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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왕 장보고 그는 누구인가? (재)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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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상왕 장보고그는 누구인가?

    최광식․정운용․최근식․윤재운 저

    (재)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

  • 발간에 즈음하여

    장보고 대사는 그동안 국내외의 많은 학자들에 의해 연구되고

    평가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와 관점에 따라 해상왕, 무역왕 이라는 최상의 평

    가로부터 심지어는 해적, 반역자로까지 다양하게 언급되어 왔습니다.

    우리의 역사적 인물 중에서 장보고 대사처럼 이렇게 다양하고

    상반되게 평가되고 있는 인물도 흔하지 않습니다.

    이는 대부분의 역사적 인물이 큰 성공을 거두고 영광된 삶을 산

    데 반하여 장보고 대사는 자객에 의해 암살 당한 인물로서 우리의

    대표적인 고대사료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장보고를 미천한 해도인으로 모반을 꾀한 반역자로 기록하고 있는데 기인하기

    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역사서에서의 이런 부정적인 기록과는 달리 당나라

    의 최고시인인 두목은 그의 번천문집에서 당나라 최고의 영웅곽분양 이상의 인의와 덕을 지닌 의인으로 평가하고 있고 일본 천

    태종의 본산인 엔리꾸사의 3대 좌주인 엔닌은 그의 중국기행문 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 장보고 대사의 높은 인덕을 극존칭으로 흠모하고 있으며, 또한 장보고 대사를 세계에 소개한 전주일 미국대

    사 라이샤워는 그의 저서 엔닌의 당 여행기에서 장보고를 상업제국을 건설한 위대한 무역 왕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또한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조차도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 편

    에 “을지문덕의 지략과 장보고의 의용이 있어도 중국의 서적이 아

  • 니었던들 기록이 없어져……(乙支文德之智略 張保皐義勇 徵中國之

    書 則泯滅而無聞)”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같이 우리의 삼국사기와 일본의 기록이 상이 한 점을 규명하

    고 올바른 역사 인식을 하기 위해 사학계의 권위 있는 학자들이

    장보고 연구를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결과 역사상 어느 누구보다도 진취적이고 대외 지향적인 사

    상을 가지고 해상경영과 무역을 통하여 우리나라를 동북아 중심에

    우뚝 서게 한 장보고 대사의 업적과 꿈이 국민들에게 올바로 평가

    받고 또한 우리 미래에 귀중한 사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책을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사학 발전에 헌신해 오신 경험과 경륜으로 이렇게 장

    보고 대사를 집대성한 책을 집필해 주신 고려대학교 최광식 교수

    와 이에 참여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며 이미

    1200여 년 전에 당시로서는 세계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동북아시

    아의 해상권을 장악한 장보고 정신이 우리 젊은이들에게 계승되어

    해외로 뻗어 가는 힘찬 원동력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2002년 12월

    (재)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

    이 사 장 김 재 철

  • 目 次

    제1장 장보고 등장의 배경 ······································································· 71. 8~9세기 동아시아세계의 시대상황 ··········································7

    2. 당나라의 경제체제와 조공무역 ·················································9

    3. 8세기 공무역체제(公貿易體制)의 성립과 운영 ······················ 12

    4. 9세기 공무역의 쇠퇴와 사무역의 발달 ·································· 15

    5. 중앙정치의 혼란과 유이민의 만연 ··········································17

    제2장 장보고의 가계와 생애 ·································································· 201. ‘장보고’라는 이름에 담겨진 의미 ···········································20

    2. 장보고의 출신지 ······································································21

    3. 당에서의 활동 ·········································································21

    4. 귀국과 청해진의 설치 ·····························································23

    5. 동북아시아 해상권의 장악 ······················································26

    6. 장보고의 암살과 해상왕국의 붕괴 ········································28

    7. 장보고에 대한 역사적 평가 ····················································30

    제3장 해상왕국의 건설과 번영 ······························································ 331. 청해진이 설치되기까지의 배경 ···············································33

    2. 청해진의 설치 ·········································································40

    3. 해상왕국의 건설과 번영 ·························································46

    제4장 청해진과 신라 정부와의 관계 ······················································ 541. 여러 군진의 설치와 청해진 ····················································54

    2. 청해진의 중요성 ······································································61

    3. 청해진과 신라 정부와의 관계 ·················································67

  • 제5장 해상왕국의 몰락 ··········································································· 771. 신라 중앙 정부의 혼란 ···························································77

    2. 청해진 세력의 정치적 한계 ····················································86

    3. 장보고 해상왕국의 몰락 ·························································93

    제6장 중국 산동반도의 신라인사회와 무역 ··········································· 981. 재중국신라인 사회의 형성 ······················································98

    2. 재중국신라인의 무역활동 ······················································105

    3. 장보고무역선단과의 관련성 ··················································112

    제7장 재일본 신라인사회와 장보고 ····················································· 1201. 재일본신라인사회의 형성과 역할 ··········································120

    2. 장보고의 대일무역활동 ·························································130

    제8장 장보고세력의 성격 ····································································· 139

    제9장 장보고 선단의 무역선과 항로 ··················································· 1431. ‘백제선’과 ‘신라선’의 등장 ····················································146

    2. ‘신라선’의 구조 ······································································151

    3. 9세기 장보고선단의 항로에 대한 재검토의 필요성 ············· 163

    4. 도리기 ‘신라왕성로’의 재검토 ···········································1645. 장보고 무역선단의 항로 ························································168

    제10장 장보고 무역선단과 해양신앙 ··················································· 1761. 한국고대의 해양신앙 ····························································176

    2. 신라의 제사와 청해진 ························································180

    3. 법화원 창건의 목적 ······························································181

    4. 적산 법화원의 창건시기 ·······················································182

    5. 적산 법화원의 규모 ······························································183

    6. 법화원의 철폐와 재건 ··························································185

  • 7. 적산법화원의 역할 ·······························································187

    8. 재일본 신라인과 신라신 ·······················································189

    제11장 청해진의 혁파와 군소해상세력의 대두 ··································· 1941. 청해진의 혁파와 그 영향 ·····················································194

    2. 신라 하대 지방세력의 유형 ·················································196

    3. 해상무역을 담당한 세력 ·······················································197

    제12장 장보고가 남긴 교훈 ································································· 2071. 해양경영의 중요성 ·······························································207

    2. 21세기 세계화의 지표 ··························································207

    3. 21세기 동북아 경제권의 구상 ··············································208

    4. 해양자원의 산업화와 국제화 ················································209

    5. 해양경영모델 ········································································210

    6. 민족역량의 결집 ···································································210

    참고문헌 ································································································ 211

  • 해상왕 장보고 그는 누구인가?발행처 (재)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

    발행인 김 재 철

    편 저 최 광 식 외

    발행일 2002년 12월 31일

    주 소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 159-1

    한국무역센터 1803호

    인쇄처 대산문화인쇄

    비매품

  • 제1장 장보고 등장의 배경 7

    제1장 장보고 등장의 배경1. 8~9세기 동아시아세계의 시대상황

    8~9세기는 동아시아의 역사상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살펴볼 때에도 매우 흥미롭고 특기할 만한 시기이다. 이

    시기에 동아시아 지역의 국가들은 중앙집권적 통치체제가 무너지

    고, 지방의 토호들이 각지에서 자신들의 실력을 쌓아가며 독자적

    세력을 형성해 나가던 지방분권적 체제로 변화해 가던 시기였다.

    7세기 초에 중국대륙을 통일한 당(唐)은 율령을 정비하고 제도

    화하여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확립하였다. 당은, 이러한 정비된

    통치체제를 바탕으로하여 중국대륙 뿐만 아니라 주변 여러 나라들

    을 제압하고 명실상부한 동아시아세계를 형성하고, 이를 주도해 나

    갔으며, 개방적이고 세계적인 제국으로서 역사를 전개시켜 나갔다.

    그러나 8세기에 접어들어 율령제를 통한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

    치체제는 여러 면에서 그 모순이 드러나게 되었고, 그 모순은 안

    사(安史)의 난(亂; 755~763)으로 폭발하였다. 이 난의 결과 당에

    서는 율령에 의한 기존의 통치체제가 무너지고 사회는 각 지방의

    절도사세력에 의해 주도되는 이른바 번진체제(藩鎭體制)가 성립되

    었다. 이들 번진세력들은 8~9세기 당의 정국을 주도하며 그들의

    세력을 확대하였고, 급기야는 중앙정부에 반항하는 반당적(反唐

    的) 번진으로 바뀌어 당왕조와 대립하는 양상을 나타내었다. 이러

    한 현상은 결과적으로 농민들에게는 당 왕조와 번진세력에게 이중

    으로 수탈당하는 생활고를 가져왔고, 결국 9세기말에 이르면 황소

    (黃巢)의 난(亂; 875~884)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동아시아세계를

    주도해나가던 당은 결국 907년에 멸망하게 되었다.

    그동안 한반도의 삼국 중에서 가장 늦게 중앙집권적 고대국가의

  • 8 해상왕 장보고 그는 누구인가?

    기틀을 마련하였던 신라는, 7세기 중엽 삼국을 통일하고 당의 율

    령제를 수용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이룩하였다. 이후 100여

    년간 신라는 사회 각 분야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고 적극적

    인 대외활동을 통하여 발달된 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신라는 8세기말에 이르러 왕권은 진골귀족들의 도전을

    받아 약화되고 진골귀족들이 연합하여 정국을 주도해 갔다. 그리

    고는 이들 진골귀족들 간에 왕위쟁탈전이 일어나 중앙정부는 대혼

    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중앙에서 이러한 혼란이 가중되고 있는 사

    이에, 지방에서는 각지의 호족들이 그들의 세력을 키워나갔다. 9세

    기에 이르러 신라에서도 지방분권적 양상이 뚜렷이 나타났다. 이

    러한 양상은 결국 889년(진성여왕 3년) 전국에서 농민반란을 야기

    하였고, 지방호족들의 반란으로 이어졌다.

