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계란 명창과 “대구아리랑” 고찰 · 은 강원도지역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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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of Daegu Gyeongbuk Studies Vol.13. No.2 2014. 10. pp.67~85 67 Journal of Daegu Gyeongbuk Studies 최계란 명창과 “대구아리랑” 고찰 손 태 룡 *1) A study of great singer Ch'oe Kye-ran and Taegu-arirang Son, Tae-ryong 국문 요약 우리나라 민요 <아리랑>은 강원도지역에서 모심기 때 불린 “긴아라리”와 대원군(李昰應, 1820-1898) 이 경복궁을 중수할 때 한강으로 뗏목을 옮기면서 부른 “자진아라리”가 전국으로 전파되면서 각 지역의 <아리랑>이 새롭게 탄생하게 되었다. 더욱 1926년 나운규(羅雲奎, 1902-1937)가 제작한 무성영화 <아 리랑>에 사용된 “본조아리랑”(서울아리랑, 나운규 편곡, 노래 이상숙)이 알려지게 된 이후에는 전국적으 로 지역별 <아리랑> 노래가 만들어졌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대구아리랑”이 창작되어 최계란(崔桂蘭, 1920-2001)에 의해 SP음반에 취입 되었다. 그 음반이 바로 1936년 밀리온(Million)에서 발매한 “대구아리랑”이다. “대구아리랑”은 자진모리 로 된 전주-간주-후주를 포함하여 8분음10박자의 엇모리장단으로 되어 있다. 반주로 사용된 장구와 가 야금 그리고 바이올린과 함께한 선양악단(鮮洋樂團)이 반주를 하였다. 선양악단이라고 한 것은 장구와 가야금의 조선악기와 바이올린의 서양악기가 함께 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대구시 동구 봉무동 출생인 최계란은 1930년 10세 때 대구 달성권번에 들어가 강태홍(姜太弘, 1893-1957)의 지도를 받았다. 그리고 임종성(林鍾成)에 의해 서울의 경성방송국 출연과 조선권번에 기 적(妓籍)을 두고 활동을 하면서 “대구아리랑”을 취입했었다. 최계란이 밀리온음반에 취입한 “대구아리 랑”의 선율과 가사의 형태는 고제(古制)에 해당된다. 특히 낙동강, 금호강 등 대구지역과 관련되는 지형 을 가사에 이용함으로써 더욱 친밀감을 더하고 있다. 본고에서는 “대구아리랑”을 취입한 최계란은 누구이며, “대구아리랑”은 어떠한 음악인지를 밝히는 작 업이 연구목적이었다. 연구를 위해서 최계란을 추적하였고, 유성기음반에 담긴 “대구아리랑”을 통해서 가사를 채록하고 음원을 채보하여 오선보로 악보화 했다. 앞으로 “대구아리랑”이 대구지역의 특색 있는 대표적 민요로 규정되려면 지속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계속 불러 전승될 때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나 은 전승 보존책이 시급히 요구된다. 주제어 : 아리랑, 대구아리랑, 최계란, 밀리온음반, 키타키 세이키토(北木正義), 최양환, 강태홍, 임종성, 달성권번, 조선권번, 동래권번, 장미요정 * 한국음악문헌학회 대표(President, Journal of the Society for Korean Music Philology), E-mail: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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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ournal of Daegu Gyeongbuk StudiesVol.13. No.2 2014. 10. pp.67~85

    67

    Journal of Daegu Gyeongbuk Studies

    최계란 명창과 “대구아리랑” 고찰

    손 태 룡*1)

    A study of great singer Ch'oe Kye-ran and Taegu-arirang

    Son, Tae-ryong

    국문요약

    우리나라 민요 은 강원도지역에서 모심기 때 불린 “긴아라리”와 대원군(李昰應, 1820-1898)

    이 경복궁을 중수할 때 한강으로 뗏목을 옮기면서 부른 “자진아라리”가 전국으로 전파되면서 각 지역의

    이 새롭게 탄생하게 되었다. 더욱 1926년 나운규(羅雲奎, 1902-1937)가 제작한 무성영화 에 사용된 “본조아리랑”(서울아리랑, 나운규 편곡, 노래 이상숙)이 알려지게 된 이후에는 전국적으

    로 지역별 노래가 만들어졌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대구아리랑”이 창작되어 최계란(崔桂蘭, 1920-2001)에 의해 SP음반에 취입

    되었다. 그 음반이 바로 1936년 밀리온(Million)에서 발매한 “대구아리랑”이다. “대구아리랑”은 자진모리

    로 된 전주-간주-후주를 포함하여 8분음10박자의 엇모리장단으로 되어 있다. 반주로 사용된 장구와 가

    야금 그리고 바이올린과 함께한 선양악단(鮮洋樂團)이 반주를 하였다. 선양악단이라고 한 것은 장구와

    가야금의 조선악기와 바이올린의 서양악기가 함께 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대구시 동구 봉무동 출생인 최계란은 1930년 10세 때 대구 달성권번에 들어가 강태홍(姜太弘,

    1893-1957)의 지도를 받았다. 그리고 임종성(林鍾成)에 의해 서울의 경성방송국 출연과 조선권번에 기

    적(妓籍)을 두고 활동을 하면서 “대구아리랑”을 취입했었다. 최계란이 밀리온음반에 취입한 “대구아리

    랑”의 선율과 가사의 형태는 고제(古制)에 해당된다. 특히 낙동강, 금호강 등 대구지역과 관련되는 지형

    을 가사에 이용함으로써 더욱 친밀감을 더하고 있다.

    본고에서는 “대구아리랑”을 취입한 최계란은 누구이며, “대구아리랑”은 어떠한 음악인지를 밝히는 작

    업이 연구목적이었다. 연구를 위해서 최계란을 추적하였고, 유성기음반에 담긴 “대구아리랑”을 통해서

    가사를 채록하고 음원을 채보하여 오선보로 악보화 했다. 앞으로 “대구아리랑”이 대구지역의 특색 있는

    대표적 민요로 규정되려면 지속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계속 불러 전승될 때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나

    은 전승 보존책이 시급히 요구된다.

    주제어 : 아리랑, 대구아리랑, 최계란, 밀리온음반, 키타키 세이키토(北木正義), 최양환, 강태홍, 임종성,

    달성권번, 조선권번, 동래권번, 장미요정

    * 한국음악문헌학회 대표(President, Journal of the Society for Korean Music Philology), E-mail: [email protected]

  • 68 손 태 룡

    대구경북연구 제13권 제2호

    Abstract

    Arirang, Korean folk song, has been newly established in various regions, with Kin-arari sung

    in Kangwŏn Province and Chajin-arari sung while conveying rafts along Han River spreaded.

    Futhermore, A variety of Arirang song was made after Bonjo-arirang (Seoul-arirang) and used in

    movie Arirang by Na Un-gyu(1902-1937), has known to public in 1926.

    In this social circumstance, Taegu-arirang was made and embeded in SP record by Ch'oe

    Kye-ran. The SP record was Taegu-arirang released by Million in 1936. Taegu-arirang has

    eight-ten time and Ŏnmori-changdan. The song was accompanied by Sŏnyang Orchestra with

    Kayagŭm, Changgu and violin. Sŏnyang Orchestra (鮮洋樂團) was originated from the fact that

    Kayagŭm, Changgu and violin perform together.

