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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2012년

더라이트미션

선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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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지일( 方之一牧師, Pang, Chi Yi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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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및 저서 소개

<약력>

1911. 5. 21 평북 선천 출생

1929. 선천 신성중학교 졸업

1929. 정오리교회 개척

1933. 평양숭실대학 영문과 졸업

1931. 김진홍, 박윤선, 윤병식과 함께 월간지「게자씨」창간

1933~37. 평양 장대현교회 전도사

1937. 평양 장로회 신학교 졸업

1937. 4. 목사 안수 (평양노회)

1937. 4. 8 총회 파송 중국산동성 선교사(21년간 봉직)-1957-귀국

1945. 청도 교민회 외교부장, 학무부장, 청도한국학교 교장

1958. 6. 12 영등포교회 부임

1960~78 총회 전도부장

1958. 월요 목회자 성경연구모임 시작(현재까지)

1961. 장로회 신학대학 강사

1961. 한남노회장

1968. 경기노회장

1970~95 대한성서공회 재단이사

1971~72 제56회 총회장

1973~81 총회 유지재단 이사장

1973~75 기독공보사 사장

1979. 영등포교회 원로목사

1982. 숭전대학교 명예 철학박사

1982. 대한성서공회 재단이사장

1983. 기독공보사 이사장

1996. 12. 2 국민일보주관 세계선교부문 대상 수상

1998. 숭실인상 추양목회대상

1998. 8. 28 국민훈장 모란장 서훈

2003. 10. 28 언더우드 선교상 수상

2004. 장로교신학대학교 명예 신학박사

2007. 11. 29 Yeshua University and Theological Seminary 선교학 박사

2010. 10. 7 횃불트리니티신학 대학원대학교 명예 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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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영등포교회 원로목사

경기노회(영등포노회) 공로목사

재한 중화기독교 유지재단 이사장

한국외항선교회 상임고문

기타 수상경력

-숭실대 졸업생으로 모교를 빛낸 인물 표창

-장신대 모교를 빛낸 인물표창

-성경구락부 창립50주기념 창립공로 표창

-대한성서공회 이사 25주년 표창

-한국교회100주년기념 선교 20년근속 표창

-시카고 세계선교대회시 선교표창

-한인기독교이민100주년기념 선교사역표창

-장신대 개교100주년기념 중국선교사역표창

<저서>

◎성경강해

1)창세기 2)출애굽기 3)레위기 4)민수기 5)신명기 6)여호수아

7)사사기․룻기 8)사무엘上 9)사무엘下 10)열왕기上 11)열왕기下

12)역대上 13)역대下 14)에스라․느헤미야 15)에스더 16)욥기

17)시편Ⅰ 18)시편Ⅱ 19)잠언 20)전도서 21)아가 22)이사야Ⅰ

23)이사야Ⅱ 24)예레미야Ⅰ 25)예레미야Ⅱ․애가 26)에스겔․다니엘

27)소선지서Ⅰ28)소선지서Ⅱ 29)공관복음 30)요한복음 31)사도행전

32)로마서 33)고전․후, 살전․후 34)옥중서신 35)목회서신․공동서신

36)요한계시록

◎말씀의 샘 시리즈

1)말씀의 샘 1권 20말씀의 샘 2권 3)말씀의 샘 3권 4)말씀의 샘 4권

5)말씀의 샘 5권 6)말씀의 샘 6권 7)말씀의 샘 7권 8)말씀의 샘 8권

9)말씀의 샘 9권 10)말씀의 샘 10권 11)말씀의 샘 11권

12)말씀의 샘 12권

◎본대로 들은대로 시리즈

1)본대로 들은대로 1권~2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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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말씀 시리즈

간단한 말씀 1권~6권

◎기타

1)부스러기Ⅰ 2)부스러기Ⅱ 3)목회여담Ⅰ 4)목회여담Ⅱ 5)들리는 말씀

6)들려진 말씀 7)목회자의 생활 8)허락의 원칙 9)성도의 생활

10)복음역사 반백년 11)중공의 실태 12)피의 복음 13)눈물의 병

14)여호와 닛시 15)메시아 16)임마누엘 17)야사도정사로

18)새그릇에 담는 옛보물 19)血旳福音 20)소선지 강해(역서)

21)나의 나됨

카페 : cafe.daum.net/pang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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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방지일 (1) 아직도 사역중인 ‘97세 청년’

[2008.10.26 18:29]

장로교 분열 이래 처음으로 4개 장로교가 함께 연합예배를 드렸던 지난달

24일 제주 국제컨벤션센터.

방지일(97·영등포교회 원로) 목사가 부축을 받아 연단에 서자 목사와 장

로 등 참석자 5000여명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국내 최고령 목회자이

자 '한국교회의 산증인'으로 불리는 방 목사를 향한 후배 목회자들과 성

도들의 작은 예의였다.

"믿음이란 투항인데, 아직도 우리는 내 주관과 경험, 아이디어와 지능으

로 무장하고 있어요. 우리 모두가 보혜사 성령께서 인도하심으로 무장을

완전히 해체할 때 비로소 주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장로교가 분열되기 전인 1937년에 목사안수를 받은 방 목사가 한국교회의

분열상을 두고 안타까움을 토로하자 참석자들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97세 청년 목사, 영원한 현역….' 방 목사 이름 앞에 붙는 호칭들이다.

백수(白壽)를 눈앞에 둔 그는 일반인들이 보기에 믿기 어려울 만큼 왕성

한 활동을 펼치는 현장 목회자다. 새벽 3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성경을 읽

고 기도를 하며, 글을 쓴다. 인터넷으로 해외에 머무는 선교사, 후배 목

회자들과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교제를 나눈다. 그에게 성경공부와 설교,

축사를 요청하는 교단 총회와 교회 목회자들도 끊이지 않는다. 방 목사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건강상태가 허락하는 대로 현장을 찾는다. 걷기가

불편할 뿐, 말하고 읽고 듣는 데는 별 문제가 없다는 게 본인과 주변 사

람들의 얘기다.

방 목사는 79년 현직에서 은퇴한 뒤 1년 중 거의 반년은 해외에서 각종

집회에 참석, 강사로 참석하는 등 여전히 바쁘게 생활하고 있다. 매주 월

요일마다 그의 자택에서 열리는 '월요성경공부'는 벌써 50년 넘게 이어지

고 있다. 이미 2000여명이 그와의 성경공부를 통해 믿음의 성을 견고히

쌓았다. 방 목사는 설교와 특강, 성경공부 등을 병행하면서 저술한 책만

100권이 넘는다. 주위에서는 그를 향해 "좀 쉬면서 천천히 하시라"고 말

할 때마다 방 목사가 꺼내는 유명한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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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녹슬기보다는 닳아 없어지기를 바랍니다."

본보는 이번 '역경의 열매' 주인공을 방 목사로 정했다. 한국의 개신교

역사를 온몸으로 체험한 방 목사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통해 그의 신앙

과 한국교회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짚어보자는 취지에서다. 어린 시절

조부모 밑에서 자라며 신앙을 접한 그는 20대 초반에 평양 장대현교회를

섬긴 데 이어 중국 선교사로 파송됐다. 공산권 치하에서 숱한 시련을 감

내하며 21년간 중국인들에게 목숨을 걸고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 이어 영

등포교회에서 21년간 담임을 맡으며,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통합 총회

장과 임원 등을 역임하며 한국교회 발전에 앞장서 왔다.

본보는 방 목사와의 인터뷰를 비롯해 그의 자서전인 '나의 나됨(선교문화

사·2005)'과 그의 신앙 일대기 등을 담은 각종 저서 및 논문 등을 토대로

그의 사역과 인생을 재조명했다.

"내 일생을 돌아보건대 삶이 그리 순탄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살아 보니 '나의 나됨은 하나님의 은혜(고전 15:10)'라는 바울의

말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아요."

◇누구인가

1911년 평북 선천 출생. 선천신성학교, 평양숭실대학, 평양신학교 졸업,

평양 장대현교회 전도사, 평양노회 목사안수(37), 총회파송 중국선교사

(21년 사역), 영등포교회 담임(58∼79), 예장통합 총회장(72), 신일학원

이사 및 대한성서공회 이사장 역임, 국민훈장 모란장 서훈(98), 숭실인상

추양목회대상 수상(98), 국민일보 제1회 국민선교대상(96), 숭전대(현 숭

실대) 명예철학박사(82), 장로회신학대 명예 신학박사(2004), 목사안수

70주년(2007), 현 중화기독교유지재단 이사장, 영등포교회 원로목사

정리=박재찬 기자 [email protected]

[역경의 열매] 방지일 (2) ‘가문의 아브라함’ 할아버지 신앙 생활

큰 영향 [2008.10.27 18:14]

나는 생모의 얼굴을 모른다. 태어난 직후, 이름 모를 병을 얻어 내가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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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될 즈음 세상을 떠나셨기 때문이다.

1911년 5월, 내가 태어난 평북 선천은 당시 평양과 함께 '조선의 예루살

렘'으로 불릴 만큼 기독교 교세가 크게 확장되던 곳이었다. 당시 아버지

(방효원)는 신학생 신분이었는데, 내가 5세 때 중국으로 선교를 떠나셨

다. 나는 평북 철산읍 영동이라는 마을에서 줄곧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할

아버지와 할머니가 부모나 마찬가지였다.

할아버지(방만준·1856∼1941)는 온양 방씨 가문의 '아브라함'이나 마찬가

지다. 한국에 처음 기독교가 들어온 지 불과 10년 남짓하던 1890년대 후

반쯤 신앙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 분이다. 믿기로 작정한 날부터 집에서

20리나 떨어진 철산읍교회의 삼일기도회에 한 번도 빠지지 않으셨다고 한

다. 하지만 방씨만 250가구가 모여 살던 동네에는 그때부터 커다란 소동

이 빚어졌다.

"방씨 가문에 양교(洋敎)가 웬 말이냐.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결코

들여놓을 수 없다."

그때부터 할아버지에 대한 친척과 동네 주민들의 방해 공작이 끊이지 않

았다. 교회에 갔다 오는 길목에 숨어있다가 할아버지를 공격하는가 하면

심지어 교회에 간 사이 할아버지의 집에 불을 놓기도 했다. 그 무렵 할아

버지에게는 '방예수쟁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그러나 핍박이 심해질수

록 할아버지의 신앙은 더욱 견고해졌다.

마을 친지와 주민들은 할아버지가 신앙적 양심에 따라 "제사를 지내지 않

겠다"고 선언하자 할아버지 가족을 동네에서 쫓아냈다. 철산읍 영동에서

30리 떨어진 연수동으로 추방된 식구들은 "예수쟁이라서 쫓겨난 집"이라

는 비난을 받고 살아야 했다. 할아버지는 먹고 살기 위해 소작이라도 해

야 했지만 마을 주민들은 "예수쟁이들은 일요일에 일을 안 한다"면서 어

느 누구도 농토를 제공하는 사람이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한 주민이 자갈밭이나 다름없는 불모지를 맡겼다. 할아버

지는 그 밭을 옥토로 만들었다. 다른 논밭에 뒤지지 않을 만큼 소출을 거

둔 뒤 그 절반을 지주에게 돌려줬다. "방예수는 그 믿는 신이 복을 주더

라." 마을 주민들 사이에 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할아버지에 대한 박해는

점점 줄어들었다. 할아버지의 근면함과 성실함은 오히려 전도 수단이 되

었다. 결국 할아버지는 마을에 교회와 학교까지 세우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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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조부의 부지런함과 신앙 생활을 그대로 보

고 자랐다. 한밤중에 이마를 베개에 대고 기도하시다가 새벽이 되면 어김

없이 새벽기도를 드리러 교회로 향하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참외밭을 일구시던 할아버지는 많은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온전히 주일

을 성수했다.

철저한 십일조 생활도 빠뜨리지 않으셨다. 타작을 하고 나면 마치자마자

10분의 1은 "이것은 하나님의 것"이라며 아예 따로 떼어놓으셨다.

나는 내 조부의 신앙에 휩싸여 자랐다. 내게 이런 귀한 할아버지의 배경

이 있다는 걸 만천하에 알리고 싶다. 나의 나 됨은 하나님의 은혜이기도

하거니와 또 내게 아브라함 같은 신앙의 할아버지 덕분이다.

[역경의 열매] 방지일 (3) 가문 첫 목회자 된 아버지 중국 선교사

로 평생 헌신 [2008.10.28 18:13]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조부모의 사랑 속에 자랐지만 나에게는 아버지도

더없이 소중한 분이시다.

아버지는 친지와 마을 주민들이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할아버지를 핍박

하는 것에 격분해 "나도 예수를 믿겠다"고 선포하며 복음을 받아들이셨

다. 그 믿음은 아버지를 방씨 가문의 첫번째 목사가 되게 했고, 중국 선

교사로까지 떠나게 만들었다. 아버지와 함께 보낸 시간은 극히 짧다. 안

식년에 중국에서 귀국해 계실 때와 내가 평양 장대현교회에 시무할 때,

아버지가 맡으셨던 상하이 교회의 건축 모금을 위해 귀국하셨을 때 정도

다. 하지만 아버지가 내게 전해주신 말씀의 편린들은 아직도 내 기억과

생활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언젠가 내가 외출할 때였다. 미처 구두끈을 매지 못하고 나가려 하자 아

버지가 붙드셨다. "밖에 출입하면서 신발을 그렇게 신고 나가선 안 되느

니라." 혹 겉옷의 단추라도 풀고 나갈 때에도 "외출할 때에는 단추나 옷

고름을 단정히 채우고 나가야 한다"고 일러주셨던 기억이 난다. 나는 그

때 아버지가 해주신 말씀들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지키면서 산다. 사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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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침은 말이 많아야 되는 법이 아니다. 한마디라도 근엄하게 타이르는

말씀이 마음의 중심에 깊이 박히는 법이다.

아버지는 중국 산둥성 래양 지역에 교회 7곳을 개척하셨고, 소학교와 성

경학교, 부녀학도반 등도 운영하셨다. 청년 지도자를 길러내는 일에도 열

심이셨는데, 특히 대인관계가 좋으셨다. 전도자는 대인관계가 원만해야

한다는 걸 몸소 보여주신 분이다.

총회(대한예수교장로회)의 명령으로 산둥 선교사를 사임하신 아버지는 상

하이 한인교회 전도 목사로 부임하셨다. 당시 상하이 교회는 임시정부 요

인들을 비롯해 주관이 뚜렷한 인물들이 많아서 교회가 바람잘 날이 없었

다. 급기야 상하이임시정부에 있던 아버지 동창들은 "방효원이 와야 교회

가 된다"며 총회에 청원, 아버지가 교회를 맡게 된 것이다.

일본이 상하이를 점령하면서 총회의 퇴거 명령으로 귀국하신 아버지는 평

북 선천 남교회에 시무하시다가 월남하셨지만 1951년 1월 갑자기 돌아가

셨다. 동생(고 방화일 목사)이 6·25전쟁 당시 공산군에 총살당했다는 비

보가 아버지의 마음을 많이 아프게 하셨던 것 같다. 동생이 죽은 지 20여

일이 지나지 않아 하늘나라로 떠나셨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장례는 최초로 이뤄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의 임종도, 장례식도 참석하지 못해 자식의 도리를 다하지 못

했다. 장례식 참석은커녕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조차 한참 뒤에

알았다. 당시 중국 선교사로 사역 중이었는데, 혼란한 국내외 상황 때문

에 수개월간 국내 소식을 듣지 못할 때가 적지 않았던 탓이다.

함께 지낸 시간은 짧았지만 아버지는 평생 내 사역의 크나큰 배경이 되셨

다. 훗날 내가 중국 선교사로 파송되어 21년 동안 선교사로 활동하고 공산

당 치하에서 9년 넘게 있으면서도 아버지 '방효원'이라는 이름 덕분에 목숨

을 건진 일이 비일비재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 할아버지의 개

척자적인 신앙이 결국 아버지와 나까지 중국 선교사로 길러낸 씨앗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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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방지일 (4) 숭실대학 진학 목사 꿈 집안선 의사 되

길 바라 [2008.10.29 18:33]

어머니를 일찍 여읜 나는 할머니의 빈 젖을 빨며 자랐다. 어린시절, 할머

니는 밤을 많이 구워주셨다. 1년 내내 집에는 밤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였

다. 잘 영근 밤을 굽알밤이라고 하는데, 할머니는 다 익어 땅에 떨어진

밤만을 골라 장독에 저장해뒀다가 나 혼자만 먹였다. 이 사실은 한참 자

란 뒤에 알았다. 손자에 대한 할머니의 사랑은 그만큼 컸다.

하지만 밤 때문에 곤욕을 크게 치른 기억도 있다. 명신소학교에 다닐 때

였다. 소풍 가는 날, 할머니는 변함없이 밤을 한되나 구워주셨다. 정거장

에서 기차를 기다리며 밤을 까먹고 있는데 속이 불편해졌다. '괜찮아지겠

지'하며 기차에 올랐지만 상태는 점점 악화됐다. 먹은 것을 모두 토해내

자 담임 선생님은 나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날 이후 나는 만성 소화불

량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약을 먹고 주사를 맞아도 소용없었다. 할머니는

민간 요법으로 닭똥을 먹이는가 하면 약수를 바가지째 퍼먹이기도 했다.

삼촌들은 바닷가에 나가서 몇 자루나 되는 굴껍질을 주워와서 연자에 빻

아 먹이기도 했지만 증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백약이 무효였다.

그 와중에도 신성중학교 5년 동안 결석 한번 하지 않았다. 그 무렵 나는

매일 새벽 성경을 옆에 끼고 동네 옆 수청고개를 오르내렸다. 꼬불꼬불한

고갯길을 올라가 기도 자리를 정해 기도하며 성경을 읽었다. 5리쯤 되는

길을 매일같이 왕복으로 오가는 사이 원인 모를 속병은 씻은 듯 사라졌

다.

'약이 아니라 하나님이 고쳐주신거구나.'

당장 먹던 약을 끊었다. 그 뒤로 나는 중국 선교사로 파송되기 전 홍콩

국경을 넘을 때 한차례 맞은 예방주사 빼고는 수십년 동안 약을 모르고

살았다. 그때 일을 아무리 생각해봐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설명

할 길이 없다.

나는 어려서부터 총명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서당에 다닐 때에는 글

을 외우는 것만큼은 항상 1등이었다. 신성중학교에 입학한 뒤로는 수학을

잘한다는 칭찬도 많이 받았다. 기하와 대수는 항상 만점을 받을 정도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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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돌이켜보건대 가족과 친지들의 총애를 한몸에 지니고 자란 어린시절

이었다.

집안 어르신들은 장손인 나의 진로에 유독 관심이 많으셨다. 특히 삼촌들

은 내심 '지일이가 의사가 되어줬으면…'하는 마음인 것 같았다. 그래서

중학교를 졸업하면 세브란스 의전으로 보내려고 하셨던 것 같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숭실대학에 지원하고 싶었다. 친척들의 기대를 어기는

것이었지만 그렇게 하기로 결심한 상태였다. 신학을 해서 목사가 되고 싶

은 마음이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두고 할아버지와 상의하거

나 조언을 받은 적은 없었다. 하지만 어릴적부터 듣고 보아온 할아버지의

신앙생활이 자연스럽게 그런 결정을 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 하

나님께서 나를 택하셨다는 믿음이 생겼다.

내가 숭실대학에 가겠다고 선언하자 집안 어르신들은 낙심한 듯한 표정이

역력했다. 하지만 내 결정에 대해 말리거나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

나님께서 하신 일이구나.'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역경의 열매] 방지일 (5) ‘공부하고 일한’ 대학생 시절

[2008.10.30 18:34]

숭실대학에 입학했다. 학업이란 본래 한 인간의 인격을 완성하는 과정으

로 생각했던 나는 '학업을 게을리하지는 말되 공부벌레는 되지 말자'고

다짐했다. 학창시절 나는 할아버지의 신앙과 근면, 성실함을 실천하려고

애썼다. 그래서 나의 대학 시절은 처음부터 끝까지 '공부하고 일하는' 생

활의 연속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교 수업을 마치면 3시간 정도 일을 했다. 기숙사의 식대를 벌기 위한

일이었는데, 나는 제초작업과 베이컨 만드는 일을 주로 했다. 그리고 밤

에는 혼자 야간학교에 가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야학을 마치고 기숙사에

도착하는 시간은 밤 11시쯤이었다. 하지만 새벽기도도 빠지지 않았다. 그

러면서도 학교성적은 늘 중간 이상 유지했다.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생활을 지켜보던 룸메이트는 "몸을

너무 혹사시키는것 아니냐. 좀 절제하면서 학업에 충실하라"고 충고까지

할 정도였다. 맞는 얘기였지만 내 대답은 조금 달랐다. "몸은 하나님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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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주실 것이라 믿고 있고, 학업은 우등은 아니더라도 중간 정도는 유지

할 테니 걱정 안 해도 된다."

룸메이트와 함께 매일 아침저녁으로 방기도회(QT)를 가졌던 기억도 새롭

다. 하루씩 교대로 기도회를 인도하면서 기도제목을 나누고 서로를 위해

기도했다. 일기책도 두 권 만들어 그날 읽은 성경말씀과 받은 은혜를 적

어서 교환하며 서로를 위해 기도했는데,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도

취되었다. 우리는 그 은혜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이 간

절해졌다. 그래서 은혜받은 말씀과 느낌 등을 등사기로 찍어 몇몇 동료들

에게 보내게 됐다. 이 같은 작업은 나중에 월간 '게자씨'를 발간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됐다.

야간학교에서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어린이들을 가

르쳤다. 일부러 교회도 없고, 형편이 어려운 동네를 택했었는데, 평양에

서 20리쯤 떨어진 정백동이었다. 처음에는 작은 공간에 어린 아이 몇십

명 정도를 앉혀두고 시작했는데, 날이 갈수록 참석하는 어린이 수가 조금

씩 늘었다. 주일에는 그곳에서 예배까지 드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학부모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글을 가르치는 것에는 찬성하

면서도 전도를 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발이 심했다. 학부모들 중에는 "내

아이를 예수쟁이로 만들 순 없다"면서 심지어 나를 때리거나 돌을 던지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밭에서 일을 하다가도 내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

가면 일손을 멈췄다. 그리고 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멀찍이 서서 나를

감시하곤 했다.

룸메이트는 학부모들한테 맞고 다니던 나를 안타까워하며, 그만두라고 뜯

어 말렸다. 하지만 전도를 멈출 수는 없었다. '이 일도 다 주의 일을 하

기 위한 것"이라는 믿음이 확고했기 때문이다.

시일이 지나면 지날수록 아이들은 더 많아지면서 시작할 때보다 몇 배나

많은 수백명을 헤아리게 됐다. 주일이면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까지

함께 예배를 드릴 정도였다. 야간학교 모임이 점점 교회처럼 변해갔다.

마을에 제대로 된 교회당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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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방지일(6) 땅 헐값 매각 외국인 목사 도움으로 교회

건축 [2008.10.31 17:44]

'교회당을 짓자.'

마침 정백동 지역에는 교회가 없었다. 교회에 나오는 어른들에게 교회당

이 왜 필요한지 설명하자 모두들 공감했다. 어른부터 어린 아이들까지 교

회건축에 대한 소망이 커갔다.

주변을 둘러보던 중에 교회가 들어설 만한 곳을 찾게 됐다. 교회 위치는

평안남도 대동군 대동강면의 전정백동과 후정백동, 오야리, 자수원 등 4

개 마을의 한가운데 되는 지점으로 정했다. 마을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집이라고는 한 채도

없는 언덕배기였다. 땅의 임자를 수소문해보니 마침 사무엘 마펫(한국명

마포삼열·1864 ∼1939) 목사가 사둔 땅이었다.

너무나 기뻤다. 잘 교섭하면 그 부지를 쉽게 얻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

문이다. 교회 사람들과 함께 마펫 목사를 찾아갔다. 그리고 정중하게 우

리의 교회건축 계획을 말씀드렸다. "좋소, 사시오." 우리는 순간 당황했

다. 흔쾌하게 허락해준 것도 놀랐지만, 정작 우리에게는 땅을 살 만한 돈

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펫 목사님은 매매 계약을 서둘렀다. "자, 계약서를 만듭시다.

금액부터 써야죠." 그러고는 매매 금액으로는 턱없이 적은 금액인 고작

몇전을 제시하며, 그 이유를 설명하셨다.

"내가 이 땅을 살 때에는 매우 쌌는데, 지금 보니 많이 올랐습니다. 하지

만 이곳에 교회를 짓는다고 하시니 구입했을 때의 가격으로 드리는 겁니

다."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당시 마펫 목사는 전국 곳곳을 다니면서 한

국인을 통해 교회당을 세울 만한 부지를 구입해 놓았거나 준비해 두셨다.

그리고 누군가 교회를 짓겠다고 그에게 찾아가면 내가 겪은 것과 비슷한

대화가 오간다. 그리고 증여나 다름없는, 거저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일지

라도 꼭 매매형식을 취한다. 한국교회의 자립정신이 여기서 비롯됐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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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펫 목사는 또 교회의 시설확충이나 비용이 많이 드는 일에 몰래 도움을

주면서도 결코 자신을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과연 대인(大人)이었다. 우

리는 마펫 목사의 배려에 너무 놀랐고 감사했다. 공짜로 얻는 것보다 몇

배나 더 흡족했다. 마펫 목사는 늘 그런 식이었다. 타인에 대한 세심한

배려와 사랑은 그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의 머리를 숙이게 만들었다.

교회 부지 문제를 해결한 뒤 본격적인 교회건축이 시작됐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성도들과 마을 주민들은 저마다 '벽돌 한 장이라도 보태자'는

심정으로 십시일반 건축 헌금을 했다. 성도들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교회

건물이 차근차근 올라가기 시작했다.

교회건물은 한옥식으로 치면 거의 세 칸이 되는 집이었다. 완공된 뒤에는

교인이 더 불어나기 시작했다. 학생만 200명 정도가 됐다. 이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을 만큼 인파가 몰렸다. 할 수 없이 교회당을 배로 증축했

고, 그 뒤에 한 차례 더 증축했다. 교회당 모양은 네모 반듯해졌다. 1929

년 건물이 완공된 뒤에는 정백동의 '정(貞)'자와 오야리의 '오(梧)'자를

취해 '정오리 교회'로 이름을 지었다. 그때가 내 나이 18세 때였다.

[역경의 열매] 방지일 (7) 성경구락부 결성 어린이 교육 평양 주

일학교까지 부흥 효과 [2008.11.02 18:07]

정오리교회 개척뿐만 아니라 대학시절에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이 몇 가

지 있다.

그 중에서도 성경구락부는 나에게 많은 가르침을 줬다. 형편이 어려워 배

움의 기회가 없는 어린이들에게 예수님을 전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모임이

다. 당시에는 진학 적령기에 맞춰 소학교에 진학하는 아동 수는 5명 중 1

명꼴에 불과했다. 그러니 공부를 가르치고 배우는 일 모두 더없이 소중했

고, 성경구락부는 복음을 전하는 효과적인 전도수단이 됐다.

성경구락부는 숭실대학의 영문학 교수인 프란시스 킨슬러(한국명 권세열)

목사를 주축으로 꾸려졌다. 나를 포함한 학생 3명은 권 목사를 도와 '소

년개척구락부'를 설립했다. 그런데 일제는 '개척'이라는 어휘가 불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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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대신 '성경'이란 명칭으로 고치도록 명령했다.

'아니, 이보다 좋은 이름이 어디 있단 말인가.' 우리는 속으로 쾌재를 불

렀다. 그리고 당장 '성경구락부'로 이름을 바꿨다. 주로 숭실대 학생들이

교사가 되어 가르쳤는데, 과목은 성경 한글 지리 역사 등이었다. 시일이

지날수록 성경구락부는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아이들이 몰리니까

자연스럽게 조직도 확대됐다. 200∼300명의 학생이 모이는 한 구락부 수

십 곳이 평양에 설립됐다. 1년에 몇 차례씩 전체 구락부 대회를 열기도

했는데, 2000∼3000명씩 모이는 행사라 전도의 큰 열매가 됐다. 운동회로

모일 때는 2500명이 들어가는 숭실대 체육관에서 개최할 정도였다.

당시 성경구락부의 왕성한 활동 덕분에 평양의 주일학교까지 크게 부흥했

다. 성경구락부는 지금까지 적어도 100만명 이상의 아동과 청소년들에게

예수님을 전하고 기독교를 소개하는 신앙교육의 초석으로 손꼽아도 손색

이 없을 것 같다. 특히 6·25전쟁 중에는 교육 기회를 갖기 힘들었던 청소

년들에게 배움의 터전이 됐다. 나는 성경구락부에서 수천명이 참석하는

큰 규모의 행사들을 치러내면서 온몸으로 많은 걸 체득했다. 경험만큼 큰

스승이 없는 것 같다.

훗날 중국 선교사로 나가 있다가 해방 이후에 귀국해서 보니 성경구락부

는 이미 평양을 벗어나 전국적으로 조직이 확대돼 있었다. 성경구락부를

처음 만들었던 권세열 목사는 평양에서 결혼식을 갖고 가정을 이뤘고, 그

아들인 아서 킨슬러(한국명 권오덕) 숭실대 교수는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

인 여성과 결혼까지 했다. 그 부부는 나중에 은퇴해 본국으로 귀국한 뒤

에도 한국 교회를 물심양면으로 많이 도왔다. 그 공로로 한국정부로부터

훈장까지 받았다. 그들이 세상을 떠날 때에는 유언대로 유해를 한국 양화

진에 안장해 드렸다. 한평생 한국교회를 위해 복음의 씨앗을 뿌린 그들은

목숨을 다한 육신까지도 한국에 묻히기를 원했던 것이다.

대학시절, 나는 이곳저곳 뛰어다니며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일하고, 공부하

며, 교회사역까지 맡았다. 그러던 가운데 평양노회에서 고시를 치르고 전

도사 자격을 얻어 정오리교회를 개척했고, 이어 장대현교회 전도사로 부

임한 것이다. 목사 안수를 받은 지 어느덧 70년 세월이 지났다. 중학교

때부터 주일학교 교사를 맡았으니 평생 교회에서 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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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방지일 (8) 신앙잡지 ‘게자씨’ 발간 평양 집 팔아

비용 충당 [2008.11.03 18:00]

룸메이트와 함께 시작한 방기도회는 날이 갈수록 은혜가 충만했다. 둘이

서만 나누기에는 아까웠다. 그래서 모임을 확대하기로 했다. 예수의 발자

취를 따른다는 의미로 이름을 '종적회'로 정했는데, 처음에는 3명이 모였

다.

우리는 그저 받은 은사를 함께 나누자는 소박한 바람에 각자 한 달에 20

전씩 회비를 납부해서 '게자씨(정식명칭은 겨자씨)'를 발간하게 됐다. 60

전으로 종이와 미농지를 구입한 뒤 강판에 내용을 긁어 학교에 있는 등사

기로 등사를 했다. 이렇게 밀면 200장 정도가 나오는데 호치키스로 찍어

친구들에게 보내는 일을 6년 동안 이어갔다.

당시 기독교 잡지로는 평양을 중심으로 발간됐던 '신앙생활'과 성결교의

'활천', 그리고 이용도 목사가 조선총독부에 등록한 '예수선도원'이 고작

이었다. 학생들의 힘으로 발간된 건 게자씨가 유일했다.

하루는 일을 마치고 방에 들어오니 고등계의 경찰이 방을 수색하고 잡지

를 모두 압수해갔다. 그리고 우리가 펴낸 등사물이 허가를 받지 않고 출

판한 것이기 때문에 벌금을 물어야 한다고 했다. 당시 경찰은 위세가 대

단했지만, 나는 또박또박 따졌다. "내가 돈을 받고 판 것도 아니요, 신앙

간증을 편지로 써서 친구들끼리 나눠보는 것 뿐인데 출판법 위반이라니

요. 말도 안 됩니다."

며칠 뒤 경찰은 "잘 알지 못해서 그랬다"며 사과했다. 그런데 계속하려면

조선총독부에 원고 검열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회원들 사이에서는 "우리

가 공부하고 일까지 해야 하기 때문에 원고 검열과 허가까지 받는 일이

쉽지 않다"며 포기하자는 얘기가 나왔다. 하지만 내가 계속 맡겠다고 했

다. 시간문제일 뿐이니 조금만 부지런하면 되지, 못할 일은 아니라고 생

각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부터 나는 원고를 수집해 총독부에 보냈다. 며칠 뒤에는 원고 페

이지마다 '검열'이란 붉은 도장이 찍혀왔다. 고생은 했지만 시일이 지나

면서 주문 부수도 늘었다. 우리는 더 많은 부수를 뽑을 수 있도록 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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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인쇄를 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비용이 많이 들어 빚이 쌓여갔다.

할 수 없이 평양에 있던 집을 300원에 팔아 몽땅 게자씨 발간하는 일에

쏟아 부었다.

얼마 후에 중국 선교사로 가 계시던 아버지가 평양에 오셔서 집을 판 사

실을 아시고 추궁하셨다. 아버지께 솔직하게 말씀드리자 더 이상 꾸중은

없으셨다. 한번은 총독부의 허락을 받고 주기철 목사의 간증을 담은 '죽

으면 죽으리라' 원고를 2000부 인쇄했다. 하지만 평양지역 치안을 책임지

고 있는 평남고등계에서 허락할 수 없다고 해 고스란히 압수당한 일도 있

었다.

몇 해쯤 지나 함께 만들었던 친구들이 유학길에 떠나게 되고 나는 선교사

의 길로 떠나게 됐다. 누군가 게자씨 발간을 맡아야 했다. 동창에 이어

당시 평양의 교역자 회장인 한 목사에게 맡기기도 했다. 하지만 일제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면서 물자부족을 이유로 모든 잡지를 정간시키면서

게자씨도 결국 자취를 감추게 됐다. 성경구락부가 나에게 가르치는 사역

에 도움을 줬다면, 게자씨 발간은 문서선교활동에 큰 힘이 됐다.

[역경의 열매] 방지일 (9) 성경읽기·기도·전도활동 조화 이루는

삶 위해 고심 [2008.11.04 18:27]

평양신학교에 입학한 뒤로는 성경읽기와 기도, 전도 이 세가지를 어떻게

조화시키며 살까가 주된 관심사였다.

'성경이 기도의 내용이 되게 기도하자. 성경 보는 만큼 기도하자,' 그때

가졌던 이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성경은 기도의 내용이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중 성경이 계시하는 말씀을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는

성경의 주석이 되는 것이다. 즉 기도하면서 성경의 참맛을 알게 되는 것

이다.

성경묵상과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사는 것이 전도

다. 전도는 계시의 은사를 전달하는 일이니 신앙인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사명이다. 신학교 때에는 교회 일로 많이 분주했지만 노방전도 등 어디에

서나 전도하는 일에 열심이었다. 성경과 기도, 전도 이 3가지 요소는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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붙어다녀야 한다는 게 나의 철저한 신앙관이다. 특히 '게자씨'를 발행하

면서부터는 전도를 더욱 폭넓게 하려고 애썼다. 전차전도, 전주(전봇대)

전도, 우편전도, 통신전도 등 가리지 않았다.

전봇대에 전도문을 써서 전도하는 일은 돈이 적지 않게 들었다. 하지만

호응이 있어서 감사했다. 그리고 전화번호부에 나온 주소를 참고해 일본

인에게는 일어로, 한국인에게는 한글로 전도지를 보내는 '통신전도'도 제

법 효과가 컸다. 평양을 다니는 전차에는 성구만 붙여서 광고했다. 전도

지 밑에는 '궁금한 것이 있으면 게자씨사로 연락해주시면 친절히 안내하

겠습니다'라는 안내문을 한글과 일본어로 적어놨는데, 가끔씩 일본인으로

부터 문의가 와서 우편으로 답하기도 했다. 우편전도의 경우 우편봉투 뒷

면에도 성구를 적어 집배원도 편지를 배달하면서 말씀을 볼 수 있도록 배

려했다. 노방전도로 전도한 이들은 다시 심방을 하고 기도회와 예배에 함

께 참여할 수 있도록 독려하면서 신앙의 동지로 만들어갔다.

전도의 열매는 인간의 생각으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놀랍다.

한번은 한 대만인 의대생을 길에서 전도해 집에도 초청하고 기도회에도

참석하도록 권유하면서 신앙을 갖게 했다. 훗날 내가 대만에 갔을 때 그

를 찾았는데, 병원을 개업한 뒤 의사로 일하면서도 계속 예수를 믿고 있

음을 목격했다. 그 뒤로 내 맘속에는 '언제 어디서든 씨를 뿌리는 일(전

도)은 게을리 할 수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깊이 각인됐다. 신학교를 다니

면서 펼쳤던 전도방법들은 나중에 중국 선교사로 활동하면서도 선교에 많

은 도움을 줬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어떻게 그런 일들을 해낼 수 있었을까. 오직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 단 한

생명이라도 더 구원하자는 단순한 심정에서였다. 그랬기에 유학을 포기하

고 선교사로 진로를 바꿨고, 오늘까지 일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성경과 기도를 통해 얻은 하나님의 뜻과 사랑과 계시를 전달할 때 문자화

하는 것이 '전도용지'요, 강단에 서는 것이 설교다. 지금은 내가 나이가

많이 들었지만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라면 거리나 국내외를 가리지 않는

다. 설교를 부탁받으면 사양하지 않는다. 글을 써 달라는 부탁이 오면 쓴

다. 집회도 힘닿는 대로 나간다. '받은 대로 전달하라.' 이것이 나의 목

회지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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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방지일 (10) 평양 장대현교회 전도사 부임 실천신

학 체험 [2008.11.05 18:09]

정오리 교회에서 사역하던 중 모교회인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전도사로 오

라는 요청이 있었다.

내가 사역지를 옮긴다는 소식에 주위에서는 "작은 교회를 내버려두고 큰

교회로 가는구나"라는 비평과 뒷말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큰 교회라서

간 것은 결코 아니었다. 신학교에 입학했고, 평양노회로부터 정식으로 교

회 전도사로 인준받은 상태라 장대현교회에서 실천신학을 배우자는 마음

으로 정한 것이다.

