 명인과 예인의 삶을 함께

해온 해금

2 해금을 통해 마음을 치유하고,

해금을 통해 한국의 전통을 전하는

차영수 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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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마디만 되돌려서 계속 듣고 똑같은 소리가 날 때까

지 따라 하곤 했어요. 그다음에는 저만의 색깔을 만들

어내는 연습을 했죠. 음정은 같아도 어떻게 표현해내

느냐는 다 다르거든요. 사람마다 생김새 다 다른 것처

럼 말이죠.”

교실에서 혼자 연습을 하고 있으면, 그 소리를 듣고 와

서 누가 연주하나 창문 너머 구경하는 사람들도 많았

다. 그럴 때면 왠지 으쓱해 더 신나서 연습을 했다. 하지

만 다른 연주자가 해내지 못하는 가락을 연주했을 때,

다른 연주자와 달리 특유하게 표현해냈을 때 느끼는 성

취감은 사람들의 관심이나 칭찬에 비할 수 없는 가장

큰 기폭제였다.

욕심껏 배운 전통

대학 졸업 후에는 중앙국악관현악단을 거쳐 국립국악

관현악단에서 반주자로 활동했다. 그 후 관현악이 아닌

민속악을 좀 더 깊이 하고 싶은 마음에 한국의 집으로

적을 옮겼고 국립창극단 기악부에도 오랜 기간 몸담았

다. 그러면서 석사과정, 박사과정도 밟았다. 너무나 감

사하게도 순탄하게 하고 싶은 것, 배우고 싶은 것들을

할 수 있었다.

여건이 허락됐고 운도 따랐지만, 모든 것은 그의 욕심

과 노력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은 다 울면서 태어나잖아요. 계면조 같은 슬픈 가

락은 비교적 연주하기 쉬운데 오히려 씩씩한 느낌의 우

조나 평조는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죠. 저 같은

경우엔 제가 연주한 걸 녹음해서 계속 다시 듣고 안 되

는 부분을 중점적으로 연습했어요. 스스로 생각해도 악

바리처럼 했죠.”

그의 욕심과 노력은 해금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굿반주

를 비롯해 경기민요 반주, 남도민요 반주를 배웠고 한

복 짓는 법과 천연염색을 배우기도 했다. 박사과정은

음악과 차에 대해 연구하는 예다학을 전공했다. 음악에

국한되지 않고 전통의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졌고 관

심에 그치지 않고 직접 배워야만 직성이 풀렸다.

간결함 속의 심오함

특집, 넷

저만의 색깔을

만들어내는 연습을 했죠.

음정은 같아도

어떻게 표현해내느냐는

다 다르거든요.

사람마다 생김새

다 다른 것처럼 말이죠.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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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금을 포기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해금 말고 다른 것

에도 자꾸 관심이 생기더라고요. 한번은 굿반주를 배웠

는데, 아침 일찍 가서 레슨을 받고 바로 국립극장으로

출근하곤 했죠. 그리고 연습을 하다가 모르는 곡이 나

오면 그 곡 연주한 분을 찾아가서 직접 들어봐야 했어

요. 그러면 답이 나오더라고요.”

음악에서만큼은 자신에게 엄격했기에 차영수 명인은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도 사명감이 크다.

“처음 가르쳤던 제자가 벌써 마흔이 넘었어요. 서울, 평

창 등에서 제자들이 해금을 가르치고 있죠. 저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해금을 하게 된 것 자체가 뿌듯하죠.”

자신이 해금을 사랑하듯 많은 사람들이 그 아름다움을

향유하길 바라는 것이 그가 예인의 길을 걷는 또 하나

의 이유이다.

사람의 목소리를 닮아 아름다운 소리

“해금은 손가락 마디에 현을 놓고 악력으로 음을 조절해

서 연주해요. 피아노 건반을 치듯이 악력으로 음정을 표

현하죠. 그만큼 감각이 아주 중요해요.” 단 두 줄의 현을

가지고 기쁨과 슬픔, 씩씩함과 여림…, 수많은 감정을

17

4 차영수 명인에게 감동이 있는 공연

은 큰 무대 위에서의 공연이 아니

라 듣는 이들에게 위로를 안겨주

는 공연이다.

5 차영수 명인은 전공자는 물론 대중

들에게 해금을 가르치고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

3 대금, 기타와 합주로 가수 이선희

의 <인연>을 연주하는 차영수 명인

5

표현할 수 있는 악기가 해금이다. ‘깽깽’거린다고 표현하

는 사람도 있지만 해금이 내는 소리는 사람의 목소리와

가장 가깝고 그러기에 다양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

“제 반주에 김영림 선생님이 ‘한오백년’을 부르실 때 소

름이 쫙 끼친 적이 있어요. 제 반주에 춤을 추는 모습을

봐도 그렇죠. 악기 연주 그 자체로서도 아름답지만 노래

와 춤과 어우러질 때 더 큰 감동을 전할 수 있답니다.”

노래와 춤 그리고 다른 장르의 음악과 함께일 때, 해금

은 잘 어우러지면서도 또 그만의 존재감을 나타낸다. 현

대적인 곡과 해금의 콜라보레이션을 자주 접할 수 있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차영수 명인에게 마지막으로 던진 질문은 ‘당신에게 해

금은 무엇인가요?’였다. 그는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했

다. ‘마음을 치유해주는 악기’라고. 감동이 있는 공연은

큰 무대 위에서의 공연이 아니라 듣는 이들에게 위로를

안겨주는 공연이다.

뿌리를 알 때 새로운 길로 가지를 낼 수 있기에, 공연을

통해 전통을 알리는 데 힘쓰겠다고 말하는 차영수 명인.

해금의 곱고도 강한 선율을 닮은 그의 마음결이 잔잔한

울림을 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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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들의 등산애호는 예부터 남달

랐다. 경치 좋은 명산을 찾아다니며 남긴 기행

문, 시문과 바위각자, 회화를 비롯해 요즘 등산

용품만을 고집하던 중소기업들이 크게 성공

한 것을 보아도 그렇다. 무엇보다 이런 경향은

도처에 우뚝 솟은 산들이 바로 우리 선조들이

향유하던 명승지였던 것에 기인한다. 이번

에는 그간 숨겨져 있던 조선의 명승, 도봉산

길에 올라본다. 안대회 교수는 조선 후기 남승

도를 보면 포천의 금수정, 금강산과 함께

도봉이 조선 최고의 명승 중 하나였다고 했다.

성해응의 『동국산수기』에도 도봉산이 언급된

것을 보면 당시 그 지역을 대표하는 명승지

였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글. 신현실(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우석대 조경학과 교수)사진. 김하람

도봉산

사람과 자연이

서로 기다리고 만나

만들어진 명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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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산을 ‘명승’이게 한 도봉서원

하늘이 명승지지(名勝之地)를 마련한 것은 그 사람들

에게 사치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거

기에 가지 않으면 명승이 또한 스스로 나타나지는 못

한다. 이것은 서로 기다려서 이루어지는 이치이다(부

용재기).

번암 체제공의 명승에 관한 글을 좇다 보면 도봉산의

무엇이 조선의 명승지로 대박 나게 한 것일까, 궁금증

을 자아낸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로 우리나라 명승을 부흥시킨

유홍준 교수는 TV 프로그램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답

사지로 선암사를 꼽았다. 다음 날, 사찰 일주문 가는

길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여러 문헌을 찾다 보면 도봉산이 명승으로 각광받게

된 요인은 도봉서원이 가장 유력해 보인다. 도봉산을

주제로 한 유산기들도 거의 도봉서원 건립 이후의 글

들이다. 또 성해응의 『동국산수기』는 도봉산을 소개하

면서 도봉서원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

도봉서원은 통일신라시대 때 창건된 영국사 터에 1573

년 조선의 사림정치를 선도한 정암 조광조를 추존하

고 1696년 우암 송시열을 추가로 봉안했던 사액서원이

다. 사림파들이 득세하자 유림 내 당파를 막론하고 이

도봉서원을 드나들며 추모하고 많은 시와 글을 남기면

서 비로소 명승으로 회자되었을 것이다. 도봉(道峯)이

란 이름은 옛날 이곳에 사찰이 처음 창건될 때부터 붙

여졌다고 한다. 최근 발굴 결과에 의하면 도봉산(道峯

山) 도봉계곡에서는 율곡 이이가 쓴 <도봉서원기>에

서처럼 고려시대~조선시대 도봉산 영국사와 조선시

대 도봉서원이 한자리에서 확인되었다(박찬문, 2018).

이 내용은 최립의 시에서도 확인된다. 발굴 조사 결과,

도봉서원은 여러 차례 중건되었고 훼철된 지금은 그

흔적을 찾기 어렵다. 오히려 영국사 시절의 유물들이

대거 발견되었다고 한다.

최립( ) 간이집(簡易集) 제6권 「초미록(焦尾錄) 차운

하여 도봉서원(道峯書院)에 제하다」

옛 절터에 새 서원 영욕이 서로 점철된 듯

/

도봉이란 그 이름 기이한 인연을 깨닫겠네

/

봉우리마다 수려한 빛 하늘을 향해 치솟았고

/

콸콸 흐르는 찬 시냇물 잠시도 쉬질 않는구나

/ 2

도봉산의

무엇이 조선의

명승지로 대박 나게

한 것일까,

궁금증을

자아낸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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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현을 모신 이곳 혼령이 오르내리나니

/

학문 닦는 후학이여 미위를 삼가 살필지라

/

만정의 이적보단 정사가 더 낫고말고

/

오늘날 우리 동방 무이정사(武夷精舍)를 보겠도다

/

도봉서원 곁의 계곡과 각석군

성해응이 경기도의 산수를 기록한 부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도봉산은 한양의 동쪽 길에 우뚝 서 있다. 만장봉은

1 광륜사는 신라시대 의상조사(義湘

祖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2 도봉계곡의 청아한 풍경에 초여름

더위가 사라진다.

3 산중턱에서 올려다본 도봉산 정

상인 만장봉

3

더욱 높이 솟아 있으며 망월암은 그 옆 산기슭에 있다.

도봉서원이 그 서쪽 골짜기에 있는데 감상할 만한 샘

물과 돌이 있으니 고인이 된 유희경의 소유물이었다.

서원에는 조광조와 송시열을 배양하고 있고 침유당은

서원의 동쪽에 있다. 샘물 소리가 더욱 맑고 빠르나 시

내를 따라 올라가면 소광정이 있고 봉우리 동쪽에는

조계폭포가 있다.

성해응이 『동국산수기』에 꼽은 도봉산의 명승자원

은 만장봉, 망월암, 도봉서원, 계곡, 침유당, 소광

정, 조계폭포다. 이 중 도봉서원과 침류당은 유희경

과 관련된다. 유희경(1545~1636)은 여항문인으로 양

주목사 남언경을 도와 도봉서원을 건립한 인물로 도

성 안에 침류대를 경영하면서 이곳 도봉산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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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묵, 2006). 유희경의 호는 시은(市隱)으로 저자

거리에 은둔한다는 뜻이며, 세상 가까이에 살면서 자

신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의지로 해석된다. 침류당은

1615년 도봉서원 옆에 그가 세운 것이다. 계곡에 ‘도

봉동문’ ‘복호동천’ 등 바위글씨가 남아 있어 서울특별

시기념물 제28호로도 지정된 바 있다. 심조의 『도봉

행일기』에는 도봉서원 일원 계류에 바위각자를 언급

하고 있어 당시 주변 경관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

료가 된다.

‘조물주가 만든 기묘한 솜씨’ , 만장봉

만장봉에 관한 묘사는 박세당의 시에도 나타난다. 그

는 수락산에 들어와 살면서 늘 도봉산을 바라볼 수 있

었을 것이다. 이 시에는 조물주가 만든 기묘한 솜씨

라 하여 도봉산의 아름다움을 예찬한 가운데 밝은 달

과 어우러진 모습과 꽃이 만발한 자연의 모습 등이 묘

사되어 있다.

박세당(朴世堂), 『서계집(西溪集)』 권4, 「도봉산(道峯山)

을 바라보며 짓다」

조화옹의 기교에 마음 몹시 놀라니 /

수많은 손놀림이 신묘 막측하구나 /

온갖 형상이 땅 아래에 조밀한데 /

한 바위 봉우리가 창공을 찌르네 /

달을 보매 세상의 어둠 아랑곳없고 /

꽃을 흩날리매 내내 하늘이 붉어라 /

벼랑 중턱 노송에 걸린 높다란 둥지 /

몇 조각 구름이 학의 뒤를 따르네 /

다른 본에는 제2연이 ‘온갖 형상이 웅장한 대지에 낮게

깔려 있는데 하나의 봉우리가 광활한 우주에 우뚝 솟았

네.[ ]’로 되어 있기도

하다. 이 부분이 다른 구절로도 전한다 해도 어찌 되었든

만장봉을 가리킨 것만은 분명하다. 이중환의 『택리지』

‘팔도론’에도 도봉산의 만장봉 바위봉우리가 언급된다.

4 도봉산은 산새들에게 풍요로운 보

금자리이다.

7 해발 718m의 만장봉으로 가는 험

준한 비탈길

5 자운봉, 마당바위 등으로 이어

진 갈림길

6 도봉산을 찾은 등산객들이 산행을

시작하고 있다.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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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6

이정귀는 백사 이항복과 함께 도봉산을 유람한 기록도

남겼다.

이정귀(李廷龜), 『월사집』 권38, 「유도봉서원기(遊道峯書

院記)」

을묘년(1615, 광해군7) 가을, 내가 백사에게 이르기를,

“수락산의 가을 폭포가 한창 장관이고 도봉산에는 새로

계당(溪堂)을 지었다 하니, 오늘 함께 구경하러 가시지 않

겠습니까?” 하니, 백사가 흔쾌히 승락하면서 “수락산은

내가 날마다 가는 곳이니, 나는 도봉산에 가 보고 싶구려.

그대와 함께 가니, 매우 즐거운 일이오.” 하고는, 즉시 아

이를 불러 지팡이와 신발, 복건(幅巾)과 베옷을 준비하게

하여 여장을 갖추어 노새를 타고 나섰다. 시내를 따라 갈

대숲 속으로 난 길을 수십 리 가서 누원(樓院)의 대로를

지나 동구로 들어서니, 이미 별세계(別世界)였다. 시냇물

소리와 산색(山色)이 너무도 좋아 일일이 감상할 겨를도

없을 정도였으니, 참으로 산음(山陰) 길을 가는 것과 같

았다. 그 긴 폭포, 깎아지른 골짜기, 얕은 시냇물, 겹겹의

모래톱, 맑은 못, 우뚝 솟은 벼랑에 물가며, 언덕이며, 섬

이며, 바위들이 다투어 기이한 형상을 바치니, 마치 우리

를 환영하는 것 같았다.

