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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cfd.kookmin.ac.kr 2014년 중남미 여행기-1 - 멕시코 편 - 2007년 멕시코 여행을 한 후, 7년이 지난 올 해 3년간을 준비한 끝에 드디어 어린 시 절부터 가고 싶었던 중남미 여행을 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중남미 여행은 돈, 시간, 체력 이 세 가지가 모두 갖추어져야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올해는 안 식년이라 시간적 여유가 있고, 아직 50대라 체력도 문제가 없고, 1300만 원 정도의 여행 경비가 다소 문제였으나, 지난 3년간 여행적금을 부어 해결하였다. 참고로 현재 새로운 세계 7대 불가사의로 (1) 중국의 만리장성, (2) 이탈리아의 콜로 세움, (3) 페루의 잉카유적지 마추픽추, (4) 인도의 타지마할, (5) 멕시코의 마야유적지 치첸이트사, (6) 이집트 가자의 피라미드, (7) 요르단의 고대도시 페트라를 일반적으로 들고 있다. 이중 만리장성, 콜로세움, 타지마할, 피라미드는 여행을 다녀왔고, 이번 여 행으로 마추픽추, 치첸이트사를 관광할 수 있으니, 세계 6대 불가사의를 보는 셈이라 설 렘마저 드는 여행이었다. 평생에 한번 가기만해도 좋은 중남미 여행이라 지난 3년간 여행지에 대한 내 나름대로 의 정보를 수집하는 한편 함께 갈 파트너를 찾았다. 처음에는 배낭여행으로 약 35일간의 여행계획을 잡았으나, 안전상 문제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자신이 없고 또한 함께 여행할 파트너를 찾을 수 없던 중, 5번째 만에 드디어 고교 선배이며 같은 학교 교수인 박교수 와 함께 패키지여행으로 최종 결정하고, 우리나라 대표 여행사인 하나투어의 단독상품인 [Hola! Latin America! 중남미 8개국 20일] 패키지를 이용하였다. 참고로 이번 여행의 코스와 체류 일정은 다음과 같다. 인천-미국(0)-멕시코(3)-쿠바(1)-파나마(1)-페루(6)- 브라질(3)-아르헨티나(1)-칠레(1)-기내(1)-미국(1)-기내(1)-인천. 앞으로 중남미를 여행할 계획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내 자신 그곳을 다 녀왔고 느꼈던 것을 기록으로 남겨 향후 나 자신을 포함해 이곳을 여행할 분들을 위해 내가 보고 느꼈던 중남미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3월 4일(화) , 첫째날 인천-LA-멕시코시티 이번 여행의 인솔자(이선영씨로 여성)가 오후 4시까지 인천공항 하나투어 카운터로 모 이라고 하여 아침에 학교로 가서 오전 일을 마치고 사업단 회의를 겸해 점심식사를 한 후 집으로 와, 이미 챙겨놓은 여행가방을 들고 정릉 공항버스 정류장으로 가서 2시 20분 공항버스를 타고 3시 반경에 인천공항에 도착하였다. 지난달 캄보디아 여행을 포함해 기 회가 되면 여행을 떠나기 때문인지 여행가방을 챙기는 것이 그다지 문제가 되지도 않았 지만, 지도학생과의 미팅 등 일상사가 다소 문제가 되었다. 이번 여행에서 함께 방을 사 용할 룸메이트인 박선배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4시가 되어 하나투어 카운터로 갔다. 이번에 여행을 함께할 일행 17명을 카운터에서 만나 서로 인사를 나누고 인솔자로부터 전체적인 여행안내를 받을 것으로 예상하였으나, 예상외로 카운터에서는 인솔자가 일행이 오는 대로 개별적으로 안내책자를 주며 개인적으로 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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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cfd.kookmin.ac.kr 2014년 중남미 여행기-1 - 멕시코 편CFDNTLAB/myongpdf/trip/2014Mexico.pdf여행계획을 잡았으나, 안전상 문제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자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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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중남미 여행기-1

- 멕시코 편 -

2007년 멕시코 여행을 한 후, 7년이 지난 올 해 3년간을 준비한 끝에 드디어 어린 시

절부터 가고 싶었던 중남미 여행을 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중남미 여행은 돈, 시간,

체력 이 세 가지가 모두 갖추어져야 제 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올해는 안

식년이라 시간적 여유가 있고, 아직 50 라 체력도 문제가 없고, 1300만 원 정도의 여행

경비가 다소 문제였으나, 지난 3년간 여행적금을 부어 해결하였다.

참고로 현재 새로운 세계 7 불가사의로 (1) 중국의 만리장성, (2) 이탈리아의 콜로

세움, (3) 페루의 잉카유적지 마추픽추, (4) 인도의 타지마할, (5) 멕시코의 마야유적지

치첸이트사, (6) 이집트 가자의 피라미드, (7) 요르단의 고 도시 페트라를 일반적으로

들고 있다. 이중 만리장성, 콜로세움, 타지마할, 피라미드는 여행을 다녀왔고, 이번 여

행으로 마추픽추, 치첸이트사를 관광할 수 있으니, 세계 6 불가사의를 보는 셈이라 설

렘마저 드는 여행이었다.

평생에 한번 가기만해도 좋은 중남미 여행이라 지난 3년간 여행지에 한 내 나름 로

의 정보를 수집하는 한편 함께 갈 파트너를 찾았다. 처음에는 배낭여행으로 약 35일간의

여행계획을 잡았으나, 안전상 문제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자신이 없고 또한 함께 여행할

파트너를 찾을 수 없던 중, 5번째 만에 드디어 고교 선배이며 같은 학교 교수인 박교수

와 함께 패키지여행으로 최종 결정하고, 우리나라 표 여행사인 하나투어의 단독상품인

[Hola! Latin America! 중남미 8개국 20일] 패키지를 이용하였다. 참고로 이번 여행의

코스와 체류 일정은 다음과 같다. 인천-미국(0)-멕시코(3)-쿠바(1)-파나마(1)-페루(6)-

브라질(3)-아르헨티나(1)-칠레(1)-기내(1)-미국(1)-기내(1)-인천.

앞으로 중남미를 여행할 계획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내 자신 그곳을 다

녀왔고 느꼈던 것을 기록으로 남겨 향후 나 자신을 포함해 이곳을 여행할 분들을 위해

내가 보고 느꼈던 중남미에 해 소개하고자 한다.

3월 4일(화), 첫째날 인천-LA-멕시코시티

이번 여행의 인솔자(이선영씨로 여성)가 오후 4시까지 인천공항 하나투어 카운터로 모

이라고 하여 아침에 학교로 가서 오전 일을 마치고 사업단 회의를 겸해 점심식사를 한

후 집으로 와, 이미 챙겨놓은 여행가방을 들고 정릉 공항버스 정류장으로 가서 2시 20분

공항버스를 타고 3시 반경에 인천공항에 도착하였다. 지난달 캄보디아 여행을 포함해 기

회가 되면 여행을 떠나기 때문인지 여행가방을 챙기는 것이 그다지 문제가 되지도 않았

지만, 지도학생과의 미팅 등 일상사가 다소 문제가 되었다. 이번 여행에서 함께 방을 사

용할 룸메이트인 박선배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4시가

되어 하나투어 카운터로 갔다. 이번에 여행을 함께할 일행 17명을 카운터에서 만나 서로

인사를 나누고 인솔자로부터 전체적인 여행안내를 받을 것으로 예상하였으나, 예상외로

카운터에서는 인솔자가 일행이 오는 로 개별적으로 안내책자를 주며 개인적으로 체크

Page 2: cfd.kookmin.ac.kr 2014년 중남미 여행기-1 - 멕시코 편CFDNTLAB/myongpdf/trip/2014Mexico.pdf여행계획을 잡았으나, 안전상 문제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자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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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 여행 경로

인한 후 항공기 탑승 라운지에서 7시 30분경에 만나자고 하였다. 출국수속에 시간이 걸

릴 것을 염려하여 일찍 모이라고 한 것은 이해가 되나, 오후 8시 출발인데 단지 안내책

자를 전달해 주는 것으로 끝나는 미팅을 위해 4시간 먼저 모이게 한 것은 너무 안전제일

을 중시한 것 같아 약간 기분이 씁쓸하였지만, 여러 나라를 여행하는 장기여행이기 때문

이라고 애써 이런 생각을 지워버렸다.

탑승시간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 박선배께 근처 을왕리에라도 가서 바람 쐬고 오자고

제안하였으나, 박선배도 소심한 성격탓인지 늦으면 안 된다고 들어가자고 하여 할 수 없

이 출국수속을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간단히 저녁식사도 하고, 면세점을 기웃거리며 탑

승시간까지의 3시간여를 보내다, 7시 반쯤 탑승게이트로 가니 인솔자도 와 있었는데 아

까 카운터에서와는 다른 정장 옷차림을 하고 있어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하였다.

오후 8시에 내가 탄 아시아나항공(OZ212) 항공기는 인천공항을 힘차게 이륙하였다. 드

디어 그토록 가보고 싶던 중남미 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의자 간격이 넓어 안락하고 기

내 서비스도 좋은 기내에 앉아 가다보니 한 달 전 캄보디아 앙코르와트를 갈 때 탔던 마

치 박스에 채워진 짐짝 같은 취급을 당하는 기분이 들었던 진에어가 떠오르며, 역시 장

거리 여행에는 아세아나나 한항공을 이용하는 것이 좋으며, 돈도 필요할 때는 쓰는 것

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내식으로 보쌈정식이 나왔는데 곁들여 나온 포두부(얇게 포

같이 만든 두부)가 처음 먹어보는 것이라 그런지 무척 인상적이었으며, 이러한 한국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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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 세계인들에게 널리 전파되었으면 좋을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보쌈에는 ‘화요’와

같은 우리나라 전통 고급 증류 소주를 곁들이면 금상첨화일 텐데 아직까지 기내에 양주,

맥주, 와인은 있어도 소주를 탑재하지 않는 것이 이런 것도 사 주의의 잔재(?)인가하는

생각이 들며 소주파인 나에게는 안타까웠다. 긴 시간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서울에서

도 일 년에 한두 편 정도밖에 영화를 보지 않는데, 오랜만에 영화 [겨울왕국], [스파이]

및 [밤의 여왕]을 기내에서 연속으로 관람하였다. 그래도 시간이 남아 이번 여행할 중남

미에 해 그동안 인터넷 등을 통해 수집한 정보를 내 나름 로 다시 한 번 요약해 보

며, 이러한 사실을 이번 여행을 통해 현지에서 직접 확인해 보기로 하였다.

[중남미 전체 개관]

중남미는 엄청난 면적을 가진 륙으로, 중남미의 국가들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륙을 발견

하기 전에는 남미 안데스 지방에 번영하였던 잉카문명과 멕시코 유카탄 반도를 중심으로 마야족

을 비롯한 인디언들이 이룩한 마야문명으로 표되는 원주(민) 문화로 엮어져 있었다. 그러나 16

세기에 코르테스(Hernan Cortes)와 피사로(Francisco Pizzaro)에 의해 이 광범위한 지역이 일거

에 난도질당한 후, 400년 이상을 스페인과 포르트갈의 식민지 통치를 받았으면서 원주 문화는 사

라지고 현재 스페인과 포르트갈 언어권으로 있는 특징을 갖고 있다. 또한 한순간에 륙 전체가

독립되고 모두 함께 근 화를 시작하였으나, 아직 정치적,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있지 못한 특징을

갖고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이 지역을 단순히 지리적 의미로 중남미라고 하고, 언어 문화권으로는 흔히

라틴아메리카라고 지칭한다. 그러나 이 용어는 나폴레옹 3세가 라틴족과 라틴문화의 지위를 높이

려고 처음 명명한 것으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라틴을 표하지 않으므로 어색하며, 스페인과 포

르투갈을 포괄하여 [이베로아메리카]라는 말도 있지만 아직 널리 쓰이지 않는다. 이것들은 모두

서양 쪽에서 아메리카를 본 시각으로, 그 땅에 살던 토착민들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

는 일이지만, 16세기부터 400년 이상을 스페인과 포르트갈의 통치를 받으면서 현재 이 지역은 잉

카와 마야문명으로 표되는 원래의 문화는 철저히 파괴되고 이들의 문화로 체되었으며, 또한

인종적으로도 순수한 토착민은 거의 사라지고, 스페인인과 포르투갈인을 비롯하여 원주민과 그들

과의 혼혈(mestizo: 메스티조) 및 아프리카로부터 강제로 끌고 와서 노예로 만든 흑인과의 혼혈

인종(물라또)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면서도 소수 인종인 백인(중남미로 이주한 유럽인들의 후손들

로 크리오요라고 함)이 지배계급을 차지하고 있어, 이제는 용어를 수정하는 것도 어렵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좀 더 알기 위해 중남미의 역사를 시 적으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492년 8월 3일 스페인의 페르난도와 이사벨 여왕의 후원을 업고 바다 너머에 있을 인도를 찾

아 출항한 콜럼버스는 석 달의 항해 끝에 10월 12일 지금의 서인도 제도에 있는 바하마 군도의

한 섬에 도착한다. 그는 이 섬을 산살바도르(San Salvador)라 명명하였고 최초로 아메리카 륙

에 첫발을 디딘 사람이 된다. 이날은 오늘날에 인종의 날(Dia de la Raza)이라는 국경일로서 스

페인과 전 아메리카 륙의 기념일이 되었다. 하지만 콜럼버스는 죽을 때까지 그가 발견한 이

륙의 일부가 인도가 아닌 미지의 륙이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콜럼버스 이후 바스코 누네아 데

발보아, 아메리고 베스푸치, 마젤란(Magallanes) 등의 모험가가 그 뒤를 잇는다.

항해의 시기가 끝나자 그 뒤를 이어 들어온 것은 이 신 륙에 있을 황금에 눈먼 정복자들로,

신 륙 발견이란 결국 제국을 이루고 살던 원주민들을 무시하는 유럽인들의 오만함을 여실히 보

여준다. 1519년 멕시코 만의 베라크루스에 닻을 내린 코르테스가 1521년 아스텍의 황제 목떼수

마(Moctezuma)를 처형하고 제국을 무너뜨리는 것을 필두로, 남미에서는 피사로와 알마그로

(Diego de Almagro) 두 군인과 두께(Hernando Duque)라는 신부에 의해 잉카제국이 정복되고 만

다. 1523년 11월 황제 아따우알빠(Atahualpa)를 포로로 체포하고 1535년 오늘날의 리마인 시우

닫 데 로스 레이예스(Ciudad de los Reyes)를 건설한다. 1537년 마지막 잉카 황제인 망꼬 까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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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co Capac)을 처형하고 1572년 잉카의 후손임을 자처한 투팍 아마루(Tupac Amaru)의 저항

을 끝으로 잉카제국은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1536년 콜롬비아에 보고타를 건설하고 칩차 족을 멸망시키고, 중미에서는 1545년 마야를 정복

하였고, 1560년 카라카스 시를 그리고 피사로의 부하이며 칠레 정복자인 발디비아(Pedro de

Valdivia)가 1540년 산티아고 시를 차례로 건설하며, 1560년 를 끝으로 약 50년 사이에 중남미

의 제국들은 어이없이 무너지면서 스페인은 이를 모두 평정하고 식민지의 기초를 다진다. 새

스페인 영토로 멕시코를 비롯한 중미, 북미, 서인도 제도를 세우고, 새 까스띠야 영토로 페루, 칠

레를 그리고 새 그라나다 영토로 에콰도르, 콜롬비아, 베네수엘라를 세운다. 이 무렵 멕시코, 볼리

비아, 파라과이, 우루과이, 아르헨티나에서는 은광을 발견하여 량의 은이 유럽으로 유입되었으

며, 이들 나라 중에서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우루과이 세 나라를 특히 라 쁠라따(la plata, 은)라

고 부른다.

