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인의무대미술가展기획자 무대미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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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 우리 무대미술의 뿌리를 찾아서 윤시중: 무대디자인을 하는 사람으로서 부끄러운 일이지만, 김정환 선생님, 장종선 선생님, 최연호 선생님의 성함만 멀리서 들었지 그분들에 대해 자 세히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번 기회에 선생님들의 작품자료를 보고 많이 놀랐어요. 작고하신 무대디자이너 선생님들의 전시를 준비하시게 된 계기 가 무엇인가요? 이태섭: 저도 현장에서 작업하는 무대미술가지 전시를 준비하는 전문기획 가가 아니기 때문에 처음부터 나서서 한 것은 아니에요. 이병복 선생님께 서‘국립예술자료원과예술가의집 1층 전시장에서 무대미술의 뿌리를 찾 는, 작고하신 무대미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아래층 작은 공간 통은 무 대미술을 테마로 한 방으로 꾸몄으면 좋겠다’는 아이디어를 내셨고, 작고 하신 3인을 선정해서 전시하도록 제게 제안하셨죠. 저 역시 선생님들과 연 결지점이 없었기 때문에 말씀만 들었고 직접 뵌 적은 없었어요. 그러나 의 미 있는 작업이겠다 싶어서 흔쾌히 임하게 됐습니다. 그 시점이 4월 같아 요. 관계자들과 3개월 정도 준비했습니다. 윤시중: 뵌 적도 없던 분들이라 자료를 모으기 힘드셨겠네요. 이번 전시회 도록에“오만과편견”이라는말을쓰셨는데, 어떤의미인가요? 이태섭: 저 역시 우리의 과거 무대미술에 대해서 잘 몰랐어요. 변명 같지만, 무대미술이 굉장히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쓰는 작업이다 보니 우리의 과거 를 못 돌아봤습니다. 제가 그렇게 쓴 것은, 우리나라 무대미술의 족적이라 는 것이 전통적인 극장에서 전통에 의해서 작업하시던 부분만으로 알고 있 었거든요. 저도 무대미술을 홍익대에서 전공이 생겨 처음 접하고 외국에 나가 공부한 후 작품에 빠져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 었지, 선배님들이 얼마나 이뤄놨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죠. 실제로 당시에는 무대미술 쪽이 침체돼 있던 것 같아요. 다른 분야에 비해 서 무대미술가의 역할과 중요성을 같은 극장예술가들도 별로 인정하지 않 았고, 기술, 제작 이런 부분들도 다 같이 중요한데 열악 했어요. 제가 일을 시작할 때도 무대미술이라는 것은 대 부분 디자이너들이 직접 무대를 만들어서 납품하는 식 이 일반적이었어요. 저는 나름대로 새롭게 선진화하려 는 생각이 있어서 공부도 하고 일도 했지만 과거의 역사 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전시를 하면서 선배님들의 발자취를 보 니 제가 얼마나 오만했는지 알게 되었지요.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충실하게 많은 자료를 남기셨어요. 또 지금 저희는 미국처럼 소품, 의상, 무대가 세분화되어서 작업 을 하고 있습니다만, 세 분들은 동시에 여러 분야를 하 셨어요. 의상도 디자인하시고 소품도 만드시면서 스케 치나 도면작업 등 작업 내용에도 충실하셨어요. 정해놓 은 틀은 없었지만 전체적인 통일을 이뤄서 나름대로 연 구하고 독학으로 만들어내신 것으로 보여요. 제가 전시를 준비하며 느낀 점은, 우리 공연예술의 뿌리 가 1920년대의 신극이란 불린 서양연극이 들어오면서 무대미술이란 개념도 같이 들어온 걸로 보입니다. 평면 적인 르네상스 스타일의 작화도 있었지만 입체적인 사 실주의적 장치라는 것이 그 당시부터 선보이기 시작했 고요, 그것이 말하자면 몇몇 선생님의 독학에 의한 것이 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윤시중: 전시회를 보면서 그분들이 왕성한 작업을 하신 게 느껴졌습니다. 작품수와 디자이너의 작업 방식이 궁 금합니다. 이태섭: 최연호 선생님이 1000여 편, 장종선 선생님이 500여 편 작업을 하셨어요. 김정환 선생님은 그렇게까 지 많지 않고요. 그래도 저희에 비하면 다작을 하셨죠. 많은 디자이너가 활동하던 시기가 아니었어요. 그래서 무대미술에 예산을 많이 쓸 수 있는 국립극단 같은 대형 극단에서 무대미술 작업을 주로 하실 수 있었습니다. 윤시중: 다른 분들이 이해하기 쉽게 비교를 하자면, 이태 섭 선생님께서는 지금까지 몇 작품 정도 하셨나요? 이태섭: 제가 본격적으로 시작한 게 1990년대부터 22년 에서 23년 됐는데, 200여 편 한 것 같아요. 1년에 10편 정도지요. 당시로서는 지금과는 일하는 방법이 많이 달 라서 직접 제작은 안 하더라도, 제작사와 협업을 해서 어느 정도 제작까지 책임졌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세 분은 직접 제작에 참여하셨던 것 같아요. 특히, 칠하고 그리는 부분은 디자이너들이 직접 손을 대는 경우도 있 지요. 애석한 것은 무대미술이 디자인 과정에서 엄청난 스트 레스를 받는데, 극장에 들어와서도 굉장한 육체적 피로 와 스트레스를 받거든요. 최연호 선생님은 일을 하시다 가 심근경색으로 돌아가시고, 장종선 선생님도 오랫동 안 병상에 계셨고, 김정환 선생님도 일찍 돌아가셨죠. 워낙 노동 강도가 세고 당시에는 야간 일도 많은데다 극 장이라는 밀폐된 공간에서 일을 하니 건강에 좋을 수가 없었을 겁니다. 기록의 중요성과 에피소드 윤시중: 전시를 위한 자료를 모으기가 쉽지 않으셨을 텐 데요. 어떠한 과정을 거치셨나요? 이태섭: 김정환 선생님은 자료가 많지 않아서 남해 국제 3인의 무대미술가展 기획자 무대미술가 25 24 The Korean Theatre Review 201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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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3인의무대미술가展기획자 무대미술가 이태섭ktheater.bravod.co.kr/filedown.html?up_file=3_46.pdf를못돌아봤습니다. 제가그렇게쓴것은, 우리나라무대미술의족적이라

