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정별?분야별 문화재의 수 2. 지정별?분야별 문화재명과 지정번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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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절 지정문화재 1. 지정별?분야별 문화재의 수 2. 지정별?분야별 문화재명과 지정번호 및 소재지 국 가 지 정 문 화 재 도 지 정 문 화 재 국 보 보 물 사 적 명 승 천 연 기념물 중요무형 문화재 중요민 속자료 유 형 문화재 무 형 문화재 기념물 민 속 자 료 문화재 자 료 2 4 ? 1 6 ? ? 1 ? ? ? 6 지정명 분류명 문 화 재 명 지정번호 비고 국 보 장양수급제패지 181호울진군 울진읍 고성리 708 울진봉평신라비 242호울진군 죽변면 봉평리 91 보 물 울진구산리삼층석탑 498호 울진군 근남면 구산리 1494-1 불영사응진전 730호울진군 서면 하원리 122 불영사대웅보전 1201호울진군 서면 하원리 122 불영사영산회상도 1272호울진군 서면 하원리 122 명 승 불영사계곡 6호 울진군 근남면 수곡리 산 121 856필지 울진의 굴참나무 96호 울진군 근남면 수산리 381-1 울진의 성류굴 155호 울진군 근남면 구산리 산30 외 3필지 울진 죽변리의 향나무 158호 울진군 죽변면 후정리 297-2 화성리 향나무 312호 울진군 죽변면 화성리 산 190외 1필 울진 쌍전리의 산돌배 나무 408호 울진군 서면 쌍전리 146-1 울진 행곡리의 처진소 나무 409호울진군 근남면 행곡리 627 유 형 문화재 불영사 삼층석탑 135호울진군 서면 하원리 122 울진향교 대성전 159호 울진군 울진읍 읍내리 653-1 평해향교 대성전 160호울진군 평해면 평해리 901 해월헌 161호울진군 기성면 사동리 433 불영사 부도 162호울진군 서면 하원리 산 34 울진 소광리 황장봉계 표석 300호울진군 서면 소광리 251-1 울진 내성행상불망비 310호울진군 북면 두천리 2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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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절 지정문화재

    1. 지정별?분야별 문화재의 수

     2. 지정별?분야별 문화재명과 지정번호 및 소재지

    국  가  지  정  문  화  재 도  지  정  문  화  재

    국 보 보 물 사 적 명 승천  연

    기념물

    중요무형

    문화재

    중요민

    속자료

    유  형

    문화재

    무  형

    문화재기념물

    민 속

    자 료

    문화재

    자  료

    2 4 ? 1 6 ? ? 1 ? ? ? 6

    지정명 분류명 문  화  재  명 지정번호 소    재    지 비고

    국 보장양수급제패지 181호울진군 울진읍 고성리 708  

    울진봉평신라비 242호울진군 죽변면 봉평리 91  

    보 물

    울진구산리삼층석탑 498호울진군 근남면 구산리

    1494-1 

    불영사응진전 730호울진군 서면 하원리 122  

    불영사대웅보전 1201호울진군 서면 하원리 122  

    불영사영산회상도 1272호울진군 서면 하원리 122  

    명 승 불영사계곡 6호울진군 근남면 수곡리 산

    121856필지

    울진의 굴참나무 96호울진군 근남면 수산리

    381-1 

    울진의 성류굴 155호울진군 근남면 구산리 산30

    외 3필지 

    울진 죽변리의 향나무 158호울진군 죽변면 후정리

    297-2 

    화성리 향나무 312호울진군 죽변면 화성리 산

    190외 1필 

    울진 쌍전리의 산돌배

    나무408호

    울진군 서면 쌍전리 산

    146-1 

    울진 행곡리의 처진소

    나무409호울진군 근남면 행곡리 627  

    유  형

    문화재불영사 삼층석탑 135호울진군 서면 하원리 122  

    울진향교 대성전 159호울진군 울진읍 읍내리

    653-1 

    평해향교 대성전 160호울진군 평해면 평해리 901  

    해월헌 161호울진군 기성면 사동리 433  

    불영사 부도 162호울진군 서면 하원리 산 34  울진 소광리 황장봉계

    표석300호울진군 서면 소광리 251-1  

    울진 내성행상불망비 310호울진군 북면 두천리 206-1  

  • 3. 국  보

      울진군에는 국보가 2점이나 있다. 국보가 지닌 가치의 크고 작음을 가늠하는 일반적인 기

    준을 설정하기는 어려우나 유래가 드문 것, 즉 독특하고 희귀한 것을 가려내기는 그리 어렵

    지 않다. 따라서 고려시대의 목조건물은 그 희소가치 때문에 모두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비

    석?탑?부도?석탑 등이 주류를 이루는 석조건축물의 경우도 이와 비슷한 기준이 적용되고

    있다. 따라서 울진군의 국보도 유래가 드문 관계로 희소성이 높기 때문에 당연히 지정될 수

    있었을 것이다.

    1) 장량수급제패지1)

    이 문서의 지정번호는 국보 181호이고 지정일자는 1975년 10월 13일이며 소유자는 울진장

    씨 대종회이고 울진군 울진읍 고성리 월계서원 내 국보각에 보관되어 있던 고려 희종(熙

    宗)1년(1205년)에 진사시(進士試) 병과(丙科)에 급제한 장양수(張良守)에게 내린 급제패지

    (及第牌旨)이다. 세로 44.3cm, 가로 88cm의 누런색 마지(麻紙) 두루마리에 행서와 초서로

    쓰여져 있다. 내용 중 고시에 참여했던 사람의 관직과 성(姓)이 열기(列記)되어 있는데, 곧

    “문하시랑(門下侍郞)……임(任)”에서 임은 임유(任濡)로 당시 지공거(知貢擧)를 여러 번 역임

    한 사실이《고려사》선거지(選擧志)에 나와 있어 고려시대의 유물임을 알 수 있으며, 또 글

    씨의 서풍으로도 알 수 있다. 그런데 고려사 선거지와는 약간 차이가 있으나, 형식은 송(宋)

    나라 제도에서 받아들인 듯하며, 고려 과거제도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는 조선시

    대의 대과?소과 급제자에게 내린 홍패(紅牌)?백패(白牌)와 같은 성격의 교지이다. 양식의 윤

    곽에 의하여 단조로웠던 조선시대의 홍패?백패교지의 서식과 구별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 사급(賜給)된 홍패의 숫자는 매우 많았으나 그 가운데에서 현재 남아있는 것

    은 실물이 4건, 전사(轉寫)되어 전해오는 것 2건 등 모두 6건이 있다. 이 중에서도 이 홍패

    는 가장 오래된 것이고 전형적인 형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를 살펴보는 것은 당시의 홍

    패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례의 하나라고 하겠다. 아래의 예시에 있어서는 될

    수 있는 한 원자료(原資料)와 동일한 형식으로 적고자 하였다. 다만 종서(縱書)로 되어 있는

    것을 편의상 횡서(橫書)하였으며, 또 모호하거나 결실(缺失)된 부분에 대해서도 오늘날의 학

    자들이 보완?판독한 것을 아울러 적고 □를 표시하였다.2)

    張良守 紅牌

    1. 右人張良守

    3. 判次點

    4. 敎可丙科

    5. 及第牒旨潗

    6. 敎故牒

    7. 泰和五年乙丑七月日牒

    8. 金紫光祿大夫參知政事太子少傳王

    9. 門下侍郞平章事寶文閣太學士同修國史柱國判戶部事任

    10. 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吏部尙書上柱國上將軍判兵部御史臺事崔

    2. 貢院所

  • 11. 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上柱國上將軍監修國史判禮部事奇

    12. 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修文殿太學士監修國史上柱國判吏部事崔

      2행(行)에 대해 ?고문서자료집성?에서는 ‘공원소(貢院所)’ 세 자(字)만을 보완하여 넣고

    있는 데 비해 후2자(後二者)에서는 ‘차정공원소(次定貢院所)’의 다섯 자를 추정해 넣고 있

    다.

      7행의 태화(泰和)는 금(金)나랑 연호(年號)로서 그의 5년 즉 을축년(乙丑年)은 고려 희종

    (熙宗) 원년(1205년)에 해당한다. 그런데 ?고려사? 권73, 선거 1, 과목 1, 선장조와 동서(同

    書) 권21, 세가(世家) 및 ?고려사절요? 권14에 의하면 이해 7월에 과시(科試)를 치르고 방

    방(放榜)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위의 ?고문서자료집성? 등 세 자료에서는 그와 달리 모두

    4월로 적고 있다. 이는 아마 홍패의 뒷부분에 후손이 추가로 기술하는 가운데에서 4월에 급

    제했다고 적어놓고 있는 데 기인하는 듯하나 그것은 잘못이고 7월로 판독하는 게 옳다고

    생각되므로 바로잡아 놓았다.

      8행 이후의 각 재상(宰相)들은 ?고려사? 권21, 세가, 신종(神宗) 3년 12월조에 “以崔詵守

    大尉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判吏部事?奇洪壽守大師柱國?任儒守大傳門下侍郞平章事”라 보

    이고, 동 4년 12월조에는 “以崔詵開府儀同三司上柱國?奇洪壽爲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任儒守大尉柱國”이라 보이며, 다시 동 6년 12월조에는 “以車若松守大尉中書平章事?崔忠獻

    爲中書侍郞平章事吏部尙書判御史臺事太子少師?王珪參知政事”라 하였고, 희종 즉위년 12월

    조에는 “以崔忠獻守太師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라 한 것으로 미루어 왕규(王珪)와 임유

    (任儒)?최충헌(崔忠獻)?기홍수(奇洪壽)?최선(崔詵)임을 알 수 있다.

      이로써 본 홍패는 희종 원년의 동당시(東堂試)에 응시한 장양수(張良守)에게 공원(貢院)의

    판정에 따라 교지(敎旨)로 병과급제(丙科及第)를 사(賜)하기로 하여 첩(牒)이 이르매 당시의

    수상(首相)인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판이부사(判吏部事) 최

    선(崔詵) 등 5명의 재상이 그 교지를 받들어 이 해 7월에 사급한 것이라는 해석을 할 수 있

    을 것 같다.

      장량수는 울진의 토성(土姓) 장씨(張氏)로서 그 가계는 족보에 기재되어 있으나,3)《고려

    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같은 관찬자료에는 나타나지 않음으로써 그의 관력(官歷)을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다. 다만 그 당시의 진사시는 조선과는 달리 등용고시(登用考試)의

    성격이 좀 더 강했기 때문에 장량수는 급제 후 중견관료로 진출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의 관력이 관찬사서에 나오지 않는 것은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어느 정도 추

    론할 수 있다. 당시 울진지역은 몽고와의 항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침입을 직접 받지 않았

    고 실권자인 최씨 집권자와도 접촉이 거의 없었던 지역이었다. 따라서 울진을 포함한 삼척

    일대는 피난의 처소였을 뿐 아니라 조정과의 연락도 불가능한 지역이었으므로 장량수도 귀

    향한 다음 급제홍패를 보관하면서 난을 피하였고 고려가 몽고에 굴복한 다음 다시 등용되었

    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추론이 가능하다면 그는 재등용 후 중앙관료로서 크게 진출하지 못했을 가능성을

    상정해 볼 수 있다. 이는 그가 등용되면서 그 가문에 관련있는 사람들이 다양한 진출을 보

    였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고 하겠다. 현존 홍패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기 때문에 국보로 지정된 것이다. 원래 이 홍패는 울진군 울진읍 고성리 월계서원(月溪

  • 書院)의 경덕사(景德祠)에 보관되어 있었으나 이후 언제부터 현재의 장소에서 보관하고 있

    다.