    Ch'oi Gye-ran who was born in Bongmu-dong, Tong-gu, Taegu went to Taegu-arirang in Taegu

    at age of 10, 1930 and was tutored by Kang T'ae-hong. And she made his appearance in Kyŏngsŏng

    broadcasting and recorded Taegu-arirang while performing, with her position belonging to

    Chosŏn-Kwŏnbŏn. The form of lyric and melody in Taegu-arirang in Million recorded by Ch'oi

    Gye-ran was old-fashioned. Especially, the song added familiarity by using terrain in Taegu such

    as Nakdong River and Gŭmho River.

    For Taegu-arirang to be regarded as one of representative and distinct folk songs in Taegu, Many

    things about the song should be discovered and many people should sing and pass down the song

    continuously. And better plan to pass down and conserve the song is required from now on.

    KeyWords :Arirang, Taegu-arirang, Ch'oe Kye-ran, Million record, Kitaki-seikito(北木正義),

    Ch'oe Yang-hwan, Kang T'ae-hong, Im Chong-sŏng, Talsŏng-kwŏnbŏn,

    Chosŏn-kwŏnbŏn, Tongrae-kwŏnbŏn, Changmi-yochŏng

    Ⅰ. 머리말:“대구아리랑”의 출현

    은 한국을 대표하는 노래이다. 세계 어느 나라의 음악이 이렇게 한 악곡이 많은 종류로 파생

    되어 다양하게 불리어지고 있겠는가. 더욱 한민족 삶을 바탕으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민요이므로 사용

    역시 다양하게 불리어졌다. 모내기, 김매기, 나물 캐기, 방아 찧을 때, 뗏목 옮길 때 등 노동과 관련되어

    우리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 온 것이다. 따라서 한민족의 삶 자체를 담고 있는 음악이다. 이러한

    이 1926년 나운규의 무성영화에서 주제가로 사용됨으로써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각 지역 특색의

    문화적 영향으로 여러 가지 유형의 이 생기게 되었다.

    지금까지 확인된 은 50여 종에 2000여 사설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여러 가지 분류방법으로

    나누고 있는데, 음악적 특징으로는 선법(旋法)이 어떻게 다른 가를 주로 다루고 있다. 선율은 일반적으로

    경토리선법, 메나리토리선법, 육자배기토리로 유형을 나누고 있다. 경토리선법으로 된 은 서울

    과 경기지역을 중심으로 황해도 인근지역에 분포된 것으로 보고 있다. 메나리토리선법으로 된

  • 최계란 명창과 “대구아리랑” 고찰 69

    Journal of Daegu Gyeongbuk Studies

    은 강원도지역을 중심으로 경상도와 함경도 인근지역까지 포괄하고 있는데, “강원도아리랑”과 “정선아리

    랑”이 여기에 해당된다. 육자배기토리선법은 전라도민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으로 “진도아리

    랑”이 대표적이다.

    2007년 밝혀진 밀리온음반에 수록된 “대구아리랑”은 1936년에 발매되었다. 최계란(본명은 崔畢烈)이

    노래한 “대구아리랑”은 강원도아리랑류에 해당되는 메나리토리로 되어 있다. 메나리토리는 강원도와 경

    상도 등지의 동부지역에 사용되는 선법으로, 음이 ‘미-솔-라-도-레’로 구성되어 ‘미-라-도’ 음이 주로 사

    용된다. 또한 ‘라-솔-미’로 하행하는 선율이 메나리토리의 한 특징이며, ‘라’나 ‘미’로 곡을 마치는 것이

    일반적임을 본 내용에서 확인할 것이다. 최계란이 부른 “대구아리랑”은 옛부터 전해내려온 토속민요가

    아니고 전문음악가에 의해 만들어진 통속민요에 속한다. 이는 국악기인 장구, 가야금과 서양악기인 바이

    올린이 함께 반주하는 사실에서도 확인이 된다. 이러한 상황은 1933년과 1934년에 창작되어 음반에 담긴

    “밀양아리랑”이나 “신밀양아리랑” 그리고 1937년 음반에 수록된 부산 “동래아리랑”과 함께 한다.

    본고에서는 밀리온음반에 수록된 “대구아리랑”을 듣고 음을 채보하고, 가사를 채록해서 악보화 하여

    오선보로 제시하고자 한다. 이 악보를 중심으로 “대구아리랑”이 어떠한 특징을 갖고 있는 인지

    를 구명(究明)하고자 한다. 아울러 노래한 가수가 누구인지를 함께 알아보는 것이 본 연구의 목적이다.

    이러한 연구는 지금까지 깊이 있게 다루지 못한 새로운 연구주제이다. 따라서 “대구아리랑”을 어떠한 가

    수가 취입했는가를 알아보고, 아울러 반주는 어떠한 악기로 구성되었는가가 주목된다. 또한 음악적 내용

    이 어떠한지도 주요 관심사이다. 나아가 “대구아리랑”의 전승보전책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함이 본고의

    주내용이다.

    Ⅱ. “아리랑”의 역사적 흐름

    국문학자 조해숙에 의하면,1) 이란 용어가 기록으로 가장 앞선 것은 1790년 만천(蔓川) 이승훈

    (李承薰, 1756-1801)의 「만천유고」(蔓川遺稿)2)에 실린 (農夫詞)의 후렴구 "아로롱 아로롱 어희

    야"에서다. 조선 후기 농사를 장려하고 농민을 독려하기 위한 경향과 관련된다. 때문에 18세기 후반경에

    농부들은 이미 과 유사한 소리를 후렴으로 노래를 불렀다는 것이다. 후렴구의 ‘아로롱’(啞魯聾)

    은 음차(音借)한 것으로 대부분 특별한 의미로 생각하지 않고 있다. 또한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때 동원된

    인부들의 심정, 곧 “마음이 아리고 쓰리다”, “누가 이 마음을 알리오” 등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1) 조해숙, 「장르를 넘어선 노래, 시간을 가로지른 소리 '아리랑'」, 「한국의 고전을 읽는다」(서울:휴머니스트, 2006), 2권의

    내용에서 요약하였다. 金素雲 엮음, 「朝鮮口傳民謠集」(東京:第一書店, 1933); 임동권 역음, 「韓國民謠集」(서울:集文堂,

    1961-1980); 金練甲 編著, 「아리랑」(서울:現代文學社, 1986) 참조.

    2) 「만천유고」(蔓川遺稿)는 이승훈(李承薰, 1756∼1801)의 문집으로 총 9수(首)가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첫 수가 (農夫詞)로 7언절구의 한시(漢詩)를 우리말로 표현한 것이다. 한편 시와 함께 “경술년이농청서농기고작”(庚戌年里農

    請書農旗故作)이라고 창작동기를 밝히고 있어, 이승훈이 평택현감(平澤縣監)으로 재직한 때인 1790년으로 보고 있다. “신

    농후직(神農后稷)이 시경가(始耕稼)니, 자유생민(自由生民) 위대본(爲大本)이라. 종고(鍾鼓) 울여[려]라 종고(鍾鼓) 울여

    [려]라. 박언초아(薄言招我) 제동반(諸同伴), 아로롱(啞魯聾) 아로롱(啞魯聾) 어희야(於戱也), 사육생애(事育生涯) 노불탄

    (勞不憚)일셰.”

