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397
기독교 강요 속의 인물들 #가이사 아우구스투스 (Caesar Augustus, B.C. 27A.D. 14): 로마의 황제로 본명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이다. 카이사르의 후계자이었으면서도 카이사르를 암살했던 브루투스와 자신의 경쟁자 안토니우스를 격퇴한 후, 로마로 귀환하자 원로원은 그의 모든 조치들을 재가하고, 그의 생일을 국경일로 선포하였 으며, 브룬디시움과 로마에 개선문을 세울 것을 결의했다. 그의 개선식은 시저 (Julius Cæsar, B.C. 10044) 의 개선식을 능가했다 . 이후 옥타비아누스는 비록 치밀한 정치적 계산에 따른 것이지만, 공화정으로 회복시킨 원로원에 권력을 이양했고, 로원은 공화정 회복자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회의를 소집한 후, 그의 자택 문

Upload: others

Post on 16-Mar-2020

9 views

Category:

Documents


0 download

TRANSCRIPT

Page 1: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기독교 강요 속의 인물들    #가이사 아우구스투스(Caesar Augustus, B.C. 27‐A.D. 14): 로마의 황제로 본명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이다.  카이사르의  후계자이었으면서도 카이사르를 암살했던 브루투스와 자신의 경쟁자 안토니우스를 격퇴한 후, 로마로 귀환하자 원로원은 그의 모든 조치들을 재가하고, 그의 생일을 국경일로 선포하였으며,  브룬디시움과  로마에  개선문을  세울  것을  결의했다.  그의  개선식은  시저(Julius Cæsar, B.C. 100‐44)의 개선식을 능가했다. 이후 옥타비아누스는 비록 치밀한 정치적 계산에 따른 것이지만, 공화정으로 회복시킨 원로원에 권력을 이양했고, 원로원은 공화정 회복자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회의를 소집한 후, 그의 자택 문

Page 2: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에 월계관을 걸었고, 용맹과 관용과 정의와 경건 같은 그의 덕목을 새긴 금 방패도 원로원 의사당에 내걸었다. 이보다 훨씬 더 큰 영예는 그에게 고귀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국교적인 관념을 연상시키는 의미를 담은  ‘아우구스투스’(존엄한 자)라는 칭호를 수여한 것이다. ▣ 고대 국가 종교의 개혁에 나선 아우구스투스는 오랫동안 소홀히 했던 의식들과 사제직을 부활시켰다. 그것은 어려운 과제였다. 개울, 들판, 집, 작은 숲, 교차로의 정령들을 숭배한 로마의 원시 애니미즘은 점차 그리스의 신인동형설과 융합하여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기가 불가능했다. 그것을 부활시켜봐야 인위적이고 비현실적이고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었다. 이미 이탈리아 외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일반인들은 오래 전부터 좀더 이국적이고 들뜨게 하는 이집트와 근동의 종교들로 돌아서 있었다. 교양있고 세련된 상류층은 스토아 학파든 에피큐로스 학파든, 회의 학파든, 견유 학파든 무슨 철학이든지 받아들이는 쪽으로 돌아서 있었다. 기원전  28년에 아우구스투스는  82채에 달하는 로마의 모든 신전들을 대상으로 보수 작업을 벌였다. 바로 일년 전에 율리우스의 신전과 아폴로 신전이 신축되어 봉헌되었는데, 두 신 모두 율리우스 황가의  수호자들이자  승리의  수여자들이며  국가를  내전에서  구해낸  신들이었던 관계로 그것은 적절한 선물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새로 건립된 아우구스투스 광

Page 3: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구는 반쯤 잊혀졌던 고대 로마의 여러 종교 의식들의 부활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또한 그는 아르발레스(경작) 형제단을 재조직했는데, 이들은 한때 해마다  5월 말에 자라는 곡식에 신의 강복을 빌기 위해 들판을 돌며 펼치는 엄숙하고도 유쾌한 제사 행렬인 암바르발리아(Ambarvalia)를 주도했고, 디아 여신(Dea Dia)으로 알려진 원시 들판의 여신을 기리는 행사도 주도했다. 또한 아우구스투스는 플라멘 디알리스 사제단을 과거의 모든 터부들과 함께 부활시켰다. ▣ 고대 의식들의 부활은 경건과 용맹의 정신을 되살리는데 기여한 점도 없지 않겠지만, 새 정부에 대한 충성이나 헌신을 직접 일으키거나 아우구스투스의 군주제적 통치를 효과적으로 선전할 수 없었다. 따라서 기원전  13년에 원로원은 투표를 통하여 아우구스투스의 평화 제단(Ara Pacis Augustae)을 세웠다. 이 장려한 기념물을 장식한 조각 패널들 중 하나는 아우구스투스가 제사를 드리기 위해 장엄한 행렬을 벌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 다른 패널에는 지모신이 무릎에 자녀들과 과실들을 올려놓고 바위에 앉아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12년에 대사제가 된 뒤로는 더욱 큰 열정과 활력을 가지고 새로운 종교 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다. ▣ 아우구스투스는 서기  4년에 티베리우스(Tiberius Claudius Nero Caesar,  14‐37 재위)를 자신

Page 4: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의 양자로 삼고 그에게 속주들에 대한 명령권과 아울러  10년 임기의 호민관의 권한을 부여했다. 그는 서기  14년  8월  19일 캄파니아의 작은 도시 놀라(Nola)에서 거의  60년의 정치 역정을 마쳤다. 그가 임종의 순간에  “어떤가, 내 배역을 잘 수행했지? 그렇다면 박수를 쳐서 나를 무대에서 내려오게 해주게”라고 하는 그리스 희곡의 대사를 인용한 것은 유명하다. 로마 원로원 의원들은 감사의 마음으로 그가 생전에는 지혜롭게도 공개적으로 거부했던 신의 칭호를 자발적으로 그에게 부여했다. 특히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출생하시던 때의 로마의 통치자였다.  #가이우스  칼리굴라(Gaius  Caligula,  A.D.  37‐41):  티베리우스  가이사(Tiberius 

Caesar,  14‐37 재위)의 증손 조카요 후계자였다. 원로원 의원들은 칼리굴라가 황제 후계자로 지명되는 것을 이의 없이 승인하고, 티베리우스에 대해서는 아우구스투스와 카이사르의 경우와는 달리 그를 신으로 선포하기를 거부함으로써 불만을 표시했다.  정식  이름이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아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Gaius  Jul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인 칼리굴라는 지지를 받을 만한 여건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게르마니쿠스의 살아 남은 유일한 아들로서 인기를 누렸을 뿐 아니라, 할아버지들 중 한 사람이 아우구스투스의 의대한 장군 아그리파였

Page 5: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다.  (그러나 칼리쿨라 자신은 아그리파가 기자 신분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아울러 할아버지들 중 한 사람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였는데, 내전의 상처가 과거 속으로 잊혀져 가면서 그의 명성이 향상되었다. 또 한 사람의 위대한 할아버지는 아우구스투스였다. 그러므로 그의 화려한 계보가 그의 최근의 과거를 가린 듯하다. 사려깊은 관찰자라면 그의 과거를 놓고서 다시 한번 생각했겠지만, 혹시 그렇게 생각했더라도 입 다물고 있는 게 최선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는 십대 후반에 할머니 안토니아와 함께 살면서 할머니의 권유로 세 명의 젊은 트라키아 왕자들, 유대의 젊은 헤롯 아그리파  1세(Horod Agrippa  I),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손자 마우레타니아의 프톨레마이오스 등과 가까이 사귀었다. 동방의 절대 군주 개념은 아마 그들에게서 얻은 듯하다. 카프리에서 숙부의 궁전에서 지내는 동안 위선과 아첨을 배웠는데, 그로서는 세야누스의 공포 정치 때 살아남기 위해서 그럴 필요가 있었는지 모른다. ▣ 그는 황제로 등극하자, 답례로 리비아와 티베리우스의 유산을 분배해주고, 평소에 원성이 높던 판매세를 폐지하고, 화려한 구경거리와 오락과 전차 경주와 야수 사냥으로 인민을 기쁘게 했다. 심지어 민회들에게  정무관들을  선출하는  고대의  권한을  되돌려주었다.  원로원에  대해서는 경의와 예의를 다하고 귀족들에게 유화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그들의 비위를 맞

Page 6: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추었다. 이미 일정이 잡혀 있던 반역죄 재판을 모두 취소하고, 고발자들의 파렴치한 행위를 규제하고, 티베리우스의 추방자들을 다시 불러모으고, 정중한 예를 갖추어 어머니 아그리피나와 형제 네로의 유해를 섬들에서 가져다가 아우구스투스의 묘에 이장했다. 공동 재산 상속자인 사촌 테베리우스 게멜루스를 자기 아들이자 후계자로 입양하고, 삼촌 클라우디우스를 공동 콘술로 세우고, 세명의 누이를 제국 전역에서 존경 받게 했다. 게다가 브리타니아와 게르마니아 정복 준비를 공포함으로써 모든 계층에 애국적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그렇지만 정작 자신이 중병에 걸리게 되는 바람에 이 계획을 연기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화합과 행복이 넘치는 영광스러운 통치를 바라던 사람들의 희망을  @산산조각 낸 것이었다. ▣ 칼리굴라는 병석에서 일어난 뒤 정신착란 증세가 생기기 시작했고 최고 권력에 대한 집착은 더욱 심해졌다. 그는 제어할 수 없는 독재자가 되기 시작하더니, 잔인하고 과대망상적이고 변덕스러운 행동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원로원을 무례하게 대하고, 속주 아프리카 프로콘술라리스(Africa Proconsularis)에 대한 군 통수권을 박탈하고, 제국의 조폐국을 로마에서 리용으로 이전함으로써 원로원이 보유하고 있던 이탈리아 내에서의 조폐권을 박탈했다. 원로원 의원 개개인들에게 자신과 자신의 누이들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하게 하고, 자기 식탁 곁에서 노예 복장을 하고

Page 7: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서 시중들게 하였으며, 자신의 전차 곁에서 구보하게 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경의의 표시로 자신의 발에 입을 맞추게 했다. 그는 누이들과도 습관적으로 불륜 관계를 맺고 살았으며, 지상에서 새로운 태양으로 숭배받기를 원했다. 칼리굴라는 향료 목욕, 연회, 술, 경마, 쇼, 인민에게 줄 선물 등등에 막대한 돈을 쏟아부었는데, 그가 네미 호수에 띄운 호화 유람선들에는 목욕탕과 정원과 화려한 보석들 박힌 호화 가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 사치와 압제와 살인과 과대망상증으로 얼룩진 칼리굴라의 짧은 정치 경력은  41년  1월  24일, 친위대 장군의 하나였던 카시우스 카이레아(Cassius Chaerea)가 궁전의 비밀 통로에서 그를 쳐 죽임으로써 순간적으로 끝났다. 스웨토니우스(Suetonius)의 말에 의하면,  41년에 살행당한 이 극악한 로마 황제는 평소에는 신들을 멸시하였으나 천둥이 치기만 하면, 평소 자신의 악행에 대한 죄책감에서 그랬는지, 무서워서 벌벌 떨면서 침대 밑으로 숨었다고 한다.    #겔라시우스(Gelasius,  492‐96 재위): 로마에서 출생하여  49대 주교가 되었는데 

저명한 저술가이기도 했다.  6권의 저서와 많은 서간을 통해 펠라기우스의 이단과 마니교를 논박하는 한편, 성직자의 규율 강화에도 힘썼다. 그러나 성경의 정경과 이단서를 구별한  ‘겔라시우스 법령’과, 역시 자신의 이름을 붙은  ‘미사 전서’는 오

Page 8: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늘날 그의 손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겔라시우스는 세속 문제에 대한 교회의 권위를 주장하였고, 교회 회의의 재판권을 가진 주교는 세속의 황제들과 권위가 동등하다고 주장하였다. 즉 이원론적인 입장에서 황제권과 주교권을 구분하여, 비잔틴 제국의 양권론을 일원화하는 데 반대하였다. 짧은 재위 기간이었으나 동로마 황제에 대해서는  ‘성과 속’ 양권의 구분과 전자의 우위성을 주장하여, 중세 정치사상의 원류가 되었다. 그는 또한  4종류의 사계 대제(四季大祭,  Ember Days)를 언급했고, 최초로  ‘그리스도의 대리자’(Victor of Christ)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즉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내 양을 치라’는 명령을 주교가 물려받았다고 주장하였다. 겔라시우스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은 후  40일이 지나서 행한 정결 의식을 기념하기 위하여  12월  25일부터 시작하여  2월  2일까지 거행하는 마리아의 성촉절(Candlemas)을 도입하여 촛불을 켜든 채 시내로 행진했는가 하면(494년경), 마리아 승천 축일(the Ascension) 혹은 마리아 몽소 승천 축일(Assumption)이란 것도 시작했고, 락탄티우스(Lactantius,  240‐320)의 저서들을 금서 목록으로 설정하기도 했다.  #그라티안(Gratian,  ?‐1159): 이탈리아의 수사로 교회법학의 창시자이다. 생애에 

Page 9: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저술과 가르침을 통해 교회법학을 신학으로부터 독립시켜 새로운 학문으로 만들었다. 카말돌리 수도회 수사로서 볼로냐의 성 펠릭스‐나보르 수도원에서 강의하며,  1140년경에 통칭으로 알려진  ‘그라티안 교령집’을 완성했다. 이것은 전체를  3부로 나누어, 공의회 결의, 교황령 교부문서, 로마법 등에서 채록한 약  3,800개 법문을 주제별 및 연대순으로 배치하고 있다. 그 이전의 어떤 교회 법령집보다도 대규모로서, 여기에는 과거  1000년간의 주요한 교회 법원(法源)이 총망라하여 수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단지 많은 자료를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서로 다른 출처에서 나온 규범들 사이의 정확한 모순과 불일치를 해결하려고 하였으며, 필요한 경우 로마법을 비롯해 교부들과 성직자들의 저술을 널리 참고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 교령집은  12세기 말에 교회의 법실무(法實務) 및 대학 법학교육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했다. 또 이 교령집의 출현으로 카논법의 통일과 체계화를 위한 기초가 잡혀지고, 그 기초 위에 중세 카논법학이 발달하여 교황령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교회입법이 이루어져 중세 카논법의 체계가 구축되었다. 이것을 집대성한 것이  ‘카논법 대전’이다. 이 교령집의 출현에 따라 종래 신학의 한 분야로서 존재하고 있던 교회법에 관한 학문이 신학에서 독립하여 카논(교회)법학이 탄생하였다. 편자 그라티안을  ‘카논법학의 아버지’라 부르는 이유가 

Page 10: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여기에 있다. 수 세기 동안 학교에서 교회법 기본교재로 사용되었으며, 뛰어난 교회법학자들이 이 교령집에 주를 달고 해설을 덧붙여서 교회법대전인  ‘구 교회법전’의 일부가 되었고, 1917년에 교회법전이 공식적으로 성문화될 때 중요한 근거로 사용되었다.    #그레고리  7세(Gregory Ⅶ,  1073‐85 재위): 로마 교회의  157대 교황으로 본래의 

이름은 힐데브란드(Hildebrand)인데, 그의 생애 동안에 교황의 권위가 극도로 팽창한다.  ‘교황’이라는 칭호를 더 이상 로마가 아닌 다른 주교에게는 사용하지 못한다고 규정했다.  ‘딕다투스 파페’(교황 교서)를 발표하여, 당시 절정에 달한 교황권의 영적, 현세적 특권을 개괄적으로 보여주는  27개의 제안들을 확정하였다. 교황은 성직매매를 금지시키고, 성직자들의 독신 생활을 장려했으며, 고위 성직자들의 혁신적인 생활 개선을 요구했다. 또한 당시까지 왕과 황제가 주교들을 서임(invetitura)하여 직책과 은정을 베풀어 오던 관례를 폐지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4세 황제의 극렬한 반대를 받게 되어, 이후 두 사람은 폐위와 파문을 서로 주고 받게 된다. ▣ 과정을 보면 이렇다. 교황청이 황제의 평신도 서임을 단죄했지만, 밀라노, 스폴레토, 페르모 기타 등지에 황제는 여전히 자신의 마음

Page 11: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에 드는 사람들을 주교와 수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이렇게 사실상 교회 내부의 가장 큰 부패 요인은 속인의 서임이었다.  1075년 사순절 로마 회의에서 속인의 서임을 더욱 엄격히 규제하고 교구 점유의 모든 권리를 왕으로부터 찾아낼 것을 파문의 위협하에 결정하여 이를  12월에 왕들에게 통보하였다. 이같은 내용은 특히 독일 제국의 기반이 흔들릴 정도였다. 하지만 교황의 서신을 접한 황제 하인리히 4세는 굽히지 않고  1076년  1월 말 보름스(Worms)에서 교회 회의를 소집하여 교황 반대 운동을 전개하여 주교  26명의 서명을 받아 힐데브란트의 범행들을 규탄하고 교황을 폐위시키기로 결정하였다. 교황의 대응은 명백하였다.  1076년 사순절 로마 회의에서 교황은 황제를 파문하고 황제의 모둔 권한을 금하며 황제의 신하들에게는 충성의 의무에서 면제시켜 주었다. 그러나 황제는 폐위되지 않았고 이에 따라 교황은 교회의 명령에 반대하고 황제 편에 섰던 주교들을 파문하거나 성직을 정지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자 독일 내의 제후들은 트리부르 회의를 열어 황제가 1년 내에 교황에게 파문을 취소해 주도록 간청하거나 아니면 힘을 합쳐 새 황제를 뽑을 움직임을 보였다. 위기를 느낀 황제는  1076‐77년 겨울 소수의 수행원만을 대동하고, 마침 알프스의 아펜니노 산맥의 북쪽 카노사(Canossa)에 가 있던 교황을 찾아가, 그의 용서를 얻기 위하여 성문 앞에서  3일간을 기다렸다. 황제는 @그레고

Page 12: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리  7세 앞에 무릎을 끓고 사죄를 간청하면서, 독일 제후들의 분쟁에 있어서 교황의 중재적 판결에 따른다는 조건에 응락함으로 권한의 일부를 회복하였지만, 이 일로 인하여 독일 제국의 위세는 여지 없이 추락하고 말았다. ▣ 게다가, 독일의 제후들이  1077년  3월  15일 교황의 승인 없이 슈바벤의 루돌프(Rudolf)를 독일 왕으로 선출하였고, 그 여파로 독일에서는  3년간 격렬한 내전이 발발하였다. 교황이 나서서 양측을 중재하였지만 실패하게 되자, 교황은  1080년 사순절에 제후들이 선출한 루돌프를 독일의 합법적인 왕으로 승인하는 동시에 하인리히  4세 황제를 재차 파문하여 독일과 이탈리아 왕에서 폐위시켰다. 황제도 가만히 당하고 있지만 않았다. 그는 동년  6월 브릭센에서 회의를 개최하여 라벤나의 귀베르트(Guibert)를 교황으로 선출하고 클레멘트  3세(Clement  III)라고 명명하게 된다. 이어서 황제는 군대를 지휘하여 로마로 진격했고, 교황은 피난길에 올라 노르만인들의 보호 속에 있다가 결국  1085년  5월  25일에 서거하게 된다.  #그레고리  9세(Gregory Ⅸ,  1227‐41 재위): 로마 교회의  178대 교황인데,  85세에 

교황으로 선출되었고, 교회를 국가에 예속시키려고 한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를 두번이나 파문하였다. 특별히 도미니크 수도회에 사도적 권한을 주

Page 13: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어 당시 프랑스 남부 지방에서 번성하던 알비파(Albigenses) 이단을 처리하기 위한 종교 재판소를 운영하게 하였다. 또한 도미니크회의 레이몽 신분에게 위임하여 종전의 법령집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최초의 교황 법령집을 내게 하였다.    #그레고리 대제(Gregory  the Great,  590‐604 재위): 로마 교회의  64대 주교인 그

레고리는  로마  원로원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황제  유스티누스  2세(Justinus  II, 565‐78 재위)에 의하여  572/3년에 로마의 장관급 관리로 임명되었고, 부친의 사망으로 말미암아 많은 유산을 물려받았다. 그레고리는 얼마 후 고위직을 포기하고 수도사 생활에 들어갔다. 그는 로마의 화려한 아버지 저택을 수도원으로 바꾸고 거기서 수도사로서 생활했다. 또한 그는 시칠리에 있는 가산들로  6개의 수도원을 세우고 나머지 재산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엄격한 절제로 금욕생활에 힘썼다. ▣ 당시  63대 주교 펠라기우스  2세(Pelagius,  579‐90 재위)는 이 저명한 수도사를 주교 대사에 임명하여 비잔트로 보냈다(579‐85년). 이후  585년에 그는 로마로 돌아왔고, 자신이 세운 수도원에서 원장이 되어 근무했다. 그러다가 그레고리는  50세가 되던 해인  590년에 로마의 주교로 선출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는 상당히  @망설이며 고민하다가, 마침내 선출을 받아들여 교회의 직무를 수행

Page 14: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하기 시작했다. 그는 주교로서 절제와 검소한 생활의 모범을 보였으며, 자신의 재위 중 받게 된 여러 번의 침략자들을 직접 군대를 지휘하여 효과적으로 물리쳤다. 이것은 후대의 주교들이 군대를 이용하는 선례가 되었다. 탁월한 행정력으로 주교청 관할을 효과적으로 운영하였고, 그러다가  604년  3월  12일에 사망했다. ▣ 생전에 그레고리는 왕후 소피아의 도움으로 게르만 족과 스페인의 서고트 족을 카톨릭으로 개종하게 만들었다. 그는 영국에도  30명의 수도사를 대동한 어거스틴을 선교사로 파송하여 영국의 복음화에 기여하는 한편 로마와의 결속을 촉진시켰다. 갈리아에서도 포괄적인 교회 갱신을 추구했다. 주교는 게르만 민족과의 새로운 결속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이로써 중세에 이르는 길을 확장해 놓은 일에 참여했다. 그는 마우리티우스 황제의 형평이 없는 정치를  ‘고난받는 복종’ 속에서 겪었고, 따라서 이 황제가 처참하게 죽게 되자 만족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인 요한  4세(John Ⅳ,  582‐95 재위)와 의미 있는 호칭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즉 요한이 그를  ‘세계의 총대주교’(Ecumenical  Patriarch)라고 일컫자, 자신을 비하시켜  ‘하나님의 종들 중의 종’(Servus  Servorum Dei)이라는 겸손한 칭호를 자청했던 것이다. ▣ 그레고리의 방대한 문헌들은 주교 재임시에 형성되었다. 우선 그의 작품들은 서간문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보존된 서간문은 총  854통에 달한다. 그 다

Page 15: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음으로는 사목 활동에서 나온 것들이다. 그는 전승된 어거스틴의 신학을 당시의 궁핍과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보조 자료로 환원시켰다. 성직자들은 그레고리가 교사와  사제의  과제들을  설명해  놓은  핸드북인  ‘사목  수칙’(Regulae  Pastoralis Libger)을 받았다. 그래서 후대의 주교들은 그의 저작들과 문서보관소에 보관된 그의 공식 서한들을 잘 전수받았고, 거기서 얻은 경험과 제도는 특별히  590년 그의 주교 취임 이후  1517년 종교개혁이 일어나기까지 이어졌다. 사목 수칙은 네 부분으로 되어 있다. ⑴ 사목직에 맞는 인물과 사목에 대한 올바른 동기, ⑵ 사목자의 덕성, ⑶ 다양한 사람들에게 하는 사목자의 강론(심리적인 측면에서  40개의 유형들을 다루고 있다), ⑷ 사목자가 빗나가지 않도록 하는 양심(Conscience; 이 단어는 ‘다른 사람과 함께 어떤 일을 알고 있다’,  ‘자기 자신 안에 알고 있다’의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처음에는 의식과 유사한 의미를 가졌으나, 점차로 현재처럼 대중적이고 도덕적인 의미를 갖게 되어 자신의 행동에 대한 선악을 판단하는 능력으로 이해되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의 양심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수단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성찰 규정 등이다. 그의 재위 중에 이 책은 그리스어와  901년 영국의 대왕 알프레드(Alfred  the Great)에 의해 영어로 번역되었다. ▣ 그레고리의 글들은 올바른 그리스도교적 실천이 강론의 핵심을 이루었다. 

Page 16: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그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해야 하는  ‘낡은 세계’의 몰락한 가운데 있는 인간에 대한 배려였다. 민중은 구원의 도상에서 자극과 계발을 필요로 했다. 그레고리는  ‘이탈리아 교부들의 생애와 기적 행위에 관한 네 권의 대화서’를 저술했는데, 제2권은  ‘누르시아의  베네딕트의  생애’였다.  그는  절망적인  이탈리아  백성들에게 용기를 주고 그 시대에 구원에 이르는 길을 발견하도록 했다. 그리스도교적 소명의 진지함은 그가 주일에 행한  40편의 설교인, 복음서 강론, 에스겔, 고린도전서, 아가서에 대한 강론 등에 잘 나타나 있다. 그의 기나긴 욥기서에 대한 해석은 상세한  ‘도덕 편람’이 되었다. 그레고리는 모든 작품에서 명상을 좋아하는 인물로 부각되고 있다.  “나는 아름다운 라헬(명상)과 결속되고 싶었다. 그런데 나는 갑자기 레아(바쁜 생활)와 결속하게 되었다.” 활동과 명상 사이의 고통스러운 분열이 그의 삶과 신학을 결정하고 있다. 천사, 성자, 죽음, 지옥, 유황불, 하늘 등과 같은 영원한 주제들이 그의 개인적인 관심사였다. 그의 발언은 중세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지식을 가지고도 모르며, 지혜 속에서도 배우지 않는’ 그러한  ‘세상에 대한 거부’와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갈망’은 그레고리로 하여금,  ‘동경의 교사’로 만들었으며, 금욕과  신비의  종합을  이룩하게  했다.  ▣  그레고리의  인간론은  어거스틴주의(Augustianism)를 그대로 계승하지는 않는다. 그는 죄가 세상에 들어온 것은 인간

Page 17: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의 약점 때문이라고 해석하였는데, 아담이 범한 최초의 죄는 자유행위였으며, 이 행위 때문에 그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고, 영적 맹목과 영적 사망의 노예가 되었다고 했다. 최초의 인간의 죄 때문에 인류는 모두 죄인이 되었고 정죄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 어거스틴의 입장이지만, 그레고리는 죄를 죄책으로 보지 아니하고 허약과 병약으로 보았으며, 인간은 자유를 잃었다기보다는 의지의 선만을 잃은  것이라고  보았다.  물론  그는  @은혜가  없으면  구원도,  인간의  어떠한  공로(Merit; 하나님의 보상을 받을 만한 어떤 가치가 있다는 주장으로 로마 카톨릭이 선호하지만, 개혁교회는 배척한다. 개혁교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의 전가<imputation>에 의해서만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고 본다)도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예비적 은혜라는 것이 있어서 이로 말미암아 인간은 선을 행하려는 의지를 불러 일으키고, 그 후에 오는 은혜는 인간이 실지로 선을 행할 수 있도록 한다고 덧붙인다. 인간의 성화(Sanctification; 거룩을 의미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용어로, 기독교 신학에서 구원의 과정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한다. 성화는 칭의처럼 단번에 완성되지 않고, 점진적으로 발전하면서 성숙하다가, 영화를 통해서 완성되는데,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사용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실재가 된다)는 세례에서 시작되는데, 세례는 믿음을 만들어내고, 과

Page 18: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거의 죄에 대한 죄책을 말살시키며, 의지가 새로워지고, 마음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충만해지게 되어, 드디어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받을만한 존재가 된다고 했다. 그는 예정론도 예지(foreknowledge)에 기초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 그레고리는 성직자의 독신제를 확립했고, 교회 안의 악습을 타파하는데 앞장 섰으며, 성직매매자들은 단호하게 처벌했다. 그는 미사의 의식과 순서를 제정했고, 친히 교회 음악에도 손댔으며, 기도문과 시편 교독법도 제작하였다. 그는 교리적으로는 연옥(purgatory; 소죄에 대한 회개 없이 죽었거나, 죄책을 이미 벗어버린 죄들에 대한 처벌을 당하지 않았던 모든 세례 받은 영혼들이 사후에 가서 정화의 과정을 겪는 장소라고 로마교는 주장한다)을 성경적 교리라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연옥은 기독교인들이 최후의 심판에 앞서 가벼운 죄를 @깨끗하게 하는 상태요 불이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셨으나 세례 의식을 통해서 구주로서의 자격을 받았다고 해석했다. 그리스도인이 세례를 받은 후 범한 죄는 하나님의 은사를 따른 덕행으로 사함받아야 한다. 만약 이 고행을 성취하지 못하면 연옥에서 징계를 받는다. 선행과 고행을 사죄(Absolution; 사죄의 선언으로 보는 광의적인 의미와 한 개인이 참회한 후에 죄의 용서를 받는 협의적인 의미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로마 카롤릭 교회의 입장에서 사죄는 고해성사의 필수적 

Page 19: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절차인데, 개신교의 입장에서는 교회의 진정한 기능과 권능과 관련하여 이것을 중요하게 평가한다)의 방편으로 해석하는 그레고리의 이러한 입장은 결국 로마 카톨릭 교회의 전형적인 공로 교리로 발전하는 발판이 된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74)는 신학 대전에서 그레고리의 글을  374회나 인용하였다.  “그는 행정 능력과 그 업적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주교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라틴 기독교에 있어서 넓은 이상과 영원한 공적을 남긴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레고리에 대한 윌리스톤 워커(Williston Walker)의 평가이다.  #그릴루스(Gryllus): 플루타크(Plutarch)의 대화(Bruta  animalia  ratione  uti)에 등

장하는데, 키레스(Circe)가 짐승으로 만든 그릴루스(Gryllus)를 통하여, 타락한 인간들의 행동보다는 동물의 행동이 우월하다는 예를 지적하고 있다(7장). 곧 종교가 생활에서 상실되면 인간은 짐승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여러 면에서 훨씬 더 비참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많은 형태의 죄악에 붙잡혀 그들은 끊임없는 혼란과 불안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레고리, 나지안주스의(Gregory  of Nazianzus,  330‐389): ▣ 후대에  ‘신학자’라

Page 20: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는 별명을 얻은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는 바실(Basil,  330‐379)과 닛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 335‐395)와 함께 니케아 삼위일체론의 보편적 관철을 위해 결정적인 공헌을 한 갑바도기아의  3대 교부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레고리는 나지안주스의 유명하고도 다복한 가정에서 출생했고, 부친은 그곳에서  329년 이래로 주교직을 맡고 있었다. 그는 아테네에서 공부할 때(350‐56년경) 사귄 바실보다 나이가 많았으며, 그때부터 평생 우정을 함께 나누었다. 그는 훗날 말하기를,  ‘나는 거기서 웅변술을 추구했지만 참된 행복을 찾았다. 왜냐하면 나는 바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귀들을 찾아 나섰다가 왕국을 발견한 사울과 같았다’라고 말했다. 그레고리는 그 이전에도 갑바도기아의 가이사랴, 팔레스타인의 가이사랴, 알렉산드리아 등지에서 공부했다. 그레고리는 광범위한 수사학, 철학 교육을 받고, 잠시 수사학 교사로 활동하다가 친구 바실과 함께 금욕 생활을 하는 공동체에 들어갔다. 거기서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로 추앙을 받던 오리겐(Orgen,  185‐254)의 명문집인  ‘필로칼리아’를 바실과 공동 작업으로 펴냈다. ▣ 그는 나지안주스로 돌아왔을 때인  362년에 부친을 돕기 위하여 장로 임명을 받았고,  374년에 부친이 사망하게 되자, 이사우리아에 있는 셀루키아로 가서 조용히 수도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던 중에 그레고리는  379년에 콘스탄티노플로 와서 니케아 신앙을 지켜달라는 부름

Page 21: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에 응하여 그곳에서 교회를 지휘하게 된다. 당시 그레고리는 바실의 죽음 후, 그의 소원이었던 아리우스와의 투쟁을 자신이 이끌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때마침 콘스탄티노플의 부름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의 인생에서 교회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 당시 니케아 교회는 비록 제국의 수도에 세워져 있었으나 퇴색해 가는 소수를 이루고 있었고, 독자적인 교회 건물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레고리가 부임해 왔을 때, 아리우스파들이 폭도가 되어 돌을 던지고  @예배당에 침입하여 난동을 부렸다. 하지만 그는 완강하게 버티면서 유창한 웅변력으로서 대응하였다. 그레고리는 수사학적으로 아름다운 설교를 통하여 짧은 시간 내에 교회를 성장시켰으며, 설교를 통해서 니케아 삼위일체론을 신학적으로 옹호했다. 그러던 중에 전임 황제 발렌스(Valens, 364‐78 재위)를 계승한 신임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I,  379‐95 재위)가 콘스탄티노플로 개선해 왔고, 니케아에서 정치적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정통 신앙 사수자인 황제는 아리우스파를 모든 공직에서 @축출시키기 시작했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에서 그레고리가 지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이 시기에 나온  ‘신학적 담화’로 니케아 정통주의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381년에 이른바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로 선출되었고, 의장이었던 안디옥의 

Page 22: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주교 멜레티우스(Meletius)가 회의 시작 후  @몇 일만에 갑자기 죽게 되자 의장직을 이어받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레고리가 이미 나지안주스의 주교였다는 이유로 주교 선출의 타당성이 논박됨에 따라 그레고리는 자청하여 사직하고 공의회가 끝나기도 전에 콘스탄티노플을 떠났다. ▣  384년부터 그레고리는 인생의 말년(390년에 사망)까지 나지안주스에 있는 가족의 영지에서 보냈으며, 빈번한 서신 왕래를 통하여 종교적, 윤리적 주제들이 담긴 시를 썼다. 그는 어거스틴의  ‘고백록’ 이전에 쓰여진 가장 유명한 그리스도교적 자서전인 방대한  ‘즐거운 삶의 노래’를 남겼다. (그는  ‘아리우스를 반박하는  5편의 신학 연설’, 바실과 함께 편찬한  ‘오리겐 선집’, 아폴리나리우스를 반박한 여러 저서들과  242통의 편지와 시들을 남겼던 것이다) 이렇게 그레고리의 연설, 서간문, 시들은 그리스의 수사학과 성경신학에 있어서도 독특한 매력과 강렬한 흥미를 끄는 대상이 되고 있다. 그는 니케아의 정통 삼위일체론에 고전적인 표현을 사용했고 그 관철에 기여했다. 여기에서 그레고리는 성령이  ‘본질상’(우시아) 하나님께 속해 있지만, 동시에 하나의  ‘위격’(Hypostase)이라는 사실을 바실보다 더 철저하게 강조했다.    #네로(Nero, Claud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  54‐68 재위): 고대 로마 제

Page 23: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국의 제5대 황제인데 폭군으로 유명하다.  16세의 어린 나이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처음  5년 동안은 스승 세네카(Seneca)와 근위대장 브루스(Burrus)의 도움을 받아 세금을 내리고, 관직을 팔고 사는 행위를 금지하는 등등의 선정을 베풀었다. 재위 첫  8년(54‐62) 동안은 세네카와 브루스의 보필이 여러 면에서 이로웠다. 그들과 원로원 내의 협력자들은 원로원을 다시 한번 실질적인 권부로 만드는 일을 발견한 듯이 보였다. 그는 원로원의 특권들을 존중하는 것 외에도 가난하게 된 원로원 의원 가정들을 돕기 위해 연금을 지급했다. 그러나 이후 브루스가 죽고, 세네카 마저 멀리 물리치기 시작함으로써 점차 성격이 거칠어지기 시작하여 네로는 난잡한 생활을 일삼게 되었고, 결국 황후와 어머니마저 살해하는 등 잔인한 성격을 드러냈다. ▣  64년 도시 빈민가 전체가 불바다가 되어 버린 대규모의 화재가 일어나자, 국민들은 동요하면서 평소에 새롭고 아름다운 로마를 건설하려는 영광에 사로잡혀 있었던 네로를 의심하게 되었다. 네로는 화재와 관련하여 자신에게 쏟아지는 의혹을 딴데로 돌리기 위하여 희생양을 찾았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는 이 화재의 책임을 기독교도들에게 뒤집어 씌워 수많은 교인들을 잡아들이고 대대적으로 학살하였다. 이로써 그는 최초의 기독교 박해자가 되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Trajanus,  98‐117 재위)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타키투스

Page 24: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는 다음과 같이 묘사해 놓았다.  “그들은 혐오스러운 종파로서, 그 명칭은 티베리우스 때 본디오 발라도에게 처형된 그리스도라는 사람에게서 유래했다. 한 동안 탄압을 받은 이 위험한 미신은 곧 세력을 되찾아 유대뿐 아니라 심지어 세계 전역에서 온갖 혐오스럽고 가증스러운 것이 급류처럼 @흘러 들어오는 공동 하수장인 도시 로마에까지 퍼졌다. 이 저급하고 방탕한 사람들 중 일부가 자기들의 죄를 고백하자, 네로는 그중 일부를 개들에게 찢기게 하고, 일부를 십자가에 못박고, 일부를 산 채로 태워 죽였다.” ▣ 네로의 포악한 행위와 사치, 그리고 갈수록 도를 더해가는 잔인성은 그를 노리는 중대한 음모들을 낳기 시작했다. 하지만 음모가 적발될 때마다 네로의 보복은 잔인했는데, 심지어 당대의 유명한 철학자 세네카, 시인 루카누스, 작가 페트로니우스 등도 네로의 명령에 따라 정맥을 끊어 자결해야만 했다. 마침내 평소 그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원로원과 근위병들조차 반란군 편에 서게 되어, 사실상 네로의 운명은 끝났다. 심리전에도 능숙한 장군이었던 갈바(Servius Sulpicius Galba)가 로마 친위대까지 매수해버림으로써, 네로에게는 치명타가 되었는데 그는 로마를 탈출한 뒤 농가에 도피하여, 부하의 손을 의지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참으로 훌륭한 예술가인 내가 죽는구나”(Qualis artifex pereo)라고 마지막으로  @내뱉은 이 말은, 말년에 갈수록 독재로 치달으면서도, 예술 공

Page 25: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연에 집착했던 네로의 성격을 잘 드러내준다. 그는 서양 역사상 가장 포악한 황제로 손꼽힌다.    #네르바(Nerva,  96‐98 재위): 이른 바  ‘로마의 평화’(Pax  Romana)기의  5현제 시

대를 연 황제이다.  5현제란, 네르바(Nerva,  96‐98), 트랴야누스(Trajanus,  98‐117), 하드리아누스(Hadrianus,  117‐138), 안토니우스 피우스(Antonius Pous,  138‐161), 마르쿠스 아울레리우스(Marcus Aurelius,  161‐180) 황제들을 가리킨다. 당시 황제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81‐96 재위)의 후임을 자신들의 내부에서 찾던 원로원 의원들은  인생의  전성기가  지난  예순살의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Marcus Cocceius Nerva)를 선택했다. ▣ 네르바의 가문은 여러 유력한 법률가들을 배출했지만 유서 깊은 가문은 아니었고, 사회적인 지위를 얻은 것도 그의 외삼촌이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먼 친척 여성과 결혼한 덕분이었다. 네르바 자신은 법률가로서나 연설가로서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고, 비록 정치적 수완은 대단했으나 속주를 통치하거나 군대를 지휘한 경력은 없었다. 온건하고 악의가 없는 성품에 어느 정권에도 협력할 의사가 있었던 그는 자신의 조각상을 로마 광장에 하나 세웠고, 네로의 재위 기간에 팔라티누스 언덕에 또 하나를 세웠다. 베스파시아누스

Page 26: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Vespasianus,  60‐79 재위) 때인  71년에 콘술 직에 올랐고, 도미티아누스 때인  90년에 다시 콘술을 지냈고, 사제직도 여러 개를 지녔는데, 이러한 과거의 경력들을 보건대 그는 권력과 명성보다는 안전을 선호한 듯하다. ▣ 원로원은 네르바를 여러 가지 이유에서 이상적인 군주로 여겼다. 우선 원로원 법정에서 사형 언도를 받지 않으면 원로원 의원을 처형하지 않겠다고 공약한데다, 원로원에 무상 곡물 집행권을 돌려주었고, 원성을 사던 반역법(maiestas)을 유예했으며, 추방했던 원로원 의원들을 소환하고 밀고자들을 탄압했다. 반면에 네르바는 도미티아누스의 암살자들을 처벌하라는 요구를 뿌리칠 수 없었다. 친위대 병사들이 자신의 궁정을 포위하고 도미티아누스의 살해자들을 응징할 것을 요구할 때, 그는 그들이 그들의 전임 사령관과 그밖의 여러 음모자들을 살해하도록 순순히 허락했다. 게다가 권력 이양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는 듯했으나, 초장부터 만약 도미티아누스의 암살로 국면이 갑작스레 전환된 일을 두고 이리저리 계산할 기회를 얻을  @야심 찬 속주 사령관들을 제어할 만한 강력한 군사적 뒷받침을 받지 못하면 권력을 오래 유지할 수 없음이 분명하게 되었다. ▣ 그러므로 네르바의 짧은 재위에서 가장 중요한 조치는, 당시 대단히 유능하고 신망 높은 게르마니아의 군인 총독 트라야누스(Marcus Ulpius Traianus)를 입양하여 아들 겸 후계자 겸 공동 통치자로 삼는 일이었다. 자식이 없

Page 27: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었던 네르바는 이렇게 함으로써 이후로 양자를 후계자로 삼는 풍습이 관례처럼 시행되었고, 이 덕분에 로마 제국에는 연속적으로 좋은 황제들이 등장하면서 국가의 발전은 꽃을 피우게 된다.    #네스토리우스(Nestorius,  428‐31 재위): 기독교 초기  4대 이단들 중의  3번째 이

단은  네스토리우스주의이다.  381년에  태어난  네스토리우스는  일찍부터  수도사가 되었으며, 안디옥 근처에 있는 유프레피오스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는 안디옥에서 신학 수업을 받고 장로가 되었다. 그를 급속도로 유명하게 만든 설교들은 안디옥 학파의  영향을  분명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428년에  황제인  테오도시우스  2세(Theodosius  II,  408‐50 재위)가 네스토리우스를 공석 중인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로 청빙했다.  (테오도시우스  2세는 앞서  421년  7월  14일 칙령을 내려, 모든 교회의 문제는 콘스탄티노플 주교에 의해 처리되어야 한다고 했는데, 이는 자신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시도였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은 성직 후계자를 선출하는 과정에서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던 때였다. 열정적인 설교가이자 모든 이교도를 원수라고 일컬은 네스토리우스는 처음에는 열렬하게 환영을 받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깊은 갈등이 생겼고, 마침내 그는  431년에 열린 에베소 회의에서 파직을 당하게 되

Page 28: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었다. ▣ 네스토리우스 이단의 출발점은 그가 마리아를  ‘하나님을 잉태한 여성’이라고 부르는 것이 과연 합당한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촉발되었다. 즉 네스토리우스가 이것을  ‘그리스도를 잉태한 여성’으로 바꾸려고 함으로 말미암아 논쟁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원래 이 문제를 제기했던 목적은, 한편으로 아리우스주의(Arianismus)에 반대하여 하나님의 로고스의 영원성을 강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마리아의 신격화에 대처하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간성 사이를 분리시키고 하나님의 두 아들에 관하여 말한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가 위격의 단위를 내세웠다는 사실도 위격의 개념이 아직 그리스도의 본성과 관련하여 분명하게 해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적대자들을 진정시켜주지 못했다. 네스토리우스는 이미  ‘하나님을 잉태한 여성’이라는 칭호에 뿌리를 두고 있는 교회의 전통적인 의미를 과소평가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천적이랄 수 있는 알렉산드리아 주교 키릴(Cyril,  380‐444)의 그리스도 본체론에 근거를 두고 구원의 문제를 결정하려는 종교 세력도 과소평가했다. ▣ 이 갈등은 알렉산드리아와 콘스탄티노플 사이의 교회 정치적 대결을 통해서 첨예화되었다. 로마 교회가 이 분쟁에 개입하여, 주교는 키릴의 입장을 지지했다. 그리하여 제3차 공회의로 열린 에베소 공의회(431년)에서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파문이 관철되었다. 이로써 마리아에 대한 

Page 29: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하나님을 잉태한 여성’이라는 칭호가 공식적으로 승인되었다. 사람들은 네스토리우스의 유죄 판결에 동조했고, 네스토리우스는 추방되었다. ▣ 네스토리우스의 저작들은 부분적으로  ‘네스토리안’ 교회를 통해서 전해졌다. 그 밖의 자료는 에베소 공의회 문서들 속에서 발견되고 있다. 여기서 네스토리우스주의에 대한 평가를 종합할 필요가 있다. 네스토리우스주의는 그리스도의 이성교리에서가 아니라 한 인격(the one person)의 교리면에서 보건대 불완전하다. 그들은 참되고 정당한 신성과 인성을 인정하면서도, 진정한 통일을 형성하여, 단일인격을 구성하는 그러한 방식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이성은 역시 두 인격이기도 하다. 공통적으로 소유한 본질로서의 성과 또 그 성의 상관적으로 독립된 실존으로서의 인격과의 사이의 중요한 구별이 전적으로 무시되었다. 네스토리우스주의는 양성을 하나로 자의식화하는 대신에, 그 둘을 도덕적이고, 동정적인 연합에 불과하도록 하였다. 인간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니라, 신격의 소유자요, 하나님 지참자(God‐hearer)였다. 그리스도가 경배를 받은 것은 그가 하나님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안에 계셨기 때문이다. 네스토리우스주의의 중요한 점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완전히 정당화 하려는데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중보자의 인격(위)의 통일에 대한 모든 성경적 증거에 모순된다. 이들의 사상은 예수의 인간 인격의 진정한 경건과 도덕적인 훌륭한 

Page 30: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모범을  교회에  남겼으나,  모든  영적  능력과  은혜와  구원의  근원이신  신적  인간(Divine‐human)으로서의 구속주를 제거해 버렸던 것이다. 네스토리우스는  451년에 사망했다.  #네포티아누스(Nepotianus): 칼빈은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네포티아누스를 인

용했다.  “주의 사제들은 가난한 것이 영광이라고 한 아퀼레이아 종교 회의의 발표에 대해서 그들은 무엇이라고 대답하겠는가? 제롬이 네포티아누스에게, 가난한 사람들과 모르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손님으로서 그의 작은 식탁에 자주 앉아야 한다고 한 명령을 그들은 너무 엄격하다고 해서 거부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제롬이 곧 첨가한 말에는 부끄러워 반대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주교의 영광은 빈민을 돌보는 것이며 모든 사제의 수치는 재산을 모으려고 애쓰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이 이 말을 받아들인다면 반드시 자기들의 수치를 인정해야 할 것이다.” 제롬은 조카이기도 했던 네포티아누스에게 사제가 되는 법에 대해서 배우곤 했다. 금욕주의자였던 제롬은 이후 네포티아누스에게 극도의 금욕주의를 가르쳤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제롬이 네포티아누스에게 보낸 한 편지의 내용을 보자면 다음과 같다.  “당신이 거하는 처소에는 웬만하다면, 아니 여하튼 여자가 찾아오도록 하지 

Page 31: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마시오. 그리스도의 모든 딸들과 처자들을 아예 무시하거나 혹은 아예 모두 사랑하거나 해야 합니다. 가급적이면 여자들과 한 집에 거하지 않는 것이 좋고, 지금까지 잘 지켜나온 정절까지도 스스로 신뢰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당신은 다윗보다 순결할 수 없을 것이고, 솔로몬보다 더 지혜롭지 못할 것입니다. 처음에 인간은 여자로 인하여 에덴에서 추방되었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병에 걸린다면, 형제나 누이나 모친으로부터 간호를 받고, 행여 가족이 곁에 없다면, 차라리 교회에 나이든 여자들에게 후한 사례를 해서라도 그들로부터 간호를 받으시오 … 증인이 없이는 사적으로 절대로 여자와 있어서는 안 됩니다.”  #넥타리우스(Nectarius,  381‐97 재위): 넥타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로 요

한 크리소스톰의 선임자였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가 주교를 사직했을 때 시민들은 그의 후임으로 넥타리우스를 지명했고  381년  8월 총회에서 인준받았다.    #노바티안파(Novatians): 로마 주교 코넬리우스(Cornelius,  251‐53 재위)와 대립

했던 주교 노바투스(Novatus)라는 사람의 사상이 노바티안주의라는 이단으로 발전되어 나갔다.  248년에 칼타고에서 키프리안이 세례를 받고 난 후, 회중의 추대로 

Page 32: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말미암아 정식 절차를 생략한 채 주교에 임명되는 일이 있었다. 그러자  250년에 펠리키시무스(Felicissimus)와  노바투스(칼타코  사람)를  비롯한  네  명의  장로들이 나서서 이 문제를 정식으로 쟁점화시켰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로마에서는 장로 노바투스가 로마의 정식 주교 코넬리우스와 대립하여 주교로 선출되었다. 자연히 양 진영은 외부의 세력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사력을 다하게 되었는데 이때 칼타고의 노바투스는 로마의 노바투스를 지지했다. 반면, 키프리안은 로마의 노바투스를 지지한 칼타고의 노바투스가 자신의 주교직에 문제를 제기한데 대한 반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교회의 연합을 바라는 간절한 소원 때문에 코넬리우스를 지지했다. 이후 니케아 공의회는 이 분파의 성직자들을 인정하면서 교회와 화해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공의회를 열었던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  288‐337) 대제 역시 처음에는 칼타고의 노바투스를 지지했지만, 이들의 과격한 성향으로 인하여 이후 그들의 공예배를 금지시키면서 모든 가르침을 소각하도록 명령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 이들은 믿는 어른들만의 침례를 주장하였으며 지역 교회에서의 순수성의 유지를 위한 징계를 주장했다. 이들은 부도덕한 주교에 의한 그 누구의 침례도 거부했으며 박해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믿음에서 이탈한 사람이 주는 침례도 거부했다. 이렇게 초기 교회와 완전히 결별한 노바티안파들은 그 어

Page 33: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떤  조건하에서도 유아에게  침례  주기를  거부했다. 노바티안파의  후손들은  500년 후에  ‘카타리파’(the  Cathari)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이들은 암흑시대 동안 카톨릭 교회에 남아 있던 유일하게 참된 정통 그룹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노바티안파는 초기 교회의 입장으로 볼 때 이단적 행위를 저질렀는데, 그것은 자신들의 회중에 동참하는 모든 자들에게 침례를 주었으며 그것도 사도행전  2:38에 입각해서가 아니라 마태복음  28:19‐20에서 발견되는 방식으로 침례를 주었던 것이다. ▣ 이들은 로마의 주교들과 장로들의 도덕적 삶에 잘못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과감하게 로마 교회를 이탈하였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로마 교회의 성인 침례에 문제가 있으며, 유아 세례에도 문제가 있고, 가장 타락하고 혐오스런 카톨릭 누룩들인 마리아 경배, 유품성배, 구원의 수단으로서의 독신주의, 희생제사로서의 성체성사, 침례에 의한 중생, 묵주, 크리스마스 트리, 부활절 토끼, 형상들, 촛불, 죽은 자를 위한 기도, 연옥 등과 같은 수많은 거짓 교리들이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 노바티안파의 주장에 의하면 노바투스에 순교하였다. 그가 남긴 저서는 꽤 많이 있지만, 현재까지 전해는 것은 두 권이다.  256년에 집필한  ‘삼위일체에 관하여’는 가끔은 터툴리안(Tertullian,  ca.  155‐220)이나 키프리안(Cyprian,  200‐258)의 작품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제롬은 노바티안의 저작으로 인정하면서  ‘위대한 

Page 34: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저서’라는 평가를 아끼지 않는다. 이 책에서 노바티안은 그리스도와 성령의 신성을 변증하면서 하나님의 삼위성의 통일성과 조화시키고 있다. 특별히 성경과 철학적인 논증을 들어 군주론을 주장한 사벨리우스주의를 논박했다.  ‘유대인들의 음식에 관하여’는 박해 기간에 은신처에서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보낸 것으로 알려진다. 노바티안은 알레고리 해석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인들은 모세 율법의 음식법에 구속되지 않으며, 다만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만 먹지 않으면 된다고 가르쳤다. 그리스도께서는 모세 율법에서 짐승들을 먹지 말라고 하신 계명을 절제와 금욕으로써 대체하셨다고 하였다.    #니코메디아  사람들(Nicomedians):  칼빈은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니코메니아 

사람들을 인용했다.  “그러나 다른 문제에 관해서는, 교회의 권리를 아주 엄격하게 선언한 고대 주교들은 법에 복종한다고 해서 자기들이나 교회가 손상을 입는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또 경건한 황제들은 필요한 때에는 의례히 성직자들을 불러 재판했지만 항의하는 성직자가 없었다. 그래서 콘스탄티누스는 니코메디아 사람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만일 어떤 주교가 경솔하게 소란을 일으킨다면 그의 오만한 태도는 하나님의 사역자의 공적 권위에 의해서 즉 나의 권위에 의해서 제지될 것

Page 35: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이다’라고 말했다.” ▣ 니코메디아에는 아주 웅장한 교회당이 있었다고 알려지는데,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284‐305 재위)가 칙령을 내려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시작하게 되자, 가장 먼저 철거의 대상이 되었다.  3세기 중반 이후 기독교가 약 40년이 넘게(260‐303년간) 박해 없는 평안을 누린 덕에 교회의 부흥이 급격히 이루어졌고, 자연히 교회들은 건축에 신경을 쓰게 되었다. 원래  2세기 말까지 그리스도인들의 예배는 대부분 개인의 집이나 한적한 들판이나 순교자의 묘지와 카타콤 토굴에서  진행되었다.  켈수스(Celsus)가  이러한  기독교의  외적인  허술함을  비웃자, 오리겐(Orgen,  185‐254)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최고의 성전이요 최고로 아름다운 신상이며, 참된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제우스 신상은 감히 견주지도  @못할 만큼, 성령의 살아 있는 조각상이다”라고 하는 말로써 반박했다. 로마 황제 알렉산더 세베루스(Alexander  Severus,  222‐35 재위)는 술집 주인들의 극렬한 반대를 받았지만, 술집이 유지되는 것보다는 그래도 신에게 예배를 드리는 것이 더 좋다는 판단으로, 230년경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술집을 예배 처소로 사용하도록 조치하기도 했다. ▣ 이렇게 초기의 기독교 입장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림에 있어서 장소 문제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예배의 본질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 점차적으로 예배당을 중시하는 성향이 나

Page 36: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타나기 시작했고, 앞서 말한 교회의 평안기에는 대형 예배당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락탄티우스(Lactantius, 240‐320)에 따르면 니코메디아의 경우, 가까이 있던 황제의 궁전보다도 더 높이 솟아오른 예배당이 있었다고 한다.    #니콜라스  2세(Nicholas  II,  1059‐61 재위): 로마 교회의  155대 교황이다.  1059년 

교황 니콜라스  2세는 로마 교회 회의를 소집하여 교황 선출 자격을 추기경 회의에서 결정하도록 했다. 지금까지 황제나 로마 귀족에 의해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결정되던 교황권을 교회의 권리로 되찾은 것이다. 추기경(Cardinal)은 처음에는 교회의 항존직에 붙였던 명칭이었다. 그러나 차츰 로마 교회에 있는 성직자에게 국한되었다. 추기경을 가리키는  ‘Cardinal’(카디날)은  ‘Cardo’(카르도, 중요한)이라는 말에서 나왔다. 이후로 사제(Priest), 로마에 있는 집사(Cardinal Deacon), 로마에 있는 주교(Cardinal Bishop) 등과 같이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성직자들에게  ‘Cardinal’이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11세기에 들어와서는 유럽 전역에서 추기경을 뽑게 되었다. 1586년에는 추기경의 수를  70명 이내로 하여야 한다고 결정되었다. 1958년 요한  23세에 와서 이 규칙은 무너졌고, 지금 추기경의 수는  130명 가량 된다.  1962년 이후에는 추기경은 주교에만 해당하도록 국한시켰다. 이것은 추기경은 적어도 주교 이

Page 37: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상이라는 의미이다. ▣  1059년에 교황 니콜라스  2세는 교황 선출 자격을 이들 추기경들로 국한시켰던 것이다.  (A.D.  67년 예수의  12사도 중 하나였던 베드로의 자리를  2대 주교 리누스<Linus,  64‐76 재위>가 물려 받았다고 주장하는 이래, 로마 교회에서는  @수백 년 동안 교황을 선출하는 방식은 수없이 바뀌어져 나왔다. 초기 기독교 시절 교황은 로마 근교에 살던 지방 성직자들에 의해 선출되었지만, 왕이나 황제, 제후들이 이 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지지하지 않는 사림이 교황으로 선출되었을 때 결과에 만족하지 않은 사람들을 반(反) 교황 세력으로 부르던 시절도 있었다.) 그리고  1179년 교황 알렉산더  3세는 모든 추기경들이 선거에서 동일한 한 표를 갖는다고 규정했다. 1274년 교황 그레고리  10세는 추기경들이 교황의 사후  10일 안에 만나 회의를 개최해야 하며 교황 선출 전까지는 외부와 차단한 채 지내야 한다고 결정했다. 이렇게 현재의 교황 선출 과정의 대부분은 1500년대 후반에 이르러 확립됐다. 교황은 세 가지 방식 중 하나로 결정된다. 먼저 만장일치 투표방식과  9명이나  15명으로 이뤄지는 추기경 위원회가 만장일치로 교황을 결정할 수도 있다. 가장 많이 쓰이는 방법은 투표에 의한 선출이다. 교황이 사망하면 로마 교황청 추기경회의 의장은, 항상 아침에 이루어지는 통고로 추기경들에게 알리고 회의를 소집한다. 이 회의는 교황의 사후  20일 이내에 열리는데, 추

Page 38: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기경들은 추첨을 통해서 각기 세 명씩의 표를 모을 추기경, 집계를 담당할 추기경, 집계를 감시할 추기경들을 뽑는다. 투표 용지를 준비하여 배포한다. 그러면  80세 미만의 추기경  120여명이 투표 용지에 교황으로 선출될 추기경 한 사람의 이름을 적는데, 이때 이들은 제단에서 자신의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할 것을 다짐한 후 투표 용지를 연단에 있는 상자에 넣는다. 투표가 끝나면 집계원들이 결과를 집계하고 추기경들에 의해 결과가 발표된다. 첫 번째 투표에서 선출자가 결정되지 않으면 다시 투표가 재개된다. 이번에도 교황이 선출되지 않으면, 오후에  2번의 투표를 더 갖게 된다. 투표가 집계될 때마다 모든 투표 용지는 불태워버린다. 승자가 없다면 검은 연기를 내는 화학 약품과 함께 투표 용지를 불태웠기 때문에, 바티칸궁 지붕에서 검은 연기가 나면, 성 바울 광장에서 결과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투표가 끝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불태워지는 투표 용지가 하얀 연기를 뿜어내야 새로운 교황이 탄생했음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 전통적으로 교황은 추기경들의  2/3에 해당하는 수에 한 표 이상을 더 얻어야 선출된다.  1958년 전임 교황 피우스  12세가 죽은 후 투표를  10번 이상 했는데  2/3이상 표를 얻은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나이가 제일 많은 사람이 교황이 되기도 하였다.  12,  13일이 지난 이후에도 교황이 결정되지 않으면 콘클라베(교황 선출회의)는 과반수 투표를 행사할 수 있다. 이는 

Page 39: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가장 많은 추기경들의 지지를 얻은 후보가 교황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콘클라베는 교황으로 선출된 추기경에게 이 결정을 수락할지를 묻는다. 당선자가 이를 수락하면 콘클라베 의장은 차기 교황이 어떤 이름을 쓸 것인지를 묻고 추기경들에게 알린 후 이를 경하한다. 추기경들 중에서 가장 연장자는 성 바울 광장이 보이는 발코니로 나가 군중들에게 외친다.  “하베무스 파팜(Habemus  papam, 이는  ‘교황이 탄생했다’는 의미의 라틴어이다).” 이 추기경은 새로운 교황을 소개하고, 새 교황은 로마와 전 세계에 축복을 내린다. 많은 교황들이 공식적인 대관식 행사를 가졌지만, 요한 바오로  2세는 대관식을 거절하고 성 바울 광장의 군중 앞에서 교황으로 취임했다. 참고로, 교황을 선출하는 방을  ‘Conclave’(Con=with,  clave=key: 열쇠로 잠궈진 방)이라고 불렀다. 교황이 죽은 후 추기경들이 이 방에 모여서 교황을 뽑는데 교황이 선출될 때까지 밖으로 나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1271년 후임 교황을 뽑지 못했을 때 결정된 사항이다.    #다마수스(Damasus,  366‐84 재위): 로마 교회의  37대 주교이다. 전임자  36대 주

교 리베리우스(Liberius,  352‐66 재위)가 죽었을 때, 후임자 문제를 높고 두 파벌이 형성되었고, 급기야 각기 우르시누스(Urinus)와 다마수스(Damasus)가 자기네 지지

Page 40: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파들에 의하여 주교로 선출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 과정에서 다마수스는 로마의 한 장관의 권력을 이용하게 되고, 양쪽의 충돌이 일어나  137명이 목숨을 잃는 무서운 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이에 따라 다른 한 장관이 다마수스를 살인죄로 고소하게 되어, 그의 입지는 한층 좁아지게 되었다. 부유한 친구들을 사사하여 황제를 개입하게 함으로써 겨우 위기를 모면한 다마수스는 이후 교황권 확립을 위하여 이런 저런 방법들을 동원하게 된다. 그의 재임 중에 제롬을 설득하여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것은 주목할 만한 공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다마수스는 로마를  ‘사도 교구’라고 지칭했는데 이러한 표현은 그를 통하여 최초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는 378년에 개최된 교회 회의에서 주교들은 일반 재판소의 심리를 받지 않고, 주교들에 의한 특별한 재판을 받는다는 면제권을 확보하였다.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  B.C.  384‐322): 데모스테네스는 아테네에서 태어났

다. 당시 그리스는 신흥 마케도니아의 위협을 받고 있었으므로 정계로 진출하여 반(反) 마케도니아 운동의 선두에 서서 힘과 정열을 다한 의회 연설로 조국이 일어날 것을 촉구하였다. 또 그리스의 폴리스는 연합하여 자유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결과 아테네와 테베가 연합하였으나, 기원전  338년 카이로네이아에서 

Page 41: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필리포스 군에게 패배하였다. 전하여지는  61편의 연설 중 특히 유명한 것은  ‘필리포스 탄핵 제1,  2,  3편’을 비롯한 정치 연설이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뒤 다시 반 마케도니아 운동을 전개하다가 실패하고 사형을 선고받자 카라우레이아로 도주하여 자살하였다. 칼빈은 제네바에 아카데미를 개설했을 때 데모스테네스의 올리시악스(Olythiacs)와 필립픽스(Philippics) 같은 글들을 학생들이 배워야 하는 교과과정에 포함시켰다.  #데미스티우스(Themistius,  317‐388): 데미스티우스는 아마도 콘스탄티노플에서 

자기 아버지의 강의에 참석했고  345년에 직접 철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저술을 모두에게 이해시키려고 알기 쉽게 @풀어서 썼기 때문에 중요한 인물로 꼽힌다. 대부분이 아랍어로 번역되어 아랍 학자들에 의해 많이 사용되었다. 어떤 것들은 그리스어나 라틴어역, 히브리역, 아랍어역으로 지금까지 전해진다(아리스토텔레스 후, 해석학, 영혼에게, 하늘로부터, 형이상학  12권). 그는 정치 경력도 가지고 있는데  355년에 원로원 의원으로 임명되었던 것이다. 황제 발렌스(Valens,  364‐78 재위)는 그에게 아들을 교육하도록 맡겼다. 그는 또한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379‐95 재위)의 아들인 아카디우스의 가정 

Page 42: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교사 노릇도 하였다. 율리안 황제와도 가까운 사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383‐4년에는 지방 총독과 원로원 의장직을 역임하였다.  #도나티스파(the  Donatists): 북아프리카에 있었던 그리스도교 단체이며,  312년 

칼타고의 주교로 카이실리아누스를 선출함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문제 때문에 카톨릭교에서 갈라져 나온 교파로 그 이름은 지도자 도나티스(355년경 사망)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카이실리아누스는  311년에 주교로 선출되었으나,  303년부터 시작된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284‐305 재위)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성경을 내팽개친 주교에게서 서품을 받았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반대를 받았다.  (혹은 그가 배교자들을 너무 쉽게 용서하고 중요한 성직에 임명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칼타고 주교 서품권을  40년간이나 가지고 있었던 누미디아의 수석 주교인 세쿤두스(Secundus)는  70명의 주교들과 함께 칼타고에 와서 카이실리아누스의 선출이 무효라고 회의에서 선언했고, 독경사 마조리누스를 카이실리아누스 자리에 앉혔다. ▣ 제국의 평화를 추구하던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이 다툼을 중재하도록 명령했는데, 이에 따라 로마의  32대 주교 멜키아데스(Melchiades,  311‐14 재위)의 주재로 이탈리아와 갈리아 주교들로 구성된 회의는,  313년  10월  2일 최종

Page 43: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적으로 카이실리아누스가 모든 비난에 대해 결백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 동안에 마조리누스의 자리는 다시 도나티스에게 넘어가 있었는데, 당연히 그는 멜키아데스의 판정에 반대했다.  314년  8월  1일 콘스탄티누스는 아를에 제국의 서부 지역 주교들이 모이는 공의회를 소집했다. 카이실리아누스는 여기서 다시 지지를 얻었으며, 비록 배교자 주교가 내린 서품이라 하더라도 그 서품식 자체는 무효가 아니라는 교회법에 의해 그의 지위는 더 공고해졌다. 도나티스와 그의 지지자들은 항소를 했지만,  316년  11월 콘스탄티누스는 카이실리아누스에게 유리한 최종 판결을 내렸다. ▣ 이에 대한 도나티스파의 불복에 따라 분열은 계속되었고, 따라서 대제는 무력으로 진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317‐321년에 걸친 박해가 실패로 돌아가자, 콘스탄티누스는  321년  5월 마지못해 도나티스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기에  이른다.  이후  도나티스파  운동은  몇  년  동안  세력을  확장했으나, 347년  8월에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셋째  아들로써  황제가  된  콘스탄스(Constans, 337‐50 재위)는 도나티스를 비롯한 여러 지도자들을 갈리아로 추방했고, 도나티스 자신은  355년에 그곳에서 사망했다. ▣  361년 배교자 율리아누스가 황제가 되었을 때, 추방되었던 도나티스 추종자들이 아프리카로 돌아와 @그 후  30년 동안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그리스도교파가 되었다. 그러나 히포(Hippo)의 어거스틴이 이끄는 

Page 44: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반대파들이  세력을  얻어  411/2년에는  어거스틴의  친구이자  황제의  호민관이었던 마르켈리누스가  주재하는  회의가  칼타고에서  열렸다.  펠라기우스(Pelagius,  354‐420)의 제자 켈레스티우스(Celestius)에게 추방령도 내렸던 이 회의는 도나티스파에게 불리한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도나티스파는  7세기까지 존속했다.  #도미니크(Dominic,  1170‐1221): @프란치스코회가 시작될 비슷한 무렵에 활동한 

도미니크는 스페인 카스티야 출생으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성직자로서 수도원을 창설했다. 도미니크가  20세의 나이인  1190년에 그가 사는 지방에 가뭄이 들어 굶주림이 엄습하는 일이 있게 되었다. 그는 서슴없이 자신의 모든 재산을 팔았는데, 심지어 학문을 위해 없어서는 안될 책들까지도 가차없이 팔아서 구제하였다. 도미니크는  1199년  29세의 나이로 오스마 대성당의 참사회원이 되었고, 참사회원들이 모여서 함께 생활하는 수도원을 만들었는데 이는 수도생활에 힘쓰되 한편으로 신자들을 돌보는 형태의 수도원이었다. ▣  1203년 친구인 디다쿠스와 함께 로마로 갔다가  돌아오는  도중에  남프랑스로  갔다.  당시  이  지방에  이단  카타리파(the Cathari)의 세력이 성행하게 되자  176대 교황 이노센트  3세(Inonocentiue  III,  1198‐216  재위)의  명령을  받고,  1206년부터  15년까지  카타리파의  일파인  알비파

Page 45: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Albigenses)의 교화에 힘썼다. 처음에는 무력을 사용하여 진압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단들은 박멸되기는커녕 더더욱 늘어만 갔다. 원인을 찾기에 몰두하던 도미니크는 그들의 지도자들의 금욕적인 생활이 그러한 영향을 미친다고 판단했고, 따라서 무력으로 진압하는 방법보다는 생활의 본을 보이면서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게 된다. 이때로부터 도미니크는 더더욱 신학에 몰두하는 한편 금욕적인 생활에 몰두하게 된다. 그래서 남부 프랑스에 머물면서 추종자들과 함께 수도원을 세운 후(1206년), 박해받는 이단자들을 사랑과 동정과 섬김을 통하여 변화시키는데 주력하였다. 이러는 사이에 도미니크회 조직은 중심부가 구성되었고, 1215년 로마의 라테란 회의에 나가 교황에게 교단 설립허가를 구했으며,  처음에는  거절당했지만,  마침내  1226년에  177대  교황  호노리우스  3세(Honorius  III, 1216‐27 재위)로부터 인가를 받아냈는데, 공식 명칭은  ‘설교자들의 수도회’(The Order of Preachers)이다. 명칭이 말해주듯이 이 수도회는 사역 현장을 가졌고, 설교를 통하여 세상 속으로 파고들어갔다. 군대와 같은 조직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고, 수도사로서의 삶에 틈을 허락하지 않았다. ▣ 도미니크는 지도자로서 자신을 엄격하게 다스렸다. 아주 맨발은 아니로되, 허술한 신발에  @한 벌의 옷만을 걸치고 직접 거리로 나서서 설교했다. 교황의 무력 진압이 미치기 전에 먼저 그 

Page 46: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지역을 찾아가서 뛰어난 설교로써 사람들을 개종시켰다. 이 수도회는 처음부터 학문 도야와 설교 훈련에 매진했기 때문에 교리와 신학 공부에 지대한 관심을 쏟았고, 수도사들을 지적으로 훈련시켰다. 따라서 이 수도회는 알버트 마그누스(Albert Magnus,  1200‐1280) 대제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74) 같은 걸출한 학자들을 배출했다. 임종하는 순간에도 빌려 입은 옷인 채로 남의 침대에 누워  51세로 생을 마감한 도미니크는 죽은 지  13년 후에 성자로 추대되었다. 하지만 그의 사후 도미니크 수도회는 카타리파를 무자비하게 박멸하는 종교재판의 임무를 수행하게 되어, 신자들로부터 큰 원성을 사기도 했다.  #디아고라스(Diagoras  of  Melos): 디아고라스는 소크라테스(Socrates)와 동시대 

사람인 것으로 보인다. 키케로(Cicero)는, 디아고라스를 테오도르(Theodore) 및 프로타고라스(Protagoras)와 더불어 당시의 대표적인  3인의 무신론자 중의 한 사람으로 취급했다. 이 세 사람은 불경하다는 이유로 아테네에서 추방당했다.  #디오니수스(Dionysus,  B.C.  405‐367): 시라쿠스(Syracuse)의 폭군이었던 디오니

수스의 신성모독과 약탈성은, 키케로의  ‘신들의 성질에 관하여’에 잘 묘사되어 있

Page 47: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다.  #디오니시우스(Dionysius): 디오니시우스는  5/6세기 경에 생존했던 신비주의 문

서들을 남긴 저자의 가명이다. “저자인 사제 디오니시우스가 동료 사제 디모데에게 바친다”는 문구로 시작하여 마치 속사도의 저술인 것처럼 표현한 작품이다. 가명을 사용한 것은 이단 시비가 그치지 않던 시대에 흔히 있는 일이었다. 현대의 연구는 이 저작들이  5세기 말 또는  6세기 초에 집필될 수 있었으리라고 추정한다. 이 저작들은 아테네 학파의 후기 네오 플라톤주의, 특히 시리아노스와 그의 제자인 프로클루스(Proclus,  410‐485)를 알고 있었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디오니시우스는 저작 속에서 사도행전  17장  34절에 나오는 아레오바고에서 회심한 자, 곧 바울의 제자라고 자칭하고, 중세기 전반에 걸쳐서 교회 내에서 사이비, 사도적인 풍모를  @드러내 보였다. 그의 작품은  850년경에 라틴어로 번역되었지만, 로렌조 발라(Lorenz  Valla,  1407‐1457)에 의하여 작품의 신빙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 후, 이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계속되었다. ▣ 마침내  19세기 말에 이르러 저자가 바울 시대의 디오니시우스가 아니라는 사실이 확정되었고, 이후부터 저자는  ‘위‐디오니시우스’로 불리워진다. 현재 남아 있는  ‘위‐디오니시우스 전집’은  4편의 방대한 

Page 48: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논술과  10편의 서간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경 또는 철학적 문헌들 속에 나타난 신의 이름들에 대한 연구인  ‘신적인 칭호들’에서는 신의 본질과 속성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천상의 계급’은,  ‘스랍과 그룹과 보좌들’,  ‘주관들과 권세들과 능력들’, ‘정사들과 천사장들과 천사들’, 그리고  ‘정결과 조명과 완전의 삼중의 기능’ 하는 식으로 천사들과 천사들의  3인조 계급의 구분과 역할을 다루고 있다.  ‘신비주의 신학’은 인간의 영혼과 신적인 영혼과의 신비적 연합에 관한 연구이다. 여기에서 신의 절대적(the Absolute;  19세기의 종교철학자들 사이에 크게 유행했는데 궁극적인 존재나 현실을 의미하는 추상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특별한 의미로는 형이상학적 기능이 부각되어 일반적으로 자존, 무제한, 궁극, 제1원인 등을 의미하는데, 하지만 신학자들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신성에 대한 용어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본다) 초월성이 매우 감동적으로 서술되고 있는데, 이 초월성은  ‘과도하게 비추이는 어둠’ 속에서는 감각과 지성의 파악을 박탈한다는 것이다.  ‘하늘의 제도’는 교회의 직분과 신분은 물론 성례전에 대한 해석을 가하고 있다. 교회는 천사의 세계의 모형으로 해석되고 있으며, 따라서 교회도 삼중 구조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세 가지의 성례전은  ‘세례, 성유, 성만찬’이다. 세 가지의 성직은  ‘주교, 사제, 집례자, 집사’이며, 서로 구별되는 세 가지의 직분은  ‘수도승, 평신도, 순결한 집단(입교인, 원

Page 49: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입교인, 회심자)’이다.  ‘10편의 서간문’은 주요 저술들에 대한 보충으로서 심리적, 실천적 권면을 담고 있다. ▣ 디오니시우스에게서 그리스도교의 교리는 네오 플라톤적 교설들과 융합되어 있다. 하나님은 완전한 자존자인 동시에 타자이다. 그는 부동과 운동을 한 몸에 지닌다. 그는 존재의 피안에 있기 때문에 그를 인식할 수도 없고 그에게 접근할 수도 없다. 그는 유일한 창조자이며, 천사들은 오로지 그의 절대적 창조력의 매개에 봉사한다.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두 갈래의 길이 있다. 하나는 신에 대한 긍정적 진술을 통해서 이르는 길이며, 다른 하나는 부정을 통해서 이르는 길이다.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인 동시에 참 인간이다. 그는 아버지의 단일성에서부터 나왔고, 성육신을 통했어도 단일성이 저해되거나 침해되지 않는다. 따라서 신적인 속성이 그리스도에게도 충만하며 완전하게 된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는 하나님으로서 하늘의 제도를 계시하며, 인간으로서는 교회 제도의 주인이다. ▣  ‘신비주의 신학’은 부정적 신학과 동일시 된다. 신비주의적 경험이 부정적 신학의 언어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디오니시우스는 어둠, 암흑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신성과의 연합에 있어서의 인간 영혼의 한계성을 서술한다. 그에게서는 이러한 개념이 거의 나오지 않고 있는데, 그것은 신비적 연합의 본질에 관한 그의 이해를 설명하기 위해서 포기된 것이다. 그는 이 같은 연합이 이성의 피안에 있으며 오직 

Page 50: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무지에서만 얻어진다고 거듭 강조한다. ▣ 위‐디오니시우스에게 있어서 성경은 완전한 텍스트이며, 따라서 신성 불가침한 것이다.  ‘성경’은 은총의 도움을 받아 교회의 전통 속에서 인정되고 보존된 해석을 통해서 이해될 수 있다.  ‘성례전’은 자질과 영감과 완전을 전달해 준다. 위‐디오니시우스의 저작들은 동방 교회에서는 물론 특히 서방 교회에서도 중세기의 그리스도교적 세계관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이러한 익명의 저자가 온갖 배경을 가진 모든 시대의 신학자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의 사상의 심오한 내용과 뛰어난 특성에서만 대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루터(Martin Luter,  1483‐1546)는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서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 이 디오니시우스가 누구였던간에 …  ”라고 씀으로써 역시 의혹을 드러냈는데, 지금 칼빈은 이 말을 염두에 두고 있다.  #디오니시우스(Dionysius,  259‐68 재위): 주후  250년경에 서방의 로마와 동방의 

알렉산드리아에 각기 동명이인의 디오니시우스가 있었다. 칼빈이 기독교강요에서 제롬의 편지에 근거하여 디도니시우스를 언급한 것을 고려할 때, 로마의  25대 주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디오니시우스는 당시 황제 발레리아누스(Valerianus, 

Page 51: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253‐60 재위)의 박해로 인한 약  1년간의 공석 뒤에 주교로 즉위하였다. 그는 교회 재건에 힘썼으며, 교황의 수위권 확립에 관심을 쏟았다. 로마 주교 디오니시우스는 @어느  날  오리겐의  제자로  알려진  알렉산드리아  주교  디오니시우스(Dionysius, 247‐264 재위)의 가르침에 삼신론(tritheism) 사상이 있다는 고소를 받고, 그의 해명을 듣기 위한 의도로  260년에 로마 교회 회의를 열었다. 사건의 발단인즉 이렇다.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우스는  지상의  천년왕국을  믿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 일로 인하여 경악을 금치 못하게 되었다. 즉시 요한계시록의 문법과 문체에 비판을 가하면서 요한계시록의 저자와 요한복음의 저자가 동일하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던 중  259년 로고스 신학의 추종자들과 일부 양태론적 단일신론자들 사이에 리비아 지방의 교회에서 논쟁이 일어나자, 디오니시우스는 양태론자들의 입장을 격렬하게 공격하였고, 심지어 성부와 성자는 배와 뱃사공만큼이나 다르다면서, 양자의  ‘동일본질’(homoousios)을 단호하게 부정하기에 이른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리비아의 단일신론자들은 로마의 디오니시우스에게 호소했고, 이에 응하여 로마의 디오니시우스는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우스를 책망하면서, 하나님의 통일성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단일성을  분리된  세  휘포스타시스(hytpostases)나  세 신성(deties)으로 분열시키는 자들’을 정죄했다. 서방은 동방의 신학을 삼신론처럼 

Page 52: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생각했고, 동방은 서방의 신학이  ‘사벨리스주의’에 가깝다고 봄으로, 앞으로 양측간에 더 크게 벌어질 간격이 시작되었다.    #디오스코루스(Dioscorus, 444‐51 재위): 키릴(Cyril, 380‐444)의 뒤를 이어 알렉산

드리아의 주교가 되었다. 디오스코루스는 그리스도 안에 단지 하나의 본성(physis)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구속주는 두 본성으로부터 존재하나, 그의 성육신 후에는 ‘하나님의 성육신하신 본성이신 말씀’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들을 단성론자들(Monophysites)이라고 부르는데, 예수의 인성이 그의 신성 안에 흡수되었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이론이다. 따라서 예수는 단지 신성만을 가진다는 것이다. ▣ 이러한  이론은  처음에  콘스탄티노플의  저명한  수도원장(archimandrite)인  유티케스(Eutyches, ca. 378‐454)가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주교 플라비안(Flavian, 446‐49 재위)의 즉각적인 저항을 받으면서 아폴리나리스주의(Apollinarianism)라고 단죄당했다. 유티케스는 재판 기록이 모호하다면서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에게 항소하였고, 일련의 기록 확인 절차를 거친 후 정당성을 인정받았다. 이때 디오스코루스가 나서서 앞서 에베소 공의회(431년)가 니케아 신조에 일체의 내용을 보충할 수 없다고 판결했음에도  불구하고,  플라비안이  다른  논거로써  유티케스의  신앙의  정통성을 

Page 53: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판단하였다고 고소했다. 결국 황제는 소란을 정리하기 위하여  449년  8월에 에베소에서 회의를 개최하였다. 로마 주교 레오(Leo  1,  440‐461년 재위)의 참석을 요청했지만, 그는 초청을 거절하면서 대신 일련의 교리 진술서를 담은 교서(Tome)를 특사를 통하여 플라비안에게 보냈다. ▣ 마침내 회의가 열렸지만, 디오스코루스가 회의를 주도하였다. 레오의 교서는 회의장에서 읽혀지지조차 못했고, 유티케스는 복권되었으며, 플라비안은 맞아 죽었고, 그의 자리는 디오스코루스의 장로 아나톨리우스(Anatolius)에게 넘어갔다. 레오  1세는 이 회의를  ‘강도의 소굴’(latrocinium)이라고 규정하고 훗날의 기회를 노렸다. 때마침 테오도시우스  2세(Theodosius  II, 408‐50 재위)가 낙마 사고로 죽는 사건이 일어났고, 앞서의 혼란을 정리하기 위하여 정식으로  4차 공의회인 칼케돈 공의회(the  Council  of  Chalcedony,  451년)가 열렸다. 이때는 디오스코루스를 배반한 아나톨리우스가 회의를 장악하였고,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정죄를 다시 한번 확인하면서, 디오스코루스의 단성론적인 주장을 정죄하고 그를 직위에서 폐위시켰다. 그리스도는 단일하고(a  single) 나누어지지 않는 위격(undivided  person)이며, 그분은 두 본성으로부터 나왔을 뿐만 아니라 두 본성 안에 존재한다고 선포하였다. 예수는 완전한 하나님이며 완전한 인간이라고 정의하고, 예수의 신성은 성부와 같고 인성은 우리와 같으나 죄가 없다고 결정하였다. 