1933년 장대현교회로 옮기면서 나는 신학교를 한 해 쉬었다. 전도사 임무

에 전념키 위해서였다. 이듬해부터는 신학교에 복학했고, 전도사 일을 겸

했다. 장대현교회가 있던 자리는 지금 만수대로 명칭이 바뀌어 김일성 동

상과 김일성 혁명기념관 등이 들어서 있는 것으로 안다.

교회에 갔더니 나는 그야말로 햇병아리나 마찬가지였다. 장로님들은 거의

모두 60세 이상이었다. 여집사 한 명을 제외하고 30세 이하 제직자는 한

명도 없었다. 그때 내 나이가 23세였는데, 제직회에 들어가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처음에는 '내가 이곳에서 어떻게 사역할까'하는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교회 어른들로부터 차근차근 배워나갔다. 결과적으로 장대현교회에서 얻

은 바는 대단했다. 실천신학을 온 몸으로 체험한 귀한 학습장소나 마찬가

지였다. 신학교에서 신학을 배우며, 큰 교회 전도사로 사역하면서 목사

안수까지 받은 것이다. 내 생애에 굵은 한 획을 그은 기간으로 평가할 만

하다.

4년 동안 전도사로 섬겼던 장대현교회에 대한 기억은 생생하다. 당시 교

회는 1500명 정도가 모일 정도로 규모가 컸다. 본당과 교육관, 유치원,

당회실이 들어서 있을 정도였다.

장대현교회 하면 길선주 목사님도 빼놓을 수 없다. 한국 장로교의 최초

목사 7명 중 한 분이셨고, 장대현교회 시무 목회자이자 1호 원로목사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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셨다. 특별히 1907년에 불꽃이 일었던 한국 교회의 복음화 운동은 그해 1

월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부흥 사경회에서 목사 안수를 앞두셨던 길 목사

님(당시에는 장로)이 자신의 죄를 공개적으로 털어놓은 고백이 시발점이

됐다.

길 목사님은 내가 전도사로 있을 때 이미 현직에서 은퇴하신 원로목사님

이셨다. 연로하셔서 시력이 나빠 잘 못 보시는 길 목사님의 손을 꼭 잡고

모셨던 기억이 있다. 길 목사님은 나에게 신앙적으로 깊은 영향을 끼치신

분이다. 길 목사님은 300여차례의 큰 집회를 인도하셨는데, 특히 부흥회

를 열 때마다 꼭 성경통독 사경회를 함께 열었다. 신앙의 경건성을 잃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말씀 중심의 부흥운동을 통해 신앙의 덕

을 많이 키우려고 하셨다. 기도도, 설교도 오직 성경에 근거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신 분이

다.

길 목사님은 큰 체구에 차력까지 연마하신 분이다. 젊은이 몇 명을 자신

의 배 위에 올라오라고 하신 뒤 배에 힘을 주어 튕기면 젊은이들이 나가

떨어질 정도로 힘이 세셨다. 길 목사님은 그런 힘을 목회에 쏟으셨다. 요

한계시록을 1만독 하시고 전체 22개 장을 모조리 외우셨다. 그 외우는 장

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은혜가 넘쳤다.

[역경의 열매] 방지일 (11) 일본 경찰 감시 속 신앙생활 전도하다

수차례 유치장 수감 [2008.11.06 18:41]

내 인생의 3분의 1은 일제 치하에서의 삶이었다. 태어나서 소학교 중학교

대학교를 거쳐 전도사 시절에도 일본의 감시하에 신앙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학창시절에는 월간지(게자씨)를 간행한다, 전도지를 배포한다는

등의 갖은 이유로 고등계를 드나들며, 유치장 신세까지 진 적이 한두 번

이 아니었다.

당시 일본경찰은 그 위세가 대단했다. "모자 벗어!" "앉아, 일어서!" 불

려가는 사람들은 경찰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한번은 중학교 동창과 함께 유치장에 구금됐을 때였다. 아침마다 간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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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부르는데 내 앞에 와서는 '방지일'을 "호노이찌"라고 부르는 것이

었다. 몇 번을 부르는데도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간수가 "왜 대답을 하

지 않느냐"고 내게 덜컥 화를 냈다. 나는 큰 소리로 "나는 호노이찌가 아

니라 호시이찌입니다"라고 말하자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내 이름을 고쳐

적어놓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주위에서는 통쾌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대학 시절에는 매년 여름방학이 되면 전도대를 조직해 지방으로 내려가서

집회를 열었다. 그때마다 정복을 입은 경찰과 형사 여러 명이 나와 강단

옆에 책상을 놓고 앉아서 감시를 하기 일쑤였다.

하루는 내 고향인 평북 철산군 여한면 원세평동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할

때였다. 할아버지가 처음 예수를 믿고 다니시던 그 교회였다.

500명 정도가 모이는 교회였는데, 대학생들이 왔다는 소식에 교회당 안팎

에 사람들이 가득 모였다. 하지만 여느때와 다름없이 경찰이 강단 옆에

앉아 있었기에 많이 긴장된 분위기였다.

내가 사회를 맡았고, 동료가 연사를 맡았는데 발언의 수위가 좀 높았다.

"우리 민족이 살 길을 찾아 만주에 가지만 거기서 누구도 우리 민족을 반

겨주지 않습니다. 현해탄을 건너지만 '게다짝(육군 중위의 속어)'에 차이

기 일쑤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가서 평안을 찾아 살겠습니까. 우리에게

그럴 곳이란 없습니다."

바로 그때, 경찰이 옆에 차고 있던 긴 칼을 빼들고 책상을 치면서 "중

지!"라고 외쳤다.

나는 얼른 일어나서 연사를 앉히고 청중들과 함께 무작정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다.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이

찬송을 부르고 또 부르게 했다. 일촉즉발 같은 분위기 속에 참석자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하면서도 한목소리로 찬송만 불렀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안정을 되찾은 뒤 나는 주기도문으로 집회를 마치고

경찰에게 집회를 중지시킨 이유를 물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절망을 선동

하는 집회는 치안 책임자로서 허락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절망에서 소망으로 나가는 길을 찾

게 하는 것이 전도요, 그 결론을 막 말하려고 할 때 집회를 중단시킨 겁

니다."

집회를 계속하려면 원고검열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밤새 원고를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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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해 다음날 경찰서에 제출한 뒤 집회를 이어갔다. 전날보다 더 많은 사

람들이 모인 것을 보고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

다.

[역경의 열매] 방지일 (12) 나·박윤선·김진홍 ‘삼총사’ “美 유학

떠나자” 의기투합 [2008.11.07 17:52]

'유학을 떠나자.'

장대현교회 전도사로, 신학생으로, 전도와 기도 모임으로 바쁜 나날을 보

내던 1935년쯤이었다. 기도 모임의 '트리오'나 마찬기지였던 박윤선, 김

진홍과 함께 한 가지 목표를 갖게 됐다. 미국 필라델피아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로의 유학이었다. 평양신학교 은사들도 우리에게 유학을 권유하기

도 했다. 하지만 미국 비자를 받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숭실대의 한 선

배는 영어도 잘 하고 모든 조건이 양호했지만 6번이나 비자 발급이 거부

되기도 했다.

당시 비자를 얻으려면 일본 돈 300엔(미화 150달러)을 정기적으로 송금할

수 있는 보증인 3명을 세워야 했다. 주위에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던 친

구 윤선으로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내가 그의 보증인 세우

는 일을 돕기로 했다. 아버지가 목사였고, 할아버지도 지역에서 웬만큼

알아주는 분이셨기에 여기저기 다니면서 돈 있는 장로님들에게 할아버지

이름을 대가며 보증인을 세웠다.

윤선이 비자 인터뷰를 하는 전날, 우리 삼총사는 평양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 도착했다. 수중에 돈이 없어 서대문구에 있는 구세군 교회에 들

러 철야 기도를 하겠다고 허락을 얻어 하룻밤을 묵었다. 이튿날 새벽에

일어나 5전짜리 호떡을 사 먹고 미국 대사관으로 함께 향했다.

인터뷰를 맡은 영사가 서류를 죽 훑어본 뒤 윤선에게 물었다.

"당신의 보증인들이 쓴 액수를 매달 미국에 보낼 수 있습니까?" 그걸 보

낸다고 하면 거짓말을 하는 것이요, 안 보낸다고 하면 거짓으로 보증을

선 셈이 되니 이래저래 난감한 상황이었다. 할 수 없이 윤선이 대답했다.

"그것은 선생님이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영사는 두말없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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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에서 도장을 찍어주며 비자를 발급해줬다. 우리는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멍했다. 이 사건은 동료와 후배들 사이에서도 훗날까지 두고두고 회

자됐다. 이렇게 하여 윤선은 웨스트민스터신학교 1호 유학생이 됐으며 이

어 진홍도 2호 유학생이 되어 미국으로 떠났다.

이젠 내 차례였다. 윤선과 진홍이 미국에서 나를 기다린다는 생각에 마음

은 더 들뜨고 분주해졌다. 37년 초, 목사 안수를 받은 뒤 차근차근 준비

를 거쳐 미국 입국 비자를 무사히 받았다. 이제 출국하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외지선교부에서 어느 날 연락이 왔다. 그

리고 '아버지 대신에 중국 산둥 선교사로 가달라'는 것이었다. 너무나 갑

작스러운 소식에 곧바로 판단할 수가 없어서 생각할 시간을 달라며 결정

을 미뤘다.

'유학이냐 선교사냐'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미국에서 공부하기 위해 열심히 준비를 했고, 현지

에는 이미 친구들이 나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의 대를 이어 선교사가 되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총회의 요청을 거절하는 것도 옳지 않은 일 같았다. 어차피 목사가 되었

으니 미국에 갔다가 와서도 전도를 할 것이고 결국 공부도 전도를 하기

위함이 아니던가. 예수님 오실 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래, 순종하자. 선교사로 떠나자.'

[역경의 열매] 방지일 (13) 주변 충고 새기고 선교사 길로

[2008.11.09 18:48]

1937년 4월14일 저녁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선교사 파송 예배를 드렸다.

2주 뒤인 4월28일, 서울역에는 총회와 평양노회 관계자, 신학교 교장과

교수들, 장대현교회 성도들로 가득 찼다. 중국 산둥 선교사로 떠나는 나

와 아내, 어린 세 자녀를 배웅하기 위해 나오신 분들이었다. 엄숙한 분위

기 속에 송별 기도가 이어졌다. 기도가 끝난 뒤 한 장로님이 나오시더니

준비해온 현수막을 길게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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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는 '중국에 가서 중국 사람이 되어라. 거기서 죽고 돌아오지 마라'

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장로님의 간곡한 전별사가 이어졌다. "하나님의

사명을 위하여, 중국 사람의 영혼을 위하여 중국 사람이 되라. 중국 사람

과 함께 울고, 중국 사람과 함께 웃는, 중국 사람이 되라." 그 장로님의

당부는 내 중국 선교의 지침이나 마찬가지였다.

미국에서 공부하던 신앙의 동역자 박윤선은 편지를 보내와 내게 긴 당부

를 잊지 않았다.

"지일아, 선교사로 가면 현지인들의 어떤 단점도 보지 말고 장점만 보아

라. 본국에 선교 보고를 할 때에도 현지인들이 싫어하고 원하지 않는 사

진은 절대로 찍지 말아라. 여기 와서 보니 한국에 파송된 미국인 선교사

들이 한국과 한국인들의 생활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 중에 일부러 미개한

장면 만을 골라 공개하는 걸 보고 많이 불쾌했단다. 너는 장차 선교사로

사역할 때에는 미국 선교사들의 이런 점은 배우지 말았으면 좋겠다."

너무나도 지당한 권면이었고, 나는 윤선의 충고를 깊이 새겼다. 이후 중

국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되도록이면 현지인들의 단점보다는 장점을, 잘못

한 일보다는 잘 하는 것을 보고 칭찬하려고 애썼다.

평양을 떠나 고향인 선천에 들러 친인척들에게 인사를 드린 뒤 신성중학

교 은사인 심인곤 선생을 찾았다. 그분도 나의 선교사행 결정을 반기시며

귀한 권면의 말씀을 해주셨다. "우리가 중국으로부터 공자와 맹자의 교훈

을 듣고 배웠는데, 이제 생명의 말씀을 갖고 그곳으로 가서 빚을 갚게 되

었으니 감개무량한 일이오. 가서 성경 말씀을 바로 전하시오. 다른 것 말

고요." 평소 별로 말이 없으시고 제자들을 극진히 살피시는 스승의 말씀

이 뇌리에 깊이 박혔다. 성경 강해 중심의 선교를 강조하시는 은사의 말

씀에 따라 나는 선교사 시절, 성경을 강의하는 일을 가장 크고 귀한 일로

삼고 실천했다.

선교사로 떠나기 전, 나의 신앙의 동역자들이 주는 충고와 권면, 격려의

메시지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었다. 그리고 이 같은 메시지를 21년 가까

이 중국 선교사로 사역하면서 지켜나가려고 애썼다. 뿐만 아니라 그 이후

에도 후배 선교사들의 파송식에 초청받을 때면 그 권면을 빼놓지 않고 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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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천에서는 다시 신의주로 옮겨 한경직 목사님이 시무하시는 제2교회에서

삼일예배(수요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이튿날 중국 다롄으로 이동해 1박

을 하고 칭다오행 배를 탔다. 칭다오에 도착해서 며칠을 묵은 뒤 거기서

70㎞ 거리인 목적지 라이양까지 버스로 이동했다. 판때기로 만든 의자에

앉아 길이라고 할 수도 없는 길을 따라 하루종일 달렸다.

[역경의 열매] 방지일 (14) 中 라이양서 선교 시작 유교·중화사상

큰 벽으로 [2008.11.10 18:03]

중국 산둥성 라이양에 도착한 때는 1937년 5월7일. 본격적인 중국 선교가

시작된 날이다.

첫 임지인 라이양현은 산둥반도에 속한 108개 현 가운데 한 곳이다. 공맹

(孔孟)의 사상이 바로 이곳에서 태동했다. 라이양 현지에 도착했을 때는

거의 2년 동안 한국인 선교사가 없던 상태였다. 산둥 선교사였던 아버지

는 총회의 요청으로 선교사를 사임한 뒤 상하이 한인교회의 전도목사로

부임하셨고, 기존 라이양현에 있었던 선교사들은 모두 안식년으로 귀국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선교사로 파송받은 터라 불편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가장 먼저 맞닥뜨린 건 언어 장벽이었다. 중국어를 한 마디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말을 할줄 모르니 필담으로 겨우 의사소통이 가

능했다. 하루는 큰딸이 유리창으로 중국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파리 한 마리가 유리창에 어른거리자 "파리야, 너도 중국말만 하

니?"라며 내뱉는 말을 듣고 몹시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저 어린 것이 아비를 따라와서 자유롭게 말도 못하고 고생만 하는구나.'

현지 언어에 대한 불편함과 함께 언어 습득의 필요성이 커져가던 때 기회

가 왔다. 한 목사님의 소개로 서울 화교교회 전도사이자 아버지의 동역자

이기도 했던 양위쉬 장로로부터 '관화루이벤'이라는 책으로 중국어를 배

우기 시작했다. 현지어를 배우면서 중국인들의 생활방식과 정서를 이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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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공유하고자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중국인의 중화사상이나 민족적

기질은 선교의 큰 벽처럼 느껴졌다.

그들은 전도행위 자체에 대해 심하게 반발했다. 유교사상에 철저히 물든

중국인들, 특히 유학자와 지역 유지들은 공자에게만 쓸 수 있는 '성(聖)'

자를 기독교인들이 사용하는 것에 대해 강한 불쾌감을 드러냈다.

"너희들이 어째서 성도(聖徒)냐. 너희들이 보는 글이 어째서 성경(聖經)

이 될 수 있느냐. 너희들이 모이면 성회(聖會)고, 너희들이 모이는 집은

성전(聖殿)이라고? 거룩할 성(聖)자는 공자님밖에 쓸 수 없는 글자야!"

그들의 주장에 정면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나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

(聖)은 '갈라낸다' '구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설명했다. "여러

분, 들어보십시오. 제가 말하는 '성'을 공자님에 대한 '성'으로 들으셨습

니까. 우리도 거룩할 '성'자를 씁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경에서 쓰는 '거

룩하다'라는 말은 '구별되다'는 뜻입니다. 또 '갈라냈다'는 뜻이기도 합

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어 갈라내고, 우리

를 세상 사람들로부터 갈라내어 부르셨다는 말입니다. '성경'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보는 성경은 다른 책과 다릅니다. 역사서도, 철학서도 아

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니 이것은 '갈라낸 책'이고, 우

리는 '갈라낸 무리'이므로 '성도'라고 하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중국 유학자들의 노를 풀고 말씀을 전할 수 있었다. 결코 내

능력이 아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하나님이 주신 지혜 덕분이었다.

[역경의 열매] 방지일 (15) 중·일전쟁 터져 칭다오로 옮겨 개척교회 세

워 [2008.11.11 18:01]

1930년대 후반은 일본의 중국침략이 본격화된 시기였다. 중국 현대사에서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 중 한 때이기도 했다. 현지에서 어학과 풍습을 익

히던 가운데 37년 7월7일 소위 '노구교 사건'이 터졌다. 중국 선교사로

활동을 시작한 지 꼭 2년째 되던 날이었다.

노구교 사건은 중국 톈진 근교의 노구교에서 중국인이 일본 주둔군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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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포를 했다는 구실로 일본군이 톈진 외항의 노구교를 침략한 사건으로

중일 전쟁이 발발하는 계기가 됐다. 전 중국이 반일·배일 물결로 가득찼

고, 기세가 강해지는가 싶더니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했다. 톈진이 함락되

고 베이징까지도 일본군의 수하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들리자 민심은 흉흉

해지기 시작했다. 현지 상황만으로 보자면 당장 피신해야 했으나 아버지

가 터를 닦아둔 곳이고, 군 사령부로부터 안전을 보장받기도 해서 당분간

라이양 지역에 머물고 있었다.

하지만 중국의 기세가 점점 불리해지자, 서양 선교사들마저 본국으로 돌

아가기 시작했다. 나도 교인들과 함께 이리 저리 피신하는 처지를 면치

못했다. 하지만 중국에 들어올 때 함께 온 연로하신 할아버지를 내내 모

시고 다니기가 힘들었다. 마침 본국의 총회에서는 가족을 한국으로 들여

보내라는 명령이 내려진 상태였다. 할 수 없이 가족과 함께 일시 귀국했

다. 평북 철산 원세평동에 있는 방씨가문 교회에 머물렀다.

당시 교회에는 담임목사의 자리가 비었던 터라 말씀도 전하면서 중국어

공부를 계속했다. 수개월간 머물다가 일본군이 중국을 점령해 치안이 회

복됐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임지로 향했다.

라이양에 돌아왔으나 낮에는 일본군, 밤에는 중국의 유격대에 시달려야

했다. 그래서 중국 교인들과 함께 안전한 곳으로 피난처를 찾다가 칭다오

로 향했다. 그 지역은 과거 독일의 식민지였으나 또 다시 일본의 식민지

로 넘어갔다. 라이양에 있을 때는 라이양노회 소속이었으나 칭다오에서는

광둥노회와의 합의하에 선교를 시작했다. 중국에 온 지 3년쯤 지나 중국

어가 입에 붙기 시작했다.

칭다오에서의 첫번째 개척교회는 빈민지역인 중자와라는 곳에 세운 중자

와교회였다. 이 지역은 4개 마을에 약 4000가구가 거주하고 있었다. 당시

실외집회를 하면서 개척전도를 하고 있었는데, 한 장로의 집 한 칸을 세

로 얻어 실내집회를 드리게 된 것이 교회건축의 불씨가 됐다. 가난한 교

인들이었지만 십시일반 모은 헌금으로 자진해서 공사에 참여하면서 교회

당을 지었다. 이 교회는 나중에 3번에 걸쳐 증축됐다. 중자와 교회를 효

시로 나중에는 인근 지역 4곳에 차례로 교회를 추가로 개척했다.

그 와중에도 일제의 집요한 핍박과 박해는 이어졌다. 일본이 진주만을 공

격하면서 발발한 태평양 전쟁으로 중국내 미국인 선교사들은 쫓겨나게 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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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남아있던 선교사들은 모두 포로가 됐다. 5000명이나 달하는 미국인

선교사들의 활동이 중단되자 그들이 맡았던 중국 교회들은 공백 상태가

됐다.

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이 펼쳤던 교육 및 사회사업, 출판 등도 거의 멈췄

다. 그러자 일제는 그들의 침략전쟁을 합리화하면서 중국 교회를 휘하에

두려고 꼼수를 부리기 시작했다.

[역경의 열매] 방지일 (16) 일제가 세운 ‘대동아선교회’ 조선 선

교사 포섭 위해 음모 [2008.11.12 18:07]

'대동아선교회'는 1940년대 초 일제가 만든 단체였다. 일본은 그들의 침

략을 합법화한 이념인 소위 '대동아공영권'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중국 교

회를 포섭하기 위해 대동아선교회를 조직했다. 이는 종교를 하나로 만든

다는 명분으로 중국에 있는 각 기독교 교파와 단체를 일본기독교단 아래

에 두려고 하는 술수였다.

대동아선교회는 히비키 회장을 주축으로 수십명의 일본인 목사들을 중국

에 파견해 미국 선교사들의 추방으로 공백이 되어버린 중국 교회를 채우

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일본 목사들의 신학교육 수준이 낮은데다 중

국말도 하지 못해 효과는 거의 없었다. 그들이 중국옷을 차려입고 중국교

회 간판을 내걸었지만 중국 교인들은 교회에 모이지 않았다. 급기야 일제

는 중국교회 목사들을 청빙해 돈을 주면서까지 교회를 운영토록 했지만

교인들은 외면했다.

그러나 한국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는 200∼300명씩 모일 정도로 큰 대조

를 이뤘다. 그러자 대동아선교회의 산둥지역 책임자인 야마무라 목사가

나를 찾아왔다. '내선일체'를 구실로 자신들의 선교회에 가입할 것을 강

요했다. 나는 그의 제안을 수락할 수 없었다.

"조선이 일본에 합병되었으므로 우리가 일본인의 신분이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우리는 중국에 파송될 때에 조선예수교장로회 소속이

아닌 중화기독교회 소속으로 바뀌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목사직은 중국

에 속해 있고, 우리교회도 중국교회에 속해 있기 때문에 다른 단체에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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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할 수가 없습니다."

말이 안 통한다고 생각한 야마무라 목사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한국

선교사들이 세운 중국의 교회가 부흥하는 이유가 중국인들에게 배일 사상

을 교육시키고 있기 때문이라는 소문과 비방을 일삼았다. 심지어 일본영

사관과 헌병대에 한국 선교사들을 고발하기에 이르렀다. 야마무라 목사는

서울의 조선예수교장로회 교단 총회에까지 찾아가 해외선교부장을 만나고

와서는 "총회도 우리와 합작을 하도록 했으니 같이 일하게 됐다"는 등의

거짓말로 대동아선교회에 가입할 것을 집요하게 강요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여전히 중화기독교회에 속해 있기 때문에 본국 총회에

서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재차 설명하며 그의 요청을 거절했

다. 나중에 나는 비밀리에 서울에 들어와 총회 해외선교부장을 만나 야마

무라 목사의 말이 거짓임을 확인했다. 일본 경찰의 가택수사, 취조 등은

사역기간 내내 끈질기게 이어졌다. 나와 선교사들은 "우리가 반일 활동을

한 증거가 있다면 제시해보라"며 그저 복음을 전한 일밖에 없음을 설명했

다. 일본 경찰 고등계에서는 눈을 부릅뜨고 뒤졌지만 결국 무혐의로 입증

됐다. 고발자인 야마무라 목사의 입장만 무안해진 셈이다.

이런 고난과 탄압은 오히려 항일정신으로 뭉쳐있던 중국 교인들과의 친밀

감을 두텁게 하는 중요한 계기를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한인 선교사들이

중국 현지에 세운 교회들도 성장을 이루는 기폭제가 됐다. 1941년 총회에

제출된 산둥선교 보고에 따르면 선교지 전역에 걸쳐 교회 수가 34개, 세

례교인수가 1662명이었다.

[역경의 열매] 방지일 (17) 격변의 시대 중국 선교 21년 아직도

알듯 모를듯한 중국인 [2008.11.13 18:02]

21년 가까이 중국 선교사로 활동하던 동안에 중국은 격변의 시대 한가운

데를 걷고 있었다.

개항을 빌미로 옌타이와 텐진, 상하이 등을 강점한 영국의 침략 행위에

중국인들은 좋은 감정을 가질 리가 없었다. 영국이 홍콩까지 99년간 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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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로 했으니 속이 부글부글 끓는 듯했다. 당시 잠자고 있는 아기를 깨

워 "우리의 원수가 누구냐?"고 물으면 "영국이요"라는 대답이 자동적으로

나올 만큼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영국에 대한 반감이 뿌리 깊게 박혀 있었

다.

영국에 이어 러시아가 부동항을 얻겠다면서 뤼순과 다롄을 차지하면서부

터는 반러 감정이 솟구쳤다. 민심은 '우리의 원수는 러시아'로 돌변했다.

다행히 일본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해 러시아가 가졌던 항구들을 모

두 중국에 돌려줬지만 그 뒤로 일본 역시 사사건건 중국의 심기를 건드렸

다. 결국 만주를 점령하고 만주국을 세운 뒤 중국 본토까지 넘보기 시작

하자 당시 4억명의 중국인들의 반일 감정은 극에 달했다.

그때 한국인 선교사들이 일본과 합작을 했더라면 중국에 발을 붙이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일제로부터 핍박을 받으면서도 "우리는

중국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라며 합작을 단호하게 거절하고 그 대가로 고

난 받는 것을 직접 목격한 중국인들이 한국의 선교사들을 신뢰했던 것이

다.

일본이 투항하고 공산 정권이 들어선 뒤에는 중국내에 반미 운동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국민당 당시에는 의화단 사건 때 미국이 배상금을 받아

서 전액을 중국 교육에 투자해 거의 친미 일색이었다. 하지만 공산당이

들어선 뒤 철저하게 반미 기조로 바뀌었다. 유치원 교사들은 아이들에게

종이호랑이를 그리게 한 뒤 손가락에 침을 발라 그림에 구멍을 내게 하고

"미국은 종이 호랑이란다"라고 가르칠 정도였다.

이처럼 중국인들은 거의 100년 동안 배영, 배러, 배일, 배미 등 배외(排

外) 정치로 맘 편할 날이 없었다. 나는 이 시절 중 배일 사상이 가장 심

했던 때 중국으로 건너갔다. 당시 중국교회 목사 소속으로 활동하면서 중

국교회를 세우는 와중에 일본인들로부터 받은 박해를 생각하면 아찔하다.

하지만 그 고난을 감내하는데 중국인의 도움과 지원이 큰힘이 됐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 중국과 중국인은 알 것 같으면서도 여전히 모르는 민족인 것 같다.

중국은 다른 민족을 녹여 동화시키는 데 모종의 힘, 또는 여유만만함이

있다. 중국에서 가까이 지냈던 한 현지인 목사의 얘기다. 당시 일본 사람

들이 중국을 점령하고 일본의 전통 의상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것을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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켜보던 그는 "방 목사, 저 일본인들 보이지요. 20년이 기한입니다"라고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라고 묻자 "20년 안으로 물러가든지, 20년이

지나면 우리 식으로 동화되고 맙니다"라고 설명하는 것이었다.

중국인들은 또 아무것도 없는 것 같으면서도 뭔가 가진 사람들이며, 잘

모르는 것 같으면서도 알 건 다 아는 사람들이다. 망할 것 같다가도 망하

지 않을 민족이라는 게 20년 동안 살면서 느낀 중국의 얼굴이다.

[역경의 열매] 방지일 (18) 공산당원 심문때도 ‘성경 대화’

[2008.11.14 18:20]

21년 동안 중국 선교사로 사역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꼽으라면 단

연 중국의 형제자매들과 성경을 함께 맛본 것이다.

중국에서도 개별 모임이나 혹은 단체 모임에서도 성경공부가 언제나 중심

이었다. 개교회적으로는 제직훈련을 통해, 노회적으로는 항존직 세미나,

대회적으로는 수양회 등에서 주로 성경공부를 했다. 성경공부 참석자들에

게 미리 그날 공부할 부분을 읽으라고 공고한다. 그러면 시냇가든, 바위

위든, 숙소든 고요한 곳을 찾아 흩어져 성경을 읽는다. 그런 뒤 다시 모

여 함께 한 구절씩 읽어내려가면서 말씀을 통해 받은 은사를 나누다보면

성경 말씀의 깊은 맛을 경험하게 된다.

죽창(죽 배급소)을 운영할 때도 봉사자로 나선 집사와 장로 등 20여명은

죽 분배가 끝나고 다음 죽을 분배하기에 앞서 시간이 빌 때에는 성경공부

를 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자발적으로 나서 성경을 펴들고 읽고 함

께 은사를 나누는 모습이 너무나 고마웠다.

더 놀라운 일도 있었다. 훗날 공산당이 집권한 뒤에 당원들이 나를 불러

취조를 하면서 오래 전에 나의 성경 강해 내용을 일일이 들고 나오는 것

이었다. 깜짝 놀란 나는 "아니, 그때(성경사경회 등) 거기에 계셨던 겁니

까?"라고 묻기도 했는데, 그들은 아니라고 했다. 요즘 세상처럼 컴퓨터가

있어서 한 개인의 정보를 자세히 파악하기란 쉽지 않은 시절이었는데, 공

산당원들의 철두철미한 뒷조사에 한두 번 놀란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취조를 당하면서도 크게 감사했던 것은 취조 내용이 성경 내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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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는 것이다. 공산당원들이 나를 취조하면서 교회나 노회, 혹은 어떤

성경사경회에서 강해했던 내용을 끄집어낼 때에는 여러 해가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녹음기를 다시 켜는 것처럼 그때의 강해 내용이 술술 떠오르는

것이었다. 무신론자인 공산당원들과 성경을 두고 나눈 대화가 심문이 될

줄은 누가 알았으랴. 그 취조 자체가 그들과의 성경공부가 되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인가.

'하나님 말씀의 역사가 이렇게도 나타나는구나.' 당시의 경험은 큰 충격

이자 축복이었다. 개별적인 면담과 상담을 통해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많

이 일어났다. 상대방과 대화한 뒤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그로 하여

금 읽게 하고 함께 기도했다. 그런데 여러 해가 지나 그때 만난 면담자가

나에게 "그때 주신 그 말씀이 저를 살렸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아닌

가.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전

11:1)"는 말씀이 성취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하

시는구나'라고 다시 한번 깨닫게 됐다. 중국 선교사로 떠나면서 나의 은

사였던 심인곤 선생께서 당부하시며 "성경을 제대로 가르치라"고 하신 말

씀도 뇌리에서 맴돌았다.

선교란 성경을 주로 강론하며 가르치는 일임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됐다.

나는 학자도 아니다. 무슨 기발한 체험담도 없다. 그저 성경을 볼 뿐이

다. 내가 늘 하는 말이 있다. "성경을 맛보다가 맛을 다 보지도 못하고

갈 것 같다." 귀한 성경 말씀을 저 대륙의 사람들과 함께 맛보게 하신 하

나님께 감사드린다.

[역경의 열매] 방지일 (19) 십자가 깃발 들고 ‘골목 전도’ 中 곳

곳서 복음 열매 [2008.11.16 18:23]

장로교 선교사로서 한국의 초기선교에 큰 공을 세우셨던 사무엘 마펫(한

국명 마포삼열·1864∼1939) 목사님은 생전에 "내가 발로 밟은 곳에는 모

두 교회가 세워졌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수

1:3)라는 성경 말씀과도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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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중국 칭다오에 개척한 중자와교회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되면서

증축까지 하게 됐다. 교회가 커지려면 성도가 많아져야 하고, 성도가 많

아지려면 당연히 전도가 뒤따를 수밖에 없다. 당시 중국에서 전도했던 풍

경은 요즘의 풍경과 사뭇 다르다.

주일 오후가 되면 성도들이 교회에 모인다. 그 중 한 명이 십자가 깃발을

들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 뒤를 따라 이웃 동네를 한 바퀴 돈다. 그 광경

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동네 아이들은 호기심에 무심코 행렬을 따른다. 그

러다가 한적한 장소에 다다르면 성도들은 아이들을 앉혀 놓고 간단한 노

래를 가르치기도 하고 때로는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이런 행사를 매주 이어가다 보면 동네 아이들은 주일 오후만 되면 십자가

행렬을 기다린다. 그러다 보면 아이들에게 찬송가와 성경을 가르치는 일

이 훨씬 수월해진다. 이런 방식으로 전도를 몇 달 이어가다가 마을에 정

식으로 방을 얻어 이른바 '전도소(또는 복음당)'를 만든다. 중자와 지역

오가촌에서는 이런 식의 전도를 통해 교회를 세웠다.

오가촌뿐만 아니라 인근의 다른 지역에서도, 나중에 공산당 정권이 들어

선 뒤에도 십자가 깃발을 들고 새로운 땅을 밟으며 전도를 이어갔다. 태

평진이란 곳에도 같은 방법으로 전도를 하고 교회를 세웠다. 한 노부부가

땅을 제공해준 덕분이었다.

이렇게 뿌린 복음의 씨앗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놀라

운 열매로 나타나기도 한다.

10여년 전, 중자와 지역에 새로 개척한 교회에서 세례를 베풀었던 자매가

예수님을 믿는 사위 2명을 맞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녀가 보내준 사

진을 보면서 '나랑 같이 늙어가는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감사함과 흐뭇함

이 밀려들었다. 특히 그녀의 사위이자 의사인 왕텐민의 사연은 지금도 깊

은 감동을 준다. 왕텐민은 공산 치하에서도 신앙생활을 게을리하지 않았

다. 산둥성 제로대학(현 산둥대학교)에 다녔던 그는 공산당원들로부터 이

른바 '학습'을 강요받았다. '학습한다'는 것은 개인의 신앙을 버리고 공

산혁명 대열에 합류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는 타협하지 않았다. 핍박이

집요해지고 심해져가도 믿음의 끈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박해를 받

을 때마다 칭다오와 상하이 등 인근 지역 교회 성도들은 그와 그의 가족

을 위해 기도의 불꽃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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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선교활동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그와 소식이 끊겼다가 다시 그의 소식

을 들었다. 왕텐민과 그의 모든 형제들이 신앙을 계속 지키고 있다는 얘

기에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씨를 뿌리면 언젠가는 거두는 법이다.

[역경의 열매] 방지일 (20) 교단·교파 구분 않고 협력 중국 선교

서 큰 효과 경험 [2008.11.17 22:05]

오늘날 우리나라에는 각종 교단·교파만 하더라도 100여개를 헤아린다. 하

지만 예수를 구주로 믿고 속죄함을 얻어 구원에 이르는 복음신앙이 다르

지 않다면 교단과 교파가 달라도 상호협력과 원만한 유대관계를 통해 복

음전파에 함께 힘을 쏟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중국 선교사로 있을 당시 나는 교단이나 교파 간 선을 긋고 일하지 않았

다. 내가 속한 장로교는 물론이거니와 루터교나 침례교 등 다른 교파에서

파송받은 외국인 선교사들과 서로 협력하면서 사역을 펼쳤다. 때로는 함

께 기도회를 갖고, 서로 도울 문제가 있으면 서로 의논해 풀어나가면서

원만한 관계를 맺게 된 것은 매우 감사하고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런 유대 관계는 전도에도 큰 힘을 발휘한다. 당시 미국 장로교 선교사

들은 자동차를 갖고 있어서 나는 긴급한 일이 있을 때 운행한 마일(mile)

만큼 기름값을 내고 차량을 이용할 수 있는 편의도 누렸다. 루터교나 침

례교 선교사의 차량도 전화를 하면 보내주곤 했다. 하지만 반드시 필요할

때만 이용했다. 내가 그들의 도움만 받은 것이 아니다. 나 역시 그들을

도울 일이 있을 때 앞장서서 도왔다. 이런 관계 속에서 서로를 향한 신뢰

와 믿음이 싹텄다. 하지만 공산당이 집권한 뒤 서양 선교사들이 모두 중

국을 떠나가면서 그들과의 관계를 지속하지 못했던 것이 못내 아쉽다.

중국 산둥성 지역에서 함께 사역했던 외국인 선교사들이 그립기도 하다.

윌슨 선교사는 미국 장로교 소속으로 같은 노회 회원이었다. 우리나라에

서 활동했던 사무엘 마펫 선교사의 아들 마삼락(미국명 사무엘 휴 마

펫·1916∼) 목사와 동창이다. 서양인치고는 작은 키였던 그는 구제사업에

열심이었다. 직접 트럭을 몰아 선교지역 곳곳에 구제품을 나눠주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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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생생하다.

영국 침례교 선교사인 알렌 목사도 우리와 함께 많은 일을 했다. 평생 중

국을 위해 헌신했던 그는 중국 제남노회의 총대로, 나는 라이양 노회의

총대로 전국 총회에 참석해 많은 교제의 시간을 가졌다. 같은 영국 침례

교 선교사인 스미스 목사는 부친에 이은 2대 선교사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한 뒤 아버지와 함께 중국 선교사로 건너왔는데, 독신으로 중

국 복음화를 위해 젊은 날을 헌신했다.

교파간 담을 쌓아 서로 도와야 할 일을 돕지 못하는 건 복음전파의 역사

에 큰 장애물이 될 수 있음을 교회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국내외에서

각 교파들이 복음사역을 하는 데 있어서 서로 긴밀한 유대 관계를 맺고

돕는 건 선교효과가 클 뿐만 아니라 주님 안에서 우리 모두가 한 식구임

을 확인하는 귀중한 일이다. 이런 모임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지난 경

험을 통해 절실히 깨닫고 있으며 후배 목회자들에게도 늘 강조하고 있다.