    2) 울진봉평신라비4)

      이 비의 지정번호는 국보 제 242호이고 지정일자는 1988년 11월 4일이며 소유자는 국유

    이고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 91번지에 소재하고 있다. 이 울진봉평신라비(蔚珍鳳坪新羅碑)는

    오랜 세월동안 땅속에 묻혀 있었고, 비문의 일부가 마멸(磨滅)되어 정확한 판독이 어려운

    상태이지만 법흥왕(法興王)11년(524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비(新羅碑)이다.

    1988년 3월 객토작업(客土作業)을 하다가 우연히 발견된 이 비는 발견된 장소를 원래의 위

    치로 생각하고 확인작업을 실시하였으나 원래의 위치가 아님이 밝혀져 발견된 장소에서 약

    간 떨어져 있는 마을 입구에 비각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

      신라가 영토확장으로 동해안 지역에 실직주(悉直州)를 설치하고 이곳 거벌모라지역(居伐

    牟羅地域)을 새로 편입함에 따라 주민들의 항쟁이 발생하자 신라에서는 이를 응징하기 위해

    육부회의(六部會議)를 열고 대인(大人)을 파견하여 벌을 주는 한편 다시 대항하지 않도록 하

    기 위해서 이 비를 세운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울진지역이 신라의 영토로 편입된 뒤 이 비

    가 세워지기 얼마 전에 대군(大軍)을 일으킬 만한 어떤 사건이 이곳에서 발생하였다. 이 사

    건을 해결한 뒤 당시의 국왕인 법흥왕과 13인의 신료(臣僚)들이 모여 그에 대한 사후 처리

    의 일환으로 이 지역에 대한 모종의 조처를 취하고 반우(斑牛)라고 표현된 소를 죽이는 등

    일정한 의식을 행한 뒤 관련자에게 책임을 물어 장육십(杖六十)?장백(杖百) 등의 형을 부과

    하고 다시는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지방민에게 주지시킨다는 것이 내용의 핵심이다.

      전체 높이가 204cm이고 글자가 새겨진 부분의 윗 폭은 32cm이며 아래 폭은 54.5cm이

    다. 전체 모양은 방형이 아닌 사다리꼴에 가까운 부정형(不整形)이다. 비신은 사면이 장방형

    인 자연석의 변성화강암(變性花崗巖)에 한 면을 다듬어 비문을 새겼으며, 규모는 작지만 형

    태는 고구려 장수왕 2년(414년)에 건립된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와 거의 유사한 고구려계

    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자체(字體)는 중국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북조풍(北朝風)의 해서(楷書)로 새겨져 있지만

    자획의 형태는 예서(隸書)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다. 문체도 전형적인 한문이 아니고 신라

    식의 독특한 것이어서 문자의 해석상 애매한 부분이 적지 않다. 더구나 비문 자체는 대체로

    양호하나 이자체(異字體)가 많이 사용되었고 일부는 마멸되어 있기 때문에 구체적인 내용

    파악이 어려워 견해차가 심한 부분이 있지만 전체적인 윤곽은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신라육

    부제(新羅六部制)실시와 법흥왕의 율령반포(律令頒布)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입증(記錄

    立證) 등 사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크다고 하겠다.

      1988년 3월 발견되어 4월초 공개되자 당시까지 알려진 신라 최고의 비석으로 관련 연구

    자들은 물론이고 그 이외 많은 사람들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았다. 법흥왕 11년이란 절대연

    대를 추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중고기(中古期) 다른 비문에 비해 글자 수가 많고 판독이

    가능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비는 고대사연구가 활성화되는 계기를 제공한 셈이 되어

    한국고대사연구회에서는 1988년 7월 22일?23일 양일간 계명대학교 동서문화회관 대회의실

    에서 「울진봉평신라비(가칭)의 종합적 검토」라는 주제로 학술세미나를 개최하여 이 비에

    대한 총체적인 검토를 진행하였다.5) 이 비 발견 10주년을 기념하여 울진군과 한국고대사연

    구회에서는 1998년 3월에 「한국고대사회와 울진지역」이라는 주제로 10주년 기념 학술대

  • 회를 개최하였다.6) 따라서 이 비는 신라사 연구의 심화를 가져온 계기를 제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울진을 다른 지역의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는 데에도 큰 기여를 한 중요한 문화재라

    고 하겠다.

     

    1) 장양수급제패지를 담은 사진은 화보에 실려 있다.

    2) 이 부분은 박용운(朴龍雲), 1990, 《벽사(碧史) 이우성(李佑成) 정년 기념 -민족사의 전개와 그 문화(상)》에 전적으로 의거하여 서술하였다.3) 허흥식(許興植), 1978〈조선초 장인숙(張仁淑)의 추심호(推尋戶)와 그 분석〉《역사교육》23집에는 장양수 가계가 잘 분석되어 있어 이들 가계는 물론이고 여말선초 향촌세력의 신분상승에 관한 이해에 많은 도움을 준다.4) 이 비를 담은 사진은 화보에 실려 있다.5) 이 학술세미나에서는 발표요지가 〈울진봉평신라비(가칭)의 종합적 검토〉라는 제목의 소책자로 배포되었

    다. 이듬 해인 1989년 5월 제목과 내용의 일부가 수정?보완되어 종합토론과 함께 한국고대사연구회, 《한

    국고대사연구(-울진봉평신라비 특집호-)》제2집, 지식산업사로 출간되었다.

    6) 노중국 외(盧重國 外), 1999,《한국고대사회와 울진지방(-국보 제242호「울진봉평신라비」발견 10주년기

    념 학술대회 논총-)》, 울진군?한국고대사학회.

  • 4. 보 물

    울진에는 보물이 4점 있는데 다른 지역에 비해 많다고 할 수는 없다. 이 중에서 3점이 불영

    사(佛影寺) 경내(境內)에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고 하겠다. 너무 사찰(寺刹)에만 편중되어 있

    다는 느낌을 주는 것은 약간의 한계점이라고 할 수 있다.

    1) 울진 구산리삼층석탑1)

      이 탑의 지정번호는 보물 498호이고 지정일자는 1968년 12월 19일이며 소유자는 국유이

    고 울진군 근남면 구산리 1494~1번지에 소재하고 있다. 이 울진 구산리삼층석탑(九山里三

    層石塔)은 통일신라시대의 3층 석탑으로 높이는 3.24m이다. 2층 기단(基壇) 위에 세워진

    자그마한 일반형 3층석탑이다. 지대석과 중석을 한데 붙여서 4매석으로 구성하였고, 중석에

    는 우주(隅柱)와 탱주(撑柱) 1주가 새겨져 있다. 갑석(甲石)은 4매석이고, 상면의 경사는 심

    한 편이며, 중앙에 각형(角形)과 호형(弧形)의 2단 굄이 있다. 상층기단 중석의 2면은 우주

    와 탱주 1주가 조각된 판석(板石)을 세우고, 다른 2면은 탱주만 조각된 판석을 세워서 짰

    다. 갑석은 2매의 판석(板石)으로 덮였고 밑에는 부연(副椽)이 있으며, 상면은 약간 경사진

    가운데 각형과 호형 2단의 굄이 있다.

      탑신부(塔身部)는 옥신석(屋身石)과 옥개석(屋蓋石)이 각각 한 돌이고, 각층 옥신에는 우

    주형을 조각하였으며 초층 옥신 남면에는 높이 44cm, 너비 28cm의 이중융기선 테만 돌려

    져 있을 뿐이어서 이것이 감실(龕室)을 뜻하는 것인지 문비(門扉)를 뜻하는 것인지는 분명하

    지 않다. 각층 옥개석은 처마 밑이 수평이고 받침은 5단씩이며 낙수면(落水面) 위에 각형의

    옥신굄 2단이 있다. 낙수면은 얇고 전각의 반전(反轉)도 있으며, 처마가 수평인 점 등은 전

    형적인 신라석탑의 양식이다. 상륜부는 결실되었으나 3층 옥개석 위에는 지름 23.5cm, 깊

    이 7cm의 원형의 찰주공(擦柱孔)이 있다.

      이 석탑은 도굴꾼에 의해 파손된 채 오랫동안 방치해 두었던 것을 1968년 복원하여 곧

    바로 보물로 지정하였다. 비록 규모는 작으나 신라 석탑의 전형양식을 잘 계승하고 있으며,

    상하 기단면석의 탱주가 1주로 줄어든 것으로 보아 건립연대는 9세기 후반으로 추정할 수

    있다.

    2) 불영사응진전2)

      이 건물의 지정번호는 보물 제730호이고 지정일자는 1981년 7월 15일이며 소유자는 불

    영사이고 울진군 서면 하원리 122번지에 소재하고 있다. 이 건물은 진덕여왕(眞德女王) 5년

    (651년)에 의상(義湘)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하는 불영사(佛影寺)의 응진전(應眞殿)이다.

    1984년의 해체하여 보수할 때 발견된 종도리(宗道里) 밑 장혀 안에서 나온 중수상량문(重修

    上樑文)과 종도리 밑에서 나온 1716에 먹으로 쓴 묵서명(墨書銘)에 의하면 이 응진전은 선

    조 11년(1578년)?인조 7년(1629년)?현종 6년(1665년)?숙종 42년(1716년) 등 다섯 차례에

    걸쳐 보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상량문 앞머리에 건물의 이름이 영산전이라고 적혀 있어서

    선조 11년(1578년)에 영산전(靈山殿)으로 건립된 것이 후대에 응진전으로 바뀌었던 것 같

    다.

      불영사 경내 서쪽에 남향하여 세워져 있으며, 정면 3칸?측면 2칸 규모의 홑처마 맞배지

    붕 건물이다. 공포(?包)는 다포계(多包系)로서 건물의 앞뒤쪽 뿐만 아니라 양 옆쪽에도 포작

    (包作)을 짜올렸다. 자연석 기단 위에 자연석 주초를 놓고 기둥을 세웠는데, 기둥에는 오금

    (烏金)을 많이 주었으며, 주상에는 내외 2출목(出目)의 공포를 얹었다. 공포의 양식 중 쇠서

  • 〔牛舌〕의 처짐이나 교두형 첨차형태는 조선 중기 초엽의 다른 건물과 같다. 윗부분의 한

    대(限大)뿌리는 3분두 형식으로 길게 뻗어 그 뒤에 도리받침 화반을 얹어 외목을 받치게 해

    놓았다.

      내부는 첨차 및 살미를 교두형으로 짜올리다가 간결한 양봉으로 하여 보를 받치고 있는

    데, 양봉에는 화두자를 두어 소박하고 아름답게 처리하였다. 내부 중앙에는 우물천장을 가

    설하고, 그 외부둘레에 빗천장을 가설하였다. 불단은 별로 장식이 없이 소박하게 가설되어

    있어 내부공간에 잘 조화되고 있다. 단청은 외부는 거의 훼손되었으나 안쪽은 아직 잘 남아

    있어 조선중기의 단청문양을 볼 수 있다.