Page 54: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공의회는  ‘하나의 동일한 아들(one  and  the  same  Son)에 대한 확신을 진술하였고, “  …  혼동되지  않고(unconfusedly),  변하지  않고(unchangeable),  나뉠  수  없고(indivisibly), 분리될 수 없는(inseparably) 두 본성”을 확정하였다.  “이 본성들 사이의 차이는 연합 때문에 결코 제거될 수 없다. 그러나 오히려 각 본성의 특수한 특성은 보존되어 있으며, 양자는 한 위격 안에서 결합하였다”는 내용이 포함된 칼케돈 신조를 작성하였다. 공의회는 또한 예루살렘을 가이사랴의 사법권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예루살렘 교구에 대교구들 중 다섯 번째 위치를 주었다. 예루살렘의 지위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고통을 받으시고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신 장소이기 때문에 추가되었던 것이다. ▣ 한편, 귀양길에 오른 디오스코루스는  454년에 사망하게 되었는데, 앞서 그의 자리는 프로데리우스(Proterius)에게 위임되었다. 프로데리우스는 칼케돈 공의회의 신조를 고수했지만, 그럴수록 신도들은 더 떨어져 나갔고, 황제 마르키아누스(Marcianus,  450‐57 재위)의 죽음을 기점으로, 그는 격렬하게 일어난 폭도들에게 붙잡혀 찢겨 죽었으며, 극단적인 단성론파 주교 티모티 아에루루스(Timothy Aelurus)가 알렉산드리아 주교직을 차지했다.  #라우렌티우스(Laurenitius,  ?‐258): 칼빈은 어거스틴이 그의 편람에서 라우렌티

Page 55: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우스에게  ‘보속’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고 했는데(3.4.39), @뒷부분에서는 그레고리의 서한을  근거로  “라우렌티우스가  죽은  후  콘스탄티우스가  밀라노의  주교가  되었다”고 했다(4.7.6). 이렇게 볼 때 초기 교회사에서 라우렌티우스는 중요한 인물이었음에 틀림 없어 보이는데, 정확한 정보는 베일에 싸여 있어서 연대를 조화시키기가 쉽지 않다. 한 자료에 의하면, 라우렌티우스는 에스파냐 출생으로 전설에 의하면  24대 주교 식스투스  2세(257‐58 재위)의 인정을 받아 로마에서 부제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황제 발레리아누스(Valerianus,  253‐60 재위) 때 박해를 받아 체포되었는데,  3일의 유예기간 동안 교회의 재산을 병자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유예가 끝난 뒤 재산 제출을 요구받자, 대신 가난한 사람들을 가리켰으므로 관헌의 노여움을 사 뜨거운 철판 위에서 화형되었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대에 로마에 있는 그의 묘지 위에 교회가 세워졌다. 그는 미술에서는 보통 부제 복장으로 등장하며, 순교 당시의 철판을 들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재산을 분배해 준 것과 관련하여, 화폐를 담은 그릇 등을 들고 있기도 하며, 순교 장면은 미술의 좋은 제료(題材)가 되고 있다. 저명한 교회사가인 필립 샤프(Philip  Schaff)는 시인 프루덴티우스(Prudentius)가 라우렌티우스를 크게 찬양했다고 전한다. 

Page 56: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락탄티우스(Lactantius,  240‐320):  피르미아누스  락탄티우스(Firmianus 

Lactantius)는 북아프리카 누미디아지방 출생. 현재의 이즈미르인 니코메디아에서 수사학을 배우고,  300년경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그리스도교 박해가 시작되자 더욱 신학 저술에 전념하였다.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가 로마에서 공인될 무렵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초빙을 받고 트리어로 가서 궁정 신학자가 되어, 황제의 종교 정책을 돕고, 대제의 맏아들 크리스푸스의 가정교사 노릇을 하였다. 주요 저서에는  ‘신학 체계’,  ‘하나님의 진노에 대하여’ 등이 있다. 궁중에서 지내는 동안에도 극도의 절제 생활을 하면서 세속의 사치와 탐욕을 견디는 생활을 하였다. ▣ 제롬은 락탄티우스를 그 시대에 가장 학문이 뛰어난 학자였다고 평가한다. 실제로 그의 학문적 기질은 제롬을 제외한 거의 모든 라틴 학자들을 능가하는 것을 평가된다. 그래서 그를 기독교 세계의 키케로라고 보는 세간의 평가에 동의하는 필립 샤프(Philip  Schaff)는 그의 특이한 공적을 설명하기를, 그가  ‘렐리가레’(religare, 묶다)라는 단어에서  ‘렐리기온’(religion, 종교)이라는 단어를 이끌어냈다고 한다. 락탄티우스는 이 단어를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을 정의하였던 것이다. ▣ 락탄티우스가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284‐305 재위) 황제의 박해의 원인을 밝힌 

Page 57: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내용은 귀중한 사료이다. 락탄티우스에 의하면, 황제의 사위 갈레리우스는 기독교를 박해하기 위하여 부단히 디오클레티아누스를 사주하였고, 황제가 거하던 비시니아의 니코메디아 궁전에서 일어난 두번의 화재를 기화로, 마침내 기독교 박해령을 황제로부터 끌어내었다.  303년부터 황제는 계속 더욱 엄격한 내용이 첨가된 네 가지 칙령을 내려 기독교를 박해하였는데, 특별히 모든 기독교를 철거하고 성경을 불사르며, 기독교인들은 모든 공직에서 추방하고 시민권을 박탈할 뿐만 아니라, 로마 신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처형한다고 한 네 번째 칙령은 매우 가혹하였다. 락탄티우스는 이 화제가 갈레리우스의 짓이었다고 지적하였다. ▣ 락탄티우스의 가장 중요한 작품은  ‘신학 강요’(Divine  Institutes)로 알려진다. 이 책은 세련된 문체에 힘입어 수백개의 판본들이 나올 정도이면서 수많은 독자들을 매료시켰다고 알려지는데, 주로 이교를 비판하면서 기독교를 변호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기타,  ‘박해의 종말에 관하여’,  ‘하나님께서 하신 일’,  ‘하나님의 진노’,  ‘주홍에 관하여’,  ‘주님의 고난에 관하여’,  ‘주님의 부활에 관하여’ 등과 같은 신학서들과 각각 세 연의  6보격으로 구성된 백 개의  ‘수수께끼들’을 저술하였다. 그의 글들을 주로 진리를 밝히기 보다는 오류를 논박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따라서 교리 문제에 있어서 상당한 부분에서 난해하고 혼란스러운 문제들

Page 58: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래서 제롬은 비록 그를 당대에 뛰어난 학자라고 평가하기는 했지만, 그가 성령의 인격성을 부정한 사실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지적하였다.  #레오  10세(Leo Ⅹ,  1513‐21 재위): 루터(Martin Luter,  1483‐1546)가  1517년  10월 

31일에 비덴베르그 대학 성곽에  95개조를 내걸 당시의 로마 교회  217대 교황이다. 본래의 이름은 조반니 드 메치(Giovanni de Medici)였지만,  37세의 젊은 나이로 선출되어 교황 대관식을 거행하면서 레오  10세라고 하였다. 교황은 주변 국가들과의 전쟁에 깊이 간여하였고, 1517년에는 자신을 향한 독살 음모를 발견한 것을 계기로 많은 추기경들을 처형하고 살해하였다. ▣ 그는 전임  216대 교황 율리오  2세(Julius II,  1503‐13 재위)를 따라 전대사를 발표하였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교황의 특령으로  보속(補贖)을  면제해주는  ‘대사’(大赦,  indulgentia)  제도를  시행하는데,  보속의 일부를 면제해주는 것을  ‘한대사’(限大赦), 전체를 면제해줄 경우  ‘전대사’(全大赦)라고 한다. 예를 들어  40일 동안의 재계와 고행으로만 받을 수 있는 보속가치를, 오늘날에는 대사의 은전만 입으면 그런 고행을 하지 않고도 그와 같은 보속가치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자신들의 입장에서 대사의 근거를 여러 가지로 제시하고 있는데, 실제로 대사가 시행된 역사적 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Page 59: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9세기의  102대 교황 세르지오  2세(Sergius  II,  844‐47 재위)는 실베스터 성당과 마르티노 성당의 참배자들에게  3년과  30일  40일의 대사를 주었고, 11세기에는  152대 교황 레오  9세(Leo Ⅸ,  1049‐54 재위)가 비순디니 주교좌 성당 축성식에 참석한 신자들에게 각자의 보속의  1/3에 해당하는 감면 대사를 주었다. 또 같은 시기에  159대 교황 우르반  2세(Urbanus  II,  1088‐99 재위)는, 개인의 명예 때문이 아니고 교회를 구하려는 경건한 열정으로 예루살렘으로 출정하는 이들이라 하여 십자군에게 전대사를 주었다. 193대 교황 보니팍  8세(Boniface Ⅷ, 1294‐1303 재위)는 성년(聖年)대사를 선포하는 동시에, 그 후부터는 백 년에 한 번씩 이를 선포하기로 규정하였지만,  1350년에는  198대 교황 클레멘트  6세(Clement Ⅵ,  1342‐52 재위)가 이를  50년마다 선포하기로 제정하였고, 1475년에는 교황 바울  2세(Paul  II, 1464‐71 재위)가 이를 25년마다 선포하기로 다시 변경하였다. 1500년도 초기에 들어와 교황 율리오  2세는, 과거  콘스탄티누스  대제  당시의  로마  교회의  32대  주교  멜키아데스(Melchiades, 311‐14  재위)가  그로부터 기증 받은  궁전을 개축하여  사용해왔던  라테란  성당에 대한 신축을 시도하게 되는데, 마켈란젤로, 라파엘로, 브라만테 등의 대가들을 기용하고, 이에 소요되는 막대한 자금 마련을 위하여 대사를 발표하였다. 이 공사는 후임 교황 레오  10세까지 이어졌는데, 그 역시 성당 건축의 막대한 자금 마련을 

Page 60: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위하여 대사를 이용(?)하게 된다. ▣ 레오는  1515년에 독일 지역을 셋으로 나누고 그 중 한 지역의 면죄부 판매를 마그데부르그(Magdeburg)의 대주교 알브레히트(Albrecht, 1490‐1545)에게 일임했다. 28세에 추기경이 된 그는 아우구스부르크의 은행가인 푸거에게 많은 돈을 빚졌는데, 여기에는 화려한 궁정에 살면서 사치한 레오 교황의 영대 값이 포함되어 있었다. 알브레히트는 베드로 성전 신축 기금 마련에 골몰해 있던 교황과 의기투합하여 수익금의 절반을 갖는다는 조건하에 대사를 이용한 면제부 판매 독점권을 받아냈다. 알브레히트는 도미니크회 수도사인 요한 테젤(Johann  Tetzel)을 자신의 대리인으로 임명하게 되고, 그는  1501년부터 본격적인 면죄부 판매인으로 나서게 되었다.  (테젤은 훌륭한 대중 연설가였기에 면죄부 판매는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1517년 프랑스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1518년  1월 루터와의 면죄부 논쟁에서 면죄 교리를 옹호한 대가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나,  1519년  7월 루터와 에크의 면죄부 논쟁이 한창이던 때에 라이프찌히에서 사망했다.) 테젤과 면죄부 판매원 일행들은 가는 곳마다 마치 천국의 사자들과도 같이 영접을 받았다. 사제들, 수도사들, 관리들, 남녀노소들 할 것 없이 손에 촛불을 들고 깃발을 흔들며 종소리에 맞춰 행진하여 성당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벨벳 쿠션 위에 교황의 교서를 놓은 높은 단이 있었고, 그 앞에 교황의 문장을 새

Page 61: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긴 비단 깃발과 빨간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다. 바로 그 밑에 면죄부 대금을 넣을 커다란 철제 상자가 놓여졌다. 그들은  “상자 안에 돈이 떨어지는 소리가 나는 순간” 연옥에서 고생하는 친지들과 친구들이 고통에서 해방된다고 연설했다. 사람들은 촛불을 들고 상자 앞에 나아가 죄를 고백하고는 상자에 돈을 넣은 후 면죄부를 받았다. 그들에게 이 시간은 천국행 티켓을 받는 시간과도 같았다. ▣ 사실 면죄부에 대한 비판은 루터로부터 처음 시작된 것은 아니고, 이미 오래 전부터 이에 대한 반대가 전개되어 나오고 있었다. 영국의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4‐1384)로부터 시작하여, 보헤미아의 후스(John Huss,  1370‐1415)가 이어갔고, 독일의 존 폰 베젤, 네델란드의 존 베젤, 스위스의 토마스 비텐바흐 등도 면제부 판매 행위를 비판했다.  이런  배경하에서  성  베드로  성당  신축  자금  마련을  위한  대사(大赦, indulgentia)의 악용, 곧 면죄부 발행은 루터로 하여금 비텐베르크 대학 교회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내걸게 하였다. 그 자신이 고해신부였던 루터는 면죄부가 고백자의 진지한 회개에 치명적인 독소가 됨을 깨달았다. 당시 알브레히트에 의해 마인쯔와 막데부르크에 배부된 면죄부에 대한  ‘요약강요’는 형벌에 대한 보속이 아니라 죄 그 자체에 대한 사면을 설명하는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이 요약강요는 네 가지 주요 은총에 대한 설명에서 루터의 반대에 직면했다. 이 설명에 의하면 면죄

Page 62: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부의 은총은, 첫째, 모든 죄를 사해주는 은총이며, 둘째, 가장 크며, 유용하게 그리고 아직까지 들어보지 못한 가능성들로  @가득 찬 참회 서신이며, 셋째, 보편적인 복에의 참여, 즉 베드로 성당 신축에 돈을 낸 사람과 그들의 죽은 부모들이 이제부터 영원까지 모든 간구, 도고, 적선, 금식, 기도와 모든 종류의 순례에 참여하게 되고, 넷째, 연옥에 있는 영혼들의 모든 죄가 완전히 사해진다고 했다. 즉 대사의 보증인 면죄부를 구입하면 구원이 확실해지며, 이런 은총은 사면받지 못하거나 용서받지 못할 죄가 더 이상 없을 정도로 효능이 있다고 설파하였던 것이다. ▣ 루터의  95개조에 포함된 면죄부에 대한 반박은 교회 내에서의 토론을 위한 것이었지만 점차 발전되어가는 논쟁의 와중에서 급기야 로마 카톨릭 교회와 분리된 개신교(Protestant)를 탄생시키는 동기가 되었다. 레오  10세 교황은 루터의  95개조 중  41개 조를 단죄하였고, 루터가 뜻을 굽히지 않자,  1521년  1월  3일 그를 파문하였다. 교황은 또한 루터를 반박하여  7성사를 쓴 영국의 헨리  8세에게 평화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내렸다. 하지만 헨리  8세(Henry Ⅷ)는 이후 성공회(Anglican  Communion; 영국의 헨리  8세는 자신의 이혼과 재혼 문제와 관련하여 교황의 허락을 받지 못하자,  ‘왕이 교회의 머리’라고 주장하면서 로마 카톨릭 교회와 결별했고, 독자적인 교파를 창설하였다)를 만들어 로마 교회와 결별하게 된다.   

Page 63: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레오  3세(Leo Ⅲ,  717‐41 재위): 동방 황제 레오  3세(Leo Ⅲ)는 갓 서른을 넘긴 

평범한 농부에서 일약 제국의 황제가 된 인물이다. 평소에 그리스도를  2차원 혹은 3차원의 형상으로 표현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해왔던 레오는  725년이 되자 당시 비잔티움에 만연한 형상숭배 척결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는 일련의 연설을 통하여 우상숭배자들의 지나친 행동을 지적하면서 그것은 십계명의 둘째 조항을 범하는 것이라고 선포했다. 다음해가 되어  726년이 되자, 그 유명한 소피아 성당 서쪽에 있는 청동 대문 칼케를 파괴하기 시작했다. 칼케에는 황금으로 장식한 그리스도의 커다란 성화가 있었던 것이다. ▣ 레오의 급진적인 개혁은 기존 세력의 극심한 반발을 초래했다. 파괴 현장의 지휘자가 성난 군중에게 맞아 죽었고, 시위와 폭동이 잇달아 일어났으며, 급기야  727년에는 라벨라 총독이 반란을 일으키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레오는 더더욱 강인하게 대처하였다.  730년에는 아예 칙령을 내려 제국 전지역에서의 성상을 금지시켰다. 주로 수도원에 안치되어 있던 성상들에 대한 파괴 작업이 뒤따랐고, 따라서 급하게 보물(?)들을 끌어안고 도망가는 수도사들이 여기 저기서 붙잡혔다. 용케 탈출에 성공한 수도사들은  @갑바도기아  황야의  여러  은둔지로  잠적하였다.  ▣  서방  교회의  89대  주교  그레고리  2세

Page 64: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Gregory  II,  715‐31 재위)가 나서서 교리 문제에 간섭하지 말라고 했을 때, 황제는 주교를 체포하기 위한 일단의 군대를 파송하는 대응으로 맞섰다. 교황이 갑자기 서거함으로써 더 큰 전쟁은 재현되지 않았지만, 그를 계승한 후임  90대 주교 그레고리  3세(Gregory  III, 731‐41 재위)도 역시 완강하게 저항했다. 신임 주교 역시 교회의 신성한 물건에 손대는 자는 모두 파문에 처할 것이라고 포고했다. 황제는 자신을 설득하려고 주교의 사절들이 오면 번번이 투옥시켜 버림으로써 응수했다. 레오는  741년  6월  18일 서거하였다.  (참고로, 칼빈이 여기서 레오가 콘스탄티노플 회의를 개최했다고 말한 것은, 레오의 이와 같은 강렬한 활약에 대한 기억이 그를 지배했던 데서 온 순간적인 착각인 것 같다. 콘스탄티노플 회의를 개최한 사람은 레오가 아니라,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5세<Constantinus Ⅴ, 741‐75 재위)>이다.)  #레오 대제(Leo  1,  440‐461년 재위): ▣ 레오  1세는 로마 교회의  45대 주교로, 그

의 뛰어난 사역으로 말미암아 대제라는 칭호가 붙는다. 그가 취임한 시기는 정치에 있어서나 교회 내에서도 많은 소요가 발생했던 때였다. 그는  5세기 초엽에 출생하여, 로마를 고향 도시로 간주했고 그곳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가 이미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위하여 봉사한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집사로 임명된 그는 일찍부

Page 65: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터 교회의 과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외교 문제로 평화의 임무를 띠고 갈리아(Gallien) 지방에 파견되었던 그에게 주교로 추대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 로마의 주교이자 서방 교회의 수뇌가 된 그는 제일 먼저 마니교와 펠라기우스주의자들로부터 그리스도교 신앙의 순수성을 지켜야 했다. 레오 대제는 설교와 서간문을 통하여 서방 교회의 신학과 로마의 교회관을 유효하게 만들었다. 그는 베드로의 후계자라는 뚜렷한 의식으로 공동의 문제 해결을 위해  @서슴지 않고 이탈리아의 주교들을 소집했다. 갈리아 지방은 물론 일루리온 지방(데살로니가)에 이르기까지 로마와의 결속을 이루게 하는 데 성공했다. ▣ 레오 대제에게 있어서 특별한 도전은 단신론적(mono‐physitische)으로 생각했던 유티케스(Eutyches,  ca.  378‐454)를 통하여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미결의 동방 교회 그리스도론 문제였다. 이 문제에 대한 레오 주교의 교서가 에베소 공의회(449년)에서 무시를 당했다. 그러나 동방 교회에서의  권력  교체는  주교의  중재를  다시  허용했으며,  황제  마르키아누스(Marcianus,  450‐57 재위)와 그의 부인인 풀케리아에 의해서 소집된 칼케돈 공의회(451년)에서 서방 교회의 그리스도론이 승리했다. ▣ 레오 대제는 콘스탄티노플의 교회적 우위에 반대하여 항의를 제기했다. 그의 영향력이 동방 교회에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하자, 교육적 영역에서라도 서방 교회를 통솔하고자 했다. 수많은 설

Page 66: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교문과 풍부한 서간문은 레오 대제의 사고 방식과 신학에 대한 전체적인 윤곽을 제공해 주고 있지만, 그의 공직자로서의 역할이 참조되어야 할 것이다. 그의 교직 이해에 있어서 기초가 되는 것은 로마 주교의 완전한 수위권을 형성했던 베드로의 계승권에 대한 의식이다. 그는 영원한 로마의 이상을 주저하지 않고 그리스도교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그리스도교 사회의 주도 개념을 로마인에게 각인시켜 주었다. 레오 대제는 교회에 대한 책임을 서슴지 않고 구세대의 지배자들에게 전가시켰다. 교회적 훈련의 관철, 이단의 축출, 신앙의 생활화는 그의 긴박한 목자적 관심사로 남아 있게 되었다. 특히 모조되지 않은 그리스도 신앙고백을 확립하는 것이 중요했고, 인격적 통일 속에 있는 신성과 인간성의 독자성을 확립했다. 레오 대제는 신학의 상황을 고려하여 그리스도론에 대한 논의의 집중을 막지 않았고, 오히려 일상 속에서의 그리스도교적 삶의 실현을 도모했다. 그의 재능 있는 손길은 로마의 예전에서 느껴진다. 후대의 사람들은 그에게 마땅한  ‘대제’라는 칭호를 붙여 주었다.  #로렌조 발라(Lorenz Valla,  1407‐1457):  1440년  4월로 추정되는 어느 날, 이탈리

아의 인문주의자이자 문헌학자였던 로렌조 발라는 실로 충격적인 사실을 발표했

Page 67: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다. 지난  700여년 동안 진품으로 알아 그 누구도 감히 의심하지 않았던  ‘콘스탄티누스의 헌서’가 가짜 문서인 것을 밝혀냈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누스의 헌서라는 문서는 프랑크 왕국의 페핀  3세(Pepin Ⅲ,  747‐68 재위)가 중부 이태리의 상당한 땅을 교황에게 헌납했던  756년경부터 광범위하게 회람되기 시작했는데, 이 문서는 토지의 헌납을 정당시하는데 이용되었다. 이 문서의 내용은 이러했다. 심한 나병에 걸려 고생하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치료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허사였다. 그러나 로마의 주교 실베스터  1세에 의해 병 고침을 받고, 감사의 표시로 로마에 있는 궁궐터와 이탈리아 중부의 상당한 토지를 로마 주교에게 기증했다는 내용이다. ▣ 중세 교회가 생산한 문서는 거의 신성불가침의 권위로 받아들여졌고, 감히 문서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한 때는  208대 교황 니콜라스  5세(Nicholas  V,  1447‐55 재위)의 서기였고, 당시에는 아라곤과 시실리의 왕 알퐁스(Alphonse)의 서기였던 로렌조 발라가 결정적으로 이 위선을 발가벗겨 버렸다. 언어학자이기도 했던 그는 문서를 면밀히 검토하는 중에 이 문서에 사용된 라틴어가  4세기 언어가 아니라  8세기의 라틴어임을  @알게 되었고,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에 사용되지 않았던 몇 가지 용어를 발견했다.  ‘원로원 의원의 긴 양말,’ ‘황제의 관,’  ‘총독들’ 기타 등등의 용어들이  4세기의 용법과 다르다는 사실을 증명

Page 68: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했다. 가령, 로마제국의 관리를 칭하는 사트랍(satrap)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는데, 이 용어는  4세기 당시에는 사용되지 않았던 칭호임을  @밝혀냄으로써 그 문서가 후대의 위작이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사실 사트랍은 고대 페르샤 제국의 통치자를 칭하는 용어였던 것이다. 그 외에도 역사적 문맥과 정황에 대한 면밀한 분석을 통해 이 문서가  4세기의 것이 아니라  8세기에 만들어진 위조문서임을 입증했다. ▣ 이 문서는 교황청의 권위를 드높이고 로마 교회의 막대한 토지 소유를 정당화 해주는 문서였는데, 위조 문서임이 밝혀지자 그 파장은 대단했다. 교황청은 도덕적 신뢰를 상실했고, 발라는 교황청과 로마 카톨릭 지도자들로부터 엄청난 도전에 직면했다. 자신의 주장을 취소하라는 회유를 거절하자, 근거없는 허황된 궤변과 악의적인 목적으로 거룩한 교회의 권위를 무너뜨리려는 사악한 야수로 지목되었고, 그의 문서는 금서목록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그 해에 쓴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증으로 믿어진 선언의 허구성에 관하여’(De  falso  Credita  et ementita Constantini donatione declamatis)라는 논문을 통하여  ‘콘스탄티누스의 헌서’가 위조 문서인 것을 증명해냈다. 발라의 철저한 문서 고증은 부인할 수 없는 정확한 것이었기에 당시  207대 교황이던 유게니우스  4세(Eugenius  IV, 1431‐1447)는 이 문서가 거짓임을 인정했다. 한 지식인의 용기와  ‘진리에 이르려는 끊임없는 열

Page 69: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망’은  700년간이나 누려왔던 허위의 실체를 만천하에 공개했던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발라의 이 책은 그가 죽은 지  60년이 지나  1517년에야 출판되었다. 여하튼 그는  ‘최초의 비판적 역사가’,  ‘본문비평 분야의 개척자’,  ‘용기있는 지식인’이라는 영예를 얻었다. 이때부터 그 동안 로마 교회에 의해 자행된 역사 위조와 변조의 엄청난 실상이 부분적으로 밝혀지기 시작했다. 발라는 사도신경은 사도들에 의해 한 @구절씩 고백된 내용으로 구성되었다는 루피누스(Rufinus)의 설명이 허구임을 밝혀냈고, 심지어 어거스틴의 작품들도 후대의 첨삭으로 변조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변조된 부분은 어거스틴의 작품 중에서만  40%에 달했다. ▣ 사실 오늘날 잘  알려져  있는  또  하나의  위조  문서는  소위  ’가짜  이시도르  교령들’(Pseudo‐Isidorian decrees)이다. 이 문서가 위조 문서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1558년이었지만, 이 문서를 최초로 사용한  105대 교황 니콜라스  1세(Nicholas Magnus,  858‐67 재위)는, 이미 문서가 가짜임을 알았지만, 도리어 정략적으로 이용했다. 위조 문서 제작과 관련하여 악명높은 인물로 알려진 그는  858년 교황이 된 후 교황의 @관할권 확보를 위해  (르망 교구의 경우)  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모든 법령들을 교황 혹은 공의회 결정 사항으로 위조하였던 것이다. 그의 역사 변조로 말미암은 진실에 대한 긴 침묵은 약  700년이 지난 후 마침내 거짓을 벗어버리게 되었다. 

Page 70: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루크레티우스(Lucretius, B.C. 95‐55): 고대 로마의 시인이며, 유물론 철학자이다. 

그의 삶에 대해서는 전하는 바가 많으나 모두 불확실하다. 그가 쓴 책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만물의 본성에 대하여’는 운문으로 쓰인  6권의 책으로, 에피큐로스의 철학과 생활에 대하여 쓴 시이다.  (이 시의 사본이  1417년에 발견되어서 원자설이 알려지게 되었다. 완전한 판본은  1830년경에 와서야 나온다. 이 시기에 마르크스의 박사 학위 논문  ‘데모크리토스와 에피큐로스의 자연철학의 차이’<1841>가 나왔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그는 진실로 실재하는 것은 무수한 원자와 공허한 무한 공간뿐이며, 세계의 모든 것은 원자의 운동 현상이라고 하는 고대 원자론의 원칙에 의해서, 온갖 자연 현상으로부터 인간 사회의  @제도와 관습에 이르는 모든 것을 자연적이며, 합리적으로 설명하려 하였다. 특히, 불안과 공포의 원천인 영혼과 신들에 대한 종교적이며 정치적 편견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초기 공화정 발생기에는  ‘에피큐로스 학파’와  ‘피타고라스 학파’의 로마 전파가 금지되고,  ‘스토아 학파’가 공화정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루키안(Lucian,  120‐200):  2세기 경의 이교도 풍자 작가이다. 필립 샤프(Philip 

Page 71: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Schaff)는 루키안을 그리스 학계의 볼테르(Voltaire)라고  @할 만큼 그가 기독교 신앙을  무지막지하게  공격했다고  전한다.  루키안은  이집트에서  로마의  행정관직을 지낸 사모사타 출신이다. 그는 고전 아티카 방언에 능숙했고 문학에 조예가 깊었다. 그의 초기 저서들은 자주 재치가 가미된 수사학적 연설과 문학 비평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저서들은 인간의 자존심, 현학적인 철학자들, 종교적 사기꾼들, 대중의 미신들을 제거한  ‘죽은 자들의 대화’(Dialogues of  the Dead) 같은 해학적이고, 반 대중적인 철학적 담론이다. 그도 아풀레이우스의  ‘황금 나귀’처럼 기발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루키우스 혹은 나귀’(Lucius, or  the Ass)라는 소설을 썼다. 그는 일생에 걸쳐 허황되고 어리석고 거짓된 것을 혐호했다. ▣ 다음은  ‘죽은 자들의 대화’에 나오는 일부 이야기이다. 트로이 전쟁이 @끝난 지 천 년쯤 지났을 때, 루키안은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유부녀 헬레네 때문에 죽어야만 했는지 의아하게 생각했다. 이에 따라 그는 이 책에서 철학자 메니푸스를 내세워 저승으로 보내고,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개한다. 메니푸스는 저승에 도착하여 헤르메스 신에게 안내를 부탁하자 헤르메스는 해골 하나 하나를 가리키며 유명인사의 이름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저한테는 해골 밖에 안 보입니다. 해골은 모두 똑같아서 누가 누구인지 알 수 없어요.” 메니푸스가 푸념했다.  “하지만 시인이라는 작자들은 자네

Page 72: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가 해골이라고 말하는  (과거에 이미 죽은) 저런 것들을 숭배하며 노래부르지.”  “아마 그럴지 모르겠군요. 그런데 어떤 것이 헬레네인가요? 제 안목으로는 도저히 찾을 수가 없군요.”  “이게 바로 헬레네야!” 헤르메스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메니푸스 앞에는 그저 그런 해골 하나가 있었다. 그는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고 외쳤다.  “10만 대군을 가득 실은 천 척의 배가 그리스를 떠난 이유가 바로  ‘이것’이란 말입니까? 수많은 그리스 군인과 트로이 군인이 죽고 폐허가 된 이유가 고작  ‘이것’이란 말입니까?”  “그렇다. 그러나 자네는 이 여자가 살아있을 때의 모습을 보지 못했지 않느냐. 만약 보았다면 사내들이 무엇 때문에 여자 하나를 위해 오랫동안 고난을 겪었는지,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꽃은 시들면 추해보이지. 그러나 활짝 피어나 색깔이 있을 때는 정말 아름다운 법이라네.” 그러자 메니프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답했다.  “그건 저도 인정합니다. 허지만 그리스인들이 정녕 그것을 몰랐을까요? 그들이 얻으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그리고 그 아름다움이 얼마나 빨리 시들어 버리는지를 말입니다.” ▣ 필립 샤프는 다음과 같이 루키안을 평했다.  “루키안은 그리스도인들을 증오하기보다는 연민의 미소로 대했던 것이다. 어느 곳에서도 그들을 진압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데, 따라서 그리스 철학자 켈수스(Celsus)처럼 그리스도를 사기꾼이라고 하지 

Page 73: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않고,  ‘십자가에 달린 소피스트’라고 부를 뿐이다. … 하지만 그럴지라도 결국 그의 시각에는 기독교나 이교가 모두 사기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에피큐로스 학자의 성향이 그렇듯이, 굳이 기독교의 현상들을 세부적으로 추적하여 그 근본을 드러내고, 철학적 설명을 가하는 수고를 할 만한 그런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루키우스(Lucinus,  253‐4 재위): 로마 교회의  22대 주교인데 선임 주교 코넬리

우스와  함께  황제  갈루스(Gallus,  251‐53  재위)의  박해를  받아  치비타베키아(Civitavecchia)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발레리안(Valerian,  253‐60 재위)이 황제가 되었을 때, 귀환 허락을 받아 로마로 오게 된다. 하지만 귀환 후 몇 달 되지 않아서 사망하게 되는데, 그때까지 신부  2명, 부제  3명과 함께 생활했다고 한다. 키프리안(Cyprian,  200‐258)은 루키우스가 로마 황제 데시우스(Decius,  249‐51 재위)의 박해시 배교한 신자들에 대해 취한 선임자의 관대한 정책을 계승한 것에 대해서 증언하였다.  #리코니데스(Lyconides): 플라우투스(Titus M. Plautus, B.C. 254?‐184?)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이름. 

Page 74: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마니(Mannes,  216‐277): ▣ 마니교(Manicheism)를 창설한 사람이다. 페르샤 수

도에서 태어난 마니는  14세와  24세에 두 번에 걸쳐 계시를 받게 되어 인도와 중국을 여행하고 돌아와 가르침을 베풀면서 많은 제자들을 얻게 된다.  240년에  ‘조로아스터교’에 의해서 인도로 추방되자, 그곳에서 자신의 독특한 교훈을 전하다가,  242년에 귀국하게 되었을 때, 다시 많은 추종자들이 따르게 된다. 당시의 왕 샤푸르  1세(Shpur  1,  241‐272)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은 마니교의 경전인  6권의 경전과 책을 쓰고, 제국 전역을 다니면서 교리를 확장시켜 나갔다. 그러나 샤푸르의 손자 바라네스  1세(Varanes  I)가 즉위하면서 상황이 급변하는데, 먼저 여행의 자유가 제한되었고, 조르아스터교의 대제사장 카르터(Karter)의 사주로 수감되게 되며, 최종적으로 가죽이 벗겨지는 고문 끝에 복역한 지 한 달 뒤인  277년  2월경 사형에 처해진다. ▣ 마니교는 한 마디로 말하여 조르아스터교와 불교가 뒤섞인 신화적 성격의 기독교 이단이라 할 수 있다. 채식주의자요 금욕주의자인 마니는 가르치기를, 사탄이 빛의 세계로부터 훔친 후 인간의 두뇌 속에 가둬둔 빛이 있는데, 이것의 미분자들을 방출하여 흉악을 쫓아내는 것이 종교의 사명이라고 주장하면서, 이 일을 예수,  석가,  예언자들,  마니  등이  돕는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마니교의  영지

Page 75: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Gnosis)는 빛과 어두움의 근원적 원칙들 사이에 벌어진 전투에 중심을 둔 복잡한 우주 드라마를 구현한다. 먼저 어둠이 빛을 공격했다. 빛은 원래 패배하도록 계획되어 있었으나 반격을 가하여 어둠의 세력들을 꾀어 빛의 입자들을 삼키도록 만들었다. 그런 뒤 이렇게 갇힌 빛을 구속하고 정결케 하며, 어둠의 아르콘(지배자)들을 벌하고 가두기 위해 우주가 창조되었다. 더럽혀진 빛의 일부는 정욕을 통해서 아르콘의 육체들에게서 빠져 나와 식물의 생명이 되었다. 아울러 낙태와 간음과 식인 같은 참혹한 행위들을 통해서 인류를 배출해냈다. 그 결과 빛의 입자들인 영혼이 극히 악하고 부패한 육체에 갇히게 되었다. 하지만 영혼은 영지에 의해 깨어나 자신이 신에게서 유래했음을 자각할 수 있었다. ▣ 마니교에서 예수는 차례로 등장한 구주들 가운데 하나이고, 그의 역사적 현시는 순전히 가현이다. 마니교가 주장하는 우주적 드라마의 개별적 사항들은 주로 유대교와 기독교의 외경과 데셋사의 철학자 바르다이산(154‐222년)의 우주론에서 유래한 것이다. 아울러 마니는 말시온(Marcion)에게 큰 영향을 받아서 그로부터 이른바 바울적 반법주의를 전수받았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그는 이 세상은 예수의 재림과 함께 끝날 것이고 오랜 동안 대화제가 일어나서 세상에 남은 것들을 정련할 것이며, 그 뒤에 마침내 천상의 모든 물질이 제거되고 빛의 영역이 완전히 회복된다

Page 76: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고 주장했다. ▣ 마니교는 엄격한 성직 위계 제도를 유지했고, 회중을 선택자들과 방청자들로 구분했다. 전자는 사제들로서, 식물들에 갇힌 빛의 입자들을 해방시킬 수 있기 위해서 채식주의를 포함한 엄격한 식사법과 성적 금욕을 준수해야 했다. 방청자들, 즉 평신도들은 선택자들의 생계를 지지해야 했지만, 그들과 똑같이 엄격한 규율을 지킬 의무는 없었다. 육체를 정복하기 위한 이들의 금욕주의는 고기를 먹지 않고 결혼과 성생활을 삼가며 망령된 말을 금하는 것으로 번져나가다가 급기야 고행 수단으로 의식화 되기에 이르렀다. 이 종교는 쉽게 소집단들로 조직된 데 힘입어 신속하게 확산되었고, 박해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 선교 열정과 페르시아 사산 왕조의 박해가 결합되어, 마니교는 로마 제국과 옥수스 강 동편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특히 좀더 기독교의 형태를 유지한 채로 전파된 로마령 아프리카에서는 확고히 뿌리를 내렸으며, 따라서 그곳에 살던 어거스틴(Augustine) 같은 사람들이 유대ㆍ기독교 성경에 대한 마니교의 고등비평을 배우며 자랐다. 훗날 중세의 교회 당국자들은 마니교의 이원론이 바울파, 보고밀파, 파타리아파, 카타리파에 의해 계승되었다고 평가했다. 동방에서 이 종교는 실크로드를 타고서 점차 확산되다가 결국 종국에 다다랐을 때는 포교가 금지되었다. 하지만  9세기 이후에 이 종교는 중앙아시아에 강한 세력을 형성했다. 훗날 이 분파는 중국에 은밀하게 전파

Page 77: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되어,  16세기까지 남부 지방에서 비밀 종교로 존속했다. ▣ 마니교의 경전은 마니가 쓴 일곱권으로 구성되었는데, 그 가운데 온전한 형태로 현존하는 것은  @한 권도 없다. 교부들이 이 분파에 대해서 쓴 방대한 분량의 논박서들 외에도, 중국의 투르판과 둔황, 이집트의 메디네트 메니, 북아프리카의 테베스테에서 마니교도들이 직접 쓴 저서들이 발견됨에 따라 그 분파에 대한 지식이 크게 증가했다. 보다 최근에는 이집트에서 마니교 창시자의 생애가 적힌 작은 분량의 파피루스 사본들이 발견되었는데, 쾰른 대학교 파피루스 소장품에 속해 있는 이 사본들이 성공적으로 복원되고 편집되었다. 이 사본들은 이 분파가 이런 종교들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  어거스틴은  마니교를  반박하기  위하여  ‘자유  의지론’(De  Libero Arbitrio)을 저술했는데 이것은 마니교 비판서로 대표작이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초기 인생에서  9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마니교에 몰두했던 터라, 이에 대한 그의 비판은 단호하고 확실했으며, 마니교 비판서를 무려  13권에 달하는 작품으로 발표할 정도로 열정을 기울였다.  #마르스(Mars): 고대 로마의 군신. 그리스신화의 아레스와 동일시되었다. 로마

의 구력에서는 오늘날의  3월이 정월이었는데, 이를 마르스에게 바쳐 마르티우스월

Page 78: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月)이라 불렀다. 영어의  ‘March’(마취) 등 근대 서구어의  3월 명칭은 여기에서 온 것이다. 그는 유피테르 다음가는 국가의 수호신으로서 정중하게 모셔지고, 개전시에는 장군이 포룸의 레기아(왕궁)에서 그의 성스러운 창을 휘둘러,  “마르스여, 일어나시오” 하고 외치는 습관이 있었다. 제의는 고대인의 군사행동 개시기인  3월과 종지기(終止期)인  10월에 집중되어 있으며, 전차 경주, 나팔 축제, 무구정화제(武具淨化祭) 등이 행해졌다. 또 그의 신전은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의부인 카이사르의 암살 복수를 기념하여 스스로의 포룸 안에 만든 마르스 울토르(Mars Ultor)가 로마의 가장 웅대하고 화려한 신전의 하나로 꼽혔다. 신화에서는 로마의 건국자 로물루스와 그의 쌍둥이형제 레무스의 아버지로 되어 있으며, 성수(聖獸)는 이리요, 딱따구리가 성조(聖鳥)였다.  #마르키아누스(Marcianus,  450‐57 재위): 로마 교회의  45대 주교 레오 대제(Leo 

1,  440‐461년 재위)로부터 칼케돈 회의의 의장을 로마 교구 쪽에서 선택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인 황제로, 테오도시우스  2세(Theodosius  II,  408‐50 재위)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Page 79: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마르셀루스  1세(Marcellus,  308‐9 재위): 로마 카톨릭 교회의  30대 주교이다. 교황의 책에 의하면, 그는 로마의 교회를  25개 본당으로 재정비하고 새 묘지를 만들었으며  25명의 신부를 서품하고  21명의 주교를 성성하였다.    #마우리키우스(Mauricius,  582‐602 재위):  64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주교 그레고

리  1세(590‐604 재위) 때 동로마를 다스린 로마 황제이다.    #마케도니우스(Macedonius, 342‐46, 51‐60 재위):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인데, 반아

리안주의 입장을 취하여  @콘스탄티노플 회의(381년)에서 성령의 신성을 부정하였다는 죄목으로  정죄되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  회의는 황제인 콘스탄티우스  2세(Constantius  II, 337‐61 재위)의 명령에 따라 소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주교나 그의 특사는 물론이고 서방 교회의 주교들도 참석하지 않았음으로 인하여 그리 큰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성령의 신성을 확인한 것은 큰 업적인데, 신적 로고스가 그리스도의 신성을 대치했다고 주장한 시리아 라오디게아 교회의 주교 아폴리나리스(Apollinaris,  361‐90 재위)를 정죄했으며, 역시 성령의 신성을 부인한 마케도니우스가 이 회의에서 정죄되었다. 

Page 80: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막시미누스(Maximinus): 아리우스의 사상을 가진 사람으로 어거스틴은 이 사

람의 사상을 반대하는 반박론을 썼다.  #말시온(Marcion,  2세기): 말시온은 흑해 지방 시노페 출신이며, 그곳에서  1세기 

말경 태어났다. 고대 교회가 가장 큰 투쟁의 대상으로 삼은 이 이단자의 출생과 사망 연도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오늘날 말시온과 그의 저작에 관하여 알고 있는 것은 주로 그를 적대한 사람들의 문서에서 나온 것이므로, 논쟁적인 관점으로 채색되어 있다. 습득할 수 있는 극소수의 자료들도 그 부정확성으로 인하여 역사적으로 확실한 모습을 얻기 어렵게 만든다. ▣ 말시온에 의하면, 이 세상을 창조한 신은, 플라톤도 말했듯이, 데미우르게로 그 신은 반역의 악과 함께 세상을 창조하였다. 이 데미우르게가 영혼과 육체를 가진 인간을 창조했다. 말시온은 인간이 은밀한 지식 체계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영지주의와는 달리 인간의 육체 및 영혼을 악의 영역에 둔다. 그러나 말시온은 영지주의와의 접촉으로 자가 당착에 빠져 영혼과 육체 사이의 대립을 드러내 보인다. 그는 구약의 하나님이 자기에게 피 흘리는 희생 제물을 바치라고 명한 것과 유혈 참극을 기뻐하는 전쟁의 신인 것, 또한 

Page 81: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복수의 신이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는 이 하나님이 인간을 다스리기 위해 엄격하고 융통성 없는 율법을 내렸으며, 인간들에게 이것에 대한 복종을 강요하면서 위반자들에게 가혹한 처벌을 집행했다고 생각했다. ▣ 또한 말시온은 선인들은 데미우르게의  율법에  복종하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  역시  악신의  피조물이었다고 주장했다. 말시온은 유대 성경의 본문을 비유적인 것으로 취급하려는 평이하고 통속적인 고안으로써 성경이 제시하는 난점들을 회피하려는 것을 거부하고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  말시온은  유대인들의  하나님과는  대조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할 때까지 숨어 계시던 제2의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인간의 비참한 처지를 보고 그의 사랑의 부분인 순수한 자비에서 저들을 구원하려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인간들은 다른 신인 데미우르게의 피조물이었기 때문에 사실은 이들에 대한 구원의 책임이 그에게는 없었다. 그때까지 인간에게, 심지어 데미우르게에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이 사랑의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스스로를  나타내었다.  그리스도는  데미우르게에게 아무 부채도 지지 않았기 때문에, 데미우르게의 피조물들이 인간으로 태어나듯이 하지 않고, 다만 육체를 가진 듯이 나타나 보여진 것이었다.  (이것이 가현설이다)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내려와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새로운 왕국을 그리고 악의에 

Page 82: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찬 데미우르게의 통치자로부터의 해방을 선포했다. 그러나 데미우르게에게 충성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버림으로써 부지불식간에 데미우르게를 패배시켰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사랑의 하나님이 데미우르게로부터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한 대가였으며, 이로써 데미우르게의 왕국으로부터 인간들이 피신하여 사랑의 하나님 나라로 들어오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또한 전에 죽었던 자들이 살아 있을 당시 데미우르게에게 불복종했기 때문에, 그 신의 법적 표준으로 미루어 볼 때 악한 자들로 추정된 이들을 그들이 거한 지하 세계로부터 건져냈다. 데미우르게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하는 인간들에게 선한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은 데미우르게가 만들어 낸 유대교의 율법적 요구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말시온은 이 복음을 바울이 믿었다고 판단했다. ▣ 이러한 사상을 가진 말시온은 부유한 선주로서  139년경에 로마로 여행했고, 거기에서 교회를 자기 사상대로 이끌어보려 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144년 여름에 교회에서 분립해 나갔다. 따라서 처음에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칭하다가 나중에는  ‘말시온주의자들’이라고 일컬어지게 된 이 공동체는 소아시아, 시리아를 포함하여 광범위하게 전파되었으며. 그들의 열정과 엄격한 금욕 생활로 영향력을 떨쳤다. 6세기까지도 말시온의 교회가 존립했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나머지는 마니교에 합류된 것으로 보인다. ▣ 말시온은 바

Page 83: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울의 갈라디아서를 중심으로 율법과 은혜의 날카로운 구분을 발견했다.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그에게서 그리스도와 율법은 공존할 수 없다. 복음서의 증거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율법이 무효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시려고 계속적으로 율법을 깨뜨리셨다. 특별히 산상수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행해야 할 바가 구약에서 요구하는 원리와 전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가르치신다. 구약은 율법을 따르는 의를 요구하여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으라고 말하지만, 신약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한다. 그리고 전혀 보답할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선을 베풀라고 명령한다. 이런 까닭에 구약과 신약은 전혀 공통점이 없는 것이다. ▣ 이렇게 말시온에게 있어서 바울 서신에 나타난 구약성경과 그 율법에 관한 긍정적인 표현들이 모두 유대교 전통을 준수해야 했던 바울의  ‐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된  ‐ 복음의 변질을 뜻했다. 말시온은 문서비판적인 척도를 가지고 그것을 분리해 내려고 시도했다. 말시온은 율법과 선지자로 구성된 유대의 경전에서, 복음으로 구성된 유일한 경전으로 누가복음과 바울서신  10편을 분리해 냈고, 이것을  ‘유대교적 색채’가 있지만 최초의 신약문서 경전으로 채택했다. 누가복음에서도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만 초점을 맞추었고, 바울 서신에서도 후대에 가필되었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삭제해 버렸다. 이후

Page 84: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로 이것은 구약 성경의 하나님과 그의 율법과 피조물을 버리고, 세계와 동떨어진 사랑의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세상과 육적인 모든 것을 경멸하도록 촉구하는 말시온주의적 그리스도교의 근간이 되었다. 마니(Mannes,  216‐277)가 말시온의 영향을 받고 마니교(Manicheism)의 창설자가 된다.  #머큐리(Mercury)  (1.10.03)  (3.20.05): 로마 신화의 머큐리(Mercury) 신은 올림푸

스  12신 중 하나이다. 전령의 신이며 나그네의 수호신으로 제우스와 마이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그는 제우스의 전령이자 죽은 자를 지하 세계의 왕인 하데스에게 인도하는 안내자이며 부와 행운의 신으로서 상업, 도박, 격투를 비롯한 그 밖의 경기, 심지어는 도둑질에 이르기까지 숙련과 기민성을 요하는 분야를 주관한다  #메다르드(Medard, 545 사망) (3.20.22): 칼빈의 고향 노용시의 주교였다.  #멘나스(Mennas, 536‐52 재위) (4.07.02): 5차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의장 역할을 

맡았다. 

Page 85: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멜키아데스(Melchiades, 311‐4 재위)  (4.07.10): 로마 교회의  32대 주교이다. 나중

에  대제가  된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  306‐337)와  대치  중에  있던  막센티우스(Maxentius)의 박해를 받은 로마의  31대 주교 유세비유스(Eusebius,  309)가 귀양지 시칠리아(Sicilia)에서 죽은 후 로마로 옮겨져 @묻힌 지 오래 되었지만 로마 교회는 아직 주교를 선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얼마 후 대제 콘스탄티누스의 허락을 받아 멜키아데스가 주교로 선출되었다. 멜키아데스는 로마에서 교회 회의(Synod)를 열어, 당시 칼타고 교회에서 복잡하게 얽혀있던 도나티스 이단들을 정죄하였다. 또한 그는  313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로부터 그의 궁전 중의 일부를 받게 되었을 때, 일부를 성당으로 개조하여 사용하였다.    #모니카(Monica)  (3.05.10): 모니카와 어거스틴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

계에 있다. 그녀가 후세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 것은 주로 아들 덕분이었고, 또한 아들은 어머니 모니카가 없었던들 오늘날처럼 존경받는 위대한 성인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모니카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에 아들을 바치기 전까지는 안식을 누리지 못했다. 그녀는 어거스틴을 세례대에 데려간 뒤에야 자신의 임무가 끝났다

Page 86: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고 말했다. 그녀는 이제 지상생활의 어떤 것도 더 이상 원치 않고 기꺼이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 잘못과 세속적인 욕정에 빠져 그토록 자신을 피눈물 나게 하던 아들을 천국에서 편한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그녀가 세상에 어거스틴을 선물했다는 이유로 그녀를 공경한다. 따라서 그녀의 전기를 쓰는 데는 어거스틴에 관한 이야기가 필연적으로 수반된다.    #몬타누스(Montanus,  150‐?)  (4.12.23): ▣ 몬타누스의 가르침을 추종하는 몬타누

스주의(Montanism)는 그노시스파의 갱신운동에 대한 한 반동에서 일어난 것으로 여겨지나 그러면서도 그 자체 역시 혁신 사상에 의하여 특징지어졌다. 몬타누스는 주후  150년경에 프로기아(Phrygia)에서 출생하였기 때문에 그의 교훈은 흔히 프로기아  이단이라고  불리운다.  몬타누스와  두  여인,  프리스카(Prisca)와  막시밀리아(Maximilla)는 자신들을 예언자라고 선언했다. 그들은 요한복음에 기초하여 계시가 마지막 절정에 이르렀다고 주장하였다. 더불어 보혜사의 시대도 왔는데, 그 보혜사가 몬타누스를 통하여 세상의 종말이 바로 앞에 놓여 있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 몬타누스주의에 의하면, 계시의 마지막 시대는 보혜사의 강림과 함께 열렸다. 그러므로 현시대는 영적 은사의 시대요, 특히 예언의 시대이다. 몬타누스와 그의 조력

Page 87: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자들은 새로운 계시를 가져오는 말세의 예언자들로 생각되었다. 대체로 몬타누스주의자들은 정통적이어서 신앙에 필요한 규칙들을 잘 받아들였다. 그들은 세계의 종말이 가까웠음을 강력히 주장했고, 따라서 엄격한 도덕적 생활을 요구하였으니 한번만 결혼할 것과 금식할 것, 또한 엄격한 도덕적 훈련을 할 것 등이었다. 그들은 지나치게 순교를 강조하였으며, 박해를 피하는 것을 절대로 금하였다. 더욱이 그들은 교회의 공직과 직원들을 무시하고 교회에서 특별히 예언하는 능을 찬양하는 경향을 보였다. 말시온(Marcion,  2세기)의 경우는 바울 서신들에 호소하였으나, 몬타누스는 복음서와 요한 서신들을 더 지지하려고 애썼다. ▣ 몬타누스주의는 교회의 입장을 다소 난처하게 만들었다. 몬타누스주의는 그노시스파의 사상을 반대한 정통적 입장을 보였으므로, 높은 평가를 받을만 했다. 세상의 종말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성경적 입장에서 강조한 점, 예언하는 은사에 대한 중요성을 크게 인식한 것, 신자가 세상 악에 물들지 말아야 할 필요성 등을 강조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에 공감하였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교회는 이를 본능적으로 거절하였는데, 특히 그 이유는 그것이 광신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으며, 신약의 계시보다 더 고도의 계시를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 터툴리안(Tertullian,  ca.  155‐220)은 개종한 지  10년 만에 칼타고 교회의 장로가 되었는데 이후로 그는 점차 몬

Page 88: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타누스 운동(Montanist Movement)으로 기울다가 약  207년경에는 그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게 되었다. 비록 그가 훗날 이들과 관계를 끊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특징인 금욕주의적인 성향이 터툴리안의 신학의 후반기에 농후하게 나타나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가 순교를 찬양한 것, 부부 생활의 절제를 주장한 것, 그리고 금식과 기도에 전념할 것을 강조한 사실들이 당시의 영향에서 왔다고 여겨진다.  #미네르바(Minerva)  (1.10.03)  (3.20.05): 올림푸스  12신 중 하나이다. 전쟁과 @여

러 가지 기예(技藝)의 수호신이며 도시의 수호신이기도 하여, 그리스의 여러 주요 도시에 아테나의 신전이 있었다. 즉 그리스 신화에서는 아테나(Athena)인데,  ‘하늘의 여왕’을 뜻하는 수메르어 아나타(anatha)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아테나는 헤파이스토스가 도끼로 제우스의 머리를 쳤더니 완전 무장한 성인의 모습으로 뛰어 나왔다고 하는데, 이 아테나의 탄생 경위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여하튼 공통적인 것은 제우스가 혼자 낳은 딸로서 제우스의 머리에서 무장한 채로 태어난 처녀신이라는 것이다. 처녀신이었으나, 같은 처녀신인 아르테미스와는 달리 남성을 멀리하지 않고 오히려 남성적인 행동을 즐겼으며, 싸움터에 가는 용사들을 응

Page 89: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원했다. 그녀의 성조(聖鳥)는 지혜를 나타내는 올빼미였고, 그녀에게 바쳐진 식물은 올리브였다.    #바로(Varro, B.C. 116‐27)  (1.11.06): 바로는 카이사르 때 로마 최초의 공공도서관

장으로 임명되었다. 참으로 고대 작가들 세계에서 가장 박식하고 다재다능한 사람이 바로였다고 한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근면으로 @다양한 주제의 글을 남겼다. 대표작은  방대한  지식뿐  아니라  많은  오류도  포함된  ‘인간과  신의  고대사’(Antiquities Human and Divine)이다. 그는 이 책에서 로물루스가 로마를 건축한 표준 일자를 기원전  753년  4월  21일로 고정시켰다. 그가 남긴 무수한 저작들 중에서 살아남은 것은 농사에 관한 가치 있는 책 세 권과 라틴어에 관한 스물다섯 권의 저서 중 여섯 권, 그리고 해 아래 거의 모든 주제를 다룬 산문과 운문의 잡문책(Menippean Astires)의 많은 단편들뿐이다. 그는 기원전  36년 여든의 나이에 농사의 이론과 실제를 다룬 기념비적인 저서를 집필했는데, 이것은 로마의 사회적, 경제적 역사를 이해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논문이다. 기타 저서들로는 시(詩)를 삽입한 도덕적 수필집  150권을 비롯하여, ‘라틴어’, ‘문학사’, ‘수사학’, ‘역사’, ‘지리’, ‘법률’, ‘종교’,  ‘음악’,  ‘수학’,  ‘건축’,  ‘농업’,  ‘의학’ 등 모든 분야의 연구를 합쳐서  500권에 이

Page 90: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른다고 한다. 그러나 현존하는 것은 앞에서 말했듯이  ‘라틴어론’ 6권과  ‘농업론’ 3권뿐이다.    #바바라(Barbara,  ?‐235)  (3.20.22): 중세 시대에 가장 인기있던 성인들 중의 한 사

람으로 동정, 순교자였던 바바라가 있다. 유력한 어느 전승에 의하면, 그녀는 디오스쿠루스의 딸로서 뛰어난 미모를 지녔는데, 그의 부친은 수많은 청혼자들의 기를 꺾기 위하여 그녀를 탑 속에 가두었다고 한다.  @어느 날 부친은 그녀가 크리스챤이 된 것을 발견하자, 그녀를 죽이려고 덤벼들었지만, 그녀는 기적적으로 도망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붙잡혔고 이번에는 재판관 앞에 끌려가서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처벌로도 만족하지 못한 그녀의 부친은 그녀를 산으로 끌고가서 끝내 죽이고야 말았다. 그녀의 순교지는 안티오키아, 헬리오폴리스, 니코메디아 그리고 로마 등, 서로 엇갈린다. 바바라는 건축가와 건축업자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바실(Basil,  330‐379)  (1.14.20): ▣ 갑바도기아 지방 가이사랴 출신인 바실은  330

년경에 태어났으며,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있는 유명한 그리스도인 가문 출신이었

Page 91: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다. 그는 이에 걸맞게 철저한 수사학적, 철학적 수양을 쌓았다. 이 교육은 가이사랴에서  시작되어  콘스탄티노플(346‐50년)과  아테네(350‐56년)에  있는  대학에서  계속 이루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만난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ianzus, 330‐389)와 깊은 우정을 키웠다. 바실은 이미 당대의 사람들에게  ‘대제’라고 알려졌다. 친 동생인 닛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 335‐395)와 친구인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와 함께 유명한  3인의  갑바도기아 학파를 이루었으며, 이들은  아리우스(Arius)와의 논쟁 종국에 삼위일체 교리를 확립함으로써 니케아 신조를 승리로 이끌었다. ▣  356년에 가이사랴로 되돌아온 바실은 사회 경력을 포기했다. 그는 세례를 받고 모친과 누이의 영향하에 세바스테의 유스타티우스를 중심으로 한 금욕생활 운동에 동참했다. 바실은 당시 여러 곳에 등장한 수도원 형태들을 경험하기 위하여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팔레스틴, 이집트 지방을 여행하였고, 가이사랴 근처에 독자적인 수도원 공동체를 설립했다. 이곳에서 바실은 수도원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교회 갱신을 위한 개혁 프로그램을 발전시켰다. 수도사들은 은둔주의자들과 방랑하는 급진적 금욕주의자들과는 달리  ‐ 남성과 여성을 분리시켜  ‐ 교회를 위하여 모범이 되도록, 그리스도인의 공동생활을 실천해야 한다는 입장을 지켰다. 이로써 바실은 수도원을 교회로 통합시키기 위한 중요한 토대를 마련해 놓았다. 그러고 

Page 92: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이것은 동시에 수도원에서 지속적인 정신 개혁의 원천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364년에 바실은 다시 가이사랴 중심부로 돌아왔는데 같은 해에 억지로 떠밀려서 장로로 추대되었고,  370년에는 가이사랴와 갑바도기아 전역을 감독하는 주교가 되었다. 이후로 바실은 훌륭한 설교, 재산을 처분하여 설립한 사회 봉사기관들에서의 활동, 사회정의를 위한 투쟁, 그리고 성직제도의 개혁을 통해서, 살아 있는 교회를 창출해 냈다. ▣ 바실은 평생 가난하게 살았고 육체도 심히 병약했다. 평생  @한 벌의 옷만으로 만족했으며, 아주 검소한 식사를 했고, 힘써 사치한 생활을 멀리하였다. 그는 가이사랴 접경에 사회에서 버림받은 자들을 위한 대규모 보호시설을 지었는데 주로 문둥병자들을 수용했으며, 그들을 형제처럼 여겨 직접 보살피면서 그들과 입맞춤 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아리우스파를 지지하는 동방 황제 발렌스(Valens, 364‐78 재위)가 관리를 보내어 바실을 협박하여 재산 몰수와 추방과 사형을 선고했을 때 그가 보여준 다음과 같은 태도는 유명하다.  “좀 더 심한 것은 없오이까? 이런 것들은 너무 시시합니다. 나는 아무 재산이 없으니 몰수당할 것이 무엇이며, 세상 온 지역을 다 소유하신 하나님의 나그네이니 추방당한들 무슨 상관이며, 순교당한들 내게는 과분한 유익일 뿐이외다.” 바실은 숨을 거두면서 이렇게 기도했다.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구속

Page 93: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하셨나이다.” ▣ 신학사에서 바실의 또 하나의 중요성은 무엇보다도 아리안주의자들의  ‘유사성 이론’의 공격에 대응하여  ‘본질의 동일성’으로 확신에 찬  ‘니케아 신조’의 변호에 있다고 하겠다. 나중에 바실은 성령도 하나님 편에 속해 있다고 주장하여, 그의 금욕주의적 스승인 유스타티우스와 결별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 속에 있는 신적인 존재(우시아)라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그가  50세의 나이인  379년  1월  1일에 사망하게 되어, 이후  381년에 열린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신앙고백이 정립되는 것을 직접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당시 회의의 결실은 근본적으로는 바실의 신학적 업적이다. 이렇게 바실은 평생을 신학자, 설교자, 교회 지도자로 활약하면서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생전에 수도원 생활을 하면서 제정한 규칙들은 아직도 헬라 지역 수도원들의 생활 규칙이 되고 있다. 저술로는  ‘그리스도의 신성론’,  ‘성령에 관하여’,  ‘시편을 위한 설교와 주석’,  ‘유노미움에 대한 반박’ 등과 더불어 다양한 주제로 된 설교집과 서간집이 있다. 특별히 그의 책  ‘성령에 관하여’(On  the Holy  Spirit)는 아타나시우스의  ‘세라피온에게 보내는 서신’(Letters  to Serapion)에서 그가 중단한 시점에서 시작하여, 삼위일체 논쟁에 큰 도약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Page 94: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바울  3세(Paul Ⅲ,  1534‐49 재위)  (4.7.24)  (4.7.27): 로마 교회의  220대 교황으로, 이전에 두 차례나 강력한 교황 후보로 부상하였다가 마침내 세 번째 도전에서 성공했다. 수장령을 선포하고 떨어져 나간 영국 헨리  8세(Henry Ⅷ)를  1538년에 파문하였고, 기타 카톨릭 신앙을 벗어났거나 공격하는 사람들을 찾아내게 했으며, 금서 목록을 강화시켜 금서를 판매하면 벌을 가하였다. 트렌트(Trent)에서 공의회(1545‐63)를 열어 면죄부의 남용을 규제하는 등 중요한 의제들을 다루었다. 하지만 그는 공의회를 마치지 못한 채  1549년  11월 서거하였다. 그의 서거 후, 율리우스  3세(Julius Ⅲ,  1550‐55 재위)가  221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칼빈은  1551년  1월  24일 에드워드  6세에게  ‘공동서신 주석’을 헌정하면서 이들에 의해 지속된 트렌트 회의를 혹평한다. “최근 트렌트 종교회의에 모인 어중이떠중이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는 자들입니까? 그들은 일종의 거짓 꼭두각시들에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회의에 교회적인 거룩한 총회라는 명칭을 붙였는데  – 불과하면서도, 그 회의가 교황 한 사람의 즐거움을 위해 나팔을 불고 북을 울렸다는 것은, 거기 모인 자들이 그의 즐거움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는 결론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교황은 날마다 자기를 치켜세우는 자들의 소리에 도취되고 있지 않습니까? … 저 불신앙의 괴수가 그처럼 악랄하게 우리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들의 구원을 짓밟을 때 우리는 침묵함

Page 95: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으로써 이 거룩한 뜻을 저버려야 하겠습니까? 도저히 그렇게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가 겁을 먹음으로 우리의 건전한 교리를 그렇게 부당하고 악랄한 흑암의 속박 가운데 계속 빛을 잃고 신음하게 하느니 차라리 우리가 할 수만 있다면 백번이라도 죽어서 이 교리를 지켜야 할 것입니다. …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주제넘게 채택한  7 성례를 단호히 거부합니다. 우리는 그들이 하나의 제사로 생각하는 미사가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를 어처구니없이 부인하는 것임을 밝혀두는 바입니다.”  #발렌티니아누스  2세(Valentinianus  II, 375‐92 재위)  (3.20.32)  (4.4.13)  (4.11.15): 부

친 발렌티니아누스  1세(Valentinianus  I,  364‐75 재위)가 만족 사절들과 회담하던 중에 노여움이 폭발하여 뇌혈관이 파열되어 급사하게 되자, 이복 형인  17세의 그라티아누스(Gratianus,  375‐83, 재위)가 서방 황제로 추대되었는데, 이때 일부 군대의 추대에 의하여 그 역시 공동 황제가 되었고, 아프리카 및 서부 일리리쿰 지역이 할당되었다. 하지만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즉위 당시 나이가  4세에 불과했으므로, 모친 유스티나가 섭정하였다.  8년 후, 막시무스(Maximus,  383‐88 재위)의 반란으로 그라티아누스가 리용에서 죽게 되었을 때, 혼란의 와중에 당시  12세의 어린 황제였던 그는 측근이었던 아르가보스테스에 의하여 목이 졸려 죽는 죽임을 당하게 된

Page 96: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다. 아르가보스테스는 꼭두각시 황제로 유게니우스(Eugenius,  392‐94 재위)를 옹립하였지만, 동방 황제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379‐95 재위)에 의하여 진압되었다. (서방 로마 황제 발렌티아누스  1세의 동생으로써 동방 로마 황제로서 다스렸던 발렌스<Valens,  364‐78 재위>가 하드리아노플에서 서고트족과 일전을 벌이다 전사하게 되자, 당시 서방 황제였던 그라티아누스의 천거에 따라 동방 황제로 즉위한 사람이 테오도시우스 황제였다.)  #버나드(Bernard  of Clairvaux,  1090‐1153)  (2.01.04): 버나드는 프랑스 디종 근처 

퐁텐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23살에 당시 신설된 @엄격한 시토회의 명맥을 유일하게 이어가던 곳인 시스턴 수도회(Cistercian  Order)에 들어갔다. 이후  3년 뒤에 버나드는 클레르보에 신설된 수도원의 원장에 임명되게 되며, 그의 사역 하에서 수도원은 급속히 성장하여 그의 생시에 무려  70개의 새로운 시토회 대수도원들을 설립하게 된다. ▣ 버나드는 피터 아베랄드(Peter Abelard, 1079‐1142)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속죄(Expiation; 다른 사람에게 범죄했거나 해를 끼친 것에 대해 어떤 행위로나 제물을 바침으로 죄를 면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속죄론<Atonement>, 화목제물, 제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의 근거로 보지 아니하고,  ‘단지 인간의 마음

Page 97: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에 회개를 일으키는 수단이라고 주장’한  ‘도덕적 감화론’에 반대하여, 적극적으로 나서서 수아송 회의(Synod  of  Soissons,  1121년)에서 단죄받게 했으며, 상스 회의(Synod of Sens, 1140)에서는  ‘종신 침묵형’을 이끌어냈다. 버나드가 볼 때 아베랄드의 삼위일체, 속죄, 자유의지, 원죄에 대한 가르침들은 파괴적인 것이었다. 특히 그가 어거스틴의 원죄론을 부정하고, 각 사람은 선행으로 하나님의 형벌을 피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 버나드는  1145년에 자신의 지도를 받던 수도사 유게니우스  3세(Eugenius Ⅲ,  1145‐53 재위)가 교황이 되자 권위는 더욱 높아졌다. 이후  1148년부터  2년간 교황의 요청에 따라 제2차 십자군 원정을 위한 기금 모금을 위하여 유럽을 순회하면서 설교하게 되지만, 이 사역은 참담한 실패로 끝나게 되어 그의 위상은 타격을 입는다. 당시 버나드의 명성은  ‘마지막 교부’라고 일컬어질 정도였다. 그는 중세 초의 수도원 신학 전승을 마지막으로 대표한 거목이었다.  ‘감미로움의 박사’라는 칭호를 얻을 정도로 탁월한 저술가였으며, 규칙적으로 행한 그의 설교는 지금도 많이 현존한다. 또한 그는 상당한 수의 편지를 남겼는데, 참으로 많은 사람들과의 서신 교환을 통하여 개인적이고 신앙적이며, 공적이고 정치적인 사상들을 드러내 보였다. 어떤 서신들은 사실상 세례와 주교직에 대한, 그리고 아베랄드의 오류를 비판하기 위한 논문들이다. ▣ 버나드는 여러 편의 

Page 98: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논문을 썼는데, 그 중에 세 편은 수도원주의에 관한 것으로,  ‘변명’(Apology)은 끌루니회에 대해 시토회를 옹호한 내용이다.  ‘계율과 시대’(Precept and Dispensation)는 베테딕트 수도회 규칙에 대한 정확한 해석을 다룬 내용이며,  ‘새 기사단의 예찬론’(In Praise of  the New Knighthood)은 신설 수도회인 성전 기사단을 다룬 내용이다. 그밖에도 아일랜드 교회로 하여금 로마의 전례를 따르게 한 아르마의 대주교 말라키(Malachy,  1094‐1148)의 전기를 쓰기도 했다. ▣ 버나드는 활동 초기에 은혜와 자유에 관한 탁월한 논문을 썼다. 이 논문에서 그는 은혜와 인간 의지를 어거스틴의 노선에 맞추어 설명한다. 인간의 선행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인 동시에 인간이 선행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자유의지의 역사라고 한다. 전자의 경우 인간에게 자랑할 여지를 남기지 않으며, 후자의 경우 공로와 상급의 근거를 제공한다. 버나드는 말년에 다가서면서 과거 자신의 제자였던 교황 유게니우스 3세를 위하여  ‘숙고’(Consideration)를 썼는데, 교황에게 바쁜 업무 속에서도 숙고 혹은 묵상을 위한 시간을 낼 것을 권고한다. 그는 교황을  ‘하나의 민족이 아닌 모든 민족을 관장하는 그리스도의 유일한 대리인’으로서 충분한 권력을 지녔다고 보지만, 교황의 독재에 대해서도 똑같은 비중으로 반대하였다. ▣ 버나드는 영적 저자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저서  ‘하나님 사랑하기’는 중세의  ‘신비주의’ 관련 

Page 99: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저서들 중에서 가장 탁월한 책으로 평가받으며, 베테딕트의 수도회칙에 기술된 겸손의 열 두 단계에 근거하여  ‘겸손의 길과 교만의 단계’를 저술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것 위에 그의 가장 뛰어난 저서는 지금도 현존하는  86편으로 구성된  ‘아가서 설교’(On Song of Songs)인데, 은유적 해석과 시적 표현으로 하나님과의 신비적 사랑을 묘사한다.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묘사하는 그의 설교는  “나에게 입맞춰 주세요, 숨막힐 듯한 임의 입술로”라는 말로 시작한다.  “주님은 우리가 언제나 들어갈 수 있는 침실입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비밀스런 성소이며, 몸이 필요치 않고, 양심의 쏘는 것이 없으며,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육체적 형상들의 침입이 없는 곳입니다. 다만  ‘왕은 나를 그의 침실로 안내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고 하는 사랑 표현으로 이어진다. 그는 위‐디오니시우스의 신비사상이 가르치는 세 가지 신비의 길을 따른다. 버나드는 안셀름(Anselm,  1033‐1109)이  “나는 알기 위해서 믿는다”고  한  신학적  주지주의와는  달리,  “나는  체험하기  위하여  믿는다”(Credo  ut Experiar)고 하였다. 루터(Martin Luter,  1483‐1546)는 이러한 버나드의 설교를 가리켜,  “그는 심지어 어거스틴보다 탁월하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를 탁월하게 설교하였기 때문이다”라고 극찬하였다.  