이 같은 협력 사역은 먼저 기도모임으로 시작돼야 한다. 정기적인 기도

모임을 통해 영적인 힘을 얻는 게 매우 중요하다. 특별하고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더 자주 모여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기도회뿐만

아니라 가족들과 함께 친목을 도모하는 모임도 서로를 이해하며 관계를

돈독히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역경의 열매] 방지일 (21) 중국서 성경공부 ‘도리반’ 운영 성도

신앙 튼튼 [2008.11.18 18:33]

주님의 몸이자 생명체인 교회는 언제나 살아 숨쉬어야 한다. 수시로 프로

그램을 만들어 살아 움직이게 만들어야 교회의 생명력이 왕성해진다. 중

국에서는 교우들의 신앙 향상을 위해 '도리반(道理班)'이라고 이름 지은

성경공부반을 만들었다.

교우들의 직장과 가정생활을 고려해 주간·야간·새벽반까지 만들어 운영했

다. 이렇게 몇 해 동안 지속하다보면 생활화되어 순조롭게 진행된다. 나

아가 교회 조직은 물론 성도들의 신앙까지 튼튼해진다. 도리반은 성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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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였다. 성경학교에서 신학교로 이어지며 자연스럽게 배움의 길을 걷게

된다. 저마다 바쁜 일상의 연속이지만 일하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일하는

과정 속에서 성경공부의 힘은 더욱 강해진다. 도리반을 통해 신앙이 자라

는 교우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선교의 보람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도리반에서는 성경공부를 위주로 하고 글을 못 읽는 사람들을 위해 주음

자모(注音字母)를 따로 가르치는 반도 만들었다. 주음자모란 자음 21개,

모음 16개로 구성된 표음기호로 1918년 중국정부가 만들어 보급했는데,

어려운 한문을 쓰기 쉽게 표기해서 복음 전파에도 큰 몫을 했다. 1, 2주

만 가르치면 성경까지 넉넉하게 볼 수 있게 되는데, 이 글자로 성경과 찬

송이 발간되기도 했다.

도리반은 성경을 신약이나 구약으로 나눠 가르쳤다. 이밖에도 사회 상식

으로 역사와 위생, 예의, 작법 등을 보름이나 1개월, 또는 분기별로 함께

가르쳤다. 도리반 운영이 제도적으로 정착되면서 교우들이 신·구약 성경

66권을 모두 배웠을 때에는 타 과목까지 괄목할 만한 지식을 쌓게 됐다.

교회에서는 도리반 과정을 수료하고 일정한 분량의 성경 지식을 쌓은 교

우들에게 초급반 교사 자격을 주고 교사로서 봉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줬

다.

어떤 사람이라도 도리반에 등록해 성경 66권의 지식을 습득하고 진리를

깨닫게 되면 일꾼으로 변신해 장로나 집사로 봉사하면서 교회 안팎에서

많은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이렇게 교회에서 계속 연결된 프로그램을 선

보이면 교회는 움직이는 교회로서 쉴새없이 돌아간다. 교인들은 프로그램

에 따라 배우고 익히면서 리더로 성장하며, 교회에서는 자연스럽게 인재

가 배출된다.

도리반이 곧 사회 계몽의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리반을

수료하고 고등교육을 받고 전문 분야로 나아가 사회에서 봉사하는 인재가

많았다. 의사를 비롯해 교육학 교수나 교사, 신학을 마치고 전도사나 목

사나 된 이들까지 다양했다.

선교는 장터에서 떠들며 물건을 파는 행상꾼처럼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신앙인을 얻어 교회를 세우고 알찬 교인으로 자라게 하고 동시에 교회도

함께 성장하게 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엡 4:13) 성

장하면 그리스도의 산 몸으로 생산성 있는 교회로까지 발전한다. 그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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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또 인재를 낳고 그 인재는 또 교회를 성장시킨다. 이것이 바로 선교의

보람이고 기본이다.

[역경의 열매] 방지일 (22) 칭다오 빈민촌 교회 사역 신비주의 성

도 때문 혼란 [2008.11.19 18:10]

구원은 믿음으로 얻거니와 믿는 자는 교회 생활을 통해 본분과 의무, 권

리를 행사한다.

특히 믿는 자들은 바른 교회관을 가져야 하는데, 그 교회관은 교회 규례

를 지킴으로써 정립된다. 여기에는 순종이 반드시 필요하다. 교회관이 없

이 믿는 사람은 순종의 삶이 없다. 순종이 없는 사람은 아집과 자기 중심

의 신앙에서 헤어나지 못하는데, 교회에 그런 사람들이 종종 보인다. 하

지만 바른 교회관을 갖고 교회의 규례를 따르며 순종하는 사람은 교회와

사회에서 인재로 성장하는 걸 많이 경험했다.

교회 사역은 물론 성도와 성도 가정들의 신앙을 돕기 위한 활동도 이어갔

다. 여교역자를 위해 세운 성도부녀학원을 통해서도 많은 인재를 길러냈

다. 여교역자 양성에 중점을 두고 초교파적으로 운영했는데, 귀한 교육기

관이었다. 성도부녀학원은 나중에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막을 내릴 수밖

에 없었다.

기독화 가정 운동도 빼놓을 수 없다. 1년에 한번씩 1주일동안 펼쳐지는

이 운동은 교회 자체 행사뿐만 아니라 외부 강사를 초청해 가정 윤리나

신앙 강의를 함께 진행하기도 했다. 또 신앙생활을 잘하는 가정을 격려하

며 자녀교육에 열심인 가정의 효부, 효자를 뽑아 상을 주기도 했다. 표창

장을 받는 이들에게는 '그리스도는 이 집의 주인이니라'라는 뜻의 '基督

是此家之主(기독시차가지주)'라는 문구가 적힌 액자를 선물해주기도 했는

데, 액자를 거는 가정이 해마다 늘어났다. 신앙이 더욱 깊어지는 성도들

이 점점 많아졌다는 뜻이니 참으로 감사한 일이었다.

하지만 목회 행정에 있어서 어떤 이유로든지 교회에 혼란이 야기되는 일

이 발생하는데, 이때는 단호하게 처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혼란만

가중될 뿐이다. 중국 칭다오 빈민촌에 세운 중자와교회에서의 일이다.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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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동안 타지 출장을 다녀오니 교회가 예전과 달리 상당히 흥분된 분위기

였다. 한 여전도사가 "목사님이 안 계실 때 맹인과 함께 여전도사들이 와

서 여러 날 집회를 가졌는데 큰 은혜를 받았다"고 말했다.

그 얘기를 듣고 주일 강단에 섰는데, 교인들의 찬송하는 모습이 예전과

많이 달랐다. 기쁘게 환호하는 것이나 기도의 몸부림도 이상했다. 한마디

로 비정상적이었다. 또 교인들 사이에서는 "누구 누구는 하나님과 직통으

로 전화를 걸었다" "하나님과 직통 전화를 못하면 외면당한다"는 등 이해

할 수 없는 말들이 흘러나왔다.

교회의 한 장로가 걱정이 돼서 교회를 혼란시키는 몇몇을 치리하는 게 어

떻겠느냐고 제안해왔다. 내가 대답했다. "지금 교인들이 은혜에 갈망해서

불이 붙어 있음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불이 붙는 길이 있어요. 세상의

불은 밑에서 산소 공급을 받아 위로 올라붙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불은 위로부터 내려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불이 잘못 붙었습

니다. 이 불을 끄기 위해서는 위로부터 맞불을 놓아야 하는데, 방법은 기

도밖에 없습니다."

온 성도들이 기도회를 시작했다. 그리고 밑에서 올라오는 불을 기도의 불

로 막아냈다. 나중에 혼란을 일으켰던 교인들은 자신들이 일시적 흥분으

로 혼란을 일으켰다고 용서를 구하면서 신비주의 사태는 일단락됐다.

[역경의 열매] 방지일 (23) 일본 패망으로 전쟁 끝나 동포들 귀

국위해 칭다오로 [2008.11.20 18:30]

1945년 8월, 일본은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지 4년 만에 연합군에게 무릎

을 꿇었다. 아시아 전역의 일본 식민지들도 해방을 맞이했다. 1937년부터

이어져오던 중일전쟁도 막을 내렸다.

전쟁이 끝나자 미군은 중국의 톈진, 칭다오 등에 미 해병대를 파병해 군

정을 실시했다. 이미 6만명의 미군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다시 5만명이

추가 투입됐다. 미군은 중국의 국민당 정부군과 공산군의 충돌이 우려되

는 지점에 주로 머물며 치안을 담당했다. 나의 선교사역지였던 칭다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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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미 해병대 제6전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당시 중국 전역에는 일제 치하에서 먹고 살 길을 찾아 한국을 떠나온 동

포들과 징용자, 학도병, 독립군들이 흩어져 살며 전쟁이 끝나기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일본이 패망하자 고국에 돌아가려고 한국과 가

까운 외항인 칭다오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칭다오에 오면 나와 교민회가

있다는 소식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민들은 수백리, 수천리 떨어진 오지에서부터 칭다오로 향했다. 저마다

물건들을 이고 지고 오다가 빼앗기는가 하면, 눈길에서 동사하는 일도 부

지기수였다. 당시 칭다오에는 교민회가 조직됐다. 선배 선교사였던 이대

영 목사가 회장을 맡았고, 내가 외교업무와 교육을 담당했다. 교민회로서

는 그들을 무사히 데려오는 일이 급선무였다.

나는 미 해병대 6전대 사령관인 클레멘트 장군(준장)을 찾아갔다. 그리고

칭다오로 향하는 교민들을 안전하게 데려올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정중히

부탁했다. 클레멘트 사령관은 그럴 때마다 미군이 제공하는 G3 수송대 트

럭 수십대와 함께 헌병대 호위까지 붙여줘서 교민들을 무사히 데려올 수

있었다.

당시 하루 일과는 밤낮이 없을 정도로 바빴다. 클레멘트 장군과 거의 매

일 만나다시피 했고, 그로부터 참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 교민회로서는

미군의 도움으로 칭다오에 도착한 교민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내는 일도 중

요했다.

한국에 정식 정부가 수립되기 전인 45년 겨울 성탄때 미군의 상륙함(LST)

을 통해 처음으로 교민 1진 2000여명을 한국으로 보냈다. 교민들의 본국

송환은 모두 4차까지 이어졌고, 수만명이 꿈에도 그리던 고국 땅을 다시

밟았다. 그들을 돕는 일은 보람도 컸지만 정말 고된 사역이기도 했다. 교

민들을 위해 숙소를 만들고 음식을 제공해야 했다. 솜바지저고리 등 옷을

만들어 입히고 목욕도 시켜야 했다. 몸이 열개라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칭다오에 교민이 모여들면서 교회도 세워졌다. 목사도 청빙해 노회까지

조직됐다. 한국학원이라는 학교도 세우고 내가 교장을 맡았는데, 개교식

에는 신입생만 200여명이 참석했다. 교민들 중에는 다행히 일본군 징용자

중에 사범대생 졸업생들이 있어 그들을 교사로 채용했다. 공장 건물을 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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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교실로 사용했고, 아침 조회 때는 태극기를 게양하고 애국가를 불렀

다.

조국을 떠나 타국에서 한글을 모르는 아이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치는 기쁨

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난민들은 계속해서 밀려들었고, 할 일은

점점 많아졌다.

[역경의 열매] 방지일 (24) “한국인 몰려오자 우린 뒷전” 중국

교인들 눈시울 [2008.11.21 18:00]

일본이 투항한 뒤에는 중국 공산당이 지방에서 세력을 점점 확장해 나갔

다. 그 즈음 칭다오에는 각 지방에 머물던 한국 교민들과 마땅한 거처가

없는 현지 난민들까지 몰려들면서 교민회는 더욱 바빠졌다. 집도 집이지

만 음식을 공급하는 일이 급선무였는데, 당시 유엔의 국제식량기구로부터

지원을 받게 됐다. 우리는 식량을 배급하는 일을 맡게 됐는데 배급 대상

자들이 수천명에 달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이들을 위해 '죽창(粥廠·죽을 만들어 배급하는 공장)'을 운영했다. 3000

여명분의 죽을 밤새 쑤어서 큰 독 수십개에 가득히 채워둔다. 그리고 아

침 일찍부터 죽창의 창장을 비롯해 직원 수십명이 달라붙어 그릇과 표를

들고 오는 난민들에게 차례로 죽을 분배한다. 죽이 아니라 거의 된밥 수

준이었다.

매일 수천명에게 죽을 나눠주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기다리는 시간이 많은 데다 서로 먼저 받으려고 싸우는 이들도 생기기 마

련이었다. 또 하루에도 쌀이 몇 트럭씩 들어오는 상황에서 조금의 차질도

없어야 했기에 보통 신경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도 전도할 기회가 생겨서 참으로 감사했다. 죽 배급을 기다리

는 이들을 전도했다. 별도의 장소를 마련해 성경을 읽고 함께 기도하며,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전했다. 오후에는 30명쯤 되는 죽창 직원들에게 직

접 성경을 가르쳤다. 이 일은 공산당이 칭다오 지역을 완전히 장악할 때

까지 계속 이어갔다. 그러다가 미군이 철수하고 중국 국군도 대만으로 철

수하면서 중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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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일상에서도 주일이 되면 만사를 제쳐두고 교회에 나가 설교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자정이 다 되어서 집에 들어서자 중국인 교인 7,

8명이 집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웬일이냐고 묻자 "목사님이 보고 싶어

서 왔다"고 했다. 방으로 그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다소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한 사람이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우리는 방 목사님이 우리 목사인 줄만 알았는데, 한국인이 모여드니까

우리는 완전히 뒷전이 됐군요." 함께 왔던 교인들이 갑자기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했다. 당시 내 생활은 교민들과 난민 살피는 일에, 제대군인 교

육에, 한국학교 교장 일에 눈코 뜰새 없이 바빴기 때문에 그들의 말대로

중국 교인들을 따로 만날 시간을 내기가 좀처럼 쉽지 않았다.

내 눈에서도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그리고 중국 교인들을 위로했다.

"아니에요. 나는 당신들의 목사입니다. 여러분도 먼저 난민으로 오지 않

았습니까. 하지만 집도 다 마련했고, 같이 잘 살고 있잖아요. 한국인들은

배가 오면 모두 한국으로 떠나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돌아가면 나는

여전히 여러분과 함께 남아 있을 거예요."

"알아요 알아요, 목사님. 그걸 모르는 건 아니지만 우리는 그저 우리 목

사님을 누군가에게 빼앗긴 것 같아서 섭섭한 마음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날 밤 우리 집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나도 울고 중국 교인들도 한참 동

안 울었다. 그러나 슬픔이 아니라 목사와 교인 사이에 진한 사랑을 확인

하는 감사의 눈물이었다.

[역경의 열매] 방지일 (25) 중국 내전 치안상태 불안 가족같은 교

인들 때문 못떠나 [2008.11.23 18:24]

일본의 패망과 중일전쟁의 종식이 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했다.

중국은 국민당 정부군과 공산당 간의 내전으로 더욱 혼란스러웠다. 국민

군은 열세를 보이기 시작했고, 공산당이 전 중국을 장악해 나갔다. 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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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국민군이 대륙을 포기한다는 소문이 곳곳에서 나돌았다. 공산당을 피

해 타국으로 피난을 가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밀려드는 난민을 태운

배가 초만원 상태에서 침몰해 많은 이들이 수장되는 일도 적지 않았다.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민심은 흉흉해졌다. 치안도 엉망이었다. 이런 상황

에서는 인심이 수심으로 변하는 것 같았다. 창고라는 창고는 모두 털리는

가 하면 거리에는 약탈자들이 눈을 부릅뜬 채 먹이를 찾는 늑대처럼 배회

했다. 목사들이 '치안유지'라고 적힌 완장을 두르고 질서를 유지하려고도

했지만 효과는 일시적일 뿐이었다.

죽창을 언제까지 운영할지도 고민이었다. 정세가 악화되자 외국인 선교사

들도 모두 귀국을 서둘렀고, 그들은 나에게도 공산당이 정권을 잡을 것이

라며 본국으로 돌아갈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을 떠날 수는 없었다. 공산당에게 쫓겨 모여든 중국 교인들에

게 공장 기숙사를 얻어 머물게 하고 함께 동고동락하던 관계였는데 그들

만 놔두고 떠날 수는 없었다. 무슨 정치적 선견지명을 가진 것도 아니고,

모험을 해보자는 것도 아니었다. 이미 가족 같은 교인들에 대한 사랑과

신의를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 난민들이 돌아가고 나면 나는 분

명히 여러분의 목사입니다"라고 함께 울면서 중국 교인들에게 약속한 말

도 지켜야 했다. 나의 가족들도 귀국하지 않겠노라고 나에게 힘을 실어줬

다.

당시 교민회 회장을 맡았던 이대영 목사는 1947년 가족들을 남겨두고 본

국으로 일시 귀국했다. 그런데 이듬해에 한반도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

립됐다. 그 무렵 중국에서는 공산당의 득세가 가속화됐다. 그러면서 한국

과 중국 간 연락이 끊기고 왕래도 차단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이 목

사는 선교지로 귀환할 수 없게 됐다.

중국에서는 유일한 한국인 선교사로 나만 남게 됐다.

나는 칭다오에 남겨진 이 목사의 가족들도 함께 돌봐야 했다. 중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던 이 목사는 그러나 중국선교에 대한 열정을 한국에서도

뿜어냈다. 귀국 후 서울 승동교회를 담임하고 제41회 대한예수교장로회총

회장(1956)을 역임했던 그는 전국교회를 순회하면서 중국 선교에 대한 후

원 운동을 일으켰다. 중국인 목사의 봉급을 남대문 교회에서 부담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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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고, 어떤 교인은 자동차를 헌납하기도 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금을 내

놓기도 했다.

이 목사는 이 같은 내용을 미국과 홍콩을 거쳐 서신으로 알려왔다. 하지

만 워낙 치안이 불안한 정세 속에서 선교헌금과 헌물 등이 제대로 전달되

지 못하기도 했다. 급기야 본국 총회와 모든 통신수단이 차단된 상태에서

끼니를 거르는 어려움에 직면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중국교인들의

사랑과 배려가 커다란 힘이 됐다. 선교란 결코 일방적인 사랑이 아니다.

현지인들과 서로 주고받는 사랑이 선교다.

[역경의 열매] 방지일 (26) 공산당 정권 기독교 박해 시작 요주의

인물로 낙인 찍혀 [2008.11.24 18:26]

1949년 6월2일, 공산당이 중국 칭다오에 입성했다.

그들은 교회당 앞에 '신교자유(新敎自由)'라는 벽보를 큼지막하게 써 붙

여놨다. 그해 10월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정식으로 수립됐다. 나는 처음

엔 공산당이 어떤 조직인지 잘 알지 못했다. 일제의 핍박과 중·일전쟁 등

갖은 풍상을 겪은 나로선 공산당에 대해 별로 두려운 마음이 없었다. 또

공산당이 '신교자유'를 표방하고 나선 상황에서 '중국 공안이 일본 고등

계만큼 지독할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오래지 않아 깨달았지만 나의 생각은 공산당을 너무 과소평가한 것이었

다. 공산당 정권 초기, 그들은 개교회에 간섭할 여유가 없었던 것 같았

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유물사관을 꺼내놓고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

했다. 당시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에는 종교의 자유가 명시돼 있었다. 하지

만 그 이면에는 무서운 박해와 핍박이 기다리고 있었다.

외국 선교사가 내쫓기고, 외국인이 세운 교회는 등록통고 의무가 내려졌

다. 공산정권은 기존의 교회 조직을 무효화하고 교회를 새롭게 장악하기

위해 자주(自主), 자양(自養), 자전(自傳)을 뜻하는 삼자혁신운동을 전개

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중국 교회가 '스스로 설 수 있고, 스스로 키울 수

있으며, 스스로 전할 수 있게 만들자'는 운동이다. 공산당은 이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지방마다 기독교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강습회를 개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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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습회에서는 교역자들의 인간 개조와 사상 개조가 이뤄졌다.

그들은 처음엔 교역자들을 모아놓고 며칠간 편하게 휴식을 취하도록 한

다. 그리고 그들을 위로하는 모임을 열어 회유하는 단계를 거친다. 이어

중국 역사에 대한 자연스러운 토론을 유도하면서 서양의 제국주의가 중국

에 들어와 이화단전쟁, 아편전쟁 등을 일으키고 홍콩을 빼앗아간 역사 등

을 언급한다.

그들은 이런 내용을 전하면서 빼놓지 않는 주장이 있다. 서양 제국주의가

들어오기 전 반드시 선교사를 보내 그들로 하여금 제국주의의 앞잡이가

되게 하는 과정을 거친다는 것.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 강화조약을 체결

할 때에도 꼭 '선교의 자유' 조항을 넣어 선교사가 자유롭게 활동하게 해

달라는 조건을 붙인다는 것이다.

공산당은 이런 식으로 약 20일 동안 분반토의 등을 거치면서 결국 참석한

교역자들이 공산당의 주장에 동의하게 만든다. 그쯤 되면 웬만한 사람은

'선교사는 간첩'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공산당은 그러면서 강습회에 참석

한 교역자들이 '선교사에게 어떤 도움을 줬는지' 스스로 반성하게 만든

다. 이 과정에서 어떤 이는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자신의 뺨을 수십차례

때리는 일도 있었다.

삼자혁신운동이 확산되면서 교회는 사분오열되기 시작했다. 신앙을 지키

는 이들에겐 고난의 세월이 시작됐다. 교인 중에는 유물사관에 세뇌돼 신

앙을 버리는 이도 속출했다. 신앙을 지키기 어려운 시기였다.

나 역시 중국 공안의 요시찰 인물로 찍혀 있었다. 모든 외국인 선교사가

떠나고 혼자 남았으니 그럴 만했다. 설교 내용은 물론 일거수 일투족이

낱낱이 보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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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방지일 (27) 공산당 상상 초월한 세뇌작업 교인 수

백명 사상범 몰려 [2008.11.25 18:20]

공산당의 사상 교육과 세뇌 작업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집요했다. 설마

일본 경찰보다 더하겠느냐고 얕보았다가 큰코를 다친 적이 한두 번이 아

니었다. 무신론을 주장하는 공산 치하에서의 삶은 지금 생각해도 치가 떨

린다. 그들은 놀랍게도 다양한 '운동'을 벌이면서 주민을 통제하고 획일

화하는데 이골이 난 집단이다.

한번은 적의 세균전에 대응해야 한다며 균을 퍼뜨리는 파리를 다 잡아없

애자는 운동을 벌인 적이 있다. 주민들이 하루종일 파리를 잡아 그날 저

녁 마을회의에 참석해 각자 몇 마리를 잡았는지 공개한다. 가장 많이 잡

은 사람은 영웅이 되고, 신문에도 소개되지만 못 잡은 사람은 친미파로

몰린다. 그런데도 파리잡기에 동참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적으로 간주

되고 공개회의를 거쳐 즉석에서 처형당한다. 파리잡기 운동에 목숨까지

빼앗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는 게 공산 치하에서의 삶이다. 이런 식

으로 쥐잡기운동, 참새잡기운동 등이 펼쳐졌다.

이런 일들을 통해 사상 개조와 공포정치를 벌이는 공산 정권은 살벌함 그

자체였다.

교회를 통제하는 데 있어서도 처음에는 아무 간섭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

였지만 정권을 완전 장악한 뒤에는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공산당이

기반을 굳히기 전까지 나는 공산당의 실체를 잘 몰랐다. 자유롭게 목회와

선교활동을 펼치면서 1950년 공산정권 하에서는 처음으로 소췐장 교회를

건립했다. 주위에서도 교회를 건립하는 나에게 "공산당은 무신론자들인데

어떻게 교회를 지을 수 있겠느냐"며 반신반의했다. 나는 그때마다 공산당

이 내건 '신교 자유'라는 말만 믿고 교회 건축을 완료했다. 공산당이 얼

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몰랐던 상태에서 그나마 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소

췐장 교회는 공산당 정권 수립 이후 세운 최초이자 마지막 교회가 됐다.

교회당을 건립하고 전도를 펼쳤던 나는 공산당의 '블랙리스트' 에 올랐

다. 취조를 당했지만 그들이 나를 간첩으로 몰 구실은 나오지 않았다. 순

수하게 복음만 전했기 때문이다. 나는 행여나 중국 교인들에게 피해를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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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 봐 그들과 우연히 만나는 일까지도 조심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백 명의 중국 교인들이 나 때문에 사상범으로 몰려가며 크고 작은 어려

움을 겪었음을 나중에 알았다. 마음이 많이 아팠다.

중국 공산당이 그렇게 무서운 조직이었지만 한 가지 긍정적인 평가를 하

자면 중국 역사 5000년 만에 처음으로 50여개 민족을 하나로 통일시켰다

는 점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로 생각하는 것 중 하나는 연도 표기를

예수님의 강생연대(서기)로 통일해서 표기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우리

신앙인들도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겠느냐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그렇게

이뤄졌다. 우리 몇몇 목사들은 조용히 모여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함께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

언어 장벽을 없앤 것도 업적이라 할 만했다. 이전까지는 한족에게도 북방

말과 남방말이 혼재했고, 남방말에도 광둥말 푸젠말 상하이말 등 각양각

색이어서 통역이 필요했다. 이런 변화는 선교적 차원에서도 분명 도움이

되는 정책이었다.

[역경의 열매] 방지일 (28) 어항 속 물고기처럼 감시 혼자 교회묘

지 찾아 예배 [2008.11.26 17:49]

공산당의 감시망은 소름끼칠 정도로 촘촘했다. 마치 어항 속 물고기처럼

사는 느낌이었다.

예를 들어 A가 B를 맡고 B는 C를 맡으며, C는 다시 A를 맡는 식이었다.

누구 집을 방문하거나 누가 나를 만나기 위해 오는 일도 삼가야 했다. 내

가 누구를 만나 뭘 했는지 낱낱이 보고되기 때문이었다. 간혹 내가 누구

와 만났다는 얘기가 공산당 간부에게 흘러들어가면 무슨 얘기를 했는지

밤을 새워서라도 토해내게 만드는 게 공산당 조직이다.

한번은 중국인 왕모 집사를 길에서 만났다. 만나고도 모른 척해야 하는

게 좋으련만 시선이 마주치자 눈인사를 나눴다. 그날 밤 '자아검토' 회의

를 위해 마을 주민들이 모였을 때 누군가 입을 열었다. "왕 동무는 오늘

어디를 다녀온 것 같은데 누굴 만났소?"

왕 집사는 어리둥절해하며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감시원은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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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는 요즘 마음 한구석에 혁명대열에 무슨 불만이라도 있는 것 아닌가"

라고 추궁하면서 나와 길거리에서 인사를 나눈 사실을 언급했다. "눈인사

만 나눴을 뿐"이라고 항의해도 그 대상이 '목사'였다는 점을 물고늘어지

면서 결국에는 스스로 비판하게 만들었다. 고문도 이런 지독한 고문이 없

을 것이며, 금족령 이상의 형벌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디를 다녀도 감시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으니 가장 편한 곳은 한곳뿐

이었다. 교회묘지였다. 묘지에 들러 묘비를 보면서 내가 장례를 집례했던

사망자와 그 집안 식구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를 위해 기도하며 혼자

찬송을 부르기도 했다. 목 놓아 울더라도 근처에서, 혹은 멀리서 나를 감

시하는 사람은 '저 사람이 가족을 잃고 저렇게 우는구나'라고 생각할 뿐

그리 관심이 없었다. 거기서는 비석이나 돌 틈에 성경을 감춰두고 조용히

보고 가곤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소췐장 교회와 중자와 교회 교인들은 나를 목자로 따르

며 따뜻한 사랑을 건넸다. 어떤 이들은 내 집 마당에 몰래 떡을 던져놓고

가는가 하면 어린이용 옷이나 내가 신을 신발을 수개월 동안 직접 만들어

던져놓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

당시 중국 주민들의 삶이란 공산당으로부터 배급받아 겨우 끼니를 이어가

고 간신히 옷을 지어 입을 정도였다. 그런 곤궁한 생활에서도 나에게 사

랑을 베풀어준 것이다.

한번은 내가 일본 간첩으로 내몰렸던 적이 있다. 내가 일제시대 파송된

선교사이며, 일본어를 구사한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일제가 강요했던 대

동아선교회에 반대했고, 학창시절부터 일본 경찰에 취조받은 일 등은 아

예 거론할 수도 없었다. 이 사안으로 결국 나는 '쿵수대회'(일종의 인민

재판)에 회부되기 직전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그때 중국 교인들이 강하게

반발하자 공산당은 민심이반을 우려, 나에 대한 쿵수대회를 취소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나를 사랑해서 희생의 제물이 되셨듯 나도 조건 없이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해 주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선교관을

늘 강조했었는데, 그 열매가 바로 중국 교인이었음을 깊이 깨닫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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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방지일 (29) 공안당국 평양 추방령에 저항

[2008.11.27 18:33]

1953년 3월, 중국 공안은 '외국인은 군항에 거주할 수 없다'는 이유로 나

에게 전격 퇴거명령을 내렸다.

중국을 떠나라는 얘기였다. 공안 당국은 나를 평양으로 추방할 방침이었

다. 하지만 그대로 응할 수는 없었다. 퇴거명령을 받았으니 떠나기는 떠

나야 하겠으나 나를 보내준 곳으로 가는 게 옳다고 판단했다. 곧 대한예

수교장로회 총회가 있는 서울이었다.

그해 말, 본국의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도 가족과 함께 국내로 들어

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이창규 총회 선교부장이 통지서를 보내왔다. 미

국영사관에서 최후로 떠나는 미국배에 같이 오르라는 것이다. 하지만 당

시 죽창을 운영하고 교인들에게는 공장 숙소를 얻어 살게 하면서 한창 사

역중인 가운데 나 혼자 가족을 데리고 훌쩍 떠날 수는 없었다. 가족에게

먼저 떠나라고 했으나 극구 반대했다. 총회의 명령을 무시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을 떠나면 안 될것 같았다. 아니,

떠나지 못할 것 같았다.

당시 한국과 중국의 정치적 상황은 최악이었다.

한반도는 각각 남북으로 갈라져 다른 정부를 수립한 상태였고, 중국은 북

한을 지원하며 남한과 전쟁을 지속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중

국 공산당이 한국의 선교사를 서울로 돌려 보내줄 리는 만무했다. 중국

공안과의 줄다리기가 계속됐지만 해결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지방의 공안 당국이 결정할 수 없는 문제라는 생각까지 미치자 중앙정부

의 마오쩌둥 주석으로 방향을 틀었다. 수차례에 걸쳐 그에게 직접 편지를

써서 한국의 총회로 보내달라고 줄기차게 요구했다. 이 작업만 3년 넘게

이어졌다.

추방 명령을 받은 이후 몇 해 동안 나보다는 중국교인들의 마음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그들 자신에 대한 문제보다는 내가 과연 어떻게 될까

에 대한 관심 뿐이었다. 내 신변에 이상이 있지는 않을지, 멀리 쫓겨나는

건 아닌지 교인들의 걱정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당시 사회적으로 모든

외국인 선교사들은 간첩이라는 낙인이 찍힌 상태였다. 그러니 교인들은

안절부절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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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단의 대책이나 해결방법은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 견디며 하나님의 은

혜를 구하는 것뿐이었다. 이러한 여건은 오히려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는

경험을 선물했다. 특히 억압과 핍박의 연속이었던 공산 치하에서의 삶은

내 생애에 있어서 말씀과 기도의 깊이를 깨우쳐주는 시기이기도 했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의 일을 어찌 예측하리요. 주님 말씀대로

내일 일을 위해 염려하지 말라 내일 염려는 내일 할 것이요 그날 염려는

그날에 족하다'고 하신 말씀(마 6:34) 그대로다. 중국의 속담도 비슷한

얘기가 있다. 사람의 천만가지 타산이 하나님의 한번 타산에 따르지 못한

다'는 말이다.

그러던 사이, 국제사회에서는 '중국에 유일하게 남은 한국인 선교사의 귀

환 문제'에 대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나에 대한 소식이 국제적으

로 알려지게 되자 중국이 부담을 느끼는 것 같았다.

[역경의 열매] 방지일 (30) 아버지·동생 세상 떠났다니… 비보에

넋 잃어 [2008.11.28 18:17]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아버지와 동생이 세상을 떠나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1953년 4월. 한국에서 미국으로, 미국에서 홍콩

을 거쳐 다시 내가 머물고 있는 중국 칭다오까지 날아온 비보에 넋을 잃

고 말았다. 나는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다시 한국에서 목회 중인

이대영 목사에게 아버지와 동생의 사망 경위를 물었다.

한달 만에 답신이 왔다. 동생은 1952년 12월10일 미군에 의해 살해됐고,

아버지는 지병과 그 충격 여파로 53년 1월1일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1941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와 마찬가

지로 아버지 사망 소식은 내 기도의 커다란 배경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중국 선교사였던 아버지와 친분이 있는 이 몇몇을 불렀다. 함께 모이는

일 자체가 위험한 때였지만 그들은 목숨을 걸고 나를 찾아와 위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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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하게나마 예배를 드리고 함께 아버지를 추모했다.

한국 교회의 배려로 아버지는 대한예수교장로회장으로, 동생은 한국기독

교협의회장으로 치러졌고, 산소는 부산 괴정의 공동묘지에 있다는 말을

나중에 들었다. 한국 교회에 감사한 마음도 들었지만 부모와 자식된 도리

로서 장례에 참여하지 못한 송구함과 안타까움에 두고두고 마음 한 구석

이 아팠다.

그런 와중에서도 중국 내 선교사들의 삶은 하루하루 피말리는 생활의 연

속이었다. 간첩으로 몰리면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함께 기도하며 서로를

격려해주던 미스 폴사이드 미국 선교사가 있었다. 그녀가 세운 교회와 학

교 앞에서는 거의 매일 학생들이 학교 주위를 돌면서 그녀를 향해 "간첩

은 물러가라"고 외쳤다. 신문에는 폴사이드 선교사가 간첩 활동이 명백하

다는 등의 악의적이고 왜곡된 보도가 이어졌다. 결국 그녀는 1954년 추방

당했다.

나 역시 공안 당국의 추방령에 대해 평양이 아닌 서울로 보내달라고 끈질

기게 요구하던 중 드디어 1957년 초 홍콩으로 떠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사실상 서울로 돌려보내달라는 나의 요구를 중국이 받아들인 것이나 마찬

가지였다.

'중국 선교사의 삶 21년이 이렇게 막을 내리는구나.' 그 세월이 주마등처

럼 지나갔다. 이렇게 내 신변에 대한 문제가 해결된 것은 126명의 교인이

나를 위해 간절히 기도해준 덕분이다. 그들이 보고 싶어졌다. 당시에는

공산당의 감시 때문에 교인들이 서로 만나는 일조차 힘들었다. 하지만 그

들은 나를 위해 모험을 감행했다. 중자와교회와 소췐장교회에 들러 주일

설교를 통해 말씀을 전했다. 그리고 교인들과 함께 간단한 환송회도 가졌

다.

사랑하는 중국 교인들을 두고 떠나려니 마음이 아팠다. 내가 떠나면 그들

의 신앙생활은 공산당의 방해와 핍박으로 더욱 힘들어질게 불을 보듯 뻔

했다. 하지만 지난 21년 동안 정권이 다섯 번이나 바뀌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각별히 체험한 나로선 그들에게 믿음을 강조할 뿐이다. 공산정권

하에서만 9년을 견디게 해주신 하나님이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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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방지일 (31) 중국 교인들과 눈물로 이별 그리스도

사랑 체험한 21년 [2008.11.30 18:14]

1957년 8월23일 중국 칭다오를 떠났다. 칭다오역에는 우리 가족을 배웅하

기 위해 많은 중국 교인이 나와줬다.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마지막 인사

를 건네는 그들을 보자 내 눈에도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들의

앞날을 하나님께 부탁할 뿐이었다. 난징과 상하이를 거쳐 홍콩으로 향했

다. 국경을 넘어 영국땅 홍콩에 발을 디뎠다.

구룡역까지 기차로 가야 하는데 수중에 돈이 하나도 없었다. 아는 사람도

없었다. 식구가 5명인데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한 운수 회사에 들어가

사정을 설명하고 차표를 얻어 구룡역까지 왔지만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

다. 행인에게 동전을 빌렸다. 그리고 공중전화 앞에 내걸린 전화번호부에

서 한국인 명단을 찾았다. 은행 지점장의 부인이 전화를 받았다. 나가 "

중국 대륙에서 퇴거령으로 추방당한 방지일입니다"고 소개하자 부인이 반

가워하면서 현지 총영사 연락처까지 알려줬다. 그들 덕분에 다행히 며칠

간 숙식을 해결하면서 한국행 배편을 알아봤다. 배는 부산행 화물선이 약

한달 후에 있는데 배삯은 150달러였다. 가족을 모두 태울 수 있다고 했

다.

9월18일 대만과 일본 요코하마 고베 등을 거쳐 부산으로 향했다. 그리고

닷새 후인 9월23일 조국 땅 부산에 도착했다. 당시 부산에서는 대한예수

교장로회 총회가 열리는 기간이었는데 많은 교회 관계자가 부두에 나와주

었다. 총회 장소에 들러 교회 어른들과 총대들에게 인사하고 부산에 모셔

진 아버지 산소로 향했다. 가족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데 만감이 교차했

다. 내가 중국에서 왔기에 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받아야 했다. 신문기자

들이 찾아왔기에 내 이름은 신문에 나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했는데 나중

에 '공산치하에서 나온 모 선교사'라는 글을 보고 중국의 교인들이 행여

나 피해를 당하지 않을까 마음이 많이 무거웠다.

한국에 들어와서는 많은 이들로부터 중국 선교에 대해 얘기해달라는 요청

이 쇄도했다.

누군가 21년 중국선교 활동을 결산하라고 할 때 빠뜨리지 않는 말이 있

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함께 깊게 넓게 길게 높게 맛본 시간이었습니

다." 선교는 주고받는 선교가 돼야 한다는 게 나의 선교 지론이다. 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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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라고 하면 가르치는 선교를 생각한다. 경제·문화적으로 열악한 현지

인들을 가르치는 것도 초창기엔 중요하지만 그것이 주가 돼선 안된다.

예수의 복음 없이 그저 그들의 생활이나 형편을 개선해주는 식으로 전락

하고, 선교사와 현지인들간에 주종적 관계가 맺어지면 더 이상 선교가 아

니다. 가르치는 선교, 주는 선교만으로는 그들 자신의 예수를 믿지 못하

게 하기 때문이다.

