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 2008년 7월 16일(수)~18일(금) (2박3일) 장소 : 제부도...

89
일시 : 2008년 7월 16일(수)~18일(금) (2박3일) 장소 : 제부도 하내테마파크 http://hrnet.jinbo.net/hrcamp 주 : 인권단체연석회의 [거창평화예술제회,속동후회,주동센터,다산센터,대항지화행동, 동성애연대,화연대,민주화실천가족동협회,민족민주열사희생모(기)단연대회,민주동연대,민주사회를 한변호사모,민주주법학연회,부산센터,불회,빈차별에저항하는동연대,사회진보연대,새사회연대,안 산동센터,외주 동동협회,산동연대,불회,주연대,센터들,평화를한 제민주연대,동사랑방,애와발바닥행동,애제연소,전애차별철폐연대,전불안정동철폐연대,전북 평화와연대,전쟁없는세상,진보트크센터,천주회,평화연대,한회센터,한DPI,한게동단 사,한성적소수화센터,HIV/AIDS연대나누리+(전 39개 단)] 주 : 변호사그룹 감, 다산센터, 동성애연대, 화연대, 불회, 반차별동행동, 주연대, 센터 들, 동사랑방, 애와 발바닥행동, 애제연소, 애화간, 애학생지트크, 전 쟁없는세상, 진보트크센터, 천주회, 한게동단사, 한즈비언상담소, 한HIV/AIDS감염 연대(KANOS)

Upload: others

Post on 04-Jul-2020

0 views

Category:

Documents


0 download

TRANSCRIPT

  • 일시 : 2008년 7월 16일(수)~18일(금) (2박3일)

    장소 : 제부도 하내테마파크

    http://hrnet.jinbo.net/hrcamp

    ◎ 주최 : 인권단체연석회의[거창평화인권예술제위원회,구속노동자후원회,광주인권운동센터,다산인권센터,대항지구화행동,

    동성애자인권연대,문화연대,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연대회의,민주노동자연대,민주사회를위

    한변호사모임,민주주의법학연구회,부산인권센터,불교인권위원회,빈곤과차별에저항하는인권운동연대,사회진보연대,새사회연대,안

    산노동인권센터,외국인이주․노동운동협의회,울산인권운동연대,원불교인권위원회,이주인권연대,인권교육센터들,인권과평화를위한

    국제민주연대,인권운동사랑방,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전북

    평화와인권연대,전쟁없는세상,진보네트워크센터,천주교인권위원회,평화인권연대,한국교회인권센터,한국DPI,한국게이인권운동단

    체친구사이,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HIV/AIDS인권연대나누리+(전국 39개 인권단체)]

    ◎ 주관 : 공익변호사그룹 공감, 다산인권센터, 동성애자인권연대, 문화연대, 불교인권위원회, 반차별공동행동, 이주인권연대,

    인권교육센터 들, 인권운동사랑방, 장애와인권 발바닥행동,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장애인문화공간,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전

    쟁없는세상, 진보네트워크센터, 천주교인권위원회,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친구사이, 한국레즈비언상담소, 한국HIV/AIDS감염인

    연대(KANOS)

  • 7/16(수) 두근두근~ 인권과의 첫 만남 인권을 만날 때 기억해야 할 것들 03

    인권의 역사에서 배우기 07

    [강의]

    인권의 돋보기로 자기 삶 들여보기

    삶의 현실과 희망의 대안 13

    7/17(목) 주제마당 평화 23

    성소수자 26

    장애 30

    이주민 40

    생태 47

    이슈마당 사회공공성 51

    정보인권 56

    반차별 67

    민주주의와 직접행동 67

    감옥인권 70

    주관단체 소개 76

    목차

  • - 3 -

    “궁금하면 들이대면 되고~”

    두근두근~ 인권과의 첫 만남

    인권을 만날 때 기억해야 할 것들

    인권교육센터 ‘들’

    인권(Human Rights)이란 말은 쉬운 듯하면서도 알쏭달쏭합니다. ‘인간의 권리’, ‘인간이면 누구나 누리는 권리’라

    는 뻔한 말만으로는 그 의미를 제대로 담아내기 어렵습니다. 흔히 인권은 하늘이 주신 선물도 아니고 국가가 허용

    한 권리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뿌리로부터 자라난 사회적․역사적 산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의

    존엄함에 대한 외경은 인권의 뿌리이자 생명줄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인권이라는 가치이자 제도가 사회를 구

    성하는 기본 원리이자 제도로서 보장되기 시작한 것은 근대시민혁명 이후의 일입니다.

    현재 도대체 어디까지가 인권인가, 특정 상황에서 제한될 수 있는 인권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정말 모두가 인권

    의 주인이 될 수 있는가 등을 둘러싸고 엄청난 긴장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누구에게는 절실하게 필요한 권리가 누

    구에게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권리로 생각되기도 하고, 특권이 인권의 자리를 차지하고 패악을 부리는 일들도

    일어납니다. ‘입장’에 따라 인권을 둘러싼 커다란 관점의 차이가 생겨나는 것이지요.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이

    당연한 현실 속에서 인권이 제 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혼란 속에서 방향을 잃지 않고 고

    민을 계속해나가려면 나침반이 있어야할 것입니다. 인권을 인권답게 만드는 기본 원칙을 잊지 않고 되새겨보는 일

    이 바로 그 나침반입니다.

    1948년 유엔이 채택한 세계인권선언의 전문(前文)은 인권을 아끼는 사람들이 놓치지 않아야 할 원칙을 잘 보여주

    고 있습니다.

  • - 4 -

    세계인권선언 전문(前文)

    인류 가족 모든 구성원의 타고난 존엄성과 평등하고도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전 세계의 자유와 정의와 평화의 기초이며,

    인권에 대한 무시와 경멸이 인류의 양심을 짓밟는 야만적 행위로 귀착되었으며,

    인류가 언론의 자유와 신념의 자유를 누리고 공포와 궁핍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은 보통 사람

    의 지고한 열망으로 천명되었고,

    인간이 폭정과 억압에 대항하는 마지막 수단으로서 반란에 호소하도록 강요받지 않으려면, 인권

    이 법에 의한 통치에 의해서 보호되어야 함이 필수적이며,

    나라 사이의 우호관계의 발전을 촉진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며,

    유엔의 여러 국민들은 그 헌장에서 기본적 인권과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 남녀의 동등한 권리에

    대한 신념을 재확인하였으며,

    더 폭넓은 자유 속에서 사회적 진보와 생활수준의 개선을 촉진할 것을 다짐하였고,

    회원국은 유엔과 협력하여 인권과 기본적 자유에 대한 보편적 존중과 준수의 신장을 성취할 것

    을 서약하였으며,

    이러한 권리와 자유에 대한 공통의 이해가 이 서약의 이행을 위해 가장 중요하기에,

    그리하여 이제 유엔총회는

    모든 개인과 사회의 각 기관은 이 선언을 항상 마음속에 간직한 채, 교육과 학업을 통하여 이러

    한 권리와 자유에 대한 존중을 신장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점진적인 국내적 및 국제적 조치를 통하여 회원국 국민과 회원국 관할권 아래에 있는 영토의

    국민들 양자 모두에게 권리와 자유의 보편적인 효과적인 인정과 준수를 보장하기 위해 힘쓰도

    록,

    모든 국민들과 나라들이 성취해야 할 공통의 기준으로서 본 세계인권선언을 선포한다.

    모두가 인권의 주인입니다(인권의 보편성)

    누구나 자신의 존엄성을 유지하기 위해 보장받아야 할 것이 바로 인권이기 때문에 인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누구

    에게나 차별없이 평등하게 보장되어야 합니다. 특권에 대한 도전으로부터 성장해온 인권은 인종, 성별, 종교, 장

  • - 5 -

    애, 피부색, 사회적 출신, 신분, 정치적 의견 또는 사상, 재산 등에 따른 어떠한 차별도 없이 누구나 보편적으로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학생이니까, 가난하니까, 못 배웠으니까, 어리니까, 여성이니까, 흑인이니까, 어떤 병에 걸

    렸으니까 등등의 이유로 인권을 부정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보편성을 인정한다는 것이 모두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권리가 실현되어야 한다는 말로 받아들여져서는 곤

    란합니다. 인권의 보편성 주장은 인권이 불평등하게 향유되고 있는 현 질서를 바꾸기 위한 노력이라는 점을 잊지

    않을 때 빛을 냅니다. 예를 들어 장애를 가진 어린이가 교육을 받기 위해서는 집 가까이에 학교가 있다는 것만으로

    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어린이가 가진 장애를 고려하여 학교의 공간 구성도, 교육 방식도 달라져야 하겠지요.

    또한 사회적 약자, 소수자들의 인권 수준을 높이기 위한 ‘적극적 우대 조치’를 불평등 조치라고 공격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경찰 조사를 받게 된 어린이나 외국인에게는 어려운 법률용어를 알아듣기 쉽게 풀이해주는 일과 신뢰할

    만한 사람의 도움이 보장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차이를 명분삼아 혹은 차이를 외면함으로써 차별을 정당화하는

    현실에 맞서기 위해서는 현실에 존재하는 차이와 불평등을 고려하면서 인권이 보편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야 합니다.