피플

우리무 미술의뿌리를찾아서

윤시중:무 디자인을 하는 사람으로서 부끄러운 일이지만, 김정환 선생님,

장종선 선생님, 최연호 선생님의 성함만 멀리서 들었지 그분들에 해 자

세히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번 기회에 선생님들의 작품자료를 보고 많이

놀랐어요. 작고하신 무 디자이너 선생님들의 전시를 준비하시게 된 계기

가무엇인가요?

이태섭:저도 현장에서 작업하는 무 미술가지 전시를 준비하는 전문기획

가가 아니기 때문에 처음부터 나서서 한 것은 아니에요. 이병복 선생님께

서‘국립예술자료원과 예술가의집 1층 전시장에서 무 미술의 뿌리를 찾

는, 작고하신 무 미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아래층 작은 공간 통은 무

미술을 테마로 한 방으로 꾸몄으면 좋겠다’는 아이디어를 내셨고, 작고

하신 3인을 선정해서 전시하도록 제게 제안하셨죠. 저 역시 선생님들과 연

결지점이 없었기 때문에 말 만 들었고 직접 뵌 적은 없었어요. 그러나 의

미 있는 작업이겠다 싶어서 흔쾌히 임하게 됐습니다. 그 시점이 4월 같아

요. 관계자들과3개월정도준비했습니다.

윤시중:뵌 적도 없던 분들이라 자료를 모으기 힘드셨겠네요. 이번 전시회

도록에“오만과편견”이라는말을쓰셨는데, 어떤의미인가요?