명심할 것은 선교는 그들이 스스로 예수를 믿게 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내게 은과 금은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3:6)' 선교의 처음과 끝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가 '주어'가 돼야 함을 선교사는 늘 잊지 말아야 한다.

[역경의 열매] 방지일 (32) 영등포교회서 21년간 시무 교회 행정

은 장로들에 일임 [2008.12.01 18:17]

귀국한 뒤에도 선교사 신분을 한동안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비록 몸은

중국에서 추방돼 한국에 머무르고 있지만 선교사로서의 사명이 남아 있다

고 믿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중국교회를 위해 계속 기

도하는 일이었다.

교단 총회(예장통합)에서는 선교부 총무 업무를 맡아달라고 요청해왔다.

하지만 사무적인 일에는 재능이 없기에 정중히 사양했다. 그러던 중에 영

등포교회의 강단이 비었고, 임시목사를 맡아달라는 요청이 있어서 받아들

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가 소속된 한남노회에서는 위임목사가 되어줄

것을 요청해왔으나 쉽게 응하지 못했다. 아직 선교사 신분인데다 중국에

두고 온 교인들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4년간 임시목사로 봉직하면서 영등포교회에 미안한 생각이 들었

고, 결국 위임목사를 맡기로 했다. 선교사직은 1963년에 내려놓았다. 영

등포 교회에서는 지난 79년까지 21년간 담임을 맡았다. 이어서 지금까지

원로목사로 교회에 적을 두고 있다. 57년에 교회에 발을 디뎠으니 반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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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게 한 교회에 머무른 셈이다. 이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설

명할 수 없다.

한국에서 교회를 맡은 뒤로도 바쁜 나날을 보냈다. 교회와 노회, 총회에

서 할 일이 많았다.

17년 동안 총회 전도부장으로 봉사했고, 한남노회장과 경기노회장에 이어

72년에는 교단 총회장을 거쳤다. 또 영등포지역 공장 노동자들을 위해 영

등포산업선교회를 설립했고, 맹인선교후원회를 발족해 무료 개안수술을

하는 실로암 안과병원 건립의 물꼬를 트기도 했다.

그 가운데서도 담임목사직은 가장 중요하고 기본이 되는 일임에 틀림없

다. 목회관을 논하는데 있어서 나는 신앙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다른 타협

이 있을 수 없다고 본다. 기타 다른 행정적인 면은 장로님들의 경험을 중

시했기 때문에 내가 관여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다. 시무를 할 때에도

목사는 모든 것을 장로님들께 맡기고 당회에서 나는 사회만 본다는 입장

을 고수했다.

하지만 강단에서 설교를 하고 말씀을 전하는 일, 다시 말해 강단을 지키

는 일은 나의 전임이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해서는 확고한 방침을 두고

있다. '이번 말씀사경회에는 누구 누구 목사님을 모시자'는 제의나 건의

를 받아들일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이상은 곤란하다. 내가 책임을 져야

하는 강단에 누구를 세우느냐 하는 문제는 담임목사로서는 더없이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영등포교회에서 10년쯤 됐을 때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한 교회에서 어떻게 그리 오래 있을 수 있습니까." 그때 나는 나의 목회

원칙을 말해주면서 대답을 대신한 것으로 기억한다. "각자가 맡은 영역만

존중해왔을 뿐입니다." 20년 넘게 시무하면서 정기 당회와 임시 당회가

수백 번이나 있었을 텐데 물 흐르듯 지나온 것 같다. 함께 지내온 당회원

들께도 감사하지만, 나는 그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생각한다. 교회

는 주님의 교회인지라 하나님이 운행하심이 마땅하다. 내가 주도하는 건

금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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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방지일 (33) 장로교단 통합·합동 분열 화합 호소

외면당해 허탈 [2008.12.02 18:14]

지난 세월, 목회를 하면서 침이 바짝 마를 때가 두어번 있었다. 중국 선

교사 시절 공산당으로부터 취조받을 때, 그리고 다른 하나는 교단이 분열

을 겪을 때였다.

중국 선교사를 마치고 귀국해 보니 한국 교회가 말이 아니었다. 해방 이

후 교회가 재건되는 과정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가 고려파와 한신파 등 3

개 파로 나뉘어 있었다. 고려파를 주도했던 한상동 목사나 박윤선 목사,

기독교장로회의 정희수 목사 등은 모두 평양신학교 동기였는데 따로 떨어

져 있었던 것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선에서 한국 교회의 분열 원인은 일제가 뿌린 '불화의

씨'가 자란 탓이 크다.

일제시대 일본 기독교단 총무였던 아베 요시무네 목사는 내선일체(內鮮一

體)를 강조하면서 조선 기독교회를 일본 기독교단으로 편입시킬 구상을

갖고 조선총독부의 정무총감 우에노에게 협조를 요청했다. 그러나 우에노

는 오히려 "조선 기독교를 산산조각내는 것이 우리의 정책이다. 조선 장

로교를 일본 기독교단 아래에서도 뭉쳐놓을 계획은 아예 단념하라"고 말

하고 다녔다. 일제는 그 후로 한국 교회 목회자들에게 접근하면서 지방색

을 조장하고 분파와 반목을 부추기는 정책을 교묘히 취했다. 이런 간계는

정치와 계교를 모르는 교계 인사들에게 무의식적으로 침투됐고, 다른 문

제들과 얽히면서 교회 내에 파벌이 생기고 사람이 갈라지는 등 대립 구도

를 형성했던 것이다.

1959년 대한예수교장로회가 통합과 합동 교단으로 갈라질 때 가슴 아팠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당시에는 전화도 흔치 않은 때인지라 우체국으로 뛰어가 사방으로 전화를

넣던 일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증경 총회장님들을 초청해 수차례 모

임을 갖고 대책을 논의하는가 하면, 교단 분파를 찬성하는 목회자들을 따

로 만나 간곡히 만류하기도 했다. 당시 내가 속한 한남노회는 3년간 중립

을 지키기도 했다. 총회에서도 분열을 막기 위한 노력은 이어졌다. 그때

분열된 양측 교계 인사들의 합동 회의에서 의장을 맡게 된 나는 목회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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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화합을 호소했다.

"여러분, 시험관과 대접을 아시지요. 시험관과 같은 신앙은 깊이는 있으

나 넓지 못합니다. 반면 대접과 같은 신앙은 폭넓게 수용하는 듯하지만

깊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깊은 것을 자랑하지 말고 넓어지도록 노력합시

다. 좁고 얕다고 불평하지 말고 깊어지도록 애씁시다."

대부분 인사들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실상은 그 반대로 나가고 있었다. '

나와 같이 단수가 옅은 사람은 이런 일에 아무 힘도 없구나….' 가슴 깊

이 절감한 때였다. '힘써도 못하네, 참아도 못하네, 울어도 못하네, 믿으

면 하겠네….(새 찬송가 544장)' 이 찬송을 부르면서 바로 우리의 믿음이

큰 문제임을 절실히 깨달았다.

얼마 전에도 4개 교단 목회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강조한 말이 있다. 믿음

이란 투항이다. 믿는다는 것은 무장을 해제함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

개인은 아직도 그 무장을 해제하지 못하고 있다. 보혜사 성령께서 인도하

심으로 자기 무기를 주님 앞에 온전히 바칠 때 비로소 한국 교회의 통합

과 일치의 역사가 이뤄질 것으로 믿는다.

[역경의 열매] 방지일 (34) 세계 선교지 찾아 말씀 전달

[2008.12.03 17:49]

내 슬하의 1남(방선주) 1녀(방선자)는 모두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각자

결혼해 선주는 1남을, 선자는 1남1녀를 낳았다. 그리고 그 3명의 손주들

은 그 밑으로 모두 5명의 증손주를 나에게 안겨줬다. 아들과 손자, 증손

자까지 모두 10명을 헤아린다.

그들을 만나기 위해 종종 미국에 들를 때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 한국

에서는 아들과 손자들이 현지에서 인터넷 이메일로 보내주는 증손주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 파일을 인화해 집안 곳곳에 걸어두며 갖는 생각이 있

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기쁨이 바로 이 맛이로구나.'

영등포교회 담임목사를 내려놓고 원로목사로 부임한 이래 1년 중 반 정도

는 해외에서 지내는 편이다. 후배 목회자들과 세계 곳곳의 선교사들을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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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하면서 말씀도 전하고 격려하는 일이 나에겐 크나큰 기쁨이다. 지금까

지 30개국 넘게 다닌 것 같다. 한국에서는 매일 20통 넘는 이메일을 주고

받으며 그들과 교제의 끈을 이어간다. 그런 활동을 가능하게 하신 주님께

감사할 뿐이다.

국내외에서는 여러 장로교단뿐만 아니라 감리교 침례교 성결교 등 각 교

단과 교회, 교계 단체에서도 나를 불러주는 편이다. 그런 배경에는 내가

교단이 분열되기 전 목사 안수를 받았기에 어느 교단에서도 자유롭게 설

교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인 듯하다.

많은 후배 목회자와 선교사들을 만나면서 그들에게 전하는 몇 가지 '바른

목회자상'이 있다. 주님과 성경, 성도는 불가변적 요소이며 예배의 양태

나 규례, 예배 장소 등은 바뀔 수 있다는 것. 이 두 가지 요소를 정확히

구분해야 한다. 그리고 주관적인 요소와 객관적인 요소를 조화롭게 다루

되 극단은 피해야 한다. 셋째로는 구심력과 원심력의 조화를 고려하며,

보수와 진보를 원만히 아우를 줄 알아야 한다.

목회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따라서 목회자는 순종할 뿐이다. 이런

원칙하에서 바람직한 교회상은 양보다 질을,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을 우선

해야 한다. 다른 이의 장점과 나의 단점을 먼저 찾으라고 강조하고 싶다.

또한 바른 목회자라 함은 심방을 부지런히 해야 한다. 자기의 포도원을

지키는 일에 밤낮이 따로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직장인처럼 시간제로

출퇴근하는 목회자는 '삯꾼'에 불과할 뿐이다.

사랑은 결코 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의 복음을 전하고 나의 사랑

도 건네면서 상대방으로부터 배울 것은 배우고 그들의 문화도 익히는 것,

즉 서로 주고받을 때 사랑이 통하는 법이다. 두 손이 마주쳐야 소리가 나

듯이….

영국의 한 선교사가 아프리카 부족에게 복음을 전했다. 마을 주민이 선교

사 덕분에 모두 예수를 믿었다. 안심하고 선교사는 본국으로 돌아갔는데

원주민들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모두 믿음을 버렸다. 원주민들은 '선교사

의 예수'를 믿어준 것이다. 내가 그들을 대접하고 그들의 대접을 내가 받

아줄 때 비로소 인격적인 동등함이 형성된다. 그 때 예수의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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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방지일 (35) 성경공부모임 반세기 이끌어

[2008.12.04 18:15]

중국에서 귀국했을 때, 몇몇 분들이 성경공부를 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그 모임이 나를 중심으로 이뤄질 것 같은 데다 교계에 또 다른 단체를 하

나 더 만드는 게 아닌가 싶어서 거절했다. 하지만 주위의 요청이 계속 이

어진지라 "정 그렇다면 초교파적으로 하자"고 제안했고, 모두들 동의했

다. 장로교와 침례교, 성결교, 감리교, 기독교장로회 등 어느 교단에 소

속된 이들이라도 누구나 성경공부 모임에 참여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놨

다.

1958년쯤부터 매주 월요일마다 개최한 그 성경공부 모임이 올해까지 벌써

반세기 넘게 이어지고 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당시 서울 영등포

사택에서 모일 때에는 40∼50명씩 참석하기도 했는데, 집 안팎으로 인파

가 꽉 차서 확성기를 쓰기도 했다. 해외선교지 등을 방문하느라 불가피하

게 자리를 비울 때에는 미리 녹음해둔 카세트테이프로 대신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장소만 서너 차례 바뀌었을 뿐, 달라진 건 별로 없다. 지금은

10∼20명이 내가 머무는 서울 등촌동 집에서 매주 월요일 모인다. 그들은

대개 후배 목회자들로부터 알음알음 찾아온 이들이 대부분이고, 모두 자

발적으로 참석하기 때문에 출석을 부르는 일도 없다.

성경 66권을 통독해 나가며, 때로는 성경 한 장을 서너번에 걸쳐 깊이 다

루기도 한다. 참석자들은 일주일에 한 장의 성경을 읽어 오고, 나는 사전

에 연구한 원고를 낭독한 후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 방식으로 성경공부를

진행했다. 이 모임을 위해 준비한 원고는 나중에 출간한 강해집의 원고가

됐고, 1992년에는 이 원고를 토대로 성경전서 66권의 강해서를 30여년 만

에 완간했다. 참석자들은 이 모임을 통해 서로의 신앙을 격려하며, 목회

의 방향을 설정하기도 했다. 지난 50년 동안 월요성경공부 모임을 거쳐간

이들은 어리잡아 2000명이 넘을 것이다. 이 또한 하나님이 맺어주신 열매

이리라.

성경은 어느 한 부분만 보고 이해하거나 강조해선 안 된다. 성경 말씀에

의문이 있으면 그 해답도 성경에 있다. 성경 한 구절 한 구절을 강해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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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철저히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해갈 때 비로소 성경의 깊고 깊은 맛을

알 수 있다.

성경도 중요하지만, 기도 없이 성경 말씀에만 치우치면 냉각병에 걸린다.

또 말씀 없이 기도에만 기대면 광신병에 걸리게 된다. 따라서 성경말씀을

읽는 것과 기도는 어느 한쪽에 치우침이 없이 균형감있게 이뤄져야 한다.

기도는 '죄를 찾는 현미경'이다. 기도를 하면서 감춰진 내 죄가 찾아진

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선 안 된다. 찾은 죄를 하나님 아버지께 고백하고

용서받는 은혜의 감격까지 누리는 게 신앙의 참 맛을 아는 것이다. 성경

말씀으로 기도하고 기도와 깊은 묵상 속에서 또다시 깨닫게 되는 성경 말

씀은 그렇게 달 수가 없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사람이 인위적으로 받지 못한다는 것

이다. 그것은 가르치는 말씀이 아니요. 그저 받은 대로 전달할 뿐이다.

보혜사 성령이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받은 그 말씀을 듣는 이들도

받게 될 따름이다.

[역경의 열매] 방지일 (36·끝) “교회 임무는 주님 핏소리 중계”

[2008.12.05 18:18]

서울명성교회(김삼환 목사)의 부속 시설인 명성글로리아센터에는 '방지일

홀'이 있다. 토마스홀, 언더우드홀, 길선주홀, 주기철홀, 손양원홀, 이기

풍홀 등 한국 교회 초기 선교사와 목회자들의 선교 정신을 기리는 곳에

현역 목회자를 기념하는 공간이 있다는 건 극히 이례적이다. 지난 2월 중

순 '방지일목사기념사업회'(이사장 김삼환 목사)가 조직된 일도 흔치 않

은 일이다. 교회와 기념사업회측은 방 목사의 뜨거운 선교 열정과 신앙을

본받자는 취지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정작 방 목사는 자신의 이름이 남들

앞에 거론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아닌 자신을 드러내는 것 같다며 부담

스러워한다.

지난 10월27일부터 총 6주 동안 방 목사를 주제로 한 본보 '역경의 열매'

가 연재될 때에도 방 목사의 심기는 내내 불편했다. '주님의 종'을 자처

하고 살아온 자신의 삶에 대한 얘기가 자칫 독자들에게 자신의 사역을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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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하는 것처럼 비치는건 아닐지, 등장하는 인물과 그 후손에 대해 누를

끼치는건 아닌지, 행여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건 아닐까 하는 우려 때

문이었다. 그런 그의 마음은 중국 선교사를 마친 뒤 국내에서만 50년 넘

게 교회와 선교를 위해 헌신해온 수많은 사역까지도 구체적으로 담아내기

를 꺼렸다.

"방 목사님은 다른 사람을 위한 배려가 깊으신 분이에요. 누구한테도 폐

를 끼치지 않으시려고 긴장하면서 사시는 분입니다." 방 목사 후임으로

영등포교회 담임목사로 재직했던 김승욱(영등포교회 은퇴) 목사의 전언이

다.

방 목사는 겸손하면서도 열정을 지닌 목회자로도 일컬어진다. 림인식 노

량진교회 원로목사는 "방 목사님은 선교사이며 목회자요, 저술가이면서

행정가이자 부흥사이기도 하고 여행가라고도 할 만한 분"이라며 "옛날 바

울 사도가 1인 10역의 다양한 활약으로 로마를 복음화했듯 방 목사님이야

말로 한국의 바울처럼 열정적으로 활동하시는 분"이라고 말한 바 있다.

다사다난했던 2008년이 저물어가고 있다. 하지만 백수를 눈앞에 둔 원로

목사의 메시지는 연초나 세밑이나 한결 같다. 방 목사는 믿기지 않을 만

큼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방방곡곡 세계 곳곳을 다니며 복음의 씨앗을 심

고 가꾸기에 바쁘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이들에게는 "신앙은 알고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아는 것이다. 알고 믿는 것은 지식이지 참신앙이

아니다"며 회심을 권유하고 있다.

지난 4일 저녁 서울 63빌딩 국제회의장. 한국 교회 지도자들과 성도 등

700여명이 모인 자리에서 그는 '핏소리의 중계'라는 제목으로 다시금 복

음과 교회의 본질을 가슴 깊이 되새기게 만들었다.

"주님이 세우신 우리 교회의 임무는 주님의 핏소리를 중계하는 것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다가올 미래에도 교회는 주님의 핏소리를 분명하고 깨끗

하게 그리고 똑똑하게 전해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주님의 핏

소리는 억울함의 호소가 아니었습니다. 그분의 핏소리는 '죄인들아 다 내

게로 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의 핏소리를 마음 한가운데 품은 채 한평생 전해온 97세 원로목사의

'핏소리 중계'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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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준형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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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력 서

태국주소: P. O. BOX 136 Udonthai, 41000, THAILAND

66-42-266464, 66-81-764-7337

[email protected] www.pckthailand.net

1. 학 력

1970년 2월 휘문 중고등학교 졸업

1970년 3월 -1974년 2월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B. A.)

1974년 8월 -1977년 2월 군복무 (육군)

1977년 3월 - 1980년 2월 장로회 신학교 신학대학원 졸업 (M. Div)

1982년 9월 - 1984년 4월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선교학 박사 과정 수료 (D. MIN.)

2000년 9월 - 2003년 5월 NEW YORK THEOLOGICAL SEMINARY

목회학 박사 취득 (D. MIN.)

2012년 3월 - 현 주안대학원대학교 신학석사 (T.h.M.) 과정

2. 선교사 경력

1987년 6월 30일 - 현재 총회 파송 태국 선교사

(1987.6-2003.12 새문안교회 후원)

-PAYAP UNIVERSITY 내 MCGILVARY THEOLOGICAL SEMINARY 교수

-한-태 선교관 관장 (1998.5-2003.12)

-총회선교사회 회장 (2002.11-2004.7)

-태국기독교단 전도부내 교회개척부 부장(2004.5-현재 )

-태국기독교단의 전도훈련원 원장으로 사역지를 우돈타니로 옮김

(2006. 8--현)

-세계 한인 선교사회 인도차이나지역 회장 (2008. 7 --201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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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공보 선교기고문에서)

1. 태국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역사

장신대 재학 중(신대원2년) 저에게 선교사역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를

‘선교사파송연구회’를 통하여 주셨다. 1979년 1월에 방글라데시에서 선교

사로 사역하는 고 정성균선교사님 사역을 돕는 단기선교사로 한 달 간 파

송 받게 된 것이다. 이것을 계기로 저는 방글라데시에 선교사로 갈 것을

생각하고 기도하였으나 선교사님 가정이 파키스탄으로 사역지를 옮김으로

기도의 제목을 파키스탄으로 바꾸었다. 졸업 후 후원관계가 여의치 않아

우선 미국에서 선교학 공부를 먼저하고 교육 행정을 위한 선교사로 가도

록 결정하였다. 2년 남짓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D. Min 과정을 수료했

을 때, 고 정성균선교사님께서 파키스탄에서 순교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하자마자 저는 파키스탄으로 가서 임평수선교사님(사모님)과 함께 선

교사님 묘지를 방문하니 아직 봉분을 세우지 않은 상태였다. 자신의 생명

을 다해 주님의 사역을 위하여 헌신하시다가 주님의 부름을 받았다. 자신

의 것을 조금도 귀히 여기지 않으시고 최선을 다한 삶이었다. 오직 주님

의 나라를 위해... 그후에 파키스탄에 선교사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나름대로 애를 썼다. 외국선교 단체에도 가능성을 타진하는 등 2년

의 시간이 흘렀다. 선교사 후보생으로 곧 선교지로 갈 것을 생각하여 어

느 교회에서도 전임으로 사역을 할 수 없었다. 나에게 선교사로 나가기

위해 조언을 구하던 후배들은 선교지에 이미 파송되었는데 나 지신은 아

직도 선교지에 나가지도 못한 상태로 마냥 이렇게 지날 수 없어 한 교회

의 대학부 지도 목사로 이력서를 냈다. 소개해 주던 목사님도 꽤 자신 있

어 했는데 그만 이력서에 중요한 한자 하나를 잘못 기재함으로 담임목사

님께서 보류하셨다고 한다. 저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바로 하나님 앞에 감

사하였다. ‘대학부를 맡게 된다면 적어도 3년은 섬겨야 하는데..그만큼

선교사로 가는 것은 멀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면서 무거운 마음으로 지

원 했었다. 그렇기에 이 결과는 ‘하나님께서 멀지 않아 저를 선교사로

보내시려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큰 기쁨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서정운 전총장님께서 전화로 새문안교회 담임목사님이신 故 김동익

목사님을 만나보라는 것이었다. 새문안에서 태국에 ‘새문안교회 창립 100

주년 기념 선교사를 보낼 계획’이 있는데 저를 추천하셨다는 것이다.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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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그런 사실을 알곤 있었으나 선교지로 오직 파키스탄만을 고집하였

기에 다른 나라를 전혀 생각지 않았다. 고 김동익목사님과의 첫 만남에서

태국선교는 양 교단 간의 협약에 의하여 사역이 정해져 있음을 알게 되었

다. 새문안은 오래된 역사를 지닌 교회로서 선교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성숙과 균형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저는 태국 선교사로서의 비죤을 갖

고 있지 않고, 어느 한 선교회와 연관이 있음을 말씀드렸다. 고 김동익목

사님은 함께 기도하자고 하시고 후속 조치를 취해주셨다. 저와 아내인 이

명화선교사는 지금까지 파키스탄을 위하여 기도하여 왔는데 갑자기 태국

으로 선교지를 바꾼다는 것을 용납하기 힘들었다. 이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인지 아니면 저희를 시험하는 것인지? 당황해 하면서 간절히 기도해야

만 했다. 하루는 제가 꿈을 꾸었다. 야자나무가 늘어져 있는 바닷가에 들

어가 물고기를 잡는 장면이었다. 곧 이어 그날 저녁 사모가 꿈을 꾸었는

데 어느 산에서 오랜지색 옷을 입고 머리를 민 사람들이 내려오고 돼지가

나타나고 사탄과 싸우는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놀랍게

도 그 산은 치앙마이의 ‘도이수텝산’과 같고, 오랜지색은 승려 복장이고,

그 산에 아주 유명한 절이 있었다. 이런 꿈이 파키스탄만을 고집하던 저

희에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을 뜻을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

게 시작 된지 불과 5일 만에 총회 선교부, 새문안교회, 우리를 후원하던

선교회와의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진척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

이 태국선교사로의 부르심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선교지를 정해놓고

이 길 아니면 안되는 듯 낮이든 밤이든 기도드릴 때마다 보내어 달라고

했던 우리의 모습, 어려운 곳에 가겠다는데 왜 주님은 응답이 없으신가에

대해 많이 답답해 했던 우리부부. 주님은 너무 더디고 마냥 멀듯 보였던

선교사로서의 길을 하나님의 때를 따라 이렇듯 급속히 이루어주신 것이

다. 처음에 하나님의 뜻이라고 받아들이기가 힘이 들었다. 그것은 지금까

지 기도해왔던 방글라데시와 파키스탄에 대한 열망과 기도 또한 꼭 그곳

에 가야한다고 생각해 왔던 시간들을 당장에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 의지와 기도대로 선교지에 갔었더라면 아마도 우쭐함도 있었겠

고, 선교의 주체에 대한 혼돈과 시행착오가 많았으리라... 그러므로 선교

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주님‘이시라는 것을 철저히 깨닫는 좋은 기회

가 되었다. 즉 어느 나라, 어느 때, 파송교회, 사역까지라도 주님이 정하

시는 선교의 주체가 되신다는 것이다. 새문안교회에서 인터뷰 중 첫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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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선교사로 가면 몇 년이나 사역을 할 것 입니까?“ ”최소한 10년은 사

역할 것 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저희를 22년간 사용

하시고 계십니다. 선교의 주체이신 주님께서 저희를 붙드시기에 아직 이

루지 못한 태국 복음화와 주변국 인도차이나를 위하여 무익한 종인 저희

가정을 사용하고 계십니다. 할레루야 (1987년 6월 30일 태국에 입국)

기도제목:

-저희가 태국영혼을 사랑하며 영적인 지도자들을 바로 세울 수 있도록

-태국인들이 자신들이 죄인일 때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와 복음을 깨닫고

받아들이도록

2. 부름받은 사명감을 가진 주의 종들 세우는 신학교 사역

멕길버리 신학교! 미국장로교회가 파송한 다니엘 멕길버리 선교사에 의하

여 세워진 120년의 역사를 가진 신학교이다. 이 학교를 통해 주의 종들을

나와 태국 교단 지도부와 교회를 섬기고 있다. 1974년에 첫 기독교 사립

대학인 파얍대학교가 생기면서 대학교 편재로 들어갔다. 저희는 9개월 간

방콕에서 태국어를 배우고 1988년 6월 신학기에 전도학을 가르침으로 선

교사역을 시작하였다. 비록 언어시험을 통과하고 태국어 성경을 공부했다

할지라도 많은 신학용어를 태국어로 가르쳐야하는 부담감이 많이 있었다.

철학 용어 사전, 신학용어 책자 등을 보고 또한 다른 서양 선배 선교사들

에게, 태국 교수들에게 물어가면서 혹은 스스로 단어를 새롭게 만들어 가

면서 태국어 신학 용어들을 익히고 가르칠 내용을 문장으로 잘 표현하려

고 하였다. 학생들에게 한참 설명하고 나서 이해하느냐고 물었더니 대답

이 시원치 않다. 그래서 영어로 설명하고 한 학생이 간단히 설명한 적도

있다. 문제는 표현이 부족한데다가 한국적인 사고에서 나온 설명을 그대

로 태국어로 표현하기에 문화적으로 다른 상황에서 저들이 이해를 잘못하

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否認하였다’란 말을 하면

서 ‘否認’을 태국어로 ‘빠띠셋’ 인데 비슷한 단어인 ‘빠띠틴(달력)’이라

고 말하니 학생들이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한 적도 있었다. 이런 저

의 강의를 참고 인내하면서 들어준 초창기 제자들이 참으로 기특하였다.

2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초창기학생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만나면 과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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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들을 하면서 웃곤 한다. 첫 해의 제자 중 한 명인 두앙수다 전도사

는 우리 교단 전장학금을 2년 간 받았으며 지금 신약교수가 되어 같이 강

단에서 가르치고 있다. 신학교는 총회가 목회자들 양성하는 선지동산 이

다. 그러나 대부분이 졸업하면 목회자 보다는 학교, 병원, 기독교 기관으

로 빠지고 1/4 정도가 목회자로 나간다. 저는 이것이 교회 내에서 문화적

인 충격이었다. 또한 여학생이 반 정도 인데 졸업후 목회자가 되는 경우

는 참 드물다. 제자인 쑤콘락 전도사에게 목회자로 가도록 권하였고, 출

신교회에서 목회자로 섬기게 되었다. “최소한 3년간은 울어야 할 것이며

그 눈물로 씨가 움터 자라게 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실제로 장로 한분

이 5년을 아주 힘들게 했고 그 일로 울며 기도해 왔다. 하루는 그 장로가

찾아와 말하길 5년의 시험을 잘 견뎠으니 이제부터는 전적으로 후원하겠

다고 고백하는 일이 있은 후, 그 교회는 잘 성장하여 자립하고 80-100여

명의 교회가 되었다. 22년 간 배우고 나간 주의 종들이 총회 임원으로,

노회장으로, 목회자들로, 기관의 주요부서에서 섬기는 것을 보면서 신학

교육이 교회의 지도자들을 세우는 중요한 사역임을 깨닫는다. 졸업생들을

기존의 교회의 목회자로 나가게 할 뿐 아니라 개척교회를 하도록 신학교

안에 ‘개척교회 관심자 기도모임’을 만들어 개척교회를 시작하게하고 생

활비를 지원하고, 상담해 주는 역할도 한다. 신학생들이 공부를 잘하지

않아 매년 평점이 제일 높고 신앙적으로 품행 좋은 학생 한 명에게 우리

교단이름으로 전장학금과 용돈을 (년 $2000) 주고 있다. 한국교회는 교회

건축에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신학교육과 사람을 키우는데는 별로

관심이나 지원을 잘하지 않는다. 현재 신학교 사역에 선교사가 더 필요하

다. 선교사로 지원하는 사람들 가운데 대부분이 선교학을 공부한다. 그러

나 신학교 사역에는 성서신학과 기독교교육을 전공한 사람들도 필요하다.

감사한 것은 염신승 선교사 가정이 4년 전에 신학교 교수로 초청되어 조

직신학을 중심으로 여러 과목을 가르치고 있다. 신학교에 국제학과가 있

어 영어로 신대원을 개설한지 4년이 되었다. 주로 동남아 지역 교회에서

와서 배우고 있다.

한국교회가 태국의 신학교육과 목회자의 질을 높힐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면에서 멕길버리 신학교(파얍대학)과 장신대 간에

협력을 추진 중인데, 태국의 교수 요원을 세우고 수준있는 신학교류를 모

색하고 있다. 또한 사역지인 우돈타니 전도훈련원에 신학부(B. TH/ 멕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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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 신학교의 분교)를 세우는 것을 진행 중이다. 태국 동부지역에는 신

학생을 키우고 훈련하는 문교부에 등록된 신학교가 없고 많은 목회자가

필요하기에 교단과 노회, 신학교에서 이곳에 신학교를 열기를 바라고 있

다. 나아가 라오스를 포함한 주변국의 인재들도 이곳에서 신학 훈련을 할

수 있다. 때문에 이를 위한 교수 요원 확충과 시설에 재정적인 지원이 필

요하다. 신학교육은 교회를 바르게 세우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주는 근

간이 되기에 미래를 좌우하게 된다. 이런 면에서 처음부터 주 사역을 신

학교를 통하여 이루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현재도 목회자와 지도자

들을 세우는 사역을 감당함이 저로서는 주님 앞에 큰 영광이다.

3. 교회 지원 사역

1998년 5월에 치앙마이에서 신학교에서 가르치며 치앙마이를 중심한 노회

에서 교회/교구를 맡아서 감당해야했다. 단지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수

로서 만이 아닌 태국의 전반적인 삶, 실제적으로 교회의 상황, 문화, 문

제, 성도들을 이해함을 통하여 어떻게 목회계획이나 선교 방법을 세워야

하는지를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선교사는 가르치는 자 일 뿐 아니라 실

천하는 본이 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저희 가정을 어느 지역에

서 교회사역하기를 원하시는지를 알기 위하여 여러 교회들을 방문하였다.

대부분의 교회들이 한 번 설교 초청하겠다는 말을 한다. 그런데 쫌통교회

(치앙마이에서 70킬로 떨어진 당시에 노회적 차원에서 소외된 지역)를 방

문하자 나이 많으신 할머니 한분이 “꼭 와서 도와주세요”라고 눈물을 보

이면서 부탁하는 것이었다. 저희는 이 말이 마치 사도행전 16장의 마게도

냐 사람의 “와서 도우라”는 부르심의 손짓으로 받아들이고 그곳 지역을

노회의 허락을 받아 교구목사로 시무하면서 퐁싹전도사를 목회자 겸 동역

자로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사실 그곳은 목회자들로부터 가기를 기피

하던 지역 이었다. 그 곳에는 세 교회가(나중에 다섯 교회) 있는데 문제

가 산재하였다. 즉 헌금을 하지만 교인들이 서로 빌려 쓰고는 갚지 않고,

교회 부지가 장로 이름으로 되어있어 나중에 재산권의 분쟁 가능성이 있

고, 건물이 낡아 제대로 예배드리기 어렵고, 성경공부가 없고, 설교자가

없어 장로님들이 돌아가면서 설교하는데 영성이 없고, 지역 사회의 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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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받거나 손가락질을 당하고, 어린이 학교가 제대로 없고, 가난으로 찌

들려 있는 등의 이런 문제 해결을 위하여 저희 가정 네 식구는 금요일 혹

은 토요일에 전도사들과 함께 가서 어른, 청년성경 공부, 기도회, 주일설

교를 형식에 맞추어 시작하였다. 또한 쫌통군 일대를 돌면서 전도와 교회

개척도 하였다. 2-3년 간 이렇게 사역을 하자 교회들이 변화되었다. 씨춤

교회는 장로들이 스스로 후배 자녀들에게 주일에 일 나가지 말라고 가르

치고, 외국 선교부 땅을 자신들의 이름으로 양도하자 자립을 위하여 받은

땅의 십일조와 농산물의 십일조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그 후에 그 교회는

메마른 검불의 땅에 식수펌프하나로 30 가정이 의존해 먹기에도 부족하

였으나 나중에 도움으로 지하수를 개발하여 식수 및 농업수로 사용하여

초록색의 유실실로 가득하게 되었다. 한 교회는 지금까지 빌려간 헌금을

갚도록 하기 위하여 교회 건축시 교인들이 와서 일하고 일당 중 반은 빚

을 갚는 것으로 하여 모두 빚을 청산하였다. 교회 땅 재산권을 총회 유지

재단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교회들이 생명력을 가지고 성장

하기 시작하였으며 주님께서 영육간에 축복하셨다. 쫌통교회는 한 장로님

의 10년 간의 헌신으로 많은 전도와 복음 전파를 하게 되고 郡에서 교회

를 ‘인생 상담소’로 인정하였다. 태국에서 제일 높은 산인 인타논산 정

상을 지나 전도하러 갈 때 제 차에 일곱 명이 타고, TV와 영사기, 짐을

가득 싫은 상태에서 꼬불꼬불한 99고개를 내려 가다가 부레이크를 밟았는

데 아무런 느낌이 없이 푹 들어가면서 차는 서지 않는 것 이었다. ‘부레

이크 파열’이었다 내리막 커브 길이었으면 모두 수 십길 낭떨어지로 굴렀

을 텐데 주님의 은혜로 커브길 오르막이어서 차가 설 수 있었다. 내려보

니 바퀴에서 연기가 나고 기름이 새어나오고, 휠이 너무 뜨거워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마침 지나가는 정규노선 차를 타고 기술자를 불러 수선하고

전도 후에 돌아오게 되었다. 내리막 길을 갈 때 마다 뒤에서는 ‘아짠

조,(조목사님) 부레이크를 밟지 말고 낮은 기아를 쓰세요’라고 명령(?)을

한다. 그 후에 이 전도에 참여하였던 일곱 명은 ‘역전의 용사’라고 자부

심을 갖고 있다. 저는 지금도 가끔 이 길을 다니면서 그 당시를 회상하고

기아를 사용하면서 다닌다. 주님이 저희 무리를 지켜주시지 않으셨다

면... 선교는 주님의 인도와 역사하심이 없이는 할 수 없음을 안다. 이

교회들을 돌면서 네 식구가 교인 집에서 자기도 하고, 교회 바닥에서, 툇

마루에서 자면서 추위에 떨기도하고, ‘뚝께’이라는(도마뱀 보다 10배 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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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충류는 모습도 사납고 징그러운데 이 것이 머리 위 천정에서 ‘뚝께 뚝

께’하는 우는 소리를 들으면 소름이 돋았으나 그 아래서 자야했다. 모기

장을 쳐 주었으나 모기에 수없이 물리고, 이상한 벌레에 물려 22년 지난

지금도 그 까만 상처에서 진물이 나고 가렵다. 저는 이런 것을 경험하면

서 사도 바울이 간증한 ‘그리스도의 흔적’(갈6:17)을 생각하자 우리 몸의

모든 상처들이 그리스도의 흔적으로 오히려 감사하면서 사역하고 있다.

새로운 선교사가 올 때 저는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기 보다는 먼저 기존

교회에서 사역을 경험하고 새로운 사역을 모색하도록 돕고 있다.

기도제목: 모든 선교사들에게 생명의 위험과 각가지 질병의 위험이 있을

지라도 주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으로 복음의 진보가 있도록

4. 람푼 한태 선교관 사역

쫌통지역 교회지원 사역을 하면서 태국의 상황과 도시에 교회개척을 어떤

형태로 할 것인가로 고민 하던 중에 동역자인 퐁싹목사와 대화를 하면서

절에서는 주말이면 노인들이나 거처가 없는 사람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면

서 불공을 드리게 한다는 것이다. 교회에서도 노인들이 토요일에 와서 자

고 주일에 예배드리고 돌아가는 사역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였다. 그러면

절, 태국인, 태국사회가 무슨 연관이 있기에 상호상조하는 것인가?

*태국인에게 절이란 어떤 곳인가? 태국어의 ‘절’의 의미는 발리어에서

유래하였는데 ‘아람’ 즉 ‘살고 싶은 숲(자연)’이란 뜻이다. 다른 의미로

는 ‘진리(道)가 있는 곳’을 의미한다. 태국의 불교는 순수 불교와 힌두

교, 정령숭배 등과 복합되어있다. 따라서 집집마다 귀신단지를 두고 地神

에게 매일 절을 한다. 현대적인 면에서 절의 의미가 바뀌고 있다 할지라

고 그들이 생각하는 절은 승려가 있는 곳, 거주지 지역의 승려가 되는 사

람들이 모인 곳, 질서가 있고 깨끗한 곳, 주민들이 가서 쉬는 곳, 학교와

병원 같은 곳, 분쟁이 있을 때 찾아가는 재판소, 예술을 장려하고 지금은

박물관의 역할도 하는 곳, 불교의 전당으로서의 종교적인 역할과 주민들

의 절기 축제의 중심지 또한 동네의 잔치가 있으면 절에서 필요한 기구들

을 빌려 주는 곳이다. 그러므로 절은 태국인의 삶의 자리이며 정신적 영

적 지주이다.