우리에게 등산 코스로 더 잘 알려진 도봉산은 조광조, 송

시열의 영향으로 도봉서원이 명승으로 가치를 얻게 되

면서 그 일대가 명승유연의 대상으로 확장된 것이다. 지

금은 그 안에 많은 유적들이 시간의 흐름 속에 소실되고

변화되었지만 우뚝 솟은 도봉산의 산세는 옛 모습 그대

로 우리를 반긴다. 도봉산을 통해 진정 명승은 사람과 자

연이 서로 기다리고 만나야만 만들어진다는 이치를 보

게 된다. 아름다운 우리 국토의 명승들은 우리가 부지

런히 다녀서 그 가치가 더욱 빛나게 되는 것일 게다.

참고 문헌

박찬문(2018), 서울 도봉서원 하층 영국사지 출토 금석문 자료 소개, 목간과 문자, 20

이석호 편(1982), 한국명저 번암록, 대양서적

안대회,이승용 외 옮김(2018), 완역정본 택리지, 휴머니스트

안대회(2019), 조선 후기 전국 명승의 범위와 평가, 2019(사)한국명승학회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

연구원 공동학술대회

이종묵(2006), 조선의 문화공간 3책, 휴머니스트

이정귀(李廷龜), 『월사집』 권38, 「유도봉서원기(遊道峯書院記)」 한국고전종합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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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과학사

설계·제도된 거푸집, 새김 방법이 다른 거푸집

국보 제231호 전 영암 거푸집 일괄(이하 국보 거푸집)

은 우리나라 청동기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유물로

11종 26점의 청동기 주형이 새겨져 있는데, 청동검(細

形銅劍), 청동꺾창(銅戈), 청동투겁창(銅矛), 도끼(有

肩銅斧), 장방형 도끼(長方形銅斧), 조갯날 도끼(蛤刃

銅斧), 끌(銅鑿), 지우개( ), 바늘(銅針), 낚싯바늘

(釣針), 거울(銅鏡) 등이다.

국보 거푸집은 현재 일괄 유물로 알려져 있지만 거푸

집을 만드는 데 사용된 돌의 재질이나 주형(鑄型)의 설

계·제도와 새김 방법을 보면, 두 그룹으로 나누어진

다. 우리나라 거푸집들은 두 짝을 맞춰서 사용하는 쌍

합범(雙合范)들이 많기 때문에 양쪽에 새겨진 기물의

주형이 꼭 들어맞아야만 청동기를 제대로 주조할 수 있

다. 그래서 정밀한 설계·제도 기술이 필요하다. 국보

거푸집들을 보면, 돌의 색상이 흑청색과 흑갈색을 띠

는 것으로 구분된다. 그런데 흑갈색 거푸집들은 흑청

색 거푸집들보다 주형을 설계·제도할 때 자와 같은 도

구를 사용한 빈도가 높아졌지만 좌우를 결합할 때의 정

밀도는 떨어졌다. 그뿐 아니라 흑청색 거푸집들의 주형

은 각진 새김이어서 가장자리 윤곽이 뚜렷하지만 흑갈

색 거푸집들은 모죽임 새김을 선호해서 가장자리 윤곽

이 덜 뚜렷하다. 한국 청동기문화의 거푸집들을 보면,

설계·제도할 때는 자와 같은 도구를 사용하는 빈도가

늘어나며, 새김 방법은 각진 새김에서 모죽임 새김으로

변해간다. 국보 거푸집에는 이러한 과정을 잘 보여주는

2개 군의 거푸집들이 섞여 있는 것이다.

1 000 °C 이상의 고온에서도 깨지지 않는 돌,

활석

국보 거푸집을 비롯한 한국 청동기-초기 철기시대의

거푸집들은 대부분 활석(滑石)으로 만들어졌다. 왜 거

푸집을 활석으로 만들었을까? 거푸집은 청동기물을 주

조하는 물건으로 1000°C 이상의 고열을 순간적으로 받

기 때문에 도중에 터지거나 깨져버릴 위험이 있다. 주조

현재 한국인들은 세계에서도 부러워하는

첨단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제4차 산업혁명의

시대를 선도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5세대

이동통신 시대의 개막을 두고 미국과 선두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현대 한국인들은 첨단

기술의 선도를 좋아하고 즐기는 것 같다.

과연 현재 우리들만 그럴까? 아니다. 2300년

전에도 우리들은 첨단의 청동기 주조기술로

다양한 청동기들을 만들었다. 국보 제231호

전 영암 거푸집 일괄은 2300년 전의 우리 조상

들이 우리들에게 남겨준 당시 첨단기술의

결정판이다.

글. 조진선 (전남대학교 문화인류고고학과 교수, 한국청동기학회 회장)

국보 제231호

전 영암 거푸집(鎔范) 일괄

초기 철기시대

첨단기술의 결정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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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보 제231호 전 영암 거푸집

일괄은 활석으로 만든 것으로

우리나라 청동기문화를 이해

하는 데 중요한 유물이다.

ⓒ 문화재청

2 전 영암 거푸집 일괄에 새겨져

있는 11종 26점의 청동기 주형 중

낚싯바늘과 동부용범

ⓒ 문화재청

하는 도중에 거푸집이 파손되면 제대로 된 주물을 얻을

수 없다. 초창기 고고학자들은 활석으로 청동기 주조

실험을 하면서 거푸집이 터져버릴까 걱정하였다고 한

다. 청동기물이 제대로 주조되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고온의 쇳물이 튀면 사람이 다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우려는 기우였다.

거푸집의 재료인 활석의 성질은 2013년에 필자가 활석

과 각섬석암으로 각각 거푸집을 만들어 주조실험을 해

보면서 더 잘 알게 되었다. 활석은 우리나라 거푸집들

이 대부분 활석이기 때문에 선택하였다. 각섬석암은 장

수곱돌로 더 잘 알려진 돌인데, 일부 거푸집들의 재질

이 이 돌로 알려져 있었을 뿐 아니라 이 돌은 열에 강해

서 현재도 돌솥이나 고기구이판을 만드는 데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활석과 각섬석암 거푸집에 각각

청동창의 주형을 새겼다. 각섬석암 거푸집은 첫 번째

주조 후에 0.5㎝ 정도 크기로 3~4군데가 깨져나갔지만

한 번 더 사용해도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두 번째 주조실

험을 진행했는데, 주형이 심하게 파손되면서 주조에 성

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활석제 거푸집은 다섯 번을 주

조한 후에도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활석제 거푸집으로

한국 청동기들을 여러 번 복원하였던 이완규 주성장(鑄

成匠)은 활석제 거푸집으로 청동검을 30번가량 주조해

봤는데, 그때까지도 거푸집이 멀쩡했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활석제 거푸집은 하나를 가지고 청동검이나 청동

투겁창을 수십 개, 또는 백 개까지도 주조할 수 있지 않

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국보 거푸집의 고향은 영암일까?

국보 거푸집은 영암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진다. 돌려

이야기하면 영암이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1960년경 고 매산 김양선 교수가 국

보 거푸집을 수집했을 때 영암에서 출토된 것이라고 전

해 들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2003년 화순 백암리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

다. 마을 사람들이 무덤을 이장하는 과정에서 청동검과

청동꺾창 등을 수습해서 신고한 것이다. 국립광주박물

관에서는 급히 수습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거의 다 파

괴되기는 했지만 고운무늬거울(精文鏡) 등을 더 수습하

였고, 이 유물들이 모두 초기 철기시대의 무덤에서 출

토된 것도 알게 되었다. 필자도 전공자여서 현장에 가

보았고 유물들도 관찰했다. 필자의 눈에 가장 먼저 들

어온 것은 청동꺾창에서 내(內)라고 불리는 자루를 끼

우는 부분이었다. 백암리 청동꺾창의 내가 동일한 형식

의 다른 청동꺾창들보다 0.3~0.5㎝정도 좁아 보인 것

이다. 필자는 국보 거푸집에 있는 청동꺾창의 주형을

보면서 항상 “왜 저렇게 청동꺾창의 내가 좁을까?” 하

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에 백암리 청동꺾창의 좁은 내가

눈에 확 들어온 것이다. 그래서 국립광주박물관과 숭실

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의 도움을 받아 두 유물을 면

밀하게 비교 검토하였다. 그리고 화순 백암리에서 수습

된 청동꺾창이 국보 거푸집의 청동꺾창 주형에서 주조

된 것을 밝히고, 이를 논문으로 발표하였다. 한국은 물

론, 중국과 일본에서도 없던 일이었다. 2300년 만에 거

푸집과 거푸집에서 주조된 청동기가 다시 만나는 순간

이었다. 그리고 국보 거푸집의 고향이 밝혀지는 순간

이기도 했다. 물론 국보 거푸집의 고향을 영암으로 확

정 지을 수는 없다. 하지만 영암도, 화순(백암리)도 모

두 영산강유역 안에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국보 용범의

고향은 영암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영산강유역 안에 있

는 어느 지역일 가능성이 더욱 커진 것은 분명하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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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면 쓸모 있는 문화재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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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지방의 낙동강 유역에서 힘을 키웠던

작은 나라 ‘가야’. 10여 개의 소국이 각자 독립

적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가야는 질 좋은 철을

여러 나라에 수출한 철의 왕국이었다. 특히

철로 만든 여러 가지 농기구나 무기들은

참으로 훌륭했다.

글. 성혜경

가야 연맹왕국의 성장 배경은 무엇인가?

가야 연맹왕국의 소국들은 일찍이 벼농사를 지으며 농

경문화를 발전시켰다. 이러한 높은 농업 생산력과 더불

어 해상 중계무역 또한 번성했다. 가야는 주변국은 물론

이고 바닷길을 통해 북쪽의 한 군현, 동해안의 예, 남쪽

으로는 왜와도 교역을 했다. 이러한 경제적 바탕 위에서

우수한 문화가 만들어졌다.

가야는 또한 철의 생산을 통해 경제력을 구축했다. 『삼

국지(三國志)』에 따르면, 가야에서는 철이 많이 생산되

어 삼한과 낙랑군, 대방군, 그리고 왜나라까지 철을 수

출했다고 한다.

특히 초기 가야의 중심지였던 김해는 철이 넘쳐났는데

금관가야는 이 철을 매개로 밖으로는 여러 나라와 교역

하고 안으로는 가야의 여러 정치체제를 통합하여 맹주

의 자리에 올라설 수 있었다. 이처럼 가야의 대표적 철

생산지라 할 수 있는 김해에는 근대까지 조업한 대동

면의 상동광산이 있고 조선시대에는 많은 철을 공납하

고 있었다. 또 생철리와 같은 제철과 관련된 지명도 있

고, 근년까지 전통적인 방식으로 쇠를 만들었다는 기록

이 있다.

후기에 들어서 맹주로 떠오른 고령 지역 대가야의 성장

에 있어서도 철광 개발과 이를 통한 철의 생산이 큰 기

반이 되었다. 즉 철을 통한 풍부한 경제적, 군사적 성장

이 대가야의 성장에 있어 주요한 배경이라 할 수 있다.

5~6세기 무렵 대가야가 고대 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가야산 남서쪽에 분포하는 철산 개발을 통한

활발한 철의 제련과 이를 통한 철 생산이 크게 작용했

다는 것이다.

어떻게 철을 생산하였는가?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가야가 ‘어떻게 철을 생산

하였는가?’이다. 고대사회에서 철 생산은 고도의 기술적

수준이 요구된다는 점, 그리고 경제적·군사적으로 미

치는 영향력이 막대하다는 점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철 생산은 대부분 국가가 관장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문화재 발굴로 세상에 드러난

가야의 경제와 문화

철의 왕국, 가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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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 생산에는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우선 양질의 철광석

이 필요하다. 다음은 풍부한 산림 자원으로부터 생산되

는 대량의 목탄이 필요하다. 목탄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벌목과 운반은 물론 목탄요를 축조할 수 있는 전문적인

생산 체계를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제철로의 축조에는

점토와 모래·물 등은 물론, 철광석을 선광(選鑛)하고

파쇄 또는 배소(焙燒)하기 위한 시설도 필요하다. 또 송

풍 장치를 갖추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철 생산 작업을 수행하기 위한 전문 기술자를 포함

한 다수의 인력이 필수적이었다. 철광석과 목탄이 확보

되면 제련로(製鍊爐)를 축조한다. 제련로는 고온에 견딜

수 있도록 점토와 모래, 짚 등을 함께 이겨 만들었다. 목

탄을 넣고 가풍하며 고온의 상태를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지하로부터의 습기를 차단하는 기초 시설을 갖추

고 그 위에 노를 축조했다.

다음은 제련로에서 생산된 괴련철 혹은 부분적으로 선

철이 함유된 괴련철을 소재로 하여 다시 정련하는 정련

로(精鍊爐)가 필요하다. 정련로에는 단조 철기 생산에

필요한 제강 공정과 제련된 철괴를 장시간 가열하며 탄

소량을 높여 선철을 만드는 공정이 있다. 따라서 정련로

에서 만들어진 선철을 용해하여 주조 작업을 하는 용해

로(鎔解爐), 그리고 정련 과정에서 제강된 소재를 이용

한 단조 작업의 단야로(鍛冶爐)를 둔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 반드시 필요한 가풍 장치로 풀무

와 송풍관이 사용됐다. 목탄을 연료로 인위적인 가풍을

하지 않고서는 제련 작업이 거의 불가능하다.

한편 최근 김해 봉황대 유적에서 제철에 사용된 송풍구

파편과 쇠똥(slag)이 출토되어 관심을 끌었다. 송풍구

는 용광로에 꽂아 바람을 넣는 토제 관으로, 강한 불에

타 까맣게 변질된 모습으로 확인되었다. 쇠똥은 제철할

때 나오는 쇳물의 찌꺼기가 굳은 것이다. 또한 양산 물

금을 중심으로 대규모 제철작업이 있었다는 견해도 있

다. 김해 대성동, 동래 복천동 유적 등 여러 가야 유적에

서는 철기 제작에 사용했던 철 집게와 망치 등 도구들

이 출토되었다.

1 사적 제327호 창원 다호리 고분군

은 고대국가 형성기의 고분으로,

구릉지와 저습한 평지의 지형관

계로 목제품 유물의 보존이 가능

한 지형이다.