약 50년 사이에 중남미의 제국들이 어이없이 무너진 이유로는 먼저 남미의 원주민들이 세운

나라들이 신정 일치의 황제 정치체제를 가졌기 때문에 멕시코의 아스텍이나 페루의 잉카제국 모

두 통치자를 먼저 처형함으로써 적은 수의 군사로 정복이 용이할 수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르네상스를 지나며 발전의 가속이 붙었던 스페인 군 의 기술적 우위 즉 갑옷,

말, 포, 보병, 총 등의 신무기의 위력과 아스텍이나 잉카 제국의 내분도 그 원인이 된다.

스페인의 중남미 정복은 이 땅의 원주민들에게 불행한 역사의 시작이 되었다. 백인들이 들여온

천연두, 홍역, 인플루엔자, 발진티푸스 등 구 륙의 질병들이 신 륙 원주민들의 생명을 파도처럼

쓸어가 버렸다. 콜럼버스가 첫발을 내디딜 당시만 해도 아스텍 제국은 인구가 약 500만 또는 600

만을 헤아리고, 중남미 전체에 5천만 명에서 약 1억까지 추정되던 원주민들이 정복된 지 1세기가

지나가기도 전에 그 수가 90%나 격감하였다. 질병의 원인과 함께 금, 은 광산에서의 강제노역과

노동력 착취 그리고 사탕수수 농장과 흑인 노예 유입 등도 그 원인이다. 이러한 중남미 수탈의 결

과로 유럽은 번영의 절정에 이르렀으며 스페인은 해가 지지 않는 강국이 되었다.

약 300여 년간 수탈을 당하던 중남미에 독립의 바람이 불어온 것은 스페인 본국 태생이 아닌

중남미에서 태어난 백인 지배층 즉 크리오요(criollo) 들의 변화에서 시작되었다. 스페인으로부터

의 아메리카 식민지들이 분리되는 독립전쟁은 1810년 멕시코에서 시작되었으며, 1824년 페루의

아야꾸쵸 전투를 끝으로 25년 만에 24개국이 독립을 달성한다. 약 15년간에 걸친 독립전쟁의 직

접적인 계기는 1807년 나폴레옹이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침입함으로서 야기된 혼란이나, 그밖에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즉, 미국 독립과 프랑스 혁명의 성공에 자극을 받은 크리오요 지식인들의

본토인의 차별에 한 저항은 수탈 위주로 자행된 스페인의 식민지 경제정책과 자유무역을 추구

한 영국의 꼬드김 그리고 크리오요들의 시의회 진출과 정치적 영향력 행사 등의 복합적인 원인이

작용하였다. 그러나 스페인, 포르투갈로부터 정치적 독립을 달성하였지만 영국, 미국, 네덜란드,

프랑스의 경제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던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1810년 7월 베네수엘라의 크리오요인 미란다 장군은 베네수엘라 독립을 선포하여 독립전쟁의

불을 지폈지만 실패하고, 그 휘하의 부하였던 크리오요 출신의 볼리바르(Simon Bolivar)가 그 뒤

를 이어 1812년 제 2차 독립전쟁을 일으킨다. 이로부터 14년에 걸쳐 중남미의 독립전쟁이 벌어

져 중남미 륙은 일 혼란에 빠지게 된다. 중남미 독립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남미 독립의

아버지'인 볼리바르는 타협을 하지 않는 인물로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에콰도르, 볼리비아 등 남

미 북부지역의 독립을 주도하였으며, 지금도 그가 독립시킨 나라들의 도시에 가면 그의 동상이 있

다. 그는 북미처럼 남미 합중국을 꿈꾸며 1811년 남미 최초로 베네수엘라를 독립시킨 후, 1819년

보야까(Boyaca)에서 콜롬비아를 해방시킨 후, 콜롬비아 연방 건설 통령을 역임한다. 또한

1821년 볼리바르 휘하의 수끄레(Sucre) 장군이 까라보보(Carabobo)에서 에콰도르를 독립시키고

같은 해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에콰도르를 묶어서 그란 콜롬비아를 탄생시킨다.

한편 남미 남부를 해방시키며 올라온 산 마르띤(Jose de San Martin) 장군은 1818년 오히긴스

(Bernado O'Higgins) 장군과 함께 칠레를 해방시키고, 오히긴스는 칠레 초 통령에 오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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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시티 레포로마 대로 교차로에 있는

멕시코 독립기념비

군사독재를 펼친다. 현실주의자인 산 마르띤

은 1821년 7월 페루의 독립을 선언하고, 아르

헨티나, 파라과이 등 남미 남부를 해방시킨

후, 1822년 7월 26일과 27일 페루 해방을 놓

고 에콰도르의 과야낄 항구에서 남미를 단일

국가로 만들고자 했던 이상주의자 볼리바르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면하고 밀담을 나눈

뒤 볼리바르에게 모든 권한을 이양하고 독립

전쟁에서 물러난다. 1824년 볼리바르는 페루

의 아야꾸초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페루와 볼

리비아를 해방시킨다. 이후 1825년 상부 페루

는 볼리비아(볼리바르의 이름을 따서)로 독립

함으로써 독립전쟁은 완전히 끝이 났다. 그러

나 독립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볼리바르

는 정치인으로서는 실패를 하고 1830년 그의

은퇴와 함께 그가 꾸었던 남미 합중국의 꿈은

더 이상 가능성이 없게 되었다. 독립 이후 중

남미는 혼란에 빠져들었고 볼리바르가 꿈꾸었

던 중남미 단일 공동체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

으며, 중남미 신생 독립국들은 정치적인 후진

성을 드러내면서 정치적인 안정 확보가 어렵

게 되었다. 즉, 전쟁의 결과로 특출한 개인과

소집단의 독립이 나타났으며 까우디요

(caudillo)라는 새로운 군인 수령이 나타나 무

력으로 권력을 휘두르게 된다. 미국에 이어 아메리카 륙에서 두 번째 독립국인 아이티 흑인 공

화국을 제외하고는 신생 독립국의 지도자들은 모두 크리오요 출신으로 근본적으로는 자신들의 권

익을 확보하기 위하여 독립전쟁을 벌인 관계로, 나머지 민중들을 위한 사회적 경제적인 방면에서

는 근본적인 개혁이 없었는데, 이것이 중남미가 북미 합중국과 비슷한 시기에 독립하였지만 현저

히 낙후된 이유가 된다. 따라서 19세기는 북미가 민주주의 또는 자본주의의 성공적인 실험실이

된 것에 비해 중남미는 그렇지 못하였다. 게다가 지리적으로도 조건이 다르다. 즉, 중남미는 남북

으로 뻗은 험한 안데스 산맥과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아마존 밀림, 게다가 끝없는 불모의 사막

등 자연 지형의 장애로 인해 풍부한 자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외국자본의 먹이

가 되었다. 다만 북미 멕시코는 멕시코 독립의 아버지 이달고(Hidalgo) 신부와 모렐로스(Morelos)

신부 등에 의해 남미의 다른 나라와는 다소 다르게 발전되어 갔다.

이후 근 사에 접어들며 절 지도자 또는 수령이라는 뜻의 까우디요, 즉 독재자의 시 가 펼

쳐지며 정치적 사회적 혼란의 도가니에 접어든다. 이후 군장성과 각 지방의 토호인 까우디요들은

중남미를 표하는 정치인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며, 힘센 자가 절 권력을 행사하는 정치 형태

인 까우디이스모(Caudillismo)가 중남미의 고질적인 정치 파행으로 나타나게 된다. 중남미 정치의

전형인 군벌독재는 식민지제도의 유물인 지주제도의 영화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그 표

적인 예가 우리가 익히 이름을 알고 있는 베네수엘라의 빠에스, 블랑꼬, 아르헨티나의 로사스

(Juan Manuel de Rosas)와 1946년부터 9년간 독재 정치를 편 페론 통령, 멕시코의 산타아나,

고메스 통령, 브라질의 바르가스 통령, 쿠바의 바티스타(Fulgencio Batista) 통령, 과테말라

의 까브레라(Rafael Cabrera), 에콰도르의 모레노(Gabriel Garcia Moreno), 도미니카의 뜨루히요

통령, 아이티의 두발리에, 니카라과의 소모사 부자 등으로 이들은 중남미에 한 부정적인 시각

의 주범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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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기는 태평양을 건너는 10시간 반의 오랜 비행 끝에 현지 시간 오후 1시 반에 미국

LA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기내에서 인솔자가 비행기에서 내리면 통로에서 모이라고 하

여, 비행기에서 내려 통로로 나오자 이번 여행의 우리 일행 17명과 처음으로 면하게

되었다. 남성 8명, 여성 9명으로 이중 6쌍이 부부였다. 서울을 포함해 일산, 부산, 양

산, 층주 등 지역도 전국적이었다. 서둘러 미국 입국수속을 마치고 수하물을 찾는 곳으

로 갔다. 참고로 미국을 경유하는 모든 여행자들은 일단 미국에 입국수속을 하였다가 다

시 출국수속을 밟게 되어 있어, 미국비자가 반드시 필요한데, 전자여권을 갖고 있는 사

람은 최근에는 미국비자를 간단히 컴퓨터상에서 ESTA(Electronic System for Travel

Authorization)를 이용하여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미국에서의 출국수속은 통상 항공사에

체크인하면서 함께 하기 때문에 별도의 수속이 필요 없다.

우리 일행은 각자 수하물을 찾아 모였는데 문제가 발생하였다. 일행 중 한 부부의 수

하물이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인솔자가 항공사측과 이 문제를 해결하느라 시간이 다소

지체되었으나, 우리 일행은 각자의 수하물을 가지고 수하물 검사를 마친 후 다시

Transit 수하물을 부치는 곳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통상은 수하물 검사를 하지 않고 통

과되는데, 하필 공주라는 닉네임을 가진 여성분이 정 수하물 검사에 걸려 시간이 지체

되는 바람에 나머지 일행은 수하물을 멕시코시티로 부친 후 바깥인 공항청사 합실로

나와 기다렸다. 조금 지나자 공주도 무사히 수하물을 부치고 밖으로 나왔다. 확인해 본

결과 분실된 수하물은 다른 사람이 가방이 비슷하여 가지고 간 것으로 판명되었으며, 항

공사에서 찾아 멕시코시티 호텔로 가져다준다고 하여 다소 안심을 하였다. 참고로 우리

나라 국적기는 LA 탐 브래들리(Tom Bradley) 터미널을 사용하고 있는데, 우리가 멕시코

시티로 타고 갈 에어로 멕시코(Aero Mexico) 항공사는 이웃한 다른 터미널을 사용하고

있다. 우리 일행은 옆 터미널에 있는 에어로 멕시코 항공사로 가서 오후 4시경에 체크인

한 후 출국장으로 들어갔다. 에어로 멕시코 항공사의 전용 출국장은 매우 좁아 마치 좁

은 방안에 갇혀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두 시간 정도를 탑승구 게이트에서 기다렸다.

오후 6시 에어로 멕시코(AM669) 항공기가 샌프란시스코 공항을 이륙하여 다시 3시간

반을 비행한 후, 오후 11시 반(멕시코 현지시각)에 멕시코시티에 도착하였다. 착륙 전

비행기 창문으로 내려다 본 멕시코시티의 야경은 백만 불짜리로 매우 인상적일 만큼 멋

졌는데, 이러한 환상은 다음날 그 실상에 해 현지 가이드의 말을 듣고 산산이 부서졌

다.

참고로 멕시코는 관광목적으로 올 경우 3개월간 비자가 면제된다. 그런데 입국수속을

마치고 세관을 통과할 때 보니 실내용 신호등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세관을 통과할 때

이 등에 녹색불이 깜박이면 짐을 열어서 보여줄 필요가 없으며 세관원의 검사도 생략된

다. 물론 만약 빨간불이 깜박이면 가방을 열고 짐 검사를 받게 된다. 통상적으로는 빨간

불보다는 녹색불이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하필 이번에는 일행 중 내가 수하물

검사를 받게 되었다. 문제가 된 것은 한국에서 가져간 고추장 볶음과 깻잎 통조림이었는

데 이것을 세관원에게 설명하느라 다소 애를 먹기는 하였으나 무사히 밖으로 나올 수 있

었다. 앞으로 이런 것들을 어떻게 알기 쉽게 설명할지를 미리 준비해둘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멕시코시티의 베니또 후아레스 국제공항은 공항시설이 상당히 좋은 편으로 시내 중심

부에서 북서쪽으로 약 7㎞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택시·미니버스·지하철 등을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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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하고 화려한 외관을 뽐내는 Fine Arts Palace(Palacio de Bellas Artes)

용하여 20∼40분 정도면 시가지로 나갈 수 있다. 밖으로 나오니 현지 가이드(김국진씨로

젊은 남자)가 기다리고 있어 그의 안내를 받아 버스를 타고 호텔로 향하였다. 7년 전 멕

시코시티를 발로 걸으며 여행한 덕분에 호텔로 가는 길이 낯설지 않고 그 때의 기억이

주마등 같이 떠올랐다. 호텔로 가는 중에 현지가이드가 멕시코에 해서 간략히 소개하

였는데 부분 여행 전에 내가 조사한 내용이었고, 새롭게 안 사실은 멕시코 화폐인 페

소는 미국 달러와 똑같이 $를 사용하고 있는데, 1 페소가 약 0.1 US 달러에 해당되며,

멕시코에서는 60페소만 주면 필기 및 실기 시험 없이 2종 보통 자동차면허증을 발급해

주기 때문에 멕시코에서는 차도를 건널 때 조심하여야한다고 하였다. 또한 이번 중남미

부분의 나라에서 사용하는 스페인 말 중에서 꼭 기억해야할 단어로 올라(영어로 hi!),

아듀우스(Goodbye!) 그리고 그라시아스(감사표현)를 가르쳐 주었는데 이번 여행 내내 정

말로 요긴하게 사용하게 되었다.

7년 전 여행을 포함해서 이번 중남미 여행 출발하기 전 멕시코에 해 수집한 정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멕시코 일반]

멕시코는 고원지 를 중심으로 형성된 마야·아스텍 문명의 유적지로 유명한데, 이미 BC 2000

년 경 옥수수 농사를 기반으로 한 농경사회인 촌락이 각지에 발달하였으며, BC 1200년경에 성립

된 올멕(Olmec) 문화를 비롯하여 테오티와칸(Teotihuacan), 마야, 톨텍, 아스텍 등 고도로 발전된

문명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하였다.