Page 100: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버질(Vergil,  B.C.  70‐19)  (1.05.05): 호라즈(Horaz), 프로페르즈(Properz) 등과 더불어 로마 당대에 유명한 시인이었다. 아우구스투스(Augustus, B.C.  27‐A.D.  14) 황제의 상담역이었던 가이우스 클리니우스 메세나스(Gaius Clinius Maecenas: B.C. 70‐A.D.  8)는 당시 이 세 사람이 작품 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예술 애호 차원에서 대가  없이  적극적으로  후원해  주었다.  버질은  만년을  필생의  대작  에니어스(Aeneas)에 몰두했는데, 이것은 트로이 멸망 후 영웅 에니어스가  7년의 유랑 후에 로마시를  건설한다는  내용으로  12권으로  이루어졌다.  칼빈이  제네바  아카데미를 설립했을 때, 버질의 작품들을 교과과정으로 채택하였다.  #베네딕트(Benedict, 480‐550)  (4.13.14): 누르시아 베네딕트는 서유럽 최고의 수도

회를 설립했다. 따라서 베네틱트회는 넓은 뜻으로는  ‘베네딕트의 수도 계율’에 따라 생활하는 모든 수사, 수녀의 수도원 혹은 수족(Congregatio Monastica; 자주성을 가진 각 수도원 연합체의 명칭)을 포함한다. 좁은 뜻으로는 별도의 파로 독립한 카마돌회, 시토회를 제외한 수도원(16개 수족을 헤아린다)을 가리킨다. 처음에 베네딕트는  529년 로마와 나폴리 중간에 있는 몬테카시노에 수도원을 세우고 계율을 제정하여 서유럽 수도제의 기반을 닦았다. 수도원의 계율은 서문과  73장으로 되어 

Page 101: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있으며, 성무일과(기도)의 규정, 수도원 내외의 생활과 행동의 규정, 수도자로서의 마음가짐 등이 빠짐없이 구체적으로 조문화되어 있다. 그러나 계율의 요체는 공동생활의 권장과 복종하는 정신으로 집약되어 있다. 때마침 전환기의 유동적 사회 상황 가운데 놓여 있어서 금욕자의 무리를 수도원 안에 정주시키고 조직화해서 중세 카톨릭 교회의 골격을 지탱할 집단을 형성한 것은 매우 의의가 깊었다. 자급자족 체제와 연관된 노동윤리의 육성, 장원경제와 연계된 사회경제사에 끼친 영향, 고대문화의 중개역할 등 수도원이 감당한 역할은 다채로웠다. ▣ 그러나 베네딕트회가 그 기반을 현실사회 속에 확보함에 따라서 제도화에 수반되는 부작용이 생겼다. 8‐9세기의 아니안의 베네딕트에 의한 개혁이 있었고, 11세기에 들어와서는 클루니(Cluny) 수도원의 개혁운동이 있었다. 클루니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베네딕트 수도 규칙을 엄격히 준수하면서 금욕적인 생활에 힘썼다. 엄격한 자기 관리로 주변 수도원들의 개혁이 성공하게 되자, 클루니 수도원은 당시 음모와 권력의 투쟁장이었던 교황 제도에까지 도전하게 된다. 이 수도원에서  152대 교황 레오  9세(Leo Ⅸ, 1049‐54)가 배출되었으며, 157대 교황 그레고리  7세(Gregory Ⅶ, 1073‐85 재위)가 나왔고, 클루니 수도원은 이들 교황의 개혁을 적극 후원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클루니 수도원도 점차적으로 많은 재산을 소유하게 되어, 토지를 확보하고 화

Page 102: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려한 건물을 지으며, 수도사들이 사치와 향락에 빠져듦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일반 대중으로부터 비판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자체적으로  @쌓아 올린 부 때문에 마침내 몰락의 길로 빠져버린 것이다. 개혁을 주도하던 세력이 어느덧 개혁이 대상이 되고 말았다. ▣ 이러한 어두운 상황 속에서 이제  12세기로 들어와서 로버트(Robert)를 중심으로 한  20명의 친구 수도사들이 뭉쳐서 형성한 시스턴 수도회(Cistercian  Order)에 의해서 새로운 개혁 운동이 전개되게 된다. 수도사들은 다시금 베테딕트 수도 규칙을 엄격히 따르면서 경건생활에 힘을 쏟았다. 처음에는 인기가 없었지만, 점차 힘을 얻어 세력을 내기 시작하여,  4개의 수도원으로 분립하면서 서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이러한 때에 그야말로 이후 누르치아의 베네딕트와 동격의 인물로 평가받게 되는 약관  23세의 나이인 버나드(Bernard of Clairvaux, 1090‐1153)가  30여명의 친지를 이끌고 시스턴 수도회에 가입함으로써 차후 놀라운 개혁의 시대를 시작하게 된다. 왜소한 체구에 수줍은 성격과 시인의 가슴을 지닌 버나드가 군사와 돈과 지위도 없는 상태에서, 일거에 수도원들을 개혁하고 이끌어 1세기 전의 클루니 수도회가 누렸던 명성을 되찾게 했는가 하면, 그의 기간 동안 통치했던  4명의 교황들을 거의 다스리기까지(?) 했다는 것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의 설교는  ‘감미로움의 박사’(Doctor  of Melliflous)라는 별

Page 103: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명을 얻었으며, 속세를 떠난 수도사로서 속세를 지배한 교황에게 끼친 영향력은 ‘교황 제작자’(The Pope Maker)라는 별명을 얻은 데서도 너무나 잘 드러난다.    #베렌가리우스(Berengarius)  (4.17.12): 베렌가리우스는  1059년에 로마에서  155대 

교황 니콜라스  2세(Nicoholas Ⅱ,  1059‐61 재위)의 강요를 견디지 못하여 이전에 자신이 가르친 내용을 뒤집어  ‘에고 베렌가리우스’(Ego Berengarius)에서 극단적인 단어들을 사용하여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우리 주님의 진짜 몸과 피는 … 분별할 수 있으며, 지극히 신성할 뿐아니라 실제로 사제들의 손으로 넘겨지며 쪼개지고 신자의 치아로 분쇄되기도 한다.’  #보니파스  1세(Boniface  I, 418‐22 재위)  (2.03.14)  (2.08.12)  (3.18.05)  (4.05.08): 로마 

교회의  42대 주교이다. 전임 주교 조시무스(Zosimus)의 장례식이 끝난 후 대부제였던 율라리우스(Eulalius)가 라테란 대성당에서 스스로 로마 주교로 취임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러자 로마 주교단은 다음날 테오도라 성당에서 연로한 보니파스를 주교로 선출한다. 두 사람의 싸움에 실증난 황제 호노리우스(Honorius,  395‐423 재위)는 두 사람 다 로마에서 떠나라는 명령을 내리는데, 엎치락 뒤치락하는 우여곡

Page 104: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절 끝에 보니파스가 합법적인 주교로 자리를 차지했다.    #보니파스  3세(Boniface Ⅲ,  607.2.19‐11.12)  (4.07.17): 로마 교회의  66대 주교인데, 

황제 포카스(Phocas,  602‐10 재위)에 의해 최초로  “로마 주교는 교황(Pope)이다”라고 하는 직위 공포를 받았다.  (하지만 보다 본격적인 교황 칭호는  91대 교황인 자카리아스 때부터 시작된다.) 보니파스는 앞서 콘스탄티노플에 파견되어 그레고리 1세 주교의 사절의 직분으로 일했다. 당시 그는 황제 포카스로부터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us,  527‐65 재위) 황제가 선포한 칙령 노벨라(Novella)를 받아내어 로마 주교가 세상 모든 교회의 머리임을 인정하게 하는 외교적 수완을 발휘했다. 이 칙령의 발표로 말미암아 당시 스스로  ‘세계 총주교’라는 호칭을 사용한 콘스탄티노플의 주교 요한  4세와 그의 후계자 키리악은 치명타를 입었다. 그의 재위는  9달도 채 못되었지만, 주교가 사망한 후  3일이 되기 전에 후계자 문제를 거론하는 사람에게는 파문을 내리라는 특이한 칙령을 반포한 일화가 있다.    #브루투스(Brutus Albinus, B.C. 85‐42)  (4.2.3): 젊어서부터 카이사르 밑에서 일하

고, 갈리아전쟁에서 활약하였다. 특히 B.C.  56년 베네티족과의 해전,  52년 베르킨게

Page 105: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토릭스와의 결전에서 공을 세웠다. 내란 중  49년에는 마실리아에서 카이사르 함대를 지휘하여 공을 세우고,  48년 갈리아 트란살피나의 장관으로 임명되어, 반란을 진압하였다(46년). 삼두정치의 한 축이었던 카시우스와 함께 카이사르를 암살하였고, 이후 갈리아 키살피나로 부임하여 이 지방을 요구한 안토니우스와 맞섰다. 그 때문에  12월 무티나에서 안토니우스에게 포위되었지만, 이듬해 히르티우스와 옥타비아누스에 의하여 구출되어 위기를 벗어났다. 이어서 원로원으로부터 군대 지휘권을 받았으나, 서방 진군에서 군대를 많이 잃었고, 마침내 부하에게 배반당하여 갈리아인에게 체포되고 안토니우스의 명으로 처형되었다.  (또는 스스로 목숨을 끊다고 한다) 브루투스는 철학을 사랑했고, 평생 동안 외삼촌인 동시에 장인이기도 하였던 소 카토(Coto, 95‐46)를 존경하였다.  #비너스(Venus)  (1.10.03)  (3.20.05):  ‘비너스’(아프로디테)는  ‘́거품에서 태어났다’라

는 뜻을 가진 성애와 미의 여신으로 로마 신화의 베누스(Venus)에 해당하며 올림푸스  12신 중 하나이다. 아프로디테는 처음에는 우주 전체를 지배하는 무서운 힘으로 생각되었다. 그녀는 여성의 생식력을 표현하는 무서운 신이며 그러므로 또 자연의 번식력을 표현하는 다산의 여신이기도 하다. 그녀가 총애한 새는 백조와 

Page 106: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비둘기이고, 그녀에게 바쳐지는 식물은 장미와 도금양이다.  #비투스(Vitus)  (4.7.1): 칼빈은 이 사람이 빈센티우스(Vincentius)와 함께 로마 주

교 율리우스를 대신하여 니케아 회의에 참석했다고 한다. 그러나 연대기적으로 볼 때, 니케아 회의 당시 로마 주교는  33대 주교 실베스터  1세(Sylvester  1,  314‐35 재위)였다.  #빅토르(Victor,  189‐98 재위)  (4.7.7): 최초로 라틴어를 사용하는 로마 교회의  14

대 주교이었다.  190년 @어느 날 빅토르는  ‘부활절’을 지킴에 있어서 교회들이 날짜를 서로 일치시킬 것을 소아시아에 요구하게 된다. 당시 소아시아 교회는 유대력 니산월  14일에 부활절을 지켰던 반면, 로마 교회는 알렉산드리아 교회와 함께 유대교의 유월절 직후의 일요일에 부활절을 지켰다. 이러한 차이가 어떻게 해서 발생하였는지는 알려진 바 없으나, 로마의 관습이 베드로와 바울의 가르침을 물려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빅토르의 입장에서는, 소아시아가 지키는 부활절 날짜가 영 신경에 거슬리는 것이었다. 물론 반대로 소아시아 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로마 교회의 요구는 대단히 전제적이며 교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빅토르는 로마 교회와 

Page 107: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다른 날짜에 부활절을 지키는 사람은 카톨릭 교인이 아니라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빅토르는 자신을 반대하는 에베소 주교 폴리크라테스(Polycrates)의 파문을 시도하였고, 이러한 사태에 깜짝 놀란 리용의 주교 이레네우스(Irenaus of Lyons, 130‐202)는  즉각  개입하여  로마로  가서  빅토르를  만났다.  이레네우스는  ‘콰르토데치마’(Quartodecima) 준수는 이름 있는 여러 교회들이 초창기부터 지켜 온 관습이므로 폐지할 수 없다고 빅토르를 설득하였다. 지금 지금 칼빈은 이 사건을 염두에 두고  “중요하지 않은 문제로 위험한 논쟁을 일으켜 교회를 소란하게 했다”고 한 것이다. 빅토르의 이와 같은 태도는 처음으로 로마의 영향을 타지역에 미치려고 한 시도로 평가되고 있다. 빅토르의 시대에 일어난 다른 중요한 사건으로  ‘단일신론 논쟁’(Monarchian  controversy)이 있었다. 로마 주교는 비잔티움의 양자론자(養子論者,  adoptiontst) 테오도투스(Theodotus)를 단죄하였다. 하지만 이 논쟁은 그의 후계자인  15대 로마 주교 제피리누스(Zephyrinus,  198‐217 재위) 시대에 더욱 달아올랐다.    #빈센티우스(Vincentius)  (4.7.1): 비투스(Vitus)와 함께 로마 주교 율리우스를 대

신하여 니케아 회의에 참석한 사람이다. 그러나 연대기적으로 볼 때, 니케아 회의 

Page 108: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당시는 실베스터  1세(Sylvester 1, 314‐35 재위)가 로마 교회의  33대 주교로 있었다.  #사벨리우스(Sabellius,  3세기)  (1.13.04): ▣ 북아프리카 리디아 출신인 사벨리우

스는  217년경에 로마에서 서머나의 노에투스(Noetus of Smyrna) 학파의 지도를 받았고, 그곳에서 한 종파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에게 사벨리우스의 이름을 따라 사벨리우스주의라는 명칭을 붙였다. 그런데 이  ‘사벨리우스주의’는 양태론적, 군주론적 교설을 나타내는 말로서, 그 근거를 아버지, 아들(성령)이 동등한 위격의 표현 방식이라는 관점에 두고 있다(하나님을 표현하는 말이  ‘아들  – 아버지’이다). 사벨리우스의 저서가 몇 권 밖에 현재 남아 있지 않으므로 그의 사상이 어떠했는가를 결정짓는 것은 쉽지가 않다. ▣ 사벨리우스는 신적 본체의 단일성과 그 현현의 다양성을 구별했다. 그는 그러한 현현을 연극처럼 한 부분이 다른 부분으로 옮겨가는 것과 같다고 표현하였다. 따라서 사벨리우스가 이따금 신적 삼위에 대해 말할지라도 이때 사용한  ‘위’라는 말은 연극의 역할이나 혹은 현현의 한 양식을 가리키는 고유한 의미의  ‘위’를 말한다. 그에 의하면 성부, 성자, 성령이란 명칭은 단순히 한 신적 본체가 자신을 나타낼 때의 세 가지 현상을 @가리키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창조와 율법 수여에서는 성부로, 성육신에서

Page 109: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는 성자로, 중생과 성화에서는 성령으로 각각 나타내신다는 것이다. 결국 이들은 258년 로마 교회 회의에서 정죄되었다. 앞서 비잔티움의 테오도투스(Theodotus  of Byzantium)와  사모사타의  바울(Paul  of  Samosata)은  ‘역동적  단일신론’(Dynamic Monarchianism)을 주장함으로써 이단으로 정죄되었다면, 사벨리우스는 이것을 약간  변형시킨  이론인  ‘양태론적  단일신론’(Modalistic  Monarchianism)으로  이단이 되었던 것이다. ▣ 터툴리안(Tertullian,  ca.  155‐220)은 사벨리우스파의 기원을 당시 거의 알려지지 아니한 프락세아스(Praxeas)라는 사람에게서 찾았다. 또한 이레네우스(Irenaeus,  130‐202)와 더불어 반그노시스파 교부인 히폴리투스(Hippolytus,  170‐235)는 서머나 사람 노에투스의 사상에서 사벨리우스의 사상의 기원을 찾는다. 이렇게 볼 때 프락세아스와 노에투스가 양태론적 단일신론을 유력하게 선포하였다는 사실만은 분명한 것 같다. 소아시아 교회 지도자였던 프락세아스는 하나님의 위격 구별을 전적으로 반대하였다. 따라서 터툴리안은  “그는 보혜사를 쫓아버리고 성부를 십자가에 못박았다”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프락세아스는 성부가 고난 받으셨다는 주장은 피한 듯하나, 서머나 교회 사람이었던 노에투스는 이 점을 주장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히폴리투스의 말을 인용하면, “그리스도는 자신이 성부이며, 이 성부 자신이 출생되어, 고난 받으시고 죽으셨다고 노에투스가 말했다”고 하였

Page 110: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다. 또 노에투스는 아버지가 그의 존재의 형태를 변형하시어 문자 그대로 자기의 아들이 되셨다고 대담하게 주장하였다. 그는 주장하기를,  “하나님이 아직 출생되지 않았을 때는 성부로 불리어졌다. 그러나 일단 즐거이 출생에 종속되자, 그는 출생하여 성자가 되었는데, 이 성자는 자기 자신으로 된 것이지, 다른 이로 된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샤를마뉴 대제(Charlemagne, Carolus Magnus,  768‐814 재위)  (1.11.14)  (4.7.17): 

카를  대제  또는  카롤루스  대제라고도  한다.  샤를(Charles)은  이름이고,  마뉴(magne)는 존칭어이다. 샤를을 독일어로 읽으면 카를이고, 그에게  ‘대제’라는 영광스러운 명칭을 붙이는 것은, 그에 의한 프랑크 왕국이 오늘날의 프랑스와 독일의 시조가 되었기 때문이다.  (라틴어로는  ‘카롤루스’인데, 이러한 그의 이름은 영국식으로는 챨스이며, 에스파냐<스페인>어로는 카를로스인데 모두 같은 이름이다.) 샤를은 부왕 페핀  3세(Pepin Ⅲ,  747‐68 재위)가 죽은 뒤 동생 카를로만(Carloman)과 왕국을 공동 통치하였으나,  771년에는 동생 역시 죽게 되어 단일 통치자가 되었다. 772년부터  804년까지 몇 차례의 원정을 감행하여 작센 족의 정복, 바이에른과 케른텐 병합, 아바르 족, 벤드 족 정복의 업적을 이루고, 서유럽의 정치적 통일을 달

Page 111: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성하였다. ▣ 그는  800년에 로마 교회의  96대 교황 레오  3세(Leo Ⅲ,  795‐816 재위)로부터 황제로 인정받게 되었다. 교황은 이렇게 해서 황제를 지명할 권리를 행사했고, 따라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지위를 최상에 올려놓았다. 무엇이 교황에게 이와 같은 권위를 행사하게 했을까?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정당한 권세였던 것이 아니라, 당시까지 교회사 속에서 희대의 사기극으로 유명했던  ‘콘스탄티누스의 헌서’에 근거한 것이었다. 이 완전히 날조된 문서는  15세기까지 무려  600년 이상 교황청의 온갖 권력 찬탈욕을 정당화시켜주는 배경이 되었다. 그러면 샤를마뉴의 입장에는 무엇 때문에 교황의 윤허가 필요했을까?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서 로마 제국에는 진정한 황제는 없었다. 복고주의에 사로잡힌 사람들 입장에서 볼 때 여자인 이레네가 황제라는 사실은 기분이 영 그랬다. 이러한 분위기와 더불어, 또한 실제로 샤를마뉴와 이레네 사이에는 혼인 문제까지 오가고 있었다. 비록 잠깐 후면 이레네가 모반을 당하여 황제로서의 권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었지만(802년), 천하를 호령하는 제왕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인간의 한계에 갇힌 샤를마뉴는, 이제 그녀만 아내로 얻는다면, 그야말로 천하를 한 손에 쥐게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급작스러운 이레네의 몰락으로, 정중하게 혼인 사절단까지 파송했던 샤를마뉴의 꿈은 방향을 틀어야만 했다. ▣ 여하튼 신성 로마제국 초대 

Page 112: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황제가 된 샤를마뉴는 프랑스에 있는 수도원과 성당마다 그 안에 학교를 세웠다. 비록 이 학교들 안에서 신학적인 혁신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이를 통하여 중세의 예전과 신학을 지키며 전달하는 일이 진행되었다. 여기에서 이후 스콜라 학파를 형성하게 될 학자들이 배출되기 시작되었다. 샤를은 로마 교황권과 손잡고 그리스도교의 수호자 역할을 자처하면서 서유럽의 종교적인 통일을 꾀하게 된다. @샤를마뉴는 프랑크 제국 전체가 로마식 예전을 따르도록 명령하였고, 성직 매매를 금지시켰으며, 일요일을 공휴일로 지정하는 법률을 제정하였고, 성직자들의 질적 향상을 위하여 교육을 실시했다.  @샤를마뉴 대제는 카롤링거(라틴어 카롤루스에서 유래한 이름) 왕조 궁중 신학자들에게 지시를 내려  4권으로 된 책  ‘리브리 카로리니’(Libri Carolini,  787년)를 저술하게 했다. 이것의 중심 주제는 당시 논의되던 성상 파괴 논쟁에 대한 것이다. 이 책이  1549년에 틸레(Jean du Tillet)에 의하여 출판되었는데, 칼빈은 이듬해  1550년에 출판한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이를 인용하였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이  4권의 책을 다 인용하여, 여러 가지 관련된 내용들을 전개한다) ▣ 샤를마뉴에 얽힌 재미 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8세기 말, 샤를마뉴 대제는 이슬람교에 맞서는 가장 강력한 왕이었다. 그는  7년에 걸친 전쟁을 벌여 스페인 외곽으로 사라센인들을 몰아내는 데 전력을 다했고, 마침내 사라센의 세력

Page 113: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은 사라고스 한 군데만 제외하곤 모두 철수했다. 사라고스의 마르실 왕은 거짓 항복을 제의했다. 이때 샤를마뉴 대제가 극진히 아꼈던 기사인 롤랑은 항복을 받아들여선 안된다고 주장했다. 롤랑은 대제가 가장 신뢰하는  12명의 성기사 가운데 가장 용맹스러운 기사였다.  (@어느 날 천사가 롤랑에게 나타나 명검 한 자루를 건네주며 샤를마뉴에게 바치라고 지시했다. 롤랑은 즉시 이 검을 샤를마뉴에게 전달했다. 대제는 검을 살펴본 후 롤랑에게 하사했다. 다른 전설에 따르면 롤랑이 유토문다스라는 거인을 죽이고 빼앗은 검을 샤를마뉴가 하사한 것이라고도 한다.) 롤랑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샤를마뉴 대제는 사라센의 항복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롤랑은 사라센에 보낼 사절로 자신의 양부인 가르농을 추천했다. 하지만 위험한 임무가 내키지 않았던 가르농은 롤랑에게 앙심을 품고 사라센과 내통했다. 샤를마뉴 대제는  12 성기사에게  3만명의 병사를 맡겨 후위를 담당하게 한 후 프랑스로 퇴각했다. 가르농은 마르실 왕에게 본대의 퇴각 사실을 알렸고, 기회를 놓칠새라  10만명의 사라센 병사는 피렌체 산맥에서 롤랑의 부대를 습격했다. 롤랑의 친구이자 라이벌인 올리비에는, 위기를 벗어나기 위하여 대제가 남겨준 뿔피리를 불자고 주장했지만 롤랑은 자존심 때문에 거절했다. 12 성기사와  3만명의 후위담당부대는 사라센의 병사들에게 결사적으로 항전했지만 한 명씩 쓰러져갔다. 병사가  60여명밖

Page 114: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에 남지 않게 되자 롤랑은 뿔피리를 불지 않은 걸 후회했다. 본대와의 거리가 멀어져 피리를 불어도 소용없다고 생각한 올리비에는  “이제와 피리를 부는 것은 비겁하니 그냥 싸우자”고 했다. 최후까지 저항하다 힘이 다한 롤랑은, 명검  ‘듀란달’이 적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파괴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듀란달을 있는 힘껏 바위에 내리쳤지만, 오히려 바위가 갈라졌다. 롤랑은 끝내 듀란달을 파괴하지 못한 채 피투성이가 되어 숨을 거뒀다.    #세네카(Seneca, B.C.4‐A.D.65)  (1.11.2): 에스파냐 코르도바에서 태어났다. 로마에

서 자라면서 변론술과 철학을 배운 그는 웅변가로 성공하여 재무관이 되었으나,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황후 메사리나의 미움을 사서 코르시카 섬으로 추방되었다. 실의의  8년을 보내고 로마에 돌아온 뒤, 어린 네로(Nero,  54‐68 재위)의 스승과 법무관이 되었고,  54년 네로가 황제가 되자 섭정이 되었다가  62년 물러났다. 스토아 철학자였던 세네카는 도덕적이고 문학적인 작품을 많이 남겼는데, 인간이 인간다운 까닭은 올바른 이성 때문이고, 유일의 선인 덕을 목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라는 그의 이론은 독창적인 것은 아니지만, 스토아 철학 교리를 명학하게 표현했고, 실천을 통해 그것을 증명했다. 그는 스스로 세속에 물들면서도, 끝까지 인간이 인

Page 115: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간다운 까닭은 올바른 이성 때문이라는 스토아주의를 강하게 주장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도덕 서한’,  ‘섭리에 대하여’,  ‘인생의 짧음에 대하여’ 등이 있다. 그의 스토아적인 윤리 사상에는 비장한 색조가 깃들어 있다. 그에 의하면 우리의 영혼은 육체와 구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육체보다 우위에 있다. ▣ 세네카는 네로에게 반역하였다는 의심을 받자 스스로 혈관을 끊고 자살하게 되었다. 그러나 죽음에도 기술이 필요했다. 세네카와 그의 아내는 함께 칼날로 팔목에 힘껏 칼자국을 냈지만, 평소 금욕적인 생활로 허약해진 그의 늙은 육신이었던지라 피는 너무도 느리게 흘러나왔다. 세네카는 발목과 무릎의 혈관도 잘랐다. 하지만 고통만 지속되고 죽음은 여전히 찾아오지 않았다. 따라서 세네카는 옆에 있던 친구요 유능한 의사였던 스타시우스 아나에우스에게로 몸을 돌려 오래 전부터 준비해 두었던 독약을 요청한다. 하지만 독약을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효과가 없었는데, 이는 그의 육체가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던지라 독약에 반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그를 둘러싸고 있던 노예들에게 물을 튀기면서 뜨거운 물이 담긴 욕조 속으로 들어갔고, 그리고 욕조를 한증실로 옮기게 하여 더운 수증기에 숨이 막혀 마침내 질식으로 사망했다. ▣ 칼빈은  ‘세네카의 관용론’에 대한 주석을 집필하였다. 대부분의 칼빈 작가들은 이 사실을 스쳐 지나가듯이 언급하지만, 사실 이 책이 칼빈을 이해함에 

Page 116: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있어서 갖는 중요성은 너무나 크다. 흔히 칼빈이 왜 하필 세네카의 관용론을 썼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시한다. 세네카가 네로 황제를 설득하여 그리스도인들을 관대하게 대하게 할 목적으로 관용론을 썼듯이, 칼빈 역시 당시 박해하던 프랑스 왕 프란시스  1세로 하여금 융통성 있는 정책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대답이다. 그러나 칼빈 전문가 방델(Francois Wendel)은, 이것은 비록 개연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어디까지나 입증되지 않은 가설이라고 일축한다. 당시는 칼빈이 종교개혁에 돌입하기 이전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유이다. 그는 보다 단순한 데서 대답을 찾는다. 에라스무스는 세네카의 작품을 두번이나 출판했으면서도  1529년에 내놓은  2판에서도 여전히 자신의 아쉬움을 숨기지 않았다. 그래서 누군가가 제대로 써 보았으면 좋겠다고 공개적으로 의견을 제시했다. 방델은 이것이 칼빈의 야망에 도전이 되었다고 보면서, 칼빈이 그의 서문에서 에라스무스가 세네카에게서 간파하지 못한 것을 자신이 찾아냈다고 주장한 부분을 증거로 제시한다. 더욱이 당시에 세네카는 신학자들과 도덕주의자들이 가장 쉽게 인용하는 저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여하튼 칼빈이 이 작품을 위하여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자비를 들여서까지 책을 출판한 것에 비해서 정작 대중들의 반응은 별로였다.   

Page 117: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세르베투스(Servetus, Michael, 1511‐1553) (1.13.10): 세르베투스는 스페인의 바르

셀로나의 빌라누에바에서 태어났다. 프랑스에서 법학을 공부한 후, 당시 종교개혁자로  유명한  마틴  @부처(Martin  Bucer,  1491‐1551)와  외콜람파디우스(John Oecolampadius,  1482‐1531) 등과 접촉하였다. 세르베투스는 자신의 입장에서 보건대, 고대 교회의 삼위일체론에서 성경의 중심 사상인 하나님의 계시의 의미를 변조시킨 악마의 활동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1531년에 세르베투스는 삼위일체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여  ‘삼위일체론의 오류에 대하여’(De Trinitatis  erroribus libri)라는  책을  써서,  성령은  독립된  위격이  아니라  단순히  ‘하나님의  능력’(A Power of God)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 아니라고 주장하게 된다. 따라서 그의 이러한 주장은 개혁자들뿐만 아니라, 로마 카톨릭으로부터도 반감을 사게 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이듬해에 다시 같은 성격의 책을 내놓는다. ▣ 로마 교회는 세르베투스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체포에 들어갔다. 이에 따라 프랑스로 도피한 세르베투스는 집필 활동에 전념하면서  1538년에는 파리 대학교 의학부에 입학하게 되고 결국 의사가 되게 된다. 프랑스  빈의  대주교의  주치의로  일하는  동안  세르베투스는  다시  ‘기독교의  회

Page 118: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복’(Christianismi  Restitutio)이라는 원고를 저술하여 더 정교하게 전개한 삼위일체론을 칼빈에게 우편으로 보낸다. 몇 차례 서신이 오가던 중, 칼빈은 세르베투스의 잘못된 삼위일체론에 혐오감을 느껴 더 이상의 서신 왕래를 중단한다. 결국 세르베투스는 자신의 원고를  1553년에 빈에서 책으로 출판하게 되지만, 앞서 칼빈에게 보낸 서신이 문제가 되어 리용(Lyons)의 종교 재판관에게 고발되어 체포된다. 하지만 세르베투스는 재판 도중에 탈출하여 나폴리로 가던 중 제네바에 들르게 된다. ▣ 한편 앞서 칼빈은 세르베투스에게 경고하기를,  “그가 제네바로 온다면, 내 권위가 어느 정도 유지될 경우, 그가 이 도시를 살아서 떠나가게 되는 것을 어떤 경우에도 참지 못할 것이다”고 했는데, 이 경고는 리용을 탈출한 세르베투스가 어이없게도(?) 제네바로 왔을 때 실제로 이루어졌다. 세르베투스는 제네바에서 체포되었고, 이단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어 화형 언도를 받았다. 하지만 정작 칼빈은 세르베투스를 동정하여 화형이 아닌 온건한 처형을 요청했지만, 스위스 여러 도시들의 단호한 입장에 고무된 시 당국은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동년  10월  27일에 세르베투스는 화형을 당하고야 말았다.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 칼빈에 대해서 거의 유일하게 비판한 사람은 당시 제네바 아카데미의 학장이었던 카스텔리오(Sebastain Castellion,  1515‐1563)였다.  16세기에 세르베투스와는 별도로 소치니스와 같은 다른 

Page 119: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반삼위일체론자들도 있었다.  #켈레스티우스(Celestius) (2.01.05) (2.03.05) (2.03.07)(3.17.15) (3.23.05): 펠라기우스

의 친구요 제자로서 뛰어난 언변으로 스승의 사상을 충실하게 가르쳤다. 어떤 경우에는  코엘리스티우스(Coelestius)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기도  한다.  켈레스티우스는 펠라기우스가 힙포에서 어거스틴을 만나지 못한 채 떠나게 되자, 그곳에 남아서 스승의 가르침을 전파했다. 그는 법률을 전공한 자답게 뛰어는 논법으로 펠라기우스의 가르침을 증거하여, 이내 칼타고 교회들을 논란에 빠트렸다. 사실 펠라기우스의 글이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그의 교설은 그의 제자인 켈레스티우스의 저작들과 어거스틴의 반박문과 당대의 종교회의들에서 발표한 내용들을 통해서 추려보게 된다. 펠라기우스주의 체계는 그가 사용한  ‘은혜’라는 용어의 다의성에서 특색을 드러냈는데, 그는 이것을 하나님의 순수한 자연 섭리로 이해하기도 했다. 그것은 자연적인 것에 고착되어 있는 천박하게 합리화된 도덕주의를 대변하고 있고, 초자연적인 은총을 위한 영역을 전혀 부여하지 않았다. ▣ 결국 칼타고 교회는 회의를 열어(412년), 켈레스티우스를 정죄하게 된다. 그러자 펠라기우스파(the Pelagians)는 자신들을 정죄한 칼타고의 결정이 억울하다면서 예루살렘 교회에 

Page 120: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호소했을 때, 디오스폴리스(옛날의 룻다)에서 회의를 개최한 예루살렘 교회의 주교들은 일방적인 그의 말에 설득 당하여, 그에게 호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거스틴(Augustine)은  이  사실을  정확하게  간파해냈다.  어거스틴은  디오스폴리스 교회 회의의 회의록을 꼼꼼히 읽어본 후, 펠라기우스가 상당히 간교하다고 판단하게 된다. 그는 시종 일관 은혜라는 말을 쓰고 있지만, 그것의 정확한 의미를 드러내지 않았던 것이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이 악에서 선으로 돌아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물론 그 은혜의 사역이 인간 생활에 유익을 주며, 악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펠라기우스가 말하는 이런 관계의 은혜는, 내면에서 역사하시는 신적 정력, 다른 말로 하면 성령의 역사로서, 인간의 의지를 바꾸어 선을 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적 성질이라든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과 같은 외적 은사와 자연적 은혜로서 구성되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여러 가지 견해에서 볼 때, 유아세례를 베풀 이유가 없지만, 펠라기우스는 유아들도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들의 세례는 거룩한 봉헌의 의식이며, 장차 받을 사죄의 예표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어린아이들은 영생이라 불리우는 행복의 저급한 상태에는 참여할 수 있으나 천당으로부터는 제외된다고 하는 입장을 그가 

Page 121: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취한 것은 오히려 비논리적이었다. 이렇게 펠라기우스에게서의 은혜의 개념은 정통주의와 다르다는 것이 완연하게 나타난다. 또한 펠라기우스는 원죄론을 무의미한 것으로 보고, 실제로 그는 자력으로 도덕적인 생활을 통한 일종의 자기 구원의 형태를 가르쳤다. 그는 하나님께서는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에게 완전히 거룩한 생활을 명령하신다는 데 착안하여,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은 온전히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 (앞에서도 말했듯이, 결국 켈레스티우스는  412년 칼타고 교회 회의에서 정죄 받기에 이르렀고 따라서 그는 에베소로 후퇴하였다.) 펠라기우스는 얼마 후 직접 로마 교회의  41대 주교인 조지무스(Zosimus,  417‐18 재위)를 찾아가서 설득함으로써 호의적인 반응을 이끌어내는 수완을 발휘한다. 그러나 여전히 상황이 개선되지 않고, 급기야는 로마 교회로부터 추방령을 받게 되자, 이번에는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 네스토리우스(Nestorius,  428‐431 재위)를 찾아가서 상황을 설명하고 동의를 이끌어낸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수고는 마침내  431년에 열린 에베소 공의회가 네스토리우스주의를 정죄하고 동시에 펠라기우스주의에 대해서도 정죄하게 됨으로써 끝을 맺었다. ▣ 그런데 이러한 과정에서 어거스틴주의와 펠라기우스주의의 양 극단 사이에서, 그 두 파 사이를 중재하는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를 역사상 반펠라기우스주의라고 부른다. 사실 이 중간 입장은 어거스틴주

Page 122: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의와 같이 강한 논리적 일관성을 가진 체계만이, 펠라기우스의 공격에 대항하여 성공적으로 그 기반을 굳힐 수 있다는 것을 명백히 해주었다. 반펠라기우스주의는 인간을 갱신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의지가 동등한 요소라고 하였고, 또 하나님께서 인간의 믿음과 순종을 미리 아시고 예정하신다고 주장하므로 양파간의 모든 어려움을 해결하려는 무익한 시도를 했다. 반펠라기우스주의는 인간의 부패를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그 인간 본성은 타락으로 인해서 치명적인 상처를 받았다기 보다는, 오히려 약화되었거나 병든 것으로 보았다. 타락한 인성은 아직도 자유의 요소를 지니고 있으며,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해주는 것이다. 중생은 그 두 요인이 연합하여 산출한 것이며, 그러나 그 일을 시작하는 것은 인간이요 하나님이 아니다. 반펠라기우스파의 대표 인물은 맛실리아 수도원장인 카시안이었으며, 레기움의 화우스투스와 맛실리아의 겐나디우스도 역시 유능한 변호자들이었다. 그러나 반펠라기우스주의는 내용 통일이 부족해서, 어거스틴주의와 같은 치밀한 조직체와 대항해서 싸울 수가 없었다. 이 사상은 오랑주 회의(the  Council of  Orange,  529년)에서 정죄되었는데, 이 회의는 온건한 어거스틴주의를 옹호하였다.    

Page 123: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셀레스틴(SelestinusⅠ,  422‐32 재위)  (4.7.1): 로마 교회의  43대 주교로, 주로 네스토리우스(Nestorius,  428‐31 재위) 이단자들과 논쟁을 벌였다. 셀레스틴은 처음에 네스토리우스를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로  인정하였지만(428년),  그가  펠라기우스파(the  Pelagians)에게 호의를 베풀게 되자 입장을 바꾸었다. 셀레스틴은 동방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Theodosius  II,  408‐50 재위)가 서방의 공동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Valentinianus  Ⅲ,  425‐55  재위)와  협의하여  네스토리우스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목적으로 에베소 회의(the Council of Ephesus, 431)를 소집하자, 2명의 주교와 1인의 사제를 파견하였는데, 이들은 본래 키릴(Cyrill,  Alexandrien,  ca.  380‐444)을 지지하는 입장이었지만, 논쟁에 개입하지 않고 중립적인 판단을 내리는 입장을 취함으로 로마 교회의 권위를 행사하는 수완을 발휘했다.    #소조멘(Sozomen, 323‐425)  (3.4.7): @콘스탄티노플에서 활동한 역사가이다. 그가 

쓴 교회사는 고전적 문체, 수도원주의에 대한 선호, 서유럽 자료들의 방대한 사용 등으로 유명하며, 동시대 인물로서 그보다 나이가 위인 소크라테스 스콜라시티쿠스의 교회사와 견줄만하다. 당시 세력을 떨치던  @비잔틴 제국의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Theodosius  II,  408‐50 재위) 때 교회사 저술 작업에 헌신한 그는  324‐423년

Page 124: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의 시기를 다룬  9권의 책을 편집했다. 그러나 현존하는 본문은  425년에 끝났는데, 마지막 부분이 테오도시우스  2세의 탄압으로 삭제되었는지, 아니면 그냥 분실되었는지 의문을 남겼다. 소조멘은 성직자들뿐만 아니라 교양 있는 평신도들을 위해서도 소크라테스의 책을 뛰어난 문제로 @개정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떤 학자들은 소조멘이 전혀 소크라테스를 모르는 채 독자적으로 집필하였다고 주장한다.) 비록 그가 소크라테스보다 평론 방법 및 신학 이해해서 열등했지만 그때까지 유례없던 독특한 자료를 삽입함으로써 연대기를 가치 있게 만들었다. 이 연대기들은 소크라테스의 본문에 대한 교정본이며, 이 본문으로 초기 그리스도교에 대한 정보를 중세  교회에  제공한  셈이다.  소조멘은  한  가지  일화로  도로테우스(Dorotheus)의 일생을 기록하면서 그가  6온스의 빵과 약간의 채소만을 매일 섭취했으며 물만을 마셨다고 한다.  “그는 편안한 침대나 마루에 누워 있지 않았으며 손발을 편안하게 하지 않으면서 잠을 잤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그런 행동이 나를 파괴시키기 때문”이라고 답변했다.  #소크라테스(Socrates)  (1.13.5)  (4.12.20): 교회 역사가인데 주해가 딸려 있는 그의 

연대기  ‘교회사’는  4‐5세기 교부 시기의 교회사 연구에 중요한 기록 자료이자 개요

Page 125: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이다. 이후에 나온 그의 작품집의 발췌문은 초기 그리스도교에 관한 주요 지식을 중세 라틴 교회에 제공해 주었다. 법률 고문이었던 그는 평신도로서는 최초로 교회사를 저술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교회사는 모두  7권으로 당시의 종교적, 세속적 연보를 망라하고 있으며, 제2판은 지금까지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각 권은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e,  324‐337 재위)에서 테오도시우스  2세(Theodosius  II, 408‐50 재위)에 이르기까지 동로마 황제들의 재위 기간에 해당하며,  4세기 @가이사라의 역사가 유세비우스(Eusebius,  265‐339)의 주요 작품들을 싣고 있다. 그는 선대의 자료들을 그대로 인용하기도 하고 종교회의 의사록을 황제나 주교의 서신 가운데 입수 가능한 것과 한데 묶는 방식을 취했다. 또 그는 때때로 증언을 인용한 긴 일화를 넣어 사건을 재미 있게 꾸미되 비교적 편견 없이 그러나 비판적으로 설명한다는 원칙하에서 책을 엮었다. 하지만 이단들과 분파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관대한 입장을 취하고, 황제들과 주교들을 칭송하는 데는 다소간 인색하였다. 따라서 일부에서는 노바티안파(Novatians)에 기울었다는 비판을 가하기도 한다.    #소크라테스(Socrates, B.C. 469‐399) (1.5.13) (1.15.6) (3.24.10):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서 태어났다. 그에 관하여 확실한 것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제자들이 지은 

Page 126: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책을 통하여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당시 아테네는 스파르타와의 전쟁에 패하여 백성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는 그러한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치기로 결심하고 거리로 나갔다. 여기저기서 사람을 모아 놓고 참된 자기 자신의 모습과 인간 정신의 중요함을 가르쳤다. 그는  ‘자기 자신의 무지를 안다’는 것을 출발점으로 하여, 사람들과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런 대화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무지를 깨우치기 위한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하며,  ‘지혜를 사랑한다’는 것에 이르게 하였고, 이것이 철학을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오늘날  ‘철학’이라고 하는 것도 그에게서 유래한다. 서서히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고 젊은이들이 그를 따르게 되자 일부 권력자와 학자들이 그를 시기하여 고발하였다.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자  많은  사람들이 달아날 것을 권유하였지만,  그는  ‘악법도  법이다’라면서 기꺼이 사형을 받아들여 독약을 물마시 듯이 들이마셨다. ▣ 그의 재판 모습과 옥중 및 임종장면은, 제자 플라톤이 쓴 철학적 희곡들인  ‘에우추풀론’,  ‘소크라테스의 변명’,  ‘크리톤’,  ‘파이돈’ 등 여러 작품들에 자세히 그려졌다. 죽음 앞에서 초연했던 그의 태도는 철학자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 소크라테스는 책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주변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그에 관하여 썼고, 그들의 글을 통해서 그를 알 뿐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 누구를 얼마만큼 믿어야 할지는 문제이며, 이것을 

Page 127: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철학사상으로  ‘소크라테스 문제’라고 일컫는다. 일반적으로 제자 가운데 가장 걸출한 철학자인 플라톤이 전하는 소크라테스상(像)을 골자로 하고, 여기에 다른 것을 보충하는 경우가 많다. 소크라테스의 젊었을 때의 일에 관하여 확실한 것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낯익은 것은, 늙은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거리나 체육장에서 아름다운 청소년들을 상대로, 또는 마을의 유력한 사람들을 상대로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착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용기란 무엇인가 등등에 관하여 묻고 있는 모습이다(이것을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이라 한다). 이와 같은 문답의 주제는 대부분 실천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 문답은 항상  ‘아직도 그것은 모른다’라고 하는 무지의 고백을 문답자가 상호간에 인정하는 것으로 끝났다. 이때 상대방은 소크라테스가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실은 자기는 알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는 경우가 많아, 여기에서 자기의 무지를 폭로당한 사람들은 때로는 소크라테스의 음흉한 수법에 분노하였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참뜻은, 모든 사람이 자기의 존재 의미로 부여된 궁극의 근거에 대한 무지를 깨닫고, 그것을 묻는 것이 무엇보다도 귀중하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촉구하는 데 있었다. 물론 소크라테스가 이 근거를 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궁극적인 근거에 대한 무지를 깨닫고(무지의 지), 그것에 대한 물음을 통하여 이  ‘막다른 벽’ 속에 머무는 데 소크라테

Page 128: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스의 애지, 곧 철학이 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근원부터 질문당하는 곳에 놓아 두는 것이며, 이러한 방법으로 내 자신이 온통 근원에서부터 조명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두 눈이 튀어나왔으며, 코는 찌부러진 사자코로 그 용모는 추하였다. 그러나 그와 이야기를 나눈 사람은 그의 말에 매료되고 그의 내면에 사로잡혔다. 이렇듯 외면과 내면의 이율배반에 그의 존재의 본질이 있다. ▣ 그때까지의 그리스 철학자들은 우주의 원리를 묻곤 하였는데, 소크라테스에게서 비로소 자신과 자기 근거에 대한 물음이 철학의 주제가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소크라테스는 내면(영혼의 차원) 철학의 시조라 할 수 있다. 또한 자신에 대한 물음은 자기를 지탱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것(초월)에 대한 물음이라는 의미에서 동시에 형이상학의 시조라고도 할 수 있다. 다만 소크라테스에게 있어 내면은 근거에 의해 질문당하는 데서 생기는 막다른 벽 안에 끝까지 머무는 애지의 동반자로서만 제시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소크라테스는 외부와 내면의 틈을 통해 개시(開示)되는 근원의 문제를 철학적 관심을 중심으로 그 생(生)과 사(死)의 증거를 가지고 정착시킴으로써 서양철학의 무게를 한몸에 짊어지는 사람이 되었다  #솔론(Solon, B.C. 630‐560)  (4.20.09): 아테네의 시인, 정치가, 군인이다. 귀족 출신

Page 129: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으로 에우포리온 혹은 엑세케스티데스의 아들이라고 한다. 밀레토스의 탈레스, 미탈레테의 파타코스, 프리에네의 비아스, 아테네의 킬론, 레이안드로스, 클레아보울로스 등과 더불어 그리스의  7현인 중의 한 사람으로 평가되는 솔론은 젊었을 때부터 교역을 겸하여 여러 나라를 방문하였다. 솔론이 이곳 저곳을 두루 다닌 것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식과 경험을 얻기 위해서였다고 평가하는 학자들이 많은데, 실제로 그는 어렸을 때부터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했으며, 청년이 되어서는 남의 도움을 받지 않으려고 혼자서 장사를 시작했다. 그의 자작시에  “나이는 하루하루 늙어가지만, 배움의 길은 나날이 새롭구나”라고 노래한 내용을 볼 때, 그는 노년에 이를 때까지 늘 배움의 길에 서 있었던 것을 보게 된다. ▣ 솔론은 B.C. 7세기 후반, 살라미스섬의 영유를 둘러싼 이웃 나라 메가라와의 전쟁 때, 오랜 전쟁에 지친 아테네 시민을 일깨우는 자작시를 낭독하고 전투를 재개시켰다.  B.C.  594‐593년, 조정자이면서 전권을 위탁받은 아르콘에 선출되어 일련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 무렵 아테네는 상층평민의 국정참여에 대한 요구가 강하여 귀족지배가 위협을 받게 되었으며, 다른 한편 소수에게 토지가 집중되는 현상이 너무 커서, 그들에게 예속되는 사람들이 증대하여 큰 사회 문제가 되고 있었다. 가난한 농민들이 그 무렵의 관습에 따라 자신의 몸을 담보로 빚을 얻었으나, 반제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Page 130: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수확의  1/6을 바쳐야 하는 채무 예속자가 되었다. 공납 의무를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노예가 되었고, 그 가운데는 외국에 팔리는 경우도 있었다. 이와 같은 사태에 직면하여 솔론은 우선 공사(公私)의 채무를 말소하고, 몸을 담보로 하는 차재를 금지하여 시민의 노예화를 막았다. 이 조치로 시민과 노예의 신분적 격차가 명확해졌다. 평민층의 국정참여 요구에 대해서는 가문이 아닌 재산을 기준으로 국정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는 제도를 정하였다. 이에 따라서 평민층의 국정참여의 길이 열렸다. 그리고 그는 살인에 관한 법 이외의 드라콘의 법을 폐지하고, 시민생활 전반을 규제하는 일련의 법을 제정하였으며, 도량형을 개혁하였다. 솔론의 이와 같은 일련의 개혁은 민주정치의 초석을 세운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 당시 각 지역마다 파벌이 생겨나서 정권 싸움이 벌어졌다. 산간 지방 사람들은 민주 정치를, 평지에서는 과두 정치를, 해안에 사는 사람들은 혼합 정치를 주장하면서 각기 다투었다. 이렇게 나라가 혼란스러울 때 솔론은 어느 파벌에도 가담치 아니하였다. 그래서 아테네 사람들은 솔론은 찾아가서, 공화국을 구하고 충돌을 조정해 달라고 요청했다. 레스보스의 역사가 파니아스의 말에 의하면, 그때 솔론은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빈민들에게는 토지를 분배해주고, 부자들에게는 빚을 돌려받을 수 있게 해주겠다고 양쪽 모두에게 약속을 했다고 한다. 부자들은 솔론의 부유

Page 131: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함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은 그의 정의감 때문에 그가 다같이 자기 편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는  “모두가 평등하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것이 부자와 빈민 모두에게 호감을 주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솔론에게 희망을 갖고 그가 자유롭게 정책을 추진하도록 그를 적극 지지했다. 급기야 주변으로부터 아예 왕으로 등극하라는 강력한 권고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솔론은  “전제 군주는 과연 좋은 자리이긴 하지만 한번 그 자리에 앉게 되면 떠날 수가 없게 된다”고 하면서 극구 사양하였다. 그는 왕위를 단호히 사양하고 조용히 정치를 돌보았다. 그리고 권력자들에게 비굴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고, 대중들에게 인기를 끌려고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솔론의 정책은 어느 편도 호응을 얻지 못하게 되었다. 부자는 그들의 채권을 잃어버릴까봐 분개했고, 가난한 자들은 토지를 분배받지 못해서 또한 분개했다. ▣ 솔론의 작품은 단편적 기록들이 남아 있다. 그는 이들 작품에서 헤시오도스와 같이 신의 지배의 불공평을 탄식하면서도 끝내 신의 정의를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솔론은, 처음에는 한가로움을 달래기 위해 시를 썼지만 나중에는 도덕적인 내용이나 철학적인 뜻을 표현하기 시작했고, 정치적인 의사 표현도 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많은 법을 제정한 것은 솔론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솔론이  @어느 날 정치적인 업무와 법률에 대한 책을 편찬하고 있을 때, 아나카르시스(Amacjarsos)

Page 132: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가 다가와 말하기를,  “법률은 @거미줄과 같아서 거미줄에 걸린 놈이 약할 때는 꼼짝못하지만, 힘이 세고 재물을 가진 놈은 줄을 찢고 달아난다”고 비판했다. 그러자 솔론은,  “내가 @이 법률을 만드는 것은 법률을 위반하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이다”라고 응수하였다. 솔론이 만든 법률에는 특이한 것이 많다. 가령, 누구든 자기 아내와 간통하는 현장을 목격했을 경우 정부를 죽이는 일이 허락되었고, 여자를 강간한 사람은 상당히 많은 벌금을 내야 했으며, 재산 상속자의 아내를 얻은 남편은 매달 세 번 이상 의무적으로 아내에게 가서 같이 지내도록 했다. 또한 결혼할 때에는 신부가 지참금을 가져가지 못하도록 했고, 일단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어떠한 비난도 하지 못하도록 했으며, 유서와 유언에 관한 합리적인 법률도 많이 만들어 사람들의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확실히 법률만으로 국민들의 생활 방식을 뜯어고친다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 말년에 솔론은 아틀란티스 섬의 역사에 대한 방대한 책을 쓰려고 했지만, 완성하지 못하고 중도에 그만두었다. 플라톤(Plato)은 그가 여가가 없어서 이 일을 끝마치지 못했다고 했지만, 사실은 그가 이미 자신의 나이가 많고, 일이 너무 방대하여 감당해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플라우투스((Titus M. Plautus, B.C. 254?‐184?)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쓰기를,  “플라톤은 아틀란티스 섬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 상속인이 없어 자신이 

Page 133: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이 저택을 물려받게 된 듯한 심정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너무 늦게 시작하였기에 완성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는데, 그가 써 놓은 부분들을 읽다보면 미처 쓰지 못한 부분에 대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B.C.  384‐322)는 솔론이 죽은 후,  ‘사람들이 그를 화장하여 그 재를 살라미스 섬 주위 바다에 뿌렸다’는 이야기를 기록으로 전한다.    #스콜라 신학자들(the Schoolmen)  (1.16.09): 8‐17세기에 걸친 유럽 중세기의 신학 

중심 철학에 대한 총칭이다. 중세 초기에 샤를마뉴(Charlemagne, Carolus Magnus, 768‐814 재위) 대제는 유럽 여러 곳에 신학원을 세워 학문 육성에 힘썼다. 스콜라학이라는 명칭은 이 신학교의 교수(doctores  scholastici)에서 유래하며 그 후 중세 신학원이나 대학에서 연구하고 가르친 학문을 스콜라학(scholasticism)이라 부르게 되었다. 스콜라 철학은 그 가운데 철학 부문이다. 그리고 중세 스콜라학의 전통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근대 및 현대 학파의 학문도 스콜라학이라 한다. ▣ 그러므로 스콜라학은 중세에 행하여진 신학, 철학 연구 전반을 총괄하는 것으로서 여러 방면에 걸친 것인데, 거기에는 전체에 공통된 몇 가지 특징이 있다. 그것은 중세의 학문연구 방법(스콜라학적 방법)에서 오는 것이며 이것에 따라 중세 철학의 양상

Page 134: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이 근본적으로 규정된다. ① 중세의 학문연구는 먼저 성경과 교부(敎父)의 저서, 고대 그리스, 로마의 철학자와 기타 저술가가 쓴 저서의 문헌적 연구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그 저서들의 독해, 주석, 해독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이때 성경은 신의 말을 전하는 것으로서 가장 중시되었다(성경의 권위). ② 신의 말은 먼저 신앙에 의해 인간에게 받아들여지는데  ‘신앙’은 곧 인간이 거기에 내포된 신의 가르침을  ‘이해’하여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신앙의  이해’(intellectus  fidei)라는 것이 스콜라학이 지향하는 목표였다. 이때 신앙과 이해(또는 이성)는 서로 한 쪽이 다른 쪽을 요구하면서도 한 쪽이 다른 쪽에 용해되어 없어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긴장관계에 있으며 이것은 중세 철학을 구성하는  2가지 요인이다. 한 쪽이 다른 쪽에 예속되는 관계에서는 스콜라학은 없어지며 긴장관계에 있는 신앙과 이해의 종합에 의해서만 스콜라학은 성립한다. ③ 교부와 철학자의 저서들은 이것을 위해 사용되었다. 각 문제점에 따라 참조되는 전거(권위)들로 보이는 여러 설이 수집, 정리되었다. 가령  12세기 초의 피터 롬바드(Lombard, ca.  1100‐1160)의  ‘명제론집’은 이 종류의 저서 중 대표적인 것이다. 아베랄드(Peter Abelard,  1079‐1142)는  “이다와 아니다”의 방법으로 여러 견해를 각 논점에 대하여 긍정측과 부정측의 대립하는 방법을 도입하였다.  13세기의 숨마(Summa; 단일로서 

Page 135: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간결한 총괄)는 이 대립하는 여러 견해 사이의 조화, 종합의 시도로서 여러 영역에 관해  논하여진  여러  설의  집대성이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74)의  ‘신학대전’(Summa Theologiae, 숨마 데오로기아)은 그 가운데 가장 저명한 것이다. ▣ 스콜라학이 시작된 초기 시대를 본다면, 카를대제 시대에서  12세기까지라고 볼 수 있는데, 신플라톤 학파의 철학을 도입하고 위‐디오니시우스의 번역에 의해 큰 영향을 받은 에리우게나와, 신앙과 이성의 관계를 명확하게 한정하고 스콜라학의  방법을  확립하여  ‘스콜라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캔터베리의  안셀름(Anselm,  1033‐1109)이 대표자이다. 신의 존재에 관한 안셀름의 증명은 유명하다. 스콜라 철학의 전성기는  13세기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에서 아라비아 철학을 들여옴에 따라 재래의 신학과 독립된 지적 연구가 시작되었다. 이 새로운 연구를 대폭 채용하여 그것을 전통적 스콜라학의 체계 속에 하나로 융화시킨 것이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신학에 대한 철학의 원리적인 독립성이 유지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신학의 체계로 종합되어 있다. 이에 대해 보나벤투라는 전통적인 어거스틴적, 신비주의적 경향을 지켰다. 스콜라 철학의 말기인  14세기에는 신앙과 이성의 조화가  차츰  약화되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학자들은  유명론자  윌리엄  오캄(Wilhelm  von  Ockham,  1290‐1349)과  신비주의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Page 136: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Eckhart, 1260‐1327)가 있다.    #스키피오(Scipios)  (3.14.03)  (3.24.10)  (4.02.03):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칼타고에게 뼈아픈 패배를 안긴 명장이었다. 그는 카토(Cato)의 ‘칼타고 격멸론’에 반대하여  ‘칼타고 존속론’을 주장하였다. 그가  ‘칼타고 존속론’을 주장한 것은 칼타고가 있음으로 해서 로마 시민들이 경계심을 가지고 살게 되어 타락을 방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전쟁이 발발하게 되자 칼타고를 파괴한 것은 스키피오 일족이었다. ▣ 제2차 포에니 전쟁 후에, 이베리아 반도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그러나 로마의 총독은 원주민(켈트 이베리아족)들을 지나치게 착취하였고, 이에 분노한 원주민들은 기회를 찾아 자주 반란을 일으켰다. 로마는 오랜 고전 끝에  B.C.  133년 그들의 아성인 누만티아를 공략하여 이를 불사르고 간신히 진압하였다. 당시 칼타고는 로마의 허락 없이 외국과 교전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점을 잘 알고 있던 칼타고의 옆 나라 누미디아왕 마시니사는 심심하면 칼타고의 국경을 넘나들며, 그 영토를 야금야금 빼앗아 가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로마에는 칼타고의 잠재적 능력을 과장하여 보고함으로써, 로마가 칼타고의 군사적 대응을 막도록 하였다. 로마의 원로원에서는 카토의 주도로 

Page 137: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칼타고 격멸론’이 늘 제기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칼타고의 대응을 막았다. 칼타고는 참고 또 참다 못하여 로마의 허락 없이 누미디아와 전투를 전개했다. 그러자 로마는 지체없이 칼타고에 선전 포고를 하였고, 결국 제3차 포에니 전쟁이 터진 것이었다.  ▣ 칼타고는 본래부터 로마와는 싸울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사절단을 보내고 간곡히 사죄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칼타고에 파견된 로마군은 칼타고를 완전히 무장해제하였다. 그리고 칼타고 시민들에게 해안에서  10마일 이상 떨어진 곳으로 퇴거하도록 명령을 내리고 칼타고를 완전히 파괴한다고 포고하였다. 이 포고를 들은 시민들은  ‘굴종의 삶을 거부하고, 자유로운 죽음을 맞자’고 비장한 결심을 하였다. 그들은 성문을 닫고, 남녀를 가리지 않고 무기를 만들고, 도시 방위를 위한 시설을 새로이 만들었다. 여자들은 머리카락을 잘라 쇠뇌의 탄력받이 스프링을 만들고, 노예들은 해방되어 전선에 참여하였다. 결사 항전의 의지를 불태우며 시작된 농성은  B.C.  149년부터 시작되어 장장  4년 동안 계속되었다. 로마군은 이 지루한 농성전에 탈진할 지경이었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손자, 즉 스키피오의 장남의 양자인 스키피오 아에밀리아누스가 로마군의 지휘관이 되었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대<大>스키피오라고 하고, 칼타고를 멸망시킨 스키피오를 작은 스키피오, 즉 소<小>스키피오라고 구별한다.) ▣ 소 스키피오는 칼타고에 대한 공격

Page 138: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을 훨씬 강도 높게 퍼부었다. 기아와 질병에 시달린 칼타고 시민들은  1주일 동안 시가전을 벌였다. 그러나 이토록 결사적으로 저항한 칼타고도 끝내 주저앉고 말았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칼타고의 주민은 총 인구의  10%도 되지 않았다. 처참한 결사 항전에 모든 시민이 동참하여 처절히 죽어간 것이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노예로 팔려갔다. 칼타고는 무려  17일 동안이나 불탔다. 이렇게 해서 칼타고 500년의 번영과 영화는 한 줌의 재로 변하고 말았다. 로마의 잔학한 파괴는 칼타고를 완전히 멸절시키고 말았다. 로마에 멸망당한 이후 칼타고의 이름을 다시는 역사에서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지금의 칼타고 유적지는 그 전쟁의 잔해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칼타고는 이제 없어지고, 로마의 속주 아프리카만이 그 땅의 이름을 대신하게 되었다.  #스타티우스(Publius Papinius Statius, 45?‐96) (1.04.04): 나폴리 출생의 고대 로마 

시인이다. 같은 시인이었던 아버지에게서 시를 배우고 궁정 시인으로 있으면서 이름을 떨쳤다. 그의 작품들은 단테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현존 작품으로는 서사시 ‘테베 이야기’(12권), 서사시  ‘아킬레스 이야기’(미완),  32편의 시를 모은  ‘실바에’(5권) 등이 있다.   

Page 139: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스타필루스(Frederick  Stapylus,  1512‐1564)  (3.3.9): 프레드릭 스타필루스는 비덴

베르그 대학 졸업생이었으나, 루터(Martin Luter, 1483‐1546)의 사상과 그의 스승 멜랑히톤(Philipp Melanchthon,  1497‐1560)을 배반하고(1553년), 종교개혁을 공격하는 글을 썼다. 이런 배경하에서, 칼빈이 그를 향해  “ … 논쟁가이며 배반자”라고 한 표현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스테판(Stephen, 254‐57 재위) (4.07.03) (4.7.7): 스테판은 코넬리우스의 후임인 로

마  22대 주교 루키우스(Lucius,  253‐254 재위)가 급사함으로 말미암아  23대 주교로 선출되었다. 당시 북부 아프리카, 안디옥, 소아시아 등지에서는 이단자들이 집전한 세례 성사는 일반적으로 무효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로마, 알렉산드리아, 팔레스틴에서는 유효로 인정되어 이단자들은 @손 얹음의 안수에 의하여 죄사함을 받고 교회에  회복되었다.  이때  키프리안(Cyprian,  200‐258)이  나서서  노바티안파(Novatians)와 같은 이단에게서 받은 세례는 무효라고 주장하게 되고, 칼타고 회의(225년)는 이를 지지하게 되지만, 일부는 로마의 입장에 서서 반대하였다. 다음 해(226년)에 키프리안은  71명의 주교들이 참석한 회의의 결과를 로마에 보냈으나, 스

Page 140: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테판은 사절들을 이단자로 취급하게 되는데, 이로 인하여 로마 교회와 칼타고 교회는 갈라지게 된다. 키프리안은 편지를 보내어 각 주교는 자기 교구에서 주인이라고 강조하였고, 스테판도 강경하게 맞섰다. 이후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디오니시우스(Dyinysius)가  양자  조정을  시도하던  중,  스테판은  황제  발레리아누스(Valerianus. 253‐60 재위)의 박해가 시작될 무렵 세상을 떠난다.  #스토아  학파(Stoicism)  (1.5.12):  크라테스(Crates)의  제자였던  키티온의  제논

(Zeno de Citium, B.C. 335‐236)이  300년에 아테네 시장에 있는 스토아 포이킬레(스토아는 주랑<柱廊>을  뜻하는  명사이고, 포이킬레는  ‘여러 가지  색깔이 있다’라는 뜻의 형용사이다)에서 가르친 데서 스토아주의라는 명칭이 유래되었다. 즉 당시 제논은 아테네의 광장에 있던 채색주랑(彩色柱廊)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따라서 사람들은 그의 제자들을  ‘스토아파’(주랑의 사람들이라는 뜻)라고 불렀다. 스토아파 철학은 이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그렇듯이 고전기의 그리스를 대표하는 여러 나라의 좋은 가문 출신 사람들의 철학이 아니라, 변경 사람이나 이국인의 철학이었으며, 그리스 문물이 좁은 도시국가의 틀을 넘어 널리 지중해 연안의 여러 지방에 영향을 미친 헬레니즘 시대를 대표하는 철학이었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철학의 여

Page 141: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러 분파들과 스토아파 사이의 대립은 격렬하였다. ▣ 스토아주의는 고전기까지의 철학의 여러 학설을 수용하여 일반화하고 통속화한 점에서 절충주의라는 비난을 받지만, 그 기반에는 고전 철학과는 아주 이질적인 것이 있다고 생각된다. 단지 로마 시대 사람들의 저작을 제외하고는 스토아파의 저작은 오늘날 거의 전해지지 않아서 연구상 어려움이 있다. 일반적으로 스토아 학파는 자연관에 있어서는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  B.C.  545‐480)의 로고스(이성,  logos)와 변화에 관한 형이상학을  바탕으로  하면서  윤리학은  플라톤(Platon,  B.C.  427‐347)과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B.C.  384‐322), 특히 퀴닉 학파의 영향을 받았다. ▣ 참고로 헬라클레이토스는 파르메니데스, 엠페도클레스(Empedocle,  B.C.  490‐435)와 함께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그의 사상을 담은  60여 개의 단편들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 까다로운 해석은 지금까지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의 철학의 네 가지 요점은, 첫째, 모든 것을 조절하는 원칙이자 최초의 원소인  ‘불의 중요성’, 둘째, 엘레아의 제논이나 파르메니데스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만물은 변화한다’는  ‘우주의 보편적 운동성’, 셋째,  ‘같은 길도 오르막이 있고 내리막이 있듯이’,  ‘하나의 실체는 상반된 요소의 결합’이라는 주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인간에게는 이성이 내재하고 있다’는 주장 등이다. ▣ 스토아주

Page 142: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의를 시작한 제논은 논리학과 형이상학, 윤리학을 잘 조화시켰다. 그의 제자로서 적빈(赤貧)과 노동으로 이름 높던 소아시아의 아소스 사람 클레안테스(Cleanthes, B.C.  331‐232), 클레안테스의 제자로서 스토아파의 학설을 체계적으로 완성한 킬리키아의 항구 도시 솔로이(솔리)의 크리시푸스(Chrysippus, B.C.  280‐207), 스토아 학설을  로마  사람에게  받아들이기  쉬운  형태로  만든  로도스  섬의  파나이티우스(Panaetius, B.C. 185‐109), 종교적 경향이 강한 오론테스 강 하반의 아파메아인 포시도니우스(Posidonius,  B.C.  135‐50),  로마  황제  네로의  스승이었던  세네카(Seneca, B.C.  4  ‐ A.D.  65), 노예였다가 자유의 신분을 쟁취한 에픽테투스(Epictetus,  55‐135), 로마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161‐180 재위)가 이 학파의 주요 인물들이다. 더 엄밀히 말하여, 사실상 제논의 뒤를 이은 학자는 클레안테스인데 그는 자신이 지은  ‘제우스 찬가’로써 보여주었듯이, 스토아 신 개념에 더욱 더 인격적인 정신을 불어넣은 인물이다. 클레안테스의 제자 크리시푸스는 스토아주의에 완전한 형태와 논리적 울타리를 제공했다. ▣ 스토아주의의 세계관은 유물론적 범신론(Pantheism; 모든 사물과 존재는 하나의 단순한 실체, 존재의 모습이나 속성이나 현상으로 하나님과 자연이 동일하다고 믿으려는 견해로, 스피노자<1632‐77>는 서양 철학에서 가장 인상적인 범신론 체계를 형성했다)으로 규명할 수 있다. 

Page 143: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하지만 그들이 말한 물질은 두 가지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통상적인 물질 개념에 따른 보다 광범위한 물질이고, 다른 하나는 호흡 혹은 영으로 묘사되고 실재에 골고루 스며 있는 보다 세련된 물질이다. 후자는 실재를 지배하는 세력이자 그것을 이끌어 가는 힘이며, 신에 상응한다. 그것이 섭리를 베풀고, 이 세상을  ‘모든 가능한 세계들 가운데 최선’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인간도 우주와 동일한 두 가지 종류의 물질적 실재로 구성된다. 현세는 불에서 유래하여 불로 돌아갈 것이며(세계적 대화재), 그 뒤에 동일한 세계가 다시 나타나 같은 주기를 반복할 것이다(재생, 팔랑게네시아, palingenesia). 지배의 영은 합리적이어서, 스토아주의자들은 실재를 합리적으로 묘사하고 자신들의 체계를 변호하려고 노력함으로써 논리학에 이바지했다. 또한 이들은 자신들의 물리적 이론들을 고전적 신화에 접목하는 방식으로 알레고리라는 해석법을 개발했다. 이들의 철학은 우주의 내면적 연관성에 기초하여 복점과 점성술을 포함한 전통 종교에 변호 체계를 제공했다. ▣ 스토아주의의 항구적인 영향력은 그것의 범신론과 합리주의가 아닌, 삶에 대한 도덕적 교훈과 태도에서 유래했다. 삶의 목표는 덕이고, 덕이란 실재의 합리성에 부합하게 하는 것이다. 감정 위주의 삶은 비합리적이고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경시되었다. 삶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것은 덕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외부에서 발생하는 일들에 동요하지 

Page 144: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않고,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태도와 인격을 집중해야 한다. 스토아주의가 주장한 섭리와 실재의 윤회성에 다르면 만물이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은 현실에 순응해야 한다. 사람은 환경을 통제할 수 없지만, 자신이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은 통제할 수 있다. 덕과 무관한 것은 모두 무의미하다. 하지만 후대에 스토아주의의 윤리학이 전개되어 가면서 무의미한 것들 중에서 선호해야 할 것과 선호하지 말아야 할 것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 윤리학의 관심사에 발행한 이러한 변화는 파나이티우스가 이끈 중기 스토아주의와 함께 찾아왔다. 그는 정치 이론에 보다 관심을 집중하고 감정적이고 미학적인 관심사들에 보다 많은 여지를 허용함으로써 스토아주의를 로마인들에게 맞도록 고쳤다. 포시도니우스는 스토아주의의 범위를 보다 확장하여 과학 실험을 포함시켰으며, 세계의 모든 부분들이 공감적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는 이론으로 일치의 유형들에 대한 이해에 이바지했다. 그는 우주를 살아 있는 몸과 같은 통일체와 동일시했다. 후대의 스토아주의자들은 영혼의 삶에 보다 큰 독립성을 허용했고, 따라서 초기의 일원론을 약화시켰다. ▣ 로마의 스토아주의는 거의 독점적으로 윤리적 관심사들만을 반영했다. 세네카는 인간 본성의 저열함을 들춰냈고, 도덕적 훈계들로써 여느 고전 철학자보다 기독교 사상에 근접했다. 루푸스(Musonius Rufus, 30‐101)와 에픽테투스는 신약성경의 언어와 비슷한 언어를 

Page 145: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사용했다. 스토아주의는 아우렐레우스라는 내성적이고 우울하되 고상한 인물과 더불어 제위(帝位)에 올랐다. 그 뒤로는 스토아주의가 학파로서 존재했다는 말을 들을 수 없지만, 그것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 학파의 의미심장한 도덕적 통찰들은 고대 세계가 서양 문화에 물려준 인류의 공동 자산이다. ▣ 스토아주의와 신약성경 사이의 많은 접촉점들이 거론되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17:28에서 사도  바울은  제논의  제자  아라투스(Aratus,  B.C.  315‐240)의  저서  파이노메나(Phaenomena)로부터 스토아주의의  상투적인 문구를  인용한다. 영,  양심, 로고스, 덕, 자충족성, 합리적 예배 등과 같은 신약성경의 많은 용어들이 스토아주의자들에게 친숙하게 들렸다. 하지만 이렇게 내용은 비슷해 보였지만 세계관은 서로 달랐다. 스토아주의는 온전히 인격적인 신, 창조주, 개인의 불멸 그리고 구주를 믿지 않았다. 가장 비슷해 보이는 윤리학에서도 근본적인 차이들이 있었다. 스토아주의는 남을 대할 때 지니는 태도를 자신에 대해 지니라고 말한 반면에, 기독교는 상반된 관점을 가르쳤다. 동기도 달랐다. 스토아주의는 보다 고상한 자아에 부합하게 살았지만, 기독교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신 사랑에 보답하며 살았다. ▣ 스토아주의가  1세기 유대인 철학자 필로의 윤리 사상을 포함한 로마 제국 초기의 윤리 사상에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초기 기독교의 윤리적 저서들에 스토

Page 146: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아주의와 접촉한 흔적이 있었다는 것을 뜻했다. 이것은 예를 들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가  쓴  ‘교훈자’(Paedagogus)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암브로스(Ambrose, 339‐397)의 논문  ‘성직자의 의무에 관하여’(On the Duties of the Clergy)는 키케로가 파나이티우스에게 영향을 받아서 쓴  ‘의무들에 관하여’(On  Duties)를 기독교의 관점에서 개작한 것이다. 스토아주의의 인간론은 타티안(Tatian,  2세기)에게 영향을 주었고, 터툴리안(Tertullian)의  ‘영혼에 관하여’(On  the  Soul)에도 영향을 주었다. ▣ 스토아주의의 양상들은 기독교 사상에 동화되면서 기독교 유산의 일부가 되었다. 기독교에 포함되어 남아 있던 스토아주의 요소들은 르네상스와 현대 초반에 독자적으로 되살아났다. 내면의 인격이 외부의 환경보다 우월하고 그 환경과 무관하다는 스토아주의의 태도는 세월이 흐름과 상관없이 설득력을 잃지 않았다. 도덕성이 종교와 상관없이 추구되던 곳에서, 덕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스토아주의는 격려를 주었다. 스토아주의가 자극한 자연 종교와 그 종교의 인도주의와 사해동포적 보편주의 사상은 기독교 사상에 흡수되었다.  #시모니데스(Simonides)와 히에로(Hiero)  (1.5.12): 시모니데스는 주전  6‐5세기 경

의 희랍 서정시인이다. 그는 시를 가리켜  ‘말하는 그림’이라고 정의했다. 칼빈은 지

Page 147: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금 시모니데스가  B.C.  476년에 히에로(Hiero) 왕의 초대를 받고 갔을 때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당시 시모니데스는 폭군 히에로에게서 하나님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이에 대하여 하루 동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달라고 요청하였는데, 사람들은 이 답변을 칭찬하였다. 다음날 다시 그 폭군이 똑 같은 질문을 되풀이 하자, 그는 이틀 동안의 여유를 더 허락해 주기를 요구하였다. 그는 여러 번 날수를 배로 연기하고 나서 마침내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되자 이렇게 답변하였다.  “이 문제에 대하여 오래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더 희미해집니다.” 칼빈은 이러한 예화를 소개하면서,  “그가 그렇게 불명확한 문제에 대하여 생각하는 일을 중단하였던 것은 @지혜로웠다. 여기서 @명백해지는 것은, 인간은 본성으로만 가르침을 받는다면, 확실하고 건전하며 명료한 지식을 갖지 못하고, 다만 혼란한 원리에 매여, 마침내는 알지 못하는 신을 예배하게 된다는 사실이다”(행  17:23 참조)라고 해설한다.  #시지베르(Sigebert, 1039‐1112) (4.19.21): 교회사를 기록한 역사가이다. @시지베르

는 연대기 편찬(Chronographia)에서 천지 창조부터  1101년까지의 시기를 다루었고,  토리니의  로베르(Robert  of  Torigni,  1186년  사망)는  @시지베르에  대한  보론(Appendix  to  Sigebert)에서  1154년부터  1186년까지의 사건을 다루었다. 또, 옥쎄르

Page 148: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의 로베르(Robert of Auxerre)는 연대기(Chroican)에서  1181년부터  1211년까지의 시기를 다루었다.  %#아나스타시우스(Anastasius):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주교였다(4.7.4).  %#아나스타시우스(Anastasius,  559‐70,  93‐98 재위: 안디옥 교회 주교로, 학덕과 

신심이 뛰어나다고 알려졌다. 에바그리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말을 적게 하였고, 주민들이 그의 면전에서 세속 일을 이야기할 때에는 들은 척도 않았고 또 말을 입 밖에 내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픔을 치료하는 놀라운 은혜를 입고 있었다. 그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Justinianus  I,  527‐65 재위)와 그의 아들 유스티누스  2세(Justinus  II,  565‐78 재위) 황제의 지지를 받은 잘못된 가르침을 반대하다가 거의  23년 동안이나 교구에서 추방되어 지냈으나, 주교 그레고리  1세(Gregory  the Great, 590‐604 재위)와 친구인 마우리키우스(Mauricius, 582‐602 재위) 황제에 의하여 귀향할 수 있었다. 그는  ‘새로운 모세’라는 별명을 얻었다(4.7.4, 6).  %#아나스타시우스(Anastasius) (4.07.20):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였다(4.7.20). 