    일본의 경우도 비슷한 변화의 모습을 보여준다. 당시 동아시아

    세계에서 가장 늦게 고대국가로서의 기틀을 마련한 일본은 7세기

    후반에 등장한 야마토정권(大和政權)을 중심으로 종래의 씨족제

    국가에서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발전해 갔다. 물론 이 과정에서

    당의 율령제와 신라의 문물까지도 받아들여 고대국가의 기초를 마

    련하였다. 그러나 일본에서도 8세기 이후 율령제는 갖가지 모순을

    드러내게 되었고, 9세기에 와서는 정치권의 붕괴양상까지 뚜렷해

    졌다. 국가권력의 상징인 천황의 권위는 추락하였으며 이를 대신

    하여 귀족세력인 후지하라씨(藤原氏)에 의해 ‘섭정정치(攝政政治)’

    가 이루어졌다. 이렇게 중앙에서는 귀족세력의 전횡이 이루어지고

    지방에서는 토호들이 세력을 신장하여 각지에서 할거하더니 결국

    에는 쇼해이(承平)․덴기요(天慶)의 난(935~941)으로 이어졌다.

    일본에 있어서 이러한 변화는 이후의 역사발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승평․천경의 난을 통하여 각지의 토호들은 이른

    바 ‘무사(武士)’로 성장하면서 이후 일본에서 전개되는 봉건적 정

    치질서를 주도해 나가게 된 것이다.

  • 제1장 장보고 등장의 배경 9

    2. 당나라의 경제체제와 조공무역

    역사이래 동서문물 교류의 주요 통로 역할을 수행해온 실크로드

    (Silk Road, 絲綢之路)는 당나라 후기에 들어 전성기를 맞이하는

    데, 이것은 무엇보다 경제적 번영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우선 전통산업인 농업부문의 경우, 개간 등을 통한 농경지확대

    와 수리관개의 확충 및 신품종의 도입에 따른 품종의 다양화로 나

    타났다. 이러한 농촌경제의 활력으로 특산물과 잉여생산물에 기반

    을 둔 상업농업이 발달해 갔다. 또한 상업의 발달은 도시의 발달

    을 가져오는 등 일련의 경제적 변화가 나타났다. 따라서 이전까지

    실크로드를 통한 서역물자의 수송에 의존했던 수급기반의 한계를

    타개하기 위하여, 결국 해상실크로드를 통한 물자수송이라는 혁명

    적 대전환을 마련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농업생산력의 발달은 먼저 농기구 발달에서 찾을 수 있다. 축력

    과 견인려의 등장 및 소형의 가벼운 농기구 등의 등장에 따라 심

    경(深耕)이 가능케 되고, 이를 뒷받침하는 관개농기구도 발달하여

    생산성이 눈부시게 향상되었다. 또한 윤작체제가 고도화되어 이년

    삼모작(二年三毛作)과 이모작(二毛作)이 보급되었으며 이를 시비

    기술과 파종기술의 향상이 뒷받침하였다. 뿐만 아니라 경작 품종

    의 다양화와 신품종의 도입과 보급이 이루어져 농업생산 가운데

    특히 미곡의 생산이 점차 확대되었다.

    이러한 농업 생산력의 발달은 필연적으로 사회적 변화를 가져왔

    는데, 그 변화 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잉여농산물의 상품작물화이

    다. 또한 농가의 부업이 농촌의 경제생활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이

    것이 바로 상업의 발달로 연계되었다.

    경제활성화를 위한 사회간접자본의 시설에 대한 투자도 있었다.

    우선 역전제도(驛傳制度)를 발전․정비하고 운하를 보수․정비하

    였으며, 또한 개원통보(開元通寶)의 주조에서 보듯이 화폐를 통일

  • 10 해상왕 장보고 그는 누구인가?

    하고, 도량형제도에 있어서도 통일적 규정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조용조(租庸調) 세법의 정비를 통해 일반 농민들까지도 유통경제

    에 편입될 수 있게 하여 상업발달의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상업을 직접 담당하는 전업적 상인세력 내지 중간층

    이 대두하여 사회적으로 성장하는, 이른바 부상층(富商層)의 관계

    (官界)로의 진출은 당시에 볼 수 있는 뚜렷한 사회변화 중 하나였

    다.

    아울러 이러한 상업의 발달이 도시화 현상을 가져왔던 것은 물

    론이다. 즉 그간의 관리, 부호, 지주의 거주지이자 행정적․정치적

    인 성격이 강했던 고대도시의 성격에서 점차 상업 내지 상공업에

    기반을 둔 경제적 기능의 비중이 커져갔다. 이와 함께 유통경제의

    보급․확산 및 상인의 활동의 장으로서 지방의 경우에도 주요 도

    시를 중심으로 상업유통기구가 형성되어 농산물의 집하(集荷) 및

    유통과 원격지 상품의 농촌으로의 침투가 용이해졌다.

    한편 당대에 국제간의 무역은 조공무역(공무역)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조공무역은 정부가 통제하고 운영하는 수출입무역을 말하

    며, 적어도 당나라 전기까지는 그것이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중국

    이 조공무역을 하게된 데에는 두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중화

    사상(中華思想)이며 다른 하나는 국가안보상의 이유였다.

    비록 중국은 강하고 넓은 지역을 통치하였지만 주변에는 많은

    다른 민족이 중국을 에워싸고 있어 항상 긴장하였다. 따라서 중국

    은 항상 이들과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때문에 중국

    은 이들과 조공무역을 장려하여 서로 오가면서 적대행위를 자제할

    것을 다짐하였다. 중국의 이러한 조공무역은 중화사상에 바탕을

    두기는 하였지만 주변국과의 평화관계를 유지하는 외교수단이기도

    했다.

    이같은 조공제도는 진한(秦漢)시대에 부분적인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시대를 거치며 제도화되었고 수

  • 제1장 장보고 등장의 배경 11

    당(隋唐)시대를 통하여 더욱 발전하였다. 공식적으로 중국과 주변

    국간의 대외교역은 조공을 통한 것이었으므로 해상을 통한 견사공

    헌(遣使貢獻)은 일종의 해상무역이며 사행선단(使行船團)은 무역

    선의 성격을 지닌 것이라 할 수 있다.

    조공무역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조공국이 정치적으로나 경제

    적으로 이익을 보게되자 중국의 주변국들은 중국에 조공사신을 더

    많이 파견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초기에는 국경을 접하거나 인

    근에 있는 국가에 한정하였으나, 이런 조공무역의 이익이 널리 알

    려지면서 조공국은 보다 확대되었다. 특히 당나라 중반에 이르러

    서는 인도와 중동일대의 서역까지 확대되었다.

    한반도에서 중국과 공무역이 시작된 것은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이 당에 조공사(朝貢使)를 파견하면서부터이다. 중국은 주변

    국가와의 대외무역에 있어 공무역인 조공관계를 원칙으로 하고 일

    반인의 사무역은 엄격히 금지하였다. 조공을 통해 주변국가는 중

    국의 선진문물을 수입하고 왕공(王公)․귀족의 정치적 지위를 보

    장받을 수 있었다. 그들은 또한 경제적 이권의 독점을 유지하였고

    양자간에 이루어지는 물화(物貨)의 교환을 전제로 경제적 욕구 또

    한 만족되었으므로 조공무역은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농업경제의 발달과 이를 바탕으로 한 상공업의 발전은 점

    차 조공무역체제를 변화시켜 나갔다. 특히 당나라 중․후기를 거

    치면서 농업기술의 발달로 인한 농업혁명은 상업발달을 가져왔다.

    상업의 발달은 점차 농촌으로 미치어 경제력의 향상과 연결되었

    다. 이러한 경제력의 향상은 많은 소비재의 수요를 가져왔다. 이러

    한 상황에서 번진이 발호하자 당왕조를 지탱해 왔던 조공무역은

    쇠퇴하게 되었으므로 결국 사무역이 발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 12 해상왕 장보고 그는 누구인가?

    3. 8세기 공무역체제(公貿易體制)의 성립과 운영

    7세기의 삼국통일전쟁 과정에서 당과 신라․일본 사이에 조장된

    심각한 긴장관계는 8세기 이르러 새로운 국제환경이 조성되면서

    다소나마 풀려 가는 변화의 조짐이 나타났다. 8세기 새로운 국제

    환경 조성의 중심에는 698년 발해의 건국이 자리하고 있었다. 발

    해의 건국을 계기로 당과 신라는 발해를 견제하면서 공조체제를

    강화해 갔으며, 730년대에는 급기야 국교를 완전 정상화하였다. 이

    에 대해 발해는 고립과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일본에 접근

    하여 양국간에 돈독한 우호관계를 성립시켰다. 즉 ‘당-신라’와 ‘발

    해-일본’으로 묶여지는 국제적 우호 및 대립의 구도가 선명히 드

    러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국제적 관계속에서도 신라와 일본의 관계는 매우

    특이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양국은 정치․군사적인 측면에서는

    불편한 관계를 완전히 불식시키지 못하면서도, 경제적인 측면에서

    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미묘한 관계를 연출했던 것이다.

