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에스토니아로 가면서 22년 전 ‘발트의 길’을 보다 - nsi · 2019. 10.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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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 - 1. 에스토니아로 가면서 22년 전 ‘발트의 길’을 보다 다음날 우리는 호텔 1층 레스토랑에서 아침을 하며 어제까지의 여행 심사분석 특히, 어제 저녁 설악산 식당에서의 식사, 그 이후 2차 등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오늘(5일 차: 7월 19일, 화)은 세 번째 나라, 에스토니아로 가는데 어 느덧 일정의 절반이 훌쩍 지나갔다.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숙박지)으 로 가는 도중에 남쪽의 항구도시 패르누라는 곳을 먼저 둘러본다고 한다. 우리나라로 따져본다면 대전에서 평양까지 가는 도중에 인천 정도가 아닐 까 싶다. 버스로 2시간 정도를 달려야 하기 때문에 가는 동안 발트 3국의 국민이 총 궐기한 ‘발트의 길’ 녹화 테이프를 보여 주었다. 발트 3국이 반짝(1919~1939) 독립을 누리던 중 독일과 소련이 상호불 가침 조약을 맺었는데(1939.08.23), 그 조약내용은 두 나라 마음대로 3국 과 폴란드를 소련의 지배하에 둔다는 것이었다. 그 조약을 맺은 지 정확 히 50년이 지난 1989년 8월 23일 ‘인간띠’의 독립운동을 한 것이다. 모 든 움직일 수 있는 수레, 자전거 등을 동원하여 할아버지, 할머니, 어린 손자들까지 모두가 지정받은 위치에서 몇 시간을 걷고 기다리다가 그날 7시 전국의 교회 종소리가 울리자 일제히 노래하면서 독립을 외쳤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서 있는 그 긴 행렬의 모습을 보던 우리는 저절로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22년 전, 간절한 마음으로 손을 잡고 서 있었던 그 길을 내려다보면서․․․․․․. 발트 3국의 200만 국민들이 600km 길 위에 섰다면 우리도 언젠가 제 주도에서 신의주까지 대각선 한 줄로 1,000만 명이 3,000km (1m에 3.3 명)의 인간띠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상상을 하는 동안 버스는 어 느덧 국경의 휴게소에 정차했다. 2. 남쪽 항구 도시 패르누에서 여성 국민시인 부녀와 함께 잠시 후 우리는 에스토니아의 여름수도로 불리는 휴양도시 패르누 (Pärnu)에 도착했다. 에스토니아 언어와 문자는 주변 국가와 완전히 다 른 핀 우그리어 계통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적은 인구가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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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1. 에스토니아로 가면서 22년 전 ‘발트의 길’을 보다 - NSI · 2019. 10. 8. · 리디아 코이둘라(Lydia Koidula, 1843~1886)라는 이 여성은 이 근처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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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에스토니아(Estonia)

1. 에스토니아로 가면서 22년 전 ‘발트의 길’을 보다

다음날 우리는 호텔 1층 레스토랑에서 아침을 하며 어제까지의 여행

심사분석 특히, 어제 저녁 설악산 식당에서의 식사, 그 이후 2차 등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오늘(5일 차: 7월 19일, 화)은 세 번째 나라, 에스토니아로 가는데 어

느덧 일정의 절반이 훌쩍 지나갔다.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숙박지)으

로 가는 도중에 남쪽의 항구도시 패르누라는 곳을 먼저 둘러본다고 한다.

우리나라로 따져본다면 대전에서 평양까지 가는 도중에 인천 정도가 아닐

까 싶다. 버스로 2시간 정도를 달려야 하기 때문에 가는 동안 발트 3국의

국민이 총 궐기한 ‘발트의 길’ 녹화 테이프를 보여 주었다.

발트 3국이 반짝(1919~1939) 독립을 누리던 중 독일과 소련이 상호불

가침 조약을 맺었는데(1939.08.23), 그 조약내용은 두 나라 마음대로 3국

과 폴란드를 소련의 지배하에 둔다는 것이었다. 그 조약을 맺은 지 정확

히 50년이 지난 1989년 8월 23일 ‘인간띠’의 독립운동을 한 것이다. 모

든 움직일 수 있는 수레, 자전거 등을 동원하여 할아버지, 할머니, 어린

손자들까지 모두가 지정받은 위치에서 몇 시간을 걷고 기다리다가 그날

7시 전국의 교회 종소리가 울리자 일제히 노래하면서 독립을 외쳤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서 있는 그 긴 행렬의 모습을 보던 우리는 저절로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22년 전, 간절한 마음으로 손을 잡고 서 있었던

그 길을 내려다보면서․․․․․․. 발트 3국의 200만 국민들이 600km 길 위에 섰다면 우리도 언젠가 제

주도에서 신의주까지 대각선 한 줄로 1,000만 명이 3,000km (1m에 3.3

명)의 인간띠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상상을 하는 동안 버스는 어

느덧 국경의 휴게소에 정차했다.

2. 남쪽 항구 도시 패르누에서 여성 국민시인 부녀와 함께

잠시 후 우리는 에스토니아의 여름수도로 불리는 휴양도시 패르누

(Pärnu)에 도착했다. 에스토니아 언어와 문자는 주변 국가와 완전히 다

른 핀 우그리어 계통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적은 인구가 사용하고 있다

Page 2: 1. 에스토니아로 가면서 22년 전 ‘발트의 길’을 보다 - NSI · 2019. 10. 8. · 리디아 코이둘라(Lydia Koidula, 1843~1886)라는 이 여성은 이 근처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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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한다. 특히 모음에 독일어 같은 움라이트(점)가 찍혀 있어 이 도시

발음이 파르누가 아닌 패르누가 되는 모양이다.

도시는 작지만 세련되고 우아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어 많은 외국 관

광객이 찾는 것 같다. 이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공원에 있는 젊은 여성의

동상 앞으로 갔는데 우리나라 유관순 같은 독립투사인 줄 알았더니 에

스토니아 사람들이 좋아하는 ‘여류민족시인’이라고 한다.

리디아 코이둘라(Lydia Koidula, 1843~1886)라는 이 여성은 이 근처

에서 태어나 이 고장에서 학교를 나왔고 신문사를 경영하는 아버지를

도와 시, 글을 쓰면서 유명해졌다고 한다.