이태섭:저 역시 우리의 과거 무 미술에 해서 잘 몰랐어요. 변명 같지만,

무 미술이굉장히많은시간과에너지를쓰는작업이다보니우리의과거

를 못 돌아봤습니다. 제가 그렇게 쓴 것은, 우리나라 무 미술의 족적이라

는것이전통적인극장에서전통에의해서작업하시던부분만으로알고있

었거든요. 저도 무 미술을 홍익 에서 전공이 생겨 처음 접하고 외국에

나가 공부한 후 작품에 빠져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

었지, 선배님들이얼마나이뤄놨는지에 해서는관심이없었던것이죠.

실제로 당시에는 무 미술 쪽이 침체돼 있던 것 같아요. 다른 분야에 비해

서 무 미술가의 역할과 중요성을 같은 극장예술가들도 별로 인정하지 않

았고, 기술, 제작 이런 부분들도 다 같이 중요한데 열악

했어요. 제가 일을 시작할 때도 무 미술이라는 것은

부분 디자이너들이 직접 무 를 만들어서 납품하는 식

이 일반적이었어요. 저는 나름 로 새롭게 선진화하려

는 생각이 있어서 공부도 하고 일도 했지만 과거의 역사

에 해서는관심이많지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전시를 하면서 선배님들의 발자취를 보

니 제가 얼마나 오만했는지 알게 되었지요.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충실하게 많은 자료를 남기셨어요. 또 지금

저희는 미국처럼 소품, 의상, 무 가 세분화되어서 작업

을 하고 있습니다만, 세 분들은 동시에 여러 분야를 하

셨어요. 의상도 디자인하시고 소품도 만드시면서 스케

치나 도면작업 등 작업 내용에도 충실하셨어요. 정해놓

은 틀은 없었지만 전체적인 통일을 이뤄서 나름 로 연

구하고독학으로만들어내신것으로보여요.

제가 전시를 준비하며 느낀 점은, 우리 공연예술의 뿌리

가 1920년 의 신극이란 불린 서양연극이 들어오면서

무 미술이란 개념도 같이 들어온 걸로 보입니다. 평면

적인 르네상스 스타일의 작화도 있었지만 입체적인 사

실주의적 장치라는 것이 그 당시부터 선보이기 시작했

고요, 그것이 말하자면 몇몇 선생님의 독학에 의한 것이

었다는것도알게되었습니다.

윤시중:전시회를 보면서 그분들이 왕성한 작업을 하신

게 느껴졌습니다. 작품수와 디자이너의 작업 방식이 궁

금합니다.

이태섭: 최연호 선생님이 1000여 편, 장종선 선생님이

500여 편 작업을 하셨어요. 김정환 선생님은 그렇게까

지 많지 않고요. 그래도 저희에 비하면 다작을 하셨죠.

많은 디자이너가 활동하던 시기가 아니었어요. 그래서

무 미술에 예산을 많이 쓸 수 있는 국립극단 같은 형

극단에서무 미술작업을주로하실수있었습니다.

윤시중:다른 분들이 이해하기 쉽게 비교를 하자면, 이태

섭선생님께서는지금까지몇작품정도하셨나요?

이태섭:제가 본격적으로 시작한 게 1990년 부터 22년

에서 23년 됐는데, 200여 편 한 것 같아요. 1년에 10편

정도지요. 당시로서는 지금과는 일하는 방법이 많이 달

라서 직접 제작은 안 하더라도, 제작사와 협업을 해서

어느 정도 제작까지 책임졌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세

분은 직접 제작에 참여하셨던 것 같아요. 특히, 칠하고

그리는 부분은 디자이너들이 직접 손을 는 경우도 있

지요.

애석한 것은 무 미술이 디자인 과정에서 엄청난 스트

레스를 받는데, 극장에 들어와서도 굉장한 육체적 피로

와 스트레스를 받거든요. 최연호 선생님은 일을 하시다

가 심근경색으로 돌아가시고, 장종선 선생님도 오랫동

안 병상에 계셨고, 김정환 선생님도 일찍 돌아가셨죠.

워낙 노동 강도가 세고 당시에는 야간 일도 많은데다 극

장이라는 폐된 공간에서 일을 하니 건강에 좋을 수가

없었을겁니다.