    먼저 정치․군사적 측면에서 볼 때, 신라와 일본간에 갈등과 대

    립의 양상들은 문무왕이래 당분간 지속되었다. 즉 문무왕의 뒤를

    이은 신라왕들은 해양 방어에 대한 경각심을 부추기고 방어체제를

    구축하는데 심혈을 기울여 나갔다.

    그러면서도 경제적 측면에서는 양국이 공히 서로를 필요로 하는

    부분도 있었다. 즉 일본은 신라를 통해 적대적인 관계에 있던 당

    과 신라의 선진 물품을 공급받고자 했으며, 신라는 당의 물품을

    일본에 중계하여 보급하거나 자국의 물품을 직접 공급하는 시장으

    로 활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양국의 관계가 이러한 경제적 상호욕

    구를 서로 소통시키지 못하는 한, 침략과 방어라는 양국간의 정

    치․군사적 대립구도는 당분간 유지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렇지만 양국은 점차 경제적 욕구를 둘러싼 이해의 폭을 넓혀 가면

  • 제1장 장보고 등장의 배경 13

    서, 정치적으로 타협을 도모하고 경제적 교류를 확대해 가는 방향

    으로 나아갔다.

    신라와 일본 양국의 교역에 관한 실례는 ‘매신라물해(買新羅物

    解)’를 통해 알 수 있다. 매신라물해는 일본어로 ‘바이시라기모쯔

    게’라고 불린다. 이것은 752년에 일본의 귀족들이 당시 신라사절들

    이 가지고 온 물품을 매입하기에 앞서, 자신들이 매입할 물품과

    수량, 그리고 물품들의 총가격을 기록하여 일본정부에 제출한 ‘신

    라물품의 매입허가를 신청한 문서’이다. 이 ‘바이시라기모쯔게’는

    문서의 용도가 다하여 폐기된 후, 그 일부가 현재 쇼소인(正倉院)

    에 소장되어 있는 ‘또리게리쯔죠병풍(鳥毛立女屛風)’의 배접지로

    활용되었다. 병풍의 전세 과정에서 이미 떨어져 나와 일찍부터 알

    려진 것도 있고, 최근의 병풍 조사시에 새로이 발견된 것도 있는

    데 현재까지 약 30건 이상의 문서가 발견되었다.

    그러면 신라는 왜 752년에 대규모의 사절단을 일본에 파견하였

    을까? 이는 신라가 끊임없이 일본에 사절을 파견하려고 한 점에

    주목해야 한다. 비록 방환(放還)되었지만 752년까지 신라는 732․

    734․738․742․743년 등 5번에 걸쳐 사절을 파견하였다. 특히 이

    무렵의 사행은 그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사절단의 규

    모가 크며, 그것도 시간이 지날수록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 결국

    752년에 700여명이 파견된 것은 이러한 증가추세의 결과라고 생각

    된다.

    733년 이전에 일본에 파견된 신라사절은 신라왕이 공식적으로

    일왕(日王)에게 보내는 ‘조(調)’ 이외에도 별도의 물품을 주었다.

    조와 뚜렷이 구별되는 이 물품들은 대개 신라사신의 이름으로 보

    내졌는데, 그 종류와 양이 매우 다양하고 많다. 이와 마찬가지로

    일왕이 신라사신에게 수여한 많은 양의 솜(綿)도 개인에게 준 것

    이 아니라, 교역의 대가를 지불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대일교역에는 왕실만이 아니라 진골귀족도 참여한 것으

  • 14 해상왕 장보고 그는 누구인가?

    로 생각된다. 특히 당시의 정국을 장악한 상신(上臣)․상재(上宰)

    와 같은 부류들이 왕실과 밀착하여 대일교역을 적극적으로 주도하

    고 있었다.

    그러나 733년 이후 신라는 당과의 관계가 호전되면서,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대등한 관계로 전환시키려 하였다. 733년 이후 신라와

    일본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그동안 활발히 전개되던 신라의 대일교

    역은 정지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신라의 지배층에게는 상업

    적 손실이 가중되었을 것이다.

    일본측은 신라와의 힘 겨루기가 진행되는 와중에 견당사(遣唐

    使)나 발해사(渤海使)를 통해 신라를 대신하는 새로운 해외물품의

    유입로를 마련하려고 노력하였지만,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결국 일본은 이후 신라와 공식적인 사절교환을 포기하고, 다자이

    후(大宰府)를 창구로 한 양국의 교역관계만을 인정하는 형태로 신

    라물품을 다시 받아들이게 되었다.

    8세기 공무역의 추세는 당과 신라 사이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당시 나․당간의 공무역은 견당사(遣唐使)라 불리는 사절단

    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다. 견당사가 당에서 수행한 공무역의 형태

    는 크게 네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① 견당사가 가지고 간 공

    물을 국경에서 검열하여 물품의 종류와 수량을 자세히 적어 홍려

    시(鴻臚寺)에 보고하면, 홍려시에서 그 가격을 산정하고 회사품

    (回賜品)의 물량을 정하여 귀국시 견당사에게 주는 형태, ② 중국

    조정에서 견당사들의 편의를 위해 그들이 머무는 객관(客館)안에

    개설해 주는 관시(官市)를 이용하는 형태, ③ 당나라조정에서 사

    신이 가져온 물품을 고가로 다량 구입해 주는 호시(互市)를 이용

    하는 형태, ④ 비공식적으로 견당사들이 당물(唐物)이나 중국에

    집산해 있던 아라비아, 페르시아의 물품들을 구입하는 형태 등이

    그것이다.

    견당사를 통해 신라에 입수된 이러한 외래 물품들은 신라 귀족

  • 제1장 장보고 등장의 배경 15

    들에게 인기리에 팔려 나갔을 것이며, 그 일부는 일본과의 무역을

    통해 일본에까지 재수출되었을 것이다.

    4. 9세기 공무역의 쇠퇴와 사무역의 발달

    8세기 당․신라․일본의 동북아시아 삼국을 풍미하던 공무역체

    제는, 각국의 권력체제가 황제 혹은 국왕을 정점으로 짜여진 율령

    체제의 정치환경 속에서 관철될 수 있었던 국가 무역통제정책의

    일환이었다.

    이처럼 황제 및 국왕 중심의 획일적 율령정치체제가 작동되던 8

    세기에는, 동북아 삼국은 공통적으로 국가간의 사적인 무역거래를

    금지하고 국가가 통제하고 주도하는 공무역체제를 유지해 가려 하

    였다.

    그런데 이렇듯 사사로운 교역을 금지하는 법령 규정이 있었다는

    것은, 반대로 당시 민간인들 중에는 국가의 감시망을 피해 사무역

    에 종사했던 이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황제(국왕) 중심의 율령체제가 강력하게 작동되는 한, 이

    러한 사무역은 어디까지나 비공식적이고 예외적인 형태를 가질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만약 율령체제의 작용력이 크게 약화되는 국

    면에 이르게 되면, 민간 차원의 사무역은 더욱 더 활기를 띠게 될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이 8세기 후반부터 동북아시아 삼국

    에서 서서히 조성되기 시작했다. 즉 이같은 시기에 동북아시아 삼

    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율령체제 붕괴조짐은 공무역을 후퇴시

    키고 그 대신 사무역을 일으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중국에서는 8세기 중반을 넘어서면서 민간 차원에서 사무역이

    급속도로 번져 갔으며, 당 왕조가 더 이상 이를 직접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자, 무역에 대한 관리를 절도사에게 위임하

    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765년에 평로치청의 번수를 자처한

  • 16 해상왕 장보고 그는 누구인가?

    이정기를 당조정이 ‘평로치청절도사․겸해운압발해양번사(平盧淄

    靑節度使兼海運押渤海兩藩使)’로 임명한 것이 그 좋은 예이다.

    이정기는 고구려의 유민으로서 평로치청절도사 후희일(이정기와

    내외종간)을 몰아내고 스스로 번수의 지위에 오른 다음에 당 조정

    으로부터 이를 추인(追認)받았다. 그가 당 왕조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은 해운과 신라․발해와의 외교를 관장하는 일이었다. 이후

    그는 반당(反唐)의 노선을 분명히 하면서 산동반도를 중심으로 해

    운의 요지들을 점령해 가면서 가장 강력한 번진으로 성장하였다.

    이정기의 막강한 권세는 3대에 걸쳐 819년까지 55년 동안 산동반

    도의 ‘소왕국’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이는 당시 산동반도 연안에서

    해운을 통해 급속히 성장해 가고 있었던 사무역 종사자들의 경제

    적 후원 위에서 가능했을 것이다.

    마침 당시에는 육상 실크로드가 경색되면서 ‘남해로(南海路)’를

    통한 동서문물교류가 크게 활성화되고 있는 추세였으므로, 해로를

    통해 사상(私商)들의 국제 해상무역활동이 크게 고양되고 있었다.

    ‘남해로’를 통해서 아라비아, 페르시아, 인도 상인들의 왕래가 빈번

    하였고, ‘남해로’의 연장으로서의 동북아시아 항로에서는 재당신라

    인들이 당과 신라와 일본을 연결하면서 국제 해상무역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9세기에 들어서서 동북아시아 삼국의 공무역체제가 무너지면서

    삼국을 왕래하며 전개했던 신라 상인들의 사적인 무역활동은 눈부

    신 바가 있었다. 이제까지 공무역체제의 제약 속에서 진귀한 수입

    품(일본에서는 舶來品이라고 했음)에 대한 욕구에 목말라 있던 일

    본인들에게, 진귀한 박래품을 가득 싣고 수시로 방문해 오는 신라

    상선들은 그야말로 흠모의 대상이었다. 그리하여 중앙의 최고 관

    서인 다이죠강(太政官)에서는 입항의 관문인 큐슈에서 출입국 업

    무를 총괄하던 다자이후(大宰府)에 일련의 관부(官符)를 발송하여

    실상을 적시하고 그 대응책을 지시하였다.