      건물의 바깥쪽은 가운데 칸에 세살 사분합문(四分閤門)을 달았으며 양쪽 협칸에 벽을 두

    고 벽 위쪽에 작은 창을 달았다. 건물 내부에는 바닥에 마루를 깔았고, 출입구를 제외한 벽

    면에 빙 둘러 불단(佛壇)을 설치하였다. 이 단 위에는 중앙에 한 단 높게 본존불(本尊佛)을

    모셔 놓았고, 불상의 좌우에는 흙을 구워 만든 16나한상(十六羅漢像)을 배열하였다. 벽체

    위의 목조 가구(架構)에는 녹색을 주조로 한 단청이 칠해져 있고, 포(包) 사이의 조그만 벽

    〔包壁〕에는 불상이 그려져 있다. 건물의 크기에 비해 큰 대들보가 천장을 가로지르고 있

    고, 그 위로 가운데는 소란반자로 마감한 우물천장을, 둘레는 빗천장을 가설하였다. 귀기둥

    위의 귀공포는 맞배지붕 건물에서는 드문 것으로서, 불영사응진전에서 4면에 공포를 두었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며, 팔작지붕 건물에서와 달리 처마를 받치는 구실을 하지 않으므로

    특징적인 짜임새를 보이고 있다.

      공포가 측면에도 돌려져 있으면서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는데, 구조로 보아 당초에는 팔

    작지붕이었던 것 같다. 전체적으로 조선 중기적인 특징을 보이고 있으나, 첨차 및 쇠서 등

    의 세부수법에서는 조선 초기적 수법이 혼용된 건물로 건축사적인 측면에서 매우 귀중하다

    고 하겠다.

    3) 불영사대웅보전3)

      이 건물은 진덕여왕(眞德女王) 5년(651년)에 의상(義湘)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하는 불영

    사(佛影寺)의 대웅보전(大雄寶殿)이다. 지정번호는 보물 제1201호이고 지정일자는 1994년 5

    월 2일이며 소유자는 불영사이고 울진군 서면 하원리 122번지에 소재하고 있다. 이 건물의

    건립년대는 법당내에 있는 탱화(幀畵)가 영조 원년(1725년)에 제작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 건물도 그와 비슷한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불영사의 중심법당으로 정면 3칸?측면 3칸 규모의 팔작기와집이다. 기단은 크기가 일정

    하지 않은 무사석을 크기에 따라 적절히 쌓아 이음이 일정한 선을 이루지 않고 자유롭게 조

    성한 조선 중기 이후의 기풍을 간직하고 있다. 중앙의 석계 좌?우 기단 밑에는 귀부형의 돌

    거북이 1구씩 놓여 있는데, 상반신만 노출되어 마치 대웅보전을 짊어지고 버티고 있는 듯하

    다. 이는 풍수도참에 연유된 것으로, 사전(寺傳)에 의하면 불영사가 있는 자리가 화산(火山)

    이어서 그 불기를 누르기 위해 물의 신인 용왕을 모신 것이라 한다.

      자연석 주초 위에 흘림이 있는 원주를 세웠는데 원주는 좌우를 정확하게 대칭되도록 다듬

    지 않고 대략 형태만 이루게 한 18세기의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기둥에는 벽선을 세우고

    문얼굴을 만들어 정중한 맛을 잃지 않았다. 문짝은 어칸에 사분합을 좌우협칸에 분합문을

    달았다. 측면은 벽체로 마감되었으나 드나들기 쉬운 자리에 문을 내었다. 공포는 외3출목?

    내4출목의 다포계이다. 단청은 금단청 계열에 속하는데, 외부 단청은 최근에 개칠하여 본

  • 모습을 잃었으나 내부는 잘 남아 있어서 18세기 영남지역, 특히 봉정사 대웅전을 대표로 하

    는 격조 높은 기법을 지니고 있다. 또한 천장의 청판을 처리한 고급스러운 기법이나 별지

    화?벽화 역시 뛰어난 솜씨이다. 조선 중기의 특징을 고루 지니고 있는 건물로, 구조수법이

    나 기단 밑에 있는 돌거북?단청 등이 건축사적인 측면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4) 불영사 영산회상도4)

      이 영산회상도(靈山會相圖)는 대웅전 같은 불당의 불상 뒤에 거는 후불탱화(後佛幀畵)로

    서, 조선 영조 9년(1733년)에 굉원(宏遠)?순일(淳日) 비구(比丘) 등 여섯 분의 스님이 그린

    탱화이다. 지정번호는 보물 제1272호이고 지정일자는 1997년 8월 8일이며 울진군 서면 하

    원리 122번지에 소재하고 있는 불영사가 소유하고 있다. 이 탱화는 좌상의 석가여래를 중

    심으로 좌?우에 10대 보살 등 여러 권속들이 협시하고 있다. 석가모니불은 홍색 가사에 이

    중 광배를 하고 있으며, 하단에 시주질과 연화질 등이 배치되어 있다. 가로 4.20m, 세로

    3.89m의 크기에 마본채색(麻本採色)된 이 불화는 안정감 있는 구도와 화려한 채색, 세밀한

    묘사, 밝고 은은한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어 당시의 불교양식 및 표현기법을 파악하는 데 있

    어서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 주며 불교회화사의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라고 하겠다. 

     

    1) 이 탑을 담은 사진은 화보에 실려 있다.

    2) 이 건물을 담은 사진은 화보에 실려 있다.

    3) 이 건물을 담은 사진은 화보에 실려 있다.

    4) 이 후불탱화를 담은 사진은 화보에 실려 있다.

  • 5. 명 승

    1) 불영사계곡1)

      울진에서 영주로 가는 국도 변에 위치한 이 계곡은 특히 산태극?수태극 형(形)에 자리잡

    은 불영사와 함께 신비의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지정번호는 명승 제6호이고 지정일자는

    1979년 12월 1일이며, 울진읍 대흥리?서면 하원리?근남면 행곡리?근남면 수곡리 등 은 불

    영사계곡 일원으로서, 소유자는 국유 및 사유지 856필지가 혼재되어 있다. 80년대 초만 하

    더라도 울진과 현동을 잇는 국도는 비포장 구간이어서 쉽게 찾아갈 수 없는 곳이었지만 고

    갯길을 다듬고 천변길을 넓혀서 아스팔트로 2차선 포장을 한 이후로는 전국 최고의 환상적

    인 드라이브길이 되고 있다. 길을 따라 차를 달리며 보는 계곡도 좋지만 계곡 갈피갈피를

    헤집고 들어가면 겉에서는 볼 수 없는 그 부드러운 속내가 있는데 그 한자락이 불영사로 드

    는 길이다. 이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봉우리들을 크게 감싸고 돌아 산태극(山太極)?수

    태극(水太極)을 이룬 곳에 고찰(古刹) 불영사(佛影寺)가 자리잡고 있는 셈이다.

      이 계곡은 울진군 서면 하원리로부터 근남면 행곡리까지 불영사를 중심을 한 장장 15㎞

    의 선경을 조형한 천연의 광천계곡(光川溪谷)이다. 이 구간의 광천은 심한 감입곡류(嵌入曲

    流)를 형성하며 계곡 아래부분과 양쪽의 절벽에는 흰빛의 화강암이 드러나 있어 장관을 이

    루고 있다. 광천의 소용돌이 치는 하상은 곳곳이 깊게 패여 구혈(?穴)을 이루고, 다수의 폭

    포?급단(急湍)?연못이 울창한 수림(樹林)과 어우러져 있으며, 창옥벽?의상대(義湘臺)?산태

    극?수태극?조계등?부처바위?중바위?거북돌?소라산 등 30여 개소의 명소가 있다 이 협곡은

    물?암석?수목이 조화된 뛰어난 명승지이다.

      특히 이곳은 울진소나무로 유명한데 20m나 될 정도로 키가 크고 오랜 적송이 우리나라에

    서 가장 많은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계곡의 단풍은 매우 유명하다. 또한 남방계와 북방계

    의 동?식물이 공존하는 곳으로 학술적인 탐사지로도 많이 찾는다. 북쪽 지역의 짐승인 산양

    이 백두대간(白頭大幹)을 타고 내려와 살기도 하고, 김빛 고사리?참꽃나무?겨우살이 등 진

    귀한 식물도 많으며, 물에는 돌고니?갈겨니?꺽지 따위의 고기들도 많이 살고 있다. 따라서

    이 지역은 울진군이 자랑할 만한 곳 중의 하나이므로 울진군민들은 이 지역이 청정함을 잃

    지 않도록 관리와 전승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후손들에게 자랑스럽게 물려줄 수 있을

    것이다.

    1) 이 계곡의 전경을 담은 사진은 화보에 실려 있다.

  • 6. 천연기념물

    1) 울진의 굴참나무1)

      이 나무는 수령 330년으로 크기는 높이 20m, 가슴높이의 둘레 6m, 가지의 길이는 동쪽

    으로 8m, 서쪽으로 8m인 굴참나무이다. 지정번호는 천연기념물 제96호이고 지정일자는

    1962년 12월 3일이며, 소유자는 사유이고 소유지는 울진군 근남면 수산리 381-1번지이다.

    이 나무의 남쪽 가지는 1959년 사라호 태풍 때 부러졌다. 1978년에 외과수술을 하여 부러

    진 곳과 썩은 부분을 제거하고 시멘트로 채웠다. 수산교에서 불영사로 가기 위해 수산교를

    막 꺽어서 36번 국도에 들어서면 오른쪽 언덕에 위치해 있으며 동으로 동해를 바라보고 남

    쪽으로 왕피천을 끼고 있다.

      왕피천은 옛날 싸움터에서 다급해진 왕이 몸을 피하여 이 나무 밑에 숨었다는 전설에서

    생긴 이름이다. 성인이 머물렀다고 하는 성류사(聖留寺)가 있었던 봉우리를 성류봉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이 나무가 성류사로 들어가는 도승들의 길잡이가 되었으나 지금은 성류굴은

    물론이고 36번 국도가 포장되면서 불영사를 찾는 관광객들에게도 시선을 끌고 있다.

    2) 울진 성류굴2)

      이 굴의 지정번호는 천연기념물 제155호이고 지정일자는 1963년 5월 7일이며 소유자는

    울진군이고 소재지는 울진군 근남면 구산리 산 30 외 3필지이다. 울진읍에서 국도로 남쪽

    으로 내려가다가 수산리(守山里)와 지음동(旨音洞)을 거쳐 구릿재인 동현(銅峴)을 넘어선 곳

    에서 약 500m정도 북서쪽 강변으로 가면 도달할 수 있다. 이곳은 성류봉(聖留峰)의 서록

    (西麓)이며 동해로 유입하는 왕피천(王避川)의 동안(東岸)에 위치하고 있다. 이 동굴은 앞을

    흐르는 맑은 물이 산과 나무가 어우러진 계곡 아래 쪽에 위치한 기나긴 석회동굴이다. 관동

    팔경 중의 하나인 왕피천 입구에 위치한 망양정과 3㎞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며 굴 입

    구는 앞이 확 터져 있어서 절경을 이루고 있다.

      이 굴을 부르는 이름에는 세 가지가 있다. 먼저 그 경치가 우아하고 신선들이 놀던 곳이

    라는 뜻에서 ‘선유굴(仙遊窟)'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성류사란 절이 이 부근에

    있었는데 왜병들에 의하여 이 절이 완전 소실되었다. 이 때에 성류사에 안치되어 있던 불상

    들을 이 굴로 피난시켰으며 따라서 불성(佛聖)이 머무르는 곳이라 해서 ‘성류굴(聖留窟)’로

    개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때에 이 굴로 주민 500여명이 피난하였는데 왜병들이

    이 사실을 알고 굴 입구를 막아 버렸기 때문에 전원이 굴 속에서 굶어 죽었다는 전설이 있

    기도 하다. 또 《울진군지(蔚珍郡誌》에는 ‘장천굴(掌天窟)’이라는 명칭이 보이기도 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신라 진덕여왕 때 원효대사가 ‘천량암(天量庵)’을 이곳에 창건

    하여 수도했다고 전하며, 고려말의 대학자(大學者)인 가정(稼亭) 이곡(李穀)(1298~1351)의

    《관동유기(關東遊記)》중에서도 북한의 동용정(凍龍亭)과 함께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굴은 왕피천에서 흘러든 물이 석회암 지형에 침식작용을 일으켜 만들어낸 것으로 생성

    시기는 2억 5천만년 전 쯤으로 추정되고 있다. 동굴 부근을 구성하는 지질은 주로 석회암으

    로 되어 있고 천판암(天板岩)이나 편암(片岩) 등이 접하고 있다. 석회암층은 주향이 북은 30

    도~40도, 동은 70~80도로 북서쪽으로 경사되어 있다. 따라서 성류굴은 석회암지대에서

    발달되는 전형적인 석회동굴이다. 석회암은 담홍색?회백색 내지는 백색을 띠고 있다.