기록의중요성과에피소드

윤시중:전시를 위한 자료를 모으기가 쉽지 않으셨을 텐

데요. 어떠한과정을거치셨나요?

이태섭:김정환 선생님은 자료가 많지 않아서 남해 국제

3인의무 미술가展기획자

무 미술가

이태섭

2524 The Korean Theatre Review 2012. 9

Page 2: 3인의무대미술가展기획자 무대미술가 이태섭ktheater.bravod.co.kr/filedown.html?up_file=3_46.pdf를못돌아봤습니다. 제가그렇게쓴것은, 우리나라무대미술의족적이라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는 주로 곡선과 동양적인

느낌이 강하게 드러나는 선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장종

선 선생님이 채우신다고 한다면 최연호 선생님은 비우

신다고할수있죠.

김정환 선생님은“한국 현 미술의 기초를 세우다”라

고 도록에서도 언급했는데, 장종선 선생님보다 10살 많

으신, 멋쟁이 신사 타입이시고, 공부도 굉장히 많이 하

셨죠. 일본 미술학교에서 공부하셨고, 조선연희주식회

사의 미술부장 등을 맡으셨어요. 1945년에는 서울무

장치소를 설립, 1950년에 국립극장 초 미술과장,

1954년에 서울 학교 미술 학 조교수, 1956년 을지

로 원각사 설립 고증, 1960년 동국 연극학과 교수를

하셨고, 드라마센터에도 참여하셨으며, 특히 예일 에

서 1960년에 록펠러재단 초청으로 수학했습니다. 일찍

이 미국의 무 미술과 기술에 해서 공부하실 기회가

있으셨던거죠.

선생님의 초기 작품인‘세자매’에서 보여지듯이 사실

적인 양식이 주를 이루고 있으나, 후기에는 담하게 생

략하고 추상화 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고 보여

집니다. 저는 우리나라의 현 적 무 미술의 기초를 김

정환 선생님이 만드셨다고 봅니다. 이분이 예일 스쿨 오

브 드라마에서 공부하신 여러 자료를 보면 아주 잘 짜인

공연제작 시스템과 무 기술, 조명에 한 수업 노트 등

이 있어요. 그걸 보면 저희가 공부할 때와 많이 다르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좀 더 교육체

제 속에 자리를 잡았으면 우리나라 무 미술이 더 일찍

틀을 잡고 기술적으로도 더 안정될 수 있지 않았을까 생

각됩니다. 이분이1973년에너무일찍돌아가시면서꿈

을다이루지못하셨던것같아요.

한국무 미술에 한전망

윤시중: 전시하시면서 아쉬운 게 있으시다면 무엇인가

요?

이태섭:이런 무 디자인 기록을 정리해서 전시회를 개

최한 건 처음이죠. 저희도 시작할 때부터 전시할 만한

자료를 모을 수 있을까, 사람들이 볼만할까 고민이 많았

어요. 아쉬운 점은 전시공간도 작고, 김정환, 장종선, 최

연호 세 선생님 말고도 1세 선생님들이 계신데, 그분

들을 다 포함하는 본격적인 전시 준비가 필요하지 않을

까 합니다. 무 미술은 기본적으로 공연예술에 속해 있

기에 전시를 통해 당시 공연상황을 파악할 수 있도록 좀

더본격적으로준비해볼필요가있겠다고생각합니다.

윤시중: 1920년 부터 2012년까지의 무 미술을 느낄

수 있는 전시 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나라의 무 미

술을어떻게전망하세요?

이태섭: 아시아연극은 서양에서 들여온 극장공간과 무

장치가 뒤섞여서 발전해왔다고 보입니다. 세 분 같은

무 미술가에 의해 비로소 자리를 잡기 시작하 습니

다. 지금 우리는 무 장치 제작자와 디자이너의 관계가

거의분업화되어서이루어진다고볼수있습니다.

지금은 세계 어느 나라든 무 장치가 센세이셔널하다

고 하면 누구나 볼 수 있는 상황이기에 그런 향들은

시간과 공간 차이를 뛰어 넘어 이뤄지는 상황이에요. 전

세계 공통 상황입니다. 현재도 계속 서양의 공연예술의

향을크게받고있다고봅니다.