멕시코시티 근처의 멕시코 중앙고원에서 BC 200년경 일어난 테오티와칸 문명은 태양과 달의

거 한 피라미드를 구축하며 인구 20만의 도시를 이룬 멕시코 중부지역 최초의 큰 문명으로 과테

말라와 온두라스 일부 등을 포함해 남부 멕시코의 약 2/3를 지배하였다. 7세기경 소멸하였으나,

인간 농업사회의 창조주인 케찰코아틀(Quetzalcoatl)과 비와 물의 신인 뜰라록(Tlaloc) 등은 멕시

코 문명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한편 AD 325년에서 AD 975년까지 유카탄 반도와 과테말라 등

에서 번성한 고전기 마야문명은 인구증가 등 환경적인 요인으로 8세기 중반부터 점차 붕괴하기

시작해 10세기 초에는 중부지역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그 후 멕시코 중앙고원의 톨텍, 마

야에 뒤이은 치첸이트사, 우쉬말(Uxmal) 등의 후기 마야문명이 융성하였으며, 멕시코분지 일 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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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는 군국주의적인 국가인 아스텍제국이 일어나 1325~1521년까지 약 200년간 테스코코호(지금

의 멕시코시티) 주변을 도읍으로 번영을 누렸다.

이와 같이 수준 높은 고 문명을 이룩했던 멕시코는 1521년 스페인 탐험 의 장군 코르테스에

게 정복된 후 원주민의 나라 아스텍은 멸망하고, 300년 동안 스페인의 ‘누에바 에스파냐’로서 스

페인의 부왕이 통치한 식민지시 가 전개되면서 고유문화가 거의 사라졌으며, 현재의 멕시코 민족

이 탄생하였다. 16세기는 식민과 포교의 시기, 17세기는 혼혈화가 진전된 시기, 그리고 18세기는

고유의 혼혈문화를 형성하여 독립의 기운을 북돋운 시기이다.

멕시코의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은 1810년 9월 16일 혁명적 애국자로, 멕시코 독립의 아버지

라 불리는 미구엘 이달고 신부의 유명한 ‘돌로레스의 부르짖음(Grito de Dolores)’을 계기로 기운

이 일기 시작하여, 1821년 멕시코의 독립을 인정한 코르도바 협정에 의해서 성립되었다. 독립 이

후 식민지시 가 끝나고 전제정치로부터 공화제로 이행하여 통령이 선출되었으나, 중앙집권주의

파와 연방주의파의 립이 심하여 혼란에 빠졌다. 또한 1846년의 실정은 미국과의 전쟁을 초래하

여, 2년 후에는 영토의 북부를 상실하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  

이를 계기로 연방주의파는 인디언 출신의 베니토 후아레스를 통령으로 하여, 자유주의 헌법

을 반포하고 정교분리를 단행하여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는 등 이른바 레포르마(개혁)를 달성하고

근 화를 지향하였다. 1861년 외채 지불문제로 무력간섭이 비롯되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막시밀리안이 괴뢰황제로 부임했으나 총살당함으로써 간섭정치는 종지부를 찍었다. 뒤를 이어 독

재자 포르피리오 디아스가 등장했으나, 토지소유제 강화가 기폭제가 되어 1910년 11월 20일

멕시코 혁명으로 돌입하였다.

멕시코의 전설 속 풍운의 인물로 널리 알려진 사파타와 판초 비아와 같은 영웅들의 혁명시절을

거쳐, 1917년 2월 5일 국가의 권리와 농민·노동자의 권리가 보장된 혁신적인 신헌법이 시행되었

으며, 오늘날 멕시코의 근 국가로서의 번영은 이 신헌법을 바탕으로 구축된 것이다. [아시엔다]

라 불리던 토지 소유제도는 농지개혁으로 무너졌고, 이후 1934년 취임한 통령 카르데나스에

의하여 집단농장의 창설, 멕시코노동자총연합(CTM)의 결성, 석유업의 국유화 등이 추진됨으로써

경제가 크게 발전하였다. 1970년 중반 집권한 통령 포르티요 때에는 주요 산유국 중 하나가

되면서 빠른 경제 발전을 보였다. 그러나 지나친 외채 부담과 1980년 중반이후 계속되는 유가

하락으로 인해 포르티요 이후의 통령들은 심각한 재정 부담을 안게 되었다. 이후 집권한 통령

들은 재정적 위기상황의 개선과 광범위한 경제부양을 위해 노력하였는데, 1980~90년 에 걸쳐 

국영기업의 민영화를 포함한 시장 자유화 조치도 그 일환으로 행해졌다. 그러나 1994년말 페소화

폭락 사태와 사파타 지지세력에 의한 남부 차아빠스 주 폭동으로 어려움도 겪지만, 2000년 70년

만의 역사적인 정권교체가 이루어져 새로운 도약을 시도하고 있다.

◈수도: 멕시코시티(Mexico City)

◈면적: 1,964,375㎢(한반도의 약 9배)

◈인종: 메스티조 60%, 인디아나 30%, 백인 9%

◈인구: 약 1억 2천만 명 (멕시코시티 2천만 명)

◈종교: 가톨릭교(89%), 기독교(6%), 기타(5%) (국교 : 가톨릭)

◈언어: 스페인어

현재 인구문제가 심각하게 두되고 있으며 경제 성장률로는 따라 잡을 수가 없다. 또한 최근

북미 자유무역협정(NAFTA)에 힘입어 경제적 성과를 거두는 듯 했으나 무리한 경제정책으로 회생

불가능한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다.

멕시코는 전형적인 1차 산업국가로 설탕, 커피, 석유, 구리 등의 수출이 주요산업이며, 자동차

와 다른 경공업제품도 생산하고 있다. 현재 페소화의 폭락, 자유민주주의적 정치체계의 미흡으로

고전을 하고 있다. 정치제도는 유럽과 미국의 제도를 혼합한 방식의 연방공화제를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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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지리]

멕시코는 북위 17-33도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북쪽으로는 미국, 남쪽으로는 과테말라, 벨리서

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총면적은 196만 ㎢로 북부고원과 중앙고원, 해안 평야 지 의 3지역으로

나눠진다. 북부고원 지 의 부분은 소노란 사막이 차지하고 있으며 멕시코시티, 과달라하라 등

의 도시가 이곳에 위치하고 있다. 멕시코 인구의 절반이상이 거주하는 지역이기도 하며, 농업지역

과 목장도 발달해 있다. 유카탄 반도를 중심으로 한 서양 연안은 항구도시들이 발달해 있으며

북쪽은 늪지를 이루고 있다. 태평양 연안은 해안평야 지 를 나타내며, 중앙에는 치아빠스 고원이

자리하고 있다. 화산 는 멕시코시티 남쪽 동서로 형성되어 있고 이곳에 멕시코 최고봉인 삐꼬데

오리사바(5,639m)와 뽀뽀까떼뻬뜰(5,452m)이 자리하고 있다.

[멕시코 기후]

지형에 따라 다양한 기후를 나타내는데 전반적으로 11월부터 5월 중순까지는 건기이며, 5월 말

부터 10월말까지는 우기이다. 특히 6월에서 9월 사이에는 계속되는 무더위와 많은 비가 내린다.

지역적으로는 남부해안은 습윤한 기후로 고원지역에 비해 비도 많이 오고 기온도 높은 편이며, 내

륙의 고원지 는 멕시코에서 가장 건조한 지역으로 사람이 거주를 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기후를

보인다. 남부 및 동부의 유카탄 반도는 열 성의 고온 다습한 기후이다. 12월에서 2월까지는 선

선한 날이 이어지며 북쪽지역의 경우는 북쪽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으로 간혹 섭씨 0℃ 가까이 기

온이 떨어지기도 한다.

[멕시코시티]

멕시코시티는 멕시코합중국의 수도이며, 멕시코 연방구의 수도로, 멕시코시티는 서반구에서 역

사가 가장 오래된 도시들 가운데 하나이며, 중남미 제일의 도시이다. 즉, 멕시코시티는 아스

텍 문명의 흔적을 가득 담고 있는 도시로 인구 2천만 명이 거주하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인구밀

도가 높은 도시이다(물론 세계 1위는 도쿄이다). 또한 멕시코시티는 멕시코의 정치·경제 중심지

로, 16세기 이후 라틴아메리카 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멕시코시티는 미국인들이 붙인 영어식

명칭으로, 정식 명칭은 Mexico Destrito Federal (Mexico D.F.)로 멕시코 연방구라는 의미로 워싱

턴 D.C.와 마찬가지로 중앙정부의 직할구로 되어 있으며, 멕시코에서는 멕시코시티를 D.F.(데 에

페)라고 부르고 있고, 그 주위를 도넛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는 것이 멕시코주이다.

해발 2,300m의 고도에 위치한 멕시코시티는 남북으로 약 100km, 동서로 약 60km의 거 한

분지를 형성하고, 그 분지를 4,000~5,000m 산들이 둘러싸고 있다. 연간 평균 기온은 20℃이며

5~11월까지가 우기이고 12~4월까지는 건기에 속한다. 열 에 위치하나 고지에 있기 때문에 월

평균기온은 최고인 5월에도 17.4℃, 최저인 1월은 12.1℃, 연평균기온은 15.1℃이다. 연교차는 작

으나 일교차가 커서 하루 중에 4계절이 있다고 할 정도이다. 연강수량은 726mm로 5∼9월이 우

기, 10∼4월이 건기이다.

멕시코시티는 16세기 초엽까지 계속된 고 아스텍 제국의 수도로 아스텍 문명의 흔적을 가득

담고 있는 도시이다. 원래 이 도시는 원래 산으로 둘러싸인 오래된 평야(옛날 아스텍시 에는 호

수였음)에 위치하고 있으며, 옛날에 호수에 있던 작은 섬들이 차츰 매립되어 하나의 큰 섬이 되었

는데, 이 과정은 아스텍족이 이곳에 정착했을 때부터 진행되었고, 계속 호수가 범람하자 나중에는

계곡 바닥에 있는 호수들을 매립하고 물을 모두 빼내서 육지와 섬(멕시코시티)을 연결하였다고 한

다. 따라서 도시 부지의 심층에 있는 흙이 연하고 고운 점토이기 때문에 도시는 지반이 불안정하

고 지진에 견디기 어려운 조건을 갖고 있다. 참고로 1985년에 발생한 지진으로 7,000명이 사망한

바 있다. 그러나 1521년 스페인의 코르테스에 의해 정복된 후, 스페인 정복자들은 그들의 세력과

기독교를 확장하고 멕시코 고 문명의 과거를 지워버리려고, 고 아스텍의 수도인 테노치티틀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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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 소칼로 광장에서

국가행사 준비로 인해 군부대의 막사로 꽉 채워져

있는 현재의 멕시코시티 소칼로 광장

중심부를 폐허로 만들고, 새로운 계획도시를 건설했다. 멕시코시티는 1535년 지금의 코스타리카

까지 영토를 통치하는 누에바 에스빠냐 부왕청의 수도가 되었고, 안토니오 드 메데사가 초 부왕

으로 부임하여 통치가 끝날 때까지 멕시코시티를 유럽식의 바로크식 건물, 넓은 공원, 잘 계획된

도로 등이 가득한 아름다운 도시로 변모시켜 놓았다. 계획도시는 현재 소칼로(공식 명칭은 플라자

데라콘스티투시온)라고 불리는 예전의 공식적인 테노치티틀란 중심부 주변에 주요 공공건물들을

배치하는 방식으로 건설되었으며, 소칼로는 현재도 여전히 멕시코시티 생활권의 중심이 되고 있

다. 아스텍 신전이 있던 곳 근처에 거 한 성당(Cathedral Metropolitan)이 있으며, 목떼수마 궁

전은 총독의 궁전(지금의 [국민궁전])으로 바뀌었으며, 지난 식민지시 의 도시 중심부에서 남서

쪽으로 뻗은 파세오 데라 레포르마(Paseo de la Reforma) 도로는 현재도 도시의 주요 도로이

며, 아베니다인 수르겐테스는 도시의 남과 북을 가로지르는 주요 거리이다. 이후 식민지 경영의

중심지로 영화를 누렸으나, 1811년 멕시코 독립의 아버지 이달고 신부의 독립선언으로 몇 번의

전투 끝에 1821년 독립되었다. 당시의 수도는 베라끄루스로 바뀌었다가 1860년에 다시 멕시코시

티가 수도가 되었다. 따라서 멕시코시티에는 고 ·근 ·현 의 모든 요소가 집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지하에는 아직 발굴되지 않은 유적이 잠자고 있으므로 도시 전체가 미발굴의 유적

이라 할 만한 곳으로 유네스코로부터 도시 전체를 하나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받기도 하였다.

멕시코시티는 차츰 확장되었는데, 1930년까지는 무계획적으로 성장이 이루어지다가 그 후 계획

적으로 도시 정비사업이 이루어졌다. 옛 도시의 면모가 많이 파괴되었지만 산토도밍고 광장을

비롯한 몇몇 광장들은 본래의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다. 20세기말에 이르자 멕시코시티는 엄밀한

의미에서 세계에서 가장 면적이 큰 도시가 되었으며, 세계에서 가장 빨리 성장한 도시권에 속하

게 되었다. 그러나 멕시코시티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멕시코시티의 확장에는 한

계가 있다. 산 때문에 공기 순환이 어려운데다 시내에 차량이 매우 많기 때문에 공기오염 문제 또

한 매우 심각하다. 현재 멕시코시티 교외를 포함한 도시권은 원래 정해진 연방구의 경계를 넘어

이웃한 메히코 주까지 이르고 있다.

멕시코시티의 인구 다수는 유럽인과 아메리카 인디언 사이의 혼혈형 자손들인 메스티조이다.

그들은 빈곤한 북부구역의 슬럼가인 시우다데스페르디다스([잃어버린 도시들]이라는 뜻)와, 또는

수도의 콜로니아스([지역]이라는 뜻)에 살고 있으며, 지방으로부터 오는 이주민이 늘어나면서 멕

시코시티는 인디언적인 특징들을 더 많이 갖게 되었다. 중산층이나 상류층 사람들은 개 유럽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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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통으로 그들은 부분 도시의 서쪽에 살거나, 새로 개발된 도시의 남쪽 교외지역에 살고 있다.

드디어 버스가 멕시코시티에서 오늘밤 우리가 숙박할 레포르마 거리 중심부에 위치한

Sheraton Maria Isabel Hotel & Tower에 도착하였다. 버스에서 내리고 보니 7년 전 발로

걸으며 와본 거 한 독립기념비(Independence Monument)가 중심에 있는 교차로 근처였

다. 짐을 끌고 호텔 방으로 올라가 짐을 놓고, 생수를 사려고 다시 내려와 근처에 있는

편의점을 찾으며 걷다보니 호텔 옆에 미국 사관이 있었고 그 옆에 편의점이 있었다. 방

으로 올라와 간단히 샤워를 하고, 서울서부터 가져온 소주를 몇 잔 마시고 여행 첫날밤

잠을 청하였다.