이 공원을 지나니 쇼핑가 길에 전신 동상(신문을 들고 있는 대머리 신

사)이 서 있는데 바로 그녀의 아버지 얀센이라고 한다. 그는 에스토니아

의 계몽시대(1800년대 중반)에 최초로 신문을 발간하여 국민을 계도하

는데 앞장섰다고 한다. 리디아의 동상은 아버지보다 더 높고 품위 있게

세워져 있어 아마도 그녀가 아버지보다 더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지 않

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시 “나의 조국, 나의 사랑”으로 만든 노

래(나중에 탈린으로 가는 버스에서 들려줌)는 국민 애창곡이 되어 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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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다 열리는 에스토니아 세계노래대전에서 국가(國歌) 다음으로 함께 부

르는 노래라고 한다. 이 부녀의 동상이 서 있는 곳을 중심으로 여기저기

예쁜 꽃밭과 상점이 어우러져 있었고 이곳에서 잠시 쇼핑시간을 가지기

로 했다.

3. 오후에 탈린문 그리고 패르누의 해변의 산책

[탈린문]

쇼핑 후에는 사모님들이 이곳 물건 가격이 비싸지 않고 대체로 적당

했다는 등의 품평이 있었다. 사모님을 수행하셨던 회원들은 다리가 아프

고, 싱글들을 포함하여 야외 카페 등에서 기다리신 분들은 다소 지루하

셨다고 했는데 이런 작은 불평들은 때마침 점심식사로 기분 좋게 마무

리됐다. 이번 여행에 처음 참가한 김동수 회장 부부의 맥주 건배로 맛있

는 점심 식사시간을 가졌다. 점심을 마치고 ‘탈린 문’이라고 하는 곳을

통과하면서 다시 오후 일정이 시작되었다.

에스토니아가 한자동맹으로 항구들이 번성하던 시절, 탈린에서 오는 상

인들이 항상 이 문을 넘어 패르누로 들어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 옛날 탈린의 상인들이 들어왔던 방향과 반대로 걸어나가니, 작은

공원과 적당한 길이의 수로 같은 발리케르 호수가 나왔다. 18세기 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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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틱 해변에서]

예카테리나 2세가 이곳을 방문할 때 배를 탄 채로 들어올 수 있도록 운하

를 파서 이 호수와 연결했다고 한다. 호수 옆길을 산책하다 보니 저 멀리

바다가 보였고 잠시 후 다시 그쪽으로 갈 거라고 해서 일단 돌아섰다. 버

스를 타고 해변가로 가는 길에 보이는 화려하고 예쁜 집들은 미국이나 서

유럽의 부촌에 못지않아 고급스러워 보였다. 메레 대로(Mere pst)라고 하

는 이곳의 고급 호텔은 탈린보다 더 비싸다고 한다.

이곳 발틱 해변은 단단하면서 고운 모래가 꽤 넓고 길게 펼쳐져 있는

훌륭한 해수욕장이었지만 생각보다 사람이 별로 없었다. 보통 이곳의 여

름은 매우 짧고 일교차가 심한데 오늘은 선선한 편이라고 한다. 필자를

비롯한 몇몇 싱글들은 여행사에서 공급한 소주와 김으로 잠시 해변가의

낭만을 즐겼다. 발트해를 바라보며 좀더 천천히 즐기고 싶었지만 다른

일행들이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돌아서니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4. 탈린까지 그리고 저녁시간은

이제 탈린으로 출발, 가는 동안은 오수를 즐기기에 제격이다. 우리나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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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6시간 늦은 시차에다가 여행의 중반으로 가니 적잖이 피로를 느낄 때이

고 더군다나 지금은 오후니까 말이다. 가이드가 에스토니아의 국가(國歌),

리디아 시인의 노래, 그리고 민요들을 틀어주었는데 음악이 느리면서 단조

로워, 자장가처럼 들려 낮잠자기에 부담이 없었다.

탈린에 도착하여 체크인하기 전에 저녁식사를 하기로 된 장소로 먼저 갔

는데, 우리로 말하면 가든 정도쯤 되는 듯 했다. 그러나 우리가 예상보다

빨리(6시경) 도착하는 바람에 30분 이상을 기다리기는 했지만, 들어가 자리

잡고 내부를 둘러보니 꽤 분위기가 괜찮았다. 테이블이 ‘ㄷ’자 모양으로 놓

여 있었는데, 숙달된 총무의 안내에 따라 “남탕, 여탕”식으로 앉고 보니 자

연스럽게 남녀가 대칭으로 나뉘었다. 우리 머리위의 벽에는 사슴 등 박제된

짐승 머리들이 장식되어 있었는데 총무가 여성 쪽에서 보이는 것은 수컷이

고 남성 쪽에서 보이는 것은 암컷이라고 해서 모두 한바탕 활짝 웃었다. 재

미있는 분위기에서 시작된 이날 저녁은 문희성 회장이 보드카를 후원해 주

셔서 메인으로 나온 쇠고기 요리와 함께 정말 맛나게 먹었다.

필자에게 건배 구호를 하라고 하여, 이런 좋은 부부모임 자리에 어울릴만한

건배 구호 “우리는! 장잘모(장가 잘 간 사람들의 모임)! 시잘모(시집 잘 온 사

람들의 모임)!”-남녀가 차례대로 외쳤고, 흥겨운 분위기는 한층 더 무르익었다.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향했는데 이곳에서도 같은 체인의 래디슨 블루 호텔

이었다. 탈린에서는 여정이 가장 긴 3일 밤을 지내는 것이니 호텔 방의 시설

이 어떨지 궁금했다. 배정된 방에 들어가 보니 무척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전망이 좋은데다 서향이어서 밤 10시쯤의 아름다운 일몰이 기대되었다.

방에는 냉장고 있는 곳에 다리미, 금고 등이 세트로 되어 있고 그 위에 텔

레비전까지 올려놓은 다기능 가구가 있었는데, 작은 면적을 효율적으로 활용

한 아이디어가 돋보였다.