지금 우리가 만들어내는 무 미술이 아주 오랫동안 갈

고 다듬은 서구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오지에

떨어져서 별도로 작업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도

이제는 시스템을 본격적으로 잘 갖추고 등한 입장에

서 연출가들과 공연예술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면 충분

히 서구에 뒤지지 않는 부분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

까, 하고낙관적으로보고있습니다.

윤시중:전시 준비와 더불어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

합니다. (웃음)

_윤시중(극단하땅세 표, 무 미술가)

사진_이찬우(포토그래퍼)

27

탈공연예술촌에 계시는 김흥우 선생님의 협조가 없었

으면 전시가 어려웠죠. 동국 석사학위논문을 쓴 박미

란 씨가 김정환 선생님 작품을 디지털로 복원한 작업이

있어서 활용했습니다. 1930년 에 처음으로 <검찰관>

공연으로 입체적인 무 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어요.

공연사진상태가좋지않지만, 소중한자료입니다.

장종선 선생님은 본인이 전시를 하시면서 책을 내셨어

요. 그 안에 많은 자료가 있죠. 자료를 컴퓨터로 받고 인

쇄해서 전시를 할 수 있었어요. 원본은 확보할 수 없었

고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저작권이 매우 까다로워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특히, 장종선 선생님 후손들과

연락이 되지 않아 걱정을 했는데, 전시를 한다는 기사를

보고 오셔서 고맙다는 말 을 해주셨어요. 최연호 선생

님에 해서는 같이 작업하셨던 분들이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고요. 아드님인 최기봉 씨가 뒤늦게 무 미술계

에 들어오고 현재 국립극단 미술감독으로 있어서 자료

를 받을 수 있었고요. 세 분이 주로 국립극장에서 일하

셨기 때문에 국립극장 자료실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습

니다.

저도 무 미술을 하기에 알지만, 스스로 공연사진을 찍

으실 여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공연 앞두고 정신없이 리

허설을 하는데 그럴 여유가 없죠. 그래서 무 미술가들

은 스스로 자료를 남기기 어렵습니다. 국립극장에서도

멋있게 찍은 무 사진을 찾기가 의외로 어려웠어요. 그

런 게 아쉽네요. 물론 공연은 일회성이고 끝나는 데 묘

미가 있다지만, 후배들은 자기분야의 뿌리에 해 항상

궁금해 한다고 생각해요. 최근에 국립예술자료원이 생

기면서 많은 자료를 정리하고 있어 다행입니다. 어쨌든

이런 전문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분야에

한 의무라고 할까요, 자신들의 작업을 기록하는 것은

굉장히중요하지않나생각합니다.

윤시중:전시된 세 분의 자취를 통해 무 미술사만 뿐만

아니라 우리 연극사가 느껴져 좋았습니다. 특히, 상으

로본원로선생님들의인터뷰가인상적이었어요.

이태섭:이번 전시가 사진을 인쇄해서 기록적인 부분을

보여드리는 것 외에도 인터뷰에 공을 많이 들 어요. 서

보형 화감독을 초빙해 남해에 가서 김흥우 선생님을

뵈었고요, 이병복 선생님, 현 극장 김의경 선생님, 연

출가전세권선생님께서인터뷰를해주셨죠.

전시된 것보다 실제 상의 분량이 길어서 구술에 의한

에피소드가 많이 있습니다. 특히, 당시에는 연출가들이

공연제작을 주로 했는데, 무 제작비를 둘러싼 갈등 등

에 한 이야기가 재미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양면적이

에요. 무 미술은 예술이지만 현실과 잘 타협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지금 무 디자이너들은 디자인에

책임을 지고 디자인료라는 보상을 받지만, 과거에는 전

체 무 제작비와 디자인료에 한 구분이 없이 종합적

으로 관리를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부분들에 한 갈

등도 없지 않았어요. 지금은 디자이너와 무 제작을 해

주는 회사나 무 기술 인력들과의 관계는 예전보다 잘

정리가되어있습니다.