ⓒ 문화재청

2 사적 제341호 김해 대성동 고분

군 출토 투구

ⓒ 위키백과

3, 4 사적 제341호 김해 대성동 고분

군 출토 철갑

ⓒ 위키백과

철을 매개로

밖으로는 여러 나라와

교역하고 안으로는

가야의 여러 정치체제를

통합하여 맹주의

자리에 올라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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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면 쓸모 있는 문화재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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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사적 제327호 창원 다호리 고분

군 전경

ⓒ 문화재청

8 사적 제327호 창원 다호리 고분군

목관 노출 모습

ⓒ 문화재청

5 사적 제327호 창원 다호리 고분군

출토 유물

ⓒ 문화재청

6 사적 제327호 창원 다호리 고분군

출토 칠초동검

ⓒ 문화재청

어떻게 철을 사용하였는가?

‘어떻게 철을 생산하였는가?’와 함께 ‘어떻게 사용하였는

가?’도 생각해봐야 한다. 가야의 철을 웅변하는 것은 고

분에서 출토되는 철기들이다. 3세기까지 김해와 경주에

서 출토되는 철기 중 가야 고분에서 출토된 것이 신라 고

분에서 출토된 것보다 많다. 가야에서 생산된 철제품은

김해, 동래, 함안, 고령, 합천 등의 가야 고분에서도 출

토되고 있으며, 가야에서 수출된 철은 신라와 왜의 고분

에서도 출토되고 있다.

종류로는 도끼 모양의 납작도끼[板狀鐵斧]가 김해 양동

리 162호 무덤을 비롯한 가야 고분에서 다량으로 출토

되었으며, 덩이쇠인 철정은 김해 대성동과 동래 복천동

고분군, 함안 도항리 고분군 등 가야의 주요 유적에 위

치한 대형 고분에서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또한 수많은

갑옷과 무기들이 가야 무덤에서 발견되고 있다. 가야 제

국이 일찍이 성장할 수 있었던 중요한 경제적 배경의 하

나가 바로 철의 생산이었던 것이다.

가야에서 생산된 철은 화폐로도 사용되었다. 가야 고분

에서 출토되는 판상철부(板狀鐵斧)와 덩이쇠[鐵鋌]는 일

정한 규격으로 만들어져 교환에 사용되었고, 수출되어

서는 여러 철기의 소재로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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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발굴과 관련된 직업 문화재보존처리원 Q&A

이재성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과학센터 학예연구사

Q. 문화재보존처리원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 직업인가요?A. 문화재보존처리원은 금속, 목재, 종이, 석재, 직물, 벽화 등 다양한 재질의 문화재를 직접 보존처리하는 직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화재 보존처리는 손상된 문화재의 수명을 최대한 늘리기 위해 문화재에 적절한 보존 조치를 취하

는 것으로 여기에는 적합한 환경을 마련해주는 작업도 포함됩니다.

Q. 문화재보존처리원의 길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A. 신문에서 우연히 ‘병들고 아픈 문화재를 고치고, 문화재에 새 생명을 준다’는 내용의 기사를 보고, 문화재 보존에 관

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관심으로 보존과학을 전공하게 되었고 이후에는 금속공학을 전공하면서 금속문화재 보

존가로서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Q. 문화재보존처리원이 되기까지 어떤 노력을 하셨나요? A. 문화재보존처리원이 될 수 있는 전공을 택하여 공부하고 문화재청에 입사하여 국립문화재연구소에 들어왔습니다. 문

화재는 다양한 형태를 가지기 때문에 그 문화재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인간문화재 등 장인의 공방을 찾아다니며 문화재와 유사한 형태의 공예품 제작 과정을 조사하고, 실습을 하였습니다.

이때의 경험은 문화재 보존처리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Q. 문화재보존처리원이라는 직업의 장점은 무엇인가요?A. 심하게 훼손된 문화재가 보존처리를 통해 잃어버린 형태를 되찾을 때 큰 보람을 느낍니다. 특히 보존처리한 문화재

가 박물관에 전시되어 현재의 사람들과 만날 수 있게 한다는 것은 이 일만의 장점입니다. 모든 문화재를 보존처리하

는 것 자체가 어렵고 힘들다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잘못된 보존처리는 역사의 왜곡을 초래하고, 후대의 심판이 따

르기 때문에 항상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옛사람의 흔적 중 하나를 후대에 잘 전달했다는 보람을 생각하면

어려움은 금방 사라집니다.

Q.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A. 2014년 9월 전라남도 나주시 정촌고분에서 금동신발이 출토되었을 때입니다. 석실 내부에서 온전한 상태로 노출되었

는데, 내부에는 흙이 많이 차 있었고, 재질도 매우 약해진 상태라서 석실 내부에 직접 들어가 보름 가까이 보존처리하

며 금동신발을 안전하게 수습했습니다. 석실 내부가 좁고 어두운 데다가 여러 개의 돌을 쌓아 만든 석실이기 때문에

위에서 돌이 떨어질 수도 있는 아찔한 순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 단 하나의 문화재인 금동신발에만 집중하

고, 안전하게 수습해서 세상에 빛을 보게 했다는 점에서 큰 보람을 느낍니다.

Q. 앞으로의 계획과 목표, 그리고 바람이 있다면요?A. 지금도 문화재 현장에서는 문화재보존처리원들이 구슬땀 흘리며 많은 문화재를 보존처리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이 문화재 보존처리를 잘 모릅니다. 문화재 현장에서 문화재보존처리원들이 하는 보존처리를 적극적으로 홍

보할 것이고, 이를 통해 다소 생소한 보존과학 분야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알기를 희망합니다.

Q. 문화재보존처리원이 되고 싶은 분들에게 전하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한 말씀 남겨주세요.A. 우리가 보존처리하는 대상은 단 하나밖에 없는 문화재이기 때문에 보존처리할 때는 원형을 훼손하지 않고 그 문화재

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증거를 남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문화재의 재질과 특성을 잘 알아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

한 건 문화재에 대한 애정입니다.

문화재 발굴과 관련된 직업이

궁금한 당신을 위한 미니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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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속 문화재

말 한마디 하지 않아도, 얼굴에 서린 눈빛과

표정만으로 많은 이야기를 건네는 배우가

있다. 만약 군산이 사람이었다면 그런 진한

느낌의 배우가 아니었을까? 그 어떠한 겉치레

없이 그 자체만으로도 드라마가 펼쳐질 것 같은

공간. 군산은 개항과 일제강점기의 시간이

쌓여 고유의 무늬를 만든다. 어디에 카메라를

들이대도 ‘영화’가 되는 곳이다. 매일을 빈곤과

싸워야 했던 조선인들 위에 군림하던 일본인이

남기고 간 흔적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도 그렇다. 이상하리만치 고요하게

남아 있는 그 흔적이 군산만의 묘한 ‘바이

브’를 만들어낸다.

글. 서동현 (프리랜스 에디터)

히로쓰 가옥, 빈해원, 조선은행

영화 <타짜> 속

군산의 시간

1

투기에 목숨 건 사람들을 그린 소설 그리고 영화

일찍이 채만식은 소설 『탁류』를 통해 군산을 배경으로

‘미두(米豆)’라는 투기 노름 속 인간 군상을 그린 바 있다.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최동훈 감독의 2006년 영화 <타

짜> 역시 군산을 배경으로 화투에 인생을 건 이들의 모

습을 포착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군산은 때로 시대 배

경을 알아차리기 어려울 만큼 역사와 전통이 혼재되어

있다. 인간의 뒤틀린 욕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영화

<타짜>의 주된 배경으로 군산이 등장하는 이유 또한 같

은 맥락일 거다. 영화에는 군산의 지나간 시간을 품고

있는 공간들에 집중한다. 그 자체로 멋스러워 <장군의

아들> <아가씨> 등 한국 영화가 사랑하는 신흥동 일본

식 가옥은 극 중 평경장(백윤식 분)의 자택으로 주인공

고니(조승우)가 화투를 배우는 중요한 장면의 배경이 된

다. 근대기 화교 문화를 보

여주는 오래된 중식당 빈

해원 그리고 한국과 대륙

의 경제 수탈을 목적으로

일제가 세운 조선은행까

지. 거리마다 한 편의 영화

가 펼쳐지는 군산의 매력

을 들여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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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가 사랑하는, 신흥동 일본식 가옥

영화 <타짜>에서 고니는 최고의 타짜임을 자처하는 평

경장에게 이렇게 말을 건넨다. “아니 그렇게 잘나신 분

이 왜 이런 데 사세요?” 극 중에서는 아주 오래된 가옥

취급을 받았지만, 군산의 근대 건축물 중 가장 대중에게

사랑받고 있는 이 신흥동 일본식 가옥은 등록문화재 제

183호로 지정됐다. 일제강점기에 군산부 협의회 의원으

로 활동하면서 포목점을 운영했던 ‘히로쓰 게이사브로’

가 살았던 곳으로 ‘히로쓰 가옥’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목재로 지은 2층 기와집으로 대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일본식 정원이 인상적이다. 1층은 온돌, 2층은 다다미방

으로 만들었다. 근세 일본 무가(武家)의 고급주택 양식

을 따르고 있는데 2층짜리 본채 옆에 단층 객실이 ‘ㄱ’자

모양으로 비스듬히 붙어 있는 형태다. 2층의 다다미방 2

칸 역시 일본식 건축 양식을 고스란히 따르고 있다. 당시

의 일본 상류층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

다. 히로쓰 가옥 밖의 조선인들이 얼마나 상반되는 빈곤

한 삶을 살았는지를 떠올려본다면, 이곳이 기억되어야

할 아픈 역사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거다. 어쨌든 따로 손

댈 곳 없이 완벽한 영화 세트장인 탓에 유독 한국 영화

가 사랑하는 로케이션이기도 하다. 이미 1990년대에 임

권택 감독의 영화 <장군의 아들>을 통해 유명세를 탔다.

군산시 금동·동신아파트와 군산여자고등학교 사이 골

목에 위치한다. 요즘엔 이 골목 곳곳에도 비슷한 분위

기의 카페 등이 들어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그 시

절의 분위기를 느끼고 싶어 하는 젊은이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는다. 평경장의 자택으로 등장하는 히로쓰 가

옥은 고니가 평경장에게 타짜 훈련을 받는 중요한 장면

에 쓰인다. “화투와 몰아일체가 되어야 한다”는 명대사

의 배경이 바로 히로쓰 가옥. 이렇게 인기 영화 속에 주

요 배경으로 등장한 탓에 관람객이 몰려 훼손을 우려하

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래서 군산시에서는 문화재 보

호를 위해, 2015년 3월부터 일반인의 실내 관람을 제한

하고 있다. 현재는 히로쓰 가옥의 정원과 건축물의 외부

관람만 가능하다고. 그럼에도 이곳만의 분위기를 엿보

고 싶은 젊은이들이 카메라를 들고 끊임없이 찾아온다.

1 영화 <타짜>에서 평경장의 집으로

나온 등록문화재 제183호 군산 신

흥동 일본식 가옥

2 등록문화재 제183호 군산 신흥동

일본식 가옥의 측면 진입부. 일제

강점기에 군산에서 포목점과 소규

모 농장을 운영하며 군산부협의회

의원을 지낸 일본인이 건립한 일

본식 2층 목조 가옥이다.

ⓒ 문화재청

3 등록문화재 제183호 군산 신흥동

일본식 가옥의 정면

ⓒ 문화재청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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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속 문화재

가장 오래된 중식당, 빈해원

물짜장으로 유명한 빈해원은 군산에서 가장 오래된 중

국 음식점이다. 화교 왕근석 씨가 한때 군산의 중심지

였던 장미동에서 1950년대에 첫선을 보인 ‘청요릿집’이

었다. 그러다 1965년 현재 건물로 옮겨왔고 1970년대

에 증축했다. 철근 콘크리트와 벽돌로 쌓은 2층 건물

로 뻥 뚫린 시원한 내부 구조가 특징이다. 요즘의 건

축물에선 쉽게 볼 수 없는 특유의 개방감 때문에 짜장

면보다 카메라를 먼저 꺼내게 되는 곳이다. 근대기 화

교 문화를 보여주는 건축물이자 당시 군산의 생활사

를 담고 있다는 문화재적 가치를 높이 평가받아 2018

년 8월 등록문화재 제723호로 지정됐다. 현재까지도

왕성하게 영업 중인 식당이 문화재로 등록되는 것은

일제강점기 때 건립된 전북 고창 조양식당을 제외하

고는 흔치 않은 사례라고. 빈해원은 <타짜>에서 고광

렬(유해진 분)이 고니의 가족을 만나 도박으로 번 돈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될

대한민국의

근대 역사를 품고 있는

군산의 시간은,

그래서 더 천천히

흘러간다.

건네주는 대목에 등장한다. 고니의 삼촌이 돈 가방을

보고 반가워 고광렬의 바지에 물짜장을 엎지르는 바

로 그 장면이다.

‘2층 청요릿집’으로 이름을 떨친 빈해원은 한창 시절,

600명이 한 번에 밥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스

케일을 자랑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빈해원 외에도

군산엔 유명한 짬뽕집이 꽤 많다. 왜 하필 짬뽕일까?

이는 군산의 근대 역사를 함께했던 화교들 덕분이다.

1890년대 후반 이곳엔 산동 출신 화교들이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해 한때는 천여 명에 이르렀다고. 이들은 주

로 비단을 팔고 농사를 짓거나 식당을 운영했다. 꾸준

히 유입된 덕에 1941년엔 화교 학교도 세워졌다. 화교

소학교장이었던 여건방 씨가 운영하던 용문각을 시에

무상으로 기증해 군산 화교 역사관으로 운영 중이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알고 빈해원의 물짜장을 먹는다면

더 깊은 맛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4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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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등록문화재 제723호 군산 빈해원.

1950년대 초부터 화교인 왕근석

씨에 의해 창업되어 대를 이어온

중국 음식점으로서 1∼2층이 개방

된 내부 공간이 특징적이다.