호텔에 사우나시설이 있다고 해서 가보니 너무 좁아서(5~6명) 불편했지만

그냥 아쉬운 대로 이용할 만 했다. 샤워하고 개운한 기분으로 와이프와 호텔

주변에 뭐가 있지 않을까 싶어 나갔더니 상점은 일찍도 문을 닫았다. 그때 조

갑주 회장 사모님도 오늘 패르누에서 산 옷을 입고 우리 부부처럼 지형정찰

을 하고 계셨다. 참 부지런한 분이다.

호텔 건너편 건물의 옥상(8층 높이)에 야외 카페로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필자 와이프와 이송미 차장 등을 초대하여 그곳에서 맥주를 한잔 하고 계셨

다. 우리가 묵은 호텔 14층 복도에서 맞은편 야외카페가 잘 보여 손을 흔들

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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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방에서 바라보는 낙조가 아름다워서 카메라에 담아 두었다.

[밤 11시, 낙조 풍경]

5. 덴마크의 도시 탈린(Tallinn)에서 시작된 역사

여행 6일 차(7월 20일, 수), 본격적으로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인구 약 40

만 명)의 역사 ․ 문화 탐방에 나섰다.

처음 라트비아에 진출(1201)한 알베르트 주교가 에스토니아까지 가톨릭의

선교활동을 확대(1208)하면서 탈린의 역사도 시작되었다고 한다.

다른 두 나라보다 발틱해의 가장 북쪽에 자리 잡은 이곳을 가까이에 있는

스웨덴과 러시아 등이 경쟁적으로 관심을 보이자 알베르트 주교는 오히려 멀

리 있는 덴마크의 발데마르 2세(ValdemarⅡ)와 손을 잡고 연합을 구성했다.

1219년 덴마크의 발데마르가 탈린에 진군했는데 탈린 원주민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주교와 함께 하나

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더니 하늘에서 붉은 바탕에 흰 십자가가 그려 있는 깃

발이 내려와 발데마르의 손에 떨어졌다고 한다. 이를 신의 뜻이라 여긴 그는

전열을 가다듬어 용기백배하여 탈린의 정벌에 성공하였다고 한다. 바로 이

깃발이 덴마크의 국기가 되었으며, 이때부터 탈린은 ‘덴마크인의 도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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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리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에스토니아는 1919년 잠깐의 독립이 되기까

지 꼭 700년 동안 외세의 지배를 받는 역사가 되풀이되었다. 라트비아 원

주민과 함께 리보니아의 한 부분으로 존재하던 에스토니아인들은 1346년

독일, 덴마크의 연합정권에 2년간의 반란을 일으켰지만 실패하였다. 이때

덴마크가 얼마간의 지분을 챙기고 철수한 이후에도 에스토니아는 외세(독

일)의 세력에 눌려 지냈다. 1558년부터 1626년까지 주변의 이해 당사국

간의 지루한 전쟁 속에 에스토니아(라트비아도)는 전 국토가 전쟁터로 변하

는 비참한 역사를 겪게 된다. 이후에도 에스토니아는 폴란드(남쪽)와 스웨

덴(북쪽)의 지배를 받게 되고, 1710년부터 다시 이 지역에 세력을 떨친 러

시아의 지배 하에서 1991년 완전한 독립을 할 때까지 식민지 역사를 이어

갔다.

6. 탈린의 중심지 톰페아는 아름다운 건축물의 전시장

이런 식민지역사의 흐름 속에서 동․북유럽의 여러 강대국과 그 중 가장

오랫동안 지배했던 러시아는 탈린 곳곳에 그들의 문화의 흔적을 남겨 놓았

다. 양파 모양을 한 러시아 정교회, 탈린의 하늘을 찌르고 있는 고딕양식의

교회와 바로크양식 건물들이 한자리에 모여 다양한 문화의 전시장을 이루

고 있다. 이곳은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고 ‘발트해의 보석’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오늘도 많이 걸을 거라 단단히 각오하고 버스에서 내렸다. 탈린 중심부에

위치한 석회암 언덕인 톰페아 언덕(Toompea Hill, Upper Town)으로 이

동했다. 높은 산이 없는 탈린에서 높이 30m의 톰페아 언덕은 마치 산처럼

느껴졌다. 이 톰페아 언덕에 있는 톰페아성은 1227~1229년에 덴마크인들

이 건설하였다.

이 성은 원통형의 ‘키다리 허만 타워(Tall Herman Tower, 45m)’로

1371년에 세워졌다. 건물은 위에서 보면 ‘ㄷ’자 ‘ㅁ’자를 붙여 놓은 구조의

바로크양식의 건물로 이 지역의 지배자들이 머물렀다. 정면으로 보이는 분

홍색 건물은 1921년 독립국의 주체의식을 높이고자 증축되었고, 현재 이

건물은 101명(라트비아는 100명인데 여기는 +1)의 국회의원들이 국정을

논하는 국회의사당으로 쓰인다고 한다. 건물 바로 앞에는 동서남북의 방위

표를 그려 놓았는데, 이것은 1989년 ‘발트의 길(인간띠)’이 저 남쪽 리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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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아 빌뉴스에서 시작하여 바로 이 지점에서 끝난 것을 표기해 놓은 것이

라고 한다.

[상: 알렉산더 네브스키 사원] [상: 톰페아 성]

[하: 국회의사당] [하: 방위표]

이 건물의 건너편에는 러시아 정교회, 알렉산더 네브스키 사원(Alexander

Nevsky Cathedral)이 자리 잡고 있는데 가장 최근까지 지배한 제정 러시아

의 차르(알렉산더 3세)의 권력을 보여주는 교회이다. 이 교회는 1900년에

완성되었고, 이 지역의 다른 건축물과 비교하여 역사성은 길지 않지만 가

장 좋은 장소를 차지하고 있었다.

양파 모양의 독특한 양식으로 맨 위의 십자가 모양이 각기 다른 다섯 개

의 타워는 무척 아름다워 전체적으로 멋있는 스카이라인을 형성하고 있다.

러시아 정교회의 원조는 모스크바의 바실리 성당이고 비슷한 시기에 비슷

한 목적으로 지은 불가리아의 소피아 정교회도 있다. 이 교회는 러시아의

13세기 유명한 장군이자 성인인 알렉산더 네브스키에게 헌정되어 그 역사

성과 권위를 높이고 있다.