    인권은 포기할 수 없는 권리입니다(인권의 기본성)

    인권은 필수적이지 않은 권리 혹은 소수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와는 구별되는 ‘기본적인 권리’를 의미합니다. 인권

    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당연히 보장되어야 할 권리입니다. 그래서 다른 ‘권리’들보

    다 ‘인권’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제약회사들은 에이즈약을 개발하여 특허를 내고 값을 비싸게 매겨 독점적인 이윤을 얻고 있습니다. 비싼

    약값 때문에 속절없이 목숨을 잃어야 하는 사람들은 넘쳐납니다. 제약회사들의 특허권과 사람의 생명권이 이렇게

    맞부딪힐 때, 생명권은 특허권에 우선하는 기본 권리로 보장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권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누려야 할 권리입니다(인권의 상호불가분성)

    인권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두 개의 기둥에 의해 떠받쳐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존엄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빵

    과 자유’, 사회권(경제․사회․문화적 권리)과 자유권(시민․정치적 권리)이 모두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표현의

    자유를 생각해봅시다. 국가의 사전검열이 없어진 것만으로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누군가

    는 포르노그라피를 표현의 자유로 보장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여성의 이미지를 왜곡하거나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

    을 모독하는 착취적인 방식으로 그려지는 포르노그라피는 여성에게 폭력이 됩니다. 자유의 이름으로 여성의 평등권

    을 해치는 것이지요. 불평등한 현실에서 억압당하는 사람들은 자신감을 갖고 자기를 표현할 힘을 위축당하게 됩니

    다. 불평등이 다시 자유를 해치는 악순환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회복지시설 안에서 폭력과 강제노동, 기초생활 수급비 착복 등의 문제가 뿌리뽑히지 않고 잘 알려지기도 힘든 이

    유는 시설생활인들이 감금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유를 빼앗지 않고서 평등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 등장

    이후 굶어죽을 자유, 가혹한 착취를 받을 자유밖에 없었던 노동자들이 불평등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힘을 모았

    던 일 역시 단결하여 보통선거권을 얻어내는 일이었습니다. 굶어죽을 자유를 대신하여 굶어죽지 않을 평등을 얻어

    내기 위해 단결의 자유, 내 손으로 대표를 뽑을 자유를 획득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권리는 자유롭고 평등하게 향유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더 많이 자유로워질수록 더 많이 평등해지

    고 더 많이 평등해질수록 더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인권은 국가권력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국가는 엄청난 힘을 갖고 있는 만큼 그 힘이 왜 주어졌는지를 망각하지 않고 힘을 사용해야 할 특별한 의무를 지

    니고 있습니다. 국가가 가해자가 되어 인권을 침해하지 않을 ‘존중의 의무’, 제3자에 의한 인권 침해를 예방해야 할

    ‘보호의 의무’, 그리고 모든 사람의 인권 수준을 높이기 위해 목표를 설정하고 적극적인 조치를 취해야 할 ‘실현의

  • - 6 -

    의무’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헌법에 보장되어 있는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원리도 인권 보장과 불가분

    의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인권을 억압하는 국가권력은 정당성을 얻기 힘들 것입니다. 그래서 국민은 정당성 없는

    국가권력에 대항하여 새로운 정치체제를 구성할 수 있는 권리, 곧 ‘저항권’을 갖습니다. 인권이 근대시민혁명을 거

    치면서 정치원리로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처럼 인권은 저항권, 인권을 옹호할 권리와

    더불어 등장했고 풍성해질 수 있었습니다. 물론 저항권을 행사하는 모습은 다양하겠지만 말입니다.

    인권은 실정법의 한계를 뛰어넘는 권리입니다

    인권은 일반적으로 성문화된 법을 통해 구체화되고 보장됩니다. 법이 인권을 보장할 수 있는 중요한 장치임에는 틀

    림없지만 동시에 인권을 억압하는 도구나 부당한 정치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법이 악용되는 사례도 많습니다.

    법이 인권을 보장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일 경우도 많지요. 예를 들어 현행 최저임금법의 가장 큰 문제는 기

    초 생활을 보장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임금을 최저임금으로 정한다는 것이지요. 건강하게 살 권리는 인권의 한 자락

    을 차지하고 있지만, 누군가는 병에 더 취약하고 병에 걸리더라도 치료를 못 받고 있습니다. 법은 이런 현실에 침

    묵합니다. 그렇다면 법에 보장된 만큼의 권리만을 우리는 인권으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인권은

    현실에 존재하는 법의 한계를 넘어서서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는 데 필요한 권리를 포기하지 않고 외칩니다. 정당

    한 사회․경제․정치적 질서를 요구합니다. 법이 있기 전에 인권이 있습니다. 인권은 법보다 우선하는 것으로 존중

    받아야 하고 법의 변화를 요구해야 합니다.

    인권은 고정되어 있지 않은 권리입니다(인권의 역사성)

    인권이 등장했던 초기에 인권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근대시민혁명을 이끌었던 부르주아들에게

    절실했던 권리가 최우선되었던 것도 물론입니다. 그러나 현재 인권은 비약적으로 풍요로워졌고 새롭게 인권의 무대

    에 등장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아동의 인권은 20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등장했고 여성이 남성과 동

    등한 선거권을 누리게 된 것은 채 1세기도 되지 않았지요. 정보사회가 발전하면서부터는 정보의 집적이나 유출로

    인한 피해가 급증하면서 ‘정보인권’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도 전쟁

    에 반대하여 평화를 이루려는 사람들의 실천 속에서 인권의 무대에 등장하게 되었지요. 예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권리가 시대 변화와 함께 등장하고 인권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인권을 과거의 구조와 문화에 붙들어 매고 고정시

    키려고 해도 인권의 꿈틀거림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이처럼 인권의 개념과 범주는 늘 시대적 조건과 사회적 권력관계 속에서 약동하고 있습니다. 인권을 아끼고 돌보기

    위해서는 나에게, 우리 사회에 아직까지는 익숙하지 않고 불편하게 여겨지는 권리 주장도 이해하려고 애쓰고 그 역

    동성과 변화를 기꺼이 수용해야 합니다.

    인권은 연대 속에서 꽃을 피웁니다(인권의 상호의존성)

    인권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추상적인 개인으로만 생각하면 인권의 생명력과 역동성이 사라지게 됩니

    다. 우리는 모두 사람이라는 보편성과 함께 다양한 정체성과 조건을 가진 구체적인 개인이라는 성격을 동시에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관계 속에서 존재하지요.

    나의 권리와 다른 사람의 권리를 경쟁하는 것으로만 바라보면서 인권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을 때는 해답이 나오

    기 어렵습니다. 한 사람의 권리, 한 집단의 권리가 제대로 보장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이 위치를 바꿈으로써

    ‘틀’ 전체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기존의 틀이 누구에게 정의롭지 못한 질서인지를 살펴볼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합니

    다. 예를 들어 교사의 권리와 학생의 권리를 대립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여전히 많습니다. 그런데 학생의 권리가

    무참히 짓밟히는 학교에서는 대개 교사들도 함부로 대하는 일들이 자주 일어남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시설생활인

    의 인권이 무참히 유린되는 복지시설에서는 그 시설에 종사하는 사회복지사들도 함부로 대하는 시설장의 횡포를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을 함부로 잡아가두는 사회는 누구라도 함부로 잡아가두는 사회가 될 수 있습니다. 한

  • - 7 -

    사람 한 사람, 한 나라 한 나라가 온실가스를 줄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만큼 내가 숨 쉬는 공기도 달라질 수 있

    습니다. 이렇게 나의 권리와 다른 사람의 권리는 상호 의존하는 관계입니다. 여기에서 인권이 이야기하는 책임, 연

    대할 권리와 책임이 나오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인권이 침해되는 현실을 외면하는 일은 나의 인권을 포기하는 일

    과 마찬가지입니다.

    인권을 만나고 마음에 받아들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인권이 격려되고 소중히 여겨지는 사회가 아

    니라 인권이 함부로 취급되는 사회에서 살아왔습니다. 인권의 주인들도 자기 권리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인권 감수성과 인권 의식을 기르기 위해서는 죽어버린 인권의 세포를 되살려내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나치즘은 히틀러라는 개인의 잔인성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잔혹한 고문으로 희생된 사람들 소식에

    대해서는 분노하면서도 촛불을 켠 채 추위 속에서 죽어간 아이들이나 오늘도 학교에서 머리를 잘리고 있는 아이들

    의 존재에 대해서는 민감함이 적습니다. 인권의 세포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일상 속에서 인권을 품고 나 자신을 변

    화시키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인권의 역사에서 배우기

    박래군(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인권은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다. 과거에 인정받지 못한 권리들이 지금은 인권으로 인정되는 것처럼 새롭게 등장하

    는 인권의 항목들은 오랜 세월 권리를 쟁취하고자 노력하는 이들에 의해 인권의 자리로 굳히게 된다. 인권이 고정

    불변의 것이 아닌 것은 그 이름에서도 찾을 수 있다. 즉, 2차 대전 이전까지 인권은 Rights of Man이었다. 인권

    의 향유자에서 여성은 제외된 것이다. 이때까지 여성은 무권리의 상태였고, 단지 보호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그러

    나 여성운동의 발전에 따라 여성들의 정치참여에 대한 권리가 보장됨에 따라 2차대전 이후에는 오늘날의 Human

    Rights로 바뀌게 되었다. 각 세대의 인권들은 새로운 세대의 인권이 등장함에 따라 앞 세대의 인권영역이 축소되

    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앞 세대의 인권을 풍부히 하면서 확장해 나간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오늘날의 인권의

    영역들이 구축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인권의 역사적 발전 과정을 추적하면서 그 의미를 더 풍부하게 이해하도록 하자.

    1. 인권의 역사

    인권은 자본주의의 역사와 더불어 탄생하고, 발전하였다. 근대 이전 11세기에서 14세기에 걸쳐 영국의 봉건영주들

    이 제멋대로의 억압을 일삼는 국왕에 대한 투쟁 과정에서 권리장전으로 불리는 마그나 카르타를 받아내는데 성공

    했다. 이는 영국 국왕의 약속인데, 이로부터 봉건영주들의 ‘고래의 권리와 자유’가 처음으로 문서로 확인되었고, 이

    로부터 이후 영국 인민의 권리와 자유로 재해석, 확대되어갔다.

    중세봉건 말기에 시민계급이 등장하고 이들은 재산의 획득과 소유를 권리로 인정받고자 했다. 15~16세기에 시민

    계급들은 자본을 축적하면서 그에 따른 사회적 힘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봉건 특권계급들에 의해 자신들이 부의

    축적의 자유가 억압당하는 상황이 오자 그들은 ‘자유’를 주장하고 ‘법 앞의 평등’을 내세우게 되었다. 이로부터 근대

    시민혁명은 시작되게 된다. 근대시민혁명기의 인권 이념의 특징은 ① 인권은 목적, 권력은 수단 ② 인권의 불가침

    성 ③ 자유권 중심의 인권보장 ④ 참정권이다. 인권을 목적으로 보는 것은 정부를 인권의 유지, 옹호의 수단으로

    보면서 이를 위해서만 권력을 인정하게 된다. 반면에 권력이 인권침해자로 등장하게 되면 이에 대해서 저항할 수

    있다는 저항권의 근거가 되었다. 자유권은 앞에서 말했듯이 권력의 불간섭을 요구하는 권리로서 신체의 자유, 정신

    활동의 자유와 더불어 경제활동의 자유를 강조한다. 경제활동은 재산권, 노동의 자유, 영업의 자유, 거주․이전의

  • - 8 -

    자유, 계약의 자유와 같은 것들이 주요 항목들이었다. 근대시민혁명기에 등장한 평등권은 사회경제적인 불평등을

    시정하려는 의미가 아닌 형식적인 평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또, 참정권도 국민주권의 원리에 의해 제한선거제도

    를 정당화시키는 근거였다.