ⓒ 문화재청

5, 6 인간의 뒤틀린 욕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영화 <타짜>의 한 장면

7 조선총독부의 핵심 금융기관인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등록문화

재 제374호)

ⓒ 문화재청

군산의 흥망성쇠, 조선은행

군산은 항구도시답게 내항을 자주 볼 수 있다. 군산

시 중앙로 구 경찰서 로터리에서 내항으로 가는 언덕

길에 구 조선은행 건물이 위치한다. 군산의 흥망성쇠

가 고스란히 새겨진 곳이다. 일제강점기 군산항은 미

곡 수탈의 통로였다. 현물 없이 쌀 거래로 시세 차익

을 남기는 일종의 투기 행위인 미두(米豆)장이 서면서

돈을 좇는 모두가 군산을 찾았다. 누군가는 부자가 됐

고 누군가는 전 재산을 잃었다. 누구의 인생이 어떻게

되던간에 쌀은 전부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흘러들

어갔다. 채만식의 소설 『탁류(濁流)』엔 당시의 상황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조그마한 어촌 마을이던 군산

에 2, 3층 신식 건물에 은행과 요정 청요릿집이 들어

서고 지게꾼, 인력거꾼 날품팔이가 거리를 가득 메운

꽤 그럴듯한 도시가 됐다’고 말이다. 돈 냄새를 맡고

모여든 일본인들이 군산에 자리를 잡았다. 앞서 본 히

로쓰 가옥의 히로쓰도 당시 군산의 부호로 명성이 일

본 땅에까지 자자했다고 한다. 이들이 돈을 맡기고 어

음을 발행했던 곳이 바로 조선총독부의 핵심 금융기

관인 조선은행 군산지점이었다. 어찌나 힘을 주어 지

었는지 조선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든 멋진 건물로 유

명했다고. 조선인의 피, 땀, 눈물로 지은 조선은행은

해방 이후 나이트클럽, 노래방, 술집 등으로 엉뚱하게

쓰였다. 다행히 군산지역 근대 역사를 새롭게 조명하

는 자료로 관심을 받게 되면서 2008년 7월에 등록문

화재 제374호로 등록됐다. 지금은 근대건축관으로 당

시의 건축 양식을 생생하게 탐구할 수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절대 잊어서는 안 될 대한민국의 근대 역사를 품고

있는 군산의 시간은, 그래서 더 천천히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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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의 현장, 투쟁의 기록

1

중가주 리들리의버지스 호텔

미주 독립운동

지도자의 숙소

위해 그가 숙박하였고 현재에도 문을 열고

있는 프란세스 호텔 내부에 기념동판을 제작

하여 부착하였다. 그런데 훨씬 앞서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숙박하였던 호텔에 얼굴 동판이

붙여진곳이 있다. 미국 중부 캘리포니아의

소도시인 리들리(Reedley)에 있는 버지스 호텔

(Hotel Bergess)에는 우남 이승만과 도산

안창호의 얼굴이 새겨진 동판이 붙어 있을 뿐만

아니라,두 독립운동가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글. 김도형 (독립기념관 연구위원)

2017년 8월 11일 멕시코 제2의 도시 과달

라하라(Guadalajara) 프란세스 호텔(Hotel

Frances)에서 독립운동가 안창호 선생의 기념

동판 현판식이 거행되었다. 1910년대 해외

한인의 대표기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 선생이 멕시코 한인사회의 단합과

독립운동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10개월 동안

순행하고미국으로 돌아가려고 이 호텔에서

잠시 머물렀다. 우리 정부에서는 멕시코지역

에서 안창호선생의 독립운동 위업을 기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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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30년 미주 독립운동의 중심지, ‘중가주’

한자 문화권에서는 캘리포니아주를 ‘가주(加州)’라

고 부르고, 로스앤젤레스를 ‘나성(羅城)’, 샌프란시

스코를 ‘상항(桑港)’이라고 한자로 표기한다. 로스앤

젤레스를 포함한 남쪽지방을 남부 캘리포니아주라

는 의미에서 ‘남가주(南加州)’라고 하였고, 샌프란

시스코와 그 북부지방을 ‘북가주(北加州)’라고 불렀

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로스앤젤레스 사이의 중부

캘리포니아지역은 영어로 ‘Central California’라고

하였기 때문에 ‘중가주(中加州)’라고 불렀다. 이와 같

이 ‘중가주’라고 하면 로스앤젤레스 북쪽부터 샌프란

시스코 남쪽 지역을 말하고, 주요 도시로는 프레즈노

(Fresno)·다뉴바(Dinuba)·리들리(Reedley)·생거

(Sanger)·팔리어(Parlier)·핸포드(Hanford)·바이

샐리아(Bisalia) 등 6개 시를 일반적으로 말한다. 이들

지역은 자동차로 10~30분 거리에 위치해 있어 한인

이주가 시작된 20세기 초반에도 1일 생활권에 속했다.

20세기와 21세기의 전환기 미국경제 부흥의 원동력은

실리콘 밸리(Silicon Valley)의 반도체산업이었다. 그렇

지만 19세기와 20세기 미국 경제의 발전소는 캘리포

니아 샌화퀸 밸리(San Joaquin Valley)를 중심으로 한

금광개발과 이에 따른 각종 산업의 발달 때문이었다.

중가주의 중심지는 다뉴바와 리들리이며, 로스앤젤레

스에서 약 4시간 걸리며 샌프란시스코에서 약 3시간

30분 거리이다. 북미지역 한인들은 샌프란시스코와 로

스앤젤레스 등 대도시에서도 생활을 영위하였지만, 두

도시 사이의 중간지역에는 1919년 이후부터 본격적으

로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1920년대와 30년대 미주지역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중가주 한인타운, 다뉴바와 리들리

중가주의 중심지 다뉴바에는 처음 한인들이 포도농사

를 짓기 위해 들어왔다. 그러다가 1908년부터 1천 에이

커 규모로 포도밭을 계약하여 재배하기 시작하면서,

수확기만 되면 150~200명(많을 때는 200~300명)의

2 버지스 호텔 출입구

© 독립기념관

1 독립운동 지도자 이승만과 안창호

가 머물렀던 버지스 호텔 전경

© 독립기념관

3 다뉴바 공동묘지와 한인묘지

구역

© 독립기념관

한인 노동자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이에 다뉴바는

미주 본토에서 한인들의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곳의 하

나로 부상되어, 1914년 5월 20일 대한인국민회 다뉴바

지방회가 설립되었고, 이때부터 다뉴바를 중심으로 한

중가주시대를 열었다. 다뉴바는 1919년 3·1운동이 일

어났을 때 3·1절 기념식을 미 본토에서 가장 먼저 가

진 곳으로 유명하다. 또한 다뉴바에서는 최초로 대한

여자애국단이 결성되어 왜간장 안 먹기 캠페인을 펼쳤

으며, 1920년부터는 매년 다뉴바의 메인 스트리트에서

3·1만세운동기념 퍼레이드를 갖기도 하였다.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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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의 현장, 투쟁의 기록

중가주의 샌화퀸 밸리 지역에 금광 개발과 철도가 부

설되면서 리들리에도 과일·견과류, 포도 등의 작물들

이 본격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하였다. 리들리는 골드러

시(gold rush)로 몰려든 광부들에게 조달할 농산물을

재배하기 적합한 관개시설이 설치되면서 중가주의 중

심 도시가 되었던 것이다. 한국인 최초의 백만장자인

김형순(Harry S. Kim, 1886~1977)이 활동하던 곳이

리들리이다. 김형순은 노동자들을 모아 묘목장(Nurs-

ery)과 과일포장회사(Packing House)를 운영하여 최

초의 한인 백만장자가 되었다. 또한 자두와 복숭아로

개발한 넥타린(Nectarine)으로, 미연방 농무성에서

‘넥타린 왕(King of Nectarine)’이라는 칭호를 공식적

으로 수여받았다.

김형순은 김호(Charles Ho Kim, 1884~1968)와 더불

어 1921년 김형제상회(Kim Brothers Co.)를 세웠다.

김형제상회의 주된 사업은 주택 정원조경과 과수원을

위한 묘목회사, 5백 에이커의 과수원, 과일 패킹, 운

송회사 등이다. 해방 전까지 재산평가는 리들리, 다뉴

바, 프레즈노 등에 산재한 5백여 에이커의 농장과 40

만불의 패킹시설, 10만 불의 묘목장 등 150만 불 가량

의 부동산과 7백만 불가량의 동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매년 순수입은 1백만 달러를 초과하였으며, 수익금의

대부분은 독립운동 자금과 동포기관 운영의 자금조달

처 역할을 했다.

독립운동 지도자, 이승만과 안창호의 방문

중가주지역에 한인들이 몰려들고 부유한 한인사회가

형성되면서 독립운동에 대한 지원도 본격화되었다. 다

뉴바와 리들리 등 중가주지역 한인사회는 로스앤젤레

스나 샌프란시스코와 더불어 1920~30년대 미주 독립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리고 미주지역 독립운동

의 지도자인 이승만과 안창호도 중가주지역의 한인사

회를 자주 순방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승만과 안창호

가 중가주를 대표하는 다뉴바와 리들리에 들렀을 때,

이들은 주로 버지스 호텔에서 숙박을 하였다. 리들리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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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으로 성공한 김형순과 김호가 경영하는 김형제

상회가 있었던 곳이기 때문에 독립운동 자금이 공급

되었다. 이승만과 안창호가 리들리 지방에 들렀을 때,

버지스 호텔에 머물며 이곳의 한인들과 더불어 독립

운동을 도모하였다.

버지스 호텔은 리들리 시내 중심가에 위치하고 있

으며, 주소는 캘리포니아주 리들리 11번가 1726번지

(1726 11th Street, Reedley, California)이다. 버지스

호텔 입구 왼쪽에는 ‘In Memory of the Two Korean

Patriots Stay at this Hotel’이라는 글과 함께 이승

만, 안창호의 사진이 들어간 동판이 있다. 호텔 2층

프레지던트실에 이승만이 숙박하였으며 내부에도 이

승만과 안창호의 사진이 걸려 있다. 호텔 내부는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놓고 있으며 고풍스러운 분위기

를 느낄 수 있게 하였다.

미주 독립운동의 지도자인 이승만과 안창호는 중가주

의 한인사회를 순방하고 그들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받기도 하였다. 리들리의 부호이며 지도자인 김

형순과 김호는 이승만과 독립운동 노선은 달랐지만,

그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통령이라는 상징적인 인

물이기 때문에 그에 걸맞는 대우를 했다.

4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한 ‘김형제

상회’ 건물(현재 모습)

© 독립기념관

5 버지스 호텔 입구의 이승만과

안창호의 얼굴이 새겨진 동판

© 독립기념관

6 리들리(Reedley) 한인장로교회

© 독립기념관

7 다뉴바 3·1운동 제1주년 기념

퍼레이드를 했던 메인 스트리트에

세워진 애국선열기념비

© 독립기념관

6 7

중가주에는 이승만, 안창호와 같은 지도자들이 머물

렀던 버지스 호텔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과 관련된

기념물들이 세워져 이를 기념하고 있다. 다뉴바에는

3·1운동 제1주년을 기념하여 메인 스트리트에서 퍼

레이드를 벌였는데, 퍼레이드 행사에 중심적인 역할

을 했던 한인장로교회 자리에 ‘애국선열기념비’가 세

워져 있다. 리들리에는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던 김

형순과 김호 두 독립운동가들이 거주하였던 집이 있

으며, 두 사람이 공동으로 경영하였던 김형제상회의

건물도 그대로 남아 있다. 그리고 중가주지역에는 이

민의 선조이며, 애국선열들이 잠들어 있는 리들리 공

동묘지(Reedley Cemetery)와 다뉴바 공동묘지(Smith

Mountain Cemetery)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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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만의 소설 『파우스트 박사』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사람들이 인간적이라고

일컫는 것. 그것이 비록 선하고 고상할지라도

[...] 그것이 무효화되어야 하네. 내가 그것을

무효화해버리겠네. [...] 그 9번 교향곡.” 베토

벤의 9번 교향곡이 무엇이기에, 그것이 얼마나

소중하기에, 인간에게 가장 유의미한 것을

더 이상 인정하고 싶지 않은 상황에서 주인

공은 이 음악을 언급하고 있는 것일까? 베토

벤의 9번 교향곡은 탄생 이래 줄곧 그 의미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음악이 여흥의

차원을 넘어 인간의 숭고함, 나아가 인류의

행복에 기여하는 중책을 적극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지, 또는 수행하여야 하는지는 이 작품과

관련하여 아직도 열려 있는 질문이지만 그

방향성은 분명하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바탕으로 한 공동체적 화합의 추구.

글. 주대창 (광주교대 음악교육과 교수)

세계기록유산

38

베토벤 9번 교향곡

서로 얼싸안아라!

인류애를 추구한

대표적 음악:

1

Beethoven Symphony No 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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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포르투갈의 포르투에 있는

리볼리 극장(Rivoli Theatre)에서

9번 교향곡을 연주하고 있는

이노 사비니(1955)

ⓒ 위키백과

1 베토벤의 9번 교향곡 악보

ⓒ 위키백과

2 하이든, 모차르트와 함께 빈고전

파를 대표하는 독일의 작곡가 루

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 위키백과

고난의 극복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은 독특한 점을 많이 지니고 있다.

우선, 이 음악을 만든 작곡가 베토벤이 당시 소리를 들

을 수 없는 상태였다는 점이다. 귀가 먼 상태에서 대부

분 머릿속의 상상만으로 음악을 구성하였다는 이야기

이다. 이것은 화음이나 악기소리 등을 감각적으로 거

의 확인할 수 없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이것은 베토

벤에게 현실적 장벽만을 뜻하지 않았다. 음악가로서

청각을 상실하였다는 자괴감 속에서 이 작품을 그것에

대한 대응으로 완성하였다. 실제 초연에서도, 그가 비

록 무대 위에서 지휘 동작을 하였지만, 그는 울리는 음

악의 실제를 확인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 작품과 함께

인류가 기억해야 할 하나의 진실이 있다. 고난은 누구

나 맞닥뜨릴 수 있으며 최악의 형태로도 나타나지만 극

복의 대상이지 결코 종속의 대상이 아니다.

긍정적 방향의 진화

다음으로, 교향곡이라는 순수 기악곡 장르에 합창이

함께 들어 있다. 교향곡은 전통적으로 기악 음악의

39

최첨단에 서 있었고, 성악 장르와 비교할 때도 목소

리 대신 악기들이 연주하는 오페라로 여겨졌다. 음향

적 아름다움의 추구에 가사가 있는 성악이 포함되었

으므로, 장르 구분의 관점에서 생경함과 새로움이 거

론되는 것은 당연하다. 베토벤이 이 작품을 9번 교향

곡으로 발표하였지만 사람들은 그가 교향곡의 순수함

과 음향 구성의 장점을 던져버린 것은 아닌지 의아해

하기도 했다. 역설적인 것은 교향곡 발달의 역사에서

최고의 작곡가가 곧 베토벤이며, 그 이전 및 이후의 누

구도 이 분야에서 베토벤을 능가한다고 감히 말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의 교향곡은 모두 아홉 곡에 불

과하지만 이전에 수십 곡 이상을 쓴 작곡가들의 작품

과 차별화된다. 뿐만 아니라 그의 교향곡들은 지속적

으로 각자 개성을 추구하고 있으며, ‘다음 작품’이 매

번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였다. 만약 그가 더 살아서

10번 교향곡을 만들었다면 어떤 형태가 되었을지 긴

장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작품을 떠올리며 인류가 기

억해야 할 원리가 있다. 변화하지 않으면 발전이 없고

긍정적 방향의 진화도 불가능하다.

