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ātañjala yogaśāstra에 있어서 소위 억제라는 요가 · 2012-07-06 · pātañja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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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ātañjala Yogaśāstra에 있어서 소위 억제라는 요가*1 필립 앙드레 마아스(PHILIP ANDRÉ MAAS) (번역: 이영진)**오베르하머 1 그의 뛰어나고 선구적인 연구 요가 명상의 구조 (Strukturen yogischer Meditation) 에서 Pātañjala Yogaśāstra (PYŚ) 가 네 종류 의 요가 삼매들을 가르치며, 이러한 삼매들이 그들의 구조에 관해서 뿐만 이 아니라, 즉 삼매에서 의식의 내용(content)을 다루는데에서(혹은 내용이 발전하는데 있어서) 그 각각의 대상(object)들에 관해서도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의심의 여지 없이 보여주었다. 2 이 논문은 PYŚ의 첫번째 품인 * Eli Franco (ed.) in collaboration with Dagmar Eigner, YogicPerception,Meditation,andAlteredStatesofConsciousness.Vienna:VerlagderÖster reichischenAkademiederWissenschaften,2009.p.263–282. ** 이영진(철학박사/ 금강대학교 HK연구교수) [email protected] 2008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동국대, 중앙승가대, 금강대 등에서 강의하였다. 함부르크 대학에서 Post-Doctor 과정을 이수하였고 현재 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의 HK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논문은 空性記述두 형태」,「초기불교 텍스트에서 나타난 상수멸(saññāvedayitanirodha)의 불일치와 모순」, 「小空經(mdo chen po stong pa nyid ces bya ba ; Cūlasuññāttasutta)티벳본과 팔리본 번역등이 있다. 1 Cf. Alper 1980에 의한 Oberhammer의 저서에 관한 리뷰. 2 Oberhammer 1977: 134230. 오베르하머의 연구가 출판된 이후로, PYŚ가 오직 두 종류의 삼매를 다루고 있다고 해석한 후라우발너의 연구는 명백하게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었다 (Frauwallner 1953:427443) Oberhammer 1977을 알고 있지 못했던 브롱코스트(Bronkhorst 1933: 6875)YS에서 각각 saṃprajñāta samādhiasaṃprajñāta (samādhi)로 이끄는 두 종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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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ātañjala Yogaśāstra에 있어서 소위 억제라는 요가*1

    필립 앙드레 마아스(PHILIP ANDRÉ MAAS) (번역: 이영진)**1

    오베르하머1는 그의 뛰어나고 선구적인 연구 “요가 명상의 구조 (Strukturen yogischer Meditation) 에서 Pātañjala Yogaśāstra (PYŚ)가 네 종류의 요가 삼매들을 가르치며 , 이러한 삼매들이 그들의 구조에 관해서 뿐만이 아니라, 즉 삼매에서 의식의 내용(content)을 다루는데에서(혹은 내용이 발전하는데 있어서) 그 각각의 대상(object)들에 관해서도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의심의 여지 없이 보여주었다 .2 이 논문은 PYŚ의 첫번째 품인

    * Eli Franco (ed.) in collaboration with Dagmar Eigner, YogicPerception,Meditation,andAlteredStatesofConsciousness.Vienna:VerlagderÖsterreichischenAkademiederWissenschaften,2009.p.263–282.

    ** 이영진(철학박사/ 금강대학교 HK연구교수) [email protected] 2008년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동국대,

    중앙승가대, 금강대 등에서 강의하였다. 함부르크 대학에서 Post-Doctor 과정을 이수하였고 현재 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의 HK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논문은 「空性記述의 두 형태」,「초기불교 텍스트에서 나타난 상수멸(saññāvedayitanirodha)의 불일치와 모순」, 「小空經(mdo chen po stong pa nyid ces bya ba ; Cūlasuññāttasutta)티벳본과 팔리본 번역」 등이 있다.

    1 Cf. Alper 1980에 의한 Oberhammer의 저서에 관한 리뷰.2 Oberhammer 1977: 134−230. 오베르하머의 연구가 출판된 이후로, PYŚ가 오직

    두 종류의 삼매를 다루고 있다고 해석한 후라우발너의 연구는 명백하게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었다 (Frauwallner 1953:427−443) Oberhammer 1977을 알고 있지 못했던 브롱코스트(Bronkhorst 1933: 68−75)는 YS에서 각각 saṃprajñāta samādhi와 asaṃprajñāta (samādhi)로 이끄는 두 종류의

  • 134 요가학 연구 제5호

    Samādhipāda(삼매품)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주제인 처음 두 삼매에 관한 오베르하머의 사고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지난 30년동안의 상당한 기술적 진보가 있음에 따라 , 이러한 삼매들에 대해 새롭게 살펴보는 것이 가능해졌다(그리고 이는 반드시 필요하다 .)

    첫째로, 요가의 문헌학(philology)에서 상당한 성취가 있었다. 오베르하머는 첫번째 편집본인 Pātañjalayogaśāstravivarṇa (Madras 1952)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 Vivarṇa와 더불어 출판된 이러한 기본 문헌(즉 YBh가 함께 있는 YS)의 버전은 편집본의 제목이 시사할 수도 있듯이 비판적으로 편집된 문헌이다 . 이 첫번째 편집본의 편집자들은 까쉬나타 샤스트리 아가쉐(Kāśīnātha Śāstrī Āgāśe)가 1904년 아난다쉬라마 산스크리트 시리즈 (Ānandāśrama Sanskrit Series)의 47번 째로 출판한 편집본으로부터 이를 단순히 복사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3 때때로 Vivarṇa의 편집자들은 Vivarṇa에 있는 기본문헌에 대한 재구성으로부터 이끌어낸 읽기(reading)들을 가지고 그들의 본보기인 이러한 문헌을 변형시켰다 .4

    그 동안 우리는 Vivarṇa의 첫번째 품(Yvi)에 관한 새로운 비판적 편집본(critical edition) 뿐만이 아니라, 활자화된 21편집본들과 25사본들에 기반한 (Maas 2006) YBh가 함께 있는 YS의 비판적 편집본 또한 구할 수 없었다.5 사본의 콜로폰(colophon)들과 이차 전거들에 따르자면 , 이 결합된 양자의 문헌들(YS와 YBh)은 PātañjalaYogaśāstra라는 공통적인 제목을 지니고 있으며, 나의 편집본의 서문에서 주장하듯이, 파탄잘리(Patañjali) 라고 하는

    삼매를 구분한다. 3 Cf. Maas 2006: xiii–xxv.4 Cf. Maas 2006: xiix.5 물론 비판적으로 편집된 문헌들은 전달(transmission)의 과정에서 손상된

    구절에 대한 바른 이해를 수월하게 한다. PYŚ Ⅰ.29의 비판적 편집본은 개선된 문헌에 대한 두가지 놀라운 예를 제공한다. I.29,3에서 일반적인 정본은 올바른 svapuruṣadarśanam 대신 손상된 svarūpadarśanam라고 읽는다. 그리고 다음 줄에서는 올바른 madīya puruṣah 대신 yaḥ puruṣah라고 (혹은 단순히 puruṣah)라고 읽는다. 이러한 이문(異文: variant)들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논의에 관해서 cf. Maas 2006: lxviii f., 104 f., and 168 f.