3월 5일(수), 둘째날 멕시코시티 및 피라미드 관광 새벽 6시 반에 잠이 깨어 세면을 마치고 짐을 챙긴 후, 호텔 밖으로 나와 주위를 산책

하였다. 이른 아침인데도 호텔 옆 미국 사관 옆문 입구에는 많은 사람들이 한손에 무언

가 종이를 쥐고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VISA 발급을 위해 줄

을 서 있는 것이었다. 예전에 우리나라 미 사관 앞에서의 광경과 너무나 흡사하였다.

미국 입장에서는 멕시코인 들의 미국 불법체류로 골머리를 앓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이해도 가지만, 우리도 겪은 바와 같이 멕시코인 들을 무시하는 미국인들의 자세를 보는

것 같아 그들이 다소 애처롭게 느껴졌다. 옛 생각이 나서 기다리고 있는 행렬사진을 찍

으니 멕시코 경찰이 쫓아와서 무어라고 스페인어로 말하는데, 아마 사진을 찍으면 안 되

며 찍은 사진을 없애라는 것 같았다. 문제를 일으키기 싫어 그들이 원하는 로 해 주니

돌아갔다. 이러한 점도 예전 한국과 똑같아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레포르마 로 교차

로에 있는 독립기념비를 사진에 담으며, 7년 전 독립기념비에 새겨진 부조 및 이름들에

멕시코 원주민과 함께 스페인 사람들의 이름이 혼재되어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이것은

멕시코의 독립이 미국의 독립과도 유사하나 조금 다르다는 사실로, 미국은 아메리카 원

주민을 완전히 배제한 채 유럽에서 이민 온 백인들만에 의해 독립이 되었지만, 멕시코는

멕시코에 파견되어 온 스페인 사람 및 그 자손(끄리오요)들과 함께 혼혈인 메스티조 및

멕시코 원주민들에 의해 독립이 이루어진 점이다. 따라서 멕시코인 들은 스페인의 침략

을 미워하면서도 그들을 독립시켜 준 또 다른 스페인 계통의 백인(그들도 멕시코인임)들

을 미워할 수 없는 묘한 입장에 놓여 있는 셈이 된다.

교차로 부근은 서울 광화문로와 같이 이른 아침인데도 출근하는 사람들로 북적였으며,

몇 명의 관광객이 기념비를 배경으로 활짝 웃는 표정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이러한

광경은 여행객인 나에게도 사람 사는 곳은 다 같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었다.

그런데 호텔 주변을 산책하면서 좀 다른 점이 눈에 띄었다. 정장을 하고 출근을 하는 사

람들은 거의 모두 백인인데, 그들 인파 속에서 청소, 구두닦이, 노점식당 등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은 분명 메스티조 또는 원주민 인디헤나(indigena)로, 명확한 신분상 계급

차이를 느낄 수 있었으며, 얼굴 표정에서는 후자가 더 평온한 편으로 이들이 이러한 상

황을 (체념적으로 ?) 받아들이고 살고 있다는 것으로 내게는 보여 다소 안쓰러운 생각도

들었다.

다소 늦은 시각인 오전 9시경 호텔을 나서 멕시코시티 관광에 나섰다. 7년 전 이곳에

와서 발로 걸으며 관광을 한 곳이라 그다지 낯설지 않았다. 버스가 레포르마 로를 거

쳐 북동쪽으로 달리다 보니 차창으로 신 륙을 발견한 콜럼버스 동상이 눈에 띄었으며,

길가 연변의 건물들은 비교적 고층의 현 식 건물들로 역시 이 거리가 멕시코시티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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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궁전(대통령궁)에 있는 디에고 리베라의 대벽화

심 도로임을 실감나게 하였다. 버스는 일상적인 생활의 중심이 되는 도시의 오아시스 중

하나로 멕시코시티에서 가장 유명한 산책로로도 유명한 알라메다 중앙공원(Alameda

central park)을 지나, 멕시코시티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1905년에 새로운 연극

공연장으로 개장하였다는 Fine Arts Palace(Palacio de Bellas Artes) 앞을 거쳐, 고

풍의 건물인 중앙우체국(Main post office) 건물을 끼고 돌아 미술관인 Tolsa Palace 앞

이면도로를 지나 소칼로 광장에 도착하였다. 지금 버스를 타고 온 길을 7년 전 발로 걸

으며 관광하였기에 각 장소 및 건물 내부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생생하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넓다(사실 사방 240m의 광장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모스크바의 붉

은 광장보다 조금 작을 뿐이라고 한다)는 멕시코시티의 소칼로(Zocalo) 광장에서 버스에

서 내렸으나, 광장은 마침 국가행사 준비로 인해 군부 의 막사로 꽉 채워져 있어 예전

과 같이 넓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7년 전 이곳을 보고는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거 한

광장이 도시 한 가운데 많이 세워질 수 있기를 기 해 보았는데, 내 기 로 현재는 서

울 한 복판에도 광화문 광장, 청계광장, 시청광장 등 거 하고 멋진 광장들이 만들어져

있다. 참고로 '기반석'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소칼로는 멕시코의 어느 도시에도 있는

중앙광장으로, 개의 경우 시나 주청사와 성당(카테드랄)에 둘러싸여 있다. 그러므로

멕시코시티의 소칼로는 멕시코의 배꼽과도 같은 존재인데, 이곳은 옛날에는 아스텍의

신전들로 둘러싸여 있던 광장으로 정치·종교의 중심지 역할을 했었고, 16세기 코르테스

에 의해 정복된 후 스페인 사람들도 역시 이곳을 정치·종교의 중심지로 삼아 광장 주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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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궁전 2층에 있는 멕시코 근대화의 아버지 베니토 후아레스의 기념실

의 파괴된 아스텍 건물에서 가져온 돌로 포장을 하여, 성당과 현재의 국민궁전, 주청

사가 건축되었으며, 그 후 400년 이상의 세월동안 소칼로는 멕시코 역사의 중요한 의식

을 계속해서 지켜보고 있다고 한다. 소칼로의 정식 명칭은 헌법광장(Plaza de la

Constitucion)으로, 주요한 국가 행사는 이 포석이 깔린 광장에서 행해진다고 하며,

1843년 Santa Anna 통령이 독립기념탑의 기반석을 놓으면서 이름을 소칼로로 바꾸었다

고 한다. 소칼로 광장 한 귀퉁이에 서서 주위를 살펴보니 중앙에는 여전히 엄청나게 큰

멕시코 국기가 휘날리고, 광장 주위로 역사적인 건축물인 성당(Cathedral

Metropolitana)과 국민궁전(Palacio Nacional)과 함께 공공건물, 레스토랑, 호텔들이 둘

러싸고 있었으며, 광장 국민궁전 쪽으로 지하철역으로 연결되는 통로가 눈에 띄었다. 잠

시 머릿속으로 현재의 모습과 비시켜 그 옛날 아스텍 문명이 번성하였을 때의 신전

으로 둘러싸여 있는 광장의 모습을 상상해 보며, 역사의 흥망성쇠를 느껴보았다.

먼저 소칼로 광장의 동쪽에 위치한 거 한 궁전과도 같은 국민궁전( 통령궁)으로 갔

다. 이 장소는 옛날 아스텍 제국의 왕 목떼수마 2세의 궁전이었으나, 그 후 정복자 코르

테스에 의해서 옛 궁전은 철저히 파괴되고 1562년에 새롭게 궁전이 세워졌고, 17세기에

개축을 거쳐, 1927년에는 재설계되어 3층이 추가되어 현재에 이른다고 한다. 이 궁전은

스페인이 멕시코를 지배하기 위한 식민통치 본부로 사용하였으나, 현재는 건물의 오른쪽

이 통령 집무실, 왼쪽이 재무부 건물로 사용되고 있으며, 멕시코 근 화의 아버지 베

니토 후아레스의 기념실도 있다. 이 궁전은 오전 9시에 개관하여 오후 5시 반에 폐관하

며 입장은 무료다. 한국에서 통령궁인 청와 를 들어가 보지도 못하였는데 멕시코에

와서 통령궁에 두 번씩이나 들어가 본다는 생각이 들며 지난번과 같이 다소 흥분이 되

었으며, 입장할 때 총기를 둔 군인과 같은 근위병들이 짐 검사를 한 것을 제외하고는 상

당히 자유롭게 개방되어 있어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같이 개방되어 있었으면 하는 부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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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궁전(대통령궁)에 있는 디에고 리베라의 대벽화

생각이 들었다. 입장하면서 정면 문의 상부에 1810년 토롤레스 이달고 마을에서 이달고

신부가 멕시코 독립선언을 할 때 타종했던 역사적인 독립의 종을 다시 한 번 확인하였

다. 먼저 이층으로 올라가다 보니, 계단 벽면에 유명한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의

벽화가 나타났는데 두 번째 보아도 여전히 놀라움 그 자체였다. 1929년에 그리기 시작

한 벽화는 그의 생애에 있어서 최고의 작품이이라고 하는데 크기도 컸지만 한 화폭에

장 한 멕시코 역사를 모두 담아내고, 적절하게 조화시켜, 표현의 공간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섬세하고 뛰어나게 이용하였는지를 눈으로 직접 보고 실감하면서도 어떻게 저러

한 작업을 할 수 있었는지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의 그림은 정원에 면한 2층 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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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궁전(대통령궁)에 있는 디에고 리베라의 대벽화

을 돌아가며 부조와 함께 이곳을 방문한 사람이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그려져

있었는데 오른쪽 벽으로부터 Valley of Mexico 시 의 화려함을 시작으로 테오티와칸,

톨텍 등 고 도시의 생활상을 포함한 이상적인 모습, 아스텍에서 스페인에게 나라를 빼

앗긴 후 독립할 때까지 거쳐 온 혁명, 독립, 전쟁, 식민시 , 종교 등 거의 부분의 역

사적 사실들을 마치 장 한 서사시를 써 내려가듯 보여주고 있었다. 흑인노예, 관료 거

래, 노동착취 등 스페인의 원주민 착취 모습은 마치 눈앞에서 그 광경을 보듯이 실감나

게 그려져 있었다. 나는 일행을 쫓아가면서도 지난번에 제 로 보지 못한 벽화 등을 집

중적으로 살펴보면서 리베라의 웅장하고 뛰어난 작품을 마음껏 감상하였다.

국민궁전의 1층 정원을 통해 밖으로 나와 아스텍 유적지인 템플로 마요르(Templo

Mayor) 신전을 향하면서 보니 궁전건물 주위로 7년 전에 왔을 때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

던 노점상들이 눈에 띄지 않아 현지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도시환경개선 차원에서 몇 년

전에 철거되었다고 한다. 예전에 노점상들을 보며 통령은 국민이 뽑은 표자로, 일반

국민과 함께 활기차게 생활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것으로 어쩌면 이것이 진짜 민주주

의의 참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어쩌다 이 나

라도 정치, 사회적으로 더 폐쇄적이고 권위적으로 후퇴하였는가하는 생각과 함께 씁쓸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성당과 국민궁전 모서리 부분에 있는 템플로 마요르 신전 유적지를 다시 한 번 관광

하면서 그동안 더 발굴된 유물과 상황을 볼 수 있다는 나의 기 는 무참히 깨어지고, 발

굴현장에 띠를 두른 바깥에서 힐끗 보는 것으로 마쳤다. 7년 전에는 야외 발굴현장 및

실내 박물관을 관람할 수 있었는데, 현재는 못 들어간다는 것이 나로서는 납득이 되지

않으며, 입장료가 있어서 그런지 시간상 생략하였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너무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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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노치티틀란의 마요루 신전 유적지 모습

아스텍 카렌다(모조품)Templo Mayor(신전) 야외에 전시된

멋진 Coyolxauhqui 조각물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천만원이 넘는 거금의 여행경비를 들여왔는데 고작 몇 푼 안 되

는 입장료 때문에 생략되었다면 하나투어의 해외여행 프로그램을 짜는 사고방식에 근본

적인 문제가 있는 것이고, 시간상 생략하였다면 아침에 출발을 조금 앞당기면 될 수 있

는 문제이므로 현지 가이드 및 인솔자의 불성실로 밖에 볼 수 없어 이래저래 고객의 입

장에서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의 편의만을 생각하는 것 같아 다소 기분이 상하였다. 참고

로 템플로 마요르 신전은 아스텍에 의해 14 ~ 15세기에 걸쳐 텍스코크 호숫가(현재의 멕

시코시티) 세워진 도시인 테노치티틀란(Tenochtitlan)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테노치티

틀란은 [세계의 중심축]이란 뜻으로 아스텍족이 부른 이름으로, 스페인 식민지하에 거의

파멸되어 버릴 뻔했었던 것을 1978년에 우연히 코욜사우키(Coyolxauhqui) 조각물이 발견

됨으로써 발굴 작업이 2차례에 걸쳐 이루어졌고, 예전 신전의 모습을 조금씩 되찾아가고

있다고 한다. 발굴 현장을 보면 지표면 위의 모든 것은 멸실되고 지하 부분에 남아 있는

신전이 발굴된 상태로, 원래 도시의 중심부로서 작은 신전들의 복합체였다고 한다. 남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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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태양의 신 우이칠로포치틀리 신전과 인신공양 , 북쪽으로 비의 신전 틀라록, 그

앞에 위치한 착물 등이 요체로, 신전은 78개 계단, 40 m 높이의 피라미드 위에 쌍둥이

신전이 얹혀져 있었다고 한다. 코욜사우키는 직경이 3m 정도 되는 거 한 둥근 모양의

돌 조각으로 아스텍의 달의 여신인 코욜사우키의 모습을 담고 있다. 또한 신전의 상징물

은 뱀으로써, 신전의 아스텍 시 의 이름은 바로 [Coatepec]으로 [뱀의 언덕](Hill of

Serpents)이란 뜻을 지닌다고 한다. 신전 바깥에 전시된 유적에 뱀의 형상으로 만든 성

곽 등이 있으며, 또한 신전 야외 전시장에 엄청난 수의 해골들이 줄줄이 벽에 붙어 있는

쏨반뜰리 사원[Tzompantli- Shrine](Wall of skulls)이 있으며, 신전 실내 박물관에는

이곳에서 출토된 많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와 함께, 아스텍 유물 중 가장 유명한 상징물은 아스텍 말로 Cuauhxicalli 즉 Eagle

Bowl이라는 뜻으로, 우리에게 [아스텍 캘린더](Azteca Calendar) 또는 태양의 돌로 잘

알려진 직경 3.5 m, 무게 2.5톤, 두께 90cm인 현무암의 원반으로, 1760년 소깔로에서 발

견되었으며, 현재 멕시코시티의 국립인류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것은 아스텍 왕조

6 왕 아사야까뜰이 1479년에 만들어 신에게 바친 것으로, 아스텍의 우주관과 세계관을

둥근 돌에 집약해서 새겨 넣은 유물로 신화적 및 천문학적인 면에서 그 시 문명의 바

탕을 이해하는데 단히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아스텍은 인간이 창조된 이래 4

개의 태양이 멸망했고, 지금은 다섯 번째 시 에 살고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 아스텍 캘

린더 중앙에는 현재의 태양이 혀를 내민 사람의 얼굴로 그려져 있는데 제물의 피와 심장

을 요구하는 모습이라고 한다. 원 안에 멸망한 4개, 즉 바람, 불, 물, 재규어의 태양을

나타내는 사각형 도안이 새겨져 있다. 다음 원에는 한 달을 표시하는 20개의 도안이 들

어가 있다. 참고로 아스텍력은 마야인들과 마찬가지로 1년을 20일을 1개월로 한 18개월

과 5일의 보충일 수로 하여 1년이 365.25일로 되어 있고, 이를 조정하기 위해 1세기인

52년마다 13일을 가산하여 정확성에서 매우 뛰어났다. 또한 이들은 수학, 천문학과 자연

에 한 상당한 지식을 기초로 하여 해와 달, 금성 등 천체의 운행을 계산하는 능력이

있었던 모양이다. 2년 전 2012년 12월 21일이 지구의 종말이라고 한동안 매스컴을 뜨겁

게 달구었던 시기가 있었는데, 이 근거가 아스텍 캘린더와 유사한 [마야 캘린더]에 근거

한 마야력에서 나왔다고 한다.