태국인이 태국교회를 볼 때 현재의 태국교회의 모습(주일예배중심)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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닌 절의 개념을 가진 눈으로 교회를 바라본다는 것이다. 즉 개념적인 교

회를 보는 것이 아닌 무슨 일을 하는 곳인가하는 현실성에 더 관심이 있

다. 이런 면에서 교회가 단지 주일예배 중심의 장이 된다면 태국인들에게

무시와 무관심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여기서 저는 ‘태국문화에 맞는 절의

역할을 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다. 마치 구약의 성전의

역할을 하는 교회라기 보다는 회당의 역할을 하면서 태국인들의 삶과 함

께하는 교회의 모습이다.

첫 텀을 마치고 저는 언제 어느 도시에 이런 사역을 시작할 것인가? 치앙

마이시에는 기독교 문화 분위기가 어느 정도 이루어져있다. 즉 신학교,

병원, 기독교 학교, 큰 교회들이 있기 때문에 이곳을 피하고 복음이 필요

하고 기독교의 혜택이 없는 도시로 람푼(치앙마이에서 30킬로 남쪽으로

쌍둥이 도시로 발전)을 생각하게 되었다. 116년 전 복음전파와 의료 진료

를 통한 복음이 초창기 미국 선교사들에 의하여 전파되었던 2000평 부지

가 있다. 제2차 대전당시에 교회가 핍박을 받아 교인들은 흩어지고 교회

는 사라지게 되었고 그 후 이곳은 외인들이 들어와 우상단지들을 세우고

식당겸 술집 가라오케가 있는 곳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하루는 그 곳을

지나가는 중에 함께 동행한 참난목사를 통해, ‘선교사들이 선교하던 곳인

데 지금은 이렇게 버려져 있습니다.“라는 내용의 역사에 대해 설명을 듣

는 순간 부끄러움과 하나님에 대한 죄송함과 안타까움과 마음 깊숙이에서

눈물이 나는 것을 경험했다.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이 빛나던 곳이 이렇게

황무하게 되다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내어주어 이렇게 버려져

있다니 이곳을 지나는 자들이 바라보면서 고개를 흔들고 조롱했을 생각을

하면서 ’수년내에 회복하리라‘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회복을 원하셨

던 주님이 그 마음을 부족한 종에게 주셨으리리 확신한다. 일련의 짧지않

은 과정을 거쳐서 건축하려하자 그 땅에 이미 오랫동안 거주하던 주민

(13가정)들이 단결하여 나가지 않으려 하며 어떻게든 땅을 교회부터 빼앗

아 보려던 자들이 법원에 문의하여보니 100년 전의 판결에 ‘이 땅은 복음

전파와 진료를 위하여’라는 헌납자의 유언을 존중한다는 법원 판결이 있

어 법적으로도 이길 수 없음을 알았다고 한 공무원이 나중에 알려 주었

다. 그러자 그 땅에서 나가지 말고 돈이라도 받아보자는 생각을 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주동자인 경찰 간부가 갑자기 죽었고, 끝까지 나가지 않

으려고 버티던 식당주인과 연관된 국회의원이 선거에서 낙선하는 일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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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있었다. 그렇게 시간을 끌면서 애태우던 일들이 다 마무리가 되어서

그 곳에 한태선교관이 새문안교회의 지원으로 아름답게 태어났다. 또한

성령님께서 다시 이 땅을 세우게 하신 뜻을 네 가지로 생각하게 되었다.

즉-이 땅은 ’하나님의 땅‘으로 누구도 가져갈 수 없다 -’회복의 땅‘으로

과거 선배들이 이룬 사역을 회복 함 -’구원의 땅‘ (헌당식 날 무지개를

십자가 위에 보여주심) -’축복의 땅‘으로 이 땅을 밟는 자에게 주님이 복

을 주심 이다. 이곳에서는 네 가지의 사역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교회개

척사역, 교회 지도자 양성사역, 사회봉사사역, 해외선교사역 등이다. 속

박시설을 갖추어 다양한 수련회와 봉사 사역이 이루어지고 있다. 교회가

주민들을 찾아가고 주민들이 찾아오는 곳으로 항상 개방되어 있다. 1998

년에 5월15일에 헌당하면서 800여명이 모인 자리에서 ’오늘 이 시간 하늘

나라에서는 과거 미국의 선교사들과 고 김동익목사님이 (건축 중에 천국

으로 가심) 이 예배를 함께 보시면서 할렐루야 찬양을 부르시고 계실 것

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이 센터가 들어서기 까지 많은 눈물과 아픔과 정

말 보따리 싸고 한국을 가고 싶은 심정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

께서는 이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게 하시면서 오히려 그것이 은혜를 체험

하는 좋은 시간들이었음을 깨닫게 하시며, 이곳의 주인도 선교사가 아닌

바로 주님이심을 철처하게 깨닫는 기회가 되었다. 이제는 이곳을 떠난지

도 5년이 된다. 열정있는 좋은 후배 선교사(김장원,박철범선교사)들이 잘

감당하고 있고 창립된지 올 해로 11년이 되었는데 많은 기적의 역사들이

일어나고 있다. 무당이 예수 믿고 귀신들이 쫒겨나가고, 병자들이 고침

을 받고,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 성도가 200여명에 이른다. 현 태국 목

회자가 열심히 교회를 섬기고 있으니 감사할 일이다.

기도제목: 쎈타의 설립 목적과 땅의 의미대로 계속된 성령님의 역사가 일

어나도록.

5. 태국의 기독교와 미래

태국은 오랫동안 불교가 국교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혹자는 말하기를 불

교가 태국인의 뼛속까지 깊게 들어가 있다고 말한다. 기독교 복음이 태

국에 들어오게 된 원인은 정치적인 요소 때문이다. 19세기 서구 열강들이

동남아 지역으로 진출하면서 영국과 불란서가 인도차이나 지역을 양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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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식민지화하고 있었다. 태국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불란서가 베트남, 라

오스, 캄보디아를 점령하였고, 서쪽의 미얀마, 남부의 말레지아와 싱가폴

은 영국의 손에 들어갔다. 남은 것을 태국으로 양대국이 삼킬 태세도 달

려들자 태국은 미국을 그 중심에 끌어드렸다. 미국에 대하여 선교사를 받

아들이고 복음 전파의 자유를 주면서 양대국의 영향력을 막아줄 것을 기

대한 것이다. 이 정책을 효과가 있었다. 이리하여 개신교가 태국에 들어

온 것을 1828년으로 한국 보다 60년 빨리 복음을 접하였다. 1837년에 방

콕에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교회가 세워졌고 (마이뜨리찟침례교회:중국

인) 복음이 들어온 때를 기점으로 태국인이 세례를 받은 것은 30년이 지

나서였다. 개신교 선교사의 대부분은 미국에서 왔고 북태국에서 복음의

꽃을 피웠다. 당시에 치앙마이 제일교회(다니엘 멕길버리 선교사 개척)의

교인 두 명이 치앙마이 분봉왕에 의하여 순교를 당하였다. 두 사람의 출

신 동네(메부카)에 기념하여 교회가 세워졌다. 그런데 아주 은혜로운 사

실은 그 분봉왕의 후손 중 한 명과 순교자의 후손 중 한 명이 결혼하였고

그 자녀가 현재 신실한 믿음의 가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참으로 오묘하다. 현재 기독교 인구의 2/3가 북쪽에 있다고 하여

도 과언이 아니다. 정부 발표에 의한 종교현황은 변함이 없이 불교 95%,

회교 4%, 기독교 0.5% 이다. 그러나 기독교 세력이 성장하여 합하여 1%가

넘게 보기도 한다. (100만명). 교회는 2000여개이다.

태국개신교 연합회에서는 2010년까지 모든 面 단위에 예배모임을 세우고

모든 동네가 복음의 소식을 듣게하는 것이 목표이다. 제가 속하여 일하는

태국교단에서 저를 개척교회 담당자로 맡겼는데 모든 도청 소재지에 교단

교회를 개척하는 것입니다. (17개 도에 교단교회가 없음) 년 두 곳에 개

척교회를 하려고 기도 중입니다. 그러므로 선교사의 사명은 현지인들을

세워주고 자신들의 전도사역을 통하여 민족 복음화를 이루게 하는 것이

다. 태국 교회는 성장하고 성령님의 인도로 뜨거워지고 있다. 그 원인은

성도들이 잘해서 라기 보다 하나님께서 복음 증거할 수 있는 기회와 도전

을 늘 주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예로 쓰나미의 재앙을 통하여 회교가 강

한 지역인 남부에 복음전파의 좋은 기회를 만드시고, 우리 교단 홍경환선

교사를 중심으로 3년 전부터 사회봉사사역을 시작하게 하셨다. 방콕에는

최승근선교사 가정, 북부에 김장원 선교사가정 등을 중심으로하여 17 선

교사 가정이 전국에서 사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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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생각하고 기도하는 것은 젊은층과 청년/대학생들을 전도 복음화의

제자로 세우기 위한 사역을 3년째하고 있는데 이들을 위한 전문인 선교사

가 필요하다. 다른 한 분야는 특수선교로서 장애인들을 위한 사역이다.

장애인들을 위한 사역이 태국에는 거의 없다. 태국은 복음증거의 문이 환

히 열려있다. 이를 빌미로 한국에서 이단들이 들어와 선동하고 성도들을

갈라내고 있으며, 기적과 이적을 행하면서 영적으로 혼란하게 하는 무리

들도 들어와 연약한 교회를 더욱 분쟁의 갈등 속으로 또한 이단이 무엇인

지 분간하지 못하는 성도들을 유혹하는 경우가 있다. 종합적으로 태국교

회를 바라보면서 한국교회가 협력하고 섬길 수 있는 부분은 복음화를 위

하여 많은 추수할 일군들을 세우는 것이고 주변국 복음화의 기초를 놓아

가는 것이다. 이 사역들들 위한 전문적인 선교사가 더 필요하다.

6. 태국과 주변국에 대한 선교 방향

인도차이나 반도 내에서 태국의 비중은 아주 크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1) 지정학적 의미: 태국의 지형적인 모양은 코끼리의 머리와 긴 코 모

양이다. 사개국과 국경을 하고 있는 인도차이나 반도의 중심에 있다. 전

세계의 비행기 노선이 거의 다 들어와 있으며 태국에서 주변국으로 가기

가 편리하다. 또한 치앙마이에서 중국 곤명까지 가는 노선 주변국으로 가

는 노선도 열려있다. 이러한 지정학적 위치는 태국이 동남아 나라로 들어

가는 문(門)의 역할을 한다. 태국의 국경 도시들을 통하여 물자 교환이

빈번하며 메콩강을 중심으로 중국과 무역도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세계

화의 추세로 도로, 교통, 통신이 하나의 고리로 연결이 된다. 즉 인도차

이나를 꿰뚫는 도로망이 동서남북으로 이어진다. 몇 년 후에는 사다리 같

은 도로망이 열려 중국을 거쳐 실크로드로 연결될 전망이다.

2) 정치적 의미: 2차 대전 이후에 제3세계에서 일어났던 독립운동에

맞물려 미국과 서방의 영향권에 벗어나려고 공산 세력 주변에서 지난 40

년간 민주주의의 대변적인 역할을 했으며 주변국이 공산화될 때 유일하게

반공국가로 남아 공산세력의 남침을 막아주고 서방은 태국을 발판으로 주

변의 공산세력들과 싸워야만 했다. 이로 인하여 태국의 국경은 항상 전쟁

의 위험과 주변국에서 탈출한 소수 부족들과 공산 세력에 등을 돌린 난민

들로 북적 거렸다. 현재는 많은 안정을 찾고 있으나 아직 버마의 국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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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에는 카렌 난민들이 수십만명 난민촌에 정착하고 있다. 또한 UN의 여러

기구가 방콕에 있어 국제적인 나라이다.

3) 경제적 의미: 태국은 아세안의 중심국으로 한국을 쫒아오는 경제적

모델로서 경제력을 과시하고 있다. 안정된 바트화는 주변의 약한 국가의

선망의 대상이기도 하다. 덧붙인다면 어느 나라보다 IT면에서도 앞서 있

다.

4) 기독교적인 면: WCC, CCA가(본부가 홍콩에서 치앙마이에로 이전)

주변국의 창구로 태국교회(CCT)를 이용하고 있다. 주변국의 교회들도 태

국교회를 하나의 모델로 삼고 있다. 라오스를 예로 들어보자. 우리 교단

이름으로 1996년부터 10년 간 CCT와 합하여 라오스교단을 지원하였다. 공

산당 문화부(종교부도 관여)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문화관광 진

흥이라는 명목으로 태국에 초청하여 교회가하는 사역 즉 학교, 병원, 사

회봉사 등을 견학하여 기독교가 국가와 사회를 위하여 무슨 일을 하는가

를 보여주었다. 한 번은 간부 한 사람이 은연중에 나에게 “가는 곳 마다

십자가가 있는데 무슨 뜻이냐?” 고 물어 간단히 복음을 전하였더니 “잘

알겠다”고 대답하였다. 이들이 돌아갈 때는 모두 합장하며서 “하나님이

당신을 축복하길 빕니다”라고 인사를 하는 것이다. 이들이 자국으로 돌아

가면 교회개축, 전도, 봉사하는데 도움을 주거나 묵인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관계로 4년 전에는 라오스 교단이 정부에 청원하여 위앙쨘 시내 교

회 세 곳에서 외국인에게 설교하도록 허락하여 주었는데 CCT 총무, 쏨칫

목사 그리고 저였다. 라오스에서는 선교사가 자신을 선교사라고 밝힐 수

없지만 저는 태국에서 사역하는 선교사이기에 고위 관리에게도 그렇게 소

개하였고 한 교회에서 설교하였습니다. (태국과 라오스는 언어가 같음)

태국교회가 주변국의 창구 역할을 하면서 발전을 돕고 있다. 반대로 태국

교회가 주변국 교회들로부터 배우는 면도 있다. 예로 신학생들과 함께 베

트남과 라오스 선교훈련을 다녀 오면서 태국의 목회자들은 자신들이 얼마

나 평화롭고 자유로운 나라에서 목회하는가를 알게 되고 핍박 속에서도

성장하고 열심을 가진 두 나라의 교회를 보면서 각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치아마이에서 차로 라오스 국경을 가고 배타고 메콩강을 건너 라오스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베트남의 다낭까지 다녀오는 선교훈련은 감동적이고 새

롭게 선교의 장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라오스는 평지이기에 길이 완성되

었고 베트남은 산을 깍아 도로를 만들고 있었다. 전쟁의 소용도리를 벗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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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제는 협력하고 개방하여 문호를 열면서 복음은 길을 따라 넓게 퍼져

나갈 것입니다. 아직도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는 없다. 또한 베트남은

소수부족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을 막아 놓았지만 주님은 방송을 통하여

복음을 듣게 하시고 자체적으로 결신자들이 생기고 교회가 세워지고 있다

는 사실 이다. 라오스 역시 1990년 초반 개방할 땐 만명인 교인이 10년

지나 10만명으로 성장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바울의 1차 선교 여행을 마

친 보고는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하고”와 같이 믿음의

문을 여신 주님의 역사를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음을 본다. 핍박 속에

교회가 죽은 것이 아니라 생명력을 키웠고 겸손이 인내하며 기다려 결실

을 맺고 있는 것 이다.

이 지역의 선교의 방향은 무엇인가?

(1) 다양한 현지 교회들과의 연합 사역

(2) 전문인 평신도 선교사와 팀을 이루어 사역

(3) 복음 전도를 위한 선교사 필요

(4) 대중매채를 통한 방송 선교

(5) 현지 교회 지도자 양성/선교 동역자로 세움

(6) 새 도로망을 따라 현지 지도자들을 훈련과 교류 이다.

이것은 저의 기도제목이면서 인도차이나를 위한 선교방향이다.

7.새로운 사역지인 우돈타니로 부르신 하나님; 황무지가 장미꽃

같이

태국선교 사역을 17년 감당하면서 새롭게 하나님 앞에서 저 자신을 생각

해 보았다. 주님 보시기에 합당하게 사역하는가? 지금까지의 경험을 가지

고 도전적으로 사역을 감당하는가? 한태선교관이 완성된 후 안정적으로

이루어지는 사역과 신학교에서 정해진 과목을 가르치는 것에 안주하는 것

은 아닌가? (물론 열심히(?) 바쁘게 시간 시간을 내어 산족 교회들을 방

문하는 등의 일들은 계속 하면서도) 개척자의 심정을 가진 선교사인가?

아니면 기득권을 가진 안일함에 빠진 선교사인가? 등을 생각하면서 몇 달

간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저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이루었기

에 그것을 누리려는 것이 아닌 처음 올 때의 심정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변함없이 신뢰와 사랑으로 후원해 주신 새문안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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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문안교회 100주년 기념 선교사라는 자부심! 이런 명예를 떠나 주님만을

의지하는 선교사로 새로 서야함을 알게 되었다. 새문안교회 담임목사님이

신 이수영목사님과 당회원들께서 의아해하시면서도 저의 뜻을 이해해 주

시면서 사임을 허락해 주셨다. 지금까지도 우리 부부의 마음에는 새문안

이 존재하고 그 사랑을 잊을 수가 없고 중보기도의 우선권에 있다. 사임

한 저의 상황을 알게된 태국교단 임원들께서 직접 치앙마이까지 저를 찾

아 오셔서 저의 계획과 미래 사역에 대하여 묻고, 제가 혹시 한국으로 돌

아갈까 생각하셨는지 돌아가지 말고 전도 개척교회 사역을 새로 시작해

달라는 요청을 하는 것이다. 재정적인 후원이 없는 선교사! 배경도 없이

홀로 선 선교사, 그러나 태국교단은 저를 우습게 보지도 않고 찿아와서

격려하며 부족한 사람을 귀하게 생각해 준 것, 그리고 새로운 사역을 맡

기면서 오히려 물질적인 지원까지 해주는 이런 은혜를 받게 하셨다. 지금

도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후원도 없이 홀로 새로 시작하려는

선교사를 무시하지 않고 격려하면서 오히려 힘을 북돋아 준 현지 태국교

단 지도자와 교회를 쉽게 잊지 못하리라. 이렇게 현지 교회로부터 이 많

은 은혜를 받게 하신 하나님께 어찌 감사드리지 않겠는가! 저는 한가지

늘 마음이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이 ‘지체 부자유한 사람들을 위한 개척교

회’가 필요하다고 말하였는데 그 분들은 저를 개척교회 사역을 맡도록 허

락하여 준 것 입니다. 그리고 전도부 안에 개척부를 신설하였다. 우돈타

니 지역 노회에서 2년 전부터 사역 요청을 하여왔는데 후배 선교사가 오

면 그쪽으로 보내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선교사가 오기까지 1-2년

기간이 걸리고 국제학교가 없어 선교사 자녀 교육에도 문제가 있다. 사실

몇몇 선교사가 그곳에서 사역하다가 다른 곳으로 옮겨가 당시에 선교사가

없는 상태였다. 어느 주일에 막 2:1-12을 아내와 나누면서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생각하였다. 주님은 열심히 백성들을 가르치시며 사역하시길 원하

시는데 바리새인들은 감시의 눈초리로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그

런 나는 어떠한가? 주님이 부르시고 새롭게 사역하길 원하시는데 뒷짐지

고 옆으로 곁눈질 하면서 우돈타니지역을 바라보는 나 자신은 아닌가를

생각하였다. 사모에게 우돈타니로 가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묻자 선

뜻 ‘그렇게 합시다. 이곳 치앙마이는 80여명의 한인 선교사가 있고 그곳

에는 아무도 없지 않는가!’ 늘 주님의 사역에 동역해 주었던 아내였지만

이렇게 준비된 마음일 줄이야...마음과 마음이 하나가 되었다! 다음날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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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과 노회에 연락해 그 곳으로 가겠다고 우리의 결심을 알렸다. 다들 이

좋은 선교의 환경(?)을 버리고 그 척박한 곳으로 가냐고 타 교단 선배

선교사님도 ‘조목사 가지 말라’고 ‘이 좋은 사역지를 놔두고 왜 우돈타니

로 가냐’ 그 곳에 있던 선교사가 다 떠난 것은 의미가 있지 않겠는가‘ ’

조선교사와는 어울리지 않는 곳이다‘라는 등의 사랑의 충고를 뒤로 하고

2006년 8월 25일에 이사하였다. 그때 떠오은 찬송은 ”황무지가 장미꽃

같이“ (사 35장)였다. 하나님께서 저희 가정을 통하여 황무지에, 사막에

백합화를 피게 하시고, 생수의 강이 흐르게 하시고, 영적으로 눈을 뜨게

하실 것으로 확신하였다. 부임한 타뚬훈련원은 손을 전혀 못된 흰개미가

먹은 폐허같은 숙소, 귀신이 사는 곳 같고(이곳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정리가 필요한 나무들 수명을 다한 부엌에서 음식이 만들어지는 것이 신

기한 정도의 열악한 곳 이었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는 것이 좋을 지를 한

참 망설이게 하는 곳..정말 소망이 없는 곳으로들 바라보았다. 예배실은

벽없이 오픈된 곳으로 양철 지붕을 통해 쏟아져 내리는 생각하기도 싫은

더위와 갖은 벌레들, 소음, 겨울에는 추위, 흰개미가 먹어 썩고 약해져

쓸어질 것 같은 기둥, 이런 악조건을 이기고 요동없이 말씀을 진지하게

듣는 모습은 어느 지역의 교인들에게서는 절대 쉽게 볼 수 없는 것이었

다. 저는 이곳 교인들의 열정, 단결, 도움이 필요하다는 영적인 갈급함

등을 보았다. 특히 이사 온 6개월 후에 20년 된 과거 서류를 정리하면서

놀라운 한 장의 종이를 발견하였다. 제목은 ’타뚬 푸로젝트‘로 제가 쓴

것이다. 그런데 제 기억에는 이것을 언제 썼는지 도대체 생각이 나질 않

았다. 그러면서 몇몇 노회지도자들과 만나 기억을 되살리면서 알게 된 것

은 1992년(15년 전) 태국교단 총회 때 이곳 13노회 노회장과 몇몇 지도자

들이 저를 찾아와서 타뚬훈련원 사역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

당시에 아직 한 번도 이곳을 방문한 적이 없는 상태에 이야기만 듣고 앞

으로 이런 이런 사역을 하고 싶다 면서 써 놓은 프로젝트 였다. 가보지도

않은 상황에 단순히 기도와 머리로 상상하면서 세운 사역으로 그 당시에

신학교 사역, 훈련사역, 주변국 선교사역, 봉사사역 등을 기록하여 놓은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바로 지금 진행하고 있는 그대로 이다. 그러나

그 후에 상황이 변화되어 노회에서 다시 요청하지 않았고 저 역시 서류를

넣고 마음 한 구석에는 생각하였으나 잊어 버렸다. 15년이 지난 이 서류

를 보면서 심장이 뛰고 머리카락이 서는 기분이었다. 왜냐하면 제가 이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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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와서 사역하는 것이 제 자신의 바른 결정이나 스스로 헌신한 것이 아

닌 주님의 계획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경험을 쌓게 하시고 15년 후에 이곳으로 다시 재배치해서 보내신 것이 바

로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저는 잊었고 할 수 없다고 생각

했다 그러나 계획을 세우시고 행하시는 주님은 잊지 아니하시고 알맞는

때에 이루신 것이다. 그 때의 계획안대로 저는 이곳에서 사역하고 있다.

하나님의 섭리는 참으로 묘하고 신기할 뿐이다. 우리가 아무리 계획할 찌

라도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내가하는 것이 아닌 성령

님의 인도 속에 이루어짐을 믿고 또한 후원자들을 허락하시어 황무지가

장미 꽃 같이 되게 하는 역사로 쎈타의 환경이 바뀐 것이다. 방문하는 사

람들은 말한다.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완전히 새로움을 덧입은 곳이라’

고 말입니다. 어둡고, 지저분하고, 음침하고 메마른 곳이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로 깨끗하고 밝고, 살고 싶은 곳으로 특히 말씀과 훈련으로

교회의 지도자들을 세우는 곳으로 새롭게 태어났기 때문이다. 목적에 따

라 미래를 준비하고 지도자를 세우는 쎈타로 굳건히 서도록 기도 부탁 드

립니다.

8. 전도훈련원 사역의 현재와 미래

훈련원 설립의 목적: 태국교단의 우선적인 정책은 전도와 교회를 개척함

에 있어 훈련원의 주된 목적은 전도자 양성과 교회를 개척하여 태국복음

화를 이루어가는 것이다.

1) 전도제자 양성 사역:정규적인 저도 훈련을 통하여 복음 증거와 교

회 없는 지역에 교회 개척.

2) 교회 지원 사역: 평신도 지도자 양육, 목회자 훈련, 청년, 남-여

전도회, 교사 훈련을 실시

3) 사회봉사사역: 지역사회 속으로 들어가 봉사와 복음 증거 하는 사

역 예로 음악, 언어, 스포츠,문화, IT 등등

4) 선교사역: 주변국 복음 사역을 위하여 교역자 훈련, 평신도훈련,

선교방문과 선교협력

5) 신학교 사역: 멕길버리 신학교의(치앙마이) 분교로 목회자 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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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들 신학훈련

이곳에서 훈련을 받은 사람들의 간증에 의하면

‘찬타’ 형제: 자신이 예수님을 믿고 전도훈련을 받은 후에 친척들을 찾

아가 복음을 증거하였으나 반응은 냉소적이었는데. 그 때 할머니에게 전

도하고 함께 기도하였는데 앞을 보지 못하던 할머니가 앞을 보게되는 기

적의 역사가 나타나자 친척들이 14명이 믿게 되고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

다. 이런 역사가 일어난 것은 성령님의 역사이기에 주님을 찬양합니다.

같은 농경지에서 놀랍게도 배 이상의 소출을 얻게 되었다면서 이 모든 것

이 주님의 축복이며 축복받은 자로 살게 됨을 증거했습니다.

전도훈련 받는 사람들 중 27명은 치앙라이에서 14시간, 12명은 남태국에

서 30시간을 봉고차를 타고 옵니다. 지금까지 전문적인 전도훈련을 받지

않았기에 교단적 차원에서 우돈타니에 가서 훈련받도록 지원해주고 평신

도 훈련의 질적 성장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우리교단 국내선교부의 교재

를 사용하며 교재 집필자가 강사로 와서 가르칩니다. 년 4회 참석자에게

양 교단 총회장님의 이름으로 수료증까지 줍니다. 감사한 것은 지난 2월

27일에 제1기 43명이 수료하였습니다. 이들은 나가 복음사역자로 서게 될

것입니다.

훈련원 내의 전도처에서 2008년에 5명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쑥’이

라는 직원은 나이가 63세인데 그동안 오토바이 면허없이 지내다가 도전하

여 면허를 따왔습니다. 30문제를 컴퓨터로 시험을 치르는데 감독관이 ‘아

저씨 컴퓨터를 다룰 줄 아시나요?’라고 묻자 ‘저는 컴퓨터를 만져보지 못

했지만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면서 하나님께

기도로 간절히 도움을 구하면서 답을 했는데 놀랍게도 최고점이 나왔나봅

니다. 30점 만점에 28점을 받아 모든 주변의 젊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

고, 어떤이는 영어도 잘하는가 하고 물으면서 지식인으로 대접하였다고

합니다. 믿음으로 기도 하는 자에게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

면서, 또한 믿는 자에게 존귀함을 주심을 감사 합니다.

저희는 가끔 폭발적인 성장이나 열매를 보길 원합니다. 그러나 160여년

전의 선배 선교사들이 수십년 걸쳐 한 영혼을 구원받도록 인도한 것에 비

하면 오늘 날의 전도 열매는 어떤 면에서 폭발적이지요. 그러나 한 영혼

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섬기지 않으면 안됩니다. 많은 선배들의 눈물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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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 한국교회의 기도 후원 등이 아울러 이런 열매들을 맺게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돈타니에서 50분 나가면 라오스 국경이 나오고 넘어가면 위앙짠 수도가

나옵니다. 라오스 중국이나 베트과 같은 공산국가이기에 제한이 많이 있

기에, 이런 지역적인 관계로 라오스복음주의교단과 연계하여 태국쪽인 저

희 전도 훈련원에서 라오스교회가 필요로하는 교육과 훈련 선교협력이 강

화되길 기도합니다.

기도제목:

1. 라오스교회에서도 전도훈련원에 와서 신학훈련, 농업훈련, 청소년 훈련

등을 받을 수 있도록

2. 훈련원 안에 2년 내에 문교부가 인정하는 신학교교육을 (B. TH) 실시

할 수 있도록

3. 전도훈련 2기생 50명을 받아 1년 간 잘 훈련하여 전도자로 세우도록

3. 여러 훈련들이 진행 중인데 훈련이 훈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영성

있는 바른 지도자를 세우고 개교회에서 질적-양적 성장이 이루어지도

9. 산족사역

태국에는 약 100만명 남짓 산부족이 긴 미얀마와의 국경을 이루는 산속

에 살고 있습니다. 카렌족, 라후족, 리수족, 몽족, 아카족 등. 각 부족

들 안에 여러 계파까지 합치면 20 여 부족이나 됩니다. 왜 이들이 이렇

게 태국 땅에 살고 있는가? 티베트 남부로 미얀마, 중국의 서남부의 연

안지역, 라오스, 베트남에 흩어진 부족사회들이 자신들의 문화, 언어 전

통을 가지고 자치주의 형태로 살았는데 18-19세기의 서구 열강 즉 영국

불란서가 이 지역에 들어와서 산과 강을 중심으로 나라를 임의로 나누고

보니 한 종족이 몇 나라로 흩어져 사는 형태가 되었다. 부족들 중에는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식민 통치를 위하여 강대국이 그들

에게 유익을 줌으로 식민시대가 종식하면서 정권을 잡은 주부족이 다른

기독교 부족들을 핍박하게 되었다. 공산정권이 들어오면서 이런 현상은

더욱 심하였다. 그리하여 자유를 찾아 경제적인 혜택을 받고자 태국쪽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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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많이 이주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화전식의 농사와 유실수를 심어 생계

를 유지하고, 태국 왕족이 이들에 대한 유화정책으로 자유롭게 살고 있

다. 이들은 정령숭배가 대부분이기에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태국인들 보다

효과가 더 많다. 이들은 고난과 삶과 죽음의 벼랑에 내몰렸던 사람들이기

에 복음을 더 빨리 수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태국내에서 이들의 인구 비

율은 1-1.5% 정도이다. (태국인구 6500만명) 복음화률은 20-30%에 이른

다. (한가지 집고 넘어갈 것은 태국선교=산족선교라는 것은 잘못된 인식

으로 산족선교는 한 부분이다) 태국정부의 이들에 대한 정책은 가급적이

면 태국에 동화와 산에서 평지로 내려 가도록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은 태국 사회 속에 살기가 상당히 어렵다. 기후, 언어, 삶의 형태, 문화

가 전적으로 다르다. 현재의 어린학생들과 젊은이들은 태국식 교육을 초

등학교에서부터 받고 있어 점점 자신의 부족 언어(문자)와 문화를 잃어간

다.

1988년에 카렌족 교회를 농롬(인타논산 중턱)동네에 개척할 때 대나무로

내과전도사 집에서 전도하면서 좁은 장소에 30여명의 어른과 어린이들이

빽빽히 모여 말씀을 들었다. 저희 네 식구가 가면 자신들의 식생활 방식

대로 큰 쟁반에 밥을 헤쳐놓고 고추장같은 반찬 한가지를 놓고 먹는다.

김이나 다른 반찬을 가지고 가서 나누어 먹기도 하면서 아이들에게 너무

많이 먹지 못하게한다. 그러면 저들이 먹을 반찬이 없기 때문이다. 혹은

미리 음식을 먹여 배를 어느정도 채워서 올라가기도 하였다. 성탄절 즈음

에는 영사기를 돌리고, 비디오를 가져가 ‘예수’ 영화를 보여주기도 하였

다. 겨울 산속의 날씨는 스산하여 추위를 느낀다. 밑에서 올라오는 냉기

는 허리를 시리게하여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밤에 식구 중 한 사

람이 화장실을 가면 모두 일어나 함께 집 뒤에 있는 화장실을 가야갔다.

그 당시 어린 아이들이 이제는 결혼하여 아이 엄마/아빠가 되었고 지금도

방문하면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성원-아라, 잘 있는지 보고 싶다’

고 하면서 눈물을 닦는 사람들도 있다. 1988년에 깊은 산속 동네에 단기

전도 팀 6명이 들어가서 한 주간 전도한 적이 있다. 동네에 화장실이 없

는 너무 삶이 어려운 지역이었다. 아이들의 머리카락에서 이와 서캐를 잡

고 감겨주고 함께 생활하면서 지냈다. 그 후 함께 일하는 전도사가 이곳

을 방문 전도하였으나 저희는 16년 간 방문할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하

루는 작정하고 방문하고 너무도 놀랐다. 교회가 200-300명 들어 갈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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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도록 지어졌고 동네의 80%가 교인이었다. 당시에는 두 가정이었는

데... 아무도 저희나 단기 팀을 기억하지 못하나 과거 머리를 감아 주던

일을 이야기 하자 생각이 난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주님의 복음 역사는

참으로 묘하다. 복음 증거를 누가 시작하였든 추수할 일꾼을 통하여 거두

시는 주님! 추수할 일군을 더 보내어 주소서! 어느 라후족 지역에서는

약 2년 간 무당이 관심을 가지고 모임에 참석하였는데 예수님을 믿고 세

례를 받겠다고 결심하고 자신이 거느리던 세 가정이 함께 믿게 되어 14

명이 한꺼번에 세례를 받은 적도 있다. 지금까지 한국의 교회들이 많은

개척교회와 교회 건축 지원을 하였다. 오늘 날 이들에게 필요한 사역은

자녀들을 위한 기숙사 사역이다. 믿는 가정들은 자녀 교육을 위하여 교회

가 기숙사 운영해 주길 바란다. 많은 선교사들이 이들을 위한 기숙사 사

역을 하곤 있지만 너무 부족하다. 저 역시 산 속 두 곳에 카렌 어린이

38명과 라후 어린이 20명을 위한 기숙사 사역을 시작하여 현지인 전도사

들이 감당하고 있다. 중등교육을 받으려면 읍 단위 도시로 내려가야 한

다. 한국교회가 교회건축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

러나 미래를 향한 산부족 교회의 바람인 기숙사 사역을 위한 지원이 시급

하다. 현지 노회와 교회들이 기숙사 사역을 시작하였으나 시설이 미비하

고 더 많은 기숙사를 필요로 하고 있다. 선교는 1세대로 끝나는 것이 아

닌 미래를 향한 비죤을 가지고 씨를 뿌려야 한다. 저들이 태국 사회에

정착할 수 있는 기반은 마련해 줄 수 있는 보다 많은 교육 선교 지원이

절실하다.

10. 태국에서 문화적으로 조심해야 할 것과 정치 상황

선교사로 간다는 것은 자신의 문화에서 다른 사람의 문화 속으로 들어가

는 것이다. 구약의 많은 믿음의 조상들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다. 아브라

함은 자신이 살던 하란의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나 가나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문화, 인종, 언어, 환경이 전혀 다른 곳이고 아는 사람이 없는 마

치 버려진 존재와도 같은 모습이다. 일군이 있다곤하나 사라, 롯그리고

자신! 세 식구의 존재가 얼마나 미약하고 초라하였을까! 창18:19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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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이루려 함이니라.” 그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은 자로서 선교사

인 셈이다. 예수님께서도 하늘나라의 문화와 삶을 버리시고 인간이 되신

성육신적인 선교를 이루셨다. 태국에 선교사로 온다는 것 역시 다른 문화

권에 들어가야 하기에 어려움이 있고 조심해야할 것들이 있다. 예로 -태

국 왕권에 대한 불미스러운 말을 하는 것 -불상을 훼손하는 것 -가족관계

를 해치는 일을 하는 것 -태국 사회와 명예를 떨어뜨리는 것 등이다. 한

번은 강의 시간에 사단의 정체에 대하여 강의하면서 에스겔서 28:11-19의

두로왕과 비교를 하면서 교만하고,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 등의 내용을 칠

판에 썼다. 두로왕을 태국어로 ‘왕, 타이라스 ’라고 썼는데 마치 ‘왕, 타

이‘이라고 보였는가 보다. 그날 대학성에서 장학관이 나와 서류를 점검하

면서 제 강의실을 지나가다가 그 내용을 보았나보다. 잠시후에 태국교수

가 내려와 나를 부르더니 ’외국인이 태국 왕에 대하여 말을 하면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기에 저는 그런 것이 아니고 성경

의 두로왕에 대한 것이지 태국왕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설명하자 성경을

들고 올라가서 해명했다. 선교사는 복음을 중시하고 전파하는 것이 본질

적인 사역이다. 물론 사회의 변화와 성경적인 하나님의 의와 공의가 이루

어지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잘못하면 타종교를 비하하거나 경쟁하는 듯

한 모습이나 왕권에 대하여 불미스럽게 말하거나, 우리나라와 비교하여

태국이 못사는 나라 혹은 문화적으로 뒤처진 나라로 표현해서는 안된다.

저는 가끔 태국에 왕권이 있기에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사는 것을 비교

하여 설명하곤 한다. 또한 가족제도와 형제자매 간의 긴밀한 관계를 비교

하여 눅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를 설명하면서 자식이 부모를 버리고

나가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면 모두들 잘못되었다고 한다.