      동굴의 길이는 약 472m에 이르고 입구에서 동굴 끝까지의 사이에 종유석과 굴 모습이

  • 기이한 곳을 골라 오작교?만불상?로마궁전 등 재미있는 이름을 지은 12개의 광장이 형성되

    어 있다. 이와 같은 동굴광장이나 동굴 내부에는 무수한 아름다운 석순이나 종유석이 발달

    되어 있어 아름다운 경관을 자아내고 있다. 굴 입구는 대단히 협소하여 한 사람이 겨우 들

    어갈 수 있는 정도이나 내부는 이와 같이 훌륭한 석회동굴이 형성되어 있으며 광장에는 대

    개 물이 고여 있다. 이들 중에는 수심이 4~5m에 이르는 곳도 있다 .동굴내부의 온도는 1

    5℃에서 17℃로서 년중 거의 변화가 없고, 습도는 늘 축축한 90~95%이며, 동굴 내의 수

    온은 15℃~16.5℃ 정도이다. 따라서 여름에는 서늘한 피서지로, 겨울에는 습기가 있어서

    좀 차가운 느낌이 든다.

    3) 울진 죽변리의 향나무3)

     이 나무의 지정번호는 천연기념물 제158호이고 지정일자는 1964년 1월 31일이며 소유자

    는 울진군이고 소재지는 울진군 죽변면 후정리 산30번지 외 3필지이다. 수령 500년으로 크

    기는 곧고 바르게 서 있는 가지는 높이가 11m이고 가슴높이의 지름이 1.25m이며 비스듬이

    누워서 자란 가지는 높이가 10m이고 가슴높이의 지름이 0.94m인 이간성(二幹性)의 향나무

    이다.

      거대한 몸집을 자랑하면서 바로 앞에 있는 동해를 내려다보고 있다. 줄기가 지상에서 두

    갈래로 분기(分岐)해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울릉도의 향나무가 이곳까지 떠내려온 것

    이라 하나 전설일 뿐이다. 향나무에 이웃해서 서낭당 당집이 있다. 동민들은 이 나무를 신

    목(神木)으로 취급해서 숭앙하고 있다.

    4) 울진 화성리의 향나무

      이 나무의 지정번호는 천연기념물 제312호이고 지정일자는 1982년 11월 4일이며 소유자

    는 남하식(南夏植) 외 1명이고 소재지는 울진군 죽변면 화성리 산 190 외 1필지이다. 수령

    500년으로 크기는 높이 14m, 가슴높이의 둘레 4.2m, 뿌리 근처의 둘레 9m, 가지 밑의 높

    이 2.3m이고, 가지의 길이는 동쪽으로 6.3m, 서쪽으로 3.6m, 남쪽으로 6.8m, 북쪽으로

    9.2m인 향나무이다.

      향나무가 자라고 있는 곳은 화성리의 꽃방마을이라고 하며 마을 뒤의 언덕에서 자라고 있

    으며 누가?언제?어떤 연유로 심었는지 알지 못하고 있지만 오랜 세월동안 풍상을 겪고도

    태연자약하게 꿋꿋이 서 있다. 뒤에 잡목림이 있고 주변에는 풀이 우거져 있다.

    5) 울진 쌍전리의 산돌배나무4)

      이 나무의 지정번호는 천연기념물 제408호이고 지정일자는 1999년 4월 6일이며, 소유자

    는 곽영수(郭榮壽)이고 소재지는 울진군 서면 쌍전리 산 146~1번지이다. 수령이 약 250년

    으로 크기는 높이 약 25m, 가슴높이의 둘레 4.35m이고, 가지의 길이는 동쪽으로 6m, 서쪽

    으로 8m, 남쪽으로 9m, 북쪽으로 11m인 배나무이다.

      울진군 서면 삼근리에서 봉화군 분천으로 가는 자동차 길에서 약 6㎞ 들어간 쌍전 2리의

    달전인 큰달밭 골짜기에 있는 곽영수씨 가옥 뒷편 산비탈에 서 있다. 주 가지는 1.2m에서

    동?서 2가지로 나눠지고, 지엽이 무성하여 수세가 왕성하다. 매년 3~4가마니씩 배를 수확

    하는데 과실모양은 압리(鴨梨)처럼 생겼으며 직경이 약 5cm, 높이 7~10cm정도라고 한다.

    ‘심배’ 또는 ‘참배’라고 부르며 과피가 엷고 황색을 띠며 감미와 과즙이 많고 향기가 매우

    높다고 한다.

      소유자이며 관리자였던 곽영수씨는 1975년 당시 64세로서, 그의 조부(祖父) 때 이미 집

  • 뒷 뜰에 서 있었다고 하며 식재 연대나 식재자 등은 명백치 않다. 봄철에 흰 꽃이 만발하여

    달빛 속에서 두견이 슬피 울 때면 이 나무도 따라서 ‘윙윙’하는 소리가 나는 일이 있고 또

    배가 많이 열리면 풍년이 든다고 한다. 개량종 배가 들어옴에 따라 재래종 배가 차츰 소멸

    되어 가는 현상에 비추어 재래종의 보호는 단순한 문화유산의 보존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품종개량의 밑천으로서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6) 울진 행곡리의 처진소나무

      이 처진소나무의 지정번호는 천연기념물 409호이고 지정일자는 1999년 4월 6일이며 소

    유자는 행곡 2리 천전동(川前洞)이고 소재지는 울진군 근남면 행곡리 627번지이다. 소나무

    중에서 보기 드문 품종으로 수령이 약 300년으로 추정되며, 높이 14m, 가슴높이의 둘레가

    2m이다. 천전동 마을 형성시 식재(植栽)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어 마을의 상징목으로 보호를

    받고 있다. 특히 수형이 아름답고 특이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1) 이 나무를 담은 사진은 화보에 실려 있다.

    2) 이 굴을 담은 사진은 화보에 실려 있다.

    3) 이 나무를 담은 사진은 화보에 실려 있다.4) 이 나무를 담은 사진은 화보에 실려 있다.

  • 7. 유형 문화재

    1) 불영사 삼층석탑

      이 탑은 도(道) 지정 유형문화재 135호이고 지정일자는 1979년 1월 25일이며 소유자는

    불영사이고 현 위치는 불영사 대웅보전 앞에 위치하고 있다. 본래 황화실 옆에 있던 것을

    1977년에 현 위치로 이축하였고, 1977년 사찰에서 이탑을 해체?복원할 때 지대석(地臺石)

    과 하기면석(下基面石) 1개를 교체하였다. 총 높이는 3.33m이고 화강석으로 만들어진 탑이

    다.

      신라 진덕여왕 5년(651년)에 의상대사가 불영사를 창건할 당시 축조한 석탑으로서 기단

    부?탑신부?상륜부가 모두 완전히 보존되고 있다. 이중기단(二重基壇)으로서 하층기단?상층

    기단 면석에 공통적으로 탱주가 하나씩 있고, 양우주(兩隅主)를 각출(刻出) 하였으며 안상

    (眼象)은 없다. 옥신(屋身)은 3층이 모두 양우주로 되어 있고 옥개(屋蓋)는 4단 받침에 2단

    의 괴임이 있으며 추녀는 전각(轉角)에서 반곡(反曲)이 있다. 삼층탑신(三層塔身)은 급격히

    줄어 들었으며 상륜부(相輪部)에는 노반(露盤)?복발(覆鉢)?앙화(仰花)?보륜(寶輪) 등이 있다.

      현재 이 탑은 2층 옥개석(屋蓋石)이 가지는 체감률(遞減率)이나 낙수면(落水面)의 곡률(曲

    率)이 초층(初層)이나 3층의 옥개석과는 다르므로 하나의 탑이 원형대로 온전히 보전되어

    온 것 같지는 않다. 상륜부의 복발(覆鉢)?앙화(仰花)?보륜(寶輪) 등은 남아 있으나 지금의

    배치는 뒤틀려 있다. 하지만 상하 기단의 갑석이 가지는 괴임의 양식이나 옥개석의 받침과

    낙수면의 곡률 등은 정형화한 신라 삼층석탑의 특징을 갖추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 8. 문화재 자료

    1) 울진향교 대성전1)

      이 건물의 지정번호는 문화재자료 제159호이고 지정일자는 1985년 8월 5일이며, 소유자

    는 경북향교재단이고 소재지는 울진군 울진읍 읍내리 653-1번지이다. 성종 15년(1484년)에

    읍내리 월변동(月邊洞)에 창건되고, 숙종(肅宗) 23년(1697년)에 고성리(古城里) 성저동(城底

    洞)으로 이건(移建)된 울진향교의 대성전이다. 그 후 고종 9년(1872년)에 읍내리 옥계동에

    이축(移築)하였다가 한국전쟁으로 인해 대성전과 동재(東齋)를 제외한 기타 건물이 소실되었

    으며 1980년 명륜당(明倫堂)을 중창하였다.

      월앙산 기슭에 남향으로 터를 잡아 대성전?내삼문?명륜당이 일직선상에 배치된 전학후묘

    (前學後廟)의 법식에 따랐으며 대성전 우측에 제기고(祭器庫)가 자리하고 있다. 출입문은 축

    선상에 있지 않고 좌측모서리에 자리하고 있으며 향교 좌측 담장 밖에 관리사?서재(西齋)?

    제물고(祭物庫)가 있다.

      대성전은 정면 5칸?측면 3칸 규모의 전퇴(前退)를 두었다. 전 내부 바닥은 장마루를 깔았

    고 정면 어칸에 쌍여닫이 궁널띠살문을 달고 양협칸은 외여닫이 궁널띠살문을 내였으며 퇴

    칸은 벽체로 막았으나 장마루는 원형이 아닌 듯 하다. 그리고 대성전 건물에는 흔하지 않는

    측면 광창을 두었다. 7량가로 퇴량과 대량은 내진 주위에서 합보시키고 제형판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게한 건실한 수법을 지니고 있으며 구조에 비해 지붕은 그리 높지 않게 처리하

    였다.