  • 70 손 태 룡

    대구경북연구 제13권 제2호

    이후 1926년 10월 1일 서울 단성사(團成社)에서 상영된 나운규의 무성영화 은 충격을 던졌다.

    상상을 초월한 흥행을 기록하면서 2년 6개월 간 전국 각처에서 상영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던 것이

    다. 이 같은 흥행에 힘입어 영화의 주제곡이었던 은 전국적으로 유

    행하게 되었다. 영화 에 사용된 은 전통적인 복합박자의 민요와 달리 4분음 3박자로

    한(恨)의 정서를 부각시킨 음악으로 변형되었다.

    이렇듯 개인적 회한가(悔恨歌)나 자탄가(自嘆歌)로 존재했던 은 20세기를 전후하여 근대 사

    회의 모습을 반영하면서 세태 풍자와 항거 의지를 고취하는 민족의 노래로 변모하게 되었다. 서울의 이후 각 지역의 이 창작되어 근대 민요로서 성장해 나갔던 것이다. 특정한 지역의 이 각기 발전을 보인 것도 민요 의 특징이다. 여기에는 상업성이 가미되어 전국적으로 유

    성기음반을 통한 이 새롭게 창작되었던 것이다. 1936년 밀리온음반회사에서 발매한 “대구아리

    랑”도 여기에 해당된다.

    함경도 원산의 “어랑타령”(신고산타령), “정선아라리”를 비롯한 “강원도아리랑”, “진도아리랑”, “밀양

    아리랑”이 대표적이다. “정선아라리”는 구성지고 느린 가락으로 생활의 체험을 구체적으로 노래하는 독

    창곡이며, “진도아리랑”은 육자배기 선율구조로 교창(交唱)이나 선후창(先後唱)으로 되어 있다. “밀양아

    리랑”은 남녀관계를 소재로 한 경쾌한 가락으로 되어 있다. 한편 전체의 공통되는 점은 짧고

    단순한 두 줄 형식으로 되어 있다. 본고에서 고찰하고자 하는 “대구아리랑”에 대해서는 다음 항목에서

    구체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Ⅲ. 최계란과 “대구아리랑”

    지금까지 “대구아리랑”을 취입한 최계란이 누구인지와 “대구아리랑”이 어떠한 음악인지는 단편적으로 알려

    진 바 있다. 유대안이 밝힌 “영남지역 아리랑의 음악양상”(「아리랑의 세계화-영남아리랑의 재발견」)에

    서와 대구MBC 라디오에서의 3부작(2013년 10월 2-4일, 3일간 50분씩, 이형환 담당) 중 2013년

    10월 4일자 방송에서다. 그렇지만 최계란과 대구아리랑에 대해 잘못 알려진 내용이 있으며, 깊이 있게

    학문적으로 다루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본 항목에서 자세하게 연구하고자 한다.

    1. 최계란은 누구인가

    1936년 “대구아리랑”을 SP음반에 취입한 최계란은 1920년 대구시 동구 봉무동 181번지에서 재혼한 아

    버지 최정보(崔廷晋, 1857-1927)와 어머니 이순이(李順伊, 1880년생) 사이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3)

    아버지 최정보는 동구 강동마을(현 동구 봉무동)이라는 최씨 집성촌에서 태어나 성장하여 생활했으며,

    아울러 최계란도 어릴 적 봉무동 강동마을에서 자랐다. 최계란의 구체적인 가계내용은 다음의 과

    3) 최계란이 누구인지를 밝히기 위해 오랫동안 노력한 사람은 영남아리랑보존회 정은하 회장이다. 정은하 선생은 여러 번

    필자에게 조사한 내용을 알려주었고, 또한 함께 방문하여 새로운 사실을 밝히고자 노력하였다.

  • 최계란 명창과 “대구아리랑” 고찰 71

    Journal of Daegu Gyeongbuk Studies

    같다.

    최계란의 가계도

    崔崑發 - 李佳東

    |

    慶州 崔廷晋 - 固城 李順伊

    |

    奉姬 - 聖澤 - 元澤 - 奉順 - 熊澤(良煥) - 駿煥 - 載煥 - 畢烈(桂蘭)

    (장녀) (장남) (2남) (2녀) (3남) (4남) (5남) (3녀)

    16세의 최계란 70대 후반의 최계란

    최계란은 1930년 10세 때 대구 달성권번(達城券番)에 들어가4) 강태홍으로부터 가야금병창을 지도받은

    것으로 알려졌다.5) 그리고 4년 후 1934년부터는 대외적인 음악활동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경성방송국의

    출연이다. 달성권번 소속의 기생 최계란은 1934년부터 1939년까지 명고수 임종성과 함께 가야금병창 “개

    고리타령”과 “고당상”(高堂上), 단가 “몽중가”(夢中歌), 민요 “보렴”(報念) 등 여러 곡을 방송하기 위해 경

    성방송국에 출연한 것이다. 아울러 경성방송국 출연과 녹음된 음반내용을 확인해보면 장구반주도 많이

    하였다. 그런데 1935년 8월에는 조선권번 소속으로 서울시 중구 낙원동 293-13호에서의 기생영업허가를

    종로경찰서에서 얻은 바 있다.6) 따라서 1934년부터 서울의 조선권번에 기적을 두면서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는 부산 동래권번에 있었던 최계란이 “대구아리랑”을 음반에 취입했다고 방송이나 연구에서7)

    밝히고 있다. 1930년대 전후 동래권번의 “계란”으로도 밝히고 있어8) 그러하다. 그렇지만 필자가 확인한

    4) 「경성방송국국악방송곡목록」(서울:민속원, 2000), 216쪽(1934년 10월 28일). 최계란은 1934년 달성권번에 있으면서 경

    성방송국에 출연하여 고당상(高堂上), 남도잡가(南道雜歌), 민요(民謠), 제비노정기(제비路程記), 춘향자탄가(春香自嘆歌)를

    노래하였다.

    5) 宋芳松, 「한겨레음악인대사전」(서울:보고사, 2012), 882쪽.

    6) "妓生營業許可. 鐘路署分. ▲樂園洞 二八三番地의 十三號 崔桂蘭(朝鮮) ▲光化門通 一一三番地 黃瑞雲(漢城)," 「매일신

    보」, 1935년 8월 3일자(5).

    7) 유대안, “대구아리랑”, 「2013 대구예총 아트 포럼:대구아리라의 예술성 탐구」(대구:한국예총대구광역시연합회, 2013),

    6-7쪽 및 각주2) 참조.

    8) 朴元杓, 「釜山變遷記」(釜山:太和出版社, 1970), 132쪽.

  • 72 손 태 룡

    대구경북연구 제13권 제2호

    바로는 대구 출신의 최계란, 곧 “대구아리랑”을 음반에 취입한 최계란은 1936년 당시 동래권번에 소속되

    어 있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동명이인(同名異人) 최계란이 동래권번에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 를 통해서 확인이 가능하다.