  • Pātañjala Yogaśāstra에 있어서 소위 억제라는 요가 135

    공통된 아마도 한 사람의 ‘저자’를 가지고 있다.6 이 저자는 다양한 자료들로부터 이 수트라(Sūtra)들을 모아 설명을 부가했을 것이며, 이것이 후대에 YBh로 여겨졌다.7 이 문헌의 연대는 아직까지 불확실하지만 325에서 425 A.D에 이르는 기간이 가장 그럴듯하다 .8

    후라우발너(1953)를 좇아 오베르하머는 PYŚ에서 논의된 첫 두 종류의 요가를 “억제의 요가 (yoga of suppression)”(Unterdrückungsyoga)라고 부른다. 그렇지만 이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는 연상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은 명칭이다 . 후뢰흐리히(Fröhlich)의 심리학 사전(WörterbuchderPsychologie)에 따르면, “Unterdrückung”은 이중의 의미를 지닌다. 심리학에서 이 단어는 “반응의 완전한 삭제 (the complete deletion of a reaction) ; [의지로] 제거할 수있는 ‘억압(inhibition)’ (Hemmung)과는 상반됨”을 지칭한다. 반대로 정신분석에서는 ‘억제(supression)’는 “행동을 위한 특정한 충동(Handlungsimpulse)에 대한 자발적인 억압 ; 억눌림(repression: Verdrägung)과는 상반됨”을 의미한다.9 이 논문의 과정에서 둘중의 어떠한 의미도 요가 심리학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명백히 하는 것이 좋다 . 후라우발너는 “억제의 요가”라는 명칭을 사용함에 있어서 마음속에 심리학적인 혹은 정신분석적인 의미의 함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 그의 관점에서 ‘억제(supression)’의 사용은 파탄잘리가 그의 문헌 첫 번째 품에서 가르치는 삼매의 종류에 의해서 옹호될 수 있다.10 이러한 삼매의 종류는 YS

    6 Bronkhorst 1985: 191–203는 다른 이유들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결론에 이른다.7 파탄잘리의 “원천이 되는 문헌들(source books)”을 밝히는 것은 고전 이전의

    요가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물론 불가능하다. 파탄잘리에게 불교의 용어가 상당히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 관해서는 La Valée Poussin 1936–1937를 보시오.

    8 Maas 2006: xii–xix.9 Fröhlich 1993: 413, col. 2, s.v.: “Unterdrückung (억제). [1] Bezeichnung für die

    vollständige Löschung einer Reaktion; im Unterschied zur Hemmung, die durch spontane Erholung u.ä. wieder aufgehoben werdenkann....[2]Allgemeine psycho-analytische Bezeichnung für das willkürliche Unterdrücken bestimmter Handlungs-implusebzw.Handlungsweisen; im Unterschied zur Verdrängung, die durch unbewußt wirksam Abwehrmechanismen erfolgen soll.”

  • 136 요가학 연구 제5호

    Ⅰ.2 yogaścittavṛttinirodhaḥ“요가는 정신 능력의 진행을 종료하는 것이다(yoga is the shutdown of the mental capacity’s processes.)”로 시작한다. 후라우발너에 따르면 이러한 종류의 요가의 목적은 “모든 정신적 행위들을 억제하는 것과 인지(cognition)를 제거하는 것”이다.11 이러한 진술중 두번째 부분은 이것을 이끌어낸 문헌과는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만약 인지의 제거가 전체로서 요가의 목적이라고 한다면 , 이것은 다만 정신 과정들의 제거 뿐만이 아니라 자아의 제거를 의미하게 될 것이고 , 이것은 필연적으로 순수 의식(pure consciousness)이다. 역설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요가의 목적은 의식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내용을 제거하는 것이다 .12 게다가 ‘억압’이라는 용어는 심리학 그리고 정신분석에서 전문용어로 사용되기 때문에 사용을 피하는 것이 좋다. 나는 이러한 용어를 대치하고자 “무신론적인 요가 삼매 (non-theistic yogic concentration)”라는 표현을 제안하고자 하며 , 이러한 표현은 유신론적인 변형을 공정히 다룰 수 있을 것이며 PYŚ의 뒷부분에서 논의하고 있는 samāpatti와 saṃyama 또한 충분히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13

    나는 “무신론적인 요가 집중”을 논의하기에 앞서서 간략하게 상키야 요가(Sāṅkhya Yoga)의 형이상학적 그리고 존재론적인 기반에 대하여 검토하고자 한다 . 왜냐하면 이들은 이후에 논의될 의식의 요가적 상태와 명상의 형태들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14

    고전 상키야 요가는 존재론적으로 이원론의 철학으로 알려진다. 이것은 세상이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실체들(entities)로 나누어진다는

    10 Oberhammer 1977은 PYŚ의 첫번째 품이 단일한 종류가 아니라 세 서로 다른 타입을 다루고 있다는 점을 설득력있게 보여준다.

    11 Frauwallner (1953: 438): “... sucht man durch den Yoga jede geistige Tätigkeit zu unterdrücken und damit auch jede Erkenntnis auszuschalten.”

    12 Cf. 곧바로 이어지는 “상키야 요가(Sāṅkhya Yoga)의 형이상학적 그리고 존재론적인 기반”에 대한 요약.

    13 이를 위해서는 Oberhammer 1977: 177–209와 209–230을 보시오.14 Cf. Schmithausen 1968: 331.

  • Pātañjala Yogaśāstra에 있어서 소위 억제라는 요가 137

    것을 지지한다. 한편에는 무수한 수의 초월적 “자아들(selves)” 혹은 “영혼들(spirits)”(puruṣa)이 존재한다. 이러한 자아들은 어떠한 내용도 없는 순수의식이다. 그들은 -단순히 무한한 수 만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에 대해서도- 무한하며, 활동을 하지 않으며, 변화하지 않는 것이다. 세계는 이러한 자아이외에도 의식이 없으며 활동을 하고 변화하는 최초의 물질(prakṛti)의 산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 이러한 물질의 산물들은 외부세계의 모든 사물들을 구성할 뿐만이 아니라 , 가장 빈번히 citta라고 불리는 정신 능력과 더불어 지각 능력(buddhīndriya)들을 형성한다.15 이러한 가정들은 인식론적인 쟁점들에 대한 고전 상키야 요가의 견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데, 이는 정신 과정들의 경우 두 종류의 실체들이 -마치 “상호작용”하듯이- 존재한다는 점에 기반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신 능력(citta)은 정신 과정의 내용물을 자아에게 공급하며, 자아는 그것을 “봄(seeing)”으로써 정신적 내용물에게 의식을 공급한다 . 물론 일상적인 경험은 이러한 분석을 따르지 않는다 . 우리는 내용물 없이 의식을 경험할 수 없으며 , 의식없이는 내용물을 경험할 수 없다. 그렇지만 상키야 요가에 따르자면, 일상 경험에서의 정신과정을 동일한 속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분석하는 것은 그릇된 분석이

    다 . 이러한 것은 무지(avidyā)에 의해 초래되며, 이것은 자아로 하여금 그 자신의 존재론적인 위상에 대해 미혹하도록 한다 . 자아는 자석에 의해 이끌려지는 철과 같이 정신 능력에 의해 매혹된다 . 이러한 “매혹”은 자아와 citta의 상호간의 양립성 혹은 적합성(yogyatā)때문에 가능하다. 정신능력, 이것은 최초물질의 세 구성요소 중의 하나인 sattva, 빛나는 물질(luminous substance)로 주로 구성된다, 는 종종 “보여지는 것” (dṛṣya)으로 불려진다. 이것은 그 내용물을 자아에게 보이는데 , 자아는 종종 “보는 자”로 명명된다. 그들의 양립성은 그들의 속성에 의해 결정되는 데, 이것은 상키야 요가의 관점에서는 문제삼을 수 없는 것이다 .

    정신적 능력의 매혹아래 , 자아는 자신을 이와 동일시 한다. 자아는 경험의 내용물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고 그릇되게 확신된다. 자아는 행복을

    15 manas 혹은 buddhi라는 용어는 종종 명백한 의미의 차이 없이 사용된다. Cf. Frauwallner 1953: 411.