톰페아 지역의 중요한 교회인 돔(Dome, 현지어는 Toom으로 ‘가장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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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는 의미의 접두사)성당은 13세기에 지어졌고, 주교좌 성당(리가의 돔성

당처럼)으로 주요한 국가행사의 집전이 이뤄지며 왕족 같은 중요 인물의

무덤으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1600년대 스페인의 지배시기에는 개신교

전파 열기로 루터교 교회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교회 내부의 벽면에는 귀족

길드 상인들의 가문 문장들이 경쟁하듯 걸려 있었다.

폭 400m, 길이 250m에 불과한 톰페아 언덕에는 현재의 국회와 함께 관

청가도 자리 잡고 있는데 내각의 건물(Stenbock’s house)도 우아하며 특

히, 골목에 있는 총리관저는 예쁜 주택같이 보였다. 흥미로운 사실은 총리

관저 바로 앞에 아일랜드 대사관이 있는데 그 이유가 에스토니아의 독립운

동 시 제일 먼저 지지해준 나라가 아일랜드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저 아래

있는 다른 나라 대사관들과는 달리 아일랜드가 총리(실세)의 이웃사촌이 된

것이다.

한 바퀴 돌아 바다가 보이는 전망대에 서니 그림 같은 항구가 내려다보

이고 거기에는 대형 크루즈 선박(최소 5~6만 톤급)이 두 척이나 정박해 있

는 것이 보였다. 오늘 이곳이 붐비는 이유가 아마도 크루즈의 관광객 수천

명이 한꺼번에 내려서인 것 같다.

탈린과 톰페아에 관광객이 많은 또 다른 이유가 이민족의 지배를 그토록

오래 받았음에도 그것에 굴하지 않고 빨리 국가를 재건하고 어쩌면 치욕일

수 있는 남의 역사, 남의 문화일지라도 잘 보존하여 지금의 빛을 내고 있

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 봤다.

7. 탈린의 성벽을 내려와 시청광장으로

톰페아를 내려오면서 덴마크 왕의 가든(The Danish King’s Garden)이

라는 정원을 만났다. 탈린의 개척과정에서 등장했던 덴마크 왕 발데마르 3

세가 하늘의 계시를 받았던 곳이라고 한다. 당시의 깃발의 모양(덴마크의

국기)이 선명히 새겨져 있고 떡갈나무와 보리수나무가 심어져 있는 아담한

정원이었다. 구 시청청사를 중심으로 주요 상업지역(Down Town-톰페어

즉 Upper Town에 대하여)을 성벽이 둘러싸고 있으며 성벽의 중간마다(50

∼120m 간격으로) 망루(탑)가 있었다. 원래 탈린은 러시아, 덴마크, 스웨

덴, 폴란드 등 당시 4대 열강의 이권다툼 때문에 13세기부터 도시 외곽을

이 성벽으로 막은 것이다. 지금 현존하는 성벽은 16세기에 건설한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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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께 3m, 높이 15m로 구도시를 감싸며 1.85km(당초 4km)을 뻗어 있고

중간의 붉은빛 원뿔모양의 탑을 이루고 있는 망루들은 처음에 46개였는데

현재는 26개만 남아 있다고 한다. 이 망루는 경비병의 숙소, 경계초소, 포

로의 감옥, 심지어 창녀들의 대기 장소로까지 사용했다고 한다. 지금은 박

물관과 카페 등 다목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주목할 것은 성벽과 망루들이 중세 분위기의 성당, 구 시청청사 등의 아

름다운 건물들과 조화를 이루어 전체적으로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관

광자원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망루에는 이름이 붙어 있었는데 우리가

대표로 본 망루탑은 ‘부엌을 들여다 본다’(원어 The Tower Kiek-in-de-kök,

영어 Peek into the Kitchen)라는 재밌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이 탑은 망

루 중에서 제일 높고(58m) 견고(바닥, 벽의 두께가 4.5m나 되어 주변 건

물의 부엌까지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는 정도)하다고 한다.

톰페아에서 다운타운(상인들의 도시)으로 내려오는 길은 두꺼운 벽이 있

는 비탈길이었는데 이것은 상인들이 외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한편,

톰페아에 있는 지배자들(성직자, 귀족, 기사들)과 신분을 구분 짓는 상징적

인 의미이기도 했다.

롱부츠가 걸려 있는 거리에는 세공이 잘된 금, 은, 호박 등의 귀금속과

그림을 파는 상점들이 몰려 있어 예술가의 거리 혹은 카타리나 골목이라고

부른다.

8. 구시청 청사, 가는 날이 장날이었던 활기찬 시청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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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관광객과 상점이 섞여 있는 카타리나 골목을 돌아 나오니 확 트인

넓은 시청 앞 광장이 나왔다. 가는 날이 장날(5일 장)이라고 노점상들이 가

득한 광장 모습이 우리네 시골 장날을 연상케 해 친숙하고 보기 좋다.

어느 도시를 가든 구시청사 건물은 광장의 주인처럼 듬직하고 품위가 있

는데 이곳 탈린의 구시청사와 광장이 특히 그랬다.

[상:구시청사, 하:구시청 광장] [시청탑 풍향계]

1406년에 지어진 구시청사 건물은 그 역사가 무려 600년이 넘고 북유럽

에서는 성당 이외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고딕식 건물이라고 한다. 나중에

자유 시간에 개별적으로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 보니 14세기부터 사용했다

는 벤치, 법령의 원본 등이 보관되어 있어 박물관의 기능을 하고 있었으며,

2층의 한쪽에는 예전 방식 그대로의 시민홀이 있었다. 또 한편에 시민의회

(City Council)까지 있는 것을 보니 식민지 지배시대라도 상인을 중심으로

한 중산층에게는 어느 정도 언로를 열어두었던 것 같다.

재미있는 것은 시청탑의 풍향계에 ‘토마스 할아버지(Old Thomas)’가 올

라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리투아니아에서는 늑대가 상징 동물이었고, 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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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자매 빌딩] [약국]

비아에서는 풍향계에 수탉(혹은 개, 고양이)이 있었는데 여기선 사람이라니

나라마다 다른 상징물에 흥미로웠다. 시청의 용감한 경비대장 이었던 토마

스 할아버지의 멋진 수염은 시민의 마스코트처럼, 1530년부터 시청청사의

제일 높은 곳에서 풍향을 알려주고 시의 전경을 수백 년 동안 보살피고 있

었다.