3인의무 미술경향

윤시중:세 선생님의 무 미술 경향을 간략하게 말 해

주시면어떨까요?

이태섭: 1900년 초, 서양식 극장이 서울에 생기면서

무 미술도 서양식 방법을 비슷하게 가지고 왔던 것으

로 보입니다. 르네상스시 처럼 배경막을 그리는 게 당

시로서도 일반적인 무 의 장치 요소로 들어왔거든요.

그 후에는 아까 말했듯 <검찰관>에서의 입체적인 박스

세트가 등장했습니다. 1930년 이전에는 화가처럼 그

림을그리는일이무 장치가들의일이었다고봐요.

김정환, 장종선, 최연호 선생님에 이르러서는 각자의 예

술세계를 가지고 디자인을 하셨죠. 세 분 다 작품을 열

심히 분석하고 자기만의 스타일을 추구한 것으로 보입

니다. 특히, 장종선 선생님께는 미국의 선택적 사실주의

향이 컸던 것으로 보입니다. 건축에 관심이 많으셨고,

재료도 담하게 사용하셨습니다. 건축적인 무 를 완

벽하게 입체적으로 구성하셨죠. 나중에는 방송 쪽에 가

서 일을 하셨지만, 당시로서는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무 미술가로서독보적인존재 어요.

최연호 선생님은 이 분보다 10살 정도 연배가 낮으신

데, 김정환 선생님, 장종선 선생님을 다 겪으면서 배우

셨어요. 이 분들의 시 까지는 도제식 개념이 있다고

보입니다. 최연호 선생님은 장종선 선생님과 공동작업

을 하기도 하셨습니다. 장종선 선생님의 스타일을 그

로 답습하진 않았고요, 주로 한국의 건축양식을 무 화

하는 것에 관심이 많으셨어요. 자유극단에서 작업하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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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시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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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

손상규:내가 왜 그 나이에 연극반을 찾아갔냐 하면, 연극 화과에 다니던 고등학교 때 친구 하나

가 올리는 연극 공연이 있다기에 무심히 보러 가게 됐었거든요. 그 연극이 아주 좋았냐 하면 그

런 건 아니었지만, 내가 살던 세계랑은 너무나도 다른 세계가 거기 있어서 호기심이 일었죠. 특

히 그 과정이 궁금했던 것 같아요. 어떤 과정을 거치기에 저런 세계를 만들어서 사람들한테 보여

주는 걸까…… 오래 할 생각은 아니었고요, 그저 고시생의 반복적인 생활에서 벗어나서 한 번쯤

저런세계를경험해보고싶다정도의욕구 어요…….

하지만 그‘한 번쯤의 경험’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고, 학을 졸업할 무렵에는 양종욱과 콤비

를 이루어 양손프로젝트란 이름을 내걸고 있었다. 두 사람은 틈만 나면 부지런히 공연을 기획하

거나 연극과 관련되는 무언가를 배우러 다녔다. 이들은 특히 신체 표현에 관심이 많았다. 졸업

후 손상규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연기과로 진학했고, 양종욱은 조승미발레단에 들어갔다.

양종욱:2년 동안 발레단에 있으면서 좋았던 건 무엇보다 발레를 배울 수 있다는 거 어요. 또 그

발레단이 클래식 발레에서 가족 발레 쪽으로 범위를 넓히면서 캐릭터 연기를 하는 역할이 생겨

나제가할수있는몫도있었고요.

손상규:그런데 제가 계속 꼬셨어요. 연극원을 같이 다니자고. 연기를 전공으로 할 수 있다는

점도 좋았지만, 둘이 같이 학교를 다니면 거기에서 이런저런 작업을 도모할 수 있겠더라고요. 결

국 양 군이 학교에 들어와서 소원을 이뤘죠. 학교에서 야외공연으로 올린 <갈매기>에서는 제가

연출을맡기도했었어요.