다음으로 광장에 인접한 성당(Catedral Metropolitana)으로 갔다. 이 성당은 멕시

코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 건축물중 하나이며, 또한 중남미의 유명한 성당 건축물 중의

하나이기도 한데, 건설은 18세기에 시작되었으며 이후 300년 동안 계속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공사를 오래 끌게 된 이유는 건축양식이 하나로 일관되지 못하고, 스페인의 르네

상스와, 프랑스의 네오클래시즘에 의해 지배되었던 영향 때문이라고 한다. 성당에 들

어가 보니 성당에 있는 다섯 개의 통로는 다소 야해 보이는 형상과, 정교한 조판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바닥은 리석이 깔려있었다. 또한 성당 내부는 상당히 크고 웅장하다

는 느낌이 들면서 다소 어둑어둑하여 엄숙함도 느껴졌지만, 성당 내부의 모든 장식이 황

금색으로 칠해져 있어 호화판의 극치(?)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데, 문득 이 성당을 짓

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돈이 들었으며, 그 자금을 멕시코 원주민들에게 약탈하였을 스페인

정복자들과, 철저하게 파괴된 자신들의 신전위에 이방인의 성당 신전을 짓는데 노동력을

제공당한 멕시코 원주민들이 함께 떠오르며 왠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성당 안

에는 마침 신부님에 의해 수요예배가 집전되고 있었는데, 관광객에 해 익숙해져 있어

서 그런지 아니면 멕시코 사람들의 종교에 한 믿음과 신앙심이 깊어서 그런지 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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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멕시코시티 대성당 내부모습

멕시코시티 소칼로 광장에 인접한 대성당(Catedral Metropolitana)

엄숙하고 조용하게 기도하고 있었다. 밖으로 나와 잠시 버스를 기다리며, 성당 외관을

살펴보니 이곳도 역시 정교한 조각장식들로 장식되어 있었으며 자세히 보니 약간 기울어

져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역시 이곳 지반은 이곳 원주민 영혼(귀신)들의 조화로 인해

약할 수밖에 없겠지 하는 생각과 함께, 300년간을 스페인의 통치를 받으면서 인종적으로

순수한 토착민은 거의 사라지고, 스페인인과 원주민의 혼혈인 메스티조가 주류를 이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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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창으로 본 멕시코시티 북부구역의 달동네인 [잃어버린 도시들] 풍경

있으면서도 멕시코로 이주한 유럽인들의 후손들인 크리오요라는 소수 백인층이 지배계급

을 차지하고 있는 멕시코인들 사회에서 코르테스는 침략자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멕시코인

의 선조로 볼 수 있으며 이들이 만들어 놓은 현재의 멕시코시티 문화유적에 한 멕시코

인들의 복잡 미묘한 애증(?)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우리나라는 36년간

일본의 식민지 시 를 겼었는데도 아직 친일 후손의 재산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데, 멕

시코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이

거 한 도시를 건설하였고 많은 병력을 가지고 있던 아스텍이 수백 명의 기마부 를 거

느린 스페인의 코르테스에게 순식간에 패퇴하여 패망하는 그 당시의 상황을 상상해 보았

다. 아스텍족이 중미 여러 부족을 무리하게 통합시켜 거 제국을 만드는 과정에서 정치

적 혼란과 내부 세력 다툼을 겪어 국력이 쇠잔하였을 것이다. 또한 태양신을 숭배하고,

농사에 종사하던 나라가 천재지변으로 인한 가뭄에 시달려 사회적 혼란이 왔을 때, 아스

텍 사람들은 그 옛날 유태인들이 메시아를 기다리듯 자신들을 떠났던 전설속의 주신 케

찰코아틀이 다시 돌아와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견뎌오다 마침 긴

머리, 흰 피부를 한 코르테스를 전설속의 왕이 약속 로 돌아온 것으로 착각하여, 핍박

받아오던 종족의 배신과 민심의 이반으로 허무하게 제국이 몰락하였을 것을. 왕의 과

욕(?)과 과신(?)으로 인해 거 왕조가 허무하게 멸망하는 역사는 끊임없이 반복되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며 마음 한구석이 왠지 편치 못하다.

다시 버스를 타고 1987년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된 풀리지 않는 신비를 간

직한 테오티와칸 유적지를 보러 출발하였다. 북쪽으로 향해 달리는 버스 차창 밖으로 은

으로 장식된 화려한 망토와 멕시코 스타일의 창이 넓은 모자를 쓴 멕시코의 떠돌이 악사

들이 모여서 연주를 하여 멕시코의 화려한 밤을 느낄 수 있다는 가리발디 광장과 남 문

시장과 같이 매우 거 한 시장이 눈에 들어와 7년 전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여 반가웠다.

또한 우리 일행이 탄 버스는 지난번 테오티와칸 유적지를 보러가기 위해 찾았던 북부터

미널(Autobus del Norte)을 스쳐 지나갔다. 그 때는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이곳에 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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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티와칸 유적지의 태양의 피라미드

피라미드행 버스를 탔었는데, 오늘은 관광버스를 타고 편하게 가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

는 주변 경관에 해 말글 로 스쳐지나가지 별로 피부로 느껴지지 않고 감응도 일어나

지 않았다. 그나마 전에 뚜벅이 여행으로 와봤으니 옛 추억이 아련하게 떠오를 뿐. 참고

로 멕시코시티에는 동서남북으로 행선지에 따라서 버스 터미널이 넷으로 나뉘어져 있으

며, 4개의 버스 터미널은 모두 지하철역에 인접해서 건설되어 있으며, 지하철역에서 나

오면 바로 위치하고 있다. 부분의 버스는 큰길을 직진하는 노선이므로 여행자에게는

매우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으며, 버스 정류장은 개 거리와 거리의 모퉁이에 있으므로

자신의 목적지가 어느 거리의 모퉁이와 가까운지를 확인하고 이용하면 좋다. 그런데 특

이한 점이 내 눈에 띄었는데 차량이 다니는 도로 한 가운데로 전철선이 나있으며, 전철

역은 육교위에 세워져 있는 것이었다. 도로와 철도를 함께 고려하여 만들다니! 기발한

아이디어로 경제적이고 편리한 시스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이 전철이 만들어진지

100년이 지났다는 가이드 말에 다시 한 번 놀랐다. 버스가 구릉지를 넘어 시내를 벗어나

서 달리자, 갑자기 차창 밖으로 산비탈을 타고 예전 상계동 및 난곡 판자촌 동네와 같은

거 한 빈민촌이 보였으며, 버스가 유료도로인 자동차전용도로로 들어서 한참을 달리는

동안에도 이러한 빈민촌 달동네가 이어졌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멕시코시티의 인구

다수를 차지하는 유럽인과 아메리카 인디언 사이의 혼혈형 자손들인 메스티조가 모여 산

다는 빈곤한 북부구역의 슬럼가인 시우다데스페르디다스([잃어버린 도시들]이라는 뜻),

또는 수도의 콜로니아스([지역]이라는 뜻)였다. 현지 가이드의 말로는 지방으로부터 일

거리를 찾아 멕시코시티로 들어오는 이주민이 늘어나면서 멕시코시티는 점점 이러한 달

동네 지역이 늘어나고 있다며, 어제 밤 비행기에서 본 멋진 멕시코시티 야경의 본모습이

이것이라고 하여 깜짝 놀랐다. 마치 야누우스의 두 얼굴을 보는 것 같은 느낌과 함께,

어젯밤 비행기에서 느꼈던 멋진 인상이 머릿속에서 산산이 부서지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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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티와칸 유적지의 케찰코아틀 신전

지금은 부분 아파트 단지로 변하였지만 서울 시내 여기저기 산재해 있던 달동네로 가

득 찼던 우리나라 서울의 예전 모습이 떠오르며, 이 나라의 지도자들이 빈부격차를 없애

기 위해 하루빨리 무리한 경제정책과 정치적 후진성에서 벗어나 진정 이러한 사람들이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주기를 기원해 본다.

버스가 멕시코시티와 달리 다소 사막기후에 가까운 고원지 를 통과하여 얼마가지 않

아 테오티와칸 유적지(Teotihuacan Archeological Zone)에 도착하였다.

[신들의 모임 장소]라는 이름을 가진 테오티와칸 유적지는 멕시코시티에서 북동쪽으로

52km, 해발 2,300m인 멕시코 고원, 주변이 언덕으로 둘러싸인 약 260만㎢의 분지 속에

위치한 도시면적 20만㎢의 거 한 고 신전도시로, 이 도시는 기원 후 4세기부터 7세기

사이에 전성기를 맞았으며, 전성기 때의 인구는 략 12만 명에서 20만 명으로 추정되는

데, 당시 유럽의 콘스탄티노플을 제외하고는 인구 2만이상의 도시를 찾아 볼 수 없다고

하니 이는 세계사적으로 볼 때 가장 규모가 큰 고 도시라 할 만하다. 또한 정교한 도

시 계획과 공간배치, 건축방법, 섬세한 조각과 벽화, 배수로 등 도시의 모든 것이 테오

티와칸을 건설한 사람들의 뛰어난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즉, 도시 전체를 사람의

등뼈처럼 도시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넓은 길이 계획의 중심에 있는데 [사자의 길]이라고

불리는 이 길은 폭이 40~100m, 길이가 4 km나 된다. 이 길 좌우로 많은 석조 구조물, 피

라미드와 사원, 광장, 주택 등이 건설되었는데 거리 북쪽 끝에는 궁전과 광장, 사람의

심장과 피를 바쳤다고 하는 달의 피라미드가 우뚝 서 있으며, 남쪽 끝에는 [케찰코아

틀](Quetzalcoatl; 깃털 달린 뱀으로 물과 농경을 상징하는 땅의 신) 신전과 광장이

있다. 신전 중에는 아름다운 벽화로 장식된 것도 많으며, 테오티와칸은 신관·점성가·

역학가 등이 살았던 엘리트 센터였던 듯하다. 따라서 주위의 농촌이나 위성도시의 제사

의 중심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테오티와칸은 광범위한 교역을 통해 경

제력을 축적하고,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해 중미 전역에 세력을 떨쳤던 것으로 보이며,

문화의 성격은 농민적·주술적이며 평화로웠던 것으로 생각된다. 테오티와칸의 정신적

영향이 넓은 지역에 걸쳐 파급되었던 것은 그 토기·토우·공예품 등의 스타일이 각지의

문화적 중심지에 퍼져 있는 데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예컨 멕시코 중앙고원 이외의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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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규어의 신전에 있는 벽화

역에서도 오아하까 계곡의 몬테알반, 페텐의 림속에 있는 마야문화의 티갈 등 그 영향

은 뚜렷이 나타나 있다. 이 문화는 8세기경 전쟁이 있은 뒤 쇠퇴하기 시작, 새 문화의

중심은 톨텍의 툴라로 옮겨졌다. 현재 태양과 달의 피라미드를 비롯한 유적 전체가 멕시

코 정부에 의해 복원되고 있으며, [신들의 도시]를 의미하는 테오티와칸이라는 도시 이

름마저도 600년 뒤 폐허가 된 이곳을 찾아 정착한 아스텍인들이 붙인 것이다. 아스텍인

들은 이 웅장한 유적을 보고 인간이 아닌 신이 지은 도시라고 생각하여 숭배하였으며,

[사자의 길], [태양의 피라미드], [달의 피라미드] 등 건물 명칭들도 이들이 붙인 것이

다. 다행인 것은 피라미드 축조술을 비롯한 문화적 전통만은 마야인에게 전해져 사라지

지 않았다는 점이다. 누가 건설했는지, 이들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사라져버렸는지

알 수 없지만 그 흔적만큼은 경이롭고 강렬하게 남아 있으며, 그 흔적을 통해 수수께끼

를 푸는 것은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일 것이다.

7년 전에 왔을 때는 정문으로 들어갔으나, 이번에는 태양의 피라미드 건너편에 나 있

는 제 2문으로 입장하였다. 이유를 물으니 시간관계상 태양의 피라미드 및 달의 피라미

드만을 관광한다고 하였다. 이곳에서 정말로 보아야 될 곳은 케찰코아틀 신전인데, 미디

어에서 상징적으로 선전하는 것만을 보고 가려고 하니, 요새 말로 인증샷 하듯이 기념사

진 몇 장을 찍으러 먼 이곳을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입장하고 보니 눈 앞 정면에

태양의 피라미드가 눈앞에 나타났다. 태양의 피라미드는 BC 200년에 시작해서 AD 150년

에 완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기존의 피라미드 위에 새로운 피라미드를 덧씌우는 방

식으로 만들어졌다. 지금은 거친 돌이 튀어나와 있지만 이전에는 회반죽으로 덮어 색을

칠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6세기 발견 당시에는 태양신에게 바친 커다란 신전으로 알려

졌지만, 최근 주변을 둘러싼 3m 넓이의 해저나 신에게 제물로 바쳐진 아이들의 무덤, 그

리고 피라미드 내부에서 동굴들이 발견되면서 이곳에서 섬기던 신이 비의 신 뜰리록이었

다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 1908년에 복원되었는데, 바닥 한 변의 길이가 230m, 높이 70m

에 248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연인원 1만 명이 완성하는 데 20년이 걸린다고

할 만큼 웅장하다. 현

재 피라미드 정상에는

신전이 없고, 중앙에

작은 프리즘이 놓여

있는데 춘분과 추분이

되면 태양이 이곳을

정확하게 지나간다고

한다. 그런데 몇 년

전 이집트 여행에서

쿠푸 왕과 카프라 왕

의 피라미드를 보고,

또한 지난달 앙코르와

트로 유명한 캄보디아

시엠립에서 이것과 유

사한 피라미드 형상의 거 한 바프온 사원을 보아서 그런지, 또는 피라미드 정상에 한번

올라갔던 적이 있어서인지 몰라도 처음 이 피라미드를 보았을 때만큼 놀랍지도 신선한

충격으로 오지 않았다. 참고로 이 신전 최 건축물인 태양의 피라미드는 이집트 가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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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에 있는 쿠푸왕과 카프라왕의 피라미드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 크기의 규모이다. 또

한 이집트 피라미드가 각이 예리한 분묘라면, 태양의 피라미드는 캄보디아의 바프온 사

원과 같이 신전으로 경사각이 43.5도이고, 전면에서 보면 4단으로 층이 쳐 있어 모난 인

상에도 불구하고 층과 층 사이가 유연하게 연결되어 안정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가이드

가 일행에게 50분간의 시간을 주고 태양의 피라미드에 올라갔다 오라고 하였을 때, 나는

가이드와 인솔자에게 실은 이번 여행에서 지난번 이곳을 관광할 때 비 때문에 제 로 보

지 못한 정문 근처에 있는 케찰코아틀 신전을 다시 한 번 제 로 보고 싶으니, 피라미드

에 올라가는 신 그곳에 갔다 오겠다고 양해를 구하고 사자의 길을 걸어 유적지 남쪽에

있는 케찰코아틀 신전으로 갔다.