    동래권번 최계란의 여동생 기사

    “妓生兄둔 사랑이 悲劇. 鐵路우 이슬로 스러진, 相思의 靑春男女. 十六日夜 京釜線 龜浦驛 慘變.【釜

    山支局電話】만물 소생의 화희를 먹음은 남국의 아릿다운 봄긔운이 바야흐로 지트랴하는 때 꽃다운 청춘

    남녀가 철도의 이슬로 사라진 비참한 변사가 동반하엇다. 十六일 밤九시二O분경 부산(釜山)을 떠난 북행

    급행렬차(北行急行列車)가 경부선 귀포역(龜浦驛) 부근을 통고할즈음 힘차게 달리는 렬차의 박휘밋헤 달

    려든 두사람의 거림자는 마츰내 구할길 없시 비참한 최후를 짓고 마럿다. 이들은 울산군 서생면(蔚山郡

    西生面)에 사는 최소웅(崔小熊)(二四)이라는 압날양양한 재자(才子)와 동래읍 수안동(東萊邑 壽安洞)에

    살며 오는 三월에 동래일신녀자고등보통학교(一新女高普)를 졸업한 재원(才媛) 최난지(崔蘭芝)(二二)

    로서 四년전부터 서로 사랑을 속삭이어 장래를 굿개 언약하엇섯스나 남자측부모는 재원이 동래권번(東萊

    券番) 기생 최계란(崔桂蘭)의 동생이라는 것을 리유삼어 그 가정이 불미타고 절대로 이들의 결혼을 허락

    하지 아니한 결과 필경은 이와가튼 정사극을 이르킨 것이라 한다.”9)

    위 는 1933년 2월 18일자 「매일신보」의 기사이다. 이 일간지 기사에 의하면, 동래권번에 있는

    최계란의 여동생 최난지의 나이가 22세임을 밝히고 있다. 대구 출신 최계란은 1920년생이므로 1933년에

    는 13세가 되며, 더구나 여동생의 나이가 22세라고 밝히고 있어 대구 출신의 최계란이 아님이 분명하다.

    곧 동래권번 소속의 최계란은 대구 출신의 최계란보다 10살 이상이나 많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대구

    출신의 최계란과 당시 부산 동래권번 소속의 최계란은 서로 다른 사람이 확실하다. 1933년 당시 “대구아

    리랑”을 취입한 대구 출신의 최계란은 대구 달성권번에 소속되어 있었다. 한편 최계란은 이후에 부산 초

    량에서 장미요정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10)

    가야금명인 강태홍 명고수 임종성

    9) 「매일신보」, 1933년 2월 18일자(2). 견명조와 밑줄은 필자가 알기 쉽도록 하였다.

    10) 영남아리랑보존회 정은하 회장은 부산 탈놀이 동래야류 명예보유자인 문장원(1917-2012)선생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를

    필자에게 알려주었다.

  • 최계란 명창과 “대구아리랑” 고찰 73

    Journal of Daegu Gyeongbuk Studies

    조선성악연구회는 남선순회연주회 중 1935년 10월 24일부터 3일 간 대구극장에서 연주회를 가졌다.11)

    이 연주회에 최계란이 당시 국창이던 송만갑을 비롯하여, 정정렬, 이동백, 오태석, 조앵무 등 8명과 함께

    출연하였다. 그만큼 높은 수준에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이듬해 1936년에는 “대구아리랑”을 비롯하

    여, 가야금병창의 춘향가 중 “비몽사몽”(非夢似夢), 남도소리 “보렴”(菩念)과 “새타령”, 남도잡가(南道雜歌)

    “긴농부가”와 “자진농부가” 그리고 장구로 반주한 기악 “봉장취”(鳳長醉), 단가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음

    반에 취입하였다.12) 서울 조선권번 소속의 기생으로 활동하였던 시기에 “대구아리랑”을 취입했던 것이다.

    이렇듯 1936년 8월에 밀리온(Million)음반으로 “대구아리랑”이 발매되었다. 밀리온레코드의 유성기음

    반에 최계란13)이 남긴 남도잡가 “대구아리랑”의 선율은 강원도의 “자진아라리” 및 “긴아라리”, 곧 “강원

    도아라리”의 선율을 담고 있는 민요이다. 한편 대구근대역사관에 소장되어 있는 최계란의 “대구아리랑”

    음반은 그의 오빠 최양환(崔良煥, 본명은 崔熊澤, 1910-1985)이 1983년 8월 9일에 부른 “아라리요”(일명

    “불로아리랑”)로 녹음된 선율과 거의 같다.( 참조) 최양환이 부른 녹음자료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의 최정여(崔正如)와 임갑랑(林甲娘)이 채록 및 녹음한 것이다.14) 당시 최양환은 고향 대구에서 생활하고

    있을 때 동구 불로1동 노인정에서 노래했던 것이다.

    “대구아리랑”이 담긴 Million음반 “대구아리랑”이 담긴 Million음반 레이블

    11) “朝鮮聲樂硏究會 大邱서公演. 二十四日부터三日間.【大邱】朝鮮聲樂界의 一流名唱으로 組織된 朝鮮聲樂硏究會에서는 얼

    마전부터 南鮮各地를 巡廻演奏中이던바 이번에 來邱한 것을 機會로 本報大邱支局後援下에 二十四日부터 三日間 每日午

    後七時부터 大邱劇場에서 聲樂大會를 開催하기로 되엿는데 出演者들이 國唱 宋萬甲을 筆頭로 丁貞烈, 李東伯, 吳太石,

    崔桂蘭, 趙鸚鵡 外八名의 名唱들인만치 人氣沸騰하는 中에 잇다.” 「매일신보」, 1935년 10월 24일자(3).

    12) “1936년 8월: 「三千里」(1936) 8권 8호에 발표된 “조선·한성·종로 삼권번(三券番) 기생 예도(藝道) 개평(慨評)"에 소개

    됐다. 일제강점기 그녀가 취입한 가야금병창의 춘향가 중 "비몽사몽"(非夢似夢), 남도소리 "보렴"(菩念)·"새타령," 남도

    잡가(南道雜歌) "긴농부가"·"자진농부가," 그리고 장구반주한 기악 "봉장취"(鳳長醉)·단가 "남한산성"(南漢山城)은 군소

    회사음반에 전한다.” 宋芳松, 「한겨레음악인대사전」, 882쪽 최계란 항목 참조.

    13) 대구MBC(96.5Mhz) 창사 50주년 특별기획으로 라디오 다큐멘터리 3부작 “아리랑”이 2013년 10월 2일(수)부터 매일 3일

    간 오전9시5분부터 9시55분까지 이영환 연출로 방송되었다, 제1부는 “아리랑, 인류의 노래가 되다”(내레이션 김명곤-배

    우, 전 문화부장관). 제2부는 “영남의 아리랑, 아리랑의 미래”(내레이션 김연갑-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 제3부는

    “대구아리랑을 아십니까?”(내레이션 류강덕-대구MBC 라디오)이다. 제3부 “대구아리랑을 아십니까?”와 사단법인 영남

    아리랑보존회 정은하 회장에 의해서 최계란과 관련되는 여러 가지 내용을 알 수 있었다. 곧 잡지 「삼천리」 8권 8호

    에 의하면 최계란이 권번 소속의 기녀이며, 강태홍의 지도를 받아 유성기음반에 취입했고, 인기가 높아 경성방송국에

    1934년부터 1939년까지 출연했다. 그리고 경주권번 출신이며 대구국악협회 제6대(1977.7-1977.12)와 제7대

    (1977.12-1978.11) 지회장을 역임한 최금란(崔錦蘭)하고는 전혀 관련이 없다는 사실, 말년에 부산 동래권번에 있었으며

    이후 요리점(요정)을 경영하였음을 밝혔다. 또한 최계란은 6남 3녀 중 셋째 딸이며, 1983년에 “불로아리랑”(자진아라리)

    을 동구 불로1동에서 부른 최양환은 그의 큰오빠이고, 동구 봉무동의 대월사 월산스님(崔昌列, 1945년생)이 큰오빠의

    아들(조카)임을 확인했다고 밝히고 있다.