Page 149: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아나클레투스(Anacletus, 76‐88 재위) (4.04.10) (4.17.44): 클레토(Cletus)라는 이름

으로도 불리는 로마 교회의  3대 주교로, 이레네우스의 증언에도 등장한다. 즉위  12년 째이면서 동시에 황제 도미티안(Domitian,  81‐96 재위)의 즉위  12년 째인 해에 박해를 받아 순교했다.  #아라투스(Aratus, B.C. 315‐240)  (1.05.03)  (1.15.05): 스토아주의 사상가로 희랍 시

인이며 천문 학자이다. 아라투스는 그의 저서  ‘파이노메나’(Phainomena)에서  44개의 별자리 목록을 소개하였다.  (고대 그리스에는 대략  48개의 별자리가 있었는데 프톨레미<Ptolemy>의 저서  ‘알마게스트’(Almagest)에 이것이 모두 기록되어 있다.) 아라투스가 노래한 전체  732줄로 된 시를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B.C.  106‐43)가 라틴어로 번역했고, 이를 바울이 언급했다. 즉 칼빈은 지금 바울이 스토아주의의 창시자인 제논(Zeno, B.C. 335‐236)의 제자 아라투스의 파이노메나로부터 스토아주의의 상투적인 문구를 인용한 것을 언급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B.C.  384‐322)  (1.05.05): ▣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 

Page 150: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북방 약  200마일 떨어진 마케도니아의 한 도시 스타게이로스(Stageiros)에서 태어났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버지는 마케도니아 왕 알렉산더 대왕의 조부인 아민타스의 친구이며 시종 의사였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신도 당시 유명한 아스클레피오스(Asklepios) 의료단의 일원이었다. 그는 과학적 경향을 발달시킬 모든 기회와 자극을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으며, 과학의 창시자가 될 준비는 처음부터 갖추어져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18세에  아테네로  가서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에서 20년간 공부하였다. 플라톤은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위대함을 인정하여 아카데미아의  ‘정신’이라고까지 불렀다고 한다. 기원 전  344년, 아리스토텔레스는 도시국가 아타르네이오스의 잠주(潛主)인 헤르미아스의 누이(혹은 조카딸)와 결혼하였다. 1년 후, 마케도니아의 왕 필립(Philioops)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성을 전해 듣고, 그를 궁전으로 불러들여 아들 알렉산더(Alexander)의 교육을 부탁하였다. 필립 왕의 사후 알렉산더는 왕위에 올라 세계 정복의 길에 나섰으며, 아테네도 알렉산더 대왕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정복당한 희랍인들의 적의 속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 정책을 찬성하고 있음을 숨기지 않았으며, 이러한 알렉산더 대왕의 관계를 통해 아리스토텔레스가 전개해 보인 정치학에의 관심을 이해할 수 있다. 알렉산더 대왕은 그의 스승 아리스토텔레스가 요구하는 동물학 및 식물학의 

Page 151: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온갖 자료들을 부하들을 시켜서 공급해 주었으며, 이에 드는 모든 비용과 편의를 제공하였다고  한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50세  때  아테네로  돌아와  리케이온(Lykeion)이라는 학교를 설립하였다. 플라톤의 아카데미아가 수학, 사변철학, 정치철학에 주력한 데 비해, 리케이온은 생물학, 기타 자연과학의 연구에 주력하였다. 당시에는 현대적 의미에서의 기계장치란 물론 없었으므로 관찰에 의한 방법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그의 제자들이 모은 방대한 자료는 과학 진보의 기초가 되었다. 기원 전  323년, 알렉산더 대왕이 죽자 아테네는 독립하게 되었으며, 알렉산더 대왕과 밀착되어 있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고소를 당하게 되었다. 당시 아테네에서는 피고인은 언제나 스스로 추방되는 쪽을 선택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를 떠나 칼키스(Chalcis) 섬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 이듬해에 그의 말년의 불운을 마감했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은 그 자신이 쓴 것이라기보다는 그의 강의내용을 노트에 적어둔 제자들이 편집한 것, 즉  소요학파(逍遙學派)의  공동  편집이라는  주장이  더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여하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라고 할 만한 것은 @수백 권에 이른다고 하니 남아 있는 작품들은 그 일부에 불과한 셈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들을 보면, 논리학에 관한 저서로는  ‘범주론’(Kategoriai),  ‘변증론’(Tapica),  ‘분석론 전서’,  ‘분석

Page 152: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론  후서’(Analtica  hystera),  ‘명제론’(Peri  hermeneias),  ‘소피스트  논박’(Peri sophistikon  elegchon) 등으로 이 모든 것들은 소요학파들이 수집하고 편찬하여  ‘오르가논’(Orgaanon)이라는 표제를 붙였다. 과학에 관한 저작으로  ‘자연학’,  ‘천체론’, ‘생성과 소멸’,  ‘기상학’,  ‘정신론’,  ‘동물 부분론’,  ‘동물의 운동’,  ‘동물 발생론’ 이 있다. 그리고 미학에 관한 저작으로는  ‘수사학’(Rhetoric),  ‘시학’(De  arte  phetica) 등이 있으며,  철학에  관한  저작으로는  ‘윤리학(Etica)’,  ‘정치학’(Politica)’,  ‘형이상학’(Metaphysics) 등이 있다. 끝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교육에 대한 생각을 찾아볼 수 있는 저서로는  ‘윤리학’과  ‘정치학’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저서의 제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본격적인 교육 이론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아니며, 플라톤의  ‘국가론’에서처럼, 국가 통치를 위한 수단으로서의 교육의 기능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 자신의 스승 플라톤이 이데아(관념)들과 신의 영적 세계를 지향하는 철학을 발전시킨 데 반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에게서 떠나 자연의 영역과 자연 연구 방법론에 초점을 둔 철학 체계를 발전시켰다. 그의 논리학 저서들에는 사고 과정에 대한 예리한 분석이 발견된다. 그가 자연철학에 관해 쓴 논문들은 물질 우주를 호방하게 설명한다. 그의 윤리학 저서들도 개인과 사회의 삶에 대해서 비슷하게 호방한 통찰을 드러냈다. 그는 형이상학이라는 학문을 창시하기도 했다. 물론 이 분

Page 153: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야에서 수많은 쟁점들을 다루지 않았거나 해결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나타나 있는 공백들은 인간심리의 분야에서 기본적인 문제들을 일으키기도 한다. 인간에게서는 영적 세계와 물질 세계가 동시에 발견된다. 인간의 육체는 변화하는 물질 세계에 속해 있지만, 그의 오성(understanding)은 물질 세계를 초월하여 영원하고 썩지 않고 신적인 세계에 속한다. 오성과 개인의 관계는 끊이지 않는 주제이다. 모든 사람들을 아우르는 하나의 지적인 영혼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각 개인에게 개별적인 영혼이 있는 것인가? 이 영혼이 어떻게 육체와 결합해 있는가? 죽은 뒤에 영혼은 어떻게 되는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추종자들은 서로  @관련된 이러한 질문들을 상이한 방법으로 다루었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주장하기를, 모든 운동과 변화는 그것들을 발생하게 하는 것, 즉 동인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제1동인이 존재한다고 한다. 자체적으로 영원하고 다른 무엇에 의해서도 변하지 않는 이 제1동인은 결국 종교에 있어서는  ‘신’과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인간이 추구해야 할 지식의 참된 대상이라고 확정하면서 결국 하나님은 영원한 정신이라고 말했다. 이 영원한 정신이 모든 존재자를 움직이게 하는 제1 원리(Prim nover)라고 주장한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훗날 후기 스콜라주의자(Scholasticism;  중세  사상을  대표하는  학문의  명칭이었는데,  신앙과 

Page 154: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이성, 신학과 철학을 조화시킨 신앙의 철학이라고 볼 수 있다.  ‘알기 위해 믿는다’고 한 어거스틴의 입장을 계승한 스콜라주의는 그들의 교부라고 할 수 있는 안셀름<1033‐1109>으로부터 시작하였고, 토마스 아퀴나스<1225‐74>에게서 절정을 이루었다. 루터<1483‐1546>는 자유의지, 은혜, 신앙, 의, 공로 등에 관한 이들의 가르침에 동조할 수 없었다)인 아퀴나스에 의하여 하나님 존재의 증명론으로 되살아난다. ▣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역사는  그의  저서들의  활용성에  의해서도  결정되었다. 그는 생시에 플라톤의 스타일로 대화록들을 써서 명성을 얻었다고 알려지지만, 이 저서들은 모두 현존하지 않는다. 현존하는 저서들은 자신의 학교 리케이온을  @위해서@ 쓴 것으로서 종종 적절한 주해가 붙어 있다. 이 저서들은 주전  70년경에 로도의 안드로니쿠스(Andronicus)가 편집하여 펴냈다.  3세기에 신플라톤주의자 포르피리(Porphyry)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Categories)에 대해 주석을 썼는데, 이 주석은  6세기에 보이티우스(Boethius,  ca 480‐524)가 라틴어로 번역했다. 보이티우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총서를 라틴어로 번역할 계획이었지만, 이 작업을 완료하기 전에 처형되었다.  (당시 그는 기독교 철학자요 정치가로서 고트 족의 로마 지배자 테오도릭의 궁정에서 실세로서 활약하였다. 그러던 중에 콘스탄티노플 황제와 내통했다는 이유로 반역죄로 고소당하게 되어 파비아에 수감되었다가 결국 그곳에

Page 155: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서 처형되었다.) 그 결과 서유럽에서는  12세기까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저서들만  알려졌고,  따라서  아베랄드(Abelard)와  그의  동시대인들은  ‘보편자들’(universals, 형이상학적 실체들)에 관해서 연구하고 토론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나머지 분야에 관해서는 하나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슬람 세계에서는 그의 저서들이 시리아어, 아랍어, 히브리어로 번역되어 잘 알려졌으며, 결국 서방 세계에서는 처음에는 아랍어 번역본들을 재 @번역함으로써, 나중에는 헬라어 본문들을 직접 번역함으로써 알려지게 되었다.  13세기 이래로는 라틴어와 헬라어로 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들을 구할 수 있었고, 따라서 그 저서들의 영향은 입수 가능성보다는 관심에 좌우되었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교부들에게는 비교적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그의 경험적이고 과학적인 초점은 신앙 지향적이던 당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별로 매력이 없었다. 어거스틴(Augustine) 같은 사람에게는 플라톤주의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얻어낸 가치 있는 모든 것을 자신들의 사상에 포함시킨 것으로 비쳤다. 어거스틴은  ‘고백록’(Confessions)에서 자신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을 읽고 그 내용을 이해했지만, 그가 유물론자였기 때문에 그에게서 별로 유익을 얻지 못했다고 기록한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은  12세기에 접어들면서 보다 본격적으로 느껴졌다. 신학자들 사이에서 보편 개념들에 관한 논

Page 156: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쟁이 벌어졌고,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적 방법론들은 자연히 삼위일체, 성육신 같은 신학 쟁점들에 적용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전파하는 데 가장 크게 이바지한 사람은  ‘긍정과 부정’(Sic  et Non)을 쓴 아베랄드였다. 이 저서에서 아베랄드는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올바로 이해하면 대부분 조화를 이루는 교부들의 견해들을 수집했다. 그의 변증법적 방법론은  13세기의 쟁점들과 신학 개요들에서 가장 큰 발전을 이룩했다. 즉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과학과 철학에서 이전 시대의 광범위한 그리스 지식을 발전시키고 체계화했으며, 그 결과 그의 저서들은 여러 다른 시대들과 지역들에서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그는  7‐12세기에 알렉산드리아  헬라인들,  시리아인들,  아랍인들,  유대인들에게,  그리고  13세기부터는 기독교 서방 세계에까지 스승 역할을 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이 끼치던 영향은 현대의 경험적 과학이 등장하면서 쇠퇴했다. 물리학과 천문학에서 훨씬 더 빨리 쇠퇴했으며, 생물학에서는  19세기까지 지속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과 정치학과 형이상학은 철학자들이 오늘날까지도 연구하는 전거로 남아 있다. 칼빈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바, ‘육체와 영혼의 불가분리성’을 배척한다.    #아리스티데스(Aristides,  B.C.  525경‐467)  (3.24.10): 아테네의 정치가이며 군인으

Page 157: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로 리시마코스의 아들로 알로페케에서 태어났다. 절제의 미덕을 가진 훌륭한 인격자로 재정관, 아르콘 등을 지냈다. 마로톤과 살리믓, 플라타이아 전투에 나가 큰 공을 세웠고,  ‘정의로운 사람’이라는 이름을 얻었으나 정적이었던 테미스토클레스의  음모로  추방당했다.  ▣  아리스티데스가  이렇게  처음에는  ʹ정의로운  사람ʹ이란 별칭까지 들으며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는데, 뒤에 와서 미움을 받게 된 까닭은 테미스토클레스가 민중에게 아리스티데스는 사사로이 모든 소송 사건을 심리 판결하여 재판의 공식성을 없앴으며, 호위병이 없다 뿐이지 독재를 남모르게 행하려 한다는 헛소문을 퍼뜨렸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민중도 그 즈음에 와서는 승전국의 국민으로 교만한 마음이 생겨 자기네들보다 높은 지위와 명예를 가진 사람의 명성에 반감을 갖고 있었다. 이리하여 그들은 각지에서 시내로 모여들어 그의 명성에 대한 질투심을 감추고, 아리스티데스가 왕이 되려 한다는 미명 아래 패각 투표를 실시해서 그를 추방했다. 이렇게 아리스티데스를 탄핵한 그들은 자신들의 명예에 대한 시기심을 독재 정치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패각 투표는, 범죄를 벌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개인의 권력이나 명망이 너무 커지는 것을 눌러서 꺾어 놓기 위한 수단을 듣기 좋게 명명한 것에 불과하다. 질투의 자위책치고는 과격하지 않은 방법으로, 상대에 대한 적개심이 돌이킬 수 없는 일(사형)에 이르지 

Page 158: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않게 하고,  10년 동안만 다른 지방에 나가 살게 하는 것이다. 패각 투표에 의한 추방 방법은 대략 다음과 같다. 사람들은 각자 조개 껍질에 추방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써서 공회장에 판자로 설치한 곳에 던져 넣는다. 그러면 장로들이 그것을 한데 모아 그 수를 헤아려 투표자가  6천명 미만이면 그 투표는 무효로 처리한다. 그 이상일 경우에는 거기에 적힌 이름들을 각각 분류하여 표가 가장 많이 나온 사람을  10년 동안 추방한다고 발표하는데, 그의 재산은 자유로이 사용하게 한다. ▣ 아리스티데스 추방 투표 당시, 사람들이 조개 껍질에 추방할 사람의 이름을 적었는데, 한 문맹자는 아리스티데스에게 조개 껍질을 내밀며 그가 아리스티데스인 줄도 모르고 아리스티데스의 이름을 써 달라고 부탁을 했다. 아리스티데스는 짐짓 놀라며, 그가 당신에게 무슨 피해라도 입혔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아니오, 나는 그를 전혀 모릅니다. 하지만 곳곳에서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떠드는 것이 듣기 싫어 그럽니다.” 라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아리스티데스는 아무 말 없이 조개 껍질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 주었다. 이윽고 추방되어 아테네 시를 떠나게 되었을 때, 그는 두 손을 높이 들어 이렇게 기도했다.  “이 땅의 민중이 아리스티데스를 다시 생각할 정도의 불행이 아테네에 생기지 않게 해주소서.”  

Page 159: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아리우스(Arius,  250‐337)  (1.13.04): ▣ 리비아에서 출생한 아리우스는 말시온(Marcion, 2세기)과 함께 교회로부터 가장 많은 공격을 받은 이단자로, 기독교 초기에 나타난  4대 이단들의 첫 번째 시대를 열었다. 한때 순교자인 안디옥의 루치아누스의 제자였던 아리우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철학과 신학을 연구했다. 그는 그곳에서 베드로 주교에 의하여 집사로 임명을 받았다. 이후에 알렉산더(Alexander, 313‐28년) 주교에 의하여 바우칼리스 교회의 장로로 임명되었으며, 종교적 열성과 수사학적 노련미를 갖춘 설교자로 정평을 떨쳤다. 그는 종교적 산문 시인으로서도 널리 알려졌다. ▣ 아리우스에게 중요했던 것은 하나의, 영원 불멸하고, 변화되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었으며, 그를 통하여 만물이, 심지어 성자까지도 피조되었다는 신앙이었다. 아리우스는 성경적 근거로 잠언  8장  22절 이하를 인용했다. 그러나 아리우스의 신관은 철학적 영향을 받아서 형성된 것이기도 했다. 신적인 본질의 유출 또는 일부의 분리라는 하나님의 확대에 대한 사상과 아버지를 통한 아들의 영원한 생산이라는 사상도 그에게는 참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그에게는 말씀(로고스), 즉 아들도 하나님의 첫 번째 피조물로 간주되었다. 말씀을 통해서 그 밖의 모든 것이 피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교리는 그리스도에게서 창조의 중보자뿐만 아니라 세계의 구원자를 본다. 하나님만이 세계를 구원하실 수 있기 

Page 160: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때문에,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어야 한다. 그런데 아리우스는 이러한 정통 교리에 도전했던 것이다. ▣  318년에 아리우스가 알렉산더 주교의 주장에 반박을 시도함으로 둘 사이에 교리 논쟁이 벌어졌다. 당시 알렉산더는  ‘통일된 삼위일체의 위대한 신비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였는데, 아리우스는 이 설교에서 삼위의 차이를 확인할 수 없다면서 공격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온건하며 웅변술에  @능한 젊은 학자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ca.  295‐373)가 나타나서 베드로후서  1:4을 근거로 아리우스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아타나시우스가 볼 때 아리우스의 논지는 성자의 신성이 부인되는 것이요, 이는 우리에게 신성을 주시기 위하여 인간이 되신  그리스도께  대한  절대적인 모욕이었다. ▣  319년에 아리우스는 알렉산드리아 회의에서 출교를 당했다. 논쟁의 중점은 아리우스가 신적인 로고스의 동등한 영원성, 즉 하나님의 아들과 성부의 동등한 영원성을 문제시하고, 성자를 피조물로 보고 성부에게 종속시켰다는데 있었다. 그들의 스승이었던 루치아누스의 다른 제자들도 비슷한 관점을 주장하여, 갈등이 확대되었고 교회는 분열될 위기에 처했다. 결국 알렉산더 주교는  321년 아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 알렉산더 주교와 그의 후계자인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가 교회로 되돌아오는 것에 반대했다. 아리우스는 팔레스타인과 소아시아 등지의 안디옥 학파에 속한 여러 교회를 찾아

Page 161: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다니면서 자신의 성자의 성부 종속론을 설파했고, 많은 지지자들을 얻었다. 주로 안디옥 학파로 구성된 아리우스의 지지자들은 독자적으로  323년에 종교회의를 소집하여 아리우스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었다. 이에 따라 안디옥과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상호간의 적개심 상태에 빠져들었다. 이런 이유로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 288‐337) 황제는 제국의 평화를 위하여 중재자로 나서서 니케아 회의(the  Council of Nicaea, 325년  5월  20일부터  7월  25일까지)를 소집했는데, 318명 이상의 대표들이 참석한 이 회의는 나중에 제1차 에큐메니칼 공의회라고 일컬어졌다. 교회의 일치를 통하여 자신의 지배권 하에서 통일된 나라를 꾀하려 했던 콘스탄티누스는 니케아 회의의 결과가 올바르게 판결하기를 원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쌍방에 격렬한 논쟁이 시작되었는데, 결과적으로 이 회의에서 아리우스의 교설이 반박되었고, 아버지와 아들의  ‘본질적 동등성’(Homoousios)이 선포되었다. 회의의 결과 아리우스가 패배하게 되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아리우스의 저작물들을 불태우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아리우스의 저작들은 잔여 부분(적대자들의 저술에 나타난 서간문과 인용문)을 제외하고는 모두 소실되었다. 따라서 그의 본래적인 신학적 의도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 실로 니케아 회의를 근간으로 한 삼위일체 교리의 형성은 아리우스주의(Arianismus)의 도전에 대한 신학적 응답이었다. 알렉산드리

Page 162: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아의  주교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파를  반박하고  그리스도의  신성을  옹호하기 위하여 많은 글들을 내놓았다.  ‘이방인에 대항하여’(Oratio contra Gentes, 318),  ‘말씀의 성육신에 대하여’(Oratio de  incarnetione Verbi, 318),  ‘아리우스파를 반박하는 연설들’(Orationes contra Arianos, 335), ‘부활절 서신’(Easter Letters), ‘세라피온에게 보내는 서신’(Letters  to Serapion) 등이다.  (이 마지막 작품은 훗날 바실에 의해서 계속 이어졌다.) 또한 어거스틴(Augustine,  354‐430)은 생전에 아리우스주의를 철저하게 비판하면서 삼위가 동일한 본질임을 강조하는 서방 신학의 전통을 지속시켰다. 그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실을 주목하면서 인간 속에  ‘삼위일체의 흔적’(vestigium  Trinitatis)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는데, 그러한 흔적들 중의 하나로, ‘존재와 지식 그리고 의지’의 세 가지 개념을 이야기했다. ▣ 십여 년 동안에 걸친 아타나시우스와 그의 동료들과의 니케아 신조 승인에 관한 논쟁, 곧  ‘아리우스 논쟁’ 이후에, 이번에는 라오디게아의 주교 아폴리나리스(Apollinaris,  361‐90 재위)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참되고 정당한 인성이 다시 부정되었다. 그는 인간이 육체와 혼과 영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여, 로고스가 인간의 영을 대신하였다고 하는 이론으로 그리스도의 이성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이는 결국 그리스도가 완전한 인성을 취하지 못했다는 결론이 도출되는 까닭에 그리스도를 인간의 완

Page 163: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전한 구원자가 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후 제2차 공회의로 열린 콘스탄티노플 회의(381년)에서 @아폴리나리스의 교설에 반대하는 최종적인 판결이 내려졌다.  %#아셀리우스(Aselius)  (2.7.9): 칼빈은 다음과 같은 표현에서 아셀리우스를 언급

하지만, 이 사람에 대한 정보는 알려져 있지 아니하다.  “어거스틴은 … 아셀리우스에게도 비슷한 말을 써 보냈다.  ‘사람이 자기의 유약을 깨닫게 하며 그 대책으로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총을 구하게 만들기 때문에 율법은 유용하다’.”  %#아우렐리우스(Aurelius):  (4.4.10) 키프리안이 독경사로 임명한 사람인데 자세

한 인적 사항은 잘 알려져 있지 아니하다. 이와 관련하여 칼빈은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키프리안(Cyprian)은  교회에  문의하지  않고  아우렐리우스(Aurelius)라는 사람을 독경사(reader)로 임명한 것에 대해서 곤란한 사과(labored  apology)를 해야 했지만, 이런 사소한 임무에는 큰 위험성이 없기 때문에 신자들의 동의를 묻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성직자들을 임명할 때 여러분에게 문의하며 각 사람의 행실과 재질을 함께 심사숙고하는 것이 우리의 관습입니다.’ 이렇게 

Page 164: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주교가 아닌 일반 교직의 경우, 적격자를 선택하고 임명하는 일을 신자들이 주교와 장로들에게 일임하는 것은 보통이었다.”  #아우렐리우스(Aurelius,  388‐423 재위)  (4.7.2,  9;  4.12.13;  4.13.8): 아우렐리우스는 

펠라기우스(Pelagius,  354‐420)를 정죄한 것으로 유명한 칼타고 회의(412년)에서, 당시 자신이 그곳의 주교였기 때문에 의장 역할을 하였다. 로마 교회는 자신들의 수위권을 주장하기 위하여,  “아우렐리우스는 악마 같은 담력과 고집으로 교만해져서 그리스도와 베드로에게 반역했으니 당연히 저주와 정죄를 받아야 한다”라고 아우렐리우스의 후임자가 말한 @것인 양 기록한 가짜 문서를 만들어 제시하기까지 하였다. 지금 칼빈은 백주대낮에 행해진 이 사기 사건을 비웃는 것이다. 한편, 어거스틴은 아우렐리우스의 교구에서 어떤 사람이 물려받은 유산을 교회에 기부한 일이 있었는데, 이후 그의 아내가 예기치 않게 임신을 하게 되는 일이 일어났을 때, 그의 기부를 그에게 도로 돌려주라고 아우렐리우스에게 조언하기도 했다.    #아카티우스(Acatius) (4.4.8): 아미다의 주교였다.  

Page 165: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아켈라우스(Archelaus)  (2.8.44): 지금 칼빈은  “지나치게 방자하고 사치한 옷을 입은 청년을 향해서 아켈라우스가 그의 어느 지체가 불결한가가 문제가 아니라고 한 말에는 적절한 점이 있다”라고 썼는데, 아켈라우스의 인적 사항을 알만한 정보가 없다.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ca.  295‐373)  (3.20.32): ▣ 니케아 신조의 주창자이자 

삼위일체  교리의  전파자인  아타나시우스는  295년경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출생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이교도 출신이었으나 젊은 시절에 그리스도교로 전향했고 곧바로 알렉산드리아 지역의 주교였던 알렉산더(Alexander,  313‐28년)의 특별한 후원을 받게 되었다. 당시 아타나시우스는 주교의 관리인 겸 비서관이 되었고,  319년경에 집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니케아 종교회의(325년)에 참석하여, 알렉산더와 아리우스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에서 뛰어난 이론으로 수완을 발휘함으로 말미암아 알렉산더의 신임을 받는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따라서 알렉산더가  328년에 사망하자 자연스럽게 아타나시우스가 주교직을 승계했다. 그러나 그의 주교 승계의 타당성에  대해서  멜리톤  사람들(Melitianer)과  아리우스의  친구들에  의하여  시비가 일어났다.  그들은  콘스탄티누스의  총애를  받던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와  그와 

Page 166: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가까운 주교들과 협력하여, 두로(Tyrus)에서 회의를 개최한 가운데 아타나시우스를 주교직에서 물러나게 만들었다(335년).  (이때의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앞서 아리우스파를 파문했던 자신의 입장을 바꾸어, 이번에는 반대로 아리우스파의 적극적인  지지자가  되어  있었다.)  결국  아타나시우스는  트리어(Trier)로  추방되었는데(335‐37년), 그럴지라도 그는 그곳에서 중요한 신학 논증들을 집필하는 기회로 삼았다. 이때 저술된 저작들 중에서 중요한 두 권은  ‘이방인들에 대하여’와  ‘말씀의 인간되심에 관하여’이다. 이 책들을 통하여 아타나시우스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그것 안에서 선물로 주어지는 구원의 은혜적인 성격을 강조했다. ▣ 얼마 후, 자신을 추방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사망하게 되어 아타나시우스는 알렉산드리아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337년). 하지만 여전히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를 중심으로 한 아리우스파가 실세를 잡고 있었다. 이들은 콘스탄티누스 대제를 계승한 콘스탄티우스  2세(Constantius  II,  337‐61)를 충동하여 아타나시우스를 2번째로 다시 추방했고(339년), 대신 갑바도기아의 그레고리를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 임명했다. 아타나시우스가 이번에 자신의 보호처로 선택한 곳은 로마였다. 그는 이곳에서 동방의 유세비우스의 친구들에 의해서 추방을 당한 앙키라의 마르켈로스 등과 만났다. 로마 주교는 이 두 망명객을 보호해 주었고 나아가 니케아 회

Page 167: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의의 주도 인물로서 복권시켰다. 이후 사르디카 회의(Serdika, 342‐3년 사이에)가 열려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통합이 시도되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얼마 후 그레고리 주교가 사망하게 되어 아타나시우스는 자신의 고향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346년). ▣ 이후로 아타나시우스는  ‘니케아 신조’를 수호하고  ‘아리우스파’에 대항하는 투쟁 과정에서 이중적인 목표를 추구했다.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황제에 의해 임명된 주교 재판관이 그의 주교 취임의 정당성을 문제시했던 두로 회의의 결정의 타당성 문제를 다시 점검하는 일이었다. 지금은 그들이 니케아 회의에서 이미 이단자로 판결되었기 때문이다. 니케아 회의의 결정이 지속적인 효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이 부각되자 자연 두로 회의의 결정이 문제점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중요한 사실은 회의의 효력이 황제의 권력과 관계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즉 이 문제는 콘스탄티우스  2세가 독점적인 권력을 장악하면서 첨예화되었고, 니케아 신조의 추종자들을 국가 권력으로써 박해하고, 마침내 니케아 신조 자체를 폐기했던 것인데, 이번에 또 다시 황제는 군대를 동원하여 아타나시우스를 강제로 파직시켰다(356년). 이때부터 아타나시우스는 국가로부터의 교회의 해방을 위하여 그와 결탁한 주교들과 투쟁하는 전투적인 신앙 용사가 되게 되었다. 아타나시우스는 이 세 번째 추방 기간 중에(356‐61년), 이집트 사막에서 은둔하고 있던 성자 안토니우

Page 168: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스(Antouius)에 관한 책을 저술하여, 금욕주의적 이상의 성경적 기초를 찾고, 수도원  제도의  교회에로의  도입을  강구했다.  뿐만  아니라  ‘세라피온에게  보내는  편지’(Letters  to  Serapion)를 통해서는 처음으로  ‘성령의 신적 본질의 동등성’에 관한 교리를 발전시키고, 성령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관점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면서 성령의 신성을 강조하였다. ▣ 이후 콘스탄티우스  2세 황제가 갑자기 사망하게 되는데(361년), 이로 말미암아 아타나시우스는 다시 승리자가 되어 알렉산드리아 주교로 복귀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니케아 신조는 다시금 교회의 승리를 추진하는  신앙의  기치가  되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아타나시우스는  유능한  정치력을 발휘하여, 여러 지역으로 흩어졌던 니케아 신조 추종자들을 종교 회의를 위하여 불러모으기 시작했다(362년). 이 투쟁 과정에서 니케아의 결정은 아타나시우스에게 있어서 적대자의 축자 영감설에 반대하기 위한 필수적인 토대가 되었고, 아리우스주의의 극복을 위한 분명한 신학적 기초로 입증되었다. 성부와 성자의 신적 본질의 동질성(Homousie)에 관한 교리만이 구원을 하나님의 활동으로 확립시켜 주었다.  (이러한 노력의 직접적인 성과는 근소하기는 했지만, 삼위일체 교리의 형성 과정과 그 신학적 관철에 중요한 실마리가 되었다. 이 교리는 아타나시우스가 사망한 후에 특히 갑바도기아의  3대 거장인 가이사랴의 바실, 닛사의 그레고리, 나지안

Page 169: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주스의 그레고리를 통해서 완성되었다.) ▣ 그런데 아타나시우스의 시련은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잘 알려진 배교자 율리우스(Julianus,  355‐63 재위)가 로마 황제로 등극함으로 말미암아 아타나시우스는 다시 한번 네 번째 추방길에 올라야 했다(362년). 하지만 예전에 비교해 본다면 이번에는 아주 짧은 기간이었다. 의외로 율리우스가 빨리 죽게 되어, 아타나시우스가 즉시 알렉산드리아로 복귀하게 된 것이다(동년). 하지만 또 다시 동방 황제 발렌스(Valens,  364‐78 재위)에 의하여 다섯  번째  추방길에  올라야만  했다(364년).  그러나  이내  발렌티니아누스  1세(Valentinianus,  364‐75 재위)의 등극과 함께 복귀되었고 비로소 더 이상의 추방과는 상관없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 이제 지금까지의 과정을 간략하게 정리해 본다면, 아타나시우스의 신학은 그의 일생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의 기본 명제는 구원론적인 것이며, 여기에서 이레네우스(Irenaeus, 130‐202)와 관련을 맺고 있다.  아타나시우스는  실존적(Existential;  어떤  존재에  대한  궁극적인  중요성<ultimate  significance>을 의미하는데, 예를 들면, 실존적 진리, 실존적 신학 등등으로, 최근 신학적 저술과 종교적 작품에서 자주 사용된다)인 이유에서 아리우스주의, 축자영감설, 합리주의적 구원론에 반대하는 니케아 신조의 선구자적 투쟁가가 되었다. 이와 더불어 그는 삼위일체 교리의 전파자가 되었으며, 이로써 교회의 독립

Page 170: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을 부분적으로 확립했다. 이것이 비잔틴 시대의 국가 교회에서보다 서방 교회에서 아타나시우스를 높이 평가(예컨대 아타나시우스의 신조라는 명칭이 부여되었다)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 아타나시우스가 아리우스파를 반박하고 그리스도의  신성을  옹호하기  위하여  저술한  책들은  다음과  같다:  ‘이방인에  대항하여’(Oratio  contra  Gentes,  318),  ‘말씀의  성육신에  대하여’(Oratio  de  incarnetione Verbi, 318),  ‘아리우스파를 반박하는 연설들’(Orationes contra Arianos, 335),  ‘부활절 서신’(Easter Letters),  ‘세라피온에게 보내는 서신’(Letters  to Serapion) 등등. 그의 비문에  ‘세상에 대항하는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contra mundum)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듯이, 이것은 신학적인 중대한 오류와 잔혹한 황제의 권세와 법정 앞에서도 생명을 아끼지 않고 성경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사랑한 그의 생애를 집약적으로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4.7.1): 칼빈은 이 사람이 니케아 회의에서 의장 노

릇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 니케아 회의를 주제한 사람은 코르드바의 주교 호시우스(Hosius)로 알려져 있는데, 다만 회의의 결정서 명단 제일 첫 번째 순서에 아타나시우스의 이름이 나온다. 참고로 호시우스는 아무런 저작도 남기지 않았다. 

Page 171: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그가 남긴 유일한 글이라면, 아리우스파 황제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  II,  337‐61 재위)에게 보낸 서신으로, 이를 아타나시우스가 보존하였다.  “저는 폐하의 조부 막시미누스(Maximinus,  305‐9 재위)가 교회를 박해하기 오래 전부터 신앙을 고백해왔습니다. 만약 폐하께서 저를 핍박하신다면, 나는 무고한 피를 흘리고 진리를 배반하기보다는  차라리  모든  고난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아타나시우스는 그가 비록 연로한 나이 때문에 신체적 폭행을 견디지 못하여 아리우스파 신조에 서명하였으나, 죽기 전에 비통해 하면서 회개하였다고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죽음이 다가오자 마치 유언을 하듯이 아리우스파의 이단설을 버렸으며, 그런 것은 누구라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그가  357년에 죽었는지, 아니면 스페인으로 돌아가도록 허락을 받아 그곳에서  359년이나  360년에 죽었는지는 논쟁으로 남아 있지만, 여하튼 그는  60년 이상 주교로 있었고, @백 살이 넘도록 살았다고 하는 것은 사실이다.  #아티리우스 레구루스(Atilius Regulus) (2.4.8): B. C. 3세기에 활동한 로마의 장군

이며, 정치가이다. 주로 전설에 의해 미화된 그의 업적은 로마인들에게 영웅적 인내력의 본보기로 여겨진다. B.C. 276년과  256년에 콘술을 지냈는데, 2번째 콘술을 지

Page 172: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낼 때 일어난 제1차 포에니 전쟁 때(B.C.  264‐241) 동료 콘술인 루키우스 만리우스 부로와 함께 시칠리아 남동부의 에크노무스 산 근해에서 칼타고 함대를 무찌르고 아프리카에 상륙했다. 그러나 부로는 곧 본국으로 불려갔으며 혼자 남아 전쟁을 끝내야 했다, 칼타고 근처 아티스에서 적군을 크게 무찔렀으나, 그의 무조건 항복 요구에 분노한 칼타고인들은 투쟁을 계속해 결국  225년 로마군은 패하고 그는 사로잡혔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칼타고에 포로로 붙잡혀 있다가 평화조약과 포로교환 문제를 협상하기 위해 가석방되어 로마로 갔다. 그는 칼타고가 내놓은 제안을 거절하라고 원로원에 권고했으며, 로마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칼타고인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돌아갔다고 한다. 그 뒤 곧 칼타고인들에게 고문을 당해 죽었다고 하는데, 이런 영웅적 행위를 구체적으로 증명해주는 확실한 자료는 없다. 그 때문에 많은 학자들은, 그가 임무를 수행하다 결국 순국했다는 이야기는 로마인이 칼타고 포로들을 학대한 것을 변명하기 위해 지어낸 것이라 보고 있다.  #아폴로(Apollo)  (1.5.13): 로마 신화에서는 아폴로로 불리우지만, 일반적으로 알

려진 이름은 포이보스 아폴론이다. 그는 궁술과 예언, 음악의 신이며, 제우스와 레토(라토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므로 달의 신 아르테미스(디아나)의 오빠이다. 즉 

Page 173: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누이동생인 아르테미스가 달의 여신이라면 아폴론은 태양의 신이었다. ▣ 올림푸스의 여러 신들 가운데서 가장 존경을 받는 아폴론은 예술을 맡아 보는 아홉 명의 뮤즈들을 거느렸고, 의성(醫聖) 히포크라테스의 조상이라는 의술의 신인 아스클레피오스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는 전염병 따위의 무서운 병액을 내리기도 한다. 또한 신탁(神託)과 예언도 내렸다. ▣ 아폴론은 결혼을 하지는 않았으나 연애는 숱하게 하였다. 그러나 나부끼는 금발머리에 떡 벌어진 어깨, 늠름한 모습을 갖춘 그도 연애에는 몇 차례 슬픔을 맛보았다. 제우스의 미움을 산 탓으로  1년간 지상에서 목동 노릇을 하고 지낼 때였다. 들판 풀밭에서 가끔 뛰노는 예쁜 요정 다프네에게 아폴론은 그만 홀딱 반해 버리고 말았다. 멀찌감치 숨어서 다프네의 모습을 지켜보던 아폴론은 그만 풀숲에서 튀어나와 이 아름다운 다프네에게로 달려갔다. 즐겁게 뛰놀던 다프네는 무서워서 도망쳤지만, 아폴론은 미친듯이 따라갔다. 도망치던  다프네는  간신히  테사리아에  있던  페네이오스  강가에까지  뛰어왔으나 이제 곧 아폴론에게 붙잡힐 찰나였다. 다프네는 아버지인 강의 신 페네이오스에게 다급하게 구원을 요청했다.  “아버지! 살려 줘요.” 그 순간 다프네는 발의 감각이 없어졌다. 아폴론이 막 다프네를 껴안았을 때는, 이미 다프네는 한 그루의 월계수로 변해 있었다. 하늘을 향해 벌린 두 팔은 고운 나뭇가지가 되었고 출렁이던 머리카

Page 174: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락은 모두 입사귀가 되었다. 이 모습에 아폴론은 눈물을 뿌리며 맹세했다.  “지금부터 내 머리는 너의 잎으로 장식하고, 저 영광의 경기 대회에서 우승한 청년과 조국의 명예를 위해 싸워 이긴 용사의 머리에 네 잎과 가지로 만든 관을 씌워 찬양하겠다.” 그리스 조각에서 볼 수 있는 아폴론은 언제나 월계관을 쓰고 있다. 아무튼 그 이후로 텔포이 신전의 시와 노래, 그리고  4년마다 열리던 파티아의 제전에서 승리한 우승자의 머리에는 이 월계관이 최고의 영예로서 씌워지게 되었다. 지금도 보통 월계관이라고 하면 누구나 승리를 연상한다. 아폴론은 그밖에도 많은 연애의 기록을 남기고 있으나, 아폴론은 올림푸스에서도 상당한 대우를 받은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신들이 회의를 할 때 아폴론이 나타나면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으며 제우스는 금잔으로 성주(聖酒)를 따라 주었고, 아폴론이 잔을 비우고 앉아야 다른 신들도 비로소 자리에 앉았다.  #아폴리나리스(Apollinaris,  361‐90 재위)  (2.16.12):  @한 분 그리스도께 본성들이 

혼합되어 있다고 주장한 시리아 라오디게아 교회의 주교 아폴리나리스는 대단히 악명이 높았다. 아타나시우스의 친구이자 호모우시오스(성부와 성자의 동일 본질)의 지지자였던 그는, 제롬(Jerome,  345‐420)에 의하면  ‘성경에 관해 헤아릴 수 없을 

Page 175: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만큼 많은 책을 썼다’고 알려지는데, 덧붙여 바실(Basil,  330‐379)은 말하기를, 그가 신학과 변증에 관해 쓴 저서들까지 합하면  ‘세상을 그의 책들로 채울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현존하는 저서들은 대부분 단편들이거나 다른 저자들의 글에 인용된 것들이 전부이다. ▣ 아폴리나리스의 기독론의 배경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그분의 성육신 위격에 두 본성이 결합되어 있음을 강력히 주장한, 아타나시우스와 키릴(Cyrill, Alexandrien,  ca.  380‐444)의 알렉산드리아 학파였다. 이런 전제들을 근거로 아폴리나리스는 안디옥 학파의 이원론적 기독론을 비판했다. 그의 관심은 내내 구원론에 있었다. 완전한 신이 아닌 그리스도는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 단순한 인간의 죽음으로는 효과적인 구속을 이룰 수 없다. 하지만 만약 그리스도가 완전한 신이라면 그분의 인성은 다소 신성 안에  ‘흡수’되는 것이 당연하며, 그로써 예배의 적합한 대상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 구원은 성찬 때 그리스도의 신격화된 육체에 참여하는 데 있다. 인간적 요소가 신적 로고스와 연합하여 신격화함으로써, 그리스도는 윤리적으로 불변한 분이 되셨다. ▣ 그러므로 부정적인 면에서, 아폴리나리스는 그리스도 안의 두 본성을 단순히 병렬로 놓는 해석을 배척한다. 그는 요비아누스에게 이렇게 썼다:  “(그리스도 안에) 예배를 받아야 하는 본성과 예배를 받아서는 안 될 본성 두 가지가 있는 것이 아니다.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Page 176: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말씀 안에는 하나의 본성이 있다.” 그는 성경은 그리스도를 한 분으로, 즉 하나의 적극적인 원칙의 구현 곧 신적 로고스로 가르친다고 주장한다. 긍정적인 면에서, 그는 그리스도께  ‘새로운 본성ʹ을 돌리며, 그 결과 그분의 위격은  ‘새로운 피조물이자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의 육체를 이룬 기이한 혼합체’라고 한다. 하지만 인간과 하나님이 어떻게 그처럼 절대적인 하나의 존재로 합체되었을까? 아폴리나리스에게 있었던 신앙의 강력한 동기는 그리스도에게서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심리학에서는 인간 정신을 자신의 의지에 의해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주체로, 따라서 악한 선택의 좌소로 보았다. 그러므로 아폴리나리스는 자신의 그리스도 위격 구조에서 이 요소를 제거했다.  “만약 그 자체가 정신이 있다면,  죄를  없이하려는  성육신의  첫째  목적이  그분  안에서  성취되지  않는다”(Apodeixis, 단편,  74).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위격은 로고스와  ‘(인간 정신이 제거된) 인간 본성’의  ‘상호 혼합체’이자,  ‘전적으로 인간도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도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결합인,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간적  존재’인  셈이다”(Syllogysmoi, 단편,  113). 성육신에서 인간을 박탈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노시스에 의해 품으신 목적과 상반된다. 편재로써 모든 존재들 안에 계시는 로고스께서 스스로를 제한하사 인간 육체로 거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 

Page 177: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아폴리나리스는 닛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 335‐395)로부터  (복음서들과 히브리서가 충분한 증거를 제시하는) 그리스도의 충만한 인간적 경험들을 부정했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았다. 인간의 완전한 구원을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을 친히 지니셔야 한다는 것이 그레고리의 주장이었다. 아폴리나리스주의는 로마 회의(377년)와 알렉산드리아 회의(378년), 안디옥 회의(379년), 그리고 마지막으로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년)에서 차례로 단죄를 당했다.  #안셀름(Anselm,  1033‐1109)  (2.2.4): ▣ 이탈리아의 아오스타에서 출생한 안셀름

은 프랑스 노르망디에 있는 베크 수도원 학교에서 초기의 학문을 닦았다. 안셀름은 스물 여섯살이 되던  1060년에 베네딕트회 수도사가 되어 베크 수도원에 들어갔고,  1063년에는 부수도원장과 수도원 학교의 교장이 되었고,  15년 뒤인  1078년에는 대수도원장이 되어 베크 수도원을 정신적, 신학적 방사력의 중심지로 만들면서  15년간 직위를 유지한다(1078‐93년). 이 수도원의 영향력은 멀리 영국에까지 퍼졌다. 안셀름은  1093년에  @켄터베리의 대주교가 되었는데 그는 주교 활동을 통하여 영국 왕이 요구하는 충성에 반대했고, 교회를 국왕으로부터 독립시키는 교회의 자유를 위한 강력한 투쟁을 전개했다. 그 결과 안셀름은 왕권을 통한 주교 서임 문제

Page 178: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와 이로 인해 생긴 교황권을 둘러싼 논쟁으로 두번에 걸쳐 국외로 추방당하기도 했다. 안셀름은 켄터베리에서  1109년  4월  21에 사망한다. ▣ 안셀름의 신학적 중요성은  ‘스콜라 학파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얻은 데서 추론할 수 있다. 이러한 명칭은 그가 이룩한 교부 연구와 변증학(Apologetics; 기독교에 대한 지식적인 반대론에 대항해 기독교를 이성적으로 변호하려고 했던 전통적 견해를 의미하는데, 기독교 신앙의 어떤 요소가 진실한지 그렇지 않으면 논증할 수 없을 만큼 진실하지 않은지를 결정하려고 시도했다. 그래서 반대로  ‘호교론’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전수에 근거한 것이다. 이러한 조화가 베크 수도원 학교는 물론 그의 문학 작품에 잘 각인되어 있다. 그의 특수한 강조점은 두 권의 주요 저서의 제목에서 잘 나타나는데,  그것은  각기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명상을  집중적으로  다룬  ‘모노로기온’(Monologion,  1076년)과  하나님에  대한  존재론적  증명을  다룬  ‘프로스로기온’(Proslogion,  1077▣78년)이다. 언뜻 제목만 보면, 여기에서 언급된 신앙과 이성의 관계가 합리주의(Rationalism; 이성을 모든 진술의 궁극적 조정자나 판단자로 간주하려는 이론적, 철학적 입장을 의미하는 일반적인 용어이다. 또한 이것은 논리적, 연역적 형태의 사상 체계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따라서 기독교 신학에서는 이성이 종교적 진리의 궁극적인 판단자인지의 여부가 논란거리이다)로 오해될 가능

Page 179: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성도 있다. ▣ 안셀름에게 있어서 모든 사상적인 노력은 이중적인 신학적 괄호에 포함되어 있다. 그 사상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하나님의 은사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과제이다. 그것이 사색의 모형이기 때문에, 객관적인 타당성과 합리성을 취한다. 여기에 안셀름의  ‘지성적 낙관주의’가 자리를 잡고 있다. 두 번째 신학적 괄호는 사색의 최종적 목표이다. 신앙과 함께 신관에 대한 합리적 인상이 병렬된다. 이같은 공동 목표와 더불어 신앙과 이성이 상호 관련을 맺게 되고. 하나님 신앙 안에서 완전한 성취를 이룩하기 위한 신앙의 사색이 요청된다. 역으로 신앙은 생동적인 개인적 확증을 얻고, 비그리스도인들과의 대화 속으로 전달하기 위하여 사고의 이해력을 필요로 한다. ▣ 그는 칸트 이후에 그렇게 명시된 존재론적 신  증명에  직면하여,  신앙과  이성의  병렬을 그의  ‘프로스로기온’에서  구체적으로 전개했다.  “나는 믿기 위해서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다. 이것을 위해서도 나는 믿는다. 즉 만약 내가 믿지 않는다면 이해하지도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안셀름은 이 저서에서 그의 유명한 신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논증’을 제시했다. 즉 안셀름은  “나는 체험하기 위하여 믿는다”고 한 버나드(Bernard of  Clairvaux,  1090‐1153)의 경우와는 달리,  “나는 알기 위해서 믿는다”(Credo  ut Intelligam)고 하는 것을 자신의 신학의 기초로 삼았던 것이다. 이러한 안셀름이 하

Page 180: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나님의 존재를 신학적으로 증명하고자 한 토대는 인간의 하나님 형상성이었다. 신학의 사색 목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연주 형태이다. 안셀름은 이러한 목표를 비신자들도 따를 수 있도록 보편 타당하고도 근본적으로 해명하려고 했다. 그는 구체적으로 일반에 적용되고 있는 신 개념, 즉  ‘위대한 분에 대해서는 사유할 수 없다’는 생각이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개념이 논리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실적인 실재를 해명해야 한다. 이러한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거스틴적이며 네오 플라톤적 사상가인 안셀름이 인식의 질서와 존재의 질서를 두 개의 분리된 영역으로 나누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사색은 순수 주관적인 것이지, 오성만으로 존재하는 개념의 형태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식에서 존재하는 현실의 파악이다. 이러한 신 증명에 대한 가장 중요한 비판가로서 토마스 아퀴나스와 칸트는 사색에서 존재로 넘어가는 비합리적 절차에 관하여 말한다. 반면 안셀름의 사상은 인식론에 있어서 사색과 존재의 밀접한 통일성 또는 더 나아가서 동질성을 주장하는 데카르트, 헤겔 등의 신학자와 철학자들에 의해 변호되었다. 그리고 이  ‘프로스로기온’은 칼 바르트(Kar Bart)라는 현대 신학자에게 각별한 의미를 주었다. 그는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 1931)에서 안셀름의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 방법’을 분석하고, 그것을 자신의  20세기 신학에 대한 

Page 181: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접근법의 선례로 삼았다. ▣ 안셀름은 그의 저서  ‘모노로기온’에서는 신앙에서 긍정된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과 존재에 어느 정도의 합리성과 사색의 필연성이 있다는 것을 해명하고자 했다. 그는 여기에서 어거스틴과 같이 인간 정신의 삼층 구조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자아의 모형이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 이와 유사하게  ‘말씀의 인식’,  ‘사랑 안에서의 인식의 성취’,  ‘인간의 영적인 삶 속에서의 인식의 성취’라는 인식의  3단계에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삶이 반영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이러한 사색 과정의 목표는 삼위일체의 신비에 대한 대략적 이해이다. 그는 비신자들에게 그 대변적인 합리성을 설명해야 한다고 한다. 이처럼 안셀름에게 있어서 삼위일체적 신앙의 신비는 유비적 개념으로 하나님에 관하여 말할 수 있는 안전한 영역이다. ▣ 안셀름의 존재론적 신 증명과 더불어 특히 그의 구원 이론이 역사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이 이론을 그의 세 번째 야심작인  ‘하나님은 왜 인간이 되셨는가’(Cur Deus Home, 1094‐97)에서 전개했다. 이 책은 안셀름이 베크 수도원의 수도사 보소와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 그는 성경을 직접 인용하지 않고 그리스도교적인 구원 신앙의 사상적 견고성을 제시하고자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반영이 이 세상에서 승인된 질서를 그의 영광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죄로 형성된 무질서는 회복을 

Page 182: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필요로 한다. 그것은 인간에 의해서 이뤄진 행동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무한한 보상을 제시하면서 회복을 요구하신다. 따라서 하나님이자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희생적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다. 안셀름에게 있어서, 비록 그것이 후대의  ‘형벌적 대속설’(penal  substitutionary doctrine)에 비교하여 몇 가지 부족한 점이 발견되긴 할지라도, 당시로서는 그의  ‘하나님의 영예에 대한 속상설’은 기독교 신학의 주요 주제인 속죄론(Atonement; 하나님과 인간의 깨어졌던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망을 통하여 회복되는 것을 의미하고, 따라서 구원론과 연결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하나님의 손상된 영예를 만족시켜 드렸다고 보는 것이 안셀름의 속죄론의 특징이다) 발전에 중교한 전기가 되는 이론이었다. 그는 시종일관 인간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속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입장을 취한다. ▣ 안셀름은 초기 스콜라주의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신학자로 평가되고 있다. 어거스틴과의 결속에도 불구하고 안셀름의 해석학, 신론, 삼위일체론, 구원론은 창조적인 독창성을 보여주었다. 여하튼 그가 목표로 삼았던 것은, 십자가의 필연성이며, 이 필연성은 신앙적으로 대단히 합리적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저서들을 통하여, 신앙에 대한 확고한 증거를  @제시하려 하기 보다는 신앙이 얼마나 합리적인 것인가를 입증하려고 했다. 기독교 

Page 183: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신앙이 지니는 내적 조화의 아름다움은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바라보는 신자들에게 기쁨이 된다. 안셀름은  ‘신이 인간이 된다는 것은 품위를 떨어뜨리는 것’이라는 불신자들의 반론에 대응하여, 기독교 메시지가 진리임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이 십자가 이외의 다른 일을 하실 수 없었다’고 @주장하는 데로까지 나아간다. 그는 십자가의 사건이 왜 참된가를 이해하기 위하여 어떻게 이성을 사용해야 하는가를 역설했고,  따라서  결국  신앙에  호소한다.  ▣  그러면  지금  칼빈이  지적한  안셀름의 ‘자유의지관’은 어떤 것인가를 보자. 그는 이  ‘의지의 자유’(the  freedom of  the will) 문제와 관련하여 주의 깊은 생각을 요하는 암시들을 제공하였다.  “그는 인류 조상의 행위는 분명히 자발적이며, 순수한 자의지의 행위였으나, 진정한 자유의 행위는 아니었다”고 해석한다. 그들이 범죄한 것은 자유 때문이 아니고, 그들이 분명 자유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범죄의 가능성(possibilitas  peccandi) 때문에 죄를 범했다. 그들이 하고 있는 바와는 다르게 행동하려는 힘은, 그들의 자유에 아무 것도 가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유가 없이도 임의로 거룩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참 자유와 자발적 능력 자체를 구별한다. 전자는 상실되었으나, 후자는 그대로 남아 있다. 의지의 참 목적과 목표는 선악간에 어느 것을 택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선을 택하는데 있다. 자발적 능력(the  voluntary  faculty)은, 하나님께서 다만 

Page 184: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의를 행하도록 하기 위해서 주셨을 뿐, 결코 다른 것을 위해 주신 것은 아니다. 그것의 참된 자유는 거룩함을 스스로 결정하는데 있다. 이 말은 자유는 임의(caprice)라는 관념과 또 의지는 무관심의 자유라는 관념을 반대한다는 뜻이다. 자유는 하나의 대상, 즉 거룩함만을 택하도록 창조된 것이다. 그러나 이 목적을 받아들이는 것은, 반드시 자결정이어야 하며, 어떤 외부적인 강요에 의해서 되어서는 안 된다. 악을 택하는 능력이 시련을 목적으로 하여 주어졌을 때 그것은 완전한 참된 자유에서 제외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조리에 맞지 않는 선택의 위협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안셀름의  자유의지관을 칼빈은 다소  ‘모호하다’는  표현으로서 평가한다.    #안티오쿠스(Antiochus, B.C. 176‐164 재위) (1.8.10) (4.7.25): 수리아의 에피파네스 

4세(Epiohanes Ⅳ)를 가리킨다. B.C. 176년 왕위에 오른 에피파네스  4세는 팔레스틴에 헬레니즘 문화 이식 정책을 강력하게 실시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를 우상 숭배와 배교로 단정하고 강력하게 반발하게 된다. 그러자 B.C.  167년에 안티오쿠스 4세는  ‘신의 출현’이라는 의미를 갖는  ‘에피파네스’(Epiphans God manifest)라는 칭호를 스스로 부여한 후, 유대교의 헬라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게 된다. 그는 예

Page 185: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루살렘 성전의 제사 의식들, 모세의 율법 교육들, 할례와 안식일 및 기타 절기들을 폐지시켰을 뿐만 아니라 유대 경전들을 불태우라고 명령하였다. 더욱이 번제단에 제우스 신상과 자신의 신상을 세우고 우상 제사를 지냈다. 이러한 종교 탄압 정책은 마침내 맛디아 제사장과 그의 다섯 아들이 주도하는 반란으로 발전하게 된다. 당시 경건한 핫시딤들의 지원을 힘입은 맛디아는 게릴라전으로 마을을 습격하고 이방 제단을 파괴하며, 헬라 문화에 동조하는 유대인들을 살해하고, 율법에 따라 아이들에게 할례를 행하였다. 이들의 신출귀몰한 투쟁을 견디지 못하여 마침내 안티오쿠스  4세는 유대 종교 금지령을 해제하게 된다. 이러한 때에 맛디아가 갑자기 사망하게 되는데, 따라서 그의 아들 시몬이 지휘권을 계승했다. 다른 아들 유다는 군대를 용맹스럽게 지휘하게 되어  ‘마카비’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훗날 이 별명은 이들 가문을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다.    #알렉산더(Alexander,  105‐115 재위)  (4.17.43): 이른 바 로마의  5현제 중의 하나

인 트라야누스(Trajanus,  98‐117 재위) 황제 치세 때 로마 교회의  6대 주교직을 수행하였다.    

Page 186: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암브로스(Ambrose,  339‐397)  (1.14.20): 밀라노 교회의 주교 암브로스는 갈리아 지방 트리어에서 지방 총독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부친이 사망한 후에 로마에서 고전적인 교육 과정을 밟았다. 그는  31세의 나이로 밀라노의 지방 장관직에 임명되기 시작하여 마일란드의 집정관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곳에서 갑자기 아리우스(Arius) 추종자인 주교 아옥센티우스(Auxentius)가 사망하게 되어, 정통파와 아리우스파 간에 주교 자리를 놓고 다투는 것을 중재하다가, 뜻밖에도 자신이 그의 후임자로 뽑히게 되었다. 당황한 암브로스는 사양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한계에 몰려  373년  11월  24일 세례를 받고, 8일 후인  12월  1일 주교에 취임하였다. ▣ 주교직 초기에는 많은 시간을 들여 연구에 몰두하였고, 특별히 신앙의 실천에 나서 자신의 많은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특히 당시 방탕한 아들로 인하여 고민과 슬픔에 빠져 기도하던 어거스틴의 모친 모니카에게 기도하는 자의 자식은 망하지 않는다는 말로 위로하였다. 암브로스는 신앙심이 깊고 설득력 있는 설교자였으므로 그가 설교하는 바실리카 예배당에는 그의 설교를 들으려고 몰려나온 수많은 사람들로 매주일마다 가득찼다. ▣ 그는 당시 황제들과 맺은 친분 관계로  4세기 초에 가장 영향력 있는 교회의 인물이 되었다. 그는 니케아 공의회에서 정통 신조를 확실하게 관철하는 일에 도움을 주었다. 계속해서  381년의 아퀼레이

Page 187: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아 교회 회의와  382년의 로마 교회 회의에서도 아리우스파를 패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와 동시에 그는 일루리엔 지방에 신실한 주교들을 세우는 일에 성공했고, 그의 영향을 많이 받은 권력자들, 특히 서방 공동 황제 그라티아누스(Gratianus, 375‐83 재위)에게서 많은 지지를 얻어 냈다. 하지만 세상 권력이 교회를 침범하는  것을  단호하게 막아냈다.  가령  아리우스파인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2세(Valentinianus  II,  375‐92 재위)와 그의 섭정자인 모친 유스티나로부터 밀라노의 성당 중 하나를 아리우스파에게 양도하라는 명령을 끈질기게 받았지만, 암브로스는 민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끝까지 거부하였다. 암브로스는 교회에 대한 국가의 간섭을 단호하게 배격함으로 교회의 권위를 월등히 신장시켰다. ▣ 이 사실을 웅변처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390년에는 데살로니가의 원형 극장에서 로마 군인들이 난동자들의 투석으로 죽는 일이 발생하였는데, 발끈한 동방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I,  379‐95 재위)는 군대를 풀어서 수천 명의 백성을 살해하였던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암브로스는  7개월 후 때마침 황제가 밀라노에 왔을 때, 교회 앞에서 공개적으로 사죄하지 않으면 성찬에 참석시키지 않겠다고 하여 기어코 황제를 굴복시켰다. 암브로스는 이 사건을 통하여 비록 황제라 할지라도 신앙 안에서는 한 사람의 평신도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각인시켰던 것

Page 188: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이다. ▣ 하지만 무엇보다도 암브로스는 밀라노의 주교로서 사목 책임을 부여받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예전에 깊은 관심을 가졌는데 당시의 송영과 찬미의 예전법이 오늘날까지 존속된 것은 그의 영향이다. 그는 순교자 추모를 통해서 그 지역의 신앙전통을 활성화시켰다. 그는 지칠 줄 모르게 활동하다가  397년에 사망했고, 암브로시아나 성당에 안장되었다. ▣ 사람들은 암브로스와 같이 교회적 실천에 종사했던 인물의 신학적 업적을 높이 평가하지 않으려고 한다. 의심할 여지 없이 전직이 관료였던 그는 과거의 사상가들을 많이 의지했는데, 예컨대 그의 유명한  ‘성직자의 의무에 관하여’(On the Duties of the Clergy)는 키케로(Cicero)가 파나이투스에게 영향을 받아서 쓴  ‘의무들에 관하여’(On  Duties)에 의지했고, 구약성경 주석은 필로에 의지했다. 그가 바실(Basil,  330‐379) 대제의  6일 동안의 활동에 대한 해석을 따르면서, 이것을 우화가 아니라 역사적인 주석의 방식으로 채택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네오‐플라톤주의의 영향과 그의 스승 키프리안(Cyprian,  200‐258)의 영향을 받아 그의 사고 방식이 결정되었고, 이것은 그의 신학 전개 과정에서 결정적인 특징으로 나타났다. 그는 죄를 영과 육의 대립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계명의 위반으로 보았다. 암브로스는 하나님을 통한 계시의 의미를 강조하였고, 모든 이단적 입장에 맞서서 이러한 표상을 보전하려고 했다. 그래서 이 밀라노의 주교는 교

Page 189: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회의 편에 서 있는 변호자로서 으뜸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제도적인 성격을 초월하여 영적인 차원에까지 영향력을 나타냈다. 그런 점에서 베드로의 신앙에 대해 마태복음  16장  16‐18절에서 반석이라고 하신 예수의 말씀에 대한 그의 해석도 중요성을 갖는다. 로마 카톨릭 사람이라면, 어떤 경우에도 로마 교회를 수호한 제1인자로서 암브로스를 추대하는 일에 이의가 없을 것이다.  #야누아리우스(Januarius)  (4.12.20): 어거스틴이 보낸 둘째 서한의 주인공인데 비

네벤툼의 주교로써 활약하다가 순교했다.    #어거스틴 스테우쿠스(Augustine Steuchus)  (4.11.12):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로

렌조 발라(Lorenz Valla, 1407‐1457)가 위서라고 밝혀낸  ‘콘스탄티우스의 헌서’를, 진짜라고 반박하라고 사주한 교황 측에 고용되어 삯군 변호 활동을 했다.  #어거스틴(Augustine,  354‐430)  (1.05.09): ▣ 기독교 신앙의 위대한 신학적 종합

자요 해석자인 어거스틴은 오늘날 알제리의 수크 아라스, 즉 타가스테(Tagaste)에서  354년  11월  13일에 출생했다. 그의 부친 파트리키우스는 관리였고, 모친 모니카

Page 190: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Monica)는 경건한 그리스도인으로서 평생 동안 아들을 위하여 기도한 것으로 유명하다. 부모는 아들에게 있는 천재성을 키워주려고  16살이던 어거스틴을 칼타고로 보냈지만, 그는 학문 연마 중에 한 여인과 동거하면서 아들을 낳기까지 하는 등 극심한 타락으로 떨어졌다.  29세 되던 해에 로마로 가서 수사학을 가르치다가 385년경에 다시 황제의 주거 도시인 밀라노로 돌아오게 된다. ▣ 이곳에서 어거스틴은  플라톤(Plato)에게  몰두하기  시작하여,  신플라톤주의자들인  플로티누스(Plotinus,  205‐270년), 포르피리(Porphyry,  232‐303년)와 같은 사람들의 작품에 몰두했고, 마침내 신플라톤주의자가 된다. 결국 어거스틴은 이 철학을 통하여 하나님은 빛이시며,  악이란  궁극적인  실체가  아니라  선의  결핍이라고  깨달으면서,  마니교(Manicheism)에 대한 그의 오랜 고민은 끝을 맺게 된다. “나는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다”(Credo  ut  intelligam)라고 하는 유명한 말을 한 것은, 신학과 철학 또는 신앙과 이성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그가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 밀라노에 머물고 있던 어거스틴은  33세가 되던 해에 불법적인 사랑으로 얻은 아들 아데오다투스(Adeodatus)와 함께  387년 부활절 저녁에 암브로스(Ambrose,  339‐397)에게서 세례(Baptism; 기독교가 출범하면서 최초로 행한 의식인데,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 생명으로 소생시키시는 성령의 

Page 191: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사역에 대한 외적인 상징이다. 이와 같은 성령의 내밀한 역사를 전제하지 않는다면, 외적인 세례 형식의 효과는 의미가 없게 된다)를 받았다. 그의 수세의 계기가 된  사건은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그는  @어느  날  이웃집 정원에서  어떤 아이가 “펴서 읽어라, 펴서 읽어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게 된다. 어거스틴이 성경을 펼쳤을 때 로마서  13:13‐14절이 눈에 들어왔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이제 어거스틴은 새로운 결심을 한다. 먼저 어머니 모니카에게 달려가 자신의 결심을 전했는데, 그러자 모니카는 자신의 기도가 이루어졌다고 기뻐하였다. ▣ 회심 후 어거스틴은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도중에 로마 근처 오스티아 항구에서 어머니 모니카가  56세의 나이로 어거스틴의 품에 안겨 사망하게 되었다.  “내 시신을 아무 곳에나 묻어다오. 이 일로 신경을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참으로 원하는 것 한 가지는 네가 내 하나님의 제단 앞에 설 때마다 나를 기억해 주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388년에 마침내 고향 타가스테에 도착하게 된다. 이곳에서 어거스틴은 상속 받은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준 후 약간의 돈만을 가지고 카시키아쿰에 정착하지만, 이곳에서 아들 마저 잃게 된다. 상심한 어거스틴은 금욕주의자들과 작은 공동체를 이

Page 192: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루어 살면서 기도와 명상에 힘쓰게 된다. ▣ 어거스틴이 히포(Hippo)라는 항구에 잠시 머무는 일이 있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그는 사람들에게 붙들리어, 그의 간절한 사양에도 불구하고 그곳의 주교 발레리우스(Valerius)에 의하여 장로 임직을 받게 되었고(391년), 그후 급작스럽게 사망한 발레리우스를 계승하여 히포의 주교가 되었다(395년). 그의 생활은 극히 단순했는데, 한 집에서 다른 사역자들과 유무상통하는 삶을 살면서, 하위 성직자들을 가르치는데 전심전력하였다. 그는 검정색 수도사복을 즐겨 입었고, @일과 중 대부분의 시간에 채소를 가꾸었으며, 공동 식사시에 틈을 내어 책을 읽고 토론을 했다. 암브로스와 마찬가지로 가난한 자들에게 각별히 신경을 썼는데, 급한 경우 교회의 그릇을 팔아서라도 옥에 갇힌 사람의 보석을 위한 대금으로 지불하는 일이 일상 다반사였다고 한다. 어거스틴은 이곳에서 남은 생애를 목회와 저술 작업에 힘쓰다가, 히포가 반달족에게 침략을 받기 직전인  430년  8월  28일에  7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자신의 묘비에 다음과 같은 말을 적도록 유언했다:  “누구든지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을 말로 비방하기를 좋아하는 자는 이 금지된 식탁이 자신에게 해당된다는 것을 모른다.” 이는 그 자리에 없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것을 규율로 정했던 어거스틴 자신의 철학을 반영한 것이었다. ▣ 어거스틴이 남긴 문학 작품은 참으로 많다. 그는 교부들 

Page 193: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철학적 사상가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목회적인 과제가 그의 신학을 결정했다. 어거스틴을 학문적인 사상가로만 간주할 수 없다. 그의 문헌 비판가들이 거리낌 없이 제시하려고 했던 것은 그의 진실성이었다. 그러한 생각을 보여 주는 기념비적인 작품은  ‘변명’이다. 또한 어거스틴은  ‘고백록’(Confessiones, 397년)을 통하여는 자신의 독특한 문학적 유형을 만들어 냈는데, 여기에서 그는 그의 종교적 성장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나타냈다.  (구성을 보면, 처음  9권은 자신이 이태리를 떠날 때까지의 삶의 과정을 기술했고,  3권은 성경 창조사에 대한 주석이며, 끝으로  1권은 자신이 마지막에 도달했던 새 삶의 상태를 기술했다) ▣ 또한 정신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그의  저작으로서  13년에  걸쳐  22권의  분량으로  저술한 ‘하나님의 도성’(De Civitate Dei, 413‐426년)은,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역사적으로 제기되었던 가장 가치 있는 그리스도교의 변호를 내용으로 삼고 있는 동시에, 최초의 주목할 만한 역사신학의 구도를 제공하고 있다. 당시  410년에 서로마는 서고트족의 알라릭 왕에 의하여 기습을 받음으로, 지난  800년의 로마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이에 따라 이교도들은 자연신들을 버리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했기 때문에 로마가 멸망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에 대한 로마의 집정관 마르셀리누스(Marcelinus)의 문의에 답하기 위하여 어거스틴은 무려  13년간에 걸

Page 194: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쳐서 훗날  ‘역사 철학의 경계표’라는 평가를 받게 되는  ‘하나님의 도성’을 집필하여 답변하게 된다. 이 책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도성, 이것이 이 책에서 나의 주제이다. 나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 마르셀리누스여 그대의 제안에 따라 약속하였던 주제가 바로 이것이다’라는 말로 시작된다. ▣ 어거스틴은 마니교, 도나티즘, 아리우스주의, 펠라기우스주의와의 대결에서 그의 신학의 기본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어거스틴이  9세에 애착을 느꼈던 마니교의 교리 체계는 세계와 구원을 하나의 우주론적 과정 속에서 연결시켰는데, 이 과정은 동양적 환상과 더불어 포괄적인 신화로 이루어져 있었다. 선과 악, 빛의 나라와 어둠의 나라라는 두 가지 원리가 처음부터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다. 빛과 어둠의 혼합에서 지금의 세계가 생성되었다. 그런 까닭에 이 세계는 사악하다. 하지만 이러한 마니교에 반대하는 어거스틴의 입장은 분명하였다. 특히 마니교 교도들이 신약 성경 내의 구약 인용을 후대의 조작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어거스틴은 이러한 이론을 반박하기 위하여, 신약 성경의 본문사에 관심을 기울였다. 어거스틴은 마니교를 반박하기 위하여 무려  13권에 달하는 작품을 발표할 정도였는데,  ‘자유 의지론’(De Libero Arbitrio)은 마니교 비판서로 대표작이다. ▣  @도나티스파(the Donatists)의 분규는 어떤 의미에서 이단 논쟁의 연속이다. 성례(Sacrament; 하나님의 구원적인 은혜가 독특하게 펼쳐지는 의

Page 195: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식인데,  ‘유형적인 말씀’이라는 표현에서 이것의 개념이 충만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보이지 않는 실재의 보이는 표적’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성례의 수에 있어서 모두  7가지를 주장하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입장에 반대하여 개신교는 세례와 성찬  2가지로 한정한다)가 객관적으로 효력을 발생하는 구원의 수단인가, 아니면 성례를 베푸는 수여자의 완전성에 달려 있는가 하는 과거의 원칙 문제가 기본적인 바탕으로 깔려 있다. 도나티스파들은 자신들을, 죄인들에게는 여지가 없는 순수한 자들의 교회라고 이해했다. 이들은 자격이 없는 성직자에게서 받은 세례는 무효라고 주장하면서 세례의 효력은 수여자의 거룩성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배교(Apostasy;  ‘어떤 지위를 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헬라에서 유래한 말인데, 일반적으로 기독교를 포기하거나 배반하는 행동이다)한 사람들이 교회로 다시  들어오려면  반드시  세례를  다시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례론’(De Baptismo)은 이러한 도나티스주의자들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하여 저술되었다. 어거스틴은 성례 자체와 성례의 유효성을 구별하면서, 비록 성례 수여자가 악하다 할지라도, 성례 자체는 그리스도의 것이므로 거룩하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키프리안(Cyprian,  200‐258)의 전통을 계승하여, 연합과 통일성이 유지된 교회 안에서만 성례의 효용성을 인정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별로 성과가 없자, 그들에 대한 

Page 196: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국가 권력의 개입을 환영했다. 도나티스들의 재세례 실시의 근거는 그 효력이 수여자의 순수성에 달려 있다고 보는 성례전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아타나시우스에 의하면 세례식에서 실제로 세례를 베푸는 자는 베드로나 요한이나 유다가 아니라, 항상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성례전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객관적인 효력이 주어진다. 순례하는 하나님의 백성이자 신비에 가득 찬 그리스도의 몸인 지상의 교회는  ‘혼합된 몸’, 즉 선과 악이 최후의 심판 때까지 공동으로 거하는 복합체이다. 어거스틴에게 교회는 믿는 자들의 정신적 어머니이며, 열쇠의 권세와 무오성의 담지자이다. 교회와 더불어 연합한 자는 구원을 얻는다. 이러한 보편 교회의 공동체에서 스스로 벗어나 고립 속에 머물러 있는 도나티스들은 그들의 구원을 박탈당한다. ▣ 한편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Pelagius,  354‐420)의 자연주의와 원죄설에 반대하여 그의 은총론의 기초를 발전시켰다. 그는 펠라기우스의 교설을 대항하기 위하여  ‘영과 문자’(De Spiritu et Littera), ‘본성과 은총에 관하여’(De Natuta et Gratia), ‘펠라기우스의 기만에 대하여’(De  Gestis  Pelagis) 등을 저술했다. 하나님은 창조시에 인간에게 그의 초자연적인 최종 목표를 위하여 소명을 부여하고 초자연적인 은총(원은총)을 선사했다. 이 은총은 불멸성, 무질서한 탐욕으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정의이다. 인간은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형상이었고, 타락한 인간은 칭의의 은총을 통

Page 197: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얻는다. 칭의의 은총은 인간의 재창조이며 갱신이다. 이 은총은 하나님에 대한 근본적인 사랑의 주입과 자신 안에 초자연적 능력의 전달을 내포하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인간의 행위를 초자연적으로 선하게 만들며, 하늘에서 보상을 받게 한다. 이러한 새로운 능력들이 인간에게 진정한 의지의 자유를 부여한다. 즉 초자연적인 선의 연습을 위한 능력을 부여해 준다. ▣ 어거스틴의 사상은 훗날 서방의 중세 기독교를 지배할 정도로 실로 엄청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마틴 루터(Martin  Luter,  1483‐1546)는 특별히 그의 은총의 신학에서 큰 영향을 받았으며, 종교개혁을 일으키는 데 있어서의 중요한 신학적 기반이 되어주었다. 칼빈 역시 기독교강요에서 어거스틴의 사상을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인용한다.    #에라클리우스(Eraclius,  425‐? 재임)  (4.4.11): 서기  425년 히포(Hippo) 교회의 부

제였던 에라클리우스는 상당한 재산을 상속받아 일부는 순교자 스데반 기념비을 건립하는데 쓰고 나머지는 모두 교회에 헌납했다. 당시 주교였던 어거스틴은 젊은 사람에게서 무조건적으로 헌납 받을 경우, 장차 책망이나 유감 거리가 될 것을 염려하여, 에라클리우스로 하여금 먼저 토지에 투자하게 했다. 이는 예기치 못한 이

Page 198: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유로 반환해야 하는 일이 발생하면 그에게 다시 되돌려 주기 위함이었다. 에라클리우스는 어거스틴의 성직자 중 하나가 되었을 때 자신의 소유로 있던 몇몇 노예를 풀어줌으로 철저하게 가난해졌다(어거스틴의 설교집  356, 제5권. 1387). 426년 어거스틴은 밀레비스(Millevis)의 요청에 따라 그곳에 가서 위험에 직면한 몇 가지 불화들을 제거했다. 당시 별세한 세베루스(Severus) 주교는 종신직으로 그의 후임자를 임명했는데, 그러한 자신의 선택을 후임자에게만 알렸던 것이다. 이것이 불만을 일으켜서 그렇게 선택된 주교를 만장일치로 받아들이게 하는 데는 어거스틴의 중재가 필요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그때  72세였던 어거스틴은 자신이 죽을 때 자신의 교회가 비슷한 문제로 곤경에 처하지 않게 할 방법을 생각하게 되었고, 따라서 교회의 하급 사제로 명백히 인정받고 있었던 에라클리우스를 자신의 주교보와 지명 후계자로 선택했다. ▣ 그러자 발레리우스는 자신이 전에 선임자에게서 종신 주교로 임명을 받았으므로, 이것은 한 교회에 두 명의 주교를 두지 못하게 한 니케아 법령을 부지불식간에 위반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에라클리우스는 주교 관구의 모든 일을 놓고 어거스틴이 죽을 때까지 사제로 있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런 까닭에 앞으로 혹시 일어날지도 모르는 분쟁을 방지하기 위해 어거스틴은 교구민들의 동의를 얻어 협정을 맺고자 사람들을 소집하였고(426년  9월 