케찰코아틀 신전은 사방이 성벽에 둘러 싸여 있는 커다란 정방형 구조물 사원 안에

위치해 있다. 이 사원은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계급이었던 사제들과 관리들이 살았던 지역

으로, 사원 가운데 공터에 2개의 작은 피라미드가 동서로 세워져 있다. 그중 동쪽에 있

는 다소 높은 피라미드가 케찰코아틀 신전으로 테오티와칸 유적지 중에서 장식미가 가장

뛰어나다. 이 신전은 AD 150-250년 사이에 정사각형 7단으로 축조되었으며, 위에 제단이

있다고 안내판에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는 무너진 채로 복원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아 4

단 정도만 형태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신전 피라미드의 계단 좌우와 기단마다 이 시

가 농경사회로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태양신에 한 제천행사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는

하늘과 창조의 신인 케찰코아틀(깃털 달린 뱀이란 뜻)과 뜰라록(Tlaloc: 비의 여신)의

부조가 조각되어 있었는데, 붉게 물들였던 색채가 아직도 어느 정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

다. 이번에 다시 확인해보니 깃털 달린 뱀인 케찰코아틀은 동양에서 상상의 동물로 신성

시하는 용의 머리와 흡사하여, 이곳 민족이 원래 아시아로부터 이주해 갔으므로 어떤 상

관관계가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신전 서쪽 앞에 위치한 4단으로 된

피라미드는 동서로만 계단이 나있고 신전보다 높이가 낮으며 피라미드 위쪽이 비교적 큰

단상으로 되어 있는데, 이번에 가서 보니 관광객들이 그곳 단상 및 계단에 앉던지 서서

신전을 감상하고 있었다. 고증에 따르면 중앙 제단에서 행해지는 제사장의 제천의식을

광장에 모인 군중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 4단의 4곳 벽면에서 부 제사장 16명이 그 로

재현하였다고 한다. 좀 더 그곳에 앉아 신전을 감상하고 싶었지만, 일행과 약속한 시간

까지 돌아가야 하므로 아쉽지만 다시 사자의 길을 되돌아 일행이 모이기로 한 장소로 향

하였다.

사자의 길은 평탄한 길이 아니고, 북쪽으로 향하면서 구획을 나타내듯 중간 중간 계단

들이 있으면서 높아지는 형태였고, 길 양편에는 신전이나 주거지역으로 사용했던 건축물

과 광장의 잔해가 남아 있었다. 참고로 아스텍인들은 양쪽 건물의 터를 고 왕의 분묘

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이 길을 사자의 길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한 낮이라 바닥으로부터

올라오는 열기와 더위로 땀이 나고 있었고, 해발 2천m가 넘는 고산지 라 조심하며 걸었

는데 그만 약속장소에 모여 있는 일행들이 눈앞에 보였을 때 반가운 마음에 순간적으로

방심하여 발이 미끄러졌다. 일어나 살펴보니 정강이 뼈 있는 부분이 자갈땅에 갈린 것

같으나 바지도 찢어지지 않았고 바지를 걷어 살펴보니 다소 긁힌 정도로 그다지 아프지

도 않고 피도 별로 나지 않아 나중에 소독만 해 주면 되겠지 하고 수롭지 않게 생각하

고, 일행들과 합류하였다. 그런데 이 상처가 이번 여행 내내 나를 피곤하게 하였고, 귀

국 후 결국 6바늘이나 꿰매게 되어 평생 흔적으로 남게 되었다.

사자의 길을 따라 걸으며 재규어의 신전(Templo del Jaquar)을 살펴보았다. 벽화에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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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피라미드

규어의 그림이 아직 선명하게 남아 이러한 이름이 붙여져 있겠지만 아직 폐허의 상태로

있다고 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드디어 사 자의 길 끝에 있으며 테오티와칸 유적지의 실질적인 중심으로 AD 500년경에

만들어진 바닥 가로 150 m, 세로 30m, 높이 46m에 4층으로 이루어진 달의 피라미드

(Pyramid of the Moon)에 도착하였다. 달의 피라미드는 태양의 피라미드보다 크기는 작

았다. 계단을 따라 피라미드를 올라가 보니 2층에서 길이 막혀 있고, 위층들은 현재 보

수공사 중이었다. 달의 피라미드는 태양의 피라미드보다 높은 지역에 위치하여 피라미드

크기는 태양의 피라미드보다 작으나 2층 광장에서 보면 테오티와칸이 한눈에 들어오는

멋진 전망을 선사하고 있었다. 달의 피라미드에 앉아 이 피라미드에서 정말로 사람의 심

장과 피를 바쳤다는 인신공희가 이루어졌을까하고 생각해 보았다. 고 의 인신공희는 다

른 지역에서는 사라지거나 동물의 피를 바치는 것으로 체되었는데, 유독 이곳 중남미

지역에서는 오래도록 유지되었다고 보는 근거로 이곳 무덤에서 다량의 유해가 발견되었

고, 이곳 사람들이 세계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심장과 피를 신에게 바쳐야 한다고

강력하게 믿어, 16세기 스페인이 점령할 때까지 이 의식이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들고 있

다. 섬뜩한 생각이 들면서 문뜩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자식을 제물로 바치라는 성서의

내용과 고 시절 순장의 풍습이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떠오르며 신의 도시인 이곳에

서는 그럴 수도 있었겠다! 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이곳 사람들이 농경문화와 교

역을 하며 살던 어쩌면 순박한 민족인데 서양 사람들이 이곳의 발전된 문화를 의도적으

로 낮추어 보려고 과장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과 함께 [사자의 길]도 신과의 소통을

위해 가는 [신과의 소통로]로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은가하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는 달의 피라미드 앞 서쪽 편에 있는 작은 피라미드 사이에 있는 케살빠빨로틀 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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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피라미드 광장에서 본 테오티와칸 유적지. 전면 넓은 길이 사자의 길이고 왼

쪽 높은 피라미드가 태양의 피라미드임.

전을 지나쳐 밖으로 나왔다. 잠깐 들어가도 되는데 현지 가이드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참고로 이 궁전 내부 무덤에 들어가 보면 피라미드 내부는 미로처럼 방과 터널

들이 이어져 있으며, 볕에 말린 벽돌과 흙으로 만들어졌는데 벽면에 그려진 그림과 벽돌

문양 등이 상당히 아름답다. 만일 인솔자가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스케줄을 다소

변경하더라도 이것을 꼭 보게 하였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패키지 투어의 한계라

생각하였다.

버스로 달의 피라미드 뒤편쪽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현지 멕시칸 뷔페로 식사를 한 후,

근처에 있는 용설란 가공공장을 방문하여, 치차라는 옥수수로 만든 멕시코 막걸리와 떼

낄라를 시음하고, 처음으로 테오티와칸 시 에도 살았다는 식용 털 없는 개도 난생 처음

보았다. 또한 선인장에서 실을 뽑아 옷감을 만드는 과정도 살펴 볼 수 있었다.

멕시코시티로 귀환하는 버스에서 인솔자로부터 후시딘 연고를 얻어 다리의 상처에 발

랐으나, 아무래도 소독이 필요할 것 같아 멕시코시티 공항에 도착하였을 때 현지 가이드

와 인솔자에게 소독약을 사 달라고 부탁하여 공항내 약국에서 구입하였다. 체크인 수속

을 마치고 게이트 합실에서 탑승을 기다리며 치료하려고 하였으나, 공항 검색을 할 때

소독약이 100cc 이상의 액체라 반입금지라고 하여 다시 밖으로 나와 상처 부위를 소독하

려고 보니 콩알 정도로 살점이 패인 곳이 2곳 눈에 띄었으며 피가 나고 있었다. 소독약

으로 소독하고 연고를 바른 후 지혈하기 위해 붕 를 사용하여 지혈시켰다. 다시 체크인

수속을 하고 안으로 들어가 게이트에서 기다리다, 18시 35분 발 에어로 멕시코 AM571편

으로 멕시코시티 공항을 출발하여 다음 목적지인 칸쿤(Cancun)으로 향하였다. 비행 도중

공항에서 받은 김밥으로 저녁식사를 하고, 오늘 관광한 멕시코시티와 테오티와칸에 해

머릿속으로 정리하는데, 항공기가 속력을 내면 기압이 더 떨어져 몸이 부풀어져서 그런

지 다리 상처 부위에 통증이 오곤 하였으나 견딜만하였다. 이륙한지 2시간이 지난 20시

50분경 항공기는 칸쿤(Cancun) 공항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공항에서 어제 LA 공항서 짐

이 바뀌었던 부부의 짐을 찾느라 다소 지체하였지만 무사히 짐을 찾게 된 것이 다행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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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베란다에서 찍은 칸쿤 해안의 아름다운 광경

고 생각하였는데,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짐이 파손된 상태로 돌아왔다고 하였다. 해외

여행을 할 때에는 자기 짐을 확실히 구별하기 위해 가방에 다른 사람의 가방과 다른 표

식을 해둘 필요가 있음을 절실히 느꼈다. 현지 가이드(김성훈씨로 남성)의 안내를 받아

버스에 올라 오늘 숙박할 칸쿤섬에 있는 호텔로 향하였다.

참고로 칸쿤은 마야어로 뱀(can)의 머리(cun)라는 뜻으로, 캘리포니아 반도와 멕시코

만 사이에 위치해 있는 도시로, 멕시코시티로부터는 약 1,600 km 떨어져 있으며, 실제로

는 메인랜드(다운타운)에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칸쿤은 Isla Cancun(zona hotelera -

호텔 존), 즉 칸쿤섬으로, 메인랜드와 2개의 다리로 연결되어 있는 23km 길이의 L자 모

양의 섬이다. 원래 산호로 만들어진 길쭉한 모양의 섬인 칸쿤은 1970년 이전에는 주민들

이 100명도 안 되는, 모래 해변의 작은 고기잡이 마을이었으나, 정부가 이곳을 새로운

휴양지로 만들 계획으로 1960년 말부터 작업에 들어갔고, 그 때부터 인구가 급증하여

지금은 인구가 100만(멕시코인 70만 + 외국인 30만)이 되는 도시로 성장하였으며, 방문

객들이 많이 찾아오는 인기 있는 해변 리조트가 되었다.

섬의 남쪽에 있는 칸쿤공항을 출발하여 북쪽 편에 있는 호텔까지 L자를 뒤집은 형태로

가는 길 한쪽으로 말로만 듣던 멋진 호텔 및 리조트를 비롯해 유명한 명품점 및 레스토

랑을 가진 쇼핑타운도 보였다. 역시 미국인들이 은퇴 후 가장 살고 싶은 곳 1위로 선정

할 만큼 칸쿤의 첫 인상은 미국적 냄새가 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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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쿤의 멋진 휴양지 풍경

호텔 식음료 무료 패스 손목 띠

우리가 숙박할 Riu Cancun 호텔은 칸쿤 해변을 따라 L

자의 코너 부분에 위치한 5성급 호텔로, 약 570개의 객실

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호텔에 10시경에 도착하여 체크

인하는데 손목에 빨간색 띠를 둘러 주었다. 이 호텔은

All-inclusive 호텔로 이 띠만 보여주면 이 호텔 내 다양

한 레스토랑과 바에서 식음료는 물론이고, 객실 내 미니

바 역시 모든 음료를 포함하여 자유롭게 즐길 수 있다고

한다. 한마디로 띵호야!! 운이 좋게도 아직 저녁 식사를

할 수 있다고 하여 짐을 로비에 놓아둔 채 식당으로 가서

보니 뷔페식이었는데 음식이 정말로 산해진미로 가득하였

다. 정신없이 이것저것 마음에 드는 음식을 고른 후 생맥주까지 한잔 따라와서 식사를

마친 후 방으로 가서 짐을 풀었다. 창문을 열고 베란다로 나가자 밤이었지만 칸쿤의 해

변 야경풍경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비행기를 타고 오느라 아픈 다리를 살펴보니 비행기 탈 때 보다 상처부위가 다소 더

커진 것 같았다. 약방 집 아들답게 상처를 소독하고 붕 로 감은 후, 몸이 근질거려 밖

으로 나가고 싶었으나, 참고 호텔 로비로 나가 WiFi를 사용하여 친구들에게 오늘 찍은

멋진 사진들을 전송하고 다시 방으로 올라와, 내일 관광할 치첸이트사 일정을 생각하여

호텔 방에 채워져 있는 맥주를 베란다에서 마시며 맑은 하늘에 떠 있는 별자리 등을 감

상하다 오늘 일정을 마무리 하였다.

3월 6일(목), 셋째날 치첸이트사(Chichen Itza) 관광아침에 일찍 눈이 떴다. 베란다로 나가 밖을 보니 어젯밤에 보던 풍경과는 달리 하얀

샴페인 같은 파도가 끝없이 려오는 에메랄드 빛 바다의 칸쿤이 새로운 모습으로 나를

반겼다. 로비로 나와 바에서 모닝커피를 마시고, 호텔 주변 해변을 산책하다 아침식사를

하였다. 어제 저녁과는 많이 종류가 줄었지만 여전히 진수성찬이었다. 방으로 올라와 상

처 부위를 보니 그런 로 진정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 다행으로 생각하며 상처 부위를 소

독하였다.

