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문화원 전국역사문화기행 - ycc50.org · 신을 수행하여 북경에 머무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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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차 용인문화원 전국역사문화기행 2016. 4. 29(금) □용인문화원 출발 (07:00) □용인→김제(07:00-09:40) 2시간 40분 이석정 생가(09:40-10:10) 30분 □이동(10:10-10:40) 20분 □내아향교(10:40-11:10) 30분 □이동(11:10-11:15) 5분 (도보) 김제동헌 (11:15-11:45) 30분 □이동 (11:45-11:50) 5분(도보) □중식(11:50-12:40) 50분 *음식점: 토종하얀민들레은촌(063-544-1120) □이동 (12:40-12:55) 15분 □김제 전교비(12:55-13:20) 25분 □이동 (13:20-13:40) 20분 □남강정사(13:40-14:00) 20분 □이동 (14:00-14:20) 20분 □귀신사(歸信寺)(14:20-14:50) 30분 □이동 (14:50-15:00) 10분 □금산사(15:00-15:40) 40분 □김제→용인 (15:40-18:20) 2시간 40분 □용인문화원 해산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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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4차

    용인문화원 전국역사문화기행땅과 하늘이 만나는 지평선의 고장, 전북 김제

    답 사 일 정 2016. 4. 29(금)

    □용인문화원 출발 (07:00)□용인→김제(07:00-09:40) 2시간 40분□이석정 생가(09:40-10:10) 30분□이동(10:10-10:40) 20분□내아향교(10:40-11:10) 30분□이동(11:10-11:15) 5분 (도보)□김제동헌 (11:15-11:45) 30분□이동 (11:45-11:50) 5분(도보)

    □중식(11:50-12:40) 50분 *음식점: 토종하얀민들레은촌(063-544-1120)

    □이동 (12:40-12:55) 15분□김제 전교비(12:55-13:20) 25분□이동 (13:20-13:40) 20분□남강정사(13:40-14:00) 20분□이동 (14:00-14:20) 20분□귀신사(歸信寺)(14:20-14:50) 30분□이동 (14:50-15:00) 10분□금산사(15:00-15:40) 40분□김제→용인 (15:40-18:20) 2시간 40분□용인문화원 해산 (18:20)

    용 인 문 화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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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제시(金堤市)

    김제시(金堤市)는 전라북도 중서부에 위치한 시이다. 노령산맥 서사면에서 서해안에 이르는 지역으로, 북쪽으로는 만경강을 경계로 군산시, 익산시와 접하고, 동쪽으로 전주시, 완주군과 접하며, 남쪽으로는 정읍시, 부안군(동진강이 경계)과 접한다.

    사람들이 김제시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지평선이 보이는 드넓은 평야 지대를 생각하게 되지만 사실 평야 못지않게 구릉지도 많

    아서 밭농사, 축산업 역시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다시 말해, 김제 시내를 기준으로 서쪽은 낮은 언덕하나 찾기 어려운 드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는 반면에 동부는 모악산을 정점으로 하여 크고 작은 구릉지가 제법 있는 지형이다. 그렇긴 해도 역시 밭보다 논이 훨씬 더 많은 고장인 만큼 논농사가 거의 모든 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특히 동진강, 원평천 하류의 부량, 죽산 및 광활에서는 밭을 거의 구경할 수 없을 정도로 논 일색이다.

    김제, 정읍, 부안이 경계를 맞닿은 동진강 하류 지역은 한국에서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를 테마로 한 지역 축제인 김제 지평선 축제가 9, 10월에 벽골제 일원에서 열린다. 지평선 축제는 김제시에서 적극적으로 밀어주고 타 축제와의 차별화 시도에 성공한 덕분에 관광객도 많이 늘어나고 축제 규모 역시 상당히 커져 현재는 전국적으로도 유명한 축제로 자리 잡았다.

    또한 서북부 진봉반도에는 심포항이라는 작은 어항(漁港)이 있었다. 그밖에 부량의 벽골제를 비롯하여 백산의 돌제, 만경의 능제 등 저수지가 산재해 있다. 그런데 이제는 새만금 간척사업으로 바다가 사라졌다.