시청과 함께 있는 성당으로는 상인들의 성금으로 세운(13세기) 고딕양식

의 성 니코라스 교회(또는 니굴리스테 교회)와 17세기 바로크양식으로 지

은 루터 성령교회(The Holy Ghost)가 있었는데 주로 서민들이 이용하였다

고 한다.

9. 수 백 년 동안의 가업(약국, 호텔) 그리고 상인 조합(길드)

구 시청청사의 건너편에는 1422년부터 운영을 하는 약국이 있다고 해서

가보니 아직도 약을 팔고 있었고 한쪽 공간에는 박물관을 만들어 약을 제

조하던 용기 등을 전시하고 있었다. 구 시가지에서 북쪽 방향으로 가니 성

벽 마가렛트 성문 쪽에 세 자매(Three Sister’s)라는 건물이 나타났다. 높

이(6층)도 같은 세 개의 건물은 베이지색, 오렌지색이 아름답게 조합을 이

루면서 나란히 붙어 있었다.

이 세 자매 빌딩은 라트비아 리가의 삼형제 건물을 연상케 했는데,

그보다 한층 더 묘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세 건물 중 하나는 1362년

에 지어졌는데 내부는 튼튼하게 현대식으로 꾸며졌고 하룻밤 숙박비용

은 우리 돈으로 수십 만 원에 육박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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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가임에도 성업 중이며 엘리자베스 2세 등 귀빈들이 투숙하기도 했

다고 한다. 우리 조선왕조가 1392년에 개국한 것과 비교하면 그보다

30년이 더 앞선 때에 작은 호텔(당시는 여인숙)이 지어져 지금까지 명

문이 이어졌다니 놀랍고 부러웠다.

라트비아와 같이 독일의 주교, 기사단에 이어 이 나라에 들어온 독일

상인은 일찍이 탈린이 한자동맹(Hanseatic League)에 가입(1248)하는

등 15세기까지 전성기를 누리며 도시를 풍족하게 만들어주었다. 발틱

해 북쪽에 자리 잡은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러시아와 동․북유럽국가

사이에서 무역의 중심 역할을 하며 탈린을 발틱 제일의 도시로 만든

것이다. 상인들의 활약으로 도시가 부를 축적하면서 시청 앞 광장의

길드 건물, 꽁지(검은)머리 길드 조합 그리고 자신들의 성당 등 화려한

중세시대의 건축물들이 세워지게 된 것이다.

우리는 시청 앞 광장에서 자유 시간을 얻어 여유롭게 중세도시의 분

위기에 젖어보았다. 또 쇼핑하면서 이곳의 명물 ‘코코넛 볶음’을 한 봉

지씩 사서 나눠 먹기도 했다. 우리나라 모방송사 모 프로그램에 두 번

이나 소개될 만큼 유명하다고 했다. 이곳 광장과 함께 광장의 명물 ‘코

코넛 볶음’을 파는 아가씨는 수백 년 내려온 맛내기 노하우가 있다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점심때가 되어서 식당으로 이동하던 중 ‘구시가지 여행의 출발점’이

라고 하는 비루문(Viru Gate)을 지나갔다. 비루문은 구시가지로 들어

가는 6개의 대문 중 하나로 우리나라로 치면 동대문, 남대문 같은 곳

이라고 한다.

점심때는 이번 여행에 혼자 참가한 주영조 (전)부행장이 맥주와 와인

을 후원해 주셔서 모두 함께 건배하였다. 작년 이맘때쯤 NSI 발칸 국

가를 탐방할 때 우리가 보스니아에서 크로아티아로 이동하여 모스타르

다리에 감탄하고 있을 무렵, 주 부행장은 서울에서 손녀딸이 탄생했다

는 전화를 받았었다. 건강하고 예쁘게 자라는 손녀의 돌을 축하합니다.

10. 에스토니아 민속촌에서, 원주민의 농노 생활 짐작

다음 일정이 민속촌 방문이라고 해서 우리나라 민속촌을 연상했다.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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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자면 Folk Village로 에스토니아 옛 주민의 민속 고유의 의상, 민속

춤, 생활양식 등을 생각했는데 예상이 빗나갔다.

가이드의 안내로 걸어가면서도 관람객이 거의 없어 너무 조용하니까

좀 이상하기까지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지방의 15~18명의 농부(농노)가

살았다는 집단농촌 주택 고작 몇 채가 있는 것이 전부였다. 짚으로 올린

지붕과 방인지 부엌인지 구별이 안 되는 창고 같은 내부는 너무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고, 영문 브로슈어(안내책자)는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가이드 김 선생이 이 집은 굴뚝이 없는 것이 특징이라고 하면서 집안에

서 불을 피워 취사하면서 나오는 연기가 난방의 역할을 한다고 했다. 보

통 내부에서 불을 피우면 눈을 뜨지 못함은 물론 질식의 위험까지 있을

텐데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보다 형편이 조금 나은 가옥이 따로 있

었는데 다른 설명은 기억나지 않고 이성 교제를 하는 젊은 연인들을 위

해 가끔 공간을 내주고 있다는 말만 생각났다.

엊그제 라트비아의 리가 시내를 돌고 오후에 시굴다의 투라이다 성에

갔을 때, 많은 회원이 피곤하여 힘들어했는데 오늘도 그다지 매력 있지

않은 것을 보고 있자니 회원 대부분이 지치는 기색을 보였다. 평균연령

이 높은 팀의 여행일정은 신중하게 짜야 한다. 이렇게 더울 때는 야외보

다는 시원하고 쾌적한 박물관이나 미술관 혹은 민속공연 정도의 관람

같은 것이 적당하지 않을까! 이런 속에서도 점잖으신 우리 일행들은 불

평 한마디 없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중세의 탈린, 패르누 등 도시는 한자 무역의 일

원으로 번영을 누리고 발전했으나 그것은 독일 상인들과 이에 편승한

일부의 에스토니아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것이고 대부분의 에스토니아인

은 지배계층의 착취를 받는 농노로서 존재했다고 한다. 에스토니아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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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을 삭사(Saksa)라고 한다는데 그 의미가 ‘주인님’이라고 하니 가히

그 시대상황이 짐작되고도 남았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발트해를 풍경으로 단체사진]

피곤한 몸을 이끌고 호텔로 돌아왔고 저녁식사 전까지 1시간 정도 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호텔방에서 유리창을 통해 오늘 다녀온 톰페아와

시청 앞 광장을 내려다보니 아름다운 시가지 전경이 한눈에 들어와 다

시 행복한 마음이 되었다. 필자의 방이 1406호였는데 바로 구시청청사

가 건립된 해와 동일하니 재미있는 우연이었다.