  • 138 요가학 연구 제5호

    느끼고 고통을 경험하지만 , 다른 종류의 정신적 사태들과 더불어 이러한 것들은 오직 정신 능력안에서만 일어난 것이다 . 실제로 자아는 초월적 존재론적 위상으로 인하여 그 자신 즉 순수하고 내용물이 없으며 변화하지

    않는 의식이외의 어떠한 것도 될 수 없다 . 해탈론적 측면에서 상키야 요가의 목적은 자아가 스스로와 그 자신의

    정신능력을 그릇되게 동일시하는 것을 완전히 종식시키는 것으로 , 이것은 윤회와 그것의 본질적인 고통으로부터 최종적인 해탈에 이르는 것이다. 그 방법은 마지막까지 명상적 집중에서 자아와 물질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를

    인식하는 것으로 , 이때문에 이것은 “차이에 관한 지혜”(vivekakhyāti)라고 불린다 . 이러한 지혜는 의식의 마지막 내용이고 자아가 정신 능력에 마지막으로 관여하는 것이다. citta가 더이상 이러한 “차이에 관한 지혜”에 흥미를 가지지 않게 될때, 심지어 이러한 내용조차 존재하기를 멈추고, 자아의 차단되지 않은(uneclipsed) 자아—인식에 자리를 내어준다. 해탈한 요가수행자가 살아있는 한 정신 능력은 지속하여 존재하는데, 이는 정신 능력이 저장했던 정신적 인상(saṃskāra)들 때문이다. 마침내 요가수행자의 육체적인 죽음이후에, 정신 능력은 물질(prakṛti)속으로 용해된다. 반면, 자아는 윤회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홀로 존재를 지속한다(kaivalya).

    파탄잘리는 바로 그의 저작 서두에서(PYŚ Ⅰ.1,2 f. )에서 요가를 매우 일반적인 방식으로 정의한다:

    yogaḥ samādhiḥ; sa ca sārvabhaumaś cittasya dharmaḥ. kṣiptaṃ mūḍhaṃ

    vikṣiptam ekāgraṃ niruddham iti cittabhūmayaḥ. tatra vikṣipte cetasi vikṣepopasarjanībhūtaḥ samādhir na yogapak-ṣe vartate. yas tv ekāgre cetasi sadbhūtam arthaṃ dyotayati, kṣiṇoti kleśān, karmabandhanāni śl-athayati, nirodham āmukhīkaroti, sa saṃprajñāto yoga ity ākhyāyate. sarvavṛttinirodhe tv asaṃ-prajñātaḥ. tasya lakṣaṇābhidhitsayedaṃ sūtraṃ pravavṛte— yogaś cittavṛttinirodhaḥ (YS Ⅰ .2)

    요가는 앎 / 삼매이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상태들에서 (직역: 단계들)에서 정신 능력의 속성이다 . 고정된 , 둔한 , 산란된 , 한점에 집중된 그리고 종료된 [이러한 것들]이 정신 능력의 상태들이다 . 이러한 것들 중에서 산란된[을 포함한 앞의 첫 세 상태들에서] 존재하는 앎 / 삼매는 ,

  • Pātañjala Yogaśāstra에 있어서 소위 억제라는 요가 139

    그들이 (질병 , 무기력 등16) 마음을 산란하게 하는 요소들의 영향아래 있기 때문에 , 요가[를 이루는 목록]의 부분에 속하지 않는다 . 반면에(tu),[대상을] 인식하는 (saṃprajñāta)[삼매]는 요가라고 불리는데 , 이것은 한점에 집중된 정신 능력에서 [일어나고], 정말로 진실한 대상을 나타나게 하며 ,17 번뇌들을 파괴하고, 업(karman)의 속박들을 헐겁게 한다. [그리고 , 정신과정의] 종료를 실현한다 . 그렇지만 , 모든 정신 과장들이 종료할 때 [삼매는 어떠한 대상도] 인식하지 않는다 . 이러한 [대상을 인식하지 않는 삼매]를 정의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 [이하의] 수트라가(YS Ⅰ .2) 쓰여졌다: 요가는 정신 능력의 진행을 종료하는 것이다 . 파탄잘리를 “요가”라는 용어를 몇개의 관련된 의미들속에서 사용한다 .

    가장 넓은 의미에서 “요가”는 일반적인 정신 과정의 속성으로서의 앎을 지칭한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서로 다른 종류의 앎이 있으며, 이것은 다섯 정신 능력의 상태들을 수식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해 세 상태들은 요가적이지 않으며 , 이것이 파탄잘리가 그의 설명으로부터 이들을 제외한 이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츨러가 Vivaraṇa에 의해서 제공된 정보의 배경에서 납득이 가게 보여 주듯이, 요가로 명확하게 정의된 이러한 상태 들 뿐만 아니라 첫 세 상태들의 배열 또한 요가의 “마지막 목적에 의해 매우 일관되게 결정된다 .” 즉 일반적인 정신 과정들을 멈추는 것에 의해 결정된다 . 18 “고정된”으로 불리는 첫 번째 상태는 정신 능력과 그 대상 사이의 강력하고 의도가 없는 결합으로 특징지워진다 .19 완전하게 그 대상에 달라붙어

    16 YS I.30에는 산란한 요소들의 전체 그룹을 나열한다. 17 나는 sadbhūtam artham이라는 표현이 자아(puruṣa)를 지칭하다고 받아들였다. 18 Wezler 1983: 23. 베츨러는 Oberhammer 1977을 알지 못했고 후라우발너의

    nirodha- 와 aṣṭāṅgayoga의 구분을 버리지 못했다.19 YVi 150,2 f.: kṣiptamaniṣṭaviṣayāsañjanenastimitam.“집착된 [정신 능력]은

    의식적으로 선택하지 않은 대상에 의해 마비된다.” Cf. Wezler 1983: 20. 오베하머(1977: 136, n. 6)는 “... das durch die Färbung durch nicht angestrebte Gegenstände gebannte [psychische Organ].” 이라고 번역한다. 나는 °sañjanena를 °rañjanena로 수정해야 하는 어떠한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게다가 °viṣaya° 의 문법적인 수는 단수이다.; cf. 이 구절에 대한 이후의 번역.

  • 140 요가학 연구 제5호

    있는 정신능력은 다른 대상을 인식하게 될 수 없다 . 하나의 대상에 대한 무의도적인 고정이 정신적 훈련의 가능성을 배제한다는 것은 매우 명백하

    며, 이것이 파탄잘리가 이 항목을 그의 목록의 가장 첫머리에 위치시킨 이유이다 .

    두 번째 자리는 “둔한” 정신 능력이 차지하고 있는 데 , 이것은 앞서와 동일하게 하나의 대상에 의도가 없이 결합된 것이다. 그렇지만 이 경우 대상과의 결합이 매우 약하다 . 비록 YVi의 설명이 상세하지는 않지만 , 둔한 정신 능력을 그 대상만에 대한 기본적이고 제한된 앎으로 간주하는 것은

    무난할 듯 하다 .20 이 정신 능력은 대상을 뚜렷이 지각할 수 없다 . 이러한 약함은 왜 요가 심리학적 관점에서 이러한 둔한 상태가 “고정된”으로 불리는 상태보다 우월한가에 관한 이유가 된다 . 확고함의 결여는 다른 대상들에 대한 인식의 조건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이고 , 이것은 산란된으로 불리는 다음의 좀더 높은단계로 정신 능력이 변이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

    이러한 상태에 대한 YVi의 설명 또한 매우 부족하다 . 여기서는 단순히 vikṣiptam을 nānākṣiptam “ [대상들]에 고정되어 있는”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그 의미를 표현한다. 베츨러는 정신 능력이 몇몇 대상들에 동시에 묶여있다고 의미를 취한다.21 그렇지만 나는 이 해석이 올바른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산란된 마음은 오히려 짧은 시간의 연속에서 몇몇 대상들에 묶여 있다 . 이것은 우리의 일상 의식과 일치하는데, 이것은 일반적으로 하나의 대상에 대한 영속적인 집중을 결여한다 . 의식의 내용은 감각 능력들을 통해 마음에 들어오는 서로 다른 감각자료들에 따라 변화한다 . 정신 능력은 다소 짧은 시간동안 하나의 대상에 달라붙는데 , 이전의 대상에 대해 흥미를 잃어버렸을 때 다음 대상에 달라붙게 된다. 생각컨데 마음이 그 산란된 상태에서 몇몇 대상들과 연결되기 때문에 , 이것을 일정한 거리 혹은 —YVi의 저자가 — 그 대상에 대한 무관심(impartiality)을 계발한다. 이

    20 유일한 설명은 mūḍhaṃ nirvivekam (YVi 150,3)이다.21 Wezler 1983: 22: “명백하게 citta는 ... 오직 하나의 대상만을 [가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한번에 몇몇 [대상들을 가진다].”