Page 199: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26일) 교회의 공증인들을 참석시켜 정식 행적 의사록을 작성하여 모든 사람이 서명하도록 요구하였다.  #에피큐로스(Epicures, B.C. 341‐271) (1.2.2): ▣ 사모스에서 태어나 아테네에서 죽

은 것으로 알려진 에피큐로스는 플라톤(Plato)과 데모크리토스(Demokritos)의 제자들에게서 배웠다. 데모크리토스는 기원전  460년경 아브라테라에서 태어나, 고향에서만 적어도  100년 이상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존재를 공간에서 운동하는 원자로 구성된 물질과 동일시하였던 스승 류키푸스의 유물론을 변형, 발전시키면서 방대한 저술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데모크리토스는 종교적 신앙에 대한 합리적인 비판을 시도하고, 유물론적 윤리학의 기초를 마련한 최초의 철학자로도 알려지는데, 그의 제자들의 영향이 에피큐로스에게까지 미쳤던 것이다. ▣ 에피큐로스는  32세에 자신의 학파를 설립했고,  306년에는 아테네에  ‘정원’이라는 사유지에 학교를 세웠다. 그는 불필요한 공포나 미신, 죽음, 헛된 욕망 등으로부터 자신을 해방하여 동요 없는 평정상태인  ‘아타락시아’에 도달하는 것을 철학의 목표로 삼았다. 에피큐로스의 저작은 꽤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오직 단편들로만 존재한다. 키케로(Cicero)가 자신의 작품에서 이 단편들을 많이 인용하였는데, 주로 

Page 200: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에피큐로스 학파의 신 개념을 해석하고 그에 대해 비평하였다. 칼빈은 키케로가 ‘종말에 관하여 및 신들의 성질에 관하여’를 통하여 에피큐리안파의 신성 개념을 설명하고 비판한 것을 주목한다. ▣ 현대의 학자들은 에피큐로스의 교설을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⑴ 무로부터는 무만 나오기 때문에 우주는 항상 존재하였고, 또 영원히 계속 존재하여야 한다. ⑵ 우주와 그것이 포함하고 있는 무수한 물체들은 무한하다. ⑶ 이 물체들은 단순한 것과 복잡한 것, 두 종류가 있다. 단순한 물체들은  형태,  크기,  그리고  무게를  지닌  원자들이다.  그것들은  불가분리적이고 불변적이고 불멸적이다. ⑷ 이 원자들은 그 단순한 무게와는 구별되는 그 특유의 힘을 갖고  있다.  ⑸ 물질(Matter;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물질은 변형되거나 변화할 수 있는 어떤 형태를 취급하는 용어이다. 따라서 물질은 잠재적이며 현실성이나 형태와 대조를 이룬다. 공간을 차지하고, 질량과 무게를 가지며, 비정신적인 것에서부터 인식하는 마음에 의해 조직되는 것에 이르기까지 범위가 다양하다. 따라서 항상 그것이 사용된 문장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 정확하다)의 양과 세상의 힘의 양은 항상 동일하니, 증가되거나 감소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⑹ 그 무수한 원자들은 필연적인 물리법칙의 인도 아래 엄청난 속도로 우주 전체를 이동하면서 활동한다. ⑺ 중력과 다른 물리적 힘들의 영향 아래 이 원자들이 결합함으로써, 우

Page 201: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주는 형성되었고, 우주가 되었다. ⑻ 영혼은 물질이다. 아니 다른 말로 하면 모든 정신현상들은 물질의 속성들에 기인한다. ⑼ 당연히 영혼은 육체가 죽으면 존재를 멈춘다. 즉 죽음이 생명활동의 정지인 것처럼, 그것은 또한 개체의 지성적 기능의 정지이다. 인간을 구성하는 원자들은 그것들에게 속해 있는 힘을 가지고 계속 존재하고, 다른 인간들과의 결합 속에 들어갈 수 있다. ⑽ 감각이 인간에게는 지식의 유일한 원천이다. 과거의 감각들을 기억함으로써 개념들을 형성시키고, 개념들의 결합을 통해 판단들을 형성한다. ⑾ 진공상태를 제외하고는 영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따라서 모든 존재 양식들은 물질이라는 제목 아래 다 포함된다. 정신이나 영혼은 없기 때문에, 신도, 도덕법도 없다. 덕은 단지 행복에 대한 지극한 관심 속에 있다. ▣ 이상 살펴보았듯이, 선은 쾌락에 의존한다는 역설을 중시하는 헬라 윤리관(A Greek ethical view that emphasizes that good consists in pleasure)을 취하는 자들을  통상  에피큐리안주의(Epicureanism)라고  한다.  이들의  신관을  보면,  신은 인간과 떨어져 저 멀리 있고, 안일무사하고, 사랑이 없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결국 신을 폐기한 것이다. 내세의 존재를 부정하는 에피큐로스의 입장에서 볼 때 신을 경외할 이유가 없으며, 단지 현세를 즐겁게 보내기 위하여, 신체적 고통과 세상의 욕심과 두려움에서 해방되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인간의 단순한 쾌락을 찬양한 

Page 202: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이 학파의 사상은 로마 사회의 상류층에 쉽게 퍼져나갔고, 세련된 향락 생활을 위한 뒷받침이 되었다. 이런 까닭에 당시 금욕과 절제를 중시하던 기독교로부터는 외면을 당하였다. 에피큐로스는 인간은 까닭없는 고통을 자초하지 말아야 하니, 곧 죽음과 신의 진노에 대한 불안을 벗어버리고, 즐거움을 생활의 근본원리로 삼으라고 외쳤는데, 이는 앞서 말했듯이 모든 물질의 최소 단위가 원자라고 주장한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토스의 이론을 계승한 것이었다. 다음은 에피큐로스가 죽음에 임박하여 이도메네라는 사람에게 쓴 편지의 일부이다.  “지금 이 편지를 쓰는 이유는 이제 내 행복했던 삶을 마감해야 할 때가 되었기 때문이야. 소변이 막히고 이질이 심해서 생기는 고통이 극에 달한 채 계속되고 있다네. 하지만, 우리가 과거에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기억하면서, 나의 영혼이 느끼고 있는 기쁨 덕분에 그 고통을 이겨내고 있다네”(DL.  X.  22). 참으로 에피큐로스가 일평생 추구한 쾌락주의의 절정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에피파니우스(Epiphanius,  315‐403)  (4.9.9)  (4.15.21): 어거스틴의 선배였던 에피

파니우스는 여자들이 세례 주는 것을 반대했다. 따라서 그는 이런 비성경적인 가르침의 기초를 놓았던 말시온(Marcion,  2세기)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에피파니

Page 203: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우스는  한  마디로  말하여  이단  감별사이다.  그가  374‐377년에  집필한  ‘의료  상자’(Panarium)는 비록 논리적이 않고, 연대적인 배열이 무시되었지만, 세상이 시작된 때로부터 자기 시대까지 존재했던 모든 이단들을 망라하여 다룬 그의 대표작이다. 모두 여든 개의 이단(Heresy; 단체나 조직에서 규범이 된 어떤 교리나 신앙을 의식적,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것)을 소개하는데 이미 잘 알려져 있던 순교자 저스틴, 이레네우스, 히폴리투스의 저서들을 많이 인용하였다. 이러한 에피파니우스의 뒤를 이어 시몬파로부터 시작하여 펠라기우스파(the  Pelagians)에서 마감하는  88가지 이단에 관한 개론을 쓴 사람이 있는데, 바로 어거스틴이다. 근대에 에피파니우스의 아가서 주석 라틴어판이 로마에서 출판되기도 하였다(1750년). ▣ 에피파니우스가 소개한 이단들 중에, 당시 아라비아에 존재했던 광신적인 여사제 집단인  ‘콜리리데스파’(Collyridians)란  것이  있다.  당시  퍼져나가고  있던  수도원주의자들은 동정녀 마리아를  ‘영원한 동정녀’로 여기면서 경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보편적인 경향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영향을 반영하듯이 콜리리데스파는 마리아를 신으로까지  숭배하면서  작은  ‘케익’(콜리리데스)을  바쳤다고  하는데,  이는  거의  ‘케레스 숭배’를 모방한 것이었다고 본다. 오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만이 경배의 대상이라고 주장하는 에피파니우스의 입장에서 이는 분명히 이단적인 행동이었고, 따라

Page 204: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서 그는 이들을  79번째 이단 목록에 포함시켰다.    #엑수페리우스(Exuperius,  Bishop  of  Tholouse)  (4.4.8): 툴루즈의 주교인데 출생 

장소와 날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실비우스(silvius)의 뒤를 이어 주교가 되었고, 선임자가 시작한 사투르니누스(St.  Saturninus) 대성당 건축을 완성했다. 제롬(Jerome, 345‐420)은 교회들이 지나치게 호화롭다고 공격하면서 당시의 툴루즈의 주교 엑수페리우스가 보여준 행동을 칭찬했다. 엑스페리우스는 주의 몸을 버들가지 바구니에 담고 주의 피를 유리 그릇에 담을지언정 빈민은 한 사람도 굶는 일이 없도록 배려했던 것이다. 또한 제롬은 그가 팔레스틴, 이집트, 리비아의 수도승들을 후하게 대하고, 그 당시 반달족, 알란족, 수에버스족의 약탈로 고통 받고 있는 자신의 교구민들에게 자선을 베풀었던 것에 대해서도 칭찬했다. 그는 극도로 검소하고 소박한 생활을 하여, 개인적으로 소유를 추구하지 않았고, 오히려 가진 것을 아낌없이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는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해서는 심지어 성찬 그릇까지도 팔았는데, 따라서 성찬용 빵을 바구니에 담고 포도주를 유리 그릇에 담아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덕에 대한 존경과 베풂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제롬은  ‘스가랴 주석’을 그에게 헌정했던 것이다. ▣ 그런데 사실 엑스페리우스

Page 205: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는 정경과 관련된 인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정경과 교회 권징의 몇 가지 요점에 관한 교육을 위해 로마 주교 이노센트  1세(Innocent  1,  401‐17 재임)에게 편지를 썼다. 주교는 회답의 서훈을 보냈는데(405년  2월), 이 서신에는 카톨릭 정경인 제2 카톨릭 정경을 포함하여 우리가 오늘날 가진 것과 같은 정경 목록이 들어 있었다. 따라서 이노센트  1세의 정경에는 외경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비카톨릭 교회측 저자들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 엑수페리우스 주교가 동명(同名)의 수사학자와 동일인이라는 바로니우스(Baronius)의 견해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 수사학자는 엑수페리우스 주교보다 반세기 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조카들인 하니발리아누스(Hannibalianus)와 달마티우스(Dalmatius)의 선생이었기 때문이다.  394년  로마의  푸리아에게  쓴  편지와  397년  보르독(Bordeaux)의  아만두스(Amandus)에게 쓴 파울리누스(St.  Paulinus)의 서신에 의하면, 비록 이 두 서신이 어떤 다른 사람에 관해 언급하고 있을 수도 있지만, 엑스페리우스는 주교직에 오르기 전 로마에서 사제였고 후에 보르도에서 사제였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 그가 정확히 언제 주교가 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가  405년  2월 툴루스(Toulouse)의 주교을 맡고 있었다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이노센트  1세의 서신을 보면 명백하다. 또한 루스티쿠스(Rusticus)에게 쓴 제롬의 서신에 의하면  411년에도 생존해 있

Page 206: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었음이 확실하다. 사람들은 종종 제롬이 스페인의 사제인 리파리우스(Riparius)에게 쓴 서신에서 이단인 비질란티우스(Vigilantius)를 묵인한 것에 대해 엑스페리우스를 책망했다고 한다. 그러나 비질란티우스는 툴루스의 교구민이 아니었기에 제롬은 아마도 다른 주교에 대해 말했을 것이다. 엑스페리우스는 일찍부터 성인으로 추앙을 받았다.    #엔코라티스파(Encratites):  “그러나 로마 카톨릭 교회는 몬타누스와 타티아노스

파와 엔코라티스파와 기타 이단자들에 대한 이 선고를 부정함으로써 깨끗이 피한 것같이 생각한다. 이단자들만이 결혼을 정죄하고 있지, 자기들은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사제 계급에는 부적당하다고 생각해서 그들에게만 금하는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마치 이 예언이 처음에 저 이단자들에게서 실현되었으나 자기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듯이 말하는 것이다. 또는, 자기네들이 모든 사람에게 결혼을 금지시키는 것이 아니므로, 자기네는 결혼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유치한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이것이 들을 가치가 있는 것같이 행동한다. 하지만 이는 마치 어떤 폭군이 도시의 일부분만을 부당하게 압박하는 법률은 부당한 법률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4.12.23). 

Page 207: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엘리기우스(Eligius, 660 사망) (3.20.22): 칼빈의 고향이었던 노용시의 주교였다.  #오리겐(Orgen, 185‐254) (2.2.4; 2.2.27; 2.5.17; 2.8.12; 3.11.19; 3.21.8; 4.2.2): ▣ 오리겐

은 알렉산드리아에서  185년경에 부유한 그리스도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부친  레오니데스(Leonides)가  201년에  투옥  중에  순교자로  사망하자,  이 아들도 순교에 대한 갈망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모친의 재략으로 말미암아 당국에 자진 출두하게 되어, 순교를 위하여 의도적으로 행한 시위 행동은 저지되었다. 당시 가족의 재산이 몰수당한 상태에서 장남이었던 오리겐은 철학과 문학을 가르친 돈으로 모친을 돌보았고  6명의 자매들의 생계까지 보살피게 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인 데메트리우스(Demetrius)는 아직 어린 오리겐을 잘 보살펴주었고 당시 유명하였던 클레멘트의 교리문답학교에 보냈다. 이곳에서 그는 데메트리우스의 인품과 강연을 통해 감화를 받았다. 그는 동시에 성경 연구에 몰두했다. 이와 더불어 감옥에 갇혀 있는 신앙의 형제들을 방문하여 위로의 말을 전하는데도 힘썼다. ▣ 오리겐은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순교자들과  자주  동행했다.  교회사가  유세비우스(Eusebius,  265‐339)가 오리겐이 거세했다고 한 보고는 이 시기(202  ‐  210년 사이)에 

Page 208: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카라칼라(Caracalla,  211‐17 재위) 황제가  215년에 철학자들과 그들의 학교를 박해하자, 오리겐은 알렉산드리아를 떠나서 팔레스틴에 있는 가이사랴로 가게 된다.  217년에 테메트리우스는 오리겐을 알렉산드리아로 다시 초청했다. 그는 팔레스틴을 거쳐 그리스로 여행하던 중에,  230년에 가이사랴에 머물러 장로로 안수를 받았다. 그러나 데메트리우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열린 두 차례의 공의회에서  ‘비합법적 안수’였다는 이유로 오리겐을 단죄하고 파문했다. 오리겐은 결국 오래간만에 돌아왔던 고향을 다시 떠나야만 했다. 가이사랴로 온 오리겐은 그곳 주교의 도움으로 알렉산드리아에서와 같은 학교를 설립했는데, 이후 학교의 명성은 이 도시를 넘어서 나라 전체에 급속도로 파급되었다. 알렉산더 세베루스(Alexander Severus, 225‐35 재위) 황제의 모친인 율리아 맘메아는 오리겐을 안디옥으로 초청하여 강연을 하게 했다.  244년경에 오리겐은 베릴루스(Beryllus) 주교의 실수를  해결하기  위하여  보스트라(Bostra)로  파송되었다.  그러나  황제  데기우스(Decius,  249‐51 재위)의 박해로 오리겐은 투옥되어 고문을 당하게 된다. 그는 두로에서  70세로 사망했다. ▣ 평생 @수천 권의 책을 쓴 것으로 유명한 오리겐의 가장 유명한  저서는  ‘헥사플라’(Hexapla)로  이는  구약성경을  히브리어@판,  헬라어@판, 아킬라 헬라어@역, 심마쿠스 헬라어@역, 칠입@역, 테오도티온 헬라어@역으로 세

Page 209: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로로 @여섯 줄로 편집한 책이다. 그리고  218년에 시작하여  231년에 마친 모두  4권으로 구성된  ‘제1원리에 관하여’(De  Principiis)라는 최초의 조직신학 및 기타 여러 종류의 책들이 있다. 그는 이 연구 도구들을 가지고 성경의 거의 모든 책에 대해 문장마다  해석을 붙였다. 그는  ‘원칙에 관하여’에서 그리스도교의  주요 문제들을 다룰 때, 체계적인 관점에서 결정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고, 그 기초에 대한 개괄적인 소개를 했다. 또한 오리겐은  ‘켈수스에 반대하여’라는 저술에서는 당시 예수를 기만자라고 주장하던 철학자들을 반박했다. 그는 증거 제시가 빈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용한 어조와 뛰어난 지식으로 이 과제를 관철시켰다. 그의 또 다른 유명한 저서  ‘기도에 관하여’는 오리겐의 경건심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증거이다. ▣ 오리겐의 신학적인 특색은 사색적이며 분석적인데, 그는  ‘인간의 삼분설’에 근거한 특이한 성경 해석을 시도하였다. 즉 인간의 육과 혼과 영에 대응하여 성경을 문학적, 도덕적, 영적 의미로 해석하였던 것이다. 오리겐은 그의 주석적 저작들 속에서 성경적 의미를 유형론(Tropologie)과 우화론(Allegorese)으로 탐구했다. 그의 성경 해석의 주요 동기는,  ‘보다 높은 영적인 의미’를 찾으려는 성경 탐구였다. 그는 성경 속의 모든 것이 반드시 역사적 의미를 취하지만은 않는다는 관점을 주장했다. ▣ 오리겐은  ‘삼위’에서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특별하게 설명하였다. 

Page 210: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영원한 광채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성자에게서 발산되며, 그리고 나서 성령으로부터 발산된다. 오리겐에게서 신적인 삼위의 관계는 구원의 경륜적 종속설로서 규정되었다. 성자는 하나님의 인간되심에서 어느 정도 성부에게 종속되고, 또한 성령은 성자보다 지위가 낮다는 것이다. 오리겐은 창조를 영원한 활동으로 파악했다. 가시적인 세계는 완전한 영에 의해서 출발했지만 그 가운데서 일부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현재의 피조된 상태로 머무르게 된 것이다. 인간의 성별과 은총의 부여는 세계 이전의 죄과에 달려 있다. @오리겐은  ‘신인’이라는 표현을 성육신이라는 서술로 표현한 최초의 신학자였다. 오리겐이 최초로 마리아를 가리켜  ‘하나님을 잉태한 여성’이라고 말했을 것이라고 전해진다. 그는 육체를 입고 태어난 모든 영혼이 죄로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유아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게서 성례전에 그리스도의 영원한 현재가 있다는 신앙은  ‘그리스도인의 공동의 것’, 즉 단순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움이 되는 신앙이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대한 상징적ㆍ알레고리적 관점은, 앞서가는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지켜진다. 그는 성례전에 있어서의 예전적 현실주의를 주장했고, 다른 한편 예전적 식사의 섭취와 하나님의 말씀의 들음을 동일시했다. 이 두 가지는 동일한 효력을 갖는다. ▣ 오리겐은 그리스도인에게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스스로 용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했다. 

Page 211: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그러나  ‘죽음에 이르는 죄’(예. 우상숭배와 간음)는 공개적이며 장기간에 걸친 파문을 받아야 하고, 이 기간 동안에 행하는 철저한 참회로 속죄할 수 있다고 했다. 오리겐은 그의 회복설 때문에 당대에서만이 아니라, 그가 죽은 다음에도 여러 세기 동안 많은 공격을 받았다. 회복설이란, 이는 세상에서 죄를 지은 영혼들은 죽은 후에 정화 상태에 있다가 모두가, 심지어는 악마까지도, 단계적으로 최종적인 청결에 도달하게 된다는 주장이다. 그 영혼들은 정기의 육신을 입고 부활하게 되며 하나님은 다시 그들에게 유일한 희망이 되신다. 이러한 회복설은 세계 종말이 아니라 그 잠정적인 마감을 생각했던 것이다. 이 세계 이전에 다른 세계가 있었고 이후에 또 다른 세계가 도래한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그리스도의 제자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구는 자기 인식이라고 했다. 욕정과 이 세상의 영과의 지속적인 투쟁이 하나님과 결속되는 전제이다. ▣ 오리겐은 금욕주의적 훈련으로서 빈번한 철야, 명상, 금식, 날마다의 성경봉독을 추천했다. 참으로 그는 오늘날 신학이 그와 대결해야 하는, 교회 시작기의 성경 해석자였으며 영성과 명상의 신학을 창시한 사람이었다. 동시대에 확약한 터툴리안(Tertullian, ca. 155‐220)은 오리겐의  ‘영혼 선재설’을 반대하여  ‘영혼 유전설’(Traducianism)과  ‘영혼 창조설’(Creationism)을 주장하였다.    

Page 212: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오시안더(Andreas Osiander,  1498‐1552)  (1.15.3): 누렘베르크 지역에 있는 군첸하우젠에서 출생하여,  1552년  10월  17일에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사망했다.  1515년에 인골슈타트 대학에서 공부하고,  1520년에 히브리어 선생이 되었다.  1522년에 누렘베르크에서 설교자가 되었고,  1524년부터 이 중요한 제국 도시에서, 그리고 프랑켄 지역에서 종교 개혁자가 되었다.  1543년에 오시안더는 비텐베르크 대학으로 초빙된 요아힘 레티쿠스를 대신하여 코페르니쿠스(Nicholaus Copernicus)가 죽은 해에 나온 그의 저작인  ‘천체의 변천 과정에 대하여’를 편찬해 놓았다. 이같은 사건은 신학자인 그에게 근대 과학사에서 결정적인 선례를 남기는 역할을 담당케 했다. 오시안더가 코페르니쿠스의 요청에 응하여 쓴 책에 익명으로 전개한 서문에서  ‐ 그가 이렇게 한 것은 자신의 글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옹호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반박을 당할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  ‘태양 중심설’, 즉 태양의 정지 상태를 ‘가설’로 삼은 것은 과학이론적 고찰의 측면에서 사실 주장과 갈등을 일으키는 이론을 천거한 것이다. 운동에 관한 서술은 단지 실제적인 또는 승인된,  (관찰자의) 정지된 상태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 선택은  ‘가장 단순한 이해’의 원리에 따라 이루어진다. 오시안더는 이러한 상대성 원리를 가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는 이러한 관점과는 달리 지구가 정지해 있다는 주장이 부당하다는 것을 입증

Page 213: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하려고 했다. 오시안더는 이같은 진리를  ‘하나님께서 자연 과학자들에게 계시하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같은 주장의 선례에 따라 갈릴레오 갈릴레이에 대한 소송이 제기되었다(1632년). ▣  ‘과도기’의 결정적인 적대자인 오시안더는  1548년에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목사와 교수가 되었다.  1550년  10월  24일의 논쟁에서 전개한 그의 칭의론은 오랜 동안 루터교의 신학적 위기를 만들어 냈다. 오시안더는 하나님은 세상  일에  관여하시지  않는다는  영성주의적  신  개념에서  멜랑히톤(Philipp Melanchthon,  1497‐1560)에 반대하고 루터(Martin Luter,  1483‐1546)를 지지하는 입장을 전개했다. 그런데 그의 칭의론, 곧 칭의는 믿는 자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신적인 본성의 내주에 있는 것이지, 십자가에서의 화해의 죽으심에 대한 신앙에 있지 않다는 입장은, 보편적으로 거부를 당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에베소서  3장  17절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라는 구절은 ‘칭의를 받은 신앙의 형태’(1618년)로 이해되었고,  17세기 초 이래로 루터교적 경건과 신앙 속에서 신비적 합일로 표현되었으며,  1625년에 교의학에 도입되었고, 마침내  1640년에 케제만을 통하여 받아들여졌다. ▣ 그는 단편 논문인  “만약 죄가 세상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해야 했을까 아닐까”를 발표하였는데, 이를 통하여 인간의 타락이 성육신의 목적을 변경시키고 말았다고 주장한 

Page 214: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존 둔스 스코투스(John Duns  Scotus,  1265‐1308)의 가르침을 반복하면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본래부터 계획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창조를 입증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형상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라고 할 때, 이는 인간이 장차 성육신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견케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기조 위에서 오시안더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신성의 담지자라는 측면에서 보면, 결국 우리를 구원하고 연합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아니라 신성이라고 주장했으며, 또한 중생과 칭의를 혼동하여 칭의를 법정적인 행위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칼빈(John Calvin)은 이런 오류들을 확실하게 반대한다.    #오캄(William Ockham, 1285‐1347) (2.03.10): 영국의 스콜라 학자로서 @프란치스

코회에 속했다.  ʹ개별자만이 현실성을 지니고 있으며 일반자는 추상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ʹ고 하는  ‘중세 유명론’의 대표자이다. 그리고 모든 지식은 개별자에 대한 경험으로부터 유래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영국 경험론이 형성되는 데에 주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지식과 신앙을 철저히 분리하여 철학과 종교가 서로의 영역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세속적 세계와 교회의 @관계에 있어서도 한계를 설정하

Page 215: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교황이 이끄는 세속적 권력장치를 비난함으로써 투옥당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그의 사상속에는 이미 스콜라 철학의 붕괴 가능성이 잠재해  있다고  하겠다.  ▣  오캄은  엄격파  @프란치스코회  수도사로  교황  요한  22세(pontiffs  John XX  II,  1316‐34 재위)와 논쟁하였다. 당시 오캄이 속한 엄격한 수도회에 대해서 다른 수도회에서 비판을 했다. 비판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돈궤가 있었다는 것이다. 엄격파는 돈에 손대는 것도 금지시켰는데, 그렇다면 그리스도보다 더 완전한 사람인가 라고 비판했다. 오캄은 이에 대해서 그리스도는 특별한 경우에는 돈궤를 인정했지만, 그리스도를 완전히 따르는 사람들은 자신들처럼 절대적인 빈곤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323년 교황 요한  22세는,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전혀 소유를 가지지 않았다는 주장은 이단이라고 발표하면서, 엄격파  @프란치스코회를 이단으로 정죄했다. 그래서 오캄과 몇몇 사람들은 교황의 박해를 피해서 황제의 밑으로 들어갔다. 그러면서 교황청과 제국은 다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렇듯 각자는 그 나름의 영역을 가지고 있다는, 이원론이 아니라 일원론을 주장한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순수하게 종교적 기능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회의 최종적 권위를 신약성경으로 보아서 교황의 권위, 교회의 총회의 권위 등을 상대화시켰다. 오캄의 제자들

Page 216: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은 루터(Martin  Luter,  1483‐1546)의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 ▣  “자기 안에 있는 것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은총을  거부하시지  않는다”고  한  말은,  가브리엘  비엘(Gabriel  Biel)이 피터 롬바드의 명제집을 해설하면서 한 말인데, 미심쩍은 듯이 생각되는지, 칼빈은 오캄이 한 말로 돌린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37‐100)  (1.08.04)  (2.08.12):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아피온 반박문’을 두 권이나 썼는데, 여기서 이교 율법보다도 더 오래된 유대인들의 고대성을 주장하였다. 그의 작품에서  ‘유대 전쟁기’는,  1차 유대 전쟁 이야기와 전쟁에 이르기까지의 사건들을 기록한 작품으로, 로마 공화국의 동정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저술하였다. 이후 그는  ‘고대기’를 썼는데, 이 책은 창조로부터 유대 전쟁에 이르기까지의 유대 역사를  20권의 분량으로 기록한 것으로, 교부들로부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았다. 당시 헬라와 로마에는 그들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가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율법에만 가치를 두었기 때문에 역사기록에는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 이러한 이유에서 주후  37년에 태어나 활동한 역사가 요세푸스의 중요성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외가 쪽으로  @하스몬 왕조의 혈통을 이어받은 요세푸스의 히브리 이름은 요셉 벤 마티티야후이며 그는 젊어서부터 율

Page 217: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법에 능통해서 제사장과 율법학자들조차 그를 찾아와 도움을 요청했다. 요세푸스는  26세에 유대인 대표단의 일원이 되어 로마로 건너가게 된다. 몇 가지 불미스러운 문제로 제사장들이 로마에 끌려간 사건이 있었는데 이들의 석방을 탄원하는 대표단이 구성되었고 아마도 요세푸스는 그의 뛰어난 헬라어 실력 덕분에 대표단 일원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젊은 요세푸스는 당시 세계를  @제패한 로마가 어떠한 나라인지를 보았고 이 경험이 후에 그가 로마군에 투항하게 된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 주후  66년 유대인들이 로마에 대항하는 전쟁을 시작하자 그는 갈릴리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지만, 로마와의 전투 중 갈릴리의 요타파타에서 로마군에 포위되게 된다. 그와 함께 동굴에 숨어있던 동료들은 로마의 포로가 되기 전에 자결을 하자고 의견을 모은다. 그러나 요세푸스는 전날 밤 장차 유대인이 당할 재난과 로마 황제들이 당할 미래의 일을 하나님이 꿈으로 보여주신 것을 기억했다. 그는 자신이 살아남아야만 하는 이유를 발견했다. 로마에 투항하는 것은 유대를 배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동료들은 집단자결을 주장했으나 요세푸스는 동료들과 함께 죽을 수는 없었다. 그들을 설득시키는데 실패한 요세푸스는 모험을 감행했다.  “우리가 죽기로 결심했다면 제비를 뽑아 차례대로 죽도록 하자. 첫 번째 제비를 뽑은 사람은 두 

Page 218: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번째 제비를 뽑은 사람의 손에 죽고 두 번째 제비를 뽑은 사람은 세 번째 제비를 뽑은 사람의 손에 죽는 식으로 하자. 스스로 자결하는 방법을 택하면 혹시 한 사람이라도 다른 사람들이 다 자결한 틈을 타서 자결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들은 요세푸스의  의견에  동조했다.  유대인들이  차례대로  자결을  하고  우연성(Contingency; 어떤 사건의 발생이 불가능하지도 않지만, 필요하지도 않은 경우에 사용되는 용어이다. 따라서 모든 유한적 존재는 우연적 존재로 간주될 수 있고, 오직 하나님만이 우연이 아니시다)인지 하나님의 섭리(Providence; 전통적으로 이 용어는,  ‘하나님의 보존과 하나님의 협력과 하나님의 통치’ 등 세 가지 개념과 연결된 하나님의 통치로 해석된다. 그러나 인간이 어떤 행위를 할 수 있도록 @일반적이며 지속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라고 보는 로마 교회 차원의 하나님의 협력 개념을 칼빈주의는 거부한다)인지 요세푸스와 다른 한 사람이 최후에 남게 되었다. 요세푸스는 죽임을 당하고 싶지도 않았고, 또한 자신의 손으로 동족을 죽이고 싶지도 않아서 그를 설득했다. ▣ 로마군에 체포된 요세푸스는 나중에 황제가 된 로마 사령관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  60‐79 재위) 앞으로 끌려갔다. 요세푸스는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은밀히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당당하게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사자라고 밝히고 미래에 베스파시아누스와 그의 아들이 로마의 

Page 219: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황제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전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요세푸스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얕은 꾀를 부리는 것으로 생각했으나 곧 그를 신임하게 되었다. ▣ 당시 로마는 혼란의 연속이었다. 네로(Nero,  54‐68 재위) 황제를 시작으로 제명에 죽은 황제가 없었다. 그런 혼란 중에 베스파시아누스는 자기의 부하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어 로마로 떠나고, 유대인과의 전쟁은 그의 아들 티투스(Titus,  79‐81 재위)에게 넘겨졌다. 요세푸스는 티투스 장군과 함께 전쟁터를 다니게 되어 유대인과 로마군이 어떻게 전쟁을 했는지 유대의 몰락과정이 어떠했는지를 목격할 수 있었다. 그는 유대인들이 로마에 대항하여 벌인 전쟁을 무모한 것으로 여기고 동족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강도 떼라고 부르기를 서슴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후 요세푸스는 로마로 건너가 플라비우스 황제 가문의 이름까지 얻고 황제의 보호 아래 남은  여생을  보냈다.  ▣  요세푸스는  전쟁이  끝난  뒤  주후  75년경  ‘유대인  전쟁사’(History of  the  Jewish War)라는 전쟁의 기록을 책으로 자세히 저술하였다. 그리고  20년 후에는 유대 역사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는 로마인을 위해 인간의 창조부터 로마의 네로 황제 때까지의 역사인  ‘유대인 고대사’(Jewish Antiquities)를 저술하였다. 그 외에도 요세푸스는  ‘자서전’,  ‘아피온 반박문’(Contra Apionem)을 남겼다. 요세푸스가 남긴 저서의 역사적 가치는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요세푸스에 대한 

Page 220: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연구 논문이 요세푸스의 저서보다 더 많다는 사실이 이를 보여준다. 이스라엘이 멸망하던 주후  1세기 당시 요세푸스는 이스라엘의 유일한 역사가였다. 특히 구약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는 요세푸스의 기록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세푸스는 이런 업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네 동족 유대인으로부터는 배신자라는 모욕을 감수해야만 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요세푸스의 저작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의 손에 의해 보존되어 왔다.    #요한  22세(pontiffs  John XX  II, 1316‐34 재위)  (4.07.28): 로마 교회의  196대 교황

인데  ‘영혼 멸절설’을 주장하였다가 프랑스 왕의 압력을 받고 취소했다.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청빈 문제와 마찰을 일으켜, 극단적인 청빈 주의자들  25명을 종교 재판에 회부하여  4명을 화형시켰다. 이에 대항하여 오캄(Wilhelm von Ockham, 1290‐1349)이 교황을 이단적이라고 비난하자 즉시 그도 파문하였다. 신비주의자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1260‐1327)의 일부 작품을 이단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요한  4세(John Ⅳ,  582‐95 재위)  (4.07.04)  (4.11.16): 콘스탄티노플 주교로 자신을 

Page 221: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스스로  ‘세계 총주교’(Ecumenical  Patriarch)라고 칭했다. 로마의 수도가 천도를 완료한  5세기 이래로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들은 이 칭호를 전통적으로 사용해 왔는데, 요한은 이를 더더욱 강조하였다. 요한은 로마 교회의  63대 주교인 펠라기우스  2세(Pelagius II, 579‐90 재위)의 저항을 받았고, 64대 주교 그레고리  1세(Geregory I, 590‐604 재위)는 자신을 한없이 낮추어  ‘하나님의 종들 중의 종’(Servus  Servorum Dei)이라고 부름으로써 요한과 맞섰다. 하지만 훗날 로마 카톨릭 교회는 그레고리의 이러한 표현을 변개시켜, 교황청은 모든 교회들의 머리이며 전체 교회의 관심과 수위권이 베드로의 후계자에게 위임되어 있다는 의미로 이용하였다.    #요한(John,  ca. 675‐749)  (1.11.14): ▣ 다마스커스의 요한은 교회사에서 나름대로 

중요한 교부이자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별로 자료가 많지 않다. 따라서 그의 소수의 저작들, 동시대인들의 저작들, 그리고 당대의 공의회의 결정 사항들 속에 산재해 있는 것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그를 이해할 수밖에 없다. 내용이 상세하지만 진정성이 확실시되지 않고 있는 그의 아랍어와 그리스어로 된  ‘거룩한 생활’은  11/12세기에 출현한 것으로 보인다. 요한은 회교 국주의 본거지인 다마스커스에서  675년경에 만수르라고 알려진 유명한 그리스@∙시리아계 그리스도인 

Page 222: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복 형제 코스마스에게서 그리스도교적, 세속적 교육을 받았다. 그는 부친이 사망한 후에, 회교국주인 발리스  1세(Walis  I,  705‐715년) 치하에서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관리인 로고테텐(Logotheten)의 직책을 이어받았다. 나중에(743년부터) 가자 근처의 마주마의 주교가 된 이복 형제 코스마스와 더불어, 요한은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사바스 수도원의 수도사로 입문했고, 그곳의 추기경인 요한  5세(Johannes  V,  706‐735)로부터 신부의 서품을 받았다. 그는 수도원에서 죽을 때까지 생활하면서 금욕과 경건에 열중했을 뿐만 아니라 신학적으로도 매우 주목할 만한 저작 활동에 몰두하기도 했다. ▣ 다마스커스의 요한은 그의 주저,  ‘안식의 원천’(743년 이후에 집필?)에서, 그리고 다른 저작들 속에서 전승을 구별하는 일에 전력을 다했고, 그럴지라도 자신의 개인적인 사상을 말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을 밝히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은 주목할 만한 다각성과 정확한 신학적 지식, 놀라운 조직력과 명료성을 보여 주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의 전승이란 신앙의 진리를 학술적으로 전개한 것이 아니라, 올바른 신앙을 표현하고 심화시키는, 유일하고도 올바른 신학적 토대를 의미했다. 처음부터 전승된 신앙과의 일치와 연속성은 신학과 교회의 합법성을 보증해준다.  ‘하나님의 말씀과 제단에서 지배하고 있는 교회의 전승’은 그리스도의 몸을 표방하고 있다’(De  imag,  I, 1). 요한

Page 223: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에 의하면, 전승된 신앙의 유산에 대한 설명은 반드시 철학, 세속적인 학문과의 관련, 특히 이성의 사용을 전제로 하고 있다. “내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교회법을 준수하는 것이 마치 이성의 용골 또는 주춧돌과 같다고 주장한 후에 비로소, 이성의 경주로가 열렸고, 그것(즉 이성)은 잘 조련된 말과 같이 출발점에서부터 발차를 가했다”(De  imaging  I,  2). ▣ 요한은 교회의 전승된 신앙에 대한 이러한 관점과 교부들의 전승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근거로, 그의  ‘인식의 원천’을 통하여 동 서방 교회에 지속적인 중요성과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교의학적, 신학적 내용을 성공적으로 전수해 주었다. 그는 이 저작의 첫 부분에서 특히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B.C.  384‐322)에 의지하여 철학적 개념들을  ‘교의학 입문’으로 다루었고, 제2부에서는  ‘이단사’를, 제3부에서는  ‘전통 신앙에 대한 정확한 서술’을 다루었다. 제3부는 100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리스 교부들의 교의학적 가르침들’을 훌륭하게 요약하고 있다. 이 부분이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요한은 이 저작 이외에도 다른 소규모의 논문들을 집필했다: 교의학적 문헌(‘올바른 생각에 관한 소책자’, ‘교리 입문’), 논쟁적 문서(‘네스토리우스주의자들과 단식론자들에 대한 논박 문서’), 주석(‘바울서신 주석’), 성문서(‘수도승의 소설인 발람과 여호아삽’), 그리고 금욕주의적‐도덕적 문헌들(가장 중요한 것은  3권으로 되어 있는  ‘거룩한 생활’)이 바로 그

Page 224: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것이다.    #유게니우스  3세(Eugenius  III, 1145‐54 재위)  (4.11.11): 로마의  167대 교황으로 버

나드(Bernard  of Clairvaux,  1090‐1153)의 제자로서 교황이 되었다. 유게니우스는  2차 십자군 원정을 위한 자금 모집을 위하여 유럽을 순회하면서 설교해줄 것을 버나드에게 요청하였다. 하지만 버나드의 후원은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고 한다.  #유구비누스(Eugubinus)  (4.11.12):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로렌조 발라(Lorenz 

Valla, 1407‐1457)를 반박하려고 교황 측에 고용되어 변호 활동을 했다.    #유노미우스(Eunomius)  (4.09.13):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였던 마게도니우스와 함

께 부동일 본질론을 주장하였는데 당시 주교직에 있지는 않았다.  #유베나리스(Decimus  Junius  Juvenalis,  ca.  55‐130)  (1.11.03): 데키무스 유니우스 

유베나리스는  브리타니아에서  타키투스의  장인  아그리콜라  밑에서  섬긴  것으로 추정되는 기사 신분의 시인(詩人)이었다. 그는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81‐96 재위) 황제 치하에서 추방을 당했는데 그 일이 그에게는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계속 

Page 225: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남았던  것으로  보인다.  트라야누스(Trajanus,  98‐117  재위)와  하드리아누스(Hadrianus,  117‐38 재위) 때 그는 다섯 권으로 된 시집  ‘풍자’(Satires)를 펴냈다. 이 책은 일상적으로 되풀이 되는 악행들에 관해서 종종 격렬하고 때로는 무례하게까지 비판한 작품이다. 초기의 풍자집에서 그는 도미티아누스 치하에 만연한 병리현상에 대해서 쌓였던 분노와 미움을 남김 없이 토해내는 듯하다.  ‘풍자  6’에서 여성들을 악하게 묘사한 것은 다소간 현실에 대한 실망이 소설에 반영된 듯하고,  ‘풍자 2와  9’에서 동성애를 격렬하게 비판한 것은 하드리아누스의 경향을 승인치 않았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의 가장 독창적인 작품은 거대한 생선을 요리하는  ‘중차대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자문회를 소집한 도미티아누스를 조롱한  ‘풍자  4’일 것이다. 그는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들게 하소서”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유베나리스가 중세에 큰 인기를 얻은 원인은 이교 로마의 퇴폐 풍조에 대한 그리스도 윤리주의자들의 견해를 인정해 줌으로써 그들의 비위를 맞췄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유베나리스는 유대인들이 흰 구름과 하늘의 신격을 예배한다고 비난하였는데 이는 당시 유대인들이 가시적인 형상으로써 하나님을 제시한 것을 비판한 것이다. 칼빈은 비록 유베나리스가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 것은 잘못이지만, 그가 신을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제시했던 유대인들을 

Page 226: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비판한 사실을 높이 사면서, 종교 개혁기 당시 교황주의자들에게서 편만했던 형상숭배를 비판한다. ▣ 엄격히 말해서  @유베나리스는 기독교인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루이스 벌코프(Louis  Berkhof)에 의하면, 당시의 유대인 기독교 신자들 중에는, 유대교적 경향을 띠고 있던 세 단체가 있었는데, 그 자취는 신약성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첫째, 나사렛파(The  Nazarenes)가 있었다. 이들은 기독교 교리를 받아들인 유대인 기독교 신자들이었다. 이들은 히브리어 마태복음만을 사용하였지만, 바울을 진정한 사도로 인정했다. 다른 유대종파들과 달리 이들은 예수의 신성과 동정녀 탄생을 믿었다는데서 두드러진 특징을 보여준다. 이들은 율법을 엄격히 준수하고 실행하였으나,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둘째, 에비온파(The  Ebionites)가 있었다. 이들은 사도 바울을 유대교적 입장에서 계속 반대한 진정한 바리새형의 단체였다. 이들은 바울의 사도직을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율법의 배교자로 여겼으며,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아마 구약의 유일신 사상을 주장하였던 케린두스파(Cerinthian)의 그리스도관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동정녀 탄생을 다 부인하였던 것이다. 이들의 견해대로 하면 예수는 다만 율법을 엄수한 점에서 다른 사람들과 다르며, 또 그의 율법적 경건 때문에 메시아로 피택되

Page 227: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었다는 것이다. 예수는 세례를 받을 때 이 사실을 의식하였으며, 또한 그때 그로 하여금 선지자와 교사의 일을 성취할 수 있게 하는 성령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들은  예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를  싫어하였다.  셋째,  엘크사이트파(The Elkesaites)가  있었는데,  이들은  접신론적  사색(theosophic  speculations)과  엄격한 금욕주의(strict  asceticism)로 특징 지어진, 유대적 기독교형을 나타낸 단체였다.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여, 그리스도도 다른 사람과 같은 방식으로 출생하였다고 주장하는 동시에, 그를 고상한 영이나 혹은 천사라고 보았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이상적 아담의 성육신으로 보았으며, 또한 그를 최고의 천사장으로 불렀다. 이들은 할례 받는 것과 안식일 지키는 것을 영광으로 알았다. 또 자주 세결 예식을 지냈는데, 여기에 마술적 정결과 화목적 의미가 있다고 하였다. 그들 사이에는 마술과 점성술이 성행했다. 그들은 율법준수에 대한 신비로운 교리를 가지고 있었다. 아마 이 운동은 당시의 혼란한 사상적 경향에다 자기네 사상을 적용해서 유대적 기독교로서의 일반적인 인정을 얻으려는 시도였는지 모른다. 골로새서와 디모데전서가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바로 이 이단에 대해서일 것으로 보인다.    #유세비우스(Eusebius,  265‐339)  (1.11.06): ▣ 가이사랴의 주교였던 유세비우스는 

Page 228: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팔레스타인에서 출생했다. 당시 팜필루스라는 학자가 오리겐(Orgen,  185‐254)의 책들을 보관하고 있던 가이사랴 교회에서 책과 씨름하면서 지냈는데, 유세비우스는 그와 오랜 동안 동거동락하면서 그의 지성과 신앙을 배우게 된다. 이후 유세비우스는 기독교 역사를 기록하기로 결심한 후, 기록과 자료들을 찾기 위한 여행에 나서게 되고, 저술에 집념하게 된다. 하지만 때마침 발생한 로마 황제의 박해로 인하여 도피자의 신세가 되었던 중, 다시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  288‐337)가 리키니우스(Licinius,  308‐24 재위)를 물리치고 황제에 오르면서  313년에 기독교를 합법적인 종교로 선포하게 되자, 그는 자유의 몸이 되게 된다. ▣ 유세비우스는  315년에 가이사랴의 주교가 되었고, 이에 따라 박해로 상처투성이가 된 교회를 회복하는데 전념하게 된다. 하지만 @틈틈이 저술 활동에도 힘을 기울여 마침내  10권의 대작인 ‘교회사’(Historia  Ecclesiastica,  325년)를 완성했다. 이 책 때문에 그는  ‘교회사의 아버지’(Father of Church History)라고 여겨지는데, 교회사는 이교도의 박해를 통과하여 승리하는 기독교에 대한 기록이다. 이 책에서 그는 아브라함의 출생에서 로마 황제 네로(Nero,  54‐68 재위),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284‐305 재위)의 박해를 포함하는 역사를 취급한다. 특히 그는 기독교의 기원과 승리, 교회의 성장과 조직에 초점을 맞추어 자신이 직접 경험하고 연구한 역사적인 자료들을 비판과 해설

Page 229: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을 자세히 곁들여 제시했다. 따라서 이곳의 자료들은 다른 문헌에서는 찾기 쉽지 않은 초대 교회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들이 된다. 유세비우스의 저술 목적은 미래의 신자들을 위하여 초대 교회의 가장 위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일부를 후세에 전하는 것이었다. 유세비우스가  ‘교회사’의 저자로보다는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로 더 많이 알려진 것은, 그곳의 주교로 오랜 동안 사역했기 때문이다. ▣ 유세비우스의 또 하나의 역작으로 연대기(Chronography)가 있다. 그렇지만 그의 저서가 연대 문제에서 정확한 것은 아니다. 이는 그가 기독교의 연대를 가지고 로마 제국의 사건들을 병행시켜서 단일 연대기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로마 제국은 자체의 연대기가 있었으나 유세비우스는 그것을 무시하였다. 이와 같은 획기적인 연대기 통합은 유세비우스의 사관에 토대한 것인데, 로마 제국의 기독교 박해는 종식되었고,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독교 옹호정책으로 로마 제국은 기독교 세계가 된다는 그의 역사 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그런 이유로 이제부터는 세계사와 기독교사는 분리되어 서술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즉 유세비우스의 연대기는 세계사를 성경의 하나님의 창조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로 봄으로써, 세계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경륜과 그의 영광을 높이려는데 의의가 있었다. 그리고 모세의 시대를 그리스의 트로이 전쟁 이전  50년으로 잡은 것은, 그가 기독교의 모태인 유대교가 가장 

Page 230: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오래된 이방 종교보다 더 오래된 종교라는 것을 말하려는 의도이고, 동시에 기독교가 신흥 종교로서 비하되는 일이 없게 하려는 변증법적 목적이 있었다. 그가 연대기를 통하여 이런 목적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들을 아주 간략하게 그리고 사실 중심으로 기술하는데 역점을 두었고, 인물 소개에는 흥미를 보이지 않았으며, 또 철학적인 문제도 배제하였다. 그러나 그는 고대 역사에 관한 많은 책들을 읽고 필요한 모든 것을 세밀하게 정리한 결과, 근동의 역사가 재구성되었고 세계 역사로 결합되어 나타나게 되었다. 한편으로 그 책에서는 성경의 역사에 나타난 선택된 백성의 사건들이 자세하게 다루어졌고, 아브라함과 함께 시작된 세계사에서 하나님의 선민과 구원의 역사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주고 있다. ▣ 유세비우스의 연대기와 교회사는 후대의 교회사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술피쿠스 세베루스(Sulpicus  Severus)는 유세비우스의 연대기를 모방하여 403년까지의 연대기(Chronicorm)를 저술하였다. 즉 유세비우스의 연대기가 교회사의 연대기는 물론 서양 역사의 연대기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연대기는 다 그리스도의 탄생을 중심으로 하는 기원 전과 기원 후로 구분하는 것이 되었다. 유세비우스는 그리스도 이전의 역사를 유대인의 구원의 역사는 물론이고, 그 밖의 이방의 모든 민족의 역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기다리고 준비한 역사라는 사상을 가지

Page 231: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고  ‘복음의 준비’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즉 유대교, 희랍의 철학, 로마의 법 등이 복음의 준비로서 가치부여를  @받게 된 것이며, 기독교는 이러한 준비의 역사 안에 뿌리를 박고 성장하여 성숙하였다는 것이다. 유세비우스는 그리스도가 만일 다른 어느 시대에 탄생하였더라면, 세계는 그를 수용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비로소 탄생하시기에 알맞은 준비된 시대에 탄생했다는 말이며, 그의 탄생은 따라서 적시에, 혹은 신약의 기자들의 말대로 ‘때가 차서’, 즉 카이로스(Kairos; 신약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헬라어로, 시간과 관련하여 다양한 의미를 나타낸다. 주로  ‘채워진 시간’이나  ‘바로 그 때’를 가리키는 것을 통하여,  ‘측정할 수 있는 시간’과 관계된 다른 헬라어  ‘크로노스’와 대조된다)에 나타났다는 말이다. ▣ 유세비우스의 사관은 기독교 세계관과 기독교 사관의 토대를 놓았다. 즉 세계사는 하나님의 창조로 인한 인간의 기원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며, 그것은 민족들과 인종들의 유래와 지역을 정한 정착과 문화의 건설과 쇠망, 국가 수립과 그 흥망성쇠 등 모든 것을 포함하는 역사이다. 또한 이 세계사는 어느 한 왕국이나 제국의 패권이나 어느 한 영웅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며, 그들의 흥망성쇠는 다 하나님의 역사 경륜과 역사 개입으로 된 것이지 그들의 의지와 힘으로 또한 욕망대로 성취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하여 그들과 그

Page 232: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들의 역사는 결국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능력을 찬양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섭리는 그의 역사의 주권 행위이며 인간주의 역사는 역사를 언제나 비참하게 만든다. 그러나 하나님은 역사의 주권자로서 세계를 비참한 데서 구출하여 재건하신다. 유세비우스는 그리스도 이전의 역사를 준비와 대망의 역사로 보고 새시대의 새 역사의 출현을 말하였는데, 이것은 묵시적, 즉 새시대의 환상을 말한다. 이러한 세계사관은 희랍적인  ‘순환 사관’과  ‘회고주의 사관’을 지양하고 창조 때부터 역사의 종말로 이어지는 직선적인 사관이다. 현실의 역사에 대해서는 인간주의적 역사적 행위자들의 소행으로 비관하면서도,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를 믿는 신앙으로 낙관한다. ▣ 신학적인 측면에서의 유세비우스는 아리우스(Arius,  250‐337) 논쟁 때 삼위일체에 관해 발표한 견해로 유명하다. 그는 오리겐의 사상 가운데 성자 종속설에 가까운 노선을 채택했다. 그것은 오리겐처럼 하나님이 만유의 창조주로서 지니신 독특한 자존을 중시한 결과였다. 그는 성자, 곧 로고스가 만물과 역사 전부터 존재하셨다고 주장하면서도, 성자가 하나님과 동등하게 영원하시다고 하는 생각을 부정했고, 성자의 발생을 성부의 의지와 연관지었다. 성부와 성자 사이의 일치점은 영광을 공유하시는 데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그가 니케아의  ‘호모우시오스’(Homoousios; 동일 본질성<one  and  the  same nature>을 의미하며, 니케아 신조

Page 233: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에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혹은 로고스의 성부 하나님과의 신성에 대한 관계를 설명한다. 아리우스파들은 로고스가 종속적인 존재라서 동일한 신적 본질이 아니라고 주장했으므로, 니케아 공의회는 이들이 참된 교리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신조에 호모우시오스를 삽입했다.) 문구를 보고 당황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 문구가 사모사타의 바울에 대한 불길한 기억을 떠오르게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성령도 유세비우스에게서는 훨씬 못한 대접을 받아서, 셋째 서열과 권능으로 묘사되었고, 오리겐이 말했듯이  ‘성자를 통해 존재하게 된 만물 가운데 한 분’으로 평가되었다. ▣ 유세비우스는 교회의 평화에 집착한 나머지 생전에 신학적인 입장을  @몇 번씩 바꾸었다. 그는 니케아 공회의 중에도 입장을  2번씩이나 바꾸면서 아리우스편에 섰다. 유세비우스에게서 나타나는 오리겐의 또 다른 잔영은 기독론에 대한 접근법이었다. 그는 말씀이 성육신 전에 수행하신 중보적 기능을 강조하는 전승을 계승했지만, 성육신에서 말씀의 중요성을 오리겐보다 훨씬 더 강조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인간 영혼이 아예 가려지게 했다. 이로써 그는 어느 정도는 아폴리나리스주의(Apollinarianism)로 이어지게 될 발전을 예기했다. ▣ 유세비우스가 발휘한 가장 큰 영향력은 아마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혁명을 이론적으로 변명한 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는 황제의 기독교 공인 사건

Page 234: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을 마치 출애굽 사건처럼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신 놀라운 사건이라고 해석했다. 그가 보기에 황제는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비상하게 개입하신 도구였다. 그의 교회사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종 사건을 중요하게 취급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에 덧붙여 유세비우스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생애’와  ‘콘스탄티누스 찬미사’도 썼다. 그는 평생 동안  10권의 대작인  ‘교회사’를 비롯하여 기타 다른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종류별로는, 교회사들, 변증적 저술서들, 교리적 논쟁서들, 주석서들, 그리고 크고 작은 많은 단편들이 있다.  #유스티나(Justina)  (3.20.32):  10세에  황제가  된  발렌티니아누스  2세

(Valentinianus  II, 375‐92 재위)의 모친으로 아리우스주의자였다. 당시 아리우스주의는 밀라노까지 확장되어 나왔으므로 암브로스는 힘을 다하여 이를 저지하게 된다. 그러나 이 문제가 표면화된 것은,  385년 당시  14세였던 젊은 황제의 어머니인 태후 유스티나가 아리우스 숭배를 위해 밀라노에 있는 교회 건물을 사용하게 해달라고 암브로스에게 요청했을 때였다. 이때 암브로스는 연좌 항의를 벌였고 그리스도인들은 그가 작곡한 찬송가를 부르며 농성을 벌였다. 결국 아리우스주의를 재건하려던 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그 후로 이탈리아계가 아닌 이방 군인들 가운데서 

Page 235: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소수의 무리가 저항한 것을 제외하고 달리는 큰 소동을 일으킴이 없이 아리우스주의는 무대에서 사라지고 만다.  #유케리우스(Eucherius, ?‐450) (2.02.09): 프랑스어판에 의하면, ‘옛날 리용의 주교’

라는 설명이 첨가되어 있다.    #유티케스(Eutyches,  ca.  378‐454)  (2.14.04): ▣ 기독교 초기의 4대 이단 중에서 4

번째 이단은 유티케스에 의해서 제기되었다. 콘스탄티노플  수도원의  원장으로서 유티케스는 알렉산드리아의 키릴(Cyril,  380‐444)의 그리스도론을 지지하면서 네스토리우스(Nestorius, 428‐31 재위)의 입장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네스토리우스를 반대하려던 그는 다른 반대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적 본성과 인간적 본성이 하나의 본성으로 융합되어 제3의 본성이 되었다는 그의 단신론적(mono‐physitische) 교리는 콘스탄티노플 회의(448년)에서 유죄 판결을 받게 되었다. 그러자 유티케스는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Theodosius  II,  408‐50 재위)에게 상소하여 승리하게 되고, 이를 기회로 알렉산드리아의 디오쿠로스와 힘을 합쳐 황제를 움직여  ‘강도 회의’로 알려진 에베소 회의(449년)를 연 끝에 모든 상황

Page 236: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을 역전시켰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반격이 일어났다. 낙마 사고로 사망한 테오도시우스  2세를 계승하여 마르키아누스(Marcianus,  450‐57 재위)가 황제가 되었을 때, 칼케돈 공의회(451년)가 개최되어 다시 모든 상황이 역전되었던 것이다. ▣ 그런데 강도 회의가 소집될 당시 레오(Leo 1, 440‐461년 재위)는 콘스탄티노플의 주교 플라비안(Flavian,  446‐49 재위)에게 교서를 보냈는데, 이것은 당시의 무력적인 분위기상  회의장에서  읽혀지지조차  못하고  무시되었지만,  칼케돈  신경이  작성될 때에는 많은 영향을 끼쳤다. 따라서 당시 레오가 보냈던 지침서의 중요한 사항 몇 가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⑴ 그리스도 안에는 이성이 있으니 그것은 영원히 구별된다. ⑵ 이성은 일위 안에서 연합하며 이들 각자는 성육신한 생활 속에서 각자의  적절한  기능을 행한다. ⑶  위의 통일성에서 속성의  교통(Communion  of  the Properties;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과 인성의 두 본성은 친밀하게 연합되어 있어서 신성의 속성은 어느 정도 인성을 나타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기독론의 특수한  용어이다)에  따라  ‘하나님께서  고난을  받으셨다’거나  ‘그리스도께서  창조의 일을  하셨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사상을  극단적으로  해석함으로  루터(Martin Luter, 1483‐1546)는 인간 예수의 편재성(Omnipresence; 하나님께서 어디든지 계시다고 하는 하나님의 속성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

Page 237: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지 않으시고, 그의 창조성과 능력은 모든 것에 작용한다. 따라서 무한성<infinity> 또는 무소부재<Immensity>와 동의어이다)의 기초 위에 성찬에 대한 루터파 해석의 기초로 삼았다. ⑷ 구속의 사역은 중보자에게,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 감각적인 것과 무감각적인 것, 가시적인 것과 불멸적인 것을 동시에 요구한다. 성육신은 하나님 편에서 친히 행하신 겸하의 행동이었으나 그 성육신에서 로고스가 바로 하나님되시는 일을 중지하신 것은 아니다. 종의 형상이 하나님의 형상을 상하게 하지는 못한다. ⑸ 그리스도의 인성은 영원하시며, 이것을 부인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실제로 고난 받으셨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다. ▣ 칼케돈 신조에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중요한 진리가 고백되었다. ⑴ 양성의 특성은 일위에 속한다. 예를 들면, 전지성과 제한된 지식 등과 같은 것들이다. ⑵ 신인의 수난은 참으로 무한한 것일 수 있으나, 그 신성은 감각할 수 없다. ⑶ 그리스도의 인격의 근거와 기초를 이루는 것은 인성이 아니고 신성이다. ⑷ 로고스는 별개의 인간 개체와 연합한 것이 아니라, 인성과 연합한 것이다. 처음부터 신격의 제2위와 합체된 개인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동정녀의 복중에서 인간의 본질과 연합한 것이었다. 이상과 같이 공의회에서  4대 이단의 각각을 명시적으로 거부하는 것을 목표로 절묘하게 고안된 몇몇 구절을 직접 인용해보면 이렇다:  “이 두 본성은 혼동(confusion)이 없고 변화

Page 238: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change)도 없으며 구분(division)도 없고 분리(seperation)도 없다.” 교회 지도자들은 이 네 단어 속에 예수 안에서의 신성과 인성의 신비가 담겨 있고, 따라서 이 용어들은 정통 기독교론의 경계를 이룬다고 확신하였다.    #율로기우스(Eulogius,  581‐608 재위)(4.7.4): 알렉산드리아 주교로 칼케돈주의자

이다.    #율리시이즈(Ulysses) (4.06.08): 호머의 오딧세이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이다.  #율리아누스(Julianus,  386‐454)  (2.04.03)  (3.03.13):  펠라기우스  운동(Pelagian 

Movement)의 지도자들 중 가장 학식이 깊었고 베네벤툼(Beneventum) 근처에 위치한 에클라늄(Eclanum)의 주교였다. 그는 아풀리아(Apulia)의 주교였던 메모리우스(Memorius)의 아들이었고, 그의 교회 경력은 아버지의 교회에서 시작되었다. 그 교회에서 그는 낭독자로 임명된 후 부제(집사)가 되었다.  417년경 로마 교회의  40대 주교 이노센트  1세(Innocent  1,  401‐17 재임)에 의해 주교의 지위에 오르게 되고 다양한 호칭으로 불리는 주교좌에 임명되었다. 학식과 열정과 숭고함으로 부러운 

Page 239: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명성을 향유했던 율리아누스가 어떻게 펠라기안 종파와 결합되었는지 명확한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41대 주교 조시무스(Zosimus,  417‐18 재위)가  418년 그에게 공문서를 발송했을 때, 율리아누스는 그 안에 포함된 펠라기우스의 이단 판정에 서명하기를 거부했던  18명의 이탈리아 주교들 중의 하나였다.  (이들 중에 몇 사람은 나중에 철회하고서 복직되었다) 그 결과 펠라기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의 추방을 선고한 황제 호노리우스(Honorius, 395‐423 재위)의 칙령에 따라 추방당했다. 421년 이탈리아에서 쫓겨난 율리아누스는 그 새로운 이단을 위하여 활발한 저술 활동을 시작하였고, 그러한 저작물로 인해 곧 이단 종파의 지적인 지도자의 위치를 얻었다. 펠라기우스와  @셀레스티우스(Celestius)의 가르침을 체계화한 것은 그의 수고 덕분이다. 명백하게 펠라기우스적인 그의 저술들은 주로 어거스틴(Augustine,  354‐430)이 변호했던 교리들을 향해 있었고, 펠라기안 종파들이 추방당한 몇 년 동안의 대립의 역사는 거의 율리아누스와 어거스틴 사이의 논쟁이었다. ▣ 율리아누스의 저술 대부분은 분실되었고 알려진 것은 다만 그의 적수들의 저술 속에 나타난 풍부한 인용들을 통해서이다. 그 인용들 중의 주요한 것들은 데살로니가의 주교 루푸스(Rufus)에게 보낸 서신, 어거스틴이 보니파스(Boniface) 주교의 요구로  ‘펠라기안의 두 서신에 반하여’라는 저술에서 반박했던 로마 성직자에게 보낸 서한, 그리

Page 240: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고 어거스틴의 저술  ‘혼인과 정욕에 대하여’(De Nuptiis  et Concupiscentia)에 대한 답신, 그리고 어거스틴이 자신의 저술을 변호한 것에 대한 그의 회답 등이다. 이태리에서 추방당한 후 율리아누스는 한동안 테오도루스(Theodorus,  350‐428)에게로 가서 그곳에 피난하기도 했다. ▣ 율리아누스는 펠라기우스의 견해를 계속 주장했고, 430년  어거스틴이  죽을  때까지  그와  글로써  논쟁을  벌였다.  율리아누스는  결국 431년 에베소 공의회에서 펠라기우스 진영의 사람들과 함께 단죄받았다. 그의 근본 논지는, 은혜가 인간 본성을 하나님이 의도하신 완전으로 인도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본성 자체도 창조주의 선한 선물이기 때문에 은혜와 본성이 완전히 무관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본성적인 것’은 아무 것도 악할 수 없다. 성적 충동도 하나님이 정해주신 범위 밖에서 나타날 때만 악한 것이며, 원죄와 색욕을 혼동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이렇게 율리아누스는, 어거스틴이 마니교의 사고 방식을 교회에 가지고 들어왔기 때문에, 그리고 그가  ‘고백록’에 기술한 사춘기 시절의 어리석은 소행으로 인한 성에 대한 강박적인 태도 때문에, 하나님이 지으신 선한 것을 훼손하고,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바라신다는 사도 바울의 분명한 가르침을 부정하기 때문에 자꾸 문제를 만든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러한 율리아누스의 역량을 다한 펠라기우스의 가르침에 대한 집착은, 그의 사력을 다한 논증들의 

Page 241: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사이 사이에 있는 모순들을 성경적으로 정확하게 짚어내는 어거스틴의 반박 앞에서는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율리우스  1세(Julius  I,  337‐52 재위)  (4.7.5): 로마 교회의  35대 주교이다. 콘스탄

티누스 대제의 두 아들 콘스탄티우스와 콘스탄스의 치세 시에, 동방 교회들이 아리우스파 때문에 분열과 소란을 겪었을 때 정통 신앙의 지도적 옹호자였던 아타나시우스가 추방을 당했다. 아타나시우스는 로마 주교의 권위를 빌려서 원수들의 광태를 누르며 고난 중에 있는 신자들에게 힘을 주기 위하여 로마로 갔다. 이때 로마 주교 율리우스  1세는 아타나시우스를 정중히 대접했고, 서방 주교들을 설득하여 아타나시우스를 지지하게 했다.  #율리우스  2세(Julius Ⅱ,  1503‐13 재위)  (4.7.27): 로마의  216대 교황으로 싸움을 

좋아하여 전쟁으로 이탈리아를 통일하려고 하였다. 교황은 전쟁에서 승리하여 개선할 때에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에게 명을 내려 보로냐에 있는  ‘베드로 성당’ 입구에 자신의 동상을 만들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역시 미켈란젤로에게 맡겨 자신의 무덤을 만들고 그림을 그리게 하였

Page 242: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다. 이후 그의 교만에 분노한 도시민들은 기회를 살려 그의 동상을 무너뜨려 녹여 대포를 만들어 버렸다. 또한 교황은 베드로 성당 신축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앞서 전대사를 발표하였는데, 이 공사는 후임 교황 레오  10세(Leo Ⅹ,  1513‐21 재위) 때까지 계속됨으로 말미암아 면죄부 판매 사건으로까지 확대된다.    #이그나티우스(Ignatius,  70‐107 재위)  (1.13.29): ▣ 이그나티우스는 사도적 교부

에 속한다. 사도적 교부라 함은  17세기 이후에 명명된 것인데,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의 작가를 지칭한다. 그 당시의 연구에 의하면, 이들은 사도들의 제자, 또는 사도들의 청중으로 입증되거나, 사도들과 직접적인 만남은 없었지만 사도적 전승의 담지자와 선포자로서 높이 평가되는 사람들, 그러나 신약성경의 저자에는 속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그나티우스는 자기 자신을 테오포로스(Theophoros, 하나님의 담지자)라고 일컬었는데, 사도 베드로를 포함하여, 오늘날 터키 동부에 있는 안타키아(Antakya) 지역으로 여겨지는, 시리아@∙안디옥 동방 교회의 두 번째 또는 세 번째 주교였다. 이그나티우스가 얼마나 오랫동안 주교직을 맡았는지 정확하게 규정할 수는 없다. ▣ 그가 체포되고 순교를 당한 시기는 트라야누스 황제(Trajanus, 98‐117년) 재임 시기에 속한다. 그는 안디옥에서 로마로 압송되던 기간 중에 에베

Page 243: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소, 마그네시아, 트랄레스, 로마, 필라델피아, 서머나 교회로 @여섯 편의 편지를 썼다. 또한 그는 한 편의 서신을 서머나의 폴리캅(Polycarp) 주교에게 보냈다. 여기서 두  가지로 밀접하게 관련된  주제는 은사주의자들(Charismatiker)과  신비주의자들(Mystiker)에 관한 것인데, 이그나티우스는 소아시아 교회들에 보내는 다섯편의 편지에서도 똑같은 주제를 말하고 있다: 각 지역의 교회들이 합심하여 분파적이며 이단적인 운동들을 극복하라고 권면하고, 특히 주교를 중심으로 한 예배와 형제적 결속으로 수도 생활을 영위해 줄 것을 권면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방랑 설교자들(Wanderprediger)이 전파하고 있는 이단적 교리들(유대교, 가현설)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다. 그런데 로마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는 그러한 경고와 권면이 완전히 빠져 있다. ▣ 한편 이그나티우스는 각 지역 교회들에서의 주교의 권위를 강조했고, 다른 한편 전체 교회보다 로마 교회에 우선권을 부여했는데, 이는 로마 주교청의 수위권의 전역사로 간주될 수 있다. 이그나티우스가 처음으로  ‘서머나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카톨릭’(Catholic)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의  서신들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은 특히  2세기 초반기의 소아시아ㆍ시리아 지역 교회들의 신앙, 윤리, 생활, 조직에 대한 정보를 제동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그나티우스는 교회 내의 세 가지 직분, 곧 주교, 장로, 집사가 이미 있었다는 것을 밝혀 주는 주

Page 244: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요 증인이 되고 있다. 그의 경우 주교에게 바치는 복종이 그리스도에게 바치는 복종과 동일시되었다. 신자들은 주교를 중심으로 모인다. 합법적인 성례전은 오직 주교의 집례와 과제로만 거행되는 것이었다. 주교는 사목적인 과제들(예컨대, 세례, 결혼)을 맡고, 이단자들과 맞서서는 교리의 순수성을 확립했다.    #이노센트  1세(Innocent 1, 401‐17 재임)  (2.07.09)  (4.05.08)  (4.07.14)  (4.19.21): 로마 

교회의  40대 주교로 교황제 확립에 몰두했다.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였던 크리소스톰(Chrisostom,  346‐407)의 문제를 놓고 알렉산드리아의 테오필루스와 분쟁을 겪었는데, 니케아 교회법이 로마 교회가 승인한 유일한 공의회 법령이라는 근거로, 테오필루스(Theophilus)가  안디옥에서  열린  아리우스파  공의회의  교회법을  인용한 것을 일축했다. 당시 크리소스톰은 아카디우스 황제(Arcadius,  395‐408 재위)의 게르만족 아내인 유독시아(Eudoxia)와 겪은 불화로 말미암아 유배길에 오르게 되었는데, 그러기 전에 로마 주교 이노센트  1세에게 호소했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지지한 이노센트  1세가 끝까지 힘을 써보기도 전에 크리소스톰은 유배길에 올랐고, 폰투스(Pontus)로 가던 중에 코마나(토카트)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407년  9월  14일). 따라서 이노센트는 크리소스톰의 원수들과 관계를 단절하면서 사건의 해명을 

Page 245: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집요하게 요구하게 되는데, 이를 통하여 콘스탄티노플을 지휘하는 교회로서의 로마 교회의 권위를 확립하려고 했다. 실제로 이노센트의 단호한 입장으로 말미암아 로마 교회의 위신은 크게 높아졌다.  416년에 이노센트는 주장하기를, 복음이 로마로부터 다른 속주들로 이미 두루 퍼졌고, 따라서 라틴 교회들을 로마 예배식을 따라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로마 교회의 위상을 높이려는 그의 이러한 특별 시도는, 그가 다음해에 죽게 됨으로 인하여, 이후의 주교들의 몫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그레고리 대제(Gregory  the Great,  540‐604)와 같은 주교는 로마 교회의 전례를 다른 모든 교회들에게 주장하는 정책에 분명하게 반대 의사를 밝힌 것으로 유명하다.    #이노센트  3세(Innocent  III, 1198‐216 재위)  (3.4.7): 교황청을 최고의 절정기에 올

려놓은 로마 교회의  176대 교황이다. 그는 파리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볼로냐에서 교회법을 공부했다. 그리스도는 베드로에게 전세계 교회를 다스리는 권한을 @주었을 뿐 아니라 전세계를 다스리는 권한을 주었다고 주장했다. 황제의 선출권은  7명의 선제후에게 있었으나, 교황은 이 선출된 사람들을 조사하는 권한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합당하다고 판단되어야, 비로소 교황은 그를 축복해 주고 관을 씌워 주면서 황제로 임명해주었다. 이렇게 교황이 인정을 해주기 전에

Page 246: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는 황제가 아니라 단순히 황제 후보자일 뿐이다. 이런 원칙에 따라 이노센트  3세는  1209년에 오토라고 하는 사람의 대관식을 집례하였다. 오토는 황제가 되기 전에 이탈리아 중심부에 교황의 영지를 확보해주고, 독일의 주교선거 즉 성직자 임명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러나, 황제가 된 후 그가 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자 교황은 프리드리히  2세라고 하는 사람을 황제로 임명했다. 결국은  2명의 황제가 서게 되었는데,  1214년 오토가 죽고  @난 뒤 프리드리히  2세가 정식 황제가 되었다. ▣ 프랑스의 필립  2세는 왕비와 이혼을 했다. 그러자 교황은 프랑스에 있는 모든 성직자에게 성직을 중지하도록 성직 정지령을 내렸다. 그래서 세례도 못받고, 결혼도 못하고, 고해도 못하고 죽으면 다 지옥에 가는 것이다. 결국 왕은 교황의 명령에 굴복하고 왕비와 재결합했다. 영국왕 존(John)은 대헌장에 서명했던 왕이다. 존왕이 켄터베리 대주교를 선출하는데 관여했다. 그래서 이노센트  3세가 랑톤(Langton)이라는 사람을 대주교로 임명했다. 여기에 대해서 존왕이 반대를 하자, 교황은 그를 파문시켜버렸다. 그리고 영국을 상대로 제4차 십자군을 선포했다. 결국  1213년 왕이 교황에게 굴복하고 영국땅 전체를 교황에게 바쳤다. 존왕은 교황에게  1년에  1천마르크씩 봉토세를 지불했다. 도미니크회와  @프란치스코회를 정식 교단으로 인정해 주었다. ▣ 이상 보았듯이 이노센트  3세는 종교적, 정치

Page 247: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적 감각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1215년 제4차 라테란 총회를 개최하였다. 여기에는 412명의 주교들과  800명의 수도원장들, 그리고 군주들이 보낸 대표들이 참석했다. 여기서 결정된 사항은 다음과 같다. 1) 화체설이라고 하는 교리가 채택되었다. 2) 휘오래의 요아킴을 공식적으로 정죄했다.  3) 동방 기독교는 서방 기독교에 종속한다. (이노센트  3세는 전세계의 교회를 지배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4) 모든 대주교는  1년에  1번씩 주교회의를 열어야 하고 이@ 회의에서 주교들은 이단을 색출하여 징계하여야 한다. 5) 주교는 자기 관할의 수도원들을 방문하고, 세속 통치자들이 그들을 압제하지 못하도록 그들을 보호하여야 한다.  6) 주교 자리가 공석일 때 참사회에서  3개월 이내에 새 주교를 뽑지 못하면 대주교가 임명하도록 해서 주교 자리가 오랫동안 공석이 되지 않도록 했다.  7) 일반 사제에게 도덕성을 고양(독신을 지키는 것, 음주, 도박, 사냥, 장사, 여관에 자주 가는 것, 화려한 의상을 입는 것 등의 금지)시킨다.  8) 종교적 일을 한 다음에 지나친 사례를 받아서는 안@ 된다. 9) 성직은 세습이 안되고, 이중 성직(여기서 주교를 하고, 또 저기 가서 주교를 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10) 평신도는  1년에 한번은 사제에게 고해를 하도록 해서 평신도가 이단에 빠졌는지를 알아보았다.  11) 카타리파(the Cathari)의 대안으로 독신이나 결혼하는 사람도 다같이 축복을 해주었다.  12) 이단으로 확정된 사람은 세속 

Page 248: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군주에게 위임해서 처벌하게 하고 재산은 몰수했다.    #이레네 황후(the Empress Irene, 797‐802 재위) (4.09.09): 비잔틴의 황후 이레네는 

레오  3세(Leo Ⅲ,  717‐41 재위)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5세(Constantinus Ⅴ,  741‐75 재위)가 낳은 아들인 레오  4세(Leo Ⅳ,  775‐80 재위) 황제의 아내였다. 레오  4세가 질병 때문에  31살의 나이로 일찍 요절하게 되자, 왕권은 그의 어린  10살짜리 아들 콘스탄티누스  6세(Constantinus Ⅵ,  780‐97 재위)에게 계승되었다. 당연히 어머니인 이레네가 섭정했다. 하지만 아테네 출신인 이레네 황후의 성격은 아주 교활하고 이중적이며 야심과 권력을 갈망하여 제국에 불화와 재앙을 가져온 여인으로 유명하다. 남편의 치세 동안 열렬한 성상 옹호자로서 그에게 압력을 행사하여 추방되었던 많은 성상숭배 옹호 수도자들을 복귀시켰고, 그들의 성모 마리아 상은 다시금 숭배의 대상이 되어 버젓이 소피아 성당에 나타났다. 성상 숭배를 회복시키는 이레네의 역량은 남편의 죽음을 기회로 권력을 움켜쥐게 되자 그 괴력이 한껏 살아났다. 이레네는 당시  10세 밖에 되지 않은 어린 아들인 황제 콘스탄티누스  6세를 섭정하면서, 제2차 니케아 회의(the Council of Nicaea, 787)를 소집하여 그 동안 금지되어왔던 형상숭배를 복구시키려고 하였다. 이를 위하여 먼저 서쪽에 사절을 