3

고난은 누구나

맞닥뜨릴 수 있으며

최악의 형태로도

나타나지만

극복의 대상이지

결코 종속의

대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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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음악은

후반으로 갈수록

인간에 대한

긍정의 의지,

포괄적 사랑을

담고 있다.

세계기록유산

4

하세, 그리고 보다 환희에 찬 것을.” 이 작품은 음악으

로 희망과 평화를 전하는 최초의 교향곡이다. 이전에

고급 음악은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다. 그러한 음악은

문화적 수준에서뿐만 아니라 경제적 수준에서 일반인

이 범접하기 어려웠다. 표현 내용 역시 예배나 행사에

종속되거나 자체적 아름다움(자율적 음악미)이 중심에

있었다. 인류 전체를 향하여 어떤 가치를 공표하는 예

술로서의 음악이 그 구체적 모습을 보인 것은 아마 이

작품이 처음일 것이다.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이 이러한

사고전환의 상징적 음악이기에 서두에 소개한 『파우스

트 박사』의 주인공은 절망하면서 이 교향곡에 인류의

가치를 묶은 것이다.

음악, 특히 단일 음악 작품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된 것은 해당 작품의 이해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

작품에 대한 평가는 획일적이지 않다. 작곡가의 생존

때부터 크고 작은 비판들이 제기되었다. 베토벤은 그

의 후기 작품이 청중에게 저절로 즐겨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의 작품을 진정으로 이해해주기를 바랐고,

그러한 사람의 수가 당장은 적을 수 있음도 각오했다.

대중성과 공공의 가치

또 하나 돋보이는 점은 대중적 연주회를 바탕으로 수

익을 얻는 음악 매니지먼트 방식이 동원되었으나, 이

작품이 전하는 바는 보편적 인류애와 관습타파라는 것

이다. 말하자면 도덕적 음악과 상업적 흥행이 같은 테

두리 안에 들어와 있는 작품이다. 초연을 준비하던 중,

베토벤은 빈의 청중이 점차 자신의 음악언어에서 멀

어지고 있다고 여겨 연주 도시를 다른 곳으로 바꾸려

고 하였다. 주변 사람들은 그에게 이 교향곡의 연주회

가 성황을 이룰 것이라고 설득하였으나, 청중이 외면

하는 음악회의 한계를 아는 베토벤은 쉽게 마음을 바

꾸려 하지 않았다. 이에 빈의 지성인들이 공개적으로

신문에 탄원서를 발표하였다. 그들은 당시 신분사회를

고려한 지위 우월성을 다 던져버리고 베토벤의 음악에

서 위대한 것을 기꺼이 배우려고 하였다. 이 작품의 수

용과정을 통하여 인류가 기억해야 할 지향점이 있다.

어떤 예술 작품이든 그 대중성이 장기적으로 공공의 가

치와 동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

“공공의 향유를 위해서, 위대한 것 그리고 완결된 것의

솟구치는 의미를 위해서 당신의 손에 의한 최근 대작

들의 공연을 그리 오래 주저하지 마십시오. [...] 우리는

당신의 장려한, 아직 도달하지 못한 교향곡들의

화환에서 하나의 새로운 꽃이 반짝이며 드

러나고 있음을 압니다.”

예술 음악의 보편화

이 교향곡의 4악장에서 베토벤은 프리드

리히 실러의 ‘환희의 송가’를 편집하여 가

사로 사 용하였다. 그런데 성악부

분 이 나오는 맨 앞에 자신이 직

접 써넣은 구절이 있다. “오 친

구들이여, 이런 음들이 아닐세!

보다 아늑한

것을 우

리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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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4 빈 운가르 거리의 한 건물에 설치

된 베토벤 기념 동판

ⓒ 위키백과

5 베토벤 9번 교향곡은 전 세계적

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곡 중의

하나로, 도덕적 음악과 상업적

흥행이 같은 테두리 안에 들어와

있는 작품이다.

ⓒ 위키백과

자신이 음악적으로 진화하면, 요즘 유행하는 말로 혁

신을 추구하면, 그만큼 청중과의 거리감이 생길 수 있

음을 모르지 않았다. 그의 음악은, 특히 9번 교향곡을

포함하여 그의 후기 작품은 진리를 설파하는 강연에 가

깝다. 그의 음악은 후반으로 갈수록 인간에 대한 긍정

의 의지, 포괄적 사랑을 담고 있다. 그의 9번 교향곡은

이러한 가치지향성을 지닌 대표적 작품이다.

멈추지 않는 활용

음악이 이념에 편승하거나 이념이 음악을 끌어들이는

경우는 오늘날 더 이상 새로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베

토벤의 9번 교향곡은 넓은 지지를 받는 다양한 이념들

이 관여한다. 소위 베토벤 끌어들이기의 선봉에 9번 교

향곡이 위치한다. 물리적 사회 변혁을 꿈꾸던 혁명 세

력의 정신을 잇는 음악으로, 산업 현장에 있는 노동자

들의 희망을 담은 음악으로,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

을 옹호하는 음악으로, 심지어 나치의 전쟁 명분을 드

높이는 음악으로 사용되었다. 구 동서독의 국가 대용

음악으로, 4+2(연합국 및 동서독) 연합오케스트라 연

주에 의해 동서냉전의 마감을 알리는 ‘자유의 송가’로

41

쓰였고, 유럽연합의 국가로 사용되고 있으며, 나아가

세계 곳곳에서 연말연시에 연주되는 것도 이 작품의

그러한 성격을 잘 나타낸다.

문헌적 기록물의 관점에서 보면 이 기록유산은 악보

와 음반의 형태를 띠고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이 인류

에게 전하는 바는 사실 그 정신에 있다. 숭고한 가치

지향적 내용을 음악으로 표현하여 소통시키고 그 파

장을 지속적으로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점에서 인류의

공동 유산인 셈이다. 어떤 세계기록유산이 우리 인류

에게 계속 기억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곧 현재에도 인

류의 문화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어

느 한 지역, 구성원, 시대 또는 이념이나 유행 등에 국

한되지 않고 두루 되새길 수 있는 문화물이 세계의 기

억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이 맥락에서 보면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은 이미 수행한 역할만으로도 인류의 기억

속에 길이 살아 있을 만하다. 그 기억을 바탕으로 우

리 인류가 공동체적 이상을 드높이며 화합을 도모할

새로운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이를테면 모든 사람들

이 형제가 되어 서로 얼싸안으며 환희를 향유하는 계

기마다 이 음악이 기억될 것이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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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가 숨겨둔 보물

파주 구 장단면사무소

암울한 역사의

흔적이 남은

1

2

1945년 8·15광복 후 국토분단으로 인하여

장단면은 북한으로 들어가 미수복된 채 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6·25전쟁 때

미군 해병대와 중공군이 치열한 격전을 벌였던

베가스 고지 전투와 고랑포 전투 등은 장단면

사무소를 철근 콘크리트로 지어진 건물 그대로

가만히 두지 않았다. 빼앗기지 않으려고, 빼앗

으려고 총탄을 날렸던 그 흔적으로 콘크리트가

떨어져나가고 철근이 드러났다. 모든 참상이

끝나고 남은 처참한 건물은 암울했던 역사의

흔적만 남긴 채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이 6·25전쟁이 준 교훈이다.

글. 정진해 (한국능력교육개발원 교수)

1, 2 6·25전쟁 전까지 장단면의 행정

업무를 담당하던 파주 구 장단면

사무소(등록문화재 제76호) 전경.

6·25전쟁 때의 총탄 흔적이 곳곳

에 남아 있어 암울했던 우리 근대

사를 전해주고 있다.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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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3 6·25전쟁 때 미군 해병대와 중공

군이 치열한 격전을 벌였던 베가

스(Vegas) 고지 전투

© 위키백과

번성했던 장단면 지역

장단지역은 『삼국시기』에는 고구려와 백제가 임진강과

한탄강 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던

요충지였다. 신라가 한강 유역을 점령하면서 마지막으

로 차지하였던 땅으로 삼국의 문화가 담겨 있는 지역

이다. 중앙세력의 정치적, 문화적 영향력 아래 자치권

을 지닌 지방세력이 존재하였고 그들의 문화 역시 중

앙과 구별되는 강한 지역색을 띠었다. 고려시대는 개

경의 외곽지역으로 왕도의 문화가 고스란히 젖었던 곳

이며 조선 시대 또한 수도 한양의 북쪽에 인접하여 그

곳의 문물을 직접적으로 받아들였던 땅으로 불교문화

와 유교문화가 융합된 지역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였던 1934년에 진남면이 장단면으로 개칭

되고 1945년 8·15광복 후 국토분단으로 장단지역은

북한의 땅이 되었다가 6·25전쟁 때 미군 해병대와 중

공군이 치열한 격전을 벌였던 베가스(Vegas) 고지 전

투와 고랑포 전투 등이 휴전을 앞둔 상태에서 전개되

었던 유명한 공방전 가운데 한 곳이다. 1945년 11월에

장단군은 행정구역개편이 되고, 다시 1949년 장단면·

군내면·진동면·장남면·진서면이 남한 지역이 되

고, 1962년에는 일부 지역이 파주군·연천군에 편입

되었다.

경기도 장단군 장단면 소재지에 면사무소 건물이 만

들어진 것은 1934년 일제강점기였다. 이때만 하여도 3

장단군은 경기도의 최북단 개성의 교외 지역으로 물자

가 풍부한 지역이었다. 군내에는 군청과 시장, 금융조

합이 밀집되어 있었으며, 임진강 수운이 발달하였다.

하천 연안에는 비옥한 평야가 형성되어 벼농사의 중

심지였고, 콩은 품질이 우수하여 ‘장연대두’라 하여 국

제시장에서도 거래되었다. 또한 경의선이 북부를 동서

로 통과하며 장단역이 있고, 군내면 읍내리를 경유하

여 고랑포와 구화장을 잇는 도로가 통과하면서 군내,

파주, 개풍군 등과 연결되어 교통이 편리했던 지역이

었다. 근대적인 시가지가 형성되고 장단군청도 이곳으

로 이전되면서 면 이름도 군명을 따라 1934년에 장단

면이 되었다.

북한

군내면

진동면

파평면

법원읍

파주읍

월릉면광탄면

조리읍

교하동

금촌동

고양시

김포시

탄현면

문산읍장단면

연천군

적성면

동두천시

양주시

한강

임진강

이 지역은

근대화와

경제 활동의 활성화로

한국근대건축사

발전에 한 획을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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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가 숨겨둔 보물

면 소재지의 철근 콘크리트 건물 등장

1934년 장단면의 행정 업무를 관할해야 할 면사무소가

신축되었다. 지금은 비무장지대(DMZ) 내 장단면 도라

산리에 1층 건물로 6·25전쟁 전까지 장단면의 행정

업무를 관장했던 곳이다. 6·25전쟁 전까지만 하여도

미곡과 두류의 주요 산지였으나 전쟁으로 어디 한 곳

발 디딜 수 없이 처참하게 폐허가 되었다. 처참한 만큼

역사의 흔적은 더 값지고 가치를 느낄 수 있다.

당시 목조건물로 면사무소로 사용되는 시기였다. 1932

년 건립된 울산지역의 상북면사무소는 정면 7칸의 한

식 목조 기와집으로 일식 건축양식이 가미된 형태를 지

니고 있다. 또한 안양 구 서이면사무소의 건물도 1914

년 이전에 지은 목조건물로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이다.

목조건물을 뛰어넘어 철근 콘크리트 건물을 선택하였

다는 것은 획기적인 발상이 아닌가 한다. 목조건물은

말 그대로 목재를 조립하여 만든 구조로 뼈대가 되는

기둥과 보, 슬라브를 목재로 세우고 지붕과 바닥, 벽을

만들어 이 목재 뼈대에 연결하는 가구식 구조이다. 철

근 콘크리트 건물은 콘크리트 안에 철근을 넣어 콘크

리트의 단점을 보완한 것이다. 즉, 철근과 콘크리트의

열팽창계수가 거의 동일하다는 특징이 있고, 콘크리트

가 철근을 감싸는 형태로 시공되므로 부식에 취약한 철

근에 공기가 접촉하는 것을 막아주고, 콘크리트는 수

분을 잔뜩 머금고 있지만 알칼리성 물질이라 철근의 부

식을 막아준다.

우리나라는 1910년대부터 철근 콘크리트 건물이 지어

지기 시작하였는데 첫 철근 콘크리트 건물이 1910년

11월 준공된 부산 세관 본청사이다. 철근 콘크리트 구

조를 잡고 러시아산 붉은 벽돌로 외부를 마감하였다.

1934년에 준공한 장단면 사무소의 건물과 같은 연도의

고려대학교 본관 건물(사적 제285호), 1937년에 준공

된 중앙고등학교 본관 건물(사적 제281호) 등이 대표

적 건물이다.

1925년 전후는 일본이 한반도 내의 각 분야에서 전성

기를 구가할 때로 특히 건축 분야에 활기를 띠고 있었

다. 이 시기에 장단면사무소의 철근 콘크리트 건물은

지방의 면 소재지에서의 획기적인 변화이다. 일제강점

기에 조선건축회에서 발행되었던 건축잡지인 『조선과

4

이 시기에

장단면사무소의

철근 콘크리트

건물은 지방의

면 소재지에서의

획기적인 변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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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한국전쟁 당시 연합군 군수물자

수송을 위해 개성역에서 황해도

한포역까지 올라갔다 전세가

악화되어 남쪽으로 내려오던 중

경의선 장단역에서 피폭되어

탈선하여 그 자리에 멈춰선 등록

문화재 제78호 경의선 장단역

증기기관차

© 문화재청

4 1934년에 준공한 장단면사무소의

건물과 같은 연도의 고려대학교

본관 건물(사적 제285호)

© 문화재청

건축(朝鮮と建築)』에 수록되었다. 이 잡지는 일제강점

기 한국에서 건축 분야의 대표적 직능단체로서 1922년

에 창립한 조선건축회가 1944년까지 발간한 건축 도시

전문 월간잡지다. 매호 조선 내 중요 건축물의 평면도

를 싣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새로운 건축물을 소개하

는 등 식민지 조선의 건축사 및 당시 일제의 건축 수준

을 알려주는 자료다. 이 잡지에 장단면사무소 개소에

따른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면사무소의 규모

면이나 철근과 콘크리트로 만든 건물이 만만치 않았다

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증명한 것이다.