그렇듯 우리도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버리고 이 땅 살면서 좋은

일을 하고 공덕을 쌓은들 소용이 있는가? 그러니 주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고 복음을 제시한다. 이런 조심해야할 문화적인 것이 복음의 장애가 아닌

복음 증거의 좋은 접촉점을 제시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정치적인 면에서 탁신 전 수상이 부정부패, 왕 제도에 대한 도전, 노동

자와 농민층의 지지로 인한 지식층의 반발 등으로 밀려나 망명을 떠났지

만 그에 대한 지지는 별로 떨어지지 않았고, 비록 그가 만든 당은 해체되

었으나 추종자들에 의하여 다른 당을 만들고 선거에서 승리하여 다수당이

되었다. 그러자 짬롱 전 시장과 쏜띠 등이 연합구룹(노란색으로 왕을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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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을 만들어 수상관저 앞에서 여러 개월 동안 집회를 가지고 심지어는

작년 11월 말에 국제공항, 지방 공항 등을 점거함으로 폐쇄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로 인하여 엄청난 손해를 보았다. 우리나라에서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지요! 노란색의 주장은 탁신과 추종

자들이 왕권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만든다는 것이다. 이 기간에 저희도 큰

피해를 보았다. 즉 전도집회(12월1-5일) 강사들이 입국할 수 없어 모임을

연기해야하나 아니면 강행해야하나 하고 고민하였다. 그러나 주님의 제자

들은 비록 정치적인 혼란은 있지만 이미 짐을 쌌고 갈 준비를 다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사도행전을 강의하면서 전도에는 늘 고난과 장애,

핍박이 있지만 이것을 성령님의 능력으로 이기고 감당하는 것임을 재확인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집회를 물리적으로 진압하지 않았고 내버려두는

듯한 모양이 되었다. 이로 인하여 새로운 내각이 들어섰고 아피씻 수상은

영국 옥스포드에서 공부한 엘리트이고 젊은 사람, 청렴한 사람으로 알려

져 있다.

이번에는 탁신 지지 세력이 (독재에 항거하는 민주 구룹, 빨간 색) 노란

색 처럼 수상관저 앞에서 데모하기 시작하여 아세안+3의 정상들이 묵는

파타야 지역 호텔에 납입하는 상황이 벌어졌고 정상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껴 귀국하고, 태국 수상 역시 자리를 피하였다. 그리고 강렬한 집회를

관저 앞에서 하였다. 군인들이 투입되 사격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그러

던 중 데모대 내부적인 강온의 갈등과 불순분자들이 참여함으로 스스로

해산하여 한숨을 돌렸다. 올해 5월 5일이면 왕(80세) 즉위 60 주년이 된

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 왕권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앞날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번을 계기로 태국 교회가 나라를 위한 기도를 더 열심

히 하길 바란다. 또한 태국인이 복음 이외에는 소망과 행복이 없음을 알

고 마음의 문이 열리길 기도한다.

끝맺으면서...(혹은 시작하면서)..

교회는 우리를 선교사를 보내면서 5년을 견딜까 했답니다. 선교지에 식구

4명이 꿈을 안고 도착해 만난 은혜를 강조하는 교단에서 한인교회 사역을

위해 파송받은 선교사를 우연히 만났는데 나중에 그들이 하는 소리가 들

리데요.‘성령을 받지도 못한 선교사가 왔다’고( 사실 선교지 출발하기 전

에 사실 우리 부부 그 교단에서 하는 기도원에 가서 둘이 합해 예수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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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하신 것보다는 조금 못 미치는 금식기도를 하고 떠났었는데, 그럼에도

그렇게 보였었나 봅니다...존경하는 동기목사님 한 분이 자주 저를 소개

할 때 하십니다. ‘선교지는 발판이고 미국에 가서 공부하고 살 줄 알았다

고...’그런데 이렇게 선교지에서 오fot동안 잘 선교하고 있다고....선교

지에 도착해서 새문안교회 100주년을 기념해서 선배선교사들을 초청해서

식사를 하는 자리였지요. 한 선교사님이 안식년으로 태국을 곧 떠난다고

하시면서 우리를 빤히 보시면서 ‘조선교사님을 보니 심성도 그렇고 어찌

이 척박한 태국에서 견디실지 모르겠다’ 면서 우리를 염려했지요. 그렇

습니다. 저를 두고 한 추측들이 맞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하

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붙들지 않으셨다면...

만약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않으셨다면...

만약에 부족한 종을 뽑으시고 흡족해 하시던 새문안교회 장로님들과 목사

님, 사모님, 그리고 사랑하는 권사님들 집사님들이 아낌없이 후원해주지

않았다면...

정말 눈이라도 뽑아주실 것같이...

마치 기르는 나무에 아낌없이 양분을 부어주듯 이름없이 빛도없이 기도와

물질과 사랑을 부어주셨습니다. 선교사가 부끄러워하며 힘들게 찾아갔을

때 눈치 채시면서 후원을 약속해 주셨던 님들.. 이 태국 땅을 제 집 드나

들 듯이 관심과 사랑을 부어주신 님들. 강사비는 커녕 비행기표도 직접

준비해 오셔서 말씀으로 섬겨주신 그 많은 님들, 젋은시절 주님을 선교지

에서 느껴보려고 젊음의 귀한 때를 드린 그 많은 님들 한국이 경제의 어

려움으로 신음하고 교회가 선교를 접으려 할 때가 바로 선교할 때라면서

불 같이 선교에 동참하는 님들이 있었습니다. 님들이 존재하는 한 선교는

진행형입니다. 나귀새끼를 묵어 놓은 채 주님의 사역에 쓰임 받기를 기다

리면서 드리고 난 후에 오직 기록되기를 오직 ‘나귀주인’이라고 만족해

하는 님들의 준비된 마음들이 있었기에 오늘도 곳곳에서 주님의 이름 앞

에 무릎 꿇는 역사가 이어갑니다.

가족적으로는 이 태국의 무더운 날씨에 오랜 동안 에어콘이 없이 지내며,

기숙사 내에서 학생들과 함께 지나면서도 오히려 즐기며 기뻐하며 생활해

주었던 우리 아이들, 주말이면 친구들과 놀고 싶지만 부모를 따라 시골

로, 산으로 부모가 다니는 모든 곳에 아무 불평 없이 동행해 주었던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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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 고등학생 시절에는 설교를 영어로 동시 통역하는 선교 협력자의 삶을

가졌던 우리의 아이들이 있었기에 이렇게 주님이 맡기신 일들을 감당할

수 있지 않았나 하며 좋은 자녀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어떤 때

는 ‘나도 한국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자다가 깨어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만 ...

신학교 기숙사 안에서, 센타 안에서 늘 현지인들과 함께하는 공개된 삶을

살면서 늘 눈물로 기도하는 동역자요, 벗이요, 든든한 후원자로, 지금도

건축하는 공사장에서 뙤약볕 아래 감독자(?) 아닌 감독일을 정말 열심을

다해 감당하고 있는 이명화선교사...

지난 22년 간 떨어져 살면서도 돌아와라, 외롭다, 보고 싶다는 등의 감정

을 감추시고 단 한 번도 내색 없이 기도와 눈물로 지원하신 부모님들...

이 모든 분들이 있었기에 오늘 저희가 있습니다. 선교는 선교사 만이 하

는 것이 아니라 님들 모두가 함께 현장에서 부딪히면 땀흘리며 일구어내

는 것 임을 믿습니다. 계속해서 지원과 후원을 기대합니다. 지면을 통해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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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보고 05-01

치앙마이 선교소식조준형/이명화/조성원/ 조아라 선교사

Rev. Jun Hyung Cho/ Mrs. Myung Wha Cho Payap University,

Chiangmai, 50000, Thailand

661-764-7337, 669-997-5660, fax 6653-245812

[email protected]. www.pckthailand.net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문안을 드립니다. 봄의 향긋

한 꽃내음이 다가서고 있지요? 그러나 이곳은 소위 겨울(?)을 지나자마자

여름이 다가와 뜨거운 햇볕, 40도가 넘는 팡아 사역지-쓰나미로 인하여

고통하는 영혼들을 돕고 복음 사역-에서 돌아와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올해 받은 주님의 말씀은 야베스의 기도 (대상 4:9-10)입니다. “야베

스는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 그 어미가 이름하여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

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주님께서 여러 기도의 선교 후원

교회와 단체들을 부쳐주시고 태국 전국을 돌며 개척교회 사역을 감당케하

심을 인하여 감사하면서 야베스의 기도를 이루시는 하나님을 찬양 합니

다. 다함께 그 역사에 초창합니다.

1. 신학교 사역

“신나는 여름 방학!” 학교 기

숙사는 조용합니다. 학생들은 방

학 동안 실습을 두 달 동안 나갔

습니다. 또한 2005학기 신입생

면접이 시작되었습니다. 고난 주

간인 목요일과 금요일에도 신대

원과 목회연수과 학생들을 면접

해야 했습니다. 저는 팡아지역에

내려 갔다가 올라와 면접과 교수회의를 마치고 다시 팡아지역으로 내려

갔지요.

(바울서신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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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학기에는 바울서신(신대원 1년 4명, 목연 11명으로 캄보디아

학생 3명 포함), Mission Trip(신대원 6명)과 신대원 논문지도 3명을 감

당하고 있습니다. 논문은 4월 말까지 마쳐야 하기에 매 주에 논문들을 들

고와 수정에 수정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Mission Trip을 차로 치앙마이

에서 라오스 국경을 넘어 베트남 다낭 지역을 다녀오면서 동남아에 이루

시는 성령의 역사가 얼마나 위대하고 힘이 있는지요? 핍박과 고난 속에서

믿음을 지키고 복음을 전하는 교인들의 모습들! 기적과 이적이 나타나며

많은 열매들이 맺히는 모습들!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역사들이 현

지 교회들을 통하여 이루고 계신 주님을 찬양 합니다. (pckthailand.net

참고) 모든 태국 목회자들이 자신들은 너무도 편안하고, 안일한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고 목회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회개하였습니다. 저들을

통하여 더욱 강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길 기도 합니다.

기도 모임인 ‘개척교회써클’은 매 주 화요일에 10명 정도 모여 말씀

을 나누고 기도하였습니다. 첫째는 각 노회가 지역을 조사하여 점차적으

로 개척교회를 세울 계획을 세우도록, 둘째 추수할 일군을 보내어 주소

서! 교회를 세우는 것 보다 일군을 키우고 세우는 것이 중요 합니다. 특

히 개척의 비죤을 가지고 함께 일할 수 있는 일군을 보내어 주소서, 셋째

는 기도 모임의 신학생 각자가 자신의 달란트, 재능을 살리되 주님이 원

하시는 개척사역의 방향을 잡을 수 있도록.

작년에 선교 후원이 적어 신학생에게 장학금을 주지 못했는데 올 해

는 2명에게 장학금을 지원할 예정입니다. (년 한 명에게 $1000-1200)

2. 개척교회 사역: 태국을 향하신 새로운 부름

개척교회 사역을 위한 첫 단계로 각 노회를 돌면서 전도와 개척교회

사역에 힘을 내도록 원치과 방법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치앙마이를 필두

로 북태, 나콘씨타마랏(남태

국), 우돈타니(동북태국) 등

을 돌았고, 몇 노회들이 저

를 감사절 예배 설교자로 초

청하고 있어 개척사역에 대

하여 여러 가지 모양으로 강

조하고 있습니다. 이 사역을

위하여 몇몇 노회들이 합하

여 전도 훈련과 개척교회 세

미나를 개최하려는 움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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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쓰나미로 인하여 복음의 문이 열린 팡아지역에 개척교회 두 곳을 시작

할 예정입니다. 이를 위한 적극적인 후원이 필요 합니다. (pckthai land

.ne t참조)

(죽음의 현장에 땅을 사고 교회 건물을 짓는 기공예배 후: 미국의 New

Life Church 팀이 건축 시작)

3. 에이즈 환자 자녀들 지원 사역

쿠앙빠우교회 장학금 지원 (목회자: 뿌리차전도사): 에이즈 자녀들까

지 포함하여 30명의 학생들에게 학비를 지원하며 현지 교회가 이를 위하

여 기도하고 열심히 전도하고 있습니다.

단기 선교 팀들이 치앙마이를 방문 하였을 때 에이즈협회를 들려 감

염 방법과 실상을 교육 받고 그들을 방문하여 저들의 삶을 나누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가난하게 사는 가정들이 HIV 보균자로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으며 자녀들을 교육 시킬 능력이 없는 가정을 올 해부터 얼마간 지원하

기로 하였습니다. 자신을 보균자라고 공개한 사람들과 만나 복음을 전하

고 함께 눈물의 기도를 드리면서 저들이 복음을 접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런 구룹들이 치앙마이에 수없이 많습니다.

4. 산족교회들 (냇가에서 침례식)

-농따우교회(짠띱전도사): 3

월 13일 주일에 4명의 결신자

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처음있

는 세례식을 1부 예배를 마치

고 2킬로 떨어진 냇가에 가서

현지 원로 목사와 제가 집례하

였습니다. 건기로 물이 많지

않았지만 무릎까지 오는 곳에

서 한 명씩 들어와 침례를 받

고 교인들은 찬양을 하였지요. 무릎을 꿇고 현지 목사님께서 기도하고 뒤

로 눕히면서 물에 들어갔다가 다시 일어나는 침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참예하는 구원의 역사들 저들이 체험하였지요. 주일 예

배에 제가 설교하고 첫 성찬식을 가졌습니다. 다른 두 교회에서도 함께

참석하여 은혜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어린 기숙사 학생들 28명을 지원하면서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이번

겨울은 추워 늦게 나마 3단 메트리스를 사주어 겨울을 낫으며, 영농 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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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통하여 기숙사 자립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짠팁전도사가 열심히 연구

하면서 목회를하고 있습니다. 남자 아이들을 위하여 교회 아랫 층을 방으

로 썻으나 새로 지을 예정인데 일본 재단의 지원으로 짓습니다. 지금은

방학이라 모두 집으로 돌아가 기숙사는 조용합니다.

-후아이풍교회(쑤찻전도사): 치앙마이에

서 멀고 4륜구동 차량으로 가야하기 자주

방문이 어려운데 건기에 방문하는 것이

좋아 2월 두 차례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많은 변화를 없지만 방문할

대마다 열심히 모이고 함께 예배드리면서

저들과 많이 가까워져 가고 있습니다. 지

원하는 신길동교회 용덕순목사와 선교부

담당 집사 부부가 방문하였을 때 경사가 급하고 앞은 절벽인 곳을 내려가

면서 한 번에 90도 꺽어지지 않아 뒤로 후진하였다가 내려갈 때는 여집

사들이 ‘이제 제 영혼을 받으소서...’라고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북태국 겨

울에는 마른 산을 태우느라 흰연기가 곳곳 산에서 피어 오르고 밤이면 산

불나는 장면들이 이곳저곳에서 보입니다. 산을 개간하기 위하여, 억새들

을 태우기 위하여 등등으로 자연이 많이 훼손되고 있어 안타갑습니다.

후아이막쌍교회: 그동안 제대로 목회를 하지 못하던 전도사가 그만두

고 갓 졸업한 쑤바전도사가 올 해부터 시무하게 됩니다. 쑤바전도사는 열

심이 있고 아이들을 잘 가르치는 은사가 있습니다. 아직 숙박할 집이 없

어 교회 내에서 머물면서 시무할(후아이막쌍교회)것입니다. 교회 내에 있

던 장판을 걷고 플라스틱의자를 놓고 예배드리고 나중에 타일을 깔도록

신길동교회가 지원 합니다.

시온교회: 산족 교회의 문제는 좋은 목회자를 찾기가 어렵다는 것입니

다. 주님께서 좋은 목회자를 허락해 주시도록 기도 중입니다.

5. 설교 및 특강

쫌통군의 기술학교 초청 설교: 예마본

찬양단이 쫌통에 있는 기술학교에서 찬양한

후에 그 학교 교장이 졸업식 날 프라스틱

의자를 신우회를 위하여 기증한다고 하여

설교를 부탁하였는데 현지 목회자가 저를

추천하여 설교하게 되었습니다. 500여명인

이 학교가 좋은 영적인 어장인데 주님께서 특별한 기회를 주셨습니다. 약

50명 가까이 모였고 교장과 교수 및 유지 몇 명도 참석하였지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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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감사하는 것이 복의 근원임을 설교하

였습니다. 이 사역을 위하여 쫌통교회의

역할이 큰데 아피칫목사가 열심히 헌신

하고 사역을 감당하길 기도 합니다.

전도부 특강 통역: 2월 22일에 전도

자 훈련 시간에 용덗순목사의 특강이 있

어 통역을하게 되었습니다. 30여명의 교

회 지도자들이 2년 코스로 전도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이번 7월 경에 20

여명의 훈련자들이 한국을 방문하고 전도의 열의를 더 배우려고 합니다.

한국을 방문시에 초청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6. 선교단신:

-초원교회 단기 팀 (10명): 1월 17-21일에 태국교회, 산족교회, 에이

즈협회 및 환자들 방문하였음

-장신대 예마본 중찬당 방문(10명): 2월 15-25일에 신학교, 중고등학

교, 산족교회, 에이즈협회 및 환자들을 위하여 또한 방콕의 한인교회와

태국교회에서 찬양함

-신길동교회 선교부: 2월 21-25일 후원하는 산족교회들 방문

-총회 선교부 임원들 방문: 2월 27-3월3일 동남아 방문 중 태국에서

선교사들의 보고와 선교전략을 세움. 짧은 기간 중에도 푸켓을 방문하였

고, 태국교단 총무를 만나 인사를 나눔.

-CCA 총회에 참석한 교단 대표들: 3월 31-4월 5일에 함게 회의 참석

및 사역지 소개

기도제목:

1. 선교사 자신이 영성을 가지고 성령의 충만을 갖도록 또한 성원/아라가

수학 중에 있는데 주님을 사랑하면서 잘 공부할 할 수 있도록

2. 개척교회 사역을 위하여 주의 종들을 키우고 제자 훈련하는 사역을 온

전히 감당하며, 영적 전쟁인 개척역사에 성령의 역사가 크게 나타나도

록...

3. 쓰나미로 인하여 복음의 문이 열린 팡아지역 선교 사역이 은혜 속에

이루어지며, 선교 지원이 원활히 이루어지도록...

2005. 3.

조준형-이명화선교사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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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사 35:1)

태국 동부는 메마른 땅이라고 합니다. 영적으로 지형적으로 어려운 곳입

니다. 그래서 많은 노무자들이 고향을 떠나 타지로 외국으로 나가서 일을

합니다. 이 지역의 대표되는 도시 중 하나인 우돈타니(동북부) 노회가 저

를 필요로 하였고, 태국 총회가 사역지를 옮기도록 허락하였습니다. 물론

치앙마이가 태국선교에 중심지요 꽃을 피운 곳이지요. 그러나 주님은 황

무지를 개척하고 전도로 영적인 생수를 흐르게 하도록 저희 가정을 다시

한 번 부르신 것을 믿습니다. “황무지가 장미꽃 같이” 찬송을 부르면서

메시아 시대를 갈망하는 믿음으로 2006년을 맞이하여 은혜 가운데 치앙마

이와 우돈타니를 오가며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1. 신학교 사역

2학기를 수업을 마치고 성적을 내고 나니 무더운 여름 방학으로 들어갑니

다. 지난 20년 가까이 사역하던 ‘아짠 조가 우돈타니로 간다’는 소문이

퍼지자 ‘어떻게 신학교를 떠날 수 있는가?’라고 안타까워하는 분이 있는

가 하면 ‘일꾼이 없는 우돈에 신학교를 세워 많은 일을 하라’고 격려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가 떠나도 후배 염신승선교사가 있기에 안심은 합니

다. 태국 총회에서 신학교가 대학학제에 얽매이지 않고 실질적으로 신학

생을 훈련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신학과에서 신학부로 자유롭게 신학

생을 교육하도록 한 것입니다. 예로 전도학 교수가(조선교사) 없으면 그

강의를 듣기 위해 우돈타니에 가서 몇 주간 훈련을 받을 수 있고 혹은 제

가 몇 주간 와서 집중 강의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계속적으로 신학생들을 위한 전도 사역은 이어질 것이며 좀 더 전도 실습

을 위한 단계로 나아갈 것입니다.

2. 개척교회 사역

찌우전도사가 방무앙 개척교회를 감당하는데, 유아원사역에 얽매여 목회

에 전념하지 못하여 속히 유아원 교사를 구하도록 홍경환선교사에게 부탁

하였지요. 다양한 사역이 복합되어 주된 사역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함을

아쉽게 생각하면서 불교-회교가 강하여 복음이 미약한 남부지역에 동역할

사역자가 부족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쓰나미로 인한 고통이 1년을 지나

면서 진정되어지고 삶의 터전을 잡기 위한 주민들이 물질적인 것에 집착

하여 갑니다. 이 와중에 찌우전도사가 성령의 인도함 가운데 영혼의 목회

자도 서길 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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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진지하지요?

3. 타뚬 훈련원 사역(우돈타니)

아직 이사하지 않은 상태에서 월 1-2회 치앙마이 우돈타니를 오가면서

사역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1월에는 ‘아짠 조가 우돈타니로 온다’고 하

니 저를 초청하여 성탄-신년 감사예배 설교하도록 하였고, 우돈타니의 중

심교회인 싸막키탐교회가 설교 초청하였지요. 2월에는 120명이 모이는

전도집회에 초청되어 강사로 강의하였습니다. 태국교단 임원들도 참석하

여 타뚬훈련원에 남녀숙소(3층 건물)와 선교관 짓는 것에 대하여 상의하

였습니다. 예산이 없는 가운데 대지 정리를 겸하여 건물을 지어야하는 예

산을 태국교단에도 협력하도록 부탁하였습니다. 1단계로 2억이 좀 넘는

예산이 필요합니다. 이일과 다른 사역을 상의하러 지난 번 한국을 좀 무

거운 마음으로 방문했을 때 신길동교회 용덕순목사님이 선뜩 천만원을 그

리고 강서교회 정헌교목사님(천만원) 황산성변호사님(천만원) 조석훈장로

님(이천만원)께서 후원을 약속하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요. 급한대로

공사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름 방학이 되어 4월에 초등, 중고등 학생들을 위한 각종 수련회가

열렸습니다. 우돈타니가 치앙마이 보다 덥다는 말을 들었지만 이렇게 더

울 줄이야!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땀이 줄줄 흐릅니다. 걸아 다니기가

겁이 날 정도입니다. 그러나 학생들은 기뻐하며 더위에 아랑곳없이 배웁

니다. 물론 에어컨은 없지요. 그런 저들이 너무도 사랑스럽고 대견합니

다.

-음악 캠프: 2-7일에 걸쳐 예상 보다 많은 47명이 참석. 하나님의 말씀

공부를 시작으로 발성법, 작곡법, 키보드연주, 기

타연주 등을 배웠습니다. 저들의 반주로 성도들이

찬양하며 학생 복음 전도에 큰 몫을 감당할 것을

생각하니 주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학생 수련회: 9-11일 걸쳐 90명을 예상했는데

100명이 넘게 참석했지요. 태국교단 학생부 주최

로 열렸는데, 올해 수련회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하다가 열려 학생이 적게 참석하였다고 합니다. 한국교회가 예산 일

부를 후원하였지요. 무더위를 식혀주는 비가 저녁에 내려 얼마나 감사한

지요! 저는 치앙마이에서 오면서 비와 우박을 동시에 맞으면서 타뚬에 도

착하였습니다. ‘학생들이 영적으로 강하다’는 말을 교단 학생부 담당자가

저에게 칭찬하였습니다.

-주일학생 성경학교: 17-21일 걸려 150명이 참석 예상. 한국교회가 예산

일부를 후원.

대부분의 교회들이 2세들을 위한 사역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으나, 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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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4 헌당예배 후

생들은 많은 관심과 기대를 노회에 갖고 있는 것을 보았기에 이들을 위한

사역에 역점을 두어야함을 깨닫습니다. 따라서 이들을 위한 청년 단기/견

습 선교사가 필요합니다. 예로 음악, 컴퓨터, 운동 및 언어 등을 가르칠

견습선교사 입니다. 감사하게도 태국에 늘 귀한 부담을 안고 학생을 지원

해 주셨던 장신대 이명신교수께서 이곳의 급함을 아시고 단기로 보내주시

려고 기도하면서 학생들을 격려하고 계십니다. 감사할 뿐이지요.

4. 교회지원 사역

점통교회: 50년 된 구 건물을 헐고 3월19일에 기공예배를 드림으로 성전

건축을 시작하였습니다. 나이 많으신 분들이 새 성전을 보고 주님께 가고

싶다고 했으나 몇 분이 이미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기공 예배시에 나이

드신 분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취토하였습니다. 예산은 삼천 오백만원 정

도인데 저희 가정이 처음에 치앙마이에 와서 교회지원 사역을 시작한 곳

으로 저희의 눈물과 진심을 드렸던 곳이기에 적지만 저희가 재물을 드리

고 성도들이 1/3을 준비하고, 양경란란집사(백만원) 헌금하여 주셨고,

인천 산돌교회가 5 백만원 지원할 예정입니다. 아직 좀 부족한 부분이

있으나 채워 주실 것을 믿습니다.

5. 산부족 사역

-후아이야싸이교회: 쑤바전도사가 4월1일에 에스더전도사와 결혼하여 목

회자관에 입 주하였습니다. 신부 교회에서 결혼식을 거행하면서 주례사

인 제가 ‘교회는 신학을 공부한 주의 종을 한 명 더 받아서 기쁘고 또한

며느리를 얻어 기쁘다’ 고 하였지요. 9일 주일에 가서 말씀을 증거하고

수바전도사 부부가 찬양으로 영광 돌렸습니다. 특히 교인들의 발을 제가

직접 씻어주니 그런 일이 처음이라 어리둥절하면서도 다들 숙연한 자세로

받았습니다. 안주인이 오니 교회가 활기가 차고 다들 기뻐하며 목회자관

을 방문하여 함께 식사도 하며 교제를 나눈다고 합니다.

-방힌훤교회 헌당예배 : 1월 10일에 건축 시작하여 3월8일에 헌당. 성은

교회(박인수목사님 시무)가 지원. 헌당식 3일을 남기고 마지막 단계에 예

상하지 않은 색을 칠하였기에 산족인 건축업

자를 부르기 위하여 30-40분 저희 차로 들어

가면 된다고 해서 가보니 길이 험악하고 의외

로 시간이 많이 걸려서 괜히 여기까지 왔나보

나 하는 마음이 들었지요. 여러 가지 우여곡

절을 겪으면서 건축업자를 만나 약속을 하고

다시 칠을 하면서 교회는 정성을 다하고,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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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드려 아름답게 세워야함을 가르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들은 대강

칠해도 아름답다고 말하였지만 저희들로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직접

칠을 했지요. 색이 다른 곳에 번지지 않게 하려고 종이를 대기도 하면서

정성을 다하였지요. 빨간 진훍이 교회 안으로 들어가지 않게 작을 돌을

주변에 깔고, 화장실에 배수가 잘되게 하고 또한 화장실 문도 칠하였지

요. 정성을 다하는 모습을 봐서인지 나중에 방문해보니 깨끗하게 정리되

고 구석구석 청소한 흔적을 보았습니다. 건축비를 지원하는 것만이 아닌

선교사와 교인들과 함께하는 교회건축으로 마무리 하였습니다. 헌당식에

서 박목사님은 십자가를 어께에 메고 입장하여 강단 앞에 달아 놓았습니

다. 주님께서 이곳에 함께하시고 양들을 먹이시길 기도 합니다. 아주 예

쁜 교회당입니다.

-학끼야교회 기공예배: 카렌족 동네인데 3-4 가정이 새로 믿기로 한 곳

입니다. 쫌통에서 약 1시간 반 떨어진 곳으로 산 깊이 들어갑니다. 3월1

일에 기공하여 5월 중순에 헌당 할 예정입니다. 교인들이 믿음에 대한 간

절한 열심 있어, 저희가 떠날 즈음에는 자기들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고

가냐고 따져(?) 놀랐지요. 예배 시에는 말씀을 들으면서 ‘아멘 아멘’하면

서 말씀을 받는 저들의 모습에서 성령의 역사하심이 나타남을 느낍니다.

6. 가족소식

성원-아라를 미국에 보내어 놓고 제대로 찾아가 보지도 못했지요. 두 번

미국방문을 통해 그리고 저들이 여름 방학 때 한국과 태국 방문 시에 만

났지요. 저들의 필요도 제대로 채워 주지 못하고 주님께 기도하는 것 밖

에 없었는데 5월6일에 성원이가 6월10일에는 아라가 대학을 졸업 합니다.

멀리 떨어져서 안타까움도 있었지만 자녀도 결국은 하나님께서 책임지시

고 함께하셨고 지켜주셨음을 인해 다시 한번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뿐입

니다 주님께서는 저들을 친히 돌보시고 위험 속에서 보호하셨습니다. 성

원 아라도 어려움이 있었겠지만 한번도 어려움을 저희에게 이야기를 해서

부담을 준적이 없이 모든 일에 하나님께 감사를 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

과 축복하고 계심에 저들도 입으로 간증을 합니다. 감사할 뿐입니다. 그

동안 미국 뉴욕의 롱아이랜드 한인교회 안중식목사님과 안정화사모님께서

늘 환영해 주셨음에 감사와 방문할 때에 맛있는 음식을 사주셨던 모든

분들이 계셨음을 인해 감사를 드립니다. 특히 아라가 치과 치료를 급하게

받아야 할 때 시카고에 계시는 이두만목사님께서 사모님께서 입원을 하시

고 계셔 분주하셨음에도 병원까지 기꺼이 데려다 주셔서 무사히 치료를

잘 받을 수 있었지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자

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심에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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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간단한 소식

-라후노회 총회에 참석(3월23일), 카렌총회에 참석 (4월6일) 하여 축하의

메쎄지를 전하고 우리 교단 선교사들의 후원금을 함께 전달하였습니다.

-3월29-30일에 교단 선교사 1.4분기 회의가 치앙마이에서 개최되었습니

다.

-5월8-11일에 서울노회 주최 선교대회가 “태국선교 50주년 어제 오늘 내

일”이라 는 주제로 치앙마이에서 열리며 사역지도 탐방합니다.

기도제목

-황무지가 장미꽃 같이 변화시키시려는 성령의 역사가 타뚬 전도 훈련원

을 통하여 다양한 사역자들을 세울 수 있도록... 특히 숙소 건축과 선교

관 건축에 한국교회가 많이 참여하도록...

-개척교회를 위한 사명과 비죤을 가진 전도자가 나오며, 동부태국 지역에

개척교회를 시작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교회들과 목회자들이 성령의 역사 가운데 변화를 받고 양들을

주님의 제 자로 온전히 세우도록

-저희가 우돈타니-치앙마이를 오가며 사역을 감당함에 영육이 강건하여

결실을 맺기에 부족함이 없으며, 성원 아라가 졸업 후 진로를 바르게 정

할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치앙마이-우돈타니에서 조준형-이명화선교사 올림

"사 43: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

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메시아의 시대가 도래 하는 구원을 주는 새 생명의 역사!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성령의 인도로 새롭게 서는 역사!

새 땅에 주님의 나라와 복음을 전파하는 역사!

영적인 지도자를 세우고 훈련하고 내어 보내는 역사!

눈물로 땀으로 씨를 뿌리고 추수를 기다리며 인내하는 역사!

추수하기 위하여 성실히 부지런히 또한 함께 거두는 역사!

기도와 후원에 참여하는 모든 분들께 충만한 은혜가 더해지는 역사!

1. 전도훈련원 현판식 (2006년12월2일)

태국교단이 정식으로 훈련원에 현판식을 함으로 전도훈련원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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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총회 임직원, 전국에서 온

태국총회실행위원들, 우돈지역

교회 지도자와 교인 등 150여

명이 모여 주님을 찬양하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2. 타뚬 전도처 첫 성탄예배 (2006년 12월23일-24일)

훈련원 내에 개척교회를 시작한 첫 성탄예배를 12월23일 토요일에는

주변 동네 주민들을 초청하였습니다. 초청 전에 매 주일 새벽예배를

드리고 동네를 한 바퀴씩

4주를 돌면서 기도하였고,

11월 감사절 때는 각 가정을

돌면서 간단히 과일을 돌리며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메쎄지를

돌렸고, 초청장을 만들어

성탄절에 와서 함께 교재를

나누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23일-24일이 동네가 절에 가서 공덕을 쌓는

날이라고 하여 몇 사람 오지 않을 것이라는 전도사의 말이었습니다.

저희는 이를 위하여 열심히 기도하였고 얼마가 오든 상관없이 우리는

믿고 성탄을 준비하고 초청한다고 하였지요.

(예배 후 함께 식사) 50여명이 오리라고 예상하였는데 150명이 참석하여

큰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성탄 메시지를 전하고, 어려운 가정에 구호미와

나이 많은 분들에게 담요를 전달하고, 함께 게임도하고 식사를 하였는데

모두들 맛있다고 하면서 공손히 인사를 나누었지요. 제가 이곳으로 이사

온 후에 어린이들 이곳에 들어와서 노는 것을 거의 보지 못하였는데

어린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혹은 걸어서 들어와 마음껏 노는 것을 보니

얼마나 주님께 감사한지요! 그 후에 20명의 어린이들이 매 주일 교회에

와서 주일학교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드세거나 막무가내가

아니고 얼마나 공손하고 열심히 와서 예배 전에 청소하고 정돈하며

말씀을 배우는지 모릅니다. 아이들이 교회에 간다고 하니 할머니가

보내어 주기도하고 할아버지가 아이들 데리러 교회에 오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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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에도 이들이 놀러와 조용한 센터가 어린이들의 소리로 즐겁습니다.

이교회가 잘로 성장하여 갈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벅찹니다.

3. 교회 헌당 예배

3.1. 마힌루앙교회(카렌족 교회): 12월

10일에 성은교회가 지원하여 헌당예배를

드림. 깊은 산 속의 교회로 치앙마이에서

차로 5 시간을 가는 곳입니다. 산족들에게

맞게 나무로 지어졌으며, 100명여명이

들어가니 꽉 들어찼 습니다. 다 함께

기쁨과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3.2. 나리앙교회 헌당예배: 12월31일에 지난 7년 간 완성하지 못하고

있던 중 성은교회의 후원으로 마지막 손질을 하여 헌당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지난 7년간 지붕이 온전하지 못하여 비가 새고, 강단에 쌓아둔

성미에 쥐들이 들어와 먹고 강단 커튼이 찟겨지고, 천정이 없어 어둡게

느껴진 곳이었습니다. 성도들은 짓다만 성전을 보며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지요. 성은교회의 도움과 다시 힘을 합쳐 믿음으로 마음과 물질을

드려 완성하여 헌당하게 되었습니다. 태국교단의 총회장께서 오셨는데

헌당식 날인 31일이 본인에게는 총회장의 직책을 내려놓는 날이어서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에게 맡겨진 직책을 나리앙교회에서 다하게 되어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단지 새 건물이 아닌

우리의 믿음과 진심을 받으시 고 기뻐하실 것입니다.

4. 태국교단 총회 (2006년10월16일-20일)

이번 총회는 새롭게 총회의 임원들이 바뀌는 회기입니다. 새로운

인물들로 물갈이를 하면서 젊은 피가 수혈되었습니다. 총회장은 직전

부총회장이 되었고, 부총회장은 학교교사로 있는 장로가, 총무로는 젊은

목사 후보생이 되었고, 회계는 집사로서 별로 교회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분입니다. 총회장을 빼고 다들 북쪽 출신입니다. 21세기에 주역을 맡을

이들이 조용한 변화를 통한 교회를 새롭게할 것을 기대합니다. 쓰나미

이후에 남부 지역을 안다만사역을 개정하고 지속적으로 회교지역의

복음화를 위해 사역할 것입니다. 또한 지역별 신학교육 강화와 목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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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교육에 중점을 둘 것입니다. 물론 기관 보다는 교회중심의 사역과

전도 훈련에 초점을 맞추리라고 봅니다. 총회가 바르게 신학적인 입장과

교회중심의 사역을 추진해야 태국교회가 살아날 수 있습니다.

5. 신학교 졸업식

2006년도 신학교 졸업생은 23명입니다. 신학교육에 있어 목회-교회 중심

사역에 힘을 싣도록 해야 합니다. 태국인 청년들이 줄고 산족 젊은이들이

많이 신학교에 들어오는데 태국교회가 이 문제를 깨닫고 청소년 사역에

중점을 두어야 합니다. 신학교가 교회 사역을 준비시키는 곳이 되도록

기도합니다. 감사한 것은 목회자 계속 교육과 신대원 학생들이 늘어나

사명감을 받은 경험있는 종들이 많이 배출되기 때문입니다.

6. 훈련원에서 신학교 사역

태국교단과 맥길버리 신학교가 이곳 훈련원에 분교 형태로

목회자들과 직장에서 일하는 신학교육을 받기 원하는 사역자들을 위하여

특별 신학훈련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2007년 1월29일 개강하여 4개과가

시작하였습니다. 37명가량이 신청하여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수업 형태: 매 월 1주간 공부하여 한 과목을 수료 합니다. 낮 강의는

주로 목회자들을 위한 신대원 2년 및 목회자 연장교육 2년이고,

저녁-주말 강의 반(신대원 3년과 연장교육 3년) 으로 나뉘어 교육합니다.

훈련원에서 배우는 신학생들을 위하여 한국교회가 장학금을 1인 당

1000바트를 (25000원 정도) 지원하기로 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이들의

숙박, 식사, 도서관 설치 등등 감당해야할 부분이 많습니다.

2월3-4일에는 치앙마이 맥길버리 신학교의 수강생들과 함께 연합

수련회를 이곳에서 가져 비록 서로 멀리 있으나 함께 주님의 나라를 위한

열정을 함께 나누는 은혜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 기간은 우돈 지역의

날씨가 치앙마이 보다 추워 모두들 떨면서 야외예배실에서 함께

나누었지요. 훈련생들의 나이가 30대-60대까지로 다양했지만 서로 겸손히

주님 안에 하나 되어 말씀을 배움에 신분과 나이가 문제되지 않음을

실감하였습니다.