Page 249: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보내어 로마 교회의  95대 교황 아드리아노  1세(Adrianus  I,  772‐95 재위)에게 공식적인 공회 개최를 제의했다. 교황이 반대할 아무 이유가 없었으므로, 회의는 신속히 개최되어  786년  8월  17일 사도 성당에 대표단들이 집결하였지만 급작스럽게 밀어닥친 일군의 병사들 때문에 회의가 무산되게 된다. 하지만 이레네는 신속히 대처하여  9월에 다시 니케아에서 회의가 속개되었고, 성상 파괴 행위를 이단으로 규정하면서, 형상숭배야 말로 예배의 극치라고 결정하였다. 그런데 콘스탄티누스  6세는 성년이 되면서 어머니의 정치 간섭에 불만을 품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이레네는 보수파 정치가들과 모략하여 자기가 낳은 아들의 눈알을 뽑고 폐위시켜 버리는 잔인성을 보여주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아들을 낳았던 바로 그 침실에서 그 아들을 살해한 후,  797년에 로마 제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황제로 즉위했다. 황제가 된 후 제국 내의 형상숭배가 극도로 달아올랐을 것은 뻔한 일이다. 하지만 제국의 한편에서는 반대 세력도 만만치 않게 커져가고 있었다.  @쿠데타는 언제라도 기회만 잡으면 일어날 것이 뻔했다. 국고는 바닥났고, 신하들은 서로 갈라져 싸웠으며, 신앙의 영역 역시 형상숭배 옹호론자들과 반대자들의 싸움으로 끊임없이 문제를 만들어냈다. 무엇보다도 자기 아들까지 죽이면서 권좌를 찬탈한 독찬 여성 이레네를 향한  대중들의  경멸은  극에  달했다.  이런  상황에서  저  야만족(?)  샤를마뉴  대제

Page 250: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Charlemagne, Carolus Magnus,  768‐814 재위)와 정략 혼인까지 감행하다니! 결국 802년  10월 통치  @5년째의 이레네는  @쿠데타 군에 의해 원형 경기장에서 체포되었고, 섬으로 유배된 뒤  1년 후에 사망하였다.    #이레네우스(Irenaeus,  130‐202)  (1.13.27): ▣ 이레네우스는  4세기부터 순교자로 

추앙을 받았는데, 그리스어 표기 방식으로 된 그의 본명은 루그두눔의 에이레나이오스였다. 그는 소아시아의 서머나에서 출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그곳에서 폴리캅(Polycarp)의 설교를 들었고, 그의 제자가 되었다. 따라서 이레네우스도 역시 사도 세대에 속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이레네우스가 언제, 그리고 무슨 이유에서 서머나를 떠나 갈리아로 옮겼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아무튼 그는  177년, 또는 178년에 루그두눔 교회의 장로가 되었다. 거기에서 이레네우스는 리용과 비엔나의 순교자들의 임무를 맡아 추천서를 갖고서 로마로 파송되었다. 당시 종말론적, 엄격주의적 운동의 하나인 몬타누스(Montanus,  150‐?) 추종자들에 대해서 관대한 정책을 폈던 로마의 주교, 엘로이테루스를 설득하기 위한 것이었다. ▣ 그가 리용으로 되돌아왔을 때, 포티누스(Pothinus) 주교가 순교자로 사망했기 때문에 이레네우스가 그의 후계자로 선출되었다. 부활 논쟁 시기에 이레네우스는 그 논의에 개입했

Page 251: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다. 그는 로마 교회  14대 주교 빅토리우스  1세(Victorius  1,  189‐99 재위)로 하여금 소아시아 교회들과 평화를 맺게 하는 일에 성공했다. 그런 까닭에 유세비우스는 그를 교회사 속에서 평화를 위해 일한 자로 묘사했다. 갈리아의 동부 지역의 대부분의 선교는 아마도 이레네우스에게 소급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말년은 어둠 속에 사라졌다. 그의 사망, 즉 순교의 시기도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다. ▣ 이레네우스는  2세기의 가장 유명한 신학자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5권으로 구성된  ‘이단 논박: 이른바 거짓된 영지주의에 대한 반박’(Against Heresies,  185년)은 발렌티누스의 영지주의 체계가 반 그리스도교적인 것임을 입증했다. 이 책에서 이레네우스는 발렌티누스의 교설을 설명하고, 이와는 다른 교회의 교리를 설명함으로써 반박했다. 그리고 나서 시몬 마구스로부터 시작하는 영지주의의 역사에 대한 개관을 다룬다. 영지주의는 성경적, 교회적 형태를 표방한 자기 구원의 신화로서 부분적으로는 심오한 깊이가 있어 보인다. 이레네우스의 반박은 이성에 근거하여 사도들의 전승과 교훈, 그리고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인용으로 전개되었다. 마지막 부분은 ‘최후의 일들’에 관해서 다루는데, 여기에서 육신의 부활을 강조했다.  ‘사도적 선포의 해석’이 정통 신앙을 설명하고 하나님, 삼위일체, 창조, 타락, 구원을 다루는 목표로 설정되었다. 다윗의 후손인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

Page 252: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의 나라가 이미 도래했다는 증거로 구약성경을 내세웠다. 이레네우스는  ‘총괄갱신설’(the Recapitulation Theory;  ‘요약’이라는 의미의 라틴어로, 기독론과 구원론의 어떤 형태를 가리키기 위하여 사용하는 용어이다)을 주장했는데, 핵심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그 이전의 모든 신적 계시를 요약해 재현했다는 것이다. ▣ 이레네우스는  ‘성경’이라는 표현이 구약에서부터 신약까지 확대되었고, 그 사이에 신약성경이 정경으로 완결되었으며, 그 영감의 성격과 증거의 능력이 구약성경과 똑같은 수준으로 제시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제1의 증언자이다. 구약과 신약의 어떤 책들이 교회 회의에서 성경으로 채택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사도성(Apostolicity; 로마 카톨릭은 이것을 교리, 전통, 교회 질서 안에서 본래의 사도들을 끊임없이 이어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하면서 주교 제도의  @끊임없는 계승으로 결론짓는다. 하지만 개신교의 입장에서의 사도성은, 사도들이 전한 메시지를 계승하는 것이므로, 단순히 역사적으로 교회적 구조를 계승하는 것에 적용하지 않는다)의 원칙뿐만이 아니라 교회의 전승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복음서 기자들에 대한 형상 상징물들은 이레네우스에게서 비롯되었다. 그는 네 그룹의 형상과 그리스도교 밖의 전승들을 결합시켜, 마태복음을 인간/천사로, 마가복음을 사자로, 누가복음을 황소로, 요한복음을 독수리로 묘사했다. ▣ 이레네우스는 영지주의 체계에 대한 최

Page 253: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종적인 논박을 위해서 헤게시프의 입장에 간접적으로 의지하여, 사도적 승계와 전승의 원칙을 강화시켜 놓았다. 신앙의 원천과 신앙의 규범은 올바르게 믿는 교회 속에 존속하는 사도들의 교리의 전승이다. 올바른 신앙의 전승을 위해서는 주로 사도들에 의해서 설립된 교회들이 고찰된다. 사도들로부터 현재의 주교 직분자에 이르기까지 중단 없는 주교들의 계승이 교리의 진리성을 보증한다. 사도들에 의해서 설립된 모든 교회들의 인명록을 인증하는 것이 막중한 것이기 때문에, 가장 크고 가장 오래되었고 모두에게 알려진, 그리고 영예로운 베드로와 바울 사도에 의해서 설립된 교회를 증거로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 교회와 일치하는 교회는 항상 올바른 교회를 수용하고 있다. 이단의 방지를 위해서는 전승 및 승계의 원칙만으로도 충분한데, 여기에서 사도적 계승이 신앙론의 올바른 전승을 위한 보장이 된다. 이렇게 이레네우스는 교회에서의 직분의 결정적인 중요성을 강조한다. ▣ 이레네우스는 영지주의적 이원론에 반대하여 창조주 하나님, 성부이자 예수 그리스도이신 하나님,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구원의 경륜),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를 가르쳤다. 성령이 은총의 원칙이다. 그리스도는 새로운 아담으로서 모든 피조물을 새롭게 하며 재창조함으로써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가게 한다. 이레네우스는 이브‐마리아 평행론에서 새로운 아담 그리스도와 새로운 이브 마리아를 발견한다. 동

Page 254: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정녀 마리아는 복종을 통하여 이브의 불복종을 회복시켜 놓았다. 그녀의 복종 때문에 모든 인류를 위한 구원의 협력자가 되었다. 이레네우스는 모든 인간에게 전수되는 원죄론을 주장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유사성을 따라 창조되었지만, 죄를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했다. 하나님의 형상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재창조되었다. 따라서 이레네우스는 유아 세례의 필연성을 주장한 첫 번째 증인이 되었다. 이레네우스는 지하 세계인 하데스를 죽은 자들의 영혼의 거처라고 설명했다. 죽은 자의 집인 무덤은 하데스의 지부이므로, 대부분의 죽은 자들의 영혼이 보편적인 부활시까지 그곳에 머무르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세계 종말 이전에 1,000년  동안  부활한  자들을  다스리신다고  했다.  이레네우스에  의하면,  성례전은 주님의 살과 피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죽은 자들의 부활이 있을 때에만 의미를 갖게 된다. 창조의 은사인 빵과 포도주는 예수의 살과 피로써 전세계를 위한 교회의 새로운 희생 제사이다. 성례전은 예언자 말라기에 의해서 선포된 새로운 희생 제사이다. 이레네우스의 사상은 대부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예전 개혁을 계기로 성례전 예식문에 반영되었다.  #이시도르(Isiodorus, d. 636)  (4.19.22): 세빌레의 이시도르(Isiodorus of Seville)는 

Page 255: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아주 무서운 학자 형을 둔 덕분에 당대에 가장 존경 받는 석학이 되었다. 그는  37년간 주교로 재직하면서 비시고트인들을 카톨릭으로 개종시키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백과사전의 일종인  ‘어원학’을 편집했고, 비시고트의 역사책을 지었으며,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돌보는 데 앞장 섰다.  ‘어원학’은 모든 세속적, 종교적 지식을 집대성하려 한 중세 초기의 백과사전의 일종으로서 중세 시대 동안에 학생들을 위한 표준적 참고서가 되었다.    #자카리아스(@Zacharias, 741‐52 재위)  (4.07.17): 로마 교회의  91대 주교로 특별히 

프랑크 왕국과의 관계에 공을 들였다. 당시 페핀  3세(Pepin Ⅲ,  747‐68 재위)의 황제권 찬탈 사건과 포카스 때부터 시작된 로마 주교의 교황권 굳히기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페핀은 합법적인 황제를 추방하고 정권 탈취에 성공하는데, 이때 로마 주교 자카리아스의 도움을 입는다. 따라서 페핀은 정권을 찬탈한 후 자신에게 협력한 자카리아스에게 모든 교회의 수위권을 주며 특히 재판권까지 부여하는 협정을 맺는다. 이로써 로마 대주교는 교황이 되어 모든 교회를 통치하는 교회 황제의 자리에 등극하게 된다. 페핀의 아들 샤를마뉴 대제(Charlemagne, Carolus Magnus, 768‐814 재위)에 와서 역시 같은 정치적 상황이 펼쳐지는데, 교황을 이용하여 정권

Page 256: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의 안정을 꾀하려 했던 샤를마뉴였던지라, 그 역시도 로마 교황의 교황권을 강화시켜 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교회사 속에서 명백히 나타나듯이, 로마 교회의 교황권이란 것은, 기원을 주님께서 찾을 수 없고, 단지 포카스와 페핀 황제에게서 찾을 수 있을 뿐이다.  #재세례파(the Anabaptists) (2.08.26) (3.03.02) (4.01.13): 재세례파는  16세기 종교개

혁의 급진파 혹은 좌파 운동에 참가했던 집단이다. 재세례파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성인 세례이다. 이 운동의  1세대 개종자들은 세례를  2번 받았는데, 하지만 당시의 법에 따르면 재세례는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였다. 그래서 재세례파 자신들은 세례를  2번 받는다는 사실을 부인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이 받은 유아 세례를 신성모독적인 의식으로 보고 부정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죄와 믿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성인 세례를 받는 것만이 유일하게 타당한 세례라고 보았다. 주로 스위스의 종교개혁가 율리흐 쯔빙글리(Ulich Zwingli,  1484‐1531년)의 견해를 따른 그들은 유아들이 선과 악에 대한 자각이 생기기 전까지는 죄로 인한 형벌을 받지 않으며 그런 자각이 생기고 난 후에야 자유의지로써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견해를 고수했다. ▣ 또 재세례파들의 신앙에 따르면 구원받은 자들의 공동체인 

Page 257: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교회는 국가로부터 독립해야 하며, 죄인을 처벌하는 것이 국가의 유일한 존재 이유라고 보았다. 대부분의 재세례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전쟁을 행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는 것에 반대했으며, 맹세 역시 인정치 않았으므로, 시민 선서를 하는 것도 거부했다. 이런 신앙 때문에 수천 명의 재세례파들이 죽임을 당했다. ▣ 재세례파들은 중세 교회의 개혁을 목표로 삼지 않았으며, 단지 초대 교회의 제도와 정신을 복원하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마지막 시대를 살고 있다는 분명한 확신을 갖고 있었고, 재세례파 운동의 지도자들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예언자와 사도로 기꺼이 인정했다. 모든 개종자들은 심판관 앞에서 자신들의 신앙을 충분하게 설명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자신들이 받는 고난을 처음  3세기 동안 그리스도교 순교자들이 받았던 고난과 동일시하곤 했다. ▣ 이러한 재세례파 운동은 취리히의 젊은 지식인 집단 가운데에서 처음 생겨났는데, 이들은 쯔빙글리가 행정관들에게 아부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교회의 전반적인 개혁을 신속하게 진행하는 데 주저하는 태도를 보이는 데 반발했다. 그들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은 귀족 출신으로 상당한 학식을 갖춘 인문주의자 콘라트 그레벨이었다. 최초의 성인세례는  1525년초에 취리히 외곽의 촐리콘에서 실행되었으며 곧이어 대중운동이 진행되었다. 스위스 운동의 좀더 독특한 신념들 가운데 일부는 미하엘 자

Page 258: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틀러의 지도로 준비된 슐라이트하임 고백(1527)의  7개 조항에 제시되었다. ▣ 재세례파 지도자들의 격렬하고 비타협적 태도와 그들의 가르침에 함축된 혁명적인 내용 때문에 그들은 차례로 각 도시에서 추방되었으나, 이것은 기본적으로 선교운동을 촉진시켰을 뿐이다. 얼마 후 여러 도시의 시장들은 좀더 완고한 조치를 취했고, 초기의 재세례파 지도자들은 대부분 옥사하거나 사형당했다. ▣ 토마스 뮌처는 재세례파가 마지막 시대를 살고 있다는 사실을 유난히 강조하였다. 그는  1525년 반란에서 튀링겐 농민을 이끈 이후에 사형당했다. 그의 제자였던 한스 후트는 남부 독일의 중요한 급진 개혁주의자였는데,  1527년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옥사했다.  1528년 빈에서 사형당한 발타자르 후프마이어는 모라비아 니콜스부르크의 지도자였다. 그곳을 다스리는 영주들의 호의에 힘입어 많은 재세례파들이 그곳에 정착하여 예루살렘의 초대교회를 모델로 삼아 재산 공유를 강조하는 재세례파주의의 한 양식을 발전시켰다. 야곱 후터가 지도자로 있을 때 이들 공산주의적 이주민들은 그의 이름을 따라 후터파로 불리게 되었다. 후터파는 지금은 주로 미국 서부와 캐나다에서 명맥을 이으며 살고 있다. ▣ 멜히오르 호프만은 네덜란드의 재세례파 사도로서 네덜란드에서 상당히 많은 추종자를 얻었다. 그는 이 세상이 곧 끝나며 새 시대가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시작될 것이라고 가르치다가  1533년에 그곳에서 투옥

Page 259: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되어  1543년경에 죽었다. 호프만의 추종자 중 일부는 네덜란드 사람인 얀 마테이스(1534 죽음)와 레이덴의 얀 뵈켈손(1535 죽음)의 영향을 받았다. 이 두 지도자들을 비롯한 여러 망명자들이  1534년에 베스트팔렌의 뮌스터에 정착했으며, 이곳에서 그들은 도시의 통치권을 장악하고 공산주의적인 신정국가(神政國家)를 세우고 일부다처제를 실시했다.  1535년 독일의 군주들이 일으킨 군대에 의해 뮌스터는 함락되었으며 체포된 재세례파들은 고문과 죽임을 당했다. ▣ 근대 역사가들은 뮌스터 사건을 재세례파 운동의 일탈현상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 수년 동안 전통적인 개신교도와 카톨릭교도들은 호전적인 소수의 재세례파와 평화적인 다수의 재세례파를 가리지 않고 유럽 전역에 걸쳐 재세례파에 대한 탄압을 가중시켰다. 네덜란드와 북부 독일의 평화적인 재세례파들은 과거에 사제였던 메노 시몬스와 그의 부관 디르크 필립스의 영도 아래 집결했다. 그들의 추종자들은 살아남아서 마침내 메노파라는 종파를 형성했다.  #쟌 제르송(Jean  Gerson)  (4.7.28): 그러나 내가 말한 교황들은 설교로나 저술로 

그들의 신앙을 발표하지 않고 단지 식탁이나 침실이나 방안에서 무심코 드러냈을 뿐이므로 세상에 대해서는 그 신앙이 숨겨졌다고 가정하자. 그러나 만일 그들이 

Page 260: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주장하는 특권을 여전히 유지하고 싶다면 교황 명부에서 요한  22세(pontiffs  John XX  II, 1316‐34 재위)를 삭제해야 한다. 이 사람은 영혼은 사멸적인 것이어서 육체와 함께 죽어 부활하는 날까지 죽은 대로 있다고 공공연하게 주장했다. 그때에 로마 주교직이 그 모든 지주와 함께 붕괴되었다는 것은 파리 학파가 프랑스 왕을 충동해서 교황이 자기 주장을 취소하도록 압력을 가한 것 외에는 이 심한 광증에 반대하는 추기경이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로써 쉽게 알 수 있다. 교황이 신속하게 회개하고 이 사실을 상례에 따라 전령관을 통해서 발표하지 않을 경우 프랑스 국민은 교황과의 교통을 끊으라고 왕은 명령했다. 이런 부득이한 강요에 의해 교황은 자기의 과오를 철회했다고 당시에 살아 있던 쟌 제르송이 말했다.  #저스틴 마티어(Justin Martyr,  100‐165)  (1.10.03)  (1.13.29): ▣  2세기의 가장 유명

한 변증가, 철학자, 순교자인 저스틴은 플라톤 사상의 그리스 철학과 그리스도교의 종합을 통하여 신학 전체에 결정적인 자극을 던져주었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2세기 초엽에 팔레스틴 시켐 근처 프라비아 네아폴리스(Flavia Neopolis)에서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저스틴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자신의 민족’이라고 표현했지만, 그의 저작을 살펴보면 그가 이교도에서 그리스도교로 전향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Page 261: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있다. 저스틴은 자신의 회심을 참된 철학을 추구한 길의 성취로 묘사한다. 그는 처음에 스토아 철학에서 시작하여 페리파토스 학파, 곧 소요 학파로 바꾸었다가, 피타고라스 학을 거쳐, 마침내는 플라톤 철학에 심취하게 되었다. ▣ 저스틴은 한창 플라톤의 사상에 빠져들던 중인  133년경 에베소 해변가에서 묵상 중에 만난 노인으로부터 구약의 선지자들과 구약에 예언된 그리스도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 기독교를 참 종교로 받아들이게 된다. 저스틴은 성령(Holy  Spirit;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으로  설명되어 나온 삼위일체의  제3위격을  가리키는데,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에, 성령이 임하셨고, 그를 광야로 인도하셨으며, 귀신을 쫓아내게 하시는 등등의 능력으로써 그와 함께 하셨다. 오늘날 성령께서는 구원의 보증의 영이 되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자녀들 안에 내주하시사 그들의 삶을 인도하신다) 안에서 예언자들에 의해서 선포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된 진리를 플라톤의 철학을 능가하는  가장  높은  철학으로  보았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훗날  저스틴은  말하기를, “나의  영혼은  그  즉시로 불타오르기 시작하였으며,  나는 선지자들과 그리스도의 친구들에 대한 사랑을 갈망하여 마지 않았다. 내가 그들의 교훈을 상고하였을 때, 그 속에는 참으로 의지할 만하고 유용한 철학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모든 일이 이렇게 일어났으며, 이로 인하여 나는 비로소 진정한 철학자가 되었다”라고 고백하

Page 262: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였다. 이때 이후로 저스틴은 기독교를 모든 철학의 완성으로 간주하고, 이방 철학자들에게 이를 전파하며 평생 변증하는 삶을 살게 된다. ▣ 저스틴은 황제 안토니우스  피우스(Antonius  Pius,  138‐161  재위)와  그의  아들  황제인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161‐180  재위)와  원로원과  전  로마  국민들에게  보낸  ‘변증서’(Apologie,  155년)에서, 거짓된 혐의로부터 그리스도교를 변호하기 위하여 애쓴 복음의 추종자들의 진실성, 순결, 인내, 고백의 용기를 강조했다. 저스틴에게 있어서 이것은 동시에 그리스도교 진리를 위한 증거이기도 했다. 그는  ‘철학자들과 이신들이 영혼의 불멸성이나 죽음 후의 심판, 천국의 문제에 대한 명상, 또는 다른 유사한 진리들에 관해 획득한 모든 것들은 그들이 예언자들로부터 취한 것들’이라고 했다. 저스틴이 그리스도교 철학자로서 가르치던 로마에서 이방의 신화론과 철학을 비판함으로써, 견유학파(Cynics; 자족의 바탕 위에 덕행을 추구하는 철학 형태로, 통상  ‘키니코스주의’라고도 한다)의 크레센과 심각한 적대감에 빠지게 되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저스틴의 제자인 타티안(Tatian)이 보도해 주고 있다. 이러한 적대 관계는 로마 총독 루스티쿠스 치하에서 저스틴과 그의 여섯 제자를 순교의 길로 이끌었다. 이 죽음은 저스틴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유대인 트리폰과 함께, 특히 그리스도교의  하나님과  구약  성경의  창조주  하나님을  구별하고자  한  말시온

Page 263: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Marcion,  2세기)을 포함한 이단자들과 이교도들에 반대하여, 구약 성경의 그리스도교적 성격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 저스틴의  ‘로고스론’은 신학사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독생자이며 신적인 로고스의 충만이라고 정의함으로써 독특한 로고스 신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저스틴은 그리스도의 본성을 철학적인 세계의 로고스와 일치시킴으로써 그리스도 이전의 철학자들, 예컨대 소크라테스(Socrates, B.C.  469‐399)와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  B.C.  545‐480) 같은 사람들도  ‘그리스도인들’로 간주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견해는 저스틴의 신학이 지나치게 철학적인 체계에 의존한 데서 나타나는 오류로 개혁주의 신학사상 체계를 벗어난 것이다. 하지만 저스틴 자신에게 있어서는 그리스도는 선과 지혜가 나타나는 로고스의 계시이다. 이것은 철학적인 문제들에 대한 대답도 그리스도의 계시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고, 저스틴은 계시의 우위성을 확신했다. ▣ 저스틴은 한 기독교 여인의 이교도 남편이 아내의 스승인 프톨레미를 당국에 고발하여 부당하게 @처형시킨 데 대하여 항변하기 위한 의도로, 앞서의 것보다는 좀 적은 분량인  ‘제2 변증서’(The  Second Apology,  160년)를 저술하였다. 훗날 저스틴은 로마 제국을 여행하던 중 두 번째로 로마시를 방문하였지만, 그만 그 때 순교하게 된다. 당시 저스틴에게 패배한 이교도 철학자가 그를 무서운 범죄

Page 264: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를  저지른  그리스도인이라고  모함하여  고발함으로  말미암아  저스틴은  소환되어 재판을 받았는데, 신들에게 희생제물을 바칠 것을 요구하는 황제의 명령에  @불복하고, 기꺼이 참수형을 당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신앙을 순교로서 확인하였다. ▣ 초기 기독교 신학의 출발에 있어서  ‘변증가들의 과업’(The  Task  of  the Apologist)은 실로 중요하였다. 변증가들의 임무는 방어, 공격, 건설의 세 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기독교인들은 비난 받을 만한 아무런 증거가 없으며, 그들을 향한 공격적 행위는 복음의 정신과 교훈에 전혀 위배되는 것이고,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의 성격과 생활은, 도덕적 순결성에 의하여 특징지어졌다는 것들을 보여줌으로써 기독교를 옹호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히 기독교를 방어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더 나아가 그들의 반대자들을 공격하였다. 율법의 대부분이 그림자요 상징적인 것인데,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율법의 일시적인 요소들을 영원한 것으로 표현하는 율법주의 유대인들, 그리고 예수가 예언된 메시야요 율법의 완성자인을 깨닫지 못하는 우매한 유대인들을 공격하였다. 더욱이 그들은 이단의 무가치성과, 어리석음, 부도덕한 특성들을 폭로하였고, 특히 하나님의 유일성과, 우주 만물의 섭리, 도덕적 통치, 내세 등을 비교하면서 이교의 신관을 공격하였다. 저스틴의 제자 타티안은 희랍 철학의 가치성을 거의 인정하지 않았으나, 스승 저

Page 265: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스틴은 거기에도 참된 요소가 있다고 인정하고 그것을 로고스라고 하였다. 이들 저술들의 공통된 특성은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를 혼합시켜 놓은 것이다. ▣ 변증이란 본래 헬라어  ‘아폴로기아’에서 유래한 용어로, 그 뜻은  ‘입으로 말하는 변호’로, 곧 논리적 변호나 옹호를 의미한다. 이같은 변증 방식의 유래는 플라톤이 그의 저작  ‘소크라테스의 변명’ 혹은  ‘대화록’에서 처음으로 보여주었다. 이 책에 의하면, 고령의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청년들을  도덕적으로  타락시킨다는  누명을  썼을 때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는 장면이 나온다.  “내가 취한 태도가 어떠한가에 대하여 신경 쓰지 말고, 내가 하는 말의 진실성에 대해서만 생각해 주시오. 바로 이 점에 관심을 집중하시오. 말하는 자는 진실하게, 재판하는 자는 정당하게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한 후 판결에 따라 독배를 마셨다.   ▣ 이러한 고대의 사례를 근거로, 초기에 기독교 진리에 대한 명확한 진술과 진리 수호를 요구하는 압력이 안과 밖으로부터 있었고, 이것이 기독교 신학의 발단 원인이 되었는데, 진리의 수호를 맡았던 초대 교부들은 이런 이유에서 변증가들이라고 불리워졌다. 저스틴은 이들 중 가장 중요한 인물들이지만, 동시에 쿠아드라투스(Quadratus)와 아리스티데스(Aristides),  저스틴의  제자였던  타티안(Tatian,  110‐172),  아데나고라스(Athenagoras)와 안디옥의 데오빌로스(Theophilus of Antioch) 등도 중요하다. 기타 

Page 266: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시르디스(리비아의 수도)의 주교 멜리토(Melito), 파피아스를 계승한 브루기아 히에라볼리의  주교  아폴리나리우스(Apolinarius),  밀티아데스(Miltiades),  헤르미아스(Hermias), 헤게시푸스(Hegesippus), 고린도의 디오니시우스(Dionysius) 등도 기독교 변증가로서 활약하였다. 무엇보다도, 이레네우스(Irenaus of Lyons, 130‐202)와 그의 제자 히폴리투스(Hippolytus,  170‐235)의 활약은 더욱 돋보인다 하겠다. 이들은 한편으로는 정치인들에게, 다른 한편으로는 지식대중들에게 그들의 변증론을 말하였다. 그들의 직접적인 목적은 기독교에 대한 집권자들과 일반 대중의 감정을 완화하려는데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기독교의 진정한 특성을 설명하며, 그리스도인에 대한 비난을 논박함으로 이 목적으로 이루려 하였다. 그들은 기독교의 합리성을 강조하여, 지식층으로 하여금 기독교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특별히 애를 썼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기독교를 최고요 가장 확실한 철학이라고 표현하면서, 자연 종교의 대진리, 즉 신과 도덕, 그리고 불멸을 특별히 강조하였으며, 또 기독교를 유대교(Judaism)와 헬레니즘(Hellenism)에서 발견되는 모든 진리의 완성이라고 설명하였다.    #제롬(Jerome,  345‐420)  (1.13.05): ▣ 라틴어 이름인 유세비우스 히에로니무스로

Page 267: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도 널리 알려졌던 제롬은 부모의 열망에 따라 로마에서 수사학과 문법을 공부했다. 이 시기에 우수한 고전 작품들을 섭렵했으며, 청년 시절에 세례를 받고서 로마 교회에 가입했다. 말년에 동방에서 지내긴 했을지라도 평생 로마 교회에 속한 상태로 남았다. 잠시 독일 트리엘로 여행하게 되었을 때 그곳에서 기독교 서적을 읽고 수도 생활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후 아퀼레이아의 수도원에 입소하지만, 수도원이 해체되게 되자, 그곳을 떠나 팔레스틴으로 가서 광야에서 독거 수도에 힘썼다. 하지만 그렇게 혼자서 하는 수도 생활이 마음에 맞지 않았고,  40대의 제롬에게 은둔과 금욕 생활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는 인내하면서 히브리어를 습득함으로써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훗날 성경 번역을 위한 준비에 몰두하게 된다. ▣ 이러한 생활과 성경 학자로서의 학문적 성숙은 이후 로마로 왔을 때 여지 없이 드러났다(382‐385년). 그는 로마의 경건한 귀부인들에게서 신망을 얻었고, 그들의 교사와 상담자가 되어 주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단점이 있듯이, 일면 제롬의 성격은 아주 꼬장꼬장하였는데, 심한 경우 반대자들을 공격하기 위하여 자신의 호방한 학문을 동원하여 증오와 저주를 퍼붓기까지 하였다. 자신을 향한 비판을 잘 견디지 못하는 성격이었으며, 따라서 가장 가까웠던 사람들이 가장 먼 사람들로 변해버리는 일이 자주 있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워낙 그의 학문이 뛰어났

Page 268: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기 때문에, 그의 반대자들까지도 그의 성경 주석을 읽는 것만큼은 자존심에 메일 수가  없었다.  ▣  제롬이  로마에  머물  당시  로마  교회는  37대  주교  다마수스(Damasus, 366‐84 재위)의 시기였는데, 그는 다른 반쪽 주교 우르시누스(Ursinus)와 대립 관계에 있었다. 이후 다마수스는  137명이나 죽는 사태가 벌어진 추한 패싸움까지 동원한 끝에, 그리고 로마 장관의 지원을 받아 주교의 자리를 차지했지만, 영적이며 도덕적인 권위가 말이 아니게 땅에 떨어졌다. 그는 이를 만회하기 위하여 온갖 정책을 구사했으며, 그 중에 이름을 날리고 있던 위대한 학자인 제롬이 잠시 로마에 와 있던 틈을 살려 그에게 성경 개정 작업을 부탁하게 된다. 당시에는 이미  2세기 경부터 라틴어역 성경들이 나름대로 존재해왔지만, 문체가 미려하지 못하고, 회화체였으며, 게다가 구약 성경의 경우 히브리어가 아닌 헬라어에 기초한 번역이었다. 이에 따라 평소 성경 사본을 옮겨 기록하는 것을 수도 생활의 큰 덕으로 여겼기에, 다른 수도사들에게도 그러한 훈련을 적극 권했던 제롬이었던지라, 주교의 제의에 선뜻 응하게 된다. 하지만 제롬의 로마 생활은 앞서 말한 그의 성격과 관련하여 이런 저런 말썽을 일으키게 되었고, 결국 다마수스와 협의 끝에 팔레스틴으로 돌아가 베들레헴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장기간에 걸쳐 성경 번역에 몰두하게 된다. ▣ 제롬의 가장 큰 업적은 단연 성경 번역이다. 평소에 원어 성경들

Page 269: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을 참조할 것을 강하게 역설하였던 그는 로마에서 시작한 라틴어 성경 개정 작업을 계속했다. 무려  22년 동안 필생의 연구로 진행된 이 작업의 결실이 바로 라틴어 공동역으로 잘 알려진  ‘벌게잇’(Vulgate,  405년)이었다. 본래 제롬은 구약 정경들의 범위를 외경들을 제외하고 히브리어로 기록된 책들로만 제한하려고 하였으나, 이러한 시도는 별로 호응을 얻지 못하다가, 종교개혁기의 개혁교회 시대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결실을 보게 된다. ▣ 제롬은 성경 번역 외에도 구약 선지서들에 대한 주석도 집필했다. 그가 남긴 성경 주석들에는 철학적, 지형학적 문제들에 대한 귀중한 논평들이 실려 있지만, 정작 중요한 신학적 통찰은 찾아보기 힘들다. 게다가 제롬은 당대의 신학 논쟁들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더욱이 그가 오리겐(Origen, 185‐254)을 비판한 것도 신학 연구의 결과라기 보다는 개인 상황에 따른 결과였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초창기에 제롬은 오리겐의 호방한 학문을 크게 존경했기 때문이다. 제롬은 과거에 오리겐(Orgen,  185‐254)의 책을 @몇 권 읽고서는  ‘사도 시대 이후로 가장 위대한 교회의 선생’이라고 칭송했는데,  393년경에 다시 달아오른 오리겐 논쟁에 휩쓸린 후, 이제는 반대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펠라기우스(Pelagius, 354‐420)를 비판한 것도 비슷하게 평가할 수 있다. ▣ 펠라기우스가 팔레스틴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제롬은,  곧  ‘펠라기우스주의자들에  대한  반론’(Dialogue 

Page 270: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Against  the Pelagians)을 집필하여 응수했다. 한때 어거스틴(Augustine,  354‐430)의 주석에 시비를 건 때가 있기도 했지만, 제롬은 전체적으로는 그의 입장을 옹호했기 때문에, 이 글을 통하여 펠라기우스의 자유의지론을 공격하고, 인간의 원죄를 강력하게 부각시켜 어거스틴의 입장을 지지했다. 하지만 그가 헬비니우스와의 논쟁을 통하여,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후로도 동정을 계속 지켰다고 주장함으로써, 로마 카톨릭 교회의 마리아 숭배사상의 진원지 역할을 한 것은 유감이다. 로마 카톨릭의 마리아 숭배 사상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74)에 이르러 마리아 승천설(Assumption; 이 용어는  ‘…으로 가다’의 의미를 가진 라틴어에서 유래되었는데, 어떤 사람의 육체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의미한다. 고대 히브리 족장 에녹은 엘리야와 모세처럼 승천했다고 전해진다. 성모 마리아의 승천설이 로마 카톨릭에 의하여 그들의 정식 교의로 선포되었다)로까지 이어졌다. 제롬은 후기에 들어 터툴리안(Tertullian,  ca.  155‐220)과 키프리안(Cyprian,  200‐258) 이후로 탄생한 암브로스(Ambrose,  339‐397), 어거스틴(Augustine,  354‐430), 그레고리 대제(Gregory  the Great,  590‐604 재위)와 더불어 네 명의 위대한 라틴 신학자로 평가된다.    

Page 271: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제피리누스(Zephyrinus, 198‐17 재위)  (4.17.46): 제피리누스는 로마 황제 셉티무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 193‐211 재위) 시대에, 빅토르(Victor, 189‐99 재위)를 계승하여,  15대 주교로서 직무를 수행했다. 제피리누스에 대해서 칼빈은 이렇게 언급한다.  “일년에 한 번 성찬에 참여하도록 하는 이 관습은 누가 처음으로 시작했든지를 떠나서 분명히 마귀가 만든 것이다. 제피리누스가 이렇게 했다고 하지만, 현재의 형태를 가진 교령이었다고는 믿을 수 없다. 당시의 정세로 보아서, 그의 명령은 교회를 위해서 그다지 불리한 조처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시대에는 신자들이 모일 때마다 성찬이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대부분이 성찬을 받았다는 것도 확실하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일시에 성찬을 받는 일은 거의 없었으며, 세속 우상숭배자들과 섞여 있는 사람들은 외형적인 표징으로 그 믿음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저 거룩한 분은 질서와 제도를 위해서 모든 신자가 성찬에 참가함으로써 신앙을 고백하는 날을 정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제피리누스의 성찬 규정을 후대인들이 악하게 왜곡해서는 일년에 한 번 성찬을 받으라는 법을 만들었다.”  #죠지(George,  303년 순교)  (3.20.27): 죠지는 갑바도기아의 성자로  303년에 순교

Page 272: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했다고 알려진다. 그를 영국에서 숭배하기 시작한 것은 사자 왕 리챠드가 십자군에(1189‐92) 참가한 이후였다.    #주피터(Jupiter)  (1.10.03) (2.02.17) (3.20.05): 로마 신화에서  ‘주피터’(제우스)는  ‘찬

란한 하늘’이라는 뜻을 가진 올림푸스  12신 중에 최고의 신으로서 천상을 지배하는 천공ㆍ뇌정의 신인 동시에 인간 사회의 정치, 법률, 도덕 등 모든 생활을 지배하였다. 모든 신과 인간의 아버지(지배자이자 수호자)이고 벼락이 그의 무기이며 아들 헤파이토스(대장장이 신)가 만들어준 아이기스라는 방패를 몸에 지니고 있다. 독수리를 성조로 총애하여 벼락을 독수리에게 맡겼다.    #줄리어스 시저(Julius Cæsar, B.C. 100‐44) (4.11.13): 제왕절개 수술로 태어났다고 

하는 카이사르는 어렸을 때는 몸이 약하였고, @그 후에는 간질병 증세도 나타났다고 한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이러한 약한 신체적 조건을 의지로 극복하였고, 청년기 이후로는 키가 크고 눈이 검고 매력적이면서 유머도 풍부하여, 로마의 많은 여성들의 흠모와 사랑을 받았다. 이탈리아 고등학교 교과서에서는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지성, 설득력, 인내력, 자제력, 불굴의 의지 등인데 카이사르만이 이 

Page 273: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모든 자질을 다 갖추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또 로마사의 거장 몸젠은 카이사르야말로 로마가 낳은 유일한 창조적인 천재라고 호평하고 있다. 나폴레옹은 카이사르가 쓴  ‘갈리아전기’를 전쟁 기술에 관한 최고의 교과서로 간주하였다고도 한다. 반면 로마 황제 율리아누스(Julianus,  361‐63 재위)는 제 일인자가 되려는 명예욕에 불타는 인물로 카이사르를 그리고 있다. 어찌하였건 카이사르에 대한 관심과 인기는 그에 대해 쓰여진 수많은 전기들이 이를 증명한다. ▣ 카이사르는 평민당의 거두였는데, 기사출신으로 평민당의 거두인 마리우스와 인척관계가 있었다. 카이사르의 고모 율리아가 마리우스의 아내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카이사르의 아내는 마리우스를 지지하는 권력자 킨나의 딸 코르넬리아였다. 당시 벌족파 집권자였던 술라는 이런 카이사르를 제거하고자 하였고, 그는 이를 피해 사비니 지방으로 은신하였다. 그곳에서 붙들렸으나 뇌물을 써서 풀려난 뒤, 다시 흑해의 비티니아 땅으로 건너갔다. @그 후 숱한 곡절 끝에 술라가 죽고@ 난 다음인 기원전  77년 로마로 돌아온다. 그는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고, 기원전  63년에는 대제관직을 받았는데, 그는 죽을 때까지 이 직분을 계속 유지하였다. 대제관직에 당선되자, 그 반대파들은 기전  63년 카틸리나의 반란사건 때 그를 제거해버리지 못한 것에 대해 키케로(Cicero,  B.C.  106‐43)를 비난하였다. 당시 카이사르는 카틸리나 도당들을 살려주자

Page 274: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고 원로원에서 주장을 하여 카틸리나와 한패라는 혐의를 받게되었다. 회의장에서 나올 때 키케로의 부하들이 칼을 들고 카이사르에게 달려갔으나, 키케로는 그를 살려주도록 눈짓을 했다고 전해진다. 카이사르는 민심을 얻기 위해 많은 돈을 뿌렸으며, 곧 이은  62년 집정관(콘술)직을 지내고 그@ 후 스페인 총독으로 부임하였다. 빚을 많이 졌던 그가 빚쟁이에 붙들려 로마로 떠나지 못하고 있을 때, 폼페이우스와 대적하던 로마 최대의 거부 크라수스가 갚아주었다. 스페인에서 그는 채무자들을 위한 정책을 폈을 뿐 아니라, 자신은 물론 부하들도 돈을 모으게 했으므로 ʹ대장군ʹ이란  명예로운  칭호를  얻었다.  기원전  60년  그는  스페인에서  돌아오면서 집정관에 당선되었다. 이때 카토(Cato,  B.C.  95‐46)가 이를 방해하려 했으나 카이사르는 사이가 나쁜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를 서로 화해시켜 일을 성사시켰다. 이 세 사람의 연합정권이 바로 제1차 삼두정치이다.  @그 해 카이사르는 식민지 개척과 토지분배안을 제안하였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딸을 폼페이우스와 결혼시켜 그를 끌어들이고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를 도와 이 법안을 통과시켰다. ▣ 그가 치른 원정 가운데 헬베티아족(라인강 주변 민족)과의 싸움, 갈리아 지방 게르만족과의 싸움, 브리타니아 원정 등이 있다. 기원전  54년 브리타니아 원정에서 갈리아로 돌아올 즈음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를 연결해주던 카이사르의 딸이며 폼페이우스

Page 275: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의 아내인 율리아가 산욕으로 죽게된다.  @그 후 두 사람의 갈등은 공동의 경쟁자인 크라수스가 파르티아 원정에서 죽음으로써 표면화되었다. 카토는 재빨리 폼페이우스와 결탁하고 그를 단독 집정관으로 당선시켰다. 당시 폼페이우스는 스페인과 전 아프리카의 총독을 겸하고 있었으나 부관으로 대신 통치하게 하고 자신은 휘하의 군대를 거느리고 로마에 머물러 있었는데, 원로원은 폼페이우스가 계속 두 지방의 총독으로 임하도록 결의하였다. 그러자 카이사르도 부하를 보내어 집정관직과 총독 임기의 연장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고, 오히려 군대를 놔두고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 ▣ 결국 기원전  49년 카이사르는 갈리아 땅에서,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라는 결의를 표하면서 루비콘 강을 건너 이탈리아로 진군하였다. 기원전  48년 그리스 에피루스로 건너간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보다 더 많은 군대를 소유했음에도 전술의 부족으로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대패하고 이집트로 도주하였다가 거기서 암살당하였다. 폼페이우스의 뒤를 쫓아 이집트로 건너간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 사랑에 빠져 둘 사이에 케사리온이라는 아들까지 두었는데, 후일 이 아들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암살된다.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가 로마로 개선할 때 함께, 혹은 얼마 후, 로마로 왔고, 카이사르가 암살되자 다시 이집트로 되돌아간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파당들이 여러 곳에서 일으킨 반란을 진압한 

Page 276: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뒤 정권을 전단하였으며, 안토니우스는 그에게 왕관을 쓰도록 제안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의 일인 독재 정치는 마침내 원로원의 반발을 사게되어  44년  3월  15일 브루투스를 비롯한 원로원 의원들의 칼에 맞아 원로원 안에서 최후를 마치게 된다. 특히 이 음모에 가담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가 아들과도 같이 사랑하던 청년 중의 한 사람이었다는 점에서  “너도냐!”라는 카이사르의 외침과 더불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단테는 그의  ‘신곡’에서 예수를 배반한 유다와 함께 브루투스를 가장 무서운 지옥에 있는 것으로 묘사했다. 반면, 세익스피어는 그를 감동적으로 표현하였다. @그 후 카이사르의 유언에 의해 그의 양아들로 지명된 옥타비아누스와 카이사르의 부장 안토니우스는 브루투스 일당을 제거하고 레피두스 등과 제2회 삼두정치를 수립하게 되며 이는 마침내 옥타비아누스의 원수정 수립으로 이어진다. ▣ 후일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신으로 승격한 카이사르는 로마 화폐에 그 얼굴이 나타난 최초의 정치가가 되@었으며, 그가 쓴 전쟁기록  ‘갈리아 전기’는 그 문장이 간결하면서도 힘이 있고 아름다워, 당시 최대의 문장가 키케로에 의해서도 격찬되었다.  (그는 연애 편지를 비롯한 다른 많은 저술도 남겼다고 전해진다. 당시 카이사르와 카토의 누이이자 브루투스의 어머니인 세르빌리아와의 사랑 @이야기는 유명한데, 카이사르는 브루투스가 자신의 아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

Page 277: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은 신이 된 사람의 품위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옥타비아누스의 명에 의해, 그의 작품들 중의 상당 부분이 사라지게 되었다.    #쯔빙글리파(Zuinglians)  (3.11.10):  ▣  스위스  종교개혁자인  율리허  쯔빙글리

(Ulich  Zwingli,  1484‐1531)의 사상을 따르는 자들을 가리킨다. 쯔빙글리는 불링거, 부처, 칼빈의 신학에 앞서  10여 @년 남짓 기간 동안 분명하고도 원기 왕성하며 목표가 뚜렷한 신학을 이론과 실제에 적용함으로써 개혁교회의 창시자가 되었다. 빌트하우스에서 태어난 쯔빙글리는 석사 학위를 받은 후(1506년), 글라루스(Glarus)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1516년). 그는 특히 에라스무스를 배우려는 열정과 비텐바하에게서 배운 것으로 추정되는 은혜 교리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활동을 시작했다.  1519년 이래로 혼자서 어거스틴(Augustine,  354‐430)의 신학과 바울 신학을 연구하면서  1523년에 파브리에 대한 논박을 근거로 시의회에 종교개혁을 관철시켰다. 그는  67개 논제로 루터의 견해와 가까운 이론들을 밝혔지만, 본래 처음부터 취리히 시에서 그리스도교적 사회를 지향하는 프로그램을 제시했다. 그는 초창기에 강한 영향력을 떨쳤는데  1530년까지 베른, 바젤, 보덴제의 도시들과 스트라스부르크 지방에 이르기까지 쯔빙글리주의가 전파되었다.  1531년에 발발한 카펠 전쟁은 

Page 278: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결국 카톨릭 계열의 지역들을 무기력화시켰다. 쯔빙글리는 이 전쟁에 군목으로 참전했다가, 아들과 함께  1531년  10월  11일에 전사했다. ▣ 쯔빙글리의 신학은 취리히에서 발생한 세례파 운동과 관련하여 전개되었다. 이 운동은  ‘인간이 하나님의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 이르게 된다’는 쯔빙글리의 고유한 명제를 변화시켜, 교회 조직에 반대했고,  ‘그러한 것을 피조물에게 부가시키는 자는 우상숭배자라고 주장했다. 그 이후로 쯔빙글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선택된 자들과 언약을 체결하셨다는 ‘언약 신학’의 근거에서  ‘유아 세례’를 정당화시켰다. 그는  ‘보이지 않는 교회’와  ‘보이는 교회’,  ‘설교직과 성례전을 행하는 교회’는  ‘서로 분리될 수 없다고 했으며, 성경에 따라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진 제도에 복종한다고 해도 성령이 어떠한 기구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피해를 주지 않는다고 했다. 쯔빙글리의 예정설은 하나님의 전능 사상에서, 그리고 하나님을 통한 신앙의 능력에 대한 확증과 그의 선견에서 나온 것이다. 성찬을 제사로 보는 로마 교회의 견해를 배척한 점에서는 루터와 일치했지만, 성찬에 그리스도의 몸이 임재@하신다는 이유로 성찬의 상징과 상징이 되는 대상을 동일시할 필요를 인정하지 않은 점에서는 그와 달랐는데 그리스도의 몸이 지금 하나님의 우편에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는 신앙으로만 그리스도의 임재를 깨달으며 그로 인한 유익을 받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Page 279: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성찬에 대해서 초기에는 느슨한 기념론을 주장했지만, 성찬에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신다는 것과 성찬이 눈으로 볼 수 있는 말씀이라는 것, 그리고 성찬이 신앙을 굳건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면서 그의 주장에는 살이 붙었다. ▣ 쯔빙글리는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했지만, 스위스에서 종교개혁을 출범시켰고, 그것이 독특한 특색을 갖도록 이바지했다.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는 루터의 관심사들을 많이 공유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자국어 성경 번역, 교회 부패 근절, 성경 교육과 성경의 수위성 확립에 힘썼다. 성경의 표준을 철저히 적용한 점에서는 루터보다 한 발 앞서 나갔다. 비교적 전제적이지 않았던 사회에서, 시의회들을 교회 평신도들의 대표들로 간주하여 그 집단들에게 보다 큰 발언권을 부여했고, 전례를 보다 단순하게 개정했다. 신학대학을 세우고 목회자들이 성경을 원어로 공부할 수 있게 함으로써 교육 사업을 효과적으로 펴나갔다. 멀리 떨어져 있던 콘스탄스 주교로부터 주교권을 인수함으로써 장로교 제도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미사 제도를 확실하게 폐지하고 교황제와 성직자 위계 제도를 배척하고, 수도원들을 폐쇄하고, 성경과 전례를 번역하고, 관습과 의식들을 성경에 따라 폐지하고, 신학 훈련을  개선하고,  교회회의  사역을  확립하고,  평신도의  지위를  향상하고,  철저한 권징 제도를 도입했다. 권징의 측면에서는 평신도 대표들이 포함된 특별한 기구를 

Page 280: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설치함으로써 권징을 철저히 시행했다. ▣ 신학적인 면에서도 쯔빙글리는 스위스 교회들을 개혁주의 교회들과 구분될 만한 노선으로 이끌어 갔다. 예를 들어 신앙과 행위의 준칙인 성경의 수위성을 각별하게 강조했다. 베른 논제들(1528년)은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태어남으로 오직 그 터에서만 다스릴 수 있다는 그의 신앙을 잘 표현한다. 루터와 동일하게 말씀의 유효성을 확고하게 믿은 그는, 비록 말씀이 내적으로 명료할지라도, 성령께서 조명해 주셔야만 두텁게 형성된 그릇된 해석을 뚫고서 본연의 구원의 진리를 깨닫고 받아들일 수 있다고 했다. 기도도 해석의 선결 요건이라고 보았다. 세례에 관해서는 구약의 언약 신학으로 돌아갔고, 그것이 그의 강력한 선택관에 힘을 실어주었으며, 그의 교회와 사회관을 주관했다.      #카밀루스(Marcus Furius Camillus, B.C. ?‐365) (2.03.04) (3.24.10) (4.02.03): B.C. 4세

기  @초 푸리우스 집안의 후손으로 로마의 유명한 장군이었는데,  ‘조국의 아버지’, ‘제2의 건국자’라고 불렸다.  6차례에 걸쳐 최고관직에 올랐고,  5차례 독재관에 임명되었으며,  4차례 개선식을 거행하였다고 전해진다.  10년이나 대항하고 있던  ‘베이이’를 항복시키고, 갈리아의 침입으로 위기에 처한 로마를 구해했다. 로마를 휩쓸었던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다.  카밀루스의  명성에  대한  기록은  ‘플루타크  영웅

Page 281: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전’(The Parallel Lives)에 잘 나타나 있다.  #카시오도루스(Cassiodus)  (4.12.20): 소크라테스 전기  9권에 나오는 인물로 금식

과 관계하여 등장한다. 남이탈리아의 명문 출신으로, 라벤나가 수도였던 동고트의 왕 테오도리쿠스를 섬겨, 514년에 집정관, 533년에는 친위대 장관이 되었으며, 550년 이후 수도원을 세우고 저술에 전념하였다. 수도승들에게도 그리스 고전의 필사와 라틴어역을 공부시켜 중세 수도원의 연구생활의 기틀을 이루었다. 주요 저서로는 ‘연대기’,  ‘잡록’,  ‘고트사’ 기타 일종의  ‘백과사전’과 같은 것 등이 있다. 소크라테스와 소조멘과 테오도레투스(Theodoret)의 저서들을 간추려  ‘삼인의 역사’를 기록한 또 다른 카시오도루스(562년 사망)와 구별된다.  #카에킬리아누스(Cecilianus, 311‐2 재위)  (4.07.10): 칼타고의 주교인데, 당시 도나

투스(Donatus)로부터 고발되었을 때, 변호 한번 해볼 기회도 없이 정죄 받았다. 교회에 극심한 박해가 찾아올 때마다 많은 변절자들이 생겼다. 변절자들은 비단 신자들뿐만 아니라 주교들 중에도 있었다. 그 중에 펠릭스(Felix)라는 북아프리카 주교가 있었는데 그는 박해 때 성경을 버리고 성물들을 부숴버린 노골적인 변절자로 

Page 282: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알려졌다.  당시  박해가  끝났을  때  중요한  자리인  칼타고  주교였던  멘수리우스(Mensurius)가 죽자(311년), 그의 후임으로 카에킬리아누스가 선정되었다. 그런데 카에킬리아누스를 주교로 안수한 안수 위원들 중에 하나가 바로 이 변절자로 소문난 펠릭스였다. 이 사실에 불만을 품은 엄격파들은 카에킬리아누스의 임직이 무효라고 선언하고 마조리누스(Majorinus)를 따로 선출하게 된다. 그런데 마조리누스가 선출된 후, 곧 사망하게 되자 그의 후임으로 선출된 사람이 도나티스이다. 이렇게 되어 칼타고 교회에는 카에킬리아누스와 도나티스라는 두 주교가 존재하게 되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다른 교회들은 누구를 주교로 인정해야 하느냐 하는 어려움에 부딪혔다. 이때 로마 교회의 주교 멜키아데스(Melchiades)는 카에킬리아누스를 지지하였고, 여기에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  288‐337) 황제까지도 합세하였다. 제국의 통일을 위해 교회의 통일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황제는 다수 주교들의 의견을 따라 카에킬리아누스 주교에게 특혜(면세 조치)를 허락했다. 그러자 도나투스측은 “황제가 교회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하면서 반항하게 되었다. 저들은 주류측을 향하여  “세상의 군주와 간음을 범한 교회” 또는  “황제의 조직망 확대에 가련하게 고용된 고위 성직자들”이라고 비난하면서 자기네 교회의 독립을 선언하였고,  330년경에는  270명의 주교들이 따로 모임을 갖는 등 계속 세력이 확장되었다. 이렇게 

Page 283: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되자 콘스탄티누스 황제로서도 무력으로 진압하기 어렵게 되었다.    #카타리파(the  Cathari)  (4.1.13): 자신들을  ‘순결한 사람’(Cathari)이라고 부른 데

서 연유된 이름이다. 이들은 세상은 선과 악이라는 두 가지 영원한 힘과 원리에 따라 움직인다고 하는 주장으로 인기를 끌면서, 11세기 초부터 이탈리아 북부와 프랑스 남부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였다. 카타리파는  9세기경 불가리아가 속한 발칸 반도와 그 주변 섬에서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2세기 경에는 상인과 십자군에 참가한 카타리파 사람들에 의해 서유럽에 들어가게 되어 독일,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등으로 신속하게 퍼져 나갔다. ▣ 카타리 사람들이 주장하는 교리는 일종의 마니교식 이원론의 그리스도교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창조신을 둘로 보았다. 즉, 선의 신과 악의 신이 있는데, 인간이 사는 세상은 악의 신이 지배하는 곳이어서, 인간의 순수한 영혼은 악의 창조신에 의해 지배되는 육체와 결합되어 죄를 범하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선의 창조신인 하나님께서 그의 천사 중 하나인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파견하여 가르치셨는데 천국에 가기 위해서 나쁜 물질과의 접촉을 금해야 한다. 따라서 결혼, 성교, 육식, 물질, 재산의 소유 등도 물질적인 것이므로 배척해야 한다. 그리하여 물질적인 것을 사용하는 카톨릭의 미사나 성사

Page 284: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를 거부하였으며,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자기네 식의  ‘통과 의례’를 거쳐야 하며, 이 의례를 행한 자는  ‘완전한 자’ 혹은  ‘순결한 자’(Cathari)가 된다는 것이다. 이들은 당시 성직자들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비난하였고, 상대적인 금욕주의적 생활을 통하여 대중의 존경을 받기도 했으며, 탁발 수도회의 발전에 큰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카타리파의 주장은 당시 청빈하고 복음적 생활을 꿈꾸고 있던 급진적 성향의 개혁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많은 추종자들이 생기게 되었다. ▣ 이들은 별도로 교계 조직을 만들고 자기네만이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면서 카톨릭 교회를 사탄의 회당으로, 사제를 위선적 죄인으로, 성사를 마귀의 산물로, 황제를 사탄의 대리자로, 제후를 사탄의 조수로 규정하고 비판했다. 카타리파의 일부 세력은 불란서 남쪽 툴르즈(Toulouse) 지방의 알비(Albi) 지역에서 일명 알비파를 형성했다. 즉 카타리 추종자들은 무역로를 따라 발칸 반도, 북부 이탈리아와 남부 프랑스에서 세력을 떨치고  1145년‐1155년 사이에는 툴르즈 지방의 알비에 전파되어 세상에 크게 알려졌던 것이다. 알비파의 지나친 엄격주의는 당시 신경이 곤두 서 있던 교황청에 의하여 즉시 이단으로 판명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교회는  종교재판소를  만들었다.  로마  교회의  170대  교황  알렉산더  3세(Alexander  III, 1159‐81 재위)는 카파리파의 움직임을 경고하던 중, 제3차 라테란 공

Page 285: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의회(1179)를 열어 알비파를 단죄하면서 때마침 일어났던 또 다른 단체인 왈도파를 이단으로 정죄했다. 당시 왈도파는 이미 성경을 번역하여 읽으면서 성경의 가르침에 눈을 떴는데, 따라서 로마 교회의 부패한 성직 제도를 거부했고, 성인 숭배를 거부하는가 하면, 말씀의 권위를 교황이나 교권보다 더 앞세웠다. 이는 교황청의 입장에서 볼 때 여간 성가시고 도전적인 것이 아니었다. 마침내  171대 교황 루치오  3세(Lucius  III, 1181‐85 재위)는  1184년에 왈도파를 색출하기 위하여  ‘종교재판법’(Inquisition)을 제정하여  ‘마녀사냥’(Witchcraft)을 시작했다.  176대 교황 이노센트  3세(Innocenius  III, 1198‐1216 재위)는 제4차 라테란 공의회를 소집하여  3차례 회의(1215. 11. 11  ‐ 11. 30) 끝에 이단들을 진멸하도록 결정함으로써,  ‘종교재판’이 다시금 부활했다. 이에 따라 수도사들까지도 주교의 법정에서 심문을 받아야 했고, 교황은 십자군까지 일으켜 팔레스틴이 아닌 이교도들을 향하여 진군하였으니, 조금이라도 새로운 신앙의 모습이 드러나기만 하면 여지 없이 처형하였다. 교인이 되려면, 무조건 교회의 권력에 복종해야 하며, 교회의 철저한 통제를 받아들이고, 교회의 어떠한 권세에도 도전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이노센트  3세는 특히 카타리파를 처형하는 데 광적일 정도로 집착했다.  

Page 286: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카토(Cato)  (3.10.4): 두 사람의 카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 번째 사람 마르쿠스 카토(Marcus Cato,  B.C  234‐149)의 본래 이름은 프리스쿠스였지만, 그의 뛰어난 지혜 때문에  ‘현명하다’는 뜻을 가진 카투스(catus)에서 나온 말인  ‘카토’라는 성을 얻게 되었다. 카토는 어려서부터 검소한 생활을 했으며, 스스로 생각하기를 이름도 없이 편하게만 살다가 끝내게 될 그런 인생이 아나라면 반드시 웅변술을 익혀야 한다고 생각하고, 끊임없이 훈련하였다. 카토는 농장 가까이에 있는 마니우스 쿠리우스가 살던 초라한 집을 찾아가 그의 인격을 배웠다. 마니우스 쿠리우스는, 기원전  290년에 집정관이 되어 삼니움의 반란을 진압하여  2번씩이나 개선식을 올렸고, 275년에는 피로스를 궤멸시켜 다시 한번 개선식을 했다. 하지만 이후 모든 부귀영화를 내려놓고 초라한 농장으로 물러나 스스로 땅을 갈며 살았다. 하루는 삼니움인들이 보낸 사절이 아궁이 앞에서 무우를 삶고 있는 마니우스를 찾아와 많은 황금을 주었지만, 그는 정중히 사절하면서 말하기를,  “이런 음식을 고마운 마음으로 먹고 있는 사람에게 황금 같은 건 필요 없소. 나는 황금을 갖기보다는 그것을 가진 사람을 정복하는 것이 더 명예로운 일이라고 생각하오”라고 했다. 그런 마니우스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카토는 자신의 큰 집과 넓은 땅과 많은 하인들을 돌아보고는 자신의 생활을 뉘우치고 쓸데없는 지출을 줄이고 절약하는 생활을 하기로 결

Page 287: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심했고, 이후의 삶 속에서 이 원리를 절대적인 생활 철학으로 펼쳐나갔다. 정치인으로서 카토는  “칼타고를 쳐부수어야 한다”라고 끊임없이 경고한 끝에, 마침내 죽기 직전인 B.C.  149년에 칼타고와의 마지막 싸움인 제3차 포에니 전쟁을 일으켰다. 역사가들은 그를 통상  ‘대 카토’(Cato  the Elder)라고 부른다. 그는 당시 대(大) 스키피오에 의해 정복당한 칼타고가 서서히 힘을 축적(蓄積)하고 있는 것을 감지하였고, 따라서 칼타고를 직접 방문하여 살펴본 후 자신의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된다. 따라서 카토는 칼타고 징벌론에 대한 자신의 주장으로 원로원을 설득하기 위하여, 말끝마다  “또한 칼타고는 멸망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는 말을 덧붙이곤 하였다. 반면 나시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던 푸블리우스 스키피오는 그의 의견에 반대하였으므로,  “칼타고를 그대로 두는 것이 로마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끝마다 덧붙였다. 여하튼 카토는 죽기 직전 칼타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 사람을 내다보면서 호메로스(Homer,  B.C  9‐8세기)의 시를 인용해서 말하기를,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지혜로운 것은 그 사람뿐, 다른 사람들은 모두 흔들리는 그림자에 불과하다”라고 했다. 이렇게 예언된 사람이 바로 소(小) 스키피오였는데, 그는 곧 행동으로 카토의 예언을 증명하였다. 카토가 남긴 본처의 자손으로는 자기보다 먼저 죽은 장남의 아들, 즉 손자뿐이었다. 카토는 후처를 통하여는 카토 살로니우

Page 288: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스를 낳았는데, 그는 법무관의 자리에까지 올랐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 마르쿠스는 나중에 집정관의 자리에까지 올랐는데, 이 마르쿠스는 덕행과 역량으로 당대의  명사로  존경받던  철학자  소  카토의  할아버지였다.  ▣  두  번째로,  ‘소  카토’(Cato  the Younger, B.C. 95‐46)는 일찍 부모를 잃고 외삼촌인 리비우스 드루수스 밑에서 자라, 마침내 로마의 위대한 군인과 정치가와 철학자로 성공했다.  (방금 앞에서 말했듯이) 소 카토의 증조부는 마르쿠스 카토(대 카토)이다. 소 카토는 준엄한 성격과 검소한 생활 태도가 몸에 익었으며, 사람들을 설득하는 웅변술이 뛰어났다. 로마를 위기에 빠트린 카이사르와 평생 동안 싸웠는데, 당시 카토의 강력한 권력을 맞서기 위해서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와 율리우스는 이른바 제1차 삼두정치 체제로 연합했다. 이후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사이에 내전이 발생하자, 카토는 과거 자신이 반대했던 폼페이우스를 지지하는 것이 공화정을 보존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판단하고 그를 돕지만, 결국 패배의 막다른 골목에서 스스로 생명을 끊었다. 당시 카토의 누이는 브루투스의 아내가 되었는데, 남편과 함께 카이사르의 암살 음모에 @깊숙이 간여하였다. ▣ 칼빈은  1563년  6월  31일에 당시  10살이던 헨리 왕자에게 헌정한 오경 주석에서, 왕자에게 세속에 물들지 말로 덕을 함양하라고 충고하던 중에 카토의 말을 언급하기도 했다.  “… 그러나 현명하신 왕자님, 당

Page 289: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신은 이 모든 것이 쾌락을 즐기는 사람을 산출하는 독소라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그렇게 모든 것을 간주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만약 금욕과 절제를 하지 못하게 하는 독소가 이미 당신에게 밀려와 당신을 유혹하고 있다면 장차 성인이 되어서는 어떻게 그것을 물리치고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이들에 대한 지대한 염려는, 그들이 미덕에 대하여 너무나도 무관심하다고 하는 것이 너무 가혹한 표현일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카토(Coto)의 말대로 가장 사실적인 표현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이하에 언급되고 있는 역설도 일반 생활에서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육체의 노예가 되는 것보다 더 위대한 존재로 또 그보다 더 위대한 일을 하려고 태어났다. 육체의 노예로 전락되는 것을 경멸하는 것은 나의 진정한 자유이다.’ … 당신은 사치스러운 생활로 만족하지 말고 또한 기타 다른 악한 것으로도 만족을 채우려고 추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당신의 공손함과 온순함보다 더 매력적인 것은 절대로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카티린(Catiline, B.C. 108‐62)  (2.3.4): 카티린은 기원전  1세기 로마의 정치가로서 로

마 공화국 특히 귀족 원로회의 권력을 전복시키려고 했던  ‘카티린의 몇 차례의 음

Page 290: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모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귀족이었으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폼페이우스 스트라보 치하에서 폼페이와 키케로와의 동맹전쟁(the  Social War)에 복무했다. 그는 또한  B.C.  84‐81년에 일어난 내전에서 술라(Sulla)를 지지했다. 카티린은 68년에 집정관이 되어  @그 후  2년간 아프리카를 통치했다. 돌아와서는 권력 남용으로 기소되었으나 풀려났고,  66년에 다시 죄목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아우트로니우스(Autronius)와 술라와 함께 고발되었다. ▣  63년 집정관 선거에서 키케로에게 패배한 후 귀족정치가들과 운이 나빠진 술라의 고참군인들의 이익을 옹호했다. 그는 새로운 더 큰 음모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카티린은 가울(Gaul)에 있는 여러 부족들에게 동맹을 맺자고 제의했다. 알로브로게족은 그의 제안을 거절하고 그 음모를 공개했다. 따라서 B.C.  63년 당시 집정관이던 키케로는 카티린의 음모를 적발하여 원로회에 고발했고 카티린은 로마에서 피신해야 했다. ▣ B.C.  62년  1월 카티린과 그의 동료들은 피스토리아(Pistoria) 근처에서 로마 군대에 의해 저지 당하고 그는 후속 전투에서 사망했다. 그의 음모는 몇몇 문학작품에 영감을 주었다. 키케로는 원로회에 보내는 연설문을 작성했고 이것은 널리 연구되는 웅변과 수사의 모범이 되었다. 또한 살루스트(Sallust)는 이 사건의 역사 보고서를 썼다.      