      주심포계열의 익공양식으로 전면은 2익공으로, 배면은 초익공으로 하여 살미형상은 길게

    빼내고 단부는 사절시켰다. 그리고 연봉(蓮奉)을 조각하였고 첨차는 전면에만 두었다. ‘○○

    42年 9月(1703년)’이라는 대성전 기와명문으로 보아 2차 이건시 사용된 기와로 추측되며,

    현재의 건물은 3차 이건 후의 모습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2) 평해향교 대성전2)

      이 건물의 지정번호는 문화재자료 제160호이고 지정일자는 1985년 8월 5일이며 소유자

    는 경북향교재단이고 소재지는 울진군 평해면 평해리 901번지이다. 공민왕 6년(1357년)에

    저전(楮田) 반월산 아래에 창건되었으나 태종 7년(1407년) 군수 김한철(金漢哲)에 의해 송

    릉동(松陵洞)으로 이건된 평해향교의 대성전이다. 그러나 이때까지 향교의 규모가 크지 않

    았으며 성종 원년(1470년) 대성전을, 성종 5년(1474년)에 명륜당을 건립함으로써 어느 정도

    의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으나 임란으로 인해 소실되었다. 선조 18년(1585년) 대성전을 중

    수하고 숙종 12년(1686년)에 제기고를 건립하였다. 영조 8년(1732년)에 대성전과 명륜당이

    중수되고 영조 18년(1742년)에 비로소 동?서무(東?西?)가 건립되었다. 그 후 고종 6년

    (1869년) 동?서무와 태화루(太和樓)가 중수되고 고종 23년(1886년) 대성전과 명륜당이 중

    수되었으며 1977년 태화루가 도괴되어 재축하였다. 현재 제기고는 남아 있지 않고 태화루

    우측에 남향으로 관리사가 있다.

      전학후묘의 방법에 따르고 있으며, 명륜당 전면에 동?서재 대신 태화루가 자리하여 대성

    전과 동일축 선상에 배치되어 있다. 출입은 누(樓) 하부를 통하지 않고 우측계단을 이용하

    여 당에 오르게 하였으며, 전으로는 내삼문과 우측 협문을 이용토록 하였다.

    대성전은 정면 5칸에 측면 3칸의 전퇴가 없는 다소 큰 규모이다. 정면 어칸문은 쌍여닫이

    궁널띠살문을 달고 양협칸은 격자광창을 두었으며 양퇴칸은 외여닫이 궁널띠살문을 내축기

  • 둥에 기대어 달았다. 그리고 전면 벽체는 판벽에 가로?세로 띠장을 댄 판벽을 세우고 측면

    과 배면벽은 심벽으로, 하벽은 부측벽으로 처리하였다. 2고주 5량구조이며 포대공으로 중도

    리와 뜬창방을 받도록 하고 제형판대공에 공아를 넣어 종도리를 지지케 하였다.

      주심포계열로 전면은 외1출목 2익공양식이며 배면은 출목없이 2익공으로 처리하였다. 살

    미형상은 길고 날카로우며 첨차는 단부가 사절되고 하부는 쌍S자형으로 초각되었다. 처마는

    정면은 겹처마이며 배면은 홑처마로 처리하여 맞배지붕을 올렸다. 전체적으로 정면이 매우

    강조된 느낌을 주는 건물이며 조선 중기, 즉 임란이후의 건축양식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3) 해월헌3)

      이 건물의 지정번호는 문화재자료 제161호이고 지정일자는 1985년 8월 5일이며 소유자

    는 황의석(黃義錫)이고 소재지는 울진군 기성면 사동리 433번지이다. 조선 광해군 대에 길

    주목사와 동래진 병마첨절제사를 지내고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던 해월(海月) 황여일(黃汝

    一)(1556~1622년)의 별구(別構)인 대청이다. 선조 21년(1588년)에 건립된 건물로 원래 기

    성면 사동리에 있었으나 헌종 13년(1847년)에 후손들이 현 종택 내로 이축하였다. 사동리

    마을 안쪽의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는데 주위에는 토석담장을 둘렀으며, 담장의 전면에는

    1993년에 복원한 대문채가 자리잡고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구자

    형의 정침과 해월헌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으며 그 뒤에는 사당이 자리잡고 있다.

      정면 4칸?측면 3칸 규모의 팔작기와집이며 측면의 앞 쪽 1칸은 마루를 깔고 난간을 돌렸

    다. 경사진 대지에 자리잡은 관계로 전면주의 하부에는 하층주를 세워 전면 퇴칸은 누마루

    를 이루게 되었다. 어칸 2칸에 우물마루를 갈아 대청으로 꾸미고 좌우에 온돌방을 둔 중당

    협실형이며 전면에는 반칸 규모의 퇴칸을 두었다.

      정침은 정면 7칸?측면 5칸 규모의 구자형 건물인데 전면은 좌?우로 1칸씩이 돌출되어 양

    날개집의 형상을 하고 있다. 중문간의 우측에는 사랑채를 두었는데 지붕은 팔작기와지붕을

    올려 마치 독립된 건물인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평면은 2칸의 사랑방과 1칸의 사랑마루방

    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면에는 빈 칸 규모의 퇴칸을 두고 퇴칸의 전면에는 헌함을 둘렀으

    며 5량가이다.

      중문을 들어서면 마당폭과 같은 3칸 규모의 대청이 나타난다. 대청의 좌우에는 안방과 상

    방을 두었으며 안방과 상방의 전면에는 익사가 연접되어 전체적으로는 구자형의 평면을 이

    루고 있다. 1847년에 이건한 건물로 건축수법상의 특징은 찾아볼 수 없으나, 주택의 지역적

    인 특성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4) 불영사 부도

      이 부도(浮屠)의 지정번호는 문화재자료 제162호이고 지정일자는 1985년 8월 5일이며 소

    유자는 불영사이고 소재지는 울진군 서면 하원리 산 34번지이다. 연산군 6년(1500년)에 불

    영사를 중창하고 입적한 양성당(養性堂) 선사(禪師)의 부도이다. 선사의 이름은 혜능(惠能)

    이며 자(字)는 중열(中悅)이고 속성(俗姓)은 남씨(南氏)이다. 세종 7년(1425년)에 울진군 원

    남면 금매리에서 11세에 출가하여 불영사를 중건하고 중종 11년(1516년)에 입적하였다.

      전체 높이는 185㎝이고 석종형(石鍾形)으로 대강 치석(治石)한 지대석(地臺石) 위에 팔판

    (八辦)의 중복련(重伏蓮)을 장식한 기단(基壇) 위에 세워져 있다. 부도의 신석(身石)은 하면

    (下面)에 앙련(仰蓮), 견부(肩部)에 복련(覆蓮)을 조각하였으나 매우 형식적이다. 부도 옆에

    는 숙종 25년(1699년) 상묵선사(相?禪師)가 세운 부도비가 있으며, 높이는 165cm이다.

  • 5) 울진 소광리 황장봉계표석4)

      이 표석은 울진에서 봉화로 가는 36번 국도에 위치한 장천교에서 5㎞정도 들어간 도로변

    에 위치한 소광리(召光里) 황장봉계표석(黃腸封界標石)이다. 지정번호는 문화재자료 제300

    호이고 지정일자는 1994년 9월 29일이며 소유자는 국유이고 소재지는 울진군 서면 소광리

    251-1번지이다. 봉산제도(封山制度)는 국가에서 일반인에게 벌채를 금지하는 산림보호제도

    이며, 황장봉산(黃腸封山)의 제도가 시작된 것은 숙종 6년(1680년)이었다. 이 해는 남인들

    이 중앙정계에서 대거 축출된 경신환국(庚申換局)이 있었고, 이후 붕당정치가 일당전제의

    성향을 보이게 된 시기였다. 또한 이 시기는 남설(濫設)되는 서원(書院)과 사우(祠宇)에 대

    한 일정한 통제가 이루어지고 정표정책(旌表政策)이 본격화되었던 시기이다. 즉 국가는 성

    리학적 예제(禮制)를 통하여 일반인들을 지배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중앙정부는 전국에 장례 때 필요한 황장목(黃腸木)이 있는 산을 봉산으로 지정하여

    의례(儀禮)에 필요한 자원을 직접 장악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인 의도와 함께

    왕실에서 필요한 양질의 목재를 얻기 위해 황장봉산제도가 실시되었던 듯하다.

      이 곳 주민들은 이 지역을 장군터라고 부르고 있으며 대광천 계곡과 연접한 바위에 글자

    가 새겨져 있다. 자연석의 앞면에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자연석의 가장 긴 부분이 가로

    245cm, 세로 195cm, 높이 86cm, 오른쪽에 가로 세로 60여 cm정도의 공간에 19자가 새

    겨져 있다. 왼쪽에는 세로 40cm 정도의 길이에 4자가 새겨져 있다. 글자의 크기는 대체로

    8cm, 한 획의 굵기는 8mm, 음각의 깊이는 약 3mm정도이다. 오른편의 명문은 글씨가 크

    고 깊게 새겨져 있으나 바위에 금이 가고 결락(缺落)된 곳이 많아 판독이 어려운 부분이 몇

    군데 있다. 더구나 행과 행의 간격이 일정하지 않고, 윗쪽은 넓게 잡고 아래쪽은 좁게 하여

    글자가 모이도록 되어 있으며, 왼편의 것은 얕게 새겨져 있어 오독할 가능성이 많다.

      판독문은 다음과 같다.

      좌면 : 山直命吉

      우면 : 黃腸木 界地名生達 峴安一王山 大里堂城 四回

    6) 울진내성행상 불망비5)

      이 비의 지정번호는 문화재자료 제310호이고 지정일자는 1995년 6월 30일이며 소유자는

    두천리(斗川里) 동회(洞會)이고 소재지는 울진군 북면 두천리 206-1번지이다. 1890년경 울

    진과 봉화를 왕래하면서 어염해조류(魚鹽海藻類)를 물물교환하며 상행위를 하던 선질꾼들이

    당시 봉화 내성(乃城)에 살고 있던 그들의 최고 지위격인 접장인 봉화사람 정한조(鄭韓祚)와

    반수(班首)인 안동사람 권재만(權在萬)이 그들의 상행위를 도와준 데 대해 그 은공을 기리고

    자 세웠던 울진내성행상(蔚珍乃城行商) 불망비(不忘碑)이다. 이러한 연유로 인해서 이 지역

    의 주민들은 ‘선질꾼비’라고도 한다.

      선질꾼들은 2?7일장인 울진장과 3?8일장인 흥부장(興富場)에서 주로 해산물인 소금?간어

    물?미역 등을 구매하여 쪽지게에 지고 12령(嶺)을 넘어 봉화장(奉化場)으로 가서 그 주위의

    내성장(乃城場)?춘양장(春陽場)?법전장(法田場)인 장동장(獐洞場)?재산장(才山場)에서 잡화와

    약품 및 양곡?포목 등을 물물교환하여 되돌아 왔다. 또 봉화에서도 간간이 행상이 울진에

    오기도 하였다. 도중에 무뢰한(無賴漢)들이 상품을 탈취해 가기도 하고, 선질꾼에게 장세를

    과도하게 요구하기도 하여 일제시대까지도 무척 애를 먹게 되자 봉화인으로서 유력한 자를

    동료로 정하여 그들의 행상위(行商爲)를 보호케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   울진에서 봉화 사이에 있는 12령을 넘나드는 행상은 마상과 바지게꾼으로 나눌 수 있는

    데 바지게꾼이 선질꾼이다. 선질꾼이나 마상은 다른 지역의 보부상처럼 완전한 조직을 갖춘

    단체가 아니었던 듯하고, 다만 같은 지역출신으로 한 곳에서 무리를 지어 출발했기 때문에

    자연히 단체가 이루어졌던 것 같다.

      울진에서 봉화 소천까지에는 12고개가 있어서 보통 ‘12령(嶺)’ 또는 ‘열두재’로 칭해지고

    있으며 이들 행상들은 3일이 걸려서 이 12령을 넘어 소천에 도달할 수 있었다. 울진이나

    흥부 어디에서 출발하던지 간에 출발에 관계없이 바릿재에 오르기 직전에 있는 두천리(斗川

    里)에서 일단 머물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두천리는 한창 번성할 때 50여명의 행상들이 몰

    려 들어 주막과 마방(馬房)으로 흥청거리던 마을이었다고 한다. 울진에서 봉화까지 130리

    길을 걷다가 날이 저물면 외딴 주막이나 띄엄띄엄 있는 인가에서 머물면서 지게에 달고 가

    던 솟단지로 밥을 지어먹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면서 이들 큰장에서 물품을 교환하여 울진

    으로 다시 되돌아 오는 데에는 대체로 10여 일이 걸렸다고 한다.