제가 갑자기 강의를 맡게 되었는데 마침 미국의 롱아일랜드

한인교회의 은퇴 목사님이신 안중식목사님이 오셔서 공관복음서 강의를

은혜롭게 진행하여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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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전도부 주최 전도훈련 (2007. 1월16일-18일)

매 년 있는 평신도 지도자 전도훈련에 안중식목사를 초청하게 되어

‘지도자와 영성’을 주제로 2박 3일간의 훈련을 마쳤습니다. 교회의

지도자이지만 지도자 수업을 받아본 적이 없고, 지도자의 영성에 대하여

들어보지 못했기에 성경 말씀을 풀어가면서 또한 안목사님의 개인적인

목회의 경험에서 온 영성과 현지인들의 문제들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강의 중심 보다는 구룹 별로 나누어 자신들이 알고, 바라는 지도자 상에

대하여 교회내의 갈등 문제 해결 방법 등을 나누고 보고 하였습니다.

보고하는 것을 안목사님께서 보시고 비록 숫적으로는 태국교회가 작다고

하여도 회의하는 모습은 많이 성장해 있다고 칭찬하였습 니다. 평신도

지도자들의 영성을 꿰뚫는 강의로 모두들 은혜를 받고 평생 이런 말씀

중심의 강의를 듣기 어려울 것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8. 가족 소식

매 년 송년, 성탄, 신년 때마다 부모님들에 대한 송구스러움이

많았으나 이번 이 기간에는 아버님과 장인어른이 이곳에 오셔서 한 달간

계시면서 함께 사역에 참석하고, 저희들이 모실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성원이는 공부하면서 직장 일도하고 있으며 아라는 한국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지나면서 법대 대학원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식구들이 흩어져 있서 직접 돌보기가 어려우나 주님께서 친히 양육

보호하실 것을 믿습니다.

9. 선교대회 참석

9.1. 교육선교대회(2006. 10월18-21일) Midwest대학의 주최로

선교사들의 교육사역을 통한 선교를 지원하기 위한 자리였습니다.

9.2. 인도차이냐 선교사대회 (2006년 10월 24일-27일) 베트남에서 열려

이 지역 선교사들과의 연대를 도모하고 정보교환과 영적인 은혜를

덧입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9.3. 태국선교사수련회 및 선교 50주년 선교대회 (2006년 12월26일-29)

파타야에서 450명이 모여 큰축하 잔치와 태국선교 50주년

기념대회를 가졌습니다. 대 선배되시는 방지일목사님, 태국선교의

시발점이신 최찬영선교사님과 선교의 개척자이신 조동진목사님과

여러 후원자 분들이 함께하여 미래를 향한 선교를 구상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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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의 선교대회가 아닌 현지교회 지도자들도 함께하는 대회가

되길 제안하였습니다.

9.4. 우리 교단 선교사 대회 (2006년 12월29-30일) 짧지만 11가정의

선교사들 함께 모여 교재와 사역을 위한 준비 및 협력을

모색하였습니다. 다른 교단 선교사들과 교재를 나누면서 남자

선교사들이 운동에서 늘 졌는데 사모선교사들이 나가 발야구에서

무장한 저들을 맨발로 승리함으로 위신을 회복하여 다들

기뻐하였습니다.

선교보고 08-01

(사진: 양 교단 선교협의회)

P. O. BOX 170 UDONTHANI, THAILAND, 41000

+66-81-7647337, +66-89-9975660, T/F +66-42-266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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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교단 선교협의회(1월 7-9일)

1996년 5월에 제 1차 양 교단 선교협의회 후 10년 만에 열린 협의회

를 통하여 미래를 향한 새로운 선교협력의 시대를 열어가는 계기를 마련

하였습니다. 교단 대표로 오시기로한 부총회장님과 사무총장님이 오시지

못하여 섭섭하고 결례가 되었지만 태국교단의 배려와 이해 가운데 잘마첬

습니다. 교단 대표와 후원교회 대표 6명과 13명의 선교사가정 그리고 태

국 총회 임원과 노회 대표 등 60명이 참석하였습니다. 그간의 선교 보고

와 현지 교회들의 반응 그리고 교단 미래의 협력 사역을 상의하고 선교지

를 방문 하였습니다.

우리 교단의 측면에서 태국선교는 현지 교회와 연합적인 선교, 교단

간의 협력, 현지 교회 속에 들어가서 현지 교회를 살리는 선교형태임을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들은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을 수행하는 우

리 교단의 대표로서 현지 교회를 세우고 섬긴다는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

게 되었습니다.

미래 협력사역으로 태국교회의 신학정립과 인적교류 증대, 한국 내

태국 노무자 선교를 위한 선교사역, 특수 사역을 위한 선교사 더 초청,

동남아선교 협력 증진 등을 협의 하였습니다. 선교사들은 이 협의 내용을

계속적으로 감당해야할 사역 입니다.

지역별 전도 훈련 (1월 22일과 3월26일): ‘간증하는 방법’ 강의

우돈타니에서 차로 5시간 걸려 전도훈련자들에게‘간증하는 방법’을

강의하였습니다. 처음가는 지역이고 지역이름 역시 생소하였으나 복음으

로 뜨거운 지역이었습니다. 30여명 모인 소규모 전도훈련 코스로 전도부

에서 훈련하는 기간이었습니다. 태국 사람들은 말을 잘합니다. 그러나 간

증을 체계적으로 복음에 맞게 전하는 방법이 필요함을 깨닫고 저에게 순

회하면서 강의하도록 부탁하였습니다. 강의하고 각자 간증문을 써서 몇

사람 간증하는데 기혼 여성들이 간증할 때는 자신들의 삶의 깊은 고통과

아픔이 있는 갈급한 순간에 주님을 체험하고 눈물로 간증할 때 은혜를 받

았습니다. 이들의 간증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 주께로 돌아오길 기도합니

다.

안중식목사의 지도자훈련 ‘지도자란?’ (1월28-31일)

1년 전에는 전도훈련을 중심으로 강의하셨던 안목사님이 올해는 느헤

미아서를 중심한 지도자에 대하여 강의를 하셨습니다. 목회자 뿐아니라

평신도를 위한 이 시대에 맞는 지도자상을 정립하는 계기로 자신을 돌아

보고 교회가 필요로 하는 지도자란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이끄신 것을 돌아보는 자신의 경험을 나누는 시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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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사람들이 눈물로 은혜를 고백

하였고, 믿음의 백성이 됨이 얼마나

감사한지를 고백하였습니다. 한 젊

은 자매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결단

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 목회자가 추

천하여 왔다가 은혜를 받고 믿기로

결단하여 목회자들이 함께 기도하였

습니다. 이번 훈련에 80-90명이 참

석하였는데 처음 쎈타에 와서 훈련 받는 사람이 1/3 정도 되었습니다. 모

두들 지도자의 참 모습을 깨닫고 자신도 그런 지도자로 살기를 다짐하는

진지하고 성숙한 훈련 기간이 되었습니다. 특히 이들의 간증문을 소책자

로 만들어 서로 은혜를 나누고 전도지로로 사용하려고 합니다.

안중식목사의 ‘환자 상담 훈련’ (2월5-7일)

지난 1년간 병원 원목과 병원 사역을 위한 목회자들을 중심한 상담학

훈련을 여러 각도를 계획하면서 무산될 상황까지 갔으나 태국교단의 의료

선교부에서 이 훈련의 필요성을 확인하면서 결실을 보게되었습니다. 태국

에는 환자를 위한 상담학 특수 전공자의 강의를 받기가 어려운 여건이었

는데 안목사님이 이 분야에 경험자로서 초청을 받게되었습니다. 치앙라이

의 OVERBROOK 병원에서 모였는데 방콕과 치앙라이를 중심한 20명의 원목

및 목회자, 신학생 10명 (정승회선교사시무) 등이 참석하였습니다. 이 훈

련을 처음 받기 때문에 이론과 실습을 중심으로 하면서 자기 성찰을 통한

환자 이해의 방향을 잡고 짧은 기간이지만 알찬 시간이 되었습니다. 안목

사님이 영어로 강의하시고 치앙라이 제일교회의 분쏭목사님이 태국어로

통하여 보다 더 현지인들이 잘 이해하였지요. 자기 성찰에서 각자의 삶

속에 받았던 상처가 어떤 것이며 그것이 나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고

주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셨는가를 간증하면서 눈물과 기쁨이 교차되는 은

혜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배운것을 실제로 상담에 적용하는 시간도 가져

짝지어 환자들을 방문하고 다시 모여 나누었는데 배운것을 제대로 살리지

는 못하였지만 계속적으로 실습하기로 하였습니다. 모두들 이런 훈련이

더 필요함을 느끼면서 사역지로 돌아갔습니다.

제1회 1분기 전도훈련 시작 (2월11-15일 )

전도훈련원의 주 사역이 바로 전국 노회를 대상으로 하는 전도훈련입

니다. 우리 교단 전도부와 함께 이 훈련을 실시하게 됩니다. 년 4회 훈련

하여 전도훈련 수료증을 줍니다. 지난 1년 기간 동안 총회 전도부와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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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태국어 준비, 강사, 일정, 예산 등을 협의하면서 쉽지 않았으나 전도

부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제 1회를 시작하게 되었지요. 첫 훈련이기에 잘

준비되고 실제적이고 영적인 의미있는 훈련이 되길 기도하면서 염려되었

던 것은 여러 지역에서 올 것인가? 참석자가 70-80명이 될것인가? 이었습

니다. 태국교단 전도부의 협력으로 태국교회가 전도와 개척교회에 관심

이 많기에 치앙라이-치앙마이와 (버스로 13시간) 남쪽의 뜨랑에서 (버스

로 30시간) 많이 참석하였고 우돈지역도 반 정도 참석하였습니다. 하나님

께서는 기도한 대로 70명을 보내 주셨습니다. 훈련 중에 전도를 나가 실

제로 실습하였는데 70여명의 관심자 목록을 가지고 왔습니다. 전도 간증

시간에는 승려에게, 비구니에게 전도한 경우도 있어 아주 은혜스럽고 기

쁨이 넘치는 시간이었습니다. 훈련원의 날씨가 너무 추워(싸늘한 날씨)

떨면서 훈련을 받았지요. 그 이유는 지붕만 있는 야외 교육장이라 이상

저온 기후에 떨수밖에 없었지요. 이들이 교회 건물(큰 강의실)을 위하여

폐회 예배시에 특별헌금을 하였습니다. 건축 예산으로 2억 정도 필요한데

헌금은 18만원 입니다. 이는 5병2어로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신 줄 믿습니

다. 다시 2차 훈련을 기대하며 헤어질때 함께 식탁을 나눈 믿음의 형제

자매로서 아쉬워하며 헤어졌습니다.

선교 단기 팀들 전도집회:

-1월 9일-17일 평촌교회 (16명): 타뚬초등학교 전도 집회 후에 학생들

을 위하여 컴퓨터를 2대를 기증하였습니다. 담롱파타나교회에서는 어린이

들과 함께 이틀을 지나면서 정이들어 팀이 떠난 후에도 30분을 아이들이

울었다고 합니다. 이만큼 단기 팀이 교회와 주민/어린이들을 묶어주는 역

활을 합니다. 낮 시간에 동네회관에서 전도 집회를 할 때 많은 동네 주민

들이 와서 관심을 가졌고 저녁 집회 시에도 아이들과 함께 참석하여 복음

을 들었습니다. 시내의 교인 약국 앞에서 전도도하여 시장 주변의 사람들

이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도 가졌습니다.

-2월18-22일 마산 문창교회 (16명): 초급대학 강당에서 이루어진 전도

집회 때는 200명의 학생들이 참석하여 처음으로 한국 기독청년들의 전도

집회를 보면서 함께 웃으며 즐거운 마음으로 복음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깔라신교회에서는 동네를 한 바퀴 돌고 나니 200명 가량의 어른이 참석하

고 아이들도 80명 가량 참석하였습니다. 그날 저녁은 대보름이라 많이 참

석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교인들 모두 놀랄 정도로 많이 참석

하였습니다. 교회 건축 중으로 1/3 정도의 공정이 진행되었습니다. 약 천

만원 정도가 부족하였는데 후에 문창교회의 성도 한 분이 헌금하여 주셔

서 참 감사하였습니다. 마지막 날은 아침에 근처 초등학교에서 전도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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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하였지요. 교장선생님의 인사말 중에 “... 기독교 청년들이 온다고 하

여 마음이 심히 불편하였습니다. 태국은 불교를 숭상하는데 이들이 와서

무엇을 하려는가하고 반대적인 생각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보

니 기독교인들은 굉장히 활동적이고 행동으로 표현하는데 반해 불교도들

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다음에 오면 또 초청하겠습니

다...” 이렇게 단기 선교 팀들의 방문이 현지 교회로 하여금 복음증거 하

도록 용기를 주는 역활도 합니다.

-2월26-29일 신길동교회 선교 팀(22명)/ 바야오교회 헌당: 신길동교회는

여섯 곳에 교회 건축을 지원하였고 일곱 번째로 푸라폰 바양오교회 헌당

식에 참석하여 초중생들과 교사, 학부형들의 특별 프로그램에 참석자 모

두 기뻐하면서 나누어 줄 때 더 많은 복을 받음’을 알게해 주었습니다.

스산한 날씨 가운데 치앙마이 산동네에서 자면서 전도집회를 하였는데 농

따우 기숙사의 한 학생이 요한복은 3장 전체를 외우는 것을 보고 모두들

깜짝 놀라고 도전을 받았습니다.

기도제목

1. 4월에 있는 훈련과 수련회가 말씀의 잔치요 영적인 부흥의 기회가 되

도록 ...

2. 전도 훈련 제 1기생들이 1년간 잘 훈련하고 현지 교회에서 전도의 열

매를 맺으며 새 신자들을 통해 교회를 개척해 가도록...

3. 한국의 이단인 ‘구원파’와 ‘박옥수파’들이 들어와 태국교회의 영적인

혼란을 주는데 태국교회가 말씀에 기초하여 성장하도록...

후원금 지원 방법

1. 총회 선교부 구좌

조준형 신한은행 구좌 번호: 325-81-0000-3418

2. 태국의 구좌 번호

NAME: JUN HYUNG CHO

BANK: SIAM COMMERCIAL BANK, UDONTHANI BRANCH

ROUNDING NO.: SICOTHBK

ACC. NO.: 510-4-10843-3

HOUSE ADDRESS: 153 M. 11, UDON-NONGKAI RD. UDONTHANI,

41000 THAI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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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보고 09-01

P. O. BOX 136 UDONTHANI, 41000, THAILAND

[email protected]

전화:+66817647337 +6642266464(fax & tel) www.pckthailand.net

타뚬전도처에서 성탄절에 세례받은 4명의 성도

(좌로부터 싸미안, 싸팃, 유핀, 쑥)

2008년 한 해 동안 성령님의 인도로 그리스도의 새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주신 하나님

2009년에 더욱 성숙된 선교사역을 감당하도록 인도하실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며

후원하시고 기도해 주신 모든 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타뚬전도처 성탄절 예배 (12월15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온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기에 저희 전

도처로써는 동네의 주민들을 초청하여 기쁨을 함께 나누고 그리스도의 오

심을 증거한 성탄절은 단지 기독교인들만의 나눔이 아닌 주변 동네들의

삶 속에 주님이 탄생하도록 하는 것이 저희들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주민

들을 초청하여 150여명이 참석하여 말씀을 듣고 찬양하고 아이들은 연극

을 하면서 아주 기쁜 성탄절을 보냈습니다. 특히 쎈타에서 일하는 4명의

직원이 이곳에 와서 일하면서 1년이 넘어가는데 결단하고 세례를 받았습

니다. 자신들의 친인척이 있는 가운데 기쁨과 감사로 세례를 받으면서 눈

물을 흘렸습니다. 주님은 이들의 삶속에 역사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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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이라는 직원은 나이가 63세인데 그동안 오토바이 면허없이 지내다가

도전하여 면허를 따왔습니다. 30문제를 컴퓨터로 시험을 치르는데 감독관

이 ‘아저씨 컴퓨터를 다룰 줄 아시

나요?’라고 묻자 ‘저는 컴퓨터를 만

져보지도 못했기에 아무것도 모릅

니다’라고 대답하면서 하나님께 기

도로 간절히 도움을 구하면서 답을

했는데 놀랍게도 최고점이 나왔나봅

니다. 30점 만점에 28점을 받아 모

든 주변의 젊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

였고, 어떤 이는 영어도 잘하는가

하고 물으면서 지식인으로 대접하였다고 합니다. 믿음으로 기도 하는 자

에게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하면서, 또한 존귀함을 주심을 감

사 합니다.

싸팃 아주머니: 동네의 술꾼으로 친구들이 술을 사가지고 와서 한 주에 5

일 정도는 함께 술을 먹었다고 합니다. 교회는 나오지만 반신 반의하면서

신앙생활하다가 셰례받기를 결단하면서 마음의 준비를 하던중 그렇게 하

루라도 안마시면 이상할 정도였던 이 분이 어느 날부터 술이 받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세례받기 얼마 전에 자신도 모르게 술이 끊어졌다

고 합니다. 술친구들이 왔을 때 이제는 술을 못 마신다고하자 친구들이

‘예수 믿고 좋은 사람 되었다.’고 칭찬을 하였다고 합니다.

싸미안 아주머니: 말이 없고 말을 잘하지 못하는 아주 수줍음이 많고 조

용한 분인데 방콕에서 공부하던 조카가 방문하자 데리고 와서 함께 예배

드리고 갔는데 그 때부터 이상하게 조카가 3일간 잠을 자지 못하고 영적

인 혼란에 빠졌다고 합니다. 보다 못한 싸미안 아주머니가 그동안 말씀을

생각하고 잠을 못자 고생하는 조카를 붙잡고 기도하였더니 그렇게 잠을

못자 애쓰던 조카가 잠을 잘 잤다고 합니다. 이는 사탄이 영적인 혼란함

과 괴로움을 주려하였으나 인간의 말의 능력이 아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승리함을 보여주는 큰 간증이었습니다.

유핀 아주머니: 부엌에서 음식을 만드는 일을 합니다. 당뇨로 고생하던

중 쎈타에서 일을 시작하였는데 1년을 지나면서 주일 예배를 드리고 기도

하는 가운데 정상이 되었습니다. 또한 손자들이 초등학교 2-3학년으로 매

일 아침에 학교에서 불교예식이 있어 선생님들에게 ‘저는 기독교인 입니

다’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아무도 이런 담대함(?)이 없었는

데...그 학교에는 기독학생이 단 두명뿐입니다. 훈련받으러 오는 청년들

을 보면서 자신이 주위에서 보아온 청년들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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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인상을 받은 유핀아주머니는 자신의 자녀들이 예수님을 잘 믿어 좋

은 청년으로 자라 주님 앞에 쓰임받길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께

서 저들의 삶 속에 역사하심이 분명하시기에 저들이 믿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오고 있습니다. 이들의 간증으로 주변 친구들이 예배에 참석하

기도 합니다.

쎈타 옆집은 동네 이장집인데 지난 12월에 부부가 밤에 오토바이를 타

고 나갔다가 달리던 앰블란스 차에 치어 죽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그 어

머니를 초청하여 몇 주 예배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이 열리도록 인도하시길 기도합니다.

후아이야싸이교회의 기숙사 개관: 지난 해 10월24일에 초등학생 20명을

받아 개관예배를 드렸습니다. 아직 기숙사로서 시설이 부족하고 쑤바 전

도사 가정이 어린이를 돌봄에 미숙함이 있겠으나 2년 간 미루어왔고 학부

형들과 학교에서 빨리 열기를 원하여 학교장, 어린 학생들과 더불어 개관

예배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올 해 겨울은 참 추웠는데 침대를 구입하고

옷 넣는 플라스틱 개인 서랍을 마련하여 주었습니다. 또한 평촌교회 단기

팀이 방문하여 세탁기와 엠프 시설을 마련하여주고 화장실을 짓고, 전도

사역을 하였습니다. 부모를 떠나 기숙사에 있을지라도 주님의 많은 사랑

을 받고 한 인간으로 잘 자라길 기원합니다.

쁘로포교회 헌당예배와 부흥회 (10월25-27일): 치앙마이에서 약 4-5 시

간이 걸려 카렌족 교회인 쁘로포교회에 도착하였습니다. (비포장 도로로

2시간) 성은교회(박인수목사)가 부분 후원하여 건축한 교회로 토요일에

는 부흥회로 말씀을 듣고 주일 새벽 기도회, 헌당예배, 성경공부를 하면

서 영적으로 갈급한 심령들이 열심히 말씀을 들으면서 기뻐하고 감사하였

습니다. 위랏 전도사 부부가 열심히 섬기고 있으며 기숙사를 다른 동네에

마련하여 20여명의 학생들을 양육하고 있습니다.

제3차 전도훈련(12월1-4일)

제1기 3차 훈련이 있기 전 주에 여당인 구 탁신총리를 반대하는 무리들

(노란색)이 더욱 거세게 보다 효과적으로(?) 보다 빠른 해결책을 얻기 위

하여 국제-국내 공항을 점거하는 사태가 발생하여 국내외 여행객들이 큰

불편을 겪었습니다. 물론 한국에서 오실 강사들이 태국에 들어올 수 없는

상황이라, 날짜는 다가오는데 연기할 수도 없어 그대로 훈련을 실시하기

로 하였습니다. 북부, 남부에서 오는 훈련자들이 무사히 도착하였습니다.

강사가 올 수 없는 상황이지만 제가 사도행전 공부를 인도하기로 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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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장까지 읽고, 질문하고, 바울사도의 선교여행을 지도로 그렸습니다.

성령님께서 핍박 속에서도 어떻게 복음을 증거하게 하시고 교회를 세우시

고 든든히 서게 하셨는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탄의 핍박 위

에 계시면서 복음 사역을 이루신 것입니다. 이렇게 자세히, 말씀을 읽으

며 성경공부 한 적이 없었다고 하면서 다들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였습니

다. 날씨가 추웠지만 참고 견디면서 마지막 날 저녁에는 야외에서 모닥불

을 피우고 전도자로서의 헌신과 결단하는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13노회 34주년 기념예배 (12월5일)

우돈 지역 노회가 창립된 지 34년이 되어 한 번도 기념축하 감사예배를

드린 적이 없어 이번 어버이날을(왕의 생신일) 기하여 300여명의 성도들

이 모여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지난 역사를 연극으로 표현하면서 현재

의 인물들을 비슷하게 생긴 청년들을 골라 역을 맡아 더욱 즐거운 시간이

었습니다. 지난 역사가 갈등과 분열의 역사였지만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

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풍성했는지를 감사하면서 앞으로 2006년부터

전도 강화하여 2010년 까지 50%의 성장을 가질 것을 기도하였습니다. 즉

전도를 통하여 2000명 성도가 3000명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교단 선교사 수련회(12월29-31일)

우리 교단 선교사가 14가정으로 늘

어났고 이번 수련회에 3명의 태국

선교사 후보생이 함께하면서 인터

뷰하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태국

에 여러 선교동역자들을 보내어 주

시고 사역이 태국 전 지역으로 확

산되고 있습니다. 즉 북부 치앙마

이, 중부 방콕, 동북부 우돈, 남부

푸켓-팡아 지역입니다. 복음 전파가 어렵거나 미약한 지역에 선교사를 보

내게 되었습니다. 이에 선교회의 고민은 동남아 지역의 선교사 자녀와 교

육 시설이 미비한 지역에서 사역하는 태국 선교사 자녀 교육을 위한 기숙

사가 절실하게 필요함을 느끼고 기도하며 구체적인 방안을 연구하기로 하

였습니다.

2009년 1월-2월의 선교 사역

1기 전도훈련생 4차 훈련 및 졸업식 (2월23-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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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같이 지난 간 1년! 드디어 1기 전도훈련생의 마지막 훈련! 기쁨과 감사

로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3차 훈련 때 오지 못했던 황철규 목사, 조재호

목사와 원인섭 목사가 오셔서 마지막 강의를 맡아 주셨습니다. 하루는 근

처 동네를 가가호호 방문 전도를 하여 많은 관심자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

니다. 처음에 70여명이 등록하여 시작되었던 훈련이었는데 끝까지 수료한

사람은 43명이었습니다. 중간에 빠진 사람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도록

합니다. 감사한 것은 멀리 700킬로, 1500킬로 떨어진 지역에서 온 훈련생

은 모두 수료한 것입니다. 비록 교통사고로 어려웠던 형제도 있었지만 끝

까지 참석하여 졸업장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 열정을 주셨기에 이런 결

과가 왔습니다. 졸업장은 양 교단 총회장님들과 제가 싸인 하였습니다.

졸업생들이 입을 가운이 마땅치 않아 고민한 끝에 색깔은 비록 달라도 다

른 교회들의 성가대 가운을 입혔고, 태국교단 총회장님이 참석하여 명예

롭게 졸업장을 수여하였습니다. 한국 강사님들은 저들에게 전도 시 더위

로 땀이 날 때 닦도록 수건을 선물하였습니다. 제2기 전도훈련이 언제 실

시되는가를 묻는 관심자가 많이 있어 주님께 감사합니다. 5월 하순 경에

모집하려고 합니다.

안중식 목사님의 상담자훈련 (2월9-12일)

작년에 병원 원목을 중심으로 실시했던 상담훈련을 우돈의 목회자와 교사

중심으로 다시 실시하였습니다. 영어로 강의하고 치앙라이 제일교회의 분

쏭목사님이 통역하시도록 초청하였습니다. 이 훈련에 문을 개방하여 속한

노회만이 아닌 다른 교단의 목회자들과 한국선교사와 함께 일하는 목회자

들도 참석하여 좋은 관계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상담자가 먼저 주님 앞에

서 받은 은혜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서로 나누는 가운데 성령님의 구

원의 역사가 얼마나 오묘하며 능

력으로 역사하셨음을 알게 되었습

니다. 믿음에 체험이 있어야하는

모두들 귀한 체험을 가지고 있음

에 놀랐습니다. 19살에 죽음으로

소망이 없던 청년이 주님의 부름

을 깨닫고 종이 되어 수 십 년을

주의 종으로 섬긴 간증은 모두에

게 은혜가 되었지요.

안중식목사님의 지도자 훈련 (2월16-19일)

이 기간에 여러 훈련이 겹쳐 30명 정도의 새로 부상하는 지도자들을 주님

께서 보내 주셨습니다. 참석자 대부분은 아직은 지도자로서의 미약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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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이 부족한 사람들이었으나 자신을 지도자로 부르신 주님께 감사하면

서 사명감을 가지고 섬기는 자로 설 것을 다짐하였습니다. 저로서는 적은

숫자가 와서 마음이 불편하였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더 좋은 결과가 있음

을 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늘 보던 지도자 그룹이 아니고 비록 미숙하긴

하지만 신선하고 의미 있는 훈련이었습니다. 저들이 새로운 시대에 맞는

지도자로 우뚝 서길 기도 합니다.

박창윤목사님 초청: 13노회 씨윌라이 지역 전도 부흥회와 타뚬교회 설교

“저는 양 눈이 없고 양 손도 없

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 속

에 역사하시는 주님이 하십니

다.” 이 간증은 집회에 참석한

모두에게 큰 힘과 용기를 불어

넣어 주었습니다. 박목사님은 2

주간 태국을 방문하시면서 푸

켓, 팡아, 방콕 그리도 우돈 지

역에서 간증집회를 인도하셨습니다. 쉴 시간이 없는 빠듯한 일정이었지만

간증을 통하여 우리 속에 주님이 역사하시고 저희들을 쓰시고 계심을 확

신하게 하는 기간이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푸켓 한인교회에서는 불

황으로 실망 가운데 있었지만 새롭게 은혜를 받고 헌신하는 역사가 나타

났습니다. 씨윌라이 지역 태국교회에서도 이번 전도 집회를 통하여 11명

이 믿기로 작정하였습니다. 특히 “아이를 업고, 기저귀 가방과 성경 가

방을 어깨에 메고, 비가 와서 우산을 들고 남편의 팔을 끼고 가야 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버스를 탔는데 급정거로 목사님이 앞으로 쓰러

졌을 때 아이를 내려놓고 남편을 일으켜 세워야하는 순간... ”라고 간증

하는 아름다운 최미숙사모의 간증은 참석한 많은 여 성도들의 마음을 울

렸고 다시 도전과 소망을 가지고 굳게 서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왜

우린들 할 수 없겠는가! 내 속에 역사하시는 주님이 계시지 않은가!”라는

믿음을 갖게 한 것입니다.

선교단신:

유한진선교사 가정 부임: 성덕교회 후원으로 새로운 선교사 가정이 방콕

에서 언어를 마치고 사역지인 전도훈련원에 부임하여 왔습니다. 사모님은

조경숙 선교사이고 두 딸이 (혜빈 9살, 은빈 6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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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제목

1. 태국이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계파 간 불신으로 치닫고 있는데 속히

안정을 찾고 하나님의 의가 정치 사회에 이루어지도록

2. 세계경제와 한국경제의 어려움 속에도 선교역사가 성령님의 은혜 가

운데 확장되며 열매 맺도록

3. 각 지방으로 선교사 가정들이 들어갈 수 있도록 선교사 자녀를 위한

기숙사가 마련되도록

4. 2009년의 사역이 주님의 뜻에 부합하며 현지인들을 온전히 교회 지도

자로 세우는 사역을 감당하도록

5. 후원금 지원 방법:

1. 총회 선교부 구좌: 조준형 신한은행 구좌 번호: 325-81-0000-3418

2. 태국의 구좌 번호 MR. JUN HYUNG CHO. SIAM COMMERCIAL BANK,

ROUNDING NO.: SICOTHBK Acc. No: 510-4-10843-3

졸업식장으로 들어가는 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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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생들의 특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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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보고 10-01

P. O. BOX 136 UDONTHANI, 41000, THAILAND

[email protected]

+66817647337 +6642266464 www.pckthailand.net

www.churchplantcct.org

전도훈련 2기 3차 (1월25-29일) 4차 훈련 및 수료식 (2월22-26일)

제가 안식년 기간이지만 현지에서의 사역들은 계속되기에 훈련을 위하

여 우돈타니에 한 달간 체류하면서 전도훈련 마지막 두 번을 개최하여 졸

업 감사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게 되었습니다. 강사님으로 증경총회장이신

김영태목사님, 박봉수목사님,송태승목사님, 원인섭목사님이 오셔서 은혜

와 도전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졸업식에 1차 훈련을 받은 선배들이 격려

하는 모습은 참 아름다웠습니다. 특히 1기 졸업생들 중 치앙라이를 중심

으로 전도하여 450여명의 결신자를 얻었고, 2기 전도훈련생 중에는 전도

지 만장을 돌린 훈련생도 있습니다. 남쪽지역에서는 개척교회가 세워지고

10여명의 결신자를 얻기도 하였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이들을 통하여 교회

가 부흥하고 개척의 역사를 이루시고 계심을 확신합니다.

후아이파담교회 헌당예배 성은교회 지원 (2월 6일-7일)

야생 코끼리를 만나지 않도록

기도하면서 가는 산길! 이해가

되시나요? 산 속 깊이 꼭꼭 숨어

있는 후아이파담동네를 향하여

가고 오면서 주제가 야생 코끼리

였습니다. 이 지역에 100여 마리

가 있으며 가는 길에 야생 코끼

리의 여러 흔적들을 볼 수 있었

습니다. 비포장길을 4시간 정도

를 마음 졸이며 가면서 코끼리가

나타나면 어떤 길로 피해야하는지? 누가 가서 코끼리를 먼저 달랠 것인

지? 결론은 제가 먼저 가서 코끼리를 달래면 자신들은 도망을 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현지인들이 가야 어느 정도 무마하여 시간을 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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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지 않는냐고 반문하였지요. 이 동네는 복음이 전파되어 80여명의 교

인들이 함께 모여 헌당감사예배를 드리고 돌아왔습니다. 치앙마이에서 차

로 가는 가는데 8-9시간 걸립니다. 이 깊은 산중까지 성령님께서는 역사

하시고 복음을 전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가난하게 살아도 영적으로 부유

케하시는 성령님의 은혜가 큽니다.

지원하는 목회자 수련회 (2월 15일-19일)

지원하는 목회자 부부 초청 수련회를 우돈타니의 훈련원에서 가져 25명

참석이 참석하였습니다. 저희가 지원하는 사역 동역자들이지만 서로 알지

못하였다가 한자리에 모여 사역을 나누고, 합심하여 기도하고 하루 라오

스를 방문하면서 주님 안에서 하나 되

어 더욱 주님이 맡기신 사역에 충성할

것을 다짐하였습니다. 9시간을 차로

이동하여 오는 과정이지만 처음으로

이렇게 멀리 여행하기도하고 외국을

(라오스) 나간 것도 처음인 사람이 여

러 명 있었습니다. 이들에게는 큰 도

전이요 용기를 가지는 시간이었습니

다. ‘차이’라는 전도사는 10년 전에 한국교회의 지원을 받다가 떠난 전도

사인데 본인의 고백에 의하면 당시에 자신은 민족주의적인 신앙을 가지고

한국교회가 지원하고 선교사가 역할하는 것에 대하여 반감을 가지고 목회

지를 떠났는데 후에 성령님께서 자신을 새롭게 변화시켜 주시어 선교사가

주관하는 훈련에 참석하고 이제는 복음증거를 위하여 사모와 더불어 생활

비를 적게 받는 어려운 생활 속에도 열심히 사역을 감당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고백을 들으면서 그의 헌신에 감동을 받았고 일부 생활비를 지원하

기로 하였습니다.

인도차이나 선교사대회 준비위원 1차 회의 (2월 25일-27일)

제가 11차 인도차이나 (5개국) 회장으로 태국에서 선교사대회를 준비해

야 하는 일로 주님 앞에 거룩한 부담을 가지고 있습니다. 600여명의 선교

사들이 참석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선교대회 준비를 위하여 1차 준비 모

임을 우돈타니 전도훈련에서 가졌습니다. ‘선교사 중심의 나눔의 장과 선

교전략 구상’에 초점을 맞추며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갈 6:2)”라는 제

목으로 방콕에서 열릴 예정입니다. 이를 위한 강사 교섭, 예산 확보를

위한 회장의 책임을 잘 감당하도록 많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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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 훈련원 내의 기독교방송 사역

훈련원에 FM 100의 기독교방송을 시작하여 지난 12월부터 본격적으로

자격증을 가진 방송인과 전기 기술자를 임명하여 오전 6시-저녁 9시에 걸

쳐 방송하여 좋은 반응을 받고 있습니다. 시내 다른 세 교회들에서도 하

루 한 시간 씩 사용하고 있습니다. 감사한 것은 바로 옆집에 있는 아주머

니가 그동안 전도에도 큰반응을 보이지 않더니 이 방송을 들었나 봅니

다. 그리고 믿기로 작정하고 '호반축복교회'에 나와 주기도문 사도신경

을 한 주만에 다 외우고 물이 담긴 종지를 가지고 와 성경을 넘길 때 물

을 찍어 장을 넘기면서 말씀을 읽는 등 놀라운 반응을 보이면서 세례 공

부 반에 들어 열심히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가정 동정

안식년 기간 동안 여러 교회들을 다니며 설교, 선교보고 및 선교사 교

육 등을 위한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태국에 사역이 있어 몇 주씩 다녀오

고 태국 교단에서 한국 교회 방문이 있어 3-4차례 함께 일정을 소화하기

도 하였습니다. 선교사는 한국에 있든 태국에 있든 양국 교회를 대표하는

사역을 감당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부족한 종이 훌륭한 선교사님들이 많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영광스런 장

로회 신학대학의 총동문회가 주는 ‘선교부문의 장한 동문상’을 받게 되어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선교사역에 보이지 않게 삶으로 사역하

는 선교사님들에게 죄송한 마음입니다. 받을만하지 않지만 주님이 더 열

심히 섬기라는 채찍으로 알고 겸손히 ‘주님이 기뻐하시는 선교사’로 남은

삶을 드리길 서원합니다.

저희 가정의 안식년 기간에 유한진-조경숙선교사 가정이 열심히 우돈타

니의 훈련원에서 많은 수고를 하고 있습니다. 위해서 기도부탁드립니다.

기도제목

1. 제 11차 인도차이나 태국 선교대회가 선교사들간의 협력과 선교방향을

제시

하는 성숙한 대회가 되기 위해 강사초청과 필요한 예산을 허락해 주시

도록

2. 방송선교를 통하여 복음을 접한 영혼들이 주님께로 나오도록

3. 지원하는 30여명의 목회자들이 성령님에 충만하며 두 곳의 기숙사 50

여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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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자라도록

4. 세례교육을 받는 5명이 말씀으로 잘 양육되어 성령님의 역사로 온전한

믿음

의 사람을 거듭나도록

5. 안식년에 저희들이 영육 간에 강건하고 주님의 강한 인도와 역사함을

온전히

믿고 나아가도록

후원금지원

_총회선교부선교부문구좌):신한은행구좌 번호: 325-81-0000-3418

-태국의 구좌 번호: NAME: JUN HYUNG CHO

BANK: SIAM COMMERCIAL BANK, UDONTHANI BRANCH

ROUNDING NO.: SICOTHBK

ACC. NO.: 510-4-108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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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보고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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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요란하고 소용돌이쳐도 하나님의 교회와 사역은 성령님의 인도로

성장함에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할렐루야

여러 분들의 기도와 후원이 태국의 영혼들을 일깨움에 감사드리며

복음의 열매가 2011년에 많이 맺길 기도합니다.

전도훈련 3기 졸업식예배 (3월4일)

전도훈련생 3기 등록자가 90명 정도이었으나 3차 훈련(1월17-21일)과 4차

를 (2월28-3월4일) 거치면서 59명이 졸업장을 받게 되었습니다. 강의 중

심이라기보다는 실제 전도훈련을 통하여 자신감을 갖고 지역 교회를 나누

어 나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기뻐하며 돌아왔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승려에게도 복음을 전하였고 관심자들을 지역 교회로 인도하였

습니다. 이 훈련을 위하여 한국에서 강사님들이 바쁘신 중에도 시간과 물

질을 드려 오셔서 강의와 전도 부흥회를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졸업장을

받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생애에 이런 벅찬 감동은 없다고 하며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로 예배드렸습니다. 감사한 것은 교인 졸업식에

참석했던 한 자매는 예배를 드리며 은혜를 받고 믿기로 결단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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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교회 선교 의료팀 25명 메라 난민촌 (2월1일-5일)

태국과 미얀마 국경 지역에 카렌족을 중심한 난민촌이 5-6곳 있습니다.