  • 제1장 장보고 등장의 배경 17

    사무역으로 인한 사회적 폐단은 일본뿐만 아니라 신라에서도 나

    타나고 있었다. 흥덕왕이 834년에 내린 교서(敎書)에 의하면,

    “사람은 상하가 있고 지위는 존비(尊卑)가 있어 명목과 법식이 같지

    않고 의복도 다르다. 그런데 풍속이 점점 각박해지고 백성들이 다투어

    사치와 호화를 일삼아 다만 외래품의 진귀한 것만을 숭상하고, 도리어

    토산품의 야비한 것을 싫어하니, 예절이 참람함에 빠지고 풍속이 파괴

    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옛법(舊章)에 따라 엄명을 베푸는 것이니, 그래

    도 일부러 범하는 자가 있으면 국법에 따라 형을 집행할 것이다.”

    라고 하고 있다. 이렇듯 9세기에 들어 외래 사치품이 범람하여

    신라와 일본에서는 법제에 규정된 엄격한 신분질서의 틀마저 붕괴

    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은 사무역이 그만큼 급속히 확산되

    어 갔음을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런데 동북아시아에 이런 엄청난 사회변동의 파장을 몰고 온

    사무역의 주요 담당자가 바로 당과 신라와 일본에 흩어져 살고 있

    던 신라상인들이었고, 당시에 이런 신라상인들의 한 가운데서 그

    들을 조직․관리하고 그들의 능력을 극대화시킨 인물이 바로 해상

    왕 장보고(海上王 張保皐)였던 것이다.

    5. 중앙정치의 혼란과 유이민의 만연

    장보고 등장의 국내 배경으로는 우선 중앙정치의 혼란을 들 수

    있다. 신라는 8세기 말경에 오면 진골귀족들의 도전을 받아 현저

    히 약화되고, 진골귀족들은 왕경(王京)을 중심으로 권력다툼을 벌

    이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왕위쟁탈전의 발생은 왕실의 5묘제를

    확립하는 과정에 그 원인이 있었다. 왜냐하면 이로써 왕위계승에

    있어 직계 상속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인식되었고, 나아가 이러

  • 18 해상왕 장보고 그는 누구인가?

    한 직계 존중은 자연히 방계와의 차별성을 강조하는 결과를 낳게

    되어 나물왕계 혹은 태종무열왕계라고 하는 광범위한 씨족 연대의

    식을 약화시키게 됨은 물론, 원성왕계 내부의 혈족집단 자체를 점

    차 가족 규모의 작은 단위로 분지화(分枝化)시킨 요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원성왕계 내에서 분지화된 소가계(小家系) 즉

    인겸계(仁謙系)와 예영계(禮英系), 또 예영계내에서 다시 균정계

    (均貞系)와 헌정계(憲貞系)간의 소속가계에 따라 찬탈과 유고(有

    故) 또는 혼인으로 왕통이 옮겨간 경우, 종전의 왕족들이 잃어버

    린 왕위계승권을 되찾기 위한 반역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왕위쟁탈전은 점차 지방과 연계되면서

    실패한 세력은 지방에 새로운 근거지를 형성하여 전국적으로 분권

    화 현상이 나타났다. 초기에는 왕경에서 진골귀족이 일으켰으나,

    김헌창의 난을 계기로 하여 지방에서 진골귀족이 중심이 되어 난

    을 일으키는 현상이 나타났다. 후기에는 왕위찬탈에서 더욱 진전

    되어, 장보고의 반발을 시초로 하여 궁예와 견훤의 봉기 등 지방

    에 근거한 진골이 아닌, 즉 신라 왕위계승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자들의 왕조부정 반역으로 발전하여 갔다.

    결국 신라하대 있어서 왕계의 변동에 따른 왕족간의 왕위를 둘

    러싼 자기 항쟁은 정치와 사회 전반에 걸쳐 혼란을 더해 주었다.

    또 이와 같은 중앙에서의 분열과 대립은 지방에 대한 통제력의 이

    완을 낳아 지방에서는 장보고와 같은 독자적인 세력의 대두와 성

    장을 가능케 하였고, 아울러 하층민의 유망(流亡)과 민란(民亂)을

    야기하였다.

    다음으로 장보고 등장의 국내 배경으로 들 수 있는 것은, 유이

    민의 만연이다. 장보고가 828년 청해진을 설치하기 직전인 헌덕왕

    대(809~826)에는 중앙통제력이 이완되어 간 반면에 일반백성들에

    대한 부역과 조세의 징수는 한층 과중되어 국가 권력과 일반 백성

    과의 마찰이 차츰 커져 가던 시기였으며, 더욱이 이 무렵에는 큰

  • 제1장 장보고 등장의 배경 19

    기근이 자주 발생하여 지방사회가 몹시 피폐해졌다.

    이 시기에 있어서 신라 유이민 발생의 동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

    만, 특히 자연재해와 그에 따른 기근현상을 들 수 있다. 또 중대

    말부터 계속된 정치적 혼란을 들 수 있다. 그리고 하층민에 대한

    과중한 조세 부담과 그에 대한 저항도 유망의 중요한 원인이었다.

    신라 출신의 유이민이 이주해 간 지역에서는 대단히 심각한 문

    제와 파급효과를 초래하였다. 유이민의 양상은 걸인이나 약탈자의

    모습이었다. 이들은 해외로 진출하여 외국에 귀화하기도 하였지만,

    몇 명 또는 수십명씩 무리를 이루고 무장을 하여 배를 타고 다니

    면서 약탈행위를 하기도 하여 해적이나 침략자로 인식되어 지기도

    하였다. 이 무렵 당나라에서는 신라 노비의 매매가 성행하였고, 이

    틈에 해적들이 신라의 양민을 납포하여 노비로 파는 일이 빈번하

    였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장보고 등장의 시대배경으로는 동아시

    아 삼국 당․신라․일본의 중앙통치 혼란과 이에 따른 공무역체제

    의 이완, 신라 유이민의 해외이주에 따른 교포사회의 형성과 같은

    여러 요인들을 들 수 있다.

  • 20 해상왕 장보고 그는 누구인가?

    제2장 장보고의 가계와 생애1. ‘장보고’라는 이름에 담겨진 의미

    장보고와 신라인들의 활약상은 우리나라 기록은 물론 중국 및

    일본 사서에 잘 남아있다. 중국측 기록으로는 중국정사의 하나인

    신당서(新唐書)권220 동이전 신라조에 관련기사가 실려 있는데이는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이 지은 번천문집(樊川文集)권6의장보고․정년전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일본측 기록으로는 중국

    에 가서 장보고와 중국내 신라인들의 도움을 받아 불교수업을 마

    치고 9년만에 귀국한 승려 엔닌(圓仁)의 기행문인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와 일본 정사인 일본후기(日本後紀),속일본기(續日本紀), 속일본후기(續日本後紀)에 장보고에 관한 기사가 자세히 실려 있다. 우리나라 기록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비교적 간략하게 소개되고 있는데 상당부분이 앞서언급한 중국의 기록을 재인용한 것이다.

    장보고를 부르는 이름은 네 가지나 된다. 우리측 기록에는 활보,

    즉 궁복(弓福) 또는 궁파(弓巴) 그리고 장보고(張保皐)로 되어 있

    고, 중국측 기록은 모두 장보고(張保皐), 일본에서는 장보고(張寶

    高)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당시 신라 관습

    상 평민은 성(姓)을 갖지 못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장보고가 중국

    에 있을 때 궁복의 ‘궁’자와 비슷한 장씨라는 성(姓)을 갖게 된 것

    이고, 보고라는 이름은 ‘복(福)’의 음을 그대로 따라 지은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당시 일본측 기록에 장보고(張寶高)라고 적고 있

    는 것은 무역을 통해 거액의 이윤을 얻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

    로 보여진다. 즉 오늘날로 따지면 재벌정도의 의미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 제2장 장보고의 가계와 생애 21

    2. 장보고의 출신지

    장보고는 우리나라 역사상 특기할만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

    의 전 생애에 관한 기록은 희소하고 그것도 분명치가 않다.

    그의 출신지에 대해서는 일단 그가 ‘해도(海島)’ 혹은 해안지방

    출신이라는 것에는 이의가 없는 듯하다. 삼국사기(권11, 문성왕7년조)의 기록을 보면, 문성왕(文聖王; 839~856)의 차비로 장보

    고의 딸을 맞이하려 할 때 조정의 신하들이 그가 해도인(海島人)

    이라는 점을 들어 반대하고 있다.

    장보고의 고향은 청해진이 설치되었던 오늘날의 완도라고 보여

    진다. 왜냐하면 첫째로 그가 해상왕국의 근거지를 하필이면 청해

    진에 설치하였던가 하는 점이다. 이는 완도가 그의 고향이었거나

    연고지였기 때문에 그곳에다 근거지를 두었던 것이라 생각된다.

    둘째로 정년이 뒷날 당나라에서 실직하여 사주(泗州)에서 굶주림

    과 추위에 허덕이고 있다가 고향에 돌아갈 결심을 하면서 “기한으

    로 죽는 것보다 싸워 죽는 편이 나은데 하물며 그것도 고향에서

    죽으니 바랄 것이 없노라”고 하면서 청해진으로 돌아오고 있다.