    14) 崔正如‧千惠淑, 「韓國口碑文學大系」(城南:韓國學中央硏究院, 1985), 7권 13책(大邱直轄市編), 797쪽.

  • 74 손 태 룡

    대구경북연구 제13권 제2호

    최계란이 1936년에 취입(Million CM806-A)한 밀리온음반 레이블()에 의하면, “嶺南雜歌 大

    邱아리랑 崔桂蘭 伴奏밀리온鮮洋樂團”15)이라고 밝히고 있다. 장구와 가야금 그리고 바이올린이 반주하기

    때문에 선양악단(鮮洋樂團)이라 한 것이다. 곧 장구와 가야금의 조선악기[鮮]와 바이올린의 서양악기[洋]

    가 함께 반주한 악단[鮮洋]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최계란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가 없어 그가

    어떠한 국악인인지 잘 알 수 없었다. 다만 달성권번(대구)16) - 조선권번(서울)17) - 동래권번(부산)18) 소

    속의 기생으로 활동했다는 최계란이 음반에 취입한 내용을 분석해보면,( 참조) 자신과 강태홍의

    소리는 물론 주로 가야금과 장구를 번갈아가며 맡았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가야금명인 강태홍이 자신의

    스승일 것으로 미루어 짐작이 된다. 강태홍은 일찍이 달성권번 - 경주권번 - 울산권번 - 동래권번에서

    가야금의 실기사범으로 있었다.19) 그러므로 “대구아리랑”의 가야금병창은 최계란이 노래하고 강태홍이

    장구를 맡았을 가능성이 높다.

    효산(曉山) 강태홍20)은 1893년 3월 21일 전라남도 무안의 세습무가(世襲巫家) 출신인 강용안(姜用安)

    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900년(7세) 부친이 사망했으며, 이듬해 1901년 8세부터 김창조(金昌祖,

    1865-1919)에게서 가야금을 전수받았다. 이후 1911년(18세) 고향을 떠나 1910년에 조직된 대구기생조합

    (大邱妓生組合)을 거쳐 1924년 경주권번(慶州券番)에서 최금란(崔錦蘭, 1910-1974), 이소향 등과 같은 제자

    를 양성했다. 한편 1918년 당시 대구기생조합 소속의 32명 기생 중 28명이 가야금을 연주했고, 그 28명 중

    22명이 가야금병창을 연주하였다.21) 당시 가야금과 가야금병창을 가르친 명인은 강태홍이었던 것이다.

    강태홍은 1926년 서울에서 가야금병창으로 이름이 나면서 이소향과 함께 상경하여 활동하면서, 1929년

    대구 출신의 박차경(朴且更, 1911-1990)에게 풍류와 산조를 가르쳤다. 한편 대구기생조합은 1927년에 달

    성권번으로 확대 조직되었다. 1932년에 발족한 조선악협회(朝鮮樂協會)의 요곡부(謠曲部)의 일원으로 조

    학진, 이동백, 오태석 등과 함께 활동했고, 1933년 조선음률협회(朝鮮音律協會) 주최 명창대회에 출연했

    다. 1934년 5월 11일 그는 이동백, 김동강, 김용승, 김종기, 김창룡, 김채련, 박녹주, 송만갑, 심상건, 오태석,

    정정렬, 한성준, 이상의 발기인과 함께 1934년 4월 24일에 설립한 조선성악원(朝鮮聲樂院)을 조선성악연

    구회로 개칭하여 다시 출범시켰다.

    그 후 1937년에 명창 박동진(朴東鎭, 1916-2003)과 함께 경주권번에 사범으로 있으면서, 아울러 대구

    달성권번과 울산권번을 거쳐 1939년에 부산 동래권번(東萊券番)에서 자리를 잡고 살면서 당시 동기(童妓)

    15) “밀리온레코드 第一回巨彈 朝鮮뮤-직 大邱아리랑 崔桂蘭 今月 二十一日부터 發賣.” 「每日申報」, 1936년 8월 22일자

    (2), 8월 28일자(7); 「朝鮮日報」, 1936년 8월 23일자(2), 9월 16일자(7), 9월 21일자(1) 광고 참조.

    16) 宋芳松․宋相赫 外, 「경성방송국국악방송곡목록색인」(서울:민속원, 2002), 648쪽. 1934년 10월 28일자(216)에 의하면,

    최계란은 대구 달성권번 소속으로 “高堂上”, “南道短歌”, “民謠”, “제비路程記”, “春香自嘆歌”를 방송했음을 알 수 있다.

    17) 宋芳松, 「한겨레음악대사전」, 882쪽. 「三千里」(京城:三千里社, 1936), 제8권 제8호, 229-236쪽에 발표된 의 “朝鮮·漢城·鐘路 三券番 妓生藝道 槪評”에 소개된 내용을 근거하면, 최계란은 1936년 8월 1일 이전에 서울 조

    선권번에 소속되어 가야금을 특기로 활동하고 있는 명기(名技)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부산 동래권번에 있을 때 “대구아

    리랑”을 취입했다고 하는 내용은 수정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18) 「매일신문」, 2012년 12월 18일자. 유대안의 “1936년 음반 취입 대구아리랑 아시나요” 기사 참조.

    19) 손태룡, 「한국전통음악가연구」(서울:보고사, 2011), 118쪽.

    20) 송방송, 「증보한국음악통사」(서울:민속원, 2007), 588쪽; 宋芳松, 「한겨레음악인대사전」, 42-43쪽 참조.

    21) 손태룡, 「대구기생조합 소속의 기생 고찰-「朝鮮美人寶鑑」을 중심으로-」, 「한국전통음악가연구」(서울:보고사, 2011),

    221-253쪽 참조.

  • 최계란 명창과 “대구아리랑” 고찰 75

    Journal of Daegu Gyeongbuk Studies

    였던 원옥화(元玉花, 1928-1973)를 비롯하여, 강남월(康南月), 김춘지(金春枝), 구연우(具演祐), 신명숙(申

    明淑) 등 여러 제자를 길렀는데, 김춘지는 뒤에 가야금산조 및 병창의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1939년에

    는 이동백의 은퇴공연 때 출연했고, 대동가극단을 따라 지방공연에도 출연했으며, 여러 음반에 산조와

    병창을 취입하였다. 이후 전국에서 음악활동을 꾀하다가 해방 후 부산에 완전히 거주하면서 김창조에게

    배운 산조를 갈고 다듬어서 강태홍류 가야금산조를 완성하였다.

    “대구아리랑” 음반 광고(「每日申報」, 1936년 8월 22일자 2면)

    “대구아리랑”을 취입한 밀리온레코드사는 한국인이 설립한 소규모 음반회사로 추정되고 있으며, 서울

    밀리온레코드회사에서 자체적으로 음반 생산시설이 없어 일본 오사카 코카(Kokka)레코드회사의 시설을

    이용하여 제작했음을 음반 레이블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밀리온음반은 1936년 8월부터 같은 해 10월까지

    3개월 간 20매의 한국음악만 발매했는데, 이듬해인 1937년 3월부터 고라이(Korai)라는 상표로도 음반이

    발매되었다. 밀리온과 고라이 레이블로 발매된 국악음반으로는 판소리 명창 이화중선, 임방울, 김남수, 조

    소옥, 경서도 명창 이영산홍, 고일심, 대금 명인 박종기, 가야금 명인 강태홍, 가야금병창 명인 최계란 등의

    녹음이 있다.