그 중에서 제일 큰 5만여명이 살고 있는 메라 난민촌에서 의료 진료를 행

하였습니다. 마치 병원 하나를 그곳에 옮겨 놓은듯 했습니다.

의료진은 방콕에서 12시간을 버스로 이동해야했고 3일 진료하는데 마지

막 이틀은 몰려들어오는 사람들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으나 질서를 유지하

며 진료를 받도록 하였습니다. 이들은 정치적으로 난민의 지위를 받아야

하지만 그렇지 못한 가운데 좁은 공간에 5만명이 사는 참 어려(싸이몬목

사가 의료팀에게 감사) 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자유롭지만 갇혀있는

상황입니다. 의료진의 헌신적인 진료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기에 충분

하였습니다. 신학교가 있어 학생들 300명이 공부하고 있는데 20여명이 미

얀마어를 영어로, 카렌어를 영어로 통역하는 수고를 하여 진료가 잘 이루

어졌습니다. 3500명 가까이 진료하였습니다. 의료팀이 귀국 후 이틀 뒤

에 미얀마가 공격하여 난민촌의 출입이 봉쇄되었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진료를 마치기까지 저들을 붙잡고 계신 것입니다. 의료진이 태국에 들어

오기까지 저는 긴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공항 통과에 어려움이 있기 때문

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저희의 염려와 걱정을 기쁨으로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수고한 모든 의료진의 헌신에 주님이 축복하실 것을 믿습니

다.

청년 교회 시작

3-4년 간 청년부와 전도 부흥회를 년 1차씩 주최하면서 청소년-대학생들

을 위한 모임이 태동하도록 기도해 오던 중 치앙마이에서 1월 9일 주일에

뿌이전도사를 중심으로 기독교 중고등학교 학생 6명과 몇 대학생들을 중

심으로 예배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매 주 20여명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으며 이들이 장래 지성인 복음화에 큰 역군이 되길 기도합니다.

안중식목사의 병원 선교 사역: 환자 상담 교육 (2월14-17일)

매년 마다 태국기독교단에서는 안목사님을 모시고 상담교육을 실시해 오

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방콕에서 30명의 원목과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훈

련을 실시하여 좋은 경험을 가졌습니다. 정규코스로 정해 3년의 훈련을

마치면 자격증을 수료할 계획도 갖고 있습니다.

전국교역자 부인회 주최 여선교사 모임

1년 전부터 우리 교단 교역자 부인회에 의뢰하여 여선교사들과의 허심탄

회한 대화의 시간을 갖길 부탁드렸는데 이번에 치앙마이에서 2월8-11일에

열렸습니다. 18명의 부인회원들이 정성껏 많은 준비를 하셨고 좋은 프로

그램으로 웃게하고, 울게하고, 감탄케하는 은혜의 기간이 되었습니다. 황

산성사모님도 오셔서 특강을 해주시고 안애란사모(회장)의 추진력으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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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어졌습니다. 특히 선교사 자녀 기숙사 건립을 위한 관심을 가지고 기도

해주실 후원자가 되실 뿐 아니라 천만원을 후원하여 주셨습니다.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요! 태국교단 총회장 사모님, 태국 목회자 사모회원들,

한국을 방문했던 여전도회원들과 목회자들이 저녁 식사를 대접하면서 양

교단 간의 우정을 더욱 돈독히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씨윌라이싸막키교회 헌당예배: (헌당 3월26일)

학생 토요학교, 유치원을 통하여 열심히 전도하고 있는 씨윌라이싸막키교

회가 건축하면서 재정부족으로 몇 년간 지연되어 오던 중에 증산제일교회

((조천기목사님) 후원으로 완성하여 헌당감사 예배를 하나님께 드렸습니

다. 참 아름다운 건물입니다. 저는 설교하면서 '여러분들의 믿음, 헌신과

희생은 하늘나라에 이것 보다 더 아름다운 교회로 하나님께 기억될 것'이

라고 전하였습니다. 200여명이 모여 축하하면서 하나님의 큰 역사하심에

감사하였습니다.

소망교회 대학생 단기 팀(13명): (1월10-15일)

후아이야싸이교회에는 어린 초등학생 30명이 있습니다. 고아들, 가난하여

부모가 부양하기 어려운 아이들, 몇몇 믿는 자녀들이 있는데 숙소와 부엌

의 시설이 미비하여 숙소를 추가하고 부엌을 신축하여 공부방도 겸하도록

하였습니다. 경사가 있어 짓기 어려웠지만 소망교회 대학부가 지원하여

새 학기 전까지는 (5월) 완공할 것입니다. 대학생들이 빗물에 젖는 진흙

경사에 미끄러지며 만든 남자 숙소와 부엌 지붕

을 이룰 빔에 페인트를 칠하면서 몸으로 주님의 사랑을 느끼며 실천하게

되었습니다.

선교 단신

-분당구미교회: 빡꽁교회 건축지원 (11월 헌당예정)

-PCK 씨니어선교사회의: 캄보디아 대회 참석 (2월25-28일)

-성은교회: 퉁똔응위우 카렌교회 건축 지원

-신학생 장학금 지급: 씨펜(전장학금) 랑씨마(M. Div) 쑤와라(B.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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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보고 12-01

P. O. BOX 136 UDONTHANI, 41000, THAI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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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817647337 +6642266464 www.pckthailand.net

www.churchplantcct.org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습3:17)

2011년 성탄절 (12월25일)

온 인류를 향하신 예수 그

리스도 탄생의 기쁨과 구원 소

식을 주변 태국인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가난하고 어려운 분들을

초청하여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

고 주님의 사랑을 나누었습니

다. 초청 받은 70여명, 성도들

과 어린이들 합하여 150여명이

참석하는 성탄예배! 분위기가

어수선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물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말씀을 듣는

영적인 분위기는 흩틀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짜임새 있게, 질

서 있게 또한 말씀 들음에 초점을 맞추는 분위기와 관심을 갖도록 잘 준

비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전과 달리 모두들 조용한 가운데 말씀을 듣고

질서 있게 예배를 드리게 되어 성령님께서 저들의 마음을 잡고 계심을 알

게 되었고 저들도 해를 거듭하면서 열림 마음으로 성탄예배에 참석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 후로 2명의 주민이 교회에 새로 나오고 있습니다.

이번 성탄절에 그동안 열심히 신앙 생활한 3명에게 세례를 베풀었습

니다. ‘뿔라’자매는 한국 청년과 결혼 준비를 하면서 교회에 나오기 시작

하여 2년을 한 번도 결석하지 않고 예배에 참석하고 부모를 도와 열심히

일하는 성실함과 효심을 가진 자매로서 복음을 받아 예수를 구주로 영접

하였습니다. 문화의 차이는 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주님의 가정

을 꾸미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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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우통’아저씨는 노무자로 해외를 다니며 일하던 중 중풍으로 일을

하지 못하고 어렵게 살고 있습니다. 교인 친구의 권유로 교회에 나와 2년

간 열심히 예배에 참석하여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는 문맹이며 큰 아들

이 두뇌 발육이 더딘 병이 있어 어려운 상황에서도 주님을 영접하였습니

다.

‘딱’형제는 교인의 아들로 이혼하고 아들 둘이 있는데 2년 만에 세례

를 받은 것입니다. 이들 모두 많은 기도가 필요 합니다.

전도훈련 4기 3차 (2012년 1월30-2월3일)

교단 총회 국내 선교부에서 손윤탁목사님(남대문교회)와 송태승목사

님(창신교회) 부흥 집회 강사로 오성춘목사님(광장교회)이 오셔서 모두

풍성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훈련생 한 사람이 이탈하여 하루 사라졌다가

나타나 무슨 일인가 했더니 과거에 같이 병원에서 일하던 동료에게 전도

하고 함께 훈련원에 나타나 그 동료가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기도를 부

탁하는 것이 아닌가! 강사로 참석하신

태국 총회장이신 분랏목사님께서 직접

안수로 영접 기도를 하였습니다. 과거

에 기독교병원에서 일하면서 믿지 않

았으나 여러 해가 지나 오늘 주님을

마음에 진정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렇듯 주님은 한 영혼 한 영혼을 부

르시고 구원하게 하시고 계심을 봅니

다. 질그릇 같은 우리 모두를 사용하

시어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고 계심을 확신 합니다.

13노회 목회자 수련회 및 장로 가족 수련회(2월6일-9일)

강사로 안중식목사님이 오셔서 사도행전을 통한 교회성장의 모델을

배우고자 40여명의 목회자들이 모여 말씀을 진지하게 듣고 스스로를 생각

하면서, 새 시대에 맞는 변화하는 목회자로서 성령님 안에서 스스로 변화

하고 교회가 변화하도록 쓰임 받고 있는가를 생각하는 기회였습니다. 남

의 탓으로 돌리는 분위기가 변하여 스스로 변하지 않는 이유를 찾고 회개

하고 교회 활성화에 쓰임 받기를 다짐하는 기회 되었습니다.

장로 20 가정이 우돈 근처 산 속 공원에서 가진 수련회는 장로 가정

으로 하나님의 사역에 쓰임 받는 존재인지? 아니면 주님의 길은 막는 존

재인지? 아굴라와 부리스길라 부부 같이 목회에 협력자로서 쓰임 받고 있

는지를 점검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노회장께서 깊은 영감의 말씀을 듣는

기회를 가져 안목사님께 감사하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목회자와 지도자들

의 가정이 영적으로 좋은 본이 되어 교회와 성도 나아가 사회를 변화시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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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역사가 곳곳에서 일어나길 기도 합니다.

청소년을 위한 엘리교회: 뿌이전도사 (사진 속 안경 착용)

교회가 창립된지 1년이 지나갑니다. 예배 처소가 마땅치 않았으나 새

로운 장소로 옮겨 30여명이 나와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다라학교 고3

졸업생 중에 좋은 대학 진학생 10명 중에 10명 모두 엘리교회 출신임을

알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 중 한 학생은(사진 속 왼쪽 끝) 집에

서 강하게 반대하고 뺨을 얻어맞는 어려움이 있었으나 믿음으로 잘 견뎌

지금은 허락을 받은 상태로 대학으로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이 교회가 점

점 성장하여 대학생 사역도 활성화되길 기도 합니다.

뿌리차목사 안수 (2012년 2월14일)

태국에서 은퇴할 나이(60세)가 지난 65세에 목사 안수를 받는 뿌리차

목사! 24년 전에 처음 만나 장로로서 교회를 함께 섬겼던 분이지만 만년

에 목회자로 10여 년간을 목회하다가 아들 벌되는 전도사들과 함께 목사

고시를 치고 떨어지는 우여곡절 끝에 오늘 드디어 목사 안수를 받은 것

입니다. 목회하는 10년 간 한국교회가 지원하여 왔습니다. 과거 한센병

환자와 가족을 중심한 교회에서 목회하는데 교회가 과거와 달리 안정되

고, 깨끗하고, 질서있는 교회 모습으로 변화되어 있어 너무도 놀랐습니

다. 사모님의 헌신이 이렇게 변화시켰다는 말을 듣습니다. 목사 안수 받

은 후에 며느리와 손자에게 직접 세례를 베풀기도 하여 참 의미 있는 예

배시간 이었습니다.

헌당예배: 2012년 1월21일-22일

성은교회가 지원하여 파수타교회와 퉁똔응위교회 헌당예배를 하나님

께 드렸습니다. 작년 홍수로 도로가 유실되고 다리가 끊어졌으나 건기라

4륜구동 차량을 빌려 치앙마이에서 8시간 운전 후 도착하여 양 일에 한

곳 씩 헌당예배를 드렸습니다. 추운 날씨로 떨면서 잠을 제대로 자지 못

하고 장거리 여정으로 건강상에 어려움이 있었으나 은혜 가운데 헌당예배

를 드리고 다시 8시간 걸려 치앙마이에 돌아왔습니다. 산족 사역은 항상

알 수 없는 상황들이 일어나기에 많은 기도와 전천후를 위한 선교장비가

필요 합니다. 깊은 산중에 교회가 개척된 역사를 보니 15년 전에 9살 난

아들이 황달로 죽음 앞에 놓이자 아버지가 멀리 있는 목사님을 초청하여

기도를 부탁하였고 그 기도 후에 병이 나아 한 가정으로 시작된 구원 역

사가 45 가정 중 40 가정이 예수님을 믿고 그 청년은 현재 동장으로 동네

를 섬기고 있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아닌가요? 주님은 깊은 산

중에도 다 같은 은혜로 역사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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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단신:

-초원교회 후원으로 싸막키탐 푸키야우교회가 건축 중입니다.(5월 헌당예

정)

-평촌교회 단기 선교 팀 훈련원 중심으로 태국 동북부 사역

기도제목:

1.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께서 저희 가정과 사역을 통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실 정도로

영광을 2012년에 돌리도록

2. 1년 간 2개의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자를 파송하도록

3. 전도사역, 방송사역, 훈련사역을 통하여 현지인 지도자를 많이 세우고

교회가 성장하고

열매 맺는 사역이 되도록

4. 방학인 3-4월과 그 이후에도 많은 사역이 있어 적은 인력으로 감당하

기에 어려운데

음악, 스포츠, 언어를 가르칠 단기 청년들을 허락해 주시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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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 사

저는 태국기독교총회(The Church of Christ in Thailand)의 대표자로

서 조준형 목사께서 The Light Mission 상을 받게 됨을 진심으로 축하드

립니다. 이같은 수상은 조준형 목사 개인, 가족,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PCK)의 영광뿐만 아니라 저희 태국기독교총회의 영광이기도 합니다. 조

준형 목사는 태국기독교총회의 동역자로서 저희 총회와 매우 오랜 기간

사역하면서 복음 전도자로서, 교회 개척자로서, 태국기독교총회 신학대학

의 교수로서 봉직하였습니다. 이뿐 아니라 복음 전도와 교회 개척을 위해

태국기독교총회의 교회개척훈련원을 세우는데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와 함

께 혼신의 힘을 다해주셨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저희로서는 잊을 수 없

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조준형 목사께서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의 한 분

으로서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와 저희 태국기독교총회가 50여년이 넘도록

서로 협력할 수 있는 훌륭한 가교 역할을 잘 해주신 점입니다.

조준형 목사는 개인 뿐아니라 가족이 헌신적으로 봉사하였고 또한 존엄하

신 하나님께 헌신을 다하였습니다. 조준형 목사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맡기신 복음 전파의 사명을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생명을 다하기까지 이

일을 감당하실 것이기에 조준형 목사께서는 이처럼 크고 영광스러운 상을

받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 모든 일에 우리 주님 영광 받으시고 조준형 목사와 가족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언제나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태국기독교총회 총회장: 분랏 부아옌

(번역: 염신승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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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2012년

더라이트미션

장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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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학생

선교 장학금 감사의 글 (권한준)

성명: 권 한 준

이렇게 장학금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신 모든 분께 감사의 인

사를 드립니다. 저는 현재 미국 풀러신학교에서 선교학 석사 과정의 마지

막 학기를 보내며, 이어서 박사 과정을 공부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습니

다. 일과의 대부분을 하나님을 배우는 일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굉장한 일이지만, 장성한 사람이 부모님을 비롯한 여러 분들의 도움의 손

길에 의존해 생활한다는 것은 큰 부끄러움이기도 합니다. 머지않아 하나

님께서 이 사랑의 빚을 갚는 마음으로 힘껏 일할 기회를 주실 것이라 믿

습니다. 그때까지는 어린 아이처럼 날마다 하나님의 선교를 배우며 진지

하게 경이로워하는 이 은혜의 길을 감사한 마음으로 열심히 걸어가겠습니

다. 다시 한 번 이광순 교수님을 비롯해 도와주신 모든 분께 머리 숙여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그리고 주님을 통해 불러주신 이 벅찬 구원의

길을 수많은 동역자분들과 성령님 안에서 함께 걸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섭리를 찬양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더 알고 싶다”는 저의 단순한

기도에 놀랍도록 신실하게 응답해 주셨습니다. 저는 5살 때 부모님을 따

라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고 청소년 시절까지는 그저 즐겁게만 교회 활동

에 참여하는 학생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청년부를 계기로 하나님과의 인격

적인 관계를 시작하였고 점차 교회와 구원의 의미를 진지하게 깨닫게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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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습니다. 그리고 대학교 졸업 후 긴 고민 끝에, 하나님에 대해 알고 싶

다는 단순한 바람을 따라 신학교에 지원했습니다. 신학 공부와 사역을 병

행했던 이후 몇 년은 하나님을 점차 깊이 알아가게 된 은혜의 시간이었

고, 신학교에 오기 전에 품은 저의 막연했던 소망에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신실하게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제 인생의 소명이 점차

뚜렷해지게 되었습니다.

2008년에 교역학 석사과정을 졸업한 이후, 저는 성경을 더 공부

할 필요를 느끼고 구약학 석사 과정에 지원해서 공부를 이어갔습니다. 그

리고 그와 동시에 학교 부속 세계선교연구원에서 전임 조교로 근무할 수

있는 길도 열렸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학비를 해결하기 위한 목적이었

지만, 선교연구원에서의 경험은 그동안 성서 본문에 치우쳐있던 저의 신

학이 조금씩 균형을 찾아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러 선교 세미나와 강

연회에 참여하고, 선교사님들과 교류하고, 선교지들을 방문하고, 선교학

문헌들을 번역하면서 저는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일하고 계신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선교학으로 공부의 영역을 넓히게 된 계기는 두 가지입니

다. 첫째로, 구약학 석사 논문을 쓰던 중 이사야 본문 안에서 예언자의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뚜렷한 선교 계획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

로 인해 저는 과연 선교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새롭게 품게 되었습니

다. 둘째로, 당시 저는 예레미야와 이사야를 묵상하던 중에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고발과 심판이 한국교회에 그대로 적용된다는 생각에 큰

두려움을 갖게 되었지만, 사역 현장에서는 그런 현실 속에서 별 다른 변

화를 이끌어내지 못하는 자신의 무력함을 보며 절망할 뿐이었습니다. 그

러다가 어떤 계기로 듣게 된 선교학 세미나를 통해 한국교회가 나아갈 방

향을 보게 되었고, 그것을 사역하던 부서의 교사들과 나눴을 때 뒤따르는

긍정적인 변화들을 확인하며 선교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을 다지게 되

었습니다.

작년에 풀러신학교로 온 이후 제가 배운 것을 요약하면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로 저는 낯선 땅에서 제 자신이 연약해지고 제 삶이 불

안정해졌다고 느낄 때 그 어느 때보다도 친밀하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길을 찾을 수 없을 때 하나님

께서는 놀라운 방법으로 저의 걸음을 인도하시며 제가 더 하나님을 신뢰

하고 사랑하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둘째로 제가 경험했던 하나님의 특

별한 임재가 안정된 삶을 떠나 온 수많은 다른 학생들에게도 동일하게,

혹은 그 이상으로 임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저는 모든 사람과 문화를 동일

하게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커다란 사랑 앞에 겸손해졌습니다. 그리고 동

시에 사람들을 다양하게 지으시고 그에 맞춰 다양한 방식으로 일하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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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다양성을 보게 되었습니다. 셋째로, 그 다양성을 아우르며 지역

과 교파를 초월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은 수많은

다양성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선교 안에서

함께 소통하고 연합하도록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랑

하시는 교회와 세상이 그것을 창조하신 분의 신비한 존재 양식, 즉 삼위

일체를 닮아간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배운 바로 ‘선교’라는 말은 본래 ‘삼위일체’처럼 하나님의

속성을 가리키는 용어였습니다. 하지만 16세기 이후 교회로 밀려든 권력

화와 세속화의 물결은 선교가 마치 교회 주도의 확장 활동을 가리키는 말

인 것처럼 그 의미를 인간화시켜 놓았습니다. ‘선교’의 본래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보내심’입니다. 다시 말해, 선교란 피조 세계를 일방적으로 지

배하시지 않고, 대신 지속적으로 사역자를 보내시는 하나님의 독특한 성

품에서 비롯된 용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교에는 하나님의 통치 외

에 두 가지 요소가 포함되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사역자 간의 친밀

한 연합, 그리고 사역자와 다른 피조물 간의 친밀한 연합입니다. 이 둘은

하나님의 선교가 온전히 이루어지기 위한 필수 요건이면서 동시에 하나님

이 의도하셨을 선교의 결과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선교의 사명을 부여받았다는 말은, 세상을 한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사랑을 전달할 사역자로서 교회를 택하여 다시

세상으로 보내셨다는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선교는 부자 교회가 가난

한 나라에 교회를 이식하고, 그들도 부자가 되도록 베푸는 것이 아닙니

다. 우리의 부름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참여하는 것이고, 세계

곳곳의 다양한 교회들과 한 성령님 안에서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

다. 부자 교회는 물질을 전해주러 가서, 가난한 교회 가운데에 임재하시

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지성적인 교회는 이론적이고 사변적인 신학을 전

해주러 가서, 초월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영적이고 체험적인 신학을 배웁

니다. 발달한 문화권의 교회는 하나님의 법과 공의를 세우려고 가서, 세

상의 고통을 끌어안으시는 하나님의 고난당하는 교회를 보게 됩니다. 물

론 이와 정반대의 방향으로도 하나님의 선교는 진행되어 왔습니다. 이렇

게 모든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함으로써 그분을 더 온전하게 이해

하게 될 뿐 아니라, 함께 그리스도의 성숙한 몸으로 자라는 것 같습니다.

한국 교회는 선교에 앞서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이

웃들과의 사랑의 교제를 회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과거 이스라엘의 실수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이스라엘은 무엇보다 하

나님의 선교가 인간의 신학에 의해 제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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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했습니다. 그래서 마치 자신들의 손으로 지은 성전 안에 하나님이 갇혀

계신 양, 유대 신학 안에 그것과 상충하는 예언자들의 외침을 가두려 했

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자신이 모든 족속을 위해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약속의 땅을 위해 구원받은 것처럼 살았습니다. 그러나 무

한히 창조적이며 날마다 신실하게 일하시는 하나님의 선교 앞에 우리는

신부가 새 단장을 하듯 끊임없이 우리의 하나님 이해를 새롭게 해야 합니

다. 그리고 무익하지만 은혜로 택함을 받은 종과 같이 겸손하게 형제를

향해, 이웃을 향해 그분의 사랑을 증거해야 합니다.

저는 한국 교회를 향한 안타까움을 가지고 이곳으로 떠나왔지만,

하나님께서는 작은 아이의 조바심을 꾸짖으시고 대신 하나님의 위대하심

을 조금씩 바라보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새로운 일

을 행하시기 때문에 한국 교회가 이스라엘의 과거 실수를 그대로 반복하

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분명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를 그분의 선교에

동참시키시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인간의 모든 예측을 뛰어넘으시는 하나

님의 섭리를 찬양합니다. 오늘도 각 사람을 흔들어 불러주시는 하나님,

인간의 사변보다 훨씬 가까이에서 우리와 대화하길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선교의 부름에 응하는 모든 지체와 교회에게 보여주실 놀랍도록 풍성하신

능력과 지혜와 선하심을 찬양합니다. 저의 고마운 마음을 전하는 모든 분

들의 평생에 이 찬양이 끊이지 않기를 축복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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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학생

자기소개서 (학업계획서 및 선교비전을 포함하여)

성명: 이원재

저는 현재 동아프리카 케냐에서 선교사로 사역하고 있는 이원재 선교사

입니다. 불신가정에서 태어나 1976년 경신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처음으

로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1977년 여

의도 광장에서 열린 민족복음화 대성회를 참석하면서 선교사가 되기로 서

원을 하였습니다. 핍박과 반대를 받으면서 신앙생활 하던 중에 주님의 은

혜로 대부분의 가족과 친족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어 우리 가문의 신앙의

첫 열매인 제가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느꼈기 때문입

니다. 그 이후 1997년 선교사로 파송을 받기까지 단 한 번의 흔들림이나

생각의 변화 없이 선교사가 되기 위해 기도하고 준비하였습니다.

장로회 신학대학 신학과와 장신대 신대원을 마친 후 1990년 이화여대 특

수교육과를 졸업하고 은평특수학교 교사로 일하던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

혼을 하였고, 그 이듬해인 1991년부터 약수동 소재 신일교회에서 전임전

도사로 사역을 했고 서울노회에서 1993년 목사안수를 받은 후 동교회에서

계속하여 부목사로 사역을 하다가 1997년 동교회의 후원으로 총회의 파송

을 받았습니다. 선교지에 부임하기 전 제게 부여된 사역의 특성상 좀 더

공부를 하는 것이 필요하여 아내와 함께 영국의 버밍업에 소재한 셀리옥

칼리지(현 버밍엄대학 소속)에서 1년간 선교학을 공부하여 석사과정을 마

쳤습니다.

1997년 7월 이곳 동아프리카 장로교단(Presbyterian Church of East

Africa-PCEA)의 초청으로, 이곳 동부 아프리카 케냐의 ‘키쿠유’라는 곳에

위치한 PCEA교단 신학대학에 교수로 사역을 시작하였고 현재까지 이곳에

서 주로 선교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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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로 사역을 하면서 동시에 지역노회에 소속하여 목회에 참여해왔고

지역의 절실한 필요와 요청에 의해 ‘나록’ 이라고 하는 지역 관내에 고아

원을 설립하여 31명의 고아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제가 사역하고 있는 케냐는 개척단계의 선교지는 아닙니다. 이미 많은

그리스도인이 있는 나라입니다. 다만 통전적인 관점에서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 필요하고 인재양성을 통하여 세계선교, 특히 하나님나라의 선교에

필요한 일꾼들을 양성하는 것이 시급한 곳입니다. 이를 위해 저희 예장통

합교단과 동아프리카 장로교단의 선교협력관계(MOU)를 체결하여 선교동역

자로 사역을 하게 되었고 협력사역의 일환으로 제가 사역하고 있는 동부

아프리카 장로교대학(PUEA)에 기독교교육과와 연구센타를 설립하여 케냐

를 비롯한 인접국가의 기독교교육 교사들을 양성하고 각종 자료개발을 하

려고 합니다. 현재 기독교교육 관련학과가 전혀 없는 기독교 대륙 아프리

카에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일은 장로회신학대학 대학원에서

기독교 교육을 전공한 아내와 함께 해나가려고 합니다. 작년에 이곳에서

평생을 보낸 저희 아이들이 모두 한국의 대학으로 진학을 하여 이제 저희

들은 사역에 좀 더 집중할 수 있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저와 제 아내 진은현 선교사는 이곳 PCEA 교단에 꼭 필요한 두 분야인

선교사 양성과 기독교 교육 교사를 양성하는 일에 앞으로의 사역의 초점

을 맞추려고 합니다. 21세기의 교회의 미래가 아프리카 교회에 달려있다

는 믿음과 소신을 가지고 이들과 협력하여 세계복음화에 필요한 일꾼들을

이곳에서 양성하는 것이 저희의 사역의 비전이고 목표입니다.

이에따라 현지 교단과 나라에 필요한 고급일꾼들을 양성하기 위해 제

자신이 좀더 학문적으로 훈련되어지고 이에 필요한 지식을 쌓는 것이 필

요하여 선교학박사과정을 시작하게 되었고, 이 공부를 통해 그동안 경험

해온 아프리카 교회의 성장과 문화의 함수관계를 역사적이고 실증적인 방

법으로 연구하여 선교방법론에 있어서의 자그마한 학문적 기여를 하려고

합니다.

두 자녀를 대학교육을 시키고 있는 어려운 경제적 상황에서 더 라이트 미

션의 장학금은 제게는 너무도 절실했고 감사한 일입니다. 여러분을 통해

이일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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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학생

자기소개서 (학업계획서 및 선교비전을 포함하여)

성명: 조 정 희

저는 4대째 예수를 믿는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증조부께서는 서구선

교사를 통해서 복음을 접하고 교회를 세웠으며, 조부께서는 6.25 전쟁당

시 교회를 사수하느라 순교하셨습니다. 저의 부친은 장로로 모친은 권사

로 교회에서 귀한 직분을 잘 감당하는 분이셨습니다. 얼마 전 모친께서

돌아가셨는데, 새벽 4시면 어김없이 일어나서 새벽제단을 지키는 분으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거동 못하는 몸을 일으켜 집에서 새벽을 깨우시는 귀

한 분이셨습니다. 형제 중 가장 부족한 제가 주의 종으로 부름을 받게 되

었고, 장신대 신대원을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고 남편과 함께 중국선교

사로서 13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처음 9년은 중국 S지역에서 한국인들

을 대상으로 하는 이민교회를 저희 부부가 공동으로 섬겼으며, 1년간 안

식년을 가진 후에 지금은 X지역에서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3년째 선교활동

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의 사역방향은 중국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하도록 도와서 세계선교를

감당하는데까지 이르도록 돕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 저희의 목회경험을

중국교회에 나누는 것입니다. 현재 중국은 7%~10%가 기독교인인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최소 8천명에서 최대 1억3천명이 기독교인일 것으로 내다

보고 있습니다. 명목상의 교인은 많으나 진정한 성도로서 훈련받은 성도

는 극히 적은 가운데 있으며, 또한 신학교졸업자들이 실제 목회선상에서

부딪히는 여러 난관들을 극복하지 못함으로 부흥을 경험하지 못하는 가운

데 있습니다. 이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 중의 하나인 목회자재교육과 양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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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 확립을 저희가 돕고 있습니다. 선교사 중에 담임목회 경험을 가진

자들이 적은 이유로, 저희의 경험에 의한 사역이 현재 중국교회에 큰 도

움이 되고 있음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교회지도자들에게 설교작성법을 꾸

준히 훈련시키고 있으며, 교회의 양육시스템을 마련함을 돕고 있으며, 이

외에도 가정사역에 있어서도 전무한 중국교회에 가정사역의 기초인 부부

세미나를 곧 시작할 예정입니다. 무엇보다 삼자교회지도자들과의 교류가

시작되어, 가정교회지도자들을 섬겼던 방식으로 삼자교회를 돕기로 했습

니다.

조금은 늦은감이 있지만 이광순 총장님의 권고로 주안대학원대학교

Th.M.과정에 입학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선교학적으로 다시금 선교를 정

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현재 중국교회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고,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음에 있어서도 이전의 무조건적인 신뢰와는 달리 학

위와 실력을 중시여기는 분위기가 되고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석사학위

과정을 밟게 된 것은 적절한 선택임을 다시 확인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이

성장하고 사역의 왕성으로 인해 재정적인 필요가 증가하는 시점에 놓여있

습니다. 만일 선교장학금을 받게 된다면, 현재 학업을 마침에 있어서 큰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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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학생

자기소개서(학업계획서 및 선교비전을 포함하여)

성명: 전 부 일

할렐루야~!! 이렇게 The Light Mission Scholarship 을 신청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또 부족한 저를 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

께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전부 1등’만 하라고 전부일 입니다. 이름처럼 모든 분야에서 1

등 하는 것은 아니지만 주를 향한 ‘열정과 패기’만은 일등 감이라고 생각

합니다. 마이크 없이도 교회 전체를 울릴 만큼 목소리가 우렁차고, 또

181cm의 키와 100kg의 몸무게의 건장한 청년으로 올해 36살의 이제 4돌을

지난 딸아이와 단아하고 미소가 아름다운 동갑내기 아내와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훌륭하신 믿음의 스승들을 만나고 교제하게 되면

서, 주의 종으로 평생 영혼구원에 힘쓰고, 말씀을 섬기며, 사명을 따라

산다는 것이 얼마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지 깨닫게 됨과 동시에 너무나

간절한 마음의 소원이 되었었는데 좋으신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귀하게

받아주셔서 감사함으로, 기쁨으로 주님의 부르심을 따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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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하루에 1시간 이상 기도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3시간은 기도

하려고 노력하며, 부르짖어 통성으로 기도하기를 좋아하며, 음악을 전문

적으로 공부한 것은 아니지만 찬양에 대한 간절함과 뜨거운 열정이 있어

서 찬양인도를 하면 와이셔츠가 다 젖을 정도로 온몸으로 춤추고, 전심으

로 찬양을 드리며 말씀 또한 간절히 사모하여 현재 사역을 준비하는 모든

시간 가운데 말씀을 준비하는데 가장 많은 시간과 열정을 쏟고 있습니다.

특별히 전도와 선교 즉 영혼 구원에 대한 불붙는 열망과 은사가 있어

서 앞으로의 비전 또한 이 땅에 죽어가는 영혼들을 깨우는데 앞장 선 전

도자로, 또한 전도자를 길러내는 양육자로 굳건히 서서 아무런 기대도 소

망도 없는 영혼들이 주님 앞으로 나아와 참된 치유와 회복과 행복을 누리

게 하는데 귀하게 쓰임 받는 것입니다.

청년시절 주님께서 주신 뜨거운 마음으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역과

터미널, 지하철, 공원을 비롯해 아무도 복음을 전하지 않는 룸싸롱, 나이

트클럽까지 복음을 전하였지만 전도와 선교의 전략이 부족하여 열정만큼

의 열매를 맺지는 못했는데 하나님의 선한 인도하심으로 열정에 맞는 선

교적 전략 또한 훈련되어질 수 있도록 은혜를 주셨습니다.

전임사역자로 섬겼던 일산 홍익교회는 열두제자 선교회(대표 김삼성

선교사)의 1세대 모델 교회로서 알파를 통한 전도와 양육시스템이 체계

화 되어있고 선교중심 적이어서 매년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은혜로

운 교회입니다. 이 교회에서 현재 핵심전도사역인 알파를 비롯한

T4T(Training for Trainer)등 전도전략에 대해 훈련받았습니다. 전도-

양육파트를 담당하여 양육 전반에 관련된 강의와 설교로 섬겼으며 특별

히 전도사역을 전담하여 아파트전도세미나, 관계전도세미나, 전도 특

강, 고구마전도학교 등을 운영하며 성도들을 동기부여하고 훈련시키는

사역을 하였습니다. 또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 가장 행복한 일임으로

행복한 전도 팀을 세워 100여명의 전도대원들과 함께 새롭게 입주하는

아파트 전도와 기존 아파트 전도, 지역상가와 공원, 중심지 등에서의

노방전도 등을 현장에서 직접 지휘하며 신나게 전도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과 은혜가운데 목회자로 부름 받아 가

슴 벅찬 감동으로 이 귀하고 복된 복음의 사역들을 감당하던 중 존경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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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이신 산성교회 허원구 목사님의 2번의 추천으로 선교사로 파송되질

뻔 하면서 막연히 '부르시면 가야지~'라고 생각했던 선교에 대해 더 깊고

간절히 작정기도 가운데에 소명으로 확신하게 되었고, 선교사로 쓰임받기

에 부족함이 없도록 준비되고자 기도하며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처음에는 선교대학원에 진학할까? 했으나 PAUA(범 아시

아·아프리카 대학협의회)를 통하여 알게 된 인도네시아의 U.K.C.W

(Universitas Kristen Cipta Wacana)기독 종합대학을 품게 되었고

U.K.C.W 대학의 필요에 의해 진주교육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한국어교

육' 전공으로 3년 6학기 과정 공부하게 되었고, 이 과정을 이수하면 ‘교

육학석사학위’와 함께 ‘한국어교원 2급’ 자격이 주어짐으로 대학에서 한

국어를 가르칠 수 있는 자격됨으로 ‘한국어학과’를 개설 할 수 있게 됩니

다.

그래서 저의 아내도 학부에서 일어를 전공했고, 가족 상담으로 석사학

위가 있음에도 같은 과정에 진학하여 함께 공부하고 있으며 과정을 마치

는 대로 대한예수교 장로회(통합)총회에서 진행하는 총회 파송 선교사 훈

련과정을 이수하여 총회 파송선교사로 파송 받을 계획입니다.

U.K.C.W(Universitas Kristen Cipta Wacana)기독종합대학은 ‘창조주

의 말씀에 의해 세워진 학교’라는 뜻으로 2억4천만명의 인구 중 5%기독

교, 이슬람90%, 즉 13억 이슬람 인구 중에 2억의 이슬람신자가 있고, 또

수많은 미전도 종족들이 모여 있는 인도네시아의 동부 자바의 교육 도시

말랑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교육도시 말랑 에는 50개의 대학이 있고

그중 48개가 이슬람 대학인데 정원이 5만 명에 육박하고, 3만명이 한꺼번

에 들어갈 수 있는 모스크사원이 있고, 학교 건물 또한 얼마나 웅장하고

화려하게 지었는지 모릅니다. 남은 2개의 대학 중 하나가 불교대학이고,

나머지 유일한 기독교종합대학이 U.K.C.W입니다.

이 U.K.C.W 대학은 1965년에 인도네시아 기독교재단에 의해 설립되

었으나 1998년 재정의 어려움으로 학교는 패쇄 위기에 처해졌고, 이 소식

을 들은 한국인 평신도들이 인도네시아 최초의 외국인 교육재단을 구성하

여 U.K.C.W 대학을 인수해 지금까지 모든 학생들에게 전액 장학금을 주

고 운영하고 있는 학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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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는 이슬람국가라 드러내놓고 복음사역을 감당할 수 없는

열악한 상황이지만 U.K.C.W 대학은 그 이름자체에 ‘기독’이라는 단어가

들어가기 때문에 이 학교 안에서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뜨겁게 찬양

하고 기도하며, 영적으로 훈련하는 것에 대한 제약이 적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400여명의 학생들이 대학 4년을 지내는 동안 변화되어 복음을 받

아들일 뿐만 아니라, 복음으로 강력하게 무장시켜 주변 이슬람권에 선교

사로 재 파송한다면 가장 좋은 이슬람 선교 중에 한 역할을 감당할 수 있

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이 사역을 준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이 땅에 계시다면 아픈 마음을 붙잡고 눈물을 흘

리며 높은 산, 험한 골짝 마다하지 않고 하셨을 그 일, 그 죽어가는 영

혼들을 가슴에 안고 하셨을 그 일, 그래서 아무런 내일도 기대할 수 없

는 영혼들이 소망을 품고, 회복되고, 살아나서 아름다운 발걸음으로 주

님과 함께 그 길을 가도록 하는 너무나 가치롭고, 너무나 행복한 이 복

된 선교 사역의 도구로 부족한 종을 불러 주신 그 은혜에 감격하며 겸

손한 무릎으로, 눈물로, 마음과 열정을 다해 섬길 것을 다짐하면서 하

나님의 뜻 안에서 선한 인도하심이 있기를 기대하며 기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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