Page 291: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칼릭스투스(Calixtus,  217‐22 재위)  (4.17.44): 로마 교회의  16대 주교로,  15대 주교 제피리누스(Zephyrinus, 198‐217 재위)를 계승했다.    #캐서린(Catherine)  (3.20.22):  2명의 캐서린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칼빈의 정확

하게 누구를 염두에 두었는지 모르겠으나, 둘 다 공통점이 있다. 첫째,  4세기초 이집트의 막시미누스 황제 당시의 캐서린은 예수님을 영접하면서 세례를 받은 후, 황제의 우상숭배를 비난하였다. 결국 캐서린은 고문을 받고 알렉산드리아에서 순교하게 된다. 그녀의 시신은, 수도원의 한 수사가 꿈속에서 천사의 인도를 받은대로 시나이 반도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이 사건 이후 시나이 산 수도원은 캐서린 수도원으로 이름이 붙게 되었다. 이곳은 기원 후  2세기경 로마의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가해지자 이집트의 그리스도인들이 이곳으로 피신하여 은둔생활을  하며  신앙을  지키는  장소가  되었다.  이들이  313년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  288‐337) 대제의 모후인 헬레나 왕후에게 배드윈 족의 위협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줄 것을 청원하자, 왕후는  330년에 불붙는 떨기나무가 있었던 자리라고 알려진 곳에 성모 마리아에게 헌납하는 성당을 지어주었다. 둘째, 시에나의 캐서린(Catherine  of  Siena,  1347‐1380)은 @어린 시절에 도미니크 고행 수녀회(혹은 

Page 292: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프란치스코 제3 수도회)에 가입하여, 수도에 힘쓰던 중,  2년 후에 자신이 그리스도와 영적 혼인을 하고 결합하는 환상을 보았다고 한다. 이때 이웃을 섬기라고 한 명령을 받은대로, 가난한 자들과 병자들을 돌보는데 이후의 삶을 바쳤다.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황청은  194대 교황 클레맨트  5세(Clement Ⅴ,  1305‐14 재위) 때부터 약  70년간(1309‐1377)을 로마가 아닌 프랑스 영토 아비뇽에 있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교황청의 로마 복귀 주장은 끊임없이 이어졌는데, 직접 이곳 저곳으로 순례하면서 교황의 로마 귀한 운동을 펼친 끝에, 마침내  201대 교황 그레고리  11세(Gregory ⅩI, 1370-78, 재위) 재위 때인  1377년  1월  17일 로마로 귀환하게 만든 것은, 캐서린의 뛰어난 업적으로 꼽힌다. 교황청이 귀환한 후 캐서린은  3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고, 교회로부터  ‘교회의 박사’라는 칭호가 베풀어졌다.    #케레스(Ceres)  (4.5.5): 로마 종교에서 식용 식물의 성장을 관장하는 농업 여신

이다. 로마인들은 이 여신만을 따로 숭배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대지의 여신인 텔루스와 함께 숭배하였다. 초기에 케레스 숭배는 시칠리아 섬과 마그나그라이키아에 널리 퍼져 있던 데메테르 여신 숭배에 압도당했다. 그러나 시빌의 책이라는 예언집의 충고에 따라, 로마는 기근을 막기 위해 케레스와 리베르 및 리베라 

Page 293: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숭배를 도입했다. B.C. 493년에 아벤티누스 언덕 위에 세워진 케레스의 신전은 평민의 종교 활동 및 정치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그 예술성으로 인해 유명해졌다. 이 신전은 B.C.  31년에 화재로 파괴되었지만, 아우구스투스(Augustus, B.C. 27‐A.D. 14)가 복원했다.  1년에  3차례 열리는 케레스 숭배의 주요축제는 모두 그리스 방식을 따랐다.  #코넬리우스(Cornelius,  251‐53 재위)  (4.7.3):  21대 로마 교회 주교인데, 키프리안

은 자주 코넬리우스를 동료요 형제 주교라고 불렀다. 지금 칼빈은 이 사실을 주목하고 있다. 당시 로마 교회는 황제 데시우스(Decius,  249‐51 재위)에 의해 제기된 박해로 인하여 주교 파비아누스(Fabianus,  235‐250)가 순교했지만, 치열한 박해에 직면한 상황 하에서 후임자를 선출할 여유가 없었다. 로마 주교의 부재 중 교회는 장로 노바티아누스(Novatian)를 포함한 사제단에 의해서 다스려지다가, 코넬리우스가 주교로 선출되게 된다. 그러나 이때 노바티아누스와 그의 추종 세력에 의해서 반란이 일어나니, 그는 이탈리아 남부 지방의 세 주교에 의하여 주교로 서품되었다. 이들은 도덕적 근엄성에 힘입어  6세기에 이르기까지 서방과 동방의 여러 속주들에게서 지지를 이끌어냈으며, 훗날 몬타누스파(Montanism)의 잔존 세력과 규

Page 294: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합하게 되었다. ▣ 한때 키프리안의 경쟁자인 포투나투스(Fortunatus)가 코넬리우스에게 키프리안을 모함하여 두 사람 사이에 금이 갔으나 곧 화해하였다. 당시 코넬리우스가 안디옥의 주교 파비안(Fabian)에게 보낸 편지는 역사적으로 로마 교회의 조직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가 된다.  3세기 중엽의 로마 교회는 약  5만 명의 신자로 구성된 공동체였는데,  46명의 신부와 부제  7명, 차부제  7명, 시종  42명, 구마자  52명, 일부 독경사들과 수문장들,  1,500명 이상의 과부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키프리안의 기록에 의하면 코넬리우스는 데시우스(Decius,  249‐51 재위)의 후임 황제인 갈루스(Gallus,  251‐53 재위)가 재게한 박해로 인하여 유베지에서 순교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로마의 순교록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 288‐337) (1.11.14; 4.7.10; 4.11.12, 15): ▣ 디오클레티아

누스(Diocletianus,  284‐305 재위) 황제의 궁정에서 정치적인 인질이 되어 어린시절을 보낸 콘스탄티누스는 일련의 복잡한 내전을 거치면서 리키니우스(Licinius,  308‐24)와 함께 부제가 된 뒤(308년), 동로마 황제인 그와 더불어 서로마 황제가 되었으며(312‐24년), 이어서 그를 무찌르고 로마 제국 전체를 단독으로 다스리는 황제가 되었다(324‐37년). 콘스탄티누스는 이러한 자신의 성공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Page 295: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덕분이라고 평생 동안 믿었다. 그래서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막센티우스(Maxentius, 306‐12)를 무찌른 뒤에 로마에 세운 개선문에 이 승리를 그 자신의 재능만이 아니라  ‘신이 준 영감’ 덕분으로도 돌리는 글을 새기게 했다. 또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십자가를 높이 쳐들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동상에는  “이 구원의 상징 덕분에 저는 당신의 도시를 폭군에게서 구했고, 원로원과 로마 국민에게 자유를 되돌려 주었습니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324년 리키니우스에게 승리를 거둔 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자신이 신앙심이 없는 자들을 진압하기 위해 신이 선택한 도구로서 브리튼 섬 북쪽 끝에 있는 해안에서부터 왔다고 말했으며, 페르시아 왕 샤푸르  2세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자신은 신의 신성한 힘의 도움을 얻어 이 지상에 평화와 번영을 가져오기 위해 왔다고 선언했다. ▣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의 성격이 무엇이었고, 그 진정성이 어찌되었든지간에, 그의 변화는 그후 수세기 동안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특별한 일꾼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자신의 세계에 있는 교회를 잘 다스리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책무라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소수 종파로 취급받았던 그리스도교는 일약 로마의 국교가 되었고, 콘스탄티누스와 후계자들의 후원으로 큰 발전을 이룩했다. 교회는 재산을 늘렸고 교회의 수도 늘어났다. 덕분에 교회는 배교자인 율리아누스

Page 296: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Juliaus,  361‐63 재위) 황제 시대에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확고한 지위를 굳힐 수 있었다.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콘스탄티누스를 성인으로 추앙하고 있다. 로마 황제인 그의 개종에 힘입어 로마 제국은 급속히 그리스도교 국가로 변모하기 시작했으며, 그의 추진력 덕분에 형성된 그리스도교 문화는 비잔틴 제국과 서유럽의 중세 문화가 발전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 그런데 콘스탄티누스의 이와 같은 변화는 밀라노 칙령을 발표해 그리스도교도에 대한 관용을 선포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나,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나, 리키니우스 황제는 신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기 위한 합의를 보았도다. 이제 그리스도교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원하는 대로 믿음을 가질 권리를 부여하노라. 하늘에 어떠한 신이 계시든, 그분께서는 우리를 비롯하여 우리의 지배하에 있는 모든 생명들에게 호의를 품고 계시리라는 것을 믿고 있음이로다.” 오늘날 남아 있는 이 칙령의 사본은 사실상 리키니우스가 동로마 지역에 공포한 것들이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는 메디올라눔에서 리키니우스와 합의한 공동 정책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정책을 채택했다.  313년 그는 당시 로마 교회의  32대 주교였던 멜키아데스(Melchiades, 311‐14 재위)에게 황실 재산인 라테란 궁전을 하사했고, 그 옆에 오늘날의 로마 대성당을 지어주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교회와 성직자의 재정적, 법률적 특권, 로마 시민이 마땅히 

Page 297: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져야 하는 담세 및 부역의 면제 등에 관한 법률을 공포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였다. 그는 또한 같은 시기에 아프리카 속주 총독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리스도교 성직자가  ‘신에게 최고의 봉사를 자유롭게 바칠 수 있을 때 국가에 큰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들이 종교적 의무에 전념하는 것을 세속 관리들이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와 더불어 노예 살해 금지법(319년), 일요일의 휴일 선포(321년) 등이 뒤따랐다. ▣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개인적으로 어떤  ‘신학’을 가졌는가는  313년부터  320년대 초까지 북아프리카의 도나티스파(the Donatists)에 관해 쓴 일련의 편지에 특히 뚜렷이 드러나 있다. 도나티스파는 일단 그리스도교에서 일탈했던 신부와 주교를 다시 교회에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가장 걱정한 점은, 만일 교회가 분열(Schism; 교회의 일치를 분리하려는 고의적인 행위를 의미하는 전문용어인데, 거짓 교리를 주장하는 이단과는 엄격히 구별된다. 하지만 현대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의 분열은 믿음과는 상관없으니, 단지 사랑을 거역하는 죄일 뿐이다. 따라서 분열을 조장하는 주교라도 계속 사제권을 유지하고, 미사를 집전할 수 있다)하면 그리스도교 신이 화를 낼 것이고, 따라서 로마 제국과 콘스탄티누스 대제 자신에게 신의 보복이 내릴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는 교회의 분열을 초래하는 것은 바로 악마라고 생각했다. 평생 

Page 298: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동안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기독교에서 잘못을 제거하고 진정한 종교를 전파하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이며 대제의 지위를 바람직하게 이용하는 길이라고 확신했다. 그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의 주교’임을 자처한 것도 이런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밖에 제국 관리들과 그리스도교 성직자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가 밝힌 견해들을 보면, 그리스도교에 대한 그의 헌신이 일부 사람들이 언급한 것보다 훨씬 확고하고 분명했음을 알 수 있다. ▣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때마침 일어났던 아리우스파 논쟁의 해결책을 마련하기 위하여 황제의 궁전이 있는 곳으로 유명했던 니케아에서 공의회를 열었다.  325년  5월  20일부터  6월  19일까지 열린 니케아 공의회는 콘스탄티누스 대제 즉위  20주년 기념 행사와 거의 같은 시기에 열렸다. 논쟁에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서방에서는 거의 참석하지 않았지만, 동방의 주교들은  220명이 이상이나 참석하였다. 주교들은 황제가 공의회에 참석해 경의를 표시한 보답으로, 콘스탄티누스 대제 즉위  20주년 기념 행사에도 참석하여 그를 빛내주었다. 그런데 사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니케아 공의회를 열기 직전에, 먼저 알렉산드리아의 아리우스(Arius,  250‐337)에게 편지를 보내, 분쟁을 조장하는 것은 한가한 사람들이나 하는 학문적 논쟁일 뿐이며 쟁점은 지극히 사소하기 때문에 쉽게 해결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전했다. 그러나 정작 회의가 개회되

Page 299: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자, 아리우스의 완고한 태도로 인하여 그의 낙관은 빗나갔다. 따라서 아리우스의 학설이 더 이상 퍼져나가지 못하게 하려고, 중요한 핵심어를 채택한 성명이 발표되었는데, 그것은  ‘호모우시오스’(homoousios)였다. 이는  ‘동질적인’, 즉  ‘하나의 실체로 된’이라는 뜻으로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를 확정하는 개념이었다. 교회는 이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처럼 영원한 실체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위하여 창조된 존재”라고 주장하는 아리우스파의 오류에 쐐기를 박았다. 회의의 결정과 동시에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아리우스파를 박해하여, 아리우스를 비롯한 주요 추종자들을 추방하고, 아리우스의 저작들을 불태워버리게 하였으며, 아리우스 자신도 알렉산드리아로 되돌아가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는 일리리쿰으로 추방되었는데, 하지만 이후 그의 추종자들의 끈질긴 탄원은 그를 니코데디아로 귀환하게 만든다. ▣ 한편,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자신의 즉위  20주년 기념 축하 행사를 되풀이 하기 위하여  326년에 서로마를 방문했는데, 이 기간에 큰 정치적 위기를 초래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는 동로마를 떠나 있는 동안 맏아들이자 부황제인 크리스푸스와, 크리스푸스의 계모이며 자신의  2번째 아내인 파우스타를 죽이게 했다. 그 이유는 아직까지도 추측만 무성한 채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는 짧은 방문을 마친 뒤 로마를 떠났고, 두번 다시 로마를 찾

Page 300: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지 않았다. 이 일련의 사건들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통치 말년의 방향을 설정해주었다. 그는 서로마에서 비잔티움으로 돌아오자마자, 비잔티움을 자신의 이름을 딴  ‘콘스탄티노플’로 그 명칭을 바꾸었고, 이 도시를 훨씬 확대된 도시 계획에 따라, 그의 상설 수도이며  ‘제2의 로마’로 재건하기 시작했다. 당시 로마는 비록 오스티아 항구는 여전히 붐볐고, 아직도 엄청나게 부유하고 유명한 도시이자 제국의 중심지였지만, 제국의 전략적 필요성에 적합하지 않은 지역이 된 지 이미 오래였고, 정치적으로는 제한된 중요성밖에 갖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내  330년  5월  11일에 이 도시는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되었고, 그후로  1,000년이 넘도록 로마 제국 수도의 기능을 유지했다. 하지만 봉헌식에는 유명한 이교도 예언자인 소파트로스도 초청되었다. ▣ 그런데 니케아 회의가 끝난 후 채  3년도 넘지 않은 이 기간 중에, 아리우스파 주교들의 끈질긴 탄원에 설득된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자신의 입장을 바꾸어 아리우스파에게 관용을 베풀게 된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당시 자신의 고문이던 호시우스를 해임하고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를 고문으로 임명함으로써 이 일은 신속히 집행되었다. 따라서  327년에 일리리쿰에 귀양가 있던 아리우스를 비롯하여 그의 추종자들은 다시 복직되었다. 대제는 아리우스의 명석함과 신실함에 크게 감동을 받았고, 무엇보다도 그가 앞서 결정한 니케아 회의를 존중하겠다

Page 301: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고 약속한 바에 고무되었다. 따라서 대제는 알렉산드리아 주교에게 요구하여 아리우스를 복직시키라고 했지만, 당시 사망한 스승 알렉산더(Alexander,  313‐28년)를 계승한 주교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ca.  295‐373)의 저항을 받았다. 지리한 입싸움 끝에 결국 대제는 교회 연합의 새로운 장애물이 등장했다고 판단하게 되고, 때마침 그의 즉위  30주년 기념으로 예루살렘에 재건한 성묘 교회 봉헌식에 제국 전역의 주교들을 초청하기로 한 것을 기회로, 주교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으로 오는 길목에 있는 티루스에서 교리의 일치를 보라고 명령을 내렸다.  335년에 열린 이 회의에서 모든 것이 뒤집혔다. 대부분이 아리우스파로 이루어진 회의는 그들의 기고만장한 활약장이 되어버렸으며, 해묵은 비난들이 부활했고, 아타나시우는 궐석 상태에서 파문되었다. 상황의 심각성을 눈치 챈 아타나시우스는 재빨리 콘스탄티노플로 도망쳤고, 황제에게 면담을 요청했지만, 대제는 이미 아리우스에게로 마음이 기울었던 터인지라, 그의 요청을 거절하고 오히려 추방령을 내려버렸다. 연이어 그에게 동조한 안디옥의 유스타티우스, 콘스탄티노플의 바울 주교 기타 등등에게도 추방령이 뒤따랐다. 하지만 아리우스를 복귀시키려는 콘스탄티누스의 작업은 순조롭지 못했는데, 알렉산드리아에서 그의 복귀를 반대하는 폭동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복음의 핵심 진리가 변질되려는 위기 앞에서,  86세의 노구를 일으켜 그 동

Page 302: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안의 오랜 은둔을 박차고 나온 성자 안토니우스가 폭동을 주도했다. 사태가 이렇게 돌아가자 콘스탄니누스 대제는 다시 한번 아리우스의 신앙을 검증해 보아야겠다고 판단하여 그를 불렀다. 그런데 기괴한 운명과도 같이,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초청을 받은 바로 그날 아리우스는 발작을 일으켜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의 천적(?) 아타나시우스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추종자들의 보호에 우쭐해진 아리우스는 한참 동안 경박하고 어리석은 대화에 열중하다가 갑자기 본성이 발작했다. 그는 거꾸로 넘어지면서 온 몸이 갈기갈기 찢어지며 유령이 되어버렸다.” 다소 과장된 것 같지만, 아리우스가 끔찍한 최후를 마쳤다는 점에 있어서는 이의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대세는 아리우스파에게 유리하게 작용했고, 여전히 아타나시우스는 돌아올 수 없었다. 심지어 콘스탄티누스가 죽은 뒤까지도. ▣ 이러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통치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개인적인 헌신’이라는 배경에 비추어 해석해야 한다. 예루살렘에서 진행된 그의 즉위  30주년 행사는, 앞서 콘스탄티노플의 경우와는 달리 이번에는 전체적으로 그리스도교식으로 모든 행사가 진행되었다. 그는 수도로 돌아온 후, 몇 년 전에 착수한  12 사도의 대성당 공사를 지휘하였는데, 자신의 무덤 양 옆에  6명씩의 사도들의 무덤을 만들었다. 그는 곧 눈 앞에 직면한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듯 했다. 남은 기간 동안 황제

Page 303: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는 그리스도교를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기도 했다. 사실 리키니우스를 무찌르기 전부터도 그는 신학자이자 논쟁가인 락탄티우스를 트리어로 불러들여, 맏아들 크리스푸스의 가정교사로 임명했다. 이제 말년에 그는 콘스탄티노플에서 갈수록 늘어나는 그리스도교도를 위해 성경을 새로 발간해 보급하도록 했다. 그는 군대를 위해 특별한 기도문을 만들었고, 원정 중에는 막사 안에 이동 예배당을 설치하기도 했다. 그는 그리스도교 의식 및 그리스도교도가 특히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문제와 관련된 수많은 법률들을 공포했다. ▣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말년에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기를 원했지만, 그럴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세례식을 연기해나왔다. 그가 헬레노폴리스에서 병에 걸린 것은 아마 페르시아 원정을 준비하던 중으로 추측된다. 치료에 실패하자 그는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가려 했지만, 니코메디아 근처에서 몸져 누울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서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아리우스파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게 되어, 황제의 자주빛 옷을 벗고 대신 세례받는 사람이 입는 하얀 옷을 걸쳤다. 그는 마침내  337년  5월  22일 정오에 숨을 멈추었으며,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사도 교회에 묻혔는데, 앞서 잠깐 말했듯이 무덤 주위에는 사방에 각각  6개씩의 기념물이 늘어서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종교적 과대망상증을 표현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확신, 즉 자신은 사도들의 후계자로서 그리스

Page 304: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도교 전파를 위해 인생과 공직을 바쳤다는 믿음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유세비우스(Eusebius,  265‐339)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통치를, 신의 섭리의 실현 차원에서 해석한 이유가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즉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자신을  13번째 사도로서의 역할자였다고 평가한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같다.  그는  죽기  몇  년  전부터  ‘사도들과  동격’이라는  뜻의  ‘이사포스톨로스’(Isapostolos)라는 명칭을 즐겨 사용했다. ▣ 그의 업적에서 정치적 측면으로는, 제국을 세 아들에게 물려줌으로써 상속에 따른 제위 계승을 재확립했다는 데 있을 것이다. 그의 세 아들들 중에서 콘스탄티누스  2세(Constantinus  II,  337‐40 재위)는 서방 속주들(히스파니아, 브리타니아, 갈리아)을, 콘스탄티우스  2세(Constantius  II, 337‐61 재위)는 동로마 지역을, 막내 콘스탄스(Constans,  337‐50 재위)는 이탈리아, 일리리쿰, 북아프리카를 차지했다. 그러나 그의 아들들의 이러한 제위 계승권은 그가 죽은 뒤 유혈 사태가 잇따른 뒤에야 겨우 확보되었다.  340년 장남 콘스탄티누스 2세가 막내 콘스탄스를 공격한 전쟁에서 오히려 전사했으며,  350년에는 콘스탄스가 반란자인 게르만족 출신 장군 마그넨티우스(Magnentius)의 공격을 받고 패주하던 중에 갈리아에서 생명을 잃었다. 마지막 남은 아들은 둘째였던 콘스탄티우스  2세인데, 그는 곧장 마그넨티우스를 격파하고 로마 전체를 다스리는 단독 황제가 

Page 305: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되었다. ▣ 그는 통치 초기에 아버지의 신앙을 계승하여 아리우스파들을 지지함으로 아타나시우스를 아주 모질게도 박해하게 된다. 그러나 이후 앙키라 주교인 바실(Basil,  330‐379)의 설득을 받아들여 니케아 신조를 수용하게 된다. 하지만 이후 교회의 평화를 위하여 제안한 자신의 타협 정책이 아리우스파로부터는 지지를 받은 반면, 아타나시우스와 바실로부터는 반대를 받게 되자, 이들을 도무지 관용의 태도가 없는 사람들이라고 판단하여 박해를 가하기 시작했다. 황제는 페르시아를 친정하고 있던  361년  11월  3일, 갈리아 군단이 정제로 추대한 율리아누스(Julianus, 361‐63 재위)를 토벌하기 위한 출정 중에 열병에 걸려  44세의 나이로 급사하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의 헌서  (4.11.12): 바울  1세(PaulⅠ,  757‐67 재위) 주교 때, 주교의 

위상을 세속 정치 권세의 위에 올려 놓기 위한 의도로 당시 교회 법원에서 만든 위조 문서이다.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  (1.11.16): 칼빈은 이 사람의 열정적인 형상 숭배 신

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키프러스 섬의 콘스탄스의 주교 콘스탄티우스

Page 306: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는 형상물을 경건하게 받아들인다고 공언하고, 앞으로는 생명의 원천이신 삼위일체의 하나님께 드리는 것과 꼭 같은 예배와 영예를 이 형상물에게 드릴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기와 같이 하기를 원하지 않는 자들을 파문하고, 마니교도나 말시온파와 동류로 낙인 찍었다. 그리고 이것이 한 개인의 사사로운 의견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은 모두 합심해서 이에 동조하고 있다. 실로 동방 교회의 사절인 요한은 이에 열중한 나머지, 형상예배를 거절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 도시에 매음굴을 허용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만장일치로, 모든 이단자보다 사마리아인들이 더 나쁘고, 이들 사마리아인들보다는 형상 반대자들이 더 나쁘다고 결정하였다. 더욱이 그들은 이 소극이 박수 갈채 없이 끝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한 문구를 첨가하였다. ‘그리스도 상을 가지고 그것에 제물을 바치는 자는 기뻐 날뒤어라’라는 귀절이었다.”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  (4.7.6):  밀라노(Milan)의  주교  라우렌티우스

(Laurenitius,  ?‐258)가 발레리안(Valerian, 253‐60 재위) 황제의 박해를 받아 죽은 후, 밀라노의 주교가 된 사람이다. 그의 아들 펠릭스  1세(Felix  I,  269‐74 재위)는 로마 

Page 307: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교회의  26대  주교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사람에  대해  칼빈은  이렇게  언급했다. “라우렌티우스가 죽은 후에 콘스탄티우스가 밀라노 주교로 취임했을 때 이런 예가 있었던 것을 그레고리(Gregory,  590‐604 재위)의 서한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은 아주 오랜 규정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경의 표시와 예의로 대표들을 서로 파견하여 취임식에 참석시키며 동지 관계를 표명했다. 이렇게 자발적이던 일이 후에 하나의 의무로 인정되기 시작했다. 하여간, 이전에는 로마 주교의 임명권이 니케아 회의의 결정에 있는 것과 같이 그 자신의 주교구, 즉 로마가 있는 지방의 교회들에 한정되어 있었다.”  #쿠리우스(Curios)  (3.24.10):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소

수의 예에서 무엇을 얻어내려는 것인가? 선택된 사람들은 모두 항상 경건한 정신을 지니고 있다는 것인가? 그것은 아리스티데스(Aristides,  B.C.  525경‐467), 소크라테스(Socrates, B.C. 469‐399), 크세노크라테스(Xenocrates), 스키피오(Scipios), 쿠리우스(Curios), 카밀루스(Marcus Furius Camillus, B.C. ?‐365) 등의 고귀한 생활을 보고, 이 사실을 근거로 우상 숭배의 암흑 속에 버림을 받은 사람들도 모두 거룩함과 순결함을 성의껏 추구했다고 추론하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참으로 성경에는 

Page 308: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그들을 명백하게 부인하는 곳이 한 둘이 아니다.”    #크라테스(Crates  the Theban, ?‐ B.C. 325) (3.10.1): 청중 앞에서 도발적인 행동을 

서슴없이 취한 철학자로 잘 알려진 크라테스는 테바이에서 태어나서 아테네에서 죽었다. 이 키니코스 철학자는 자신을  ‘세계 시민’이라고 불렀던 디오게네스의 제자답게, 자신을  ‘디오게네스의 시민’이라고 불렀다. 그는 자신이 소유했던 땅을 양들이 풀을 뜯을 수 있도록 주어버리고, 재산을 모두 바다에 던져버린 뒤, 키니코스 학파의 길로 들어섰는데, 이는 스승 디오게네스를 따르기 위해서였다. 그는 나쁜 평판과 돈이 빼앗아갈 수 없는 가난이야 말로 자신의 진정한 조국이라고 주장했다. 스토아 학파를 창시한 키티온의 제논의 스승이기도 했던 크라테스는 훗날 자신의 아내가 되었던 명문 가문의 딸 히파르키아(Hyparchia de Maronee)가 청온을 해왔을 때, 그녀가 보는 앞에서 옷을 모두 벗어버린 후,  “보라, 네 앞에 있는 미래 남편의 모습을. 이것이 내가 가진 전부이다. 그러니 잘 생각해서 결정하라. 왜냐하면 내가 사는 방식 그대로 살 수 없다면 내 아내가 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크라테스와 결혼하지 못하는 한, 차라리 죽어버리겠다고 결심했던 히파르키아였으므로, 전여 개의치 않고 그를 선택했으며, 이후 이들은 대중 앞에서 

Page 309: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거리낌 없이 성교를 하는 등 그야말로 기인의 삶을 살았다.  #크리소스톰(Chrysostom, 346‐407)  (1.13.21): ▣  ‘황금의 입을 가진 요한’(John of 

the Golden Mouth)이라는 별명을 얻은 크리소스톰은 안디옥에서 출생하여 웅변가 리바니오스(Libanios)에게서 수사학적 교육을 받고, 세례를 받은 후, 타르수스의 주교 디오도르(Diodor)에게서 신학을 배웠다. 따라서 그는 안디옥의 문헌들을 쉽게 해석할 수 있었다. 그는 청년기에 광야로 들어가 금욕주의적인 생활을 하였지만, 이후 지나친 금욕주의에서 얻은 중병으로 인하여 은둔 생활을 마치고, 안디옥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크리소스톰은 주교 플라비안으로부터 장로에 임직되었고, 교회의 여러 가지 과제를 맡았으며, 말씀의 봉사도 곁들였는데, 그의 천부적인 말솜씨는 이내 설교자로서 큰 명성을 얻게 되었다. 안디옥에서의  12년 동안의 설교를 통하여 수많은 절기 설교와 신약성경 강해가 지속적으로 나왔다. 그의 설교는 개인 속기사들에 의하여 빠짐 없이 기록되었다. 안디옥 사람들은 크리소스톰을 아주 귀하게 여겼고 자랑스러워했다.  386년에 저술한  ‘사제직’은  ‘목회 사역에 대해 지극히 높은 표준을 제시한 책’으로 유명하다. ▣ 그러던 중에 황제 아카디우스(Arcadius, 395‐408년 재위)는 넥타리우스(Nectarius,  381‐97 재위)가 죽게 되자 그의 후계자로 

Page 310: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이 유명한 설교자를 콘스탄티노플의 추기경에 임명하게 된다. 당시 황제는 그의 높은 인기로 말미암아 폭동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크리소스톰을 수도 근처의 조그만 교회당으로 초청한 후, 그가 도착하자 강제로 마차에 태워 납치하는 방식으로 그를 초청했다. 그는 이곳에서  398년에 주교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비록 크리소스톰이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이며 유능한 설교자이긴 했지만, 뒷공론과 음모와 술수가 난무하는 대도시의 주교 역할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인 사람이었다. ▣ 크리소스톰의 주교로서의 직무는 급진적인 개혁으로 진행되었다. 당시 일부 독신 사제들은 자기들의 자택에 소위 영적 자매들을 두었는데 이로 인한 추문이 사방에 난무했기 때문에, 크리소스톰은 이들에게 명하여 자매들을 다 내어보내라고 하였다. 또한 성직자들에게 엄격하고 청빈한 생활을 하라고 지시하였고, 스스로 모범이 되어 저택의 장식품들을 팔아 극빈자들에게 식량을 공급하였으며,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교회당 문을 항상 열어두었다. 당대의 성직자들에게 행한 그의 설교의 한 문장이 이 당시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그대의 말의 입에 물린 금과 그대의 노예의 손목에 채운 금팔지와 그대의 신발에 달린 금술들은, 곧 그대가 고아를 늑탈하며 과부들을 굶주리게 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대가 죽은 후 당신의 거대한 저택을 바라보는 통행군들이 수군거릴 것이다. 저 저택을 짓기 위하여 

Page 311: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얼마나 많은 고통이 뿌려졌는가? 얼마나 많은 고아들이 헐벗었는가? 얼마나 많은 과부들이 약탈 당했는가?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의 임금이 착취되었는가? 당신들의 죽음을 통해서도 이러한 고발의 범위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 크리소스톰의 개혁 작업은 아시아 지역의 많은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던 성직 매매자들을 가차없이 파면한 데서 절정에 달하였다. 따라서 이 안디옥 사람에게 곧 어려움이 닥치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의 타협없는 선포, 동방의 수도에 있는 혼혈인들을 위한 배려, 궁성과의 관계를 통하여 크리소스톰의 인기가 높아져간 것이 원인이었고, 그의 꾸밈없는 활동과 일련의 단호한 개혁은 주교단과 궁성 고관들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전임자보다 못하다는 비판이 여기저기서 나오기 시작했다. 이에 크리소스톰은  ‘사람들은 현직 주교를 모함하려는 의도가 있을 때만, 전임자를 칭찬하는 법이다’라는 말로써 응수했다. 그는 좋은 환대와 건축 사업을 위한 재정 지원을 바라고 찾아온 사람들의 기대를 무너뜨려 아주 검소한 대접으로 돌려보내기 일쑤였다. 크리소스톰은 자신이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라는 이유로 황궁 의전관이 자신을 최고위 관료들보다 더 높은 서열에 두고서 예우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했다. 이는 당시 서방 로마 교회의 반쪽 주교 다마수스(Damasus,  366‐84 재위)가 자신을 높이기 위하여 황제의 수준을 넘는 접대를 베푼 것에 비할 때 너무나 대조적이다. 

Page 312: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금욕적이고 물질에 초연한 크리소스톰의 생활 방식은, 유복한 도시의 온갖 향략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과 어울려 살기에는 결코 쉽지 않았다. 가나한 자들을 배려하라고 재촉하는 크리소스톰의 설교는 수 채의 저택들을 두고 수십 명의 하인들을 거느린 채 금 세면기의 버튼을 누르는 재미로 사는 부자들에게 극도의 모욕감을 안겨주었다. 남편에게 정절을 요구할 권리가 아내에게도 있다는 그의 설교는 도덕적 불감증에 안주하는 부자들의 감정을 상하게 했으며, 여성들의 사치에 대한 그의 가차없는 질책은 고급 향수와 패션에 민감한 귀부인들로부터 반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 크리소스톰이 오리겐(Origen)의 신학에 기울어져 있다고 판단한  알렉산드리아의  테오필루스(Theophilus)  주교가,  그를  정죄하려는  속셈으로 알렉산드리아에서  일을  꾸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오리겐에게  극도의  혐오감을 가지고 있던 에피파니우스(Epiphanius,  315‐403)를 사주하여 크리소스톰에게 시비를 걸게 하였지만 실패로 돌아가게 되자, 크리소스톰을 정죄하는 법정을 열기 위하여 직접 건너왔다. 이에 따라 이른바 칼케돈의 오크 궁에서(403년,  6월), 다소 우스꽝스러운 비난들인, 에베소 침입, 궁성 모독, 조울증 환자와 같은 고립된 생활 등등에 근거하여, 궐석 재판으로 크리소스톰을 정죄한 테오필루스는 크리소스톰에게 통보하여 여러 가지 고소에 답변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크리소스톰은 대꾸할 

Page 313: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가치도 없다고 판단하여 일체 응하지 않았다. ▣ 그런데 바로 그즈음에 크리소스톰의 설교가 빌미를 제공하여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크리소스톰은 아합왕의 아내 이세벨의 예를 제시하면서, 여성들의 검소한 생활에 관해 설교하게 되었다. 그러자 과거 선량한 지주들의 토지를 가래챈 일이 있었던 황제 아카디우스(Arcadius,  395‐408 재위)의 아내 유독시아(Eudixia)가 그것을 자신을 치는 말로 받아들이게 된다. 한 여름에도 서릿발을 날리는 여성의 원한으로, 앞서 테오필루스 일파가 가한 정죄는 다시 살아났고, 마침내 크리소스톰은 유배길에 오를 수밖에 없게 되었다. 크리소스톰의 응수는 마지막 고별 설교를 통하여 황후 유독시아를 명백하게 이세벨과 헤로디아에 비유한 후 유유히 유배지로 떠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 그런데 그가 떠난 바로 다음 날, 수도에 강한 지진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러자 황제의 아내 유독시아는 크게 겁을 먹고, 간절한 애원 끝에 크리소스톰으로부터 수도로 귀환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낸다. 하지만 그가 돌아왔을 때 보였던 시민들의 열화와 같은 환송은, 그를 비난하던 사람들에게 더더욱 단결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그들은 물러서지 않았고 긴장은 더욱 커졌다. 그러던 중에 소피아 성당에 유독시아의 은상을 세우는 행사가 열리게 되었을 때, 크리소스톰의 황금의 입은 여지 없이 다시 열렸다. 이로 말미암아 이제는 황실 차원에서 이 말썽꾸러기 성직자를 제거하기로 

Page 314: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결심하게 된다. 크리소스톰은  404년에 다시 추방의 길을 떠나게 되었고, 타우루스 남동부 지방 작은 마을 쿠쿠수스(Cucusus)에서 지내면서, 잃어버린 설교단을 대신하여 펜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추방될 때에 부유한 과부 올림피아스(Olympias)는 넉넉한 자금을 보태주었고, 그의 지지자들은 무수한 편지를 보내와 격려하였다. ▣ 한편 서방의 영특한 로마 주교 이노센트  1세(Innocent  1,  401‐17 재임)는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크리소스톰을 지지했다. 이에 따라 더더욱 수많은 사람들이 크리소스톰을 찾아오게 됨에 따라 그곳은 마치 성지와도 같이 되었다. 결국 수도에 있던 권력자들의 시기심이 다시 발동되었고, 결국 폰투스(Pontus)로 떠나라는 추방령이 다시 날라왔다. 새로운 유배지로 가던 중 코마나(토카트)에 이르게 된 크리소스톰은 병으로 지친 몸으로부터 오는 임박한 임종을 직감하면서 길 옆의 작은 교회당으로 자신을 옮기게 한다.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아멘.” 동방 교회가 배출한 가장 위대한 설교자는 이렇게 일생을 마쳤다. 때는  407년  9월  14일이었다. ▣ 그의 생애가 이러한 고난의 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크리소스톰이 남겨 놓은, 거의 모든 신약성경에 대한 주석을 망라하는 풍부한 문헌 유산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 그 밖에도 약  600여편에 달하는 절기 설교들과 서간문들이 있다. 이 안디옥의 주석가는 유일한 해석을 통하여 그리스도론 분야에서 

Page 315: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그 지역의 지도급 인물이 되었다. 그는 모든 혼합주의적 경향에 반대하여 양성의 독자성을 주장했고, 그 통일성을 적당하게 묘사하지 않았다. 십자가의 사건은 바울의 입장과 같이 걸림돌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인식했으며, 특히  ‘위로부터’ 이 사건을 해명하고자 했다. 크리소스톰은 변모된 정치적 관계에서 만이 아니라 그의 주변 세계 모든 곳에서 십자가를 발견했다. 인간의 평등, 빈부 격차, 사회적 모순에 결코 둔감하지 않았던 그의 설교들은 여전히 현대 설교자들의 모범이다. ▣ 그의 신학 사상에서 명백하게 나타나는 현실주의는 구원의 신비에 대한 그의 이해, 특히 성례전 이해에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에 대한 추구에서도 관철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과정에 관한 선포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교 사회를 겨냥하고 있는데, 이 사회에서는 다름 아닌 수도원이 그 모델 기능을 담당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이 안디옥 사람의 저작은 그 시대의 신앙심을 반영하고 있고, 민중의 경건의 영역 속으로 파고는 들었으나 이에 대한 지속적인 신학적 성찰은 발견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시의 해석자와 동방의 위대한 교부로서 높은 권위를 얻게 되었다. ▣ 크리소스톰에 대한 재평가는 오래지 않아 이루어졌다. 마침내  438년에는  그의  유해가 코마나로부터 콘스탄티노플의  사도  교회로 이전 재매장되었다. 그가 남긴 말은 후세에 두고두고 음미된다.  ‘나의 사역은 흙탕

Page 316: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물이 끊임없이 흐르고 있는 땅의 한 구석을 깨끗이 청소하려고 하는 사람의 일과 같다.’ 이후 역사 속에서 그의 이름에는  ‘성 크리소스톰의 전례’라는 명칭이 붙었는데, 이는 중세 비잔틴에서 황도의 유서 깊은 전례의 작성자를 선정하려 할 때 크리소스톰보다 더 비중있는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크세노크라테스(Xenocrates)  (3.24.10): 소크라테스 시대에 다이몬(daimon)은 선

할 수도 악할 수도 있는 존재였다. 그러나 플라톤의 제자 크세노크라테스는 영적인 세계를 신과 악마로 나누고 신들의 어두운 속성을 악마로 변화시켰다. 그 당시에 마법사들의 악마에 대한 상담 행위는 그들을 어둠의 힘과 확고히 연결시켰다.  #크세노폰(Xenophon, B.C. 426‐355) (1.5.13; 4.12.22): 소크라테스의 제자이기도 하

고 페르시아의 키루스 왕에게 고용되어 페르시아의 각 지역을 여행하고 많은 저술을 남겼다. 특별히  ‘소크라테스의 회상’이라는 책의 첫 장에서 소크라테스가 기소된 첫 번째 이유로 바로 그가 다이몬을 섬겼던 데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이는 플라톤(Platon)의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라는 책에서도 소크라테스의 기소장 내용이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나라에서 인정하지 않는 새로운 신격인 다이몬을 섬

Page 317: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기고 있다’는 점을 소개한 것과 일치한다. 소크라테스가 재판 중에 델포이(Delphi) 신전에서  “너 자신을 알라”는 신탁(信託)을 받았다고 소개한 것은 너무나도 유명한 일화이다. 그가 이런 말을 했던 이유는 바로 자기 내면의 다이몬이 사악하지 않음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즉,  델포이에  모셔진  공인된  그리스의  신  아폴론(Apollon)의 신탁 내용을 알림으로써 자신의 다이몬이 사악한 존재가 아님을 밝히고자 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크세노폰은 위대한 철학자라기 보다는, 자신의 몸주신을 숭배하는 오늘날의 무당의 모습과 닮아 보였던 것이다. 또한 크세노폰은, 미남 대회에 참석했던 소크라테스가 자기가 당선자보다도 더 아름답기 때문에 상을 탔어야 했다며 익살을 떨었다고 하는 일화도 소개한다. 당시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했다.  “미는 실용성에 있다. 내 눈은 개구리 눈같이 튀어나왔기 때문에 남보다 더 잘 볼 수 있고, 코는 말코여서 숨도 잘 쉬고 냄새도 잘 맡을 뿐만 아니라, 입은 메기같이 넓어서 밥도 잘 먹고 키스도 멋지게 할 수 있기 때문에 나야말로 천하의 미남이다.” 그러나, 정작 크세노폰이야말로 잊지 못할 일화를 남겼다. 하루는 그가 희생제식을 치루고 있을 때였다. 온통 먼지를 뒤집어 쓰고 급히 달려온 전령이 크세노폰 앞에 엎드려 그의 아들의 전사 소식을 전했다. 하지만 크세노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침착하게 남은 제식을 진행했다. 이

Page 318: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후로도 꽤 긴 시간이 지난 후, 크세노폰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물론 이 마저도 스스로 말했던 것이 아니고, 그의 가장 충직한 하인이 어떻게 그렇게 아들의 전사 소식 앞에서도 침칙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해달라고 간청한데 대한 마지못한 응답에 의해서였다.  “나는 그 아이를 낳았을 때부터, 그가 언젠가는 죽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네.” 크세노폰의 글들은 칼빈이 개설한 제네바 아카데미에서 학생들이 배워야 할 교과과정에 포함되었다.  #클레멘트  7세(Clement Ⅶ,  1523‐34 재위)  (4.7.24): 로마 교회의  219대 교황이다. 

클레멘트는 당시 프란시스  1세와 카를  5세가 이탈리아를 먼저 손에 넣으려고 서로 으르렁거리는 상황에서 여러 가지로 정치적인 수완을 발휘했고, 영국의 헨리  8세 왕이 아라곤의 캐서린과의 이혼에 대한 재가를 요청해왔을 때, 그녀가 카를  5세의 숙모가 된다는 관계 때문에 카를  5세의 비위를 맞추어야 했던 당시의 상황에 따라 단호히 불허하였다. 로마 교황사에 무능했던 교황들 중의 한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클레멘트(Clement, 88‐97 재위)  (4.7.14, 20): 로마 교회의  4대 주교이지만 자세한 

정보가 알려져 있지 않다. 항간에는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언급한 사람으로 보기도 

Page 319: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하지만(빌  4:3), 정확하지는 않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로마 교황의 책은 터툴리안, 이레네우스, 에피파니스 등의 기록에 근거하여 클레멘트를 베드로의 세 번째 후계자로 명시해 놓았다는 것이다. 그가  96년경에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는 유명한데, 무엇보다도 로마 주교의 수위권이 드러났다는 점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는 교회사적으로 대단히 중여한 문건으로 취급하고 있다.    #키리악(Cyriac,  595‐603 재위)  (4.7.6,  16):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로 요한  4세를 계

승했다.    #키릴(Cyrill, Alexandrien, ca. 380‐444) (4.7.1): ▣ 알렉산드리아의 키릴은 초대 그

리스도 교회의 마지막 교부이다. 그의 이름은  5세기의 그리스도론 논쟁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키릴은  412년에 그의 백부인 테오필루스(Theophilus)의 뒤를 이어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좌에 올랐다. 키릴은 알렉산드리아 주교로서 아리우스 주의자들, 노바티안주의자들, 유대인들과 투쟁하면서 신앙에 관한 상당한 분량의 변호 문서를 썼다. 그는 초창기의 선구자인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ca.  295‐373)에게서 신학적으로 큰 영향을 받았다. 키릴의 방대한 저작은 올바른 신앙의 변호와 더불

Page 320: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어 성경 해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 428년부터  433년 사이에 저작된 문서들은 네스토리우스(Nestorius,  428‐431 재위)와의 논쟁을 위한 것으로서의 특색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구별을 강조했다. 그들은 결코 서로 혼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 까닭에 네스토리우스가 마리아에게  ‘하나님을 잉태한 여성’이라는 통속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였다. 이로써 네스토리우스와의 논쟁이 그의 상투어가 되었고, 키릴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성모’(Gottesmutter)의  적을  물리치는  일에  열중했다.  키릴은  하나님을 통한 인간의 참된 구원이라는 관심 속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이 되신 로고스의 하나 됨을 열정적으로 변호했다. ▣ 키릴은 여러 해 동안의 알렉산드리아와 로마  사이의  좋은  관계를  배경으로  하여,  로마  교회의  43대  주교  셀레스틴  1세(SelestinusⅠ,  422‐32 재위)에게 이단자 네스토리우스의 위험성을 확신시켜 주었고, 로마 공의회(430년  8월)에서 네스토리우스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고 그를 소환하는 일에 성공했다. 사람들은 이 유죄 판결의 집행을 키릴에게 위임했다. 따라서 키릴은 에베소 공의회(431년)에서도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공격을 관철시킬 수 있었다. 키릴은  430년  11월에  열린  알렉산드리아  공의회에서  12개의  파문  주문(Anathematismen)에서, 그리스도의 하나 됨을 본성적으로만이 아니라 육신적으로

Page 321: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도 묘사해 냄으로써, 신학적으로 훨씬 우세함을 보여 주었다. 이것은 과거에 안디옥의 신학자들의 거센 반발을 사서 유죄 판결을 받았던 아폴리나리스(Apollinaris, 361‐90 재위)의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의 한 본성’이라는 교리를 상기시켰다. 그러나 그는 추후에 네스토리우스에게 보내는 이른 바  2차 서신(430년 초)이 성경적 그리스도론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라는 승인을 받았는데, 키릴은  433년에 자신과 안디옥 학파 신학자들(안디옥의 요한, 키루스의 테오도레트) 사이에 협상이 이뤄지자, 파문 주문의 입장을 스스로 철회했다. 이와 더불어 양 진영은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유죄 판결(431년)을 확정하고, 아마도 테오도레트가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일치 신앙고백문을 지지했다. 여기에서 마리아는  ‘하나님을 잉태한 여성’으로 묘사되었지만, 그리스도의 양성은 구별되는 것으로 서술되었다. ▣ 그러나 하나됨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는 양쪽의 입장이 서로 달랐다. 키릴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가 완전한 하나님이요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라는 표현은 신성에 있어서의 완전함과 인성에 있어서의 완전함이 동일시되는 것을 의미했다. 키릴은 양성을 똑같이 갖고 계시는 분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베소 공의회의 일치 신조(433년)는  칼케돈  공의회(451년)의  그리스도론 교리 형성에 이르는 결정적인 첫 걸음이 되었는데, 키릴은  444년에 사망하게 되어 그 결말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니케아 

Page 322: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회의가 삼위일체 논쟁을 미처 끝마치지 못한 것처럼, 사실상 칼케돈 회의도 기독론 논쟁의 결말을 짓지는 못했다.    #키릴(Cyrill, Jerusalem, ca. 350‐81 재위) (4.4.8): 예루살렘에서 장로로 사역하다가 

350년부터는 주교가 되었는데, 생애의 많은 부분을 아리우스 논쟁에 쏟았다. 키릴은 자신을 주교로 천거했던 가이사랴의 아카키우스(Acacius)와 니케아 신앙과 교회 권징 문제로 다툼이 일어나자, 아리우스파였던 그를  357년의 공의회에서 면직시켰다. 아리우스파 황제 발렌스(Valens,  364‐78 재위)의 박해를 받아 다른 정통파 주교들과 함께 면직과 추방을 당했지만,  379년에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I, 379‐95 재위) 황제에 의해 복직되어 예루살렘 교회를 섬기는 일에 전념하다가,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 참석하여 아리우스파로부터 겪은 고초에 대하여 많은 위로를 받았다. 하지만 같은 해에 사망하였다. 키릴은  347년경 장로로 시무할 때 세례 예비자반을 가르치면서 전한 연속 설교로 구성한  23권으로 이루어진 교리문답서를 저술했다.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B.C. 106‐43)  (1.3.3): 로마의 웅변가, 정치가, 철학

Page 323: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자이다. 그는 이탈리아의 아르피눔에서 기사신분의 가정에서 이름이 같은 아버지와 어머니 헬비아(Helvia) 사이에서 태어났다. 웅변가로 출세하면서 정치계로 들어선 그는 재무관, 고등안찰관, 법무관 등을 거치는 동안 특히 여러 비리 공직자를 고소함으로써 명망을 쌓았다. 초기에 평민당에 기반하고 있던 폼페이우스를 지지하였고, 폼페이우스가 미트라다테스 원정의 총지휘관이 되도록 찬성하기도 하였다. 드디어 기원전  64년 가이우스 안토니우스와 함께 집정관(콘술)에 당선되었다. 그런데 집정관에 당선된 후 그는 평민당이나 평민들로부터 등을 돌렸다. 집정관으로 있을 때 그는 특히 카틸리나의 음모를 폭로한 것으로 유명해지게 되었는데, 음모에서 나라를 구했다는 이유로 국부(Pater  Patriae)로 불렸다. 그후 카틸리나는 로마에서 추방된 후 곧 암살되었다. 그런데 키케로가 민회의 결의를 거치지 않고 원로원 결의에 의해 카틸리나 일당을 처형한 데 대해 평민당이 그 합법성을 문제삼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그의 정적 클로디우스(Clodius)가 카이사르의 지지를 받으면서 호민관에 당선된 후 키케로를 추방형에 처하도록 제안하였다. 키케로의 배후에는 원로원과 기사계층이 있었고, 클로디우스는 카이사르와 그 군대를 배경에 두고 있었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대결 구도 속에서 그는 대체로 폼페이우스를 지지하였고,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군할 때도 폼페이우스 진영에 

Page 324: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가담하기도 하였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가 제거된 후  47년 키케로에게 사면의 은혜를 베풀었다. 그러나 키케로는 후일 카이사르가 암살되었을 때 매우 기뻐하였고, 로마 공화정을 부활시켰다면서 그를 암살한 브루투스(Brutus,  B.C.  85‐42) 등을 변호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후 제2차 삼두정치가 시작되던  43년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의 뜻을 좇아 키케로를 희생시키기로 하고, 그로 하여금 법률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하였는데, 얼마 후 그는 카이에타에서 자객에게 암살되었다. 그의 목과 손은 안토니우스의 명에 따라 로마로 옮겨져 연단에 전시되었다. ▣ 흔히 키케로를 로마 공화정의 수호자로 표현한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공화국의 자유란 귀족 중심의 전통적 질서를 강조한 것이었다. 즉 그의 정치적 입장은 평민당을 비난하고 벌족파를 지지하는 것이었다. 평민당을 비난하는 가장 큰 이유는 평민당이 사유 재산을 침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사유 재산의 신성함을 강조하고, 가난과 육체 노동자를 경멸하며, 사색의 여가를 가질 수 있는 귀족을 선호하였다. 그는 산술적인 것보다 기하학적 평등이 진정한 평등이라고 생각하였다. 또 다수는 가난한 사람들이어서 이들이 폭력으로 재산권을 침해할 수도 있으므로, 가난한 평민이 최대의 힘을 갖지 않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평민들에게는 켄투리아회를 통해서 최소한의 정치적 권리를 가지면서 완전히 소외되지 

Page 325: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않고 있다는 생각만 가지게 해주면 되며, 재산에 비례하여 유산자들이 무산자나 재산이 적은 사람들을 통치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것이라고 보았다. 고리대금업으로도 돈을 모은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ʹ더러운 근성의 벌레와 같은 존재ʹ로 표현하였다. 가난한 민중과의 투쟁을 위해 원로원과 기사 계층은  ʹ양 신분의 화합ʹ을 이루어야 한다. 그래서 키케로의 사상은 실천적 절충주의였다. 또한 그는 에피큐로스(Epicures, B.C.  341‐271)의 철학에도 정통하였으나 그 유물론적 사상은 배격하였다. 키케로의 사상은 독창적인 것은 아니나 그리스 철학을 라틴어로 표현함으로써 중세에 전한 공적이 크다 하겠다. 특히 그의 문장은 아주 아름다워, 라틴어 산문의 발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칼빈은 제네바 아케데미의 교과과정에 키케로의 글들을 다수 채택하였다.  #키클로페스(Cyclopes)  (1.5.4):  희랍  신화에  나오는  장수의  이름이다.  제우스

(Zeus)는 애꾸 눈 장수요 보기 흉한 거인인 키클로페스가 제공해준 무기의 도움을 받아 타이탄(Titan)과 싸운다. 그런데 앞서 제우스는 키클로페스를 해방시켜 주었었다.  

Page 326: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키프리안(Cyprian,  200‐258)  (2.2.9): 키프리안은  248년부터 칼타고(Carthage)의 주교였다. 키프리안은 아마도 귀족 계급에 속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처음에는 수사학자였다가,  246년경에 그리스도교를 접하게 되어 세례를 받았다. 그의 주교 활동은  250년에 일어난 박해 때문에 잠시 중단되었다. 그 동안에 그는 칼타고 근처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 이로 인해 집사인 펠리키시무스(Felicissimus)는 주교에 반대하는 불평분자들을 규합하여 다른 주교를 선출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들 반대 무리의 배후 선동자는 사실상 장로 노바투스(Novatus)였는데, 그는 키프리안을 무시하고 외지의 주교들을 통하여 펠리키스무스를 부제에 임명하였다. 당시 터툴리안(Tertullian,  ca.  155‐220)의 원리를 견지한 키프리안이 배교자들의 원상 회복에 엄격한 태도를 취하되, 죽음의 위기에 처했던 경우만큼은 예외로 했다. 그러자 이와 같은 교회의 권징은 너무 느슨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노바투스를 중심으로 새로운 세력이 형성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 키프리안은  251년 초에 칼타고로 되돌아와서 칼타고 교회에서 나간 이교도들의 우두머리들은 공의회의 대표로 참석하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아울러 박해 기간 중에 법 때문에 우상을 위하여 제물을 바쳤던 사람들이 회개를 할 경우, 교회에서 다시 받아들이겠다고 결정함으로 앞서의 입장에서 일보 후퇴하였다. 그런 점에서 키프리안은 입장을 바꾸어  252년

Page 327: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에 새로 열린 공의회에서 회개 기간이 끝나기 전에 회개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성례전을 허용하기에 이르렀다.  252‐54년에 로마제국에 페스트가 창궐하게 되자, 북아프리카의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고난과 박해의 길을 걷게 되었다. 키프리안은 칼타고에 병원을 설립하였다. 그의 말년은 이단 논쟁으로 암울했다. 그는 제의세를 거부한 죄로  258년  9월  14일 처형되었다. ▣ 키프리안은 실천의 사람이었다. 이것은 그의 체계적, 시사적 저작에 잘 나타나 있으며, 문화비판적인 서신 속에서는 부분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그는 아주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형식을 갖춘 언어로 글을 썼다. 어거스틴이 출현할 때까지 키프리안은 서방 교회의 대표적인 저술가였다. 키프리안에 의하면, 교회의 일치는 각 교회가 주교와 밀접하게 연결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주교에 반대하는 자는 교회에 반대하는 자이다. 주교들은 서로 결속을 이룬다. 키프리안은 교회를  ‘찢어지지 않는 그리스도의 옷’(요  19:23)에 비교한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가 자주 인용하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표현은 이단 세례의 부당성을 의도하는 것이었다. 처음으로 사도 베드로에게 맡겨진 교회 내에서의 통치권을 통하여 베드로가 일치의 실제적 근거가 되었다. 베드로를 통하여, 즉 베드로에게서부터 내적인 교회의 일치가 세워지는 것이다. 베드로에게 부여된 수위권은 똑같은 주교들 가운데서 으

Page 328: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뜸이라는 의미에서 명예로운 첫 번째 지위라고 보았다. 성만찬(Eucharist; 성만찬은 현재까지 기독교 예배 의식의 중심 요소가 되어서 퀘이커 교도와 구세군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기독교 세계를 연합시키고 있다. 그러나 성만찬의 의미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는 개신교와 로마 교회 간에 현저한 차이가 있고, 심지어 개신교 안에서도 그러하다)에서 희생 제사는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의 반복이다. 이 양자는 십자가 상에서의 유일한 희생 제사의 표현이다. 키프리안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희생 제사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혔다. 따라서 카톨릭 교회 밖에서 시행되는 모든 성례전은 유효하지 않다는 것이다. 회개는 죄의 고백과 공식적인 회개 의식에서 이루어지는데, 죄의 중함에 따르는 회개의 실천이 필요하며 회개 기간이 끝난 후에 보증된 화해, 곧 주교를 통해서 교회에로의 재영접이 이루어진다. ▣ 여기서 키프리안의 교회관을 다시 한번 정리해 보면 이렇다. 키프리안은 모든 그리스도 교회의 참된 지체들을 이해하고, 또 유형적이며 외형적인 통일체로 이루어진 보편적 교회(Catholic  Church)의 개념을 명확하게 확립한 최초의 인물이다. 그는 주교는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교회의 예배를 주관하며, 그 자격으로 제물을 드린다고 했다. 즉 성직자의 실제적 제사직을 제사 행위와 결부시켜 최초로 가르쳤다. 그에 의하면 주교들은 주교회를 조직하고 이를 주교단이라고 불러서 교회의 통일체를 대

Page 329: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표하였다. 그는 교회의 통일성의 기초를 주교의 통일체에다 두었고 동시에 그는 주교들의 동등한 지위를 주장하여 로마 주교의 우위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성도가 주교를 거역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라고 보았으므로, 정당한 주교에게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는 그 이유로 인해서 교회원의 자격을 잃을 것이며, 결국 구원을 얻지 못하게 된다고 했다. 참된 교회원은 언제나 순종하며 교회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키프리안은 이러한 교회 개념을 확립함으로써 논리적으로 이단자들이 행하는 세례의 정당성을 부정하게 되었다. 그의 이러한 교회관은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는 차원에서는 성경의 진리를 밝히 드러냈지만, 일부가 비약되어 훗날  ‘카톨릭 교회의 오역과 부패 조장의 역할’이 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타티아노스파(Tatians)  (4.12.23): 칼빈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대목에서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러므로 결혼을 금하는 것은 마귀의 교훈이라고 한 것은 한 하나의 예언이요 성령의 신성한 말씀이다. 이 말씀으로 성령께서는 위험한 사태에 대비해서 처음부터 교회를 무장시키고자 하셨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교는 몬타누스와 타티아노스파와 엔코라티스파와 기타 이단자들에 대한 이 선고를 부정함으로써 깨끗이 피한 것같이 생각한다. 이단자들만이 결혼을 정죄할 뿐이고, 자신들은 정죄하는 

Page 330: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것이 아니라 다만 사제 계급에는 부적당하다고 생각해서 그들에게만 금하는 것일 뿐이라고 변명한다. 마치 이 예언이 처음에 저 이단자들에게서 실현되었으나 자기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듯이 말한다. 또한 그들은 결혼을 모든 사람에게 금지시키는 것이 아니므로, 자신들이 결혼을 금지한다는 것을 부정한다는 이 유치한 궤변이, 마치 들을 가치가 있는 것같이 행동한다. 하지만 이는 마치 어떤 폭군이 도시의 일부분만을 부당하게 압박하는 법률은  (그것이 전체를 압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부당한 법률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터툴리안(Tertullian,  ca.  155‐220)  (1.10.3): 칼타고에서 출생한 터툴리안은  196년

경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에, 북아프리카 고향에서 문학적, 수사학적 재능과 법률 지식을 갖고서 신앙의 변호에 헌신했다. 그의 집필 활동은 제3세기의  20년대까지 지속된 것으로 추정된다. 터툴리안은 칼타고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단순하고도 자각적인 일원으로서 그리스도교를 위한 문서들을 집필했다. 하지만 날카로운 강직성과 비타협성으로 말미암아 카톨릭에서 추방을 당했다. 터툴리안은  207년 직전에 몬타누스주의자(Montanism)들과 접촉하였으나, 나중에 이 유별난 집단을 떠나서 터툴리안주의자들이라고 일컬어진 공동체를 세웠다. 당시 몬타누스파는 금식과 

Page 331: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참회를 비롯한 엄격한 금욕 생활을 강조하였고, 재혼을 금하고 순교를 적극 장려하였다. ▣ 터툴리안이 비록 카톨릭 교회 밖에서 일생을 마감했다고 할지라도, 수많은 신앙의 저작들을 남김으로써 초대 그리스도교 문헌사와 신학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에 속하게 되었다. 터툴리안의 저작들은 매우 다양한 분야로 구분된다. ⑴ 밖을 향한 그리스도교의 변호(Apologiticum), ⑵ 이단자들에 대한 카톨릭 신앙의 진술로서의 변호, ⑶ 실제적인 목회 서신. 그는 모든 분야에서 문학적인 완벽함을 기했다. 짧고 이해하기 쉬운 문장이 그의 탁월한 특성이다. 날카로운 비판과 풍자도 들어 있다. 그 내용은 주로 신학에 있어서 결정적인 것, 실제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비타협성에 속하는 것을 다루었다. ▣ 터툴리안은 신학자로서 사도적 전승에서 이어받은 교회론을 변호하고 해석했다. 그는 사도적 전승을 믿는 일에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그대가 구원을 연구함에 있어서 성공하고자 한다면, 사도적 교회로 달려가라. 거기에서 그들의 진정한 서신들을 읽고 그들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얼굴을 직접 보라. 그대가 마케도니아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면 빌립보서를 붙잡으라. 그대가 소아시아에서 올 수 있다면 에베소서를 보라. 그대가 이탈리아 근처에 있다면 이미 우리에게 교직의 권위를 세워준 로마서를 보라.” 그러나 이렇게 확실한 사도적 가르침이 이단자들에 의해서 해체되거나 변조되었다. 특별

Page 332: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히 그는 프락세아스(Praxeas)에게서 삼위일체론이 변조된 것을 보았다. 터툴리안은 프락세아스의 입장에 반대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전승된 신앙’을 정형화시켜 놓았다. 그는 라틴 신학자로서는  ‘삼위일체’(Trinitas)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했다. ▣ 터툴리안은 가장 엄격한 유일신론자였다: 오직 한 분의 하나님, 오직 한 분의 주님만이 존재하실 뿐이다. 그러나 이 한 분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이시다. 터툴리안은  ‘삼위 속’의  ‘일체’를 분명하게 정리했다.  ‘삼위는 속성이 아니라 위계이며, 본질이 아니라 형식이며, 권력이 아니라 특성에 따른 것이다. 한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의 본질(Essence; 어떤 것의 성질을 표현하고 그것이 어느 부류에 속하는지  정의할  때  사용되는  용어로,  한편으로  실존,  다른  한편으로는  우유성<accident>과 대조된다. 현실의 영원한 구조<본질>를 파악하려는 것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모든 사상의 목적이다), 하나의 속성, 하나의 권력이라면, 그로부터 위계, 형태, 특성이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연역된다.’ 터툴리안은 이렇게 규정함으로써  ‘세 위격을 가지신 한 하나님’이라는 라틴계 삼위일체론의 어휘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그리스도론을 위해서도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성과 인성의 하나됨  ‐ 방향을 제시해 주는 설명을 했다.  “한 인격 속에 서로 혼동되지 않고 결속되는 두 가지 본성이 있다.” 그는 영지주의(Gnosticism)자들과 말시온

Page 333: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Marcion)에 반대하여, 실제로 다른 어린이들처럼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시고 실제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 상에서 죽으신 예수의 진정한 인성을 변호했다: “육신은 구원의 닻을 내리는 축점이다.” ▣ 터툴리안의 신학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위한 엄격하고도 분명한 요구들로 귀결되고 있다. 즉 이방 사회와 그들의 삶의 방식과 타협하기를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것(‘우상 숭배에 반대하여’,  ‘연극에 반대하여’,  ‘무도회에 반대하여’ 등등)과 그리스도인의 삶의 스타일에 대한 무제한적 촉구(‘보석에 반대하여’,  ‘재혼에 반대하여’,  ‘박해를 회피함에 반대하여’,  ‘금식, 정결, 회개에 관하여’ 등등)가 바로 그것이다. 철저한 신앙을 받아들일 수 있는 교리는 엄격한 훈련에 의해서 통제되는 생활과 일치해야 한다. 이것은 터툴리안이 한때 몬타누스파에 이끌렸을 당시 받았던 영향이 크다는 것을 암시한다. ▣ 그리스도교는 계급 사회인가? 이것은 터툴리안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의 신앙은 오직 진정하고도 타당한 하나님의 계시였다. 그러나 이것은 전세계에 선포되어야 한다. 교회는 하나의 제정된 제도이다.  “우리는 신앙 안에서의 내적인 결합을 통해서, 질서의 하나됨과 희망의 계약을 통해서 한 몸이 된다.” ▣ 터툴리안은 이단과 싸우는 데 한 생애를 다 바쳤을 정도이다. 그의 최대의 적은 당시 영지주의의 유력한 분파였던 말시온이었다. 당시 영지주의는 영혼과 물질을 서로 대립적 관계로 보면서 물질의 세계

Page 334: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는 악의 원리요, 영혼의 세계는 선한 신에 의해서 운영된다고 보는 이원론적인 세계관을 견지했다. 특별히 말시온파는 구약의 율법에 의한 진노의 하나님과 신약의 사랑의  하나님을  철저하게  구별함으로써  신구약의  연속성을  부정하였는가  하면,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가현설(Docetism; 예수님은 실제로 물질적인 몸과 인간성을 갖지 않았고, 단지 유령, 곧 환영<phantom>만 가졌다고 가르치는 이단들의 교리)을 주장하면서, 기독교를 하나의 철학 체계로 취급하였다. 따라서 터툴리안은  ‘말시온에 대항하여’(Against Marcion),  ‘이단의 규정’(Prescription of Heretics) 등의 저술로  맞서면서  영지주의의  근원이  철학이라고  규정하였다.  계속해서  터툴리안은 (앞서  말했던)  프락세아스의  ‘성부  고난설’(Patripassionism)을  반박하여  ‘삼위일체’(Trinitas)라는 용어를 빈번하게 사용했고, 오리겐(Origen)의  ‘영혼 선재설’을 반대하여  ‘영혼 유전설’(Traducianism)과  ‘영혼 창조설’(Creationism)을 주장하였다.    #테오도레트(Theodoret,  393‐458)  (4.4.11;  4.8.16): 키루스의 테오도레트는 안디옥 

중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23세까지 안디옥에 머물렀는데 그 기간 동안 안디옥  주변의  산에  거주하는  수도사들에게서,  그리고  요한  크리소스톰(Chrisostom, 346‐407),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루스(Theodorus,  350‐428),  타루수스의  디오도르

Page 335: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Diodor) 등의 글이나 설교들에서 기독교적인 가르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수사학자들로부터 세속 학문도 교육받았다. 그는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그의 스승이었던 수도사의 조언을 받아들여 유산을 모두 분배한 다음 니케테(Nicerte)에 있는 수도원에 들어가기 위해 안디옥을 떠났다(416/7년). 니케테 수도원의 생활은 그에게 세상으로부터의 조용한 은둔처를 제공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세속 사상과 종교 사상에 대해 지속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으므로 훗날 그는 애정을 가지고 그곳의 생활을 회상한다. 니케테에서 테오도레트는 유명한 변증서인 ‘이교 폐해들의 치료’(Graecarum Affectiomum Curatio)를 저술했다. 이 작품은 철학과 종교의 의문들에 대한 기독교와 이교의 대답들을 비교하는데 내용 속에서 그의  비범한  수준의  학문의  깊이를  보게  된다.  테오도레트가  아파메아(Apamea)의 주교이며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루스의  형제인  폴리크로니우스(Polychronius)를 만난 곳도 역시 니케테였을 것으로 보인다. 테오도레트는 폴리크로니우스의 삶과 활동을 알려주는 소수의 증인들 중에 한 명이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에게 남겨진 폴리크로니우스의 작품의 파편들에서는 몇 가지 유사한 주석적인 관심과 경향들이 나온다. 수도원에서  7년을 지낸 후에 테오도레트는 키루스 지역  800여개 교구들의 본부인 키루스 교구(diocese)의 주교직에 올라  458년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서 

Page 336: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사역하였다. 테오도레트는 앞에서 언급한 변증서 외에도 시리아 수도사들의 역사, 교회의 역사, 기독론과 섭리에 대한 신학 소책자들, 바울 서신들뿐만 아니라, 욥기, 에스라∙느헤미야, 잠언, 전도서를 제외하고  70인역의 대부분의 책들에 대한 주석을 저술했다. 특별히 그의 주석 작업은 목회 직무와 연관되었는데 그는 자신의 이러한 생각을  449년에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수도사들에게 이렇게 써 보냈다. “나의 임무는 사도 신조들을 위해 싸우고 주님의 양 떼를 이 교훈의 목초로 인도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나는 성경을 해석하며, 사람들의 이원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독생자를 위해, 이교들에게 대항하여, 유대인들에 대항하여 … 이교들의 허위를 드러내는  35권의 책을 썼다 …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 바로 우주의 창조주시라는 사실을 이교도들에게 납득시키고 유대인들에게는 그분에 대해 선지서들에서 예언을 했다는 사실을 납득시키기 위해 애쓰면서 나는 분투를 결코 멈추지 않는다.”  #테오도루스(Theodorus,  350‐428)  (1.11.14): ▣ 요한 크리소스톰의 친구로, 안디

옥과  다소  중간에  위치한  오늘날  아다나  동쪽  미시스에  해당하는  ‘몹수에스티아’(Mopsuestia)의 주교이다. 안디옥의 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크리소스

Page 337: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톰과 함께 궤변가 리바니우스(Libanius)에게서 배우고,  369년경에는 안디옥의 금욕주의적인 장로인 디오도르(Diodor) 밑에 들어가 배웠다. 이때 결혼과 법조계의 직업 선택을 심사숙고하느라 한 동안 수도원을 떠나게 되는 일이 있게 되었고, 이때 크리소스톰은 그를 되돌리기 위하여 이후 유명하게 된 열정적인 편지를 쓰게 된다. 테오도루스는  383년에 플라비안에게서 장로로 임직받았으며,  392년에 몹수에스티아의  주교가  되어,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서  사역하였다.  아폴리나리스주의(Apollinarianism)가 그리스도의 인성의 실재를 왜곡하는 것을 제대로 짚어내고서, 그리스도의 인성의 실재를 수호하는 데 주력하였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하여  ‘단일  위격’(prosonon)을  이루었지만,  그러나  여전히  연합된  두 개의  ‘본성’(nature)의 이원성은 항구적으로 구별된다고 강조했다. 이런 전제 하에 하나님과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본성과 하나의  ‘실체’(hypostasis;  ‘위격’을 의미하는 이 헬라어는 삼위일체 교리 논쟁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몇 가지로 해석이 가능한 점 때문에 헬라어 사용 신학자들에게 혼란이 되었고 라틴어 학자들에게는 더더욱 그러하였다. 결국 이 단어는  ‘개별적인 존재’와 상응하는 라틴어 단어  ‘페르소나’로 결정되게 된다)로 결합하셨다고 주장했다. ▣ 하지만 그의 주장은 정통주의의 입장에 아주 정확하게 다가서지는 못한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Page 338: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완전한 인성과 그의 인간적 경험의 완전한 실재성에 주목했다. 그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실제적으로  인간적인  정욕(Concupiscence;  합리적  지성의  지배와  통제를 받지 아니하는 인간 본성의 낮은 기능의 어떤 욕망이나 탐욕을 가리킨다. 개신교의 입장에서 보편적으로 정욕은 죄를 가리킨다)과 싸우시고, 유혹의 갈등을 겪으셨으며, 그리고 마지막에 승리하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첫째, 그의 무죄한 탄생을 위하여, 둘째, 그의 인성과 신적 로고스와의 연합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죄에서 보호할 능력을 가지셨다. 이러한 생각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로고스의 본질적 내재(the essential  indwelling)를 부정하고, 단순한 도덕적 내재만을 인정한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내재와 신자들 안에서의 하나님의 내재 사이에는 어떤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뿐이라고 보았다. 이 견해는 참으로 성육신(Incarnation; 요한복음  1장  14절의 라틴어 문구에서 유래된 이 용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들어오신 사실을 가리키는데,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인 기독교의 독특한 속죄론과 맞물려 있다)을 인간 예수 안에서 로고스의 도덕적 내재로 대신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런데도 테오도루스는 그리스도 안에 이중 인격이 있어서 두 인격 사이에 도덕적 연합이 존재한다고 하는 그의 견해를 불가피하게 결론짓기를 망서렸다. 이 연합은 매우 밀접하여서, 

Page 339: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마치 부부가 일신으로 불리울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양자는 한 인격으로 부를  수  있다고  했다.  이러한  견해의  논리적  발전은  이후  네스토리우스주의(Nestorianism)에서 나타나는데, 그는 네스토리우스주의자들에게는 영적 아버지가 되었고, 시리아의 네스토리우스파 교회는 지금도 테오도루스를 가장 위대한 성경 주석가로 존경하고 있으며, 시리아어 사본들로 보존된 그의 작품 일부가 금세기에 발견됨에 따라 그의 작품수가 증가했다. ▣ 테오도루스의 핵심 사상은 인류 구속이 인간 그리스도의 완전과 순종에 좌우된다는 것이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한 것은 그분의 의지와 성부 하나님의 의지 사이에  ‘사랑의 유대’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른 한편으로 테오도루스는 수많은 메시야 예언들과 시편들이 그리스도께 대한 예고라는 점을 부인하거나, 아가서를 인간의 연애를 다룬 시에 불과하다고 평가하였다. 칼빈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테오도루스의 성경 해석을 내세워 자신들의 형상숭배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어리석음을 비판하였다.  #테오도시아스(Theodesias Bishop of Amora)  (1.11.16): 철저한 형상 숭배 옹호자

였다. “아모리의 주교 테오도시아스는 형상 예배를 싫어한 사람들에게 파문을 선언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와 동방 나라가 당한 일체의 재난의 원인이 형상 예배

Page 340: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를 거부한 죄 탓이라고 주장하였다. 만일 그렇다면 선지자들과 사도들과 순교자들의 시대에는 형상 예배들이 일체 없었는데, 이들은 대체 왜 형벌을 받았어야 하는가? 더욱이 그들은 만일 사람들이 황제의 상 앞에 분향을 한다고 하면 성자들의 상에는 더욱더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부언한다.” 칼빈은 형상 예배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자들을 논박하기 위하여, 그들의 그릇된 주장을 이렇게 논박했다.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379‐95 재위)  (4.5.17;  4.11.3;  4.12.7): 동방 황제 

발렌스(Valens,  364‐78 재위)가 서고트족과의 전투에서 전사하게 되자, 그의 형인 서방 황제 그라티아누스(Gratianus,  375‐83, 재위)의 추천에 의하여 동방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정치적으로도 로마 제국의 안녕과 질서에 위대한 공헌을 한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신앙적으로도 위대한 업적을 남겼는데 그것은 제국을 그리스도교로 더욱 견고하게 굳혔던 것이다. 황제는  380년에 모든 사람이 사도 베드로가 로마에 준 신앙만을 가져야 한다는 칙령을 내렸다. 따라서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업적들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 마니교(the Manichees)를 대대적으로 탄압한 사건을 들게 된다. 이에 덧붙여 황제는 이교 제사를 금하고 신전 문을 닫도록 하는 법을 공표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로마 제국 안에는 기독교만, 특히 서방의 정통

Page 341: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신앙인 니케아 신조에 입각한 기독교만이 국교가 되고 다른 모든 종파와 이교는 극형을 받아 마땅한 우상으로 취급되었다. 하지만 이런 식의 기독교의 로마국교화는 로마 제국에 대한 기독교의 승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이용한 것이었으니, 이는 수많은 이민족을 흡수한 로마 제국이 국가의 내적 통일을 위해 기독교를 국교화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는 국가와 대립하는 종교가 아니라 로마 제국 안에서 통일을 이룩해야만 했다.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  288‐337) 이래로 황제는 교회의 내정에 간섭했을 뿐만 아니라 교리와 신앙에도 영향을 끼쳐 교회를 지배하기까지 했다. 결국 교회는 자유를 잃었으니, 이것이 황제의 교회 지배, 즉 황제 교황주의의 등장이다. ▣ 한편,  388년 유프라테스 강변 칼니쿰의 회당이 기독교 과격파의 방화로 소실된 사건이 일어났는데, 황제는 그 지역 주교에게 교회의 재원으로 전액 보상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황제는 암브로스(Ambrose,  339‐397)의 강렬한 항의를 받게 된다. 그는 성찬 집례를 거부하면서까지 황제가 명령을 취소할 것을 요구했고, 결국 황제는 항복하고 자신의 명령을 거두었다.  390년에는 데살로니가 주민들에 의해 군사령관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황제는 대노하면서,  3년 전에 안디옥 시민들이 일으킨 반란을 일으켰을 때는 관용하였지만, 더 이상의 재발 방지를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가 

Page 342: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는 명령을 내려 무려  7000여명에 달하는 군중을 원형 극장에 불러모은 후 무차별 학살케 하였다. 비록 황제가 명령을 내린 후, 이내 후회하여 취소하는 명령을 하달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암브로스는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어 공개적인 회개를 요구하게 된다. 황제는 이를 묵살했고, 따라서 암브로스는 그를 파문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이후 성당 문 앞에서 서서 황제의 출입을 막는 암브로스와의 긴 대결 끝에, 결국 테오도시우스는 화려하고 위엄에 찬 의복을 벗고 절대 군주로서의 표지를 내려놓은 후, 일반 신도의 한 사람으로서 하나님 앞에 부복하여 진지하게 회개하기에 이르렀다. ▣  391년에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테오필루스(Theophilus)의 주도로 동방에서 시행된 대대적인 이교 신전 파괴 작업의 배후에는 황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 역사가들의 통상적인 견해이다.  당시  주둔지  장관이었던  키네기우스(Cynegius)는  대대적인  이교  신전 파괴가 진행되는 동안 성난 군중들에 의해 기독교 사제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군대를 파병하여 보호했다. 이런 행위는 황제의 명령이 없이는 불가능하였다. 황제는 이교와 이단들의 집회를 금지시켰고, 직업 현장에서 추방시켰으며, 유언의 권리도 박탈시켰다. 황제는 삼위일체 신앙에 근거하여 세례를 받은 최초의 황제이기도 한데 따라서 동방 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 아리우스파를 근절시키는

Page 343: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데도 힘썼다.  395년  48세의 아까운 나이로 황제는 병환으로 타계하게 되었다. 황제는 임종시에 제국을 양분하여 동로마는 장자 아카디우스(Arcadius,  395‐408 재위), 서로마는 차남 호노리우스(Homorius,  395‐423 재위)가 통치케 하였다. 하지만 이후 5세기에 들어서면서 로마는 빈번히 외세의 침략을 받아 위기에 처하더니, 급기야 456년 서로마는 흉노일파인 게르만, 곧 훈족의 용병 대장 오도아케르(Odoacer)에 의해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Romulus Augustulus,  475‐476 재위) 황제가 폐위되는 수모를 겪으면서 멸망하였다. 즉 동로마는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정한 후, 비잔티움 제국으로  15세기까지 명맥을 유지하게 되지만, 역사 속에서 이탈리아 반도에 자리잡았던 서로마 제국은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사실 이미 앞서  410년에 서로마는 서고트족의 알라릭 왕에 의하여 기습을 받음으로, 지난  800년의 로마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이에 따라 이교도들은 자연신들을 버리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했기 때문에 로마가 멸망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에 대해 로마의 집정관 마르셀리누스<Marcelinus>는 어거스틴에게 문의했고, 이에 따라 그는 무려  13년간에 걸쳐서  ‘하나님의 도성’을 집필하여 이러한 의혹에 답변하게 된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74) (2.2.4; 3.22.9): 토마스 아퀴나스는 

Page 344: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1224년에 네아펠에서 아퀴노(Aquino) 백작 가문에서 출생했다. 그는  1239년에 네아펠 대학에 입학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접하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토마스의 철학적, 신학적 사상의 체계를 세우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했으므로, 그는 평생 동안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을 논평했다. 하지만 그는 어거스틴적이지도  않고  아리스토텔레스적이지도  않은  특유의  토마스주의라고  하는  새로운 철학적 신학을 출현시켰다. 그의 신학의 핵심은  ‘이성으로 옹호될 수 있는 신앙’이라는 주제에 있다. 즉 그는 세속 철학을 기독교 신학의 영역으로 깊숙히 끌여들여 ‘자연신학’(theologia  naturalis)을 만들어냈는데, 자연계를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므로, 자연지식을 가지고 얼마든지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추론할 수 있다는 것이다. ▣ 토마스 아퀴나스는 도미니크회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는  1245년부터 파리 대학과 쾰른 대학에서 공부했다. 이곳에서 그는  1248‐52년에 당시의 걸출한 학자인 알버트 마그누스(Albert Magnus,  1200‐1280)의 제자가 되었는데, 그의 스승은 피터 롬바드(Lombard,  ca.  1100‐1160)의  4권의 조직신학서를 주석했고, 방대한 백과사전도 만들어낸 학자로, 철저하게 신학과 철학을 구분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1254년에 교황청의 주선으로 보나벤투라와 함께 파리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여기서  ‘롬바드 평전’과  ‘논박 질의문’이 나왔으며, 자신의 사상을 포괄적으로 보여주는 대표

Page 345: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적인  2권의 저서 중의 하나인  ‘이교도 반박대전’(Summa  Contra  Gentiles)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1261‐69년 사이에 로마, 파리, 나폴리, 프랑스, 스페인 등지에서 교수로 활동하였다. 이 기간에 그의 또 하나의 대작,  ‘신학대전’(Summa Theologica)을 집필하기 시작했는데, 이 작품은 제3부에서 미완성으로 끝났다.  (따라서 나머지 부분이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마무리되었는데, 주로 스승의 주석 부분을 발췌한 것이었다.) 토마스는 다시 파리에 체류하면서(1272년), 걸식 수사들의 이상을 변호했다. 이와 동시에 브라방의 시거가 주장하는 왜곡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대해서 반박했다. 토마스는 브라방의 시거가 주장하는 창조의 영원성에 관한 교설은 물론이고 모든 인간이 분리된 지성을 갖고 있는 개인이라는 견해, 곧 단신론을 물리쳤다.  그는  1272년부터  이탈리아로  되돌아와서  활동하다가,  1274년  3월  7일  리용(Lyon) 공의회에 가는 도중에  49년의 나이로 생애를 마쳤다. ▣ 토마스의 정신사적 중요성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 있다: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론과 존재론을 신학과 철학은 물론 신앙과 인식에도 적용하여, 그때까지 통용되었던 네오 플라톤적 어거스틴주의보다 더 분명하게 분리시키고 결합시켰다. 따라서 토마스에게 있어서 철학은 그 배타적인 이성 원칙을 갖고 보나벤투라에게서보다 훨씬 더 분명한 지위를 차지한다. 철학의 대상은 세계에 대한 정신적 계발이다. 그러나 토

Page 346: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마스는 여기에서 세계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하나님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하지 않는다. 아퀴나스의 토마스에게 있어서 신학적으로 더욱 발전되고 심화될 수 있는, 방법론적으로 독자적인 철학이 얼마나 중요했는가를 그의 신론이 대변해 주고 있다. 그는 이것을  ‘철학적 신학’과  ‘성경론’에서 정리한다. 이 양자는 그 특수한 원칙 때문에 근본적으로 철학은 자연 이성으로, 신학은 초자연적 계시로 구분된다. 철학적 신학에 이르는 통로는 인간의 인식이 경험 세계에서 출발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기본 명제이다. 따라서 토마스는 천부적 이상에 관한 이론은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본질과 실존으로부터 직접적이고도 분명한 통찰을 얻게 되었다는 보나벤투라의 견해에 반대했다. 토마스는 내면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하나님의 활동으로부터 무제약적이며 절대적인 원인자에게까지 나아가려고 시도했다. 여기에서 그의  ‘다섯 가지 방식’으로 도달하는 자연적 신인식은 신앙의 대상이 아니고, 그것은 준비 단계에 있다고 주장했다. 토마스는 유일한 세계와 첫 번째 존재에 대한 관찰에서 어떤 경우에도 우주론적이나 형이상학적으로 논리를 전개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학적 관심이었다. 토마스는 하나님을 향해 구원을 추구하는 인간에게 주목했다. 그는 이에 대한 증명으로 반영적 경험과 초자연적 경험을 함께 포괄할 수 있는 접합점을 만들었다. 유한한 자연적 인식 능

Page 347: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력은 계시 신앙을 통하여 본질적으로 심화된 신 인식을 통하여 확대된다. 그것은 오류와 불손에 이르는 인간의 위험성을 막아 주고 인간에게 초자연적인 신관에 이르는 최종적인 축복을 준비해 준다. 토마스는 이러한 철학의 지향성을 통하여 신앙을 이성으로 대치시키는 것을 예방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동시에 철학에 의하여 신앙론을 인간의 경험의 지평에 병렬시켜 놓았다. ▣ 토마스는 인간학에 있어서 오직 영혼만이 인간에게 인격을 줄 수 있다는 플라톤적 견해와는 다른 입장을 취했다.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통해서 육체와 영혼의 밀접한 관계를 강조했는데, 이것이 그의 성례전 신학의 특징을 이루었다. 이러한 교리는 모든 육체적 존재가 비독자적인 원칙인 제1질료와 본질적 형태를 통하여 규정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가능성으로서의 제1질료에 대하여 본질적인 형태가 구체적인 원칙이 된다. 이러한 사상을 배경으로 하여 영혼은 육체의 본질적인 형태가 된다. 인간의 죽음에서 영혼이 육체와 분리된다면, 그것은 토마스에게 있어서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그것은 본질과는 전혀 다른 상태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 이미 토마스의 철학적 인간학에서 육체와 영혼이 낙관주의적으로 병렬을 이룬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신학적 인간상도 같은 선상에서 파악되었다. 토마스에게 있어서 초자연적 은총은 자연의 완성이라는 선상에 놓이게 된다. 그는 자연과 은총의 조화라는 확신

Page 348: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러한 확증은 그의 원죄론을 규정하게 되었다. 종합적으로 말하자면, 토마스의 사상은 분리적이며 통합적인 사상이라고 일컬을 수 있겠다. 토마스는  ‘자연’과  ‘은총’이라고 하는 두 가지 현실 영역을 분명하게 승인하지만, 어느 한쪽의 진리를 편애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이 두 영역의 차별적 통일성이었으며, 따라서 서로 특색을 갖춘 신앙과 인식, 신학과 철학의 통일성이었다. ▣ 토마스가 세상을 떠난  3년 후, 파리의 주교 스테판 텡피에르는 토마스와 그의 추종자들을  정죄하기  위하여  219개조를  논박하는 고발문을  만들었다. 옥스포드에서도  30개조에 달하는 정죄문이 출간되었으며, 기타 그를 비판하는 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칼 바르트는 그의 자연신학을 단호하게 거부하면서 그것은 단지 철학적인 구성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현대 개혁주의 교회권에서 토마스의 속죄론은 칼빈주의 신학자 루이스 벌콥(Louis Berkhof)에 의하여 잘 정리되었다. “ … 그의 견해가 열등하다는 것은, 논리적 통일성을 보이지 않을 뿐아니라, 속죄의 필요성을 신성에다 두지 못하고, 단순히 다른 방법을 택할 수도 있었고, 또 심지어는 하나님의 의지는 속상(배상)을 전적으로 폐지하실 수도 있었다고 주장한 점이다. … 그러나 그의 견해들이 우월하다는 점은, 형벌적 속상, 즉 형벌을 통하여 속상한다는 관념에 접근하였다는 것과, 그리스도의 공로를 보다 크게 강조하여, 후에 그

Page 349: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리스도의 능동적 및 수동적 순종을 구별하였다는 것과, 또 그리스도의 공로가 신자들에게 옮겨짐을 설명하기 위하여 신비적 연합의 관점을 소개한 점들이었다.”    #트리스메기스투스(Trismegistus)  (4.16.31): 보다 정확한 이름은  ‘헤르마스 트리

스메기스투스’(Hermes  Trismegistus)인데 이는  ‘삼중으로 가장 위대한 헤르마스’라는 뜻이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가 언급한 바를 보면) 연금술서  42권을 쓴 신으로, 희랍 사람들이 애굽의 문학과 지혜의 신 토트(Thots)에게 붙인 이름이다.  #티베리우스(Tiberius Claudius Nero Caesar, 14‐37 재위)  (4.6.14): 제2대 로마 황

제로 아버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 어머니 리비아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으나  이혼한  어머니가  옥타비아누스(나중의  가이사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재혼하자 어머니를 따라갔다. 여러 차례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고 의부인 황제를 도와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초기에는 아우구스투스의 통치 이념에 충실하여 선정을 베풀었으나 세력이 증대된 친위대장 세이아누스를 중용하여 그에게 통치를 맡기고,  26년 카프리섬으로 은퇴함으로써 세이아누스가 제위 찬탈을 음모하게 되었다. 하지만  31년 세이아누스는 음모가 탄로나 처형되었다. 티베리우스는 만년을 대

Page 350: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부분 카프리섬에서 지냈으며 후반의 공포 정치와 긴축재정 단행 및 친밀성 없는 성격 때문에 민중의 인기를 얻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의 치세에 관한 역사적 자료가 타키투스, 수에토니우스 등 원로원 옹호파인 역사가의 입장에서 기록되어 있어 그의 사상과 성격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티코니우스(Tychonius)  (2.5.8):  어거스틴은,  우리는  율법과  약속  또는  계명과 

은총을 주의 깊게 구별해야 한다는 견해를 주장하면서 티코니우스의  (성경 이해를 위한) 원칙 중에서 한 가지를 실례로 든다. 티코니우스는 도나티스파(the Donatists)였는데, 무천년설을 주장했고, 당시 로마 교회의 세례의 유효성을 인정했다. 이로 말미암아 티코니우스는 자기네 파의 지도자들로부터 정죄되었다. 그는 급진적 도나티스파에 반대해서 아주 설득력있는 글을 썼으면서도 그 파를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지만, 대신  ‘원칙론’이라는 책에서 성경 해석의 일곱 가지 원칙을 제시하였다. 이 원칙을 통해서 마치 열쇠와도 같이 성경의 모호한 점을 밝혀낼 수 있다고 했다. 그가 말한 대로 이 원칙을 주의 깊게 검토하면, 성경의 숨은 뜻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성경 말씀들을 이 원칙들을 통하여 전부 깨닫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다음은 그의 성경 해석의 일곱 가지 원칙을 간단히 나열한 것이다. 