    근대시민혁명기에 터져 나온 자유와 평등, 박애의 정신은 봉건체제의 억압에 눌린 민중들의 절박한 생존적 외침이

    었고, 따라서 자유와 평등의 이념은 보편적인 것이었다. 그럼에도 시민계급(자본가 계급)은 이를 배신하고 자신들

    의 자본주의적 요구를 중심으로 자유권의 내용을 채워버렸다. 결국 민중들은 자유와 평등을 외치며 시민계급을 도

    와 혁명에 참가했지만, 봉건 신분으로부터 해방된 것 외에는 다시 극한 상황의 노동에 의해 생존조차 보장받기 어

    려운 지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서구 자본주의적인 인권의 개념이 형성되었고, 이는 현재에까지도 영

    향을 미치고 있다.

    사회권은 이렇게 배신당한 민중들이 프랑스혁명 후기에 민중해방을 위해서는 토지 기타의 생산수단의 사유를 부정

    하고 사회주의를 도입할 것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초기 사회주의 사상에서 나타나는 인권

    보장의 구상의 특징은 ① 정신활동과 신체의 자유를 강조하는 자유권 ② 실질적인 평등 ③ 교육의 중시 ④ 압제에

    대한 봉기 인정 ⑤ 인민주권으로 요약할 수 있다. 자본가 계급의 자유권이 주로 사적 소유에 대한 자유를 중심으로

    구성된 데 비해서 여기서 자유권은 모든 인민의 평등한 자유를 지향한다. 평등도 형식적인 평등이 아니라 사회경제

    적 약자에 대한 여러 가지 배려의 조처들을 요구한다. 교육은 민중이 각성함으로써 권리의 주체로 설 수 있는 주요

    한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이런 사회권적인 인권보장은 사회주의운동과 더불어 발전하였고, 이 세력들이 국가를 압박하면서 이를 체제내화 시

    키는 과정에서 인권의 한 축으로 정립된다. 즉, 사회권 그 자체가 사회주의의 강령은 아닌 자본주의 내에서 보장받

    아야 할 사회적 약자들의 권리체제로 정착되는 것이다. 사회권은 1919년 현대헌법의 시초로 불리는 바이마르 헌법

    에 처음으로 명기되고, 사회복지 국가의 헌법이 이를 이어받는다. 하지만, 사회권에 대해서 대부분의 복지국가도

    실효성 있는 수단을 갖춘 인권개념으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격렬한 계급투쟁으로부터 자본가 계급의 이해를 보호하

    는 국가의 안정적인 체제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양보되어진 측면이 강하다. 서구에서는 아직도 자유권 중심의 인권

    체계를 근본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이유도 이에서 비롯된다.

    이런 자유권과 사회권은 2차 대전 이후 세계인권선언에 의해 보편적인 인권으로 정착되었다. 하지만, 선언은 법적

    인 구속력이 없는 관습법이기 때문에 이후 유엔은 보다 실효성 있는 인권보장체계를 염두에 두고 사회권 조약과

    자유권 조약을 1966년 채택하고, 1976년 발효시키게 된다. 이 과정에서 사회주의 국가들이 유엔인권선언의 채택

    에 대해 기권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파시즘에 반대하는 것과 민족자결권을 명기하지 않았으며, 사회보장에 대한 권

    리가 충분하지 않고, 사적 소유권을 인권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또, 양대 인권조약을 채택할 때

    에도 두 조약을 한 개의 조약으로 할 것인가 둘로 나눌 것인가를 두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런 논의들은 지

    금까지 이어지는 인권에 대한 중대한 논의지점들이다.

    2. 인권의 역사에서 배우자

    위에서 간략하게 살펴본 인권의 역사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정리할 수 있다.

    ① 추상화, 형식화하려는 지배세력과 실질적인 권리로 구체화하려는 피지배세력의 대립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지배

    세력과 피지배세력의 ‘인권’을 보는 눈에는 차이가 있으며 양자의 긴장관계의 변화에 따라 ‘인권’의 내용은 변해왔

    다. ‘인권’개념은 가급적 인간의 권리를 강제력이 없는 강령으로 취급하려는 세력과 실질적 권리를 얻어냄과 동시에

    새로운 권리를 계속 수용하면서 ‘인권’의 지평을 넓히려는 세력과의 힘이 양방향에서 충돌하면서 그 충돌 속에서 빚

    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시대에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비인간적 상황도 시간이 흐르고 민중의 힘이 성

    장함에 따라 특정한 사람들에 대한 ‘인권침해’라고 인식되어 그런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새로운 인권항목이 생기

    는 것이다.

    ② 인권은 보편성을 띤다는 점이다. 인권은 그 출발에서부터 ‘특권’층의 권한에 반대하는 양상을 띠었다. 어떤 특권

    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세가 철저히 깔려 있다. 반면에 모든 차별에 반대한다. 처음 인권이 왕의 특권에 반대하여

    제기되었고(마그나 카르타), 다음에는 봉건영주의 특권에 반대하여 시민계급이 자유권(국민주권론적)을 중심으로

    인권을 주장하였다. 다시 시민계급이 특권을 누리고, 민중을 배신하자 각성된 민중은 시민계급의 특권을 반대하였

    다. 현대에서는 다수자에 대한 소수자의 보편적 권리의 주장까지 가세하게 된다. 이렇듯이 특권과 차별에 반대하는

  • - 9 -

    투쟁 과정에서 인권은 보편성을 획득하게 되며, 그로부터 형식적이나마 인권은 누구도 쉽게 부정할 수 없는 도덕적

    권위(힘)를 획득하게 된다.

    ③ 사회적 약자의 인간적 생존권을 중심으로 발전해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근대 시민혁명에 민중들이 대거 참여

    하게 되는 것은 민중들이 질식할 것 같은 봉건제의 압제를 더 이상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사회권을 주장하

    던 민중들도 원생적 노동관계에 의한 무한대의 착취에 의해 인간적 생존권이 파괴되는 극한 상황에서 제기되는 것

    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노동자계급은 노동권을 획득, 확장시켜 왔으며, 여성들은 정치참여권부터 여권의 신장을

    가져왔다. 제3세계 약소민족들은 식민제국에 대항하여 독립을 쟁취하였고, 선주민들은 선조의 역사를 복원시켜내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이 사회적 약자의 처지에 있는 세력들이 자신들의 인간적 생존권(시민․정치적 권리를 포함하

    는)을 확장시키면서 인권의 역사를 밀고 왔으며, 반면에 지배세력의 권한들은 점차 축소되어 왔다. 예를 들어 근대

    시민혁명기 이후 절대적인 권리로 인정되던 재산권 등은 사회복지국가 이념이 보편화된 현대복지국가에서는 적극

    적인 제한을 가할 수 있도록 변화되었다.

    ④ 위의 정리에서 보듯이 인권은 천부적인 것도, 고정불변의 것도 아니다. 역동하는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인간의

    존엄함을 드러내는 투쟁 과정을 통해서 한 걸음 한 걸음 진전해온 것이 바로 인권이다. 각 시대마다 인권은 가장

    선진적인 이념을 옹호하였으며, 그 이념을 제시하는 진보운동과 결합하면서 발전해왔다. 인간의 해방을 지향하는

    그 투쟁을 통해 적극적으로 시대에 따라 개념마저 바뀔 수 있는 역동적인 것이 바로 인권이기 때문에 ‘인권은 영원

    한 진보 이데올로기’라고 주장되기도 한다. 이런 과정에서 인권에 대한 믿음은 언제고 고통 받는 민중의 벗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긍정적인 측면을 발견할 수 있는 반면에 서구를 중심으로 발전해온 인권의 역사는 인권을 매우 왜소하게 만

    들어 버렸던 점도 지적할 수 있다. 인민주권론은 자본주의 내에서 체제 유지를 위한 만큼의 내용만이 수용되었으

    며, 사회권도 실질적인 인권으로 아직까지 정립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서구중심의 인권체계는 다음과 같은 잘못된

    인권에 대한 인식을 유포시켰다.

    ① “인권의 길을 가는 것은 자본주의의 길을 가는 것”이라는 인식이다. 물론 서구 자본주의의 역사를 중심으로 발

    전되어 온 과정에서 이런 인식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 모르지만, 이는 분명 왜곡된 인식이다. 자본주의 체제가 인

    권을 수용하면서 대폭 그 내용과 범주를 축소하면서 체제내화 시키려 한 반면, 사회주의 국가들은 파리코뮨에서 확

    인된 민중의 인권적 주장을 다시 왜곡(자유권에 대한 탄압 등)시켜 적극적으로 반영하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사회

    주의 체제가 내부에서부터 관료주의 등에 의해 붕괴되는 상황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인권은 자본주의 체제

    내화 된 가치가 아니라 자본주의도 넘을 수 있는 적극적인 인류의 지향이다. 오늘날 인권운동은 체제를 넘어선 대

    안을 고민하고 있다.

    ② “자유와 평등은 어차피 현실의 것이 아니며, 인류사회의 강령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체념이다. 이상이라는 것은

    늘 현실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비친다. 그러나 이런 체념은 그간의 인권의 역사를 지나치게 비관적으로 해석

    한 데 따른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노예의 신분에서 자유로운 시민의 신분으로, 권리의 객체에서 권리의주체

    로 서기까지 인류의 투쟁은 지난한 것이었다. 그 과정은 바로 자유와 평등을 확대해온 과정에 다름 아니다. 때로는

    후퇴와 축소가 반복적으로 나타나곤 했지만, 그 과정에서 반드시 진전을 이루어오지 않았는가. 지금 필요한 일은

    자유와 평등을 추상화시키려는 세력에 맞서 이를 실질적인 인류의 무기로 획득하는 일이다. 연대가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③ “자유권이 진짜 인권이다”라는 관념이다. 자유권을 중심으로 놓고 발전해왔던 서구 중심의 인권이 역사를 단면

    적으로 볼 때 이는 꽤나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위에서 지적했듯이 근대시민혁명 시기 자유권을 주장했던 민중들

    은 자신들의 노예적 삶을 타파하는 것으로 자유권을 이해했다. 또, 이후 인민주권론에서는 국민주권론과 질적으로

    다른 자유권을 주장하게 된다. 그리고 자유권과 사회권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 인권의 원칙이다. 즉, 현실

    에서는 이 양자가 통일되어 있지, 어느 것 하나로 구분해서 나타나지 않는다. 빈곤의 상태에 처한 사람은 사회권의

    박탈을 경험하지만, 자유권으로부터도 철저하게 배제 당한다. 그러므로 자유권과 사회권을 분리하려는 데에는 저의

    가 있다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는 오히려 사회권을 중심으로 인권을 재구성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논의도

    한편에서는 일고 있다. 생존권을 확보할 것을 전제로 하고 자유권을 비롯한 여타 권리군(權利群)이 구축되어야 한

    다는 주장이다. 어쨌거나 어느 영역의 권리도 축소, 등한시할 것이 아니라 종합적으로 통일적으로 접근하는 눈을

    가져야 한다.