    전주시, 임실군과 함께 전라북도에서 다른 도와 경계를 접하지 않는 고장이기도 하다. 따라서 전주, 익산, 군산에서 부안, 정읍, 고창으로 가려면(혹은 그 반대일 경우) 한 번 쯤은 이곳을 거쳐 가게 된다. 그래서인지 지나쳐 가는 고장 정도로 인식되어 있는 것도 현실이다. 딱히 이름난 관광지도 없는 곳이다.

    그러나 한반도의 곡창인 호남평야의 한복판에 위치해 있는 관계로 경지면적 전국 3위, 경지율 전국 1위인 농업 생산력이 높은 고장으로 쌀농사가 주류를 이룬다.

    새만금 간척사업 완공으로 군산, 김제, 부안의 육지는 넓어졌으나 이 간척지를 어떻게 배분하느냐가 현재 전라북도의 큰 고민이다. 해상 경계에 따르면 군산이 다 차지하게 되어 있어서 김제와 부안이 간척지 배분을 위해 연합전선을 펼치고 있다. 김제와 부안의 입장에서는 새만금으로 생기는 땅을 공평하게 배분하자는 것인데 군산이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나 김제의 경우는 원안대로 군산이 다 차지하는 상황이 되면 바닷가가 없어지는 결과가 초래된다. 그래서 더더욱 필사적인 상황이었다. 그런데 최근 중앙정부에서 새만금권 군산-김제-부안 통합을 시도하게 되었다. 2015년 행정자치부 중앙분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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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김제시는 새만금 방조제 중 2호 방조제를 관할하게 된 것이다.김제시의 관광지로는 모악산도립공원에 있는 금산사(金山寺)가 유명하다. 사적지로 벽

    골제(碧骨堤)가 있고, 해양 문화 체험지로 심포항이 있다. 이 밖에 삼불암(三佛庵)·망해사(望海寺)·귀신사(歸信寺)·문수사(文殊寺) 등의 사찰, 김제동헌(金堤東軒), 김제향교(金堤鄕校), 금구향교(金溝鄕校), 만경향교(萬頃鄕校), 용암서원(龍巖書院), 삼현서원(三賢書院), 백석서원(白石書院), 조선 숙종의 교지를 기록한 김제전교비(金堤傳敎碑) 등이 있다.

    이석정 선생 생가(李石亭先生生家)

    석정 이정직(李定稷, 1840∼1910) 선생은 간재(艮齊) 전우(田愚)1) 선생과 더불어 조선 말기의 뛰어난 유학자이다. 그는 27세에 중국에 가는 사신을 수행하여 북경에 머무르는 동안 중국의 시문학에 대한 고증(考證)과 논평, 성리학에 있어서의 정주학(程朱學)과 양명학(陽明學)에 대한 변해와 논평 그리고 칸트 등 서양철학에 대한 연구와 동서철학의 절충론 등 여러 방면에서 많은 연구 성과를 거두었고, 이것을 종합하여 뒤에 연석산

    방미정고(燕石山房未定藁) 25책을 남겼다. 그는 뒤에 향리에 돌아와 후진을 양성하면서 어음학(語音學), 천역학(天歷學), 술수학(術數學) 등 다방면에서 걸친 저술을 남겼다.

    이 집은 그의 생가로 140년 전에 건립되었으며, 안채와 헛간채 2채만이 남아 있다. 초가지붕의 안채는 조촐하게 지어진 평범한 농가 모습이다. 평면은 윗방과 큰방 그리고 부엌이 이어지며 부엌 남쪽에 머릿방이 있는 호남지방에서 드문 ㄱ자형 집이다. 안방과 윗방 사이의 간벽 중간에는 1짝의 띠살문이 있어 두 방은 직접 통할 수 있으며, 방 앞에는 마루가 놓여 있다. 또한 큰방에는 부엌에서도 직접 출입할 수 있는 작은 쪽문이 있다. 부엌은 다른 공간에 비해 넓은 면적을 차지하며, 부엌 한 구석에는 별도의 도장방을 만들었다. 부엌 앞에 덧달아 낸 머릿방은 삼면에 문을 내어 봉당에서 쉽게 출입할 수 있다. 지금은 철거되었지만 근래까지도 안채 전면에 사랑채가 있었다.