오늘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구시가지 시청 앞 광장에 있는 유명하다

는 식당 페페르삭(Peppersack, 후추자루)으로 나갔다. 구형우 회장의

건배와 함께 식사를 시작했는데 메인으로 나온 연어가 맛이 좋았다. 식

후엔 특별공연을 한다고 한다. 밖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은

것과 탈린을 소개하던 우리나라 TV 프로그램에도 이곳 식당과 식당의

쇼가 소개되었다는 얘기를 듣고 우리가 식사하는 식당이 꽤 유명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대하던 쇼가 시작됐는데 예상했던 민속춤이나 노래가 아닌 주먹이

나 칼로 싸움하는 내용이었다. 한 여인을 사이에 두고 두 남자가 결투

하는데 식당의 무대가 따로 없이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실제처럼

연기를 하였다. 이렇게 싸우고 나면 승자가 여자의 사랑을 차지하는 것

이 보통의 상식이지만 여기서는 여자가 패자(처음부터 자신이 사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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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를 택하여 승자는 아무 소득 없는 싸움을 하게 된 듯 보였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지는 쪽이 에스토니아를 상징하는 것이 같고,

그것은 열강에 늘 당하고 살아온 에스토니아 국민성을 표현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1. 라헤마 국립공원 늪지대 트레킹

오늘은 여행의 막바지 7일 차(7월 21일 목), 국립공원으로의 트레킹이

있는 날이다.

국립공원이 풀이 많은 습지라고 해서 모기약이나 긴소매의 옷 등 단단히

준비를 했다. 어제 신용인 대표의 부인은 속이 좋지 않아 함께 투어를 하

지 못하고 치료를 받았다. 오늘은 어제보다 컨디션이 나아졌는지 아침 식

사를 하러 나와서 반갑게 안부를 물었다. 많이 회복이 됐지만 국립공원에

가기는 어려워 개별적으로 구시가지 관광을 할 것이라고 한다.

일정을 시작하기 위해 버스에 올라탔고, 잠시 후 탈린에서 80km 정도

떨어진 라헤마 국립공원(Lahemaa national park)에 도착했다. 이 공원은

천혜의 늪지대와 울창한 숲, 아름다운 호수가 많아 자연을 체험하는 좋은

기회가 될 거라고 한다. 이곳은 1971년에 지정된 에스토니아의 제일 크고

오래 된 국립공원으로 면적은 720㎢이고 그 중 바다(발틱해)가 30% 포함

되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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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왕복 2시간 30분 정도를 걷는 일정이었다. 국립공원 내에는 하이

킹을 하기 편하도록 나무길이 깔려 있어서 그 길을 밟으니 걷기가 편했다.

모기가 많을 것을 예상해 무장하고 나갔지만 괜히 그랬나 싶었다. 국립공

원은 기대했던 것만큼 멋있는 숲, 아름다운 호수가 등장하지 않아서 좀 아

쉬웠다.

점심 식사를 한 야외의 식당은 모양새가 그럴 듯했지만 식사를 30분 이

상을 기다리게 했다. 우리의 “빨리빨리” 문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익

히 알고 있었지만 이건 좀 지나치다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 야외 식당은

40명을 한꺼번에 서비스 한 적이 한 번도 없는 모양이었다. 김순도 사장님

의 건배로 그럭저럭의 점심을 마치고 오후 일정 장소로 떠났다.

12. 기사단의 野戰의 城과 영주의 작은 宮殿

탈린의 동부지방 해안에 있는 중세의 성곽이 잘 보존되어 있다는 다음

일정지 라크베레(Rakvere)로 갔다. 13세기 독일 기사단이 진출하여 기사

단의 주요 요새로 건설하기 시작하여 현재까지 그들의 흔적이 잘 남아 있

다.

우리가 도착한 버스 주차장에서 성벽까지 올라가는 계단이 꽤 가팔랐고

날씨도 햇볕이 강한 시간이었다. 올라가는 것이 무리라고 생각한 회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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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버스에서 기다리도록 하였다. 힘은 들었지만, 성 위에 올라서고 보니

올라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크베레 성은 라트비아의 시굴다 성

보다 훨씬 잘 보존되어 있었는데, 성의 출입구부터 성벽과 성내의 배치는

독일 기사단의 활약상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성내에는 대장간에서 무기를 만드는 모습도 보였고 또 한쪽에는 홍등가

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그 입구에는 최근에 그린 것 같은 춘화도(春花圖)

가 붙어 있었다. 한창 젊은 남자들로 구성된 기사단들이 이역만리 타국으

로 왔는데, 성 밖으로의 출입이 어려웠을 터이니, 홍등가의 등장배경이

이해가 되었다.

십자군 전쟁 시 첫 출정(1096)은 이교도들이 점거하고 있는 예루살렘으

로였는데, 이때 보병과 기병을 합쳐 3만 5천 명이 출병하면서 여인(창녀)들

이 5천 명이나 따라갔다는 기록도 있다.