  • - 10 -

    읽을꺼리

    세계인권선언

    1948. 12. 10 국제연합 총회에서 채택

    인류 가족 모든 구성원의 고유한 존엄성과 평등하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세계의 자

    유, 정의, 평화의 기초가 됨을 인정하며,

    인권에 대한 무시와 경멸은 인류의 양심을 짓밟는 야만적 행위를 결과하였으며, 인류가 언론의 자유,

    신념의 자유, 공포와 궁핍으로부터의 자유를 향유하는 세계의 도래가 일반인의 지고한 열망으로 천명되

    었으며,

    사람들이 폭정과 억압에 대항하는 마지막 수단으로서 반란에 호소하도록 강요받지 않으려면, 인권이

    법에 의한 지배에 의하여 보호되어야 함이 필수적이며,

    국가간의 친선관계의 발전을 촉진시키는 것이 긴요하며,

    국제연합의 여러 국민들은 그 헌장에서 기본적 인권과, 인간의 존엄과 가치, 남녀의 동등한 권리에 대

    한 신념을 재확인하였으며, 더욱 폭넓은 자유 속에서 사회적 진보와 생활수준의 개선을 촉진할 것을 다

    짐하였으며,

    회원국들은 국제연합과 협력하여 인권과 기본적 자유에 대한 보편적 존중과 준수의 증진을 달성할 것

    을 서약하였으며,

    이들 권리와 자유에 대한 공통의 이해가 이러한 서약의 이행을 위하여 가장 중요하므로,

    따라서 이제 국제연합 총회는 모든 개인과 사회의 각 기관은 세계인권선언을 항상 마음속에 간직한

    채, 교육과 학업을 통하여 이러한 권리와 자유에 대한 존중을 신장시키기 위하여 노력하고, 점진적인 국

    내적 및 국제적 조치를 통하여 회원국 국민 및 회원국 관할하의 영토의 국민들 양자 모두에게 권리와 자

    유의 보편적이고 효과적인 인정과 준수를 보장하기 위하여 힘쓰도록, 모든 국민들과 국가에 대한 공통의

    기준으로서 본 세계인권선언을 선포한다.

    제1조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성과 권리에 있어서 평등하다. 사람은 이성과 양심을 부여받았

    으며 서로에게 형제의 정신으로 대하여야 한다.

    제2조 모든 사람은 인종, 피부색, 성, 언어, 종교, 정치적 또는 그 밖의 견해, 민족적 또는 사회적 출신, 재산,

    출생, 기타의 지위 등에 따른 어떠한 종류의 구별도 없이, 이 선언에 제시된 모든 권리와 자유를 누릴 자

    격이 있다.

    나아가 개인이 속한 나라나 영역이 독립국이든 신탁통치지역이든, 비자치지역이든 또는 그 밖의 다른

    주권상의 제한을 받고 있는 지역이든, 그 나라나 영역의 정치적, 사법적, 국제적 지위를 근거로 차별이 행

    하여져서는 아니된다.

    제3조 모든 사람은 생명권과 신체의 자유와 안전을 누릴 권리가 있다.

    이런 인권의 역사는 오늘날에도 이어져 오고 있다. 오늘날 세계화의 광풍 앞에서 인권은 위기를 맞고 있다. 경쟁의

    논리와 무자비한 시장법칙만이 존재하는 세계화에서는 민주주의와 삶의 질의 후퇴가 이미 곳곳에서 증명되고 있다.

    이런 시대에 인권은 인류에게 희망일 수 있는가. 이에 대해 인권운동은 답해야 하고, 희망이기 위해서 분투해야 한

    다. 민주주의의 강화와 인권의 전면적 보장은 그래서 지금도 유효한 해답이 될 것으로 믿는다.

  • - 11 -

    제4조 어느 누구도 노예나 예속상태에 놓여지지 아니한다. 모든 형태의 노예제도 및 노예매매는 금지된다.

    제5조 어느 누구도 고문이나, 잔혹하거나, 비인도적이거나, 모욕적인 취급 또는 형벌을 받지 아니한다.

    제6조 모든 사람은 어디에서나 법 앞에 인간으로서 인정받을 권리를 가진다.

    제7조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고, 어떠한 차별도 없이 법의 평등한 보호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 모든 사람은

    이 선언을 위반하는 어떠한 차별에 대하여도, 또한 어떠한 차별의 선동에 대하여도 평등한 보호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

    제8조 모든 사람은 헌법 또는 법률이 부여하는 기본권을 침해하는 행위에 대하여 담당 국가법원에 의하여 효과

    적인 구제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

    제9조 어느 누구도 자의적인 체포, 구금 또는 추방을 당하지 아니한다.

    제10조 모든 사람은 자신의 권리와 의무, 그리고 자신에 대한 형사상의 혐의를 결정함에 있어서, 독립적이고 편견

    없는 법정에서 공정하고도 공개적인 심문을 전적으로 평등하게 받을 권리를 가진다.

    제11조 1. 형사범죄로 소추당한 모든 사람은 자신의 변호를 위하여 필요한 모든 장치를 갖춘 공개된 재판에서 법

    률에 따라 유죄로 입증될 때까지 무죄로 추정받을 권리를 가진다.

    2. 어느 누구도 행위시의 국내법 또는 국제법상으로 범죄를 구성하지 아니하는 작위 또는 부작위를 이유

    로 유죄로 되지 아니한다. 또한 범죄가 행하여진 때에 적용될 수 있는 형벌보다 무거운 형벌이 부과되

    지 아니한다.

    제12조 어느 누구도 자신의 사생활, 가정, 주거 또는 통신에 대하여 자의적인 간섭을 받지 않으며, 자신의 명예와

    신용에 대하여 공격을 받지 아니한다. 모든 사람은 그러한 간섭과 공격에 대하여 법률의 보호를 받을 권

    리를 가진다.

    제13조 1. 모든 사람은 각국의 영역 내에서 이전과 거주의 자유에 관한 권리를 가진다.

    2. 모든 사람은 자국을 포함한 어떤 나라로부터도 출국할 권리가 있으며, 또한 자국으로 돌아올 권리를

    가진다.

    제14조 1. 모든 사람은 박해를 피하여 타국에서 피난처를 구하고 비호를 향유할 권리를 가진다.

    2. 이 권리는 비정치적인 범죄 또는 국제연합의 목적과 원칙에 반하는 행위만으로 인하여 제기된 소추의

    경우에는 활용될 수 없다.

    제15조 1. 모든 사람은 국적을 가질 권리를 가진다.

    2. 어느 누구도 자의적으로 자신의 국적을 박탈당하거나 그의 국적을 바꿀 권리를 부인당하지 아니한다.

    제16조 1. 성년에 이른 남녀는 인종, 국적 또는 종교에 따른 어떠한 제한도 받지 않고 혼인하여 가정을 이룰 권

    리를 가진다. 이들은 혼인 기간 중 및 그 해소시 혼인에 관하여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

    2. 결혼은 양당사자의 자유롭고도 완전한 합의에 의하여만 성립된다.

    3. 가정은 사회의 자연적이며 기초적인 구성 단위이며, 사회와 국가의 보호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

    제17조 1. 모든 사람은 단독으로는 물론 타인과 공동으로 자신의 재산을 소유할 권리를 가진다.

    2. 어느 누구도 자신의 재산을 자의적으로 박탈당하지 아니한다.

    제18조 모든 사람은 사상, 양심 및 종교의 자유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 이러한 권리는 자신의 종교 또는 신념을

    바꿀 자유와 선교, 행사, 예배, 의식에 있어서 단독으로 또는 다른 사람과 공동으로, 공적으로 또는 사적

    으로 자신의 종교나 신념을 표명하는 자유를 포함한다.

    제19조 모든 사람은 의견과 표현의 자유에 관한 권리를 가진다. 이 권리는 간섭받지 않고 의견을 가질 자유와 모

    든 매체를 통하여 국경에 관계없이 정보와 사상을 추구하고, 접수하고, 전달하는 자유를 포함한다.

    제20조 1. 모든 사람은 평화적 집회와 결사의 자유에 관한 권리를 가진다.

    2. 어느 누구도 어떤 결사에 소속될 것을 강요받지 아니한다.

    제21조 1. 모든 사람은 직접 또는 자유롭게 선출된 대표를 통하여 자국의 통치에 참여할 권리를 가진다.

  • - 12 -

    2. 모든 사람은 자국의 공무에 취임할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

    3. 국민의 의사는 정부의 권위의 기초가 된다. 이 의사는 보통 및 평등 선거권에 의거하며, 또한 비밀투

    표 또는 이와 동등한 자유로운 투표 절차에 따라 실시되는 정기적이고 진정한 선거를 통하여 표현된

    다.

    제22조 모든 사람은 사회의 일원으로서 사회보장제도에 관한 권리를 가지며, 국가적 노력과 국제적 협력을 통하

    여 그리고 각국의 조직과 자원에 따라 자신의 존엄성과 인격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하여 불가결한 경제적,

    사회적 및 문화적 권리의 실현에 관한 권리를 가진다.

    제23조 1. 모든 사람은 근로의 권리, 자유로운 직업 선택권, 공정하고 유리한 근로조건에 관한 권리 및 실업으로

    부터 보호받을 권리를 가진다.

    2. 모든 사람은 어떠한 차별도 받지 않고 동등한 노동에 대하여 동등한 보수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

    3. 모든 근로자는 자신과 가족에게 인간적 존엄에 합당한 생활을 보장하여 주며, 필요할 경우 다른 사회

    적 보호의 수단에 의하여 보완되는, 정당하고 유리한 보수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

    4.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가입할 권리를 가진다.

    제24조 모든 사람은 근로시간의 합리적 제한과 정기적인 유급휴일을 포함한 휴식과 여가에 관한 권리를 가진다.

    제25조 1. 모든 사람은 식량, 의복, 주택, 의료, 필수적인 사회역무를 포함하여 자신과 가족의 건강과 안녕에 적

    합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를 가지며, 실업, 질병, 불구, 배우자와의 사별, 노령, 그 밖의 자신이 통제

    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다른 생계 결핍의 경우 사회보장을 누릴 권리를 가진다.

    2. 모자는 특별한 보살핌과 도움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모든 어린이는 부모의 혼인 여부에 관계없이 동

    등한 사회적 보호를 향유한다.