    “대구아리랑” 음반 광고(「朝鮮日報」, 1936년 9월 16일자와 21일자 7면)

  • 76 손 태 룡

    대구경북연구 제13권 제2호

    밀리온레코드는 1936년 8월 22일에 제1회 신보 발매 광고가 처음 있었으며( 참조), 같은 해

    10월말까지 약 3개월 정도 발매 광고가 나타난다( 참조). 그리고 1937년 3월부터 고라이(Korai,

    곧 高麗)라는 상표로 명칭이 바뀌어서 재발매되었다( 참조). 최계란이 취입한 음반이 명칭만 바

    뀌어 모두 재발매되어 같은 음반이 밀리온과 고라이로 함께 나타난다.22) 1937년 3월부터 음반을 발매한

    고라이레코드는 밀리온레코드를 승계한 음반회사로 이해할 수 있다. 음반번호 체계가 바뀌면서 고라이라

    는 상표만 단독으로 쓰였던 것이다. 또한 바뀐 음반번호 체계 속에는 이미 문을 닫은 밀리온회사의 음반

    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고라이는 이미 없어진 밀리온회사에서 발매한 음반을 재발매하는 회사였던

    셈이다.

    “대구아리랑” 음반 광고(「朝鮮日報」, 1937년 3월 10일자 1면, 3월 11일자 4면)

    고라이레코드는 한국음악과 일본음악을 함께 발매했으나 서로 관련성은 없다. 고라이가 1938년 4월에

    창립 1주년 기념광고23)를 내고 있으므로, 밀리온을 직접 승계한 것이 아니라 음반을 인계받아 발매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라이레코드 역시 1938년 9월까지만 광고가 나타나는 것을 보면 대략 2년 정도 한국음반

    을 발매한 회사임을 짐작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최계란의 “대구아리랑” 음반은 레이블이 다른 2매가 있

    는 셈인데, “Million CM806-A”와 “Korai CM806-A” 음반이 그것이다. 결국 음반 회사명만 다른 같은 음

    반이다. 한편 고라이에서 발매광고하면서 밀리온 레이블에 없는 내용이 있는데, 그것은 “대구아리랑”의

    편곡자이다. 지금까지 알 수 없었던 최계란이 취입한 “대구아리랑”의 편곡자는 키타키 세이키토(北木正

    義)이다.24)

    우리가 흔히 메나리토리로 된 “아리랑”이 경상도와 직결된다고 한다. 유대안은 “영남지역 아리랑의 음

    악양상”25)에서 최계란의 창법에 대해서, “그는 목소리가 단아하면서 애조섞인 남도소리 창법의 소유자이

    22) 「한국 유성기음반」(서울:한걸음․더, 2011), 4권, 1256-1257쪽 참조.

    23) 「朝鮮日報」, 1937년 4월 13일자(1).

    24) 「朝鮮日報」, 1937년 3월 10일자(1). “高麗 朝鮮盤 第一回 發賣 十吋 南道雜歌 大邱아리랑 北木正義 京畿雜歌 興打令.”

    아울러 「朝鮮日報」, 1937년 3월 11일자(4)에 의하면, “대구아리랑” 뒷면에 담긴 경기잡가 “흥타령”을 부른 가수는 고

    일심(高一心)임을 확인할 수 있다.

    25) 유대안, “영남지역 아리랑의 음악양상”, 「아리랑의 세계화-영남아리랑의 재발견」(대구:영남민요‧아리랑보존회,

  • 최계란 명창과 “대구아리랑” 고찰 77

    Journal of Daegu Gyeongbuk Studies

    다”라고 밝히고 있다. 최계란이 취입한 “대구아리랑”을 들어보면, 경상도의 표현이라 할 만큼 힘차게 노래

    하고 있음을 느낀다. 또한 최계란이 취입한 “대구아리랑”은 장구를 비롯하여 가야금과 바이올린이 함께

    반주를 맡고 있다. 한편 노래는 엇모리로 하며, 전주․간주․후주는 자진모리로 장단을 표현하고 있다.

    민요에서 이렇게 가곡과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은 밀리온선양악단의 편곡자 키타키 세이키토가

    기존 선율을 새롭게 편곡하여 만든 것이 분명하다.

    2. “대구아리랑”의 내용

    최계란이 취입한 음반의 가사지에 의하면( 참조), “대구아리랑”의 가사내용은 아래와 같다.

    1절에서는 “고향으로 떠나는 님을 애절하게 기다리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으며, 2절에서는 “떠난 님에

    대한 그리움을 슬피우는 두견새 울음과 구름속에 숨어 있는 고향의 달도 여울물에 눈물흘린다”하여 곧

    떠난 님을 간절히 그리는 마음을 자연의 풍광에 담아 표현하고 있다. 더욱이 노랫가사에는 ‘낙동강’과 ‘금

    호강’이란 대구지역의 강(江) 명칭이 나타나고 있다. 아래의 ”대구아리랑“ 가사가 바로 음반 가사지에 있

    는 내용이다.

    “대구아리랑”의 가사지

    위 최계란의 “대구아리랑” 가사지()에 기록된 내용을 알아보기 쉽게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2009), 86쪽.

  • 78 손 태 룡

    대구경북연구 제13권 제2호

    洛東江 해 다진데 우리님아 關山萬里26) 어디라고 가시라오

    아롱아롱 아롱아롱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고개 넘어가네

    언제나 오실나오 내사랑아 봄풀이 풀으거든 오실나오

    아롱아롱 아롱아롱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고개 넘어가네

    空山27)에 우는杜鵑28) 너 무삼29)일로 님그러 서근30)肝臟 다 녹이노

    아롱아롱 아롱아롱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고개 넘어가네

    관산만리 구름속에 저 달이 숨어 錦湖강31) 여울물32)에 눈물지네

    아롱아롱 아롱아롱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고개 넘어가네

    그런데, 최계란이 실제로 노래한 가사는 가사지의 내용과 조금 다른데, 그 가사는 아래의 내용과 같다.

    당시는 노래를 취입할 때 연주가에 의해 이렇게 조금 다르게도 부르기도 했었다. 1절에서는 “가버린 님이

    언제 올지 모르는 상황을 표현”하고 있으며, 2절에서는 “님에 대한 그리움을 공산에 우는 두견새의 울음

    과 금호강 물에 비친 구름속의 달도 눈물지어 떠난 님을 간절히 그리는 마음을 자연의 풍광에 담아 표현”

    하고 있다. 아래의 내용이 바로 최계란이 음반에 취입한 노랫가사를 필자가 직접 음반을 듣고 채록(採錄)

    한 것이다.

    낙동강 기나긴줄 모르는 님아, 정나미 거둘라고 가실라요.

    아롱아롱 아롱아롱 아라리야, 아리랑 고개로 넘어가네.

    언제나 오실라요 내사랑아, 봄풀이 푸르거든 오실라요.

    아롱아롱 아롱아롱 아라리야, 아리랑 고개고개 넘어가네.