    석정은 여기에서 주로 기거하며 손님을 맞거나 후학들을 지도하였다고 한다. 안채 서쪽에 있는 담장과 이어진 헛간채는 근래에 지어진 것이다. 2칸의 헛간과 방이 있으며 방 앞에는 집밖에서 바로 출입할 수 있도록 쪽마루를 만들었다. 주위에는 토담이 둘러쳐 있어 초가와 좋은 조화를 이룬다.

    1) 간재 전우(田愚:1841∼1922)는 구한말 유학자로 임헌회 문하에서 20년간 학문을 배웠으며, 고종 19년(1882) 벼슬에 올랐으나 곧 사임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910년 국권이 일제에 강탈되자 통분하여 스스로 귀향, 도학을 통해 국권 회복을 위해 노력하였다. 전우 선생은 전통적인 유학사상을 그대로 실현시키려 한 점에서 조선 최후의 정통 유학자로서 추앙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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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제향교(金堤鄕校)

    향교의 설립 목적은 성현에 대한 향사와 유생들에게 유학을 가르침에 있으며 아울러 지방 문화 향상 및 사기 진작 등 사회교육적 기능도 지니고 있다. 태조는 지방 재정에 의해 설치된 지방 향교의 흥패(興敗)를 수령들의 치적 평가 척도로 삼는 적극적인 정책을 취함으로써 향교 보급에 중점을 두었다.

    이후 향교는 조선 중엽까지 성황을 이루었으나, 병란과 흉년, 서원의 과다로 본래 기능을 잃어가고 있어 후기에는 한 고을에 1개씩만 두고 정리하였다. 향교의 감독 책임은 감사에게 있었고 중앙 정부는 향교 보호 육성을 위해 제독관을 8도에 두는 등 지방 교육에 관심을 두었다. 한일병합 이후에는 향교도 제 기능을 잃고 최근에는 서고에 있는 자료를 열람하는 도서관 기능을 하고 있다.

    김제시 교동에 위치하고 있는 김제향교(金堤鄕校)는 1404년(태종 4)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의 중등교육과 지방민의 교화를 위해 창건되었다.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가 1635년(인조 13)에 중건하였으며, 그 뒤 몇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 명륜당, 동무, 서무, 동재, 서재, 만화루(萬化樓), 교직사(校直舍), 내삼문(內三門) 등이 있다.

    대성전은 1404년(태종 4)에 창건하였으나 정유재란 때 불에 탔으며 그 후 1635년(인조 13)에 다시 세워 오늘에 이르기까지 몇 차례 고쳐지었다. 대성전 앞면에 사당 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앞과 옆이 트인 툇간을 두었고 몸채 쪽에는 문을 달았다. 중앙 칸의 가운데에 2짝의 문을 달고 양쪽 기둥에는 골판벽을 끼웠다. 양 끝 칸에는 1짝씩 문을 달고 그 옆 공간에도 골판벽을 끼워 특이한 앞면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히 양쪽 끝에 있는 기둥에는 건물 옆면 쪽으로 지겟다리 모양의 굽은 버팀목을 기둥 중간에 박았는데, 그 형태가 장수향교(長水鄕校)의 대성전(보물 제272호)과 같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柱心包) 양식이다.

    공포(拱包)는 주심포계와 같이 전면에서 창방(昌枋)을 걸치고 기둥 위에서만 짰는데, 포작(包作) 자체는 다포계(多包系) 형식을 취하고 있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기둥은 두리기둥이고, 초석은 자연석과 약간 다듬은 돌을 혼용하였다 기단은 잘 다듬은 화강암을 이용하여 네 단으로 축조하였다.