Page 351: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첫째; 주님과 그의 몸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머리와 몸, 즉 그리스도와 교회가 하나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 때 어느 것이 머리이고 어느 것이 몸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상황에 따라 해석해야 한다. 둘째; 주님의 몸의 이분법이다. 이것은 주님의 참 몸과 가짜 몸 등으로 표현했어야 한다. 이는 섞인 교회에 관한 것으로서, 좋은 부분에 섞여 있는 나쁜 부분을 말한다. 셋째; 약속들과 율법에 관한 것이라고 했는데, 영과 문자에 관한 것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은혜와 율법이라고 부를 수 있는 데 이 문제는 중요하다.  (그는 믿음과 행위의 문제를 논하면서 행위는 믿음에 대한 보상으로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며, 믿음 자체는 우리 자신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믿음까지도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그는 몰랐던 것이다.) 넷째; 종과 유에 관한 것이다. 논리학자들은 이 구별을 세세히 하지만, 여기서는 그런 자세한 구분을 할 필요가 없다. 다섯째; 시간에 관한 것이다. 이 원칙에 의하여 성경의 시간을 찾는다는 것이다. 이 원칙은 다음 두 가지 방법으로 적용한다. 즉 제유(synecdoche)라는 어법과 올바른 숫자로 나타내는 것이다. 제유는 부분을 전체로 또는 전체를 부분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올바른 숫자라 함은 성경이 존중하는 숫자를 뜻한다. 예를 들어 일곱, 열, 열둘, 그밖에 성경을 숙독하는 사람이면 곧 알게되는 숫자이다. 즉 

Page 352: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이 숫자들은  ʹ항상ʹ이라는 의미가 있다. 여섯째; 소급반복의 원칙이다. 이것은 성경의 난해한 부분에서 발견된다. 성경 기록이 사건이 발생한 순서를 따른 것 같거나, 사건이 계속된 것 같을 때, 실은 이야기가 무언중에 이전으로 돌아가서, 빠뜨린 것을 순서대로 이야기하는 것을 말한다. 이 점은 중요하다. 이것을 놓쳐버리면 성경을 잘못 해석하게 된다. 일곱째; 마귀와 그 몸에 관한 것이다. 마귀는 악인들의 머리이며, 악인들은 이를테면 그의 몸으로서, 그와 함께 벌을 받게 된다. 이는 첫 번째 원칙에서와 같이 어느 때는 머리로, 어떤 때는 몸으로 해석해야 하는지 분명치가 않다. 이상에서 여러 원칙을 살펴보았지만,  ʹ약속과 율법ʹ에 관한 것을 제외하고는 표현된 것과 다른 해석을 하게 된다. 이는 비유적 어법의 특색이다. 이 어법은 널리 사용되기 때문에, 아무도 그 범위를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것 같다. 언급되는 말과 다른 의미로 해석하려는 것이 비유적 표현인데, 트로포스(비유)라는 말도 수사학에는 없다. 성경에서 표현하는 말은 보통 성경에서 표현되는 형식을 알며, 자세히 관찰하고, 정확히 기억할 뿐만 아니라, 그 표현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 어거스틴은 티코니우스가  390년경에 제출한 성경 이해의  7원칙 중의 셋째 것을 그의 기독교 교육론(De  dictrina  Cbristiana)에서 언급했다. 그런데 도나티스파인 티코니우스가 어거스틴에게 호감을 주었던 것은, 그의  ‘교회 연합 정

Page 353: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신’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교회의 거룩성을 지나치게 주장한 도나티스파는 그리스도의 진정한 몸에 섞여 있는 혼합된 몸을 구분하기 위하여 권징을 엄격하게 시행하였다. 티코니우스 역시 교회를 그리스도의 이중의 몸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교회의 한 부분은 참된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되었지만, 다른 부분은 외양만의 그리스도인들로 구분되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당시 교회가 세상과 교회를 뒤섞는 데 대해 분명한 반대의 입장을 취했지만, 온건한 입장에 서서 교회를 둘로 가르려는 시도에는 반대하였던 것이다. 훗날 개혁파 교회에 의하여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를 구분하게 되는 씨앗이 되는 이러한 사상은, 당시 어거스틴의 교회관에서도 주도적인 영역을 차지하는데, 하지만 어거스틴 역시 교회를 엄격하게 가르려  한  도나티스파의  시도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생각이었으므로,  티코니우스의 태도에 관심을 가질만 했던 것이다.    #파브리키우스(Fabriciuses)  (3.14.3):  “따라서 어거스틴은 훌륭한 행위를 했던 파

브리키우스나 스키피오나 카토와 그리고 유사한 사람들도 행위로써 죄를 지었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신음의 광명이 없었고, 그들의 행위는 마땅히 추구해야 할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참으로 진정한 의

Page 354: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는 그들에게 없었다. 그것은 의무 수행은 행동보다는 의도에 의해서 그것의 가치가 판단되기 때문이다.”  #파우스투스(Faustus)  (1.7.3): 어거스틴이 다음과 같이 책망한 대상의 마니교도

이다.  “그렇게 기초가 튼튼하고, 그렇게 견고하게 세워졌으며, 그렇게 영광스럽게 찬송을 받으며, 사도 시대로부터 오늘날까지 확실히 계승되어 온 복음의 진리를 그(파우스투스)는 순종하지 않는다.”  #파프누티우스(Paphnutius)  (4.12.26):  4세기 초 윗 테베(Upper  Thebaid)에 있는 

한 자그마한 도시의 주교였다. 그는 디오클레티안(Diocletian,  284‐305 재위) 황제 치하에서 한 쪽 눈을 잃었고, 막시미누스(Maximinus,  305‐9 재위) 황제 치하에서 신앙 때문에 왼쪽 무릎이 절단되는 고통을 당하였으며, 직후에 광산으로 추방되었다. 하지만 새 황제인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  288‐337 재위)에게 선택되어 황제와 교회 사이의 우정의 표시로서 황제로부터 눈이 없는 쪽 뺨에 입맞춤을 받는 특별한 영예를 얻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종종 이 선하고 연로한 신앙고백자를 위해 사람을 보내어 그의 눈이 뽑힌 장소에 입맞추게 했다고 한다. ▣ 파프누티우

Page 355: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스는 니케아 공의회(325)에서 금욕주의 문제와 관련하여 뛰어난 역할을 하였다. 비록 자신은 금욕 생활을 하는 유명한 주교였으나, 다른 주교들에게 일괄적으로 독신 생활을 요구하는 제안에는 반대했다. 그의 주장은, 결혼은 존귀한 것이며 합법적 동거는 정절을 지키는 것이므로, 제안된 독신 규칙은 해롭다는 것이었다. 그는 성직자의 독신 생활에 관해 열린 최초의 전체 기독교 공의회에서 탁월하면서도 확고한 입장으로 논쟁에 참여했다. 소조멘(Sozomen)에 의하면, 그 회의에 참석한 대부분의 주교들은 성직 임명 전에 결혼한 주교, 사제, 부제, 보부제들에게 부부 관계를 금지하는 엘비라 공의회(the  Council  of  Elvira)의 선례를 따르고 싶어했다고 한다. ▣ 파프누티우스는 성직계층에 이와 같은 의무(구속)를 부과하지 않기 위해 동료 주교들을 열심히 설득했다. 그는 교회의 고대 전통에 따라 성직 임명 때 독신이었던 사람들만 계속해서 금욕생활을 준수하도록 하고, 성직 임명 전에 혼인한 아내와는 별거시키지 않을 것을 제안했다. 그가 받은 깊은 존경과 그 자신이 평생동안 가장 엄격하게 순결을 지켰다는 잘 알려진 사실이 그의 제안에 무게를 더해서 마침내 이 제안은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공의회는 혼인관계를 지속할지 아니면 중단할지의 여부를 결혼한 성직자들의 자유 재량에 맡겼다. 파프누티우스는 두로 종교 회의(the Synod of Tyre, 335)에도 참석했다.     

Page 356: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페트로스(Peter)  (4.4.11):  “그러므로 어떤 주교는 후계자를 지명할 때에는 교인

들이 확인해야만 그 지명이 효력이 있었다. 이런 예와 그 형식을 우리는 어거스틴이 에라클리우스를 지명한 때에 볼 수 있다. 테오도레트는 아타나시우스가 후계자로 지명한 페트로스에 관하여 언급할 때 장로들이 그 지명을 인정했고 관리들과 지도적 시민들과 모든 교인들이 만장의 환호로 승인했다고 부언했다.”  #페핀  3세(Pepin Ⅲ, 747‐68 재위) (4.7.17): 샤를마뉴 대제의 아버지이다.    #펠라기우스(Pelagius,  354‐420)  (2.1.5): ▣ 펠라기우스는 영국 또는 에이레에서 

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4세기 말에 로마에 출현하였다. 펠라기우스는 로마에서 수도원에 소속하지 않은 채 수도승의 생활을 영위하게 된다.  410년에 고트족이 로마로 진격하게 됨으로, 알라리히 군대에 쫓겨서 북아프리카로 물러가게 된 펠라기우스는  411년에 칼타고에 나타났고, 평소에 만나보고 싶어했던 어거스틴을 만나려고 했으나, 그가 도나티스파 문제 때문에 다른 곳으로 가버려 히포(Hippo)에는 없었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대신  제자  켈레스티우스(Celestius)를  남겨놓은 

Page 357: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채 그곳을 떠났다. 켈레스티우스는 남아서 펠라기우스의 가르침을 전하다가,  412년에 열린 칼타고 교회 회의에 의해 공식적인 책망을 받게 되자, 에베소로 물러가버렸다. 그러나 이들의 외곽에서의 가르침은 계속되었고, 여전히 아프리카 지역 교회들은 이런 저런 일로 이 문제와 씨름하게 되었으니, 마침내 교회들은 펠라기우스 사상을 격렬히 비판하는 증거들을 모아서 당시 로마 교회의  40대 주교인 이노센트 1세(Innocentius  401‐17 재위)에게 보내기에 이른다. 문서들을 살펴본 후 인노센트 1세는 펠라기우스와 그의 제자 켈레스티우스가 그들의 주장을 철회해야 한다고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석달 뒤 이노센트  1세의 뒤를 이어 로마 교회의  41대 주교로 조지무스(Zosimus,  417‐18 재위)가 등장했을 때, 그는 자신을 직접 찾아온 켈레스티우스의 변호에 설득 당한 후, 선임자의 결정을 뒤집는 일이 발생하게 되었다. 하지만 북아프리카 주교들의 반복되는 항의, 그리고 황제 호노리우스(Honorius,  395‐423 재위)까지 나서서 가한 압력에 굴복하여, 결국 조지무스는  418년  4월  30일에 펠라기우스에 대하여 로마로부터의 추방령을 내리게 되었다. 당시 아프리카 주교단들은 어거스틴의 가르침에 크게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후로 펠라기우스의 운명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  418년 칼타고 공의회는 다음과 같은 펠라기우스의 가르침들을 파문하였다: 형벌받을 만한 것이 아니라 정상적이라는 아담의 

Page 358: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도덕성; 유아 세례에 대한 부인과 아담으로 말미암아 거듭남을 위하여 세례의 씻음이 요구되는 원죄에 대한 부인; 칭의의 은혜를 과거의 죄들의 용서에만 국한하고, 미래의 죄들을 범함에 대한 그 은혜의 도움까지 배제하는 것, 즉 죄를 짓지 않도록 은혜가 주는 도움을 지각을 깨우치는 것에만 제한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즐거워하여 순종할 수 있도록 하는 사랑을 불어넣는 것을 제외하는 것, 그러니까 은혜는 단지 그것이 없다면 훨씬 큰 어려움이 있겠지만 은혜 없이도 여전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좀더 쉽게 할 수 있도록 하는 것뿐이라는 주장; 사람이 사실은 죄가 없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하여 요한복음  1:8‐9의 분명한 말씀과 주기도에서 함축하고 있는 것  –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 을 부인하는 것 등등이다. ▣ 431년에 열린 에베소 공의회에서도 펠라기우스와 그의 제자 켈레스티우스, 그리고 켈레스티우스의  주장에  동조한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  네스토리우스(Nestorius, 428‐431 재위)는 정죄되었다. 펠라기우스의 사상은 당연히 어거스틴의 강력한 반대를  받았다.  심지어  어거스틴주의(Augustinianism)는  단순히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에 대한 반동이며, 그렇기 때문에 대체로 그 반대 사상에 의하여 결정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일어날 정도로, 펠라기우스에 대한 어거스틴의 관심은 상당한 분량을 차지한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알기 전에 각각 독립적인 

Page 359: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사상을 가졌다. 두 사람이 필사적인 논쟁을 벌이게 됨으로써, 어거스틴주의의 정식 진술은, 그 내용의 일부가 펠라기우스주의에 의해서 결정이 되었고, 마찬가지로 펠라기우스주의의 진술도 어거스틴주의에 의해 결정된 것을 보게 된다. 이후 로마 카톨릭  교회는  반어거스틴주의(Semi‐Augustinianism)와  반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 두 사상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엄격히 말하여 비록 최종적으로 오랑주 회의(the Council of Orange, 529년)에서 반펠라기우스주의가 정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으로 후자는 더 세력을 얻게 된다. ▣ 어거스틴의 죄론과 은혜론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지만, 서방 교회에서는 인간론으로 채택되었다. 어거스틴처럼  타락자의  간과와  유기를  주장하기는  하였지만  그렇게  강력하지는 못했으나, 레오와 그레고리, 베데와 알쿠인과 같은 유력한 인물들이 이 사상을 지지하였다. 그들은 인간 의지의 예속화와 인간을 갱신하는데 있어서의 하나님의 은혜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힘주어 강조하였다. 어거스틴 이후  2,  3세기 동안 교회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들은, 어거스틴 인간론의 가장 실제적인 부분을 잘 지켰다고 할 수 있다. 오랑주 회의는 이러한 온건한 어거스틴주의를 교회의 교리로서 채택하였던 것이다. 구원은 은혜에 의해서만 받는 것이라는 어거스틴의 구원 교리는 승리를 했으나, 불가항력적 은혜의 예정 교리는 세례의 성례적 은혜의 교리로 대

Page 360: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치되었다. 악도 예정되었다고 하는 이중예정의 교리는  529년에 폐기되었다. 로마 교회의 일반적인 경향은 점진적으로 오래 전 동방에서 확고한 발판을 갖고 있던 반펠라기우스주의 방향으로 기울어져 갔다. 시간이 감에 따라 라틴 교회는 헬라 교회의 인간론을 채택하였으며 그 후 영구히 이것을 신봉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포카스(Phocas, 602‐10 재위) (4.7.17): 동로마 황제 마우리키우스(Mauricius, 582‐

602 재위)의 뒤를 이은 황제이다.  #풀케리아(Pulcheria)  (4.7.2): 황제 마르키아누스(Marcianus,  450‐57 재위)의 아내

이다.  #프락세아스(Praxeas)  (1.13.28): 프락세아스는 소아시아 교회 지도자로  195년경 

하드리안  (Hadrianus,  117‐38 재위) 황제 때 로마를 방문하여 그곳의 주교들에게 몬타누스주의(Montanism)를 경계시킴으로 유명하게 되었다. 그는 로마의 히폴리투스(Hippolytus,  170‐235)와  논쟁했는가  하면,  칼타고의  터툴리안(Tertullian,  ca. 155‐220)과도 대결하였다. 특별히 터툴리안의 삼위일체론을 비판하여, 하나님의 위

Page 361: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격 구별을 반대하면서  ‘일체의 삼현’을 주장하였다. 그는 이렇게 해서 양태론적인 단일신론(Modalistic Monarchianism: 단일신론의 제2 형식으로, 비잔티움의 테오도투스<Theodotus of Byzantium>가 최초의 대표자였던  ‘역동적 단일신론’<Daynamic Monarchianism>보다도 더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 견해도 역시 하나님의 단일성을 주장하는 데 관심이 있었으나, 그 기본적인 관심점은 기독론, 즉 그리스도의 충분한 신성을 주장하는 데 있었던 것 같다. 이것이  ‘양식적 단일신론’ 혹은  ‘양태론적 단일신론’이라고 불리어진 이유는 하나님의 삼위를 하나님의 현현의 세 가지 양식으로 생각한 때문이다)의 주창자가 되었다. 프락세아스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구분은 단지 형식적이고 이름뿐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을 때 성부가 고난을 받으셨다고 하는  ‘성부수난설’(Patripassianism)을 주장하였다. 그는 “나는 여호와라 나밖에는 다른 이가 없나니 나밖에는 신이 없느니라”(사  45:5),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라고 한 구절들이 마치 성경 전체를 구성하는 양 항상 이 세 절에 근거하여, 성부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친히 인간이 되시어 고통을 겪으셨고 마침내 죽기까지 하였다고 주장했다. ▣ 그는 그리스도와 성부 사이의 차이점을 완전히 부인하고 성부라는 말을 인간 예수라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Page 362: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그는 말씀이 독립된 존재를 갖고 있지 않으므로 성부와 성자는 동일 위격이라고 이해했다. 동정녀의 태에 들어간 이는 성부이고, 성부는 예수의 인성과 연합하여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셨다가 다시 사심으로 자신의 아들이 되셨다. 이는 성자가 아직 출생하지 않았을 때에는 성부로 불렸으나, 일단 출생하게 되자 성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성자는 성부 자신이지 다른 이가 아니다. 이렇게 양태론적 단일신론은 하나님의 삼위를 현현의 삼위로 생각한다. 이와 같은  ‘성부 수난설’에 의한  ‘양태론적 단일신론’은 그리스도의 참 신성을 주장한 점에서는, 이전에 비잔티움의 테오도투스와 사모사타의 바울(Paul  of  Samosata)에 의해서 개진된  ‘역동적 단일신론’과는 차이가 있다. ▣ 프락세아스의 주장들은 그의 입장에 반대하기 위하여 터툴리안이 진행한 일련의 논쟁 문서들을 통해서 널리 알려졌다. 터툴리안은 ‘프락세아스에 대항하여’(Adversus  Praxean)라는 저서를 발표하여 그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터툴리안에 의하면, 하나님은 하나의 본체이시지만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 여기서 각 위격간의 차이는 본질적인 차이가 아니라, 활동상의 차이 혹은 경륜적인(economical) 차이를 의미한다. 이러한 삼위의 하나됨을 터툴리안은  ‘삼위일체’(Trinitas)라는 용어로 표현하였다. 또한 그는 이러한 삼위의 관계를  ‘태양, 빛, 열’ 혹은  ‘뿌리, 줄기, 열매’,  ‘샘, 시내, 강’ 등의 유비로 설명하였다. 그것은 마치 뿌

Page 363: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리에서 줄기가 자라고 그 줄기에서 열매를 맺지만, 뿌리와 줄기 그리고 열매가 동일한 하나의 식물을 이루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아울러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에 대하여,  터툴리안은  그리스도가  신성과  인성이라는  ‘두  성을  가진  한  인격’(one person with  two  natures)이시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프락세아스의 견해를 반박한 것일 뿐만 아니라 가현설 주장자들을 행해서도 치명타를 날린다.    #프란@치스(Francis of Assisi, 1181‐1226)  (4.13.14): 이탈리아 아시시 출신으로 본

명이 지오반니(Giovanni)이지만, 고향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시인들의 노래를 좋아한 그를  ‘작은 프랑스인’이라는 뜻의  ‘프란@치스’로 불렀다. 부유한 섬유 무역상의 아들로 태어나 기사가 될 꿈을 가지고  1202년 아시시와 페루자의 전쟁과  1205년 반프레드릭 전쟁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1208년을 전후로 신의 계시와 기도를 통해 신의 뜻을 깨달아 청빈한 생활을 하기로 서약하게 된다.  1209년 청빈, 겸손, 이웃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생활에 동참한  11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로마 교회의  176대 교황인 이노센트  3 세(Inonocentiue  III,  1198‐216 재위)를 만나러 갔다. 교황은 누추한 거지 모습과 고약한 냄새에 질려 이를 거절하려고 하였으나, 꿈 속에서 하나님의 꾸중을 듣게 되어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교황에게 자신들이 만든 수도회

Page 364: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칙인  ‘삶의 방식’의 인가를 청원했는데, 일단 구두 허락을 받게 되자, 일행은 다미아노 성당에서  ‘작은 형제들’(Friars Minor)을 설립하게 되고, 이때부터 사람들에 의해  ‘형제단’(Order  of  Rriars)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 프란@치스는  1212년에는 아시시 귀족의 딸 클라라(Clara)가 자신의 가르침에 감동하여  ‘가난한 클라라 무리’(The  Poor Claras)라는 수녀회를 조직할 때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는 선교를 위해 여러 차례 여행을 떠났으며,  1219년 제5차 십자군 전쟁 때에는 이집트의 다미에타 사라센진지로 들어가 술탄을 설득하여, 팔레스타인 방문을 허락받았다. @프란치스코회의 세력이 커지게 되자, 177대 교황 호노리우스  3세(Honorius  III, 1226‐27 재위)는 수도회칙의 개정을 요구하였고, 조건을 갖추게 되어  1223년에 정식으로 인가를 얻게 되었다.  1224년 아르베니아산에서 그리스도의 성흔을 받았다는 사건은 유명하며, 1226년  10월에 자신이 젊었던 시절에 재건했던 성당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생을 마감했다.  “나는 책임을 다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너희들의 의무를 가르쳐 주실 차례이다. 나의 자매인 죽음이, 어서 오라.” 임종시에도  “빨리 모든 옷을 벗겨달라”고 외치면서 온전히 벌거벗은 가난한 모습으로 그리스도 앞에 서려고 했다. ▣  @프란치스코는 당시 중세기 수도원들의 타락이 재산 확보에 혈안이 된 데 있다고 보고 생애 내내 절대적 가난을 강조하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 사정을 잘 

Page 365: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모르는 한 수도사가 금화 한 닢을 얻어왔을 때, 그것을 입으로 문 채로 배설물 속에 파 묻으라고 명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금은 보화가 있을 곳은 배설물이 최상의  장소라는  뜻이었다.  @프란치스코는  1228년에  178대  교황인  그레고리  9세(Grrgorius  Ⅳ,  1227‐41  재위)에  의해  시성되었는데,  시에나의  성녀  캐서린(Catherine of Siena, 1347‐1380)과 함께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이며  ‘또 하나의 그리스도’로 평가 받으면서 많은 로마 교회 신자들의 사랑을 받는다. 그의 작품으로는 모든 자연을  ‘형제 자매’라고 부른 시  ‘태양의 찬가’를 비롯하여, 오늘날 잘 알려져 있는  ‘평화를 위한 기도’가 있다.    #플라비안(Flavian,  446‐49 재위)  (4.7.1): 콘스탄티노플 주교인데 일명  ‘강도 회

의’(illud Latrocinium)에서 폭행을 당해 죽음에까지 이르렀다. 당시  431년에 열렸던 에베소 회의는 회의가 끝난 후에도 계속하여 문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그것은 네스토리우스(Nestorius,  428‐31 재위)를 이단이라고 배척한 키릴(Cyril, 380‐444)파 중에서도 다른 의견이 나오게 되었기 때문인데, 콘스탄티노플 근교의 수도원 원장인 유티케스(Eutyches, ca. 378‐454)가  ‘신인 양성의 연합’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양성의 구별을 어렵게 만든 것에도 원인이 있었다. 즉, 유티케스에 의하면 

Page 366: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성육신  때  그리스도의  양성(신성,  인성)은  하나의  신인단성(Monophysitism)으로 연합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이같은 단성론은 쉽게 함정에 빠지게 되었다. 즉, 무소부재한 것이 신의 속성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을 가졌기 때문에 무소부재할 수가 없다. 따라서 예수의 인성은 우리와 다른 신체를 가졌어야만 된다는 것이다. 이같은 유티케스의 주장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우리 인성과 다르다는 결론을 내리게 했다. 이 주장 때문에 문제가 일어나자 유티케스는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Theodosius  II,  408‐50 재위)를 충동하여  449년에 에베소에서 대회를 열고, 반대파들과 심한 몸싸움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 당시 콘스탄티노플 주교이던 플라비안이 맞아 죽게 되고, 반대파들을 유배시키게 된다.  (그런데 플라비안이 당시 바로 죽은 것이 아니고, 이때 당한 폭력 때문에 이후 유배지에서 죽었다는 설도 있다.) 당시 로마 주교 레오  1세(Leo  I,  440‐461년 재위)는 이 회의를  ‘강도 회의’라고 혹평했으며, 사태 수습에 나서게 된다. 마침내 레오의 설득을 받아들여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후임자인 마르키아누스(Marcianus,  450‐57 재위)는 명을 내려, 전임 황제가 추방한  성직자들을  다시  불러들였고,  630명의  주교들이  참석한  가운데  ‘칼케돈  회의’(the Council of Chalcedony, 451년)가 열리게 되었다.  

Page 367: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플라우투스(Titus M. Plautus, B.C. 254?‐184?)  (1.17.3): 고대 로마 희극가로 움브리아 사르시나 출생이다. 테렌티우스와 함께 고대 로마 최대 희극작가로 손꼽힌다. 생애에 대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나, 겔리우스의  ‘다락방의 밤’에는 로마에서 극장관계 일을 하였으며 무역에 투자해 실패하고 다시 로마로 돌아와 방앗간에서 일한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의 작품으로 알려진 것은  130편이 넘으나,  21편이 진작으로 인정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져온다. 기교를 살린 다양한 줄거리와 재치를 살린 대화, 사람을 웃게 만드는 희극성과 성실, 풍자 등이 뛰어나며 대표작으로  ‘암피트루오’,  ‘포로’,  ‘허풍선이 병사’ 등이 있다. 특히  ‘메나에크무스 형제’는 셰익스피어의  ‘헛소동’의 원본으로,  ‘황금의 항아리’는 몰리에르  ‘수전노’의 원본으로 쓰이는 등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플라톤(Platon, B.C.  427‐347) ▣ 플라톤은 기원 전  427년, 아티카 최후의 왕 코

도로스(Kodoros)의 후예인 아버지 아리스톤(Ariston)과 명문 출신의 어머니 페리키네(Perikine)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가 귀족의 혈통을 이어 받았다는 사실은 당시의 풍속에 따르면 자연스럽게 정치에 관심을 가지도록 해주었을 것이다. 플라톤은 안락한 생활 환경에서 자라 활달한 청년이 되었다. 군인으로서도 훌륭했고, 체격도 

Page 368: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건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아테네의 정치 현실은 희랍문화를 융성케 한 민주적인 정치가 페리클리세(Pericles)의 사후, 펠로포네스 전쟁(B.C.  431‐404)에서 패전한, 퇴락해 가는 비운의 시대였다. 플라톤은 혼돈에 빠진 정치 현실에 당황하여, 행정면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적인 개선책이 무엇일까 끊임없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플라톤은 정치에의 관심뿐만 아니라 여러 방면에 다양한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가령 레슬링 경기에서의 승리라든가, 현재 남아 있는 작품은 없으나 여러 편의 극시를 쓰기도 했다.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드러나는 풍부한 상상력과 문화적인 비유 등을 보면 이를 짐작할 수 있다. ▣  20세 되던 해에 플라톤은 스승 소크라테스(Socrates, B.C. 469‐399)를 만났다. 이후  8년간 일생 중 가장 감수성이 예민한 시절을 그의 지도 아래 스승의 사상을 익혔다. 소크라테스와의 만남이 플라톤의 삶에 차지한 비중은 그가 신에게 드린 다음과 같은 감사에서 잘 나타난다. “나는 신에게 네 가지를 감사드린다. 첫째, 야만인이 아니고 희랍인으로 태어났다는 것, 둘째는, 노예가 아니고 자유인으로 태어났다는 것, 셋째는, 여자가 아니고 남자로 태어났다는 것, 끝으로, 특히 감사하는 것은 소크라테스와 같은 시대에 태어났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 청년 시절에 플라톤이 가졌던 아테네의 중흥을 위한 정치 참여에의 욕구는, 현실에서의 정치 동료들과의 불화, 그리고 기원전  399년 

Page 369: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당대의 가장 정직한 사람이라고 부르기에 조금도 주저할 필요가 없는 분’이라고 생각하던 스승 소크라테스에게 독배를 들게 한 사건은 그로 하여금 더욱 환멸을 느껴 정치 참여를 단념하게 만들었다. 젊은 이상주의자였던 그에게 정치란 그의 꿈과는 너무도 다르다는 사실을 절감케 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죽던 때에 그의 나이는  28세였다. 스승의 비극적 최후는 그의 총명@한 제자였던 플라톤의 생애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  기원전  399년  플라톤은  아테네를  떠나  메가라(Megala), 이집트, 북아프리카, 남이탈리아 등지를  12년간 여행하였다. 메가라에서는 유클리데스(Euclides: 메가라 학파의 창시자)를 만나서 그의 권고에 따라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엘레아 학파의 창시자)를 연구한 일도 있었다. 이집트에서는 사제 계급이 정치를 성공적으로 펼쳐나가는 것을 보았으며, 이탈리아에서는 피타고라스학파로부터 수학을 배우기도 했다. 시실리 섬에 있는 시라쿠사이(Syracusai)로 건너가서는 디오니시우스(Dionysius)  1세를 만나 자신의 좌절된 정치 이상을 실현시켜 보고자 했으나, 간계에 능한 전제 군주와는 도저히 마음을 같이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왕비의 동생인 청년 디온(Dion)을 만나 깊은 영향을 주게 되었고 후에 디온이 플라톤을 다시 부르게 되는 계기가 된다. ▣ 플라톤은 다시 아테네로 돌아와 기원전  385년 아테네 서쪽 교외 아카데모스 숲속에 아카데메이아

Page 370: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Akaemeia)를 창설하였다. 지혜를 사랑하고 진리와 정의를 구현할 청년들의 교육을 통해 미래 지도 계급의 육성을 도모했던 오늘날의 고등 교육 기관의 기능에 흡사한 학원이었다. 플라톤의 강의를 들으러 희랍 전국에서 많은 청년들이 모여들었고 @그 중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  B.C.  384‐322)는 그의 수제자가 되었다. 이 학원은  529년 로마 황제 유스티아누스  1세(Justinisnus  I,  527‐65 재위)가 폐쇄령을 내리기까지  900년간 학문 연구의 전당으로 존속되어져 나왔다. ▣ 플라톤은 만년  20년 동안 두 번이나 아카데메이아를 떠나 다시 시라쿠사이로 갔다. 디오니시우스  1세 사후 그의 아들 디오니시우스  2세가 즉위하자 그의 숙부이며 플라톤의 제자였던 디온의 부탁으로 젊은 군주를 교육하고, 자신의 정치 이상을 다시 한번 실현해 보려고 갔던 것이다. 그러나 디오니시우스  2세에게서 철인왕(哲人王)이 될 소질이 보이지 않자 두 번에 걸친 방문에서도 역시 실망하고 아테네로 돌아왔다. 아카데메이아로 돌아온 플라톤은 제자들을 가르치고 저술에 집념하는 등의 행복한 만년을 보내다가 기원전  347년  80세로 일생을 마쳤다. ▣ 이렇게 인간의 사상사에서 가장 중요한 면의 하나인 플라톤주의(Platonism)는 스승 소크라테스의 보편적 진리와 도덕을 이어 받은 아테네의 귀족 플라톤에게서 비롯되었고, 특히 신플라톤주의로 알려진 그의 마지막 창조적 발전은 기독교 신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플라

Page 371: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톤의 작품은 도덕의 기저에 비판적 철학적인 주의를 기울인 최초의 그리스 사상가이며 그와 동일한 아테네 시민이었던 소크라테스의 감명적인 삶과 죽음에 의거하고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당시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불사하고 자신의 신념을 고수하였기 때문에 초기 기독교에서 가장 주목받는 이교의 영웅이 되었다.) ▣ 그는 대략  25권의 책을 썼는데, 거의 모두가 대화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종종 소크라테스가  주도하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Aplogia  Socrates),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국가론’(Republic),  ‘법률론’(Nomoi),  ‘향연’(Symposium),  ‘파이돈’(Phaidon),  ‘크리톤’(Kriton),  ‘정치학’(Poltioca),  ‘소피스트’(Sophistes),  ‘티마이오스’(Timaios),  ‘고르기아스’(Gorgias),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제7 서간’ 등은 그의 대표작들이다. 그 중에  ‘대화편’의 경우, 거의 전 @부분에서 소크라테스가 주요 화자로 나타나기 때문에 어디까지가 소크라테스의 사상이고 어느 대목이 플라톤의 생각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점이 있으나, 실상은 소크라테스를 등장시킨 제자의 관점이라는 점에 거의 합의하고 있다. ▣ 플라톤에 의하면 올바른 깨달음은 변증법(Dialectic; 이성에 의한 논리적 사고방식을 의미하며, 플라톤이 그의  ‘대화’에서 극적인 방법으로 사용했는데, 이후 논리적인 형태로 발전했다. 현대 철학은 이 용어를 정, 반, 합의 발전이 이성의 본질이라고 주장한 헤겔<1770‐1831>의 철학적 논

Page 372: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리학과 연결시킨다)적 논증에 의해 추구되었다. 플라톤은 강조하기를, 감각 경험은 확고한 지식이 아닌 오류에 빠지기 쉬운 의견만 내놓을 뿐인데, 그 이유는 관찰된 세계는 끊임없이 움직여 감각을 쉽게 기만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일시적인 현상 이면에는 변함없는 원형적인  ‘형상들’, 불완전한 모사인 모든 개체들의  ‘원형들’이 있다. 따라서 모든 개개의 인간들을 초월하여 그리고 그 인간들과 별도로 인간의 ‘형상’, 그들의 완전하고 영원한 모델이 존재하는데, 현재의 그들은 그 모델을 공유하고 있다. 인공물(예를 들어, 탁자들과 탁자의  ‘형상’)과 미와 지혜와 같은 추상적인 실체(Substance;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떤 물건의 지속적인 형태를 정의할 때 주로 사용했는데, 우유성<accident>과 대조했을 때 어떤 것의 영구적이고 균일하며 원인이 되는 실재<reality>를 의미한다)에 똑같이 적용되고 있다.  ‘형상들’의 지식은 도덕의 기본이며 실제의 삶이다. ▣ 최고의  ‘형상’은 선의 형상인데, 이것은 기독교 사상에서 쉽게 하나님과 일치가 되었다. 그러나 플라톤은  ‘선의 형상’과  ‘신의 형상’을 구분하고 있다. 보통은 형상들이 신으로부터 독립하여 있지만, 그의 작품  ‘티메우스’(Timaeus)에서 형상들은 신의 생각들로 나타난다. 이 작품은 기독교 사상에 영향을 미쳤는데, 그 이유는 이 작품이 우주론의 개요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우주와 인간은 장인 혹은 창조자인 데미우르고스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그는 

Page 373: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무질서한  물질에  형상들의  모형을  찍는  신이  분명하다.  훗날  이  사상을  말시온(Marcion,  2세기)이  채택하여  자신의  종교를  만들었다.  또  다른  작품인  ‘로우’(Laws)는 모든 운동의 원천으로  ‘완벽하게 선한 영혼’의 필요성에 바탕을 두고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우주론적 논증을 최초로 설명하고 있다. 즉, 이 논증은 훗날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74)에 의하여 제기된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는 다섯 가지 논증 중의 하나로 정착한다. 물론 이것은 플라톤의 특별한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당시에도 하나님이 세상의 제1원인이자 최종 목적이라고 가르쳐지기도 했다. ▣ 플라톤은 영혼 불멸을 믿었는데, 이것은 형상들의 영역에 속해 있다. 영혼은 그들의 감옥인 몸(body; 몸은 인간 전체를 총칭해 부르는 헬라적 개념이지만, 히브리 사상에서는 각 부분이 전체를 대표할 수 없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몸은 인간의 육체, 타인과 자신을 구별하는 독립된 개@체를 의미한다)에 종속되어 있고, 최종적으로 죽음에 의해 해방되어 영계의 하늘에서 심판을 받은 뒤에 완성될 때까지 윤회될 수밖에 없다. 물질과 정신, 육신과 영혼, 현상계와 이데아가 대립하는  ‘이원론’(Dualism; 선과 악을 최고의 대립 원리라고 주장한 토마스 히데의 이론을 따라, 고대 신화에서는 빛과 어둠, 하늘과 땅의 이원성을, 플라톤 철학에서는 정신과 물질을 우주의 두 가지 근본 원리로 본다)에

Page 374: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서 플라톤 철학의 중심을 보게 된다. 이와 같은 이원론은 기독교의 태도에 깊이 감염되었는데, 몸과 물질 세계를 멸시하고 오직 이성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영혼과 참된 실재의 세계를 선호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상은 육체와 영혼을 한 인격 안에서 해석하는 히브리 사상과 대치된다. ▣  ‘국가론’에서 플라톤은 철학자가 군주여야 하는 이상적인 국가관을 제시하였다. 그는 너무 크지도 않고 너무 부유하거나 가난하지도 않은 국가를 이상적인 국가로 제시한다. 이 국가를 구성하는 대중은 생활 필수품을 조달하는 노동자층, 국가 방위를 담당한 군인@계층 및 국민의 선을 위해 통치하는 철학자 층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그는 자유보다는 조화와 효율을 강조한다. ▣ 기원 후  2세기 초의 중기  @플라톤주의는 저스틴 마티어(Justin Martyr)와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와 같은 초기 기독교 저술가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면서 절충주의로 발전한다.  플라톤의  ‘형상들’은  이제  신적인 마음에서 명백한 생각들이었으며, 악의 원인에 관한 사색들은 다른 방식들로 악의 원인을 물질 자체와 관련시킨다. 그러한 경향들은 정통 기독교뿐만 아니라 영지주의(Gnosticism;  1세기 그리스▣로마에 널리 보급되었던 아주 다양한 종교 사상과 예식에 대해 종교역사학자들이 사용한 영어로, 초기 정통 기독교인들은 이들의 창조에 대한 비관적인 부정과 육신 생활의 경시 및 예수님의 참다운 인성에 대한 부

Page 375: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정을 확실하게 반대했다)로도 흘러 들어갔다. 절충적 플라톤주의는 초기 기독교 신학의 전반적인 색조가 되었는데, 유대인 필로가 절충주의 방식을 주도하고 있었던 알렉산드리아의 기독교 플라톤주의자들에게서 그러한 색조가 가장 두드러졌다. ▣ 그 전통의 마지막 단계는 신플라톤주의였는데(3‐6세기), 이 주의는 누메니우스 같은 사람에 의해 중기 플라톤주의에서 발전하였지만, 나중에 로마에서 가르쳤던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Orgen,  185‐254)과 동시대 인물인 플로티누스(Plotinus,  205‐270년)의  창조적인  재능에  의해  그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시리아인  얌블리쿠스(Jamblichus,  250‐325년)는 신플라톤주의를 다신교와 마술과 점에 적응시켰고, 반면에 플로티누스의 학생이요 편집자와 전기 작가, 심지어 그를 대중화하는 사람이기도 한 포르피리(Porphyry,  232‐303년)는 신플라톤주의의 방향을 반기독교 쪽으로 바꾸었다. 그의  ‘기독교도들에 반대하여’(Against  the Christians)는 여러 주요 기독교 저술가들의 반응을 불러 일으킬  @만큼 통찰력과 비중이 있는 것이었다.  400년경 아테네 아카데미 자체가 가장 박식한 신플라톤주의 교사 프로클루스(Proclus, 410‐485년)의 강력한 영향력 발휘에 따라 신플라톤주의 일색이 되었다. ▣ 플로티누스의 플라톤주의에서, 이원론은 더 높은 일원론(Monism; 근본적인 실체는 하나 밖에 없으며, 만약 다른 존재가 실재한다고 말할 경우, 그것은 속성이나 형태일 뿐

Page 376: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이라고 주장하는 것) 안에 포함되었고, 철학은 종교와 신비주의(Mysticism; 일반적으로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경험하는 것과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과의 다양한 방식으로 연합하는 개념을 포괄하여 가리킨다. 따라서 이것은 주로 심리학적인 경험이며, 형이상학적인 문제가 된다. 기독교에서 신비주의의 기본적인 개념은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궁극적인 실체이신 하나님과 연합하는 수단을 추구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성경적으로 옳지 않다)로 다가간다. 모든 존재의 기원과 목표는 신이며, 그리고 신은 모든 설명을 뛰어넘을 뿐만 아니라 한결 같은 존재 자체이다. 그것은 감각의 세계와 심지어 생각의 세계를 넘어 오직 금욕적인 추상적 개념에 의해서만 가까이 할 수 있고, 자아가 신과 합일하는 매우 황홀한 환상의 순간에 절정에 달하게 된다. 신의 창조적인 충일로부터 다양성과 열등과 신에게로 회귀하려는 열망의 경향이 있는 존재의 체계적인 수준들이 나온다. 맨 처음 나오는 것은 마음과 영혼으로 각각 지성과 생기의 우주적 원리들이다. 모든 존재 그 자체는 선하며, 심지어  ‘존재의 큰 사슬’의 가장 하한에 있는 물질조차 그러하다. 악은 엄밀히 말하자면 빈존재이다. 즉, 신을 외면하는 자들을 위한 실재적인 기능인 것이다.    

Page 377: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플루타크(Plutarch,  ?‐120)  (1.3.3): 그리스의 수필가 겸 전기 작가인데 카에로네아  보에오티아(Boeotia)에서  출생했다.  그는  이집트와  이탈리아를  여행했고  로마(여기서 그는 철학에 관해 강의했다)와 아테네를 방문한 후 결국 자신이 태어난 보에오티아로 돌아와 델피(Delphi) 신전의 제사장이 되었다. 플루타크는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꾸리면서  4남  1녀를 두었는데,  ‘부부의 계율’을 통하여 남편과 아내들에게 유익한 조언들을 남겼다. 그는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을 비교하는 전기를 쓰기 위한 자료를 수집하면서, 한편으로 도덕 강의를 자주 개최하였는데, 강의 내용을 통하여 자신이 플라톤주의와 신플라톤주의 사이에 서 있음을 드러내  @보인다. ▣ 그의 위대한 작품은  ‘플루타크 영웅전’(The  Parallel  Lives)으로, 이는 쌍으로 배열된(그리스인의 삶 한편과 비교할만한 로마인의 삶 한편)  46개의 현존하는 전기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19개의 짧은 비교들은 그 진위가 의심스럽다.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최초로 영역한 것으로도 유명한 문호였던 토마스 노스(Thomas North)의 영어 번역판은 영문학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예를 들면 그것은 세익스피어의 코리올라누스, 쥴리어스 시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아테네의 티몬과 같은 작품에  소재를  제공했다.  존  드라이  덴의  번역판은  1864년  아셔  후  클러후(A.  H. Clough)에 의해 개정판이 나왔다. ▣ 비록 플루타크가 그리스인의 문화와 위대함

Page 378: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에 명백한 자부심을 보여주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인을 다룰 때에도 공정하고 정직했다. 그의 전기의 사실들이 항상 정확한 것은 아니었지만 전기 작가로서 플루타크와 견줄 자가는 거의 없다. 그는 인물을 묘사하여 도덕적 암시를 드러내려 했기 때문에 그의 기술은 풍부한 일화와 관련된 소재들의 사용을 포함했다. ▣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커다란 매력과 흥미를 제공하는 또 하나의 그의 작품은 도덕론(Moralia)이다. 이 작품은  ‘신의 늦은 복수’,  ‘미신에 관하여’,  ‘시를 듣는 올바른 방법’,  ‘결혼한 부부들에게 주는 조언’ 등과 같은 윤리적, 문학적, 역사적 주제들에 관한 대화와 수필로 구성되어 있다. 종교의 토대 위에 도덕을 수립하려고 했던 플루타크는 기타  ‘신들에 대한 그릇된 두려움’,  ‘악인들을 벌하는 일에 신의 공의가 지연되는 이유’ 등과 같은 유작들을 남겼다. ▣ 필립 샤프(Philip  Schaff)는 플루타크의 뛰어난 인격으로 그의 겸손을 높이 평가한다. 고대의 철학자들, 특히 스토아주의자들 가운데서 플루타크 이상 겸손한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플루타크는 항상 자신을 직시했고, 이것이 그의 겸손의 원천이 되었다. 그는 영혼이 태어날 때부터 부패했다는 것을 의식하여  ‘숱한 악과 질병의 저장소’가 영혼이라고 했다. 만약 그가 죄에 대한 참되고 근본적인 치유책인 그리스도를 알았더라면, 틀림없이 겸손하기 그지 없었던 그는 감사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했을 것이라고 본다. 

Page 379: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 칼빈이 기독교강요에서 언급한 그릴루스는 플루타크의 저서에서 매우 능숙한 이론으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곧 종교가 생활에서 상실되면 인간은 짐승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여러 면에서 훨씬 더 비참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많은 형태의 죄악에 붙잡혀 그들은 끊임없는 혼란과 불안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피기우스(Albert  Pigius,  1490‐1542)  (3.2.30): 네덜란드 캄펜에서 태어난 알버트 

피기우스는 파리와 로마에서 학문을 마친 후, 네덜란드 중부 소도시 유트렉트의 로마 카톨릭 교회 소속 부주교로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사역하였다(1535‐1542). 칼빈이  1539년에 기독교강요 재판을 내놓았을 때, 그의 예정론을 반박하는  “인간의 자유 선택과 신의 은총에 대한  10권의 책”을 죽기 직전인  1542년  8월에 썼다.  1부(1‐6권)는  ‘자유의지’를 비판하고,  2부(7‐10권)는  ‘예정’을 비판했다. 이에 대해 칼빈은  1543년에  “피기우스 논박”을 써서 대응했고, 또한  1552년에는 제롬 볼섹과 논쟁하게 된 것을 계기로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에 관하여’를 통하여 대응하였다. 칼빈의 예정론은 좀더 정확한 제목을 붙인다면 사실상  “이중 예정 교리”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예정론인  ‘하나님의 주권적 무상 선택과 그의 주권적 공의의 유기’라고 

Page 380: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하는 두 가지 맞물리는 주제를 다루기 때문이다. 칼빈이 이 교리를 가르친 것은 그의 개인적 기호 때문이 아니라, 성경이 명확하게 이것을 선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에 관하여를 마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처음에 말한 것을 다시 되풀이 해야겠다. 자신이 하나님의 성령보다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 이외에는 아무도 내가 설명한 교리를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 나로서는 하늘 아버지의 학교에서 배운 것 외에 다른 겸손한 법칙을 결코 알지 못함을 엄숙하고 경건하게 고백한다. 그러나 나는 믿음을 확립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신중을 기하는 데 있어서도 정당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경건한 신앙 안에서 배운 바대로 일부 세밀한 부분들에 있어서 만족스럽지 못하다 할지라도 나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한다. 귀 있는 자들은 들을지어다.”    #피터  롬바드(Peter  Lombard,  ca.  1100‐1160):  피터  롬바드는  아베랄드(Peter 

Abelard, 1079‐1142), 버나드(Bernard of Clairvaux, 1090‐1153) 등과 동시대의 인물로 이탈리아에서 수학였다. 훗날 논평의 대가(Magister  sententiarum)로 알려지게 된 피터 롬바드는  1095년경에 노바라ㆍ롬바르데이 지역에서 출생하여, 볼로냐 대학, 

Page 381: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랭스 대학, 파리 대학, 성 빅토르 대학에서 공부했다. 그는  1130년부터는 파리에 있는 노트르담 성당의 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했는데, 이 학교는 아베랄드도 교사로 있으면서 가르친 곳이다. 그의 강의가 얼마나 유명했던지 학생들이 구름 떼같이 몰려들었다. 자연히 시기심에 사로잡힌 반대파들의 박해에 직면하여 그의 신학적 견해를 문제 삼아 프랑스 당국이  ‘땅’에서의 강의를 금지시켰다. 그러자 그는 나무 위로 올라가서 강의를 계속했고, 여전히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프랑스 당국은 이번에는  ‘공중’에서도 강의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강물 위에 배를 띄워놓고 강의를 했는데, 여전히 학생들이 강둑으로 몰려들었다. 롬바드는  1148년에 랭스 회의에 참석하여 푸아티에의 질베르의 교설을 검토했다. 여기에서 버나드 편에 서서 푸아티에의 주교에 반대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그는  1159년에 파리의 주교가 되었으나, 그 이듬해인  1160년에 사망했다. ▣ 그의 초기 저작으로서는  ‘시편 주해’와 ‘바울서신 주석’이 손꼽히고 있다. 이 두 저작은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이미  1142년에 라이헤르스베르크의 게로는 피터를 당대의 가장 유명한 바울서신 주석가로 선정했지만, 동시에 그의 그리스도론에 대한 양자설을 비판했다. 피터의 가장 유명한 저작은  4권으로 구성되어 있는  ‘논평’이다. 이것은 일종의 조직신학 총론으로  1권은 하나님, 하나님의 속성, 삼위일체, @예정을 논한다.  2권은 천사들의 창조를 포함

Page 382: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한 하나님의 창조사역, 인간, 죄, 자유의지, 구속의 필요성을 다룬다.  3권은 기독론, 구속론, 성령의 능력과 산물 그리고 하나님의 계명을 다룬다.  (여기에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는 죽었으나 죽지 않았다고 하고, 고난을 당했으나 고난을 당하지 않았다고 하는 어려운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훗날 불러온 신랄한 비난의 요지를 제공한다.)  4권은 성레전과 종말론에 관한 논의이다. ▣ 이 저작은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여 중세기와 중세 후기까지 신학의 길잡이가 되었고, 16세기 말에 이르러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74)의 저서가 교회 안에 자리잡기까지 중세기 지식인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당시까지  신학의  전통적  교과서는  성경이었으며 거기에 첨부된 주해였다. 하지만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년) 이후로 교재는 점차 ‘논평’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로저 베이컨 이후에 알렉산더가 처음으로 성경 대신에 이것을 교재로 사용했다.)  16세기까지 이 저작이 공식적인 교재로 사용되었으며, 항상 새로운 주석이 가해졌다. 교육적인 우수성, 변증법 사용의 절제, 전승에 대한 결속이 이 저작의 특성이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특히 중요했던 것은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피오레의 요아힘의 공격에 대응하여 삼위일체론을 교권적으로 변호한 것이었다.  ‘논평’에서 전개한 성만찬론은 특별한 중요성을 갖는다. 피터는 일곱 가지의 성례전을 열거하고, 그 본질적 요소들을 서술했으며, 거기에 원

Page 383: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인 개념을 최초로 적용했다. ▣ 피터의 속죄론은 출발점을 ‘그리스도의 공로’에다 둔다.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지 않고 영화할 공로를 세우시기 위하여 경건한 생활

을 계획하셨다. 하지만 그가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신 것은 자원적이요, 또 그리스

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들을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죄와 형벌과 마귀로부터 인간을 구출하사 낙원(Parsdise;  70인역에서 이 용어는 에덴 동산을 의미했지만, 구약종교에서 의인들의 영혼이 가는 곳을 의미한다. 이런 전제하에 누가복음  23:43절에서 예수님은 회개한 강도에게 낙원을 말씀하셨다)에 들어가게 하셨다고 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에게 구원을 이루실 수 있는 것은 그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해 주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위대한 보증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감동을 받고 고무된다. 이에 따라 죄에서 벗어나 의롭게 되고, 죄에서 해방될 때 마귀로부터도 해방된다고 했다.  #하인리리  4세(Henry  IV,  1056‐1106, 재위)  (4.11.13):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당시 교황이었던 그레고리  7세와 생명을 건 치열한 권력 대결을 벌였다. 카노사(Canossa)의 굴욕 사건으로 유명한 황제이다.  

Page 384: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헤라클라스(Heraclas,  232‐247 재위)  (4.4.2): 알렉산드리아 주교이다. 그의 후임으로 디오니시우스(Dionysius, 247‐264 재위)가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되었다.  #헬리오가발루스(Heliogabalus)  (4.2.3): 외할머니 율리아 마이사의 계략으로 만 

14세에 로마 황제 자리에 오른 소년이 헬리오가발루스인데 동시에 태양신을 섬기는 사제 노릇도 하였다.  (숙부와 재혼한 뒤 그를 독살한 소 아그리피나 덕분에  17세에 황제가 된 네로<Nero,  54‐68 재위>의 기록을 깬 최연소 황제였다.) 헬리오가발루스는 외할머니 밑에서 허수아비 황제로 치세를 시작했다. 네로와는 이 점에서 닮은꼴이지만 두 소년 황제의 통치 기반은 완전히 달랐다. 네로는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로서 정치적 갈등 요인들에도 불구하고 로마 전통과 아우구스투스가 세운 왕조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통치 기반으로 삼을 수 있었다. 반면 헬리오가발루스는 시리아 전통과 시리아 군대를 기반으로 했고 만일의 경우 대안이 될 수도 있는 네 살 어린 사촌 동생도 있었다. 헬리오가발루스는 외할머니의 계획대로 카라칼라의 공식 황제명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라는 이름으로 세베루스 왕조의 뒤를 잇게 됐다. 하지만 일반 역사책에서도 공식 명칭보다 엘 가발 신전의 사제를 칭하는 헬리오가발루스라는 별명으로 더 많이 호

Page 385: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칭된다. 그의 고향인 시리아 속주 에메사시는 오늘날의 시리아 홈스시로 로마 시대에 태양신 엘 가발의 신전이 있어서 유명한 곳이었다. 그의 가문이 대대로 이 신전의 사제직을 맡았다. 헬리오가발루스도 즉위 전에 이 신전의 사제로 있었다. 사제명이 황제의 별명으로 굳어진 것은 이런 연유에서이다. 태양신 숭배는 로마가 동방을 정복하기 이전부터 고대 기원의 종교 발상지라 할 수 있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유행한 종교였다. 이것이 로마 세계에 확산된 것은 제정기에 들어 동방에 주둔한 군대 안에서 세력이 커지면서부터였다. ▣ 한 세기 후 기독교를 공인하였던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  288‐337) 대제도 태양신 신자였을 정도다. 문제는 헬리오가발루스의 태양신 사제 경력이 그의 치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데 있다. 즉위 다음 해에 로마에 도착한 소년 황제는 별명대로 사제 복장으로 사람들 앞에 나섰고 엘 가발 태양신 숭배를 보급하는 데 앞장섰다. 비단 겉옷을 걸친 모습에, 볼에는 연지를 바르고, 목에는 진주 목걸이를 걸고, 머리에 보석 호화롭게 박힌 면류관을 쓴 이국적인 모습으로 이교의 종교의식을 벌인 것이다. 이렇게 그는 태양신을 로마 제국의 최고신 위치에 올려놓아 파문을 일으켰다. 스스로 엘 가발신의 사제이자 예언자로서 신과 인간의 중재자임을 자임하였고, 심지어 엘 가발신과 미네르바 여신을 결합시키기까지 했다. 이러한 종교 정책의 연장선에서 그는 시리아

Page 386: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인을 요직에 등용해 원로원과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마부를 경찰장관으로 임명하고 곡물장관 자리를 이발사에게 주는 등의 행위로 정치적 마찰을 야기했을 뿐 아니라 성화의 여신 베스타를 모시는 베스타 여사제와 결혼하는 전대미문의 스캔들을 일으키기도 했다. 정절을 생명으로 하는 베스타 여사제와의 결혼이 그에게는 로마 고유의 종교와 시리아 최대 종교간의 완전한 결합을 상징했지만 로마인의 종교 전통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헬리오가발루스의 제반 행위는 로마의 정치, 문화, 종교 전통과 심한 마찰을 일으켜 모두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이렇게 헬리오가발루스가 민심을 잃게 되자 외할머니 율리아 마이사가 다시 나서게 된다. ▣ 그녀는 민심을 잃은 황제가 제거당하기 전에 왕조를 보존할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판단했다. 대책이란 황제의 사촌 동생을 후계자로 삼아 권력 계승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황제가 자신의 또 다른 손자 게시우스 바이아누스 알렉시아누스(Gessius Bassianus Alexianus)를 입양, 세베루스 알렉산더라는 이름을 주고 부제로 지명하게 했다. 하지만 이 조치는 황제와 후계자 사이에 반목을 야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헬리오가발루스와 알렉산더의 갈등은 황제의 권위를 더욱 실추시키고 친위병들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우려하던 일이 마침내 터지고 말았다. 황제가 알렉산더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몄을 때 친위병들은 이를 저지하는 데서 한 

Page 387: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걸음 더 나아갔는데, 헬리오가발루스와 그의 모친이 숨어 있던 화장실에서 그들을 끌어내서 목을 베고, 몸뚱이를 질질끌고 거리를 누비다가 아이밀리아 다리 밑으로, 육중한 물체를 매달아 던져버렸다. ▣ 칼빈은  1561년  8월  19일에 프랑스의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다니엘서 주석을 헌정하면서, 로마의 교황을 헬리오가발루스에 비교하였다.  “… 마귀는 온갖 유의 소란을 위해 특별한 격정으로 노예로 만든 자들을 선동합니다. 그러므로 나팔 소리가 터져나오고 싸움과 전투가 벌어집니다. 한편, 헬리오가발루스와 같은 로마의 교황은 붉고 피비린내 나는 무리와 뿔이 달린 짐승들을  ‐ 추기경과 주교들  ‐ 이끌고 그리스도를 향해 난폭하게 돌진해 오고, 또한 거짓된 사제의  ‐ 로마의 사제단  ‐ 온갖 더러운 것을 그의 협력자로 사방에서 불러들이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똑같지는 않지만, 같은 솥에서 만든 음식을 먹고 있습니다. 많은 배고픈 친구들도 그들에게 달려갑니다. 대부분의 재판관들은 이 사치스런 잔치에서 식욕을 충족시키며 음식과 쾌락을 위해 싸우는데 아주 익숙합니다. 게다가 수도승들의 은거지와 소르본느의 소굴에서는  ‐ 신부 양성소  ‐ 대식가들을 파견하여 불난 집에 부채질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 그러므로 친애하는 형제들이여, 진정한 종교가 완전한 상태를 회복하기 위해 여러분이 진정한 노력을 쏟는 것은 여러분의 능력이 닿는 한, 그리고 부르심을 받은 한 여러분의 의무입니다. 내가 이

Page 388: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제까지 소란을 막기 위해 얼마나 분투했는지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 주님께서 성령으로 여러분을 지배하시고 나의 가장 사랑하는 형제들을 모든 적의 간계로부터 온전히 막아주시며 보이지 않는 권능으로 지켜주실 것을 기원합니다.”  #호머(Homer, 호메로스, B.C  9‐8세기)  (1.17.3;  2.2.17): 기원전  9 혹은  8세기에 살

았던  그리스  서사  시인이다.  소아시아의  즈미르나(Smyrna)에서  태어난  듯  하나, 키오스 섬과 인연이 깊어 이 섬에는 호메로스풍 시인들의 단체가 있었다. 호메로스의 이름으로 전해오는 송가의 제목은  33개에 이르지만, 현재 전편이 남아 전하여지는 것은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 뿐으로, 이들은 모두가 육각운으로 되어 있다. 이 두 서사시는 각각  24절로 되어있는데, 이는 알렉산드리아 음유서사시의 전통과 유사하다. ▣ 일리아드는 그리스 본토인들이 소아시아 서북쪽의 트로이로 원정간 전쟁을 다루는데, 당시 전쟁은 약  10년간 계속되었다. 전쟁의 원인은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스파르타 왕의 아내인 미녀 헬레네를 약탈해간 까닭에 발발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만, 일리아드는 전쟁 9년 째에 트로이에서 일어난 약  50일간의 사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9년이 넘도록 전쟁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리스 병사들은 약탈을 자행하게 되고 그

Page 389: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리스인 진영은 분열이 일게 된다.   결국 이 전쟁은 그리스인 본토인들의  ʹ트로이 목마  ́작전으로 트로이 성이 함락되며, 그리스의 영웅 아킬레스의 죽음과 트로이의 몰락으로 끝을 맺게 되나, 사실 이런 마지막 이야기는  ‘일리아드’에는 나오지 않는다. 일리아드의 클라이막스는 아킬레스의 친구 파트로클레스가, 트로이의 영웅이며 트로이 왕 프리아모스의 아들인 헥토르에게 죽음을 당하는 사건, 그리고 이에 격분한 아킬레스가 헥토르를 죽이게 되는 과정에 있다. 아킬레스는 분을 삭이지 못해 헥토르의 시신을 끌고 트로클레스의 무덤을 돌게  @하여 시신을 능욕하였다. 그러자 늙은 트로이왕 프리아모스는 아들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받기 위해 몰래 적진으로 들어와 아킬레스와 담판을 하고 눈물로 호소하자, 마침내 아킬레스는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주는 감동적 장면으로 일리아드는 일단 끝난다. ▣  ‘오디세이아’는 트로이 전쟁을 끝내고 고향인 그리스 서쪽 이타카로 돌아오는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미움을 사서 풍랑에 떠밀려 다니며 갖 가지 고초를 겪지만, 여신 아테나의 보호로 마침내 아내 페넬로페와 아들이 있는 이타카로 돌아오게 된다. 오늘날의 연구 결과, 이 서사시에 쓰인 언어로는 원래 아이올리아와 이오니아 지역 방언이 쓰였다가, 후에 전파되는 과정에서 아티카(아테네 지역) 방언이 가미된 것으로 알려졌다.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에 관한 체

Page 390: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계적 분석은  1795년 울프(Fr. A. Wolf)의 호메로스 서설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호메로스 생존 당시에는 아직 문자가 없었으므로, 그의 작품들은 당시에는 정식으로 기록되지 않았고, 9‐6세기 간에 구전되어 왔다고 주장하였다. 호메로스는 대충 줄거리를 엮었고 @그 후 많은 시인들이 첨가하여 작품이 이루어졌으며, 아테네의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 때에 이르러 기록되었을 것이라는 견해이다. 그 이후 여러 시각에서 이 두 서사시를 둘러싼 문제점이 제기되었으며, 아직 상반된 이론들이 대립해 있어 해결이 되지 않고 있다. 칼빈은 호머의 작품에 등장하는 아가멤논이 기사들의 모임에서 한 말을 해석 없이 헬라 원문으로 그대로 인용했다. 그런데 고대 변증법과 수사학 및 고급 문법에 역점을 두었던 칼빈의 제네바 아카데미의 입장에서 호머의 작품들은 학생들에게 가르칠 훌륭한 교재가 되었던 것은 당연하다.  #히에로(Hiero)  (1.5.12): 주전  6‐5세기 경의 희랍 서정시인 시모니데스가 쓴 작

품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칼빈은 이렇게 소개한다.  “시모니데스는 폭군 히에로에게서 하나님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이에 대하여 하루 동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달라고 요청하였는데, 사람들은 이 답변을 칭찬하였다. 다음날 다시 그 폭군이 똑같은 질문을 되풀이하자 그는 이틀 동안의 여유를 더 허락해 주기를 요구

Page 391: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하였다.  그는  여러  번  날수를  배로  연기하고  나서  마침내는  이렇게  답변하였다. “이 문제에 대하여 오래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더 희미해집니다.” 그가 그렇게 희미한 문제에 대하여 생각하는 일을 중단하였던 것은 지혜로운 일이었다. 여기서 명백해지는 것은 인간이 본성으로만 가르침을 받는다면 확실하고 건전하며 분명한 지식을 갖지 못하고 오히려 혼란한 원리에 매여 마침내는 알지 못하는 신을 숭배하게 된다는 사실이다(행  17:23 참조).”  #히폴리투스(Hippolytus,  170‐235)  (3.20.27): 히폴리투스는 이레네우스(Irenaeus, 

130‐202)와 터툴리안(Tertullian,  ca.  155‐220)과 더불어  3인의 반  @그노시스파 교부(The Anti‐Gnostic  Father) 중의 한 사람이다. 정신적인 면에서나, 단순하고 온건한 면에서나, 또는 실제적인 면에서 그의 스승 이레네우스와 매우 흡사하였다고 한다. 그는 이레네우스 보다 재능은 적었으나, 철학 사상에 있어서는 훨씬 더 우수한 자질을 드러내 보였다. 논쟁을 좋아했던 히폴리투스는 처음으로 교리에 대해 신학적이며 철학적인 작업을 시도했다. 그는 삼위일체의 삼위를 구별하는 로고스 교리를 옹호했고, 따라서 당시 로마 교회의  15대 주교 제피리노(Zephyrinus,  199‐217 재위)를 향하여 그의 이론이 양태론이라고 비판하였다. 또한 제피리노의 후임자로 칼리

Page 392: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스토  1세(Callistus  I,  217‐22 재위)가  16대 주교가 되어 간음 같은 중대한 죄에 대해서까지 쉽게 사죄를 선포했을 때, 히폴리투스는 교회란 공의로운 자들만의 사회라고 생각한 까닭에 크게 분노하였다. 제피리노의 후임자로 칼리스토가 선출될 때, 반대파들은 히폴리투스를 옹립하여 주교로 선출하였다. 따라서 히폴리투스는 대립 주교가 되어(217‐235),  17대 주교 우르반  1세(Urbanus  I,  222‐30 재위)와  18대 주교 폰시아노(Pontianus,  230‐35)의 반대편에 서서 교회를 이끌었다. 그러던 중에 황제 막시미누스 트락스(Maximinit Thrax,  235‐38 재위)의 박해를 받아 히폴리투스와 폰시아노 두 사람 다 사르데냐 광산으로 귀양을 갔고, 그곳에서 두 사람은 화해한 끝에  다같이  주교  자리를  내어놓음으로  분열을  끝내고,  19대  주교로  안테로(Anterus,  235‐36 재위)를 지명한 후 순교하였다. ▣  5세기 초에 활동한 스페인의 시인  프로덴티우스(Prudentius)의  글에  의하면,  히폴리투스는  죽음을  앞두고서는 분열에 가담했던 것을 극히 후회하였고, 따라서 추종자들에게 보편 교회의 품으로 돌아가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야생마들에게 발이 묶인 채 나무와 돌 위로 끌려다니@다가 죽었다고 알려진 신화에 등장하는 테세우스의 아들 히폴리투스에 자신의 이름을 빗대어 비통해했다. 그래서 죽기 직전,  “이 말들이 내 사지를 끌고 가듯이, 그리스도시여 저의 영혼을 당신께로 이끄@소서”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Page 393: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남겼다. 이러한 그의 순교 장면을 그린 그림을 로마의 지하 묘실에서 보았다고 프로덴티우스는 증거한다. ▣ 히폴리투스는  3세기 로마 교회에서 가장 학문이 깊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고, 실제로 상당히 많은 저서를 썼다. 그가 비록 스승 이레네우스처럼 헬라어만 사용했고, 그의 신학 대부분이 스승의 글을 인용한 것이지만, 학문의 식견과 깊이가 아주 뛰어났다. 그의 주요 저서로서  10권으로 구성된  ‘필로소푸메나’ 곧,  ‘제반 이단에 대한 논박’(The Refutation of All Heresies)이 있는데, 여러 그리스도교의 이단들이 그릇된  ‘이교도들의 철학’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글이다. 이 책은 이레네우스의 논문 다음으로 니케아 이전 교회의 가장 교훈적이고 논쟁적인 저작으로 알려져 있어서, 고대 이단들의 성격과 교회 교리의 성향을 드러내주는데, 무엇보다도 요한복음의 진정성을 주장하고 있다는 데서 귀중한 자료이다. 또한 교회 규범을 논한  ‘사도들의 전승’(Apostolic Tradition)도 있지만, 오늘날은 번역본들만 존재한다. 기타 그는 해석학, 연대기 논쟁, 성경의 주석들(이는  암브로스<339‐397>가  사용한  헥사메론이다),  설교  등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작품들을 남겼다.    #힐라리(Hilary, 315‐367)  (1.13.5):  ‘서방의 아타나시우스’라는 칭호에 어울리는 힐

Page 394: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라리는 귀족 이교도 집안에서 태어났다. 후대의 어거스틴(Augustine,  354‐430)과 마찬가지로, 그는 이교 철학이 기독교 복음의 유용한 준비 역할을 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회심 직후에 그는 프랑스 남부에 있는 도시 포이티어스(Poitiers)의 주교가 되었지만, 곧 당시 교회에서 아리우스주의(Arianismus)가 성행하는 경향에 제동을 걸었고, 이에 맞선 저항에 의하여 소아시아로 얼마간 추방되기도 하였다. 당시는 아리우스주의에 호감을 가진 콘스탄티우스  2세(Constantinus  II, 337‐61)의 통치기였고, 황제의 영에 따라 소아시아 프리키아로 추방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힐라리에게는 추방 기간이 동방 교회의 신학을 직접 체험하는 기회가 되었는데, 특별히 앙키라의 바실의 오리겐주의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 그의  ‘종교회의론’은 이 시기에 저술된 것이다. 이 책은 서방 교회의 동료들에게 동방 교회의 반아리우스주의자들의 상이한 신학적 접근법을 이해시키려는 시도였다. 그는 또한 추방 기간에 그의 대표적인 저서로 열두 권의 분량인  ‘삼위일체론’(De Trinitate)을 쓰기도 했는데, 이는 아리우스 논쟁을 다룬 라틴 신학의 탁월한 논문이요,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힐라리는 성부와 성자의 관계 혹은 성령의 역할에 관한 정통적 견해에 크게 기여한 바는 거의 없고, 단지 전통의 계승자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그는 성령에 대해서 핵심적으로 말하기를,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들을 찾는 분으로서 신적 본질과 

Page 395: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다를 것이 없다”고 했다. 지금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이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 힐라리는 기독론에서 독창적인 기여를 하였는데, 그리스도의 실존(Existence; 일반적으로  본질<essence>과  대조되며,  어떤  실체의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현실<actuality>을 의미하며, 그것의 단순한 가능성이나 잠재력과 대조된다)에 세 가지 구별되는 단계가 나타난다고 가정할 때 그리스도의 인간적 연약함에 대한 아리우스의 주장을 가장 효과적으로 응수한다고 보았다. 첫 번째 단계에서, 그리스도는 성부와 상호적 내주 관계로 하나가 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선재하셨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품에서 영원히 발생하셨기 때문이다. 두 번째 단계인 성육신에서 그리스도는 사람으로 태어나셨는데, 순전히 자유로운 사랑의 동기로 성육신하시고 종의 형체를 취하셨다. 그래서 일단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종의 형상으로 나타나셨으므로, 사실상 하나님 안에서 틈이 생겼다. 그리스도께서 취하신 인성은 성부 하나님과 무한히 나누어졌다. 물론 인성은 성자 하나님의 신성과 영구히 연결되어 있었다. 인성을 신성의 차원으로 올리는 것이 신성의 임무였다. 이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Ascension;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오른편에 좌정하신 것’을 강조한다)에서 달성되었다. 세 번째 단계에서, 그리스도는 부활을 통하여 성육신 이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지셨던 영광으로 회복되셨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Page 396: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올리신 그 영광에 자신들도 참여하리라고 소망할 수 있게 되었다. ▣ 힐라리는 또한 아폴리나리스(Apollinaris,  361‐90 재위)의 기독론을 반대하여, 만일 로고스가 완전한 인성을 취하지 못하였다면 그는 우리의 완전한 구속주가 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죄인 전체가 구속을 받아야 하는 까닭에, 그리스도는 인성의 최소 중요 부분만을 취할 것이 아니라, 완전한 인성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당시 아폴@리나리스의 주장은, 비록 그 이론이 어떤 방식으로 설명되든지를 무론하고, 로고스가 예수의 영의 기능을 하였다고 주장하는 한, 결과적으로 지상의 예수는 인간의 영을 소유하지 않았다는 결과를 피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힐라리는 당시 갑바도기아의 유명한 세 사람의 신학자들과 더불어 아폴리나리스주의(Apollinarianism)을 통렬하게 비판하게 되었다. ▣ 힐라리의 구원론의 열쇠는 인간의 신화(神化)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목적하셨던 것이다. 신화의 성취는 죄로 인하여 복잡하게 되었을 뿐이지, 죄 때문에 처음으로 영감된 것이 아니었다. 힐라리는 그리스도의 인격의 통일성뿐만 아니라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두 본성에 관해서도 분명한 개념을 갖고 있었다. ▣ 힐라리의 ‘인간론’은  어떠했을까?  암브로스(Ambrose,  339‐397)와  더불어  힐라리  역시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범죄하였고, 그러므로 죄 속에서 태어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

Page 397: 기독교 강요 속의calvinacademy.net/pub/calvin4.pdf · 2012-02-15 · 장에 마르스(Mars the Avenger)의 새 신전을 건축했다. 이러한 무너진 신전들의 복 구는

 

 

만  인간  의지의  전적  타락은  인정하지  않게  되어,  결국  합력적  중생론(the synergistic  theory  of  regeneration)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 문제에 대해, 이전의 어떤 다른 초대 교부들보다도 더 불확실하고 모순적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향후 펼쳐질 어거스틴의 죄론과 은혜론을 점진적으로 준비하게 되었던 것이다.  #힐라리우스(Hilarius) (3.20.32): 호민관을 지낸 힐라리우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