  • Pātañjala Yogaśāstra에 있어서 소위 억제라는 요가 141

    러한 무관심은 정신 능력에게 의도적으로 원하는 대상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하고, 물론 이것은 자율적인 주체로서 작용하기 위한 전제조건 일뿐만이 아니라 정신적 훈련과 영적인 진보를 위한 길에 들어가기 위한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정신 능력과 의도적으로 선택된 대상 사이의 충분한 힘이라는 자발적인

    연결은, 이것은 때때로 산란된 상태에서 일어나기도 한다 , 명확히 구분된 요가 상태들 중의 첫번째인 한 점에 집중된(ekāgra)으로 불리는 상태의 속성이다 .

    파탄잘리가 엄밀한 의미의 요가에 대해 논의하는 것은 PYŚ Ⅰ.12로부터 시작한다 . 이 절은 정신 과정을 종료하는데 도움이 되는 두 가지 방법 즉 , 수습(abhyāsa)과 이욕(vairāgya)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들의 효력은 정신 능력을 양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는 강과의 비교를 통하여 명확해진다. 마음이라는 강은 수행과 이욕에 의해서 이끌어질때 행복(kalyāṇa)의 방향으로 흘러가거나 , 혹은 통제되지 않을 때 나쁜 상태(pāpa)로 흘러가기도 한다 . 이 문맥에서 이욕은 대상들로 향하는 흐름들을 방해한다고 말해지는데, 이를 다른 말로 하자면, 마음이 대상과 의도적이지 않게 결합하는 상태로 들어가는 것을 방지 하는 것이다 .

    파탄잘리는 PYŚ Ⅰ.15-16에서 이욕이라는 개념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다. 그는 이욕은 두 종류 즉 하열한 것과 뛰어난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가르

    친다 . 하열한 이욕은 지각에 의해 좌우되는 모든 것들을 지칭하며 , 예를 들면 여자 , 음식 , 음료수 그리고 권력의 집행이다 . 더욱이 이것은 천상의 대상들과 같은 권위적인 전통으로 부터 알려진 대상들에게도 또한 적용된

    다. 비록 이러한 대상들과 접촉하고 있을 때에도 이욕된 정신 능력은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한다. 정신 능력은 이러한 대상들의 결함 즉 명백히 그들의 무상한 속성에 놓여있는 점을 보기 때문에 그들을 피하고자 하지도 않

    고 소유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 대상을 다루는데 있어서 이러한 마음의 강력한 힘은 “[대상들을] 통제하는 의식”(vaśīkārasaṃjñā)라고 불린다 .22

    22 Cf. 218,8 ff.에 있는 YVi의 주석: vaśīkartuṃ śakyante’ syām avasthāyām ̣sarve gauṇāh ̣padārthāḥ, vaśīkartavyatvena saṃjñāyante. vaśīkṛtāni ca tasyāmavasthāyām

  • 142 요가학 연구 제5호

    이욕의 두 번째 종류는 “물질의 구성요소들로부터 이욕”(guṇavaitṛṣṇya)라고 불리며, 상키야 요가의 존재론에 있어서 물질(prakṛti)의 영역에 속하는 실체들[에 대한 이욕]을 지칭한다. 마음은 “자아에 대한 지각”을 수습하기 때문에(puruṣadarśnābhyāsāt)자아가 물질의 영역과 다르드는 점에 만족하며 , 고로 모든 잠재적인 대상들로부터 이욕하게 된다 . 파탄잘리에 따르면 최고의 이욕은 “오직 지혜의 밝음일 뿐”이다(jñānaprasādamātra).이것은 내용을 가지고 있지 않은 지혜이며, 다른 말로 하자면 자아의 제한되지 않은 자아—인식으로 , 윤회로부터 자아의 해탈이거나 혹은 해탈로 이끄는것이다. 이러한 자아 인식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요가 수행자는 의식의 내용에 대하여 모든 것을 포함하고 제한되지 않은 태도로써 이욕을 계발해야만

    한다. 심지어 해탈 가까이에서 정신 능력안에 존재하는 지각하기엔 너무나 미약한 내용조차도 마지막 단계에서는 포기해야만 한다 . 자아의 제한되지 않는 인식이 성취되었을 때 , 이러한 경험은 집착을 최종적으로 근절시킨다. 파탄잘리는 하나의 주목할 만한 구절에서 해탈한 요가수행자로 하여금 그의 이욕의 정도에 대해 기술하도록 한다 .

    “prāptaṃ prāpaṇīyam, kṣīṇāḥ kṣetavyāḥ kleśāḥ, chinnaḥ śliṣṭaparvā

    bhavasaṃkramaḥ, yasyāvicchedāj janitvā mriyate, mṛtvā ca jāyate”iti (PYŚ Ⅰ .16,5 f.)

    “나는 성취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성취했다 . 나는 소멸해야만 하는 모든 번뇌들을 소멸시켰다 . 나는 [단단하게] 연결된 매듭을 지니고 있는 존재의 연속을 잘라냈다 . 그것의 연속때문에 사람은 태어난 후에 죽고 , 죽은 이후에 [다시] 태어난다 .”

    indriyāṇi saṃjñāyante. vaśīkaraṇam vā saṃjñāyate’ syām iti. 이러한 [마음의] 상태에서는 물질의 구성 요소들로 이루어진(gauṇa) 모든

    사물들(padārtha)이 통제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사물들의] 통제할 수 있음이 알려진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의] 상태에서 감각 능력들이 통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혹은 이러한 [마음의 상태]에서 그들을 통제함을 알 수 있다.

  • Pātañjala Yogaśāstra에 있어서 소위 억제라는 요가 143

    앞서 언급했던 것 처럼, PYŚ Ⅰ.12는 정신 과정들의 종료에 도움이 되는 “이욕”이외에도 두 번째 관념 즉 “수습”(abhyāsa)을 언급한다. 정신 능력을 강에 빗대는 비유안에서 , “[자아와 물질사이의] 차이를 인식하는 수습”(vivekadarśanābhyāsa)은 행복으로 향하는 흐름을 여는 것으로 말해진다. 23

    파탄잘리는 바로 뒷 구절에서 좀 더 자세히 정의한다: “…수습은 견고를 위한 노력이다((YS Ⅰ.13).”24 그는 설명한다: “ 정신 능력의 작용들이 감소될 때 , 정신 능력이 조용히 흐르고 있는 상태가 견고이다 . … 수습은 이 [견고]를 일으키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수단에 따라 행하는것[을 의미한다].”25

    이러한 인용은 앞서 윤곽을 그린 삼매(samādhi)의 명확히 구분된 요가의 형태에 대한 분석을 확증해준다 . 엄밀한 의미의 요가에 속하기 위해서 삼매는 두 가지 요구를 충족해야만 한다: ⑴ 이것은 정신 능력과 하나의 대상 사이의 안정된 결합으로 구성되어야만 한다. ⑵ 대상은 반드시 의도적으로 선택된 것이어야만 한다. 두번째 요구는 집착이 초래한 무의도적인 결합에 의해 잠재적으로 종속되고 있는 모든 대상들로부터의 “이욕”에 상당한다 . 첫 번째 요구 즉 결합의 안정성은 수습의 목적이다 .