전쟁으로 남은 장단면사무소의 역사적 가치

비무장지대 내 옛 장단역에서 서쪽 능선으로 약 700m

떨어진 곳에 전체 면적 295.4㎡, 건물 높이 3.5m의 면

사무소 건물, 전쟁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장단

면사무소의 건물은 전쟁의 결과물로 폐허가 되어 앙상

한 골조만 남았다. 장단면사무소에 관한 역사적 기록

과 건물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DMZ

에 방치되어 있었다. 오래도록 접근할 수 없었던 탓도

있지만, 아직 남과 북이 대치 상태에 있어서 전쟁의 상

흔을 잊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은 건물을 산산이 부서

져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골조와 지붕이 남

아 있다는 데서 철근 콘크리트 건물이 쉽게 부식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산물이다.

대부분 일제강점기 건물은 화재 피해를 당할 경우 벽

체만 남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것은 목조로 만든 바닥

과 천장은 불에 타고 불연재인 벽돌 벽체만 남기 때문

이다. 그러나 장단면사무소는 화재로 인한 폐허가 아

닌 총탄에 의해 골조만 앙상하게 남아 있고 지붕이 덮

어져 있다. 어느 칸이 벽이고 어느 칸이 문이 있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콘크리트 골조에 드러난 철근이 녹

슬어 있다. 철근에 녹이 짙어질수록 이를 감싸고 있던

콘크리트도 균열이 생겨 조금씩 떨어져나가지만, 지금

까지 방치된 상태에서도 총탄에 맞아 난 상처임에도 아

직은 전체의 틀은 간직하고 있다.

이 건물을 지을 당시 건물 외벽에 붙여 건물의 가치를

더욱 높였던 세로줄 무늬가 있는 황토색의 스크래치

타일이 일부 남아 있다. 이런 타일이 사용된 것은 1930

년대의 관급 건물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였다는 증거이

기도 하다. 1920년대부터 타일이 본격적으로 사용되었

는데, 이것은 개항 이후 근대화와 경제 활동의 활성화

에 따른 건축물의 대량 신축, 사무소, 판매시설과 같은

새로운 용도의 건축물 등장, 철근 콘크리트와 타일 같

은 새로운 구조·재료의 도입, 민간 건축가의 성장과

같은 변화가 동시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이 변

화 속에서 1931년 10월에 완공된 구 서울대학교 본관이

나 1932년에 완공된 충남도청사 등에서도 철근 콘크리

트와 스크래치 타일을 이용하였다. 1934년에 같은 방

식의 장단면사무소도 상당히 고급 외장재를 사용했음

을 보여주는 것은 이 지역이 근대화와 경제 활동의 활

성화로 한국근대건축사 발전에 한 획을 그었다. 그러

나 면사무소를 비롯한 주민이 걸었던 거리, 옹기종기

모여 있던 민가, 거리의 상점들은 한국전쟁과 함께 묻

혀버렸으니 역사적 가치는 어떻게 보상될 수 있을까

한다. 아직도 늦지 않았다. 우리에겐 역사적 가치를 위

해 한 발 더 보존하고 보여주어야 할 책무가 있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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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20년사

문화재 약탈은 주로 19세기나 20세기 초에

발생했으나 국제적 차원에서 문화재 개념을

도입하고 환수의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 것은

20세기 후반의 일이다. 따라서 문화재를 환수

한다는 것은 ‘현대인이 근대적 정신을 가지고

전근대적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전쟁이나 식민지배, 도난 등으로

불법·부당하게 반출된 문화재가 기원국으로

반환되어야 한다는 국제 여론은 1973년 자이

레 (현 콩고민주공화국) 모부투 대통령의 유엔

연설을 계기로 형성되기 시작했고 1973년

‘유엔총회 결의 3187’호와 1978년 「문화재

반환 촉진 정부 간 위원회」(ICPRCP) 설립

으로 국제적 주목을 받았으나 강제성이 없는

권고 수준이어서 문화재 환수는 여전히 약탈

국이 자신의 선의를 가장하는 정치적 상황

에서만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도

일본과 「1965년 한일 문화재협정」과 이에

부속한 「협정 합의사록」을 체결하고 식민

지배 당시 반출된 문화재(1,432점)를 환수

받았으나 일부에 불과하다. 이 점에서 지난

20년간 문화재청 환수정책의 성장을 돌아

보고 앞으로의 방향을 모색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글. 사진. 국제협력과

문화재 환수 20년

국가 정체성과 국민의

자긍심을 드높인

전근대적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

현대인이

근대적

정신을

가지고

1

북관대첩비 환수를 위한 민·관 협력(1999~2007 )

「1965년 한일 문화재협정」(1,432점) 이후 한·일 간 문화재 분야 최대

현안은 일본 야스쿠니신사에 보관된 ‘북관대첩비’이었다. 북관대첩비

는 러·일 전쟁 당시 일본군 이케다 마사스케(池田正介, 1856~1914)가

약탈하여 일본 도쿄에 위치한 야스쿠니신사에 전리품으로 봉납되었다.

동경한국연구원장이었던 최서면이 비석의 소재와 반출경위에 대한 내

용을 발표(잡지 ‘韓 ’ 통권 74호, 1978년 3월)하면서 1979년부터 정부, 국

회, 민간이 환수를 추진하였다.

비석 환수의 전환점은 한일불교복지협회(회장 초산스님) 활동을 통해

마련되었다. 한일불교복지협회는 2004년 12월 10일 중국 베이징에서

북한 조선불교도연맹과 회담하고 ‘북·일 수교가 이루어지지 않는 관

계로 남한을 경유하여 북한으로 이전한다’는 합의를 하였다. 이 합의

는 민간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일본 측이 효력 문제를 제기하면

서 추인 문제가 발생했다. 이때 문화재청은 2005년 4월 20일 야스쿠

니신사측과 직접 면담해 추인 문제를 해결했다. 이후 문화재청장 명의

로 북한 측에 남북 당국자 간 회담이 제의되면서 2005년 10월 21일 북

관대첩비가 국내로 환수되었고 수리를 거쳐 2006년 3월 1일 북한 김책

시로 이전되었다.

북관대첩비 환수는 일본 야스쿠니 측과의 협상에 문화재청이 나서면

서 우리 정부의 공식 의사를 통해 일본 측을 설득할 수 있었다는 점에

서 의미가 있다.

환수 방식 다각화(2008~201 1 )

문화재청의 환수정책은 2008년 11월 서울에서 개최된 문화재반환촉

진정부간위원회(ICPRCP) 30주년 기념 특별회의를 계기로 새롭게 전

환된다. 서울에서 개최된 특별회의에서는 식민지배나 외국군 점령으

로 불법·부당하게 반출된 문화재가 주로 다

루어졌다. 문화재청은 일본을 상대로 궁내

청 소장 조선왕조도서(1,205책)의 반환

을 촉구하였고 프랑스를 상대로는 외규

장각도서(297책) 반환을 촉구하여 국제

적 관심을 유도했다.

조선왕조도서는 2010년 8월

10일 일본 ‘칸 나오토’ 총리

담화를 계기로 한·일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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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2

협상을 거쳐 2011년에 반환되었고 외규장각도서는 2010년 서울에서

개최된 G-20회담을 계기로 ‘5년 주기 갱신 가능한 대여방식’으로 우

리나라에 반환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문화재청은 2011년에 환수정

책을 제도화하고자 「문화재보호법」을 개정하여 국외문화재 환수 조항

(67조~69조)을 도입했다. 또 민-관-학 협력을 체계적으로 추진하고

자 2009년에는 ‘국외문화재협의회’를 설립하여 현재까지 24차례 개

최되었다.

무엇보다도 이 시기에 주목할 점은 ‘한·미 수사공조’이다. 한·미 수사

공조는 「1948년 미국 연방도품법(NSPA)」을 근거로 문화재청이 수사를

요청하면 미국 국토안보수사국(HSI)이 압수한 후 미국 법원 판결이나

법무부 명령에 따라 몰수(forfeiture)하는 절차이다. 흔히 도난 문화재

는 선의취득 주장이나 ‘국제조약의 불소급 원칙(non-retroactivity of

treaties)’에 따라 환수의 어려움이 많았다. 한·미 수사공조는 문화재

청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안해낸 새로운 전략이다.

이 시기 또 하나 특징은 피탈국의 국제연대 강화이다. 문화재청은 식

민지배 당시 반출 문화재 환수의 국제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2011년과

2012년 두 차례에 걸쳐 서울에서 ‘문화재 환수 전문가 국제회의’를 개최

하였고 2013년에는 그리스 문화부, 터키 문화체육부, 중국 문물국과 환

수 협력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2013년 그리스 아테네, 2014년 중국 둔

황, 2015년 터키 네브세히르, 2016년 경주 등으로 순회하여 개최했다.

환수 성과 확대(2012~2019 )

문화재청의 환수정책 중심에는 국새와 어보가 있다. 2013년 10월 문화

재청과 미국 국토안보수사국(HSI)은 센디에고에 거주하는 6·25 전쟁

참전 미군 유족이 대한제국 국새, 고종어보 등 인장 9점을 소장하고 있

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한·미 수사공조를 개시하여 2014년 4월 모두

환수했다. 아울러 문정왕후 어보·현종 어보도 2013년 5월부터 한·

미 수사공조를 개시하여 2017년 6월 문재인 대통령의 미국 방문을 계

기로 모두 환수했다.

또 중요한 환수 성과는 불교 문화재이다. 2015년 4월 미국 경매에 도

난 불화인 ‘동악당재인대선사진영(선암사 불화)’이 출품되었을 때 문화

재청은 조계종으로부터 권한을 위탁받아 경매를 중지시켰고 소장자와

협상을 통해 무조건적 반환에 합의했다. 2015년 7월 국내 반환을 계기

로 조계종과 ‘불교 문화재 환수협력 양해각서’를 체결하여 협력을 제도

화했다.

이 시기 특징으로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설립을 들 수 있다. 문화재청은

국외문화재 현황, 반출경위 등을 체계적으로 조사하고 정부 환수정책

이나 민간단체 활동을 전문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2012년 7월 「문화재

보호법」(제69조의2)을 개정하여 재단을 설립했다.

환수 확대를 위한 과제(2020~2030 )

문화재청 개청 20년 동안 환수된 국외문화재는 비교연도(1978~1998)

보다 약 188%(6,552점) 증가되었다. 또 대상국도 4개국(일본, 미국 등)

에서 7개국으로 확대되었다. 외교협상이나 구입, 기증에서 벗어나

한·미 수사공조와 소송 등으로 보다 다각적으로 추진하였다. 특히 일

본 궁내청 조선왕조도서(1,205책), 프랑스 외규장각도서(297책) 등 오

랜 외교 현안을 해결했다는 큰 의미를 가진다.

지금까지 국외문화재 환수가 협상, 수사공조 등 사후적 방법으로 추진

했다면 앞으로는 소재국 국민에 대한 홍보와 교육 등 사전적 방법을 병

행할 필요가 있다. 아직도 도난된 국새·어보가 75점(국새 29, 어보 46)

이다. 기존 한·미 수사공조가 정보 공유를 바탕으로 몰수에 주력했다

면, 앞으로는 홍보, 교육을 확대하는 방향이 되어야 한다. 국새나 어보

는 우리나라의 국가 상징물로 사적 거래가 불가능하며 혹여 보관, 운

송, 이전, 양도 등을 하는 경우 형사 처벌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나

라와 소재국 간 문화 교류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양국 국

민이 충분히 인지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홍보와 교육이 필요하다.

1 2014년 4월 환수한 대한제국 국새

© 문화재청

2 2017년 문정왕후 어보·현종 어보

반환식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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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함께하는 문화재청

가자, 우리 동네 매장문화재 발굴현장으로문화재청,「매장문화재 발굴현장 활용 교육프로그램」 시행(5~10월)

글. 사진. 발굴제도과

문화재청은 (사)한국문화유산협회와 함께 지역주민

에게 자신이 사는 지역에서 발굴된 매장문화재를 소

재로 한 「매장문화재 발굴현장 활용 교육프로그램」을

오는 5월부터 10월까지 진행한다.

* 교육 일정은 추후 한국문화유산협회 누리집(http://www.kaah.kr)에서 공지

이번 프로그램은 일반인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지역에 있는

매장문화재를 활용해서 문화유산의 역사적 가치를 체험하고

즐길 수 있는 내용을 모의 발굴 체험과 유물 모형 제작, 고고

학 교양강좌 등으로 구성하였다.

전국 각 지역의 매장문화재를 주제로 서울·경기, 대구·

경북, 전남, 전북 등 4개 지역에서 총 11개의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매장문화재로 조선의 건국 역사를 알아보는 ▲

「매장문화재가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 4」와 「종로 공평동 유적 이야기」

(서울·경기, 한울문화재연구원), 읍성 견학 및 토기제작 체험 교육인

▲ 「청도읍성 가자!」와 「조물락 조물락 토기교실」(대구·경북, 경상북도

문화재연구원), 교육자료를 활용한 박물관 만들기 체험 교육인 ▲ 「압독

으로 떠나는 여행」과 「나만의 박물관 만들기」(대

구·경북, 한빛문화재연구원), 유물모양 석고방향

제·양초제작 등 실습형 교육인 ▲ 「알아두면 쓸

모있는 신비한 문화재(알·쓸·신·문)」(전남, 동북

아지석묘연구소), 매장문화재 발굴현장 답사 및 세계

유산 탐방 교육인 ▲ 「안녕! 고고학은 처음이지?」와 「전

북인의 세계유산 짚어보기」(전북, 전북문화재연구원) 등으

로 구성된다.

프로그램에 대한 자세한 내용과 일정은 (사)한국문화유

산협회 누리집(http://www.kaah.kr)에서 확인할 수 있

으며 더 자세한 사항은 전화(042-526-9270)로 문의하

면 안내받을 수 있다.

문화재청은 이번 프로그램을 통해 지역민에게 지역 내 매장문화재의 역

사적 가치를 직접 체험하고 즐길 소중한 기회를 제공하는 한편, 학생들

에게는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이해와 문화유산 관련 진로 체험을 통해

자신의 적성과 소질을 계발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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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문화재 카툰

문화유산과 4차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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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코너

| 문화재행정 Q&A |

50

Q. 국내에 있는 문화재를 국외로 반출할 수 있나요?

A. 「문화재보호법」 시행규칙 별표 2의 ‘일반동산문화재의 구체적인 범위(제

24조 관련)’에 해당하는 국내에 소재한 문화재는 「문화재보호법」 제60조

(일반동산문화재 수출 등의 금지)에 의거하여 국외 전시 등 국제적 문화

교류를 목적으로 문화재청장의 허가를 받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국외 반

출이 엄격하게 금지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일반동산문화재로 오인될 우

려가 있는 동산을 국외로 반출하고자 할 경우에는 사전에 공항 또는 항만

에 소재한 문화재 감정관실에서 비문화재확인을 받아야만 가능합니다.