      이 비에는 ‘내성행상접장정한조불망비(乃城行商接長鄭韓祚不忘碑)’와 ‘내성행상반수권재만

    불망비(乃城行商班首權在萬不忘碑)'라고 양각(陽刻)되어 있다. 기록이 없어 비의 확실한 소

    종래(所從來)를 알 수는 없으나 그 유례가 드문 철비(鐵碑)로 조선조 말기의 것으로 추정된

    다. 일제의 철재동원령 때에는 땅에 묻었다가 해방 후 골기와를 얹어 비각을 세웠다. 1965

    년 경에 대구에 살고 있다는 후손이 찾아와 돈을 내어 양기와로 비각을 보수할 때 전수범

    (田壽範)이 청부하여 일을 하고 마을 사람들이 협조하였다.

      무쇠로 주조된 이 비는 2기(基)로서, 1기는 부러진 것을 이어 세운 듯하며 2기 모두 비저

    (碑底)가 땅에 묻혀 있다. 양각(陽刻)되어 있는 문자가 뚜렷하고, 1평도 안되는 비각은 현재

    매우 퇴락하여 있다. 철비는 인근에 적당한 석재나 석공이 없었으며 당시 울진의 하당리(下

    塘里)와 중당리(中塘里)에 철광산과 용광로가 있어 석비보다 제작이 쉬웠기 때문이었던 것

    으로 추측된다. 이 비는 현재 울진에서 봉화 소천에 이르는 이른바 서울 나들이길 입구에

    세워져 있다. 비록 비조직적인 행상의 불망비이지만 당시 이 지역 상품의 유통경로와 장시

    (場市)의 이해에 상당한 도움을 주는 향토(鄕土)의 역사적 자료로서 그 가치가 매우 크다고

    하겠다.

    9. 동산문화재(動産文化財)

    1) 나배(螺盃)

      약 500전 소라 껍질을 잘라서 만든 술잔으로 장백손(張伯孫)이 강계(江界) 도호부사(都護

    府使)로 있을 때 지역주민(地域住民)이 선사한 것이라고 하며 소라 껍질에 매화를 새긴 걸

    작품으로 1979년 11월 30일 동산문화재 제5088호로 지정되어 장백손의 17대 후손인 북면

    주인리 장현철(張鉉澈)이 소유하고 있다. 크기는 직경 17cm, 두께 40cm이다.

    2) 화각은장도(華角銀粧刀)

      조선후기의 작품으로 칼집은 화각(華角), 칼자루는 은(銀)으로 용각(龍刻)되어 있는 쇠뿔

    은장도로 1979년 11월 30일 동산문화재 제5089호로 지정되어 울진읍 호월리 장보균(張甫

    均)이 소장하고 있으며 크기는 21cm이다.

    3) 위목(位木)

      1978년 2월 24일 동산문화재 제3549호로 지정된 조선중기의 부처님 위패(位牌)로서 서

  • 면 하원리 소재 불영사에 소장되어 있고 나무로 된 크기 42cm × 23cm이다.

     

    4) 석가모니문수보현보살좌상(釋迦牟尼文殊普賢菩薩坐像)

      1978년 2월 24일 동산문화재 제3547호로 지정된 조선시대의 작품으로 불영사에 소장되

    어 있으며 나무로 된 크기 100cm × 55cm, 93.5cm × 43.5cm, 93.5cm × 43.5cm 이다.

    5) 석가모니후불탱화

      1978년 2월 24일 동산문화재 제3548호로 지정된 옹정(雍正) 11년인 1733년의 작품으로

    불영사 대웅전 불상 뒤에 소장되어 있으며 비단으로 된 크기는 480cm × 355cm이다.

    6) 독성탱화〔獨聖幀〕

      1978년 2월 24일 동산문화재 제3552호로 지정된 탱화로서 1880년의 작품이며 불영사

    산신각에 소장되어 있고 비단으로 된 크기는 213cm × 22.5cm 이다.

    7) 삼장탱〔三藏幀〕

      1978년 2월 24일 동산문화재 제3554호로 지정된 탱화이다. 건륭(乾隆) 4년인 1739년의

    작품으로서 불영사에 소장되어 있으며 비단으로 된 크기 188cm × 236cm 이다.

    8) 불련(佛輦)

      1978년 2월 24일 동산문화재 제3561호로 지정된 부처님의 위패를 실은 가마로서, 조선

    영조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불영사 대웅전에 소장되어 있고 나무로 된 크기는

    129cm×317cm 이다.

    9) 현판황화실(懸板黃華室)

      1978년 2월 24일 동산문화재 제3563호로 지정된 조선 중기의 작품으로 불영사에 소장되

                                                          불영사 독성탱화

  • 어 있으며 나무로 된 크기 60cm × 115cm 이다.

    10) 금강역사(金剛力士)

      1978년 2월 24일 동산문화재 제3572호로 지정된 조선조의 석조물로 불영사 명부전(冥府

    殿)에 소장되어 있으며 크기는 126cm × 63cm 이다

                          

                                                     불영사 찬기11) 불영사시

    창기(佛影寺始創記)

      1978년 2월 24일 동산문화재 제3586호로 지정된 불영사 시창기로서 불영사 창건 당시의

    사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1370년 한림학사(翰林學士) 유백유(柳伯濡)가 쓴 것으로 불

    영사에 소장되어 있는 목판으로 크기는 37.2cm × 26.5cm 이다.

    12) 만고화(萬古和)

      1978년 2월 24일 동산문화재 제3565호로 지정된 목판으로 기성면 사동리에서 태어난 김

    주서(金周瑞)가 4살 때 쓴 것이며6) 불영사에 소장되어 있고 크기는 107cm×44cm이다.

    13) 석가모니후불탱〔釋迦牟尼後佛幀〕

      1978년 2월 24일 동산문화재 제3550호로 지정된 광서(光緖) 6년인 1880년의 작품으로

    불영사에 소장되어 있다.

    14) 산신탱(山神幀)

      1978년 2월 24일 동산문화재 제3551호로 지정된 탱화로서 1880년의 작품이며 비단으로

    된 크기는 100cm × 87cm 이고 불영사에 소장되어 있다.

    15) 신중탱(神衆幀)

      1978년 2월 24일 동산문화재 제3553호로 지정된 함풍(咸豊) 10년인 1860년의 작품으로

    불영사에 소장되어 있으며 비단으로 된 크기는 213cm × 225cm 이다.

    16) 십왕탱(十王幀)

      1978년 2월 24일 동산문화재 제3555호로 지정된 조선조 때의 작품으로 불영사에 소장되

    어 있으며 비단으로 된 크기는 102cm × 77cm 이다.

    17) 석가여래탱(釋迦如來幀)

      1978년 2월 24일 동산문화재 제3556호로 지정된 1880년의 작품으로 불영사에 소장되어

    있으며 비단으로 된 크기는 130cm × 133cm 이다.

    18) 법고(法鼓)

      1978년 2월 24일 동산문화재 제3558호로 지정된 조선후기의 작품으로 불영사에 소장되

    어 있으며 가죽으로 된 크기는 104cm × 17cm 이다.

    19) 금구(金口)

      1978년 2월 24일 동산문화재 제3559호로 지정된 조선후기의 작품으로 불영사에 소장되

    어 있으며 가죽으로 된 크기는 10.5cm × 66.5cm 이다.

    20) 대웅보전현판(大雄寶殿懸板)

  •   1978년 2월 24일 동산문화재 제3562호로 지정된 조선조 때의 작품으로 불영사에 소장되

    어 있으며 나무로서 크기는 120cm × 150cm 이다.

    21) 관음보살후불탱(觀音菩薩後佛幀)

      1978년 2월 24일 동산문화재 제3564호로 지정된 조선후기의 작품으로 불영사에 소장되

    어 있으며 비단으로 된 크기는 190cm × 146cm 이다.

    22) 불영사적묵당창설선원기(佛影寺寂?堂創設禪院記)

      1978년 2월 24일 동산문화재 제3566호로 지정된 현판으로 불기(佛紀) 295년의 작품으로

    불영사에 소장되어 있으며 나무로 된 크기는 189cm × 41cm 이다.

    23) 불영사유제(佛影寺留題)

      1978년 2월 24일 동산문화재 제 3567호로 지정된 조선후기의 나무로 된 현판으로 불영

    사에 소장되어 있으며 크기는 89cm × 37cm 이다.

    24) 인합(印盒)

      1978년 2월 24일 동산문화재 제3568호로 지정된 연대 미상의 인장 보관함으로 불영사에

    소장되어 있으며 나무로 된 크기는 10.5cm × 14cm 이다.

    25) 불영사가직인 및 가직장(佛影寺佳職印 및 佳職章)

      1978년 2월 28일 동산문화재 제 3569호로 지정된 조선조 때의 인장으로 불영사에 소장

    되어 있으며 크기는 6cm × 4.4cm, 4.8cm × 2.8cm 이다.

    26) 지장보살도명존자무독귀왕(地藏菩薩道明尊者無毒鬼王)

      1978년 2월 24일 동산문화재 제3570호로 지정된 크기 139cm × 76cm와 132cm ×

    42cm, 그리고 128cm × 35cm의 3점이 돌로 되어 있고 불영사에 소장되어 있다.

    27) 지장보살후불탱(地藏菩薩後佛幀)

      1978년 2월 24일 동산문화재 제3571호로 지정된 1880년의 작품으로서 크기는 260cm

    × 270cm이며 불영사에 소장되어 있다.

    28) 대방광불화엄경소연의초(大方廣佛華嚴經疏演義抄)

    1978년 2월 24일 동산문화재 제3573호로 지정된 조선조 때의 작품으로 목판본으로 된 책

    8권이며 크기는 30.3cm x 20.4cm로 불영사에 소장되어 있다.

    29) 대방광불화엄경현행원품소(大方廣佛華嚴經賢行願品疏)

      1978년 2월 24일 동산문화재 제3575호로 지정된 조선조 때의 목판본으로 크기는

    30.7cm × 19.9cm 이며 불영사에 소장되어 있다.

    30)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1978년 2월 24일 동산문화재 제3576호로 조선조 때의 목판본으로 크기는 13.8cm ×

    21cm이며 불영사에 소장되어 있다.

    31)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1978년 2월 24일 동산문화재 제3577호로 지정된 목판본으로 크기는 27.6cm × 20.2cm

    로서 불영사에 소장되어 있다.

    32) 선문촬요(禪門撮要)

      1978년 2월 24일 동산문화재 제3578호로 지정된 융희(隆熙) 2년인 1908년의 작품으로

    목판본으로 된 크기 27.7cm × 19.2cm로서 불영사에 소장되어 있다.

    33) 대방광단각수다라료의경(大方廣丹覺修多羅了義經)

  • 1978년 2월 24일 동산문화재 제3579호 및 제3580호로 지정된 성화(成化) 원년(元年)인

    1470년과 만력(萬曆) 39년인 1611년의 작품 2종으로 목판본으로 된 크기 36.1cm ×

    25cm, 31.2cm × 21.1 cm로 불영사에 소장되어 있다.

    34)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

      1978년 2월 24일 동산문화재 제3581호로 지정된 강희(康熙) 4년인 1665년의 작품으로

    목판본으로 된 크기 35.8cm × 25cm로서 불영사에 소장되어 있다.