    PYŚ Ⅰ.17에서는 대상을 인식하고 있는 “무신론적인 요가 삼매 (non-theistic yogic concentrati-on)”의 구조를 간락하게 기술하고 있다.

    vitarkavicārānandāsmitārūpānugamāt saṃprajñātaḥ (YS Ⅰ .17).

    vitarkaś cittasyālambane sthūla ābhogaḥ. sūkṣmo vicāraḥ. ānado hlādaḥ.

    ekarūpātmikā saṃvid asmitā. tatra prathamaś catuṣṭayānugataḥ samādhiḥ savitarkaḥ. dvitīyo vitarkavikalaḥ savicāra-ḥ. tṛtīyo vicāravikalaḥ sānandaḥ.

    23 PYŚ Ⅰ.12,6 f: vivekadarśanābhyāsenakalyāṇasrota udghāṭyate.24 …sthitau yatno' bhyāsaḥ(YSⅠ.13)25 cittasyāvṛttikasya praśāntavāhitāsthitiḥ. […] tatsaṃpīpādayiṣayā sādhanānuṣṭhānam

    abhyāsaḥ(PYŚⅠ.13,2f.)

  • 144 요가학 연구 제5호

    caturthas tadvikalo 'smitāmātraḥ. sarva ete sālambanāḥ samā-dhayaḥ (PYŚ Ⅰ .17,2-6). 26

    [삼매는 하나의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다 . 왜냐하면 이것은 사유(thinking), 평가(evaluation)27, 환희, 그리고 개체성의 형태[?](rūpa)를 수반하기 때문이다(YS Ⅰ .17).

    “사유”는 정신 능력이 하나의 대상28에 대해 거칠게 조사하는 것이다 .29 미세한 조사가 “평가”이다 . “환희”는 즐거움이다 . 하나의

    26 불교의 정려(dhyāna) 명상과 유사한 구절들(이를 위해서는 Eimer 2006: 25를 보시오)이 Bronkhorst 1993: 71에 의해 언급되었다.; cf. 또한 Cousins 1992: 148와 151 ff.

    27 불교와 요가에서 삼매 단계로서의 vitarka (Pāli vitakka)와 vicāra의 의미는 Cousins 1992의 주제이다. 그는 “혹은 아비담마에서 vitarka는 … 어떤 것에 마음을 두고 이를 [명상적] 대상에 고정하는 능력이다. vicāra는 대상을 탐구하고 조사하는 능력이다”라고 결론을 내린다. 커진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Oberhammer (1977: 149 f.)는 Vasubandhu의 Abhidharmakośabhāṣya 와 이에 대한 Yaśomitra의 이에 대한 주석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는 “Vitarka und Vicāra ein von Sprache ... begleitetes diskursiv-begriffliches Erfassen des Gegenstandes ist. Der Unterschied der beiden scheint ... darin zu liegen, daß der Vitarka ein prüfendes Überlegen (ūhaḥ, paryeṣaṇam) ist, während der Vicārajene erwägende Einsicht am Ende ist, inder das prüfende Überlegen auf das Ergebnishin überstiegen wird, und die daher subtiler als jenes genannt werden kann”(150)”라고 말하며 논의를 결론짓는다.

    28 불교 문헌들에서 ālambana의 의미가 “object”라는 것은 pw (187, col.1, s.v.)에 기록되어 잇다. 그렇지만 이것(“또한 dharma 혹은 manas에 속하는 법” 153, col. 2, s.v.)은 MW에서는 적절하게 포함되어 있지 않는다. 하지만 BHSD (105, col. 2, s.v.)에서는 나타난다. “Objektstütze”라고 번역하는 Oberhammer (1977: 148)는 명백히 Woods’ (1914: 40)의 “대상을 지지하는(supporting [object])”을 따르고 있다. Ganganatha Jha (1934: 30)는 이미 올바른 번역을 알고 있었다.

    29 BHSD (99, col. 2, s.v)에 따르면, ābhoga는 “노력(effort)”, “애씀(endeavour)”을 의미하다. Ober- hammer (1977: 148)는 이것을 “맛보는(tasting : Verkosten)”으로 취하고 있다. ; Cousins (1992: 148) 은 아마도 PTSD (103, col. 2, s.v.)에 기록되어 있는 “ 관념화,개념, 사고(ideation, idea, thought)”라는 의미에 맞추어 “(마음을) 향하게 하는{directing (the mind)

  • Pātañjala Yogaśāstra에 있어서 소위 억제라는 요가 145

    형태를 가지고 있는 의식이 “개체성”이다 . 이러한 [네 종류]중에서 모든 [네 종류의 의식 내용]을 수반한 첫 번째 삼매는 사유를 동반한다 . 사유를 결여한 두 번째는 평가를 수반한다 . 평가를 결여한 세번째는 환희를 동반한다 . 이 [환희]를 결여한 네번째는 다만 개체성일 뿐이다 . 이러한 모든 삼매는 하나의 대상을 가진다 . 네 키워드는 의식이 있는 삼매를 향한 정신 능력의 발전 과정의 윤곽을

    그린다: 사유(vitark-a),평가(vicāra),환희(ānanda),개체성(asmitā).각각의 키워드는 삼매의 발전 과정에 있어서 각각의 단계의 특징이다 . 첫번째 단계에서는 모든 네가지 형태의 정신 작용들이 순서대로 존재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 능력과 의도적으로 고른 대상 곧 자아 사이의 결합을 확립하

    는 것은 이러한 “사유”이다 .30 “사유”는 상키야 요가 철학에 있어서 “자아”에 관한 가르침들을 파악하는 것이고 , 이것은 자아에 대한 인식을 수습하는 것(puruṣadarśanābhyāsa)의 기반을 제공해주는 것으로 명확하게 이해해야만 한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정신 능력과 대상 사이의 결합은 요가 철학을 다시 생각하는 것이 필요없을 정도로 고정되어 있다. 요가 수행자는 요가의 가르침에 종사하는 동안 획득한 통찰에 의지할 수 있으며 , 다시 그 주제에 관하여 탐구하는 것이 불필요하다. 아마도 이것이 거칠다고 보여지는 “사유”와 비교하여 “정제된” 조사로 불리게 된 이유일 것이다 . 환희로 특징지워지는 세번째 단계에서 정신 능력과 대상사이의 결합은 그 개념적

    이고 언어적인 영역을 박탈한다. 이전 단계에서 개념화의 대상이었던 자아는 이제 직접적이고 즐거운 경험의 내용으로 바뀐다 . 모호하지 않게 인용된 구절은 뒤에서 두 번째 삼매가 두 가지 측면 즉 환희라는 특징적 측면과

    개체성이라는 부수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다고 언급한다 . 마지막으로 언급

    towards}”이라고 보다 적절하게 번역하고 있다. 조금은 망설임을 가지고 나는 이를 “조사(investigation)” 라고 번역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이는 “대상을 개념적으로 취하기 위하여 대상에 마음을 향하는(directing the mind towards an object in order to grasp it con- ceptually”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좋을 듯하다.