    3. 당에서의 활동장보고의 유년시절에 대한 정보는 전혀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

    가 8세기 후반 경에 완도(莞島), 혹은 그 인근에서 출생하여 유년

    기를 보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후 청년으로 성장한 장보고

    는, 자기보다 10세 가량 어린 동향(同鄕) 후배 정년(鄭年)과 함께,

    풍운의 꿈을 안고 당으로 건너가서 30세 쯤에 서주(徐州) 무령군

    소장(武寧軍 小將)이라는 군직(軍職)에 올랐다고 한다. 그런데 무

    령군이라는 군단명이 805년에 처음 생겼다고 하니, 805년이라는

    해는 재당 시절 장보고의 행적을 추적하는데 중요한 기준이 될 수

  • 22 해상왕 장보고 그는 누구인가?

    있다.

    즉 장보고가 무령군 소장직에 오른 시기는 아무리 빨라도 805년

    이전으로 올라갈 수는 없겠고, 그가 당에 건너간 시기는 일단 805

    년 전후였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런데 그가 신라에 귀국

    한 시점이 828년이었으므로, 그의 재당(在唐) 기간은 9세기초 20

    여년간으로 압축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무령군의 주요 임무는 당 조정에 반기를 든 평로치청의 번

    수 이사도(李師道)가 이끄는 평로군을 소탕하는데 선봉에 서는 일

    이었다. 그런데 이사도가 이끄는 평로군은 819년에 완전 토멸되었

    다. 장보고는 무령군의 일원으로 평로군 진압전에 참전하여 그 전

    공을 인정받아 소장직에까지 승진했을 것으로 보인다.

    평로치청 번진세력이 반당의 기치를 내걸고 대두하게 된 것은

    765년에 고구려유민 출신인 이정기(李正己)가 당 조정으로부터 임

    명받은 평로치청절도사 후희일을 무력으로 몰아내고 스스로 번수

    가 되면서부터였다. 이후 819년 완전 진압될 때까지 이정기(765~

    781년)-이납(李納;781~792년)-이사고(李師古;792~806년)-이사도

    (李師道;806~819년)로 이어지는 3대 55년 동안 산동반도를 중심

    으로 하나의 ‘소왕국’을 이루어 군림하였다. 한 때 이정기일가의

    번진세력은 산동반도 일원의 15개 주(州)를 영유하고 10만의 대군

    을 거느리는 최대의 번진으로 성장하여 당 왕조의 지배와 간섭을

    배제하였다. 이처럼 짧은 기간 동안에 당 왕조를 위협하는 막강한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던 것은, 당 왕조로부터 발해와 신라와의

    해상교역을 관장하는 ‘해운압신라발해양번사(海運押新羅渤海兩藩

    使)’의 업무를 위임받아 막대한 재부를 축적할 수 있었기 때문이

    었다. 여기에 산동반도를 중심으로 널리 해운의 요충지에 집단 거

    주하면서 막강한 경제력을 발휘하고 있던 재당 신라인들의 적극적

    인 후원도 이정기 일가의 권력기반을 뒷받침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코 무너질 것 같지 않던 이사도의 평로군도 대당제국

  • 제2장 장보고의 가계와 생애 23

    의 대대적인 공세 앞에서 결국 분열과 붕괴의 최후를 맞이할 수밖

    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무령군 소장으로 이사도 세력의 진압전에

    참전했던 장보고는, 재당 신라인의 저력을 발견하고 이를 확신하

    게 되면서, 이정기 일가가 그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 인식을 갖게 되었을 것이고, 그 대안으로 그들의 경제적 권

    익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 갔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결국 무령군 소장의 경험에서 나온 군사전략가적 그의 소양은

    해적퇴치에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게 하였을 것이고, 여기에 두목

    (杜牧)이 칭찬했듯이 인의지심(仁義之心)과 명견(明見)의 통찰력

    을 겸비한 빼어난 그의 자질은 재당신라인사회에서 대중적 인기와

    신임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이러한 대중적 인기와 신임을 통해

    서 그는 재당신라인사회에서 강력한 리더십을 구축해 갔으며, 이

    것이 장보고가 당대 최고의 국제 해상무역가로 입신하게 되는 기

    반이 되었던 것이다.

    4. 귀국과 청해진의 설치

    장보고는 828년 이전의 어느 시기에 당나라에서 귀국하였는데

    귀국한 동기로는 우선 노예무역을 들 수 있다. 그가 청해진(淸海

    鎭)을 설치한 동기는 신라 근해에 출몰하여 신라인을 약매(掠賣)

    하는 노예무역선을 소탕하는데 있었다. 그는 이미 무령군에 복무

    하던 시절 동포들이 해적선에 강제로 끌려와 도처에서 매매되는

    현장을 목격하고서 의분을 느꼈다고 한다.

    당시 노예무역은 당조정의 거듭된 금령에도 불구하고 성행하였

    다. 이른바 ‘신라노(新羅奴)’는 중국연안지대 곳곳에서 매매되고

    있었다. 신라에서는 이 문제를 중요시하고 당에 단속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당은 816년에 신라인을 노예로 삼는 행위에 대하

    여 금령을 내린 바 있다. 그러나 금령에도 불구하고 노비매매는

  • 24 해상왕 장보고 그는 누구인가?

    결코 근절되지 않았다.

    한편 해적은 중국인들이 주축을 이루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한반도 서남해 연안지대나 혹은 도서지방에 기반을 둔 해상세력들

    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9세기초 신라에서는 만성적인 식량기근으

    로 중국에 가서 살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이들 이주

    희망자를 수송하던 변경의 군소해상세력들 중에는 이들을 중국에

    서 노비로 매매하는 경우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821년

    봄에 기근이 발생하자 백성들 가운데는 자손을 팔아 자활(自活)한

    자들이 있었다. 이들을 사서 중국상인에게 노예로써 팔아 넘긴 중

    개무역상들도 있었을 것이다. 장보고의 귀국동기에는 이들 군소해

    상세력을 자신의 통제아래 두는 한편 재당 신라인사회와 유기적인

    연계를 꾀함으로써, 나·당·일 삼국간의 무역을 장악해 보겠다는

    원대한 포부가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과 같은 동기 이외에 당시 번진(藩鎭)의 사정도 작용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이사도(李師道) 등 조정에 반항적인 번진군

    벌을 토멸한 뒤 당은 821년부터 번진병사의 수효를 점차적으로 삭

    감하는 정책을 계속 추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군사비 삭감정책

    은 과중한 재정부담으로 시달리고 있던 강회방면(江淮方面)의 번

    진에서 적극적으로 실시되었다. 따라서 다른 강회의 번진들과 마

    찬가지로 장보고가 속해 있던 무령군도 감군정책(減軍政策)이 실

    시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와 관련하여 장보고가 군을 떠나게 된

    동기를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828년(흥덕왕3) 4월에 장보고가 중국에서돌아와 흥덕왕을 알현하고 사졸(士卒) 1만인으로써 완도에 설진

    (設鎭)했다고 한다. 여기서 일단 생각할 수 있는 의문은 갑자기

    장보고가 청해진에 1만이라는 적지 않은 병력과 청해진 설치를 어

    떻게 허락 받을 수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왕위를 둘러싸고 권력항쟁이 극심한 속에, 시중이던 김우징(金

  • 제2장 장보고의 가계와 생애 25

    祐徵)은 자신과 처자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837년 5월에 청해진

    으로 도피하였는데, 이는 우연이 아닌 듯하다. 왜냐하면 그가 시중

    으로 재직하던 시기에 장보고가 청해진 설치를 흥덕왕으로부터 공

    식적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우징의 심복인 김양(金

    陽)은 흥덕왕 3년에 고성군 태수로 재직하다가 무주(현재의 전라

    도)도독(武州都督)으로 전임되어 재직한 바가 있다. 따라서 흥덕

    왕대에 청해진 설치를 전후로 하여 김우징, 김양과 장보고 사이에

    는 예전부터 인연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다음으로 청해진 설치와 관련하여 우선 군졸 1만 명의 성격이

    문제가 된다. 김헌창(金憲昌)의 대란을 겪은 지 몇 해 지나지 않

    은 당시에 신라조정이 변경해안지대에 군사기지를 설치하기 위해

    서 많은 군사를 제공했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장보고가 신

    라 국왕으로부터 현지 완도의 주민 1만 명을 규합할 수 있는 양해

    를 받아 내어 일종의 민군조직(民軍組織)으로써 청해진을 설치한

    것이 아닐까 믿어진다. 혹은 장보고는 828년 4월 이전에 이미 완

    도지방에서 자신의 세력기반을 구축한 뒤, 국왕을 알현하여 자신

    의 세력을 조정으로부터 정식으로 인가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

    뒤 청해진이 국가의 공식기구라기 보다는 장보고의 사병집단적 성

    격을 농후하게 띠게 된 근본이유도 이 점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장보고의 공식 관직명은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인데, 신라의

    관직에는 이런 명칭이 없다. 따라서 그것은 골품제도 및 관등제도

    의 규정에 구애받지 않는 일종의 예외적인 관직으로서, 어쩌면 중

    앙정부의 행정적 통제의 대상에서 벗어난 특수한 자격으로서 장보

    고 개인에 의해서 사용되었고, 또한 조정에서도 이를 묵인했던 것

    으로 생각된다. 아마도 장보고는 중국에 있을 때 절도사를 가리키

    는 별칭으로 흔히 사용된 ‘대사’라는 명칭에 유념했을 가능성이 크

    다.

  • 26 해상왕 장보고 그는 누구인가?