양손프로젝트의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린 것은 서울프린지페스티벌로부터 신예 창작자를 발굴하

는 두산아트센터의‘프로젝트 빅보이’를 통해서 다. 2009년에 박해성 연출가와 함께 만들었던

<십이분의 일>이 이‘빅보이’에 선정되었고, 2011년에는 다자이 오사무의 단편소설을 무 화한

<개는 맹수다>가 또다시 같은 수순을 밟아 두산아트센터 무 에 오르게

된다. 비어있는 단출한 무 를 배우들의 참신한 감각과 에너지로 채워가

는 이들의 연극은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두 배우

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 독특한 팀워크 역시 사람들의 관심 상이다.

손상규:프로젝트 빅보이에 선정이 되면서 우리 작업에 한 자신감을 얻

게 된 것 같아요. 또 동시에 우리 팀의 정체성이나 존재 방식에 한 고민

도 시작됐는데, 이런저런 모색과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지금과 같은 팀워

크를 이루게 됐죠. 지금 우리 멤버는 우리 둘하고 박지혜 연출가, 그리고

여자배우인 양조아까지 네 명인데요, 평일 오후면 거의 매일 연습실에 모

여서트레이닝을하거나작품을만들죠.

양종욱:우리가 배우 중심의 연극을 일부러 추구하고 내세우는 것처럼 여

겨지기도 하나본데, 우리로서는 꼭 그렇지 않아요. 연극 동아리에서 연극

을 시작해서 그런지 집단창작식으로 너나할 것 없이 아이디어를 내놓고

다 같이 달려들어 구현해보고 하는 이런 방식이 익숙하고 자연스러울 뿐

이죠. 물론 배우로서 연기하는 일이 가장 즐겁고 좋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스스로를 배우라기보다는 연극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자각하고 있습니다.

연극을만들어내는과정전체가좋고그시스템자체에관심이많은거죠.

극단의 살림은 제가 거의 맡아서 하고 있는데요, 지금 우리가 하는 공연의

규모라면 제가 배우를 하면서 기획과 무 감독 일까지도 그럭저럭 해낼

수 있거든요. 남들보다 훌륭한 기획자가 될 소질은 없을지 몰라도 적어도

우리 팀에게는 내가 가장 좋은 기획자가 아닐까 싶어요. 우리 팀을 잘 알

고 있고, 뿐만 아니라 창작의 일원이니까 우리 작품을 위한 기회를 잘 판

단하고마련할수있죠.

손상규:양 군이 워낙 부지런하고 성실한 성격이라서요, 기획 담당으로서

도끊임없이움직이지만늘새로운걸배우는것을좋아하고또연기트레

이닝 프로그램 같은 것도 가지길 원하거든요. 그래서 지난 번에는 혼자 연

기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어요. 강원도에 있는 극단 뛰다의 워크숍으로

요. 그래서 양 군이 서울에 없는 1주일 남짓 시간 동안이 나머지 멤버들에

게는 오랜만에 맛보는 휴가가 되었죠. 근데 그 유학을 다녀오더니 우리한

테요구하는게더많아져버렸어. (웃음)

양종욱:상규 형이 좀 자유인 기질이 있는 것에 비해서 저는 팀 작업에 있

어서만큼은 마치 보수적인 가족주의자 같이 굴어요. 연극을 사랑에 빗

서 말하자면, 자유연애를 통해서가 아니라 결혼 관계 안에서 더 깊이 있고

온전하게 사랑할 수 있다고 주장하죠. 개인적인 욕망을 좀 누르더라도 팀

워크로 뭉쳐서 해낼 수 있는 많은 일들이 있으니까. 요새 같아선 운 좋게

도계속팀공연이이어지고있어서‘외도’를꿈꿀틈도없지만요.

쉴 새 없이 작품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는 양손프로젝트의 2012년은 이제

세계국립극장페스티벌에 초청된 <개는 맹수다>의 재공연 및 중국에서 열

리는 북경청년연극제 초청공연, 그리고 올 초 두산아트센터의 아트랩 프

로그램으로 발표한 후 11월에 본 공연 무 로 이어가는 <죽음과 소녀>를

남겨놓고 있다. 양종욱과 손상규, 이 두 배우가 보여주는 연기는 깔끔하고

세련된 신체 표현에 철학적 사유가 묻어 있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 자의

식 강한 개인주의자의 분위기를 풍기면서도 묘한 연민과 친근감을 불러일

으키는 것이 매력적이다. 이런 이들의 개성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걸까?