    30 Cf. Oberhammer 1977: 156.

  • 146 요가학 연구 제5호

    한 측면은 이러한 삼매 단계에서의 의식의 구성요소일 뿐 아니라 , 일반적인 경험의 구성요소이기도 하다. 경험은 그 본질상 개인에게 속하며, 개인은 이 경험의 주체를 “나(I)”라는 대명사를 가지고 지칭할 수 있다. 그렇지만 , 일반적으로 개체성은 의식의 내용에 의해 가리워지며 , 지각의 대상으로 바뀌지 않는다. 의식이 있는 삼매의 마지막 단계에서 사정은 달라진다 . 환희 즉 이전 단계의 특징적인 의식의 내용이 포기되었기 때문에 , 의식의 내용으로 바뀌는 것은 이제 의식의 형태이며, 이것은 개체성 −혹은 YVi의 저자에 따르자면− 인식 만이 있는 상태(pratyayamātratā)31를 체험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의 의식은 여전히 무엇인가를 인식하는 것이다 . 이것은 개인에 속하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 고로 자아는 그 자신을 물질과 존재론적으로 다르다고 경험하지 않는다 . 이것은 여전히 [스스로를] 정신 능력과 연관된 지각의 주체로 간주한다. 그리고 정신 능력 안에 하나의 내용이 존재하는 것은 궁극적인 단계에서 조차 “하나의 대상을 인식하고 있는 삼매”(saṃprajñātasamādhi)라고 명명하는 것을 정당화시킨다 .

    하나의 내용을 가지고 있는 삼매로부터 내용이 없는 삼매로의 변이는

    PYŚ Ⅰ.18의 주제이다: athāsaṃprajñātaḥ kimupāyaḥ, kiṃsvabhāva iti? virāmapratyayābhyāsapūrvakaḥ saṃskāraśeṣo 'nyaḥ (YS Ⅰ.18).…tasya paraṃ vairāgyam upāyaḥ. sālambano 'bhyāsas tatsādhanāya na

    kalpyate, iti virāmapra-tyayo nirvastuka ālambanīkriyate, tadabhyāsapūrvakaṃ cittaṃ nirālambanam abhāvaprāptam iva bhavati. sa eṣa nirbījaḥ samādhir asaṃprajñātaḥ (PYŚ Ⅰ.18,1-7).

    대상을 인식하지 않는 [삼매]에게는 어떠한 수단이 있으며, 무엇이 이것

    의 성질인가?

    31 YVi 233,8 : asmitāpratyayamātratā.

  • Pātañjala Yogaśāstra에 있어서 소위 억제라는 요가 147

    다른 [삼매]는 인상의 잔여물을 지니고 있으며 소멸의 체험에 대한 수습

    이 선행하는 것이다(YS Ⅰ.18) 이러한 [삼매]의 수단은 보다 뛰어난 이욕이다. 대상을 가지고 있는 수습

    은 이러한 [삼매]를 불러일으킬 수 없다 . 고로 사물에 의지하는 않는(nirvastuka)소멸의 체험을 대상으로 한다. 이러한 [소멸의 체험]을 선행으로 하는 마음은 대상이 [전혀] 없으며,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종자가 없는 (=특정한 인상을 가지고 있는[?])32 삼매는 대상을 인식하지 않는 것이다 .

    보다 뛰어난 이욕은 대상을 인식하지 않는 삼매를 불러일으키는 수단이

    다. 이것은 앞서서 간략히 언급한 이욕의 역할을 가능하게 한다. 정신 능력과 자아 사이의 상호작용을 끝내기 위해서는 남아 있는 의식의 내용 즉

    개체성의 인식을 포기해야만 한다 . 그 결과는 매우 가혹하다 . 요가수행자는 —분명하고 어떠한 의식에 의해서도 가리워지지 않는— 초월적 자아 가 정신능력안에서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는 심지어 스스로를 개아라는 존재

    의 일관성에 대해서조차 집착을 버려야만 한다 . 요가 수행자는 말하자면 진실한 자아를 획득하기 위해서 경험적 인간으로서의 존재를 포기해야만

    한다 . 어떻게 이러한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까? 의식이 있는 삼매의 궁극적인

    단계에서 의식의 내용인 “개체성”의 본질은 어떠한 의직 작용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 의식의 내용을 가지고 있는 삼매로부터 내용이 없는 삼매로 변이하는 유일한 이유는 자아(puruṣa)의 자아 인식(self-perception)이며, 이것

    32 YVi 226,15에서는 nirbījaḥ를 saṃskāraviśeṣasvabhāva[ḥ]로 주석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내가 이러한 용어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지 않는다. 아마도 파탄잘리는 PYŚ Ⅱ.4.에서 논의되는 개념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번뇌들은 정신 능력안에서 잠재적인(prasupta) 형태로 존재할 것이라고 배운다. 이러한 번뇌들은 정신 능력이 방아쇠로 작용하는 대상과 접촉하자마자 그 효력을 발휘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prasaṃkhyāna 명상이라고 하는 불을 가지고 번뇌-종자들을 이미 “태워 버린” 요가수행자에게 있어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 148 요가학 연구 제5호

    은 그 자체로 정신 능력을 물질의 영역으로부터 멀어지도록 이끈다 .이러한 역동성은 이하의 진술에서 보다 뛰어난 이욕의 정의가 된다 .

    puruṣadarśanābhyāsāt tacchuddhipravivekāpyāyitabuddhir guṇebhyo vyaktāvyaktadhamakebhyo viraktaḥ (PYŚ Ⅰ .16,2 f.)

    자아를 보는 것을 수습하기 때문에(puruṣadarśanābhyāsāt)[봄 그 자체로부터] 그 [봄](혹은 자아)33 의 청정을 구별함에 만족하는 정신 능력을 지닌 그 [요가 수행자는] 모든 물질의 구성 요소들로부터 , 그들의 성질들이 드러나든 드러나지 않던 간에 , 집착이 떠난다 . 내용이 없는 삼매를 계발하기 위한 출발점은 개체성이다. 이러한 내용은

    자아를 인식하는 청정과 비례하여 감소한다 . 거의 어떠한 내용도 남아 있지 않을 때 , 정신 능력을 “지지하는” 것으로 작용하는 너무나 미미한 잔여물들을 “소멸—경험”(virāmapratyaya)이라고 부른다. YVi는 “소멸—경험”을 동격한정 (a desciptive determinative: karmadhāraya)복합어로 설명한다.34 그러므로 이러한 표현은 소멸이라는 내용을 가진 경험이 아니라 소멸로 특징

    지워지는 경험을 나타내는 것이다 . 다른 말로 하자면 , 이것은 정신 능력이 그 내용물을 완전히 잃어버리기 바로 이전에 마지막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의 한계의 경험은 연료를 이미 태운 불의 마지막 불꽃에 비유

    된다 .35

    33 YVi 219.10 ff.: tad iti puruṣadarśanam parāmṛśyate .tasyaśuddhis tacchuddhiḥ. nirṇiktakleśādimalat-vam. athavātasya puruṣasya śuddhis tacchuddhiḥ. tacchuddhes tadālambanadarśanam pravivicyate .tatpravivekenāpyāyitā buddhir asya yoginaḥ.

    “그” (tad)라는 [단어]는 자아를 보는 것을 지칭한다. tacchuddhiḥ의 복합어는 속격 관계를 지닌 격한정 복합어(dependent determinative compound=tatpuruṣa)이다. [자아를 보는 것의 청정은] 번뇌(kleśa) 등의 더러움이 깨끗해진 상태이다. 혹은 그렇지 않다면, “그것의 청정”은 자아의 청정을 의미한다. 요가 수행자는 [자아의] 청정을 그 [자아]를 대상으로 가지고 있는 봄으로부터 구별한다. 이러한 요가 수행자의 정신 능력은 그것을 구분하는 것에 만족한다.