    5. 동북아시아 해상권의 장악

    장보고 무역선단의 기반이 되었던 세력은 크게 세 지역에 분포

    되어 있었다. 그 하나는 중국 산동반도와 경항(京杭)대운하 일대

    에 일찍부터 진출해 있던 고구려․백제 유망민과 신라인들이며,

    다른 한 집단은 한반도 서남지역의 완도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 주

    민들, 마지막은 백제의 유이민과 자연재해로 인해 이주한 신라인

    들에 의해 형성된 재일신라인사회이다.

    신라인취락은 산동반도 남안일대에서 해주(海州), 그리고 대운

    하변을 따라 집중되어 있었다. 이 연안에 산재해 있던 촌락을 연

    결해 보면 신라와 당의 중심부를 이어주는 자연의 수로가 형성된

    다. 그리고 운하의 심장부는 초주(楚州)였음을 알 수 있다.

    초주에서 35Km 떨어진 연수현(漣水縣)은 옛 회하하류의 북안

    에 위치한 내륙수운의 중심지였다. 이곳에도 신라인 집단거주지인

    신라방이 있었다. 엔닌(圓仁)에 의하면 이곳에 총관과 ‘전지관(專

    知官)’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초주 신라방의 크기와 비슷했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운하연변에 거주하던 다른 신라인들처럼 대부분

    은 운수업․무역․조선업․상업 등에 종사하고 있었다.

    다음으로 산동연해안지역을 살펴보겠다. 엔닌 일행은 해주 동해

    현 숙성촌(東海縣 宿城村)연안에서 하선하였다. 이곳에서 엔닌일

    행은 밀주(密州)로부터 초주로 목탄을 수송해 가던 우호적인 신라

    상인들을 만나 이들의 안내로 인근 신라인 마을인 숙성촌으로 안

    내되었다. 숙성촌은 바다에 면한 마을로 이곳 신라인들은 주로 소

    금생산에 종사하고 있었다. 엔닌도 마을주변에 ‘취염처(取鹽處)’가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일부 목탄생산에 관계하는 자도

    있었다. 이것은 촌락주변이 산림지대였고 또한 주민들이 목탄업과

    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라인 촌락은 산동반도 남쪽 연안일대에서 가장 많이 형성되어

  • 제2장 장보고의 가계와 생애 27

    있었다. 모평현(牟平縣) 소촌포(邵村浦)와 도촌(陶村), 해양현(海

    陽縣) 동북의 유산포 등이 대표적인 곳이다. 이곳 유산포 주변은

    넓은 평야를 끼고 있어 신라인들은 해운업․상업보다 농업에 종사

    한 듯하다.

    문등현 청령향 적산촌(文登縣 淸寧鄕 赤山村)은 산동반도일대

    신라인들의 중심지였을 뿐아니라 당내륙․연해안 교통과 신라와

    당 및 일본 3국을 잇는 무역의 중심지였다. 이곳에는 장보고가 건

    립한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이 있어 신라인들의 마음의 고향이기

    도 하였다. 법화원은 연간 500석의 곡식을 수확하는 장전(庄田)을

    소유하고 장보고 휘하의 장영 등 3인에 의하여 경영되었다. 839년

    11월 16일에 시작하여 다음해 1월 15일에 끝난 강회에는 매일 40

    명 안팎의 사람들이 참석했다. 이 강연의 마지막 2일간은 250명과

    200명이 각각 참여하였다. 법화원은 이외에도 고국에서 온 여행자

    라든가 무역관계종사자들을 위한 숙박소로도 제공되었던 듯하다.

    한편 8세기 중엽을 고비로 하여 신라와 일본간의 국교는 사실상

    단절되고 말았다. 따라서 공무역의 길이 막히게 되자 양국간에는

    사무역에 대한 욕구가 크게 증대했다. 당시 일본측은 중국 물품에

    대한 욕구가 매우 컸었는데 이는 주로 신라상인들의 중개무역에

    의해서 충족되고 있었다. 신라는 지리적 조건으로 볼 때 나․당․

    일 삼국간의 무역에 유리했을 뿐 아니라 특히 조선술과 항해술에

    있어서 당시 일본을 훨씬 능가하고 있었다.

    일본에서도 중국에서처럼 신라인사회의 존재가 주목된다. 신라인

    은 이미 7세기 이전부터 일본에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있었다. 일본

    측 자료에 의하면 신라인이 끊임없이 일본의 각 지역 즉 하모야국

    (下毛野國)․무장국(武藏國)․미농국(美濃國)․근강국(近江國)․

    준하국(駿河國) 등에 이주하여 신라인사회를 형성하여 신라인의

    성(姓)을 갖고 생활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신라인사회의

    명칭은 신라군(新羅郡) 또는 도전군(度田郡) 등으로 불려졌다. 이

  • 28 해상왕 장보고 그는 누구인가?

    러한 신라인사회를 형성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은 신라의

    승려나 관리들이었다.

    재일신라인사회와 신라본국간의 연락은 빈번히 이루어지고 있었

    다. 이러한 사실은 견당일본사절사선(遣唐日本使節使船)에 동승한

    신라 역어(譯語, 신라출신 통역관)와 재당신라인들이 긴밀히 협조

    하여 중국과 외교절충을 하거나 일본사절이 귀국하기 위하여 초주

    에서 배 9척과 선원 60명을 마련한 데서도 알 수 있다.

    재일신라인들도 재당신라인들처럼 주로 무역에 관련된 일에 종

    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재일신라인들은 일본정부가 필요로 하는

    각종 고급인력을 제공해 주었다. 엔닌의 일기에 나타난 역자․선

    원․승려․노젓는 사람 등은 재일신라인들이었다. 이외에도 귀국

    할 일본조공사선(日本朝貢使船)의 준비․항해의 지휘․재일신라인

    사회 주위에 있는 일본인에 대한 기술지도 등을 수행하였다.

    청해진이 설치된 후 장보고의 대일무역활동은 본격화되었다. 그

    가 당시 일본에 보낸 무역사절단은 회역사(廻易使)라 했는데, 이

    들의 무역활동은 다자이후(大宰府) 뿐만 아니라 일본정부의 묵인

    아래서 이루어졌다. 한편 장보고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생긴 신라

    와 일본간의 분쟁을 통해서도 대일무역의 번성함을 알 수 있다.

    결국 장보고는 재일신라인사회와 청해진 및 재당신라인사회를

    연결하는 일련의 무역망을 구축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는 당시 동아시아 해상교통의 요충지였던 완도에 거점을 마련하고

    항로를 장악하여 중개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해상왕국

    을 건설하였던 것이다.

    6. 장보고의 암살과 해상왕국의 붕괴

    장보고의 몰락을 초래한 직접적인 원인은 그의 중앙정치에의 진

    출 야망, 특히 납비(納妃) 문제가 유산된 데 있었으나, 이 밖에도

  • 제2장 장보고의 가계와 생애 29

    서남해안지방의 군소해상세력들의 장보고에 대한 반발을 생각할

    수 있다. 이들은 청해진의 설치로 말미암아 장보고의 통제 아래

    들어감으로써, 종전에 자신들이 누리던 해상무역의 이익을 대부분

    잃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노예무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취해 왔던

    해상 세력가들이 입은 타격은 매우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들은

    그간 신라 조정에 대해서 노예무역을 다시금 허가해 줄 것과 청해

    진의 무역 독점 행위를 시정해 줄 것을 요구했을 가능성이 크다.

    장보고의 사망연대에 대해서는 국내자료와 일본측 자료와의 사

    이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삼국사기에는 그가 846년 봄에 죽었다고 되어 있는데 반하여 일본측 기록에는 841년 11월중에 죽었다

    고 되어 있다. 한편 엔닌은 그의 일기에서 지난날 장보고의 대당

    매물사(大唐賣物使)로서 중국에 가서 무역을 한 바 있었던 청해진

    병마사(兵馬使) 최훈십이랑(崔暈十二郞)이 ‘국란(國亂)’을 당해서

    845년 7월 현재 중국 연수의 신라방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 ‘국란’이란 바로 장보고 암살사건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일본측 자료를 기준으로 해서 본다면

    그의 암살사건은 841년 11월중의 일로 판단된다.

    장보고가 암살 당한 뒤 그의 부장이었던 이창진(李昌珍) 등이

    반란을 일으키려 했으나, 염장에 의해 진압되었다고 한다. 그 뒤

    한동안 청해진은 염장(閻長)의 통제 아래 놓여 있었다. 이에 장보

    고의 심복들은 중국 혹은 일본으로 떠나고 말았다. 한편 장보고를

    따르던 완도 주민들은 염장의 압제에 끈질기게 저항하다 탄압만

    받았다. 결국 851년(문성왕 13년) 2월에 신라 조정은 청해진을 폐

    쇄하고 그곳 백성들을 벽골군(碧骨郡, 오늘의 전라북도 김제)으로

    집단 이주시켜 청해진은 국제무역항으로서의 기능이 사실상 정지

    되고 말았다.

    청해진이 폐쇄되어 장보고에 의한 무역통제력이 제거되자, 각지

    에서 군소해상세력들이 독자적으로 대중국무역을 전개하였다. 강

  • 30 해상왕 장보고 그는 누구인가?

    주(康州, 오늘날의 경남 진주)의 왕봉규(王逢規), 금주(金州, 오늘

    날의 경남 김해)의 이언모(李彦謨), 개성지방의 왕건 집안, 나주의

    오씨집안, 울산의 박윤웅(朴允雄)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의 활

    동은 후삼국시기를 거쳐 고려의 벽란도(碧瀾渡) 활동으로 이어지

    게 된다.