손상규: <개는 맹수다>와 <죽음과 소녀>에는 공통적으로 서사극적인 요

소가 들어가게 됐어요. <개는 맹수다>는 애초부터 소설 텍스트에 연기를

싣는 작업으로 출발한 작품이구요, <죽음과 소녀>에서는 양 군이 희곡의

지문을 사로 말해가며 장면을 진행하는 방식을 시도하고 있죠. 그런데

우리가 신체 표현을 좋아하기는 해도 정작 소중히 여기는 건 텍스트거든

요. 우선 텍스트의 이야기를 잘 따라가려 하고 그 이야기의 특징 안에서

생각하고 거기에 적합하게 표현하려고 노력해요. 관객으로서 남의 공연

을 볼 때에도 마찬가지죠. 이야기 전개가 좀 빈 채로 넘어간다고 느끼거나

이야기 상으로 필요한 것 이상의 감정이 나오는 것 같을 때 불편하고 좀

싫거든요.

양종욱:새로운시도와실험도좋지만어떻게하면내용과형식이일치되게

전달할수있을지신경써요. 멋이나허세를부리지않고요. 그리고저는연

극의 내용만큼이나 형식에 관심이 많이 갑니다. 또 남의 공연을 볼 때, 그

팀이 어떤 질문을 서로 던지고 어떤 창작 과정을 겪어서 그런 결과물이 나

왔는지엿보이면거기에서감동을받고막배우고싶어지고그래요.

단단하고 단란한 팀웍을 이루고 하루하루 신나게 창작의 기쁨을 누리고

있는 양손프로젝트의 양종욱과 손상규. 앞으로 한동안은 지금의 팀웍과

작업방식으로 충분히 만족스러우리라는 이 두 배우가 더 멀리 내다보며

그리는 미래는 어떤 것일까?

손상규:우리나라 같은 여건에서 현실적인 꿈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5년,

10년이 지났을 때 우리 양손프로젝트 이름만으로도 티켓이 매진이 되고

그 수입만으로 다음 공연을 준비할 수 있게 되고 그럴 수 있다면 좋겠어

요. 그리고 예순 살, 일흔 살이 됐을 때 이 분야에서 달인 같은 게 돼서 그

누구보다도 연기에 해서, 연극에 해서 잘 알고 후배들에게도 잘 얘기

해줄수있는그런배우가되어있길꿈꿔봅니다.

양종욱:지금은 연극에 한 열정만으로도 하루하루가 가득 차 있지만요,

지금 하고 있는 이 연극이 지금의 내 생활, 내 인

생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 건지 생각해보면‘잘

모르겠다’싶을 때가 있거든요. 언젠가 내 삶 자

체와 내가 만드는 연극이 더 직접적으로 맞닿게

되는 그런 때가 왔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내 연극

과 내 삶이 행복하게 만나서 나오는 무언가가 관

객들에게도나누어진다면더좋겠고요.

_성기웅(극작가∙연출가, 본지편집위원)

사진_박창현(포토그래퍼, [email protected])

2928 The Korean Theatre Review 2012. 9

연극전체를고민하고즐기는배우

양손프로젝트의

양종욱, ‘피플’지면에 한국 연극의 미래를 예고하는 젊은 연극인들을 소개하는 자리를 마련하기로 한

후 그 첫 주자가 된 양손프로젝트의 양종욱, 손상규 배우. 오랫동안 짝패로 붙어다니며 손뼉을

마주쳐온 양-손 두 사람의 인연은 10여 년 전 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물여섯 살의 법

학과 복학생으로 고시 공부를 하던 손상규가 어느 날 연극 동아리(연세 학교 극예술연구회)의

문을 두드리고 들어갔던 것. 그리고 거기에서 전공인 화학공학보다도 연극에 깊이 빠져들어 있

던 두 살 아래의 양 군(양종욱)을 만난 것.

손상규

손상규

양종욱 성기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