    34 YVi 225,10 ; virāmaś cāsau pratyayaś ca virāmapratyayaḥ.

  • Pātañjala Yogaśāstra에 있어서 소위 억제라는 요가 149

    이러한 내용물이 없는 상태에서 정신 능력은 제한되지 않는 자아에 대한

    인식에 자리를 양보한다 . 이러한 의식의 상태를 다루면서 , 오베르하머는 PYŚ Ⅰ.3을 정확하게 언급하는데 이는 모든 정신 능력 과정들의 소멸에 관해 간단히 기술한다36:

    tadā draṣṭuḥ svarūpe 'vasthānam (YS Ⅰ .3).svarūpapratiṣṭhā tadānīṃ cicchaktir, yathā kaivalye (PYŚ Ⅰ .3,2 f.)

    그리고서 보는 자 (즉 자아)는 그 자신의 형태에 안주한다(YS Ⅰ .3).그때 의식의 능력 (즉 자아)는 그 자신의 형태에 기반을 둔다 . 마치

    독존에서와 같이 . 앞으로 간략하게 논의하게 될 두 번째 요가 삼매는 여태까지 간략히 설

    명했던 것처럼 요가의 다른 형태이다 . 그렇지만 이것은 일반적인 명상의 목적 즉 자아의 제한되지 않은 자아에 대한 인식의 실현을 공유하며, 고로 대상을 인식하지 않는 삼매(asaṃprajñātasamādhi)에서 정점을 이룬다.37 이 최초의 단계에서는 최고의 신(īśvara)을 그 대상으로 갖는다. 이러한 점에서 나는 이러한 종류의 요가를 “유신론적인 요가 삼매”라고 명명하고 싶다 . 이러한 “유신론적인 요가 삼매”는 어떠한 종파적인 혹은 신화적인 요소들을 결여한 신에 대한 특별한 관념에 기반하고 있다 .38

    35 YVi 225,11-13; sarvaviṣayebhyo vinivartamānasya vinivartanakāle prāgapratyayā-{apratyayatā라고 읽는다}-patteḥ pratyayarūpatvam etat {etat대신에 etasya라고 읽는다[?]}. yathā pāvakasya jvalataḥprakṣīyamāṇendhanasya śanaiḥ śanirupaśāmyataḥ prāg aṅgāratāpatter jvalātmatā.

    물러나는 때에, 무지각(무경험)의 상태가 일어나기 [바로] 이전에, 모든 대상들로부터 물러나고 있는 [정신 능력]은 [아직 어떠한] 지각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마치 연료가 소모되고 있을 때, 조금씩 조금씩 감소하며 타오르고 있는 불이 불씨의 상태를 띠기 바로 이전에 [아직] 불꽃으로 이루어진 것과 같다.

    36 Oberhammer 1977: 161.37 Cf. Oberhammer 1977: 177.

  • 150 요가학 연구 제5호

    앞서의 상키야 요가의 존재론에 대한 요약에서는 최고신을 단 한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배제는 상키야 요가의 존재론적 이원론이 초월적 자아 , 원칙적으로는 해탈한 자아의 개념과 나란히 최고신의 개념을 포함하기 때문에 정당화된다 . 최고신과 “보통의” 해탈한 자아사이의 유일한 차이점은 후자가 해탈하기 이전에 속박되어 있었다는 점에 있다 . 반면에 최고신은 과거에도 물질의 영역에 속박되지 않았으며 미래에서도 속박

    되지 않는다. 이러한 점을 제하고는 신과 자아들은 완전히 동일하다.39 그들은 순수하고 변화하지 않고 내용물이 없는 의식이다 . 물론 어떻게 이러한 신의 초월적인 특징을 상키야 요가에 따른 세상안에서 신의 행위의 개

    념과 조화시킬수 있겠는가에 관한 의문이 일어난다 . 부언하자면: 초월적 자아는 순수의식이고 어떠한 종류의 행위로부터도 정의상 자유로운 것인

    데 , 어떻게 이것이 물질의 영역인 세상에 간섭할 수 있는가? 텍스트들은 세상안에서 신의 효력성은 매우 제한적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 순환적으로 다시 일어나는 세상의 창조들 그 각각의 시작에 그는 밝은 재료 sattva로 이루어진 완전한 (prakṛṣṭa)정신 능력의 형태를 취하는데, 이는 현자에게 가르침을 제공하고 스승과 제자 사이의 계통(lineage)을 시작하기 위해서이다 .40 상키야 요가에 따르면, 이러한 과정은 단어의 완전한 의미에서 행위가 아니다 . 이것은 그의 자비스로운 성질에 부합하여 있어나는 사태이다 . 이 뿐만이 아니라 상키야 요가에서의 신의 개념은 이러한 세속적인 행위에

    기회를 부여하지 않는다 . 고로 최고신에 대한 헌신의 해탈론적인 효력은

    38 Cf. 이하의 설명에 관해서는 Oberhammer 1977: 162-177.39 PYŚ Ⅰ.24,1-10: atha pradhānapuruṣavyatiriktaḥ ko' yam īśvaraiti?

    kleśakarmavipākāśayair aparāmṛṣṭaḥ puruṣaviveṣa īśvaraḥ (YS Ⅰ.24). … kaivalyaṃ prāptās tarhi santi bahavaḥ kevalinaḥ. te hi trīṇi bandhanāni cchittvā kaivalyaṃ prāptāḥ. īśvarasya tatsaṃbandho na bhūto, na bhāvī. yathā muktasya pūrvābandhakoṭir jñāyate, yathā vā prakṛtilīnasyottarā bandhakiṭiḥ saṃbhāvyate, naivam īśvarasya. sa tu sadaiva muktaḥ sadaiveśvara iti.

    40 PYŚ Ⅰ.25,8-11: “jñānadharmopadeśwna kalpapralayamahāpralayeṣu saṃsāriṇaḥ puruṣānuddhariṣyāmi”iti. tathācoktam: “ādividvān nirmāṇacittam adhiṣṭhāya kāruṇyād bhagavān parama ṛṣir āsuryate jijñāsamānāya provāca”(TVś와 YVā에 따르면 Pañcaśikha) iti.

  • Pātañjala Yogaśāstra에 있어서 소위 억제라는 요가 151

    신의 행위의 결과가 아니다 . 이것은 “유신론적인 삼매”가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

    파탄잘리는 언어적 명칭 (vācaka)즉 단어와 그 명칭의 대상(vācya)사이의 관계에 대한 철학적 사고의 방식으로 “유신론적인 요가 삼매”에 관한 논의의 기반을 제공한다 . PYŚ Ⅰ.27에 따르면 , 신은 praṇava 성스러운 음절 om에 의해 표시되며 , 이것이 그의 명칭이다.41 파탄잘리는 언어의 이론을 주장하는데, 이것은 명칭의 대상(vācya)과 언어적 명명(vācaka)사이의 영속적인 결합(saṃbandha)을 주창한다.42 이러한 영속성은 명백하게 언어와 그 지시대상사이의 동일한 구조로 간주될 수 있다. 비록 언어와 그 의미는 지속적이고 우연적이지 않지만, 음성 실체들의 모양 — 곧 단어들의 형태 —은 지속적이지 않으며 우연적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관습(saṃketa)에 의해 확립되고 유지되기 때문이다 . 음성 실체들의 형태는 변화에 종속할 수 있지만 언어의 논리적 구조는 종속할 수 없다 .