    한편 신라는 패강지역에 진을 설치한 이후 주로 해안지역에다

    여러 개의 진을 설치하였다. 청해진, 당성진(唐城鎭; 흥덕왕 4년,

    829), 혈구진(穴口鎭; 문성왕 6년, 844), 장구진(長口鎭)이 바로

    그것이다. 당성진은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에, 혈구진은 강화도에,

    장구진은 황해도 장연군 장산곶 근처에 위치하였다. 이처럼 해상

    교통의 요지에 대규모의 군대가 주둔하는 진영을 설치하였다는 점

    에서 신라는 일차적으로 안전한 해상교통로를 확보할 목적으로 해

    안지역에 진을 설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청해진의 성공

    에 고무된 신라조정이 직접 무역에서 나온 이익을 얻기 위한 조치

    였다고 생각된다.

    7. 장보고에 대한 역사적 평가

    장보고에 대한 최초의 평가는 번천문집(樊川文集)의 저자 당나라 사람 두목(杜牧, 803~852)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기록은 장

    보고가 살던 당시에 기록된 것으로 가장 사실에 근접한 평가로 간

    주할 수 있다. 두목은 장보고를 안록산의 난 때에 활약한 곽분양

    (郭汾陽)에 비유하였다. 아울러 그는 장보고가 명철한 지혜를 가

    진 사람으로써 동방의 나라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있는데 이것은 신라인 장보고가 당시에 중국 내에 널리 알려져 있

    는 존경받는 인물이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고려시대 삼국사기를 저술한 김부식은, 열전에서는 장보고를진(晉)의 기해(祈奚) 또는 당나라의 곽분양에 비견되는 위대한 인

  • 제2장 장보고의 가계와 생애 31

    물로 평가하였다. 그리고 김유신 열전 편에서 ‘비록 을지문덕이 지

    략이 있고, 장보고가 의리와 용맹이 있다 하더라도 중국의 사서

    (史書)가 아니면 그 자취가 없어져 위대함이 알려지지 못할 뻔하

    였다’고 덧붙이고 있음을 볼 때, 장보고에 대한 평가는 고려시대에

    이미 객관적인 관점을 회복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점차 중앙집권적인 국가권력체계가 공고화되고, 왕조에 대

    한 충성의 논리가 강조되던 조선시대에는 장보고가 정당한 평가를

    받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서세동점의 근대 세계사의 흐름속에서 세계사의 주역은

    다름 아닌 오대양을 주름 잡을 수 있는 역량을 가진 해양 강국들

    이었다. 개항기~일제강점시기를 거치면서 세계속에 한국을 꿈에

    그리던 우리의 선각자들의 눈에 장보고는 그야말로 우리 민족이

    나가야 할 길을 보여준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최남선이 해상대한사(海上大韓史)에서 서술한 것은, 망각되었던 우리 민족의 해양 기질을 되찾아야만 세계의 주역이 될 수 있음을 역설한 것에

    다름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장보고의 업적에 관하여 최초로 연구논문을 쓴 김

    상기 교수는, 장보고야말로 우리나라 역사상 바다를 다스리는 자

    가 세계사를 지배원리를 몸소 실천한 문자 그대로 ‘해상왕국의 건

    설자’라 주장한 적이 있다. 그리고 '해양상업 제국의 무역왕(The

    Trade Prince of the Maritime Commercial Empire)' 이는 주일

    미국대사를 지낸 바 있는 미국 하버드대학의 라이샤워(Edwin O.

    Reischauer)교수가 장보고를 평가한 말이다. 이후 국내에서는 장보

    고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일부 학자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전개되

    고 있다.

    이상과 같은 평가를 받는 장보고는 중국과 한국 및 일본의 바다

    를 신라인들의 일터로 가꾸고, 나아가서 중국 산동반도 일대와 한

    반도 남부지방을 마치 자치지역처럼 독자적으로 제어했다. 장보고

  • 32 해상왕 장보고 그는 누구인가?

    의 해상활동은 이순신 보다 7백여년을 앞섰다. 지금으로 보면 최

    초로 동양세계의 해상권을 지배한 막강한 해군력을 과시하였고,

    최근 세계적으로 눈부시게 뻗어나는 우리나라의 해운산업과 국제

    무역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 제3장 해상왕국의 건설과 번영 33

    제3장 해상왕국의 건설과 번영1. 청해진이 설치되기까지의 배경

    신라 하대(下代 : 780~935년)에는 많은 지식인들이 당(唐) 나

    라에 유학을 하였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새로운 지식의 습득과 출

    세를 위한 자신들의 필요성에 의한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골품제(骨品制)라는 엄격한 신분 체제 아래에서

    제한된 관직과 정치적 출세에 제약을 받던 6두품(頭品) 이하의 신

    분층을 정치권에서 축출·도태시키기 위한 신라 정부의 방침도 어

    느 정도는 작용한 것이었다. 아울러 신라 사회 내부의 왕권(王權)

    을 둘러싼 쟁탈전이나, 경제 질서의 문란 등 정치·사회적 혼란도

    당 나라로의 유학을 부추기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장보고(張保皐)는 20대 후반의 나이에 중

    국으로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장보고가 당 나라 서주(徐州)

    의 군중소장(軍中小將)이 된 것이 30세 남짓이라 파악되기 때문이

    다. 본래 해도(海島) 출신이라 알려진 장보고는 신라 신분제 사회

    에서 그다지 높은 계층은 아니었다고 이해된다. 그러나 그가 중국

    으로 건너가 곧바로 군대에서 출세할 수 있었던 것은, 어느 정도

    의 경제력과 자기 지방에서의 실력을 갖춘 집안 출신이었기 때문

    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처럼 특정한 지방에서 영향력

    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을 우리 역사에서는 호족(豪族)이라고 부

    르는데, 이러한 세력은 특히 신라 말과 고려 초에 많이 존재했었

    다. 따라서 아마도 지금의 전라남도 완도(莞島) 태생으로서 뛰어

    난 무예를 갖고 있었던 해상세력 출신의 장보고는, 보다 넓은 세

    상에서의 경험과 출세를 위하여 당 나라로 건너간 것이라 보인다.

    당시 당 나라도 신분제 사회였기는 하지만, 신라처럼 지배층 사

  • 34 해상왕 장보고 그는 누구인가?

    이에서의 차별은 없었다. 또 과거(科擧) 시험을 통해 자신의 능력

    에 따라 정치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사회였기 때문에, 신라보다는

    개방적인 사회였다. 아마 이러한 점들이 많은 신라 사람들로 하여

    금 당 나라로의 유학을 결심하도록 한 것이라 보인다. 이러한 시

    대 상황에서 장보고는 당 나라로 건너가, 30세 남짓에 무령군(武

    寧軍) 소장이 될 정도의 출세를 하고, 그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그러나 장보고는 당 나라에서 무장(武將)으로 출세하는 것에 만

    족하지 않았다. 820년대 전반기에 장보고는 당 나라에 기반을 두

    고 신라·일본 등 동아시아 일원의 해상 교역에 참여하였다. 이것

    은 일본 승려 엔닌(圓仁 : 794~864년)이 쓴 『입당구법순례행기

    (入唐求法巡禮行記)』라는 책에 장보고가 대사(大使)라는 직위를

    갖고 824년(헌덕왕 16년)에 일본까지 다녀왔다는 사실에서 잘 확

    인된다. 이러한 장보고의 활동은 적산(赤山) 법화원(法華院)이 있

    는 지금의 산동반도(山東半島)를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법화원은

    일찍이 장보고가 세운 사찰로서, 군대에서 물러나 해상 교역을 시

    작한 장보고로서는 본래의 연고지인 그 지역을 중심으로 해상 활

    동을 시작한 것이다.

    장보고가 등장하기 이전의 산동반도 일대는 고구려 출신인 이정

    기(李正己) 가문의 세력 근거지였다. 이정기 가문은 이 지역에서

    3대에 걸쳐 신라·발해와의 교역을 통제하여 왔었다. 특히 이정기

    가문은 발해와의 교역에 중점을 두어, 중요한 군수품인 말(馬) 등

    을 수입하고 있었다. 이 당시 신라는 산동반도 지역을 통한 당 나

    라와의 교류가 원활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것은 아마 고구려 출

    신인 이정기가 신라보다는 발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

    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819년에 이사도(李師道)가 당 나

    라 중앙 정부에 의해 토벌됨으로써, 산동 지역에서 이정기 가문의

    영향력은 소멸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도 장보고 세력의 등장에 좋

    은 기회로 작용한 것이다.

  • 제3장 해상왕국의 건설과 번영 35

    이처럼 산동반도는 당시에 중국 대륙과 한반도 및 일본 열도를

    연결하는 중요 교통로였다. 또 이들 지역의 나라들은 사신의 왕래

    를 비롯하여, 일찍부터 민간인들의 왕래가 있었다. 특히 신라 사람

    들은 산동반도 일대에 신라방(新羅坊)이라는 자신들의 사회를 이

    룩하고 있었다. 신라방은 신라인들이 중국 지역으로 이주하여 정

    착한 후, 해상 무역을 통해 성장하고 있었던 사회이다. 산동 지역

    신라방은 문등현(文登縣)에 있는 구당신라소(句當新羅所)를 중심

    으로 결집되어 있었다. 이 지역의 이러한 지리적 위치 및 경험과

    전통 등이 장보고로 하여금 산동반도 일대를 활동의 중심지로 삼

    도록 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정기 가문이 몰락할 즈음 산동반도를 둘러싼 황해 일

    대의 해상 교역은 중국 동해안이나 한반도 서남해안 지역에 근거

    를 둔 해적들의 출몰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던 시기였다. 즉 강

    력한 통제 세력이 없는 틈을 이용하여 여러 해적 집단들이 등장하

    였던 것이다. 이 해적들은 교역선(交易船)에 대한 재물 약탈에 그

    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을 납치하여 노비로 팔아 넘기기도 하였다.