    제26조 1. 모든 사람은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교육은 최소한 초등기초단계에서는 무상이어야 한다. 초등교

    육은 의무적이어야 한다. 기술교육과 직업교육은 일반적으로 이용할 수 있어야 하며, 고등교육도 능력

    에 따라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개방되어야 한다.

    2. 교육은 인격의 완전한 발전과 인권 및 기본적 자유에 대한 존중의 강화를 목표로 하여야 한다. 교육은

    모든 국가들과 인종적 또는 종교적 집단간에 있어서 이해, 관용 및 친선을 증진시키고 평화를 유지하

    기 위한 국제연합의 활동을 촉진시켜야 한다.

    3. 부모는 자녀에게 제공되는 교육의 종류를 선택함에 있어서 우선권을 가진다.

    제27조 1. 모든 사람은 공동체의 문화생활에 자유롭게 참여하고, 예술을 감상하며, 과학의 진보와 그 혜택을 향

    유할 권리를 가진다.

    2. 모든 사람은 자신이 창조한 모든 과학적, 문학적, 예술적 창작물에서 생기는 정신적, 물질적 이익을 보

    호받을 권리를 가진다.

    제28조 모든 사람은 이 선언에 제시된 권리와 자유가 완전히 실현될 수 있는 사회적 및 국제적 질서에 대한 권리

    를 가진다.

    제29조 1. 모든 사람은 그 안에서만 자신의 인격을 자유롭고 완전하게 발전시킬 수 있는 공동체에 대하여 의무를

    부담한다.

    2. 모든 사람은 자신의 권리와 자유를 행사함에 있어서, 타인의 권리와 자유에 대한 적절한 인정과 존중

    을 보장하고, 민주사회에서의 도덕심, 공공질서, 일반의 복지를 위하여 정당한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목적에서만 법률에 규정된 제한을 받는다.

    3. 이러한 권리와 자유는 어떤 경우에도 국제연합의 목적과 원칙에 반하여 행사될 수 없다.

    제30조 이 선언의 그 어떠한 조항도 특정 국가, 집단 또는 개인이 이 선언에 규정된 어떠한 권리와 자유를 파괴

    할 목적의 활동에 종사하거나, 또는 그와 같은 행위를 행할 어떠한 권리도 가지는 것으로 해석되지 아니

    한다.

  • - 13 -

    “고민되면 들으면 되고~”

    [강의] 인권의 돋보기로 자기 삶 들여보기

    삶의 현실과 희망의 대안

    강수돌(고려대 교수, 조치원 마을 이장)

    1. 숭례문 붕괴의 교훈

    숭례문은 조선 초기에 건립되어 지금까지 산전수전(山戰水戰) 모두 겪으면서도 무려 600여 년을 당당히 살아왔

    다. 숭례문(崇禮門)이란 글자 그대로 ‘예(禮)를 존중하고 드높인다’는 뜻을 가진다. 동대문인 흥인지문이 인(仁)을,

    서대문인 돈의문이 의(義)를, 남대문인 숭례문이 예(禮)를, 북대문인 홍지문이 지(智)를, 그리고 중앙의 보신각이

    신(信)을 상징하는 것은, 봉건 국가 조선조차 ‘인의예지신’이라는 유교의 올바른 도덕을 나라 경영과 온 사회의 길

    잡이로 삼고자 했던 뜻에서였다.

    600년 세월을 넘긴 이 숭례문이, 자신이 살던 집이 아파트 건설 사업에 휘말리면서 토지보상가 때문에 여러 모

    로 한이 맺힌 70줄 노인에 의해 2008년 2월 10일 밤, 처참하게 불타버렸다. 국보1호의 위상을 갖던 상징적 문화

    재가 새까맣게 탐과 동시에 이 소식을 들은 모든 시민들 마음까지 새까맣게 타버렸다. 이제 한편에선 이 사태의 책

    임과 처벌에 관한 논의가, 다른 편에선 숭례문 재건 및 문화재 보호에 관한 논의가 봇물처럼 터져 나온다. 그런데

    이번 사태를 한 개인의 인격 장애 문제쯤으로 치부하거나 철저한 처벌, 성급한 복원 및 완벽한 관리의 문제쯤으로

    처리하고 만다면 이는 사태의 본질을 건드리지 못하고 단순한 대증요법에 그칠 것이다.

    나는 이번 숭례문 붕괴는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 사회에 ‘예’가 숭상되기 보다는 체계적으로 붕괴했기 때문에 그

    를 상징적으로 최후 통첩하는 일이라 본다. 선각자에 따르면 예(禮)란 타자와 존중의 관계, 배려의 관계, 소통의

    관계, 따뜻한 관계를 맺는 것이다. 숭례문이 남쪽을 향해 따뜻한 태양을 향해 서 있는 것도 그런 의미가 있다고 한

    다. 그렇다면 이른바 ‘동방예의지국’의 전통을 가졌던 우리 사회가 오래 전부터 갈수록 예의 없이 오만방자하고 추

    하고 속물 냄새가 흠씬 풍길 정도가 되어 가고 있기에, 이를 정말 호되게 경고하느라 숭례문이 새까맣게 불타고 만

    것이다.

    실은 이런 상징적 의미가 아니라 하더라도 위 노인은 남들에 비해 턱 없이 낮다고 생각한 토지보상가 때문에 건

    설 회사에 속이 상했고, 이를 호소하느라 관청과 청와대까지 찾았지만 허사였고, 나아가 사법부에 기대했지만 결국

    절망했다. 그 노인 입장에서 보면 이 나라에 예의가 무너지고 도덕이 무너졌다고 한탄했을 터이다. 물론 여기서 나

    는 그의 방화 행위를 정당화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정반대다. 그런 식의 자기표현과 파괴 행위는 민주 사회에서

    마땅한 벌을 받아야 한다. 내가 주목하는 부분은 그 노인의 심정이고 그 심정 뒤에 있는 이 사회의 ‘예(禮)의 붕괴’

    다.

    여기서 말하는 예(禮)란 흔히 말하는 예의범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저 인사 잘하고 윗사람을 공경

    하자는 식의 개별적 예절만 말하는 게 아니다. 내가 말하는 예란, 우리 삶에 있어 나와 타자가 맺는 따뜻하고 올곧

    은 사회적 관계다.

    생각건대, 해방 이후 기존 친일파가 정당하게 단죄되지 못하고 다시금 돈과 권력에 빌붙어 힘을 키워온 역사적

    현실, 그리고 1960년대 이후 경제개발 과정에서 인간(노동력 포함)이나 자연에 대한 ‘예’를 갖추지 못하고 그를 무

  • - 14 -

    자비하게 희생시켜 오로지 더 많은 수입과 더 높은 성장률을 달성하겠다며 물질만능주의와 탐욕을 강화해 온 정치

    경제적 현실, 또 아이들이 건전하고 자율적인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성숙하도록 도와주기 보다는 친구들과 살벌한

    경쟁을 하며 별 의미 없는 내용을 밤새도록 암기해서 오로지 높은 점수만을 따도록 윽박지르는 성과지상주의적 교

    육 풍토, 바로 이런 것들이 우리 사회가 이미 오래 전부터 체계적으로 ‘예’를 붕괴시켜 오고 있다는 증거 아닌가.

    결국, 이번 숭례문 사태는 한편으로는 지금까지의 정치경제적 패러다임에 대한 철저한 성찰을, 다른 편으로는 그

    런 패러다임 속에서 뒤틀리고 왜곡된 우리 자신의 사회심리적 태도와 습성을 차분히 반성하고 변화하도록 강력히

    촉구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여태껏 한국 사회에서 성장과 개발의 광풍 속에 일중독과 소비중독이 경향적으로

    조장되고 결국 인간과 자연 모두가 파괴되고 있는 현실에 주목, 21세기를 건강하게 만들 전망에 대해 논하고자 한

    다.

    2. 우리 사회가 처음부터 이렇지는 않았다 - 역사적, 사회적 배경

    얼마 전(2008. 3. 28), 충북 청주의 어느 고교 백모 교사(47·수학)는 아침 7시 경에 출근해 ‘야간자율학습’이

    끝난 밤 11시쯤 귀가 뒤 갑자기 가슴통증과 두통을 호소하다 곧 심근경색으로 숨지고 말았다. 그는 1987년에 교

    단에 선 뒤로 최근 8년간 고3 담임을 맡을 정도로 ‘열성’이었다. 그 학교 교감은 “새 학교로 부임해 와 3학년 담임

    을 맡은 백 교사는 한 달 가까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자율학습이 끝난 뒤에도 남아있는 학생들을 끝까지 지켜주던

    분이었다.”며 “그런 열정이 오히려 화를 부른 것 같다.”고 했다. 안타까운 일은 이것만이 아니다. 모 대학에서는 연

    구와 강의에 열의를 보인 40대 교수 두 명이 2008년 3월에 ‘때 아닌’ 죽음을 맞이했다. ‘과로사’는 공무원도 예외

    없다. 2006년 7월의 한 보도에 따르면, 지난 5년 간 과로로 세상을 떠난 공무원은 462명이다. 야근과 스트레스에

    따른 심·뇌혈관 등 순환기 질환이 주 원인이었다. 연령별로는 40대가 41%, 50대가 42%였다[서울신문

    2006.7.14]. 또 지난 2005-6년 (주)한국타이어에서는 노동자 15명이 일과 관련해서 줄지어 사망했다. (주)금호

    타이어 노동자들은 60% 이상이 주당 48시간 이상을 노동하며 휴일 노동 및 연장 근로, ‘몰아치기’ 노동(쉼 없이

    과중한 노동을 하고 나중에 쉬자는 식으로 하는 벼락치기 노동)을 ‘밥 먹듯’ 한다. 근골격계 질환이나 과로사가 쉽

    게 뒤따른다. 오죽했으면 노조가 나서서 ‘주당 64시간’(이것도 많지만)을 초과하는 노동을 못 하게 규제하려 들까?