    명륜당은 임진왜란 때에 소실된 것을 1842년에 보수하고 1879년에 중수하였으나 6·25사변 때 다시 소실된 것을 1958년에 복구하였으며, 정면 5칸, 측면 3칸의 고주(高柱)집으로 되어 있다. 동재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이며, 만화루는 2층 누각인데 임진왜란 때에 소실된 것을 1635년에 복원하고 1964년에 중수한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전답과 노비·전적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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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쳤으나, 현재는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고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으며,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김제동헌(金堤東軒)

    김제동헌은 전북 김제시 교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관아이다. 현종 8년(1667)에 세워진 동헌은 근민헌(近民軒)과 그 앞으로 부속건물인 정자 피금각(披襟閣), 그리고 동헌 뒤편에 지방수령의 살림집인 내아가 남아 있다. 동헌 주변으로 고목이 우거져 운치가 더하며 250여 미터거리에 김제향교가 가 있어 과거 왕성하였을 지방행정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김제동헌인 근민헌은 김제군수가 업무를 보던 곳으로 이름 그대로 ‘옷깃을 풀고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나눈 곳’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현판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웅장한 느낌을 주는 건물로 앞면 7칸, 옆면 4칸의 팔작지붕이다. 사적 482호로 지정되어 있다.

    세월이 오래되었음에도 튼튼하게 잘 보존되어 있는 것은 건물 부재나 장식이 좋은 재료를 사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관아의 위계를 짐작 할 수 있다. 처마는 겹처마, 두리기둥, 초석은 자연석의 윗부분을 평평하게 다듬어서 만든 것과 윗부분 중 기둥에 닿는 부분만을 원형으로 돌출시킨 두 가지 초석을 살펴 볼 수 있다. 똑같은 모양의 문짝은 띠살로 되어 있으며 툇마루가 없어 지방관아의 동헌 느낌보다는 중앙관청의 건물과 비슷한 느낌이 든다. 김제동헌은 일제강점기 이후 읍사무소로 사용되었으며 최근까지 식당 겸 결혼식장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동헌 앞에 있는 정자인 피금각(披襟閣)은 정면 3칸, 측면3칸의 남향으로 중앙1칸은 방이며 주위가 마루로 되어 있는 게 특징이다. 2단의 자연석위에 두리기둥을 세웠으며 지붕은 팔작기와지붕이다. 작은 정자에 비해 피금각 현판이 무척 큰 것이 인상적이다.

    동헌 뒤에는 내아가 있다. 동헌과 내아 사이를 두고 250여년 된 회화나무가 서 있다. 내아는 조선시대 김제 고을의 수령이 기거하던 살림집이다. 보통 관아는 외동헌과 내동헌으로 나눠지는데 외동헌은 집무를 보던 동헌으로 부르며 내동헌은 수령의 처소이다. 내동헌인 내아는 조선 헌종 8년(1667) 세워져 현재는 동쪽이 트인 ㄷ 자형 안채 건물만 남아 있다. 원래는 안채, 안행랑채, 안측간 등의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안채만이 복원되어 있다. ㄷ자형의 평면으로 조선시대 일반적인 중, 상류 계층의 주택건축과 거의 차이가 없다. 다만 대청마루 등에 굵은 두리기둥을 사용하고 있는 점이 일반 민가보다는 격식을 차리고 있는 점으로 두드러진다. 한단의 낮은 기단 위에 자연석 주초를 놓고, 네모기둥과 두리기둥을 섞어서 세웠으며 홑처마의 소로수장집이다. 거의 모든 주간(柱間)에 두 짝의 세살문을 달았다. 전체적으로 간결한 외관을 갖추었으며, 동헌의 내아 건물로는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유구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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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제 전교비(傳敎碑)

    1680년(숙종 6) 왕이 교지를 내려 이곳 주민의 조세를 면제해준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조선시대 금구현(金溝縣)의 일북면(一北面)·하서면(下西面)·초처면(草處面)에 살던 백성들은 매년 비만 오면 수해를 당했다. 3개 면이 모두 벽골제(碧骨堤)의 물이 흐르는 곳에 인접해 있어서 비가 조금만 와도 인근 지방의 물이 다 이곳으로 흘러들어 다리가 떠내려가