    YVi의 저자는 하나의 경험적 논의를 덧붙인다. om이라는 음절과 신 사이의 결합은 고정되어 있는데, 이것은 왜냐하면 mantra의 적용은 그 결과를 반드시 초래하기 때문이다 . 고로 이러한 것은 음식 즉 요리의 대상과 불 즉 요리의 행위수단 사이의 결합에 비교될 수 있다. 만약 이러한 두 존재물들 사이에 고정된 결합이 없다고 한다면 , 불은 요리를 하기 위한 적절한 수단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 동일한 방식으로 , 만약 om이라는 음절과 신 사이에 고정된 결합이 없다고 한다면 , mantra를 암송하는 것은 신에 대한 직접 경험을 초래하지 않았을 것이다.43 PYŚ Ⅰ.28을 여는 구절에서 이러한

    41 PYŚ Ⅰ.27,1: tasyavācakaḥpraṇavaḥ(YSⅠ.27); vācyaīśvaraḥ.42 PYŚ Ⅰ.27,3: sthito' sya vācyasya vācakena saṃbandhaḥ.43 YVi 278,1—3: vācyavācakayor asthitasambandhatve tu praṇavarūpeṇābhimukhī-

    bhavatīśvara iti nāvakalpate. na hi pācyapācakasambandhe' navasthite pācakāgnyupādānam pākārthaṃkalpate. 만약 명칭과 명칭의 대상이 확립된 결합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한다면,

    praṇava형태로 최고신이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만약 요리되어지는 것[인 음식]과 요리를 하는 것사이의 결합이 확립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요리를 하는 수단으로서 불을 사용하는 것은

  • 152 요가학 연구 제5호

    직접 경험의 수단을 기술하고 있다: vijñātavācyavācakatvasya yoginaḥ — tajjapas tadarthabhāvanam (YS Ⅰ.28) [신]이 명칭의 대상이고 [om이라는 음절이] 그것의 명칭이라는 것을 완

    전하게 이해한 요가 수행자는 [그 om이라는 음절]을 암송하며 그것의 지시대상이 나타나도록 한다 .

    mantra의 암송과 요가 삼매가 서로 의존한다는 것은 Viṣṇupurāṇa로 부터

    인용한 게송의 주제인데, 파탄잘리는 이를 유신론적인 요가 삼매를 개괄하기 위한 권위로써 인용한다 .

    svādhyāyād yogam āsīta svādhyāyam āmanet |svādhyāyayogasaṃpattyā para ātmā prakāśate || (PYŚ Ⅰ.28,5 f. = VPurāṇa

    6.6.2) 만트라의 반복 이후에 요가 명상을 행해야 한다 . 요가 명상이후에 만트

    라의 반복을 행해야 한다. 만트라 반복의 성취와 요가 명상의 성취에 의해 최고의 자아가 나타나게 된다 .

    YVi의 저자는 신을 경험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처음에는

    만트라의 반복이 마음을 최고의 신에게 향하는 경향을 확립한다 . 일단 이러한 경향이 확고해질 때, 요가수행자는 신에 대한 명상적 비젼(dhyāna)을 수행한다. 마음이 산란되지 않고 비젼이 확고해질 때 , 요가 수행자는 내면화된 형태로 만트라를 반복하는데, 이것은 최종적으로 최고의 신이 의식의 유일한 내용물이 될 때까지 명백히 그러한 비전의 선명성을 증가시킨다.44

    요리를 위해 적절하지 않게 될 것이다. 44 YVi 278,14 — 280,2: …“svādhyāyāt” praṇavajapād īśvaram pratyavanacittañ san

    “yogamāsīta” tadartham īśvaran dhyāyet. tadarthadhyānāc ca pra{사본 L은 ca pra

  • Pātañjala Yogaśāstra에 있어서 소위 억제라는 요가 153

    그리고서 요가수행자의 정신 능력은 하나에 집중된 상태를 획득한다 .45의식의 내용을 가지고 있는(saṃprajñātasamādhi)무신론적인 삼매와 그의

    유신론적인 변이 사이의 유사성은 명백하다 . 정신 능력의 상태들이 양자 모두 하나의 내용물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첫눈에 보기에도 그 내용물은 다르다. 전자의 경우에 있어서 이것은 개아이며, 유신론적 변이에 있어서 내용물은 최고신이다 . 만약 우리가 앞서 개설했던 신의 개념을 기억한다면 , 그 차이는 양자 모두 그 성질에 있어서 동일하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차이는 아무것도 없게 될 것이다 .

    파탄잘리는 PYŚⅠ.29에서 자아와 신의 동일성을 체험하는 것에 관한 설명을 제공하는데 , 이는 유신론적 삼매의 결과를 요약하는 부분이다 .

    kiṃcāsya bhavati tataḥ pratyakcetanādhigam[aḥ] ... (YS I.29). ...

    svapuruṣadarśanam apy asya bhavati: “yathaiveśvaraḥ śuddhaḥ, prasannaḥ, kevalo, ’nupasargas, tathāyam api buddheḥ pratisaṃvedī madīyaḥ puruṣaḥ,” ity adhigacchatīti. (PYŚ I.29,1-5)

    게다가 이 [요가 수행자]는 내적인 의식에 대한 깨달음을 획득한다 (YS I.29) [이것은] 심지어 그는 자신의 자아(puruṣa)의 봄을 획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깨닫는다: “신이 청정하고 밝으며 독존하고 모든 불행을 여윈 것처럼 , 이 정신 능력을 경험하는 나의 자아 또한 그와 같다 .

    대신 cāpra라고 읽는다} calita-manāḥ “svādhyāyam” praṇavam “āmanet” manasābhijapet… tathācapraṇavajapaparameśvaradhyā-nasampatyā “paraātmā” parameṣṭhī “prakāśate” yoginaiti.

    “만트라-반복”이후에 — om이라는 음절을 암송한 후에 — [요가수행자는] 신으로 향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한 “요가 명상을 수행해야” 한다 —그 [om이라는 음절의] 지시대상인 신을 관상해야 한다. 그리고 [om이라는 음절의] 지시대상을 관상한 후, [요가 수행자는] 배회하지 않는 마음을 지니고 만트라의 반복을 수행해야 한다 —[그는 조용하게] 그의 마음에서 om이라는 음절을 암송해야 한다. … 이러한 방식으로 om이라는 음절을 암송을 성취하고 최고의 신을 관상하는 것을 성취하는 방식에 의해 — “최고의 자아” —최고의 위치에 서있는 자 —는 요가수행자에게 “드러난다”.

    45 PYŚ Ⅰ.28,2—4: tad asya yoginaḥ, praṇavaṃ japataḥ, praṇavārthaṃbhāvayataś, cittam ekāgratām ̣saṃpadyate.

  • 154 요가학 연구 제5호

    요가 수행자의 이러한 깨달음 즉 그 자신의 자아가 본성상 최고의 신과

    동일하는 것은 개념적 사고에 의해 획득한 지식으로 이해해서는 않된다 . 물론 이러한 것은 정신 능력이 한 점에 집중된 상태와 양립할 수 없을 것이

    다 . 이러한 깨달음은 앞서 기술한 내용물을 지닌 무신론적 요가에서 유추하여 보아야만 한다 . 무신론적 삼매에서 의식의 내용은 각자의 자아이며 이것은 스스로를 개체성의 주체로서 지각한다. 이러한 상태에서의 자아−깨달음 (self−realization)은 불완전한데, 이는 이러한 경험의 주체로서의 자아가 아직까지 그 자신의 정신 능력에 묶여있기 때문이다 . 발전 과정에서 정신 능력의 이러한 남아있는 내용물은 점차 감소하며 , 마침내 자아는 스스로를 순수 의식으로서 지각한다. 유신론적 변이에서 출발점은 동일하다. 여기서도 또한 자아는 어떠한 자아 즉 신을 경험한다. 이러한 경험은 직접적인 것이 아니다 . 자아는 오직 자신의 정신 능력의 내용 만을 지각할 수 있기에 오직 신의 이미지만을 가지고 있다 . 명상의 과정에서 의식의 이러한 내용은 감소한다. 자아로서의 신의 이미지는 점차 약해지며, 의식에 의해 순수의식이 가리워지는 것은 사라진다 . 마침내 모든 정신 전개들이 종료될 때, 정신 능력은 자아의 제한되지 않은 자아−인식을 허용하며, 이것이 어떠한 대상도 인식하지 않는 삼매(asṃprajñātasamādhi)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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