    비단 이런 회사만의 문제는 아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노동현장에서 관찰되는 현상이다. 이른바 ‘IMF 사태’ 시기에

    사상 초유의 대량해고라는 사회경제적 폭력을 경험하는 가운데 심각한 충격과 상처(트라우마)를 받은 노동자들이

    ‘언제 잘릴지 모르니 일할 수 있을 때 (죽지 않을 만큼) 일하자’는, (다소 병적인) 정서를 공유하게 된 것은 일견

    ‘자연스런’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1998년에 노동자의 30% 정도를 해고하려는 계획을 둘러싸고 노사 간 ‘전쟁’을

    치룬 (주)현대자동차에서는 2002년 한해에만도 과로사 추정의 줄초상이 16-18명이나 나왔다. 지금도 직장인의 대

    다수가 극심한 스트레스와 불안감에 시달린다. 온라인 리크루팅 업체 와 직장인 지식포털 이 최

    근 국내외 기업에 재직 중인 직장인 1,127명을 대상으로 ‘직무 스트레스 현황’에 대해 조사한 결과, 조사 대상 직

    장인 87.8%(990명)가 현재 직장생활에서 직무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한다. 특히, 직장인 2명 중 1명

    (49.6%)은 자신들이 현재 받고 있는 직무 스트레스가 ‘심각한 수준’이라 했다[아시아경제, 2008.1.31]. 설사 옆에

    일하던 사람이 쓰러져 나가도 충격은 ‘그 때’ 뿐이다. 깊은 고민이나 사회적 의제화가 잘 안 된다. 이게 우리 현실

    이다. 그러나 이런 현실이 ‘원래’ 그런 것은 아니었다.

    조선 시대 사람들의 걸음걸이와 오늘날 회사에 출근하는 사람들의 걸음걸이를 비교해 보라. 가끔 마당극에서 볼

    수 있는 조선 시대 양반의 걸음걸이는 한마디로 ‘느긋함’ 그 자체였다. 상민이라고 해서 그다지 바쁠 것도 없었다.

    뭔가 바쁘게 쫓아다니는 이는 오히려 ‘경망스럽다’거나 ‘촐랑거린다’고 꾸짖음을 당했다. 그런데 오늘날 회사에 출퇴

    근하는 사람들의 걸음걸이를 보라. 특히 아침 시간은 한마디로 ‘전쟁’이다. 일하러 가는 시간은, ‘칼같이’ 출근 시간

    에 맞추어야 한다는 ‘보이지 않는 손’ 때문에 초와 분을 다툰다. 반면에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은 ‘칼 퇴근’이 어렵

    다. 마음은 벌써 집에 가 있는데 몸은 회사에 묶여 있는 인질이나 다름없다. 그만큼 마음은 더 바쁘다. 아이들이나

    노인 등 다른 가족 구성원들에 대한 죄책감까지 겹치면 마음은 너무나 급하다. 모든 바쁜 일이 끝나고 밤중에 비로

    소 잠자리에 누우면 ‘어휴, 오늘도 바쁘게 하루를 살아남았구나.’라는 안도감과 함께 ‘또 내일은 얼마나 바쁠까?’라

    는 불안감이 동시에 밀려온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숨 가쁘게’ 살아야 하는 것이 오늘날 대부분 사람들의 일상생활

  • - 15 -

    이다. 그나마 다음날 ‘무사히’ 일어나면 다행이다. 많은 경우 죽도록 일하다가 정말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매일같이 10명이 산재 사망하는 통계를 목격하고 있다. 그 중에는 매일 2-3명이 과로사로 죽어간다. 공인

    과로사, 이것은 공인 회계사보다 더 인정받기 어렵다. 그런데도 매일 2-3명의 과로사가 쌓여간다. 이것이 우리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불편한 진실’이다.

    그렇다면 왜, 언제부터, 어떻게 해서 느긋함의 사회가 과로사의 사회로 변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한마디로, 우리

    사회가 ‘산업 사회’로 변하면서부터다. 농촌, 농업 중심의 사회가 도시, 공업 중심의 사회로, 또 사람과 자연이 조

    화로이 살던 사회로부터 시장과 돈이 삶을 지배하는 사회로 변하는 것이 그러한 변화의 본질이다. 이 변화와 더불

    어 시간의 개념도 변했다. 한마디로, 자연의 시간으로부터 인공의 시간으로 변한 것이다. 농사를 보라. 봄이면 씨

    앗 뿌리고 여름이면 풀을 뽑고 가을이면 추수하고 겨울이면 쉰다. 느긋하게 그러나 철에 맞게 움직이는 것이 자연

    의 시간이다. 그러나 공장을 가보라.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움직이는 작업 대상물을 놓치지 않기 위해 초와 분을

    다투어야 한다. 옆 사람과 이야기는커녕 화장실도 마음대로 갈 수 없다. 자연의 시간과 인공의 시간이 이렇게 대조

    된다. 게다가 가정은 어떠한가? 갓난아기일수록 자연의 시간에 가깝게 움직인다. 예컨대, 아기는 수시로 배고픔을

    느끼고 수시로 잠을 잔다. 그러나 아이가 클수록, 어른이 될수록 인공의 시간에 맞추어진다. 아무 때나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시간에만 밥을 먹어야 한다. 그것도 ‘잽싸게’ 먹어치우거나 ‘값싸게’ 한 끼 ‘때워야’ 한다. 또 설

    사 배가 고프지 않아도 낮 12시만 되면 ‘점심시간’을 써야 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자신의 내면적 욕구에 솔직하

    게 반응하고 이를 건강하게 충족시키는 과정 속에서 매 순간 만족과 행복을 느끼는 삶을 살기보다는, 기계처럼 돌

    아가는 현실 속에서 마치 톱니바퀴처럼 어쩔 수 없이 맞물려 돌아가야만 하는 그런 삶을 산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살다 보면 언젠가는 행복할 날이 오겠지.’하는 막연함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냉철히 생각해보라. 막연한 미래의

    행복은 결코 오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행복을 추구하다 보면, ‘그 날’은 비로소 ‘땅 밑’에 가서야 온다. 이것이 또

    다른 ‘불편한 진실’이다. 다시 말해, 우리들 대부분이 오늘의 행복을 오늘 누리기보다는 막연한 미래로 부단히 유

    보하면서 ‘빠지게’ 일하도록 만드는 것, 바로 이것이 무한한 돈벌이 시스템이 가진 또 다른 ‘불편한 진실’이 아니던

    가.

    3. 돈벌이 시스템이 낳은 결과: 일중독과 소비중독

    공인 과로사가 공인 회계사보다 더 빠른 속도로 증가하는 시대, 이건 바로 일중독(work addiction)의 결과다.

    그렇다면 일중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들이 내면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갈수록 일에 강박적으로 매달리는

    병적 상황이다. 흥분 속에 한 가지 일이 끝나면 또 가슴 벅차게 새 일감을 찾는다(면역성). 일을 않고 쉬면 오히려

    불안하다(금단 현상). 반면 일하는 동안에는 세상만사 모두 잊고 마음이 편하며 ‘뿌듯’하기도 하다(의존성). 삶의

    의미가 일 속에, 성취 속에 있기 때문에 여가활동, 사회운동, 인간관계 따위가 경시된다. 자아 정체성을 오로지 일

    속에서만 찾는 것이다. 일이 없다면 죽음이라 볼 정도다. 따라서 일중독을 정의할 때 핵심은 세 가지다(졸저,『일

    중독 벗어나기』참고). 첫째, 일에 대한 의존성, 둘째, 만족에 대한 면역성 증가, 셋째, 일이 없을 때 금단 현상 발

    생 등이다.

    일중독의 발생 원인을 추적해보면 크게 두 가지 뿌리가 있다. 하나는 어릴 적부터 좌절감을 반복적으로 경험한

    사람들의 경우 좌절감, 굴욕감, 열등감, 심적 고통을 상쇄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일 속에 자신을 파묻고자 하거나

    의도적으로 일을 통한 성취에 목숨을 거는 경우다. 둘째는 어릴 적부터 성취감을 반복적으로 경험한 사람들의 경우

    더욱 많은 성취감, 칭찬과 인정, 더 많은 도취감, 자아실현감을 느끼기 위해 본능적이든 의도적이든 일을 통한 성

    취에 인생을 거는 경우다. 따지고 보면 바로 여기서 일이란 일종의 ‘마약’ 역할을 한다. 첫째의 경우, 사람들에게

    일이란 진정제 내지 망각제가 된다. 둘째의 경우 일이란 흥분제다.

    일중독의 정의나 발생 원인을 정리하는 가운데 본질적으로 중요한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우리가 ‘내면의 공허

    함’을 느끼는가 않는가 하는 문제다. 생각건대 내면의 공허함을 느끼는 것은 우리 내면의 참된 욕구가 건강하게 충

    족되지 못할 때다. 그렇다면 내면의 참된 욕구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생존의 욕구와 사랑의 욕구다. 바로

    이것을 해결하는 과정이 삶이 아니던가. 그 중에서도 사랑의 욕구(인정과 존중, 나눔과 배려, 인간미와 공동체, 소

    통과 연대)가 핵심이다. 요컨대, 사랑의 욕구가 건강하게 충족되지 못하면 공허함이 생긴다. 이 공허함은 고통이

  • - 16 -

    다. 이 고통을 회피하거나 보상하기 위해 우리는 ‘외부’에 눈을 돌린다. 그 외부가 마약이면 마약중독이 되고 게임

    이면 게임중독이 되며, 쇼핑이면 쇼핑중독이 된다. 앞서 말한 ‘산업 사회’의 핵심은 경쟁 사회이자 능력 사회, 성과

    사회다. 일을 통한 성취와 능력, 일을 통한 자아실현, 일을 통한 생존, 일을 통한 인정을 본질로 한다. 따라서 우

    리가 가진 내면의 공허함은 일을 통한 성취로 쉽게 메워지는 듯 보인다. 일중독이 발생하는 사회심리적 메커니즘이

    바로 이것다. 한편, 일중독 자체도 고통이다. 이 고통을 상쇄하기 위한 또 다른 노력이 알콜중독이나 쇼핑중독으로

    확장된다. 한국 사회가 술 권하는 사회, 쇼핑 조장하는 사회로 변모하는 까닭이 바로 이것이다.

    따지고 보면, 가정, 학교, 직장, 종교, 시장, 군대, 그 어느 영역을 보더라도 내면의 공허함이 관찰된다. 그리고

    그 공허함을 메우기 위한 중독적 노력, 그 중에서도 일중독, 소비중독, 알콜중독이 쉽게 관찰된다.