    35) 금강반야경소론찬요간정기회편(金剛般若經疏論纂要刊定記會編)

      1978년 2월 24일 동산문화재 제3582호로 지정된 조선 현종 때의 작품이고 목판본으로

    되어 있으며 크기는 29.2cm × 20cm로 불영사에 소장되어 있다.

    36)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

      1978년 2월 24일 동산문화재 제3584호로 지정된 함풍(咸豊) 갑인(甲寅)인 1854년의 작

    품으로 크기는 29.8cm × 19.5cm로 목판본이며 불영사에 소장되어 있다.

    37) 사분계본여석(四分戒本如釋)

      1978년 2월 24일 동산문화재 제3585호로 지정된 건륭(乾隆) 을축(乙丑)인 1745년의 작

    품이며 목판본으로 된 크기 30cm × 19.4cm로 불영사에 소장되어 있다.

    38) 천축산불영사기(天竺山佛影寺記)

      1978년 2월 24일 동산문화재 제3587호로 지정된 가경(嘉慶) 15년인 1809년의 작품이며

    필사본으로 된 크기 45.2cm × 31.5cm이며 불영사에 소장되어 있다.

    39) 불영사불량답소전책(佛影寺佛糧畓疏傳冊)

      1978년 2월 24일 동산문화재 제3558호로 지정된 광무(光武) 6년인 1902년의 작품이며

    필사본으로 된 크기 39.7cm × 28.8cm 로 불영사에 소장되어 있다.

    40) 설선당준각기문(說禪堂浚閣記文)

      1978년 2월 24일 동산문화재 제3589호로 지정된 가경(嘉慶) 11년인 1806년의 작품이며

    필사본으로 된 크기 109cm × 48.5cm로 불영사에 소장되어 있다.

    41) 칠중수계의궤(七衆受戒儀軌)

      1978년 2월 24일 동산문화재 제3590호로 지정된 광무(光武) 5년인 1901년의 작품이며

    목판본이며 크기는 29.7cm × 19cm로 불영사에 소장되어 있다.

    42) 치문경훈(緇門警訓)

      1978년 2월 24일 동산문화재 제3591호로 지정된 목판본으로 크기는 28.7cm × 20.2cm

    로강희(康熙) 을해(乙亥)인 1695년의 작품이며 불영사에 소장되어 있다.

    43) 칠구와불모소설준제시라니경(七俱瓦佛母所說准提施羅尼經)

      1978년 2월 24일 동산문화재 제3592호로 지정된 목판본으로 크기는 34.1cm × 27.8cm

    로 조선후기의 작품으로서 불영사에 소장되어 있다.

    44) 현행서방경(現行西方經)

      1978년 2월 24일 동산문화재 제3594호로 지정된 강희(康熙) 49년인 1710년의 작품이며

    목판본으로 된 크기 29.3cm × 20cm로 불영사에 소장되어 있다.

    45) 고봉화상선요(高峰和尙禪要)

      1978년 2월 24일 동산문화재 제3595호로 지정된 숭정(崇禎) 8년인 1635년의 작품이며

    목판본으로 된 크기 24.5cm × 17.7cm로 불영사에 소장되어 있다.

  • 46) 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

    1978년 2월 24일 동산문화재 제3596호로 지정된 가경(嘉慶) 2년인 1797년의 작품으로 목

    판본으로 된 크기 27.8cm × 19cm로 불영사에 소장되어 있다.

    47) 불설대보부모사중경(佛說大報父母思重經)

      1978년 2월 24일 동산문화재 제3597호로 지정된 만력(萬曆) 2년인 1575년의 작품이며

    목판본으로 된 크기 28.2cm × 19.5cm로 불영사에 소장되어 있다.

    48) 불설무량수경(佛說無量壽經)

      1978년 2월 24일 동산문화재 제3598호로 지정된 함풍(咸豊) 11년인 1861년의 작품이며

    목판본으로 된 크기 30.2cm × 20.7cm로 불영사에 소장되어 있다.

    49) 불설천지팔양신주경(佛說天地八陽神呪經)

      1978년 2월 24일 동산문화재 제3599호로 지정된 목판본으로 크기는 29.3cm × 19.5cm

    이며 도광(道光) 13년인 1833년의 작품으로서 불영사에 소장되어 있다.

    50) 해월(海月)황여일(黃汝一)선생의 유품(遺品)

    • 만국공여지도(萬國供輿地圖)

      1598년 이항복(李恒福)?이정구(李廷龜)선생과 함께 변무진주사(辨誣陳奏使) 서장관(書狀

    官)으로 명(明)나라에 갔을 때 이태리의 지리학자 “마테오리치”의 감수를 받아 손수 제작한

    세계지도로서 병풍식으로 되어 있으며 동양 유일품의 걸작으로 현재 숭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갈근필병풍(葛根筆屛風)

                             

      마상휴대용술통

      1588년(선조 21년)에 해월헌(海月軒)을 이룩한 후 석봉((石峰) 한호(韓濩)가 해월헌에 들

    러 해월헌 뒷산의 칡뿌리를 캐어 입으로 씹어서 붓을 만들어 쓴 친필 병풍으로 해월헌에 소

    장되어 있다.

    •마상휴대용(馬上携帶用) 술통

      조선 명종(明宗) 때의 것으로 추정되는 술통으로 사동(沙銅)에서 서울로 왕래할 때 술이나

    물을 넣어 마상(馬上)에 싣고 다니는 것으로 안주합과 술잔·잔대로 구분되어 있으며 해월헌

    에 소장되어 있다.

  •                                      

      각대

    •각대(角帶)

      조선 선조(宣祖)때의 것이며 해월선생이 사용하던 각대로서 2점이 있다.

    •화살

      해월선생이 임진왜란 때 윤탁연(尹卓然) 및 권율(權慄)장군의 종사관으로 있을 때 사용한

    화살이다. 행주대첩 때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휴대용(携帶用) 모필갑(毛筆匣)

      해월 선생이 사용하던 휴대용 필통이다.

    •수저

      해월 선생이 사용하는 수저가 오늘까지 전하고 있다.

    •교지(敎旨)

    ?관직교지(官職敎旨)는 해월 선생의 것이 23매 동명공 교지 5매가 보존되어 있다.

    ?입궐교지(入闕敎旨)는 해월선생과 동명공의 입궐고지 5매가 현존하고 있다.

    ?정부인교지(貞夫人敎旨)는 해월(海月) 황여일(黃汝一)선생의 부인에게 내린 교지(敎旨)    

    이다.

    •과거답안지

      해월선생과 동명공의 과거 답안지 2매가 보존되어 있다.

    •내사대학언해(內賜大學諺解)

      선조(宣祖)께서 해월(海月)선생에게 하사(下賜)한 대학언해(大學諺解)이다.

                              

      천군기

    ?청동등잔

      조선조 중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으로 만들어진 등잔이다.

    51) 천군기(天君記)

      황씨 종가의 유품으로 내려오는 삼황연의(三皇演義)라는 책 속에 천군기의 전문이 수록되

  • 어 있다. 맨 앞장에는 “비술기종전미오(備述其從前迷誤) 어차편우언운중차(於此編寓言云中

    此) 숭정계유중추(崇禎癸酉仲秋)”라는 글귀와 동명(東溟) 황중윤(黃中允) 서(書)로 표기되어

    있다. 이 책의 기록 연대는 1633년(인조11년)이고 광해군(光海君) 때 승지(承旨)를 지낸 황

    중윤(黃中允)이 쓴 것이며 조맹부체(趙孟?體)로 가로 28cm, 세로 24.5cm 크기의 한지에 각

    장마다 16행 22자로 19장에 걸쳐 쓰여져 있다. 완벽하게 해월헌에 보관되어 있다.

    52) 해월선생 부인 완산이씨(完山李氏) 필사유언(筆寫遺言)

      1651년(효종2년)과 1656년(효종 7년)에 기록한 2통의 유언기록문으로 해월선생의 부인

    완산이씨가 쓴 것이며 내간체로 기록한 한글로 쓰여진 우리나라 최초의 유언문이다. 크기는

    가로 52cm, 세로 50cm와 가로 70cm, 세로 50cm로 앞서의 것은 강원감사에게 보낸 것이

    고 나머지 1점은 후손에게 남긴 것이다. 1981년 7월 27일 인천대 최동국 교수가 반장이었

    던 문학과 언어연구회 학술조사반에 의해 발표되었으며 해월헌에 소장되어 있다.

    53)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선생의 영정(影幀)

      기성면 황보리 692번지 소재 1816년에 건립된 노동서원(魯東書院)에 우암(尤庵) 송시열

    (宋時烈)선생을 봉안하였는데 1816년 전후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우암(尤庵)선생의 영정(影

    幀)이 모셔져 있다. 이 영정은 마지에 그린 것으로 색채가 조금도 퇴색됨이 없이 선명하게

    보존되어 있다.

    54)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선생의 정명촌기(正明村記)

      문충공(文忠公)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선생이 선조(宣祖)21년에 기성면 황보리에서 5

    년 동안 귀양살이를 할 때에 기성면 정명리의 대해(大海) 황응청(黃應淸)선생과 교우가 두터

    워 정명촌에 자주 들러 학문을 토론하였는데 대해(大海)선생과 문답한 말을 기록하여 정명

    촌기를 지었다. 원문이 목판본으로 평해황씨세보(平海黃氏世譜)에 기록되어 있다.

    55)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선생의 사동촌기(沙銅村記)

      조선조 선조(宣祖)때 8대 문장가의 한 사람이며 영의정을 지낸 문충공(文忠公) 이산해(李

    山海)선생이 선조 21년에 기성면 황보리에 귀양 올 때 삼척인 진주(眞州)로부터 울진을 거

    쳐 기성에 이르기까지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관동팔경의 산세를 살펴보고 관동의 청숙(淸淑)

    한 기운이 다하여 지낼 수 없는 데에는 반드시 산세가 굴곡(屈曲)해 상서(祥瑞)로운 기운이

    하나로 뭉쳐 박혀진 곳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사동이라 하였고 또한 재주가 뛰어난 선비가

    그 마을에 태어난 사실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그때 한림원(翰林院)의 황학사(黃學

    士)?형조(刑曹)의 원외랑(員外郞)인 형조정랑(刑曹正郞) 황여일(黃汝一) 선생을 만나 보니 문

    사(文詞)가 뛰어나고 풍부하며 문의(文義)가 뛰어나고 기량(器量)이 넓고 큰 것에 탄복한 연

    후에 그 상서로운 기운이 황원외(黃員外)에게 있음을 알았다고 하였으며 인재가 무상하게

    배출되어 끊이지 않을 것을 점(点)칠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평해황씨세보에 목판본으로

    기록되어 있다.