다소 늦은 8시경 호텔을 나서 버스를 타고 칸쿤에서 205km 거리로, 약 3시간 정도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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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첸이트사 가는 고속도로 휴게실의 초가지붕 같은 모습

리는 유카탄 반도의 중앙에 있으며 마야 최 의 유적지인 치첸이트사(Chichen Itza)로

출발하였다. 어젯밤에 도착하여 느끼지 못하였던 칸쿤섬의 멋진 모습이 차창 밖으로 스

쳐지나갔다. 칸쿤섬을 개발하면서 이제는 호수와 같이 변한 산호섬으로 유명한 바다는

너무나도 푸른 빛깔을 보여주고 있었으며, 차로 주변은 호텔과 쇼핑타운, 레스토랑 등으

로 여느 도시보다도 더 화려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칸쿤공항 부근으로 나온 버스

는 잡목림으로 우거진 숲으로 난 고속도로로 진입하였다. 고속도로라고 하지만 우리나라

의 지방도로 수준이었다. 가이드 말로는 우리가 달리고 있는 유카탄 반도는 운석이 떨어

지면서 융기된 지역으로 석회암 위에 얇은 흙층이 덮여 있어 잡목밖에 자랄 수 없다고

하였는데, 약 3시간 달리는 동안 그의 말 로 잡목림뿐이었다. 또한 유카탄 반도의 주도

메리다는 애니캥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1905년 멕시코 이민역사를 연 지역으로, 이 지

역에는 우리 민족의 후손들이 상당수 살고 있다고 한다. 또한 이전 통령이 마약퇴치를

위해 모든 화장실에 자동 CCTV를 설치하여 5분이 경과하면 모든 것이 녹화된다며 화장실

에 들어가 너무 오래 있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어이없기도 하였지만 마약문제가 이곳

멕시코에서 커다란 문제라는 사실만은 이해할 수가 있었다. 멕시코시티에서 통령궁 주

변의 노점상을 없앤 것과 함께 멕시코 문화가 상당히 후퇴하였다는 생각이 들어 씁쓸하

였다. 몇 가지 스페인 말도 배웠는데, 포르 파보르(please!), 엘바뇨(화장실), 아구아

(water), 카페(coffee)와 함께, 우리가 지금 가고 있는 치첸이트사(Chichen Itza)는

chi(입구) + chen(웅덩이, 연목) + it(이트족)+za(물)로 이트족의 물웅덩이 또는 이트족

의 샘에 해당한다며, 마야어로 [하]는 ‘물’을 의미하고, [보쉬]는 ‘검은(black)'을

의미해 마야어로 [보쉬하]라고 하면 “커피”를 의미한다고 한다.

또한 가락이 익숙한 몇 가지 노래가 원래는 멕시코 음악이라고 들었다. 여치라는 뜻의

[라쿠카라챠]는 원래 군 에서 잔심부름하는 사람을 의미하며, [베사메뮤초]는 원래‘키

스 많이 해 주세요’라는 뜻이고, 조영남이 아쉬운 이별 또는 작별노래로 개작해 노래한

[제비]는 원래 [돈데보이]로 ‘나는 어디로 가야하는가’라는 뜻으로 불법체류자 아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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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 새겨진 원주민 모습의 문양

메리다와 칸쿤 고속도로 톨게이트

고향 남편을 그리워하며 부른 애절한 가락이라고...

치첸이트사 가는 고속도로 휴게실에 잠시 버스가 멈춰 내렸는데 조그마한 휴게소 건물

모습이 예전 우리나라 초가집과 유사한 느낌을 주고 있어 멕시코 원주민들이 아시아에서

건너간 민족이라는 학설을 더욱 강하게 신뢰하게 만들어 주었다. 물론 지붕의 재료가 볏

짚이 아닌 이곳에서 나는 갈 와 유사한 풀이라지만..

여행 전에 조사한 마야문명에 한 학설은 너무나도 다양하여 종잡을 수 없지만 전체

적으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기원전 수 세기 전부터 멕시코와 중미지역에서 싹트기

시작한 마야문명은 거 단일 문명이 아닌 독립된 부족들이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문화

로 저마다 독자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마야문화가 번성한 지방은 3개 지역으

로 구분되나, 그 중심을 이룬 것은 과테말라 북부의 페텐지방으로부터, 서쪽은 멕시코의

타바스코, 동쪽은 벨리즈지방에 이르는 중앙지역이다. 여기에 유카탄반도의 북부지방 및

과테말라고지, 차아파스 지방으로부터 태평양 연안에 이르는 남부지방 등 2개 지역이 포

함된다. 특히 치아파스와 유카탄 주는 고 마야문명이 특별히 번성하였던 곳으로, AD 1

세기경에 과테말라, 그 후에는 멕시코의 유카탄 반도 남부의 치첸이트사를 중심으로 5세

기를 전후로 하여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마야문명은 사회와 경제제도, 천문학,

수학, 조각, 의학, 그리고 예술적 측면에서 가장 뛰어난 중남미의 고 문명으로 평가받

고 있는데, 마야문명의 사회조직은 아스텍 사회와 유사했으나 가정(Familia)을 기본으로

하고, 한 가정을 아버지인 윰(Yum)이 다스리고, 여러 가정은 클란(Clan), 지역 단위는

바탑(Batab), 그리고 최고의 권력은 아아우(Ahau)가 장악하고 있었다. 마야 족은 지구가

둥글고,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으며, 위도와 경도의 개념, 일식과 월식 그리고 금성을

포함한 가시성좌의 이동법칙을 이해하고 있었다. 또한 마야력은 아스텍력과 유사했으나,

마야족은 아라비아 민족보다도 훨씬 먼저 세계에서 0의 개념을 최초로 이해하고 사용한

부족이었다. 마야문명의 우수성은 특히 건축술에서 뛰어났다. 마야 족은 부신(el Dios

del Padre), 모신(el Dios de la Madre) 및 선악신 등 3 신을 섬기는 것 외에도 수많

은 신들을 숭배하였다. 특히, 마야 족은 상형문자를 가지고 이를 기념비나 신전의 벽 또

는 양가죽에 남겨 놓았다. 그러나 이들은 오랜 가뭄 및 인구증가 등으로 인한 농작물 수

확 감소 및 식수난 등 환경적인 요인으로 8세기 중반부터 점차 붕괴하기 시작해 10세기

경에 이르려 농지가 척박하고 카리브 족(Caribes)의 잦은 침략으로 치첸이트사를 떠나

내륙으로 이동하면서 쇠망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10세기 말경에 마야 족의 후손들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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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첸이트사 입구 풍경 및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이곳에서 노래를 불렀다는 안내판

북쪽 방향에서 본 치첸이트사 꾸쿨칸의 피라미드 모습

시 유카탄 반도로 진출하여 톨텍 족과 합세하여 소위 마야-톨텍의 신마야 제국으로 일컬

어지는 치첸이트사, 욱스말(Uxmal) 등의 후기 고전문명이 융성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12

세기에 들어 치첸이트사와 마야판(Mayapán) 간의 전쟁 이후 계속된 도시 상호간의 내전

으로 15세기 중엽에서 16세기 초 사이에 걸쳐 여러 곳으로 흩어졌다. 결국 신마야 제국

은 스페인 정복자들이 도착하기 이전에 이미 종말을 고하고 있었다.

11시 조금 지나 드디어 멕시코 남부 유카탄 반도 남중부에서 내륙으로 조금 들어간 곳

에 위치해 있는 치첸이트사에 도착하였다. 깊은 산속 분지에 있을 것이라는 나의 예상과

달리 치첸이트사는 비교적 완만한 평지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유적지

입구에 들어서니 이른 시간인데도 전 세계로부터 온 많은 관광객들이 눈에 띄었으며, 입

구에는 얼마 전 타계한 이탈리아의 가수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이곳에서 노래를 하였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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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첸이트사 유적지에 있는 나무에 기생하여 사는 식물

치첸이트사 피라미드 앞에서 제례를 지내고 있는 세계 각지에서 온 역술인들

안내판이 걸려 있었다. 역시 소문 로 이곳이 노래하기에 좋은 장소였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다. 또한 이곳이 1988년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는 안내판도 눈

에 띄었다.

여행 전에 많은 마야유적 중에서 왜 치첸이트사가 세계 7 불가사의에 들어가 있는지

궁금하였기에 치첸이트사에 해 좀 더 광범위하게 조사해 보았다. 치첸이트사는 중미를

표하는 유적 중 하나이며, 피라미드는 오랜 옛날부터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예를

들면, 16세기에 멕시코에서 활약했던 이단심문관(주: 가톨릭 교회에서 이단을 판정하는

종교심판관. 이들에게 이단으로 판정받은 사람들은 화형에 처해지거나 가혹한 처벌을 받

아야 했다) 디에고 데 란다는 치첸이트사의 피라미드를 비롯한 몇몇 유적에 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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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쪽 방향에서 본 치첸이트사 피라미드 모습

을 남겨놓았다. 그러나 유적에 한 학술조사는 19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이

루어졌다. 1941년 미국의 여행가 존 로이드 스티븐스의 저서 『중앙아메리카, 치아파스,

유카탄 여행담』이 출판되자, 이 책에 영향을 받은 영국의 알프레드 모즐리와 프랑스의

디지레 샤를네가 치첸이트사를 비롯한 중앙아메리카 유적을 사진으로 촬영하고, 또 여러

차례 조사와 발굴을 벌였던 것이다.

치첸이트사 유적은 마야문명의 흐름을 이끈 유적이지만 멕시코 중앙고원을 거점으로

한 톨텍문명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마야문명 시 를 구치

첸, 톨텍문명을 신치첸으로 나누는 경우도 있다. 마야어로 [우물가 이트족의 샘]이란 치

첸이트사는, 아마도 유카탄 최 의 세노떼(성스러운 우물)가 이곳에 있기에 붙여진 이름

으로 추측된다. 마야의 역사자료에 따르면, 쿠쿨칸(깃털 달린 뱀을 의미)이라는 인물이

서쪽에서 와서 유카탄 반도를 지배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치첸이트사를 제압하고 수

도를 건설했으며, 이로써 치첸이트사는 전체 규모가 확 되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 쿠쿨

칸은 마야식 호칭이며, 톨텍족은 테오티와칸의 문화를 이어받았기에 [깃털 달린 뱀] 케

찰코아틀이라고 부른다. 케찰코아틀은 톨텍의 신인 동시에 영웅신이었다. 치첸이트사를

지배한 쿠쿨칸은 톨텍족의 우두머리라는 존칭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이 도시는

5세기경에 성립된 후 7세기~8세기 사이에 쇠퇴했으나, 10세기 전후로 멕시코 중앙고원

문화의 영향을 받은 톨텍 족에 의해 도시가 재건된 후 치첸이트사는 약 240년 동안 예술

과 종교도시이자 교역의 거점으로서 커다란 번영을 누렸다. 하지만 인구증가와 농지의

황폐로 인한 영양실조와 피라미드와 같은 건축물에 사용되던 회반죽을  만들기 한  벌목

으로 인한  질병의 창궐, 그리고 지배계층의 권위손상으로 13세 초반 무렵부터 점차 도

시가 쇠퇴하기 시작하면서 1224년에 결국 성채 도시인 마야판(Payapan)에게 종족과의 전

투에 패한 후 멸망당하고 말았다. 또 치첸이트사를 정복한 마야판도 13세기에 몰락의 길

을 걸으면서 분열이 계속되어 마침내 아스텍 민족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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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첸이트사 피라미드의 남쪽 및 서쪽 방향 모습

치첸이트사 입장권

이러한 역사적 변천이 있기에, 치첸이트사는 툴텍족 문화영향을 수용한 북쪽의 새로운

유적인 신치첸과 순수한 고 마야문명으로 이루어진 남쪽의 오래된 유적인 구치첸으로

나눌 수 있는데, 북쪽에 비해 남쪽의 건축물들이 더 복잡하게 배치되어 있다. 스페인어

로 엘 카스티요(요새)라고 불리는 유명한 피라미드는 북쪽에 있지만, 그 주변에는 구기

장과 전사의 신전, 시장 등이 있고, 북쪽으로 뻗은 성스러운 길에는 석회암 지 위에

파놓은 세노테라 불리는 연못이 있다. 남쪽에는 신관의 묘와 수도원, 비문의 신전 등

으로 불리는 유적이 흩어져 있고, 카라콜(달팽이)이라 이름 붙은 탑 모양의 유적이 하늘

높이 솟구쳐 있다. 원통 모양의 카라콜 구조는 전통적인 마야 건축양식과 다른 것으로,

다른 마야 도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치첸이트사만의 독특한 건축물이다. 유적 그 자체

는 3단으로 쌓아올린 기단부 위로 높이 22미터의 탑이 솟아 있는 구조로, 그 내부는 카

라콜 모양처럼 나선형 계단을 통해 정상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건축 당시에

는 아무런 문제없이 굳건하게 서 있었을 테지만 그 후 머지않은 시기에 개축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치첸이트사를 특징짓는 유적인 꾸꿀칸의 피라미드와 카라콜은 당시 고도로 발달

한 천문학의 산물임이 밝혀졌다. 가혹한 자연 환경 속에서 농경생활을 했던 마야인들에

게 기후 예측만큼 중요한 일은 없었기 때문에 정확한 달력을 통해 계절의 변화를 아는

것이 필요했고, 필연적으로 천문학이 발전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카라콜의 기단부와 테

라스는 주요 천체의 궤도와 합치하도록 만들어졌으며, 탑의 정상에는 관측실이 있었다.