다음 일정이면서 오늘의 마지막 목적지는 팔름세에 있는 지방 영주의 궁

전이었다. 궁전이라고는 하지만 일반 궁전보다 규모가 훨씬 작아서 큰 저택

쯤으로 부르는 게 나을 것 같다. 중세와 근세까지 라트비아 일부로 포함되

었던 리보니아의 지방, 농촌에는 약 260여 명의 영주들이 있었다고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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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는 곳은 부의 규모가 중·상급 정도 되는 것 같았다. 궁전은 노란

색의 바로크양식으로 지은 단정한 느낌의 2층집으로 미국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등장하는 남부 지주 오하라의 저택보다 조금 작은 것 같다. 우

리나라로 치면 양반집의 안채, 사랑채의 구조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이것으로 우리는 세 나라의 도시뿐만 아니라 농촌의 민초(民草)인 농노의

주거, 그들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던 영주의 저택과 호화로운 살림살이 그리

고 기사단들의 성까지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많은 관광객들이 주마간산(走

馬看山) 격으로 3~5시간 만에 탈린 투어를 끝내는 것과 비교하면 우리 탐

방단은 에스토니아에서만 3박4일을 관광 했으니 이제 전문가 수준이 된 듯

하다.

13. 고려식당의 마지막 만찬, 아쉬운 저녁 파티

오늘 저녁은 이번 여행의 마지막 저녁 식사이기에 원래 예약되어 있던

호텔에서의 식사를 취소하고 고려인이 운영한다는 식당으로 변경하였다.

호텔에서의 식사를 취소한 이유는 여행 시작하면서 매일 먹다시피 한

양식이 물리기도 하고 우리끼리의 오붓한 분위기를 만들 수 없다는 의견

이 나와 위약금까지 물면서 고려인 식당으로 추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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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 초, 소련에 의해 중앙아시아 쪽으로 강제 이주당한 한국인들

은 소련연방 내에서 교류하면서 현재 에스토니아에는 고려인 3, 4세

200명 정도, 그 중 탈린에는 50명 정도가 살고 있다고 한다.

한국 음식을 잘하는 곳을 추천받아 간 고려인 식당은 음식 맛도 좋고 여

러 가지 면에서 마음에 들었다. 우리가 식당에 도착했을 때 메인인 바비큐

(돼지고기, 양고기)는 준비 중이어서 밥과 국, 김치 등 밑반찬이 먼저 나왔

다. 배도 많이 고팠고 오랜만에 먹는 우리 음식이라 메인이 나오기도 전에

밥과 김치로 포식을 해 버렸다. 마지막 만찬이라 맛있는 바비큐를 안주 삼

아 술을 나누며 즐겁게 식사하려고 했으나 고기가 나왔을 때는 이미 식욕

은 한고비 지난 상태였고, 마상곤 회장이 무한정 제공하기로 한 보드카도

많이 드시지 않아 만찬은 아쉽게 마무리 되는 분위기였다.

그동안 말씀을 아끼던 강경식 이사장님과 김태준 회장님의 여행 소감

에 모두가 공감하였고 조용하게 여행을 이끄시던 정동수 단장님의 말씀,

그리고 마 회장님의 힘찬 건배가 이어졌다.

밤 9시까지는 버스로 귀환해야 한다고 하여 만찬을 끝낼 수밖에 없었

다. 마지막 순서로 이 식당 여사장(류 리디아)의 인사와 자신이 아는 한

국노래 ‘곰 세 마리’를 부르고 ‘아리랑’을 합창하였다. 그러자 손삼수 총

무는 답가가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러시아어로 ‘카튜샤’를 부르는데 훌

륭한 솜씨에 모두 감탄스런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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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로 돌아갔지만 여전히 해가 중천이었다. 아무래도 저녁파티가 부

족하다는 느낌이 들었고 마 회장도 저녁에 보드카를 많이 안 마셨으니

한잔 더 후원한다고 해서 호텔의 24층 라운지로 올라갔다. 모두 다 앉

을 자리가 없어서 그 중 10여 명은 엊그제 개척한 호텔의 맞은편 옥상

야외카페로 갔다. 이렇게 탈린의 아쉬운 마지막 밤이 마무리되었다.

14. 민족의식 고취의 장이 되어준 세계노래대전

여행의 마지막 날, 8일 차(7월 22일, 금)다. 사흘 동안 묵었던 래디슨 호

텔을 떠나면서 마지막 날까지 안내를 담당할 줄 알았던 김정곤 가이드 대신

에 정정임이라고 하는 여자 가이드가 나왔다. 우리가 의아해하자, 여자가이

드는 자기는 김정곤 가이드의 부인으로 남편 못지않은 전문가라고 소개했다.

오늘은 마지막 일정으로 두 곳을 아껴두었는데, 하나는 세계노래대전의

장이 되었던 무대가 있는 곳이고 다른 하나는 피터대제가 지은 카드리오르

그 공원의 예카테리나 황후를 위한 궁전이었다.

세계에 알려진 행사 중 가장 발트 3국다운 행사가 ‘세계노래대전’이라고

한다. 세계노래대전은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에서는 4년마다, 에스토니아에

서는 5년마다 열린다고 한다. 이 행사가 열릴 때는 전 세계에 사는 해외동

포와 모든 지방의 사람들이 각국의 수도로 몰려와서 일주일간 노래의 향연

을 벌인다고 한다. 이 노래대전은 1869년에 시작되어 5년마다 해외에 사는

에스토니아 후손들(100만 명 추산)까지 모여 민요와 현대의 합창곡을 부르

며 민족의 화합을 다지는데, 그 행사 마지막 날이 되면 피날레 합창단의 수

는 수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 축제는 발트 3국이 소련의 압제 하에 있을

때도 폭력이나 무기가 아닌 노래로 저항했기 때문에 그때의 혁명(독립운동)

을 ‘노래하는 혁명’이라고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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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도착한 탈린항구 근처의 노래 동산은 저 멀리 무대를 두고, 잔디

밭으로 조성한 일종의 타원형 동산처럼 보인다. 2002년의 대회 때에는 전

인구의 20%가 넘는 약 30만 명이 이곳에 모였다고 한다. 몇 백 명 정도 올

라설 수 있을 것 같은 무대(Singing Bowl)에 최대 2만 명까지 올라가 합창

을 했다는 정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니 이들의 뜨거운 열정이 느껴졌다. 이

무대를 내려다보고 있는 이가 있었다. 바로 에루소 작스라는 인물의 거대

동상이었는데, 에루소 작스는 작곡가로 이 무대에서 부를 국민의 노래를 만

들고 이 노래대전을 위해 앞장서서 헌신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에 뒤지지 않은 패르누의 국민시인 리디아 코이둘라의 노래 ‘아! 나의

조국, 나의 사랑’도 여기에서 많이 불렸을 것이다. 우리도 이곳에서 합창 한

곡하고 가면 좋겠지만 다른 관광객도 많아 다음 목적지로 떠났다.