    자본의 패러다임과 삶의 패러다임

    패러다임

    비교 기준 자 본 삶

    인간

    자연

    농업

    교육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인적자원, 가변자본

    자연 자원, 원료, 개발 대상

    경쟁력없는 산업, 저부가가치업

    노동력 생산 공장

    돈벌이 여건 조성

    돈벌이

    지배이데올로기, 이윤공간

    노동력 공급원, 상품시장

    생동하는 주체

    생명의 원천, 사람의 어머니

    생명산업, 천하 근본

    삶의 자율능력 학습

    책임 있는 자기결정

    먹고사는 것

    생동하는 삶의 과정 자체

    공동체, 선물 주고받는 관계

    본질 파괴적 자기증식 창조적 상호관계

    4. 중독 사회를 넘어 새로운 21세기를 향하여

    신경정신과 의사들은 일중독자들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하루에 30분 이상 운동을 하라, 일을 집에 갖고 가지 말

    라, 취미 활동을 하라, 등등 이런 식이다. 물론 이런 ‘테크닉’도 중요하다. 하지만 두 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다. 첫

    째, 자칫 이런 테크닉조차 일중독적으로 진행되기 쉽다. 바쁘게 일한 다음에 바쁘게 취미 활동을 하고 바쁘게 운동

    을 하고 바쁘게 사람을 만나야 하는 식으로. 정말 웃기는 것은 가족과 함께 여유롭게 휴가를 가서조차 아침부터 저

    녁까지 ‘빡세게’ 휴가 일정을 짜고 ‘효율적으로’ 휴가 소비를 하고 마지막에는 ‘녹초’가 되어 돌아오는 경우다. 둘째,

    일중독이 발생하는 보다 큰 맥락, 즉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맥락을 전혀 손대지 않은 채, 일부 미시적인 테크닉으로

    ‘자기’만의 비법으로 일중독을 피하려는 것은 결국 일중독 사회를 (자기도 모르게) 묵인하거나 (그래도 살 만한 곳

    이라고) 조장하기 쉽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보다 큰 맥락을 짚어야 한다. 그 맥락 자체가 문제라면 그것을 우선적으로 문제 삼아야 한다. 그

    런 다음에 사회적 실천과 개인적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 이것이 바른 길이다. 그러면 보다 큰 맥락이란 무엇인가.

    첫째, 역사적으로 우리는 이른바 ‘외세’의 지배를 받는 과정에서 ‘강자와의 동일시’라는 집단 심리를 형성하게 되

    었다(H. 하이데, 『노동사회 벗어나기』, 박종철출판사, 2002 참고). 외부의 폭력을 강하게 경험하는 과정에서

    ‘싸울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상황에 직면하여 일종의 생존 전략으로 ‘강자 앞에 무릎 꿇고 숭배하는’ 심리를 온 사

    회가 공유하게 된 것이다. 한마디로 제국주의 앞에서는 제국주의를 형님이나 아버지로 모시고, 자본주의 앞에서는

    자본주의를 형님이나 아버지로 모시는 것이다. 지배 체제가 바로 아버지다. 아버지로 모시지 않으면 죽음 또는 그

    에 값하는 고통이 따르기 때문이다. 더욱 서글픈 것은 약자인 자신이 강자를 동일시하면서 은연중에 자신보다 더

  • - 17 -

    약한 자를 무시하고 짓밟게 된다는 사실이다. 적군이 아군 되고, 아군이 적군 되는, 묘한 일이 생긴다. 강자의 논

    리를 철저히 ‘내면화’한 결과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는 ‘약자-강자의 논리’나 ‘피해자-가해자의 논리’를 벗어나야 할

    역사적 과제를 갖는다.

    둘째, 사회적으로 우리는 출세와 성공에 대한 집단적 강박증을 갖게 되었다. 가정, 학교, 직장 등 삶의 세계를

    지배하는 모든 영역에서 우리는 이러한 강박증과 조급증에 시달린다. 더 슬픈 것은 그런 시달림조차 모르거나 모른

    척하고자 하는 ‘집단 불감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이다. 안타깝게도 이것조차 못 느끼는 경우도 많다. 가정에서는 뱃

    속의 아기에게조차 ‘태교’를 하는데, 심한 경우 영어, 중국어까지 가르치려 든다. 태어난 유아에게는 부모들의 성취

    욕을 대신 채워 달라는 기대를 은연중에 강제한다. 아이들은 일종의 생존전략, 사랑받기 위한 전략으로 부모님의

    ‘눈치 보기’를 배운다. 유치원과 학교에 가면서 성취, 성과, 점수 따위가 삶의 목표처럼 강제된다. 어른들이 경험하

    는 직장 세계가 가혹한 경쟁사회, 성과사회, 업적사회이기 때문에, 2세들이 미리 경쟁력을 갖도록 돕는다는 명분

    아래 (의도하든 않든) 아이들에게 치열한 경쟁 논리를 강요한다. 이런 문제를 그대로 둔 채 ‘오로지 돈 벌어 자식

    을 대학 보내려고’ 연장 노동과 일중독에 빠지는 것은 답이 아니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는 집단적 강박증, 조급증,

    불감증과 더불어 성공과 출세의 논리, 경쟁의 논리를 상대화해야 할 사회적 과제를 가진다.

    이 두 가지의 큰 맥락을 전제한 위에서 우리는 사회적, 개인적 실천을 해야 한다. 사회적 실천으로는 강박적으로

    일에 매달리지 않아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 자연의 시간에 가까운 리듬으로 살 수 있는 사회, 내면의 참된

    욕구를 건강하게 실현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결국, 사람들이 자신의 개성을 살릴 수 있는 공부

    와 직업을 영위하면서도 다른 사람과의 차별 없이 비슷한 대접을 받는 사회에 살 수 있을 것이다. 보다 구체적인

    경로는 활발한 사회적 토론 속에 찾아나가야 한다. 최소한 그런 사회가 되기 위한 몇 가지 기둥들은 여기서도 지적

    할 수 있다. 예컨대, 2, 3차 산업이 아닌 1차 산업 중심의 사회, 모든 분야에서 하루 한 나절 정도의 짧은 노동시

    간, 초과노동 없는 기본급만으로도 충분한 생활 보장, 땅과 집, 교육과 의료 문제의 공동체적 해결, (개성 있는)

    고교 평준화를 넘어 대학 평준화 및 직업 평준화 실현 등이 바로 그것이다. 한마디로 ‘죽임’의 사회경제 구조가 아

    니라 ‘살림’의 사회경제 구조를 구축해야 한다. 이런 지향점을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공유하게 될 때 비로소 새로운

    전망이 열린다. 그 속에서라야 일중독 문제도 제대로 해결될 것이다.

    다음으로 개인적 실천을 보자. 심리상당 차원의 해법들이 제시하는 바와 같은, 매일 규칙적 운동을 하거나 명상

    에 잠기거나 취미 생활을 하는 개인적 해결책조차 이런 사회적 해결책의 구현과 더불어 이뤄질 때 비로소 의미를

    지닌다. 그렇지 않다면 한편에서 일중독은 확산되고 심화하는데도 다른 편에서 자기만큼은 ‘여유’를 누리며 산다고

    (자위하는 줄도 모르고) 결국은 자위하는 데 그치고 말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개별 가정과 학교에서는 어릴 적부

    터 아이들이 자신의 참된 욕구를 솔직히 표현하고 건강하게 충족하는 가운데 행복감을 느끼도록 도와야 한다. 그런

    것이 좌절되거나 오로지 성취욕에만 불타게 되면 이런 저런 유형의 일중독자만 양육하는 결과를 부를 것이다. 또

    노동 현장, 직장에서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고달픔’에 대해 서로 숨기거나 억지로 참지 말고 모두 털어 놓고 이야

    기하는 풍토를 만들고, 민주 노조나 참된 노동자 소모임 등이 주체가 되어 적극 공론화해나가야 한다.

    요컨대, 참된 삶의 여유란 결코 ‘하루 30분 명상’과 같은, 값싼 방식으로는 오지 않는다. 차라리 가정, 학교, 직

    장에서 하던 일을 멈추고 ‘하루 30분’씩이라도 이런 근본적 문제의식을 나누는 데 쓰기 시작하면 어떨까? 그래야

    비로소 우리는 생존의 욕구를 넘어 진정한 내면의 행복감을 느끼며 살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진정으로 건강한 노

    동자의 삶이 아니겠는가? 노동과 건강, 그리고 건강과 행복 …, 단순히 몸 건강하게 노동해서 돈 잘 벌어 자식을

    대학 보내는 것으로 참된 행복은 결코 오지 않는다.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라는데, 그 한 걸음조차 ‘제대로’ 내딛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5. 독일계 보험사 (주)알리안츠생명의 ‘사회적 책임’

    자본주의 경제가 발달하면서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CSR)’이 부상한다. 하나는 기업의 사회적 권력이 막강해지면서 기업에 대한 사회적 기대와 압력이 커지기 때문이

    다. 둘째는 기업의 사회적 모순이 커지면서 그 모순에 적절히 대응하지 않으면 경제적 성과가 위험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두 측면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 활동의 과정에서 온갖 사회적 모순이

  • - 18 -

    생기지만, 아무런 사회적 압박이 없다면 기업은 별 다른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한편에서는 사회

    적 모순, 다른 편에서는 사회적 압박이 존재할 때,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공론화한다. 한마디로, 변화된 여건 속에

    서 기업의 새로운 생존 전략으로 등장한 것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다. 여기서 말하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란 단

    순한 ‘이윤의 사회 환원’이 아니라 ‘기업 활동 전 과정에서의 자기책임성(self-responsibility)’을 뜻하는 것으로 정

    의한다.1)

    미국 경영학자 A. Carroll 교수는 1979년에 이미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을 크게 경제적 책임, 법률적 책

    임, 도의적 책임, 재량적 책임으로 나누고 있다. 이에 따르면 CSR은 기업이 ‘정도경영’과 ‘환경경영’을 기본으로 ‘사

    회공헌’ 활동을 활발히 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아시아경제, 2008.6.16). 이런 책임을 외면하면 오늘날 기업은 생

    사의 갈림길에 놓일 수도 있다. 일례로 ‘정도 경영’을 외면하다가 망한 기업으로 일본 최대 유제품업체 유키지루시

    유업이 있다. 이 업체는 2000년 오염된 우유를 생산, 1만4789명의 식중독환자가 발생하는 사고를 저질렀다.

    2002년에는 ‘수입쇠고기 국산 위장 사건’으로 일본 열도를 떠들썩하게 했다. 소비자들은 사고 그 자체보다 경영진

    들의 끊임없는 책임 회피, 미온적인 대응에 크게 분노했고 결국 이 기업은 문을 닫았다.

    (주)알리안츠생명(Allianz Life Korea)은 세계 각국에 거점을 두고 활동하는 독일계 초국적기업이다. IMF 사

    태 이후 1999년에 한국에도 진출했다. 처음엔 힘들었지만 2004년부터 2007년까지 수천억 원의 순이익을 내고도

    법인세 한 푼 내지 않았다. 또한 54억 원 규모의 연수원공사를 하면서 자금 출처나 비용 처리 등에서 의혹이 많이

    일었다. 그런데 2008년 들어서는 단체협약 갱신 및 성과급제를 둘러싸고 노사 간에 갈등이 일어나 2008년 7월 중

    순 현재, 노동자 파업 180일에 이르고 있다. 일방적 성과급제 도입, 92명의 지점장 해고 사태, 노조 위원장 구속,

    신뢰와 성실에 기초한 단체교섭 회피 등으로 파업은 장기화하고 있다. 보험사로서는 매우 이례적이다.