    도랑을 건너려면 매번 물이 빠지기를 기다려야 했다.그런데 관가에서 파견된 사감(司監)들이 홍수에 대비하여 도랑을 깊이 파고 다리를 가

    설한다는 명목으로 백성들로부터 각종 명목의 지세(地稅)를 징수하여 많은 폐단을 야기시켰다. 이때 숙종이 이로 인한 각종 폐단을 척결하라는 윤음(綸音)을 내렸다. 이에 당시 금구 현령(縣令) 이순익(李純翼)은 사감을 내쫓고 이러한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왕의 윤음과 그 동안의 과정을 비석에 새겨 백성들의 왕래가 잦은 곳에 세웠다.

    전교비 옆에 또 하나의 비가 있는데, 현령 이순익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백성들이 전교비 옆에 세운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이다. 이순익의 공으로 교지가 내려 면세된 것을 감사하는 뜻으로 백성들이 비를 세웠다고 한다. 이 비들은 뒤에 방치하여 파손된 것을 지역 촌로들이 땅에 묻어 안전하게 보존했다. 1971년에 이 비석들을 다시 찾아내고 1973년에 원형대로 복원했다. 1974년 9월 27일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65호로 지정되었다. 지정 면적은 208㎡이다.

    남강정사(南崗精舍)

    구한말 충신 장태수(張泰秀, 841~1910) 선생이 순국한 집이다. 조선 순조 초인 1800년경에 장태수의 부친이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선생의 자는 성안(成案)이요 호는 일유재(一遊齎)이고 관은 인동(仁同)이다. 김제에서 출생하여 철종(哲宗) 12년(1861) 문과에 급제한 후 관직에 나아가 부정자(副正字)·전적(典籍)·사과(司果)·예조정랑(禮曺正郞)·지평(指平)·장령(掌令) 등을 거쳤다. 고종

    (高宗) 6년(1869) 양산군수(梁山郡守)로 부임하였을 때는 군기를 정비하고 별포군(別砲軍)을 길러내는 등 국방에도 힘썼다.

    고종 15년(1875) 연로한 부친을 봉양하기 위하여 사직하고 고향인 금구에 내려와 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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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 전념하다가 부친 사후에 다시 관직에 나가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 대사간(大司諫)과 부승지 등을 거친 뒤 가선대부시종원부향에까지 올랐다. 고종황제의 선위(禪位) 후에는 신명학교(新明學校)를 세워 인재를 길러냈으나 일제에 의해 폐교되었다. 1910년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나라를 지키지 못한 것이 임금에게 불충하고 조상에게 불효한 것이라 생각하여 《자죄문(自罪文)》을 지어 망국을 자책하는 한편, 단식하여 목숨을 끊고자 하였다. 단식하는 중에 그는 동포에게 주권 회복을 호소하는 《고대한동포문(告大韓同胞文)》을 남겼다. 절식(絶食)한 지 27일 만인 1910년 11월 27일 이곳에서 순국하였다.

    이 건물은 자연석재로 40cm 정도의 축대를 쌓은 후 세운 정면 4칸, 측면 4칸의 초가집이다. 초석은 덤벙주초이며 그 위에 세워진 기둥은 모두 네모기둥이다. 평면의 배치는 중앙의 전면 2칸에 폭 133㎝의 마루를 깔고, 가운데에 큰 방을 두었으며, 좌·우로는 툇방과 마루를 꾸몄다.

    큰방은 2칸으로, 터서 서로 왕래할 수 있도록 하였다. 사랑방 뒤로는 다락을, 큰 방 뒤로는 부엌을 두었다. 툇방과 마루의 앞 및 툇방 옆부분에도 툇마루가 놓여 있다. 전체적으로 소박하고 건실한 느낌을 주며 사라져가는 이 지방 초가집의 일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1983년 8월 24일 전라북도기념물 제64호로 지정되었다. 장방호가 관리하고 있다.

    귀신사(歸信寺)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金山寺)의 말사이다. 676년(문무왕 16)에 의상(義湘)이 창건하여 국신사(國信寺)라 하였으며, 국신사(國神寺)로 표기되기도 하였다. 최치원(崔致遠)은 이곳에서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을 편찬하였다.