    공산에 우는 두견 너 무슨일로, 임그려 썩은 간장 다 녹이노.

    아롱아롱 아롱아롱 아라리야, 아리랑 고개고개 넘어가네.

    관산만리 구름속을 저달이 숨어, 금호강 여울물에 눈물지네.

    26) 멀리 있는 고향의 산, 곧 먼 고향을 뜻한다.

    27) 공산(空山)은 대구의 팔공산(八公山)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28) 한편 단종 임금이 영월 청령포에서 사사되자 그의 영혼이 환생해 두견새가 됐다고 전해지고 있다. 곧 아주 애절한 심정

    을 나타내는 새로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29) ‘무삼’은 무엇의 고어(古語)이므로 ‘무슨’을 뜻한다.

    30) ‘썩은’을 말한다.

    31) 대구를 가로지르는 강이 금호강(琴湖江)인데, 화원유원지에서 낙동강으로 합류하는 하천이다.

    32) 강의 물살이 세게 흐르는 것을 말한다.

  • 최계란 명창과 “대구아리랑” 고찰 79

    Journal of Daegu Gyeongbuk Studies

    아롱아롱 아롱아롱 아라리야, 아리랑 고개고개 넘어가네.

    그리고 최계란에 의해 1936년에 두 절로 취입되어 발매된 “대구아리랑” 음반의 악곡과 그의 오빠 최양

    환이 1983년에 녹음한 엇모리장단33)의 “아라리요”(일명 불로아리랑)를 기존 작성된 오선보로 밝히면 다

    음의 과 와 같다.

    최계란이 취입한 “대구아리랑”

    33) 엇모리장단은 매우 빠른(♪=180) 3박자와 2박자가 3+2+3+2로 구성된 8분음 10박자의 장단으로, 엇모리는 박자가 엇

    갈려 나아가는 빠른 장단이라는 뜻이다. 때문에 10박자의 장단이나 3박자로 된 긴 박자와 2박자로 된 짧은 박자가 섞

    인 4박자로 느껴진다.

  • 80 손 태 룡

    대구경북연구 제13권 제2호

    최양환이 녹음한 “아라리요”

    위 의 최계란이 1936년에 취입한 “대구아리랑”과 그의 오빠 최양환이 1983년 녹음으로 남긴

    “아라리요”의 악보()는 결국 서로 같은 악곡이다. 유대안의 선행연구에 의하면,34) 최계란의 “대

    구아리랑”은 전주, 간주, 후주를 자진모리장단으로 연주하고, 노래 부분은 엇모리장단으로 노래한다. 그리

    고 최양환이 부른 “대구아리랑”은 “영천아리랑”처럼 강원도 “자진아라리”류이다. “자진아리리”의 후렴

    ‘아라라요’에서 대부분 [/도도 라솔 미 -/]로 하행하여 마지막 “요”의 ‘미’ 음을 길게 지속하는 경우가 대부

    분이지만, 최양환의 “아라리요”에서는 ‘미-솔-미’로 상행 도약하여 하행하는 시김새를 갖는다.

    그리고 후렴 끝부분 ‘아라리야’에서도 대부분의 선율은 상행하거나 하행한 다음 ‘라’ 음으로 마무리 하

    는 경우가 많지만, 이 곡에서는 평으로 ‘라’ 음을 내다가 ‘솔’ 음으로 장2도 하행하여 후렴의 악구를 마무리

    한다. 이러한 현상은 메나리토리의 하행선율에서 ‘라’ 음이 ‘솔’ 음으로 흘러내려가려는 음계적 특성을 보

    여주는 것이다. 가창자 최양환은 1절에서 자신의 이름을 넣어 불렀고, 2절에서는 음이 점차 고조되어

    ‘도’(C) 음에서 반음 올라간 ‘내림레’(D♭) 조(調, key)로 불렀다. 필자의 의견을 덧붙이면, 대구음악이라는

    34) 유대안, “영남지역 아리랑의 음악양상”, 「아리랑의 세계화-영남아리랑의 재발견」, 85-87쪽 참조.

  • 최계란 명창과 “대구아리랑” 고찰 81

    Journal of Daegu Gyeongbuk Studies

    관점에서 볼 때 가장 특징적인 요소는 바로 표현력에 있는 것이다. 곧 경상도 언어와 직결되는 표현으로

    굳굳하게 힘차게 표현하는 것이 바로 대구음악의 특징이다. 이러한 현상은 대구 관기 향선이 1908년 미국

    빅타음반에 취입한 “평시조”에서도 마찬가지임이 확인된 바 있다.35)

    그런데 필자가 확인한 바로는 몇 군데 가사가 다르게 알려져 있다. 그것은 음반 가사지에 수록된 내용

    과 실제 최계란이 취입한 음반에서의 내용을 견주어 본 결과이다. 특히 음반에 녹음된 최계란의 1절 노랫

    가사 중에서 유대안은 “뻐꾸기 우려거든 오실나요”라고 밝히고 있다(의 가사 참조). 그러나 이

    부분의 정확한 가사는 “봄풀이 푸르거든 오실나요”이다. 한편 후렴부분인 “아리랑 고개로 넘어가네”는

    1절 첫 번째만 이렇게 부르고, 두번째와 2절 첫 번째와 두 번째 모두는 “아리랑 고개고개 넘어가네”로

    노래하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 정확하게 나타내자면 다음의 과 같이 표현해야 한다.

    요컨대, 1920년생인 최계란은 10세에 대구 달성권번에 들어가 강태홍으로부터 가야금 및 장구 수업을

    받았다. 1934년부터는 명고수 임종성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 함께 경성방송국에 출연했으며, 1935년 8월에

    는 조선권번 소속으로 서울 낙원동에서 예기영업을 할 수 있는 허가를 종로경찰서로부터 받은 바 있다.

    그러므로 최계란은 1934년부터 1939년까지 임종성과 함께 서울에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고, 아울러

    서울 조선권번에 소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곧 임종성의 장구반주로 경성방송국에 출연하였고, 1936년에

    는 강태홍의 가야금반주와 함께 음반에 취입했던 것이다. 이후 부산으로 내려가 동구 초량에서 장미요정

    을 개설하여 영업을 한 것으로 보았다.

    1936년에 취입된 “대구아리랑”은 당시 대구지역에 널리 불렸던 대구의 이다. 그것은 자신의

    친오빠 최양환이 1983년에 부른 “아리리요”와 같은 선율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고제(古制) “아리랑”에 해

    당되는 후렴부분, 곧 ‘아롱아롱 아라리야...’가 최계란이 취입한 음반 및 가사지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편 “대구아리랑”은 최양환이 부른 “아라리요”와 같은 것과 같이 1936년 이전에 “아라리요”라는 노래로

    불린 대구의 토속민요가 1936년에 밀리온음반회사에 의해 새롭게 가사를 만들고, 키타키 세이키토(北木

    正義)가 편곡을 하면서 전주 - 간주 - 후주를 넣어 새롭게 만든 노래일 수 있다고 하였다. 더욱 경상도

    언어의 스타일로 표현하고 있음이 대구음악의 특징적이라고 강조하였다. 하여튼 최계란이 취입한 “대구

    아리랑”은 대구지역 고유의 “아리랑”임에는 틀림이 없다.

    35) 이진원, “대한제국기 대구 평시조에 관한 음악적 검토-기생 향선의 평시조를 중심으로-”, 「韓國音盤學」(서울:한국고

    음반연구회, 2011), 제21호, 61-73쪽 참조.