15. 카드리오르그 공원, 예카테리나 1세의 궁전

카드리오르그 공원은 탈린의 여름휴양지로 1710년 페테르 대제가 에스토

니아를 점령한 후 이곳에서 만난 그의 아내(두 번째 황후), 예카테리나(에스

토니아어로 카드리오르그)를 위하여 조성한 공원이다.

1718년에는 이곳에 궁전을 건축하였다. 궁전은 이탈리아 바로크건축의

대가 니콜로미제티가 설계한 것으로 현재는 예술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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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전의 외양도 화려하면서 우아하고 아름답지만, 내부도 구석까지 섬세하

고 화려한 장식을 하였다. 러시아의 페테르부르크의 겨울궁전(아미타쥬)을

모작하였으며 발트 3국에 라트비아의 룬달레 성과 더불어 러시아 건축의

높은 수준을 뽐내고 있다. 2층에는 이탈리아, 독일 등 외국에서 들여온 그

림, 예술품, 황후와 가족들의 초상화 등을, 3층에는 러시아의 작품들을 전시

하고 있었다.

러시아에도 ‘예카테리나’라는 이름이 자주 등장하여 헷갈렸는데, 이곳의

예카테리나(1684~1727)가 러시아의 예카테리나(1729~1796)보다 앞선 시

대의 사람으로, 피터 대제 이후 3년간 여황제로 즉위함으로 1세라는 호칭이

붙었다. 피터대제의 손자며느리에서 여황제가 되어(1762) 러시아를 더욱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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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킨 예카테리나 2세와 구분되는 것이다.

궁전 주위에 백조의 호수와 정원이 있다고 하는데 일부 수리 중이었고,

시간관계상 볼 시간도 없어 우리는 탈린에서 마지막 점심식사를 한 후 공항

으로 가는 귀로에 들어섰다. 탈린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핀란드의 헬싱키

공항으로 다시 헬싱키에서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도착은 내일(9일째) 아침

9시경이다.

16. 여행의 7고(Go-苦) 심사분석, 그리고 인천공항으로

여행의 요소를 7가지 ‘고’로 정리할 수 있다고 한다. 그것은 ⑴ 타고, ⑵

걷고, ⑶ 보고, ⑷ 찍고, ⑸ 사고, ⑹ 먹(마시)고, ⑺ 싸고 이다.

‘타고’는 말할 것도 없이 비행기나 버스 등을 타고 이동하는 것이다. 이번

여행은 인천-헬싱키 왕복에 한 번씩은 갈아탄 비행이었고, 그 Transfer 시

간도 2시간 정도여서 대체로 적당했다. 그리고 버스가 좋은 편이었고 면적

이 작은 국가라서 2시간 이상의 이동이 없어 지루하지 않아 좋았다. 다만,

비행기에서 부부 등의 동반자를 위한 좌석 배치가 일부 순조롭지 못한 것이

흠이었다.

그 다음 ‘걷고’, ‘보고’에서는 여행의 일정을 잘 맞추는 것이 필요했다. 특

히, 더운 날이거나 오후 또는 평균연령이 높은 여행팀의 일정은 박물관 같

은 실내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다. 이번 여행에서 박물관,

민속공연이나 음악회, 오페라 같은 볼거리가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 못내 아

쉬웠다. 또 한 가지, 이번 여행은 이름조차 생소한 발트 3국에 7박9일을 모

두 배정했는데 볼거리에 비하여 너무 넉넉한 일정이 아니었나 싶었다. 차라

리 1~2박 정도는 인접국가인 핀란드(헬싱키), 스웨덴(스톡홀름), 러시아(생

페테스부르크) 중 한 곳을 넣는 것도 괜찮지 않았나 생각한다.

‘찍고’는 여행에서 그 비중이 줄어들지 않았나 싶다. 사진기의 종류가 비

약적으로 발전한데다 인터넷으로 호환성이 좋아졌으며, 또 우리 일행들처럼

노장이 되어 가면 사진 찍기를 예전처럼 그렇게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고’는 특히 여성분들에게 항상 인기 있는 요소였다. 이번 행사에 쇼핑

일정은 없었지만 시내 관광과 더불어 짬짬이 한 쇼핑은 적당한 즐거움을 주

었다. 발틱해의 특산물 호박(琥珀, amber)은 이번 여행에서 아주 중요한 쇼

핑품목으로 ‘발트 3국의 호박(못난이)들을 다 가져와서 미인들만 남겼다’는

우스갯소리를 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Page 25: 1. 에스토니아로 가면서 22년 전 ‘발트의 길’을 보다 - NSI · 2019. 10. 8. · 리디아 코이둘라(Lydia Koidula, 1843~1886)라는 이 여성은 이 근처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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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마시)고’는 틈틈이 언급했듯이 어느 정도 아쉬움이 있었던 것이 사실

이지만 다들 묵묵히 참고 있는 것을 알기에 필자도 참고 지나갔다.

‘싸고’는 짐을 싸는 일과 적당한 배설, 즉 여행 중의 건강이라 하겠다. 우

선 싸고(Packing)는 일정상 호텔을 옮길 때마다 풀고 싸고 하는 것이 일이

되지만 이번 여행은 2~3일씩 같은 호텔에서 숙박하여 그 수고가 덜했고,

자연히 화장실 문제도 잘 해결되었다.

결론적으로 이번 여행의 7고는 그런대로 순조롭게 잘 진행된 ‘Go-Go’이

었으며 잘못된 “苦”가 적었으니 다행스러웠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요인은

이번 여행팀의 인격과 인내를 바탕으로 한 전통적인 “高品格”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일행 한 분 한 분이 건강하게 무사히 잘 다녀오셔서 다행이고 감

사합니다. 민트여행사의 장성권 팀장, 현지가이드 최 선생님, 김(정) 선생님

부부, NSI 이송미 차장 여러 가지로 수고 많았습니다.

9월 16일 뒤풀이 날, 여행의 추억을 다시 한 번 나눕시다. (끝)

- 에스토니아 수도‘탈린’비루문에서...2011.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