    이 때 특히 많은 피해를 보게 된 것이 신라였다. 신라는 본래 뛰

    어난 조선술과 항해술을 바탕으로 황해 일대에서 해상 교통·교류

    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 사신이나 승려들이 중국으

    로 가고자 할 때에도 신라의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신라가 해적들의 약탈로 인한 피해를 가장 많이 받게 되었

    던 것이다.

    따라서 완도 출신으로서 어려서부터 바다에 익숙하고, 자신의

    능력과 노력을 바탕으로 당 나라에서 군인으로 출세할 수 있었던

    장보고로서는 자연스레 산동반도를 중심으로 한 해상 활동에 관심

    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아울러 장보고는 해적들의 약탈 행위로

    인한 피해나, 그러한 피해를 예방하여야 할 필요성을 누구보다 심

    각하게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장보고가 왜 청해진

  • 36 해상왕 장보고 그는 누구인가?

    (淸海鎭)을 설치하게 되었는지, 청해진 설치의 배경이 무엇인지

    잘 알 수 없다. 해적들의 소탕과 안정적인 항해·교역 등의 확보

    는 장보고가 산동반도를 중심으로 활동할 경우에도 어느 정도 가

    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보고는 당 나라에서의 활동을 정리하고,

    귀국하여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등

    의 옛 기록에는 당 나라에서 활동하던 장보고가 해적들이 신라 사

    람을 약탈하여 노비로 팔아먹는 등의 행위를 막기 위해, 828년(흥

    덕왕 3년)에 귀국하여 국왕에게 청해진 설치를 건의하였다고 전하

    고 있다. 이 때 흥덕왕(興德王 : 826~836년)은 장보고의 요청을

    받아들여, 그에게 대사(大使)의 직함과 함께 군사 1만 명을 주면

    서 청해진을 지키도록 하였다. 이러한 짧은 기록을 통해 우리는

    청해진 설치의 배경을 장보고 자신의 활동이나 당시의 시대 상황

    과 관련하여 몇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신라방·신라소 등을 중심으로 하여 산동반도에 존재하

    고 있었던 신라 세력과, 그에 기반을 둔 장보고의 해상 활동 경험

    을 들 수 있다. 위에서도 서술하였지만, 신라 사람들은 일찍부터

    중국과의 교역을 위하여 적극적인 해외 진출을 하고 있었다. 당시

    의 당 나라는 세계적인 제국(帝國)으로서, 선진 문물의 산실(産

    室)임과 동시에 서양 세계와의 교섭 창구 역할도 수행하고 있었

    다. 이러한 점이 신라인으로 하여금 당 나라와의 교역이나 중국

    대륙 지역으로의 진출에 적극성을 띠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장보고의 중국 대륙 진출도 결국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신라

    인들의 적극성과 진취성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장보고 개인은 자

    기 자신의 성공을 위하여 당 나라로 건너갔고, 또 평소의 뛰어난

    무예를 바탕으로 군인으로서의 출세를 이루었다. 그러나 궁극적으

    로 군대에서의 개인적 성취에 만족하지 않은 장보고는 당시의 시

    대적 흐름이었던 동북아시아 일대의 해상 무역에 눈을 뜨게 되었

  • 제3장 해상왕국의 건설과 번영 37

    고, 신라인들이 이루어 놓았던 산동반도 일대에서의 기반을 근거

    로 적극적 해상 교역에 뛰어들게 되었다. 이것은 장보고 개인의

    역량도 중요한 것이지만, 장보고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

    록 조성되어 있었던 산동반도 지역 신라 사회의 저력에 힘입은 것

    이기도 하다.

    따라서 동북아시아 일대의 해상 무역을 주도했던 청해진의 설치

    는 ⅰ) 신라인들의 적극적인 해외 진출과, ⅱ) 그 시대 동아시아

    국제 사회에서 필요한 대외 교류와 해상 무역의 중요성을 파악한

    장보고의 역사 인식 및 개인적 능력, ⅲ)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종합적으로 결합하여 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었던 산동반도 지역

    신라 사회의 저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둘째는 신라 사회 및 중앙 정부의 필요성 때문이었다는 점을 지

    적할 수 있다. 당시 신라의 정치적 상황은 여러 차례의 정치적 혼

    란을 겪었던 혜공왕(惠恭王 : 765~780년) 이후 진골(眞骨) 귀족

    들 사이에 왕권을 둘러싼 쟁탈전이 심화되어 왔다. 따라서 신라 국

    왕의 위상은 그 이전 시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화되어 있었다. 특

    히 헌덕왕(憲德王 : 809~826년)은 자기 조카인 애장왕(哀莊王 :

    800~809년)을 죽이고 왕위에 즉위한 인물이었다. 이처럼 극단적

    인 경우까지 경험하게 됨으로써 신라 왕권을 둘러싼 귀족 세력들

    의 싸움은 더욱 치열해졌다. 그에 따라 국왕의 통치 행위나 중앙

    정부의 행정은 국가와 백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정권을 잡기 위한

    투쟁에 많은 것을 허비해야만 했다. 따라서 자연스레 민생을 위한

    정치는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헌덕왕 때의 신라 사회는 많은 자연 재해에 시달려야 했

    다. 화재·홍수 등은 물론이고, 고대 사회에서 하늘의 계시라고 여

    겼던 천체(天體)의 이상 현상도 자주 일어났다. 또 직접적으로 심

    한 가뭄과 흉년의 피해를 수시로 입어, 백성들은 자식을 팔아 끼

    니를 이어가거나 굶주려 죽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천재지변과

  • 38 해상왕 장보고 그는 누구인가?

    자연 재해로 인하여 815년(헌덕왕 7년)에는 고통에 못이긴 백성들

    이 무리를 이루어 도적질에 가담하기도 하고, 816년(헌덕왕 8년)

    에는 170~180명의 신라 사람들이 지금의 중국 절강성(浙江省) 지

    역으로 가서 양식을 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신라 백성들이

    절강성 지역에까지 양식을 구하러 갈 수 있었다는 것은, 이 이전

    시기부터 황해를 둘러싼 중국 대륙과 한반도 사이의 해상 왕래가

    상당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런데 백성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한 피해를 주는 자연 재해는 장보고가

    등장하는 흥덕왕 시기에도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따라서 정권 쟁탈전에 치중하느라 자연 재해에 시달리는 백성들

    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있던 신라 중앙 정부로서는 청해진을 설

    치하겠다는 장보고의 제안을 소홀히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중국에

    서의 장보고의 활동을 이미 알고 있었을 신라 중앙 정부는 장보고

    가 청해진을 설치하여 해상 무역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해적들을

    소탕하여 교역이나 백성들의 피해를 막을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

    정권이나 국가를 위해 바람직한 것이라 판단했을 것이다. 장보고

    의 활동으로 인하여 경제적인 이득뿐만 아니라, 민심의 안정을 꾀

    할 수 있다면 일거양득인 셈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흥덕왕

    은 선뜻 1만 명의 군사까지 내어주면서 장보고의 청해진 설치를

    지원했던 것이라 판단된다.

    세째는 청해진 설치의 배경과 관련하여 장보고 개인의 의지와

    애국심에 큰 비중을 두어야 한다. 완도 출신인 장보고는 평소 바

    다에도 익숙했지만, 중국에 건너간 후 기마(騎馬)와 창술(槍術)에

    도 능하여 대적할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장보고는 이처럼 뛰어난

    무예를 바탕으로 군인으로서 상당한 출세를 한 인물이었다. 또 해

    상 무역에 관심을 갖고, 군대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산동반도를 근

    거로 해서 상당한 세력을 형성한 인물이다. 따라서 신라 출신으로

    서 당 나라에서 명예와 함께 경제적으로도 성공한 인물이었다.

  • 제3장 해상왕국의 건설과 번영 39

    따라서 장보고 개인의 입장에서는 어지러운 모국(母國) 신라로

    돌아오지 않더라도, 당 나라에서 부유하고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보고는 당 나라

    에서의 생활에 안주하지 않고 고국으로 귀환하였다. 그리고는 국

    왕에게 청해진의 설치를 건의하였던 것이다. 장보고가 흥덕왕에게

    청해진 설치를 건의할 때, 그는 당 나라 여러 곳에서 신라 사람을

    노비로 삼고 있으니, 해적들이 신라 사람을 약탈하여 당 나라로

    데려가지 못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장보고가 해적들 때문에 당 나라에 끌려온 동포들이 노

    비 신세가 되어 고생하는 것을 직접 보고, 그것을 방지해야 하겠

    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당 나라에서 무장으로 명성을

    날리고, 산동반도를 중심으로 해상 활동을 전개한 경험이 있는 장

    보고로서는 동포들의 그와 같은 고생을 그냥 보고 넘길 수 없었던

    것이다. 또 장보고로서는 여건만 주어진다면 해적들의 약탈 행위

    를 방지할 충분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당 나라에서의 장

    보고는 해상 무역 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상인의 위치에 있었을 뿐,

    정치적·군사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할 지위에 있지는 못하였다.

    아마 이런 의지와 동포애가 있었기 때문에, 장보고는 신라 국가

    의 차원에서 해적들의 약탈 행위를 방지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

    을 것으로 보인다. 즉 장보고는 자신의 능력을 자기 자신의 행복

    과 성공만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국가적·민족적 차원에서 고통

    받는 동포들을 구하고 나라의 경제를 부흥시키고자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