그곳에 나란히 나 있는 창들도 태양과 달의 운행에 맞춰서 설치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런 시설을 이용해서 고 마야의 천문학자들은 태양과 달, 금성 등의 궤도를 정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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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했고, 정확한 달력을 만들었다. 또한 치첸이트사의 주민들은 달력과 마찬가지로 산

제물을 바치는 의식을 단히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구기장에서는 종교적인 의미를

지닌, 4kg에 해당하는 고무공을 벽에 붙어 있는 돌 바퀴 사이로 통과시키는 구기를 했는

데, 게임에 진 팀(일설에는 이긴 팀)의 리더는 산 제물로 머리가 잘리는 운명을 맞았다

고 한다. 그리고 피라미드 북동쪽에 있는 전사의 신전에서도 산 제물을 바치는 의식이

이루어졌다. 신전에서 가장 높은 곳에는 신과 인간의 사자가 옆으로 길게 누운 착물 상

이 있는데, 그 배 위에 있는 그릇에 살아 있는 인간에게서 뽑아낸 심장을 올려놓고 신에

게 바쳤다고 한다. 이 외에도 치첸이트사에는 산 제물을 바쳤을 것으로 추정되는 신전에

몇 개 더 있다. 또 북쪽에 있는 [산 제물의 샘] 또는 [성스러운 샘]으로 불렸던 세노테

에서도 산 제물을 바치는 중요한 종교적 의식을 행하는 장소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입구를 들어서 나무숲으로 이루어진 숲길을 조금 걷다 보니, 넓은 평지위에 건설된 피

라미드와 그 주변으로 작은 건축물들로 이루어진 치첸이트사 유적지가 한 눈에 들어왔

다. 유적지에 한 첫 인상은 어제 본 테오티와칸 유적지 보다는 규모가 상당히 작으며

일종의 테마파크에 온 것 같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꾸꿀깐의 피라미드(El Castillo)에 관해 자료조사와 현지 가이드의 설명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 피라미드형 신전은 AD 9세기 초 완성된 바닥둘레 55m, 높이 23m로, 치

첸이트사의 표적인 유적이다. 정식 이름은 성이라는 뜻이지만 [꾸꿀깐의 피라미드]로

더 많이 불린다. 이 피라미드는 이집트의 피라미드, 테오티와칸의 피라미드 및 다른 마

야문명 지역에 있는 피라미드에 비해 규모면에서는 매우 작으나, 보존 상태가 우수하고

건축미도 뛰어나지만 마야인의 역법을 건축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즉, 테라스가 층

층이 쌓여 있는 모습의 피라미드는 각각 91개로 되어 있는 4면의 계단에 정상의 1개 계

단을 더하면 365일이 된다. 그리고 피라미드의 기단부는 9층의 테라스 형태 구조물로 이

루어졌지만, 그 밑으로 8층까지는 여섯 곳, 가장 높은 곳에는 네 곳에 패널이 설치돼 있

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수를 모두 더하면 52가 되는데, 이는 태양력의 1년 일수인 365

일과, 마야 달력 중에 하나인 260일력과는 최 공약수가 된다. 사실 마야에서는 52년마

다 커다란 종교 행사가 있었고, 종교시설의 건설과 보수 등도 그 시기를 맞추어서 했다

고 한다. 또한 피라미드 4개 계단의 각 난간마다 뱀이 흘러 내려오다 지반에 이르러 머

리를 드는데, 땅에 내려서는 좀 더 강한 인상을 남기기 위해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데,

특히 피라미드 북쪽 계단 가장 하단부에 있는 깃털 달린 뱀 조각은 춘분과 추분날 저녁

이 되면 계단까지 퍼져나가 그림자가 마치 구불거리며 내려오는 뱀의 모습처럼 보여 종

교적인 영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어, 지금도 전 세계 역술인들이 자주

찾아오고 있다고 한다.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이집트가 그랬고 인도와 앙코르와트도

그랬던 것 같이 역시 뱀은 지역을 가리지 않고 인간에게 어떤 영묘함을 표현하는 영원한

주제인가 보다(물론 기독교에서는 사악한 동물로 간주하고 있지만)라는 생각이 들면서,

주위의 나무를 보니 우리나라 겨우살이와 같이 나무에 기생하여 사는 식물이 눈에 띄어

다소 신기하게 느껴졌다. 가이드를 따라 피라미드의 동쪽으로 가서 피라미드 정면에서

박수를 쳤더니 동물 울음처럼 독특하게 반향 되는 소리를 직접 들으며, 입구 안내판에서

본 이탈리아의 가수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이곳에서 노래하였을 때 과연 어떻게 들렸을까

하는 상상을 해 보았다. 또한 가이드 말 로 여러 나라로부터 온 역술인(옷차림으로 판

단하건데)들이 피라미드를 향해 제사(?)를 지내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

다. 이곳에 와서 직접 겪어보니 역시 이 피라미드는 여느 피라미드와는 다른 신기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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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첸이트사에 있는 전사의 신전

가지고 있는 건축물이기에 세계 7 불가사의에 들어갈 만하다는 생각에 동의할 수 있었

다. 그러나 나중에 피라미드를 한 바퀴 돌며 확인한 바로는 피라미드의 남서쪽 방향은

많이 훼손되어 있었다.

전사의 신전(Templo de los Guerreros)은 전사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어 붙여진 이름으

로, 원래 착물 신전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것이다. 내부에는 깃털 달린 뱀이나 전사, 수

도승 등이 조각된 기둥과 전쟁과 일상의 모습이 그려진 천장벽화 및 치첸이트사에서 가

장 잘 보존된 착물 조각상이 있다고 하는데 신전 둘레에 줄을 쳐서 안으로의 출입을 금

지하고 있어 보지 못하고 상상으로 만족하였다. 전사의 신전에 해 좀 더 살펴보려고

할 때 때마침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나무 밑에 잠시 피를 피하며 그치기를 기다렸지

만,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아침에 호텔을 나설 때 날씨가 너무 좋아 일행 부분이 우

비를 가져오지 않아 고스란히 비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빗줄기가 다소 엷어지는 것 같아 서둘러 유적 중심에서 북쪽으로 300m 떨어진 곳에 있

는 성스러운 샘(Cenote Sagrado)인 세노테로 갔다. 샘은 다소 탁한 샘물로, 직경 60m,

땅에서 수면까지 22m, 물 깊이는 6~12m로, 샘 아래에 살고 있다고 믿는 비의 신 착

(Chac)에게 마야인들이 비를 기원하며 인간을 포함해 많은 제물을 바친 곳이라 치첸이트

사에서 가장 중요한 의식장소라고 한다. 다시 세차게 내리는 비를 피해 세노테 근처에

있는 휴게소에서 비가 멈추기를 기다리며, 마야인들이 세노테와 같은 커다란 샘을 제물

을 바치기 위한 장소로 사용하였다는 것이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 어쩌면 치첸이트

사는 이 커다란 물웅덩이로 인해 물 문제가 해결되었기에 오랫동안 유지된 도시였을지도

모르며, 이곳 물웅덩이에서 발견된 많은 유골은 전쟁에서 패한 후 이곳을 다시 사용하지

못하게 치첸이트사 민족을 이곳에 매몰시킨 것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

었다.

비가 계속 내려 일행 중 버스로 돌아가자는 사람도 나와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하여 성

스런 샘으로부터 다시 광장으로 나와 일행을 쫒다 보니 아까는 눈에 띄지 않았던 금성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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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첸이트사의 성스러운 샘인 세노테

치첸이트사의 금성의 제단

제단(Platforma de Venus y Tumba del Chac-Mool)이 나타났다. 아무리 바빠도 잠깐 보고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벽면에 새겨진 독수리와 재규어, 뱀과 사람을 섞은 신기한 형상을

사진에 담았다. 이 금성의 제단은 중요한 의식용으로 추정되는 제단으로, 모서리에는 금

성을 상징하는 문자가, 옆면 중앙에는 독수리와 재규어, 뱀과 사람을 섞은 신기한 형상

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가장 독특한 것은 한쪽에 있는 착물(Chac-Mool)의 조각상으로,

고 멕시코의 톨텍 문화, 아스텍 문화와 톨텍 마야문화에 나타나는 신과 인간 사이를

중계하는 신격으로 엉덩이를 땅에 댄 채 양쪽, 무릎을 세우고 상반신을 반쯤 일으킨 앉

은 것도 누운 것도 아닌 모습으로 머리를 옆으로 돌리고 손을 배위에 놓고 그곳에 공양

물을 담은 용기를 올려놓고 있는 자세의 등신 석상으로 나타내었기 때문에, 착물의 무

덤이라고도 부른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일행을 쫒아가기 위해 확인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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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첸이트사의 금성의 제단

치첸이트사의 넓은 볼경기장 모습

비가 계속 내려 현지 가이드는 서둘러 볼경기장으로 우리를 안내하였다. 가는 도중에

죄수나 잠재적인 적들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 목적으로, 전쟁에서 죽인 적군

과 인신공양에 쓰인 희생양들의 해골을 쌓아 올려 전시하던 곳으로, 사각형 제단의 벽면

에는 다양한 표정의 두개골이 새겨져 있고, 흙무더기 아래에서는 의식에 쓰인 것으로 보

이는 9개의 해골이 발견되었다고 쏨반뜰리(Plataforma de los Craeos o Tzompantli)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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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첸이트사 볼경기장 벽면에 새겨져 있는 경기 모습

치첸이트사 피라미드 근처에서 발견한 이구아나

있었지만 그냥 눈으로 힐끗 보고 지나쳐 확인할 수 없어 아쉬웠다.

볼경기장(Juego de Pelota)은 길이 150m의 경기장으로, 양쪽으로 평행한 벽 위에 골

을 넣는 원형골 가 있으며, 아래쪽 경사면에는 경기모습이 현실감 있게 새겨져 있었다.

사전 조사한 자료에는 제물로 바쳐진 자의 목에서 흘러내린 피가 7마리 뱀이 되어 용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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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첸이트사 유적지 입구에서 전통복장을 입고 춤을 추고 원주민 인디오들

음치는 장면이 있다고 하였는데 발견하지 못하였다.

계속 비가 내려 가이드가 25분정도의 시간을 주고 정문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나는 피

라미드와 금성의 제단을 한 번 더 살펴보려고, 종교의식 때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마

야-똘텍 스타일의 제단으로, 마야 문명에서 용맹한 전사계급을 상징하는 뱀, 독수리 및

재규어가 새겨져 있으며, 제단의 옆면에는 사람의 심장을 움켜진 독수리와 재규어가 그

려져 있다는 독수리와 재규어의 제단(Plataforma de los Aguilas y los Jaguares)을 생

략하였다.

전사의 신전 중앙 계단의 맨 위쪽에 치첸이트사에서 가장 잘 보존되었다는 착물의 조

각상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신전 오른편에 수많은 기둥들이 모여 있는 Grupo de

Columnas를 살펴 보며 그 안의 공터에 있다는 증기탕과 시장터를 상상해 보았다. 피라미

드를 한 바퀴 둘러보다 이구아나를 발견하였다. 바로 눈앞에 야생의 이구아나를 보는 것

은 난생 처음이라 무척 신기하면서 반가웠다. 좀 더 이구아나를 살펴보고 싶었지만 일행

과 만날 시간이 다 되어 유적지 입구로 향하면서, 고 마야의 유적으로 피라미드와 함

께 치첸이사의 표적 상징물인 천문 로 추정되는 카라콜(달팽이)이라 이름 붙은 탑 모

양의 유적도 보지 못하고 간다는 생각이 들며, 배낭여행으로 왔다면 아무리 비가와도 점

심을 거르는 한이 있어도 이 모든 유적을 천천히 확인해 보고 갔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1시 반경에 치첸이트사 관광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인디오들이 전통 춤을 추고 있

었다. 잠시 구경하다 근처에 있는 식당으로 가서 현지식으로 점심식사를 하고, 2시 반경

칸쿤을 향해 출발하였다. 점심을 먹으면서도, 이 여행을 마친 지금도 고 4 문명의

발상지들이 강을 끼고 온 기후에 속해 기후가 좋고 비옥한 토지에서 발생했던 것과는

달리 마야인들은 풀과 나무가 무성한 림으로 덮여있고 표범, 멧돼지, 독사, 독도마뱀,

독거미 등이 우글거리며, 또한 축축한 습기와 더위로 전염병이 유행하기 쉬운 열 우림

지역에 도시를 세운 것이 이해가 되지 않고 있다.

돌아오는 버스 속에서 술을 좋아하는 내게 현지 안내인을 통해 멕시코 술에 해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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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쿤 휴양지 모습

히 알게 되었다. 먼저 떼낄라는 선인장의 한 종류인 용설란으로 만든 증류주의 일종으

로, 과달라하주에서 9년 이상 자란 푸른 용설란으로 만든 것은 떼낄라, 오아하까 지역에

서 다양한 용설란을 사용해서 만든 것은 [메스깔]이라고 한다. 또한 떼낄라도 종류가 많

은데, 가장 하품은 백색인 [크라세], 이것을 묵힌 중품이 [레포사또], 그리고 숙성을 시

킨 것이 상품으로 [아네호]라고 한다. 참고로 쿠바의 럼주는 [모히토]라고 한다.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 버스 속에서 스페인의 코르테스가 멕시코를 입성하기 바로 전

마야문명에 관해 멜깁슨이 주연한 [아카폴리스]란 비디오를 시청하였다. 몇 년 전 TV로

보았을 때에는 별 감응이 없었는데, 오늘 치첸이트사를 관광하고 보니 영화의 내용이 한

층 더 가슴에 와 닿았다.

5시 반에 호텔에 귀가하여 방으로 올라와 다리의 상처를 소독한 후, 1층으로 내려가

느긋하게 저녁 만찬(?)을 즐긴 후, 선배와 함께 칸쿤 쇼핑가로 갔다. 명품 매장들이 서

울의 백화점 명품매장 뺨칠 정도였다. 평일이라 그런지 비수기라 그런지 잘 모르겠으나

손님들이 별로 많지 않았다. 역시 경제 불황의 여파가 여기도 심각한가하는 생각이 들었

다. 잠시 둘러 보다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데 호텔 근처에 젊은이들의 밤문화가 화려하게

펼쳐지는 장소가 보였다. 혼자였으면 물론 내려 그들 속에 섞여 칸쿤의 밤문화를 느껴

보고 싶었으나, 상처로 인해 다리도 아프고 일행이 있어 그 로 호텔로 돌아와 맥주와

테낄라를 마시며 오늘 관광한 것을 정리하면서 휴식을 취하였다. 룸메이트인 선배가 술

을 마시지 않고, 나 또한 다리 상처로 많이 마시는 것이 안 좋을 것 같아 자제하였지만,

저녁시간을 호텔 방에서 지내는 것이 무척이나 답답하였다. 이건 내 스타일이 아니지 하

며, 이번 여행 중에 마실 생각으로 호텔방에 있는 공짜 술을 물병에 4병이나 담았다. 물

론 이 술은 여행을 마칠 때까지 나의 소중한 식량이 되었다.

3월 7일(금), 넷째날 칸쿤--> 쿠바 오늘은 오후 3시 비행기로 쿠바로 가는 일정만 있으므로 11시까지는 자유시간이었다.

아침에 눈을 떠서 다리 상처 부위를 살펴보니 그런 로 진정되어가는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다만 거의 매일 비행기를 타고, 며칠 후 해발 4천m가 넘는 쿠스꼬, 그리고 마

추픽추를 관광하면 다리상처가 무척 부풀어 오를 것인데 괜찮을지가 다소 걱정이 되었

다. 하지만 이번 여행이 어떻게 온 여행인데 막 시작된 이 시점에서 그만둘 수 없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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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쿤섬 호텔 및 쇼핑가의 야경

생각이 들어 무사히 여행을 마칠 수 있을 것이라고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일행에게

도 내색을 하지 않기로 작정하였다.

베란다로 나가니 마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는데 풍경이 너무나 멋졌다. 한참을 감상하

다가 로비로 나가 원두커피를 마시고, 식사 시간이 될 때까지 호텔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제와 달리 오늘은 화창한 날씨라 그런지 아침 일찍부터 수영복 차림인 숙박객들이 많

이 눈에 띄었다. 다리 상처만 아니라면 수영복도 가지고 왔기에 카리브해의 바닷물에 몸

Page 42: cfd.kookmin.ac.kr 2014년 중남미 여행기-1 - 멕시코 편CFDNTLAB/myongpdf/trip/2014Mexico.pdf여행계획을 잡았으나, 안전상 문제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자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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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쿤 국제공항 체크인 카운터 풍경

도 담가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호텔을 벗어나 이웃한 삼판 및 바닷가 모래사장을 거닐며 많은 카

리브해 바닷가에서 선텐 및 해수욕을 즐기는 관광객들을 둘러보다 방으로 올라가 짐을

챙겨 로비로 나와 체크아웃을 하고 11시경 공항으로 출발하였다.

체크인을 하고 난 후, 공항 밖 공원에서 도시락으로 점심식사를 한 후, 출국 수속을

마치고 게이트로 가서 기다리다, 15시 05분 CU153편으로 칸쿤 국제공항 출발하여 쿠바로

향하였다. 아듀! 멕시코여!!!!! 수수께끼만 내게 남겨준 마야문명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