QR코드를 검색하시면

Q&A 페이지로 연결됩니다.

문화재청 간행물

•우리 조상들이 다녀간 신라 왕경 경주

•낙동강 하류 철새도래지 모니터링 및 개선방안 마련 최종보고서

• 대형불화 정밀조사 보고서

- 김천직지사, 안심사영산회괘불탱, 남양주 봉선사 비로자나삼신괘불도

• 대형불화 정밀조사 보고서

- 광덕사노사나불, 금탑사, 선석사영산회, 보살사영산회괘불탱

•문화재 제52권 제1호

•2018 종묘 동측 외곽 담장 보수 공사 수리보고서

QR코드를 검색하시면

문화재청 간행물 페이지로 연결됩니다.

| 20 19년 5월호 독자의견 |

허*희 / 부산시 강서구 과학산단로

무형문화재 보존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요구

되는 시대를 살아가는 만큼 국립무형유산원이 해야

할 일이 점점 많아지고 방대해져가는 것이 당연합니

다. 이런 정부기관이 있다는 것조차 〈문화재사랑〉에

서 읽고 나서야 알게 된 내용이네요.

이*영 / 서울시 금천구 시흥2동 금하로

두 딸을 데리고 전주한옥마을을 구경했는데 경기전의

존재도 몰라서 한옥마을 구경 및 먹거리만 즐겼던 제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조선의 얼굴과도 같은

태조의 초상화를 모신 곳, ‘그 중요한 의미와 가치를

담은 초상화가 왜 전주에 봉안되었을까?’의 궁금증도

알 수 있었고, 하마비를 금했던 곳에서 지금은 버스킹

을 하는 공간이 공존하고 있다는 모습이 다시 한번 방

문하여 제대로 느끼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옥*민 / 부산시 해운대구 선수촌로

완벽을 위한 너그러움의 글에서 동작에 구애를 덜 받

는 사폭바지의 기능이며 엉성해 보이지만 옹골찬 우

리나라의 돌담과 흙담은 지역에 따라 특색이 있고 아

름다움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쁜 사진

들을 보고 행복하고 포근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철 / 경기도 군포시 금산로

수많은 세월이 지났어도 고귀한 문화재를 정성들여

서 찾아내는 모습, 어쩌면 어려운 퍼즐 한 조각을 맞

추는 느낌이었습니다. 수중발굴조사원의 직업내용과

그분들이 보람을 느끼며 직업정신을 발휘하는 모습

이 좋았습니다.

이*아 / 서울시 서초구 서초동 효령로

특집기사 완관은 깊은 감동과 공감을 이끌어냈던 기

사였다고 생각합니다. 의·식·주 어느 하나 완과 관

의 사상을 저버리지 않았던 조상들의 지혜에 감탄하

고, 기사로 다루어준 점에 감사드립니다.

권*미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양지로

몇 해 전 친정 부모님께서 오래된 예전 집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집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땅속

에 문화재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해 한동안 공사도

중단되고 아주 난감했습니다. 법이 개정되어 국가에

서 일정 규모 이하의 대지에 지원을 해준다고 하니 환

영할 만한 소식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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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를 대표하는 경관으로 죽방렴 방조어부림,

그리고 가천 다랑이 논을 꼽을 수 있다. 남해 하

면 사람들은 이 세 곳 중 하나를 떠올릴 것이다.

자연에 순응하고 때로는 그에 맞서 삶을 일궜던

조상의 삶의 흔적이 진하게 배어 있는 장소들이

다. 특히 설흘산과 응봉산 아래 바다를 향한 산

비탈 급경사지에 곡선 형태의 100여 층 논이 계

단식으로 조성되어 있는 가천 다랑이 논은 배후

의 높은 산과 전면의 넓게 트인 바다가 조화를 이

루어 빼어난 농촌문화경관을 이루고 있다. 논과

산림 그리고 바다의 자연적 요소와 가천암수바

위, 밥무덤, 설흘산 봉수대, 서포 김만중의 유배

지인 노도(섬)와 같은 문화적 요소는 가천 다랑

이 논의 명승적 가치를 한층 높이고 있다. 조상

들이 산간지역에서 벼농사를 짓기 위해 산비탈

을 깎아 만든 가천 다랑이 논. 인간의 삶과 자연

이 조화를 이룬 그 풍경은 현대인들에게 과거의

지혜를 일깨워주고 있다.

<남해 가천 다랑이 논 방문 정보>

소재지: 경남 남해군 남면로 674

문의처: 055-860-8631

주변 볼거리: 앵강다숲길, 남해 가천 암수바위, 남해 남면해안

관련 웹사이트: http://tour.namhae.go.kr

문화재가 있는 풍경

자연과 더불어 삶을 일궜던 조상의 삶의 흔적,남해 가천 다랑이 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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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문화재청 김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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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月 火 水

2 3 4 5

9 10 11 12

16 17 18 19

23 24 25 26

30

이달의 문화재 행사

문화재청 6월 문화유산 행사 달력

이달의 추천 행사

문화공간음악회, 창덕궁

5월 11일~6월 9일 / 매주 주말 09:00

경복궁 •칠궁 특별관람 09:20, 10:20, 11:20, 13:20, 14:20, 15:20, 16:20 / 칠궁

•할머니가 들려주는 경복궁 이야기 10:30~11:30

/ 근정전ㆍ사정전ㆍ경회루

국립문화재개소 50주년 ‘한·중 고전원림 특별 사진전’ 09:00~

현충사 •충무공 고택마루 차(茶)예절 체험교실

13:00~16:00 / 충무공 고택 마루

만인의총 •만인의사 추모 예능대회 13:00~17:00

•국가무형문화재 제84-2호 예천

/ 예천통명농요 전수교육관

•국가무형문화재 제13호 강릉단오

6.5.~6.10. / 단오장 및 행사장

경복궁 •경회루 특별관람 10:00,

•칠궁 특별관람 09:20, 10:20, 11:20

•집옥재 작은도서관 10:00~13:00

•집옥재 왕실문화강좌 14:00~16

•수문장 교대의식 10:00, 14:00 / 흥

•생과방 운영 10:00~17:00 / 생과

•경복궁 별빛야행 19:40~21:40 /

•국립문화재개소 50주년 ‘한·중

현충사 •충무공 고택마루 차(茶)예

13:00~16:00 / 충무공 고택 마루

경복궁 •경회루 특별관람 10:00, 14:00, 16:00 / 경회루

•집옥재 작은도서관 10:00~16:00 / 집옥재

•수문장 교대의식 10:00, 14:00 / 흥례문 앞 광장

•생과방 운영 10:00~17:00 / 생과방

경복궁 •경회루 특별관람 10:00, 11:00, 14:00, 16:00 / 경회루

•집옥재 작은도서관 10:00~16:00 / 집옥재

•수문장 교대의식 10:00, 14:00 / 흥례문 앞 광장

•생과방 운영 10:00~17:00 / 생과방

•고궁음악회(주간) 16:00~16:40 / 흥례문ㆍ수정전ㆍ영추문

창덕궁 •문화공간음악회 09:00 / 사전예매

•국립문화재개소 50주년 ‘한·중 고전원림 특별 사진전’ 09:00~

현충사 •충무공 고택마루 차(茶)예절체험교실

13:00~16:00 / 충무공 고택 마루

경복궁 •경회루 특별관람 10:00, 11:00, 14:00, 16:00 / 경회루

•집옥재 작은도서관 10:00~16:00 / 집옥재

•수문장 교대의식 10:00, 14:00 / 흥례문 앞 광장

•생과방 운영 10:00~17:00 / 생과방

현충사 •충무공 고택마루 차(茶)예절 체험교실

13:00~16:00 / 충무공 고택 마루

•조선왕릉중부지구 조선왕릉 숲속 음악회 6.29.~6.30. / 태강릉

•십이지신상 그리기 및 단오선 만들기 / 의릉

•태종대왕과 함께하는 오후 6.29.~6.30. / 헌인릉

경복궁 •칠궁 특별관람 09:20, 10:20, 11:20, 13:20, 14:20, 15:20, 16:20 / 칠궁

•할머니가 들려주는 경복궁 이야기

10:30~11:30 / 근정전ㆍ사정전ㆍ경회루

창덕궁 •국립문화재개소 50주년 ‘한·중 고전원림 특별 사진전’

09:00~

현충사 •충무공 고택마루 차(茶)예절 체험교실

13:00~16:00 / 충무공 고택 마루

•국가무형문화재 제19호 선소리산

경복궁 •경회루 특별관람 10:00,

•칠궁 특별관람 09:20, 10:20, 11:20

•집옥재 작은도서관 10:00~13:00

•집옥재 왕실문화강좌 14:00~16

•수문장 교대의식 10:00, 14:00 / 흥

•생과방 운영 10:00~17:00 / 생과

•경복궁 별빛야행 19:40~21:40 /

창덕궁 •국립문화재개소 50주년

현충사 •충무공 고택마루 차(茶)예

13:00~16:00 / 충무공 고택 마루

경복궁 •경회루 특별관람 10:00, 14:00, 16:00 / 경회루

•집옥재 작은도서관 10:00~16:00 / 집옥재

•수문장 교대의식 10:00, 14:00 / 흥례문 앞 광장

•생과방 운영 10:00~17:00 / 생과방

•경복궁 별빛야행 19:40~21:40 / 경복궁 일원

•국가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이춘목 보유자 공개행사

/ 부천시 북부역 북부 마루광장

경복궁 •경회루 특별관람 10:00, 11:00, 14:00, 16:00 / 경회루

•집옥재 작은도서관 10:00~16:00 / 집옥재

•수문장 교대의식 10:00, 14:00 / 흥례문 앞 광장

•생과방 운영 10:00~17:00 / 생과방

•고궁음악회(주간) 16:00~16:40 / 흥례문ㆍ수정전ㆍ영추문

•경복궁 별빛야행 19:40~21:40 / 경복궁 일원

창덕궁 •창덕궁 달빛기행 20:00 / 사전예매

•문화공간음악회 09:00 / 사전예매

•국립문화재개소 50주년 ‘한·중 고전원림 특별 사진전’ 09:00~

현충사 •충무공 고택마루 차(茶)예절 체험교실

13:00~16:00 / 충무공 고택 마루

경복궁 •칠궁 특별관람 09:20, 10:20, 11:20, 13:20, 14:20, 15:20, 16:20 / 칠궁

현충사 •충무공 고택마루 차(茶)예절 체험교실

13:00~16:00 / 충무공 고택 마루

경복궁 •경회루 특별관람 10:00,

•칠궁 특별관람 09:20, 10:20, 11:20

•집옥재 작은도서관 10:00~16:00

•경복궁 야간 특별관람 19:30~22

•수문장 교대의식 10:00, 14:00 / 흥

•생과방 운영 10:00~17:00 / 생과

•수라간 시식공감 19:00~21:00 /

현충사 •충무공 고택마루 차(茶)예

13:00~16:00 / 충무공 고택 마루

경복궁 •경회루 특별관람 10:00, 14:00, 16:00 / 경회루

•집옥재 작은도서관 10:00~16:00 / 집옥재

•경복궁 야간 특별관람 19:30~22:00 / 경복궁 일원

•수문장 교대의식 10:00, 14:00 / 흥례문 앞 광장

•생과방 운영 10:00~17:00 / 생과방

•수라간 시식공감 19:00~21:00 / 외소주방

•국가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이애주 보유자 공개행사 / 돈화문 국악당

경복궁 •경회루 특별관람 10:00, 11:00, 14:00, 16:00 / 경회루

•집옥재 작은도서관 10:00~16:00 / 집옥재

경복궁 •야간 특별관람 19:30~22:00 / 경복궁 일원

•수문장 교대의식 10:00, 14:00 / 흥례문 앞 광장

•생과방 운영 10:00~17:00 / 생과방

•수라간 시식공감 19:00~21:00 / 외소주방

창덕궁 •국립문화재개소 50주년 ‘한·중 고전원림 특별 사진전’ 09:00~

현충사 •충무공 고택마루 차(茶)예절 체험교실

13:00~16:00 / 충무공 고택 마루

경복궁 •칠궁 특별관람 09:20, 10:20, 11:20, 13:20, 14:20, 15:20, 16:20 / 칠궁

현충사 •충무공 고택마루 차(茶)예절 체험교실

13:00~16:00 / 충무공 고택 마루

경복궁 •경회루 특별관람 10:00,

•칠궁 특별관람 09:20, 10:20, 11:20

•집옥재 작은도서관 10:00~16:00

•경복궁 야간 특별관람 19:30~22

•수문장 교대의식 10:00, 14:00 / 흥

•생과방 운영 10:00~17:00 / 생과

•수라간 시식공감 19:00~21:00 /

현충사 •충무공 고택마루 차(茶)예

13:00~16:00 / 충무공 고택 마루

조선왕릉중부지구 •재실에서 만

우리 국악 6.26.~6.29. / 선정릉

경복궁 •경회루 특별관람 10:00, 14:00, 16:00 / 경회루

•집옥재 작은도서관 10:00~16:00 / 집옥재

•경복궁 야간 특별관람 19:30~22:00 / 경복궁 일원

•수문장 교대의식 10:00, 14:00 / 흥례문 앞 광장

•생과방 운영 10:00~17:00 / 생과방

•수라간 시식공감 19:00~21:00 / 외소주방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송순섭 보유자 공개행사 / 순천 낙안읍성

경복궁 •경회루 특별관람 10:00, 11:00, 14:00, 16:00 / 경회루

•집옥재 작은도서관 10:00~16:00 / 집옥재

•경복궁 야간 특별관람 19:30~22:00 / 경복궁 일원

•수문장 교대의식 10:00, 14:00 / 흥례문 앞 광장

•생과방 운영 10:00~17:00 / 생과방

•수라간 시식공감 19:00~21:00 / 외소주방

현충사 •충무공 고택마루 차(茶)예절 체험교실

13:00~16:00 / 충무공 고택 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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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사 일정과 장소는 변경될 수 있으니 반드시 해당기관에 확인 후 방문 바랍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17호 봉산탈춤 공개행사 / 국립중앙극장 KB청소년하늘극장