    56) 책판(冊板)

      남계명저(南季明著) 해운집판(海雲集板), 상현사(尙賢祠) 소재 남사고저(南師古著) 격암집

    판(格菴集板), 주신개저(朱臣介著) 이우당집판(二友堂集板), 주필대저(朱必大著) 한재집판(寒

    齋集板), 전선저(田銑著) 만은집판(晩隱集板), 구장사(龜藏祠) 소재 전구원저(田九?著) 우와

    집판(愚窩集板), 윤시형저(尹時衡著) 우암집판(憂菴集板), 윤사진저(尹思進著) 정관치설판(井

    觀痴說板), 몽천서원(蒙泉書院) 소재 윤사진저(尹思進著) 황림집판(篁林集板), 황응청저(黃應

  • 淸著) 대해집판(大海集板), 명계서원(明溪書院) 소재 황여일저(黃汝一著) 해월집판(海月集

    板), 명고서원(明皐書院) 소재 황중윤저(黃中允著) 동명집판(東溟集板), 김역저(金譯著) 탁계

    집판(卓溪集板), 우암선생(尤庵先生) 송시열(宋時烈)의 친필(親筆)7)

    57) 조선(朝鮮)의 호적(戶籍)

      1414년(태종15년)에 시행한 호적이며 북면 주인리 장씨 종가에 소장되어 있다. 낭장이었

    던  장인숙(張仁淑)의 추심호(推尋戶)이다. 다른 대부분의 추심호와 마찬가지로 그 내용은

    거의 모두 고려후기의 것이며 생존된 것으로 기록된 몇 명의 인물조차도 모두 고려말에 활

    동하였던 사람들이다. 71년에 간행된 《울진군지》에 급제홍패(及第紅牌)와 함께 장양수(張

    良守)의 세계(世系)가 포함된 조선초의 호구단자가 한글로 토(吐)를 달아 거의 전문이 실려

    있다. 71년도 군지(郡誌) 간행과 거의 같은 시기에 장씨종가(張氏宗家)의 잇다른 흉사(凶事)

    와 후손(後孫)들의 식견(識見)부족으로 인하여 군지에 실린 것을 마지막으로 상가(喪家)의

    휴지와 함께 불살라 졌다. 이 자료가 현존하였다면 호구단자로서는 가장 오래된 일차자료였

    다는 점에는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따라서 울진장씨족보(蔚珍張氏族譜)와 군지(郡誌) 등을

    토대로 하여 이를 분석한 연구성과8)가 나와 있어서 이해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永樂十三年七月十四日立案

    右立案狀告前郞將張仁淑所志內乙用良同員及妻氏邊內外八祖戶口乙良狀員所納持音戶口草件乙

    用良傳 郡上去辛未年戶口帳憑考斜只監踏印狀員亦中退向事合行立案者 知蔚珍郡事

    嗚呼此郞將先祖永樂十三年乙未帳籍也

    58) 순조대(純祖代)의 호적(戶籍)9)

      1828년(純祖 28년) 남경순(南景淳)호적에 부(父)?조(祖) ?증조(曾祖)?외조(外祖)가 등재되

    었으며 처(妻)?처부(妻父)?처조(妻祖)?처증조(妻曾祖) 및 처외조(妻外祖)가 등재되었고 몇 자

    (字) 낮추어 자(子)?자부(子婦) 또 몇 자(字) 낮추어 노비(奴婢)가 부기되었으며 성(姓)이 없

    는 것으로 보아 노비는 성을 갖지 못하였던 것 같다.

    59) 비석군(碑石群)

    •불영사(佛影寺) 사적비(事蹟碑)

      서면 하원리 120번지에 있으며 비머리〔?首〕는 길이 46cm, 폭 75.5cm, 두께 59cm이

    고 비신(碑身)은 높이 155cm, 폭 51.1cm, 두께 23.8cm이며 비좌(碑座)의 높이 19cm, 폭

    1.07cm, 길이 83cm이다. 이 비는 최근에 세운 것이나 이수나 이좌는 옛부터 있던 것에 비

    신을 다시 만든 것이며 불영사의 사적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울진비석군

      조선 군수?현령?관찰사 등 고을 백성들과 호흡을 같이 하며 선정(善政)을 베풀었던 명관

    (名官)들의 선정비(善政碑)로 여러 곳에 흩어져 있었는데 향인(鄕人) 임경필(林敬弼) 이

    1922년 9월 2일에 자비(自費)로 새마실〔新村〕도로 변에 25좌(座)를 정열(整列)하여

     놓았다. 그 후 1981년 6월1일에 울진군에서 월송대(月松臺) 입구에 이설(移設)하였고 이설

    하면서 5좌(座)를 추가하여 모두 30좌(座)며 29기(基)이다. 이들 중에는 철비(鐵碑) 2기(基)

    가 있다.

    ? 도순찰사(都巡察使) 신응조(申應朝)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

    ? 어사(御使) 오명준(吳命俊) 승세불망비(承世不忘碑)

    ? 관찰사(觀察使) 김치용(金致龍) 선정영세불망비(善政永世不忘碑)

  • ? 관찰사(觀察使) 민치서(閔致序)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 순찰사(巡察使) 민영위(閔永緯)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 관찰사(觀察使) 임한수(林翰洙)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

    ? 관찰사(觀察使) 정원용(鄭元容)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 관찰사(觀察使) 홍우순(洪佑順)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

    ? 관찰사(觀察使) 남정익(南廷益)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

    ? 현령(縣令) 김태희(金泰熙)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 관찰사(觀察使) 김정근(金禎根)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

    ? 현령(縣令) 이상성(李相成)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

    ? 현령(縣令) 김태희(金泰熙)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

    ? 현령(縣令) 남정환(南廷煥)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

    ? 현령(縣令) 왕근호(王謹鎬)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

    ? 현령(縣令) 김봉년(金鳳秊)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

    ? 현령(縣令) 심규택(沈奎澤) 애민선정비(愛民善政碑)

    ? 현령(縣令) 심해유(沈?遺)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

    ? 현령(縣令) 남예원(南禮元)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 현령(縣令) 김태희(金泰熙) 애민선정비(愛民善政碑)

    ? 현령(縣令) 홍은(洪?)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 현령(縣令) 이광전(李光?) 청덕휼민비(淸德恤民碑)

    ? 군수(郡守) 이규목(李圭穆) 거사비(去思碑)

    ? 군수(郡守) 윤우영(尹宇榮) 인명선정비(仁明善政碑)

    ? 평해군겸임 장영환(平海郡兼任張永煥) 선정비(善政碑)10)

    ? 관찰사(觀察使) 김승집(金升集) 청덕영세불망비(淸德永世不忘碑)

     ? 관찰사(觀察使) 강상국(姜相國) 선(銑)?임상국(任相國) 순기(舜?) 선정비(善政碑)

    ? 현령(縣令) 성영구(成永龜) 후세불망비(後世不忘碑)

    ? 현령(縣令) 황익(黃益) 청덕애민선정비(淸德愛民善政碑)

    •평해비석군

       평해읍 평해리 평해향교 태화루 앞에 있었으며 4기로서 수령들의 선정(善政) 불망비(不

    忘碑)이다.

        ? 군수(郡守) 심공능무(沈公能武) 불망비

        ? 군수(郡守) 이공승원(李公承遠) 불망비

        ? 군수(郡守) 이공윤옹(李公玧翁) 불망비

        ? 군수(郡守) 신공치응(申公致應) 불망비

    •월송리 비석군

      평해읍 월송리 월송초등학교 앞에 있으며 모두 6기로서 수령?방백(守令?方伯)의 선정비이

    다.

    •관찰사(觀察使) 도애비(道愛碑)

      북면 나곡리 고포동에 있으며 비석 앞면에 관찰사이공보혁휼민도애비(觀察使李公普赫恤民

    道愛碑)라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옹정십이년건립(雍正十二年建立)이라 새겨져 있었어1734년

  • (영조10년)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이보혁(李普赫)은 명인전에 나오는 인물이 아니므로

    휼민(恤民)이란 글씨가 의문시된다.

    •북면 비석군

       북면 부구리에 있으며 모두 7기로 육방관속(六房官屬)들의 서정을 기리는 뜻에서 세운

    것으로 보인다.

    •충혼비(忠魂碑)

      ? 충혼탑(忠魂塔) : 울진읍 고성리 월송공원에 위치하고 있으며 1978년 6월 6일 군민의

    정성을 모아 492평의 부지에 지하 1층, 탑의 높이 4.5m로 3,891만을 들여 건립하였으

    며 충혼탑 위패 봉안 현황은 독립지사(28위), 한청(60위), 육군(608위), 해군(7위), 경찰

    (46위), 군무원(5위), 기타(10위) 등 총 764위를 봉안하고 있다(1999년 12월 31일 현

    재)

      ? 원남충혼비 : 1961년 6월 원남면 재향군인회에서 건립하였다.

      ? 기성충혼비 : 1966년 8월 기성면 전몰군경 유족회에서 건립하였다.

      ? 평해충혼비 : 1955년 6월 5일 평해읍 재향군인회에서 건립하였다.

    ? 온정충혼비 : 1957년 3월 1일 온정면 재향군인회에서 건립하였다.

      ? 울진군장말익제단비(蔚珍郡張末翼祭壇碑) : 울진읍 고성리 가원동 위치.

      ? 판서장양수제단비(判書張良守祭壇碑) : 울진읍 매장동 위치.

      ? 안렴사전자수제단비(按廉使田子壽祭壇碑) : 후포면 삼율리 율현 위치.

      ? 감사안오상신도비(監司安五常神道碑) : 평해읍 비랑동 위치.

      ? 고려대광영양군도금의찬성남홍보제단비(高麗大匡英陽君都僉議贊成南洪輔祭壇碑) :

         죽변면 화방동 위치.

      ? 직장동정장인행제단비(直長同正張仁幸祭壇碑) : 울진읍 호월리 위치.

      ? 진사장겸제단비(進士張謙祭壇碑) : 울진읍 호월리 위치.

      ? 고산서원유허비(孤山書院遺墟碑) : 근남면 행곡리 소재.

      ? 옥계서원유허비(玉溪書院遺墟碑) : 북면 고목리 기곡동 소재.

      ? 구장사유허비(龜藏祠遺墟碑) : 북면 신화리 소재.

      ? 몽양사유허비(蒙養祠遺墟碑) : 죽변면 후장리 소재.

      ? 경춘단제단비(景忠壇祭壇碑) : 원남면 매화리 죽포 소재.

      ? 묵암전만은유허비(?菴田晩隱遺墟碑) : 북면 신화리 소재.

      ? 경흥부사장백손유허비(慶興府使張伯孫遺墟碑) : 죽변면 매정동 소재.

      ? 수의부위사정최운생제단비(修義副尉司正崔雲生祭壇碑) : 근남면 성산동 소재.

      ? 학사 황낙제단비(黃洛祭壇碑) : 평해읍 월송리 월송정 입구 소재.

      ? 황낙황씨시조유래사적비(黃洛黃氏始祖由來事蹟碑) : 평해읍 월송리 월송정 입구 제단

         원 경내 소재.

      ? 기성군갑고지제단(箕城君甲古之祭壇) : 평해읍 월송리 월송정 입구 제단원 경내 소재

      ? 장수군을고지제단(長水君乙古之祭壇) : 평해읍 월송리 월송정 입구 제단원 경내 소재

      ? 창원백병고지제단(昌原伯丙古之祭壇) : 평해읍 월송리 월송정 입구 제단원 경내 소재

      ? 금오공평해황공휘온인지제단(金吾公平海黃公諱溫仁之祭壇) : 평해읍 월송리 월송정

            입구 제단원 경내 소재

  •   ? 소윤평해황공휘우정지제단(少尹平海黃公諱佑精之祭壇) : 평해읍 월송리 월송정 입구

         제단원 경내 소재

      ? 태자검교평해황공휘유중지제단(太子檢校平海黃公諱裕中之祭壇) : 평해읍 월송리 월송

           정 입구 제단원 경내 소재

      ? 펑리문하시중문절평해황공휘서지제단(評理門下侍中文節平海黃公諱瑞之祭壇) : 평해읍

      월송리 월송정 입구 제단원 경내 소재

      ? 호부전서평해황공휘종량지제단(戶部典書平海黃公諱宗亮之祭壇) : 평해읍 월송리 월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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