    당초 알리안츠의 한국 진출은 선진 경영의 전수라는 사회적 기대를 낳게 했다. 일찍부터 독일 기업은 노사공동결

    정(Mitbestimmung) 제도와 노사자치주의(Tarifautonomie)를 통한 갈등의 합리적 해결로 범세계적 명성을 얻

    었다. 그 기초엔 기업이 노동자를 보는 시각이 단순한 ‘종업원’이 아니라 ‘공동경영자, 동반자’라는 시각이 깔려 있

    다. 그러나 현실은 오히려 한국 기업이 70년대에 보여준 과오를 반복하는 듯한 착각을 하게 한다.

    우리는 다국적기업 알리안츠생명 사례를 통해 ‘윤리 경영’을 선포한 기업이 스스로 ‘비윤리 경영’에 얼마나 쉽게

    빠질 수 있는지 보게 된다. 언론이나 시민 등을 상대로 한 회사 PR(Public Relations)에서는 ‘사회적 책임’을 강

    조하지만 실제 이윤 추구 과정에서는 ‘사회적 무책임’이 팽배하다. 이것은 비단 위 사례에서만 있는 일은 아니다.

    전 세계 대부분의 기업들에서 보편적이라는 사실이 더욱 마음을 무겁게 한다.

    ‘윤리 경영’을 한다고 해서 자본주의 기업 활동의 문제가 다 해소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최소한 위 사례 알리

    안츠생명의 경우 스스로 빠져 있는 ‘비윤리 경영의 덫’에서 탈출해야 한다. 그 탈출의 출발점은 스스로 잘못된 점을

    솔직히 인정(recognition)하고 그 위에서 개방적 소통(communication)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 다음엔 ‘정도(正

    道) 경영’의 관점에서 변화(change)를 시작해야 한다. ‘위기’는 위험과 동시에 기회를 뜻한다. 그러나 그 기회는

    참된 ‘변화’의 의지와 역량이 있는 이에게만 온다. 당장 급한 변화는 다음 세 가지다.

    첫째, 상처 받은 직원들과 조합원들의 마음을 치유해야 한다. 그들을 인정하고 대화를 시작하라. 그 위에서 성과

    급에 대해 다시 토론을 하라. 새로운 경영 문화를 활성화하기 위한 성과급조차, 노동법의 준수라는 기본 위에서,

    내용적 정당성, 보상적 정당성과 더불어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둘째, 상처 받은 고객의 마음을 치유하라. 그들에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설명하라.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어떻

    게 고칠 것인지 방향을 제시하라. 앞으로는 고객이 신탁한 자원을 관리함에 있어서도 정보 공유와 소통을 통한 합

    리적 의사결정을 할 것임을 약속하라.

    셋째, 내부 고객인 직원들과 외부 고객인 소비자들에게 상처를 준 책임자는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라. “약속은 약

    속”임과 마찬가지로 “책임은 책임”이다. 그래야 내외부 모두로부터 신뢰가 샘솟는다. 특히 조직 구성원들이 평생 학

    습을 하고 조직 자체가 학습 조직으로 발전해야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되는 이 시점에, 그 학습의 터전인 ‘연

    1) 대개의 논의들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을 사회적 기대와 압력에 대한 기업의 반응(responsiveness) 정도로 정의하거나 적극적 경영

    전략의 일환으로 취급하기도 한다. 이 글에서는 진정한 책임이란 보다 심층적으로 ‘자기-책임성’에서 출발한다고 보기에, CSR도 ‘기업 활

    동의 전 과정에서의 자기책임성’으로 정의한다.

  • - 19 -

    수원 공사’에 탈법적인 비리가 개입된 것은 “개인의 이익과 조직의 이익”을 조화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의 이익”을

    희생시켜 “개인적 이익”만 추구하는 부도덕한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설사 이러한 작은 변화를 통해 당장의 위기를 기회를 되돌린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기

    업의 사회적 책임’ 문제와 관련, 여전히 본질적 문제는 남아 있다. 실제로,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

    업이 그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은 사회적 신뢰를 확보함으로써 더 나은 경제적 성과를 거둘 수 있을 뿐만 아니

    라, 결국 자본주의 시스템 그 자체를 존속시키는 데 오히려 도움이 됨에도 대부분 기업은 그마저 방기한다. 이것이

    현실이다. 설사 개별 기업은 망하더라도 그래도 세계시장에서 경쟁이 계속되는 한, 시스템은 망하지 않는다. 인간

    노동력에 대해 마치 일회용 종이컵 취급을 하더라도, 생명 살림의 토대인 자연 생태계에 대재앙을 초래하는 사건들

    이 연이어 터져도, 또 전 국토에 4차선 이상 도로와 고층아파트 건설 공사로 마을 공동체를 파괴하더라도, 돈벌이

    시스템에는 큰 지장이 없다. 오히려 그렇게 비윤리적 경영을 해서 더욱 더 큰 이윤을 올린다. 심지어는 ‘생명(삶)’

    을 지킨다는 생명보험사에서 반생명적 노사관계나 경영 활동을 행하면 앞뒤가 맞지 않다. 결국, 비용은 사회화하면

    서도 이윤은 사유화하는 것은 ‘윤리 경영’이 아니다. 이것의 궁극적 결말은 온 세상의 황폐화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세상의 종말과 황폐화가 전면적으로 우리 코앞에 오지 않았다고 해서, 당장 내 앞에 닥친 문제가 아

    니라고 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감각하고 냉담하게 아웃사이더로 머물러 있으며, 심지어 스스로 죽음을 초래하

    는 ‘집단적 자살 체제’에 가속 페달까지 밟는다.

    그렇다면 바로 여기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한편으로 기업에 대한 사회적 압력의

    일정한 성취물이기도 하지만, 다른 편으로는 결국 상대적으로 여유 있는 기업들이 자본주의 돈벌이 시스템의 정당

    성을 이데올로기적으로 강화하는 데 필요한 매개 변수(parameter)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닐까? 사회적 책임이라는

    그럴듯한 이름 뒤에 ‘사회적 무책임’이 팽배한 작금의 현실이야말로 가장 무책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살아 있는

    사람과 자연의 생명 공동체 모두에 해악과 위협을 가하는 자본주의 무한 축적 시스템이 가진 ‘본질적 무책임성’은

    그대로 둔 채, 또한 참된 ‘자기책임성’이라는 진정성 없이 겉으로만 번지르르하고 그래서 지키지도 못할 몇몇 개별

    적인 ‘기업의 사회적 책임’만 그럴 듯하게 선전하는 것은 ‘자기기만’이 아닐까? 어느 생명보험사가 “Love your

    life."라 말하지만 실제로 내․외부 고객들의 삶을 진정 사랑하는지는 잘 모른다. 이제 이런 자기기만은 타파되어야

    한다. 세계적 다국적기업 알리안츠그룹이 이러한 자기기만의 덫으로부터 탈출하여 ‘지속적 성장(continuous

    growth)’이 아닌 ‘지속가능한 성장(sustainable growth)’으로 모범을 보일 수만 있다면 더욱 많은 사회적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6. 광우병 사태와 생명에 대한 새로운 감수성

    개방화, 탈규제화, 민영화, 유연화를 핵심으로 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그 일환으로 추진된 ‘한미 FTA’, 그 끝

    자락엔 미국산 쇠고기 수입 개방이 자리 잡고 있다. 2008년 4월 18일, 전면 개방 합의가 있었다. 그리고 광우병에

    대한 불안이 전 국민적 저항을 초래했다. 5월 들어 연일 계속되는 학생, 시민, 직장인에 의한 청계천 촛불 시위는

    상징적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업적 중 하나로 거론되는 청계천이 아이러니하게도 불신과 저항의 근거지로 이용되고

    있다.

    문제의 광우병의 핵심은 초식 동물인 소가 억지로 육식을 한 것이다. 그것은 더 적은 비용으로 더 많은 이윤을

    추구하는 사람의 탐욕 때문이다. 따라서 광우병의 본질은 사람이 돈에 미친 것, 즉 ‘광인병’이다. 광인병이 없다면

    광우병은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광우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광인병을 고쳐야 한다. 그런데도 광인병의 내용과 원

    인 따위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는다. 광우병조차도 단순히 사람들의 두려움만 잠재우면 된다고 하며 쉬쉬하는 편

    이다. 정말로 아프고 고통스런 부분은 직접 말하지 않고(사태가 커지는 것, 또는 사태가 근본을 건드리는 것에 대

    한 두려움 때문에) 이렇게 사태의 본질과 핵심을 건드리지 않고 겉으로 드러난 부분만 갖고 우왕좌왕하는 것은 오

    히려 사태를 악화할 뿐이다. 그런 식으로 돌아가는 사회를 ‘중독 사회’라 한다.

    한국에도 유명한 미국의 ‘배스킨 라빈스’라는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다. 체인점이다. 원래 배스킨 라빈스는 버트

    배스킨과 어니 라빈스라는 두 동업자의 이름이다. 축산업과 유가공업을 겸하는 큰 회사다. 라빈스 회장이 어느 날

  • - 20 -

    그 아들인 존 라빈스를 불러 자기 사업을 물려주겠노라 했다. 엄청난 재산을 물려주겠다는 아버지에게 아들은 뜻

    밖에도 ‘사양’을 한다. 그 이유는 건강한 사업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를 묻는 아버지에게 아들은 축산업과

    유가공업의 과정이 가진 문제와 모순을 하나씩 설명했다. 예컨대, 수천 마리의 소를 대량 사육하는 과정은 수만은

    소들을 고문하는 것이며, 결코 먹을 수 없는 사료나 항생제, 영양제, 성장촉진제, 살충제 따위를 억지로 주입시키

    는 것은 사람이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게다가 아프리카 등지에서는 하루에만도 수천 명이 굶어죽는데 엄청난

    양의 옥수수나 밀이 잘 사는 나라 사람들의 육식을 위해 축산 사료로 소비되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쇠고기 1킬

    로그램을 위해 곡물 14킬로그램이 들어간다면 이것은 일부의 육식을 위해 다수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이나 다름없

    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한 존 라빈스는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해서 배부른 사장이 되기보다는 ‘육식이 세상을 망친

    다’(미국인을 위한 식사)라는 책을 써서 온 세상을 놀라게 했다.

    존 라빈스의 메시지에 따르면 대량으로 사육되는 동물이나 식물은 건강한 음식이 되지 못한다. 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