  • 82 손 태 룡

    대구경북연구 제13권 제2호

    최계란의 “대구아리랑” 악보

    노래 최계란, 편곡 北木正義(1936)

    채보 및 채록 손태룡(2013)

    엇모리장단

    1. 낙 동 강 기 나 긴 줄 모 르 는 님 - 아 - -

    2. 공 산 에 우 는 두 견 너 무 슨 일 - 로 - -

    정 나 미 거 둘 라 고 - 가 실 라 요

    임 그 려 썩 은 간 장 - 다 녹 이 노

    아 롱 아 롱 아 롱 아 롱 아 라 리 - 야 - -

    아 리 랑 고 - 개 로 - 넘 어 가 네

    아 리 랑 고 개 고 개 - 넘 어 가 네

    언 - 제 나 - 오 실 라 요 - 내 - 사 랑 - 아 - -

    관 산 만 리 - 구 름 속 을 - 저 달 이 숨 - 어 - -

    봄 풀 이 푸 르 거 든 - 오 실 라 요

    금 호 강 여 울 물 에 - 눈 물 지 네

    Ⅳ. 맺는말:“대구아리랑”의 전승

    현재 “아리랑”의 시원은 1790년 이승훈의 「만천유고」에 나타난 아로롱(啞魯聾)으로 보고 있다. 강원

    도 지역에서 노동요로 모심기 때 불리어진 “긴아라리”와 한강으로 뗏목을 옮기면서 부른 “자진아라리”(뗏

    목아리랑)가 전국으로 전파되었다. 또한 1926년 나운규가 제작한 무성영화 에 사용된 “본조아

  • 최계란 명창과 “대구아리랑” 고찰 83

    Journal of Daegu Gyeongbuk Studies

    리랑” 이후 전국적으로 노래가 만들어졌다. 그 대표적인 이 바로 1933년 시에론레코

    드로 발매된 “밀양아리랑”(가야금병창 한성기 노래)과 이듬해 1934년 오케이레코드사가 당시 “밀양아리

    랑”을 변형시킨 “신밀양아리랑”(기생 박부용 노래)이다. 이 음반은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이러한 전국의 분위기에서 대구에서도 아리랑이 창작되어 발매됐는데, 그 음반이 바로 1936년 밀리온

    음반에 취입된 “대구아리랑”(최계란 노래)인 것이다. 한편 이러한 영향으로 1937년 오케이레코드에 취입

    된 부산 “동래아리랑”(서영신 노래, 피리 반주)이 있다. 특히 1934년 발매된 “신밀양아리랑”에서의 반주가

    주목된다. 그것은 반주로 사용된 가야금과 장구 그리고 바이올린과 함께한 선양악단이 반주를 하였던 이

    유이다. 선양악단은 “대구아리랑”에서 나타나듯, 장구 및 가야금을 비롯하여 바이올린이 함께 했다는 사

    실이다. 때문에 당시 국악기와 서양악기가 함께한 것을 새로운 악기편성으로 볼 수 있다.

    음악학자 권오성은 다음과 같이 피력한 바 있다.36) 구비전승물이 어떤 시대적 요구와 필요성에 의해

    창출되어 다수의 입으로 전승 향유될 때 생명력을 가지게 되며, 이것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 새로운 문화

    로서 자리잡을 때 문화적 창조성과 영원성을 담보하게 될 것이다. 또한 기존의 전통적 갈래와 정체성을

    공유할 때는 그 가치가 더욱 뚜렷해진다. 이런 면에서 새롭게 나타난 “대구아리랑”을 비롯하여, “구미아리

    랑”, “봉화아리랑” 등의 출현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기존 아리랑의 대표 주자격인 이나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이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초반에 창작된 이듯이 “대구아리

    랑”의 출현이나 가창운동은 새로운 전통의 계승이란 측면에서 주목된다.

    1936년 최계란이 밀리언음반에 취입한 “대구아리랑”의 선율과 가사가 오래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당시

    음반으로 발매 되었으므로 이미 널리 불리었던 것이다. 1937년 고라이음반회사에서 임시로 “대구아리랑”

    음반을 재발매하기도 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대구아리랑”이 대구지역의 특색 있는 대표적 민요로

    규정되려면 여러 내용이 새롭게 밝혀져야 할 것이고, 또한 많은 사람들이 계속 불러 전승될 때 이루어질

    것이다. 아울러 기존의 전통적 갈래와 정체성을 함께 할 때 그 가치는 더욱 뚜렷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앞으로 나은 전승 보존책이 요구된다.

    최계란이 취입한 음반내용

    Million CM804-A 短歌 南漢山城, B 興甫傳中 돈타령 趙素玉 長鼓崔桂蘭

    CM805-A 南道소리 菩念, B 새타령 崔桂蘭·趙素玉 長鼓,伽倻琴,大笒

    CM806-A 南道雜歌 大邱아리랑 崔桂蘭 伴奏밀리온鮮洋樂團

    CM809-A 器樂 鳳將娶(上), B (下) 合奏 伽倻琴姜太弘 大琴朴鍾基 長鼓崔桂

    CM813-A 南道雜歌 긴六字박이, B 흥타령 趙素玉 長鼓崔桂蘭

    CM815-A 春香傳中 非夢似夢(上), B (下) (伽倻琴竝唱) 崔桂蘭 長鼓姜太弘

    CM819-A 短歌 千里江山 崔桂蘭 長鼓姜太弘, B 鎭國名山 趙素玉 長鼓崔桂

    CM820-A 南道雜歌 긴農夫歌, B 자진農夫歌 趙素玉 崔桂蘭 長鼓 大笒 錚

    Korai CM804-A 短歌 南漢山城, B 興甫傳中 돈타령 趙素玉 長鼓崔桂蘭

    36) 권오성, 「아리랑의 상징성과 세계성」, 「아리랑의 세계화-영남아리랑의 재발견」, 5쪽.

  • 84 손 태 룡

    대구경북연구 제13권 제2호

    CM805-A 南道소리 菩念, B 새타령 崔桂蘭·趙素玉 長鼓,伽倻琴,大笒

    CM806-A(임) 南道雜歌 大邱아리랑 崔桂蘭 伴奏밀리온鮮洋樂團

    CM809-A 器樂 鳳將娶(上), B (下) 合奏 伽倻琴姜太弘 大琴朴鍾基 長鼓崔桂蘭

    CM813-A 南道雜歌 긴六字歌, B 興打令 趙素玉 長鼓崔桂蘭

    CM815-A 春香傳中 非夢似夢(上), B (下) (伽倻琴竝唱) 崔桂蘭 長鼓姜太弘

    CM819-A 短歌 千里江山 崔桂蘭 長鼓姜太弘, B 鎭國名山 趙素玉 長鼓崔桂蘭

    CM820-A 南道雜歌 긴農夫歌, B 자진農夫歌 趙素玉 崔桂蘭 長鼓 大笒 錚

    CM832-B 伽倻琴倂唱 竹杖芒鞋 倂唱崔桂蘭 長鼓姜太弘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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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계란 명창과 “대구아리랑” 고찰 85

    Journal of Daegu Gyeongbuk Stud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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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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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문접수일:2014. 08. 11, 심사완료일:2014. 10. 10, 최종원고:2014. 10.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