    고려시대 국사 원명(圓明)이 중창하였다. 그 뒤 임진왜란의 전화로 폐허가 된 것을 1873년(고종 10)에 춘봉(春峯)이 중창한 뒤 현재의 이

    름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고려 말에는 왜병 300여 기(騎)가 성을 함락한 후 이 절에 주둔하였는데, 병마사 유실(柳實)이 격퇴하였다고 하며, 당시에는 건물과 암자가 즐비했던 대찰이었다고 전한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보물 제826호로 지정된 대적광전(大寂光殿)을 비롯하여 명부전·산신각·요사채 등이 있다. 주요 문화재로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62호인 귀신사삼층석탑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63호인 귀신사부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64호인 귀신사석수(石獸)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삼층석탑은 높이 4.5m의 화강암재 석탑으로, 귀신사의 창건과 함께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탑의 선이 정밀하고 옥개석의 곡선이 거의 평행을 이루면서도 신라시대의 미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 빼어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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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도는 청도원 마을 입구의 논 가운데 있는데, 전성기에는 이 부도가 있는 곳까지가 절의 경내였음을 알 수 있다. 석탑과 통일된 조각수법을 보이고 있는 이 부도는 정교한 조각의 예술성을 보이고 있으며, 높이 2.5m이다.

    또 석수는 딴 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것으로, 앉아 있는 석수의 등 위 중간에 남근(男根) 같은 석주가 꽂혀 있고 도약 하려는 듯한 석수의 모습에는 당당한 위용이 엿보인다. 석수나 남근은 모두 화강석으로 되어 있고, 높이 1.65m, 너비 1.65m이다.

    금산사(金山寺)

    금산사는 후백제의 견훤이 유폐되었던 절로 알려져 있으며, 원래는 백제시대에 지어지고 신라의 통일 이후 혜공왕 때 진표율사에 의해 중창되면서 절의 기틀이 갖추어졌다고 한다. 당시 신라 불교의 주류였던 교종 계통 법상종의 중심 사찰로 역할을 했는데, 법상종이 미륵신앙을 기반으로 이루어진 종파라 이곳 절에는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전이 없는 대신 미륵불을 모신 미륵전이 절의 중심이다.

    다시 견훤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견훤은 후백제를 세우면서 스스로 세상을 구원할 미륵이라 자청하며 민중들의 민심을 얻고자 하지만 끝내는 그의 아들들에 의하여 미륵신앙의 요람인 이곳 금산사에 유폐되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겠다. 입구에서 매표소를 지나 홍예문 위로 반쯤 남아 있는 돌문을 지나게 되는데 견훤석성이다. 금산사는 건물의 수는 많지 않은 대신에 큰 건물들이 우람하게 서 있는 모습의 대가람이다.

    절의 본당이라 할 수 있는 미륵전은 나무로 지어진 3층 건물로 각 층은, 대자보전, 용화지회, 미륵전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데 모두 미륵불을 지칭하는 다른 표현들이다. 미륵전 안으로 들어가보면 밖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내부는 한 층으로 통해 있으며, 높이가 12m에 이르는 미륵입상이 서 있다. 원래는 진표율사가 절을 세울 때 철불로 미륵장륙상을 세웠다고 하나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절이 불타면서 철불은 없어졌다고 한다.

    미륵전과 대적광전 사이 마당에는 둘레가 10m가 넘는 거대한 받침대인 석련대가 있는데 위쪽에 만들어진 네모난 구멍이 옛날 미륵장륙상을 받쳤던 것이 아니었을까 추정하고 있다. 그 옆으로 다른 곳에서 쉽게 볼 수 없는 특별한 형태의 탑을 볼 수 있다. 바로 육각다층석탑인데 보통의 탑이 화강암으로 네모나게 쌓은 것과 달리 이곳의 탑은 점판암이라는 석재를 다듬어 화려하게 꾸민 형태이다. 미륵전 뒤로 올라가면 방등계단이라는 곳을 찾을 수 있는데, 양산 통도사 금강계단 등과 비슷한 형태이다.