•국가무형문화재 제43호 수영야류 공개행사 / 수영민속예술관 놀이마당

•국가무형문화재 제62호 좌수영어방놀이 공개행사 / 수영민속예술관 놀이마당

•국가무형문화재 제76호 택견 공개행사 / 택견원

•국가무형문화재 제81호 진도다시래기 공개행사 / 진도군 무형문화재전수관

경복궁 •경회루 특별관람 10:00, 11:00, 14:00, 16:00 / 경회루

•칠궁 특별관람 09:20, 10:20, 11:20, 13:20, 14:20, 15:20, 16:20 / 칠궁

•집옥재 작은도서관 10:00~16:00 / 집옥재

•경복궁 야간 특별관람 19:00~21:30 / 경복궁 일원

•수문장 교대의식 10:00, 14:00 / 흥례문 앞 광장

•생과방 운영 10:00~17:00 / 생과방

•고궁음악회(주간) 16:00~16:40 / 흥례문ㆍ수정전ㆍ영추문

•수라간 시식공감 19:00~21:00 / 외소주방

•고궁음악회(야간) 20:00~20:50 / 수정전 앞 월대

창덕궁 •창덕궁 달빛기행 20:00 / 사전예매

•문화공간음악회 09:00 / 사전예매

•국립문화재개소 50주년 ‘한·중 고전원림 특별 사진전’ 09:00~

현충사 •충무공 고택마루 차(茶)예절 체험교실 13:00~16:00 / 충무공 고택 마루

칠백의총 •칠백의사 추모 예능대회 13:00~17:00

천통명농요 공개행사

오제 공개행사

14:00, 16:00 / 경회루

0, 13:20, 14:20, 15:20, 16:20 / 칠궁

0 / 집옥재

6:00 / 집옥재

흥례문 앞 광장

과방

경복궁 일원

중 고전원림 특별 사진전’ 09:00~

예절 체험교실

•국가무형문화재 제44호 경산자인단오제 공개행사

6.7.~6.9. / 경산시 자인면 계정숲 일원

•국가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 신응수 보유자 공개행사

/ 강릉 구 우림목재 공장

•국가무형문화재 제123호 법성포단오제 공개행사

6.7.~6.10. / 법성포단오제 전수교육관 일원

경복궁 •경회루 특별관람 10:00, 14:00, 16:00 / 경회루

•칠궁 특별관람 09:20, 10:20, 11:20, 13:20, 14:20, 15:20, 16:20 / 칠궁

•집옥재 작은도서관 10:00~16:00 / 집옥재

•수문장 교대의식 10:00, 14:00 / 흥례문 앞 광장

•생과방 운영 10:00~17:00 / 생과방

•고궁음악회(주간) 16:00~16:40 / 흥례문ㆍ수정전ㆍ영추문

•경복궁 별빛야행 19:40~21:40 / 경복궁 일원

창덕궁 •달빛기행 20:00 / 사전예매

•국립문화재개소 50주년 ‘한·중 고전원림 특별 사진전’ 09:00~

현충사 •충무공 고택마루 차(茶)예절 체험교실

13:00~16:00 / 충무공 고택 마루

경복궁 •경회루 특별관람 10:00, 11:00, 14:00, 16:00 / 경회루

•칠궁 특별관람 09:20, 10:20, 11:20, 13:20, 14:20, 15:20, 16:20 / 칠궁

•집옥재 작은도서관 10:00~16:00 / 집옥재

•수문장 교대의식 10:00, 14:00 / 흥례문 앞 광장

•생과방 운영 10:00~17:00 / 생과방

•고궁음악회(주간) 16:00~16:40 / 흥례문ㆍ수정전ㆍ영추문

•경복궁 별빛야행 19:40~21:40 / 경복궁 일원

창덕궁 •창덕궁 달빛기행 20:00 / 사전예매

•문화공간음악회 09:00 / 사전예매

•국립문화재개소 50주년 ‘한·중 고전원림 특별 사진전’ 09:00~

현충사 •충무공 고택마루 차(茶)예절 체험교실

13:00 ~ 16:00 / 충무공 고택 마루

칠백의총 •칠백의총 활쏘기 체험 13:00 ~16:00

•조선왕릉중부지구 헌릉(태종) 제향행사

•국가무형문화재 제4호 갓일 박창영 보유자 공개행사

6.6.~6.9. / 강릉오죽헌

•국가무형문화재 제50호 영산재 공개행사 / 봉원사 영산재보존도량

•국가무형문화재 제86-3호 경주 교동법주 공개행사

6.6.~6.8. / 경주교동법주 제조장

경복궁 •경회루 특별관람 10:00, 14:00, 16:00 / 경회루

•칠궁 특별관람 09:20, 10:20, 11:20, 13:20, 14:20, 15:20, 16:20 / 칠궁

•집옥재 작은도서관 10:00~16:00 / 집옥재

•수문장 교대의식 10:00, 14:00 / 흥례문 앞 광장

•생과방 운영 10:00~17:00 / 생과방

•경복궁 별빛야행 19:40~21:40 / 경복궁 일원

창덕궁 •달빛기행 20:00 / 사전예매

•국립문화재개소 50주년 ‘한·중 고전원림 특별 사진전’ 09:00~

현충사 •충무공 고택마루 차(茶)예절 체험교실

13:00~16:00 / 충무공 고택 마루

산타-령 공개행사 / 소월아트홀

14:00, 16:00 / 경회루

0, 13:20, 14:20, 15:20, 16:20 / 칠궁

0 / 집옥재

:00 / 집옥재

흥례문 앞 광장

과방

경복궁 일원

‘한·중 고전원림 특별 사진전’ 09:00~

예절 체험교실

•국가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및병창 문재숙 보유자 공개행사

/ 창경궁 통명전

•국가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 최기영 보유자 공개행사

/ 대목장 최기영 선생 전수교육관

경복궁 •경회루 특별관람 10:00, 14:00, 16:00 / 경회루

•칠궁 특별관람 09:20, 10:20, 11:20, 13:20, 14:20, 15:20, 16:20 / 칠궁

•집옥재 작은도서관 10:00~16:00 / 집옥재

•수문장 교대의식 10:00, 14:00 / 흥례문 앞 광장

•생과방 운영 10:00~17:00 / 생과방

•경복궁 별빛야행 19:40~21:40 / 경복궁 일원

창덕궁 •국립문화재개소 50주년 ‘한·중 고전원림 특별 사진전’ 09:00~

현충사 •충무공 고택마루 차(茶)예절 체험교실

13:00~16:00 / 충무공 고택 마루

•국가무형문화재 제45호 대금산조 이생강 보유자 공개행사

/ 창경궁 통명전

•국가무형문화재 제84-1호 고성농요 공개행사 / 고성농요전수관

경복궁 •경회루 특별관람 10:00, 11:00, 14:00, 16:00 / 경회루

•칠궁 특별관람 09:20, 10:20, 11:20, 13:20, 14:20, 15:20, 16:20 / 칠궁

•집옥재 작은도서관 10:00~16:00 / 집옥재

•수문장 교대의식 10:00, 14:00 / 흥례문 앞 광장

•생과방 운영 10:00~17:00 / 생과방

•경복궁 별빛야행 19:40~21:40 / 경복궁 일원

창덕궁 •국립문화재개소 50주년 ‘한·중 고전원림 특별 사진전’ 09:00~

현충사 •충무공 고택마루 차(茶)예절 체험교실

13:00~16:00 / 충무공 고택 마루

칠백의총 •칠백의총 활쏘기 체험 13:00~16:00

•조선왕릉중부지구 (태강릉)‘조선왕릉 아름다운 숲’ 사진전 / 6.15.~6.30.

•국가무형문화재 제51호 남도들노래 공개행사 / 남도들노래 시연장

•국가무형문화재 제53호 채상장 서신정 보유자 공개행사

6.13.~6.16. / 채상장 전수교육관

경복궁 •경회루 특별관람 10:00, 14:00, 16:00 / 경회루

•칠궁 특별관람 09:20, 10:20, 11:20, 13:20, 14:20, 15:20, 16:20 / 칠궁

•집옥재 작은도서관 10:00~16:00 / 집옥재

•수문장 교대의식 10:00, 14:00 / 흥례문 앞 광장

•생과방 운영 10:00~17:00 / 생과방

•경복궁 별빛야행 19:40~21:40 / 경복궁 일원

창덕궁 •국립문화재개소 50주년 ‘한·중 고전원림 특별 사진전’ 09:00~

현충사 •충무공 고택마루 차(茶)예절 체험교실

13:00~16:00 / 충무공 고택 마루

14:00, 16:00 / 경회루

0, 13:20, 14:20, 15:20, 16:20 / 칠궁

0 / 집옥재

2:00 / 경복궁 일원

흥례문 앞 광장

과방

/외소주방

예절 체험교실

경복궁 •경회루 특별관람 10:00, 14:00, 16:00 / 경회루

•칠궁 특별관람 09:20, 10:20, 11:20, 13:20, 14:20, 15:20, 16:20 / 칠궁

•집옥재 작은도서관 10:00~16:00 / 집옥재

•경복궁 야간 특별관람 19:30~22:00 / 경복궁 일원

•수문장 교대의식 10:00, 14:00 / 흥례문 앞 광장

•생과방 운영 10:00~17:00 / 생과방

•수라간 시식공감 19:00~21:00 / 외소주방

현충사 •충무공 고택마루 차(茶)예절 체험교실

13:00~16:00 / 충무공 고택 마루

경복궁 •경회루 특별관람 10:00, 11:00, 14:00, 16:00 / 경회루

•칠궁 특별관람 09:20, 10:20, 11:20, 13:20, 14:20, 15:20, 16:20 / 칠궁

•집옥재 작은도서관 10:00~16:00 / 집옥재

•경복궁 야간 특별관람 19:30~22:00 / 경복궁 일원

•수문장 교대의식 10:00, 14:00 / 흥례문 앞 광장

•생과방 운영 10:00~17:00 / 생과방

•수라간 시식공감 19:00~21:00 / 외소주방

현충사 •충무공 고택마루 차(茶)예절 체험교실

13:00~16:00 / 충무공 고택 마루

칠백의총 •칠백의총 활쏘기 체험 13:00~16:00

경복궁 •경회루 특별관람 10:00, 14:00, 16:00 / 경회루

•칠궁 특별관람 09:20, 10:20, 11:20, 13:20, 14:20, 15:20, 16:20 / 칠궁

•집옥재 작은도서관 10:00~16:00 / 집옥재

•경복궁 야간 특별관람 19:30~22:00 / 경복궁 일원

•수문장 교대의식 10:00, 14:00 / 흥례문 앞 광장

•생과방 운영 10:00~17:00 / 생과방

•수라간 시식공감 19:00~21:00 / 외소주방

현충사 •충무공 고택마루 차(茶)예절 체험교실

13:00~16:00 / 충무공 고택 마루

14:00, 16:00 / 경회루

0, 13:20, 14:20, 15:20, 16:20 / 칠궁

0 / 집옥재

2:00 / 경복궁 일원

흥례문 앞 광장

과방

외소주방

예절 체험교실

만나는 성종대왕의 악학궤범과 흥겨운

•국가무형문화재 제115호 염색장 정관채 보유자 공개행사

6.28.~6.30. / 염색장 전수교육관

경복궁 •경회루 특별관람 10:00, 14:00, 16:00 / 경회루

•칠궁 특별관람 09:20, 10:20, 11:20, 13:20, 14:20, 15:20, 16:20 / 칠궁

•집옥재 작은도서관 10:00~16:00 / 집옥재

•경복궁 야간 특별관람 19:30~22:00 / 경복궁 일원

•수문장 교대의식 10:00, 14:00 / 흥례문 앞 광장

•생과방 운영 10:00~17:00 / 생과방

•수라간 시식공감 19:00~21:00 / 외소주방

현충사 •충무공 고택마루 차(茶)예절 체험교실

13:00~16:00 / 충무공 고택 마루

•국가무형문화재 제121호 번와장 이근복 보유자 공개행사

/ 번와장 전수관

경복궁 •경회루 특별관람 10:00, 11:00, 14:00, 16:00 / 경회루

•칠궁 특별관람 09:20, 10:20, 11:20, 13:20, 14:20, 15:20, 16:20 / 칠궁

•집옥재 작은도서관 10:00~16:00 / 집옥재

•경복궁 야간 특별관람 19:30~22:00 / 경복궁 일원

•수문장 교대의식 10:00, 14:00 / 흥례문 앞 광장

•생과방 운영 10:00~17:00 / 생과방

•수라간 시식공감 19:00~21:00 / 외소주방

현충사 •충무공 고택마루 차(茶)예절 체험교실

13:00~16:00 / 충무공 고택 마루

칠백의총 •칠백의총 활쏘기 체험 13:00~16:00

조선왕릉중부지구 •조선왕릉 숲속 음악회 6.29.~6.30. / 태강릉

•신덕황후 ‘버들잎 설화’ 포토존 운영 6.29. / 정릉

•태종대왕과 함께하는 오후 6.29.~6.30. / 헌인릉

경복궁 •경회루 특별관람 10:00, 14:00, 16:00 / 경회루

•칠궁 특별관람 09:20, 10:20, 11:20, 13:20, 14:20, 15:20, 16:20 / 칠궁

•집옥재 작은도서관 10:00~16:00 / 집옥재

•경복궁 야간 특별관람 19:30~22:00 / 경복궁 일원

•수문장 교대의식 10:00, 14:00 / 흥례문 앞 광장

•생과방 운영 10:00~17:00 / 생과방

•수라간 시식공감 19:00~21:00 / 외소주방

현충사 •충무공 고택마루 차(茶)예절 체험교실

13:00~16:00 / 충무공 고택 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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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통

권 제

1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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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간등록번호 11-1550000-000370-06ISSN 2005-3584

새내기 문화재

문화재청은 매천 황현 「매천야록(梅泉野錄)」 등 7건의 항일독립

문화유산을 문화재로 등록하였다. 등록문화재 제746호 매천

황현 「매천야록(梅泉野錄)」은 조선말부터 대한제국기의 역사가

이자 시인이며, 경술국치 직후 순절(殉節)한 황현이 1864년

대원군 집정부터 1910년 경술국치까지 약 47년간의 역사 등을

기록한 친필 원본 7책으로 한국근대사 연구에 중대한 가치를

지닌 사료다. 「매천야록」에는 한말에 세상을 어지럽게 하였던

위정자의 사적인 비리·비행, 특히 일제의 침략상과 이에

대한 우리 민족의 끈질긴 저항 등이 담겨 있으며, 자유로운

방식으로 당시의 역사를 보고 들은 대로 기록하였다.

매천 황현「매천야록(梅泉野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